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八章 : 고립 (11/19)

八章 : 고립

연오는 처음으로 머리가 다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가 보고 있던 서찰을 마침내 신경질적으로 한곳에 밀어 두었다. 이번 사냥대회에서의 사건이 온 중원에 퍼져 나간 탓에 평소보다 그의 일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명이 창일당에 완전히 칩거하여 그 곱절의 곱절은 더 쌓인 상태였다.

숲에서 잡은 녹림십오채 잔당들은 모진 심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걸 줄줄 실토했다. 이미 눈앞에서 영명이 잔인하게 동료를 도륙하는 걸 보아 잔뜩 겁에 질린 상태였다.

얼마 전 어떤 남자가 돌아다니며 술을 사 주고 돈을 좀 주며 위로하고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겠냐며 자신들을 설득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 내쳤으나 남자의 계획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들렸다. 사냥대회가 열리는 숲의 지형이며 무사들의 배치까지 줄줄이 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세가 내에 첩자가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래서 남자의 외양을 설명해 보라 하였더니 놈들마다 외양을 서술하는 게 달랐다.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싶었는지 변장을 하며 설득을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결국 범인을 알아내는 건 실패로 돌아갔고, 모든 일의 뒤처리가 연오에게 어마어마한 일거리로 돌아왔다.

“네 아버지 좀 이상하더라.”

머리를 싸맨 채 괴로워하는 남궁연오 옆에서, 제갈우가 세상에서 가장 편해 보이는 자세로 앉아 쉬며 말했다. 제갈우는 제갈세가의 직계로, 제갈금려의 오라비이자 연오와 제갈금려가 이어지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중에 실토하기를 실은 일찌감치 연오를 금려의 반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는 뒤로는 온갖 간교한 공작을 꾸며 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연오는 이상한 걸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다만 금려는 제갈이라는 성씨를 단 사람답게 일찍이 알아차렸다― 가히 놀라울 따름이었다.

“원래 성정이 거친 분이시지.”

부친의 일로도 꽤나 골치 아팠지만 연오는 그리 말하고는 말았다. 최근 영명의 성격이 나빠진 건 그가 먼저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세가에서 영명과 가장 많이 마주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사냥대회 사건 이후로 장로들이나 다른 세가 사람들은 영명의 통솔력에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소가주로서 은근히 영명을 견제하고 있는 그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난번 행동은 영 꺼림칙하던데, 난.”

“원래도 넌 내 아버지를 싫어했지 않나.”

“우리끼리 있으니 탁 까놓고 말하는데, 솔직히 이 세상에 네 아버지 좋아할 사람 없다.”

연오는 대꾸 없이 다른 서신을 꺼내 읽었다. 사냥대회에서 녹림십오채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으니 보상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날 세가의 무사들 외에 부상 입은 자는 없었다. 그저 공연히 떼를 써 보는 서신이었다. 그럼에도 연오는 보상을 보낼 것이라 답신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일은 엄연히 남궁세가의 책임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침음했다. 이번 일로 이래저래 손해가 컸다. 무사들 여럿도 부상을 입은 데다가, 애지중지 키워 온 일결월산토들 중 일곱 마리나 돌연사하거나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제 곧 혼인날이니 힘내라.”

혼인날이라……. 연오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답신한 서찰을 고이 접었다. 칩거에 들어간 영명이 유일하게 연오에게 지시한 게 있다면 혼인 재촉이었다. 사냥대회로 세가의 위명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경사스러운 일로 메꾸자는 의도다.

그래, 혼인을 빨리 하는 건 좋긴 했다. 금려와 함께 살 생각을 하면 연오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혼인날이 가까워질수록 순식간에 불어나는 일에는 한숨만 나올 뿐이다.

혼인날에 맞추어서, 연오는 세가 사람들과 함께 호북성(湖北省) 융중산(隆中山)에 위치한 제갈세가로 신부를 데리러 가게 된다. 융중산은 산세가 험해 마차가 다니기 힘든 길이었으나 제갈세가에서 그리하기를 원했다. 영명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으나 지금은 칩거하는 중이고 제 혼인이니 연오는 제갈세가에서 원하는 대로 할 참이었다.

‘연과 한위도 데려갈까.’

전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나 이제는 가능했다. 연은 최근 들어 몸이 제법 건강해진 상태니 일정을 여유롭게 잡으면 장거리 여행도 될 터다.

또한 한위는 최근 장로들에게서 은근한 총애를 받는 중이었다. 성실하고 총명한 데다 언제나 상대에 대한 호감이 얼굴에 솔직히 드러나니 싫어할 사람이 없었다. 한위를 데려간다 하면 좋아할 이들이 여럿이었다.

둘 다 호북성에는 가 본 일이 없고 융중산의 산세는 제법 볼만하니, 구경시켜 줄 겸 금려에게 제 두 동생을 소개시켜 주고…….

“이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연오는 팔꿈치로 붓을 쳐서 떨어트렸다. 아래를 보니 데구르르 굴러가 저 아래에 있었다. 제갈우 근처였다. 제갈우는 연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만 보고도 어찌 된 일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가 주울 테니 자네는 이거 주울 시간에 서찰이나 더 봐.”

얄밉게 말하며 제갈우가 탁자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가만, 붓이 어디로 굴러갔지? 그가 이리저리 둘러볼 때였다. 화월당의 문이 벌컥 열렸다.

“형님!”

형님이라 부른다 함은 동생 중 한 명이라는 건데 목소리를 듣자 하니 아마 둘째인 남궁연일 터. 아무래도 자신이 있는 건 모르는 게 분명했다. 연오의 동생은 호기롭게 문을 연 게 언제냐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쁘십니까?”

“아니, 아니다. 무슨 일이냐? 안색을 보아하니 그저 날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닌 듯한데. 그보다…….”

연오가 자신이 있다고 말하려는 걸 제갈우가 콱 발목을 잡았다. 어쩐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까까지는 바빠서 죽어 가던 연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쁘지 않다고 하지 않나.

게다가 남궁연은 소문이 꽤 안 좋게 난 이였다. 그는 소문의 실체가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다. 살짝 짜증이 난 연오가 제갈우의 손목을 아프게 걷어찼다. 이크 하며 제갈우가 얼른 손을 빼냈다.

“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궁금한 것?”

“별것은 아니고…….”

별것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항상 별것을 말하는 법이다. 제갈우는 빨리 나오라고 걷어차는 연오의 발을 피하려다 축축한 걸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아까 연오가 떨어트린 붓이었다.

“저, 형님은 금려 누님이 형님을 좋아한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오호라. 이거 봐라. 연애 문제인가 본데. 동생의 목소리가 머뭇거리는 것이 제법 마음이 중한 모양이었다. 연애 문제 하면 또 제갈우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나오지 말라고 연오가 걷어차는 걸 무시하고 제갈우가 붓을 쥔 채 벌떡 일어났다.

연오만 있는 줄 알았던 연이 헉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연오는 대놓고 제갈우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갈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궁세가에 온 뒤로 내내 심심하기만 하던 참인데 잘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안녕, 연오 동생. 생일 연회 때 본 뒤로는 오랜만이지?”

“제갈우…… 대협…….”

“우리 사이에 뭘 딱딱하게. 우 형님이라고 불러.”

우리 사이가 뭔데? 연이 생각했다. 제갈우가 연오의 오랜 친구인 건 알았지만 매번 먼발치에서나 봤지, 말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사이였다.

“넌 볼일 없으면 이만 가 봐라.”

연오가 대놓고 축객령을 내렸으나 제갈우는 들은 척 만 척하였다. 목석같은 남궁연오와 제 금려를 잇느라 그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괜히 끼어들지 말라는 누이동생의 구박과 도와주는 것도 눈치 못 채던 친우의 눈치는 서운할 정도였다. 그런 연오에게 연애 상담이라니 조금도 도움이 안 될 게 분명했다.

“형님 친구는 형님 같은 존재가 아니더냐. 날 연오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털어놔 봐라. 이래 봬도 내가 네 형님과 금려를 이어 준 사람이거든.”

도로 슬금슬금 나가려던 연은 제갈우의 말에 솔깃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쫓아내려는 노력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연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갈우는 연에게서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는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게 뻔했다.

“여기 차 좀 내오게.”

심지어 제갈우는 뻔뻔하게 주인인 것처럼 시비를 불러 차를 내오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연은 정말로 들으려는 듯 본격적으로 구는 그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사냥대회 이후로 그는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모란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인정한다. 모를 수가 없었다. 모란을 보면 마치 가슴을 얻어맞는 것처럼 심장이 세게 뛰다가도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으니. 모란에게 ‘치료’를 받을 때면 이런 치료라면 얼마든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는 분명 은애하는 감정이 아니던가.

그런데 도통 모란이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모란이 남자나 여자나 다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게 연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치료’도 그렇다. 어디까지나 모란에게 ‘치료’는 치료일 뿐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특별히 대하는 것도 그저 그와 모란 사이가 남들과는 다른―몸과 몸이 바뀌었던― 관계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아 그는 주변에 상담할 만한 사람이 없나 고민해 보았다. 사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상담할 만한 대상은 모란이었다.

그는 수십 가지의 해결 방안을 알고 있었다. 그럴 만한 능력도 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달랐다. 장본인에게 어찌 누굴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겠는가? 한데 다른 사람이라고 여의치는 않았다.

한위? 한위는 이제 겨우 열다섯―아공간에서 일 년을 넘게 보냈으니 열여섯이지만―이었다. 심지어 이제 막 세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한지라 아직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다.

은록 사부? 그는 독신이다. 게다가 사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털어놓는 걸 생각만 해도 연은 머리가 다 아찔해졌다. 주강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는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협소한 인맥 속에서 연은 간신히 한 명을 골라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연오였다. 더군다나 그는 이번에 막 혼인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정략혼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금려와 서로 은애하는 사이였다. 이미 연에게 ‘백매화’에 대해 충고를 한 적도 있었다.

결국 연은 모란이 없을 적에 조용히 나와 연오가 지내는 화월당으로 향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가볍게 충고나 조언을 구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탁자 밑에 제갈우가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 연오 동생. 자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지?”

연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쥐고 눈만 깜박였다. 제갈우는 단순히 연오의 벗이 아니다. 그 제갈세가의 제갈우가 아닌가. 연오와 마찬가지로 제갈세가의 후계자로 지략과 기문지식에 뛰어나다고 들었다. 연이 한 마디를 하면 열 가지의 정보를 파악해 낼 사람이기도 했다.

“걱정 마. 내가 이래 봬도 입은 무겁거든.”

연이 눈을 굴려 연오를 바라보았다. 연오가 미간을 접고 있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입이 무거운 녀석이긴 하다.”

“내 제갈이라는 성에 걸고 약조하지. 오늘 이 방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흘러 나가지 않을 것이야.”

제갈우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연은 말을 안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제갈이라는 성을 걸기까지 한다는데 연이 털어놓지 않으면 그 호언장담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결국 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상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상대가 누군지까지는 말 안 해도 돼. 그저 작은 신상 정보만 필요하지. 아무것도 모르고 상담할 수는 없잖나. 그 은애하는 상대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자네보다 나이가 많은가, 적은가?”

이게 정보를 캐내려는 고도의 수작임을 눈치챈 연오가 노려보았으나 신난 제갈우는 그냥 무시했다.

‘나이가 많다 적다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연은 신중해지기로 했다. 상대는 제갈우. 그 제갈! 우였다. 한 마디 들으면 열 가지, 아니 백 가지 정보를 뽑아내는 제갈이다.

“저와 나이가 같지는 않습니다.”

“오호라, 상대가 연상이구나. 연애가 다소 힘들긴 하겠는데. 평소에 어린애처럼 대하고 말이야, 그렇지?”

연이 놀라 입을 벌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제갈우는 근엄한 얼굴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가볍게 떠본 것에 불과한데 이렇게 솔직한 반응이 돌아오니 재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갈이라는 이름은 이런 곳에서 사용하기 쉬웠다. 그저 떠본 것임에도 상대가 알아서 착각해 주니.

‘그나저나 연상이라면 한때 그 소문 자자하던 안휘성의 젊은 상단주 ‘백매화’인가? 하루아침에 부유한 상단주의 주인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남궁세가의 공자에게 청혼을 했다는 건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이지. 누가 한눈에 반했다는 걸 믿겠나. 그 백매화란 여인은 순진한 공자를 발판 삼아 남궁세가를 어찌해 보려는 작정인가?’

실상은 조금도 모른 채 제갈우가 지레짐작하며 눈을 빛냈다. 남궁세가에서 백매화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음에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 않았나. 남궁세가뿐만이 아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백매화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저 묘령의 여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오늘 연 공자에게서 뭔가 더 정보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상인 것이 문제인가?”

연상인 것이 문제냐고……. 연이 미간을 접었다. 이백오십 살이면 심하게 연상이긴 하지. 몇 살이나 차이가 나는 거야? 그러나 이백오십이든 오백이든 모란의 나이 같은 건 이제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니, 천 살 정도나 차이 나면 좀 그렇긴 하겠네.

“열 살이나 차이 나는 것도 아니라면 별문제야 되겠는가?”

“그게 아니라 상대가…… 저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은근하게 떠보았는데 지레 찔린 연이 얼버무렸다. 제갈우는 속으로 좀 놀랐다. 열 살이나 연상인 여인이라면 확실히 배필로는 드문 일이긴 한데.

말하고 나니 새삼 실감이 나서, 연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리고 회의감이 들었다. 괜히 여기에 왔나? 여기서 제멋대로이고 껄렁한 자에 대해 좋니 어쩌니 이야기 나누고 있으려니 뭐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거 참…… 난감한 일이겠군.”

제갈우가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려 보았다.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은데. 내가 백매화라면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어. 일단 혼인하여 세가에 들어간 뒤에는 이래저래 손을 볼 수가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딱 보아도 그 여인은 지금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듯한데. 나중에 혹여 공자가 백매화와 혼인을 하게 되면 남궁세가는 과연 번창할 것인가 기울 것인가? 남궁세가가 중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가문이다 보니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물론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추측이었다. 일단 백매화가 여자라는 것부터 틀렸으니.

“워낙 제멋대로인 사람이라서 의중을 읽기가 힘듭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연이 냅다 털어놓았다. 답답한 상황에서 제갈우가 뭔가 답을 내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에서였다.

