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아, 예전에 그런 꿈을 꿨었지.’
가물거리는 와중에 연이 떠올렸다. 모란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야릇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개꿈인가 하고 지나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예지몽이었다. 예지몽을 꾸어도 하필…….
눈을 떠 보니 방이 동트기 직전의 푸른빛에 잠겨 있었다. 모란은 연을 이불로 둘둘 감아다가 끌어안고 있었다. 내내 그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자고 일어난 건지, 그는 연이 눈을 뜨자마자 턱을 괴고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 씩 웃었다.
“으…….”
몸을 뒤척이던 연이 신음했다. 몸은 보송보송하니 쾌적한 상태였지만 말하기 민망한 그곳이 얼얼했다. 몽둥이 같은 것이 셀 수 없이 드나든 탓에 아직도 벌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허리 아래로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고 흐물흐물 마비가 된 느낌이다.
‘몇 번이나 했더라…….’
못해도 세 번은 한 건 확실했다. 종내에는 까무룩 기절하듯 잠들고 말아서 모르겠지만, 설마 기절한 사람을 잡고 하지는 않았겠지. 몸 상태가 가뿐한 느낌이 확실히 치료를 한 모양이었다. 이제 몸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연은 오래 걷는 것 정도로는 숨도 차지 않았다. 밖에만 나가지 않는다면 손발도 따스했다. 문득 궁금해져 연이 물었다.
“치료는 어느 정도나 남은 거야?”
“글쎄, 지금 이대로 쭉 가면 한…….”
말꼬리를 흐리면서 모란은 영 마음이 착잡하였다. 본원지기란 마치 촛불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일단 사라진 건 돌이킬 수가 없다. 연은 이미 그 초를 반절 넘게 태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갈라진 혼을 꿰매어 이어 붙이면 뭐 하나. 그래도 길어 봤자 이십여 년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을. 이십여 년이라니, 얼마나 빨리 흘러 사라져 버리는 세월인가?
다른 사람의 초를 가져다 대신 태우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무림에서 사술이라 일컫는 방법이었고 모란도 내키지는 않았다.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역시 다녀오는 수밖에는 없나…….’
하여 모란은 차원을 넘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마타모를 처리하는 대신 아이낙스에게 대가로 요구할 만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실리낙스의 눈이다. 실리낙스가 백 년에 한 번 탈피할 때 드물게 눈도 같이 떨어지는데 모란이 알기로는 아이낙스가 그것을 세 개 가지고 있다. 타마타모를 상대할 때는 모란도 제법 각오를 다져야 했으니 그 정도는 대가로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혼을 이어 붙인다고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닌 것을. 모란이 잠시 제 손에 무엇이라도 든 것처럼 바라보다가 이내 주먹을 쥐었다. 연이 실리낙스의 눈을 취하게 된다면 당장 씻은 듯 좋아질 수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낳는다.
“……빠르면, 완치까지 한 달 정도.”
한 달……. 한 달이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연은 가슴이 뛰었다. 건강한 몸이라니. 이제는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생경함이었다.
“모란 당신은 혼 좀 찢어진 일로 죽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항상 시시각각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거든.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해 줘서 많이…… 안심이 되었지.”
모란이 생각에서 빠져나와 바라보자 연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정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연이 웃는데 모란은 덥석 입을 맞추고 말았다. 혼이 찢긴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혼이 아주 조금 찢어진 수준이라는 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지금이라도 치료를 그만두면 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돌아갈 터였다.
많이 이어 붙이긴 하였으나 여전히 본원지기가 새어 나가는 게 모란의 눈에는 보였다. 새어 나가는 이상으로 퍼 넣어 줘도 또 다음 날이면 빈다. 전에는 콸콸 쏟아지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졸졸 흐르는 정도라는 게 다를 뿐.
그러나 모란은 연에게는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 주기로 다짐하였다. 제 것을 도려내어 연의 것을 이어 붙이고 생기를 흘려 넣어 주고, 또 실리낙스의 눈을 구해 와 먹이자. 그리하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 될 것이다. 모란은 그리 여겼다. 그에게는 능히 그럴 만한 능력도 있었다.
‘한데…….’
모란이 연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지나 해가 뜨며, 연의 얼굴이 햇볕에 잠겨 들었다. 머리카락이며 눈썹이 연해지고 눈동자에는 연한 금색의 빛이 투명하게 고였다. 그 위로 얇은 눈꺼풀이 깜박이는 걸 보며 모란이 생각했다.
‘평소와 달리 거짓말을 하자고 작정한 순간 이미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침상에서 일어나기 전 머리를 단정히 한 연이 의아한 얼굴로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
뒤늦은 깨달음을 곱씹어 보고 있던 모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연을 뒤에서 끌어안고 지분거렸다. 연은 머뭇거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그 품에서 달아났다.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을 모란은 모른 척했다.
“형님 혼인 선물 사러 청진상회에 가려고. 같이 갈 거야?”
“그럴까.”
둘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를 다 하고 나자 앱솔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왔다. 모란이 한 대 걷어차는 것으로 끝내고 말자 앱솔은 마음속 깊이 교훈을 새겼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자. 모란의 기분이 나쁘면 일단 남궁연을 가져다 바치자.
나갈 채비를 마친 둘은 청진상회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서는 청진상회만큼의 고급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드물었다. 청진상회에서 연은 극진한 대접―아마 모란을 위한 게 틀림없는―을 받으며 혼인 선물을 골랐다. 한 쌍의 아름다운 새가 조각되어 있는 향로였다.
사실 거북이 암수 한 쌍을 살까 하였는데 거북이를 보는 앱솔의 얼굴이 워낙 찜찜해서 그만뒀다. 그는 마치 거북이가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봤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향로를 받아 들며 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형의 혼인인데도 제 마음이 다 들떴다.
“혼인은 참 좋은 것 같아.”
요즘 들어 영명이 두문불출하니 금려가 들어온 뒤에도 계속 그대로만 지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모란이 연의 혼잣말에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인이라, 좋은 것이긴 하지.”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상대가 내 것이라 알리는 게 아니야?”
물…론…… 그런 효과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혼인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그 말을 하면서 왜 저를 빤히 바라보는지 연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모란과 내 관계는 이제 무엇이지?’
서로 좋아한다 말을 했으니 이제는 연인인 것일까? 연인이라……. 평소와 다른 게 없으니 별거 아닌 듯한데, 별거 아니면서도 또 별거인 것 같고.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모란의 말마따나 상대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는 건 퍽 좋은 일이긴 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웃고는 얼른 헛기침을 했다.
밖에 나갔다 오니 세가는 혼인식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귀빈을 모신 마차가 세가 앞에 멈췄으며 사람들은 연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시비나 하인들은 붉은 천을 품에 끌어안고 종종걸음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볼 뿐인데도 연까지 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붉은 조화와 천을 걸자 어느새 해가 졌고, 붉은 등을 걸자 달이 떴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연오와 금려가 혼인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큰 경사에 남궁세가는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경사에 걸맞게 사방에 붉은 것들뿐이다. 모란과 함께 화정당을 나서자마자 여기저기서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꼭 세가를 떠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싫기만 하던 세가가 붉은 천에 뒤덮인 걸 보니 여기도 괜찮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꾸며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연오와 금려의 혼인으로 세가가 전보다는 나아질 것 같았고, 이제는 가족 중에 한위도 생겼으며 은록도 있었다. 무엇보다 전과 다른 건 모란이 있다는 점이다.
‘혼인하여 자식을 낳아 가족을 꾸릴 수는 없어도…… 뭐어, 괜찮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바라보니 곁에서 걷고 있던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연아, 잠시만. 여기에…….”
“응?”
하고 가만히 있으니 모란이 몸을 숙여 먼지를 떼어 내는 척 입술을 슥 핥고 지나갔다. 사람들 번잡하게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던가. 얼굴이 벌겋게 된 연이 퍽 걷어찼으나 모란은 히죽히죽 웃을 따름이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게 맞나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는 길에 폐월당에 들르자 한위는 제대로 옷을 차려입은 채 주강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주강은 화정당에는 거의 오지 않은 채 폐월당에만 자주 들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마차 여행도 처음이었던 만큼, 혼인식도 처음인 한위는 잔뜩 들떠 있었다.
“이번에 연오 형님과 형수님에게 드리려고 직접 샀어요.”
혼인식이 진행될 창일당에 도착하자 한위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옷에 달고 다니는 노리개 두 개를 꺼냈다. 연오와 금려를 위한 한 쌍의 옥 장신구였다. 꽤나 값이 나갈 것 같은 모양새에 연은 적잖이 놀랐다.
“무슨 돈으로?”
“소룡대회 때 받은 상금이요!”
연은 한위가 그때 받은 상금을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썼으면 했으나,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한위를 위한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남에게 선물을 주는 일도 좋은 기억이 될 수 있었다. 연은 그저 잘했다며 한위를 다독여 주었다. 노리개를 다시 품에 넣은 한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참을 살펴보더니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가주님은, 오늘 안 나오시는 건가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장남인 연오의 혼인식인데 영명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모습을 안 보이기는 하였다. 연은 천천히 주위를 살피다가 영명을 발견했다. 그는 당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당가? 저 가문이, 어쩐 일로…….’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제갈세가와의 혼인식이다 보니 중원에서 남궁세가와 좀 친분이 있다 하는 가문들은 죄다 오늘 혼인식에 왔다. 당가가 와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영명이 저리 길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당가와 친분이 있지는 않으니 다소 의아하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전에 연오의 생일 연회 때에도 영명의 곁에 당가의 인물이 있었다. 잠시 후 연이 고개를 저으며 관심을 껐다. 이제 곧 혼인식이 시작될 것이다.
