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十二章 : 그래도 꽃은 핀다 (16/19)

十二章 : 그래도 꽃은 핀다

‘멍이 들었네.’

모란이 꾹 콧잔등을 눌러 보았다. 보통은 항상 마력으로 몸을 감고 있어 감은커녕 쇳덩이로 얻어맞아도 멀쩡했을 터였다. 요 보름간 정파나 사파에서 덤벼 오는 무리들을 경험하며 저를 상대할 놈들이 없다는 것을 직접 체득한 데다가, 튼튼하고 강력한 결계도 쳤겠다, 옆에서는 연이 건강하여 뜨끈뜨끈하게 잘도 자고 있겠다,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자 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감에 얼굴을 맞는 순간 방심했다 싶어 식은땀마저 났었는데 눈을 떠 보니 연이 짓고 있던 그 표정이라니…….

“진짜 한도 끝도 없네.”

모란이 중얼거렸다. 잠자다가 날벼락으로 과일에 두드려 맞아도 연이 짓고 있던 표정만으로 괜찮아지니, 이러다 나중에 가면 연이 자신을 두들겨 패도 좋다고 맞아 주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뭐어, 실은 푸르게 멍든 얼굴을 볼 때마다 연이 내심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좋기도 했고.

“연아?”

인기척이 없기에 모란이 초가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분명 옷을 갈아입는다 하였는데, 들어와 보니 연은 벽에 고개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어떻게 옷은 다 입긴 하였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덮쳐 오는 수마에 이기지 못한 게 분명했다. 모란은 유심히 연을 살폈다.

“아직 백분지 일도 안 되는군.”

내단이야 진즉 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실리낙스의 눈은 이제 겨우 조금 녹아났을 뿐이다. 아직도 녹여 소화할 것이 한참 남았으니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는 것이다. 모란의 생각보다 진행 과정이 한참 늦어 앞으로 일 년 중 반 정도는 이리 잠으로 보내게 생겼다.

‘몸이 낫자마자 여행을 가자 하였는데, 싫어하겠군…….’

어쩔 수 없지, 하며 모란이 연을 잘 추슬러 안아 올렸다. 실리낙스의 눈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현재 연의 혼이 어찌나 단단하게 빛나는지, 심지어 모란이 현재 가지고 있는 혼 조각―혼이 찢기던 순간의 그 고통을 담은―을 돌려준다 하여도 무난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에는 그 조각을 돌려주면 미쳐 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 그때 정말 아팠지’ 하고 넘어갈 정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돌려줄 생각은 없지만.

“음…….”

미간을 찌푸린 연이 가늘게 눈을 떠 몽중 간에 모란임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고개를 묻고 푹 잠이 들었다. 그러느라 머리카락이 모란의 목덜미를 간지럽게 스쳤는데 정작 근질거리는 건 목덜미가 아니라 가슴께 어느 부분이었다.

영문 모를 화를 낸 뒤로 연은 의기소침해졌다. 화를 내는 듯싶기도 하고 혹은 침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몸도 완벽하게 건강해지고 세가의 일도 나름 해결해 두었으니 아무런 문제없을 것이라 여기던 모란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흘 정도를 지낸 뒤, 연이 문득 세가에 가고 싶다 말을 꺼냈다.

가기 전 옷을 갈아입는다기에 그동안 모란은 하오문 분파에 머무르고 있는 당주를 찾아갔다. 그간 연을 보호해 준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황산을 돌아다니며 구한 귀한 내단과 금덩어리를 쥐여 주자 당주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 최근 정파와 사파를 막론하고 다들 고루고루 다져진 가운데 하오문만 유일하게 모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으니 더욱 기쁠 것이었다.

보답을 하고 돌아오니 연이 자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한번 잠들면 몇 시간을 내리 잠들기에 모란은 차라리 자고 있을 적에 세가에 옮겨 놓기로 하였다.

얼마 전 모란은 남궁세가에 화풀이를 하느라 부서진 건물 재건을 좀 도왔다. 상당한 보화를 내주고 대들보를 세워 주자, 세가의 사람들은 병 주고 약 주느냐며 기가 막히다는 시선으로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이 운석 마법으로 창일당을 박살 낸 일은 세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터였다. 모란이 바라는 바였다. 연의 뒷배가 그런 자라는 걸 알아야 전처럼 허약하니 어쩌니 입방아를 찧어 대며 함부로 굴지 못할 터니.

세가 재건 중에서도 모란이 유일하게 직접 손을 대어 완벽히 돌려놓은 것은 화정당이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정원을 가장 신경 썼다.

연이 사술을 썼다 했을 때 가장 중요한 증인이었기에 얼굴이 사색이 된 정원사는 정원을 다시 만들며 모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혹여나 저를 어찌해 버리지는 않을까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중요한 증인이었다고는 해도 모란은 정원사에게는 별 유감은 없었다. 실은 정원사를 만나고 나서 기분이 좀 좋아지기까지 했다. 모란꽃과 연꽃을 심으라 연이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해서 모란은 연이 다시 정신이 들 적에 화정당이라는 걸 알게 되면 기분도 좋아질 것이라 여겼다. 그는 의식이 없는―것처럼 보이는―연을 안고 남궁세가에 갔을 때 사람들의 눈에 어찌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치 않았다.

“연아!”

남궁세가에 들어서자마자 동생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희게 질린 얼굴로 왔다 갔다 하던 연오가 냉큼 달려왔다. 그는 쿨쿨 자고 있는 연을 보고는 마치 모란이 큰 해코지라도 한 것처럼 치를 떨었다. 금방이라도 모란을 베어 넘기고 싶은지 검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란과 연이 생사를 함께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그나마 공격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제 날 잡아서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하나…….’

물론 귀찮으니 지금은 말고. 연오는 가타부타 별말은 없었지만 모란을 노려보는 시선이 다 말해 주고 있었다. 얼굴만 보면 백 번은 모란을 죽였을 그런 얼굴로 연오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연이는?”

“보시는 대로, 이제는 아주 건강한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결에 뒤척거리느라 연의 고개가 스륵 뒤로 넘어갔다. 연오는 마치 연의 목이 꺾이는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낯빛이 안 좋아졌다. 깨어나면 목이 아플까 모란이 대충 잡아 다시 어깨에 기대게 하자 자꾸만 연오의 손이 검 손잡이 근처에서 헤맸다.

한참을 노려보던 연오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는 세가 사람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대놓고 물었다.

“연이를 인질로 잡아서 앞으로 대체 어찌할 작정이지?”

“글쎄, 인질이 아니라, 다 연이 건강 좋아지라고 한 일이라니까. 게다가 단전 파괴형이니 뭐니 세가에서 그런 식으로 나와서…….”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남궁세가를 마음대로 할 계략인가, 네 꿍꿍이가 대체 무엇이냐!”

“…….”

전혀 안 믿는군. 말도 안 통한다. 그래도 살기는 어느 정도 미미해진 걸 보아 아주 설득이 안 된 건 아닌데, 모란에 대한 신뢰감은 바닥을 치는 게 확실했다. 귀찮으니 포기한 모란은 설득은 연에게 넘기기로 하고 몸을 돌렸다.

입을 꾹 다문 연오는 기어코 모란의 뒤를 쫓아 화정당까지 왔다. 모란이 침상에 연을 잘 뉘여 놓은 뒤에도 맥을 짚어 보고는, 의원까지 불러 다시 진맥을 하게 했다. 모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이 뻣뻣해진 의원이 연의 맥을 짚어 보는 모습을 보자 모란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더 떠올랐다.

‘아, 연이 스승.’

모란이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성가시게도 하필이면 저를 제일 싫어하는 이들이 연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라니. 심지어 은록은 이런 거대한 연극을 벌이기 전에도 모란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이였다.

“저, 공자님께서는…….”

“어떻더냐? 어디가 얼마나 좋지 않은 것이냐?”

최근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연오가 평소와 달리 의원을 닦달하였다. 모란은 시큰둥하게 걷어 올려진 연의 소매나 다시 내려 주었다. 제 형이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맥을 짚거나 말거나 연은 달게 잠만 잤다.

“아주 건강하십니다.”

“하지만 저리 의식이 없지 않아!”

“의식이 없는 건 공자님께서 지금은 자고 계시기에 그런 것으로…….”

연은 아주 건강하며 그저 자고 있을 뿐이라 의원이 몇 번이나 말해도 연오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모란은 연오가 과보호를 좀 한다고 했던 연의 말을 떠올렸다. 과보호를 좀, 한다고? 조금의 수준이 아닌데?

한참을 모란을 노려보며 머무르던 연오는 남궁원이 부른다며 시비가 찾아온 후에야 겨우 물러났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모란이 연의 곁에 있는 게 매우 싫고 꺼려진다는 태도를 내내 취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모란이 쯧 혀를 찼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현재 중원이 어떤 상태던가. 갑자기 나타난 백모란이란 고수로 인해 발칵 뒤집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홉 개의 문파 중 여섯에 오대세가 중 셋이나 하루아침에 깨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란을 적대하거나 공격한 사람들의 소속 문파와 세가들 또한 몇 번 만져 준 후로는 나머지 문파들까지 알아서 기고 있었다.

제 힘을 보여 줄 요량으로 다소 두들겨 패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죽이지 않은 데다가 보상금도 좀 보내 주었기 때문에 다들 몸을 사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모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안휘성에 온갖 첩자들이 숨어들었을 터다.

모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때려눕혔을 뿐 약탈을 하거나 죽이지 않았으니 복수나 원한도 없고, 그저 쓰라린 패배감과 새로운 강자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을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가히 중원의 절대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모란을 향해 연오는 감히 제 동생을 사술의 제물 삼았다며 대놓고 이를 갈았다. 그나마도 직접적으로 덤비지 않은 건 그가 앞으로 남궁세가를 책임져야 할 가주이기 때문이었다.

‘혹은 일말의 배신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연오는 어릴 적부터 모란을 봐 오지 않았나. 연의 주치의이자 아는 동생이라고 나름 아끼고 챙겨 주기까지 했는데 하루아침에 그리 깽판을 쳐 놓았으니 배신감에 속이 끓을 만도 했다. 물론 모란이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모란이 도사리고 있으니 화정당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용했다. 이따금 화정당을 살피러 조심스럽게 들르는 인기척이 느껴졌으나 그는 모른 척했다.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모란도 딱히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한위가 찾아온 건 연오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주강을 곁에 끼고 찾아와서는 조심스럽게 문 사이로 보고 있기에 모란이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얼굴이 환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자고 있는 연을 보고는 한위가 멈칫했다.

