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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章 : 연리지 (15/19)

十一章 : 연리지

연은 왈칵 피를 토했다. 컥컥 기침을 하는데 코에서도 주르륵 피가 흘러나왔다. 마치 거대한 벽에 부딪쳤다가 튕겨져 나온 느낌이었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한참을 신음하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더듬더듬 혈을 눌러 일단 코피를 멎게 한 뒤 작게 기침하며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시야가 회복되고 나자 보이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란의, 주루…….”

모란이 루주로 지내는 주루, 그중에서도 자주 모란과 오곤 하던 삼 층의 어느 객실이었다. 남궁세가가 아닌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어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밖을 내다보니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자개장에 등을 기대며 소매를 들어 피 묻은 얼굴을 훔쳤다. 피를 토하기는 했으나 한번 토하고 나니 도리어 속은 개운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핑 돌아 한동안 앉아 있던 연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았다. 도무지 설 기운이 없었다. 아직 옥에서 사라진 걸 모르는 이때, 어떻게든 지금 안휘성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연은 몇 번을 더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누워 버리고 말았다. 까무룩 눈이 잠겼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무언가가 이마를 조심스럽게 훑는 손길 때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눈을 뜨자 어머나,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내가 코끝을 스쳤다. 겨우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오는 건 한 기녀였다.

“연 공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연이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목구멍이 말라붙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녀가 눈치 빠르게 깨끗한 천을 물에 적셔 입술 위를 도닥여 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환자를 돌보는 일에 조예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입술을 몇 번 핥고 나니 목이 좀 트였다. 연이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제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하루 밤낮을 꼬박 잠들어 계셨습니다. 이제야 열이 내려 다행입니다.”

그리 말한 기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박사박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연이 작게 기침했다. 하루 밤낮……. 그가 사라진 걸 세가에서 눈치채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애써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은 잊고 있었던 한기로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잠시 후 기녀는 따뜻한 미음을 들고 돌아왔다. 딱 먹기 좋은 정도의 온도였다. 기녀가 먹여 주려고 하는 것을, 연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수저를 손에 쥐었다.

입맛은 없었으나 먹어야 기운이 난다. 꾸역꾸역 먹고 난 뒤 제 몸의 상태를 살폈다. 미약하게 내상이 있기는 하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지요?”

“저…….”

연이 머뭇거렸다. 이 기녀에게 세가에서 자신을 쫓고 있지는 않냐고 물어봐도 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기녀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뒤 정중히 입을 열었다.

“현재 남궁세가에 있는 하오문 소속 하인의 말에 따르면, 세가에서는 탈옥한 죄인을 은밀히 찾아 안휘성을 수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군요. 그럼에도 날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았다.

“모란 님은 이 주루의 루주이실 뿐만 아니라 예전에 창기로 팔려 나갈 위기에 처한 저희들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또한 연 공자님은 모란 님이 사전에 신신당부하신 귀한 분이지요. 어찌 연 공자님을 도와 드리지 않겠습니까.”

연은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모란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또 그 일에 의해 위기에 처했다가 다시 목숨을 건졌다. 쓰게 웃은 연이 기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일러 주십시오.”

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녀가 푹 쉬시라며 물러났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이동으로 도착했을 때에도 비워져 있던 걸 보니 이 객실은 언제나 모란을 위해 준비된 곳인 모양이었다. 목걸이를 꺼내 보았더니 붉게 반들거리던 것이 이제는 그저 나무토막처럼 빛이 바래 있었다. 그래도 다시 목걸이를 품에 밀어 넣었다.

“혹시나 하였는데 모란이 있는 곳으로 가지는 않았구나…….”

모란을 만나면 멱살부터 잡았으려나……. 화정당에 사람을 생매장해 두다니, 절대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자는 동안 이틀이 지났으니 이제는 모란이 오기까지 십삼 일 남짓 남았다.

‘영영 세가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연이 덤덤하게 생각했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적어도 다른 곳에 가 정착해 살다가 한위나 연오에게나 슬쩍 어디에 사는지 알리면……. 하지만 이내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이었다. 가출하는 것과, 당당하게 선언하고 나가는 것, 그리고 이리 죄인 취급 받아 내쫓기는 것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간 누워 있었던지라 몸이 찌뿌둥하였다. 객실의 창을 열어 지켜보니 이따금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찾아다니는 게 분명했다. 연오나 한위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곧 창을 닫았다.

하염없이 방을 돌아다니던 연의 눈에 문득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자개장 밖으로 약간 삐져나온 붉은 자락이었다. 모란이 언제 붉은 옷을 입고 다녔나 하여 자개장을 열어 보니 눈에 익은 옷이 흘러나왔다. 붉은 빛깔의 고운 비단옷. 연이 비슬비슬 웃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나.”

모란이 여장을 했던 건 언제 떠올려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비단옷을 다시 개어 자개장 안에 넣다가 연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화정당에 생매장되어 있던 자들. 아무리 녹림십오채 도적이라고는 해도……. 연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란에게는 선이 없다.’

사부님의 말이 맞았다. 정말 모란에게는 선이 없는 것이다.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아주 없는 것과 그냥 없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나 있겠나 싶었다. 아니, 있긴 있으나 그 선이 연 한정으로만 통용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연은 사부님도 언젠간 모란이 좋은 자란 걸 알아주리라 부질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한데 모란이 저지른 이 사건이 연을 위한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연은 모란을 비난하고 싶어졌다가도 또 다음 순간에는 금방 마음 한쪽이 물러져 버리곤 했다.

그러니 모란을 보고 싶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보기 싫어지는 것이다. 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벌써부터 알 수 있었다. ……제가 결코 모란에게 매정해질 수 없다는 걸.

“또 무엇을 숨기고 있었을까.”

모란이 숨긴 게 과연 화정당 생매장 사건뿐일까? 연은 그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모란을 대면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연은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여나 감당 못 할 게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모란이 그렇게까지 악질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번갈아서 들었다.

‘나는 모란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구나.’

그러고 보면 창연각 사건 때도, 녹림십오채 사건 때도 사건 이후의 일은 한 번도 모란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 하고 그냥 내버려 둔 것이 몇 번인가. 여태껏 보고 싶은 것만 봤던 것은 아닐까, 한동안 그리 앉아 있다가 연이 자개장 문을 닫았다.

저녁이 되자 주루에서는 고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연은 떠들썩하게 손님들이 웃는 소리와 비파 소리를 들으며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쨌든 이대로 주루에서 모란을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라, 연은 그리 생각했다. 하나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이틀을 주루에서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나고도 기녀가 떠나지 않았다. 연이 의아하게 보았더니 그녀가 공손하게 말해 왔다.

“오전에 하오문의 문주님께서 연 공자님을 뵙고자 하는데, 시간 괜찮으신지요?”

“……하오문의 문주님, 말입니까?”

“예.”

하오문의 문주가 왜 저를 보려고 하나 놀라서 연이 눈을 깜박였다. 공손하게 물어 왔다지만 실은 통보에 가까웠다. 지금 시간이 괜찮다 못해 넘쳐 나는 건 기녀도 연도 잘 알고 있었다. 연이 그러마 고개를 끄덕이자 기녀가 곧 모셔 오겠다 했다.

하오문의 문주는 연이 세수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난 뒤에 도착했다. 세간에 하오문의 문주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연은 내심 궁금했다. 그리고 약간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무리 봐도 점소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딜 가나 있을 법한 인상이었다. 속내와는 다르게 일단 연이 침착하게 인사했다.

“하오문의 문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남궁연입니다.”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하오문의 문주입니다. 그저 위정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문주씩이나 되면서 위정이 연을 대하는 태도가 정중했다. 실례인 건 알지만 연은 하오문의 위정을 빤히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점소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가 없었고, 십 대인가 싶으면 삼십 대인가 싶기도 했다. 얼굴도 별 특성이 없어 서너 번은 보아야 생김새를 익힐 수 있을 듯했다.

“저를 뵙고자 하셨다고요.”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감사의 인사? 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하오문 문주를 이 자리에서 처음 봤다. 문주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할 만한 일이 있던가?

“하오문 소속 문도가 연 공자님에게서 도움을 받았지요. 문도의 은혜는 곧 문주인 제가 입은 은혜이기도 합니다.”

“하오문 소속 문도 말입니까?”

“남궁한위 공자의 유모 말입니다.”

그제야 연이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한위의 유모가 하오문 소속이였다. 유모가 크게 앓았을 때 치료해 준 적이 있었지. 하도 예전에 있던 일이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오문 문주 위정이 미소 지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난번 한위의 유모에게 받았던 패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어느 자이든 하오문 문도가 입은 은혜는 하오문 전체가 입은 은혜. 이 패를 차고 다니는 한 어디서든 하오문 문도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오문은 점소이, 기녀, 장사꾼 등 평상시에 자주 보며 또 그만큼 스쳐 지나가기 쉬운 평범한 일반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는 귀와 눈이다. 또한 그들은 큰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 하오문 문도만이 알아볼 수 있는 패를 선물로 내어 주고는 했다.

정작 은인은 패가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지만, 하오문 문도만은 패를 알아보고 알게 모르게 도와주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록이 허리에 그 패를 그리 달고 있었구나, 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또한 다른 문도들도 대가 없이 치료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공자님을 돕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감사하게 패를 받으려던 연이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시치미를 떼려고 했으나 문주는 이미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공자님이 바로 화타의 환생이자 편작의 후계자이시지요?”

저놈의 화타니 편작이니 하는 호칭……. 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가. 연의 귀가 부끄러움에 벌겋게 물들었다. 그는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그러나 하오문 문주의 얼굴을 보니 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잘못, 아신 듯합니다…….”

“이미 문도 한 명을 치료해 준 적이 있으시고, 연 공자님을 지극히 아끼시는 루주 모란과 함께 다니는 백면공자(白面公子)라 하면 그 의원의 정체를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문주 위정, 최선을 다해 공자님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연의 얼굴은 그만 벌겋게 익어 버리고 말았다. 환자들을 치료하며 한 번도 대가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인사를 받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또 마음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것이었다. 위정은 연의 반응을 즐겁게 바라보고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지금 제가 이리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궁사영이 근시일 내로 이곳 주루와 모란 님의 상단을 들쑤실 듯합니다. 모란 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이곳을 잠시 떠나 계시는 게 어떻습니까? 안전한 장소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연이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옥에 갇혀 있을 때 한 말 때문인지 남궁사영이 유독 끈질기게 자신을 찾아다니는 듯했으니. 기녀를 불러오며 위정이 물었다.

“공자님이 이곳으로 오신 길이 어찌 되십니까? 흔적을 지워 놓겠습니다.”

이곳으로 온 길이…… 어찌 되냐면. 연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전에 모란이 순간이동이 공간과 공간을 접니 어쩌니 한 건 기억나지만, 그걸 하오문 문주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 길은 괜찮습니다. 모란이 알려 준 길이라 아무런 흔적도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아봐야겠군요. 일단 안휘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안휘성을 빠져나갈 때는 아무래도 변장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정이 손짓하자 기녀들이 산더미 같은 옷과 분장 도구로 보이는 물품들을 가져왔다. 위정은 점소이의 옷을 연에게 대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상인, 농부, 거지, 무사 등 온갖 복장을 다 대 보았으나 난감한 표정만이 서릴 뿐이었다.

“문주님, 하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역시 인피면구를 써야 하나……. 하지만 인피면구는 손으로 만져 보면 너무 티가 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거친 옷도 안 어울리고, 귀한 옷은 더욱이 안 될 테니.”

특이하게도 위정은 그저 문도일 뿐인 기녀에게도 공손한 말투를 사용했다. 굳이 연이 은인이라 그런 말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기녀와 위정이 머리를 맞대고 골몰하는 동안 연의 시선이 문득 자개장으로 향했다. 아까 그 붉은 비단 옷…….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어 연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장은, 어떻습니까? 남자만을 찾고 있을 테니 눈에 뜨이지도 않을 테고.”

연의 제안에 위정과 기녀가 눈을 빛냈다. 곧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자님의 얼굴은 선이 곱고 귀티가 나시니 여인의 차림새도 잘 어울릴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장으로 하도록 하죠.”

전이라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이래서 경험이란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한 가문의 여식으로 꾸미자고 하오문 문주와 기녀가 신나서 떠들어 대는 걸 들으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기녀 여럿이 치장을 도우러 우르르 몰려들자 열기는 한층 더해졌다.

“문 대감 여식의 시중을 들던 아이가 있습니다. 이런 일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나풀거리는 푸른 상의를 대어 보며 기녀가 의견을 냈다. 그사이 다른 기녀는 연의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고운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반질거리는 향유를 발라 곱게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잘그락거리는 장신구들도 대어 보았다. 귀한 가문의 공자를 여식으로 꾸민다는 건 기녀들에게 일종의 여흥으로까지 보였다.

연은 오랜 시간 동안 꾸며졌다. 보드랍고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걸치고 허리는 바싹 졸라매었다. 아교로 그럴싸하게 잘 붙여진 귀걸이가 귀에서 잘그락거렸고 고급스러운 비녀가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 꽂혔다. 분내 나는 화장까지 한 뒤에야 치장이 끝났다.

긴가민가하여 거울을 들여다본 연의 얼굴이 또 벌겋게 익었다. 거울 속에는 제법 가녀리고 앳되어 보이는 여식이 있었다. 연 본래 나이보다 세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연은 신기하여 한참을 거울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그리고 가슴……. 여인들 것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은 어찌했는지 민망하여 보지도 못했다. 무언가 덩어리진 것을 넣은 것 같긴 했는데. 여장하고도 뻔뻔했던 모란의 태도를 떠올렸으나 연은 가슴에 무얼 넣고는 차마 그리 굴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얼굴이 은근하게 비치는 면사포를 썼다.

“완전히 얼굴을 가리면 그것이 더 수상해 보이는 법이지요. 오히려 은은하게 보이는 것이 의심을 피하기에 좋습니다.”