“흐음, 이게 혼인식이란 말이지.”
차남의 주치의의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던 모란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화려한 등과 붉은 천 장식들, 그리고 중원 각지에서 온 많은 하객들을 휘휘 둘러보았다.
“나라면 등을 좀 더 화려하고 큰 것을 달았을 텐데.”
“뭐?”
“하객들은 지금보다 좀 더 많이. 저기에는 생화를 달면 괜찮겠군. 옷에는 붉은 보석을 달아야지. 그렇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연이 잠시간 모란을 바라보았다. 그런 화려한 혼인식은 황족이나 할 법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화려한 혼인식이야. 또 아무리 남궁세가라도 그런 혼인식은 못 올리지.”
“남궁세가가 무슨 상관이야? 보석이며 생화며 죄다 내가 댈 것을.”
“……지금 대체 누구의 혼인식을 말하는 거야?”
모란은 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씩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연은 좀 찜찜해지고 말았다. 설마 아니겠지. 뭔 혼인식을……?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기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러고 보면 백매화……와는 지금 애매하기는 해도 약혼 상태니까.’
백매화로라면 혼인을 올릴 수 있기는 하겠다. 그럼 모란이 또 여장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말겠지만……. 일단 혼인을 그리 올린 뒤, 자신은 안휘성 어디에서 모란과 같이 살면 되지 않을까? 이따금 세가에 들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휘성을 한 바퀴 돌고 온 사자탈이 세가에 들어왔다. 드디어 혼인식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혼주가 앉는 자리에는 영명과 황보세희가, 그리고 제갈세가의 가주 부부가 자리했다. 사자탈 공연에서 눈을 뗀 연이 혼주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기쁜 혼인식 날인데도 얼굴이 굳은 영명 때문일까?
왜일까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연은 끝내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굳이 이런 경사스러운 날까지 영명을 보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연은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느라 연은 모란이 영명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란은 한참을 영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영명과 연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사자탈 공연이 끝나자 곧 신부가 도착했다. 얼굴을 모두 가리는 붉은 면사포를 쓴 제갈금려가 붉은 마차에서 내렸다. 사뿐사뿐 걸어오는 신부를 보는 연오의 얼굴이 다정했다.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둘이 각자의 부모에게 맞절을 올릴 때였다. 시큰둥하게 보던 모란이 어라, 하는 소리를 냈다.
“네 형수, 회임하였구나.”
차를 마시던 연이 기침했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다행히 그 말을 들은 건 연뿐이었다. 침착하게 흘린 찻물을 닦고 난 뒤 연이 물었다.
“진짜로?”
“음. 보통 한 사람 몸에 근원이 둘이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제껏 형님이 혼인하시는구나, 막연히 그 정도만 생각했기에 연은 깜짝 놀랐다. 실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혼인을 하면 자연스럽게 자식을 낳을 것이니. 그러면 연에게는 조카가 생기는 것인데……. 남궁세가의 분위기가 전보다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오는 영명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전에는 치료 끝나면 세가를 떠나야지, 그 생각만 했는데…… 요즘에는 계속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어.”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는 연오와 금려를 보며 연이 중얼거렸다. 모란의 몸에서 다시 남궁연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는 좋은 일 따위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차갑고 냉하기만 한 인생을 짧게 살다 가겠지, 싶었는데. 전혀 좋아질 것 같지 않던 세가에도 좋은 구석이 생기고 전과는 달리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게…… 좋았다.
“세가에서 독립하지 않겠다고?”
돌연 모란이 몸까지 돌려 가며 연을 쳐다보았다. 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지. 세가에서 독립하는 것과,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과는 다르잖아.”
연은 원래 이전의 자신은 완전히 버릴 생각이었다. 이름이며 가족, 고향, 모조리 버려 버린 채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한위나 모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은 세가를 떠났을 터였다.
그리 말하는 연을 모란은 잠시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떠나서 무얼 하려 했는데?”
“음, 혼인을 하고 자식을 가져 가족을 꾸렸겠지. 의원 일도 하면서.”
“그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야?”
“그렇……지? 보통은 다들 그러고 싶어 하니까.”
연이 눈을 굴려 아래로 향했다. 모란이 슬그머니 탁자 아래로 손을 잡아 온 탓이었다. 몸을 바짝 붙이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연이 지레 긴장했다.
“나를 부인 대신 삼으면 되잖아. 자식도 만들어 줄 수 있거든……. 얼마나 원해? 둘? 셋?”
“무슨 헛소리야…….”
모란을 부인으로 삼으라니 듣던 중 가장 해괴한 말이었다. 사람 많은 곳이니 혹시 몰라 손을 빼내려 했지만 악력이 얼마나 센지 모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손을 빼는 건 포기하고 내버려 둔 채 고개를 돌렸다. 진심인데, 하고 모란이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무시했다.
그런데 부인으로 맞이하는 건 그렇다 쳐도 자식은 대체 어찌 만든단 말이야? 어쩐지 모란이라면 정말 남자 사이에서도 자식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연은 애써 농담이겠거니 여겼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세가는 떠나면 안 돼.”
그리 말하며 모란이 연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처음에는 그저 하는 말이겠거니 했지만 모란이 짓고 있는 표정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왜?”
“세가 밖은 위험하니까? 밖에 나갈 때마다 일이 터지지 않아. 녹림 도적들에, 융중산 마차 사고에.”
융중산 마차 사고는 원인이 분명 모란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나 없을 때 나가서는 안 돼.”
모란의 말에 연이 깨달았다. 이전 세계에 다녀올 생각이구나. 하긴 앱솔을 바로 돌려보내지 않을 때부터 그런 기미가 느껴지기는 하였다. 영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들에게 술을 돌리도록 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뭇거리다가 연이 물었다.
“그…곳에…… 언제 가는데? 혼인식이 끝난 후에?”
잠시간 말이 없다가 연오와 금려가 다정하게 화월당으로 향하는 모습까지 본 뒤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조용한 곳으로 좀 갈까.”
혼인도 끝나고 이제 연회만 남았으니, 더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한위도 예전과는 달리 남궁세가의 장로들과 곧잘 말을 나누고 있었다. 굳이 곁에 없어도 될 듯하여 연이 모란을 따라 걸었다. 그들은 화정당으로 향했다. 오늘을 위해 열심히 일한 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 떠들고 놀고 쉬는 중이라 화정당은 한산했다.
앱솔은 화정당 안에서 얌전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모란과 연이면 모를까 신원이 불분명한 앱솔은 연회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란과 연이 도착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따끈하게 우린 차를 내왔다. 모란이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안제테다에는 두 달 뒤에 갈 거야.”
“모란 님!”
앱솔이 감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크게 절하였으나 모란은 시큰둥했고 연은 딱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 조건이 있어. 아이낙스의 계약서는 가지고 왔겠지?”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바로 앱솔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빛으로 반들거리는 작은 구슬이었다. 그가 구슬 위에 훅 입김을 불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잠시 후 반짝거리기 시작한 구슬을 그가 정중히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모란은 연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타마타모를 다시 봉인한 뒤 하루 안에 바로 실리낙스의 눈을 대가로 받을 것을 요구한다.”
앱솔은 놀란 눈이 되었다. 그는 오기 전 아이낙스에게서 모란이 실리낙스의 눈을 요구할 경우 들어주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마 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란이 실리낙스의 눈을 원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까 모란 같은 존재에게 실리낙스의 눈은 그저 좋은 강장제에 불과했다. 정말로 실리낙스의 눈을 요구할 줄은 몰랐기에 앱솔은 자신의 우둔함과 대조되는 주인의 지혜에 탄복하여 엎드렸다.
“이 앱솔, 아이낙스 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연은 복잡한 기분으로 앱솔이 이제는 붉은빛이 된 구슬을 소중히 품에 넣는 걸 지켜보았다. 모란이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간다. 연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고 그저 막연히 짐작만 가는 세계라니. 꼭 가야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삼켰다. 연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조르거나 요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물었다.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는데?”
“타마타모는 잡기 위해 시간이 꽤 필요해. 준비 기간에만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지.”
일 년이라는 말에 연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일 년은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일 것이나, 지금은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구나,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란이 연의 마음을 읽고 있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의 시간은 이곳보다 스물다섯 배나 빨리 흘러. 알고 있지? 여기서 십 년이 흐르는 동안 난 이백오십 년을 살다 온 것을.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무리 길어도 이십 일 정도밖에 안 걸릴 거야.”
“아…… 그렇지. 맞아.”
확실히 모란이 그쪽에서 이백오십 년을 사는 동안 여기서는 십 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은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모란은 말이 없는 연을 끌어다가 다정하게 품에 안았다. 앱솔이 있는 자리라 연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십 일 내로 꼭 다녀오도록 할게. 좋은 걸 가져올 테니, 응? 그 뒤로 몸이 모두 낫게 되면 하고 싶은 건 다 해 보는 거야. 봄에 꽃이 피면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떠냐. 다시금 네 사부의 제자로 들어가고자 하면 안휘성에서도 의원을 열 수 있지.”