“형님 또 아프신 건가요?”

“아니, 그냥 자고 있는 거야.”

“그렇구나…….”

얌전히 굴며 한위가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형님이라서 반갑기만 하였다.

그간 한위는 폐월당에서 조용히 지냈다. 주강이 가만히 있으라고 충고하기도 했고, 모란도 나름 찾아와 별일 아니니 네 형님 데려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밖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나든 못 들은 척 지냈다. 한위는 그저 모란이 제 형님이 옥에 갇히거나, 형벌을 받고 내쫓기지 않게 해 주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돌아온 연을 보며 한위가 안도하는 동안 모란은 주강에게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동안 잘도 즐겼던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주강이 덤덤하게 대꾸했으나 모란은 알고 있었다. 그가 남궁사영이며 장로들을 가지고 노는 동안 주강이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한위 때문에 남궁세가에서 머무르는 것이지 주강은 남궁세가를 딱히 좋아하는 자가 아니다. 도리어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인이지 않은가. 아마 창일당이 박살 나는 순간 가장 속 시원해한 건 모란이 아니라 주강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딱히 추궁할 생각이 없었기에 모란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한위는 연이 깨어나는 걸 보고 가겠다고 기다리다가 한 시진이 지나도 깨어나질 않자 내일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세 번째 방문자는 저녁이 다 저물 때쯤에 찾아왔다. 바로 남궁원이었다. 말없이 화정당에 들어온 그는 모란은 쳐다도 보지 않고 들어와 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자의 건강한 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모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힘과 수명을 늘리기 위해 사술을 하였다?”

“그래.”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또 가지려 한단 말이냐?”

……모란은 눈썹만 까딱거렸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자, 남궁원. 굳이 연의 조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였기 때문에 까다로웠다. 어중간하게 강하니 완전히 통제를 할 수 없어 적당히 다치게 하는 게 힘들었다는 의미다. 또한 어찌나 교묘하게 덤벼들던지 마지막에는 짜증이 나 건물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는데, 피를 토하는 모습에 내심 아차 할 정도였다. 남궁원은 다시 연을 보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그리 생각하길 원한다면 그리해 주지.”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니군, 하고 모란이 생각했다. 남궁원의 얼굴에는 노기 따위는 없었다. 모란의 과장된 연극을 눈치챈 것이었는지…….

그리고 과연 모란의 추측대로인지라.

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남궁원의 얼굴에는 비로소 피로한 기색이 어렸다. 최근에는 그에게 있어 감당하기 힘든 일투성이였다. 아들의 죽음이나, 화정당의 사술 사건, 창일당 붕괴에 백모란이 저지른 만행까지. 이미 은거하기로 결심했던 몸이라 더욱 감당하기 힘들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에게 무참하게 패한 뒤로 남궁원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중원에서 그와 비등하게 겨룰 자는 얼마 없었다. 그러니 그를 이길 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강한 남궁원인데도 모란은 완전히 달랐다. 백모란은 단순히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있는 자였다. 승부욕이 없다기보다는 상대가 너무 하잘것없기에 승패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겨루어 보면서 남궁원은 모란과 자신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뛰고 있으면 모란은 그보다 한층 위에서 날고 있는 중이었다. 저나 호법장로들이 상대에게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무참하게 지고 말았으니, 남궁원은 남궁세가의 미래를 떠올려 보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데 모란의 말과 행동을 한참 곱씹다 보니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힘과 수명을 늘리기 위해 그런 사술을 한다 하였다. 하나 지금도 그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는데 여기서 더 힘을 늘려 봤자 무엇 할 것인가? 또한 힘이 늘면 수명도 같이 따르는 것이 아니던가.

‘거기서 무엇이 더 부족하여?’

모란이란 자는 분노는 하였으나 그것이 살생을 탐하는 방향으로 향하진 않았다. 덤벼드는 상대를 향한 손속은 가차 없었지만 살의는 없었다. 그가 죽이고자 하면 누군들 못 죽이겠는가. 가지고 싶어 한다면 뭘 못 가지겠나. 그래, 너무나 강해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가 굳이 남궁세가까지 들어와 화정당에 그런 사술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면, 화정당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음이라…….

분명 세가에 다시는 없을 위기 상황이었으나 남궁원은 부상을 핑계로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았다. 일이 마무리될 때 모란이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까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결과만 따지자면 사술의 범인으로 내쫓기다시피 사라졌던 연이 명예를 회복하여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전과 달리 건강해 보이는 손자를 보니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남궁원은 다시 한번 모란을 보았다. 다음으로는 연을 보고는 남궁세가에서 유일하게 깨끗하여 정돈이 잘된 화정당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가 그릇된 판단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릇된 판단이라 하여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백모란인 자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그저 이 판단이 맞기를 바랄 뿐이다. 남궁원은 한참을 백모란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화정당을 떠났다.

“……싱겁기는.”

그저 손자나 보러 왔단 말인가. 모란은 다시 편안히 침상에 누웠다. 그러고는 심심한 사람처럼 괜히 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손님들이 방문하고 떠들어도 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움직이는 손은 혹여나 그를 깨우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모란은 연이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아…….”

잠시 후 무언가 떠올린 모란이 중얼거렸다. 눈이 변한 거 아직도 말 못 했네.

***

“대체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남궁세가의 호법장로 남궁지랑이 큰소리로 한탄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들 다리를 절룩거리거나 얼굴에 커다란 멍 자국들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팔이 부러져 부목을 대고 있는 자도 몇 있었다. 모두가 중원에서는 큰소리 떵떵 칠 정도로 잘나가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백모란에 대한 논의를 위해 모인 참이었다.

“우리가 뭘 어찌해 볼 수는 있습니까.”

보름 사이 십 년은 훌쩍 늙어 버린 듯한 남궁인이 중얼거렸다. 다들 그의 말에 침묵으로 동조했다. 그들은 그동안 백모란에게 처절하게 당했던 걸 떠올리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을 하면 어느새 걷어차여 땅바닥에서 흙을 먹으며 구르고 있고, 멀리서 공격하면 무형의 힘에 짓눌려 땅을 기게 된다. 합격(合擊)해도 방진을 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치 넘볼 수 없는 산처럼 느껴지는 힘이었다. 이다지도 실력이 극심하게 차이가 나니 마치 어른이 아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무력감과 절망뿐이었다.

“당장 그자가 창일당을 부수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 그런 공격을 하면 우리가 막을 수나 있겠습니까.”

다들 침음했다. 창일당이 부서졌을 때는 그들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악몽을 꾸는 자들도 여럿 되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가를 박살 내 놓은 적이 화정당에 들어앉아 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백모란을 무림 공적으로 공포해 보면 어찌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몇백, 몇천 명이 달려드는 공격에도 당해 내겠는가? 사실 그만한 공격도 가볍게 해치우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괴물은 아닐 터다.

그런데 백모란을 무림 공적으로 지정하기에는 참으로 애매했다. 일단 모란에게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침상에 누워 요양 중이긴 했으나 회복 불가인 것도 아니다. 사술을 사용하긴 했으나 까 보니 무고한 이들을 제물 삼은 게 아니라 원래라면 잡히는 즉시 처형될 만한 악질인 녹림십오채의 잔당들이다.

백모란은 약탈이나 방화나, 부녀자 겁탈 따위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피해 보상까지 해 오지 않았나. 창일당은 벌써 대들보가 세워져 뚝딱뚝딱 잘도 지어지는 중이었다.

유일한 피해자라면 남궁연뿐인데, 남궁연이 있기에 도리어 더 이상의 공격을 받지 않는 상황이라니. 게다가 이자가 내놓은 보화란 것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대단한 물건들이었다. 눈치를 보던 남궁세가 무영관(武英館) 당주(堂主) 남궁호정이 슬그머니 물었다.

“……그래, 다들 무얼 받으셨소?”

“받기는 무슨!”

“이 사람이 대체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나.”

큰소리들을 내는 모양이 도리어 무언가 받았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곧 겸연쩍은 침묵이 흘렀다. 남궁호정은 먼저 이야기를 꺼낸 만큼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현철(玄鐵)* 한 괴를 받았소.”

“아니, 그 귀한 것을 말인가?!”

남궁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매화의 상단으로부터 이번 일에 대한 백모란의 보상이라며 받은 물건이다. 백련정강(百鍊精鋼)*이나 만년한철(萬年寒鐵)*만큼은 아니어도 현철은 충분히 귀한 금속이었다. 남궁호정은 세가에서 무사들을 직접 지도하는 이만큼 무(武)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런 그가 현철을 얻게 된 것이다. 어쩐지 세가가 이 지경인데도 표정이 오묘한 이유가 있었다.

“실은, 나도…….”

여기저기서 금덩이를 받았느니, 보화를 받았느니 하면서 대답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시선이 이내 호법장로 남궁인에게 향했다. 남궁사영이 폐인이나 마찬가지인 몰골이 되어 칩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평소 청렴하고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

부정은 하지 않는 남궁인의 침묵에 다들 그 대단한 남궁인도 받았군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인은 속으로 신음했다. 차라리 현철이나 금 덩어리, 보화 따위를 줬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모란이 건네 온 것은 월하백엽정(月下白葉精)이었다. 잎사귀는 희고 보드레하였으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검은 뿌리 열매는 은은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는 자랄 수 없어 달빛만을 받아야 하며, 그렇다고 너무 어두운 곳에서는 자라지 않고 근처에 폭포수와 과실을 맺는 나무가 있어야만 겨우 자라는 약초!

몇 년 동안 이 약초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던 남궁인은 물건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딸이 앓고 있는 지병의 유일한 치료 방법이 아니던가. 남궁인은 차마 그 보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결국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 따름이었다.

‘이게 어디 받아서 좋다고만 할 일인가.’

