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十章 : 정원 (14/19)

十章 : 정원

“흐으, 으…….”

숨을 헐떡이면서 연이 엉금엉금 기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떨어져 이불을 적셨다. 그 부질없는 몸부림은 모란이 허리를 죽 잡아당기는 것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이불을 붙잡아도 소용없이 연은 질질 아래로 끌려갔다. 저도 모르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더, 더는 못 해……. 진짜 못 한다고.”

“아냐, 힘내서 조금만 더 해 보자.”

“시, 싫…….”

그런 것에 힘내기 싫다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신음 소리가 교성처럼 높게 울렸다. 모란의 물건이 단번에 뒤를 꿰뚫은 탓이었다. 완전히 쾌감에 젖은 연이 숨을 헐떡헐떡 울렸다. 느릿느릿 안을 찔릴 때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도 사정한 나머지 연의 성기는 이제 발기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말간 액만 질금거릴 뿐이었다. 어쩌다가 이리 되었나. 연이 흐느끼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얼마 전, 영명의 장례식이 끝난 날 연은 끝내 열 살 무렵의 기억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모란의 것을 가진 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게 되었다. 모란의 기억이 연의 어린 기억을 대신해 준 덕이었다.

좋은 기억이라고도, 좋지 않은 기억이라고도 못 하겠다. 다만 이제 꽃들을 보면 연은 모란에게서 받은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한 번 더 모란을 보게 됐다. 그날 밤 정원에서 바람이 불 때 넘실거리는 꽃들은 분명 장관이었다. 더는 꽃이 전처럼 두렵거나 싫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영명의 칠칠재(七七齋)가 끝나고 난 뒤, 모란이 사흘 후에 떠나겠다고 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치료를 많이 해 두고 가야 한다며 연을 이리도 쥐어짜는 것은 결코 괜찮지가 않았다. 확실히 치료를 하는 것이긴 하는지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감촉보다도 지독한 쾌감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아, 아흑, 흣…… 앗, 앗, 아!”

결국 다시 견디지 못한 연이 소용없이 이불을 긁었다. 철벅철벅 모란이 박아 넣을 때마다 마치 백치가 되는 것 같았다. 온몸이 흐물흐물 물러지는 듯했다. 더는 사정할 수 없는데도 자꾸만 절정에 오르니 이제 두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연이 견디지 못하고 모란을 퍽퍽 때렸다. 그조차도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를 않아 헛주먹질이었다. 모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며칠은, 못 일어날 거란, 아흐, 으, 히익, 말이야…….”

“그러라고 이러는 것인데.”

지껄이면서 모란이 들은 척 만 척 쪽쪽거렸다. 아니, 연이 울먹거리고 애원할 때마다 더 흥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모란은 연이 두 번 더 절정에 이를 때에야 ‘치료’를 멈추었다. 연은 다소 서러워 엎어진 채 모란의 손만 모질게 질겅질겅 씹다가 그대로 지쳐서 잠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몸이 좋았는데, 그게 오히려 연의 성질을 돋우는 것이었다. 이불에 푹 파묻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던 그에게 모란이 식사를 가지고 왔다. 오늘 후로는 이십 일 정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만 아니었다면 연은 모란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만큼 허리 아래가 너덜너덜하고 감각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하는 대로 연에게 식사를 실컷 먹인 다음 모란은 화정당 밖으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뭐 하나 보았더니 잠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언가 확인하고 있었다. 아마도 화정당에 설치되었다던, 연에게 생기를 보내고 있다는 마법진인가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돌아보고는 모란이 돌아왔다.

“난 이만 가 보도록 할게. 늦어 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

알고는 있었는데 모란이 저런 말을 하자 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일 정도 걸린다 하였지?”

“그래. 가능한 빨리 오도록 해 볼게.”

머뭇거리다가 연이 슬그머니 모란의 손을 잡았다.

“무리……하거나 하지는 마. 좀 늦어도 되니까.”

만약에 모란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만 해도 연은 그저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모란은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거기서 쓰던 몸을 남겨 두고 왔으니, 타마타모를 죽일 때는 그 몸을 사용할 거야. 어차피 죽을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하면 만에 하나 죽는다 하여도 문제없지.”

거기서 쓰던 몸……. 그럼 무언가, 예비용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연은 모란이 가능한 멀쩡하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불안하고 초조한 건 연만이 아니라서, 모란은 다시 밖에 나가 마법진을 확인하고 오더니 내심 불안한 얼굴로 연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절대 세가를 나가서는 안 돼.”

“그래, 알았어.”

“거의 치료되었으니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고, 그 전에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혹시 아프거나 하면 무조건 화정당 안에 있기만 해도 나아질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서 지내지 않을게.”

“일 있으면 네 형님에게 바로 말하고……. 식사 꼬박꼬박 하고, 또 옷은 따뜻한 걸 입고.”

이쯤 되자 연은 모란이 자신을 무슨 어린아이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란은 진심이었다. 그간 연을 혼자 내버려 두기만 하면 일이 터졌던 탓이다. 그러나 안 갈 수는 없었다.

‘괜찮겠지.’

세가 밖이라면 모를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염려는 없었다. 연의 본원지기를 유지하게 해 줄 마법진은 땅속에 있어 손상되거나 들킬 염려가 없었다. 마법진을 깰 만한 유일한 존재는 모란과 함께 떠난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란은 한숨을 쉬고는 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금방 돌아올게. 그리 말하고는 그가 숙였던 상체를 폈다. 기다리고 있던 앱솔이 크게 엎드려 절했다.

“그간 실례 많았습니다, 남궁연 님. 이 앱솔, 남궁연 님이 앞으로 가시는 길에 큰 영광 있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나도 고마웠어.”

앱솔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그래도 이제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좀 기분이 묘했다. 모란은 연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허공을 휘저어 주먹을 쥐자 매우 기분 나쁜 스산한 기운이 돌았다. 연은 이제 이게 다른 공간이나 차원을 열었을 때의 느낌이란 걸 안다. 그대로 모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르륵 사라졌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서 연은 모란이 사라진 자리로 향했다. 머뭇머뭇 어정거렸다가 괜히 화정당 밖으로 나가도 보았다. 떠날 때는 태연한 척하였으나 막상 모란이 사라지고 나자 미묘하게 풀이 죽었다.

연은 다시 침상에 돌아와 누웠다. 이십 일 정도의 기간이 참으로 멀게도 느껴졌다.

‘여기서의 하루가 거기서는 이십사 일…….’

연이야 십오 일이지만 모란은 일 년이다. 모란에게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까, 짧게 느껴질까? 타마타모는 어떤 존재이기에 모란까지 가야 하나. 아이낙스는 어떤 사람일까. 다녀온 모란이 전과 달리 변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연의 마음속은 번잡하였다.

연은 이틀 정도는 침상에 누워서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료해지는 까닭에 버티지 못하고 화정당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뒤뜰에 가니 모란이 피웠던 꽃들이 모두 시들시들 지고 있었다. 계절감을 잊은 꽃 무더기에 하인이 의아해하면서도 열심히 쓸어 치우고 있었다.

“꽃나무를 좀 심을까.”

꽃을 왜 그리 싫어하였나―실은 두려워한 것이지만― 알게 된 후로는 전처럼 멀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에 꽃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정원을 다시 보고 싶어서인지, 꺼려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 것이 아닌 모란의 기억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란이 내게 준 게 대체 정확히 무얼까.’

그저 단순히 자신의 안 좋은 기억을 가져가고 대신 모란의 기억을 줬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묘했다. 계속 허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느낌이 들던 전과는 달리 이제야 무언가 찬 느낌이 드니……. 모란이 오면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연이 시비를 불렀다.

“정원에 꽃을 좀 심고 싶구나.”

연의 말에 시비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물러났다. 잠시 후에 시비는 정원사와 함께 돌아왔다. 정원사는 꽃을 심고 싶다는 말에 퍽 기뻐 보였다. 하긴 십 년 내내 삭막하기만 한 정원이었으니.

“도련님, 얼마 후면 곧 봄비가 내릴 것이니 땅이 무르고 난 뒤에 꽃을 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취소하지는 않을까 정원사가 연을 흘깃거렸다. 내내 가지치기나 해 온 터라 제대로 정원을 가꾸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명색이 화정당이 아니던가. 이제는 꽃이 필 때도 되었지.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좋을 대로 하게.”

“그렇다면 봄비가 내리는 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꽃이 필 때이니 철에도 맞을 것입니다.”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란이 돌아올 때쯤에는 화정당에도 꽃이 피어 있을 터였다. 모란이 피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피어난 꽃들이…….

‘모란꽃이나 연꽃을 가꾸어 볼까.’

가만히 생각하던 연은 괜시리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헛기침을 하고는 정원사를 물렸다. 휑한 화정당을 거닐며 이리저리 머릿속으로 꾸며 보느라 그날은 괜찮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연은 폐월당으로 향했다. 영명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나 세가에 그다지 슬픈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을 기리는 동안 세가는 조용하였으나 조용한 것이 애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칠칠재를 지내면서 연은 창일당의 시비나 하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산공독으로 고통받던 영명에 의해 불구가 되거나 죽기까지 한 이도 있던 모양이다. 보통 모시던 윗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기 마련인데 영명이 죽고 나자 창일당 시비와 하인들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모순적이다. 영명을 가장 애도하는 이가 그가 가장 아끼던 연오도 아니고 가장 홀대했던 한위라니. 연이 쓰게 웃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지.’

기만적일지도 모르나 연은 한위에게 모친에 대한 일은 영원히 비밀로 할 셈이었다. 알아서 전혀 좋을 것이 없는 사실이다. 연은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한위에게 영명이 그저 매정한 아비로만 남기를 바랐다. 하지만 주강이 언제고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저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폐월당에 도착하자 한위는 대청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주강은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얼마 전 주강은 연오에게 요청하여 한위의 호위로 자리 잡은 차였다. 영명이 죽었으니 세가를 떠나지는 않을까 내심 염려했는데 잘되었다면 잘된 일이다. 하긴 이제는 복수할 상대도 없고 대신 한위가 남아 있으니.

“형님.”