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모란이 말하는 걸 듣기만 해도 가슴이 이상하고 찌릿하게 울렸다.
앱솔은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그런 모란을 바라보았다가, 차가운 시선과 마주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거래를 하기는 하였으나 모란은 기본적으로 앱솔을 싫어하니 거슬러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모란이 연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앱솔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란이 실리낙스의 눈을 필요로 하는 까닭을.
‘아이낙스 님께서 그분의 비에게 실리낙스의 눈을 먹인 것과 같은 이유구나.’
한데 어째서 두 달 뒤에 떠나는 것일까? 일찍 떠날수록 모란에게도 앱솔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타마타모가 잠에서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아이낙스나 모란과 같은 자의 심경을 헤아릴까. 앱솔은 그저 알겠다 대답하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왜 두 달 뒤에 떠나지?’
앱솔과 비슷한 의문을 가진 건 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앱솔과 다른 건, 그는 모란에게 얼마든지 물어보고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떠나지 않고 두 달 뒤에?”
“그건…….”
드물게도 모란이 대답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다. 대답하기 난감한 일이라고 생각한 연은 고개를 저었다. 모란이 대답하기 난감한 일이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두 달 뒤면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그날부터 모란은 연에게서 떨어지는 일 없이 붙어 지냈다. 일어날 때도 함께였고 잠을 잘 때도, 한위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거나 세가 밖을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연을 두고 화정당 뜰을 거닐곤 하였는데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마법진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떠나기 전의 채비인 모양이었다.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쯤, 모란이 두 달 뒤에 떠난다 한 이유가 밝혀졌다. 연의 예상과는 달리 일찍 밝혀진 셈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이른 아침이었다. 밖에서 급히 부르는 소리에 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밖에서 또다시 시비가 도련님, 하고 불렀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의 새벽이라 방 안이 어둑어둑했다. 모란은 자리에 없었다. 연은 호롱불을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부터 시비가 왜 그를 이리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니 시비가 연을 보자마자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연 도련님…….”
“무슨 일이기에 이 새벽부터 소란이냐?”
“그것이, 오늘 새벽, 새벽에…….”
시비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가주의 혼인식을 맞이하여 붉은 등이 걸렸었던 자리에 흰 천과 검은 등이 내걸리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 뒷목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 들었다. 연이 얼어붙어 서 있는 가운데 시비가 마침내 말을 끝마쳤다.
“오늘 새벽 축시, 가주님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영명이 죽었다는 말인가? 연이 믿기지가 않아 우두커니 서서 시비를 바라보았다. 시비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영명이 죽었다.
그의 아버지란 자가 죽었다.
그토록 혐오스럽고 싫었던 자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연오의 혼인식에 참여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곁에 있던 모란은 오늘따라 화정당을 비웠다. 장례식 준비를 위해 시비가 다시 그를 부를 때까지, 연은 한참을 모란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굳이 두 달이 지난 뒤에 떠난다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두 달 안에 영명이 죽을 거란 걸 모란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영명이 죽기 두 시간 전, 자시(子時)*.
흰 종이에 쌓여 있는 붉은 환을 손안에서 굴리며 영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환이 앞으로 그의 몸을 살려 줄 아주 중요한 약이었다. 복용한 뒤 무방비 상태로 빠질 몸을 위해 영명은 창일당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암뢰대로 하여금 호위를 서게 했다. 조금도 방해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 약을 얻기 위해 당가에 내준 대가가 컸다. 정좌하여 앉으면서 영명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빌어먹을 도적 놈.’
녹림십오채는 항상 남궁세가에 있어 큰 골칫거리였다. 아무리 토벌하고 또 박멸해도 버러지처럼 다시 둥지를 틀고 자라나는 지겨운 놈들. 특히나 녹림십오채의 두목 왕장호는 죽어 마땅할 마교 출신이었다. 마교에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던 영명은 녹림십오채 토벌전 전에 당가에 의뢰를 넣었다.
그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독을 만들어 줄 것.
그는 결코 녹림십오채를 자비롭게 단칼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 독에 중독시킨 뒤에 토벌전에서 고의로 살려 보낼 계획이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을 것이며, 살아남은 소수의 놈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감히 다시는 남궁세가에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리라.
물론 독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정당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들 당가를 꺼림칙하게 보지 않는가. 그러나 남궁영명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어디 도적 떼거리를 상대로 정당한 방식 따위를 논하랴.
토벌전에 앞서 그는 세가에서 입이 무거우며 충성심이 강하다고 평이 자자한 자들을 골랐다. 비록 독을 쓸지라도 세간에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토벌전이라고 알려지는 것이 바람직했다. 계획 또한 완벽했다. 그는 토벌전에 대한 일이 세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사전에 녹림십오채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그는 충실한 무사들을 이끌고 기습을 할 예정이었다. 그 도적놈들이 방심하여 잠든 새벽, 독무를 던지고 사라지기만 하면 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았다. 독무를 사용하기 직전 매복하고 있던 녹림십오채의 역기습만 아니었더라면. 갑자기 나타난 도적들의 공격은 비열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숲속인데도 불구하고 화공을 사용하는 미친 짓에, 충실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죽어 나갔다. 이러다가는 기습은커녕 도적의 손에 의해 멱이 따일 위기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남궁영명에게 남은 선택지는 독무를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곧 녹림십오채가 있는 계곡은 중독된 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악바리 같은 왕장호는 가장 크게 중독되었으면서도 도끼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왕장호의 도끼를 피해, 남궁영명은 살아남은 무사들을 이끌고 세가에 돌아왔다. 마치 패잔병 같은 몰골이었다.
그는 자신이 독무에 중독되지 않았다 여겼다. 하나 세가로 돌아와서 살펴본 바, 그는 이미 중독된 상태였다. 호흡은 참았으나 피부로 독이 스며들었던 탓이다.
소량이라도 치명적인 독이었다. 혹시나 싶어 사전에 당가에서 준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왕장호처럼 고통스럽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으리라. 심지어 약을 복용한 후에도 고통은 이기기 힘들었다.
중독된 세가의 무사들은 암뢰대에게 처리하도록 명한 영명은, 당장 당가에 급보를 보내 해독제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부정적이었다. 처음부터 남궁영명이 요구한 것은 ‘해독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독’이었으니까.
당가에서는 당장 사람을 보내왔다. 아주 해독제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마비약에 조금 더 가까웠다. 영명은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이 반쪽짜리 해독제를 차처럼 우려 마셔야만 했다.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중독 효과로 난폭해지는 성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암뢰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애꿎은 시비가 영명의 손에 죽어 나가는 걸 몰래 처리해야만 했다.
녹림십오채가 이 기습 토벌전을 알고 있었다는 건, 세가 내에 간자가 있었다는 말과 동일했다. 간자로 의심되는 여러 무고한 사람이 은밀하게 죽어 나갔다. 화풀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영명의 화는 풀리지가 않고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만 갔다. 사람을 죽이고 난 뒤면 영명은 이를 갈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손에 의해 세가가 무너질 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세가가 문제가 아니다. 제 위명이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얼핏 그의 무공은 나날이 고강해지는 것만 같으나 실제로는 수명을 태워 나온 고강함이었다.
결국 영명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연오에게 세가를 잠시 맡긴 뒤 당가로 가 본격적인 치료를 받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효험이 없었다.
연오의 혼인식이 가까워질수록 당가에서 준 마비약을 복용하는 횟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마비약도 더는 듣지 않았다. 당가는 다시 큰 재물을 대가로 또 다른 약을 보내 왔다.
영명은 당가에서 준 이 약을 먹고 난 뒤 가사 상태에 빠질 계획이었다. 가사 상태에서는 중독 증상도 멈춘다. 폐관 수련을 빙자하여 당가에서 제대로 된 해독제를 개발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둘 작정이었다. 고통에 다시 떨려 오는 손으로 겨우 종이를 벗겨 낼 때였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환이 도르륵 굴러 떨어졌다.
“…….”
영명이 잠시 말없이 붉은 환을 노려보았다. 점차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약을 먹어도 약효가 유지되는 시간이 짧아져만 간다. 급격히 쇠약해지는 육체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무공을 사용할 때에는 고통도 사라지고 더욱 강해진 느낌이 들지만,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서둘러 손을 뻗었다. 저 약을 삼켜야 고통을 완전히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주워 드는 찰나 또다시 손가락 사이로 붉은 알이 미끄러졌다. 점차 영명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은 결코 약을 집어 들 수가 없었다. 영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눈앞에서 붉은 약이 보란 듯이 빙그르르 한 바퀴 크게 돌자 영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어떤 놈이야!”
소리를 크게 지른 건 분노 때문만이 아니었다. 암뢰대를 부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깔릴 뿐.
영명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약을 줍기 위해서였다. 그저 제 손이 떨렸을 뿐이리라, 그리 생각하고 겨우 약을 주워 들었다.
하지만 약은 또다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크윽…….”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 떨어졌다. 아무리 약을 주워 들어도, 곧장 손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이 굳어 버리고, 약은 그 사이로 빠져나가고 만다. 누구의 장난질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금 환각이라도 겪고 있는 것인가?