연을 꾸미는 일에 위정이 제일 신난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점소이에서 지긋하게 나이 든 유모로 변했다. 역용술(易容術)*이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주루 뒷문으로 나오자 말 한 필과 마부, 그리고 무사가 있었다. 일견 평범해 보였으나 그 평범해 보이는 이들 모두가 하오문의 문도였다. 그러니 구파일방 오대세가라 할지라도 하오문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 하오문의 눈과 귀가 있을지 모르니.

연은 훌쩍 말 위에 올랐다. 고삐를 쥐려다가 위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고는 머쓱하게 가지런히 앉았다. 고삐는 마부가 대신 쥐었다. 연은 잠시간 발 아래로 늘어져 나풀거리는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옷은 부드러워 기분이 좋으면서도 퍽 묘했다.

“목소리는 어찌하지 못하니 가능한 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일이 생겨도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부가 이랴,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끌었다. 위정과 하오문 문도는 각각 유모와 시비인 것처럼 뒤를 따랐다. 거리로 나오자 슬슬 긴장이 되었다. 혹여나 남자인 것이 티가 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흘끔거리며 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말이 다가닥다가닥 느리게 걸을 때마다 면사포와 옷자락이 하느작거리며 움직였다. 귀한 댁 여식이 탔다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연 일행을 보자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마침내 안휘성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는 연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마치 매와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남자의 얼굴을 유독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따라붙어 한 명 한 명 얼굴을 만져 대기도 했다. 만약 연이 점소이나 상인으로 변장하거나 인피면구를 썼다면 걸렸을 게 분명했다. 연이 탄 말이 그들을 지나갈 때였다.

“잠시만.”

무사가 세울 때 연의 몸이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말이 멈추자 무사가 다가오려 했으나 위정이 바로 나섰다. 영락없는 귀한 여식 모시는 유모 모양새로 사납게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연이 내심 놀랐다. 주루에서 들은 위정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던 것이다. 무사는 움찔하면서도 자세히 일행을 살폈다. 마부나 무사의 얼굴을 뜯어보고는, 이내 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수상한 자가 있나 잠시 살펴보려는 것뿐이오.”

그런데 수상한 자 이야기를 하면서 무사가 유독 연을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연이 몰래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위정이 벌컥 화를 냈다.

“수상한 자? 지금 우리 아씨가 수상한 자란 말이오?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이신 줄 알고 어느 안전에!”

“아니, 그게 이번에 남궁세가에서 중죄인이 탈옥하여…….”

“남궁세가에서 죄인이 탈옥하든 말든! 그게 우리 아씨 나들이 길 막은 것과 무슨 상관이오?”

호위무사로 분한 하오문 문도가 검에 손을 얹으며 다가오자 남궁세가 무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세가의 명에 따라 안휘성을 나가는 사람들을 샅샅이 살펴보는 중이긴 하나, 어느 지체 높은 분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위정이 눈을 세모꼴로 뜨자 그 사나움에 무사가 혀를 내둘렀다.

“혹시나 하여 살펴보았을 뿐이니, 지나가도록 하시오!”

말하면서도 무사가 연을 힐끔거렸다. 면사포에 반쯤 가려지긴 했어도 참으로 아름다운 미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귀한 자태며 비싼 장신구를 보니 아무리 봐도 고관 댁 아씨인 것 같았다. 오늘 그가 본 사람들 중 탈옥한 차남, 남궁연과는 가장 거리가 멀었기에 무사는 의심 없이 보내 주었다.

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들키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좋은데, 여장을 한 상태로 들키는 건……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다.

말은 저 멀리 보이는 황산을 끼고 한참을 걸어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쯤에 그들은 안휘성에서 벗어났다. 그런 뒤에도 일행은 숲속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들어갔다. 한참이나 그렇게 들어간 뒤 연의 눈에 어른거리는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근처에 다다르자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삼옥이 문주님을 뵙습니다.”

무심코 위정을 돌아본 연이 놀랐다. 어느새 위정은 유모의 모습을 집어던지고 이번에는 제법 나이 든 무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위정의 본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이 말에서 내리자 위정이 빙그레 웃었다.

“이 마을은 하오문 문도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니, 모란 루주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이것을.”

위정이 내놓은 것은 검과 침구 따위의 치료 도구였다. 검도 검이었지만 침구를 받자 연은 감동을 받았다. 당분간 치료 도구를 손에 잡기란 힘든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오늘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연이 포권지례를 하자 위정 역시 포권지례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하오문이 입은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위정은 다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같이 온 일행들과 함께 돌아갔다. 연은 잠시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삼옥이란 자를 따라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은 작았지만 그럼에도 우물이나 마굿간 등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삼옥은 정중하게 연을 한 초가집으로 안내했다. 초가집이라고는 해도 안은 매우 아늑했다. 따뜻하게 불이 지펴져 있었으며 좀 낡았지만 푹신한 이불도 깔려 있었다.

“언제든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 주십시오, 아씨.”

아, 아씨……. 오늘 하루 종일 이 차림새에 익숙해져서 연은 그만 제 옷차림을 깜박하고 있었다. 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삼옥에게 말했다.

“연이라 불러 주십시오. 또한 사정이 있어서 여장을 했을 뿐 여인은 아닙니다. 남자가 입을 옷을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아? 네, 어. 그, 그렇군요.”

당황한 삼옥은 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가 문주님의 손님에게 실례라는 걸 깨닫고는 더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삼옥이 남자 옷을 가지러 간 사이 연은 가슴에 넣은 덩어리를 빼내었다. 천으로 돌돌 만 감 두 개였다. 그가 얌전히 오늘 열심히 역할을 수행한 감 두 개를 한쪽에 내려 두었다.

연은 삼옥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장신구들을 빼냈다. 얼굴에 발랐던 분도 지우고 머리도 단정히 하고 나자 피곤이 몰려들었다. 오늘 꽤나 긴장한 데다가 오래 말을 타고 온 탓이었다.

삼옥이 저녁을 가져다주기도 전에 연은 침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여장을 한 탓인지 꿈속에서 연은 여자가 되어 연오를 오라버니라 부르고 한위가 저를 누이라고 부르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난 연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자가 된 꿈은, 괜찮다. 하지만 왜 꿈의 끝이 모란과 이런저런 음란한 짓을 하는 것으로 끝난단 말인가? 아무리 꿈속이라 하여도 참으로 염치도 없는 자라 연이 생각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문을 여니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그런데도 피로가 미처 다 풀리지 않았다. 연은 제 몸이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화정당에 있지 않은 탓이겠지. 모란이 올 때까지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삼옥이 두고 간 아침 소반을 들이며 연이 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모란이 오기까지는 열흘 정도가 남았지만…….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안 좋으니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아침을 다 먹자 마침 삼옥이 찾아왔다. 정말 사내였다니! 하는 게 분명한 눈빛으로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귀를 조금 붉히며 조용히 아침 소반을 들고 나가려는 삼옥을 불렀다.

“혹여나 마을에 아픈 이는 없습니까? 부족하나마 의술을 알고 있으니 이로 보답하려 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문주님 손님이시지 않습니까. 보답이라니요.”

그리 사양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삼옥이 기대하는 얼굴로 슬쩍 눈치를 살폈다. 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이 조용한 산골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연이 이따금 이런저런 마을에 정착하여 의원을 차려야지 하며 상상하곤 하던 곳과 비슷했다.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니 크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연의 말에도 눈치를 보다가 삼옥이 얼른 나가더니 누군가를 데려왔다. 코를 훌쩍거리는 아이였다.

가벼운 감기인지라 산에서 구하기 쉬운 약초로 탕약을 지어 주니 반색한 삼옥이 다시 뛰어나갔다. 돌아올 때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의원이란 아무래도 일반 백성으로서는 쉬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산속이라면 더욱 그렇다. 연은 그날을 하루 종일 사람들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데 썼다. 다시 사람들을 치료하니 잠시간 몸이 힘들고 피곤한 것도 잊을 정도였다. 시간도 빨리 가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나절이었다.

치료해 주는 행위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연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눈에 띄게 낫는 이들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평소에 바라던 삶이 아니던가. 자신을 많이 걱정하고 있을 연오와 한위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연은 이대로 계속 여기서 머무르며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해도 좋겠다 생각했다. 점차 피곤한 정도가 늘어났으나 이 정도라면 열흘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란이 돌아오기까지 칠 일 정도가 남았을 때, 연은 환자를 치료하다가 무언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소리는 연만 들었는지 환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지? 어딘가 불길한 소리였는데.’

의아하게 여기며 맥을 짚기 위해 다시 손을 내민 다음 순간, 연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숨이 콱 조이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가해졌다. 심한 내상이 연을 덮쳐 왔다. 입을 열자 쏟아지는 건 붉은 피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입어 본 중 가장 심각한 부상이었다.

“쿨럭, 헉, 컥…….”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의원님!”

연은 괜찮다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마치 몸속 장기가 끊어지는 것 같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진찰을 받던 환자가 놀라 사람을 부르기 위해 뛰쳐나가는 걸 보며 연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삼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자 느껴지는 고통이 지독해 연이 신음했다. 왜 갑자기 이런 내상을 입었는가, 생각해 보니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예전에 녹림십오채에게 잡혔을 적 모란이 화정당에 있는 마법진의 반작용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화정당의, 그 마법진이…….’

어떤 식으로든 손상된 게 아닐까, 그래서 반작용이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삼옥이 얼른 연을 부축했다.

“연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피를 어찌나 토하시는지…….”

연 의원님. 그 명칭을 곱씹어 보다가 연이 겨우 웃었다. 괜찮지 않다. 사실 진찰을 하기 전부터 벌써 무언가를 예감한 가슴이 선득했었다. 등골에서는 식은땀이 쏟아지고 내장은 온통 뒤틀리는 듯했으나 연은 그 모든 걸 그대로 삼켜 냈다.

“괜찮습니다. 지병이, 있어서……. 하루 푹 쉬면 나을 것입니다.”

“정말 괜찮으신 것이지요? 안색이 무척 좋지 않습니다.”

삼옥은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물어보고는 대답을 들은 뒤에야 물러났다. 삼옥이 간 뒤 연은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

연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몇 번이고 제 몸을 살펴보고는 스륵 벽에 기대었다. 절망스러운 감정이 그의 눈꺼풀을 짓눌렀다.

마치 거대한 힘에 후려쳐진 듯 그의 몸 안은 온통 진탕이 되어 있었다. 장기 중 일부는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오래 앓고서라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연의 몸은 열 살 때 크게 앓고 난 이래로 가장 좋지 않았다.

잠시 후 연은 냉철하게 판단을 내렸다. 입술이 떨렸다.

‘길어 봤자 며칠이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화정당 마법진이 깨어진 반작용 때문에 몸이 이리된 것이리라. 일순간 모란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모든 게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로 여겨졌다.

원인을 따지고 또 따지고 들다 보면 열 살, 모란의 영영화를 건드려 깨트린 바로 그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번잡하게 들끓던 머릿속이 일순간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연의 눈이 침잠했다.

‘언제는 길게 살 것이라 생각했던가.’

어렸을 적부터 피를 토하고 기절하고 크게 앓을 때마다 연은 항상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은 언제나 그의 곁에 머무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다. 모란을 만나고 나서는 그래도 이제 완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겨우 건강해졌다가 도로 빼앗기니 드는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이제는 자신이 가진 것들이 많아서……. 그가 아끼는 사람들의 얼굴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완치라.”

연이 웃고 말았다. 모란이 제게 숨겼던 것 중 하나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혹여 자신은 완치가 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모란은 화정당에 사람을 생매장까지 해 가며 제게 생기를 보내는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그러지 않는다면 연의 몸이 부지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란이 곁에 있을 때는 겨우 수명을 유지하다가 그가 떠난 뒤에는 이리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웃음은 떨리는 입꼬리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완치는 불가능하다. 완치는커녕 이대로라면 죽는다. 의원이니만큼 연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맥들이 있다. 그 맥의 흐름이 끊겼다. 기혈이 뒤엉켜 설사 화타나 편작이 직접 온다 해도 살려 낼 수 없을 내상이다. 연은 모란과 만난 후로는 한 번도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 근처에 왔음을 알았다. 연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모란…….”

그는 정말이지 연에게 잔인한 일을 하였다. 화정당에 숨겨 두었던 마법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연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를 주고, 완전히 나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약조를 주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괜찮았던 연의 곁에 끈질기게 머무르며 연인이 되어 주겠다 하였고 세상에서 그가 가장 소중하다는 듯이 대해 주지 않았나. 그래서 이렇게, 정말로 죽기 싫다 생각하게 만들었다.

“죽기 싫어, 정말로…….”

모란이 곁에 있었더라면, 하고 중얼거리다가 연이 고개를 저었다. 모란, 모란, 모란. 거세게 기침하자 속에서 후끈한 것이 올라왔다.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연이 소매로 바닥의 피를 문질러 닦아 보았다. 두려움으로 손끝이 떨렸다.

“한심하구나…….”

중얼거리다가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왕장호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눈을 감았던 걸 떠올렸다. 죽는 게 어쩔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방식 정도는 그가 정할 수 있었다.

그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리라. 죽기 직전까지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행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 마음을 먹는 연의 눈동자에 얼핏 금빛 광채가 희미하게 머무르다 사라졌다. 연은 다시 한차례 피를 토하고는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정신을 차렸을 때 몸 상태는 한층 악화가 되어 있었다. 겨우 일어난 연은 하루 종일 말없이 앉아 있다가 사부님에게 드릴 서찰을 작성했다. 그를 쓰는 것에만 해가 지도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오와 한위에게 줄 서찰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차마 무어라 쓸 말이 없어서 종이만 버렸다.

모란에게는 무엇이라도 써 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힘없이 붓을 내려 두었다.

둘째 날에 연은 겨우 일어나 여섯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어찌 앉을 수는 있어 속으로 올라오는 피를 삼켜 내며 치료했다. 이따금 속이 끊어질 것같이 아팠으나 그럴 때에는 진통 역할을 하는 약초를 삼켰다. 어차피 망가진 몸이니 망설임은 없었다. 여섯의 환자를 보고 난 뒤 그는 까무러치듯 침상에 누웠다.