영명이 죽은 뒤로 한위는 종종 우울해했다. 그래도 아버지라서 그런 건가 싶다가도, 한위의 얼굴을 보면 딱히 슬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표정은 어쩐지 죄책감과도 비슷했다. 연은 오늘에는 한위에게 연유를 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구나.”

한위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으나 연이 끈기 있게 기다리자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가주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퍼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돌아가신 날에도, 묘를 만드는 날에도 사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 말을 듣자 연은 한위의 얼굴에 왜 죄책감이 어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한위가 이제 열여섯이던가? 연은 돌연 이리 순하여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열여섯일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 그렇지. 열여섯에는 모란을 쥐 잡듯 잡고 있었구나. 아무튼.’

“전 정말 못됐나 봐요.”

“그건 네가 못되어서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라서 그런 것이지.”

연의 말에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더니, 이내 깨달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푹 쉬고는 한위가 고개를 저어 털어 냈다. 아무튼 더는 영명의 일로 괴로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직도 영명을 가주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죽는 날까지도 영명은 호부(呼父)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자였다.

여전히 한위가 풀 죽어 있자 연이 넌지시 물었다.

“연오 형님을 뵈러 갈까?”

“좋……지만요. 그게, 저……. 그분이 계셔서…….”

한위가 머뭇거렸다. 연은 한위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익히 짐작이 갔다. 남궁원을 이르는 것이다. 영명이 급사한 후―물론 실제로는 급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찍이 세가에서 손을 뗐던 남궁원이 돌아왔다. 연오가 지나치게 젊은 나이에 가주 자리를 이어받게 되자 그를 도와주기 위해 조부가 잠시 동안 와 있는 것이다.

남궁원은 척 봐도 엄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누구나 그를 어려워하곤 했다. 그러나 천출이라 하여 손자들을 차별할 사람은 아니다. 그걸 알고는 있었으나 연 역시 남궁원이 어려웠기에 한위의 마음이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인사는 드리러 가야지.”

“네에…….”

마지못해 일어난 한위가 연의 뒤를 따랐다. 둘이 향한 곳은 화월당이었다. 창일당은 내년 연오가 가주 자리를 정식으로 물려받기 전까지는 계속 닫혀 있을 예정이었다. 둘이 화월당에 가까이 가자 시비가 쪼르르 달려가 고했다.

“가주님, 연 도련님과 한위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궁원과 연오가 있었다. 최근 연오는 하루 종일 남궁원으로부터 세가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전수받는 중이었다. 남궁원을 보자 한위가 뻣뻣해졌다. 연은 한위와 함께 몸을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조부님, 인사 올립니다.”

“이, 인사 올립니다.”

그래, 하는 대답이 돌아오고 나서야 연이 고개를 들었다. 남궁원은 연과 한위를 살피더니 한참 뒤에서야 앉으라 허했다. 연과 한위를 보는 눈길이 형형하고 예리했다. 한위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바르게 앉았다. 실은 긴장되기는 연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원은 그다지 연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요즘에는 그나마 아랫사람에게 패악 부리지 않고 산다고 들었다.”

바로 연을 향해 날카로운 말이 쏟아졌다. 항상 아우들을 과보호하는 연오가 조부님, 하면서 조심스럽게 개입하려 했으나 남궁원은 손을 들어 막았다.

연은 그저 예의 바르게 굴었다. 남궁원은 연이 아랫사람에게―라고는 해도 모란뿐이지만― 패악을 부렸던 걸 매우 언짢게 여겼다. 혼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패악이라고는 해도 짜증이나 좀 부렸지 대부분은 모란을 향한 화살이었으나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달랐을 것이다.

“뉘우친 바가 있어 제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그러나 또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거라.”

“알겠습니다, 조부님.”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자 남궁원의 엄격한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는 이내 시선을 한위에게 돌렸다.

“네가 한위라고 하였느냐?”

“그, 그렇습니다.”

남궁원은 한참을 한위를 바라보다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울상이 된 한위가 꿈지럭거렸다. 하지만 연은 남궁원이 한위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우들의 경직된 분위기를 알아차린 연오가 화제를 돌리고자 입을 열었다.

“조부님, 연이가 몸이 많이 안 좋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래, 건강해졌다니 좋은 일이지. 그간 정확한 병명도 없이 약도 의원도 소용이 없더니만 어찌 된 일이더냐?”

연은 이 화제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어쩐지 남궁원 앞에서 모란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한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연오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연의 주치의로 붙인 백모란이란 의원이 그렇게 유능합니다.”

“백모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구나.”

조부가 미간에 주름을 잡자 연이 눈을 굴렸다……. 정정하여 기억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세가에서 소식통을 두고 있는지 남궁원은 곧 백모란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연을 돌아보았다.

“백모란이라 하면 연이 네가 매일같이 괴롭히던 그 아이 말이냐? 그런 아이가 주치의가 되어 네 건강을 살피다니, 혹여 겁박을 한 것은 아니더냐.”

“아닙니다, 조부님. 백모란 그자는 진정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원이었습니다. 연이 또한 요즘에는 모란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겁박이 있을 리가요.”

괜히 자신이 꺼낸 말 때문에 연이 타박을 받자 연오가 변호에 나섰다. 그러나 남궁원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궁원은 전에 세가에 들러 아픈 손자를 살피러 왔다가 연에게 핍박받던 모란의 모습을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본인을 불러오면 알 수 있겠지.”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연아.”

연오가 반색했다. 하필 이럴 때에……. 연이 난감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현재 모란은 자리에 없습니다.”

“자리에 없다니?”

주치의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 연오가 눈썹을 찌푸렸다. 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향에 일이 생겨 잠시 내려간 터라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이십여 일쯤 걸린다 하였으니 그 후에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미심쩍게 여기고 있던 남궁원이 혀를 찼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쩐지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았지만 원래도 남궁원은 연을 못마땅해하던 터. 그래도 조부가 한위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이도 약혼을 하였다고?”

“예, 그렇습니다. 백매화란 상단주입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난감한 주제들만 나오는지 연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꾸 모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니 연으로서는 대처하기가 힘들다.

“그래, 어떤 여인이더냐?”

“그…….”

연은 잠깐 고민했다. 어떤 여인이냐고? 한 번도 백매화가 어떤 여식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백매화란 여인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남궁원 앞에서 허술하게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이는 스무 살로 아…름답고 기개가 넘치며…… 강인한 여인입니다.”

여인이며 아름답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연은 최대한 사실을 말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남궁연은 이 짧은 말에 그다지 만족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여기서 더 무언가 말해야 하는 건가? 연이 눈을 깜박이다가 간신히 덧붙였다.

“백모란의 먼 친척입니다.”

“같은 성씨이니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래, 언제 그 백매화란 여인도 한번 만나 봐야겠구나.”

……모란이 여장한 모습을 한 번 더 봐야 한다고? 연은 조부가 ‘백매화’를 마주 보았을 때 자신이 웃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의심이 들었다. 아니, 웃음만 나온다면 차라리 다행인 거겠지.

아무튼 남궁원은 더는 물을 것이 없는지 연오에게 관심을 돌렸다. 연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부를 만나고 나와 페월당으로 향하는 길, 한위는 기운이 쪽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정작 혼난 건 연인데도 심력은 한위가 쏟은 모양이었다. 조부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구나, 넌지시 말했더니 한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요…….”

하지만 연이 보기에는 그랬다. 남궁원은 좋은 말은 잘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빈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간은 영명으로 인해 한위를 거의 보지 못했으니 오늘 처음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별말이 없다는 건 한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다.

“조부님께 혼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네가 잘 처신했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이 말에 한위는 한참 침묵하더니만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왜 사람들은 형님을 싫어하는 걸까요?”

연이 눈을 깜박였다. 오늘 조부가 저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싫어한다기보다는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일 테다. 얼핏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둘의 차이는 컸다. 하지만 한위는 남궁원만을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형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한위가 분한 기색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에 연은 웃고 말았다. 세가 내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건 연도 알고 있다.

그의 앞에서 대놓고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제가 모란이 되기 전에는 얼마나 모시기 까탈스러운 주인이었던가. 게다가 화정당 시비나 하인들은 연이 모란을 이유 없이 지독하게 괴롭히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또한 지독히도 허약하여 세가의 명예에 누가 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무인이 아니던가. 이리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연은 그 미움들에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백 명이 저를 싫어하는 것보다는 한위가 저를 좋아하는 게 더 중요했다.

“네가 나를 좋게 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형님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니.”

연이 잘 달랬으나 한위는 드물게도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연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위가 완전히 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검술 수련을 할 시간이라 한위를 보낸 뒤 연은 은록에게 갔다. 세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모란의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의원까지는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 의원에 가는 길,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연이 모란이 만들어 준 목걸이를 꺼내 보았다. 반들반들하니 마치 주목(朱木)으로 만들어진 나무 패 같아 보인다.

‘체액을 묻히거나 상태가 위험해지면 모란에게 바로 순간이동 된다 하였지.’

하지만 지금 세계에는 모란이 없었다. 그렇다면 모란이 있는 세계로 넘어간다는 의미인가? 궁금했지만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시험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은 다시 목걸이를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의원에 도착하니 언제나 그렇듯이 은록은 사람들을 봐 주고 있는 중이었다. 연은 가만히 앉아 제 사부가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은록은 말없이 제자에게 다가와 맥부터 짚어 보고는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 모란이란 자는 어디에 갔느냐?”

“고향에 일이 있어서 이십여 일 쯤 있다 오겠다 합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사부에게 거짓말을 하는 느낌이라 연은 양심이 좀 찔렸다. 그곳을 고향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한가……? 다행히도 은록은 그저 수긍하고 말았다. 모란이 사라져도 한위나 연오 정도나 묻고 말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궁원이나 은록이 행방을 궁금해하니 난처했다.

연은 은록과 함께 환자의 병세에 대해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은록의 처방에 대한 질의나 밤에 연이 보고 다니는 환자들에 대한 조언 등이었다.

실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가기 전 은록이 연아, 하고 불렀다.

“예, 사부님.”

전에는 은록이 연이라고 불러 주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사람 인생은 모르는 것이다. 은록은 잠시간 연을 바라보았다.