남궁인이 침음하였다. 뼈가 굵은 무인에게는 현철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자에게는 금덩이를 준다. 병이 있는 가족에게 특효인 약초를 주며 서화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자에게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의 귀한 작품을 선물해 준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모란이 그들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호의와 책임감에서 주는 선물 따위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들 약점을 잘 알고 있으며 힘뿐만 아니라 상당한 정보력과 재화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단순무식한 남궁호정 같은 자나 신났지 눈치 빠른 자들은 남궁인처럼 완전히 좋아하지만은 않았다.

“그럼 백모란을 이대로 내버려 둬야 한단 말인가?”

처음 이야기를 꺼낸 남궁지랑이 다시 말을 꺼냈지만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그 압도적인 힘을 경험하고 난 뒤 보상까지 받아 챙겼고 일도 좋게 좋게 마무리되는 듯하니 당분간은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는 것이겠지. 한데 현철을 받고 좋아하던 남궁호정이 궁리랍시고 이리 내뱉었다.

“백모란이 연 공자와 생사를 함께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소? 반대로 말하면 연 공자만 붙들어 매어도 그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 아니겠소?”

자리가 자리인지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다들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생사를 함께한다. 남궁연과 백모란이 사술로 이어져 있으니 한 명이 죽으면 다른 한 명도 죽는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남궁호정이나 그리 받아들일 뿐 다른 장로들은 쯧쯧 혀를 찼다. 그들이 정파라 비겁한 짓을 할 수는 없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자가 대체 왜 제 입으로 약점을 말했겠나? 말마따나 연 공자가 어찌 되기라도 하면 그자는 끝장인 일인데?”

“그건…….”

백모란과 연이 생사를 함께한다는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지 남궁호정이 말꼬리를 흐렸다. 다른 장로가 타박했다.

“연 공자를 내놓지 않았다고 남궁사영을 그리도 잡아 대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잘못 처신했다가 다시 세가 박살 나는 꼴 보고 싶은가, 자네?”

만약 남궁연이 그자가 말한 것과는 달리 약점이 아니라면 괜히 역린을 건드리는 셈이 된다. 그자가 진심으로 분노해 세가를 뒤집어엎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미 이번 사건으로 남궁세가는 많이 타격을 입었다. 남궁세가의 힘은 바로 장로인 그들의 힘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달리 말하면 그들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그들은 더는 손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남궁세가에서 더는 남궁연이 허약하여 세가에 오명을 미치니 어쩌니 함부로 떠들어 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허약함 또한 백모란의 사술에 이용된 결과이지 않은가.

그들은 남궁연을 내준 덕에 백모란이 조용히 지내고 있어 안도하면서도 범을 뒤에 모시고 있는 기분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연이 깨어난 건 눈가에 성가시게 머무르는 햇살 때문이었다. 미간을 찌푸렸더니 어른어른 그림자가 졌다. 살살 다시 잠에 들려는 순간 눈꺼풀을 간질이는 것이 있었다. 무어지, 이게? 부드럽고 얇은 게 천은 아니고…….

결국 눈을 뜬 순간 무언가 눈꺼풀 위에 얹어져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올 한 올 뜯어낸 꽃잎 더미였다. 이제는 꽃만 봐도 바로 모란이 떠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손에 꽃을 쥔 모란이 연분홍색의 꽃잎을 톡 떨어트렸다.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연이 몸을 일으켰다.

“잘 잤어?”

“……화정당이네?”

분명 그 초가집에서 옷을 갈아입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다. 화정당이라니……. 모란이 후 바람을 불어 꽃잎을 바닥으로 치워 버리는 걸 보며 연이 미간을 접었다.

‘정파연합과 싸웠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지?’

분명 자신은 화정당의 사술을 펼쳤다 하여 쫓겨나지 않았나. 다른 범죄도 아니고 사술이면 무림에서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옥에서 모란의 목걸이를 이용해 탈옥할 생각을 할 때 연은 세가로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스스 일어나 창을 열고 밖을 보니 예전과 그대로인 정원이 보였다. 다 파헤쳐 놓았을 줄 알았는데.

……아니, 예전과 그대로는 아니군. 귀가 좀 붉어진 연이 시선을 돌렸다. 전과 달리 연못 뒤에 꽃망울이 진 모란꽃과 연꽃의 수련 잎이 보이지 않나.

“무엇을 했어?”

“뭘 하긴?”

“정파연합과 싸웠다면서? 대체 그게 정확히 무슨 이야기야?”

거의 죽었다가 깨어난 뒤로 사나흘 정도의 시간이 있었지만 물을 틈이 없었다. 이따금 비몽사몽 깨어 있을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죽은 듯이 자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게 자고 났는데도 여전히 졸렸다.

“별거 아니야.”

“난 그 별거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

별생각 없이 침상에 놓여 있던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가 연은 조금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어쩐지 꽃이 모란이 피워 낸 게 아니라 마치 직접 꺾어 온 것처럼 줄기 끝이 상해 있는 것이다. 모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실력 행사 좀 하고 돈도 좀 먹이고…….”

실력 행사는 또 무엇이며 돈은 또 어떻게 먹였기에 사술을 부렸음에도 연이 이렇게 세가에 멀쩡히 돌아올 수가 있나? 그러나 캐물어도 모란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 능청맞게 넘어가기만 했다. 마침 한위가 도착해 연은 더 묻지 못했다.

“형님!”

약간 울먹거리며 달려들려던 한위가 주춤 중간에서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보자 한위가 입을 조금 벌리고 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감탄하는 소리를 흘렸다.

“형님, 정말 멋지세요.”

“……그…러니?”

무어가 멋지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위가 그렇다니 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모란이 씨익 웃으며 연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렇지, 멋지지? 게다가 이제는 완전히 건강해졌거든.”

“정말인가요? 그럼 더는 아프지 않은 거예요?”

좀 졸리긴 하지만 모란은 빈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니, 아마도 더는 아플 일이 없을 듯했다. 연이 잠시 제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완전히 건강해졌다니. 정말 완치가 되었단 말인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형님처럼 되고 싶어요!”

“아, 그건 좀 곤란한데. 내 내단은 하나뿐이라서.”

한위와 모란의 대화를 듣다가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완전히 건강해진 건 전적으로 모란의 내단을 얻은 탓이었다. 연의 시선이 자꾸만 모란의 배로 향했다. 지난번에 잘 봉합해 두기는 하였는데 과연 괜찮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모란의 옷자락에 피가 묻어 있던 게 떠올라 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시선이 마주친 모란이 씩 웃어 보였지만 연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런데 왜 한위가 저처럼 되고 싶다는 걸까? 한위는 이미 건강하지 않은가. 혹시나 싶어 연이 손목을 잡아 맥을 짚자 한위가 그저 헤헤 웃어 보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위는 건강 바로 그 자체였다.

오래간만에 본 김에 연은 한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후 차까지 마시며 대화를 하는 도중에 또 잠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연이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대화 중에 꾸벅 졸고 말자 한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하다고 하려 했는데 나오는 건 하품이라 무척 민망하였다.

“……어디까지 이야기하였지?”

“아니에요, 형님!”

한위가 벌떡 일어나더니 연을 침상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이불까지 끌어다가 덮어 주는 게 아닌가. 어지간히 민망했던 연이 다시 일어나려 하자 한위가 잡아 눌렀다. 뭐지, 하고 연이 눈을 깜박였다. 한위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졸릴 때는 자야 건강에 좋은 법이라 하였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그보다 연은 요즘 하루 종일을 잠으로만 보내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한위가 진지한 얼굴로 슬며시 연의 눈꺼풀까지 손바닥으로 덮어 눌러 주는 것에는 별수가 없었다. 모란이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졸릴 때는 자야 하는 법이지.”

범인이 모란이었나…….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견딜 수 없이 잠이 와 연은 그대로 항복하고 말았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와중에 어째서인지 한위에게서도 과잉보호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중이었다. 십 분 정도 잔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지다니, 자신이 매우 게을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하루의 반나절이 날아간 것이다. 미간을 누르며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자도 자도 끝이 없었다.

“왜, 더 자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모란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연은 뒤늦게 자신이 모란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히 하며 연이 한숨을 쉬었다.

“더 잤다가는 그게 어디 사람이야? 아니, 그보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졸린 건데?”

“한…… 일 년?”

“일 년?!”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었다가, 연이 다시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모란이 내단까지 내줘 가며 완치시켜 주었는데 겨우 일 년 정도 졸린 게 대수겠는가. 모란은 그런 연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직도 좀 졸렸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서, 연은 꾸물꾸물 마치 늪과 같은 침상에서 벗어났다. 이불자락이 발목을 휘감는 듯했다.

“어디 가게?”

“저녁이니까 환자도 없을 거고, 사부님 뵈러 가야지.”

이래저래 그는 참으로 사부에게 못난 제자였다. 최근 들어서는 계속 은록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만 있지 않았나. 그의 조부나 형제에게도 걱정을 끼친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은록에게는 얼굴이라도 한번 비춰야겠다. 이왕이면 지금처럼 졸리지 않을 때에.

“자, 데려다줄게.”

모란이 손을 내밀었으나 연은 잡지 않고 머뭇거렸다. 모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마법 써도 몸은 괜찮은 것이지?”

“괜찮지 않을 것이 뭐 있어. 순간이동쯤이야.”

씩 웃고는 모란이 먼저 연의 손을 잡았다. 항상 그렇듯이 순간이동을 할 때면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에 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은 벌써 은록의 의원 뒤편에 서 있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모란의 안색을 살피고는 걸음을 옮겼다.

마당을 지나 들어서니 환자는 없었지만 의원에는 아직 호롱불이 켜져 있었다. 연은 머뭇거리며 문 앞에 섰다.

“사부님, 연입니다.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안에서 그래, 하는 답이 들려오고 나서야 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약초를 정돈하고 있던 은록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은록의 얼굴이 싹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연이 자신이 어지간히 걱정을 끼쳐 드렸구나 해서 안절부절못하는데 은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먼저 맥을 짚더니 그다음으로는 몸 여기저기 혈도를 눌러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뚫어져라 안색을 살폈다. 연은 그저 면목이 없었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예, 괜찮습니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은록은 한참을 연을 살피다가 이내 연의 뒤에 있는 모란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앉거라.”