다시 깨어난 뒤 연은 반사적으로 곁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셋째 날, 그는 세 명의 환자를 진찰했다. 진맥을 하는데 환자가 소스라치게 놀라기에, 제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걸 알았다. 현기증이 심하게 돌아 네 번째 환자는 돌려보내고 말았다. 컥컥 붉은 피를 토하면서 연이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넷째 날, 연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고열을 내며 앓았다. 아파서 신음하다가 진통 역할을 하는 환약을 씹어 먹고는 한참을 이불만 움켜쥐었다.

다섯 째 날, 혼몽한 채로 눈을 뜨니 위정이 어두운 얼굴로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 공자.”

연은 숨을 헐떡거렸다. 문주님, 하고 부르고는 올라오는 피를 꿀꺽 삼켰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다가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여섯째 날에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연은 제 숨이 천천히 멎어 간다는 걸 깨달았다. 위정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이 천천히 떠올렸다. 주강, 연오와 한위…… 은록을. 그리고 모란을. 죽기 직전에는 고통조차 둔중하게 멎어 있었다. 모란, 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아는 연의 눈가로 눈물이 느리게 흘렀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그 조금을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연의 시선이 다시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며 그가 그리던 사람이 일찍 나타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까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연은 눈꺼풀을 떨며 마침내 눈을 감았다.

심장이 느리게 멎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흐르던 시간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채로, 연은 죽음 속에서 칠 일째 되는 날을 맞이했다.

***

모란은 어떤 존재를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시키는 방법 수십 가지를 알았다. 영원히 불타오르는 잉걸불, 가리지 않고 죄다 먹어 치우는 끔찍한 아귀, 심장과 머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산 채로 상대를 사지 끝부터 먹어 치우는 저주, 불타는 운석을 떨어트리고 생명을 얻은 대지가 아가리를 벌려 상대를 집어삼키게 만드는 마법.

모란은 그 모든 걸 이곳에 불러내 산지옥을 만들면 어떨까 잠시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이 연이 평생을 살아온 곳이라는 사실이 겨우 모란의 이성을 붙들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연이 있는 곳을 네게 알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창일당을 한 번에 부수어 버린 고수 앞에서도 각오를 단단히 한 연오의 대답을 들을 적에 모란은 잠시 짜증이 났다가, 곧장 깨달았다. 마법진이 손상된 것도 모자라 단전 파괴형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살벌하게 들끓었던 머릿속이 잠시 차분해졌다.

‘단전 파괴형을 받았다면 목걸이가 작동했을 터다.’

괜히 목걸이를 걸어 주고 간 게 아니다. 위급한 상황에 연을 안전한 곳에 두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목걸이었다. 일회용이기는 하나 기능은 완벽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단전 파괴형을 받았든, 혹은 연 스스로가 위기를 인지하고 사용했든 아무튼 그는 지금 주루에 가 있을 터였다. 한순간 눈에 뵈는 것 없이 막 나갈 뻔했던 모란이 남궁세가고 뭐고 뒤로한 채 서둘러 순간이동을 했다.

“연아?”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주루에는 연이 없었다. 모란의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하게 식었다. 연이 없는 걸 확인할 때마다 명치가 조여들었다.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엄습해 왔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마력 탐지로 근처에 연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로는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파괴된 반작용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파괴되었느냐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쩌다가 마법진이 들통나게 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파괴하였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가능한 연을 빨리 찾아내야 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고작 이십 일을 비웠을 뿐인데. 객실을 뛰쳐나와 일 층으로 뛰어 내려가니 지나가던 기녀가 있었다. 마침 하오문 문도였다.

“루주님, 돌아오셨…….”

반갑게 말을 걸던 기녀가 얼어붙었다. 루주님의 눈이 좀…… 하고 생각한 뒤로는 기녀의 의식이 침잠하였다. 모란이 비틀거리는 기녀를 잡아 세웠다. 그의 눈에서 사나운 금빛 광채가 번득였다.

“연이는?”

모란의 질문에 기녀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 어디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이지가 없었다.

“며칠 전…… 오셨다가…… 남궁사영의 추적으로, 문주님과 함께…….”

“함께 어디로?”

“황산, 북쪽 기슭, 계곡을 지나면 있는 하오문 분파…….”

그 정도만 들어도 충분했다. 손을 놓자 기녀가 스르륵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아마 몇 분 뒤에야 정신을 되찾을 것이다.

모란은 바로 황산으로 이동했다. 과연 황산 북쪽에 깊은 계곡 하나가 있었다. 하오문의 분파를 찾는 건 쉬웠다. 곧장 마을로 간 모란은 멈칫했다. 마을이 이상하게 조용하였다. 다시금 불안한 기분이 등골을 덮었다.

모란이 곧장 근처를 마력으로 덮었다. 이내 그의 발걸음이 한쪽으로 향했다. 어느 초가집이었다. 하오문 문도 몇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 하오문 문도들이 놀랐다.

“웬 놈이냐!”

그들이 막아서려는 것을 모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삼옥이 얼른 제지했다. 모란은 그들을 헤치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문을 열었다. 연이 누워 있었다. 불쾌한 고요함이 연의 몸에 드리워져 있었다. 모란의 귓가에서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모란은 알 수 있었다. 연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의 눈에는 단번에 보였다. 당황한 얼굴의 위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얼굴이 굳은 모란이 명령했다.

“나가.”

눈을 잠깐 크게 떴던 위정이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모란의 등 뒤에서 문이 쾅 닫혔다. 그는 누워 있는 연의 앞에 천천히 앉았다. 얼굴이 핏기 없이 매우 희고 창백했다. 몇 달 동안 모란이 돌보며 차근차근 채워 갔던 본원지기가 죄다 달아나고 없었다. 한 줌. 아니, 한 줌도 아니다. 한 방울 정도만이 남아 아주 가느다란 숨이 이어질 뿐.

심장이 거의 멎었는데도 연이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오로지 모란이 뜯어 건네준 근원 조각 덕분이다. 아니, 이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다. 겨우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있었다. 연의 혼은 이미 영면(永眠)에 한 자락 걸쳐져 서서히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모란은 일순간 멍하여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섰다. 악문 잇새 사이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연…….”

우두커니 선 모란의 눈에 순식간에 영영화가 어렸다. 금빛 꽃잎이 불규칙하게 어그러지며 공멸하다 동공을 까마득한 빛으로 채웠다. 붉은 점이 아슬아슬하게 일렁였다. 사방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온갖 것을 갉아 대면 이런 소리가 날까. 모란과 연을 제외한 사방에 붉고 얇은 선이 죽죽 그어졌다. 그러더니 불길한 소리를 내며 쩍 벌어졌다……. 모란의 검지에서 핑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금빛 고리가 요란하게 요동쳤다.

소중히 쌓아 올렸던 것이 그 잠시 사이에 망가져 있는 걸 눈에 담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으스러트릴까, 가루를 낼까, 끝없이 갉아 먹히는 지옥에 던져 넣을까.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지. 안휘성을 통째로 무간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게는 목숨을 구걸할 수 있는 자비조차 주어지지 않으리라…….

붉은 선들이 소름 끼치는 모양새로 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모란이 손짓만 한다면 천리만리 퍼져 나갈 것이리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란의 동공이 훅 원래의 검은빛으로 거꾸러졌다. 언제 붉고 불길한 선이 그어지고 난잡하게 갉는 소리가 났냐는 듯 사방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을 감았다 뜬 그가 겨우 발걸음을 옮겨 연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연의 이마에 닿으려다 움츠러들었다. 모란이 길게 숨을 뱉었다.

“연아.”

모란의 목소리는 일견 무덤덤했다. 몸을 숙여 파랗게 질린 입술을 머금었다. 길게 숨을 불어 넣어 주니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어제 죽은 몸이다. 모란이 제 혼을 거두어 가면 이 몸에서는 완전히 핏기가 가시는 것이다.

“완치해 주겠다 하였지.”

그리 말하며 모란이 다시 숨을 불어 넣었다. 본원지기가 흘러 들어가자 심장이 두 번 크게 뛰었다. 그러나 입술의 온기는 여전히 망자의 것이었다. 그 입술을 핥으며 모란이 중얼거렸다.

“혹여 그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였어?”

그가 입꼬리로만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리 실리낙스의 눈이 있다 한들, 몸이 이런 상태이니 의미가 없었다. 이미 죽음의 강에 한 발 디딘 혼을 건져 내오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불가능에 가까웠지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모란은 무엇이든 부수어 없애고 싶다가도, 연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가지 않도록 감싸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또한 죽음이라는 무형의 존재를 향해 적개심과 살기를 품었다.

이렇게 쉬이 보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모란이 천천히 제 감정을 곱씹었다. 그동안 내내 금방 죽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한 몸을 붙들고, 갈라진 혼을 억지로 꿰매고 이어 붙였다. 그럼에도 부족해 사람 몇십 명을 땅에 파묻었고 안전하게 지켜 줄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제 근원 조각과 본원지기를 내주었다. 그럼에도 모자라고 또 모자라 수명을 연장해 줄 것을 구해 차원을 넘었다.

그렇게 공을 들이고 애를 썼는데. 한데 이리 죽어 버린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짐짓 다정하게 연의 이마를 쓸어 보았다. 손길과는 달리 모란의 눈 속에서는 금색 고리로 이루어진 꽃이 만개했다 사납게 져 버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고작 이런 것으로 연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모란은 제 안에서 무수한 것들이 날뛰는 것을 느꼈다. 과보호나 과거의 일에 대한 책임감 따위는 아니었다. 도리어 집착이나 소유욕에 가까운 것이다. 놓아야 하는 것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근원 찢어진 정도로는 죽지 않는 것을.”

모란이 제가 입은 옷을 헤쳤다.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가슴과 복부가 드러났다. 중지와 검지가 가슴골을 타고 내려와 명치보다 좀 더 아래, 어느 부분을 더듬었다. 꾹 누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손끝이 칼처럼 날카롭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피가 흘러내렸다. 입은 옷과 이불을 적시고 그도 모자라 창백한 연의 얼굴에도 튀었다.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텐데도 모란은 제 속을 헤집는 걸 멈추지 않았다. 원하는 걸 찾아 움켜쥐어 잡아 뺄 때서야 악문 잇새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살짝 샜다. 잠시 후 피에 젖은 모란의 손에 금빛으로 빛나는 구슬이 걸려 나왔다.

짐승들 중 특별난 것이 영물이 되듯이, 모란은 인간들 중 특별난 것이다. 그러니 영물에게도 있는 내단이 모란에게는 왜 없겠는가. 구슬이 완전히 몸에서 뽑혀 나왔을 때 모란의 눈에서 빛나던 금빛의 고리도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모란은 연의 입을 벌려 구슬을 흘려 넣었다. 모란의 손가락에 차가운 혀가 눌렸다. 구슬이 그대로 미끄러져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모란은 연의 육신이 무의식중에 제 가장 귀한 것을 삼키는 것을 눈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내단을 삼킨 지 얼마 안 되어 연의 혼은 강제로 영면에서 끌어 올려졌다. 심장이 힘차게 쿵쿵 뛰기 시작하더니 이내 입술과 손끝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벌어진 연의 입에 반 마디쯤 잠긴 모란의 손가락에도 따스한 숨결이 감겼다. 마법진이 반파된 영향으로 입었던 심각한 내상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이어 모란은 아공간에서 실리낙스의 눈을 꺼냈다. 평소에는 숨 쉬듯이 열던 것이 아공간인데도, 내단이 강제로 제거되어 큰 타격을 입은 상태라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내렸다. 하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실리낙스의 눈은 오묘하게 빛났다. 마치 구인가 하면 육면체로 보이기도 했고, 혹은 반딧불이 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희게 빛나는가 하면 어느새 어둑어둑하였다. 모란이 손에 들어 올리자 실리낙스의 눈에서 흘러나온 빛줄기가 손목과 손가락에 감겼다. 모란은 실리낙스의 눈을 연의 오른쪽 눈꺼풀 위에 올렸다. 곧장 녹듯이 실리낙스의 눈이 스며들었다.

모란의 내단은 육신을 만들고, 실리낙스의 눈은 찢겨졌던 혼을 완벽히 할 뿐만 아니라 더 단단하고 아름답게 빛나게 만든다. 하나 이 모든 것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 고통으로 인해 강제로 깨어난 연의 눈과 입이 열렸다. 힘이 없어 새는 듯한 비명을 지르기에 모란이 몸을 숙이며 이름을 불렀다.

“연아…….”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 연이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가 선명하다 못해 말간 금빛에 잠겨 있었다. 아득하게 저를 보는 시선을 보며 모란이 웃었다. 혼이며 육신이며 온통 제가 준 것들로 이루어진 연이 얼마나 어여쁘고 사랑스럽던지, 입을 맞추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죽음 따위가, 널 내게서 뺏어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는 온기가 도는 입술을 베어 물자 연의 금빛 눈동자에 고인 물기가 눈꼬리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모란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결코 연은 제 앞에서 죽지는 못할 것이라. 연의 목숨은 언제든 반드시 제 손에 쥐여져 있어야만 했다. 모란의 마음속에서 극단적인 소유욕이 치솟았다. 연의 육신이나 목숨, 혼까지도 죄다 그에게 속해 있어야 하는 것을…….

몇 번 눈꺼풀을 떠는 것을 모란이 손을 뻗어 잠재웠다. 길게 숨을 뱉는 걸 보며 기침을 하자 후두둑 핏덩이가 떨어졌다. 오래도록 벌건 피를 뚝뚝 떨구며 기침을 한 모란은 한숨을 쉬며 연의 가슴께에 이마를 기댔다. 고통이 심해서가 아니다. 안도감이 깊었던 탓이다.