“그 백모란이라는 자와는 언제까지 같이 지낼 생각이냐?”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연이 눈을 깜박였다. 오늘따라 왜 이리 난처한 질문들만 받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모란과 관련해서.

“치료가 끝나면 그자를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은록의 말에 연이 당황했다. 아무리 하늘과도 같은 사부의 말씀이라지만, 갑자기 모란을 멀리하라니? 평소 은록과 모란의 사이가 좋지 않구나 생각은 했지만 이런 말이 나올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저, 사부님. 그리 말하시는 연유를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연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아도 은록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은록은 제자 주려고 지어 놓았던 탕약을 꺼내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자에게는 선이 없다. 혹은 선이 아주 낮거나. 실로 제멋대로인 자이니 네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된다.”

모란이…… 제멋대로인 면이 있기는 했다. 어느 순간 연도 모르게 무언가를 진행해 놓고는 끝에 가서 알려 주곤 했으니. 하지만 선이 없거나 낮다는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은록과 모란은 연에게 있어 귀한 이들이니 가능한 한 변호해 보았다.

“물론 모란이 제멋대로이고 무례하긴 하나,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또한 제 몸을 고쳐 준 은인이기도 하고요.”

“……그래. 네 은인이면 내게도 은인인 셈이지.”

은록은 드물게도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는 듯하더니 이내 밤이 늦었다며 연을 보냈다. 연은 탕약을 손에 쥐고 타박타박 세가로 돌아오면서 고개를 갸웃하였다. 모란 정도면 정말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 창연각 비급 도둑 사건이나 한위 소룡대회 우승 따위를 보면 막 나갈 때가 있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사부님도 모란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실 테지.’

그리 생각하며 연은 화정당으로 향했다.

***

모란이 떠난 지 어느덧 나흘이 지났다. 돌아오기까지는 보름 정도가 남았고, 모란 쪽에서는 어느새 몇 달이나 지났을 것이다. 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란의 하루, 이틀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가슴이 선득해졌다.

‘돌아온 모란은 예전과 같을까?’

일 년이라는 세월은 짧지만 변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다. 연은 과연 돌아온 모란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창을 열어 밖을 보니 하늘이 흐릿하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연은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정원사를 불렀다.

“정원을 가꿀 때 모란꽃과 연꽃도 심어 주게.”

“화중왕(花中王)이라면 어디에든 잘 어울리는 꽃이지요. 마침 연못이 있으니 연꽃도 매우 보기에 좋겠습니다. 연꽃을 심는 김에 연못도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꽃을 심는다면 다른 것이야 아무래도 좋았던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위를 찾아가 볼까 하였으나 오후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그저 얌전히 화정당에 머물기로 하였다. 결국 그날은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걸 보며 차를 마셨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그저 길었다.

비는 다음 날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벌써부터 정원사가 나와 이리저리 밑 작업을 해 두는 걸 지켜보다가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지난번 앱솔의 피가 묻은 옷을 연못 뒤쪽에 숨겨 놓지 않았나. 그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핏자국은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었다. 연은 정원사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성실한 정원사는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갔다.

결국 연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밖에 나설 수 있었다. 바깥이 어두워 아무것도 뵈지 않았기에 우산과 호롱불을 들고 나왔다. 흙이 젖어 물이 추적추적 발까지 스며들었다. 한기가 들었다. 살금살금 연못까지 간 연이 뒤쪽을 파내자 금방 옷이 나왔다. 희미하게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연한 빛이었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빛나는 것도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연이 일단 옷을 가지고 돌아섰다. 뒤뜰을 가로질러 가는 중 돌연 연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어떠한 소리가 그의 귀에 스친 탓이었다.

“뭐지?”

누군가 신음하는 소리 같았으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저만치서 나무를 지고 가는 하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은 찜찜한 마음에 한참을 어정거렸으나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바람 소리 따위를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한기가 훅 밀려들어 연이 몸을 떨며 얼른 화정당 안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유달리 바람 소리와 빗소리가 마치 사람 신음 소리처럼 들려 연은 밤새 뒤척여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제대로 잠을 못 잔 연이 지끈지끈한 미간을 누르고 있는 가운데 정원사가 신나서 꽃 묘종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다. 꽃망울이 조롱조롱 달린 모란꽃이 연못 뒤쪽에 심어지는 걸 보니 어젯밤 비 맞아 가며 옷을 치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원사는 연꽃 줄기도 열심히 심었다.

“어떠십니까, 도련님. 마음에 드십니까?”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봄이 되어 꽃들이 피어날 때를 상상해 보자 괜찮은 듯하여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사는 뿌듯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마저 꾸미러 사라졌다. 하도 열심히 하기에 연은 나중에 정원사에게 따로 보상을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은 모습을 갖춰 가는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폐월당으로 갈 채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일 옆에 있던 모란이 없으니 다소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자꾸만 한위며 연오를 찾아가게 됐다.

‘전에는 분명 혼자 지내도 괜찮았지.’

아니면 혼자 지내는 것밖에 몰라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거나. 예전에 지낼 때에는…… 지금보다 몸이 더 안 좋아 하루 종일 앓으며 잠으로 보낼 때도 꽤 많았고. 연은 모란으로 인해 바뀐 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란이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한 영영화(靈英花)를 피우던 날, 연과 모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내가 영영화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와 모란은 어찌 지내고 있었을까?’

연 자신은 여전히 건강한 채였을 테고, 모란과도 사이가 계속 좋았을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한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갔겠지. 잠깐 상상해 보다가 후회만 불러오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싶어 연이 고개를 저었다.

겉옷을 찾기 위해 자리를 뜬 그는, 화단을 뒤엎던 인부들이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미처 보지 못했다.

폐월당에 당도한 연은 마침 검술 수련을 마친 한위와 주강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한위도 다달이 세가에서 얼마간 돈을 받지만, 그래도 아우에게 맛있는 것이나 옷 따위를 사 주고 싶은 게 형님의 마음이었다. 한위와 함께 객잔이나 시장을 구경 다니며 흘끔 본 주강의 얼굴은 전보다 독기 같은 것이 사라진 듯 보여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오늘 저녁 늦게까지 들를 곳이 있는데 괜찮겠느냐?”

“물론이에요!”

사실 오늘 한위와 주강을 데리고 나온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이라면 모란이 밤에 환자를 보러 다니는 것을 도와주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으니……. 설마 일이 있겠나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모란이 없을 때면 일이 터졌던지라 만전을 기했다.

연이 준비해 둔 면사포를 썼다. 한위가 눈을 빛내고 있어서 한위에게도 건네주었다. 주강은 이게 무언가 싶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주강 형님도 써요!”

한위가 내밀자 주강이 마지못해 면사포를 썼다. 이로 인해 참으로 수상해 보이는 삼인방이 완성이 되었다. 이래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환자들을 보러 갈 때가 되자 한위와 주강일랑 곧 연의 머릿속에서 잊혔다.

연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당분간은 자주 올 수 없을 것 같다고도 귀띔을 해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환자들은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픈 환자들을 진찰하고, 침을 놔 주고, 탕약을 지어 주는 일을 반복하고 나자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는 중이었다. 마지막 환자까지 처방을 하고 난 뒤에서야 연은 면사포를 벗을 수 있었다. 그제야 둘을 보니 한위는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형님 멋져요’ 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의원이었습니까?”

대체 언제부터? 주강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냥대회 사건이 있기 전까지 주강은 거의 하루 종일 연을 감시했으니까. 연은 그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은록에게야 자신이 모란이었다는 걸 밝혔다지만 주강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위와 가까운 이니 의원인 것 정도는 알려도 될 듯하여 오늘 이리 함께 온 것이다. 연이 나름대로 주강에게 보여 주는 신뢰였다.

“그저 예전에 잠깐…….”

연이 얼버무렸다. 주강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연은 객잔에서 둘과 함께 저녁을 먹고 세가로 향했다. 그가 흡족한 마음으로 남궁세가 정문을 지나가려 할 때였다.

돌연 주강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빼 들었다. 뒤에서는 한위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연은 둘의 맨 뒤에 서게 되었다. 주강이 냉랭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제야 연은 세가의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가의 무사 여럿이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뒤에서 정문이 굳게 닫혔다. 무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남궁영명이 죽은 후로 호법장로까지는 아니어도 다시 장로직에 복직된 남궁사영이었다.

“당장 연 공자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았소.”

“나를, 말입니까?”

한위와 관련된 일은 아닌 것 같아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연은 앞으로 나섰다. 검을 쥔 팔을 잡아 누르자 마지못해 주강이 검을 집어넣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따라오면 알게 될 터, 부디 거친 방법은 사용하지 않게 해 주면 고맙겠소.”

그리 말하면서도 사영은 거친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한위가 발끈하여 나서려는 걸 연이 단호하게 막았다. 만약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선에서 끝내야 하지, 절대 한위를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연이 순순히 나오자 무사들도 무기를 거두었다.

사영을 따라가면서 연은 무사들이나 시비, 혹은 하인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수군거리는 분위기나 태도가 그러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사태의 원인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연은 그대로 창일당까지 향했다. 어둑한 저녁이었지만 창일당은 횃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굳은 얼굴의 남궁원과 남궁연오를 보자 연은 이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마치 심문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연 공자를 데려왔습니다.”

남궁사영의 태도는 남궁원을 등에 업은 듯 기세등등했다. 무슨 사건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남궁사영이 이 일을 기회로 세가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조부님, 그리고 가주님을 뵙습니다.”

연은 일단 침착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한위나, 주강, 그리고 연오를 제외한다면 연을 향하는 시선들이 싸늘하였다.

“세가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 일이 있었지. 그것도 아주 극악무도하며 끔찍한 일이 말이다.”

남궁원이 고개짓을 하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오늘 신나서 연의 정원을 가꾸던 정원사였다. 연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떤 그는 크게 엎드려 절했다. 정원사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정원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네 이름과 직급이 무엇이냐.”

“소, 소인의 이름은 교량으로 연 도련님의 정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아라.”

미간을 짚은 연오가 희미하게 침음했다. 그때까지도 연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에 맹세코 극악무도하며 끔찍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정원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연을 한번 흘낏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소인은 오늘, 연 도련님의 지시로 하인들과 함께 정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을 가꾸는 도중, 이, 이상한 소리가 땅속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기에…… 삽으로 파 보았더니…….”