영명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친 뒤 일단은 마비약이라도 먹자 싶어 떨리는 몸으로 품을 뒤져 간신히 꺼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마비약이 죄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결국 영명은 반은 두려움에, 반은 노여움에 검을 뽑아 들고 말았다.
“나와라! 감히 어디서 장난질이냐!”
그러나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둘러도, 소리를 질러도 창일당은 오로지 고요할 뿐이었다. 문득 영명은 이 고요함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새소리나 바람 소리 따위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 그 혼자만이 남은 듯한 고요함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몸을 떨다가 그는 이내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무너졌다.
아무런 약도 먹지 못하자 서서히 독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숨이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혈관 속에서 용암처럼 타들어 가며 흔적을 남겼다. 영명은 다시 더듬거리며 약을 주웠다. 떨어트리고는, 또 주워 들고 또 떨어트린다. 분과 고통에 못 이겨 그가 바닥에 머리를 찧고 주먹을 내리쳤다.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고통이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영명은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차라리 죽여 줬으면 하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는 과거에 이런 고통스러운 독을 의뢰한 자신을 증오했다. 바닥을 뒹굴다가 그는 손으로 주울 수 없다면 입으로라도 주워 먹으리라 생각했다. 이 끔찍한 고통 앞에서는 족히 그럴 수 있었다.
그가 개처럼 엎드렸다. 허겁지겁 약을 입으로 주워 먹으려던 찰나, 코앞에서 붉은 약이 또르르 굴러갔다. 그러고는 누군가의 신발 앞에서 멈췄다. 영명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너는……!”
“어디 다시 한번 개같이 기어 봐.”
주강이 고요하게 말했다. 그 고요함 속에 영명을 향한 증오와 살기가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영명은 반사적으로 검을 빼어 들며 상대를 베려고 했으나 소용없이 곧장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통이 극심하여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주강은 모욕적으로 영명의 턱을 걷어찼다. 영명은 검을 손에서 놓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신음하며 바닥을 기는 그의 코앞으로 붉은 약이 굴러왔다.
“그때 장강에서 멍청한 도적들이 차려 준 밥상 하나 제대로 못 해 먹는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군. 훌륭하게 일 처리를 해 줬어.”
주강의 말에 영명이 고개를 쳐들었다. 간자! 녹림십오채가 감히 그들을 역기습 할 수 있도록 정보를 흘린 간자가 바로 저놈이었다. 저놈 때문에 자신이 독무에 당한 것이다. 오랫동안 세가에 머무르며 자신을 죽이고자 숨죽이고 있던 놈이 바로…….
“네, 네놈이……. 네놈이, 커헉, 감히!”
영명은 분노를 토해 내듯 피를 토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검과 붉은 약 사이를 오갔다. 선택권은 없었다. 온몸을 태우는 듯한 고통 앞에 구원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잠시 후 영명은 약을 향해 기기 시작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제발 자신에게 약을 달라고 주강 앞에 엎드려 빌었다. 그리고 다시 또 개처럼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그가 기침하며 토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영명은 도중에 피거품을 물었다. 그러나 기절할 수 있는 자비조차 그에게는 내려지지 않았다. 주강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고통 속에 영명이 울부짖으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진비령을 기억하나?”
비명을 지르며 제발 죽여 달라고 빌고 있던 영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곧 주강의 눈에 한때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눈이 있음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희게 질린 그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그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주강은 영명이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곁에 앉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켜보며, 친히 알려 주었다. 그토록 증오하고 싫어하는 마교인을 당신 손으로 남궁세가에 들여놓았으며, 그는 이제 한위의 곁에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을. 영명은 치욕과 절망 속에 짐승처럼 바닥을 기며 인간의 존엄성을 버렸다.
축시(丑時).
한 시진이 넘는 긴 시간 끝에 영명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주강은 영명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약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 혀를 빼물고 죽은 그의 입에 쑤셔 박았다. 발로 턱을 밀어 멍청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게 한 뒤, 주강은 마침내 누이에 대한 복수를 끝마쳤다.
모란은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달 동안 그가 안제테다로 떠나지 않은 이유가 방금 막 마무리되었다. 영명은 죽음조차 오롯이 그를 위한 게 아닐 것이리라. 이 모든 것은 연을 위해서였다. 연아, 하고 모란은 조용히 입 안으로 이름을 불렀다. 모란에게 있어 영명의 죽음은 주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제, 연을 위한 영명의 장례식을 치를 때였다.
***
장례는 조용하고 숙연한 분위기 중에 치러졌다. 그 남궁세가의 가주이니만큼 각지에서 조문객이 찾아왔다. 연과 한위는 상주인 연오의 곁에서 조문객을 맞이했다. 한위는 이따금 울먹거렸으나 연은 별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저 약간 멍하기만 했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다.
장례식은 참석한 사람은 많았으나 진심으로 애통해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갑자기 사망한 일에 대해 다들 놀라워는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심지어, 남궁영명과 꽤나 친하게 지냈다 싶은 남궁사영에게서도 슬퍼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영명의 평소 행실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길게만 느껴지는 장례식, 마침내 상여까지 보내고 나서 연은 화정당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서 있어서 다리며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화정당에 들어서다가 연이 멈칫했다. 모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에 쓴 굴건을 벗으며 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안에 들어가는 대신 화정당 뒤뜰의 정원으로 향했다. 모란은 조용히 연의 뒤를 쫓았다.
이제는 봄이 오는 시기라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새순이 움트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 그 나뭇가지 위로 톡 꽃망울이 맺히더니 활짝 폈다. 모란이 한 일이었다.
남궁영명이 죽었다. 종종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자였는데 막상 이렇게 정말 죽어 버리자 기분이 착잡하였다. 기쁘다고는 못 하겠다. 한 번도 연에게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한 적이 없는 자였다. 도리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버지란 말인가. 슬프지는 않았으나 기뻐할 수는 없다.
나뭇가지에 점차 꽃이 만발해 가는 걸 지켜보다가 연이 입을 열었다.
“왜 두 달 뒤에 떠난다고 했는지 알겠어. 모란 당신은 알고 있었던 거지?”
“알고 있었지.”
연이 말끄러미 연못 안에서 헤엄치는 작은 잉어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가자 먹이를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는 몰려들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주강과의 약속도 지켰고?”
“그래. 영명이 죽은 그날 밤, 주강을 데려갔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모란은 영명이 죽던 날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죽음을 멈추고자 비참하게 노력하던 모습이었지. 그는 연에게 영명이 죽은 과정을 말해 주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연은 주강이 영명에게 어찌하였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조금 멍한 얼굴로 꽃이 피는 나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연은 간들간들 무언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어딘가에 홀린 듯한 연의 모습을 보는 모란의 눈에 금빛 이채가 감돌았다. 예전에 이런 때가 과거에 있었는데, 생각하던 연이 입을 열어 물었다.
“왜 내게는 알려 주지 않았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야.”
올바르지 않다. 연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모란의 눈에는 사람의 수명이 보인다. 그는 누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 알 수 있다 하여 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란은 저나, 은록이나 혹은 연오가…… 한위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려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명의 문제는 좀 달랐다.
“그의 남은 수명을 알려 주는 일이? 정말 그게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게 알려 주지 않은 거였어?”
모란이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
“연아, 너는 의원이지. 난 네가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때문에 조금이라도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랐어.”
모란의 설명은 이해가 갔지만 연은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 모란의 말대로 그가 영명이 언제 죽을지 알았다면 편히 있을 수는 없었겠지. 영명은 가족이라기엔 남이나 마찬가지였고 동시에 부친이었으며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은 의원이다. 하지만 모란은 지나치게…… 지나치게.
연이 문득 꽃이 만개한 나무와 제 뒤에 선 모란을 번갈아 보았다. 눈을 깜박이며 그러고 있다가 물었다.
“그자는 왜 죽은 건데?”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명은 연오의 혼인식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그제야 경사스러운 날에도 굳은 얼굴이었던 영명을 이해했다. 그때에 이미 죽음이 코앞까지 온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구나. 연은 그렇게 여겼다.
“왕장호가 죽은 것과 같은 이유지.”
모란의 답에 연은 찬 얼음을 깨어 먹은 듯 가슴이 서늘해졌다. 왕장호를 고통스럽게 죽였던 그 산공독. 그는 돌연 왕장호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영명 그자는 파멸을 맞이할 테지. 다른 동지가 그에게 복수하려 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나보다도 오래되고 질긴 원한을 가진 자이니,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영명 그자를 죽여 버릴 터.
왕장호에게 산공독을 사용한 사람은 바로 남궁영명이었다. 그는 녹림십오채를 소탕하기 위해 산허리에 지독한 산공독을 뿌렸었다. 그때 영명도 독에 당한 것이리라. 연은 불현듯 연오의 혼인식 날 왔던 당가 사람들이 떠올랐다. 친분도 그다지 없는 자들이 왜 영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나 했다. 연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혼인식 날 당가 사람들…….”
“그 산공독은 당가에서 만든 것이었으니까.”
연은 그제야 그간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이해가 갔다. 영명이 전에는 보지 못한 낯선 사람을 데리고 다닌 것, 연오의 생일 연회 때 한위를 무자비하게 대하고 최근 들어 신경이 유독 날카롭고 좋지 않던 것, 포악해지다 못해 사냥대회에서 습격자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겼던 것, 점점 기력이 쇠약해지고 유달리 붉은 차를 달여 먹었던 것……. 모두가 죽어 가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연도 서둘러 혼인을 시키려 하고 연오에게는 온갖 권한을 넘겨준 채 두문불출했을 테지.
