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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章 : 꽃 (12/19)

九章 : 꽃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제갈양이 웃으며 상대에게 차를 건넸다. 창밖을 보고 있던 사내, 모란이 예의 바르게 차를 받아 들었다. 제갈양이 한 모금 마시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갈세가의 가장 큰 보물이자 방어법인 진법 구궁척열환진(九宮斥閱幻陳)은 먼 옛날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산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진법의 사용법만 남아 있고 제작법은 소실되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제갈세가는 유용하게 잘 사용하고 있었다.

구궁척열환진은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일등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무력이 약한 제갈세가로서는 강자는 경계하고 약자만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진법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오작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며칠 전 있었던 마차 사건을 쉬이 넘기지 못할 수밖에. 특히나 그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자라면 가장 의심이 가고도 남았다.

문제는 백모란에게서 그 어떤 고수의 흔적도 살펴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무공의 성취가 높을수록 튀어나오는 태양혈이 밋밋했다. 뿐만 아니라 맥을 짚어도 남궁세가의 내기를 배운 흔적만 있을 뿐, 쌓아 둔 내공은 아주 미약했다. 신원 조사도 해 보았으나 그저 농부의 아들이자 어렸을 때부터 남궁연의 시종으로 오래간 일했을 뿐이라 깨끗했다. 딱 하나 미심쩍은 것이라면 백매화와의 관계지만 그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어떠한 꿍꿍이가 있어 세가에 잠입하려 든 고수라고 생각하여 온갖 채비를 갖추었던 제갈세가로서는 허탈한 일이었다. 지하로 가는 길은 모두 폐쇄했고 언제라도 세가의 고수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다.

항상 온갖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제갈세가가 이제까지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었던 비법이다. 그들은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상대라도 결코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방심이 화를 부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그저 의원 나부랭이란 말인가.’

백모란이 지내는 내내 긴장한 채 상대를 은근하게 심문하였던 제갈양으로서는 실망감도 들었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상대는 제갈세가에 온 뒤로 배정된 객실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루 종일 감시하던 이들도 그저 평범하게 지냈을 뿐 수상한 점은 없었다고 알려 왔다.

‘정말로 운이 좋아 그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았을 수도 있지……. 그러나 아닐 경우도 대비해 놔야 한다.’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었지만 제갈양은 일단 백모란을 잘 기억해 두었다.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그녀가 백모란을 잘 구슬렸다.

“생각이 많은 듯한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소?”

이틀 간 지켜본 결과 그는 백모란이 어떠한 상념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먹고 자고 입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백모란은 말끄러미 제갈양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말입니다.”

무언가 정보 하나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제갈양이 슬그머니 모란의 앞에 앉았다.

“얼마 전에?”

“어느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이후 어찌해야 할까 고민 중입니다.”

흠, 사랑 고민이었나. 그러고 보면 백모란은 외양과는 달리 놀랍게도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그 나이 또래의 흔한 고민이 여자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 제갈양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오, 도리어 따지자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제갈양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다면 고민할 이유가 무어가 있단 말인가?

“무슨 결격 사유라도 있소? 출신이 너무 미천하다든가, 아니면 자식이 딸려 있다든가.”

조용히 차를 마시던 모란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다만 그저, 상대가…… 나보다 오래 못 살 것이라.”

제갈양은 나름 납득이 되었다. 백모란은 의원이다. 아마 아픈 환자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과연 고민되는 일이긴 할 터였다.

“얼마나 오래 못 살기에?”

모란은 잠시 가늠을 해 보는 모양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가 엄지와 검지를 적당히 벌리며 말했다.

“상대가 앞으로 살날이 이만큼이라면…….”

그러고는 양팔을 크게 쭉 펼쳐 보이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살날은 이만큼이지요. 한데 매일매일 날이 갈수록 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상대를 좋아하고 아끼게 되니,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저런, 하고 제갈양이 혀를 찼다. 그렇다면 곤란하기는 했다. 예정된 이별이요, 슬픔이 아니던가. 방금 비교 정도를 보았을 때 상대는 정말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모란의 얼굴이 착잡해지는 걸 보고 그녀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도 좋아한다면 나는 고백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겠네. 어차피 이별할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돌이켜 보았을 때 흘려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겠나?”

백모란은 한참을 답이 없더니 혼자 있고 싶다고 전해 왔다. 제갈양은 연민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제는 백모란에게 더 캐낼 것도 없으니 슬슬 보내 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제갈양이 떠난 뒤 백모란은 표정 없이 창밖을 보았다. 치료가 끝났을 때 연이 살게 될 날은 최대로 잡아 이십 년. 한번 사라진 본원지기는 다시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그는 연의 마음을 받아들일까 말까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사라진 본원지기는 모란이 어찌 잘 채워 넣으면 삼십 년까지도 늘어날 터였다. 그런데 모란에게는 이십 년도 삼십 년도 너무 짧게 느껴졌다. 개나 고양이가 십 년을 넘겨 살기 힘든 것처럼, ‘사람’에게도 정해진 수명이란 게 있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가 톡톡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는 연이 저보다 짧게 살까 봐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 수명의 끝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어떠한 짓을 할까 알 수가 없어 고민하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상대를 좋아하고 아끼게 된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기에…….

그저 호감이 있을 때에도 단순히 생기를 회복하는 정도에 사람 몇십을 재료로 썼는데 그보다 시간이 지난 후, 죽음이 목전일 때는 무슨 짓을 하겠는가, 하고 모란이 중얼거렸다. 이곳에서는 다른 이의 목숨을 대가로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니……. 그럼에도 그런 것 따위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지.”

모란이 중얼거리고는 제갈세가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이 화창하니 밝았다. 지금 당장 연의 얼굴을 앞에 두고 싶었다. 연이 고백하던 때를 떠올리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다른 것 따위가 연에 비하면 무슨 대수랴.

***

눈 밑이 어두운 연이 조용히 화정당 문을 열고 나왔다. 어째서인지 그 품이 불룩했다.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시비와 하인을 흘깃 보고는 그가 뒤뜰로 향했다. 그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품에서 주섬주섬 옷 꾸러미를 꺼냈다. 그가 꺼낸 옷은 은빛으로 반짝반짝 광채를 뿌리며 빛나고 있었다.

연은 정말이지 노력했다. 물을 묻혀 닦아 보려고도 했고, 태워 보고, 찢어도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분명 겉으로 만지기에는 옷이었는데 은빛 피……가 묻은 곳만 멀쩡하게 남아 빛을 발했다. 침대 밑이나 자개장에 쑤셔 박으면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서 그곳에 숨길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은 땅에 파묻는 것뿐이었다.

연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열심히 삽질을 했다. 삽을 구하는 것조차도 퍽 어려웠다.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을 곳을 찾아 헤맨 끝에 그는 화정당 연못 뒤쪽을 찾아냈다. 한때 한위가 드나들었던 부근으로, 덤불이 있어 땅속에 파묻은 뒤에 대충 덤불로 가려 두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옷을 파묻은 뒤 흙으로 덮자 완벽했다.

그러나 이는 일차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 뿐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화정당 침소 안에 있었다. 연이 터덜터덜 걸어 침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상에 창백한 낯을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새벽 나절 연의 위로 뚝 떨어진 낯선 사람이었다.

연이 무사들을 부르지 않은 건 첫째로 이자가 모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요 둘째로 아무리 봐도 사람 같지 않은 외양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생긴 자도 있구나.”

신기하여 연이 상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듯 붉었으며 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끝이 뾰족하다. 게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영 구별이 가지 않는 외모였다.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맥을 짚어 보았는데, 이건 죽은 게 아닐까 싶을 때에 느리게 쿵…… 뛰고는 다시 멈추는 것이다.

‘모란의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침상에 눕혀 놓으니 상대방의 안색이 차근차근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연은 밤을 새서 무척이나 피곤했다. 상대에게 침상까지 내준 탓에 단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는 하품을 하고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낯선 이가 깨어난 건 저녁나절이 되었을 때였다. 끙, 하고 크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만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잠도 제대로 안 오고 피곤해 책이나 보고 있던 연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는 상대가 침상에 없었다. 왜 없었냐면, 그는 이미 잽싸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연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아…니…….”