“사실 제가 상대를 좋아한다고 하여 꼭 이루어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것도…….”

연의 말에 제갈우가 크게 부정했다.

“아니지, 아니야. 그런 걸 원했다면 자네가 왜 여기에 굳이 괴롭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러 왔겠는가? 하루하루 연모의 정으로 일일삼추(一日三秋)할 정도니 찾아온 게 아닌가?”

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 딱히 하루가 삼 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란을 지극히 사모하는 건 아닌데…….’

제갈우는 허어, 하고 탄식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한때 많이 보았던 연오는 씁쓸하게 식어 가는 차나 마셨다.

“자네가 뭘 모르는군. 생각해 보게. 상대가 자네에게 은애하고 있다 말하는 모습을.”

연이 미간을 접었다. 모란이 은애한다고 말하는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 사내가 아닌 탓이다. 그 반응에 제갈우가 당황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자네만 보면 가슴이 뛴다고 한다든가, 잘생기고 늠름하다며 말하는 모습이라든가.”

“그게, 귀엽거나 어여쁘다고 한 적은 있지만……”

연의 시큰둥한 반응에 제갈우는 또다시 당황했다.

“으, 응? 뭐, 그런 것도 포함이 되……겠지.”

연하라서 귀엽고 어여쁘다고 하는 것인가? 제갈우가 연의 외양을 살폈다. 몸이 약하고 아파서 그런가 확실히 소나무나 바위 따위처럼 늠름하기보다는, 뭐랄까…… 난과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 하나 귀엽……다는 건 알겠지만 어여쁘다는 건 모르겠다. 여인의 눈에는 사내가 그런 식으로도 달리 보이는 것인가?

“아무튼 그럼 상대가 제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연은 제 입으로 귀엽니 어여쁘니 뱉고 보니 더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가 쌀쌀맞게 대화를 정리하고 일어서려는 걸 제갈우가 잡았다.

“어허. 뭘 몰라도 단단히 모르는군. 자네가 이렇게 상담하려고 찾아온 건 뭔가 느낌이 있어서가 아닌가, 느낌이. 혹여나 상대가 유달리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자네를 대하지 않나?”

“그건, 그렇긴 한데…….”

이러다가는 백매화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건 둘째 치고 괜히 잘되어 가던 남녀 사이에 훼방이나 놓고 끝나겠다 싶어, 제갈우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상대가 내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에는 말이지, 이런 방법이 있네.”

“무슨 방법입니까?”

정말 연오 형님과 금려 누님을 이어 준 분이 맞느냐, 못 믿겠다……. 이런 불신의 빛을 연의 얼굴에서 본 제갈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래 봬도 그는 여러 남녀를 이어 준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질투, 유혹, 부탁, 비무.”

연이 미간을 접었다. 질투, 유혹, 부탁…… 비무?

“비무, 말입니까?”

앞의 세 가지는 얼추 이해가 갔으나 비무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제갈우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른바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상대를 유혹하고 난처한 부탁을 하고 비무를 해 보는 것이지. 이제부터 왜 이 네 가지가 중요한지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하게.”

연은 제갈이 책략으로 유명한 가문이란 걸 다시금 떠올렸다. 어쩌면 이 조언들이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다…….

“질투는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이지. 본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상대가 다른 사람과 말하는 것조차 싫어지거든. 내 여인이 다른 사내와 담소를 나누는 것만 봐도 초조해진단 말이야.”

그런……가? 연은 긴가민가하였다. 실상 모란은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과 담소를 나누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개 연과 있을 때는 상대방이 말을 걸어오지 않는 이상 시큰둥하니 턱을 괴고 멀거니 앉아 있거나 딴청을 부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부러 친하게 지냈을 때 상대가 화를 내거나 냉랭해지면 그것이야말로 내게 마음이 있다는 반증인 것이지. 그 다음으로는 유혹일세.”

유혹……. 연에게는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유혹이라니,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유혹하였을 때 상대가 반응을 보이는 건 나를 매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난처한 부탁은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깊이를 알 수 있다네. 누군가를 좋아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연은 모란에게 난처한 무언가를 해 달라 요구하는 걸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모란이 할 만한 난처한 부탁이라는 게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그는 돈이 많았고 제가 본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도무지 부족한 게 없었다.

“마지막으로 비무. 대개 비무를 하자고 할 때에는…… 그래, 혹 상대가 검을 쓰는가?”

세가에서 백매화가 남궁영명과 비무를 벌였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제갈우가 은근하게 떠보았다. 연이 제갈우의 질문에 모란이 싸우는 걸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검은 안 썼지. 그런데 모든 걸 곧잘 해내는 사내니 검도 잘 쓸 것 같기는 했다. 사실 싸운다기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는 게 아니던가? 손짓, 아니 손가락만 까딱하면 다 나자빠지던데. 모란과 비무하면 상대나 될지 모르겠다. 연이 고심 끝에 대답했다.

“……딱히 무기를 쓰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이 대답은 무인은 무인인데 검술이나 창술, 혹은 암기 따위를 쓰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군. 그럼 권법인가? 권법을 배우는 가문이 어디어디가 있더라. 상대가 검법도, 권법도, 창법도 아닌 ‘마법’이란 것을 쓴다고는 차마 상상도 못 하는 제갈우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럼 더 잘되었군! 무릇 비무를 하자고 할 때 상대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하면 여지가 있는 거야. 또한 비무를 하면서 몸도 맞부딪칠 수 있지 않나?”

“그런가요…….”

이 조언들이 정말 효과가 있긴 할까? 연은 반신반의하며 제갈우의 조언을 일단 담아 두었다. 질투, 유혹, 부탁, 그리고 비무라. 아직도 불신하는 연의 표정에 제갈우는 자존심이 다소 상했다. 그가 큰소리를 땅땅 쳤다.

“분명 효과가 있는 방법들이라니까. 내 장담하지.”

연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까? 반대로 말하자면 효과가 없다는 건 모란이 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어쨌든 시도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연은 그리 생각했다.

***

질투. 질투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감정인 것인가. 연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질투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모란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한없이 까다롭게 느껴졌다.

‘질투는 대체 어떻게 불러일으켜야 하나?’

그가 골똘히 고민했다. 제갈우의 조언에 따르면 다른 사람과 부러 친하게 지내라는데 문제는 그럴 만한 다른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점이다. 사냥대회 이후로 한위와 있을 때가 아니면 급격히 말이 사라진 주강과 친하게 지내겠나, 아니면 원래도 친한 한위와 ‘더 친하게’ 지내겠나.

‘협소한 인맥은 이럴 때 곤란하군.’

질투를 유발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럼 낯선 사람뿐인데. 낯선 사람을 만나려면 일단 세가 밖으로 나가야 한다. 연이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모란이 햇볕 잘 드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빈둥거리고 있었다. 별로 바빠 보이지는 않았다. 밖에 나가자고 어찌 말을 꺼낼까 궁리하며 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란이 힐긋 바라보았다.

“왜, 밖에 나가게?”

그리고 연이 자개장에 접근하는 걸 보자 자신도 훌쩍 일어나는 게 아닌가. 연이 겉옷을 꺼내며 눈을 깜박였다.

“같이 나가려고?”

“할 일도 없는데 같이 나가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같이 나간다니 연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옷을 입으면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밖에 나갈 때에는 모란이 따라붙지 않는 경우가 더 드물었다.

‘어라.’

곰곰 되짚어 보니 모란은 요즘, 못해도 하루에 반나절 이상, 어쩔 때는 하루 종일 제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종종 오전 나절에 자리를 비우기는 하는데 그나마도 주루의 일을 살피러 가기 위해서다. 치료도 어차피 며칠에 한 번 정도만 하는데 뭐 하러 이렇게 제 곁에 있나……. 연의 마음속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톡 굴러 나왔다.

화정당을 나오니 하인과 시비들 외에는 주강도 한위도 없었다. 주강은 사냥대회 후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인지 며칠간 모습을 안 보이더니 다시 화정당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은 이제는 그게 호위나 감시가 아니라 한위를 보기 위해서라는 걸 안다.

아무래도 남궁영명에게 원한을 졌으니 아주 사이가 나빠졌나 싶다가도, 연에게까지 척을 지지는 않았는지 주강은 마주치면 고개나마 까딱하고는 했다. 어쨌든 이제 나갈 때마다 주강이 따라붙지 않으니 좋기는 하였다.

“주루에 점심 먹으러 갈까?”

“뭐, 그래…….”

모란의 주루는 저녁 전까지는 한가하여 번잡스럽지 않고 느긋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좋았다. 별생각 없이 주루에 들어가기 직전 연은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지난번 은록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한위와 함께 이 주루에 찾아왔던 일이다. 그가 툭 하고 내뱉었다.

“요즘은, 운우지락(雲雨之樂)*인가는 안 즐기나 보지?”

“운우지락?”

주루 안으로 막 발을 디디던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돌아보았다. 연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여기서 당신을 찾으려고 하니 누가 그러던데. 모란 당신의 운우지락은 밤에나 이루어지니 낮에는 찾아와도 뵐 수 없다던가.”

“음.”

모란은 드물게도 잠시 당황한 낯을 했다. 잠시 침묵하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딱히, 최근에는 안…… 했지. 굳이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이 내키지도 않고.”

운우지락인가 뭔가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게 자신 때문인가? 그러니까 자신과 정사를 나누니까……. 그러나 이게 모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방증은 되지 않는다. 연이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저 육욕을 풀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보니 하루에 두 번이나 하려면 좀 버겁기도 하겠는데.

“루주님, 연 공자님. 어서 오세요.”

모란과 함께 들어서자 기녀들이 반갑게 둘을 맞이했다. 아직 주루의 문을 열기 전이라 여인들은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해가 질 무렵부터 찾아오기 때문에 그들은 밤늦게 자고 아침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탁자에 앉아 연은 간단히 소면을, 모란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한가득 음식을 시켰다.

“운우지락…….”

연이 중얼거리자 느낌 탓인가 모란이 젓가락을 놀리다가 멈칫한 것 같았다. 연은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여자와는 관계한 적이 없으니 동정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식사가 나오자 모란이 점잖게 소룡포를 세 개쯤 한입에 집어삼키며 물었다. 연이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방금 막 입에 들어간 세 개의 소룡포는 대체 어느 곳으로 간 거지?

“운우지락은 왜?”

“운우지락(雲雨之樂)이 대체 무언가 하여 고찰하고 있었어.”

모란과 정사를 나눌 때면 연은 딱히 구름과 비의 즐거움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구름과 비에 비교될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득하니 절벽에서 밀려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 쾌감은 쾌감인데 괴롭다고 할까. 가끔은 모란이 치료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그냥 정사를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탓에 연은 모란이 눈을 가늘게 뜨는 건 보지 못했다.

아무튼 연은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왔다. 질투하는 모란이라니 딱히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러려고 나왔으니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나. 마침 기녀가 식사를 내오기에 연이 머뭇거리다가 가볍게 칭찬을 해 보았다.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군요.”

“어머나, 연 공자님. 오늘 입으신 옷도 공자님에게 정말 잘 어울린답니다.”

기녀가 사르르 웃더니 상냥하게 칭찬을 되돌려 주었다. 연은 잠시 기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모란은 소룡포 한 접시를 해치우고 어느새 마파두부를 먹는 중이었다.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데……. 아니면 제가 한 질투 유발이 제대로 된 게 아닐 가능성도 높았다.

불현듯 연은 민망한 감정이 들었다. 운우지락이며 질투가 다 무엇인가……. 배가 고프니 소면이나 먹어야지, 하고 젓가락을 들던 그가 움찔 굳었다. 기분 탓인가? 방금 모란의 발이 묘한 느낌으로 다리를 스친 것 같았는데.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모란이 왜, 먹고 싶어? 하면서 평소처럼 음식 접시나 밀어 주었다. 연은 착각이겠거니 여겼다.

언제나처럼 연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한위나 연오와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좋았지만 유달리 모란과 함께하면 몸에 온기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차와 과일까지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시만, 하고 모란이 연을 불렀다. 무언가 하여 그가 뒤를 따라 주루의 계단을 올랐다. 삼 층에서 멈춘 모란이 연을 벽으로 슬슬 밀었다.

“뭐 하는 거야?”

“좋은 거 한번 하고 갈까?”

그렇게 말하면서 모란이 연의 아랫입술을 다소 아프도록 세게 빨았다. 혀로 다물린 입술 사이를 살살 핥기에 연이 당황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주루 객실을 오가는 복도였다.

“설마 여기서? 미쳤어?”

“걱정 마.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여기에 안 와.”

연은 안 된다며 연신 모란을 밀어 냈지만 혀가 몇 번 빨리고 깨물린 다음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항상 그렇듯이 모란이 손을 대기만 하면 금방 쾌감에 이성이 약해지고 말았다. 여기서 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또 기분은 좋고…….

연이 갈등하는 사이 잡아먹을 듯 사납게 입 안을 헤집던 모란이 돌연 몸을 숙였다. 무릎을 꿇기에 뭘 하나 했더니 불쑥 옷자락 아래로 머리를 들이미는 게 아닌가.

“뭐, 뭐 하는 짓이야!”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으나 뒤에는 벽밖에 없었다. 연이 힉, 하는 소리를 냈다. 옷감 위로 습하고 따뜻한 감촉이 닿은 탓이었다. 모란의 어깨를 밀어 내려다가도 연의 손은 허공을 방황했다. 수치심과 더불어 열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눈을 꽉 감고 연이 몸을 떨었다. 모란이 입술과 혀로 지분거린 탓에 바지 사이는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어깨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 모란이 바지를 벗겨 냈다. 연은 밀어 내고 싶은 마음 반, 이다음에 오게 될 더 큰 쾌감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 반으로 갈등했다.

“아, 안 돼, 읏, 흣, 안…….”

그러나 모란이 단번에 연의 성기를 입에 담자 머리끝까지 소름이 오싹하게 올랐다. 옷자락 아래에서 모란이 습기 어린 소리를 내자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까지 날아갔다. 정사를 나눌 때 옷을 모두 벗은 것보다도, 연은 옷을 간추려 입은 지금이 더 적나라하고 야하게 느껴졌다.

“아, 아…….”

모란이 일부러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아 올 때면 연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겨우 벽에 기대서는 지경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모란은 참으로 야살스럽게도 핥아 댔다. 손으로 단단히 쥐인 채 귀두를 혀끝으로 간질거리며 핥아질 때는 흐느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마치 벽에 박제당한 것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고 자꾸 발꿈치가 들렸다.