한참 만에서야 모란은 하마터면 잃어버리는 줄 알았지, 하고 질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내단이며 실리낙스의 혼이 있어도 일이 잘못 어긋나면 그르쳐 버리는 것이다. 따뜻한 연의 손을 쥐는 모란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떠나기 전에 준 근원 조각이 아니었다면 연은 정말로 죽었다. 아무리 모란이라도 완전히 죽은 자를 살려 내지는 못한다.

급한 불을 끄자 뒤늦게 모란의 마음속에서 다시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연이 제대로 살아 숨 쉬는 걸 본 덕에 아까처럼 앞뒤 안 가리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결코 얕은 분노도 아니었다. 마법진은 어지간해서는 발견도 되지 않고 깨어지지도 않는다. 연이 그랬을 리는 없으니 분명 남궁세가의 누군가가 그 지랄을 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모란은 속에서 몇 번이고 누군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죽인다……. 아니, 죽이는 것은 자비롭지.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모란이 이를 갈았다. 어느 잡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놈뿐만이 아니었다. 모란은 남궁세가도 매우 못마땅하였다. 사술? 사술이라 하였나? 그래, 사술이라 하여 그리 약한 애를 쥐 잡듯이 잡았단 말이지. 단전 파괴형이 어쩌고 어째?

신경을 안 쓰는 척했을 뿐이지, 모란에게는 남궁세가가 언제나 거슬리는 존재였다. 연이야 자신의 자업자득이라 하였으나 시비나 하인이나, 혹은 장로까지도 연을 향해 수런대는 게 모란에게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꽤 상태가 안 좋으니 일단은 미뤄 두기로 했다. 아이낙스와 거하게 한판 떴을 때나, 혹은 타마타모를 잡아 족쳤을 때조차 이렇게 몸 상태가 안 좋지는 않았다. 실은 벌써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모란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초가집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결계를 쳤다. 그러고는 쓰러지듯이 연의 곁에 누웠다. 그대로 기절하듯이 한참을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끙끙 앓는 소리에 모란이 다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던 모란은 다시 핏덩이를 토해 냈다.

“죽겠군…….”

마치 보통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눈앞이 핑 도는 탓에 미간을 누르며 일어난 모란이 연을 살폈다. 보통 영물의 내단이라면 제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높은 위험이 따른다. 짐승의 것이니 사람이 제 것으로 만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란의 내단이나 실리낙스의 눈은 달랐다. 일단 인간의 것이었으며, 실리낙스의 눈은 구하기가 실로 까다로워서 그렇지 혼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물이었다. 다만, 내단과 실리낙스의 눈을 제 것으로 만드는 데는 고통이 뒤따랐다.

모란은 연을 다시 강제로 잠재우고 저도 또 옆에서 잤다. 마법을 걸 만한 몸 상태가 아니라서 피를 몇 번 토하며 두어 번 이 과정을 반복하니 연은 더는 끙끙 앓으며 무의식중에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모란은 마음 놓고 몸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틀 밤낮을 꼬박 자고 나서야 모란은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연이 동면하는 짐승처럼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걸 한참을 보고 난 뒤 모란이 목덜미를 긁었다. 이백오십 년 만에 처음으로 머리가 멍하고 아팠다. 잠깐 미간을 찌푸리자 모란의 눈에 금빛 무언가가 깜박이듯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도 아주 잠시였다. 모란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이라도 좀 먹어야겠다.

문을 닫고 나오니 하오문 문도가 하나 문을 지키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문도가 모란을 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모란은 뒷덜미를 긁었다.

“먹을 것 좀 없나?”

“고,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곧 문도가 후다닥 음식이 담긴 소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소박하긴 해도 나름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었다. 모란은 털썩 앉아 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오문 문도는 공손하게 서 있다가 모란이 음식을 해치우는 속도에 한 번, 그리고 중간에 두어 번 피 섞인 기침을 하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잘 먹었어, 고마워.”

“저,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고 피도 토하시는데 의원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냐, 의원은 됐고.”

손을 내저은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계를 쳐 놓아 아무도 초가집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다녀오고 싶어 걸음이 빨라졌다. 원래라면 순간이동으로 갔겠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무리였다.

모란은 휘적휘적 걸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잠깐 또 피를 토했다가, 슥슥 소매로 닦았다. 계곡을 타고 들어간 그는 산세가 험한 곳에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원하던 걸 발견했다. 절벽 사이에 초록 잎이 바람 따라 한들거리고 있었다.

모란은 잠시 허리를 숙이고 또 피 섞인 기침을 했다. 피가 떨어진 흙이 까맣게 번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어렸다. 하지만 곧 어렵지 않게 절벽을 타고 올라가 원하던 걸 구해 내려왔다.

“이걸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라고 하던가?”

원래라면 이런 건 거들떠도 안 볼 텐데, 상태가 상태다 보니 급한 대로 이런 풀 쪼가리라도 필요했다. 모란은 마치 일반 삼이라도 씹듯이 무심하게 백년하수오를 아작아작 씹어 넘겼다. 다 먹고 난 뒤에는 그가 또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하수오처럼 좀 특별난 것들을 몇 개 발견해 그 자리에서 주워 먹으니 머리가 핑 도는 건 어느 정도 사라졌다. 물론 속은 여전히 아팠다. 하루 이틀로 회복될 만한 상처가 아니다. 다 아물기까지는 적어도 이삼 년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쯤 모란은 산에서 내려왔다. 초가집에 내려가 보니 결계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음식이 담긴 소반만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무엇이든 많이 먹어 두어야 회복이 좋기에 연의 몫까지 먹어 치우고 있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위정이 스륵 나타났다.

“모란 님.”

“위정.”

모란이 빈 소반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위정이 빙그레 웃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갚도록 하지.”

“모란 님과 연 공자님에게 입은 은혜가 큰 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오문의 문주 위정은 모란을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하오문의 기반은 많은 문도들에게서 수집하는 정보다. 때문에 하오문의 본진은 항상 정해진 곳이 없었다.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 머무르는 곳이 언제나 하오문의 본진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하오문은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안휘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죄다 하오문의 눈과 귀로 들어갔다. 백모란에 대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내가 나타나 도박판을 죄다 털어 버리고는 그 돈을 뿌리며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사들이고 있다 하니 하오문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하여 거지를 가장하여 접근하니 모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위정에게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위정은 넌지시 모란에게 하오문 문도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을 알려 주었다. 가령 어느 주루가 악덕 고리대금업자와 왈짜패들에게 시달려 헐값에 팔리고 기녀들은 창기로 넘겨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 하오문의 어느 분파가 무력이 아니면 해결 못 할 야비한 분쟁에 휘말린 것, 매일 밤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도 물어 죽이는 거대한 짐승 등등.

모란은 그 모든 것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자연히 위정은 모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모란도 위정이 필요했고, 위정도 모란이 필요했으니.

위정은 도무지 모란이란 자의 정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조사에 따르면 분명히 평범한 농부의 아들일 터였다. 나이도 고작 열여덟 정도에 지나지 않거늘. 그러나 도무지 그 나이 대의 범부라고는 보이지가 않았다.

시정잡배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오문이라고는 해도 위정도 한 문파의 문주이니만큼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하나 그런 그도 모란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백모란이라는 신분 자체가 교묘하게 만들어진 것이고 차라리 반로환동한 은거기인 고수가 나타났다고 보는 게 가능성이 높았다. 그조차 모란이 아기일 때부터 지켜봐 온 이웃들의 증언이 수두룩하니 믿기지가 않았지만.

그렇게 모란이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던 위정도 남궁세가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남궁세가를 공격했다고? 그로 인해 창일당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고?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 하여도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하늘에서 별을 떨굴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궁세가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고 수십 수백 명의 목격자가 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정은 초가집을 흘깃 보았다. 남궁연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던 날, 하오문 분파를 찾아온 위정은 연을 보고는 오늘내일한다는 걸 깨달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안색은 새파랗고 의식을 잃은 중에도 계속 벌건 피를 토해 내니 모를 리가 있나. 급히 불러온 의원조차도 고개를 저으며 며칠 내로 죽을 거라 선고하였다.

백모란을 아는 하오문 문도들이라면 그가 남궁연이라는 공자를 퍽 아낀다는 것을 모두 안다. 세상 무심하게 사는 백모란이었지만 유일하게 남궁연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입에 올리고, 주루의 이들에게 연 공자를 자신같이 대접하란 말을 단단히 하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따금 주루에 연 공자를 데려올 때면, 모란의 태도와 말도 평상시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렇기에 남궁연이 죽어 갈 때 위정은 등골이 차게 식었다. 백모란의 그 가공할 힘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숨을 뱉고 심장이 멈추었을 때는 안타까운 탄식이 나왔다. 연의 죽음이 안되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도 모란이 연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이 두려웠다.

모란에게 이를 어찌 전해 주어야 충격이 덜할까, 지금이라도 문도들을 대피시켜 놔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놀랍게도 연이 잠시 후 다시 끊어질 듯 말 듯 아주 가느다란 숨을 이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에는 차라리 미미한 안도감이나마 들었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일지라도 죽은 것과는 천지차이지 않겠는가.

한데 이상도 하지, 지금 백모란의 모습을 보니 꼭 남궁연이 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도무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의원의 말을 들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백모란의 분노가 하오문과 자신에게 향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였기에 죽지 않았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다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다시 살려 내는 자를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위정으로서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연 공자는 어떻습니까?”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는 괜찮아질 테지.”

목구멍으로 다시 울컥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모란이 말했다. 자신의 내단에 실리낙스의 눈까지 먹였으니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씨앗이 꽃을 피울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육신이며 혼이 완성될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에서 이번 일을 사파의 공격이라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정파연합에서 안휘성으로 고수들을 보내고 있다는 군요.”

위정의 말에 모란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이 몸으로 타마타모나 아이낙스를 상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세계에서 고수들이라 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잡아 족칠 수 있었다.

“그것 참 잘된 일이군.”

아무리 다시 살아났다고는 해도 한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연을 본 모란의 심기는 음산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는 마법진이 반파된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연이 거의 죽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눈이 뒤집히던 감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화풀이를 할 곳이 필요했으니 마침 잘되었다 말하는 모란의 말에 위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파연합에서 고수들을 보낸다는 게 무슨 의미던가. 모란이 중원의 공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란 이야기다. 하지만 모란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위정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연 공자를 도운 것은 굳이 은원을 갚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자에게 빚을 지우기 위함도 있었으니. 모란은 언제고 문파에 위기가 찾아올 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날 때였다. 모란과 정파연합 사이의 갈등에 괜히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포권지례를 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모란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위정이 물러나고 난 뒤 그가 초가집 안에 들어섰다. 연은 그가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고개가 다소 옆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었다.

모란의 눈에 아주 희미한 금색 고리가 겨우 하나 떴다. 울컥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찬찬히 살펴보니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고 혼 또한 찢어진 곳 없이 더 강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다만 아직 모두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해 한동안은 잠만 잘 것이었다. 모란은 연이 자는 동안 남궁세가를 어찌 손을 좀 볼 요량이었다.

마법진을 사술로 매도하는 것까지야 괜찮다. 어차피 그런 종류의 마법이었으니. 그러나 연을 천하의 악당처럼 다룬 것에는 상당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단전 파괴형? 다시 읊조리고는 모란이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작자의 단전을 아주 가루를 내 버릴 것이다.

모란은 황산에 가 이것저것 괜찮은 것들을 주워 먹고 오는 시간 외에는 내내 연의 곁에 머물렀다. 내단과 실라낙스의 눈을 받아들인 지 나흘째 되는 날에서야 연은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이며 말간 금색 눈동자가 참으로 보기 좋아 모란은 흐뭇하게 턱을 괴고 보았다.

“……모란?”

“그래.”

비몽사몽하는 얼굴로 이름을 부르더니 연이 끙끙거리며 손을 뻗었다. 잠기운에 몸이 축축 늘어질 텐데 무엇을 하고 있나 지켜보고 있자 그는 모란의 상의를 들추었다.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옆구리를 더듬거리려는 모양으로 허공을 휘적거리더니 이내 스르륵 팔이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무얼 하려고 했는지 알아차린 모란이 웃는 얼굴로 연의 손을 쥐었다. 전과 달리 따뜻한 체온이 이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다.

“걱정이 되었어?”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연은 새근새근하는 숨소리만 냈다. 모란은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근질거리는 애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연의 손을 쥔 채 손끝만 입술로 야금야금 간지럽게 베어 물었다.

모란은 이틀 정도를 더 푹 쉬고 난 다음에야 얼추 운신할 정도로는 회복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여나 중간에 연이 깨어날까 수면 마법도 걸고 결계도 강화하고 난 뒤에서야 초가집을 나섰다. 그는 순식간에 순간이동으로 안휘성 남궁세가, 화정당에 도달하였다.

모란이 운석 마법을 떨구어 놓고 나간 후 남궁세가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못해 처참한 지경에 가까웠다. 창일당에서는 아직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란은 느긋하게 화정당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쯧쯧 혀를 찼다.

“연이 속이 좀 상하겠군.”

퍽 아름다운 정원이 아니었던가. 정원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모란이 팔을 들었다. 퉁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칼날이 튕겨 나갔다. 칼날이 튕겨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상대가 당황한 틈을 타 모란이 발끝으로 걷어찼다. 막아 보려던 무사가 저 뒤로 크게 나자빠졌다. 그러더니 몇 번 피를 토하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누군가 황급히 끌어냈다. 어느새 모란의 주위에는 각각 병장기를 겨눈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게 정파연합에서 보냈다는 고수들이냐?”

무인들을 둘러보고는 모란이 피식 웃었다. 이것들도 고수들이냐고 하는 듯한 웃음에, 경계하던 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처음 정파연합에서는 남궁세가가 받은 공격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건물 벽 부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창일당같이 거대한 건물을 단번에 부수는 것이라니? 그것도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 창일당을 완전히 태우고 박살 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남궁세가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과장이 섞였겠거니 하고 고수들을 보냈다. 그리고 까만 잿더미가 된 창일당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경악했다.