연이 크게 당황하여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했다. 상대는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다시피 하며 연신 무언가 말했는데, 연으로서는 영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그저 모란 어쩌고저쩌고하는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걸 대체 어쩌나…….’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뭐라도 해 줄 텐데 말이 안 통하니 연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상대는 이제는 엉엉 울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연은 환장할 따름이었다. 상대가 다시 쿨럭쿨럭 피를 조금 토할 때에야 가까스로 이자가 환자라는 게 떠올랐다.

말은 안 통해도 행동이라면 통하겠지 싶어 연이 일단 상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제야 상대가 조용해졌다. 무언가 먹여야 하긴 하겠는데 먹여도 되겠는가 고민하던 연이 기겁했다.

“뭐, 뭐 하는……!”

대체 무슨 의미로 이해한 건지, 상대가 이번에는 훌훌 입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나신이 된 그가 다시 달려와 연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황망하게 그 광경을 보는 와중에도 그가 사내임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이젠 연의 바지를 벗기려 드는 것이 아닌가. 연은 기겁하였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걷어찬 연이 아차 하였는데 사내는 그저 걷어차인 대로 얌전히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환장하겠군.”

말이 안 통하니 연은 일단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남자는 까만 눈을 온순하게 깜박이며 침대에 가 누웠다. 연은 그를 그대로 이불로 덮어 돌돌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제대로 뜻이 통했는지 이제야 얌전했다. 이 사태는 모란이 와야 제대로 해결될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연은 일단 물은 괜찮겠지 싶어서 남자에게 가져다주었다. 목이 말랐는지 남자는 숨도 쉬지 않고 물을 마셔 없앴다. 한 잔 더 가져다줄까 하는데 슬슬 연의 눈치를 보며 침대 아래로 내려와 또 무릎을 꿇으려 하는 게 아닌가…….

연은 실랑이 끝에 겨우 남자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 나니 기력이 소모되어서 이제는 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 이상한 남자가 어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으니 밖으로도 함부로 못 나가겠다.

골머리만 앓고 있던 연을 구한 건 시비였다. 도련님, 하고는 정중하게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막 모란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이상한 남자에게 시달리느라, 고백 때문에 심적으로 괴로워하던 것도 잊고 있었다. 혹여나 남자가 그사이에 나와서 돌아다닐까 봐 연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왔다. 화정당 정문으로 달려 나가니 마침 모란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달려오는 연을 보고는 뭘 생각했는지…….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제갈세가에서 사람이 붙어서…….”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좋았던 연이 모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자신이 늦어서 기다린 게 아님을 안 모란이 의아해했다. 이내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야? 아니,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몸이 또 안 좋아져 있어.”

언제나 그렇듯이 모란은 연의 몸이 안 좋은 건 귀신같이도 알아차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얼른 침소로 들어와 봐. 어서. 모란 당신을 아는 이상한 사람이 왔는데, 피도 토하고 행동도 이상한 게, 많이 다친 것 같아. 어찌 치료하면 되지?”

“나를 아는, 이상한 사람?”

확 얼굴이 굳은 모란이 성큼성큼 화정당으로 향했다. 연이 그 뒤를 따라 좇았다. 침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걸 볼 때까지만 해도 연은 그가 남자가 위급하여 얼른 치료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 거칠게 멱살을 잡아 침대에서 끌어 내리는 걸 보기 전까지만.

“뭐 하는 거야! 환자라고!”

연이 놀라 팔을 잡았으나 모란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란과 연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너 피 어디에 토했어.”

남자가 뭐라뭐라 말을 했지만 모란은 여전히 멱살을 쥐고 있었다. 매우 거칠고 험악한 태도에 연이 기겁했다.

“모란, 환자라니까!”

“환자는 무슨, 옛날 옛적에 다 나았을 것을. 그리고 너 여기 말로 안 하냐, 응? 본 지 오래되었다고 벌써 까분다. 상황 파악 안 할래? 지금 내 기분이 좋은 것 같으냐, 안 좋은 것 같으냐?”

이런 모란은 처음 보는 연이 뜨악하여 입을 벌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더니 남자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안,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여기 말을 할 수 있잖아! 연은 두 번째로 충격을 받았다. 모란이 여전히 멱살을 쥔 채 험악하게 윽박질렀다.

“피 어디에 토했냐고.”

“그, 그게 저자의 옷에다가……. 그리고 바닥에 조금. 지, 진은 괜찮을 겁니다.”

“……그래, 진이 멀쩡하기는 하군. 그런데 애 상태가 왜 저래?”

“예?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

“설마 여기 온 뒤로 내내 저 침상에서 지낸 것은 아니지?”

모란이 상대를 쥐 잡듯이 잡을 것 같기에 연이 일단 변호하고 나섰다. 연이 직접 침상을 내어 준 것이지, 저자가 차지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피까지 토하기에 침상에 누우라고 했어. 환자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니 그만해.”

모란이 연을 잠시 보고는 한숨을 쉬며 멱살을 놨다. 남자가 바로 바짝 엎드리며 눈치를 보았다. 연은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았다. 모란이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지금 많이 봐주고 있는 건 알 테고. 돌아가.”

“모, 모란 님. 모란 님. 이대로는 못 돌아갑니다……. 제, 제발.”

연에게 한 것처럼 남자가 모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그러나 모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짜증을 내며 걷어차듯이 털어 버렸다.

“못 돌아가면 여기서 살면 되겠네. 밖에 살 만한 땅 많거든. 잘 가거라.”

“모란 님! 이, 이야기라도 들어 주세요!”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울며 매달리는데 모란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뻥 걷어찼다. 아이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구르면서도 남자는 다시 안달복달 바지 자락에 매달렸다. 모란은 무시하며 얼떨떨하게 서 있는 연을 끌어다가 침상에 눕혔다.

“저놈이 누워 있던 곳인데 찜찜하지는 않아? 이불 갈아 줄까?”

“아, 아니. 괜찮은……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저 남자는 누구인데?”

연이 물었으나 모란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이불을 스윽 덮어 주었다. 재워 버리려는 의도가 아주 노골적이었다.

“눈 보니까 많이 졸린 것 같은데. 열도 좀 있지 않아.”

모란이 연에게 하는 행동을 본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입을 헤 벌렸다. 연은 가슴을 누르는 힘에 침상에 눕기는 했지만 반쯤 바닥을 뒹굴며 매달리고 있는 남자가 신경 쓰여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연이 힐끔 남자를 바라보며 잘 생각을 하지 않자 모란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벌레 대하듯이 발로 툭툭 남자를 건드렸다. 남자가 비굴한 태도로 바짝 엎드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철혈 군주, 실리낙스의 대마녀, 우타마의 영원불멸(永遠不滅)하며 위대하신 왕 아이낙스 님의 미천한 종, 앱솔이 귀인을 뵙습니다.”

“남궁, 연입니다.”

난생처음 보는 인사법에 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앱솔은 이보다 더 낮출 수 있을까 싶은 태도로 바닥에 이마며 온몸을 딱 붙였다.

“남궁연 님을 뵙게 되어 이 앱솔에게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거창하고 긴 인사말을, 모란은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며 생략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녀석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고 있으면 금방 내쫓아 버리고 올 테니.”

“모, 모란 님! 제발 이야기라도 들어 주십시오. 모란 님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자가 어찌나 애달프고 서글프게 울던지 아무것도 모르는 연이 봐도 다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모란은 도무지 동정심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가 날 믿기는 무얼 믿어? 예전에 내 등에 창 꽂은 놈이 할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모란 니임! 제가 아이낙스 님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처량하고 비굴한 모습이라 연이 움찔하였다. 저 순한 얼굴로 모란의 등에 창을 꽂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자가 얼마나 엉엉 울며 매달리던지,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모란이 말했다.

“아주 불쌍해 보이지? 저래 보여도 남궁세가 정도는 가뿐하게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녀석이니 절대 불쌍하게 여기지 말거라.”