연이 고분고분 은록의 말대로 앉았다. 의원에 오면 항상 그렇듯이 무덤덤하니 시큰둥한 모란도 연의 뒤에 앉았다. 은록은 화덕에 주전자를 얹어 물을 끓였다. 거름망에 질 좋은 약초와 환약을 여러 가지 넣은 뒤 몇 번을 우려내자 은은한 다갈색 빛의 차가 되었다. 연은 감사히 받아 들었다. 향을 맡아 보니 척 보아도 자양강장에 좋은 차다. 한 모금 마셔 보니 몸에 훈훈한 온기가 돌았다. 마시다가 연이 문득 모란을 돌아보았다.

‘요즘 몸도 안 좋을 텐데.’

따뜻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연이 모란에게 권했다.

“마실래?”

“연이 너나 마시거라.”

별로 차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모란이 거절했다. 어차피 찻잔도 하나만 내온 것, 제자 먹이려고 우린 게 분명한데 그가 뺏어 마시겠는가……. 실은 그는 생각보다 저를 대하는 은록의 태도가 잠잠하여 내심 의아한 차였다. 아무리 의원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고는 하나 눈과 귀가 있는 이상 최근 안휘성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은 들었을 텐데? 만약 듣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지금의 연을 보면 달라진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남궁원 그자처럼 뭘 눈치챈 건가.’

한데 뜻밖에도 은록은 잠자코 찻잔 하나를 더 꺼내는 것이었다. 연은 감사해하며 찻잔을 받았다. 은록이 직접 주전자에서 차를 더 우려 모란에게 내밀었다. 모란이 떨떠름하게 찻잔을 받아 들었다. 찻물이 찻잔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몸에 좋으니까 마셔 봐.”

그리 말하고는 연이 은근한 걱정을 담아 빤히 바라보는데, 이리도 귀엽게 구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모란이 한 모금 머금자 말대로 몸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차를 정말 훌륭하게 우리기는 하였다. 한 모금 더 마시던 모란은 순간 움찔했다.

‘아니, 이 작자가…….’

바로 몸의 이상을 감지한 모란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어쩐 일로 이리도 잠잠한가 하였더니 은록이 모란이 마시는 찻잔에 독을 탔다. 그래도 의원이라고 생명에 지장이 가는 독은 아니었지만, 제 기가 급속도로 흐트러지는 걸 보니 꽤나 강력한 산공독의 일종인 게 분명했다.

모란은 오기가 생겨, 보란 듯이 차를 벌컥 마셨다. 독에 걸린 상태에서 해독 마법을 발동하니 속이 꼬여 울컥 피가 올라왔지만 이 역시 찻물과 함께 삼켜 버렸다. 모란이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은록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 잔 더 마실래?”

그런데 연이 아무것도 모르고 다 마신 찻잔에 다시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모란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차를 삼켰다. 정말 연이 스승만 아니었다면 가만히 안 놔두는 것인데.

심지어 은록은 찻물에 독을 타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약탕을 끓이는 척 교묘하게 수증기에 무언가를 섞어 흘려보내는데, 그게 모란이 먹은 독과 상승작용을 하는 모양인지 속이 뒤틀렸다. 그렇게 치명적인 타격까지는 아니었지만 모란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고도 남았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연은 은록과 오래 있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안 되겠다. 연이 스승 앞이라고 잠을 참으려 졸린 눈가를 꾹꾹 누르는 동안 모란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은록이 눈썹을 찌푸렸다. 모란은 별것 하지 않았다. 그저 들으라는 듯 기침을 두어 번 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연은 화들짝 놀라 모란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무어가?”

“분명히 몸 괜찮다고 했잖아.”

나오는 목소리는 차게 굳었지만, 연은 자신이 퍽 속상한 표정을 짓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피를 삼키면서도 모란은 입매가 단단히 굳은 은록을 향해 보란 듯 히죽 웃어 보였다. 은록과 모란의 시선이 격렬하게 맞부딪치는데 그 형세가 마치 천둥 번개를 일으키는 듯했다. 혹여나 피가 묻어났나 모란의 옷을 살펴보는 연만 그 모습을 몰랐다.

“안색도 안 좋고…….”

“신경 쓰지 마. 정말 괜찮으니.”

짐짓 다정한 목소리를 내자 가증스러웠는지 약탕을 우리는 은록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니 모란은 참으로 마음이 좋았다. 부러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자 마침내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모란의 몸이 안 좋은 듯하여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밤도 늦었으니 가 보는 것이 좋겠다.”

모란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여도 은록의 기분이 자신 때문에 꽤나 별로라는 게 다 보였기에……. 연이 인사를 올리는 동안 모란은 대놓고 히죽히죽 웃어 보였다. 은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었다. 기분이 썩 좋았던 모란이 의원을 나오면서 손을 잡자 연이 고개를 흔들며 놓았다.

“몸 안 좋잖아. 그냥 걸어가는 게 좋겠어.”

“정말 괜찮다니까.”

몸이 좋은 건 아니지만 순간이동 쯤은 약간의 아픔을 참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괜찮다고 하자 연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모란의 손목을 잡았다. 무얼 하는가 하여 멀뚱멀뚱 보고 있자 이내 복부를 더듬거렸다. 연이 자신을 만지니 굳이 사양할 이유는 없어 그냥 내버려 둘 때였다. 연의 손이 어느 부분을 콱 누르자 모란은 저도 모르게 켁 기침을 하고 말았다. 피가 울컥 치밀어 올라서 삼키지도 못하고 퉤 뱉자 연이 한숨을 쉬었다.

“……내상 입었잖아.”

이런, 의원은 확실히 의원이로군. 모란이 뺨을 긁적였다. 꼬인 듯하였던 속은 한결 편해지긴 하였다.

‘하긴 실리낙스의 눈을 먹었으니 기감이 훨씬 예민해졌을 터.’

연은 이어 옷자락을 들추어 상처 부위도 살펴보고는 침울해졌다. 돌연 아무런 말이 없어져서 타박타박 걷는 게 사흘 전과 비슷한 상태라, 모란은 어라, 싶었다. 단순히 걱정으로 우울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지 않나.

“연아.”

“…….”

“……연아?”

뒤를 쫓아가며 연거푸 부르자 도리어 역정까지 내는 게 아닌가.

“그리 부르지 마!”

그럼 어찌 부른단 말인가? 달링, 허니, 자기, 여보? 그건 그렇고 연이 왜 이러는지 슬슬 감이 잡혀 모란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미안해, 연아.”

연이 우뚝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휙 뒤돌아보는 얼굴이, 눈가가 붉어진 것이 모란의 눈에는 잘 보였다.

“뭐가 미안한데?”

“더 일찍 오지 않아서.”

모란의 말뜻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삼켰다. 연에게 다가서며 모란이 말을 이었다.

“화정당에 사람 묻어 놓은 걸 미리 말하지 않아서, 그런 걸 겪게 해서.”

그런 것. 모란이 말하는 그런 것이 뭔지 잘 알고 있는 연이 이를 악물었다. 여러 가지 말이 두서없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것 아나?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 숨을 쉬었을 때……. 모란 당신만 생각했지. 나도 모르게 문을 바라보면서, 당신이 그 문으로 들어오길 바라면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기 전 모란 당신이 보고 싶기에, 왜 모란 당신이 내 곁에 없나 그 생각 했다고. 내게 무슨 짓을 했기에 죽기 전까지 당신 생각만 나나? 왜 오지 않았냐고 구차하게 생각하며 원망하게 만들지? 왜?

말도 안 되는 떼라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미안한 것이 연이기 때문이다. 모란이 그에게 뭘 해 주었는지 아는 까닭이다……. 그가 이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해도 연으로서는 자꾸만 눈에 걸리고 침울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사과하지 마.”

그리 말하고는 연이 뒤돌아서 다시 남궁세가를 향해 걸었다.

연이라고 모를 리가 있겠는가. 모란이 자신을 어떻게든 완전히 치료하려고 애를 썼던 것을. 그러나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의 감정이 연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모란이 보기 싫은데 동시에 보고 싶었다. 심지어 모란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조차 그런 감정이 들었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아픈 것처럼 조이면서도 깊은 감정으로 들끓는 것이다.

연은 난생처음 겪는 이 감정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모란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라. 다만, 그러면서도 완전히 외면은 못 해서…….

마음이 복잡해진 연이 남궁세가에 다다를 때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당황했다. 연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본 적은 없는데 밖에서 들어오니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바로 뒤에 모란이 어슬렁거리며 따라 들어오기에 무사들은 바짝 얼어 통과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제 마음 추스르기에 바빠 연은 그런 무사들의 태도는 미처 보지 못했다.

남궁세가에 들어온 연은 잠시 서서 한숨을 쉬었다. 이 무슨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고 마음가짐인가. 모란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주어 가며 연을 살려 내고 완치까지 시켜 줬으면 이런 태도는 말아야지,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쉬이 모란을 볼 수는 없었다.

‘일단, 아까처럼 졸리지는 않으니 조부님을 뵙고 인사를 드려야지…….’

하다가도 그 생각은 바로 모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몸이 안 좋으면 걸어가야지, 왜 마법을 써서는……. 안 좋으면 쉬어야 할 것이 아니야. 내상 때문에 피까지 토할 정도면서.’

실은 속상함에 가까운 감정이었으나 아무튼 연은 모란만 생각하면 기분이 침울해지는 것이었다. 모란에게 약탕을 끓여 주어야지, 하고 속으로 이런저런 좋은 약초들을 배합하며 조부가 머무르는 정영당(靜影堂)에 당도했다. 한데 정영당에는 조부가 없는 상태였다. 잠깐 당황해 하던 그는 지나가던 무사를 붙잡았다.

“흐억.”

무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어붙었다. 연은 무사의 태도가 화정당 사술 사건 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조부님은 어디 계시느냐?”

“그, 그분께서는…… 어젯밤부터 폐,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에 연이 놀랐다. 폐관 수련? 남궁원은 무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고수였다. 왜 갑자기 폐관 수련을 하는지 연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혹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심인가?

무사가 거의 숨도 못 쉴 지경이기에 더 묻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연이 마지못해 놔주자 무사는 그대로 도망치듯이 후다닥 뛰어갔다. 연이 미간을 접었다.

‘어쩐지 딱히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닌 듯했는데.’