이게 정말 백모란이라는 자가 단신으로 저지른 일이 맞는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그들은 머리를 맞대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창일당을 파괴한 방법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겨우 사술을 이용해 벽력탄(폭탄)을 하늘에서 떨어트렸다 정도의 의견만이 오갔고, 결국에는 이게 사실이라면 이자의 파괴력이 막강하다는 결론밖에는 내리지 못했다. 그런 자가 다시 남궁세가에 나타난 것이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어디에서 온 놈인 것이냐!”

이번 일에 가장 크게 충격을 먹고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한 남궁원이 노기에 몸을 떨면서 물었다. 그는 오랜 전통을 가진 창일당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남궁세가의 자존심이 박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란은 남궁원을 보고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개중에 그나마 강한데. 하필이면 연이 조부라서.’

남궁영명 같은 자라면 차라리 마음 놓고 두들겨 패겠으나 연이 조부를 퍽 존경한다는 게 문제였다. 더 난감한 건 남궁연오였다. 이자는 정말 연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가족에 속했다. 어찌할까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모란이 팔짱을 꼈다.

“내 정체가 무엇이냐고? 조사해 보았으니 알 텐데…….”

모란이 고의로 말꼬리를 흐렸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자 다들 움찔했다. 실은 남궁세가가 아닌 정파연합에는 딱히 유감이 없다. 그러나, 지금 모란은 목적하는 바가 분명했다. 이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웃고는 있으나 웃는 것이 아니다. 모란의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다.

“우리 연 도련님의 시종이자 주치의라고 할까.”

“거짓말하지 말아라! 분명 목적이 있어서 이리 남궁세가에 숨어든 것이 아니냐! 네놈이 사파에서 왔음을 다 알고 있다!”

사술이니, 사파니. 이자들은 어떤 일만 벌어지면 그런 소리밖에 지껄이지 못하는가? 모란의 눈매에 짜증이 어렸다.

“아, 목적이라면 당연히 있었지. 흠, 그래. 사파라……. 그럼 이런 소개를 원하는 것이었군?”

모란이 아공간에 넣어 두었던 서책을 꺼내 던졌다. 암기를 던지는 것인가 하여 황급히 뒤로 물러난 이들이 뜬금없는 서책에 의문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서책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남궁세가의 사람들뿐이었다.

“이, 이것은…….”

“그래, 창연각 도둑이 바로 나였지.”

모란이 씨익 길게 웃었다. 가장 놀란 것은 연오였다. 창연각에서 마주쳤던 그 괴한이 백모란이었다니! 지금 보니 저 히죽거리는 모양새가 비슷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남궁사영이었다. 창연각 도둑이 백모란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남궁연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인가. 더 큰 불행이 오기 전에 세가에서 도망가라던……. 그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따위 허접한 것 때문에 남궁세가에 들어온 것은 아니거든. 어디 보자. 설명하기 전에 좀 억울한 것부터 풀도록 할까.”

모란이 고개를 기울였다.

“화정당의 그 진법 말이지, 연이가 그리 사람들을 매장해 놓았다고, 정말 그리 생각했나? 허약해서 남궁세가에 오점이 될 정도라고 떠들어 댈 때는 언제고?”

모란도 귀가 있으니 남궁세가에서 연을 두고 뭐라 떠들어 대는지는 알고 있었다. 당연히 불쾌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에 그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을 뿐. 그러나 이제는 참고 넘어갈 이유가 없었다.

모란이 화정당 사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움찔했다. 지난번에 창일당이 처참하게 파괴된 후로는 놀란 몸과 정신을 추스르느라 남궁연이 화정당에 벌였던 사술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다. 모란이 다시 찾아와 똑같은 일을 벌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 수를 강구하는 데만도 바빴다.

그들 중 오로지 연오만이 생각했다.

‘왜 백모란은 연이를 찾았나?’

무슨 이유로, 무슨 필요가 있어서 연이를 찾은 것일까? 다들 창일당을 파괴시킨 모란의 가공할 만한 힘에 집중하였으나 연오는 아니었다.

“아니, 진심으로 묻는 말인데. 다들 머리가 비었나 하여서.”

모란이 톡톡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두드려 보았다. 그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이 달린 자들이면 생매장된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아볼 것이 아닌가?

……다만, 누군가가 중간에 수작질을 해 놓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녹림십오채 스무 명을 연이 혼자서 잡아 생매장해 놓았다고?”

“녹림십오채라니 그 무슨 말이더냐!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 생매장한 것이 아니냐!”

남궁인이 노성을 질렀다. 장로인 그는 화정당 사건 때 가장 크게 노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자기 하나 살겠다고 많은 이들을 생매장한 극악무도한 사건이었다. 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녹림십오채라니? 생매장당한 자들이 녹림십오채라면 완전히 말이 달라진다. 게다가 스무 명이라니! 당시 땅속에 파묻어 놓은 자들은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이라.”

모란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화정당 담장 귀퉁이가 풀썩 무너져 내렸다. 어찌 손도 안 대고 저럴 수 있나 다들 경악했다. 그들이 보는 가운데 무형의 힘에 의해 흙이 파내어지고 곧 아래에서 정신을 잃은 사람이 질질 끌려 나왔다.

마치 안 보이는 실에라도 묶인 듯한 그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눈을 의심했다. 또 다른 귀퉁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모두 네 번이었다.

모란은 이 모든 일을 심드렁하게 해치웠다. 그러나 지켜보는 연오나 남궁원은 사정이 달랐다. 둘의 낯빛이 희게 굳었다. 그들은 한 번도 이런 기이한 술법을 본 적이 없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가히 마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곧 얼마 안 가 장로 몇이 생매장되어 있던 녹림십오채의 얼굴 중 두셋을 알아보았다. 남궁세가와 장강의 녹림십오채, 그리고 수로채가 다툰 세월은 꽤나 오래되었다. 때문에 녹림십오채 중에서도 왕장호의 측근들의 얼굴은 몰라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파묻힌 자들이 도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내가 분명 화정당 중앙에는 왕자우를 넣어 두었거든. 가장 팔팔한 놈이라. 누가 숨겨 두었을까?”

“닥쳐라, 네 이놈! 어디서 세 치 혀를 놀려 감히 이간질을 하려 드느냐!”

모란의 말이 이어질수록 얼굴이 희게 질리던 남궁사영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모란의 시선이 남궁사영을 향한 탓이었다.

‘네놈이구나.’

모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싹 가셨다. 놀랍지만은 않았다. 남궁사영은 전부터 걸리적거리는 놈이었으니…….

한편 남궁사영은 식은땀이 절로 흐를 정도였다. 왕자우를 비롯하여 녹림십오채를 민간인처럼 꾸민 다음 거짓 증언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었다. 남궁연이 탈옥하기 전까지만.

원래라면 남궁연이 형벌을 받고 난 뒤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왕자우를 비롯하여 다른 놈들을 죽여 버릴 예정이었다. 한데 탈옥 사건이 일어났고, 사영이 남궁연을 추적하는 데 신경이 팔려 있는 동안 왕자우 그 교활한 놈이 세가에 보호 요청을 했다. 세가 밖에 나갔다가는 탈옥한 남궁연이 저들을 죽일 수도 있으니―실상은 남궁사영에게 살해당할 수 있으니― 잠시만 보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한다는 것이, 그 후 창일당 사건으로 비상사태에 돌입한 남궁세가가 완전히 문을 걸어 잠가 버리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아직도 왕자우와 그 부하 놈들은 뻔뻔하게 무고한 피해자를 가장하여 이 세가 안에 있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불명예스럽게 세가에서 완전히 쫓겨날 판이었다.

“이간질인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

모란이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왕자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주위를 마력으로 뒤덮어 보자 과연 세가에 아직 왕자우가 남아 있었다. 모란이 허공을 쥐어 챘다. 뜯어내듯 아래로 손을 뻗자 허공에서 네 명의 사내들이 갑자기 와르르 쏟아졌다.

“이, 이게 무슨!”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창일당에 불타는 돌덩이들이 쏟아지게 만들고,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을 허공에서 불러온다. 단순히 사술이라 하기에는 기이하고 또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실로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능력이 아닌가. 단순히 빠르거나 강하다고 하여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누구던가. 각기 문파나 세가에서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온갖 기이한 기술을 쓰는 자들을 몇 번이나 겪어 왔었다. 그런 그들도 방금 일은 어찌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단순히 건물을 파괴한 강자의 수준이 아니구나.’

다들 죽음까지 생각하며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반면 모란은 치밀어 오르는 피를 삼키며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원래 아공간을 여는 것이나 순간이동이나 그다지 쉬운 마법은 아니다. 시공간과 관련된 마법은 항상 마력도 미친 듯이 많이 잡아먹는 것이라.

원래라면 그저 때려 부수었을 것을 연이라서 이리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세가가 연에게는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이 세가에 속한 자들 중 몇이 연에게는 소중한 인연이기 때문에……. 모란이 무심하게 왕자우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달라진 걸 보니 인피면구라도 씌워 놓은 모양이지.

한편 왕자우와 도적들은 완전히 겁에 질리고 말았다. 백모란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이던가. 왕장호가 죽은 그날 이후, 정신을 잃었던 왕자우와 도적들은 눈을 떠 보니 어느 계곡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하늘만이 뻥 뚫려 있을 뿐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이라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는 그런 계곡 말이다.

백모란은 참으로 잔혹하게도 무공을 쓸 수 있는 자들의 단전과 맥만을 교묘하게 끊어 냈다. 더는 무인으로서 살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도 모자라 며칠에 한 번씩 그들 중 몇 명을 데려가서는 다시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계곡에서 지내는 내내 남은 자들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왕자우와 마지막 부하들이 끌려갔을 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자신을 땅속에 산채로 묻어 버리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 괴물이 지금 바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남자들이 백모란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벌벌 떨며 비는 모습이야말로 확실한 증거였다. 남궁세가의 장로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부릅떴다. 만약 그들이 보는 대로라면 화정당에 사람들을 산 채로 묻은 건 남궁연이 아닌 백모란이 아닌가?

백모란은 말도 못 하고 벌벌 떠는 왕자우에게 다가갔다. 모란의 눈에 금빛 광채가 어리는 걸 볼 적에 그는 그만 오줌을 지리며 까무러치고 말았다.

이미 두려움에 질린 상태에서 인지를 넘어선 어떠한 것을 보자 제대로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던 탓이다. 모란은 손을 뻗어 왕자우의 얼굴에 덮인 인피면구를 뜯어냈다. 왕자우의 맨얼굴이 드러나자 큰 술렁임이 번졌다.

“아니 이, 이런……!”

“저자는 바로 왕자우가 아닌가!”

백모란의 말대로, 그동안 보호해 왔던 사내가 왕자우라는 걸 알게 된 이들의 충격은 무척 컸다. 그들이 충격받거나 말거나 모란은 연신 제게 살려 달라 손을 싹싹 문지르며 비는 도적을 툭 발로 찼다.

“살고 싶으냐? 그럼 사실대로 말해라. 누가 왕자우에게 이 인피면구를 씌웠느냐?”

살고 싶냐는 말에 도적들은 바로 반응했다. 그들은 다시는 산 채로 땅에 파묻히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저, 저자입니다!”

그리 소리치는 도적들의 손가락은 남궁사영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저자가 찾아와, 남궁, 남궁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라고 했습니다! 그리하기만 하면 나중에 자유롭게 풀어 준다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두목에게 인피면구를 씌운 것도 저자입니다!”

남궁사영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아니다! 이것은 모함이다! 사술의 죄를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이다! 어디서 이 도적들을 매수하여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느냐!”

중원에서 사술에 관련된 자는 공적이 되니 만큼, 혹여나 자신이 연관될까 두려웠는지 남궁사영이 악을 써 댔다. 그러나 손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자를 보는 남궁원의 시선은 이미 차디찬 것이었다. 세가의 위기 상황이며 적을 앞에 두고 있으니만큼 지금은 당장 추궁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모란이 팔짱을 끼고는 크게 웃었다.

“아니지, 결코 화정당의 사술을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은 아니야. 가릴 건 제대로 가려야 하지 않아. 연이를 모함한 것은 네놈의 짓이고.”

모란이 남궁사영을 똑똑히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 생매장시키는 화정당 사술은 내가 한 짓이고.”

자신이 사술을 행했다고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이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말문이 막혔다. 방금 그는 자신이 그 극악무도한 사술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셈이다. 이는 자백을 해도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다는 강자의 오만함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모란이 말을 이었다.

“남궁사영 저자는 세가에 대한 충성과 애정이 대단한 자일 뿐이야.”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남궁사영이 멍청하게 모란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일의 흐름이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 창연각에서도 그리 필사적으로 나를 막으려 하고 화정당 사술이 발각되었을 때는 연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까지 하며 사술의 진행을 막으려 노력한 것이 아닌가. 충신이 따로 없으니, 실로 칭찬해야 마땅한 일이지.”

“뭐, 뭣……?”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남궁사영의 턱이 땅까지 떨어졌다. 저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부정한다면 혹여라도 사술이나 사파에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게 되고, 긍정한다면 세가를 위해 연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되지 않는가.

모란은 속으로 냉소했다. 이는 남궁사영 따위를 위한 게 아니다. 남궁세가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연의 평판을 바꾸기 위한 발판이었다. 모란의 눈동자 속에서 요요한 금빛이 희미하게 맴돌았다.

“물론 그 모든 노력이 내게는 가당치도 않게 느껴지는 헛짓거리지만.”

당장 위기를 모면하였다 하여 훗날의 일신이 결코 편하지는 않을 것이라. 그 의미를 알아들은 남궁사영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졌다. 정말로, 그는 옥에서 남궁연에게 충고를 들었을 때 도망쳐야 했던 것이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남궁연오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우에 대한 걱정으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을 속여 가며 화정당에 그런 사술을 행한 거지?”

백모란이 그간 이 사술을 주도한 자라 하니 남궁연오는 분노보다는 애가 타는 걱정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백모란의 곁에 줄곧 있었던 건 연이었으니, 걱정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연은 지금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가 아니던가? 모란은 잠시간 그런 연오를 바라보다가 턱을 긁적였다.