크게 심호흡을 한 정원사가 진저리를 치며 입을 열었다.

“땅속에 사람 네 명이 생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정원사의 말을 듣는 순간 연은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정원사는 아직도 그 끔찍한 순간을 기억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하인들이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며 투덜거리는 것이다. 귀를 기울여 보니 정원사에게도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사람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도 뜰 바로 정중앙에서 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건가 두려워하며 하인을 시켜 땅을 파 본 정원사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땅속에 사람 넷이 묶인 채 파묻혀 있던 것이다. 셋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나머지 한 명은 정원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까무러쳤다. 까무러치고 싶은 건 정원사도 마찬가지였다.

“제, 제 평생 그런 끔찍한 건 처음 보았습니다.”

“지금 말한 것에 거짓은 없느냐?”

“결단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저와 같이 일한 하인들에게 물어보아도 똑같은 답이 나올 것입니다.”

모두 들었냐는 얼굴로 남궁원이 연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연을 향했다.

연은 어떠했냐면,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제 정원에 사람 넷이 생매장되어 있었다고? 정원의 주인인 연으로서도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그는 그제야 비 오는 날 밤에 들었던 기이한 신음 소리가 이해가 갔다. 바람 소리나 빗소리 따위가 아니라 정말 사람이 내는 신음 소리였던 것이구나.

“혹 화정당에 묻혀 있던 사람들에 대해 할 말이 없느냐?”

“…….”

“정녕 네 아는 바가 없기에 그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냐?”

남궁원의 추궁에도 연은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없느냐고? 왜 화정당에 생매장당한 사람들에 대해 할 말이 없겠는가. 하늘에 맹세코 연은 생매장되어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를 알 것 같았기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엉망으로 뒤엉켰다. 모란, 하고 연이 입 안으로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연이 창백하게 질린 채 말이 없자 남궁원이 다음 사람을 불렀다. 세가 장로 중 한 명인 남궁신건이었다. 그는 기관진식과 진법에 조예가 깊어 물러난 남궁사영 대신 창연각의 호법을 맡고 있었다.

“신건, 자네가 오늘 조사해 본 것을 말해 보게.”

앞으로 나온 신건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연은 대충 오늘 세가에서 있던 일들이 짐작이 갔다. 정원사가 생매장당한 사람들을 발견한 뒤에 바로 세가가 뒤집어졌겠지. 남궁원이 온 뒤로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노리던 사영이 곧장 나섰을 터. 그러니 연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가 범인인 것으로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기이한 사술인 듯하여 조사를 해 본 결과, 생매장당한 이들은 생기가 극도로 소모되어 있었습니다. 진법 중에서도 매우 까다로우며 처음 보는 유형입니다. 정파나 사파 어디에서도 보인 적 없는 진법으로, 아직 완벽히 해법하지 않아 확신은 못 하겠으나 추측컨대 사람의 생기를 축출하여 어느 한곳에 모으게 하는 듯합니다.”

‘당연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진법이겠지……. 마법진이니까…….’

증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화정당에서 일하는 시비가 나와 증언했다. 비가 오던 날 밤 자신이 호롱불을 들고 몰래 나와 땅을 파고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앱솔의 피가 묻었던 옷을 파내려던 것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찌 보일지 빤한 일이었다.

“형님이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한위가 소리쳤다. 이제 겨우 세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동생이다. 연은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형님? 하고 한위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것을, 주강이 끌고 나갔다. 모란에 대해 말하려는 걸 안 것이다. 한위는 반항하였으나 주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남궁연. 정말 할 말이 없느냐?”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연은 꾹 입만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변명이나 부정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다.

“저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연아!”

굳은 얼굴로 앉아만 있던 연오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초조하고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으나 연은 일부러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연오는 연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필히 무슨 음모가 있는 게 분명했다.

“연이가 대체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가주님.”

남궁사영이 나섰다. 짐짓 안타까운 척하였으나 의기양양한 기색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연오가 남궁사영을 쏘아보았다.

“최근 들어 도련님의 건강이 급격히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왜 그러했겠습니까. 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수명을 연명한 것이 아닙니까. 동생을 아끼시는 마음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하여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죄인을 싸고도시면 안 됩니다.”

연오가 주먹을 쥐었다. 그도 눈과 귀가 있으니 지금 상황이 명백히 연이 범인임을 가리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남궁사영의 말대로 형제지간의 우애와 정으로 인해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어쩐지 지금 연의 태도는……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만약 연이가 범인이라면 왜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정원을 가꾸라 했겠습니까?”

“연 도련님께서 대범하셨거나 혹은, 죄책감에 그런 식으로라도 남이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남궁사영 장로!”

결국 연오가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남궁원이나 사영에게 추궁받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으나 연오를 보니 심적으로 괴로워진 탓이었다. 남궁원은 연오와 남궁사영의 실랑이를 보고 있다가 손을 들었다. 세가 가장 웃어른의 행동에 둘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조부님.”

“조용히 하거라. 사영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 않으냐.”

“조부님! 부디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봐 주십시오. 연이가 범인이라 하기에는 정황상의 추측뿐,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사술이 관련된 일이니만큼 넘겨짚기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남궁원은 얼굴이 희게 질린 채 아무 말이 없는 손자를 보았다. 그라고 손자를 끔찍한 사술을 행한 범인으로 몰고 싶겠는가? 문제는 연이 적극적으로 항변하거나 부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역시 속이 답답했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세가에 이런 문제들이 있을 줄이야. 영명을 후계로 삼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못난 아들의 탓으로 여겨져 마음이 참담하였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일단 생매장당한 이들이 의식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겠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어 줄 테니.”

그 말에는 연오나 남궁사영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남궁사영의 입술이 일순간 호선을 그린 것은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남궁원은 이어 지시를 내렸다.

“그때까지 남궁연은 의정당(誼正堂)에 감금하도록 해라.”

***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그렇습니다. 말라서 얼핏 봤을 때는 아닌 줄로만 알았지만,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확실합니다.”

무사의 말에 남궁사영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작은 누각으로, 오늘 화정당에서 구출된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창연각 사건 이래로 남궁사영은 내내 남궁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가 내에서 비루하기만 하던 남궁한위의 위치가 갑자기 바뀌게 된 것이나, 소룡대회에서 우승하게 된 것, 모용세가와 추진하던 혼인이 파투 난 뒤 아들의 상단이 갑자기 무너지게 된 것까지……. 최근 사영이 겪은 모든 불행의 중심에는 항상 남궁연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가 이리하는 이유는 남궁원의 신뢰를 얻고 그를 기반으로 다시 원래 직위로 돌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남궁연을 계속 내버려 두었다간 또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막연한 추측일 뿐이지만 요즘 상당히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남궁사영에게는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남궁연이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고 간섭한다는 이론이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치워 둬야만 했다.

해서 그는 화정당에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갔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 사건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라면 사건 초기에 개입하여야만 했다. 도착해 보니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대단한 사건이었다. 사술이라니!

흡성대법* 같은 마공처럼, 사술이란 무릇 이치를 거스르고 사람에게 해악을 미치는 술법이 아니던가. 정파는 물론이거니와 사파인 마교에서조차 사술은 금기시되어 온 행위였다.

만약 사술을 사용하다 발각될 경우 중원의 공적으로 취급받아 단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남궁연은 남궁세가의 직계이니만큼 죽게 되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세가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화정당에서 막 사람을 파내었을 때를 떠올렸다. 곁에 있던 남궁사영의 수하는 화정당에 파묻혀 있던 사람을 유심히 보다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는 재깍 남궁사영에게 제가 알아차린 사실을 알려 왔다. 그 사실을 듣는 순간 남궁사영은 자신이 이걸 어찌 잘 이용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 사실을 잘 이용하러 가는 길이었다.

“시킨 대로 인피면구(人皮面具)*는 잘 씌워 뒀느냐?”

“물론입니다. 워낙 흙투성이로 몰골이 엉망이었기에 얼굴이 바뀐 걸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전각에 도착한 사영은 미리 매수해 둔 무사의 도움으로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닫자 화정당 아래 묻혀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메말라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무사는 사영을 가장자리에 있는 남자에게 안내했다. 가장 상태가 심각하여 폐인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남자가 남궁사영을 보자 눈을 번득였다.

“남궁연이란 자를 알고 있나?”

그 말을 물어본 뒤 남자의 반응을 보고 흡족해진 사영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돌아갈 것 같았다.

“나와 거래를 해 보지 않겠느냐? 일이 잘된다면 넌 남궁연에게 복수도 하고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떠냐?”

“남궁연에게, 복수라고?”

남궁사영의 제안에 남자, 왕자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원수와도 같은 남궁세가의 사내였으나,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

‘분명 모란이 한 일이 틀림없다.’

의정당에서 연은 일의 전말을 정리했다. 당혹스러운 배신감이 가시고 나자 머리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분명 전에 모란은 연에게 기운을 모아 주는 마법진을 화정당에 설치했다고 했다. 그 기운이 설마 산 사람에게서 뽑은 것일 줄이야.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마법진이 들통난 걸까? 연은 전에는 하루 종일 정원에 나가 있어도 사람 신음 소리 한 번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마법진이 하나가 아니라 둘일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 사술 같은 마법진과, 마법진의 존재를 숨기는 또 다른 마법진이라면 설명이 가능하겠군.’

연도 상호작용하는 진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 마법진도 진법의 일종이라면 설명이 된다. 거기에 앱솔의 피가 묻어 있던 옷자락. 앱솔은 전에 제 피가 어느 특정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법을 무효화한다 하였다. 목을 잘라 내어 피를 받아 붓지 않는 이상 그에게 기운을 전달해 주는 마법진이 손상될 염려는 없다고 했었지.

하지만 다른 마법진에는 어땠을까? 가장 중요한, 진법의 정체를 감추는 역할을 하는 진법이라면? 봄비가 내린 날 앱솔의 피가 씻겨 내려가 그 진법을 손상시켜 버렸다면? 그렇다면 갑자기 아래 파묻혀 있던 사람의 소리가 들린 것도 이해가 갔다.