설마 하고 연이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이 씩 웃는 표정을 보자 의혹은 설마에서 역시나로 번졌다. 실력 행사를 했다 하더니 어지간히 깽판을 친 듯했다. 연이 미약하게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멈칫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하게 남궁세가의 풍경이 평소 보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왜 그래?”

“아니, 어쩐지…….”

밤이라서 그런가 하여 다시 둘러보다가 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깨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졸렸다. 하는 수 없이 화정당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연이 생각에 잠겼다. 자꾸 졸음이 와서 제대로 생각을 못 해 보았는데, 대체 모란은 어떤 식으로 실력 행사를 하고 돈을 먹였다는 걸까? 정작 모란에게는 물어도 제대로 답을 해 주질 않으니…….

화정당에 돌아오자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연은 겨우 약탕을 달여 놓고서는 더는 생각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모란이 친 깽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알게 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난 연이 모란에게 약탕을 내어 주어야지, 하고 잠기운에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연이 잠자는 동안은 같이 내내 침상에 늘러 붙어 있던 모란이 머리 묶을 끈을 건네며 말했다.

“네 형님이 같이 식사하자는데. 아침부터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라고 전해 줘?”

“아, 응…….”

아직 정신이 없어 연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준비하고 형님 뵈러 가야겠다 싶어 늦어도 한참 늦은 아침 소세를 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한데 밖이 소란스러워지나 싶더니 갑자기 연오가 들이닥쳤다.

“연아!”

연오는 달려들려다가 말고 우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는데, 그 모습이 어째 한위가 저를 볼 때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형님? 하고 연이 되묻자 그가 이를 갈며 모란을 쏘아보았다.

“네놈…….”

당장 검 손잡이에 손이 가기에 연이 기겁하여 연오의 앞을 가로 막았다. 자초지종을 전혀 모르는 연으로서는 모란을 대하는 연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단순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모란을 철천지원수 보듯 했다. 연이 가로막으니 연오가 차마 검을 뽑지는 못하고 노기에 몸만 떨었다. 항상 침착한 형님만 봐 왔던 연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연오는 연이 저를 막은 것도 막은 것이지만 생사를 함께하느니 어쩌느니 하던 것도 떠올라 속이 터졌다. 정말 혹여 그 사술 때문에 모란에게 간 타격이 연에게도 가면 어찌하나? 그것만 아니었어도 죽는 한이 있을지언정 모란을 연의 곁에서 떼어 놓는 건데…….

“왜 그러냐니. 당연한 일이 아니냐, 네 인생에 해악만 끼치는 자인데!”

연이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아니, 모란이 좀 얄미운 구석은 있어도 제 인생에 해악을 끼치는 정도는 아니지 않나. 도리어 이것저것 많이 해 주었으면 모를까. 뭔 말 좀 해 보라고 돌아보았더니 모란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괴로웠느냐,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침통한 연오의 말에도 연은 이해를 못하고 눈을 깜박일 따름이었다.

‘대체 뭘 했기에 형님이 이러시는 거야?’

시선으로 묻자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란은 여전히 모른 척했다. 연은 일단 최선을 다해 연오를 진정시켜 보기로 했다.

“저, 모란이 좀 껄렁해 보이기는 해도 제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제 건강도 모란 덕에 많이 나아졌고요.”

그런데 건강 이야기가 오히려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연오는 벌컥 화를 내려는 모양새였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더니 연에게 퍽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마치 모란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고 연은 그런 나쁜 놈에게 붙잡혀 있는 포로인 것처럼…….

아무래도 이상하여 좀 뭐라 말해 보라고 연이 재차 재촉하고 나서야 모란은 마지못해 성의 없는 태도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입 아프게 말해야 할까?”

……이렇게 연오의 성미를 박박 긁었다. 덕분에 연만 중간에 껴서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연오도 연오지만 어째서 모란도 갑자기 연오에게 형식적으로나마 차리던 정중한 태도를 때려치웠는지 모르겠다.

잠시간 모란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다가 식사를 하자는 제안대로 연오는 시비들에게 상을 차려 오라 했다. 그는 상이 차려지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도, 식사를 다 마치고 식후 차를 마시고 난 뒤에도, 연이 어떻게든 자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버티지 못하고 짤막한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도 한결같이 모란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작 모란은 연오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였지만…….

그나저나 어젯밤부터 달이기 시작한 약탕이 다 만들어졌을 시간이라 연이 졸음을 떨치고 일어났다. 연오와 모란의 시선이 연에게 향했다.

“어딜 가느냐?”

“어디 가게?”

동시에 말하고는 연오가 모란을 냉랭하게 노려보았다.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설마 잠깐 약탕 가지러 다녀온 사이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연은 희미한 불안감이 들었다.

“잠시 가지고 올 것이 있어서……. 곧 돌아올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면서 연이 미간을 접었다. 그는 사방이 모란의 적으로 돌변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은록도 은록이고, 연오도 그렇고. 대체 실력 행사를 어찌했기에? 무엇보다 모란을 대하는 연오의 태도가…… 마치 모란이 연에게 몹쓸 짓을 한 자인 듯 대하지 않나. 지탄을 받는다면 화정당 사술 범인인 연이 받아야 할 텐데.

모란의 약탕을 식히는 동안 연은 연오를 위한 약차도 우려냈다. 진정 역할을 하는 약초도 좀 첨가했다. 다행히도 연이 나가 있는 동안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는 했어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연은 연오에게 약차를 내놓은 뒤 모란에게는 약탕을 내놓았다. 연오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별생각 없이 앉아 있던 모란은, 일단 연이 주니 약탕을 받아 들기는 하였다.

“……음?”

“계속 몸이 안 좋잖아. 기력 회복에 좋은 거야.”

연의 말에 연오가 눈을 부릅떴다. 기력 회복이라고? 기력 회복이라고? 누가? 누구의 기력 회복을? 왜? 어째서?

동생이 가져다준 차라고 마시면서 좀 기분이 누그러지던―진정 효과가 나타나던― 연오가 손을 떨었다. 그는 백모란이 얼마나 경악스러울 정도로 강한 자인지 잘 알고 있다. 이제 보니 정말 연에게 세뇌 따위를 하였구나 싶어 분노가 이글이글 끓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연이 모란을 감싸 줄 리가 없었다.

연오는 모란이 연의 건강을 위해서니 어쩌니 했던 말은 죄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어쩌면 정말 모란이 연의 건강을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연오는 모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분명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그의 동생이 어릴 적에 모란을 그리도 못살게 굴었을 리 없다. 이유가 있으니 못살게 군 것이지.

이젠 모든 것이 다 이해가 간다. 유독 크게 앓아누웠을 때, 혹은 모란을 못살게 굴었을 때 좀 더 알아봤었어야 했던 걸. 하나 지금은 늦은 것이다. 연이 모란에게 하는 태도를 보건대 십 년간 분명 세뇌를 당해도 단단히 당한 것이 분명했다.

“연아…….”

연오가 그 해로운 놈에게서 떨어지라는 의미로 부르자 연이 아차 하였다. 그러고 보니 형님 계신데 너무 당당히 약차니 약탕이니 타 왔구나. 졸려서 정신이 나갔지 싶어 연이 얼른 대답했다.

“아, 이건…… 진은록 의원님에게 받아 온 것입니다.”

연이 제 형님에게 그리 대답을 하는 걸 보자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모란은 유일하게 연에게만 남겨 둔 자그마한 양심이 좀 찔렸다. 연오가 그렇구나, 하고 혼이 빠져나간 듯한 대답을 했다. 연은 그제야 제 대답이 어딘가 요점을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연아, 꼭 저자와 함께 여기서 지내야겠느냐? 혹, 협박을 당한 것은 아니더냐?”

“협박……이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이내 연이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형님. 너무 걱정 마세요. 예전에 있었던 일에 비하면 지금은 이리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일이 많지 않으십니까?”

그가 연오를 잘 어르고 달랬다. 안 그래도 요즘 모란 때문에 사방팔방에서 서신이 날아오는 데다가 창일당 재건 때문에 일이 쌓여 가고 있었다. 이를 떠올린 연오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나마 연오를 지도하고 이끌어 주던 남궁원은 폐관 수련까지 들어갔으니 그 일의 정도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연오를 배웅까지 하여 완전히 보낸 뒤 연이 싹 굳은 얼굴로 모란을 돌아보았다. 모란이 눈을 굴리고는 한 모금씩 아껴 마시고 있던 약탕을 단번에 훌쩍 삼켰다. 그 모습에 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줬다가 빼앗기라도 할까 봐?

“뭐야?”

“……음.”

“사실대로 말해.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어? 세가에 뭘 하였기에 형님이 저런 반응이야? 조부님 폐관 수련도 같은 이유 때문이지?”

모란은 이제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딱히 숨기려고 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누가 연의 눈에 대해 말을 꺼내면 모란도 슬그머니 말을 꺼내 보려고 했는데 어째 만난 사람들 중 한 명도 연의 눈에 대해 지적하는 이가 없었던지라.

“안제테다에서 돌아온 날에 화정당에 가 보았더니 너는 없고 정원은 뒤집어져 있으니 내 속도 뒤집히는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그래서, 뭐……. 가볍게 창일당 좀 무너트려 줬지.”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벌컥 화정당 문을 열고 나갔다가 잠시 뒤에 황망한 낯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지난밤 세가의 풍경이 이상하다 했다. 세가 내에서는 어디서든 보이던 창일당이 안 보였으니 이상할 만도 하지!

아니, 무엇보다 창일당을 무너트렸다는 건 모란이 남궁세가에 완전히 정면으로 시비를 걸어온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모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히 남궁세가의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는 일단 너를 찾아냈지. 그런데 다 죽어 가는 걸 보니 또 복장이 뒤집히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무얼 했는데?”

약탕 때문에 입맛이 쓴지 모란이 어디엔가 쟁여 두었던 귤을 두 개 스윽 꺼내 들었다. 연에게도 건네었지만 팔짱을 낀 채 받지 않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하나는 도로 집어넣었다.

“실력 행사를 하여 설득시켰지. 사술은 내가 부린 것이고 연이 너는 그저 그 희생자인 것으로. 남궁사영은 미리 눈치채고 널 빼돌린 걸로.”

“……뭐?”