평소의 애무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겨우겨우 신음을 죽이고 있는데 모란이 돌연 손가락으로 뿌리를 꾹 죄었다. 연은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낼 뻔했다.

“왜, 왜……. 읏, 아!”

모란이 연의 물건을 끝까지 담고 목구멍으로 죄이자 정신이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혓바닥으로 감싸이고 목구멍 안으로 미끌거리며 들어가는 느낌은 너무 큰 자극이었다. 헐떡헐떡 숨이 넘어가고 오금이 바짝 당겼다. 그런데도 그는 사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것을 꾹 죄고 있는 손가락 때문이었다.

“놔아, 앗, 힉, 놔, 줘…….”

결국 이기지 못하고 연이 어깨를 밀어 냈으나 몇 번이고 깊게 빨리자 말이 마디마디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주저앉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허벅지가 경련하는 것처럼 덜덜 떨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음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을 꾹 틀어막는 중에도 온몸이 저리도록 쾌감이 지극했다.

안 돼, 이거 너무, 너무하잖아. 연의 머릿속에 너무하다는 생각만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뭉그러졌다. 츱츱하고 적나라한 소리가 나면 그만 눈물까지 찔끔 나오는 것 같았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웅크리니 모란이 허벅지 안쪽 연한 살을 세게 빨아 흔적을 남겼다. 한 손은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성기를 살살 흔들고, 입은 허벅지를 핥고 깨물었다. 다시 모란이 성기를 입에 담자 연은 제 혼이 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 지극한 쾌감으로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다리 안쪽이 죄다 순흔으로 모두 얼룩덜룩해지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가 되었을 때에서야 모란은 죄고 있던 손가락을 느리게 풀어 주었다. 입술 부드러운 안쪽으로 성기 끄트머리를 문지르며 다시 깊게 삼킬 적에 연은 몸을 떨며 사정하고 말았다.

겨우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는데 연의 것을 문 채 가만히 있던 모란이 목울대를 울리자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힘이 쭉 빠져 주저앉으려는 걸 모란이 잡아챘다.

“그, 그걸! 왜, 왜…….”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왜 삼키냐는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모란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느릿느릿 핥았다. 연은 살면서 본 가장 적나라한 것들은 죄다 모란이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운우(雲雨)가 되지 않을까?”

모란이 무어라 지껄였으나 연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가쁜 숨을 고르자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풀어 헤쳐진 바지를 추스르려고 하자 모란이 손을 뻗어 여며 줬다.

퍽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은근슬쩍 허벅지 위에 자근자근 입을 맞추니 연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다.

문제는 모란과 함께하면 연도 어느 순간 부끄러움을 모르고―혹은 부끄럽다는 걸 알면서도― 휘말려 버린다는 점이었다. 모란이 주는 쾌감이 대단하여 결코 자위와 비할 바도 되지 못하는 탓이다.

아무도 위에서 있었던 일은 모를 테지만 그래도 기녀들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 연은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일 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아직 좀 열기가 남아 벌건 얼굴로 주루를 나가 시장을 가로질러 갈 때에야 연이 깨달았다.

……이거 혹시 아까 운우지락을 모른다 하여 모란이 일부러 이런 것인가?

주루에서 모란에게 기운이 쭉쭉 빨린 것 같아 연이 타박타박 걸었다. 가는 길에는 시장에서 홍시를 몇 개 샀다. 은록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가온 모란이 슥 홍시 꾸러미를 빼앗는 게 아닌가. 들어 줄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데, 모란이 날름 하나를 먹었다.

“사부님 드릴 물건이야!”

그러나 모란은 모른 척 하나를 또 날름 먹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저리 빨리 입 안에서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연이 얼른 빼앗아 왔으나 여섯 개 중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어 바라보자 모란이 히죽 웃었다. 이백오십이나 먹었다면서 하는 모양새가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홍시를 좋아하나? 그럼 말을 하지, 한 꾸러미 더 샀을 것을.’

조금 더 기운이 빠진 연이 이제는 타달타달 걸었다. 의원에 들어서는데 순서를 기다리던 환자들이 힐끔 보고는 여상하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남궁세가 공자님이라 순서 무시하고 들어간다며 수군거렸지만, 이제는 연이 진료를 받는 게 아니라 그저 한구석에 앉아 말끄러미 보다가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연이 들어와 앉아도 은록은 시선 한번 보내지 않았다. 그만큼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저 환자는 관절이 좋지 않고 부기와 열기가 있군. 처방은 대강활탕으로 하면 되겠고…….’

연은 은록이 진찰하는 걸 눈으로 따랐다. 사부가 내리는 처방과 저가 속으로 내린 처방전을 비교해 보고는 맞으면 내심 뿌듯해했다. 이제는 백 중 아흔다섯 정도나 동일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그리 보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환자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야 은록이 연을 돌아보았다.

“사부님.”

인사를 올리고는 아까 사 온 홍시를 찾아 내주려던 연이 멈칫했다. 아까 여기 어디에 놓았는데? 설마 하여 모란을 바라보니 보란 듯이 제 발치에 감꼭지 세 개를 내놓고 있지 않나. 연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유독 모란은 의원에 올 때면 삐딱하게 굴곤 했다. 어쨌든 다음에 은록의 물건을 사면 모란에게 맡길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리 와 보거라.”

연이 얌전하게 가서 손목을 내놓자 은록이 맥을 짚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더니 요즘에는 퍽 담담한 얼굴이었다. 더는 약탕이나 환약을 내어 주지도 않았다. 점차 연의 상태가 호전되어 간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연이 진맥을 위해 걷었던 소매를 내릴 적에 은록이 입을 열었다.

“연아. 사람은 가려 사귀어야 하는 법이다.”

“유…념하겠습니다.”

단순히 사부가 제자에게 주는 가르침이라기에는, 연은 그 대상으로 짚이는 게 있었다. 눈과 귀가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은록과 모란은 이따금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신경전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둘은 정말로 상대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연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인의와 도리를 모르는 자는 곁에 두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오늘따라 은록이 왜 그러는가 싶어 연이 뜨끔한 마음으로 흘깃 모란을 보았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심 한숨이 다 나왔다. 더 있다가는 싸움 나겠지 싶어, 연은 좀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의원을 나오면서 연이 모란에게 물었다.

“전에 사부님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

“모든 사람과 사이가 좋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아.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사람이 살면서 사이 나쁜 인간 좀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

아무튼 말만은 청산유수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이가 나쁘니 연은 영 신경이 쓰였다. 은록이나 모란이나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다. 누굴 쉬이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만큼 싫어하지도 않는……. 분명 이유가 있긴 한데. 연이 둘의 사이를 중재해 보고자 조심스럽게 시도했다.

“사부님이 좀 차갑고 말이 쌀쌀맞기는 하셔도 정말 좋은 분이야. 처음에는 오해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정도 많으시고, 또 성실하시고…….”

그러나 모란은 흠, 하는 소리를 한번 내고 말 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했다.

제 설득이 별 효과가 없다는 걸 깨달은 연도 입을 다물었다. 질투 유발을 하고자 나왔더니 질투는 무슨, 은록과 모란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만 확인했다.

화정당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밤이 깜깜하니 어둑해져 있었다. 호롱불을 막 켜는데 모란이 슬그머니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슥 귀를 핥아 왔다. 놀란 연이 퍼드덕거렸다.

“뭐, 뭐야?”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모란이 뒤에서 뱀처럼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귓가에 대고 그윽하게 말했다.

“내가 좋은 거 해 줄까?”

“뭐? 아니, 아니!”

이미 주루에서도 하지 않았나! 황급히 저항했으나 이미 늦었다. 모란이 유별나게 약한 귀며 목덜미를 지분거리자 연의 다리가 또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 안 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으, 이미 오늘 낮……에, 아! 했잖, 했잖아…….”

그러나 아래에서 질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이성과는 다르게 연의 몸은 이미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그는 끌어안긴 채 모란의 손에 희멀건 정액을 두 번이나 흘려 내야 했다. 하루에 세 번이나 사정을 강요받고 나니 기운이 쭉 빠져서 모란의 얄미운 얼굴에 베개를 집어 던질 힘조차 나지 않았다. 어쨌든 잠은 참 잘 오기는 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푹신한 이불을 덮고 오도카니 누운 채 연이 생각했다. 아직도 허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질투 유발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군.’

그렇다면 다음으로 남은 건 유혹, 부탁, 비무인가. 보기로는 비무가 제일 쉬울 것 같았다. 유혹은 질투 유발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고민하다가 연은 가장 어려운 것부터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질투 유발보다는 수월하겠지. 만약 네 가지 모두를 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면 모란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것일 터.

“유혹…….”

연은 막연히 옷을 벗는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란이었으면 질투 유발이나 유혹이나 아주 쉽게 해치웠을 것 같은데.

오늘은 모란이 화정당에 없었다. 덕분에 연은 이래저래 고민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서삼경을 처음 배울 때보다도 더 골치 아프고 어려운 문제였다. 유혹을 대체 무슨 식으로 해야 하지?

그가 세가에서 본 유혹은 하인이나 시비가 서로에게 눈웃음을 쳐 보이는 것밖에 없었다. 모란으로 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또래 아이들이 풋풋하게 연애를 하는 것 정도만 봤었다. 고작 손잡고 뽀뽀하는 수준으로는 유혹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역시 옷을 벗는 게 좋겠지.’

하지만 모란 앞에서 다짜고짜 옷을 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이유나 계기가 있어야지. 곰곰 생각해 보고 있는 동안 모란이 돌아왔다. 손에는 홍시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이거 일부러 찔리라고 사 온 건가?

“다음부터는 당신 것도 살게.”

연이 지레짐작으로 말하자 모란이 홍시를 내려 두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뭘 사?”

“홍시.”

“……? 지금 사 왔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얼굴로 모란이 홍시 중 유독 발갛고 탐스러워 보이는 것을 연에게 내주었다.

……그냥 사 오고 싶어서 사 왔나? 아무튼 달고 맛있기는 하였다. 하나를 해치우고 나니 손이 끈적하여 찜찜했다. 어젯밤 정사를 나누기도 했으니 좀 씻어야겠다 싶어 하인에게 목욕할 물을 데우라고 한 뒤 연은 좋은 수가 떠올랐다.

“모란.”

부르고 난 뒤 연이 망설였다. 이제 ‘간단히 목욕 같이하지 않을래?’ 하고 물으면 되는 것을 왜 입술이 안 떨어지는지……. 모란이 의아한 얼굴로 보자 입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연이 입을 열었다.

“목…….”

“목?”

모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침묵한 뒤 연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딱 다물었다.

“아니다.”

안 돼, 말 못 해……. 목욕 한번 같이하자고 말하는 게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니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유혹이고 뭐고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라 결국 때려치웠다. 게다가 말하고 난 뒤에 이어질 상황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아무튼…….

시비가 목욕물이 준비되었다고 하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이 욕탕으로 향했다. 목간통 안에 따끈따끈 김이 나는 물이 채워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모란일 때가 좋기는 하였으나 이럴 때는 남궁연이라는 신분이 좋았다. 확실히 이런 사치는 부리기 힘들지.

그러다 무심코 뒤로 돌아본 연은 순간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비틀거리는 걸 조용히 뒤에 서 있던 모란이 바로 잡았다. 연의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왜 그렇게 놀라?”

“당연히 놀라지! 인기척이라도 내든가!”

“나에게 목욕 도와 달라는 줄 알았지?”

눈썹을 들어 올린 모란이 연의 손에서 옷을 건네받았다. 어, 하며 연이 입을 열었다. 이거 설마 그런 건가? 유혹이 먹히는 상황? 놀라서 뛰던 심장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뛰었다.

“딱…히 목욕 도와 달라고 하려던 건…….”

“알겠으니 일단 들어가. 감기 걸리니.”

춥긴 추웠으므로 꾸물꾸물 따뜻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대체 목욕을 왜 도와줘?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잠시 후 소매를 걷어붙인 모란이 따끈한 물을 살살 끼얹으며 목과 어깨에 손을 얹자 연의 얼굴에 슬그머니 홍조가 올랐다.

그러나 모란의 말은 말 그대로 목욕을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으음…….”

모란의 손이 어깨며 목덜미를 주물거리는데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는 거지? 부드러운 손길 아래에서 연의 몸은 한없이 말랑말랑하며 노곤해졌다. 정말로 모란을 목욕 시중으로 부려 먹으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치 극락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연은 어느새 침상에 널어 뉘여진 뒤 수건으로 잘 말려지고 있는 중이었다. 모란은 묘하게 흡족한 얼굴로 연의 머리까지 보송하게 말린 뒤 단정히 묶어 주기까지 했다. 상쾌하여 기분은 좋았으나 어쩐지 회의감이 들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유혹이고 뭐고 전혀 아니었다는 건 알겠다. 연은 과연 제갈우가 말한 이 시도들이 효용성이 있나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말만 유창하여 그럴듯하게 들린 게 아닐까? 괜히 마음만 더 번잡해지고.

속으로 혀를 찬 연이 옷을 단정히 한 뒤 서책과 붓을 꺼냈다. 어젯밤은 그냥 잠들어 버린 탓에 은록이 진찰한 환자에 대한 용태를 기록하지 못했다. 또 자신이 밤에 돌보는 환자들에 대해서도 적어 가며 혹시 그릇된 진찰은 없나 되살펴 봐야 하고.

마음을 평온히 가다듬기 위해 벼루에 물을 부었다. 사각사각 먹을 갈면서 속으로 오늘 쓸 것에 대해 정리했다.

‘그 어린아이의 맥을 짚어 보면 좋았을 텐데. 외양으로는 아무래도 파악하는 것에 한계가 있지. 사부님께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놈의 홍시가 무어라고.’

아니, 또 홍시가 떠오르잖아. 잡념이다. 연이 가까스로 다시 환자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갔다. 이번에야말로 집중하여 바르게 앉아 글씨를 써 내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마지막 환자에 대한 정보까지 적고 붓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턱을 괴고는 물끄러미 연이 글을 쓰는 모양을 지켜보던 모란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턱 손목을 잡았다.

“앗…….”