“모란…….”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깊은 한숨을 쉰 뒤 풀썩 침상에 앉았다. 확실히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의정당에 있으니 몸이 피곤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매번 화정당에서 자라 한 것이었구나.

연은 모란이 무고한 사람을 잡아 생매장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짐작이 가는 것은 녹림십오채 도적들이다. 의원 납치 사건 이후로 연은 왕자우가 관아에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모란이 이런 식으로 처리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더욱 답답한 것은 모란이 엄연히 자신을 속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치료를 위해서이지 않았는가. 그간 연의 몸이 빠르게 나은 것이 이 사술과도 같은 진법 덕분이었지 않나. 그러니 연은 남궁원의 추궁에 변호나 부정 따위를 할 수 없었다.

비록 이 일에 연의 의지는 개입되지 않았을지라도, 어쨌든 가장 큰 수혜자는 연이었다. 의지가 없었다 하여 그가 받은 이 수혜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살고자, 혹은 이 일에 책임을 지지 않고자 부정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으로 느껴졌다.

“……정말, 모란이 없으면 나는 항상 이런 꼴이 되는군.”

연이 자조하였다. 이런 일을 저지른 모란이 미웠다가도 또 다음 순간에는 모란이 곁에 있었으면 싶으니, 기분이 널뛰듯 하였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의원이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른 도적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그들의 것을 갈취하는 것은 옳지 않게 여겨졌다. 어찌 다른 사람의 생기를 흡수하여 건강이 나아지는 일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는가?

모란이 오면 대체 무어라 추궁을 해야 하나?

모란이 그를 위해서 한 일이라는 사실이 연의 가슴을 무겁게 찔렀다. 은인이면서 동시에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고, 연인이면서 동시에 배신자였으니.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보는 연은 혼란스러웠다.

한숨을 쉬던 그가 몸을 떨었다. 의정당은 제대로 난방이 되지 않아 쌀쌀하고 추웠다. 또한 누구 한 명 연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자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 것이 다행이다.’

겨우 다른 생각을 해 보려 했으나 다시 모란에게로 생각이 돌아갔다. 싸늘한 침상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혹여라도 이 마법진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았겠지, 그저 조금 기운이 없고 말 정도였겠지, 하다가도 사람을 죽여 가면서 제 몸을 위했다는 가정이라도 하면 숨이 턱 막혔다.

사람에게는 선이 있는 법이다. 다른 자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 중 하나였다. 돌연 은록의 말이 떠올랐다. 모란은 선이 없는 자이며, 있다 하여도 선이 아주 낮다고 했던 그 말이. 모란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직도 모란이 돌아오기까지는 십오 일이 남았다. 연은 그렇게 밤새도록 잠도 이루지 못하고 모란과 화정당의 마법진과, 제 건강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가 불려 간 건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마침내 화정당 뜰에 파묻혀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무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다시 창일당으로 가니 어제보다도 모인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예민한 사안이긴 하지.’

사술을 이용해 제 건강을 회복하려 든 남궁세가의 차남이라니. 남궁세가에 이 얼마나 큰 오명인가. 안 그래도 중원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남궁세가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방에서 물어뜯으려 할 터. 때문에 세가에서 중요한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모여 있었다. 아마도 세가를 완전히 폐쇄한 채 바깥에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게 조치를 취하고 있을 터였다.

“조부님과 가주님을 뵙습니다.”

연이 침착하게 인사를 올렸다. 연오는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다. 남궁원도 마찬가지로 미약하게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연을 보며 세가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남궁사영은 창연각 사건 이래로 가장 당당한 자태로 서 있었다.

“증인이 될 자들이 깨어났으니, 어제 말한 대로 증언을 들어 보도록 하겠다.”

그리 말한 뒤 남궁원이 손짓을 했다. 잠시 무사들이 남자 둘을 부축해 데려왔다.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동정심과 동시에 이 극악한 사술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한 명은 벌벌 떨며 엎어지고 다른 한 명은 겨우 자리에 섰다.

“자네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서, 서걸이라고 합니다.”

“문우……라고 합니다.”

남궁원의 질문에 두 사람이 엎드려 답했다. 남궁원은 두 사람을 살펴보고는 이어 물었다.

“어쩌다가 그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기억은 나나? 범인이 누군지는 아는가?”

서걸이란 자는 제대로 대답을 못 했으나, 문우라는 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땅에 이마를 한 번 찧었다. 그것만으로도 힘겨웠는지 신음하고는 외쳤다.

“알고 있습니다, 대인. 저는 그 악랄한 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자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연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문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다가 연을 바로 발견했다.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러더니 와락 달려들려다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연의 눈에는 그의 발목에 문제가 있다는 게 보였다.

“남궁연! 내 아버지의 원수!”

기어서라도 연에게 가려는 것을 무사들이 당황해 하며 잡아 제 자리에 놓았다. 문우가 침을 튀기며 소리 질렀다.

“저자가 내 아버지를 죽였소! 의원을 가장해 고통스러운 독에 중독되게 한 뒤 치료해 준다고 나를 속였지! 그러고는 아버지를 죽여 버리다니! 네 이놈, 남궁연! 남궁연!”

연이 잠시 눈을 감았다. 알겠다. 저자는 문우가 아니라 왕자우다. 어찌하여 얼굴이 바뀐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문우의 외침에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퍼져 나갔다. 심기가 매우 좋지 않은 남궁원이 크게 갈하였다.

“그만!”

내공을 담은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려 퍼지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저 왕자우가 씩씩거리고 쿨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따름이었다. 왕자우에게 있어서는 남궁세가의 모두가 원수였으나, 그중에서도 남궁연이 가장 증오스러운 자였다. 그러니 연을 모함하라는 남궁사영의 제안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남궁연. 저자의 말이 정말이더냐?”

연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한위가 없었다. 연오가 그랬는지 주강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인 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자의 아비를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뭐라?!”

처음으로 듣는 제대로 된 대답에 남궁원이 기가 막혀 큰 소리를 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 자백에 크게 웅성거렸으나 정작 남궁사영은 눈썹을 찌푸렸다. 왕자우의 아비는 왕장호다. 그 왕장호를 남궁연이 죽였다니, 정말인가? 대체 어떻게? 믿기지가 않았으나 왕자우의 살기를 보면 정말인 듯했다.

“그는 치료할 수 없는 독에 당해 더는 살길이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며 짧은 기간을 살아가느니 안식을 취하게 해 준 것뿐입니다.”

그리고 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왕장호가 죽여 달라 하였으나 그건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녹림십오채의 악명 높은 두목이라 해도, 약조는 약조. 당연하지만 연의 말에 왕자우는 눈이 뒤집히고 속이 끓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어찌 감히 네가!”

이러다가 심하게 흥분한 왕자우가 일을 그르칠 것 같아 남궁사영이 얼른 내보내게 했다. 남궁원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 아비를 죽이고는 그 아들은 너 살자고 사술에 사용했단 말이냐?”

“……그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연의 대답에 저 얼마나 뻔뻔한 태도냐며, 보던 이들이 혀를 찼다. 남궁원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연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이리 나오면 아무리 남궁원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침음하던 결국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

“이 일로 인해 하늘을 날던 남궁세가가 땅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정녕 알기는 하느냐?”

그럼에도 연이 아무런 말을 않자 어찌나 속이 답답하던지 남궁원은 분노조차 일지를 않았다. 그도 이 일이 어딘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게 단순히 연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그런 사술을 저지른 게 아닐 거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연이 원한을 가진 누군가의 음모에 휘말렸거나, 혹은…… 배후가 있거나. 전자라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후자라면 남궁원으로서는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연이 무어라도 항변을 하면 시간이나마 벌고 조사라도 더 해 볼 텐데.

좌중을 둘러보니 극히 연에게 좋지 않은 분위기라. 마침내 남궁원이 판결을 내렸다.

“죄질이 안 좋고 반성도 하지 않는 바…….”

“조부님!”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챈 연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남궁원의 목소리는 엄격했다. 아무리 손자라고 해도 봐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사술을 부릴 수 없도록 단전을 파괴하는 형에 처한 뒤 영원히 세가에 돌아오지 못하게 추방토록 한다.”

“할아버님!”

연오가 아연실색했다. 그는 연이 얼마나 몸이 안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여도 고함 한 번에 피를 토할 정도가 아니었나. 아무리 요즘에는 건강이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몸이 다른 사람보다 약했다. 그런데 단전을 파괴하라니! 몸이 건강한 무인들도 단전을 파괴당하는 충격에 종종 죽곤 하지 않나.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 녀석입니다. 그리하면 연이는 죽습니다!”

“듣기 싫다! 아무리 네 아우라고 해도 중죄를 지은 죄인이다. 앞으로 남궁세가를 제대로 이끌어 나가려면 너도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것이야!”

크게 호통을 치고는 남궁원이 빨리 연을 가두라며 명령했다. 무사들이 얼른 달려와 연의 손목에 한철로 만든 수갑을 채웠다. 연은 고분고분히 그들이 하는 대로 손목을 내밀고, 끌고 가는 대로 옥으로 향했다. 끌려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니 연오는 앞이 까마득하여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다들 물러가지 않고 뭐 하느냐!”

남궁원의 불호령에, 혹여나 불똥이 튈까 다들 허둥지둥 물러났다. 그러나 연오는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남궁원을 따라갔다. 남궁원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급기야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다시 고려해 주십시오. 그 형만은 안 됩니다. 다른 벌을 내려 주십시오.”

“…….”

남궁원이 침음했다. 그도 단전 파괴형이 끔찍한 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연의 몸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 또한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남궁세가는 그냥 지방의 그저 그런 한미한 가문이 아니었다. 법도에 따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이 거대한 세가는 흔들리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영명이 싫어도 자식이었고, 연 역시 손주 녀석이었다. 아들에 이어 손주까지 연달아 잃을 수는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나,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생매장당했던 이들은 연이 그랬다 하고, 연 역시 부정을 하지 않았으니.

“할아버님.”

연오가 다시 매달렸으나 남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안 그래도 영명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다. 이런 시기에 일을 크게 불릴 수는 없었다. 남궁원이 사라지고도 연오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단전 파괴형.