“사술을 행한 이유? 당연히 내 힘과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지.”

당연히 아니다. 수명은 그저 타고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순간이동이며 마법진이며 죄다 차원을 넘어가 이백오십여 년을 굴러다니며 직접 체득했다. 모란도 처음에는 마법으로 불씨 하나 피워 내는 일도 못 했다. 물론 저들에게 알려 줄 바는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졸지에 저들에 속해 버린 남궁연오와 남궁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분명 건강하던 남궁세가 둘째 도련님은 왜 하루아침에 허약하게 되었을까?”

모란이 느긋하게 말하며 다 들으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란의 말뜻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 성격 좋고 착하던 둘째 도련님이 갑자기 포악해졌을까? 어째서 백모란이란 시종에게만 그토록 적대감을 보였을까? 한 번이라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나 보지?”

모란의 말에 남궁연오는 세게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듯했다. 돌연 어린 시절 연이 크게 앓은 것과, 그 후로 병약해져 백모란만을 죽도록 괴롭힌 게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 그 이유가 사술 때문이었다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이 극악무도한 사술…….”

경악하여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둘러보면서 악당의 분위기를 연출하던 모란이 속으로 고민했다. 뭐 적당히 사악하고 거대해 보이면서 피나 어둠 따위가 들어가는 이름이 무엇 없나? 생각 좀 해 올걸 그랬군. 모란이 즉석에서 대충 사술 진법 이름을 지었다.

“……혈마암천광진(血魔暗天狂陳)은 진법 재료에 산 사람의 그릇이 필요하거든.”

“설마 산 사람의 그릇이, 연이란 말이냐!”

남궁원이 경악하여 외쳤다. 연오의 얼굴에서는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남궁세가의 사람들과 정파연합에서 보낸 이들로부터 천하의 몹쓸 악당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모란은 이 역할에 다소 심취했다. 매번 영웅 소리를 듣다가 악당 취급받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였다. 이리도 재미있을 수가.

모란은 안제테다에서도 종종 악당이니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니 종종 듣곤 했던 건 없는 셈 쳤다.

“겨우 십 년을 채워 혈마암천광진이 완성되어 가려던 찰나였지. 한데 벌레만도 못한 저 남궁사영이란 자가 우연찮게도 내 사술을 눈치챌 줄은 꿈에도 몰랐어. 덕분에 고맙게도 내상까지 입게 되었지.”

몇 달 동안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애지중지 연에게 본원지기며 혼이며 부어 가며 치료하려 했던 모란은 진심으로 이를 갈았다. 아무리 아낌없이 연에게 내준 그라도 그동안 들인 공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으니 아깝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없는 동안 연이 겪었을 두려움과 고통을 떠올리면 절로 이가 빠득 갈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깨달은 남궁사영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감히 내 대업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연을 빼돌려?”

말하고는 모란이 내심 감탄했다. 대업이란 용어를 넣으니 과연 광오(狂傲)한 악당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사실이 그런 것이 아니니 남궁사영은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대체 이 미친 자는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모란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이제야 그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다. 내 것을 돌려받아야겠어. 네놈이 빼돌린 남궁연이 어디 있는지 어서 불거라.”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는 모르는 일이다!”

저를 번득이며 노려보는 눈초리에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겁에 질린 남궁사영이 검을 빼 들었다. 그제야 모란의 당당한 자백에 넋을 놓고 있던 이들도 경계를 다시 세우며 모란에게 무기를 향했다. 지금까지 들은 말대로라면 백모란은 남궁세가 차남을 사술의 제물로 삼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능지처참해 마땅할 자였고, 남궁사영은 그런 백모란을 막으려 차남을 빼돌리고 그 행방을 불지 않는 의로운 자였다.

물론 남궁사영 본인의 속마음은 달랐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 이쯤 되니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모란이 몸을 낮추며 공격할 태세를 갖추자 의로움에 가득 찬 고수들도 무기를 단단히 쥐었다. 사술의 중지로 내상을 입은 상태에, 이쪽은 이리도 수가 많으니 어느 정도 가망이 있으리라. 그들은 미래의 자신들이 어찌 될지 감히 추측하지도 못한 채 소리를 지르며 모란에게 덤벼들었다.

좋은 화풀이 대상이군, 하고는 모란이 짐승같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연의 정신이 든 건 은은한 꽃향기 때문이었다. 또 모란이 꽃을 피웠나, 하다가 눈을 떴다. 머리가 뒤죽박죽이라 잠시간 눈만 깜박였다.

‘나는…… 죽은 게 아니었나?’

분명히 내상으로 몸이 진탕이 되어 며칠에 걸쳐 고통 속에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죽어 가고 있던 게 아니라 필히 죽었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 숨을 뱉었던 걸 기억해 내고는 몸을 떨었다. 한데 지금은 이렇게 숨을 쉬고 있지 않나. 이어 떠오르는 건 옆구리며 입에서 피를 쏟아 내고 있던 모란의 모습이었다. 연은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분명 끈적하고 차가운 죽음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리려는 순간 희미하게 빛나는 꽃을 보았다. 꽃잎이 흩어져 점점이 가슴 위를 수놓았다. 그 희미하게 빛나는 꽃잎만이 연이 완전히 가라앉으려는 걸 겨우 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가?

짧으나 긴 시간이었고, 찰나였으나 영원인 순간이었다. 그때를 떠올린 연의 눈동자가 잠시 아득해졌다. 곧장 연의 머릿속에서 죽음에 머무르던 순간이 잊혔다…….

대신 그는 자신이 끔찍한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던 걸 떠올렸다. 진흙과도 같은 수렁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졌고, 온몸에 달라붙어 있던 죽음이란 것이 뚝뚝 끊어졌다. 뇌수에서 연신 번개가 울리는 것처럼 온몸의 혈맥이 날뛰고 비틀리고 끓어올랐었다.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자 몸이 떨렸다.

비명을 질러도 입은 그저 새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아프고 또 아파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고개를 들자 그 자리에 모란이 있었다.

모란은 모란이되 분명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온통 피칠갑을 했고, 입이며 커다란 구멍이 뚫린 옆구리에서는 진득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었다.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무어라 했었지? 죽음 따위가 뺏어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죽은 게 아니었구나.’

온몸이 매우 나른하여 연이 겨우 시선만 돌렸다. 제 머리맡에 꽃들이 잔뜩 흐드러져 있었다. 꽃을 보자 정말로 모란이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보나마나 또 피워 냈겠지 하고 연이 상체를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바로 옆에 모란이 있었다.

그는 연의 머리맡보다 조금 더 위에서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벤 채 미동이 없었다. 매번 자는 시늉을 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은 한 번도 모란이 잠든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연보다 일찍 일어나 늦게 잠들곤 했다. 그랬기에 연은 정말 제가 모란을 보고 있나, 꿈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졸리고 나른하긴 해도 자신의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연이 숨을 죽여 가까이 다가갔다. 무어가 불만인지 모란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눈꺼풀 아래에서 움찔 눈이 움직이더니 미세하게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홀린 듯 모란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연이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안색이 안 좋은 것도 같다.

모란이 피를 토하는 걸 본 건 착각이 아니었구나. 덜컥 겁이 난 연이 모란의 옷자락을 들추었다. 그러고는 숨을 집어삼켰다. 오른쪽 옆구리에 흉한 상처가 있었다.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벌겋게 환부가 벌어진 채로 아물어 가는 중이었다.

‘대체 누가 모란에게.’

연이 입술을 깨물며 환부를 조심히 눌러 보았다. 다음 순간 다시 한번 숨을 집어삼켰다. 놀란 첫째 이유는 장기가 있어야 할 부분이 움푹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유로는 모란에게 손이 턱 잡혔기 때문이라. 연이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서 바라보기만 하는 가운데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모란이 잡은 손에 꼭 힘을 주었다. 웃으면서도 미간이 찡그려져 있어 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 눌러 대면 아픈데.”

“이, 대체…… 이 상처는 뭐야? 그 타마타모란 것을 잡다 이렇게 된 거야?”

캐물어 보아도 모란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빙그레 웃으며 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다정한지 그만 말문이 턱 막혀 버리고 말았다. 모란은 살금살금 연의 손에 깍지를 꼈다.

“몸은 좀 어때?”

“지금 내 몸 물을 때야? 모란 당신 몸이야말로…… 심각하잖아.”

연이 모란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깍지를 빼 손목을 잡아 맥을 짚으니 건강하게 펄떡펄떡 뛰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혈도 네 개가 없다. 통째로 뜯어 버린 게 아니고서야 대체 이게 가능한가 싶어 다시 안색을 살피는데 그가 물어 왔다.

“상태는 괜찮지? 어때, 완치된 것 같아?”

“완치된, 것 같냐고?”

그제야 연이 제 몸을 살펴보았다. 전혀 고통도 없고 심했던 내상도 씻은 듯 사라졌다. 아니, 제가 살아온 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건강한 몸 상태였다.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의 내상이었는데.

연은 믿을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제 몸을 더듬었다. 항상 희고 냉기가 돌던 손가락과 푸른빛을 띠던 손톱은 건강하게 혈기가 도는 분홍빛으로 따뜻했다.

“하지만, 나…… 분명 죽……었었는데…….”

모란은 건강해진 연을 보며 퍽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보드레한 발간 꽃잎 색을 한 연의 손톱을 이로 깨물어 보고는 웃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 분명.”

“……어떻게 살린 거야?”

그리 묻고는 연이 깨달았다. 지금 이 상태는 마치 모란과 자신의 건강을 맞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은가. 자신이 건들기 전까지 깊게도 잠들어 깨지 않던 모란도 모란이지만,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아까부터 몸을 나른하게 만들던 잠의 무게가 점차 묵직해져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연이 매달리듯이 옷자락을 잡자 모란이 가라앉는 몸을 잡아 침상에 뉘였다.

“뭘, 했어? 왜 이렇게…… 졸린 거…….”

“나의 내단을 뜯어 먹였지.”

졸린 와중에서도 일순간이나마 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단을 뜯어 먹였다고?

내단이란 것이 무엇인가. 보통 영물이 몸속 깊은 곳에 소중히 품고 있는 것이었다. 이 내단을 복용하면 단순히 힘이 늘어나는 정도부터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가 아주 좋아 무릇 무인에게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귀한 물건이었다. 아니, 그게 본인의 것이라면 모란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귀한 수준을 넘어선다. 무인이 제 내공을 모두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눈꺼풀을 파득 떨며 연이 아까 보았던 복부의 상처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모란은 꼭 제 멱살을 쥐려는 듯한―착각이라 여겼다― 연의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넣어 주며 말했다.

“거기에 안제테다에 다녀오면서 괜찮은 보약을 가져왔거든. 그걸 먹였으니 네 것으로 소화시키느라 한동안은 꽤 졸릴 테지.”

물론 실리낙스의 눈은 그저 ‘괜찮은 보약’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먹일 수는 있어도 보통 먹이는 데 사용하지도 않는다. 일단 모셔 두고 실리낙스의 눈에서 종종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워다가 아끼고 아껴서 공성 마구의 마법진 보강 따위에 쓰는 대단한 물건이다. 물론 그런 쓰임새 따위는 모란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연을 덮치는 잠은 마치 해일과 같은 수준이었다. 모란이 다정하게 눈꺼풀을 손마디로 내려 주었을 때 그는 저항도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느려지는 걸 확인한 뒤 표정을 바꾼 모란이 뺨을 긁적였다.

“……왜 벌써 깼지. 아직 작업도 다 안 끝났는데.”

어쨌든 연의 잠든 모습이 속이 간들거리도록 보기 좋았다. 모란은 히죽거리며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옷깃도 반듯하게 정리해 주고, 흰 이마를 살살 쓸어 주었다가 밖에서 따 온 꽃을 귀 뒤에 꽂아 주기도 했다. 연에게서 흘러넘치는 기운으로 꽃은 며칠 전에 따다 놓은 것임에도 시들지 않고 생기가 넘쳤다.

질리지도 않고 연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깨지 말라고 수면 마법 사락사락 뿌려 준 다음 그가 초가집을 나섰다. 꽃내음이 살랑살랑 풍겨 왔다.

“벌써 봄인가.”

어느덧 꽃망울이 툭툭 터지는 때가 왔다. 달리 말하자면 연이 깊은 잠에 빠지게 된 지도 벌써 보름 정도가 훌쩍 지났다는 이야기다. 그 보름 동안 모란은 착실하게 다져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를.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지만 역시 안휘성이 좋겠지. 먼 나중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모란은 그 자리에서 바로 안휘성으로 이동했다. 순간이동을 사용할 때마다 배 속이 쑤셨으나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이 ‘다지기’ 때문에 도통 몸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그럭저럭 지내기에는 괜찮았다.

내단을 연에게 내주는 건 모란에게 나름대로 꽤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모란의 본래 가진 힘이 백 정도라 하면 그중 칠십 내지 팔십 정도가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모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제테다에서라면 제법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터다. 모란의 목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으니. 하지만 다시 안제테다로 돌아갈 것도 아니고 여기서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확실히 장생종이 다수인 세계와 단생종이 다수인 세계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군.’

때문에 모란은 내단을 내준 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단이야 시간이 좀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회복되는 법이다. 연을 완벽하게 살리는 것에 대한 대가라면 그다지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 나름대로의 균형 조정일지도…….”

아무래도 좋겠지, 모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면 최근 안휘성은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남궁세가에 소속된 이들의 활동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모란이 죄다 밟아 놓은 탓이었다.

죽음에서 연을 건지고 남궁세가를 찾아간 날, 모란은 그를 향해 덤벼드는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단단히 알려 주었다. 다른 말로는 그들의 육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신 다져 놓았다는 이야기다.