덕분에 검지 마디에 까만 먹물이 한 방울 튀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눈살을 찌푸린 연이 손목을 빼내려 하자 그 전에 모란이 덥석 손가락을 물었다. 그러더니 튄 먹물을 혀로 길게 핥는 것이다. 연의 등골이 쭈뼛하였다. 뭐……지?

“그러고 보니 치료해야 하지 않아.”

히죽 웃은 모란이 손에서 붓을 빼서 내려 두며, 손목 안쪽을 야금야금 깨물었다. 연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까, 목욕 했……는데?”

“괜찮아, 괜찮아.”

“아니……!”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란은 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연은 그대로 침상에 눕혀지고 말았다. 보통 사흘에 한 번이나 할까 하였는데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니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란이 옷을 벗겨 내며 차근차근 주는 쾌감에, 아까 목욕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흐물흐물 녹을 따름이었다.

잔뜩 연을 흐트러트려 놓은 뒤 모란은 또 어디선가 향유를 꺼냈다. 매번 주머니에서 꺼냈다는데 모란의 옷에 주머니는 도통 보이질 않았다. 연이 저도 모르게 히끅, 하는 소리를 냈다.

모란이 향유에 손가락을 적셨다. 그러고는 다리를 벌려 내어 뒤에 밀어 넣자마자 연이 몸을 떨었다. 이다음에 올 게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씩 웃으며 모란이 연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

“엇, 연오 동생.”

별생각 없이 한위를 보러 폐월당에 향하고 있던 연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갈우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척 보아하니 심심해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고 있던 것 같았다.

얼마 후면 연오는 제갈금려를 데리러 가는데, 제갈세가는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다. 호북성까지는 쉽게 간다. 융중성 입구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작 안에 들어서고 난 뒤로는 제대로 된 길잡이가 아니면 제갈세가의 입구를 찾기 힘들었다. 제갈우는 바로 그 길잡이 역할을 하러 온 것이다. 아직 호북성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심심할 법도 했다.

“지난번 말해 준 건 어떻게 되었나?”

“딱히…… 효과는 없었습니다.”

질투 유발이든 유혹이든 간에 연은 결과를 확신할 수 없었다. 모란의 마음을 확인하기는커녕 대신 어젯밤 정사로 뻐근하고 저린 허리를 얻었을 뿐이다. 그는 모란이 자신에게 이리 덤벼든 게 그냥 그러고 싶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맥락 없이 너무 뜬금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했기에 효과가 없단 말인가? 자네가 너무 얌전하게 군것은 아니고?”

“하지만, 바로 앞에서 다른 여인을 칭찬하고 목욕을 같이하기까지 했는데…….”

심지어 기녀를 칭찬한 건 딱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루에서 한바탕 치른 건 운우지락이 어쩌고 하는 이유 때문이었고. 게다가 모란이 유혹을 당했다면 목욕탕에서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한참 뒤 뜬금없이 대뜸 치료를 하자며……. 어젯밤을 떠올린 연의 얼굴에 잠시 열기가 감돌았다.

그날 모란은 연을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관계를 맺었다. 연은 허공에 붕 뜬 채 오로지 모란에게만 의지해 흔들려야 했는데, 평소에도 버겁던 그 흉기 같은 물건이 뒤를 꿰뚫을 때마다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향유가 듬뿍 발려 미끌거리니, 허리를 들썩이면 그 몽둥이, 아니 길고 두꺼운 성기가 아무런 저항 없이 깊게 박혀 왔던 것이다. 깊어서 아프다고 싫다고 아무리 애원해도 모란은 그저 들어 주는 시늉을 하며 쪽쪽거리기만 했다.

마법을 쓴 걸까, 아니면 순수한 근력으로 지탱한 것일까? 연이 미간을 접는 동안 제갈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혹여나 상대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은 아닌가? 목욕까지 할 정도면 어지간히 깊은 사이인 듯한데. 못해도 하룻밤 운우지락은 나눴을 법하여…….”

“저 운우지락 안 좋아합니다.”

연이 바로 정색했다. 어젯밤 그는 모란에게 끌어안긴 채 귀가 닳도록, ‘이 정도면 운우지락이 무엇인지 알 것 같지 않아? 응? 허공에 떠 있기도 하니.’ 따위의 소리만 들었던 것이다. 세 번이나 사정한 끝에 결국에는 울면서 아주 잘 알겠으니 이제는 내려 달라고 답해야만 했기에…….

제갈우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운우지락을 싫어하다니 별 이상한 사내도 다 보겠네, 하는 표정이었지만 연이 알 바 아니었다.

“그럼 나머지 둘은?”

“딱히…….”

“어허, 자네가 형님에게 상담을 청할 정도로 좋아한다던 사람이 아닌가? 그 정도까지는 해 봐야 확신을 얻을 수 있지. 그래야 인연을 제대로 맺을 것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나는 모란의 마음을 확인해서 어쩔 셈인가? 연이 새삼 의문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모란의 감정을 알고 싶어서 민망한 일들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결론을 내기는 하겠지. 만약 모란도 저를 좋아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러면, 연인이 될 수도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게. 인연을 맺어서 혼인까지 하고 토끼 같은 자식들도 가지는 걸세.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좋지 않은가?”

연이 미간을 접었다. 연인이 된 것까지는 상상이 잘 가는데 혼인이라. 만약 혼인을 올린다면 아마 단둘이 하는 혼인일 터다. 모란이 혼인까지는 할 것 같진 않지만…….

연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었다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장애를 생각하게 되는데 모란은 도통 그런 어려움이 떠오르지 않았다. 있더라도 죄다 무시해 버릴 사람이었고 그럴 만한 힘도 있기 때문이었다.

“토끼 같은 자식은 모르겠지만…….”

제갈우가 귀를 쫑긋했다. 무어지, 저 의미는? 무릇 사내라면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낳아 대를 잇고 싶어 하는 법. 그렇다면 그 대단한 고수이자 상단의 여주인이란 자 백매화가 석녀란 이야기인가?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상단의 후계자 문제 때문일지도……. 사정을 모르는 그는 계속 착각했다.

“아무튼 꼭 나머지도 시도해 보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연이 백매화와 이루어져도 좋았고 혹은 아니어도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던 제갈우가 연을 부추겼다. 연은 시도는 해 보겠다 떨떠름하게 답하고 말았다. 제갈우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나흘 뒤구나.’

제갈우를 보니 새삼 호북성으로 떠나는 날이 부쩍 가까이 다가왔다는 게 느껴졌다. 체력 문제로 안휘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연은 벌써부터 설레었다. 강호 유람까지는 아니어도 안휘성 밖으로는 나가 볼 수 있게 되니.

한위에게 들렸다가 화정당에 돌아온 연은 괜히 자개장을 열었다가 닫아 보았다. 호북성은 안휘성보다 좀 더 따뜻하다고 하던데……. 좀 더 얇은 옷을 입어도 괜찮겠지. 그곳은 봄이 더 일찍 왔을 수도 있겠군. 꽃이 피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연은 문득 자신이 전처럼 그렇게 꽃이 극단적으로 싫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하도 보아서 익숙해진 탓인가.’

물론 그렇다고 꽃이 좋은 것도 절대 아니지만. 연이 문득 정원에 나가 보고 싶다 생각할 때에 모란이 화정당으로 돌아왔다. 뭔 꾸러미를 들고 오기에 움찔하여 보았더니 홍시는 아니고 귤이었다. 침상에 앉은 모란이 자연스럽게 귤을 내밀었다. 연이 별생각 없이 받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자꾸 먹을 걸 주는 거야?”

“그야 이렇게 안 하면 도통 뭘 먹질 않잖아. 입도 짧아서는. 자, 하나 더. 옳지.”

그건, 그렇지……. 연이 수긍하며 귤을 하나 더 받아 들었다. 확실히 모란이 주지 않으면 일부러 먹지는 않았으니. 꾸물꾸물 귤껍질을 벗겨 내는데, 아까 만나서 그런지 제갈우의 말이 둥둥 떠올랐다.

‘확신을 얻어야 인연을 맺는다라…….’

난처한 부탁을 해 보고 비무를 신청해 보라 하였나? 연은 전자는 제외했다. 지금도 모란이 자신에게 해 주는 것이 과분하다. 거기에 난처한 부탁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모란에게 과연 난처한 부탁이란 게 있는지 의문이다. 비싼 것이라면 금강석도 덥석 내줄 사람이었다. 실제로 지난번에 남궁세가에 백매화로 오면서 대뜸 금강석을 꺼내 들지 않았나.

“지금 안 바쁘지? 시간 괜찮으면 나와 비무해 줬으면 하는데.”

말하면서도 연은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척 봐도 모란은 전투나 싸움에 조예가 깊어 보였다. 한위에게 어렵지 않게 세가의 무공을 가르친 것도 그렇고 그간 몇 번 다른 이를 상대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무술을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 엄격하고 엄중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모란은 매우 뜻밖의 것을 들었다는 얼굴로 연을 바라보았다. 그간 소룡포나 홍시 따위를 잘도 순식간에 해치우던 사람이 귤을 느릿느릿 씹어 삼켰다.

“갑자기 비무는, 왜?”

“그냥……. 모란, 당신같이 센 사람을 상대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이상하게 난감해 보이는 얼굴로 모란이 귤을 깠다. 그러고는 반을 갈라서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받아 들면서 연은 좀 의아해졌다. 비무 좀 해 달라는 게 뭐가 대수라고?

“상대하다가 다치거나 무리라도 하면 어쩌려고?”

“뭐 어때? 예전에는 팔도 잘만 부러트려 놓았잖아.”

연은 아무런 유감도 뜻도 없이 말했는데 정작 모란은 정말 미안한 얼굴로 살금살금 부러졌던 팔위를 도닥였다. 그 행동에 연이야말로 당황했다.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나도 몇 번 당신 팔다리 부러트려 놓은 적 있잖아…….”

“그거랑 이게 같지는 않지.”

그건 그렇지만, 원래 모란은 항상 뻔뻔하고 태연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저 그때는 미안했다, 하고 능청스럽게 넘어갈 것 같았는데, 아니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에게 냉정하고 가차 없이 구는 걸 봤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무튼 앞으로는 팔 부러진 이야기는 다시 안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좀 난처하고…….”

어라. 연이 다소 멍하니 생각했다. 지금은 좀 난처하다는 건 지금 자신이 모란에게 난처한 부탁을 한 건가, 그럼? 모란이 사뭇 다정하게 계속 부러졌던 팔위를 살살 문질렀다.

“몸이 다 낫고 나면 내가 정식으로 비무해 줄게. 이왕이면 제대로 배우는 것도 좋겠지.”

“그…… 한위처럼 가르쳐 준다는 말이야?”

“물론 아공간에서 가르치지는 않겠지만. 시간도 많은데 급하게 배울 필요는 없잖아?”

모란은 몸이 다 낫고 나면이라고 했다. 그 말은 치료가 끝난 뒤에도 계속 곁에 머문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연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모란의 말에 기뻐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모란의 마음을 알기는커녕 자신의 마음만 더 잘 알게 되지 않았나. 그러자 질투니, 유혹이며 부탁이나 비무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싶어졌다.

어쨌든 확신이 없어도 어쨌든 모란과 연 사이에는 이미 인연이란 것이 있는 듯했다.

***

시간은 빨리도 흘러 어느새 호북성으로 출발하는 날이 왔다.

큰 경사를 앞두고 세가는 아침부터 몹시도 바빴다. 시비와 하인들이 바쁘게 종종거리며 짐을 날랐다. 세가 밖으로 나오자 마차가 줄을 잇고 있었다. 예물이 실린 마차들과 그 마차를 호위할 무사에……. 도착해 보니 연오와 제갈우는 한참 대화 중이었다.

“그럼 이 목록 외의 일행은 없는 것이지? 뭐 장로라든가, 아니면 특별나게 뛰어난 자라든가.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따로 예우를 해야 하니까.”

“음. 남궁인 장로님과 남궁주열 장로님 외에는 없어. 혹시 모르니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 보도록 하지.”

워낙 바빠 보이기에 연은 차마 연오에게는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신 한위에게 갔다. 한위는 잔뜩 들떠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주강에게 무언가 재잘재잘 떠들다가 연을 발견하고는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형님! 잠시 후면 드디어 출발이라고 해요. 안휘성을 떠나 보는 건 처음이에요. 어쩌지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연은 한위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 그저 웃어 주었다. 어릴 적 모용세가에 왔다 갔다 해 봐서 마차 여행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마차 여행은 처음에는 신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지기 쉬웠다. 호북성의 제갈세가까지는 마차로 달리면 달포(한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못해도 그 반 정도는 걸린다. 거기다 멀미까지 하면 여행이 다소 끔찍해질 수도 있었다.

다행이라고 할까 귀빈들의 마차 배치는 넉넉하게 이루어졌다. 한 마차에 두 명 정도로, 제법 대단한 호사였다. 마차 행렬이 줄에 줄을 이을 것이니 전 무림에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혼인 소식이 퍼질 터다. 특별히 연오에게 청해 놓은 덕에 연은 모란과, 한위는 주강과 함께 마차를 탈 예정이었다.

그는 한위와 지내는 기간이 주강에게 어떠한 보상이 되기를 바랐다. 혹은 그 증오가 다소 침잠하기라도 하면 좋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는, 힘든 일이겠지만.

‘누이가 죽었다고 하였지. 누군가 한위나 형님을 해쳤다고 생각하면…….’

연으로서는 그런 상황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족이 죽지 않았나. 당연히 복수를 하러 나설 것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남궁영명 같은 자라면 망설임조차 없겠지. 주강이 영명을 죽인다 대놓고 말했는데도 연은 말리거나 설득할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사실 딱히 배신감도 들지 않는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영명은 자신의 부친이 아닌가? 점차 생각에 잠겨 들어가는 동안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뜨끔한 기분으로 돌아보니 모란이었다.

“이제 슬슬 마차 타야 하지 않아?”

“아, 그래야지.”

연이 마차에 오르자 모란이 따라 오르며 문을 닫았다. 장기간의 여행에 대비한 것인지 자리가 푹신푹신했다. 모란이 연의 건너편에 털썩 앉았다. 아직 짐이 다 꾸려지지 않아 밖은 아직 소란스러웠다.

“있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궁금한 것?”

화정당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편하게 앉은 모란이 느긋한 태도를 취했다.

“주강이 정말 가주를 죽일 수 있을까?”

