후일담
오늘은 어쩐지 날씨가 매우 화창하여 좋았다. 최근에 안 좋은 일만 있었기에 연오에게는 이런 날씨가 앞으로의 좋은 일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제 완전한 봄이라 세가에는 여기저기 꽃들이 화사하게 폈다. 거름이 좋았는지 지난봄보다 꽃들이 유달리 더 풍성하였다.
백모란이 제 악행과 더불어 숨겨 두었던 힘을 보여 준 지도 벌써 두 달째. 그간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여러 곳에서 어떻게든 모란을 중원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연합 공격, 독, 금품, 여인을 이용한 유혹까지 그 어느 것도 모란에게 통하지 않았다. 중원에서 몰아내기는커녕 남궁세가에서 내보내지도 못한 것이다. 거기에 백모란이 태연하게 지내기만 하니 다들 지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안휘성은 예전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백모란의 모진 고초가 끝났음에도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가 깨어나 폐인 같은 몰골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남궁사영을 제외한다면, 장로들도 언제 모란에게 처참히 당했냐는 듯 다들 얼굴이 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오는 아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자기만 하는 동생을 볼 때마다 모란에 대한 적개심을 자글자글 태웠다. 뻔뻔하게도 모란이 아직도 화정당에 눌러앉아 살기에 더욱 그랬다.
‘과거에 연이 모란을 화정당에서 살 게 할 수 없다 할 때 그러려니 했어야 하는 것을!’
하지만 후회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제는 차츰 줄어 가는 세가의 업무를 처리하다가 연오가 한숨을 쉬었다. 일이 영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결국 그는 화월당을 나가 창일당으로 향했다. 두 달 동안 열심히 지어진 창일당은 이제 처마 장식과 현판을 제외하면 거의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근처를 지나던 장로 남궁지랑이 가주님, 하며 인사해 왔다. 그도 창일당을 보며 흡족한 얼굴을 보였다. 전보다 건물의 높이가 여섯 자나 더 높고 더 넓었다. 백모란이 창일당을 지으라 댄 자금을 얼마 안 되는 금액으로 만들기 위해 세가에서 더 많은 돈을 들이부은 결과였다.
“슬슬 현판 제작할 곳을 알아봐야겠습니다.”
현판은 건물의 상징이자 얼굴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것이었다. 신경 써서 현판 장인을 알아봐야겠다는 남궁지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연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창일당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붙이고자 합니다.”
“그도 괜찮겠습니다.”
연오의 말에 남궁지랑이 수긍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무너져 버린 건물이니 새로운 이름으로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길고 영원히 가라는 의미로 창영당(昌永堂)이라 붙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좋은 이름입니다, 가주님.”
“다른 장로들의 의견도 한번 물어보고 확정하도록 하죠.”
새로 지어지는 건물을 보니 연오는 창영당이라는 이름이 썩 괜찮게 느껴졌다. 화창한 날씨에 더불어 좋은 일이 있으니 마음 또한 좋아지는 것이다. 연오는 세가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다시 화월당으로 돌아왔다.
‘백모란도 이제 슬슬 세가 밖으로 나가지 않을까.’
최근 보고에 따르면 화정당에 내리 눌러살던 백모란은 최근 들어 유독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자를 힘으로 어찌할 수는 없으니 세가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한결 마음이 평온해질 듯했다.
화월당에 돌아온 연오는 다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조언을 줄 그의 조부가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조부가 없어도 그의 주변에는 세가에 충실한 장로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조언을 구해 가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연오도 점차 익숙해져서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연이 찾아온 것은 일을 거의 마무리해 갈 무렵이었다.
“형님,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 연아. 괜찮다. 어서 들어오거라.”
연오가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연을 반갑게 맞이했다. 시비에게 얼른 차를 내오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연의 안색을 살폈다. 하루를 거의 잠으로 보내기는 하나, 그럼에도 이상하게 연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추위도 훨씬 덜 타는지 아직도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있을 예전과 달리 겉옷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연은 한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슬며시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저, 형님께서는 모란이 세가에서 나갔으면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다마는.”
갑자기 직설적인 질문을 받은 연오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간 연이 유독 모란의 편을 들어 왔기 때문에 그로서는 이 질문이 뜻밖이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든 모란이 나가기만 하면 괜찮으신 것이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냐?”
이상하게 연이 하는 질문이 영 찜찜하게 느껴졌다. 물어보아도 연은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이거 백모란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좀 자세히 알아봐야 하나 연오가 생각할 때였다.
“실은 오늘은 드릴 말이 있어 이리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아까 꺼낸 말이 모란에 대한 것이었으니만큼 연오가 다소 긴장했다. 그러나 긴장한 것과는 달리 이어지는 연의 말은 기쁘면서도 놀라운 소식이었다.
“제 나이 벌써 스물, 저도 이제 혼인을 올리려 합니다.”
“혼인 말이냐?”
그가 반색하였다. 스물이면 혼인을 올리기에 딱 적당한 나이이기는 하였다. 불현듯 연오는 전에 연이 좋아한다던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전에 말한 그 사람이더냐?”
연오의 질문에 부끄러웠는지 연이 잠시 침묵하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어떤 사람과 혼인을 올리든 괜찮다고 하셨지요.”
“그래,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다.”
그 남궁세가가 아니던가. 연오는 상대가 가난하거나, 혹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이가 딸려 있거나 상관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의사가 있었다. 그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혹시 혼인하려는 사람이 백매화는 아니겠지?”
어째선지 연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백…매화……와 혼인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미 안휘성에 살 집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저 형님의 허락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구나.”
연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연도 어엿한 사내대장부로서 독립하여 가정을 이끌어 나갈 때도 되었다. 백매화가 백모란과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은 역시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혼인하면 백모란이 전처럼 연의 곁에 눌어붙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자에게도 그 정도 염치는 있겠지.
연은 연오의 눈치를 살피다가 허락을 받으러 왔다면서 대답도 듣지 않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흐뭇해진 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랴, 연이 나가는 것을 배웅까지 해 주었다. 그가 잠시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예감대로 좋은 일이 생기었구나. 퍽 기분이 좋아진 연오는 다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연의 혼인에 관한 일거리를 새로 추가한 채였다.
그러나 이때의 그는 모르고 있었다. 백매화가 정확히 누구인지, 혼인식이 지나고 난 뒤 그를 덮칠 어마어마한 파란이 무엇인지……. 그저 하늘에는 구름만 평화로이 떠가고, 화월당에 새로이 피어난 꽃들만 산들거리며 흔들릴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