죽이지는 않았다. 죽이는 순간 지울 수 없는 원한이 생기고 그런 원한은 끝없는 증오를 불러온다. 그건 모란이 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셈이다. 연에게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손대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 주기는 했다. 중력 마법으로 짓눌러 바닥을 기게 만들고 손짓 하나로 기절시켰다. 검이며 창을 부러트리고 먼지로 만들어 제게 덤빌 의지를 꺾어 버렸다.

이는 싸움이라고 하기에도 부적절했다. 실은 마음대로 화풀이를 하며 갖고 논 것에 가까웠다.

‘정작 화는 제대로 풀리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안제테다에서 하고 싶은 대로 군 것은 그곳에 오로지 모란 혼자밖에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이라거나, 혹은 동료, 아니면 지인까지도 그곳에는 없었다. 글쎄, 일방적으로 모란을 동료나 지인이라 부르는 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모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연이 있었기에 마음대로 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수밖에.

“몇 번이나 덤벼도 소용없는 것을 모르나?”

히죽 웃으며 모란이 뒤돌자 따라붙던 이들이 바짝 긴장하여 뒤로 물러났다.

“자, 잠시만!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오!”

“싸우려는 것이 아니야?”

뭐, 실은 싸운다고 말하기도 힘든 전투들이었지만. 일방적인 구타라 할 수 있는 이 싸움들로 인해 고작 보름 만에 중원에서 모란의 악명…… 아니 위명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였다. 모란의 위명은 다음과 같았다.

남궁세가의 차남을 제물 삼아, 불쌍한―대체 왜 그놈들에게 불쌍하단 수식어가 붙는지는 모르겠지만― 녹림십오채 도적들 수십 명을 생매장시킨 희대의 악당.

남궁세가의 창일당을 한 번에 날려 버리는 위력의 희대의 폭살마(爆殺魔). 물론 누구도 폭살(爆殺)시킨 적은 없다.

마지막으로, 어째서인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건만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학살한다는 잔인무도한…….

“불살(不殺) 혈화신마(血花神魔)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온 것뿐이다.”

“……그런데 말이야, 그 호칭 좀 통일할 생각 없나?”

모란은 보름 동안 꽤나 여러 가지의 호칭들을 얻었다. 죽이지 않는다 하여 일단 불살이 붙는다. 그 외에 무적이니, 절대니, 두 단어 가량의 수식이 붙은 뒤 파성귀왕(破城鬼王)이니 수라혈불(修羅血佛), 광천마존(狂天魔尊)에……. 그 외 한 다섯 가지는 더 있는 듯했다. 모란으로서는 썩 그다지 탐탁지 않은 호칭이었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좋지 않겠냐고.’

하긴 안제테다에서도 근질거리는 호칭으로 부르는 녀석들이 있었지. 모란이 팔짱을 꼈다. 매화가 수놓인 옷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화산파에서 보낸 이들이 분명했다. 최근 모란의 행보에 위기를 느끼고 미리 파견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란은 정파와 사파를 막론하고 죄다 꺾어 왔으니.

모란은 먼저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명목으로 남궁세가에서 자신에게 덤빈 자들의 세가와 문파를 찾아가기로 했다. 가장 처음 당한 건 남궁세가와 제법 탄탄한 동맹을 맺고 있던 제갈세가였다. 구궁척열환진(九宮斥閱幻陳)인가 뭔가 아무튼 지난번 마차 사고를 유발했던 진법을 가볍게 무시하고 들어오니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번 마차 사고가 네놈 짓이었구나!’

제갈우가 입을 딱 벌린 얼굴로 손가락질했지만 모란은 그대로 무시했다. 제갈세가에서 고수란 자들이 덤벼 오기는 하였으나 남궁세가에서 그 많은 고수들도 상대한 모란이니 구파일방 오대세가에서도 약한 축에 속하는 이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모란은 전력이 될 만한 자들은 죄다 쓰러트리고서, 무슨 짓을 하려나 달달 떨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남궁세가에서 날 공격해 오기에 되갚아 주러 오긴 했지만, 솔직히 이외의 원한은 없거든. 있다면 남궁세가와 있을 뿐이지. 그러니 남궁세가와 내가 북 치고 장구를 치건, 뭘 지지고 볶건 빠져 줬으면 하는데.”

모란은 그래도 정파연합이랍시고, 남궁세가의 큰 동맹이라며 망설이는 이들에게 덧붙였다.

“사술이라고 해도 말이지, 녹림십오채 말고 내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적이 있던가?”

싸울 만한 이들이 모두 쓰러져 긴 요양이 필요하게 된 제갈세가로서는 모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파연합이니 의협(義俠)이니 하긴 했어도, 약육강식(弱肉强食) 강자생존(强者生存)이라. 봉문을 요구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물러나겠다는데, 가주도 간단히 이겨 먹는 압도적인 힘이 있는 모란에게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는 그렇게 차근차근 다른 정파연합을 꺾어 나갔다. 벌을 준 뒤에는 살살 구슬렸다.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되갚아 주는 수밖에는 없다는 논리로, 사실상 협박을 강제한 설득이었다.

한데 그리 정파연합과 안휘성 부근의 대단하다 하는 실세들을 꺾고 다니니 사파가 접근해 왔다. 사파는 대개 두 종류로 나뉘었다. 억만금이라도 줄 테니 제 밑에서 일하라는 자와 천하의 제일강자(第一强者)를 겨루어 보자며 싸움을 걸어오는 미친 자들 말이다.

유독 사파 중에는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닌가 싶은 끈질긴 놈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지나치게 정파연합을 꺾어 놓은 듯해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여긴 모란은 사파도 개미 밟듯 지르밟았다. 바라는 것은 원한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에 적당히 손봐 주는 선이었다.

이렇듯 정파, 사파 모두 같은 취급을 해 주는 모란이었으나 물론 그들 중 단 한 명에게만은 대접이 달랐다…….

“아무튼, 무슨 일로 왔는데?”

“화산파에서는 결코 대협과 적대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리러 왔소이다. 부디 지난번 남궁세가에서의 실수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면 좋겠소.”

모란이 잠시 턱을 문질렀다. 오늘 연이 깨어난 걸 보니 조만간 일상생활 정도는 해도 될 것 같고, 또 서른쯤 되는 문파와 세가들 중 스물 정도를 손봐 주었으니 이쯤 하면 충분할 듯했다. 이제 중원에서 백모란을 모를 자는 없을 것이다.

보아하니 화산파는 중원의 어지간한 세가와 문파가 거꾸러진 상황을 틈타 어찌 천하제일(天下第一)문파의 간판을 따 놓고 싶은 모양이다. 모란에게는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쪽에서 그리 말하니 나로서도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

화산파에서 온 자들은 모란의 순순한 말이 정말인가 하고 다소 미심쩍은 얼굴로 보면서도 냉큼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그러고는 모란의 마음이 바뀔까 꽁무니가 빠지도록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산파가 하는 걸 보아하니 조만간 다른 곳에서도 알아서 백기를 흔들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남궁세가를 먼저 가 볼까.”

오늘 연이 깨어났기 때문에 퍽 기분이 좋았던 모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여유롭게 익숙한 거리를 지나면서 그는 시장에서 과일 몇 개를 샀고, 객잔에 들러 음식 따위를 사들이기도 했다. 연이 깨어나면 먹일 참이었다. 아무리 내단 덕에 먹을 필요가 없다 하여도 식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늘도 남궁세가의 정문은 굳게 닫혀 기관진식이며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그런 것들 따위는 모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가볍게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모란에게 처참하게 당한 후로 남궁세가는 완전히 침체 그 자체였다. 세가에서 가장 강한 남궁원을 비롯하여 호법장로들은 죄다 운신도 못 할 정도로 앓고 있는 중이었다. 허니 모란이 왔다 갔다 한들 막을 자가 없는 것이다.

모란은 싸울 의지나 기력이 없는 자들은 내버려 두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남궁사영을…… 영혼까지 자근자근 짓밟아 버리는 것이었다. 모란은 감히 사사로운 감정으로 연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남궁사영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흐어억!”

오늘따라 일찍 도착한 백모란을 본 남궁사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볼썽사나운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창피해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백모란 이자는 정말이지 이가 갈리도록 악랄한 자였다. 마치 악몽과도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남궁사영은 선잠을 잘 때마다 백모란이 나오는 악몽을 꾸곤 했다.

악몽에서나 현실에서나 백모란은 그 어떤 방벽도 가볍게 넘어와서는 이리 말했다.

“연이는 어디에 있어?”

남궁사영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남궁연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남궁연이 어디에 갔는지 안다면 남궁사영이 제일 먼저 가 찾아왔을 터였다. 그런데도 주위 모든 사람들은 남궁사영을, 비열하고 잔인무도한 백모란에게 용감하게 맞서 남궁연의 행방을 숨기는 용감한 자로 보았다.

첫날 정파연합에서 보낸 고수들과 함께 모란에게 덤벼들었을 때 그들은 이루 말로 할 수도 없이 처참하게 당했다. 백모란의 앞에서 거의 모든 이가 삼 초식도 넘기지 못하고 검을 떨어트리거나 정신을 잃고 나자빠졌다.

그중에서도 남궁사영은 백모란에게 제일 처절하게 당한 사람이었다. 모든 이가 이 합 만에 정신을 잃은 데 비해 남궁사영은 유일하게 의식이 남아 있었다. 백모란은 남궁사영을 사정없이 구타했다. 말복 개조차도 남궁사영처럼 흠씬 두들겨 맞지는 않았으리라. 심지어 백모란은 치밀하게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으면서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곳들만을 골라 팼다. 차라리 죽이라는 말이 나올 때쯤에서야 모란은 발끝으로 남궁사영을 굴리며 치욕을 안겨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이로써 끝이 아니었다. 모란은 보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이틀, 혹은 사흘에 한 번 찾아와 남궁사영을 잔혹하게 고문했다. 그건 정말이지 고문이라 할 만한 악랄함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온갖 기관진식이며 진법 따위는 백모란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백모란은 그 끔찍한 금빛 안광을 빛내며 담장을 넘어, 때로는 위풍당당하게 정문을 넘어 걸어왔다. 덤비는 자가 있다면 무자비하게 한 번의 손속으로 정신을 잃게 만든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자비에 가까웠다. 모란은 한 번도 남궁사영에게는 기절을 허하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이나 세 번째 방문까지는 남궁세가의 장로와 무사들도 나름 모란에게 저항을 했다. 그러나 항상 결과는 모두가 정신을 잃은 채 유일하게 남궁사영만이 땅바닥을 구르며 쥐어 터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에게 육체적인 타격 이상의 것이 가해지기도 했다.

모란이 그 금안(金眼)으로 쳐다볼 때면 남궁사영은 마치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온 정신이,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끔찍한 고통을 받았다. 몸은 멀쩡한데 얻어터지는 것보다 더한 괴로움이 닥치는 것이다. 자연히 남궁사영은 백모란만 보면 저도 모르게 소변을 찔끔 지릴 정도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궁사영은 자신이 세가에 있기에 모란이 그나마 저를 살려 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끔찍한 자로부터 남궁연을 지키려 드는 기개 있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끔찍한 인형극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뒤 모란이 떠나면 그는 남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반쯤 눈이 뒤집힌 연오는 모란 못지않게 사영에게 지독하게 굴었다.

-절대 연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리 말하고는 연오는 남궁사영을 노려보았다. 그는 결코 사영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연을 모함한 일로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한데 정말 연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게 맞기는 합니까?

모른다고 하면 사영을 남궁세가에서 당장 내쫓을 기세였다. 남궁세가에서 나가면 그야말로 사영의 목숨은 끝장나는 셈이다. 그는 도련님을 아주 안전한 곳에 빼돌렸다며, 죽어도 말하지 않겠다고 식은땀을 흘리며 연오를 설득해야만 했다.

장로들은 또 연오와는 입장이 또 달랐다. 그들은 사영을 은밀한 곳으로 질질 끌고 간 뒤 남궁연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고 윽박질렀다. 더는 모란에게 시달리기 싫었던 건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나는 모르오!

사영은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남궁연이 어디에 있는지는 그가 제일 알고 싶었다. 모란 그자의 괴롭힘이 제발 끝났으면 했다. 대체 이 괴로움은 언제까지 이어지는가. 사영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오늘도 찾아온 모란은 이렇게 지껄였다.

“지난번 말한 장소에는 없던데. 연은 어디에 있지?”

백모란에게 질리고 두려움에 질린 자들은 이제 더는 저항하지도 않았다. 반은 도망쳤고 반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모란이 남궁사영을 끔찍이 괴롭히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모, 모른다! 정말 나는 모른다니까!”

남궁사영이 악을 질렀다. 지난번 그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아무 장소나 되는대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남궁연이 어디에 있다 말하는 순간 세가의 실망 어린 눈초리가 그에게 향했지만, 그것쯤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다만 자신이 대답을 뱉자마자 백모란이 봐준다는 듯 사라진 걸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또 이렇게 찾아오니 이제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제발 이 끔찍한 기간이 끝나기만을, 백모란이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남궁사영의 기대와는 반대로, 모란은 오늘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들 때였다.

“이런.”

백모란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번개같이 검이 꽂혔다. 모란이 피하자 바로 그 뒤를 쫓아 전광석화처럼 검 끝이 쏘아져 나갔다. 모란이 쯧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가해지는 중력에 연오가 땅에 무릎을 꿇었다. 검을 지지대 삼아 겨우 버티면서도 그는 모란을 쏘아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정말 제일 성가신 상대란 말이야.’

모란이 쯧 혀를 찼다. 오로지 동생을 향한 염려로 연오는 끊임없이 모란에게 덤벼들었다. 어찌나 정신력이 지독한지, 지난번에는 수면 마법을 걸었더니 왼손 새끼손가락을 분질러 버린 뒤 그 고통으로 이겨 내어 검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지금도 중력장에 짓눌려 몸에서 으득하는 소리가 날 정도인데도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모란은 혀를 내둘렀다.

이 세가에서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라면 단연 남궁한위와 남궁연오였다. 둘 다 연이 지극히 아끼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남궁원은 좀 두들겨도 되겠지 싶어 몇 달 요양 질 신세로 만들었지만 둘에게는 그리할 수가 없었다.