“아, 아닙니다! 여기에 오면서 얼마나 크게 내상을 입었는데요!”

“죽이지도 못할 정도로 재생력이 뛰어난 녀석이니 저따위 말에 속지도 말고. 목이 잘려도 살아남는 녀석이거든.”

“모란 니임!”

둘이 주고받는 대화에 연은 그만 정신이 다 아찔해져 버리고 말았다. 목이 잘려도 살아남는 재생력은 또 무어고, 아이낙스니 무엇이니……. 저 앱솔이란 자를 돌보겠다고 밤을 샜더니 순식간에 기력이 떨어졌다. 연이 피곤한 낯으로 희미하게 끙, 하는 소리를 내자 모란이 바로 반응했다. 그는 앱솔을 한번 노려보고 연을 한번 바라보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손가락 다섯을 펼쳐 들었다.

“하나.”

앱솔은 저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다 접힐 때까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사이 또 손가락이 하나 접혔다.

“둘, 셋.”

“아, 아라벨 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란 님.”

“넷.”

“타마타모가 동면에서 깨어나 머리를 들고 말았습니다. 모란 님, 제발.”

모란이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앱솔이 답만 기다리고 있는 동안, 모란은 골치가 아픈 모양으로 인상을 썼다.

연은 아라벨 산이니 타마타모니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치 상 모란이 전에 있던 곳에 문제가 생겼고, 그건 모란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무심하게 표정을 바꿨다.

“원하는 대로 이야기 다 들어 줬지? 이제 꺼지려무나.”

“모란 니임! 아이낙스 님께서는 얼마 전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분이 모두 회복되시고 난 뒤에는 늦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앱솔이 애처롭게 모란의 다리에 다시 매달렸다. 어찌나 크고 서럽게 울던지 연의 머리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모란이 짜증을 냈다. 순간이동으로 던져 버리고 올 심산으로 앱솔의 덜미를 쥐는 것 같았는데 이동은 안 하고 둘의 모습이 지직 끊기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앱솔이 쿨럭쿨럭 은색의 피를 왈칵 토해 내며 다리에 매달렸다. 상대가 죽을 것처럼 피를 토해도 모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흐어엉, 모란 님, 모란 님뿐입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 앱솔은 답을 들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연은 모란의 얼굴에 아주 커다란 글자로 ‘짜증’이라고 써 있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그럼 죽든가.”

모란은 주저 없이 손을 치켜들었지만, 자신들을 지켜보는 연을 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그저 납작 엎드리던 앱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아는 모란이라면 저를 죽여도 벌써 열 번은 더 죽였을 텐데 아직도 머리가 온전하게 붙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볼 테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와.”

“아, 안 됩니다. 그사이에 저 못 쫓아다니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하고 연이 바라보자 진짜 그러려던 모양인지 모란이 쯧 혀를 찼다. 그는 발로 앱솔을 툭툭 찼다. 앱솔이 눈치를 보면서 침소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얼굴도 보기 싫은지 모란은 그를 완전히 안으로 구겨 넣었다. 자개장 뒤에 완전히 숨은 덕에 앱솔의 나풀거리는 옷자락만 겨우 삐죽 나왔다.

“내일 아침까지 거기서 없는 듯 조용히 있어.”

모란은 무섭게 윽박지르고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왔다. 앱솔이 쭈그리고 있는 곳을 보던 연이 얼른 다시 누웠다. 모란에게 고백했다가 아직도 답을 듣지 못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목부터 열기가 번져 오르기 시작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저자 때문에 피곤해. 일단 자고 이야기는 내일 들을래.”

그리 말하고는 심장이 쾅쾅 뛰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모란은 이불 위를 두어 번 매만진 뒤 호롱불을 훅 불어 껐다. 목소리가 매우 다정했다.

“그래. 내일 이야기해 줄게.”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리는 뜨지를 않았다. 연은 혹여나 무슨 소리라도 들릴까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피곤하긴 했던 것이다.

한데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꿈이 참으로 괴상망측하였다. 그는 한참을 끙끙거리며 꿈속을 헤맸다. 그러다가 맛있는 냄새가 나서 잠에서 깼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란이 탁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음식들을 차려 놓고 있었다. 눈을 뜨고 나서도 연은 꿈을 곱씹느라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왜 그러고 있어? 어디 아파?”

모란의 손이 척 이마를 짚을 때에야 연이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아직 미약하게 두통이 남아 있는 미간을 꾹 눌렀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

어떤 꿈이었지? 이제 아침이라고 앱솔이 자개장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걸 보며 연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슨, 산처럼 거대한…… 거북이가 있었는데……. 모란 당신이 벌거벗은 채로 거북이 머리 위에 앉아 있었어.”

별생각 없이 탁자에 앉던 모란이 멈칫했다. 연은 다시 꿈을 떠올려 보았다. 그냥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벌거벗은 채로, 몸의 반쯤은 활활 불타는 상태에서 거북이 머리를 맨손으로 반쯤 박살 내고 있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앱솔이 크게 뜬 눈으로 연을 한번 보고는 데굴 눈을 굴려 모란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진 연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모란이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준다 하였지? 얼른 와서 식사해.”

탁자에 앉기 전에 연이 머뭇거리며 앱솔을 바라보았다. 앱솔은 퍽 비굴하게도 엉금엉금 조금씩 기어 모란의 발치로 향하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온순한 양 같은 남자가 저러고 있으니 연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은 식…….”

“저건 식사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놈이니 신경 쓰지 말고.”

모란이 냉정하게 말하자 앱솔이 시무룩하게 기가 죽었다. 연은 어정쩡하게 자리에 앉았다. 푹 자고 난 뒤라 그런지 한결 몸이 가뿐하여 식욕도 제대로 돌았다. 소면 한 그릇도 뚝딱 비웠고 모란이 이것저것 얹어 주는 것들도 잘 들어갔다.

한편 앱솔은 놀라 까무러칠 것 같았다. 모란이 어떤 사내이던가! 적이건 아군이건 간에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 없이 살생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살생을 저지르는 손길에 망설임 또한 없었다. 아무리 평소에 가까이 지냈다 해도 그 목숨을 거두어야 할 때가 오면 피도 눈물도 없이 거두어 가던 사람이다.

모란의 발치에 엎드려 사랑을 구걸한 자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그는 마음을 내주는 일이 없었다. 사랑이나 전우애, 혹은 슬픔, 기쁨 따위는 모란에게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강하기는 또 얼마나 강했나. 모란과 대등하게나마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의 아름답고 위대한 왕 아이낙스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모란은 원한다면 그 누구의 목숨도 쉬이 취할 수 있었고, 그 어떤 존재도 한 줌 먼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모란이! 다정하게 탁자에 앉아서―애초에 그는 누구와 부러 식사를 같이하는 인간이 아님에도― 누군가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앱솔은 저렇게 친절한 모란은 처음 봤다. 이것저것 먹어 보라고 음식을 밀어 주는 걸 볼 때에는 턱이 땅에 떨어질 듯했으나 모란이 툭 치자 얼른 움츠러들었다.

앱솔은 이곳으로 건너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모란이 그들의 소환을 거절했을 때 아이낙스는 앱솔을 이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앱솔은 그때 감히 아이낙스의 결정에 의문을 가졌다.

-왕이시여, 정말 모란 님께서 이 부탁을 들어주실까요?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 모란이었다. 앱솔의 의문은 당연했다. 그 의문에 아이낙스는 이리 말했다. 모란 그자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이 부탁 또한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리 와서 보니 알겠다. 그 세계에서 지내던 모란과 이 세계에서 지내는 모란은 달랐다. 모란이 젓가락으로 앱솔을 가리켰다.

“이것은 전에 알고 지내던 놈인데, 암수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 아닌 누구의 의도에 의해 인공적으로 태어난 생명체지.”

앱솔은 모란의 말에 그저 머리만을 조아렸다. 그렇다. 그는 영원불멸한 왕 아이낙스의 호문쿨루스. 죽을 때까지 그의 주인만을 위해 살며, 죽는 것조차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존재다. 물론 연은 호문쿨루스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공적으로 태어난 생명체?”