말 그대로 단전을 파괴하는 형벌이다. 단전이란 무엇인가. 무인에게 있어서는 심장만큼이나 중요한 부위였다. 그런 곳을 파괴당한다는 건 영원히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은 단전이 있는 부분을 슥 만져 보았다.

“……어차피 난 무인과는 거리가 멀지.”

그저 내공심법을 익힌 수준이니. 쓰게 웃으며 그가 손을 내렸다. 남궁세가의 옥은 의정당보다 훨씬 춥고 축축했다. 절로 몸이 떨렸다. 그나마 그저께부터 내내 겉옷을 걸친 상태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조부님께서 마음이 많이 약하시구나.’

한위가 남궁원을 어려워하는 만큼이나 연도 그가 어려웠다. 영명이 세가를 물려받고 난 뒤 그는 일 년에 몇 번 정도만 세가에 오곤 했다. 조부라고는 해도 혼난 기억밖에 없으니 연은 도통 그가 가깝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남궁원을 보니 그가 나름대로 자신을 아끼는 것을 알겠다.

그러니 드는 마음은 죄책감이라. 연오는 물론이고 남궁원마저 어떻게든 연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려고 하는 걸 보며 연은 가슴 한구석이 죄이는 듯했다. 그도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나 이 일에 대해서는 차마 결백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차츰 지날수록, 연은 옥이라는 장소가 지내기에는 참으로 고생스러운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기가 가장 괴로웠고 두 번째로는 손에 차인 수갑이었다. 그나마도 연이 무인보다는 일반인에 가깝기에 수갑으로 끝난 것이리라. 아니었다면 온몸을 꽁꽁 묶이다 못해 형틀에 매달려 있었을 텐데.

‘단전이 파괴되면 난 아마…… 죽을 가능성이 높겠지.’

단전 파괴형이 선고되는 순간 연오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그는 잘 안다. 이 몸으로 단전을 파괴당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며칠 내로는 죽을 것이다.

“죽음이라…….”

항상 제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언제나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던 날이 있었는데, 왜 지금에 와서는 이토록 마음이 달라진 것인지. 연의 중얼거림에 답하는 이가 있었다.

“죽음이 두렵소, 연 도련님?”

“……남궁사영 장로.”

연이 고개를 들었다. 남궁사영이 짐짓 안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왜 이 옥에 찾아왔는가 하여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그런 사술을 부린 것이오? 그저 전처럼 얌전히 지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조금 더 오래 살려다 빨리 가게 생겼군. 아니 그러한가?”

남궁사영이 독설을 하는 걸 그저 듣고 있다가 연이 입을 열었다. 그도 결코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창연각 사건 말입니다, 장로님.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침입했던 고수가 마치 하늘이나 땅으로 꺼진 듯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또한 우연하게도 훔친 비급서의 무공들을 한위가 익히고 있으니.”

연의 대답에 남궁사영이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가 바짝 다가왔다. 언제 즐거워하며 독설을 했냐는 듯이 얼굴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역시 네놈이 한 일이었구나!”

“창연각뿐이겠습니까. 하필 장로님의 아들이 운영하던 상단에서 내부 고발자가 나온 게 그토록 고대하던 제 혼인이 파투 난 뒤라니, 그 또한 참으로 기이한 우연입니다.”

어찌하지는 못하고 남궁사영은 옥 밖에서 이만 빠득빠득 갈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내심 창연각 사건이나 혼인사건에 연이 무슨 짓을 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사실임을 확인하자 새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로님의 불행이 그것으로 끝날 것 같습니까?”

“무어라고?”

연이 웃었다. 굳이 영명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궁사영은 원래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그가 세가에 남아 있는 한, 끝까지 한위에게 방해가 되겠지. 연은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보름 후 돌아온 모란이 가만있지는 않으리란 건 잘 알았다.

“앞으로 일어날 불행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터인데, 지금이라도 세가를 떠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름 진심으로 권하는 것이었다. 당사자야 모르겠지만 그는 모란이 땅속에 파묻어 버릴까 말까 하는 대상에 속한 적도 있었다.

남궁사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연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창연각 사건 때 그를 비참하게 패배시킨 자는 분명 굉장한 고수였다. 연이 얼마든지 사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주란 것도 돈과 연락 수단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감시가 치밀한 이 감옥에서는 불가능하다. 남궁사영은 크게 비웃었다.

“두고 보아라. 모레 형을 집행할 때도 네놈이 그렇게 태연한 낯짝으로 있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연이 무시하니 화가 치민 남궁사영이 철창을 걷어찼다. 과연 세가에서 손에 꼽히는 무인답게 철창이 움푹 패여 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무시무시하게 연을 쏘아보다가 떠나는 걸 보며 연이 미간을 접었다.

“모레……인가.”

세가에서 이 일을 얼마나 빨리 처리하고 치워 버리려 하는지 그 노력이 보였다. 한숨을 쉬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었다.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이, 곧 열이 올라올 징조였다. 모란만 생각하면 속이 복잡하여 끓는 듯하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궁원이 찾아온 것은 새벽, 한기에 미열이 올라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눈을 감고 기대어 있다가 불현듯 눈을 뜨니 남궁원이 철창 앞에 서서 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이 비틀거리며 바로 앉았다.

“조부님.”

“정말 네가 그랬느냐?”

연은 이게 남궁원이 주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다. 잠시나마 갈등이 들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짐한 바가 있기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 책임입니다.”

“드릴 말이 없다, 제 책임이다, 그리 말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하거라. 정말 네가 한 일이 맞느냐?”

남궁원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연만큼이나 그도 괴로운 밤을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연은 새삼 그가 꽤 나이가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나 영명이 죽은 뒤로 부쩍 그런 듯 보였다.

“아니라면 최소한 잘못을 뉘우치기라도 하거라. 이 일에 대해 반성조차 없는 것이냐?”

잘못이라도 뉘우친다면 남궁원은 단전 파괴까지는 하지 않고 손과 발의 맥을 끊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연은 입술을 달싹이고는 말 뿐이었다. 실망한 남궁원은 올 때처럼 다시 조용히 옥을 떠났다. 그가 완전히 떠난 뒤에야 연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그는 참으로 이기적이었기에 남궁원이 원하는 대로 인정하거나, 부정하거나, 혹은 거짓된 반성조차도 할 마음이 없었다. 도리어 지금 연의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이때가 세가를 떠나기에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모용단리가 죽은 뒤 십 년 내내 세가를 떠나고 싶다 생각하며 지내 왔다. 그만큼 세가가 싫었다. 모란이 돌아오고, 한위와 친해지게 된 지금은 전처럼 세가가 싫지도 않을뿐더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완화되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평소에 인망이나 신뢰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리 단번에 내가 사술의 범인이라 믿은 것이 아닌가.’

과거에 한 행실이 있으니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연은 목의 줄을 잡아당겨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모란이 아주 대책 없이 떠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차피 자신의 상태가 위중해지거나, 피가 묻거나 했을 때에 작동한다 하였으니 단전 파괴형을 받게 된다면 필시 작동할 것이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작동시키는 것이 낫다.

‘만약 제대로 기능을 한다면 말이지.’

듣기로는 모란이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되어 있다고 했지만, 모란이 없는 지금은? 연은 목걸이가 제대로 작동할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작동시켰을 때 과연 일이 어찌 될 것인가? 모란이 있는 다른 세계로 가게 되나? 아니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계속 옥중에 남아 있게 되나? 연이 생각에 잠겨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리 떠나게 된다면, 그 뒤에 다시 한위와 연오 형님을 볼 수 있을까? 이후로 연은 세가에서 아예 없는 취급당하게 될 텐데. 그래도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이, 저 없어도 한위는 괜찮게 지내겠지 싶었다. 이제는 영명도 없는 데다가 주위에 한위를 아끼는 사람들이 꽤 늘었으니. 무엇보다 지금의 한위에게는 주강이 있었다.

마음을 굳힌 연은 목걸이를 손에 꾹 쥐었다. 붉은빛으로 반들거리는 목걸이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럽게 목걸이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다시 떼어 낸 순간, 연의 신형이 옥에서 사라졌다.

잠시 허공에 뜬 족쇄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더는 죄인이 없는 옥에는 서늘한 침묵만이 자리 잡았다.

***

“도련님.”

시비가 난감한 얼굴로 불러도 한위는 차려진 상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더 불러 보다가 시비는 완전히 식은 음식들을 내갔다. 연이 사람을 납치해 생매장하는 끔찍한 사술을 행했다는 의혹에 휘말린 뒤로 한위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형님이 그러셨을 리가 없어.”

한위가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연을 향한 한위의 신뢰는 맹목에 가까웠다. 그에게 있어 연은 형제이며, 한위의 어미나 다름없는 유모가 심하게 아팠을 때 살려 준 은인이었다. 또한 그가 세가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그는 연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그저 연을 남궁세가의 병약한 차남으로 보았지만 한위에게 연은 의원이었다. 그는 사람을 살렸으면 살렸지, 악의로 죽게 만들 사람은 아니었다.

점차 세가에서 당당히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가면서 한위는 연에 대한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비나 하인들, 혹은 장로에게서 오르내리는 연의 평가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병약하고 허약한, 신경질적인 사람. 성취가 부족해 세가에 누가 되고 폭력적이며 자질이 부족한 사람. 심지어는 장차 크게 자랄 한위를 이용하려는 것 같으니 주의하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한위가 형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반발하면 어려서 뭘 모른다는 태도로 쯧쯧 혀를 찼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뭘 모르는 것이다. 과거에 모란 형님을 죽도록 팼다니, 한위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모란과 연이 얼마나 사이가 좋던가? 또한, 모란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던가? 일 년 동안 아공간에서 한위는 똑똑히 목격했고 또 직접 몸으로 겪었다. 모란은 그가 아는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가장 자비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모란의 그 눈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만일 화정당에 누군가를 생매장할 사람이 있다면 단연 모란 형님이라고, 한위는 생각했다. 이 사건을 지켜보는 제삼자의 시각 중에서는 가장 정확하기도 한 판단이었다.

‘남궁사영.’