황망하여 연이 입을 벌렸다. 어쩐지 연오의 반응이 이상하더라니. 왜 사람들이 자꾸만 연을 보면, 아니, 정확히는 모란과 함께 있으면 두려운 듯한 반응을 취했었는지 이제야 다 이해가 갔다. 모란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파연합이니 뭐니 귀찮게 하지 않아. 기어오르지 말라고 직접 찾아가서 하나하나 때려잡다 보니 사파에서도 튀어나오고…….”

침착하려고 했으나 그 노력도 소용없이 연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말은 무림 공적이 되었다는 의미잖아!”

그저 남궁세가의 원수가 된 것도 아니고 무림 공적이라니!

무림 공적이 무엇인가. 말할 수 없는 악행으로 인해 정파와 사파를 막론하고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시시때때로 공격당하는 자였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정도로는 안 된다. 순전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수십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다닌 정도여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온 중원의 문파와 세가를 공격하고 다니거나……. 문제는 모란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자란 점이었다.

“다 때려잡지는 않았어. 중간에 화산파나 점창파 같은 곳에서는 먼저 화해를 청해 왔거든.”

“그걸 말이라고…….”

연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남궁세가에서만 깽판을 치고 다닌 게 아니라 중원 전체에 깽판을 치고 다녔구나. 자신이 모란에게 기력 회복을 하는 약탕을 준다 하였을 때 연오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겠다. 어처구니가 없었겠지…….

왜 모란을 적대시하는지도 잘 알겠다. 창일당을 부수고 중원의 온 문파와 무가(武家)를 꺾어 버렸으니까. 화산파나 점창파가 어떤 곳이던가? 명색이 구대문파가 아니던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는 두 문파에서 먼저 화해를 청했다는 것만 봐도 모란이 얼마나 악…랄하게 굴고 다녔는지 짐작이 갔다. 무림 공적은 무림 공적인데 아무도 감히 못 건드리는 무림 공적이다.

“그래도 많이 봐준 거야. 한 명도 죽이지도 않았고, 또 피해 보상까지 해 줬으니까.”

“……피해 보상?”

“지금 재건하고 있는 창일당, 내 돈으로 지어지고 있는 것이거든.”

모란은 큰 아량을 베푼 듯 말하였으나 연은 알 수 있었다. 모란의 돈으로 창일당을 재건하였다 함은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깔아뭉개는 것이라는 걸. 그 남궁세가가 창일당 지을 돈이 없어서 모란의 돈을 받았겠나. 모란의 돈을 받아 창일당을 재건한다는 건 결국 상대에게 승복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였다.

‘그래서 조부님이 폐관 수련에 드신 거로군.’

무림에서 손꼽히는 강자였기에 모란에게 패배했을 때 그만큼 충격이 크셨으리라. 연이 한숨을 쉬었다. 말하고 싶은 건 한가득이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는 꾹 눌러 참았다. 연에게 어찌 모란을 탓할 자격이 있겠는가……. 온 중원이 모란을 적으로 돌린다 하여도 연만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란이 씩 웃었다.

“이전에는 영웅이었으니 이번에는 악당이어도 괜찮겠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렸다가 연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심각한 사안인데 모란의 태도를 보니 전혀 심각하게 들리지가 않는다. 하긴 실제로도 모란에게는 전혀 심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긴 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항상 모란과 있으면 현실감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리고 또…….”

이제 들을 것은 다 들었구나 하였던 연이 움찔했다. 설마 여기서 또 남은 게 있단 말이야?

“뭔……데?”

“실은 이걸 가장 처음으로 말해 주려고 했는데…….”

남궁세가 창일당을 박살 내어 놓고, 온 중원을 적으로 돌린 이야기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털어놓던 모란이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니 연은 그만 불안해지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기에?

모란이 느릿느릿 몸을 돌리더니 무언가를 집어 건넸다. 면경이었다. 연이 반은 불안하고 나머지 반은 의아하여 면경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처음에는 햇살이 유독 밝게 비친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햇살 때문이 아니다. 연이 눈을 깜박였다. 면경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 보았다. 두 번을 봐도 그의 눈동자 색은 변함없었다. 금색이었다. 아무리 각도를 달리해서 보아도 명명백백한 금안(金眼)이다. 그의 눈동자에 모란의 눈에서 종종 보던 그 금색 광채가 어려 있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연이 침착하게 면경을 내려놓았다.

“눈 색이 바뀌었네?”

“음, 아주 예쁜 색으로 바뀌었지.”

그리 말하면서 모란이 슬그머니 연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어쩐지 한위나 연오나, 만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저를 보고 놀란다 했다. 연은 다시 면경을 보았다. 마치 눈에 햇빛이 고여 있는 듯했다. 그렇구나, 하고 연이 면경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모란은 연의 반응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별로 화 안 내네?”

“화를 낼 이유가 뭐가 있어? 건강해졌으면 되었지.”

내공심법이나 복용하게 된 내단 때문에 신체 일부가 바뀌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눈동자 색이 바뀐 건 좀 놀랍긴 해도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실명한 것도 아니고 고작 색이 변한 정도인데, 완전히 건강해지는 대가에 비해 이 정도쯤이야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게 괜찮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연이 그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찡그리면서도 저는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모란이 턱을 괴고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이 뒤늦게 대답했다.

“……괜찮지.”

“더는 네게 사술이니 뭐니 질책하지도 않을 것이고, 완전히 건강해졌고. 더는 문제가 없잖아.”

“그래, 문제랄 것이 뭐가 있어.”

연이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모란이 몸을 기울였다. 돌연 갑자기 몸이 가까워지니 연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한데 지난번 깨어난 뒤로 계속 기분이 침울한 것 같아서.”

지난번 깨어난 뒤라 하면 오늘 잠에서 깬 것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연은 잘 알았다.

“그다지 침울하지 않아.”

바로 반박하면서도 연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 됐고, 하면서 모란이 입술을 베어 물었다. 동그라니 놀란 금색 눈에 웃어 보이고는 모란이 다정하게 입을 맞추자 새삼 무언가 깨달은 모양으로 연의 몸이 움찔했다. 그제야 모란과 그가 연인 사이임을 떠올린 모양인지…….

몇 번 더 쪽쪽거리자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끙, 하고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내고는 연이 고개를 돌리며 모란을 밀어 냈다. 모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탕약 먹고 바로 입 맞추지 마.”

연의 말에 모란은 잠깐 침묵했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아까 따로 쟁여 두었던 귤을 꺼냈다. 전에 모란의 얼굴에 과일을 쏟았을 때 보이던 그 허공의 흉터 같은 곳에서 꺼내는 걸 보니 저것이 아공간이구나 싶었다.

‘내 몸이 확실히 무언가 바뀌기는 바뀌었어.’

연은 모란이 건네는 귤을 받아 들고 반을 쪼개어 다시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먹지 않고 연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눈가에 묻은 눈웃음이며 눈빛이 세상 가장 귀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지라. 정말이지 가슴이 못 견디게 간질거리는 바람에 연은 그 시선을 마주보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결국 한숨을 쉬었다.

***

‘……또 잠들었구나.’

눈을 뜬 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잠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하루에 길어봤자 두 시진 정도 깨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직 혼몽한 기운이 남아 있어 겨우 몸을 일으키자 열심히 방을 청소하던 시비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전과 같은 희미한 적개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잠으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도련님에 대한 동정심마저 보일 정도였다. 확실히 모란이 한 일로 인해 연은 세가에서 자신의 평판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모란이 악역을 자처했기 때문이지.’

한데 악역은 악역인데, 모란은 사람들이 그리 취급하든 말든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게 정확하겠지. 도리어 그 취급을 즐기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보통 같으면 크게 신경 쓰였을 텐데……. 참으로 강인한 정신력이 아닌가.

연이 세가에 돌아온 지도 벌써 달포가 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신경이 바짝 곤두선 채로 지냈다. 모란이 무림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위 악당이 된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가 강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피를 토하는 것을 보니 연으로서는 마음이 좋지 않고 불안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제 연은 몹시 졸릴 뿐 완전히 건강했고, 남궁세가에서 모란을 갑자기 공격하고 나서는 일도, 무림에서 연합하여 모란을 치는 일도 없었다.

처음에는 두려워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던 화정당 시비와 하인들은 이제는 모란이 있어도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연오도 모란에게 거의 말을 걸지는 않았으나 더는 검을 뽑으려 하지는 않았다. 창일당도 벌써 절반쯤 재건되었다.

연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화정당에서 잠자고, 일어나서는 한위나 연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눈을 감을 때도 모란이 곁에 있고 눈을 뜰 때도 모란이 곁에 있지 않나.

모란의 말대로 정말 앞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일까. 그저 앞으로는 이렇게만 지내면 되는 것인가……. 연은 종종 면경 속 제 금안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이렇듯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데도 연의 표정에서는 침울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떠나지 않는 어떠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외출도 못했는데 오늘은 주루에 다녀올까?”

창가에 앉아 따끈따끈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연이 모란의 제안에 뒤를 돌아보았다. 요즘 연은 예전에 모란이 달이 가렸니 해가 가렸니 말한 것들을 이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확실히 해와 달이 뜨면 원기가 활발해졌다. 양(陽)이라는 존재에서 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확히 정체는 몰라도 최근 들어서는 어떠한 가닥이 잡히는 것들이 있는데…….

아무튼 갈등하느라 연이 미간을 접었다. 확실히 요즘은 침상에서만 지내다 보니 나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고민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갔다가 또 그대로 자 버리면?”

잠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괜찮거니 싶어 잠에서 깨고 나면 폐월당이니 화월당이니 찾아갔다. 하지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는 잠에 가다가 비틀거리거나, 혹은 저에 대한 걱정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연오―와 함께 있는 장로들까지 덤으로― 앞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고 나니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런 모습을 사람들이 목격할 때마다 모란에 대한 악명은 높아져만 갔다. 연의 몸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데 세가에서는 오히려 전보다 훨씬 병약한 것으로 소문이 나 버렸으니, 참으로 민망할 따름이었다.

“뭐가 걱정이야. 그러면 내가 다시 데리고 돌아오면 되는 것을.”