“그래, 뭐어. 대충 계란 흰자와 피 몇 방울을 섞은 뒤 보석 가루 좀 넣으면 만들어지는 녀석이야.”

자신은 그런 허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무시무시한 모란 앞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다.

“정 이해 못 하겠으면 눈코입 달린, 말하는 계란 흰자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내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앱솔은 속으로 대성통곡을 했다. 계란 흰자라니 너무나도 치욕스러웠다……. 이래 봬도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새 트비라의 알에다가 존귀하신 주인 아이낙스의 피,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진귀한 마력석과 미스릴을 더해 만들어진 존재다. 앱솔은 벌써부터 그의 상냥하고 다정하신 왕 아이낙스가 보고 싶었다.

“전에 알고 지내던 녀석이 처리 못 할 문제가 생겼으니 나보고 도와 달라고 하는 거야. 대리인으로 이놈을 보낸 것이지.”

“아닙니다, 이것은 도움 요청이 아니라 엄연히 신성한 거래입니다!”

어찌 아이낙스 님이 도움 따위를 청하신단 말인가 하여 대들었다가 앱솔은 한 번 더 발에 채이고 말았다. 내장이 진탕이 되는 고통 속에 그가 피를 삼키며 또 속으로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앱솔에게는 아이낙스의 명령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아이낙스는 누구고 타마타모는 또 무엇인데?”

연의 질문에 이때다 싶어 앱솔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이낙스 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우신 분! 철혈 군주, 실리낙스의 대마녀, 우타마의 영원불멸(永遠不滅)하며 위대하신 왕이십니다.”

이해를 할 수 없던 연이 모란을 쳐다보았다. 모란은 연 모르게 앱솔을 마력으로 두들겨 팼다. 앱솔이 조용히 신음을 삼켰다.

모란에게 이리 얻어맞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한데 전 같으면 사지가 벌써 달아나고도 남았을 텐데……. 무언가 달랐다. 이곳의 모란은 전과는 다르게 생동감이 넘쳤다.

“내가 전에 지내던 곳에서 가장 권세가 드높은 여군주야. 이곳에 비교하자면 황제라고 할까. 타마타모는 거대한…… 영물 같은 것인데 성질이 좀 난폭해서.”

“아…… 거대한 영물이란 말이지.”

앱솔이 입을 조금 벌렸다. 그, 그런 것이 아닌데……. 타마타모는 산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괴수다. 백여 년 전 모란이 열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단단하며 용암같이 뜨거운 껍질을 다 깨부수어 기절시킨 뒤 봉인을 한 괴수.

그러나 앱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모란이 그렇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하면 항상 후환이 별로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모란을 설득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앱솔이 정중하게 물었다.

“모란 님, 이제 아침이온데 생각은 해 보셨는지요.”

“글쎄. 생각은 했지.”

어째 모란의 말투가 썩 긍정적인 말투가 아니었다. 그가 만두 세 개를 한입에 가볍게 해치우면서 말했다.

“차원까지 넘어가야 하는 그런 중대한 일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결정하라고? 양심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앱솔은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지금은 그 말만이라도 감지덕지였다. 이제부터는 비위를 잘 맞추는 것만 남았다. 슬금슬금 물러나면서 앱솔은 흘깃 연을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나 보이는 것이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가만, 근원이…….’

모란과 연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앱솔이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런 것이로군. 그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그 시선이 거슬린 모란에게 또 마력으로 조용히 쥐어 터졌다.

“차원을 넘어간다는 말은, 아예…… 다른 세계로 가 버린다는 의미야?”

내심 가슴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던 연이 놀라서 물었다. 그는 모란이 이백오십 년 간 그곳에서 지냈다는 걸 기억한다. 이백오십 년을 지낸 곳과 겨우 십여 년을 지냈을 뿐인 이곳. 어느 쪽이 더 그리울지는 뻔했다. 하지만 연이 어떤 마음인가를 눈치챈 모란은 연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난 그곳에선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야. 이방인은 정착도 할 수 없고 연을 맺기도 매우 어렵지. 어지간한 일로는 자극조차 오지 않아.”

이백오십 년 동안 그의 삶은 오로지 전투, 살인, 혹은 육체적인 관계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감흥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차원의 이방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초반에 워낙 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슬픔이나 기쁨을 느끼기가 퍽 힘이 들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온 뒤에 보니 전자인 게 확실했다.

“이백오십 년을 지내는 동안 백 년이라는 시간이 넘도록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생겼어. 쌓아 둔 부와 명예도 막대했지. 그럼에도 내게는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이곳으로 넘어오는 선택지밖에는 없었거든. ……애초에.”

마치 불안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게 설명해 오는 그의 목소리에 연의 가슴이 덜컥했다. 모란이 팔짱을 끼고 앱솔을 노려보았다. 뜨끔한 앱솔이 다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원칙을 따지자면 그 세계의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법인데 말인데. 타마타모를 한 번 처리해 주는 걸로는 부족했나?”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이낙스가 부상 중만 아니라면 괜찮았을 텐데 하필 시기가 안 좋았다. 타마타모는 차원을 부수고 가르며 야금야금 갉아먹는 존재다. 모란은 바로 그런 존재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세계에 빚을 지워 놓은 덕에 다시 원래 세계로 넘어올 수 있는 방법을 얻은 것이었다.

앱솔은 모란의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그가 부탁을 들어준다 해도 결코 대가를 허투루 받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기한은?”

“위대하신 왕 아이낙스 님이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이곳을 기준으로 다섯 번의 공회전이 끝나기 전입니다.”

앱솔이 공손하다 못해 극진하기까지 한 자세로 말했다.

‘다섯 번의 공회전. 아슬아슬하겠는데. 꼭 가야 하나? 하지만 상대가 대마녀니 대가가 대단할 터. 어쩌면…….’

이런저런 계산을 하느라 모란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연은 복잡한 마음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갑자기 모란이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그는 불현듯 이백오십 년 동안의 모란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어떤 식으로 생활을 하였는지…….

“아무튼 내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떨어져 나갈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아이낙스 님의 명이셨습니다.”

앱솔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보면 참으로 비굴한 태도인데도 앱솔은 그게 당연한 듯 보여 연은 신기했다. 이곳에서는 노비조차도 앱솔 같은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울리는 모습이라도 취해.”

“그것을 원하신다면.”

연은 앱솔의 모습이 변하는 걸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옷자락은 순식간에 짧아져 이곳의 복식으로 변했고, 검은자로만 가득 찼던 눈에는 또렷한 흰자가 생겼다. 뾰족했던 귀도 둥글어졌고 붉은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연이 시선을 떼지 못하자 앱솔은 으쓱했다. 그리고 왜인지 심기가 불편해진 모란에게 또 마력으로 얻어맞았다.

“역시 몸이 다 낫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피 색만은 바뀌지 않는지 은색 빛이 입가에 내비친 걸 예리하게 알아차린 연이 물었다. 앱솔은 모란의 시선이 또 희번덕거리는 것을 보고는 얼른 납죽 엎드렸다. 오랜만에 이렇게 쥐어 터지니 정말이지 서러워 눈물이 다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모란이 연이라는 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쩐지 그의 위대한 아이낙스 왕이 비를 대할 때와 비슷했기에…….

“귀인께서 어찌 제게 말을 높이십니까. 제발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매우 간절한 눈빛에 연이 떨떠름하게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말았다. 모란이 또 째려보는 바람에 앱솔은 속으로 흑흑 울었다. 정말 까칠하니 비위 맞추기 한번 까다롭다.

‘그럼 당분간은 이 앱솔……이라는 자와 함께 다녀야 하는 건가?’