연은 무거운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 얼마나 독하디독한 인간인가? 그는 왕장호를 보아 산공독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약하고 비참한 꼴을 남에게, 심지어 연오에게까지 알리고 싶지 않아 그토록 비밀스럽게 숨긴 것이다. 혼인식 날마저도.
영명에게는 언제나 남궁세가가 최우선이었다. 장자이자 후계자인 연오가 혼인을 올리고 나니 더는 버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겠지.
죽기 전 주강이 눈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그자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여기며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주강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복수를 한 것이다. 이제는 사냥대회 때 모란이 주강에게 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영명에게 죽음이 오히려 편안한 안식이 될 거라 했던 그 말.
모란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사냥대회 전부터, 혹은 혼인식을 올리기 전? 그도 아니면 처음 영명을 본 순간부터? 거슬러 올라가니 연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모란은 언제나 모든 것을 숨겨 둔다. 연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만한 것들은 미리 파악해 두고, 알리지 않고 숨겨 두었다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알렸다.
“그럴 필요 없어.”
“무엇을?”
“난 당신 생각처럼 훅 불면 날아가 버리는 솜털 같은 것이 아냐. 그리 숨기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난…….”
“그래서 숨겼던 건 아니야.”
“그러면?”
문득 연은 사방에 꽃이 가득 피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평소와 달리 반짝거리며 빛나는 아름답고 어여쁜 꽃송이들이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멍하지, 연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또다시 멍해지고 만다. 꽃향기가 지독할 정도로 진했다.
“나는…….”
기시감이 들어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예전, 아주 예전에. 예전에도 이렇게, 흰 상복을 입고 연못 앞에 서 있던 적이 있었다. 정원에 꽃나무가 한가득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왜 흰 상복을 입었을까? 연은 기억을 더듬었다. 모용단리가 죽은 날이었다.
지치고 지쳐서, 슬픔도 지나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 그때도 연은 이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도, 이렇게 서 있었다. 그의 뒤에서. 연이 고개를 돌렸다. 모란이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금빛 고리가 영근 눈에 연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뭘, 하려는 거야?”
연은 모란이 이때를 위해, 영명이 죽은 날을 기다려 왔다는 희미한 확신이 들었다. 영명의 남은 수명을 알리는 게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연을 과보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모란은 영명의 죽음을 어떤 기회로 삼고자 숨기고 있었다.
“마지막 시도를 하려는 것이지. 하지만 소용이 없군.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지, 그렇지?”
슬프지도 않은데 이유 없이 연의 눈에 눈물이 고여 떨어졌다. 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모란이 제게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도 가지 않았고. 그런데 장례식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정당 연못, 그리고 제 곁에 서 있는 모란을 보니 자꾸만 무엇이 떠오르려는 것이다. 연이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어른거렸다. 모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연의 가슴이 들썩였다.
“나는…… 예전에 여기서…….”
예전에, 그의 모친이 숨을 거둔 날에, 장례식을 마치고 연은 화정당으로 달려왔다. 어머니가 간절하게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익숙한 물건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영명이 치워 버린 탓이었다. 결국 유일하게 모용단리와의 기억이 남아 있는 정원에 나왔더랬다. 모용단리가 정원의 꽃을 좋아했기 때문에.
연못을 보면서 울던 바로 그날, 연을 달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다. 연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큰 공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 살 때 크게 앓아서 그 이전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줄만 알았는데…….
연못 위에 작은 연꽃이 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물방울처럼 피어나는 연꽃들을 보다가 연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이 기억이 안 나…….”
“…….”
“전에, 여기서. 누가…… 꽃을, 피웠……는데…….”
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기억하지 못한 과거에 대해 연오와 한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란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당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언제야?”
이제는 연의 발치에도 꽃이 피어났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노랗고 흰 꽃들이 수북이 피어 발등을 덮을 정도였다. 그는 꽃을 좋아했다. 모용단리가 좋아했기에 연도 좋아했다. 정말로 좋아했는데, 왜 갑자기 그리도 싫어하게 되었을까? 아니, 싫어하는 게 아니다.
연이 곧장 깨달았다.
그는 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했던 것이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왜 그렇게 꽃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아슬아슬하게 무언가 떠오르려 하여 연이 넋만 놓고 있을 때였다. 모란이 입을 열었다.
“난 가능한 네가 빈 부분을 알아서 채우기를 바랐어. 열 살 그때를 말이야.”
연이 고개를 들었다.
“매일 네가 좋아하던 꽃을 피웠지. 무언가 비슷한 것이라도 떠올리기를 바라면서.”
그는 아직까지도 모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계속 잃어버린 부분을 찾더구나. 채우려고 하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고. 버려두고 갔으면서도 돌려받기를 바랐어. 다시 돌려받았을 때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란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나? 무언가 반짝거렸다. 투명하기도 하고 반투명하기도 하다. 빛나기도 하고 혹은 어둑어둑하게 잠겨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얇은 수정 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숨이 차올랐다.
연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저것은 제 것이다.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담아 둔 무언가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눈에서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두려움에 질린 연의 낯이 희게 변했다.
“나, 나는…….”
연을 바라보는 모란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왜 연에게 영명이 곧 죽으리란 걸 알려 주지 않았는가? 단순히 연이 의원이고 영명이 그의 끔찍한 아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란은 다른 세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가진 귀한 것을 연에게 돌려주려는 시도를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손바닥 위에 있는 이 조각은 연이 모란의 몸에 버리고 간 근원이다. 연이 모란의 몸에 들렀을 때, 끔찍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워 도저히 가져가지 못하고 버려둔 것이다. 후에 자신의 몸에 돌아온 모란은 조각을 보고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인을 알게 되자 동시에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이 근원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치료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주인에게 돌려주게 된다면 치료고 무엇이고 모든 게 끝장나 버리는 수가 있었다.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근원을 가볍게 건드려 꿰매는 것조차 그리 고통스러워하는데 근원의 반절이 강제로 찢겨져 나가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그걸 보통 인간의 정신이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세상에는 없는 것이 더 나은 기억이 있는 법이었다.
연은 제 근원 조각에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파랗게 질려 벌써 넋이 나갔다. 모란이 주먹을 쥐어 감추었을 때에야 숨통이 트인 그가 겨우 중얼거렸다.
“꽃, 꽃이 너, 너무 예뻐 보였어.”
연의 말에 모란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연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데다 밀려오는 기억에 넋까지 나간 연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네가 매일 꽃을 따다 주었기에, 그날도 그런 줄 알았어. 나, 주려고, 따 온 것인 줄…… 알았는데.”
“꽃이 아니었지.”
울음을 삼키며 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란은 벌써 제 주먹 안의 근원 조각이 주인을 찾아가기 위해 안달을 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의 한 조각.
무의식이 부족하다 여겨 한 때 실제로 잠시간 연을 어려지게까지 만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이 한 조각이 채워지기 전까지, 치료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혼에 영원히 너덜너덜한 구멍을 지닌 채로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돌려줄 수가 없었다. 근원을 찢기고 빼앗기는 고통은 보통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이며 끔찍한 슬픔, 그리고 지독한 상실감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는 매일 꽃을 피웠다. 연에게 제 생기를 흘려 넣어 주며, 피어나는 꽃을 통해 어떻게든 가짜 기억이라도 만들어 연이 알아서 그 부분을 채우기를 바랐다. 애초에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장기간에 걸쳐 시도하였지만 영명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방식으로는 영 안 될 모양이지. 쓰게 웃은 모란이 오른손을 꽉 쥐어 연의 근원 조각을 삼켰다.
그가 대신 제 근원을 뜯어냈다. 아주 조금 뜯어낸 것인데도 그조차도 잠시 고통에 절로 신음이 나오고 몸이 휘청거렸다. 식은땀으로 덜미가 축축해졌으나 말없이 그 고통을 삼킨 모란이 왼손을 펼쳐 내밀었다.
연은 금빛으로 빛나는 파편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살면서 본 중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것이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리라. 모란은 연의 바로 앞에 손을 내밀었다.
“가지렴.”
“…….”
“어서.”
연이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아름다운 파편 조각에 손이 닿는 순간 그의 몸이 훅 고꾸라졌다. 그의 것이 아닌 기억이 해일처럼 연의 자아를 덮쳤다. 그 기억 속에서 연은 연이 아니고 모란이었다. 연 아닌 모란, 모란 아닌 연이 아니라 그저 모란 그 자체였다.
***
새들 중 특별하게 태어난 것들은 삼족오가 된다. 귀(貴)를 가지고 태어난 잉어들은 만년화리(萬年火鯉)로, 불씨를 지니고 태어난 뱀은 독각화망(獨脚火網)으로 자라난다. 이것들은 인간을 제외한 살아 있는 것들 중의 왕이며 화수분과도 같은 생명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 이 특별한 것들이 지나간 발자취에는 생명이나 죽음이 넘실거렸다.