맞는, 말인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그 악명 높은 백모란에게 사술의 제물로 당한 남궁세가의 매우 병약한 차남이라는, 남궁세가에서 퍼진 소문이 안휘성 장안에도 짠하게 퍼지지 않겠는가. 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밖에서 자 버렸다가 그대로 모란에게 안겨 돌아오는 부끄러움과 오래간만의 외출을 향한 갈망이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엔 후자가 이겼다.

마음을 정한 연이 외출할 옷으로 갈아입었다. 딱히 금안인 걸 보여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목적으로 면사포를 썼다. 예전에는 이 계절쯤에는 분명 이보다 두터운 외투를 걸쳤었지. 그러고도 가끔 한기에 몸서리를 치곤 했는데. 이젠 두꺼운 옷 중 반절은 버려도 될 것 같았다. 연은 잠시 옷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잠이 쏟아질까 무서워 걸음을 서둘렀다.

이번에는 산책이 목적이기에 둘은 순간이동 대신 걸어서 주루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걸으니 연의 마음이 산들산들 풀렸다. 확실히 봄은 봄이라, 이제 여기저기 꽃망울이나 개화한 꽃 따위가 보였다. 연은 정원에 심은 모란꽃과 연꽃을 떠올렸다. 정원의 꽃들은 모두 언제쯤 피게 될까? 피는 시기가 다른 꽃도 있으니 좀 기다려야 할 터였다.

“요즘 몸은 좀 어때?”

“언제나 그렇듯이 괜찮지.”

모란은 태연하게 그리 대꾸했지만 연으로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란이 피를 토하는 걸 두어 번 목격하기는 했는데, 왜 피를 토해도 맥은 그렇게 건강하게 뛰는지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모란 정도의 고수가 되면 피 토하는 내상쯤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되나?

‘그러고 보니 이제는 무공을 다시 배워도 되겠군.’

연이 괜히 검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의원이라 무의미한 살생은 하지 않으니 검술은 아무래도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까지야 제대로 배운 것이 검술뿐이라 그나마 검을 차고 다녔던 것이지만 다시 배우게 된다면 검술 말고 권법을 제대로 단련하는 것도 괜찮겠다.

세가의 정문을 지나가자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모란을 보고는 뻣뻣하게 굳었다. 연은 못 본 척 지나갔다. 적은 적이되 공격을 하지 못하는 적이라 세가 내에서 모란의 위치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볼 때마다 사람들이 움찔하거나 얼어 버리곤 했다.

다행히도 세가 밖을 나가자 둘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자기 할 일에 바쁘거나 모란이나 연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세가와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연의 마음은 한결 더 편해졌다. 남궁세가의 분위기가 다소 침울한 것과는 다르게 안휘성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루주님, 어서 오십시오.”

주루에 당도하자 기녀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기녀들은 연에게도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모란에게 손님이 와 있음을 알렸다. 기녀들의 안내에 따라 객실에 들어서니 과연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하오문의 문주 위정이었다. 오늘의 그는 젊은 봇짐장수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연은 모란이 위정이라고 부른 뒤에야 정체를 깨달았다. 언제 보아도 참 대단한 역용술이었다.

“연 공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저야말로 지난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위정과 연이 예의 바르게 서로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연이 자리에 앉으며 면사포를 벗자 다과를 내오던 기녀가 연의 눈을 보고는 숨을 집어삼켰다. 위정이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기녀가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괜찮습니다.”

연은 기녀의 행동을 이해했다. 기녀뿐만 아니라 최근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금색 눈이라니 보기 드문…… 아니, 세상에 거의 없을 색이기는 했다. 백안이나 자안, 벽안은 있지만 금안은 내공심법의 단련으로도 나오기 힘든 색이었으니. 모란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여기는 어쩐 일로 왔지?”

위정이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공단 주머니였다.

“별것은 아닙니다. 그저 저희 하오문과 루주님 사이의 우호 관계에 예를 표하고자 하여 찾아왔습니다.”

“어찌 내가 여기 올 것은 미리 알고 말이야? 우연이라 할 것은 아니겠지.”

모란의 질문에도 위정은 그저 사람 좋은 낯으로 웃었다. 모란이 공단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알이 꽤 굵은 붉은 홍옥이 들어 있었다. 지난번 모란이 하오문 분파 당주에게 주고 간 내단과 금덩어리보다 좀 더 비싼 보석이었다.

‘그것으로 보답을 끝내지 않고 좀 더 장기간 관계를 이어 보자는 것이군.’

모란이 씩 웃었다. 하오문은 그에게 있어서도 꽤 유용한 집단이었다. 게다가 문파의 풍조가 썩 마음에 들기도 하였다. 건달, 기녀, 점소이, 장사꾼……. 온갖 이들이 자유로이 모여 큰 흐름을 이끌어 내지 않는가. 모란이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이걸로 나중에 연에게 뭔가 해 주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 나 역시 하오문의 성의에 예로 답하도록 하지.”

둘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며, 연은 당과나 먹었다. 단 건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나 요즘에는 부쩍 허기가 졌다. 이도 건강해진 덕분이었다. 아프면 식욕도 감소하기 마련이라 전에는 입맛이 짧았다.

그보다 위정을 보니 모든 문파가 모란을 적대시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위정은 모란에게만 선물을 주지는 않았다.

“이것은 하오문 문도를 치료해 주신 연 공자님을 위한 보답입니다.”

그러면서 위정이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건네었다. 그다지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기에 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것은 되었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연은 거절하려 했으나…… 모란이 먼저 냉큼 받아 버렸다. 그러더니 미처 말리기도 전에 가죽 주머니를 열어 버리는 게 아닌가. 안에서 나온 건 볼품없이 잔금이 이리저리 간 주먹만 한 차돌 덩어리였다. 딱히 선물에 대해 별 기대도 생각도 없던 연이었지만 그저 돌로만 보이는 선물에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모란이 덥석 돌을 쥐어 보더니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한번 만져 봐.”

그 무슨 선물에도 손도 안 댈 작정이었지만, 호기심을 이길 순 없었다. 연은 슬쩍 손을 대 보고는 놀랐다. 펄펄 끓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오래 쥐고 있으면 화상을 입겠다 싶을 정도로 돌이 매우 뜨끈하였다. 자세히 보니 잔금 안으로 희미한 붉은빛이 일렁였다. 또한 내뿜고 있는 양기(陽氣)가 실로 대단하였다.

“용암산에서만 발견되는 귀한 돌입니다. 보통 용두지열석(鎔頭之熱石)이라 불리며 황제에게나 진상되는 것인데, 문도 중 한 사람이 산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환자를 치료할 때 요긴하게 쓰일 듯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뜻밖의 선물에 연이 망설였다. 환자들은 보통 몸의 기가 허하고 양기가 부족해 몸이 차기 마련이다. 이 돌을 일각 정도 명치 위에 얹고 있기만 해도 상당히 몸이 좋아질 텐데. 위정은 연의 고민을 단숨에 눈치챘다.

“앞으로도 계속 하오문 문도를 치료해 주실 텐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보통 하오문 문도 같은 평민들은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의원들이 대부분 돈이 있는 자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연이 앞으로도 계속 의원으로 활동하는 이상 많은 하오문 문도들이 필연적으로 연의 치료를 받을 터. 모란에게는 장기적인 이득을 셈하여 예를 갖추었다면, 연에게는 정말 예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이런 선물을 준비한 것이었다.

사실 연의 선물은 고르기가 참으로 까다로웠다. 남궁세가의 차남일 뿐만 아니라 백모란을 곁에 두고 있는 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 있겠는가? 설사 있다 하여도 죽기 전까지 환자들을 돌본 연의 성정을 보아하건대 금은보화 따위는 받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해서 위정은 나름 궁리를 했다.

“……고맙습니다. 잘 쓰도록 하지요.”

“선물을 잘 쓰신다니 제 기쁨일 것입니다.”

용두지열석은 모란이 잘 챙겨 넣었다. 모든 용건을 마치자 위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얼굴을 매만지는 것으로 그는 봇짐장수에서 주루의 심부름꾼 하인으로 변하였다.

“참, 이번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은 양회문(諒會門)에서 보낸 자들입니다.”

위정이 대뜸 던지는 말을 연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란은 바로 알아들었다. 위정은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소리도 없이 걸어 사라졌다. 연이 미간을 접었다. 양회문? 모란은 연 앞의 다과가 상당히 사라진 것을 보고는 물었다.

“군것질로 배를 채우게? 식사를 내오라 할까?”

“양회문이 무엇인데?”

연이 답을 하지 않았지만 모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내오라 하였다. 그는 양회문이 무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양회문이라면 안휘성에서도 그럭저럭 잘나가는 문파 중의 하나로 창술이 특기인 가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녀들이 곧장 따끈따끈한 식사를 내어 온 뒤에야 모란이 설명했다.

“오면서 보니 어느 피라미 같은 녀석이 날 보고는 부리나케 달려가더라고. 아무래도 날 기다린 모양이지. 지금 주루가 포위당해 있는 걸 보니.”

그 말에 연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주루가 포위당해 있다고? 창을 열어 내다보니 과연 검을 찬 무사들이 얼쩡거리기는 했다. 모란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 딱히 당하겠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최근 평화에 누그러져 있던 마음이 다시 불편해졌다. 모란이 퍽 가소롭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식사하고 있어. 상대 좀 하고 올 테니.”

그리 말하고는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모란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연이 창밖을 내다보자 아까 어슬렁거리고 있던 무사 몇이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아스라하게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퍼졌다.

연은 억지로 식사 몇 술을 뜨기는 했으나 얼마 못 가 다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모란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나타났다. 연의 시선이 모란의 옷에 묻은 핏자국에 향했다. 혹여나 하여 안색도 살폈다. 모란은 피 묻은 옷을 벗다가 음식이 거의 사라지지 않은 상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먹지 않고?”

“……아까 다과를 많이 먹어서.”

눈썹을 들어 올린 모란이 손짓 한 번으로 피 묻은 옷을 없앴다. 하지만 연은 피 묻은 옷 때문에 입맛이 떨어진 게 아니다. 그는 의원이다.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피 같은 것에는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결국 얼마 먹지 않고 상을 다시 물렸다. 연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졸리기도 하고 기분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슬슬 졸린 것 같은데, 돌아갈래.”

“그럴까, 그럼. 걸어서 돌아갈 수 있겠어?”