타인과 지내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연으로서는 떨떠름하였다. 실은 어제 자개장 뒤에 쭈그리고 잘 때부터 영 찜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앱솔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바로 그날에만 해도, 연은 화정당에서 지내며 여러 번 앱솔의 존재를 잊었다. 이따금 아, 앱솔이 있었지 하고 돌아보면 그는 얌전히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구나 창틀을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쓸고 닦는가 하면 침상의 이불도 반듯하게 펴 놓았다. 자개장을 열어 뒤적거리나 싶으면 옷이 딱딱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치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목이 말라 차를 찾으면 어느새 따끈한 차가 대령되어 있었고 입이 심심하다 싶으면 간식거리가 근처에 있었다. 공기가 답답하다 싶으면 얼른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이따금 어디가 아픈 것처럼 비틀거리는 것만 제외한다면 정말…… 편했다.

연은 어느새 앱솔을 편히 부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그런 연에게 모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평생을 누구 시중들고 살아온 녀석이라 그래. 편하게 부리렴.”

그러나 연은 앱솔이 남궁세가 정도는 초토화시킬 수 있는 이라 했던 모란의 말을 기억했다. 저쪽 세계는 하인조차도 저리 강하단 말인가, 연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귀하신 분, 어딜 나가시려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또 뒤늦게 앱솔을 인식하고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앱솔은 정중한 태도로 자개장을 열어 연이 겉옷을 고르게끔 했다.

앱솔이 화정당에 온 지도 벌써 칠 일째. 모란은 앱솔에게 하여금 맹세를 하게 했다. 앱솔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이유를 막론하고 연에게 절대 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맹세였다. 모란의 비위를 맞추는 게 우선인 앱솔은 넙죽 알겠노라고 맹세를 했다.

그 뒤부터 모란은 기루 일로 나가 봐야 할 때면 마음 놓고 앱솔에게 연을 맡기고 나갔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곧 형님의 혼인식인데, 무언가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연이 외투를 고르자 앱솔이 다가와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몸종인 양 따라붙었다. 이게 얼마나 자연스러웠냐면, 화정당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앱솔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들 새로 들어온 하인이겠거니 생각했다.

앱솔은 그의 왕을 칭송할 때를 제외하면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존재 자체가 마치 십 년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숙했다. 연은 자박자박 걷다가 물었다. 그는 앱솔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 피는 왜 은색이지?”

“제 피가 미스릴이라는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금속은 항마력이 강하기 때문에 제 피에는 마법을 무효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연은 앱솔의 대답 중 팔 할 정도만 알아들었다. 마법을 무효화하는 속성이라면…… 그래서 모란이 처음에 앱솔에게 그리도 피를 어디에 토했냐고 물었던 거구나. 연은 불현듯 화정당 연못 뒤쪽에 묻어 놓은 옷이 떠올랐다.

“그럼 옷에 묻은 피도…… 마법에 안 좋은 건가?”

“아, 그 정도 피로는 남궁연 님에게 생기를 공급하는 마법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겁니다. 사방진도 아니고 육방진이나 되니까요, 제 목을 잘라 내 피를 받아 땅을 적시지 않는 이상 괜찮습니다.”

목을 잘……라 내어 피를 받……. 아무튼 그렇다니 다행이었다. 하긴 모란도 진에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으니 좀 나중에 처리해도 되겠지. 그나저나, 생기? 연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화정당 근처에서 모아 오는 기운을 생기라고 하는 모양이지?

“그 세계에서 모란은…… 어떤 사람이었어?”

앱솔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떤 사람이냐면 그가 아는 중 가장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아이낙스마저 어찌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자일뿐만 아니라 그만큼 추종자도 많았다. 모란이 떠난 뒤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가장 위명이―악명도― 높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으니 망정이지, 마음먹고 사람들을 모아 무언가 하려고 했다면 뭐든 손쉽게 해냈을 만한 이였다.

그의 위대한 왕 아이낙스에게 위협이 될 듯하여 몇십 번이나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창으로 등을 찌른 것이 고작이었다. 열 받은 모란이 앱솔을 갈기갈기 찢어 마력석을 으깨려고 했을 때의 그 공포란…….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던 앱솔이 말을 골랐다.

“아주 강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이가 패배했고 또 많은 이가 그분을 우러러보았지요.”

이게 앱솔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었다. 앱솔의 말을 들은 연이 생각했다. 그러면 아주 강했다는 걸 빼면 여기나 거기서나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나 보지?

“그 아이낙스란…….”

연이 움찔했다. 아이낙스의 ‘아이’ 정도를 말했을 때부터 앱솔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던 탓이다.

“……분은, 모란과는 어떤 사이였나?”

앱솔은 또 고민에 빠졌다. 아이낙스와 모란은 무슨 사이인가, 하면 그간 있었던 일을 짚어 보면 된다. 처음 아이낙스와 모란은 만나자마자 온 천지가 진동하도록 무시무시하게 싸웠다. 그런 일이 몇 년에 걸쳐 한 번씩 있었는데 매번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모란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지낼 때도 있었다.

그뿐인가, 아이낙스가 그의 사랑하는 비로 인해 이성을 잃었을 때 뜯어말린―물론 앱솔은 모란이 뜯어말리는 걸 빙자해 기꺼이 아이낙스를 두들겨 팬 것이라고 아직도 생각했다― 것도 모란이다. 가끔은 연합하여 전투를 치를 때도 있었기에 아군인지 적군인지 친구인지 원수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모란 님과 위대하신 왕께서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계십니다.”

복잡한, 관계? 연의 기분도 복잡 미묘해졌다. 딱히 좋은 미묘함은 아니다. 연이 가장 찜찜했던 것을 물었다.

“처음 나를 모란으로 오해했던 것 같은데.”

“아, 그렇습니다. 이 앱솔, 사죄드립니다. 모란 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인 데다가 귀인께서 모란 님의 기운을 가지고 계시기에 잠시 착각하였습니다.”

연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모란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 치료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묻고 싶은 건 자신을 왜 모란으로 오해했느냐가 아니었다.

“침대에 눕혔을 때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그런 행동?”

잠시 앱솔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해한 얼굴로 끄덕였다.

“침대에 눕히시기에 저에게 봉사받기를 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침대에 눕게 하실 분이 아니거든요.”

보통은 쥐어박거나, 패거나, 혹은 갈기갈기 찢어서 내다 버리든가 했으니 앱솔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해하는 건 앱솔만이 아니었다. 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침대에 눕힌 것 정도로 그런, 그런 반응이 바로 나올 정도란 말인가?

“아, 오해는 마십시오.”

앱솔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한 번도 모란 님과 성적인 교합을 나눈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이 평소 폭력적이며 변태적인 정사를 즐겨 나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 이야기를 기반으로 저의 육체적 조건이 모란 님을 견디기에 걸맞지 않나 하는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또한 원체 상대를 가리시는 분이 아니기에 저 또한 가리시지 않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게, 뭐야 대체……? 연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폭력적이고 변태적인 정사? 상대를 가리지 않아? 연의 말수가 급격히 줄고 말았다. 앱솔은 연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무얼 잘못 말했나 고민했다.

‘혹여나 질투인가? 그러나 질투를 할 만한 위치는 아니지 않은가.’

앱솔은 그의 주인인 아이낙스를 흠모하고 존경하며 사랑한다. 그럼에도 아이낙스가 그의 비를 가장 아끼는 것에 대해서는 질시나 질투를 한 적은 없었다. 아이낙스가 그의 창조주이며 혼의 주인이었으니까.

그가 보기에는 모란과 연이 아이낙스와 저의 관계처럼 보였다. 연의 혼이 모란의 흔적투성이인 탓이었다. 너덜너덜하고 찢겨지고 기워져 형편없는 상태의 혼. 보아하니 오래 살지도 못하겠다.

육신을 찢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혼을 찢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보아하니 연의 혼은 모란이 찢은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모란이 연의 혼 일부를 소유하고 있지 않나. 이보다 더 명확하게 주인이란 증거도 없었다.

‘혼의 일부를 내놓는다는 건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상대에게 바친다는 뜻.’

아이낙스가 가장 충실한 종인 앱솔을 아끼듯 모란도 연을 아끼는 것이리라. 앱솔은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연의 신분이 꽤나 귀한 듯하였으나 아이낙스에게도 충성스러운 귀족들은 얼마든지 많았다.