그렇다면 인간들 중 특별하게 태어난 것은 무엇이 되는가. 모란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는 복중에 있을 때부터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하게 태어난 것들이 그렇듯이 그도 자신이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모란이 어미에게서 태어난 이후로 그 마을은 내내 풍년이었다. 과실은 맺히는 것마다 크고 튼실하였고, 동물들은 줄줄이 새끼를 낳았으며 기르는 채소들은 씨알이 컸다. 지평 너머를 보지 못한 어린 영물들이 그렇듯이 모란도 넘쳐 나는 본원지기를 추스르지 못하고 주변에 줄줄 흘리고 다닌 탓이다.
태어난 후 모란은 어미의 품에 안겨 젖을 빨며 사람들이 어찌 행동하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르다는 걸 남들이 알면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클 것이라 판단하였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뛰어나 봤자 잡아먹히기만 할 뿐이라. 사람들 속에서도 약육강식은 그대로 존재함을 벌써부터 알았다.
모란은 강보에 뉘여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고 개미가 줄 지어 기어가는 것과, 땅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것마다 이치가 있었다. 모래 한 알조차도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그의 어미며 이웃은 모란이 그저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인 줄만 알고, 그의 속에서 무엇이 자라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럭무럭 커서 네 살이 되었을 때 모란은 성장이 좋아 마치 여섯 내지는 일곱 살 정도로 보였다. 일부러 아둔한 척하였기에 여전히 주위에서는 그를 덩치 좋은 사내아이로만 보았다. 남궁세가에서 둘째 도련님의 놀이 상대를 찾은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가난하였던 모란의 어미는 그래도 위상이 대단한 남궁세가에 있으면 모란이 무엇이라도 배우지 않을까 하여 그를 보냈다. 남궁세가에 있으나 낡은 초가집에서 지내나 배우는 것은 비슷했겠지만 그래도 모란은 어미의 말에 따랐다. 이날이 모란이 남궁연을 처음 만나게 된 날이었다.
세가에 당도하자 모용단리는 분명 네 살짜리로 알고 있었는데 여섯 살로 보이는 모란을 보고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모란은 멀뚱하게 서서 모용단리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새침하니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은 누가 봐도 모용단리를 닮은 모습이었다.
-자.
귀찮은 듯 모용단리가 등을 떠밀자 여섯 살 연이 마지못해 우물쭈물 다가왔다. 애처롭게 모친을 돌아보았으나 모용단리는 제 아들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돌아섰다. 모란은 속으로 무심한 어미로군, 그저 그리 생각할 따름이었다. 놀자고 하면 대충 구색이나 맞추어 줄 생각이었다.
무가의 자식답게 연은 벌써부터 허리춤에 작은 목검을 매달고 있었다. 모란은 위아래로 살폈다. 대충 보아하니 벌모세수도 받았고 흐르는 기도 깨끗하며 정갈했다. 그러나 그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연은 놀이 아이를 앞에 두고도 연신 제 어미가 간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딱히 적극적으로 나서서 놀아 줄 생각이 아니었기에 모란은 연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도련님, 백모란이라고 하는 아이랍니다. 도련님보다 두 살 어리지요.
유모의 설명에도 연은 그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연을 보는 유모의 얼굴에는 안쓰러운 빛이 번졌다. 모란은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자신을 놀이 친구로 불러오자 한 것은 어미보다는 유모인 것으로 보였다.
-자, 도련님 좋아하시는 뒤뜰로 갈까요?
보모는 연과 모란의 손을 각각 잡고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는 큰 연못과 정자, 그리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들과 덤불이 있었다. 화사한 꽃들을 보니 왜 화정당(花亭堂)이라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퍽 보기 좋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모란아, 도련님 잘 모셔야 한단다. 알겠지?
솔직히 말해 성가셨으나 말을 따르지 않았을 때 찾아올 결과가 더 성가실 것 같았기에 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네 살짜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느냐고, 네 살짜리인 모란이 생각했다.
연은 생각처럼 모란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저 정자로 쪼르르 달려가 앉아 모란을 이따금 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모란은 화단에 앉아 잉어가 연못을 살랑살랑 헤엄쳐 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놀이 친구라고 불려 왔는데 정작 연은 모란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모란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정원에 꽃이 워낙 많아서 다행이기도 했다.
슬쩍 손바닥을 들어 보니 그가 손대고 있던 흙 위로 새싹이 조롱조롱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몸에서 줄줄 넘쳐흐르는 본원지기를 추스르는 방법을 몰랐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급할 것은 없었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을 부러 알아내기 위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모란은 자신이 어느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리란 걸 확신했다. 그저 잘 보고, 잘 듣고 잘 자라나기만 하면 되었다.
‘그때에는 진정한 태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제 근처에서 자라나는 싹을 보던 모란의 눈에 잠시 금색의 고리가 영글었다. 두 개, 세 개까지 늘어나다가 곧 풀리고 말았다. 모란이 잠시간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작 세 개라니 진정한 태고 뭐고 아직 멀었다는 걸 안 까닭이다.
남궁연오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자에 앉아 다리를 동당거리고만 있던 연이 얼굴에 화색이 돌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
모란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 남궁연과는 달리 남궁연오는 열 살이라 좀 더 체격이 컸고 허리춤에는 벌써 진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품에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 이제 고작 한 살이나 되었을 법한 아기였다.
모란은 그들의 자질을 각각 재어 보았다. 남궁연오는 가장 성취가 뛰어났으나 타고난 재능으로 따지자면 품에 안긴 어린 아기의 자질이 가장이었다.
연오가 몸을 숙여 여섯 살 아우가 막내에게 인사하도록 했다. 막내를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연이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연오는 그제야 모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연아, 이 아이는?
-놀이 친구래요.
그리 말하면서도 연은 모란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형님만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연이 쑥스러운지 머뭇거리다가 한위야, 하고 불렀다. 모란은 멀뚱거리며 남궁가 형제들의 우애 좋은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백모란.
질문에 모란은 짧게 대답했다. 어차피 네 살짜리니 예의 바른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연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간 더 머무르다가 품에 안은 막둥이와 함께 떠났다. 연은 다시 시무룩 풀이 죽었다. 척 보아도 정에 목마른 모습이었으나 모란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유모가 간식을 들고 왔을 때서야 연이 모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분명 유모도 이름을 소개했고, 남궁연오에게도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또 이름을 물어본다는 건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는 의미였다. 모란은 다소 시큰둥하게 백모란, 하고 다시 대답했다. 백모란, 하고 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란꽃?
-뭐…….
실제로도 어미가 모란꽃을 좋아하여 모란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꽃 이름을 가졌다는 걸 알자 돌연 연이 모란에게 반짝거리는 시선을 보내왔다. 모란은 이건 또 무언가 싶었다.
-연 도련님, 오늘 어떠셨나요?
모란은 물어보면서도 별로였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원했지만 이름이 꽃이라서 마음에 들었던지 연이 좋았어, 하고 꼬물꼬물 대답했다. 이로 인해 모란은 여지없이 남궁연의 놀이 친구로 낙찰되어 매일 남궁세가에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놀이 친구가 썩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연은 퍽 얌전한 축에 속해 대개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앉아 모란이 보는 것을 함께 지켜보거나 흙장난을 하곤 했다. 모란은 그저 연이 노는 일에 가끔 공이나 차 주고 장난감이나 흔들어 주며 같이 놀아 주면 되었다.
그리 노닥거리다가 유모가 와서 간식을 먹으면 같이 먹고, 식사를 하면 식사도 같이 먹었다. 배부르게 잘 먹고 놀다 돌아오니 모란의 어미도 크게 만족하였다. 이따금 남궁연오도 막둥이를 데리고 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섯 살 모란의 눈 속에 영그는 금빛 고리는 여섯으로 늘어났고, 연은 일곱 살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란은 남궁세가에 출입을 금지당했다. 자신이 안 오면 새침한 얼굴 위 서운한 기색을 드러낼 연이 떠올랐으나 모란은 금방 잊었다. 그는 최대한 자신을 성장시키기에 바빴다.
그렇게 달포 정도가 지났을까, 다시 연의 유모가 모란을 데리러 왔다. 오랜만에 남궁세가에 발을 들이며 그는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화정당에 다다랐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원한을 가지고 죽은 것이다.
-모란아, 도련님이 많이 우울해하시니 잘 놀아 드려야 한다, 알았지?
유모의 말을 대충 흘리며 모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서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여즉 떠나지 않고 화정당에 머무르는 것이지. 한참을 바라보니 한 영기(靈氣)가 모란을 눈치채고 다가와서는 연이, 연, 하고 연신 불러 댔다. 모란은 손을 뻗어 그 말라비틀어진 영기를 쥐었다. 잠시 살펴보다가 이내 그대로 흩어 제대로 떠나도록 보냈다.
‘남궁연의 어미가 죽었구나.’
모란이 무심하게 생각했다. 도착하였을 때 연은 연못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울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모란이 와도 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러고 있기만 했다. 어미의 모습으로 보건대 좋지 않게 죽은 게 분명하였으니, 어린아이에게는 큰 충격이 된 게 분명했다.
처음에 모란은 알아서 기운을 차리겠거니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매일매일 찾아와 보니 화정당 뒤뜰 연못 앞에만 앉아 하루가 달리 비실비실 말라 가는 게, 이대로는 죽겠구나 싶었다. 모란은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폭 쉬고는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울지도 않고 증오심과 막연한 분노를 품은 눈이 아주 까맸다.