연은 모친이 죽은 후로는 단 한 번도 영명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다. 가주라고 부르는 만큼 그가 아버지가 아니라 생판 남이 되기를 바라곤 했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명을 몹시도 증오하고 혐오하였으나 그럼에도 연은 영명이 주강에게 살해당하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못 죽여. 주강도 꽤 강한 자지만 영명은 더 강하거든. 최근에는 더욱 그렇지.”

최근에는……이라. 그건 영명의 무공 성취가 전보다 더 높아졌단 이야기인가. 연은 그 말을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안심이 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연(緣) 중 가장 질긴 것이 부모자식간의 연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연은 그 말이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부친이라 마음 놓고 미워할 수조차 없으니, 이럴 때면 차라리 남이면 좋겠다.

‘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건 주강의 얼굴이 되게 해 준다 하지 않았나?’

풀리지 않는 의문에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마지막에 주강의 얼굴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 주강이 영명을 죽이게 해 준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말이기도 했다. 혹시 모란이 빈말을 했나? 하지만 평소 행실을 보면 빈말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게 아니라면 혹…….

하지만 마차가 막 달그락거리며 출발하는 통에 연은 곧 그 의문을 잊고 말았다.

마차는 다그닥다그닥 잘도 달렸다. 그 남궁세가이니만큼 마차는 꽤 훌륭하고 좋은 물건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덜컹거리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한번은 크게 흔들리기에 연이 비틀거리자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대충 무어라 중얼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대체 뭘 한 건지는 몰라도 그 후부터는 돌연 마차가 흔들리는 정도가 줄어들었다.

연이 감탄했다. 이런 흔들림이라면 마차 여행을 자주 갈 수 있겠다 싶었다.

“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해?”

“가능한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아무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씩 웃은 모란이 마치 선문답 같은 말을 했다. 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예전에는 모란이 저런 말을 할 때 자신을 놀리려고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좀 생각이 달라졌다. 저게 놀리려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말의 휴식을 위해 마차는 이각여를 달리다가 멈추어 쉬고 다시 이각여를 달리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중간에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왔더니 한위가 멀미를 하는 게 분명한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침이라도 놔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 차마 그건 하지 못하고 일단은 미리 준비한 환약을 먹였다. 워낙 쓴맛에 한위는 겨우겨우 약을 삼키고는 희미하게 훌쩍거렸다. 슬쩍 냄새를 맡아 보니 두어 번 토한 모양이다. 연이 잘 다독여 마차에 들여보냈다.

다행히도 해가 질 무렵 도착한 마을에서 본 한위의 안색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일행들은 미리 알아 둔 객잔으로 향했다. 마을 풍경은 안휘성의 마을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다른 지역, 심지어 객잔에서 머무는 것만으로도 한위는 설레어 보였다.

“객잔에서는 처음 묵어 보아요.”

들뜬 한위가 신나서 말했다. 연이 내심 쓰게 웃었다. 마차 여행도 처음, 객잔에서 묵어 보는 것도 처음. 아마 앞으로도 처음인 것이 많을 터. 연은 그 처음인 것들이 점차 사라지기를 바랐다. 한위가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크게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래 여행 초반이 가장 힘든 법. 모두 객잔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방에 들어가 늘어지게 쉬었다. 달이 떠오를 때까지 푹 쉬고 난 다음 연오는 저녁 식사에 연을 초대했다. 모란까지는 초대한 것이 아니라 혼자 향하니 세가에서 동행한 장로를 비롯하여 한위와 제갈우가 있었다. 일종의 친목을 도모하는 저녁 식사였다.

식사를 하면서 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식사는 먹을 만은 하였으나 그다지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모란과 함께하던 주루의 식사가 떠올랐는데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모란과 함께한 식사는 한 번도 맛없던 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맛있는 집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주는 과일 따위도 한 번도 맛없던 적이 없었다.

‘마차를 편하게 탈 수 있는 마법도 있으니 음식을 맛있게 할 수 있는 마법도 있는 걸까?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찾아낼 수 있는 마법?’

의문 속에 저녁을 먹고 돌아와 보니 모란은 침상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무슨 마법인지 궁금해 묻고 싶었는데 자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이제는 자신의 침상에서 뻔뻔하게도 잘도 자고 있구나. 하지만 같이 잔 적이 한두 번인가.

모란만큼이나 아무렇지 않아진 연이 옷을 갈아입고 침상에 누웠다. 그러자 모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연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연은 왜 주는 것들이 다 맛있는 것인가 물으려다가 그게 무어가 중요한가 싶어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모란과 단둘이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 몸이 다 낫고 난다면. 피곤했던 연은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곁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힘입어 순식간에 잠이 밀려왔다.

***

마차는 순조롭게 잘도 달렸다. 보통 이렇게 고급스러운 마차는 습격받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 마차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위하는 무사들도 무사거니와 마차에 남궁세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머리가 달린 산적이라면 오대세가,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강력한 남궁세가는 건들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배를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곧 몇 배나 되는 보복이 돌아올 테니.

마차를 타고 달린 지 며칠이 지나자 연은 몹시도 지루해졌다. 창문을 열어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연은 정말 편하게 마차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마치 화정당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히 있다가 나오는 연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온몸이 쑤신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지루한 건 어찌할 수 없어 하품을 애써 참는데, 모란이 씩 웃는 게 시야에 걸렸다. 무언가 음흉하고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웃음이라 연은 졸음이 싹 달아났다.

“뭐야?”

“뭐가?”

“왜 그렇게 웃는데?”

“아니, 그냥. 어지간히 심심해 보여서…….”

“마차잖아.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모란이 말을 꺼내기 전에 연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이제 모란이란 사내가 어떤 이인지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차 여행 전에 질투 유발이니 유혹이니 따위를 시도했다가 얼마나 시달렸던가?

“좋은 거 해 볼까라는 말은 안 돼. 그 빌어먹을 운우지락도 필요 없어.”

“저런. 그건 좀 상처인데. 그럼…… 좋은 거 말고 재미있는 거 해 볼까?”

그렇게 말하며 모란이 슬쩍 옷깃을 잡아당겨 보이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마차 여행이다 보니 모란은 평소보다는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옷깃 선을 따라 손가락을 죽 내리자 잘 그을린 피부가 드러났다. 단단하게 잘 단련된 근육질의 몸이었다. 연이 움찔했다.

“뭐, 하려는 수작이야?”

“심심하잖아. 할 일도 없고, 가져온 서책은 이미 다 읽다 못해 두 번은 더 읽었지?”

연이 모란을 잘 알고 있는 것만큼 모란도 연을 지나치게 잘 간파하고 있었다. 모란이 아슬아슬 옷깃을 벌리던 걸 그만하고 바로 단정하게 추슬렀다. 유혹이란 게 바로 저런 거겠지, 생각하는데 그가 멈추지 않고 살살 연을 구슬렸다.

“어차피 여기서 뭘 하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거 알잖아.”

“아무에게 들리지 않아도!”

연의 얼굴에 벌써 열기가 돌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던가? 화정당도 주루도 아니고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지척에 죄다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기야 언제는 그가 다른 걸 신경 쓴 적이 있었냐마는.

“아마 한 시진은 훌쩍 가 버릴걸. 내 장담할 수 있어. 기분도 좋고 즐겁고 시간도 빨리 가는 데다가 심심하지도 않아.”

연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문제는 그가 모란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주 도를 지나칠 때가 있어서 그렇지 저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홀랑 넘어가다 못해 어느새 모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항상 그렇듯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옅은 후회를 하다가 상의가 다 풀어 헤쳐진 채 유두를 깨물렸다. 연이 신음하며 짜증스럽게 모란의 어깨를 퍽 쳤다가 몸을 들썩였다.

“봐, 벌써 반각이 다 지났지 않아.”

엉덩이를 꽉 쥐면서 모란이 지껄였다. 아프도록 가슴을 빨리고 깨물린다 싶으면 어느새 손이 바지 안으로 기어들어 와 있었다. 옷을 살살 벗겨 내고 꽉 다물린 뒤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짓눌러 대는 통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어느새 성기가 쥐어 흔들리는 것이다. 엄지와 검지로 끄트머리를 쥐여 문질러지자 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어디선가 향유 냄새가 흘렀다. 연은 이제 이 냄새만 맡으면 솜털이 바짝 곤두설 지경이었다. 매끄럽게 손가락이 문질러 밀려들어 오자 그가 잠깐 숨을 멈추었다. 손가락들이 질꺽이면서 뒤를 쑤시니 기분이 오싹오싹하다. 평소에는 충분히 풀어 주더니 오늘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란이 몇 번 밀어 넣고는 손가락을 빼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통에 무릎에 앉아 있던 연도 엉겁결에 일어났다. 모란이 뒤를 돌게 하더니 반대쪽 좌석을 잡고 엎드리게 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엎드리자 목덜미를 핥으며 물었다.

“괜찮지?”

벌써부터 뭉툭하고 두꺼운 것이 쿡쿡 입구를 찔러 대는데 안 괜찮으면 어쩔 것인가. 연이 별 대꾸 없이 팔에 이마를 묻었다. 모란이 살살 허리를 쓰다듬더니 꽉 붙잡았다.

“아, 읏, 으윽.”

조금 풀리고 만 뒤를 억지로 여는 감각에 연이 끙끙하는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밀려들어 올 듯 세게 문지르고 문지르더니 점점 뒤를 벌리는 것이다. 겨우 귀두가 들어왔을 뿐인데 압박감이 들었다. 연이 숨을 얕게 헐떡였다. 간신히 삽입되었나 싶더니 쑥 빼내고는 다시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바로 그때 마차가 덜커덩하는 통에 연이 헉, 소리를 냈다. 이제껏 방 안처럼 고요하던 마차가 덜그덕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덜커덕할 적에 갑자기 푹 깊이 들어오는 탓에 연이 허리를 틀었다.

“아읏, 잠시만, 왜, 갑…자기…….”

“이런 게 마차에서 하는 묘미 아니겠어.”

그리 말하면서 삽입된 걸 또 완전히 빼내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겨우 끄트머리만 얕게 밀려들어 왔다 빠져나가기만을 반복하니 연은 주먹을 꽉 쥐는 수밖에 없었다. 모란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깊게 범할 수 있는지 아는 까닭이다. 왜 이렇게 간만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넣지도 않고 향유로 젖은 뒤를 꾹 문질러 대기만 하는 게 아닌가. 모란이 귀 뒤를 살살 핥았다. 연이 몸을 떨었다.

“……넣고 싶지?”

밀어 넣을 듯 세게 다물린 뒤만 쿡쿡 찌르면서 모란이 귓불을 세게 빨았다. 그가 배 위를 어루만지면서 다시 은근하게 말했다.

“여기, 이 안쪽까지 닿을 정도로 깊이 넣어 줬으면 싶지, 그렇지 연아?”

채근해도 연은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말이 없었다. 넣어 주면 좋겠다고 말을 할 수는 없던 탓이다. 모란은 배 위를 손가락 끝으로 덧그리듯 간질였다.

“우리 연이는 부끄러움이 많으니 핑곗거리를 만들어 줘야겠구나.”

그리 말하면서 모란이 일어나더니 옆으로 물러났다. 어리둥절하여 바라보는 동안 짝, 하는 타격음과 함께 엉덩이에 화끈한 감각이 번졌다. 연이 움찔하며 좌석을 움켜쥐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엎드린 채 겨우 고개를 돌리자 방금 내려친 엉덩이를 꽉 쥐며 모란이 웃었다.

“……그렇다면 넣고 싶어 못 견디는 것보다는, 아파 못 견뎌 넣는다고 말할 때까지.”

다시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동시에 엉덩이에 따가운 감각이 번졌다. 연은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며 좌석에 매달렸다. 모란에게 엉덩이를 맞는 것이 이번은 처음은 아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흥을 돋우기 위함이었지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읏, 아!”

평소와 달리 오늘 모란의 손찌검은 매서웠다. 속도는 느리지만 가차 없었다. 한 대가 두 대가 되고, 다섯 대, 열 대를 넘는 것은 금방이었다. 엉덩이가 화끈화끈하고 따갑고 뜨거운데 얼굴도 귀도 그만큼이나 뜨거웠다.

마차 안인데. 바깥과는 고작 나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 무슨 민망스러운 일이냐고 생각하면서도 금세 이성이 흐려졌다. 연은 좌석에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 아파…….”

몇 대인지 모를 손찌검을 맞았을 때에 연이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아프지만, 또한 그렇게 아프냐고 하면 그리 아프지만은 않다. 모란에게 그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프다고 입 밖에 낸 적은 드물었다. 손으로 엉덩이를 맞는 것쯤이야 충분히 참을 만한 고통인 것이다. 아프다는 소리를 모란도 들었을 텐데 그는 두어 대를 더 모질도록 아프게 갈긴 뒤에야 멈추었다.

모란은 잠시간 발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눈앞의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마차 좌석에 상체를 기댄 채 엎드린 연이 아프다고 할지언정 싫다 소리는 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모습을. 어찌나 이렇게도 귀엽고, 또 귀여운지……. 어찌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나 들게 하는지.

처음 연이 이런 관계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떠올려 보니 모란은 더욱 정성스럽게 연을 길들이고 싶어졌다. 연이 원하는 한 그는 언제나 이리 공들여 귀여워해 줄 수 있었다.

“이제는 넣고 싶어?”

모란이 중지를 다물린 입구 위로 지분거리며 물었다. 손가락 끝에 연이 움찔하는 것이 다 느껴졌다. 갈등하다가 연이 뒤로 움직이려 할 때, 겨우 손톱 정도를 스스로 삼켜 내려 했을 때 모란은 다시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아!”

연이 튕기듯 몸을 움직였다. 아까보다 더 가차 없는 손찌검이 이어졌다. 불그스름한 엉덩이가 더욱 붉어지고 맞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피하려고 움찔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픈데 연의 성기 끝에서는 말간 체액이 뚜욱 느리게 흐르는 것이었다.

“흐으…….”

신음해도 봐주지 않고 몇 대를 매섭게 후려갈긴 뒤에 모란이 다시 중지를 지분거렸다. 흥분한 연이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뒤로 움직였다. 중지의 가장 짧은 처음 한 마디, 그리고 중간 마디. 그다음으로는 손바닥이 닿도록.

완전히 삽입되자 모란은 손가락을 구부려 안을 슬슬 문질렀다. 충분히 예민해진 연의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그가 손가락을 빼냈다.