일단 한위에게는 긴밀하게 찾아가 사건의 정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무난하게 해결되었다. 워낙에 사람을 잘 믿고 순진한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남궁사영이 어떤 자인지 직접 겪었기에 이해시키기가 쉬웠다. 그는 모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연에 대한 걱정을 할 따름이었다.

반면 남궁연오는 어떠했는가.

모란이라고 은밀히 설명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위에게 말하듯 툭 터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그 사술은 저를 위한 게 아니라 연을 위한 것이며, 연은 제가 건강하게 잘 데리고 있다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납득을 하는 것 같다가도 무엇 때문인지 분노에 떨며 이를 갈더니만 도중에 검을 뽑아 들고 덤볐다. 설득이 안 된 건지 아니면 설득이 되고서도 그렇게 덤비는 건지…….

하긴, 앞으로 세가를 이끌어 나가야 할 가주가 창일당을 하루아침에 박살 내어 놓은 자의 말을 순순히 믿는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겠지만……. 아무튼 모란으로서는 썩 피곤한 일이었다.

모란은 잠시 고민했다. 이제는 슬슬 일을 정리할 때도 되지 않았나? 보름이나 되었으면 이제는 연이 남궁세가에 돌아와도 전처럼 오명을 쓸 일은 없을 테고. 명실공히 비열한 악당 백모란에게 오랜 세월 고통 받은 피해자이자 세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될 터이니. 마침내 모란이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나를 막으려는 기개가 이렇게 대단하니, 좋아. 이쯤에서 타협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 남궁사영이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백모란이 지껄일 때마다 이제 듣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연이를 돌려받게 되는 순간 술식은 완성되고, 그때부터는 연이와 나는 생사를 함께하게 되니, 그리되면 내가 굳이 남궁세가와 척을 질 필요가 있겠는가.”

모란의 말에 어떻게든 중력장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고 있던 연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사술이 완성되면 저 백모란이란 자와 제 아우가 생사를 함께하게 된다니? 저자가 지금 자신이 죽으면 연이도 죽어 버린단 의미로 말하고 있는 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나 혹 사실이라면 정말로 큰일이 아닌가. 검을 꽉 쥔 연오의 손이 떨렸다. 저런 자를 곁에 두고도 몰랐다니 참으로 후회막심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희미한 희망을 엿본 남궁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란이 히죽 웃었다. 그래, 잠시간 희망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겨우 악몽에서 벗어났다 여기는 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실로 처참할 테니.

“다른 자의 생명과 힘을 빼앗아 쓰는 사술이라 하여도, 어디까지나 죽어 마땅할 녹림의 도적들을 사용할 뿐이라. 내 한 번도 무고한 사람을 쓴 적은 없거든.”

모란은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참으로 비열한 목소리를 낸다 싶어 퍽 흡족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장로 셋, 세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남아 있는 용감한 무사 여덟과 미처 도망가지 못한 시비 두어 명. 그리고 남궁연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일시적으로 병약해지긴 했으나 사술이 완성되면 연이 또한 정상적으로 돌아올 테니 왜 이 사술이 완성되는 걸 막는지 알 수가 없군. ……아, 그야 완전히 예전대로의 모습은 아닐 테지만.”

금빛으로 변한 눈을 떠올리며 덧붙이자 말뜻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남궁연오가 빠득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란은 이거, 나중에 남궁연오가 제게 좀 성가시게 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어쨌든 중요한 사람은 연이인 것을.

“연이가 있는 곳을 말해. 그리하면 이제까지의 일은 없었던 걸로 쳐주지. 뿐만 아니라 남궁세가에 입힌 피해도 모두 보상할 테니.”

모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남궁사영은 모란과 연오를 번갈아 보았다. 연오가 결코 말하지 말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가주에게 단단히 밉보일 테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모란의 이 연극에 따를 수밖에.

“남궁연은……. 장강 근처 낙양이라는 객잔에 있다.”

장강 근처에 낙양이라는 객잔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지명과 어떤 장소를 대어도 모란은 그곳에서 남궁연을 데리고 오리라. 남궁사영에게는 그러한 느낌이 있었다. 남궁사영에게 완벽한 좌절감을, 남궁연오에게는 본의 아니게도 아마 제법 오래갈 원한을 안겨 주고는 모란이 그 자리를 떴다.

이제는 모란이 떠나기 직전처럼 연이 세가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남궁사영은 공들여서 서서히 연의 주위에서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그에게서 남궁세가라는 명예를 빼앗고 재산을 빼앗으리라. 부귀와 명예. 평생토록 남궁사영이 다시는 그것들을 누릴 기회는 오지 않겠지. ‘화병(火病)’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무인으로서의 힘도 잃어버릴 테고, 모란이 혼에 가한 흠집으로 잘 때도 평온을 얻을 수 없을 터. 그에게는 오로지 버러지처럼 바닥을 기며 목숨을 겨우 이어 붙이는 삶만이 기다릴 것이다.

그는 원한을 쉬이 가지는 편은 아니었으나 한번 가지게 되면 결코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난 모란은 개운한 기분으로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연은 모로 누운 채 떠나기 전처럼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초가집에 들어서며 모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그가 자리에 앉았다.

“좀 무리를 했나…….”

내단을 쥐어뜯어 놓은 상처 부위에서 다시 질금질금 피가 흘렀다. 몇 번 기침을 하니 또 피가 섞여 나온다. 대충 소매로 슥슥 닦은 모란이 연의 옆에 쭉 몸을 펴고 누웠다. 수면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 며칠 동안 연은 자기만 할 터. 모란도 다시 연이 깨어날 때까지 잠이나 잘 예정이었다.

그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건 실라낙스의 눈을 가지게 된 연에게 약간의 항마력이 생기게 되었단 점이었다. 이백오십여 년을 산 모란도 실라낙스를 통째로 삼킨 자는 겪어 본 적이 없던 것이다.

해서 모란의 예상보다도 연은 훨씬 빨리 깨어났다. 눈을 뜨고 나서도 연은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말 지독스럽게 졸렸던 탓이다. 하마터면 깨자마자 다시 잠에 빠질 뻔한 것을 겨우 고개를 흔들어 떨쳐 냈다. 눈가를 꾹꾹 누르며 애써 상체를 일으켰다.

“왜 이렇게 졸린 것이라고 했더라…….”

중얼거리다가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모란의 내단.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연이 깨어난 줄도 모르고 모란은 또 푹 마음 놓고 곁에서 쿨쿨 자고 있는 중이었다.

“내단이라고?”

내단이라 하면 보통 영물을 죽이고 나서 얻는 전리품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연은 한 번도 모란과 내단이라는 것의 상관관계를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란이 준 과거 기억에 따르면, 어렸을 적의 모란은 영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내단이라는 것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

다만…….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입술과 소맷자락에 묻은 핏자국에 향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단이다. 무인으로 따지면 단전과 비슷한 게 아닌가? 이것이 스스로 단전 파괴형을 행한 것과 무어가 다르단 말이야? 마치 저 대신 그 형벌을 당한 것처럼 여겨져 연은 가슴 한구석이 죄여들어 왔다.

모란이 저 몰래 화정당에 사람들을 생매장했던 걸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연은 이제…… 차마 그 일로 모란을 어찌 비난할 수가 없었다.

다시 모란을 힐끔 본 뒤 연은 기다시피 방 한쪽으로 향했다. 얼마 전 사용한 침이며 여러 가지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에 연이 일단 제 혈 자리를 더듬어 침을 놓았다. 당장 정신이 맑게 개었다.

“……좋아.”

그가 다시 살금살금 모란에게 다가왔다. 모란은 지난번보다도 훨씬 더 깊게 잠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의 손이 조심스레 상의를 들추었다. 상처에서 질질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지난번보다도 더 악화된 모양이었다. 연이 입을 꽉 다물었다. 상처가 있는데 왜 처치도 하지 않고. 연의 손이 이내 침을 집어 들었다.

혹여나 깰까 아주 조심스럽게 침을 찔러 넣었다. 침 서너 개가 꽂히는데 모란은 인지도 못하고 잘만 자고 있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자라. 연은 다음으로는 바늘과 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란의 상처를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재빠르고 신속하게 바늘이 왔다 갔다 하자 벌겋게 벌어져 있던 상처가 차츰 다물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끝났다. 모란은 상처 가장자리에 바늘을 꽂아 넣을 때에 잠깐 미간을 두어 번 찌푸리기만 하고는 깨어나지 않았다. 잘되었다 싶어서 연은 무자비하게 모란의 몸에 침을 몇 개 더 꽂았다.

안색도 살펴보고,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펄떡펄떡 잘만 뛰고 있는 맥도 짚어 보고 있는데 연의 시야에 문득 무언가가 걸렸다.

“……이게 무어지?”

처음에는 보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한번 보이기 시작하자 왜 못 봤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확연하게 보였다. 무엇인가 하면, 마치 허공에 난 흉터처럼 생긴 것이었다.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모란 주위에 서너 개 있었다. 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게 대체 뭘까? 모란의 마법인 걸까? 마법이라면 대체 뭐에 쓴단 말인가?

한참을 살펴보다가 그가 조심스럽게 침을 들어 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그냥 통과했다. 망설이다가 연이 손가락 끝으로 쿡 눌러 보았다.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실체를 가진 안개를 건드리는 듯한…….

“틈……인가?”

미묘하게 진동하는 듯하던 아지랑이 같은 것이 돌연 크게 입을 벌렸다. 놀라 연이 뒤로 물러나는데 안에서 과일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미처 뭘 하기도 전에 과일 무더기가 모란의 얼굴에 정통으로 떨어졌다. 달게 자고 있다 감에 퍽 소리가 나도록 얻어맞은 모란이 벌떡 일어났다.

“……아.”

당장 누군가를 죽일 기세로 사납게 눈을 치켜떴던 모란이 황망하게 입을 벌린 연과 과일 무더기를 발견했다.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느릿느릿 손을 뻗어 콧잔등을 덮었다. 고개를 숙이더니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내, 이백오십 평생 과일로 얼굴 얻어맞아 보기는 처음이야.”

정말이다. 채찍이나 몽둥이, 혹은 무기로 맞아 본 적은 있었지만 과일로 얻어맞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게…….”

연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무방비하게 있던 것인지 콧등을 쥐고 있던 모란의 손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코피였다. 모란도 드물게 눈을 크게 뜨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코피는 모란이 콧등 부근을 꾹꾹 몇 번 누르자 곧 멎었다. 그럼에도 연은 살면서 지금처럼 죄책감이 든 적이 없었다.

“음?”

상의가 풀어 헤쳐져 있기에 모란이 살펴보다가 제 상처를 발견했다. 꼼꼼하게 봉합되어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더니 무어가 그리 좋은지 씩 웃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자 연의 얼굴은 붉어졌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따위가 아니었다. 도리어 분노와 비슷한 것이었다. 연이 떨리는 손으로 꽂아 두었던 침을 다시 회수할 때에서야 모란은 뒤늦게 상대의 기분이 별로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내단에 실리낙스의 눈까지 먹였으니 이제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이나 다름없을 텐데.”

“모란…… 당신은 대체!”

연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그 끝을 삭여 삼켰다. 화정당 사술 사건부터,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다시 숨을 쉬며 눈을 떠 모란을 봤을 때까지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고개를 돌린 연은 주위를 정리했다. 그가 침구를 돌돌 말아 넣는 동안 모란은 턱을 문질렀다.

‘……화가 난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이지?’

결론은 쉽게 도출되었다. 화정당 사건 때문이겠거니 한 것이다. 하기야 사람들 생매장해 가며 치료한 걸 숨겼고 그 때문에 세가에서 안 좋은 취급 받으며 내쫓겼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연아, 하고 모란이 다정하게 불렀다. 연은 귀를 붉게 물들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날이 선 눈매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보인다. 모란은 그 아래 반쯤 잠긴 금색 홍채를 만족스럽게 보며 살살 달랬다.

“화정당 일은 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그 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죽은 사람이 없다니 안도가 되기는 했다. 모란에게 낮은 선이나마 있기는 하였구나,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데 이어지는 말에 연이 고개를 돌렸다.

“오해를 산 것도 잘 해결해 두었으니 이제는 세가로 돌아갈 수 있어.”

“잘 해결하였다고?”

되묻자 모란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궁세가를 그리 박살을 내 놓았으니……. 생각해 보니 그다지 연이 선호하는 해결 방식은 아닌 듯했다. 연이 나중에 더 화를 내기 전에 모란은 지금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음, 정파연합과 싸우게 된 건 말이야…… 먼저 그쪽에서 덤벼 오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거든. 사파도 그렇고.”

“……정파연합과 싸우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면 그 몸으로 싸움을 벌였단 이야기야?”

어쩐지 연은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모란이 턱을 문질렀다. 하긴 이 몸으로 싸운 건 이쪽 세계 사람들에게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 완전히 어른이 어린아이를 쥐어 패는 격이 되지 않았나. 한데 화가 난 것도 꽤 귀여운걸, 하면서 모란이 연의 따뜻한 손을 살금살금 쥐었다. 연이 손가락을 움찔하였다.

“미안해,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연은 알고 있을까. 모란이 사과를 하는, 유일하면서도 최초의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사과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걸. 하지만 어째서인지 연의 기분은 풀어지기는커녕 급기야 더 악화만 되어서는 급기야 모란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이 왜 내게 사과를 해?!”

어쩐지 원망 어린 것도 같은 눈으로 모란을 노려보고는 휙 차게 몸을 돌려 침상에 누워 버리는 것이다. 매몰차게 이불까지 머리끝까지 덮어 버리는 행동을 보아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모란은 드물게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내가 아까부터 요점을 잘못 짚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럼 정파연합에 사과를 하란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모란은 아직 연에게 사과할 것이 더 남아 있었다.

눈동자 색이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금색으로 영원히 바뀌어 버린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도 꺼내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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