-이것 봐.
말을 걸어도 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모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연이 바라보고 있는 연못에 작은 연꽃을 하나 톡 피워 냈다. 바닥에서 물방울이 올라오듯 말갛게 피어나는 연꽃에 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모란의 손이 닿은 수면마다 연꽃송이가 퐁퐁 피어났다.
연은 가만히 보고 있다가 손을 뻗어 연꽃 하나를 쥐었다. 모란은 내버려 두었다. 이 꽃은 그의 본원지기로 피워 내는 것이라, 가까이하면 할수록 좋았다. 과연 얼마간 기운이 돌아왔는지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깐을 가만히 있는 듯싶었는데 흑, 흑 하고 서럽게 목 울리는 소리를 내더니 연꽃 위로 눈물을 톡톡 떨구는 것이다.
모란은 연의 몸에서 원통하게 죽은 어미의 사기가 연꽃 기운에 못 이겨 흘러나오는 걸 보고는 고사리 손으로 잡아채 없앴다. 꼭 쥔 손안에서 희미한 통곡 소리가 새어 나오다 사라졌다.
‘평소에는 그리도 관심이 없더니 죽은 후에야 관심을 보이네. 산 것에게는 쓸모도 없는 짓을.’
막히고 꽉 죄였던 게 풀리자 이내 연이 소리 내어서 크게 울었다. 유모는 울음소리에 놀라서 달려왔다가, 이내 안쓰러운 얼굴로 연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최근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있던 차라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한참을 울고는 연이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비볐다. 졸린 기운이 역력했다. 그러고는 모란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이건 또 뭐야, 하고 모란이 미간을 찡그렸다.
-……?
유모가 슬그머니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울먹울먹한 얼굴로 고개만 세게 저었다. 모란의 의사가 중요하겠는가, 아니면 귀한 도련님 의사가 중요하겠는가. 결국 모란은 그대로 같이 끌려가서 따뜻한 차를 마신 다음, 강제로 같이 낮잠을 자게 되었다. 연이 옆에서 색색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잤다. 모란은 잠시간 그러고 있다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유모는 머리를 도닥이고는 그대로 모란을 집에 돌려보냈다.
연이 본격적으로 모란을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건 그다음 날부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꽃 피워 줘, 꽃 피워 줘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게 아닌가. 모란은 연에게 시달리는 내내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크게 한숨을 쉬고는 보는 사람 없을 적에 꽃을 피워 주웠다. 그러면 연은 하루 종일 그 꽃을 쥐고 다니며 좋아했다.
그 일이 반복되다 보니 연은 둘만 남게만 되면 꽃을 피워 달라고 졸랐다. 이때쯤에는 모란도 아무렴 어떠냐 싶어서 사람만 없다 하면 꽃을 피워 댔다. 그러면 연은 그 꽃을 꺾어 모란의 귀며 머리카락에 잔뜩 꽂아 주고는 저 혼자 좋아서 해말갛게 웃었다.
-좋냐?
-응, 좋아.
그 대답에 심술이 솟은 모란이 꽃을 꺾어 연의 머리카락에도 꽂아 주었다. 연은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그렇게 둘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화정당 뒤뜰은 화사하고 알록달록한 꽃으로 풍성해져만 갔다. 제 기운으로 가득 찬 곳은 모란에게도 퍽 괜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도착해 보니 연이 연못 앞에서 섧게 울고 있었다. 연이 연못 앞에서 쭈그려 앉아 우는 건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다. 어미가 생각날 때마다, 혹은 제 아버지에게 모진 소리 듣고 올 때마다 그리 울곤 했다.
모란은 또 왜 우나 싶어 기다렸다가 울음이 멈췄을 때쯤 탐스러운 꽃이나 좀 피워 주었다. 연은 꽃을 만지작거리다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연오 형님이 이제는 한위를 데리고 올 수가 없대. 나 그런 거 싫어.
한위라면 이제는 서너 살 된 그 막둥이를 말하는 것이겠다. 같은 세가에 있는데 못 볼 게 무엇 있나 싶어서 모란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보러 가면 되지, 왜?
-어른들이 못 만나게 하잖아…….
하고는 또 울려고 하기에 모란은 참으로 성가시게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몰래 보러 가면 되잖아.
이번에는 약이 올랐는지 연이 씩씩거리며 모란을 노려보았다. 하긴 어린아이 몸으로 보러 가기는 힘들겠지. 하는 수 없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못 근처 덤불을 얼쩡거리다가 그가 결코 어른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위치한 담장에 손을 뻗었다. 손이 닿는 자리마다 파스스 소리를 내며 단단한 돌담장이 흙으로 변했다. 개구멍을 만들어 놓은 뒤 모란이 손짓으로 연을 불렀다.
-여기로 나가면 되지.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곳이 다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몰랐겠지. 방금 만든 거니까. 모란이 기어 나가자 연도 유모가 곱게 입혀 놓은 비단옷에 흙이 묻거나 말거나 엉금엉금 따라 나갔다. 툭툭 털고 일어나서는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도 잠시였다. 곧 울상을 지으며 모란에게 물었다.
-한위 어디로 데리러 가야 하는데?
-……나야 모르지.
모란이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연이 또 울먹울먹 울려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심부름을 가는 어린아이인 척 세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위치를 알아내어 돌아왔다. 한위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말하자 연의 얼굴이 다시 피었다.
폐월당에 도착한 후에 모란이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정당과는 달리 어쩐지 구석지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연의 눈에는 다 그게 그것인 모양인지 개구멍을 또 찾아 담장 주위를 헤맸다. 모란은 은근슬쩍 개구멍을 만들어 주고는 연을 들여보냈다. 마당에서는 돌보는 사람 없이 한위가 흙투성이인 채로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한위야!
연은 그저 동생을 봤다는 기쁨에 좋아할 뿐이었다. 모란은 물끄러미 형제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제법 나이를 먹은 여인이 연과 모란을 보고는 놀랐다. 입을 열었으나 나오는 목소리는 없고, 그저 안절부절못하다가 물러났다. 폐월당에서 한위를 돌보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개구멍을 알게 된 후로 연은 밥 먹듯이 폐월당에 들락거렸다. 한위는 종종거리며 제 형을 쫓아다녔고, 나중에는 폐월당과 화정당을 드나들 수 있는 개구멍이며 길을 모두 알아 불쑥 화정당에 나타나고는 했다. 페월당과 화정당에서 연과 한위의 유모는 종종 두 도련님의 가출을 목격하곤 했으나 눈감아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은 모란에게 깊은 정을 붙여 갔다. 조금이라도 모란이 늦게 도착하면 울상이 되었으며, 모란이 떠날 때가 되면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가득했다. 잘 자라 일곱 살이 된 모란은 연이 제게 무한히 퍼붓는 어린아이의 애정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간질거리기도 하였고 성가시기도 하였다.
‘이런 게 오욕칠정 중 하나인 것이지.’
그렇다고 특별히 좋거나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연에게는 모란이 특별할지는 몰라도, 모란에게 연은 울먹일 때에 꽃 좀 쥐여 주면 될 어리고 무해한 존재였다. 그때의 모란은 그리 생각했다.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연과 모란은 마치 형제지간처럼 가깝게 지냈다.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니 형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연은 하루는 모란과 단둘이 있을 적에 이리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내 이름이 싫어.
-왜, 꽃 같아서 좋지 않아?
농으로 알고 농으로 대답하였는데 연은 농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모란이 왜 이러나 하고 바라보자 꾸물거리며 털어놓았다.
-형님은 강한 연인데 나는 약한 연이래. 아버지가 그리 지어 주셨다는데, 왜 나는 약한 연이지? 모르겠어……. 나 스승님에게도 칭찬 많이 받고, 다른 애들보다 검술도 잘하는데.
모란은 연의 말에서 연오를 향한 열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생긴 게 아니다. 바로 아비로 인해 생긴 열등감이다. 모란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이름을 바꾸면 되지.
-그래도 되나?
-안 될 게 뭐야. 연꽃 연으로 바꾸면 내 이름과 짝도 맞고 좋겠네.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연의 얼굴이 환해져서 모란은 드물게도 겸연쩍어졌다. 꽃을 사람 이름으로는 쓰지 않는 법이지만, 그 또한 그저 인간의 법이니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본인만 좋다면야.
아무튼 이리도 모란을 친근하게 여기는 연이었지만 이따금 모란을 낯선 것을 보듯 바라볼 때가 있었다. 제 어미도 그런 적이 있기에 모란은 개의치 않게 여겼다. 그는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낯선 것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몸에 품고 있는 것이 공허(空虛)하면서도 동시에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득 찬 물, 혹은 가득 찬 대기와도 같았으니.
이따금 몸에서 흘러 나가는 것들을 주체하지 못할 때에는 모란은 일찍이 화정당으로 왔다. 주변의 채소나 과일 따위를 크고 실하게 키우는 것도 어느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주위에서 이상하게 볼 지경이었다.
그런 면에서 꽃이 그득한 화정당은 모란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화단에 잔뜩 꽃을 피우고 나면 몸이 근질거리던 것도 한결 나아진다. 자라나는 뿔이 간지러워 짐승이 나무에 대고 긁어 대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꽃은 피워도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만 의아해할 뿐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녀석이로군.