한위가 주먹을 쥐었다. 드물게도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품은 그는, 이내 연을 향한 걱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주강이나 시비나 아무도 그에게 연에 대한 언질을 해 주지 않았다. 한위는 마치 세가 내에서 붕 뜬 섬에 홀로 갇힌 느낌이었다.

“왜 모란 형님은 나타나질 않으시는 걸까.”

이런 상황에 대체 어딜 가 있는지 한위는 알 수가 없었다. 방을 초조하게 거닐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도 해야지 싶었다. 그가 폐월당을 나서자 밖에 서 있던 주강이 바로 따라붙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한위가 물었다.

“형님도 연이 형님이 그러셨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주강은 연이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다 아니다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호인의 얼굴로도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이 일에는 어딘가 거슬리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바로 모란의 행방이다.

만약 연이 그랬다 해도 혼자서 사람을 납치해 와 화정당 마당에 묻는다는 건 힘드니, 아마 조력자가 있었을 터. 이 경우에 그 조력자는 모란일 것이다. 아니면 모란이 바로 범인이거나.

그러나 이 모든 걸 떠나 일이 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건 확실했다. 이대로라면 연은 세가에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게 한위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주강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남궁세가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가 사라졌고 복수도 성공적으로 마친 셈이니, 이제 주강에게 남은 건 조카가 어찌 잘 자라나 지켜보고 돌보는 것뿐. 한위는 아직 어리고 치기 어리다. 때문에 그가 혹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주강은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한위에게 남궁세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직 세가에서 한위의 입지는 불안정했다.

“연이 형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주강에게 부정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자 한위의 어깨가 더욱 처졌다. 그는 조부가 지내고 있는 정영당(靜影堂)으로 향했으나 무사들에게 가로막혔고, 화정당에도 향해 보았지만 역시나 출입을 금지당했다. 연이 감금당해 있는 의정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문밖에서 보자 사술에 대한 조사를 위해 화정당의 연못이며 뜰이며, 안채까지 죄다 뒤엎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한위는 가슴이 아팠다. 그토록 아름답던 곳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는 마지막으로 화월당에 향했다. 다행히 화월당마저 출입을 금지당하지는 않았다. 들어서니 연오가 한위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는 부쩍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이 일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당장 연을 ‘더 깨끗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장로를 상대하다가 보낸 뒤였다.

“한위야.”

“형님.”

연오의 얼굴을 보자 미약하게 걸고 있던 기대가 사그라들었다. 한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증인들에게 증언을 듣는다 하지 않았나요? 그건 어찌 되었습니까?”

한위의 질문에도 대답 없이 연오의 얼굴은 어두워지기만 했다. 한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면 연이 형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분명 이틀 전만 해도 연과 즐겁게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이렇게 상황이 변할 수 있는지 한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 연오의 얼굴이 침착해졌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이제 그는 가주였고, 언제나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연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어 애가 끓기는 하였으나 섣불리 어찌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기는 하지 않는다. 상황을 낫게 만들기 위해 가능한 노력해야만 했다.

“연이를 보러 가자꾸나.”

오래도록 못 보게 될 수도 있으니. 연오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주강의 얼굴을 보니 여기서 연이 단전을 파괴당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한위뿐인 것으로 보였다. 부러 사실을 감추는 것이다.

의정당이며 화정당을 가도 연을 볼 수 없던 한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연오의 발길이 화월당을 나가, 남궁세가 외곽, 그중에서도 지하의 옥으로 향하자 한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세가에서만 자란 한위라도 차고 냉한 기운과 어두침침한 지하며 횃불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았다.

“설마 형님이 여기 계시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하지만, 여기는…….”

형님이 지내시기에는 너무 춥고 형편없는 곳인데. 한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연오를 보자 옥지기가 얼른 인사를 했다. 그는 요새 얼굴도 보기 힘든 남궁원이나 남궁사영에 이르러 연오까지 보게 되어 속으로 내심 당황했다. 원래라면 이따금 말 안 듣는 무사들이나 며칠 가두는 데 사용되는 곳이라 하루 종일 지루하게 자리를 지키는 게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연오의 옆에 있는 한위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해 식은땀을 흘렸다.

“연이는 어디에 있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옥지기가 깍듯이 대하며 앞섰다. 그도 어제 오늘 세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에 대해서 들었다. 무려 정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남궁세가의 차남이 사이한 술법으로 목숨을 연장하였다는 사건.

여럿 사람들의 입과 귀를 거치는 동안 어느새 사건은 시체가 한 무더기 나왔다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때문에 행여 저주나 사이한 술법을 받지는 않을까, 옥지기들은 부러 남궁연이 있는 옥방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남궁연이 위치한 옥방은 그나마 여기서도 좋은 위치에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기는 해도 어쨌든 미약하게나마 해도 들었고 지푸라기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연오와 한위의 눈에는 그리 보일 리 없으니, 둘의 얼굴은 점차 안 좋아지기만 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옥지기가 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가?”

“아니, 아니 그것이. 그것이…….”

옥지기가 땀을 뻘뻘 흘렸다. 분명 옥 안에 죄인이 얌전히 잡혀 있어야 하는데 도착해 보니 있는 것은 지푸라기 더미뿐이었다. 뒤에는 가주께서 서 계시고, 앞에는 옥방이 텅텅 비어 있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옥지기는 얼어붙어 서 있기만 했다.

이 옥방이 어떤 곳인가. 사방은 돌로 된 벽이요, 철창이 빽빽하게 덧대어져 있는 데다가 출입구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철창문 또한 열쇠가 없으면 절대 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옥방인데 죄인이 없다! 심지어 한철로 만들어진 무거운 수갑 또한 고스란히 바닥에 남아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연오의 눈이 빛났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리고 경종(警鐘)을 울리려는 옥지기를 연오가 막아 세웠다. 그리고 엄격하게 말했다.

“이게 뭐 하려는 짓인가?”

옥지기가 어리둥절해했다. 죄인이 탈출한 건 아주 큰일이 아니던가. 특히나 상대는 세가의 직계 도련님이었다. 그것도 바로 내일 단전 파괴형이 예정되어 있는 중죄인이다.

“죄, 죄인이 탈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방팔방 알릴 셈인가? 세가에서 이 일을 조용히 묻으려고 하는 것을 모르는가?”

그, 그렇구나. 옥지기는 자신의 짧은 생각을 탓했다. 남궁세가에서 왜 이리 서둘러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하겠는가.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질 경우 큰 낭패를 보기 때문이었다. 마침 제 앞에는 이 세가의 가장 높은 상급자가 있었으니 굳이 밖에 나가 알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일단 가서 조부님을 모셔 오게. 급하고 은밀한 일이니 조용히,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다녀와. 아무도 이 일을 알아서는 안 되네.”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옥지기가 식은땀을 흘리며 타탁 급한 발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연오와 단둘이 남았을 때에서야 한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형님이, 탈…옥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테니, 누군가가 도와준 것이 아닌가 싶은데.”

한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모란이었다. 역시 연이 형님이 위험에 처했는데 모란이 내버려 둘 리가 없다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오는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옥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유심히 살폈다. 의아한 것은, 풀리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에 남아 있는 수갑이었다.

‘풀리지도 않은 채가 아닌가.’

연을 옥에서 꺼내려면 일단 수갑을 풀어야 한다. 수갑이 옥에 연결되어 있으니까. 한데 수갑은 풀린 흔적이 없었다. 풀지도 않고 어떻게 손을 빼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살피다 연오가 다시 수갑을 내려 두었을 때였다. 남궁원이 도착했다. 그는 텅 빈 옥과 연오, 그리고 한위를 보더니 옥지기를 다시 내보냈다.

“네가 그랬느냐?”

“조부님이 그러셨습니까?”

거의 동시에 묻고는 남궁원과 남궁연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연오가 입을 벌렸다. 그는 연을 빼돌렸다면 필시 남궁원이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럴 만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남궁원뿐이었으니까. 연오가 연을 빼돌렸다고 생각한 건 남궁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당황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네가 한 게 아니란 말이냐?”

“이 옥에 내려온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허면 대체 누가?”

누군가 연을 도와준다면 남궁원, 연오, 그리고 둘을 제외한다면 한위 정도밖에는 없었다. 잠깐 남궁원과 연오의 시선이 한위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한위는 연을 매우 따르긴 하였으나 탈옥을 시킬 능력은 없었다. 한편 둘이 심각한 것과는 달리 한위는 이리 생각했다.

‘역시 모란 형님이 하신 게 틀림없어.’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는 연이 예전에 세가를 떠나겠다 말했던 걸 떠올렸다. 한위는 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갔다. 이번 사건에서 연오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연이 그러했을 것이라 말했으니까. 또 한편으로 한위는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가주님이 살아 계셨다면…….’

연 형님은 이보다 더 심한 처지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이라면 그 생각에 스스로 놀랐겠지만 한위는 이제는 그저 무덤덤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혹은 얼마나 홀대받았었는지 차츰 깨우쳐 가는 중이었다.

“일단은 조용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 편이 좋겠구나.”

연을 데려간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해 찜찜하였으나, 어쨌든 연오는 당장 연이 내일 단전 파괴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돌린 기분이었다. 그는 옥지기에게는 입단속을 시킨 뒤, 장로들과 각 대(隊)의 대주(隊主)들에게 은밀히 이 사실을 알렸다. 다들 연이 옥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에 놀라워했다. 특히나 남궁사영의 충격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갑자기 연이 한 말이 떠올라 남궁사영이 이를 악물었다. 더 큰 불행이 다가올 테니 세가에서 떠나라고 했던가. 분명 창연각 사건 때 침입한 고수와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닿아 탈옥한 것이리라. 그의 마음이 기이한 불안감에 술렁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수라 하여도 연이 세가의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혹 모르는 일이었다. 남궁원이나 남궁연오가 연을 빼돌렸을 가능성도 있으니. 사영은 후자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천풍대(天風隊)로 하여금 안휘성을 샅샅이 뒤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 장로 분들도 이 수색에 협조하기를 바랍니다.”

연오의 말에 각 장로들이 한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긴히 추적하여 꼭 찾아내겠다는 대답이었다. 그중에서도 사영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안휘성을 샅샅이 뒤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로들을 돌려보낸 뒤 연오는 긴밀히 암뢰대(暗雷隊)를 불러냈다. 손꼽히는 고수들로 이루어진, 충성스러운 대대였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가주만이 알고 있었다.