“넣고 싶지?”

다시 아까의 자세로 돌아와 모란이 다정하게 말하며 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 끝을 살금살금 쓰다듬었다. 완전히 이성이 흐려진 연이 아까처럼 엉덩이를 뒤로 움직여 모란의 단단한 성기를 꾸역꾸역 뒤로 삼켰다.

“아읏, 응, 아, 아!”

덜 풀려 버거우면서도 잔뜩 달아오른 몸은 익숙한 삽입감을 반갑게 반겼다. 겨우 반을 삼키다가 연이 몸을 떨며 헐떡거렸다. 모란은 느긋하게 연의 뒷덜미를 쓰다듬으며 기다렸다. 덜커덕하며 마차가 크게 움직이자 연이 힉, 하는 소리를 냈다.

“조금 더……. 착하지.”

모란이 쪽쪽 소리가 나도록 연의 등에 입을 맞추었다. 연은 연신 고개를 흔들면서도 시키는 대로 몸을 뒤로 움직였다. 모란의 두꺼운 물건이 점차 뒤를 깊게 벌려 내며 삽입되자 선연한 쾌감이 등골을 달렸다. 한 뼘 정도 삼키고 힘들어 멈추는데 마차가 또다시 크게 덜컥 움직였다.

“……!”

악, 하는 소리는 뒤늦게 나왔다. 부지불식간에 안을 깊이 찔린 탓이었다. 연이 몸을 떨고만 있자 모란이 아까처럼 배를 문지르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여기까지 닿았겠는데, 응?”

“아, 아냐, 앗, 앗! 아!”

철썩철썩 소리가 나도록 안을 깊게 찔리자 연의 시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모란의 숨소리도 슬슬 거칠어졌다. 잘했으니까 상을 줄게. 그리 말하고는 그가 빠르게 추삽질을 했다.

“아, 으……! 처, 천천히이…… 흐아, 아!”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면서도, 안을 후벼 파는 게 아닌가 싶은 움직임이었다. 연은 반쯤 울면서 좌석에 매달렸다가, 고개를 젖히며 울기도 했다. 흰 쾌감이 정수리에 들이부어져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흔들리나 하면 마차가 덜커덕거릴 때에는 엇박이 되었다.

연은 처음 사정했을 때는 몸을 떨었다가 두 번째 사정에는 바르작거렸다. 세 번째에는 안 돼, 안 돼, 하고 반쯤 울면서 교성인지 신음 소리인지, 아니면 울음소리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죽을 만큼 좋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죽을 만큼 괴로워졌던 탓이다.

말이 쉴 때가 되어 워워, 하고 밖에서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연은 세 번째 절정에 이르렀다. 이제는 희지도 않은 말간 액을 모란의 손에 뚝뚝 흘리면서 그는 모란의 품 안으로 무너져 헐떡거렸다. 숨 좀 고르고 일어나야지, 했으나 모란이 느릿느릿 옷을 입혀 주는 손길에 까무룩 그만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마차가 다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몸은 보송했고 향유 냄새도 싹 사라진 상태였다.

관자놀이 쪽에서 쪽 하는 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들어 보니 모란이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있었다. 연이 눈가를 문질렀다. 창문 밖을 보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시간 빨리 가지?”

그렇긴 하지만, 딱히 수긍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나른하니 기분이 좋았다. 모란은 뒤에서 연을 껴안은 채 연신 여기저기 만지작거렸다. 성가실 법도 한데 딱히 나쁘지도 않아서 내버려 둔 연이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마차가 다시 얌전해졌네.”

“그렇지. 아까는 꼭 그렇지 않았어?”

연의 고개를 잡아 이제는 입가에 쪽쪽거리면서 모란이 히죽거렸다.

“뭐가 그랬는데?”

“꼭 말 타는 것 같지 않, 윽.”

된통 입술을 깨물린 모란이 아픔에 신음하며 입을 문지르는 동안 얼굴이 벌겋게 물든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 말 타는 거라니. 그래, 두 번째에는 모란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허리를 찧기는 하였지만, 그걸 꼭 비유를 해도 말 타는 것에 비유를 하다니 정말로…….

마을에 당도했는지 점차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연은 반대쪽에 가 앉았다. 모란이 능글맞게 웃었지만 무시했다.

‘그건 그렇고 좀 이상하네.’

흘깃 창문을 열어 불빛이 조롱조롱 걸리기 시작하는 마을 불빛을 보다가 연이 생각했다. 왜 점점 모란과 관계하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이지. 분명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치료 목적이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두 번이 되고, 두 번을 넘어가더니 요즘에는…….

‘사나흘? 아니, 이삼 일에 한 번?’

싫진 않다.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분이 영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 연이 미간을 꾸깃 구기며 고민하는 사이 마차가 완전히 도착했다. 꽤나 큰 규모의 일행들이 찾아온 덕에 객잔 주인이 크게 환대하였다. 주인이 입은 화사한 옷자락을 보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연이 모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그 나풀거리는 옷자락과 목소리가 없군.’

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옷자락이며 목소리가 보이고 들릴 때마다 정말 느낌이 좋지 않았다. 모란과 함께 내리는데 땅에 서니 다리가 좀 후들후들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모란과 정사를 나누는 동안 어지간히 기력을 쏟은 탓이었다. 그저 저녁을 먹은 뒤 바로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연오 동생, 아까 마차가 쉴 때밖에 나오지 않던데, 혹여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겠지?”

뒤를 돌아보니 제갈우가 다소 걱정하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연은 그만 뜨끔하여 얼굴이 좀 붉어지고 말았다. 아까 내리지 않은 이유가 아프기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아까는 잔다는 것이 너무 푹 자서 그만.”

“그래, 아니라니 다행이네. 연오 그 녀석이 얼마나 동생 걱정을 하던지.”

연의 얼굴이 미약하게 더 붉어졌다. 연오가 제갈우에게까지 자신을 향한 과보호를 드러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제갈우는 다행이라 말하다가 문득 모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귀빈 마차에 같이 탑승한 사람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분은……?”

“아, 제 주치의입니다.”

연의 좋지 않은 건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제갈우가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제갈우라고 합니다.”

“백모란이라고 합니다.”

제갈우가 인사하는 걸 보더니 모란이 씩 웃으며 포권지례를 해 보였다. 연이 내심 놀랐다. 그러고 보니 모란이 저런 식으로 인사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간 모란은 다른 사람과 마주했을 때마다…… 껄렁거리거나, 시비를 걸거나, 대개 검을 손으로 잡아채거나 했기에……. 제갈우는 모란의 이름을 듣더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모란?”

“내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응? 묘하게 어투가 고압적인데? 제갈우는 미묘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보다는 방금 얻은 정보가 더 중요했다. 백매화, 백모란. 척 봐도 비슷한 느낌의 이름들이 아닌가.

“혹시 연 공자와 약혼하였다는 백매화와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아주 막역하고 친한 사이이지요.”

그러고 보면 아직도 백매화와 약혼한 사이로 되어 있었지. 연이 지레 찔려 헛기침을 했다. 한편 제갈우는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새 주치의를 들인 후로 연오 동생의 건강이 급격히 좋아졌다고 했지. 아마도 백모란이란 자에 대한 연오 동생의 신뢰는 대단할 것이다. 백매화가 혹 그런 심리까지 계산한 것이라면 무서운 여자다. 옛날부터 계획한 것이 아닌가?’

이런 착각과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제갈우는 백모란에게 무어라 더 말을 붙이고 싶은 눈치였으나 같이 온 제갈세가 장로의 부름에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모란이 이상하게 재미있어하는 눈치인 것 같아 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사서 고생한다는 사람은 제갈우를 말하는 건가……. 확실히 머리가 좋으면 몰라도 될 걸 아니 피곤할 것 같긴 하다고 말하자 모란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가 하여 연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음 날 마을을 출발한 그들은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마침내 융중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웅장한 산세를 보니 과연 마차가 들어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어느 곳에도 입구가 안 보였다.

그러나 괜히 길잡이가 같이 온 것이 아니었다. 잠시 마차를 세워 두고 제갈우가 내렸다. 척척 걸어간 그가 돌멩이를 주워 이리저리 놓았다. 지켜보고 있던 모란이 드물게도 감탄했다.

“이 세계에도 이런 것이 다 있었군.”

“이런 것이라면 진법을 말하는 거야?”

제갈세가는 예전부터 진법과 기관진식, 전략 및 전술로 유명한 곳이다. 제갈세가에서 만들어 낸 진법과 기관진식은 그 누구도 쉬이 파훼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까다로웠으며, 해결하기 어려운 일은 제갈세가에게 물으면 무엇이든 답을 내어 놓는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만 제갈세가는 군사로서 유명하지 무인으로 유명한 가문은 아니다. 그 점을 노려 그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방대한 지식을 탐내는 세력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가 험한 융중산 안에 위치한 것이다. 오로지 허락받은 소수의 외부인들만이 세가에 드나들 수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연오에게 하여금 금려를 직접 데려가라 한 것에는 이러한 뜻도 있었다. 연오에게 제갈세가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연오에 대한 신뢰가 높다는 의미일 터.

“다 되었습니다. 이제 가도록 하죠.”

제갈우가 작업을 마치자 아까까지는 분명 바위와 풀숲, 그리고 나무뿐이었던 곳에 사람 한 명 겨우 드나들 만한 구멍이 생겼다. 마부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저런 곳으로는 통과하지 못합니다.”

제갈우는 그저 씩 웃으며 마부를 내리게 한 뒤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제가 먼저 갈 테니 다른 마차는 뒤만 따라오면 됩니다.”

제갈세가에서 온 장로와 제갈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사람들은 그 제갈세가이니만큼 무엇이 있으리라 믿으며 마차로 돌아갔다. 이랴, 하고 앞선 마차가 달그닥거리며 달렸다. 대체 어떻게 통과하는가 궁금하여 연이 창문을 열었다.

“……!”

보이는 광경은 참으로 놀라웠다. 분명 처음에는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만한 구멍이었는데 마차가 다가가자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멀리 있는 물체가 가까워지며 커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구멍은 자꾸자꾸 커지다가 종내에는 마차 두 대가 충분히 드나들고도 남을 굴이 되었다. 연도 무인으로서 진법의 기초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짐작이 안 될 정도이니 참으로 해괴하게 느껴지는 출입 방법이었다.

짧은 굴을 통과하고 나자 곧장 나타나는 건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얼마나 높은 절벽인지 아래를 보자 아득하고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절벽 아래로는 콰아아아 희미한 소리와 함께 폭포가 흘렀다. 절벽 길은 얼마나 길이 좁았던지 마차가 겨우 달릴 만한 너비였다. 바퀴가 아슬아슬 절벽 끄트머리를 비껴 나갈 듯 말 듯 굴렀다. 모란은 양쪽 창문을 열어 두고 견주어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가짜 절벽이야?”

“아니, 진짜 절벽이야. 다만 절벽은 이쪽이 아니라 이쪽. 절벽으로 보이는 건 그냥 평지나 다름없는 산이야.”

모란의 말에 신기해하며 연이 반대쪽 창을 보았다. 그저 바위산이 보일 따름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똑똑한 자야. 마법으로도 이런 건 만들기 힘들어.”

모란은 마치 어떤 대단한 경관이라도 구경하는 얼굴로 바위산 쪽을 내다보았다. 흘깃 보니 모란의 눈에 금색 고리 하나가 영글어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눈이었다. 그런데 문득 모란의 표정이 굳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고리가 둘, 넷, 그리고 여덟 개로 늘었다.

“이런.”

쯧 혀를 찬 모란이 돌연 건너편으로 오더니 얼른 연을 끌어당겨 안았다. 품에 안긴 채로 의아해하며 그를 보니 눈에는 여전히 금빛 고리가 영글어 있었다. 연이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왜 그래?”

“내 생각에는 제갈세가가 외부의 적에 대해 정말 단단히 방비한 모양이야.”

연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란이 저런 눈을 할 때는, 드물게 진심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다. 가령 근원을 들여다보며 치료를 할 때라든가. 그런데 지금 저 눈을 보인다는 건 능력 발휘할 일이 있다는 거고, 그건…….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말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크게 기울었다. 연이 당혹하여 옷깃을 꽉 잡는 동안 모란이 태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과연 이쪽인가.”

우르릉하고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가 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소리로만 들으면 밖은 마치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모란의 손이 뒤통수를 감싼 것과 거의 동시에 마차가 이제는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절벽에서 추락하기라도 하듯, 아니……. 아니다. 콰직, 부서져 튕겨 나간 창문 밖으로 풍경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그들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도 마차와 함께 굴러야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니었다. 연은 당황하여 그들의 몸은 두고 마차만 물레바퀴 돌 듯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몸은 괜찮았지만 시야가 어지러웠다. 마차가 부서지며 여기저기 나무 파편이 튀었으나 모란과 연에게는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처럼 느껴지는 시간 동안 요란하게 구르더니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야 연은 자신이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모란이 마차 문을 뻥 걷어차고 나왔을 때서야 연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옆구리에 연을 껴안고 아예 그대로 걸어갈 생각인 것 같아서 연은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모란은 순순히 놓아 주었다.

“왜 그래? 어디 부딪힌 곳은 없을 텐데.”

“부…딪힌 곳은 없어도……. 워낙 갑자기…….”

토기가 올라와서 연이 잠시 입을 틀어막았다. 이를테면 정신적인 멀미와 비슷했다. 모란이 저를 꼼꼼하게 위아래로 살피는 것도 모르고 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계곡 깊숙한 곳으로 주위에는 온통 험악한 바위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끝이 어딘가 의심될 정도로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떨어졌을까?”

“추락하기 전에 잘 밀어 놓고 오긴 했는데, 아직 한 명도 안 떨어진 걸 보니 괜찮겠지.”

연의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과 먼지를 톡톡 털어 내며 모란이 말했다. 연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잠깐 앉았다가 일어났다. 모란 덕에 목숨 건진 건 알겠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따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마차도 떨어지지 않게 할 수는 없었어?”

“나도 그러고는 싶었는데, 마부가 환각을 보고 마차를 이미 절벽 밖으로 달리게 한 터라. 이미 마차가 떨어지는 걸 본 사람들이 여럿이었어. 마부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그 상태에서 우리가 탈출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건 현실적이고?”