화단에 앉아 수국 한 더미를 피우고 있던 모란이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조용히 앉았다. 작은 새로 가장은 했으나 다리는 세 개다. 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의 눈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얼마 안 있으면 금방 피워 내겠구나.
-나도 알아.
저 새는 저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세기도 셌다. 성가시게 굴 것 같기에 모란이 대꾸했다. 흙을 꾹 쥐었다가 연못에 뿌리자 팔뚝만한 잉어들이 먹이인 줄 알고 헤엄쳐 왔다가 흩어졌다. 앞으로 이 잉어들은 어지간해서는 병에 걸리지도 않고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 여기 있느냐?
-무슨 소리야?
이런 번잡스러운 곳에서 피워 낼 생각은 아니겠지.
모란이 고개를 들어 새를 바라보았다. 이 근처에 살지도 않는 것이 왜 여기까지 와 오지랖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칫하면 흩어질 테니 산에라도 가 있는 게 낫지 않겠는가.
-흩어지면 다시 모으면 될 것을.
모란은 자신이 오래도록 살리란 걸 알았다. 그에게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 말에 새가 꾹꾹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래, 한 번쯤은 흩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리고 오만한 것.
그러고는 조용히 날아갔다. 자존심이 상한 모란이 새가 앉아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벌써부터 흩어진다 만다 논하는 것이 기분 나빴다. 찜찜하였으나 그 뒤로 오래도록 새도 다시는 오지 않고 모란의 나머지 두 개의 고리도 완성되지 않아 그는 곧 이 대화를 잊었다. 나중에 지금 일을 후회하게 되리란 건 모른 채.
시간이 지나 열 살이 된 연은 이제 본격적으로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침나절부터 점심이 될 때까지 무술을 연마한 뒤 돌아와서는 모란과 함께 오후 시간을 보냈다. 모란은 연이 오기 전 일찍 와 화정당에서 노닥거리곤 했다. 그때쯤 모란은 눈에 총 열 한 개의 고리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고, 모란은 화정당 안에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새만 보고 있는데 문득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창문틀에 앉았다. 별거 아닌 나비라 하겠으나 모란에게는 그 나비 하나가 기연(奇緣)이나 다름없었다.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비가 그저 나비가 아니고 평범함이 그저 평범함이 아니다. 모란은 항상 평범했던 날이 그가 기다리고 있던 그날들이며 이 순간임을 알았다. 열두 번째의 고리가 모란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다른 곳에 가야 하나?’
열두 번째 고리를 얻어 낸 직후 모란이 머뭇거렸다. 그는 고리를 완전히 영글어 냈을 때 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존심 상하게 그 새의 말대로 산속으로 내뺄 수는 없었다. 당시의 어린 모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에 당장 무언가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조급함까지 일었다.
어차피 연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마음을 정한 모란의 눈이 감겼다. 양손은 바르게 포개어 겹쳐 놓았다. 겉보기에는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모란의 안에서는 장광경(長光景)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껏 그가 보고 들으며 깨우친 이치 열두 가지가 모조리 부서져 내렸다. 모란의 눈꺼풀 아래로 부서진 것이 고였다. 금빛 광요(光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손 위로 똑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은 마치 씨앗처럼 손바닥 안으로 심겨 들어갔다.
잠시 후 손바닥 위에 금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고리 하나가 어렸다. 하나로 시작하여 둘, 다음으로는 넷, 이어서 금방 열두 개로 늘어났다. 금색의 고리가 둥글게 맞닿아 원을 그리자 마치 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천화난추(千花亂墜).
하나의 고리가 열두 개가 되고, 하나의 꽃이 열두 개의 꽃으로 늘어난다. 흩어지고 떨어지고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손바닥 안의 무언가는 점차 완벽한 꽃의 모양에 가까워졌다. 모란은 어느새 현실을 잊고 깊게 침잠해 갔다.
삐걱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란?
오늘 발목을 삐는 바람에 일찍 검술 훈련이 끝난 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여 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는 척했을 모란은 졸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자고 있어? 간식 먹자.
가까이 다가간 연이 눈을 깜박였다. 모란의 손 위에 이상하고도 아주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신기해하는 얼굴로 연이 이리저리 보았다가 홀린 듯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점점 만개하던 꽃이 휙 움츠러들었다. 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무언가 볼 뿐이었다.
-모란? 이거 나 주는…….
꽃이야? 하던 물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손바닥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꽃에서 쨍강하는 소리가 났다. 아니, 꽃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연의 몸속 깊은 곳, 아주 깊고도 귀중한 곳에 담긴 것에서 나는 소리다. 영영화(靈英花)가 난잡하게 흩어지며 연의 혼을 찢어발기는 소리였다. 연이 할 수 있는 건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연은…….
“거기까지면 되었어.”
따뜻한 손이 눈가를 덮었다. 연이 크게 헐떡이며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백오십여 년을 다른 곳에서 떠돌다가 돌아온 모란이 서 있었다. 연은 어린 모란이 아니었다. 어린 연도 아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어느 날 그랬듯이 꽃이 만개한 화정당 뒤뜰에 서 있었다.
“나는…….”
연이 비틀거렸다. 모란의 귀중한 것을 샅샅이 살펴본 탓이었다. 혼이 찢기던 순간의 고통, 그 흔적을 맛보았을 뿐인데도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니, 두려움과 고통의 눈물이 아니다. 제가 모란에게 무슨 짓을 하였는지, 왜 모란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왜 제 혼이 찢겨졌는지 진정으로 알게 되어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었어.”
몸을 떨고 있는 연에게 모란이 말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연이 너는 아무것도 몰랐지.”
“무지하였다 하여 저지른 일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
연이 서러운 감정을 삼켰다. 그가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모란의 혼이 쫓겨나 이백오십여 년 동안 이계를 헤매다 돌아오는 일도, 연의 몸이 이렇게 병약해지는 일도, 혼이 찢겨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연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래 놓고는 제멋대로 고통스러웠다며 그 기억들을 내팽개친 것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꽃인 줄 알았지 않아?”
모란은 몸을 떨고 있는 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연은 이제 금빛 고리들이 영글어 꽃같이 보이는 모란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또 무섭고 아득하였다. 다시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모란은 눈물이 고인 눈을 통해 연의 근원을 볼 수 있었다. 구멍 난 곳에 모란의 근원 조각이 딱 알맞게 맞아 떨어졌다.
근원과 근원의 일부를 각자가 나누어 가졌으니 죽어서도 끊기지 않을 인연이 될 것이다. 연이 버리고 간 근원 조각을 고통스럽게 삼켜 제 것으로 만든 모란이 식은땀 어린 얼굴로 웃었다. 혼이 찢기는 순간의 고통은 모란에게도 어렵게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이것을 가지는 게 과연 연을 위한 것인가 저를 위한 것인가. 모란은 제 것이 아닌 이 고통조차도 달가웠다.
“내 꽃도 아니었는데 탐한 죄이지.”
“지금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그 꽃이 네 꽃이 되었을 것을.”
연의 눈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모란의 입술이 훔쳤다. 그가 웃었다.
“흩어져서 지나, 시들어서 지나 다시 피우면 되는 게 꽃인 것이지.”
모란은 자신의 오만과 부주의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음을 안다. 연의 잘못이라고도, 모란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고에 악의란 없다. 불운하다면 불운한 것. 그러나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이로 인해 모란과 연이 바로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 아닌가. 모란은 이 불운을 운이라 여기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연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진다면 그것대로도 좋았다. 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 때문에 그리된 것인데도, 그래도 내가 좋아?”
“아니.”
그 대답에 연의 낯이 창백해졌다. 모란은 그 또한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저 좋아하는 수준이라면 그리할 수는 없으니까. 연모하고 사모한다 하였는데 진심처럼 들리지가 않았어?”
“나…는…….”
“이토록 진심인데.”
모란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벌어져 울먹이고 있는 연의 입술과 혀를 삼켰다. 연의 근원에 남게 될 흉마저도 좋게만 느껴지는데 이것은 좀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모란은 물러나지 않았다.
연은 처음에는 벗어나려는 듯 바르작거리다가 이내 모란의 팔을 잡았다. 혀를 얽매면 얽매이고 깨물면 마주 깨물었다. 서로를 섞으며 다리에 힘이 풀린 연이 비틀거리자 모란이 그대로 놓아 주었다. 사방이 꽃이었다. 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연달아 폭죽 터지듯 꽃망울을 터트리는 꽃을 볼 수 있었다.
“나 때문에 혼이 찢겼지. 그래도 내가 좋아?”
연을 눕힌 모란이 물었다. 연이 눈을 깜박였다.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느라 목울대를 울린 연이 입을 열었다.
“아니. 좋지 않아.”
모란은 떨리는 연의 몸에 제 몸을 다정하게 포갰다. 따뜻한 체온이 번졌다. 손을 뻗어 모란의 목덜미에 난 식은땀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연이 말을 이었다.
“나도, 모란 당신을 연모하니까.”
모란은 넘치는 애정과 애욕으로 연을 꽉 끌어안았다.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꽃 속으로 둘의 모습이 잠겨 들었다. 온몸으로 모란을 받으면서, 연은 열 살 이후로 처음으로 꽃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참으로 좋다고 여겼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화사하게 꽃들이 흐드러졌다.
그러고는 연의 시야로,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