“연이를 찾아내되, 다른 장로들이나 대주들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이상하게 여길 법한 명령이었으나 오로지 가주의 말만 따르는 암뢰대는 의문도 가지지 않고 그저 그리하겠다는 충성스러운 대답을 돌려주었다. 암뢰대는 추적에 능한 이들이었다. 연오는 그들이 연을 찾아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 마침내 사흘이 되는 날에도 연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하늘이나 땅으로 꺼진 것만 같았다. 연오는 내심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이 대체 어찌 지낼까 걱정스러웠다.

연오와 달리 남궁사영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지기만 하여 거의 날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세가의 일도 내팽개치고 안휘성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연의 약혼녀라는 백매화의 상단과 주루에 압력까지 줘 가며 뒤지고 다녔지만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세가로 돌아왔다. 대신 화정당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나올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미 파헤친 뜰을 다시 파헤치고 더 깊게 파냈다. 흡사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동생이 도망친 걸로 이미 한시름 놓은 연오는 남궁사영을 내버려 두었다.

“장로님! 여기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연이 사라지고 아흐레 되는 날, 열심히 땅을 파던 무사가 외쳤다. 남궁사영이 반색하며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러고는 제 눈을 의심했다. 무사가 파 놓은 깊은 구덩이 안쪽에 이상하게 은은한 금빛으로 빛나는 석판이 있었다. 석판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림처럼 새겨져 있었다. 새 증거를 확보한 남궁사영이 씩 웃었다.

“아무래도 사술에 사용된 재료 같구나. 꺼내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무사는 사영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흙을 팠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흙일 텐데 아무리 파도 석판 주위의 흙이 바위처럼 단단하여 삽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기이한 현상에 무사가 겁을 먹었다. 진척이 없자 사영은 쯧, 혀를 차고는 검을 빼 들었다.

“저리 비켜라.”

쓸모없는 것, 하고 중얼거리며 그가 흙 위로 검을 내리꽂았다가 뒤로 물러났다. 손이 얼얼하여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군.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이를 악문 남궁사영이 검을 치켜들었다. 검에는 퍼런 검기가 웅웅 어려 있었다. 그가 검기를 두른 검을 있는 힘껏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마침내 검이 푹, 흙 속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쨍, 하고 무언가 크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남궁사영은 무언가 묵직한 바람 같은 게 자신을 스쳐 지나간 건 알 수 있었지만, 정확히 무언지는 알지 못했다. 뚜둑 소리와 함께 금빛으로 빛나던 석판에 금이 갔다.

“사, 사술이 깨진 듯합니다.”

지켜보고 있던 무사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남궁사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사술을 깼다. 이는 남궁원에게 말하면 공적(功績)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당장 깨진 석판을 들고 남궁원에게 향했다. 사라진 손주 걱정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남궁사영을 보고는 내심 언짢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사영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화정당에서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쉬이 캐내어지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사술에 사용된 물건인 듯하여 부서뜨렸는데, 사술이 완전히 깨어진 모양입니다.”

자신이 사술을 깨었노라 보고하자 한결 표정이 좋아진 남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술을 깨트리다니, 자네가 큰일을 해 주었군. 그래…… 남궁사영이라 하였나?”

“그렇습니다.”

속으로 웃으며 남궁사영이 고개를 숙였다. 연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되었다.

십이 일째 되는 날에도 연을 찾지 못하자 남궁연오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말 못 할 죄를 저지른 동생의 단전을 파괴하여 세가에서 내쫓았다고 발표했다. 이런 식으로 덮어서라도 동생을 살리고 싶었다. 더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던 장로들도 이에 동의했다. 단지 남궁사영만이 계속하여 은밀히 연을 찾았다. 그는 연을 죽여 없애야 이 술렁이는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연이 사라진 지 십오 일째 되는 날이 왔다.

고향에 갔다던 백모란이 남궁세가의 정문 앞에 나타났다. 시장에 들렀다 왔는지 그의 손에는 금귤이며 딸기가 들려 있었다. 떠날 때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똑같은 모양새였다. 모란은 정문을 지나 휘적휘적 걸어 화정당으로 향했다. 그러다 화정당에 이르기도 전에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라.”

중얼거리는 모란의 낯이 싸늘했다. 화정당의 마법진이 모조리 깨어져 나간 걸 인지한 것이다. 마법진이 깨어졌을 때 반작용은 술자에게 가도록 되어 있으나, 술자가 다른 차원에 가 있게 된다면 어찌 되는가? 그다음 사람을 향하게 된다.

모란은 즉시 마력 탐지로 연의 위치를 찾았다. 세가에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금귤이며 딸기 따위의 과일이 순식간에 파삭 말라붙어 먼지로 흩어졌다.

모란은 화정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떠날 때만 해도 꽃들로 풍성하여 아름답던 정원은 모조리 파헤쳐진 채였다. 연못의 물도 빠져서 죽은 잉어들이 바닥에 흉하게 널려 있었다. 모란의 눈이 그 모습 하나하나를 담았다.

‘연이는?’

화정당에 얌전히 있어야 할 연은 어디로 가고, 정원은 왜 이 난리란 말인가. 그가 으득, 이를 갈 때였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세가의 무사였다. 얼마 전의 일이 일이니만큼 그가 경계하며 모란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여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누구냐!”

“남궁연 도련님의 주치의인데…….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주치의라는 말에 경계를 푼 무사가 미심쩍어하면서 무기를 내려놓았다. 모란을 위아래로 살펴보고는 익숙한 얼굴임을 확인한 그가 쯧쯧 혀를 찼다.

“소식에 늦어도 한참 늦구만. 남궁연은 사술을 부린 죄로 단전이 파괴되어 세가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단전이, 파괴되었다고?”

모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금니가 맞물리며 빠득 하는 소리가 났다. 누구의 무엇을 어쨌다고? 차가운 분노가 삽시간에 몸을 점령했다. 다시 엉망진창인 화정당을 둘러보았다. 목구멍이 서늘하게 죄여 왔다.

“그래. 화정당에 불쌍한 사람들을 생매장해 두고 생기를 흡수하고 있었더군. 어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무사가 그제야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는 흠칫 얼어붙었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모란이 다가오자 그가 어, 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나자빠졌다. 그는 이토록 두려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모란이 제게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산에 깔리는 듯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럼 어디로 내쫓았지?”

“그, 그건…… 아마, 소…가주님이 아실…….”

모란은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거품을 물며 넘어가는 무사를 바라본 뒤 지나쳤다. 휘적휘적 화월당으로 가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찬찬히 생각하고 상황을 짚어 볼수록 이가 갈렸다. 금빛 분노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은 이 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았나. 주위를 둘러보던 모란의 눈에 창일당이 보였다.

“저것이 좋겠군.”

모란의 눈에 금빛 고리 세 개가 영글었다. 나머지 아홉 개는 왼손에 기이하게 걸렸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일당(昌日堂). 세 개의 해가 있는 장소는 이제 별로써 스러질 터다.

그가 손을 들자 각기 다른 금빛의 고리들에서 별 무리들이 뚝뚝 떨어졌다. 단연코 눈에 띄는 행동이니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시비며 하인들이 놀랐다. 그들은 모란의 모습에 제 눈을 의심했다. 난생처음 보는 행위였다.

“저게 대체 무어야?”

“무공인가?”

모두가 자리에 멈춰서 모란이 하는 행동을 구경했다. 손에서 떨어지는 작은 별 무리들은 정말이지 사람의 눈을 홀리는 것이었다. 모란의 행동은 곧 무사의 시선도 끌었다.

“넌 누구냐!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수상쩍은 행동에 얼른 달려온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흘깃 보고는 모란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밤도 아닌데 하늘 위로 별들이 반짝이며 떴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광경 같았으나 결코 아름답게만 볼 수는 없었다. 저 별들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끼치는 스산함이 있었다.

무사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모란의 손이 느리게 금빛 궤적을 허공에 긋는 걸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던 별이 긴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별의 꼬리가 길어지며 점점 커지더니 이내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되었다.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는 도망가고 누군가는 넋을 놓았다. 마치 거대한 우박 같은 불덩이들이 창일당 지붕을 부수었다. 눈부신 섬광이 튀었다. 하나를 시작으로, 셀 수도 없는 별들이 창일당을 때려 부수었다. 불길이 치솟고 찬란한 별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창일당은 순식간에 거대한 불구덩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부수고 또 부수려는 듯, 두려울 만치 아름다운 별들이 떨어졌다. 이 광경은 화정당, 화월당, 의정당, 폐월당…… 어디라 할 것 없이 남궁세가 모두에게 보였다.

눈부신 재앙 앞에, 세가 전체에 요란한 경종이 울렸다. 그랬다. 실로 이것은 재앙이었다.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어떠한 거대함이었다.

모란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볼 때까지 그 일을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지진이라 여겨질 정도로 지반이 쿵하고 울렸다. 커다란 별을 창일당에 처박아 넣은 뒤, 그가 불타는 건물을 뒤로 하며 입으로 히죽 웃었다. 시비나 하인들은 도망갔고 나머지 이들은 갑자기 닥쳐온 재앙에 망연자실했다.

“연이는 어디에 갔지? 누구 대답할 수 있는 자 있나?”

낯선 자가 가져온 재앙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하는 행동이나 기이한 금빛으로 빛나는 눈과 왼손 덕분에 그 누구도 모란이 이 일을 했음을 의심치 않았다. 하나 창일당이 부수어지는 소란에 한달음에 달려온 연오는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백모란?”

그가 아는 백모란은 연의 주치의이자 오래도록 알고 지낸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백모란은 창일당을 단숨에 거대한 불구덩이로 만든 거대하고 두려운, 어떠한 존재였다. 어찌 지금까지 이 정체를 숨겼을까,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선득해졌다.

“사, 사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가 모란의 시선을 받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모란이 형식적으로나마 지은 미소를 뚝 멈추었다.

그는 놀란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릴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연이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 하늘에서 별을 끌어왔다. 대낮에 반짝거리며 빛나는 별들은 이제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리며 그가 물었다.

“연이는 어디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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