‘하기야 단순히 주인이 종속자를 아끼는 것치고는, 평소 그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기는 한데.’

그러나 아무렴 앱솔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아이낙스가 내린 명령만이 중요했다. 모란을 설득하여 타마타모를 다시 처리하게 하는 것뿐.

한편 연은 무척 심란해졌다. 모란이 전에 어찌 지냈는지 앱솔에게 듣고 나자 제 고백이 모란에게 있어서는 아무짝에도 감흥 없는 어떤 것이 아닌가 싶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니 저도 가리지 않는 건가. 치료를 하는 김에 그저 몸만 즐긴 것일까.

‘하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다정하였는데.’

게다가 폭력적인 정사를 즐겨 나누었다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왕왕 울렸다. 폭력적인 정사……. 그래서 내 엉덩이를 때렸던 건가 보다……. 그럼 모란은 몸만 즐긴 것인데 나 혼자 착각하여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건가. 수치심으로 연의 얼굴이 잠깐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마음이 복잡하여 연은 혼인 축하 선물을 사는 둥 마는 둥 화정당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겉옷을 앱솔에게 건네며 연이 침상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일을 마친 모란도 돌아왔다. 연이 고개를 돌리고 있어 기분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모란이 다가와 뒤에서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살살 입술을 문지르자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를 밀어 냈다. 모란이 눈을 깜박였다.

“할 말이 있어.”

“할 말?”

아니, 아침만 해도 괜찮았던 연의 기분이 대체 왜 이러지. 모란이 흘끔 앱솔을 노려보았다. 연은 모란을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얼마 전에 했던 말, 취소하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융중산에서 말했었잖아. 당신을 연모하고 있다고. 그 말은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 분위기에 홀려 내가 잠시 넋이 나갔던 것으로.”

앱솔이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뭔지는 몰라도 순식간에 모란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모란은 갑이고 자신은 을이니 그저 죽었다 하는 수밖에. 그리고 과연 앱솔의 직감대로 모란은 성질이 바짝 올랐다.

최근 모란이 무엇을 하였는가. 그는 융중산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낙스의 일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한 사람에게 빠진 힘 있는 자가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반추해 본 것이다. 자신의 경우에는 아이낙스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동시에 모란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거절하고 또 거절했던 아이낙스와는 달리 모란은 무려 상대가 연모한다고 고백까지 해 왔으니 그에게 대체 무슨 선택권이 있겠는가.

생각 같아서는 융중산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연을 끌어안고 매우 아껴 주고 싶었다. 제갈세가에서 붙은 사람만 아니라면 그랬을 것이다. 대신 그는 마차를 타고 오면서 그날을 떠올렸다. 융중산에서의 연의 고백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입 안이 달큼하고 입꼬리와 눈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어찌 그리 사랑스럽고 어찌 그리 어여쁜가. 그 얼마나 귀엽던가.

그런데 도착해 보니 불청객이 있을 줄이야. 모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연이 하도 부끄러움을 타며 이리저리 제 대답을 회피하기에 잠시 기다려 주었다. 회피하는 모습조차도 매우 드물어 보기 좋았거든. 그랬는데 심지어 그 불청객이 죄다 훼방까지 놓을 줄은 몰랐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모란이 이를 갈았다. 그 고백을 없던 것으로 하자니!

“아니, 그건 아니지. 이미 들었던 일을 어찌 없던 걸로 해? 내 귀는 아주 정상적이니 차마 그럴 수는 없거든.”

모란이 정색하는 얼굴로 딱 잘랐다. 그러고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 하는 연에게 말했다.

“아무튼, 연아. 아주 잠시만 기다려 주렴. 무엇 좀 할 일이 있어서.”

그러고는 모란이 앱솔의 멱살을 쥔 채 끌고 나갔다. 그는 일단 앱솔을 가볍게 손봐 주었다.

“이 예쁜 주둥이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였을까?”

“모, 모란 님! 무언지는 몰라도 이 앱솔이 모두 잘못하였습니다!”

잘못을 알았다니 모란이 앱솔을 좀 더 강력하게 손봐 주었다. 실컷 두들겨 맞은 앱솔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죽은 시늉을 하며 엎어졌다.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말하라 윽박지르자 앱솔이 얼른 줄줄 불었다.

듣고 나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귀찮은 일로 쳐들어와서 화가 나는데 잘되고 있던 관계에 훼방까지 놓으니 정말 짜증이 났다.

“누가 사람을 패면서 쾌락을 얻어!”

모란은 자신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났다는 것에,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폭력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쓰레기처럼 저를 묘사해 놓지 않았나. 그가 살벌하게 을렀다.

“오늘 밤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박혀 있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하지만 모란 님, 저는 답을 듣기 전까지…….”

그냥 이것을 정말 죽여 저 입을 다물게 할까 모란이 손을 들어 올리자 앱솔이 당장 줄행랑을 놓았다. 또 갈기갈기 찢겨 흩뿌려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되면 아이낙스가 손볼 때까지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는 걸 앱솔은 잘 알고 있었다. 모란이 혼자 돌아오자 연이 놀랐다.

“앱솔은 어찌했어?”

마치 앱솔을 죽여 없앴다는 듯한 반응에―실제로 거의 그 비슷하게 만들려고도 했으나― 모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게 다 앱솔이 경망하게 입을 놀린 탓이라.

“죽이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라. 그보다 할 말이 있는데.”

연이 흠칫하여 뒤로 주춤 물러났다. 시선이 모란에게 머물지 못하고 방황했다.

“나…중에.”

“안 돼. 지금.”

모란은 일단 연을 침상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침상 기둥에 딱 등이 닿은 연이 저도 모르게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는데…… 이리도 귀여워서야. 모란이 은근하게 입맛을 다셨다.

“폭력적인 정사가 나의 취향이란 말은 사실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종종 엉덩이를 때리잖아.”

정말이지, 이리 귀엽게 구는 법이 있느냐. 모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폭력적인 게 아니라 변태적인 것이지.”

모란이 너무나도 뻔뻔하게 변태적인 것이 그의 취향이라 말하는 통에 연이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는 체온과 체온을 나누는 부드러운 정사도 취향이었으나 일상에서 벗어난 독특한 관계도 마찬가지로 취향이었다. 그쪽 세계에서는 어지간해서는 감흥을 못 느끼는 통에 그리 관계를 나누며 상대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려는 시도로 행한 것이었다.

“폭력이란 것은 동의 없이 상대를 겁탈하는 것을 의미하지, 합의하에 하는 것을 폭력이라 하지는 않아. 게다가 엉덩이 두어 대쯤 때리는 것은 변태적인 것도 아니야. 누구나 다 하는 거지.”

모란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았다. 그 뻔뻔한 태도에 연은 긴가민가하였다. 정말 엉덩이 때리는 건 누구나 다 하는 건가?

“……그럼 변태적인 게 무엇인데?”

모란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변태적인 것이라면……. 이를테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깊게 성기를 삼키게 하거나, 아니면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사정없이 몸의 일부를 매질하는 것? 노출이 심한 옷을 입히거나 두 명 이상과 동시에 관계하는 것?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성행위를 지켜보게 하거나 목줄을 매어 끌고 다니는 것?

어느 쪽이든 연에게는 납득 못 할 수준의 ‘변태적인 일’들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모란 자신이 그리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니, 노출이 심한 옷을 입히는 건 괜찮을지도.

아무튼 모란은 짧은 사이 나름대로 연에게 한정된 변태란 것의 정의를 완성했다.

“지난번 진주를 넣은 것처럼 신체 외의 물건을 넣었다 빼는 일 등이 바로 변태적인 것이지.”

진주는 그냥 넣기만 했지 뺀 적은 없잖아, 하고 얼굴을 좀 붉히면서도 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 확실히 그때는 변태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였다. 이때가 좋은 기회임을 깨달은 모란이 구슬렸다.

“아니면 눈을 가리거나 손을 묶거나 하는 것도 그런 종류지. 변태적이라 하여 마냥 이상한 건 아니야. 그럴 때면 연이 너도 좋지 않았느냐?”