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이 한없이 축축 처졌다. 하나 정문으로 나왔으니 다시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최근 들어 모란에게 잔뜩 날이 서 있는 연오가 어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모란이 연을 데리고 남궁세가 근처로 순간이동을 한 뒤 정문부터만 걸어 들어갔다. 연은 겨우 화정당으로 돌아와서는 기절하듯이 푹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벌써 해가 저물고 달이 뜬 상태였다. 어쩐 일로 곁에 모란이 없어 창밖을 보았더니 그가 화정당 뒤뜰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던 그가 연꽃과 모란꽃이 심어진 연못 앞에 멈춰 섰다. 날이 약간 쌀쌀하여 연도 겉옷을 걸치고 나갔다. 모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여기도 연꽃과 모란꽃이 피겠어. 참으로 보기 좋을 테지.”

화정당에 모란꽃과 연꽃을 심으라 했던 제 지시가 다시 떠올라 새삼 부끄러웠던 연이, 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평소에는 잘만 피워 댔으면서 요즘에는 어쩐 일로 안 피워?”

“그야, 이제는 꽃을 못 피우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연이 굳은 얼굴로 모란을 돌아보았다. 모란이 꽃을 피우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피우는 것인 줄은 몰랐다.

“……꽃을 못 피운다니, 왜 갑자기?”

그동안 모란이 얼마나 많이 꽃을 피워 댔는가. 어린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다시 만나게 된 뒤, 연이 꽃을 몹시 싫어할 때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피웠었다. 이제는 꽃만 보면 모란이 생각날 정도였다. 연은 최근 들어 모란이 꽃을 피우지는 않고 꽃가지를 꺾어 잠자고 있는 제 머리맡에 두던 걸 떠올렸다. 모란은 별것 아니라는 어투로 말했다.

“내단을 네게 내주었으니까, 이제는 좀 힘들지.”

내단은 모란의 몸에서 넘치던 생기며 본원지기의 원천이었다. 넘쳐흐르는 생기로 꽃을 피우고 생장을 재촉해 오지 않았나. 어떻게든 연이 꽃을 덜 두려워하고 기억을 조금이나마 되살리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 그리하기에는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데 모란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연은 기어코 눌러 참던 것이 터지고 말았다.

“왜……. 왜 그리 제멋대로야!”

다른 건 꾹꾹 별말 안 하고 넘어갔어도, 유독 모란이 꽃을 피우지 못 한다는 것은 연의 가슴에 아픈 쐐기같이 박혀 들어왔다.

제게 내단을 내주고, 치료해 주기 위해 안제테다에서 일 년을 또 고생하다 오고, 비열한 자를 자처해 가며 저를 다시 세가로 돌려보내고. 왜 꽃을 피우지 아니하고 꽃가지를 꺾어 머리맡에 두었는지 이제는 그 연유를 아니 분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것을 분이라 할 수 있을까. 정말 모란이 제멋대로 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연은 참지 못하고 모란의 옷자락을 와락 쥐었다.

“영영화를 건드려서 이계로 쫓아 보낸 건 나잖아!”

“연아.”

모란이 옷자락을 꽉 쥔 연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항상 혈기가 넘쳐 따뜻하다 못해 뜨끈하던 손은 이제 다소 서늘했다.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정당의 마법진이 왜 파괴되었는데? 내가 앱솔의 피가 묻은 옷을 연못 뒤에 파묻어서였어. 그도 모자라 정원에 꽃을 심으려 했어. 그래서 정원사가 발견한 것이라고.”

그동안 연은 제 완치를 완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가 일을 저지르면 그 수습을 모란이 죄다 감당하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 그러하지 않나. 멱살을 쥔 연의 손에서 스륵 힘이 풀리는 걸 모란이 잡아채 손가락을 얽었다. 목소리가 퍽 다정하였다.

“너는 영영화를 그저 꽃으로만 알고 그런 것인 줄은 몰랐지. 또한 내가 충고를 받았는데도 경솔하게 화정당에서 일을 진행하였기에 네가 건들게 된 것이지 않아.”

“…….”

“화정당에 내가 너 몰래 그런 것을 묻어 놓은 사실 또한 알지 못했고.”

“그래, 나는 몰랐지! 아무런 말도 안 했으니까……!”

그리 말하고는 연이 이를 악물었다. 모란이 그에게 해 준 것이 어찌나 지극하던가? 세가에서 사람들이 모란을 두려워하고 멀리할 때마다, 모란이 전과는 달리 깊은 잠을 자고 피를 토할 때마다 연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모란이 괜찮다 하여도 연은 괜찮지가 않았다.

모란이 제게 준 것이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단순히 부담감이나 죄책감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이리도 들끓는 이 마음은 무엇이기에?

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 모란은 조용히 웃었다. 제 말이 어린아이 투정처럼 들리는가 싶어서 연이 잠시간 입술을 깨물 때였다. 모란이 말했다.

“나는 도리어 좋아.”

“……뭐가 그리도 좋은데?”

아직도 간에 구멍이나 뻥 뚫려 있으면서…….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모란은 연꽃과 모란꽃이 심어진 부근을 잠시 돌아보았다. 연못과 화정당 정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연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네 혼과 육신에 내 손길이 닿았고, 이제는 나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그게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것이지.”

모란이 진심으로 기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접어 웃었다.

“심지어 연이 네가 나로 인해 이리 괴로워한다는 것조차 마음에 든다면 믿을 것이냐?”

모란의 말에 연이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모란이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곤 한 번도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연인이란 게 마냥 애달프고 달기만 한 것은 아니라, 하고는 모란이 제 눈을 희미한 금빛으로 빛냈다. 그 익숙한 빛깔에 연은 미약하게 안도하였다.

“세상 다른 자들이 나를 어찌 여기든 그건 정말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 하지만, 그래. 정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편하면 이러면 어떻겠어?”

“무얼 어찌하면 되는데?”

눈앞의 연인의 모습이 모란에게는 어찌나 넘쳐흐르게 보이던지. 귀애(貴愛)하다 못해, 혼이며 육신 깊은 곳도 온통 자신의 것으로 해 놓고도 그럼에도 부족하고 또 부족하였다. 모란은 자신이 참으로 비겁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물릴 생각은 없었다. 연의 팔꿈치를 한 손으로 잡아 감싸면서 그가 경애(敬愛)하는 어조로 말했다.

“나의 반려가 되어 줘.”

모란의 말에 연이 눈을 깜박였다. 지금 모란이 반려가 되어 달라 말한 게 정말 맞나? 한참 후에야 연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나와 혼인을 하자는 이야기야?”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야. 이전에 연리지 이야기를 했었지.”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설득할 적에 모란이 연리지를 비유로 든 적이 있었다. 본디 태어날 때 성질이 다른 것들이 잔뿌리부터 얽히기 시작해 나중에는 몸통까지 엉키게 되는 것. 풀려 해도 결코 풀리지 않는 것.

“반려라 함은 서로의 근원과 근원이 뿌리부터 줄기까지 엮이는 것이지. 상대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고, 나의 운명이 상대의 운명이라. 네 오욕이 나의 오욕이 되며 나의 명예가 너의 명예가 될 테니.”

팔꿈치를 감쌌던 모란의 손은 어느새 연의 몸을 두르고 있었다. 연의 눈동자에서 발하는 금빛이 모란의 눈동자 속에 어른거렸다.

전에는 모란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연은 모란이 건넨 반려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반려.

근원과 근원이 엮여 인연(因緣)이 되고, 인연이 각각 상대의 운명이 되어 버려, 결코 끊을 수가 없는 것. 이번 생애에서도, 그 다음 생애에서도 만나게 되는 것. 실로 마음에 들었다.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하면 되는데?”

“서로의 것을 나누어 가지면 되지.”

“그럼 나누어 가져.”

스스럼없는 연의 말에 모란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것을 나누어 가졌지 않아.”

연의 가장 아픈 근원 조각을 모란이 가지고, 영영화를 흐트러트리기 전의 모란의 조각을 연이 가졌다. 서로의 것을 나누어 가졌으니 서로를 반려로 삼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되고도 남았다. 남은 건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얽매는 것뿐이었다. 모란이 다시 반려가 되어 달라 입을 열 때였다. 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모란, 나의 반려가 되어 줘.”

그리 말하고는 연이 모란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손마디마다 결코 풀지 않을 것인 양 힘이 가해졌다.

“모란 당신의 오욕이 내 오욕이 되고, 나의 명예가 당신의 명예가 될 테니.”

잠시간 연을 보다가 다정하게 웃은 모란이 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혀를 얽매고 입술로 베어 물 적에 금빛의 색채가 서로에게 엉켜드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농밀하게 나누다가 다시 떨어질 적에 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연리지(連理枝)가 아니야.”

“그럼 무엇인데?”

이제 반려가 되었으니 연리지가 아니라 한들 무슨 상관일까. 모란이 몇 번을 더 입을 맞추었다.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흡족함이었다. 연은 여전히 모란의 옷자락을 잡아당긴 채 웃었다. 모란은 그 웃음에 잠시 홀리었다.

“나무가 아니라 꽃과 꽃이 얽히었으니, 연리화(連理花)라 해야 맞는 말이지.”

연의 말에 모란이 소리 내어 나지막이 웃다가, 무언가 떠올린 얼굴로 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둘은 연못 위로 걸어갔다. 그들 아래로 수련 잎이 깔리고 뒤로는 꽃망울이 맺힌 모란꽃이 자리했다.

“그렇지, 봐.”

모란이 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깍지를 껴 단단히 얽매어 수면을 건드리자 연꽃이 피어나고 손가락이 향하자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순식간에 숨 막히는 꽃향기가 깔렸다.

“나 혼자서는 못 하지만 이리하면 꽃을 피울 수 있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연이 웃었다. 그리고 모란에게 입을 맞추었다. 모란 역시 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모란이 따뜻한 체온이 머무르는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이 정원이 언제 흙투성이로 뒤엎어졌었냐는 듯, 언제 꽃망울만 있었냐는 듯 이제 그들의 사방이 연리화로 가득 찼다.

비록 지는 것이 꽃의 운명이라지만, 피어나는 것 또한 꽃의 운명이라. 꽃은 어찌 지든 언제나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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