심란해진 연은 주위를 둘러보다 평평한 바위 위에 앉고 말았다. 그리고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모란도 연의 옆에 서서 뺨을 긁적였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서서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

“방진이 작동했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비명 소리가 들리자 제갈우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닫고는 바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내리자마자 황급히 기우뚱하는 마차를 잡아 세웠다. 일단 요란하게 날뛰는 말들을 기절시키고 나서야 소란이 멎었다.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려 있는 마차도 있었고 숲에 굴러떨어진 것도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제갈우가 아연실색하며 장로에게 속삭였다. 얼굴이 희게 질린 건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부 방어용 진법이 반응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외부 방어용 진법은 선조의 놀라운 유산이다. 약한 것은 받아들이고 강하면 강할수록 밀어 내는, 척력을 적용한 세상 유일무이한 진법이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는 오랜 세월 동안 융중산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었다. 바깥에 전쟁이 터지든 말든 제갈세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외부의 적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진법을 닫으면 그 누구도 세가로 들어오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반대로 완전히 열어 두면 누구나 쉽게 세가로 들어올 수 있으나, 제갈세가의 역사상 완전 개방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그들은 단계에 따라 개방의 정도를 달리했다. 무공이 없는 일반인 정도만 드나들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어느 단계의 고수까지는 지나갈 수 있는 수준까지.

이번에는 남궁세가에서 손님이 오기에 특별히 큰마음을 먹고 크게 문을 열어 두었다. 반로환동에 이른 고수가 아니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약자일수록 들어오기 쉽고 강자일수록 들어오기 힘들다. 모순적이나 그게 바로 제갈세가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비법이었다.

그런데 그 비법이 처음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까지 본 중 가장 강도가 높았다. 처음에는 오작동인가 싶을 정도였으나,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게 곧장 떠올랐다.

오작동이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반로환동을 한 고수가 섞여 있었다는 말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갈우와 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우, 이게 대체 어쩐 일이지?”

누구보다 놀란 건 이런 사정을 아예 모르는 손님들이었다. 타인에게 가문의 비법을 알려 줄 수는 없으니 제갈우가 얼굴이 굳은 연오를 일단 다독였다. 자칫 잘못하면 공격받은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 미안하네. 진법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야.”

진법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건 제갈우에게 있어서는 오명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말하면서 제갈우가 연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허락받지 않은 고수가 일행 속에 숨어들어서 가문의 진법이 반응했다.

-허락받지 않은 고수라고?

-사전에 이야기했었지. 우리 가문의 기이한 진법.

사전에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에 연오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는 게 좋겠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던 제갈우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왜 마차가 다섯 개지? 다시 세고 또 세도 옆으로 누워 버리거나 옆 숲길로 굴러떨어진 마차까지 포함해 다섯 개였다. 모두 여섯 개여야 하는데.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다.

‘대체 어느 마차냐!’

지반이 무너지는 환각 때문에 정작 마차 한 대가 굴러떨어진 건 놓치고 만 것이다. 그는 제발 떨어진 마차 안에 남궁세가의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창백해진 제갈우의 표정에 연오 역시 불안한 낌새를 느낄 때였다.

“소, 소가주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망가지고 뜯긴 울타리가 듬성듬성 남은 절벽에 서서 아래를 망연히 보고 있던 마부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제갈우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 마부는 다름 아닌 연오 동생의 마차를 끌던 사람이었다. 그 말인즉슨, 굴러떨어진 마차가……. 마차가…….

이제는 연오도 마차 한 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몰던 마차는 대체 어디로 갔어!”

“절,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뭣이라?!”

연오가 크게 기함했다. 모두가 경황이 없었던 탓에, 아까까지만 해도 오른쪽에 있던 절벽이 이제는 왼쪽에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깜짝 놀랐다. 머리를 부딪친 한위가 주강의 부축을 받아 나오다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제대로 말하게. 혹여나 환각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연오의 험악한 기세에 마부가 덜덜 떨며 납작 엎드렸다.

“으흑, 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미쳤는지 아까는 갑자기 산사태가 일어나는 걸 보아서……. 마, 마차를 안전한 곳으로 향한다는 것이, 그만…….”

“소, 소가주님. 저도, 저도 보았습니다. 연 도련님의 마차가……. 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요.”

다른 사람의 증언까지 듣자 연오가 망연자실하였다. 연이 탄 마차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졌다는 말에 한위는 얼굴이 희게 질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갈우는 식은땀이 다 흘렀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제갈세가의 책임이었다. 혼인으로 결속을 맺으려던 양 세가의 사이가 원수지간처럼 변할 수도 있었다.

‘설마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리는 건 아니겠지.’

그는 제 친우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연오가 이성을 상실하는 상황을 대비해 제갈우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연오는 주먹만 꽉 쥘 뿐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다. 괜히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아니었다.

연오는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는, 동생이 탄 마차만 생각하면 돌아 버릴 것 같았으나 애써 내리눌렀다.

“일단 사람들은 돌려보내지.”

“……그래. 지금 당장 수색대를 파견하라고 하겠네.”

제갈우가 눈짓하자 장로가 몸을 날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한숨을 참으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까지 저곳으로 추락한 이들 중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아마도 연과 그 주치의는……. 그가 이를 악물었다.

연의 생존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일행 속에 숨어 제갈세가에 몰래 들어오려던 게 틀림없는 고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자, 이러면 되었지.”

연이 바위에 앉아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란의 손짓에 순식간에 절벽에서 튼튼한 나무가 쑥쑥 자라나 푹신한 구름처럼 가지와 나뭇잎을 드리웠다. 꽃만 피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란은 그 위에 마차를 가볍게 쑤셔 박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마차 위에도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나무가 두엇 정도 중간에 드문드문 자라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다음에 나무에 걸려서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지.”

마차에 부딪친 충격을 가장하여 나뭇가지도 툭툭 부러트리며 모란이 말했다. 노력은 가상하였으나 연은 반쯤 박살난 마차를 보자 과연 그 말을 믿어 줄지 의문이 들었다. 살아남은 건 둘째 치고 모란과 연의 행색이 너무 멀쩡했던 탓이다. 옷이라도 더럽게 하자 싶어 흙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연이 놀랐다.

“이런.”

“왜 그래?”

“사방이 해골 밭이야.”

이제 보니 바위 틈새 사이마다 백골이 보였다. 아마도 제갈세가에 침입하려다 추락해 버린 이들일 터였다. 일종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다.조금 떨어진 곳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콕콕 무언가를 뜯어 먹고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라 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란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여기에는 오래 있으면 별로 안 좋겠는데.”

왜……지? 물론 사방이 백골 투성인 바위 밭에 있는 건 안 좋긴 하겠다만, 모란이 말하니 어쩐지 뭔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연은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모란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연의 눈에는 바위밖에 안 보였는데 그에게는 다른 풍경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협곡이 험해서 아무리 빨리 수색조가 온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거야. 여기서 밤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맞는 말이다. 그만 툭툭 털고 일어나려는데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업어 줄까?”

“무슨, 혼자서 잘 걸어갈 수 있어.”

“뭐…… 그렇다면야.”

대뜸 업어 주겠냐고 하니 자존심이 상해서 연이 내밀어진 손을 본 체 만 체했다. 요즘에는 건강도 제법 좋아졌고, 바위가 좀 험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걸어갈 정도는 되었다.

……라고, 연은 생각했다. 얼마 걷지도 않아 디뎠던 바위 한쪽이 부스러지면서 미끄러지기 전까지만. 옆에서 걷고 있던 모란이 잽싸게 잡아 주었지만 벌써 발목이 얼얼했다. 지난번 사냥대회 때 주강의 공격을 피하게 하려고 모란이 떠밀었을 때 삐었던 발목을 또 삔 것이다. 연은 살살 발목을 돌려 보다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모란이 히죽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업어 줄까?”

결국 연이 자존심을 접었다. 한숨을 쉬며 답삭 업히자 모란이 성큼성큼 잘도 걸어갔다. 왜 이렇게 잘 걸어가나 흘깃 아래를 바라보았더니 이따금은 바위가 아니라 허공을 땅 딛듯 디디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좀 반칙 아닌가…….

모란은 제법 한참을 걸어갔다. 협곡이 꽤 깊고 길었다. 확실히 연이 걸어가기엔 애 좀 먹었을 험한 형세였다. 제갈세가의 진법으로 인해 사람의 발이 닿지 않아 아무런 길도 나 있지 않았다. 자존심이고 뭐고 연은 그냥 얌전히 모란에게 업혀 가는 걸 받아들였다. 발이 바쁘지 않으니 대신 머리가 바빠졌다. 연이 근심에 잠겨 중얼거렸다.

“형님과 한위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심각한 근심 걱정인데 모란은 태연하게 대꾸해 주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원래라면 그 자리에 있는 마차가 죄다 길 아래로 떨어졌을 법한 환각이었거든. 이쪽에는 비행을 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걸 고려하면 확실히 괜찮은 방어법이야. 아군이고 적군이고 죄다 쓸어 협곡에 던져 버리는 건 단점이지만.”

단점도 아주 큰 단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추락하기 전 모란이 다른 마차가 떨어지지 않게 밀어 내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모란이 연오와 한위를 구해 줬다는 의미다. 연이 진지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무사할 수 있었어.”

“……음, 뭐.”

그런데 이상하게 모란의 반응이 어물어물했다. 그게 말이야, 하고 그가 드물게도 다소 미안해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멀쩡한 진법이 반응한 게 나 때문인 것 같거든.”

“뭐?”

“대충 원리를 보아하니 일정 기준 이상의 힘이 방진 내에 존재하면 작동하는 것인데, 강하면 강할수록 반발력이 강해져서…….”

그러니까 모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제갈세가에서 편하게 여독을 풀고 있었을 거란 이야기다. 연이 한숨을 쉬었다.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뭐. 별 피해가 없으면 되었지.”

“하하.”

모란이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제갈세가와의 관계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연이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으니 좋게 좋게 넘어갈 확률이 컸다.

문득 연이 그들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지나간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벌써부터 모란은 이따금 흙이 있으면 일부러 밟아 발자국을 내고 있었다.

‘확실히 상당히 의지가 되는 사람이긴 해.’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데다가 거의 만능에 가까운 사람이 제 편이라는 건 정말로 마음을 편하게 했다. 연이 말끄러미 모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계속, 앞으로도 쭉 모란과 함께하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힘들지 않냐는 말이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나올 정도로 모란은 한참을 걸었다. 협곡은 끝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힘들어서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을 텐데 모란은 유유자적이었다. 연을 업고 있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도리어 가끔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했다.

그들이 마침내 바위 협곡을 벗어난 건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할 때였다. 드문드문 풀숲이나 덤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숲이 보였다. 온전히 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보자 연은 퍽 기뻤다. 바위 협곡은 잠시간 보기에 좋을지 몰라도 오래 있기에는 너무 황폐했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과는 달랐다.

“어디 보자……. 수원(水源)이 이 근처 어디쯤에 있을 텐데.”

“나 이제 내려도 되는데.”

모란은 연의 말을 무시하며 휘적휘적 발로 흙을 파내었다. 그리고 흙 색깔을 좀 보더니 다시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나 이제 내려도 된다니까? 연이 두어 번 더 말해도 모란은 대꾸조차 없었다. 결국 연은 체념했다. 이따금, 아니 자주 모란은…… 연오보다도 자신을 더 과보호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뭐랬지, 훅 불면 훅 날아갈 솜털처럼 느껴진다고?’

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솜털 따위에 비교되었으니 기분 나빠야 마땅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은가.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연오조차도 연을 솜털처럼 취급하지는 않았다. 모란이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여 그런 것인가? 어쩌면 인간이 개미를 보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연이 곰곰 생각하는 동안 모란은 마침내 원하던 곳에 도착했다.

“어때, 괜찮지 않아?”

연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연은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은 난생처음 보았다. 물이 마치 수정처럼 맑아 바닥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저쪽에서 아스라하게 콰아아아 하고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폭포에서 흘러 내려와 만들어진 계곡인 모양이다. 그제야 모란이 연을 내려 주었다.

“슬슬 저녁 먹어야지.”

저녁……. 연이 별생각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에 가재나 물고기 따위가 있을 테니 잡아서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모란의 생각은 연과는 달랐다.

“잠시만 기다려 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모란이 곧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연이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계곡을 감상하고 있자 다소 시간이 지난 뒤에 모란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이것저것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꼭 시장에서 사 온 것 같았다. 아니, 시장에서 사 온 것이 분명했다.

“……대체 뭐야, 그게?”

“오늘 먹을 것? 역시 숲에서는 고기를 구워 먹어 줘야지.”

제법 흥이 난 얼굴로 모란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땔감을 모아 가지고 오더니 순식간에 모닥불을 피웠다. 이제 막 봄이 되어 가는 시기라 나무들이 바삭하게 말라 쓰기에 좋았다. 그 솜씨가 아주 능숙했다. 안 그래도 좀 쌀쌀하고 추웠기에 연이 슬그머니 모닥불에 몸을 가까이 했다.

‘보통이라면 절벽에서 떨어져 심각한 부상을 입고 죽니 사니 하는 상황이어야 할 텐데.’

이건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분위기가 아닌가. 모란이 척척 모닥불 주위에 적당히 커다란 돌들을 둘렀다. 그러고는 부스럭부스럭 가져온 꾸러미를 열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꾸러미에는 잘 썰린 고기며 채소 따위가 있었다.

모란은 근처에서 막 따 온 것 같은 싱싱한 버섯의 흙을 톡톡 털어 내고는 꼬치에 끼웠다. 고기 한 점, 버섯 한 점, 파 한 쪽, 다시 고기 한 점, 버섯 한 점, 파 한 쪽……. 연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진짜 본격적이잖아.”

“어딜 가든 잘 먹고는 지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도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꼬치 재료들을 끼웠다. 그렇게 완성된 꼬치들은 돌 사이사이에 끼워졌다. 타닥타닥 모닥불 위에서 나뭇가지에 꿰어진 버섯과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 가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기다리는 것도 잠시, 적당히 잘 익은 꼬치를 들어 후후 불어 고기를 한 입 먹자 간이 적당히 잘 밴 것이 맛있었다. 겉면이 살짝 탄 파는 달짝지근했고 막 딴 버섯은 무슨 종인지는 몰라도 감미롭고 향긋했다.