연은 차마 긍정은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기만 하였다. 답하기엔 퍽 부끄러웠다. 모란이 다 알겠다는 얼굴로 웃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실은 모란은 부끄러움 타는 연도 그저 좋고 귀엽고 어여뻐 보였을 뿐이지만.

“그리고 아이낙스와는…….”

무슨 관계인가, 하고 이때에는 모란도 고민에 빠졌다. 아이낙스와의 관계는 앱솔이 말한 대로 참으로 복잡 미묘했다. 그러나 복잡 미묘한 관계란 것은 얼핏 들으면 오묘한 관계인 것처럼 들리니 그가 상세히 풀었다.

“열다섯 번 정도는 서로를 죽이려고 했고, 두 번은 내가 거의 죽일 뻔하였지. 나 역시 한 번은 아이낙스에게 죽을 뻔했고. 또 여섯 번은 전투에서 같이 싸운, 그런 사이야.”

“……그러니까, 전우인 것이네?”

“동시에 유일하게 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사이자 경쟁자라고 할 수도 있고.”

연이 납득하였다. 저런 것을 복잡 미묘한 관계……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선의의 경쟁자라는 것이 아닌가? 모란은 세 번째 오해도 풀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는 건 맞아. 사실 그 누구든 아무래도 상관없었거든. 은애하는 이도 연모하는 이도, 사모하는 이도 없이 지냈으니. 한데 지금은 다르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연이 숨을 딱 멈추었다.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모란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금은 전과 달리 은애하고, 연모하고, 사모하는 이가 있으니.”

“뭐, 뭐…….”

모란이 당황하여 달싹거리는 입술을 머금어 삼켰다. 연이 움찔하며 몸을 들썩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이가 있음인데 어찌 감히 다른 이와 몸을 접붙일까? 그리 생각하지 않으냐, 연아.”

눈가며 뺨이며, 귀에 목덜미에 모란이 입 맞추지 않는 곳이 없어 경황이 없던 연이 뒤늦게 모란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몇 번이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정말이지 모란의 혀는 간사하고 교활하지 않은가.

“나 또한 연모하고 있어, 연아.”

답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하지만 모란이 그리 말할 때 연은 참지 못하고 입술을 부딪치고 말았다. 혀를 섞으니 모란이 자연스럽게 응하는데 그것이 다소 분했다. 자신은 이렇게 어쩔 줄 모르는데 모란은 태연한 것만 같아서.

모란이 살금살금 연의 입 안을 부드럽게 탐했다. 소리가 나도록 쪽쪽 빨고 핥고 깨물리면서 몸이 점점 기울자 이게 무슨 분위기인가를 깨달은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있……잖아.”

말하라는 듯 모란이 눈을 휘어 웃었다. 연은 한숨을 쉬고는, 또 모란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되어 버린다고 속으로 얕게 낙담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몸이 달아 입술을 핥았다.

“치료할 때도 되었고…… 변태적이라 하여 마냥 이상한 것은 아니라며. 또…… 좋기도 한 것이고, 당신 취향에 맞기도 한다면…….”

“해 줬으면 해?”

말 중간을 툭 자르며 모란이 물었다. 연이 눈을 깜박였다. 해 줬으면 하냐고? 모란의 취향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해 줬으면 하냐고…….

잠깐 침묵하던 연이 아주 작게 응, 하자 모란의 무릎이 슬그머니 다리 사이를 꾹 눌렀다. 연이 움찔했다.

“어찌해 줄까? 연이 네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그저 말만 하면.”

이번에는 연의 몸이 흔들거리도록 노골적으로 무릎으로 다리 사이를 꾹꾹 눌러 대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모란의 팔을 잡았다. 말만 하면 원하는 대로……. 그가 두서없이 모란과 했던 정사들을 떠올려 보았다.

“눈……을 가리거나…… 묶거나, 아으, 읏.”

“그리고 또?”

모란의 무릎이 자꾸자꾸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만 어느새 연이 위에 앉아 모란의 무릎에 다리 사이를 은근하게 문지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성이 살살 녹아 저 아래로 흘러 사라지고 말았다. 허리를 들썩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연이 겨우 입을 열었다.

“무언가, 그으, 흣. 이, 이상한…… 물건을, 넣었으면…….”

속삭이듯 말하는 것인데도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란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정말 이상한 물건이어도? 여기에 넣을 것인데?”

엉덩이를 움켜쥔 모란이 노골적으로 뒤를 꾹꾹 문지르자 연이 숨을 헐떡였다.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 사이가 지끈지끈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모란이 참지 못하고 깊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정말 어찌할까.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기도 하고, 아끼고 아껴 살살 녹이고 싶기도 하고.’

연신 입을 맞추다가 모란이 맥이 파닥파닥 빠르게 뛰고 있는 곳을 혀끝으로 핥았다. 연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무엇이 좋을까? 이상한 물건을 말했으니 정말 이상한 물건이 좋지 않겠는가. 마침 모란에게는 그런 것들이 제법 있었다. 모란이 작은 아공간을 열었다. 손을 휘저어 보니 걸리는 것이 있어 그가 꺼냈다.

“이건 어때?”

“어…….”

모란이 꺼낸 물건에 연이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본인이 이상한 물건이라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정말 이상한 물건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모란이 내미는 물건을 연이 가까스로 받았다. 이건 진짜 이상하게 생겼다.

모란이 준 건 한 뼘 정도 되는 둥근 토막처럼 생겼다. 그러나 그냥 토막이 아니다. 말캉거리고 매끄러운데 부드러웠고, 또 탄력적이면서도 표면이 울퉁불퉁하였다. 연이 아는 것에 굳이 비교하자면…… 표면이 올록볼록한 분홍색 오이처럼 생겼다. 다만 오이와는 다르게 말랑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건 대체 뭐야?”

물론 모란은 제대로 된 명칭을 알고 있었지만 대신 향유를 꺼내며 느리게 웃었다.

“넣으면 즐거워지는, 이상하고 변태적인 것이지.”

그는 먼저 연의 손을 앞으로 묶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단단히 묶자 연이 떨리는 숨을 쉬었다. 그다음으로는 눈을 가렸다. 손도 묶이고 눈도 가려지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덕에 연의 기감이 예민해졌다.

모란은 일단 바지만 벗겼다. 윗옷만 입은 모습이 아슬아슬하여 보기 좋았다. 하체만 발가벗겨지자 연의 심장이 쾅쾅 뛰었다. 이제는 향긋한 향유 냄새가 나는 것만으로도 연의 몸은 가볍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향일까 하다가 연이 깨달았다. 꽃향기다.

잠시 후 향유로 젖은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한 번에 두 개의 손가락이 꾹 밀려 들어왔다. 몇 번 느릿느릿 들어갔다 나오더니 힘이 들어가며 양쪽으로 잡아 벌려졌다. 연은 반쯤 엎드린 상태로 희미하게 신음했다. 벌려진 곳으로 손가락 두어 개가 손쉽게 들락거렸다.

“흐으, 읏…….”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혹은 양손인지 구별이 안 되는 손가락들이 뒤를 희롱하다 빠져나가자 흠뻑 부어진 향유가 뚝뚝 흘렀다. 곧 이어 낯선 것이 뒤에 닿았다. 아까 모란이 꺼냈던 이상한 물건이다.

그는 바로 넣지는 않고 잠시 엉덩이 골 사이로 느릿느릿 문질렀다. 오돌오돌한 표면이 다 느껴지라고 부러 하는 행동이었는지, 애가 탈 정도로 그 행동을 반복하더니 꾹 밀어 넣었다. 연이 숨을 얕게 헐떡였다.

“아, 아…….”

모란과 관계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연은 뒤에 무언가를 밀어 넣었을 때의 쾌감을 점차 잘 알게 되었다. 물렁하고 울퉁불퉁한 것이 삽입되었을 때 연은 명백히 느끼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돌기가 입구를 짓누르는 자극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변태적인 것을 하는구나 싶었다.

“헉, 아읏, 응…….”

모란이 물건을 느리게 밀어 넣었다가 뽑아내기를 반복하자 연이 마침내 엎드렸다. 뒤를 우둘투둘 눌리는 삽입이 반복될수록 연한 쾌감이 번졌다. 딱히 만지지 않았는데도 연의 성기는 단단해져 조금씩 윗옷을 적시고 있었다.

“익숙해졌어?”

그리 물으며 연의 귀를 잘근거린 모란이 빙그레 웃는 입모양이 느껴지도록 입술을 꾹 눌렀다.

‘익숙해졌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 보도록 할까.’

모란은 추삽질을 하던 걸 그만두고 물건을 꾹 눌러 넣었다. 점점 물건의 굵기가 줄어드는 게 느껴져 다 넣어 버리려나 하는데 끝까지 들어가지 않고 중간에 턱 걸렸다.

연이 당황했다. 분명 잘 자른 토막같이 일정한 굵기였는데, 이상하게도 중간의 어느 부분만 유독 얇아져 마치 마개처럼 뒤에 딱 맞물리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뒤를 꽉 조이자 울퉁불퉁한 돌기가 자극을 가했다.

“아, 으……. 이것, 모양새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꿀 수 있거든. 그래서 내 이상하고 변태적인 물건이라 하지 않았어?”

모란은 엉덩이 밖으로 손잡이처럼 빠져나온 부분을 잡아 빙글 돌리며 연이 몸을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즐거운 장난감은 모란의 의지에 따라, 연의 몸 안쪽 삽입된 부분만 부쩍 크기를 늘렸다. 갑자기 커진 부피감이 느껴졌는지 연이 숨을 헐떡헐떡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귀며 목덜미가 야살스러운 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

모란이 그것을 잡아당겨 빼냈다가 좌우로 빙글빙글 돌려 밀어 넣자 연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윗옷이 흐트러지면서 드러난 허리가 떨리는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다시 꾹 밀어 넣은 모란이 이번에는 둥근 손잡이 부분까지 삽입했다. 연이 헉, 숨을 쉬며 몸을 웅크렸다. 허리 아래가 온통 달큼하게 지끈지끈하였다. 그리한 뒤 모란은 완전히 연에게서 손을 뗐다.

연은 처음에는 안에서 이상한 물건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게 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맥박이 치는 것처럼 두어 번 움직이더니, 돌연 식은땀이 쏟아지도록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그저 크기만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안에서 어떻게 부푸는 것인지, 평소 모란이 매번 문지르고 찔러 기분을 좋게 만드는 부분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 상해, 흑, 아! 모란, 아, 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래를 우악스럽게 짓눌리자 시야가 희게 번졌다. 어느새 연의 성기는 말간 액을 뚜욱, 뚝 흘려 대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다 싶을 정도로 안쪽을 눌러 대다가도 순간 약해졌고, 다시 또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잔인하게 꽉 눌렀다. 정수리에서 불꽃이 타닥타닥 뇌수를 타고 흐르는 쾌감이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묘하게 근질거리는 느낌이 번졌다. 연이 엎드려 이불만 쥐어 채다가 끝내 다리 사이로 손을 뻗으려 하자 모란이 막았다. 그건 반칙이지, 속삭이고는 다정하게 입술을 맞추었다.

“지금 이리도 어여쁘지 않아? 다 쥐어짜일 때까지만 참아 볼까?”

무얼 다 쥐어짠다는 거야, 생각하던 연은 또 크게 부풀어 오르는 물건에 입을 벌려 신음했다. 정액이 아닌 말간 액이 발갛게 달아오른 성기 끝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짓눌리고 또 짓눌릴 때마다 쾌감은 점점 커지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이제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허리만 비틀었다. 그때쯤에야 연은 쥐어짜인다는 게 무언지 감이 왔다.

“힉, 흐윽, 아! 아!”

도중에 돌연 까마득한 쾌감이 연을 덮쳤다. 온몸을 녹여 버리는 지극한 감각에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절로 몸이 덜덜 경련하듯 떨리고 발가락은 꾹 곱아들었다. 사정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다리 사이가 온통 젖어 축축하니 사정을 한 건지, 아닌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엎어져 헐떡거릴 따름이었다. 그때 모란이 다가와 다리 사이에 손을 뻗었다.

그는 땀에 젖은 목덜미를 깨물어 맛보고 향유로 젖은 뒤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따끈하고 말랑하니 부드러운 속살을 헤치고 손에 닿는 물건을 누르자 연이 바르작거렸다. 부러 아래쪽으로 손가락을 위치했다. 연의 몸이 더 떨리는 걸 무시하며 구부려 쥐고 빼내자 발작적으로 고개가 젖혀졌다.

“하, 아으, 읏……!”

반쯤 우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가 없었다. 물건이 빠져나가며 우연인지 고의인지 다시 안쪽을 느리게 짓누른 탓이다. 곧이어 모란의 성기가 뒤를 지분거렸다. 연이 고개를 저었다.

“흐, 아니, 아직……. 아, 앗! 앗!”

단번에 꿰뚫린 탓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간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삽입되니 머릿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했다. 모란이 단단해진 성기를 쥐고 흔들자 연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모란은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이내 철벅철벅 소리가 나도록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흔들리다가 안을 몇 번이고 찔리는 지극한 감각에 연이 견디지 못하고 조금 엉금 앞으로 기어 나가면, 그만큼 단번에 깊게 박아 오는 것이다.

“흐아, 아, 응, 싫어, 아니……. 아!”

안쪽이 묵직하게 뭉개어지자 연의 목소리가 자잘하게 흩어졌다. 허리를 꽉 붙잡은 채 모란이 짓이겨 박아 넣을 때마다 흰 쾌감이 넘실거렸다. 연은 제가 흐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바르작거렸다. 힘이 바짝 들어간 발이 이불을 밀어 댔다.

“깊, 깊어, 아, 흐윽, 깊단 말이야…… 아, 아!”

뒤로 갈수록 연의 말꼬리가 떨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인데 모란은 달래는 척하며 더 깊게 삽입해 대었다. 더는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엉덩이를 쥐어 잡아 벌리더니 바짝 붙여 왔다.

연은 제대로 신음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여기저기를 무작정 더듬대며 고개를 젖혔다. 안을 깊게 찔려 뭉근하게 아팠다. 그런데도 그 아픈 감각마저 등골을 짜르르 울리는 것이다. 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완전히 침대에 엎어지는 연을, 모란이 범하는 자세로 덮었다. 그러고는 제 것을 빼내었다가 다시 길게 찔러 넣었다.

철벅, 철벅, 젖은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삽입당할 때마다 연의 발가락이 한껏 곱아들었다. 모란은 연을 꽉 잡고 아래를 진탕 엉망으로 쑤시고 헤집었다.

“힉, 아…… 응, 읏, 읏!”

연은 또다시 절정에 이르렀다. 쾌감에 연이 몸부림치며 뒤를 꽉꽉 죄이면, 모란도 그때마다 제 성기를 끝까지 욱여넣고 제 정을 안에 와락 쏟아 냈다. 그러고는 또다시 허리짓을 시작했다.

사정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예민한 곳에 못질을 당하듯 박히자 연은 말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고통에 가까운 쾌감에 흐느끼다가 겨우 제발, 하고 한 단어를 꺼내면 모란은 숨이 부족해 헐떡이는 연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연아, 연아.”

세상 가장 귀한 것을 대하는 듯 목소리는 다정한데 허리짓은 난폭하고 거칠었다. 다 좋으니 천천히만 해 달라든가, 사정하고 나면 잠깐만 쉬어 달라든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꺼낼 수가 없었다. 모란의 물건에 안을 둔탁하게 찔릴 때마다 헐떡이는 숨과 함께 허리도 혀도 늘지근하게 녹아내렸다.

모란은 혀끝으로 살살 연의 발갛고 말간 혀를 핥다가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과 함께 빨아들였다.

“우리 연이는 음란하고 예쁘기도 하지.”

귀에 속삭이는 음담패설에 기시감이 드는 이유가 무얼까? 그러나 다가오는 절정에 연의 생각은 완전히 흐려져 사라지고 말았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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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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