후식으로 모란이 가지고 온 귤까지 먹고 나니 완벽했다. 배는 불렀고 몸에는 온기가 돌았으며 저녁 무렵 계곡 풍경은 은은하여 보기 좋았다. 연이 귤껍질을 잘게 뜯어서는 모닥불에 던져 태웠다.

“이상하게 모란 당신과 먹는 건 다 맛있어.”

“뭐어…….”

모란이 씩 웃었다. 맛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란 자신의 본원지기와 생기를 조미료 삼아 뿌려 준 것들이니.

연에게 치료로 쏟아부은 것들 중 반 정도는 항상 며칠이 지나면 소화되지 못하고 주위에 부스럭부스럭 뿌려졌다. 모란이 한 건 그런 걸 가능한 한 모아다가 다시 연이 먹는 음식에 뿌려 넣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속마음은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씩 웃으며 오늘은 돼지였으니 내일은 닭을 구워 먹자고 제안할 따름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연은 계곡에 가까이 다가갔다. 투명한 물에 손을 담그어 보니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잠깐 물장난을 하고 난 뒤 연이 바위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관이 아름답기는 하나 마땅히 잘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돌로 온통 울퉁불퉁했다. 그나마 평평한 곳을 찾아 돌을 골라내는데 모란이 슥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마차에 실려 있던 짐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하나 궁금하여 보고 있자 모란이 자리를 고르기 시작했다. 다만 연이 돌을 파내는 식이었다면 그는 돌을 파묻어 버리는 식이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 발로 누를 때마다 엄청난 힘으로 우득우득 하며 돌이며 바위가 안으로 파묻혔다. 그 힘에 연은 잠시 기가 질렸다.

“항상 이런 식으로 잠자리를 만들었어?”

“잠자리가 편해야 다음 날 만사가 잘 풀리는 법이지.”

적당히 자리를 고르고 난 뒤 모란은 위에 흙을 덮어 밟아 다져 평평하게 했다. 마지막 마무리로는 위에 나뭇잎을 덮었다. 그 후 짐 꾸러미에 있던 옷을 꺼냈다. 개중 가장 괜찮은 건 꺼내 갈아입은 뒤 나머지는 나뭇잎 위에 몇 겹 덮자 제법 근사한 침상이 되었다. 모란이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포닥포닥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슬금슬금 다가와 엉덩이를 붙이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푹신푹신했다.

“며칠 정도는 여기에서 자면 될 거야. 약간 불편하겠지만.”

“충분하고도 남지.”

연이 급조로 만들어진 침상에 누웠다. 몸을 눕히자마자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모란도 팔을 베개 삼아 그 옆에 누웠다. 연이 말끄러미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란이 살살 손으로 허공을 헤집자 무엇을 했는지 서늘했던 공기가 훈훈하게 변했다.

“절벽에서 떨어져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치고는 좋네…….”

순간이동으로 한순간에 화정당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부러 이러고 있다는 게 참 기묘했다. 연이 옆을 보자, 모란이 빙그레 웃으며 퍽 다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려나 싶더니 눈가에 살살 입술을 문지르고는 다시 눕는 것이다.

심장이 빨리 뛰어 연이 얼른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사금처럼 별이 무수히 박혀 반짝거리고 있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야.”

“숲에서 자는 게?”

딱히 숲에서 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가뿐한 몸도, 마차 여행도, 이런 아름다운 계곡도……. 타인과 함께 몸을 맞대고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까지 모든 것이 연에게는 처음이다. 마치 세상에 모란과 단둘이 남겨진 기분에 솔직한 마음이 된 연이 입을 열었다.

“몸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 세가 밖에서 지내는 것은 꿈도 못 꾸지. 항상 앓아눕기 일쑤였으니.”

모란일 적에는 은록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남궁연일 때는 부유한 환경이었으나 몸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 연오나 또래 무인들이 강호 유람이니 다니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히 이런 일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몸이 다 낫게 되면 여행을 한번 다녀오려 해.”

연이 불쑥 내뱉었다. 이제 몸이 낫게 되리란 희망이 생겼으니 전부터 생각만 하던 것이 말로 나왔다. 한위와 함께 다녀오면 좋겠지, 하면서도 연은 가만히 제 말을 듣고만 있는 모란에게 말을 꺼냈다.

“사냥대회 전에 당신도 제안했었지. 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그때가 되면 나와 같이 여행을 다녀오자, 모란.”

그러고는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모란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혹은 모란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엇비슷한 것 같기도 하여서 연의 가슴이 살금살금 뛰었다. 연을 바라보는 모란의 시선이며 표정이 참으로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이라, 연은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에 몸이 찬찬히 감긴 채 잠기는 듯했다.

“그럼 혼자 다녀오려고 하였어? 어딜 가든 혼자 있으면 사고만 일으키고 다니면서 용감도 하지.”

……아니 대체 언제, 사고만 일으키고 다녔다고? 발끈한 연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모란은 깍지를 껴 손가락 마디마디를 얽어 오는 것으로 연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고는 이리 말하는 것이다.

“안휘성이든 사천성(四川省)이든, 혹은 섬서성(陜西省)이나 그 어느 곳이든 여행을 가 즐거운 것을 보고 겪으면 좋겠지. 둘이서만 가도 좋고, 네 동생과 함께 떠나도 좋을 것이고.”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참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 모란과 여행에 관해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가물가물 감겼다. 깊이 잠든 그는 꿈속에서 모란과 함께 여행 짐을 꾸려 남궁세가를 나가는 꿈을 꾸었다…….

연이 즐거운 꿈에서 떠나 잠에서 깬 건 수런수런 떠드는 소리 때문이었다. 반쯤 엎드린 상태에서 혼곤하게 잘 자던 연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귀는 잠에서 깼어도 아직 나머지 몸은 깊게 잠든 상태였다. 비몽사몽 혼곤한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긴 기분 나쁠 법도 하지, 인간들이 뒤지고 다니면. 그래도 제갈세가는 얌전하니 제법 괜찮은 축이 아니야? 어차피 그 대단한 진법 혜택도 같이 누리고 있으면서.”

제갈세가가 뭐가 괜찮은 축인데? 아니, 그보다 모란은 대체 누구와 이야기를…….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가 짹짹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연이 희미하게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아침 햇살이 눈부셔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뭐어, 구애 행위……라고 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

“응? ……글쎄. 잘 모르겠네. 쉬운 결정이 아니라서. 그쪽 같으면 ……들일 수 있겠나? 수명 차이도 고려는 해 봐야지.”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연이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모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가 어쩐지 좀 축 처진 것 같았다. 그가 휘적휘적 계곡물을 손으로 저으며 물장난을 가볍게 쳤다.

“……그래. 훗날 일을 두려워해 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긴 해. 이런 걸 두려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글러 먹었다는 증거지……. 실은 이미 엮여 버렸으니.”

연이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봐도 모란이 계곡 물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벌써 수색대가 찾아왔나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도 대화 내용이 어쩐지 영 이상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모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일어났어?”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아, 이 산의 주인들과.”

이 산의, 주인들? 전의 그 사슴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이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며 다가간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모란의 옆에 깃이 흑단처럼 곱고 긴 새가 앉아 있었다. 눈은 홍옥처럼 붉었고 몸은 마치 매처럼 컸다. 거기에 다리는 세 개였다.

연이 헉 숨을 쉬었다. 다리 세 개의 검은 새……라 하면 떠오르는 게 있었던 탓이다. 태양에서 날아왔다고들 하는 삼족오 말이다. 사실, 까마귀와는 외양이 많이 달라서 삼족오(三足烏)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이 반짝반짝하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계곡물 속에 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잉어였다. 머리에는 마치 꽃잎처럼 흰 반점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고 몸은 금색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며 빛났다. 금색의 거대한 잉어를 중원에서는 흔히들 이렇게 불렀다. 만년화리(萬年火鯉)라고.

옆에서 휙 검은 것이 솟구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삼족오가 아주 조용하게 날아올랐다. 푸드덕거리는 소리 하나 없었다. 마치 태양에 닿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순식간에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 자태가 우아하고 마치 빛처럼 빨랐다. 다시 고개를 내려 보니 어느새 만년화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연은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만년화리와 삼족오라……. 모르긴 몰라도 평생 동안 아주 운이 좋아야 볼까 말까 한 존재들이란 건 알겠다. 모란이 딱히 궁금하지 않은 설명을 했다.

“바위 협곡을 경계로 둘이 각각 나누어서 산을 가지고 있어서 주인이 둘이야.”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대체 어떻게 말이 통하는 거야?”

모란이 탁탁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퍽 귀여운 걸 보는 얼굴로 연을 보았다.

“사람에게만 언어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놨는데.”

‘동물들에게도, 아니 영물들인가? 아무튼 언어라는 게 있다는 거지……. 무언지는 몰라도 모란은 그걸 알아듣고 말도 하고…….’

아직 잠도 덜 깬 데다가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걸 본 연이 잠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모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따끈따끈하니 아직도 김이 살살 올라오고 있는 소룡포였다. 무심결에 두어 개 받아먹고 나니 속이 차며 기운도 나고 잠도 깼다. 아침을 먹은 뒤 계곡물을 받아 좀 마시고 세수도 하고 나니 정신이 완전히 맑아졌다.

“산 주인들이 말하기를 어제부터 인간들이 시끄럽게 산을 뒤지고 다닌다던데, 아마도 하루 이틀 내면 수색조가 우릴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나 빨리?”

연이 좀 놀랐다. 아무리 봐도 이 협곡은 내려오기가 여간 힘든 곳이 아니었다. 오려거든 돌아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의 마음속에 미약한 죄책감이 차올랐다. 연오가 자신을 찾기 위해 그리도 고생하는데 이리 편하게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한숨을 쉬는데 모란이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다가 연을 살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발목 어제보다 상태 나빠진 것 아니야?”

“전에 한번 삐었던 곳이라서 악화된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연이 말했다. 원래 한번 삔 관절은 재발이 잦았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제 발목이 상당히 퉁퉁 부은 걸 알고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란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부목이라도 대고 다니지.”

“어차피 앉아 있을 일이 더 많을 테니까……. 게다가 그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것치고 너무 멀쩡한 것도 이상하잖아.”

어디가 부러지고 깨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준의 엄청난 추락이 아니던가. 사실 발목이 삔 게 아니라 부러지는 수준이어야 할 터였다. 연이 고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어딘가는 좀 더 다쳐야 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멀쩡한 것 같아서.”

“멀쩡하면, 어디 상처라도 일부러 내 놓게?”

“그건, 아니지만……. 쓸린 상처라도 있어야 하지 않아.”

연은 딱히 상처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갈밭에서 좌로 우로 구르면 절벽에서도 구른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모란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드물게도 엄격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냥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 바위 협곡이었다고 해. 천운이 따라 주었다고.”

연이 눈을 깜박였다. 누가 봐도 그는 약하여 골골거리게 생겼다. 그러니 이번 일로 의심을 산다면―사실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의심을 사고도 남을 것 같았지만― 연이 아니라 세가 외의 사람인 모란이 바로 주목을 받게 된다. 모란도 그걸 알 텐데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심을 받으면?”

“의심을 받아도 어쩌겠어? 천운이 따라 살아남았다는데. 인정머리가 있다면 기뻐할 것이고, 의심이 많은 자라면 의심하겠지. 그러나 어느 쪽이건 간에 나를 어쩔 수는 없을 테니.”

모란의 말은 얼핏 거만하게까지 들렸다. 그러나 거만함은 아니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그 모란이 아닌가. 무슨 일이 생겨도 정말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실은 이런 계곡도 금방 벗어날 수 있는 데다가 마차가 떨어지건 말건 개의치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마도 나, 때문인 거겠지.’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하면 연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어떠한 막연한 기대감, 동시에 드는 불안감, 그리고 지속되는 초조감 때문이었다. 이 감정을 꺼내 놓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목구멍까지 차올라 간질거렸다. 그러나 모란이 연아? 하고 물을 때는 용기가 팟, 하고 산새처럼 날아가고 말았다. 연이 얼른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수색조가 올 때까지 심심해서 뭐 하고 지내지?”

“이 근처 구경이나 할까?”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이 그 손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바람이 불었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연이 놀랐다. 그들이 있는 곳은 융중산 어느 산봉우리의 꼭대기였던 것이다. 공허한 느낌이 들 정도로 탁 트인 광경이 연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구름이 바로 발밑에서 노니는 듯했다. 이런 장관은 처음이라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연의 시선이 멎었다.

“저게 제갈세가인가?”

멀찍이 어느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남궁세가보다는 약간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모란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그가 연의 눈을 잠시 손으로 덮었다. 잠시 후 다시 손을 떼어 냈을 때 연의 눈에는 다른 광경이 보였다.

아까 보이던 산중 저택은 어디로 가고 그 자리에는 그저 거대한 폭포만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리어 조금 더 멀찍이 떨어진 곳에 길고 복잡한 저택이 하나 보였다. 봉우리 위에서 보니 저택은 저택이되 일종의 미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건물과 건물이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외부인은 십중팔구 헤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말 치밀하지. 저렇게 만들어 놓고도 정작 중요한 것들은 지하에 있더라니까.”

“지하가 있다고?”

“그래, 한 지하 삼 층까지.”

그 말에는 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치밀하다 못해 아주 철저했다. 저런 폐쇄적인 구조에다 외부와도 거의 접촉하지 않는 세가와는 달리, 제갈가의 사람들은 중원에서 각지 온갖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곤 했다. 전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는데 이렇게 본가의 모양새를 보니 새삼 제갈세가 사람들의 의식이 얼마나 다른가를 느끼게 된다. 모란이 설명을 덧붙였다.

“오대세가 중 가장 약소지만, 그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식을 터득한 것이지.”

“하기야 괜히 오대세가 중 하나는 아니니까.”

둘은 얼마간 산봉우리 정상에서 느긋하게 주위 풍경을 구경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모란은 대체 언제 어디서 알아낸 것인지 연에게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식물이라고는 약초밖에 모르는 그에게 스스로 움직여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을 보여 주기도 했고, 오래 묵은 하수오(何首烏)를 단번에 찾아내기도 했다. 연이 살면서 본 중에 가장 좋은 품질의 것이었다.

퍽 즐거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모란은 휘적휘적 걸어 다니며 날개가 오색으로 빛나는 곤충을 날려 보내거나 혹은 향긋하고 맛이 좋은 버섯들을 툭툭 땄다. 연의 눈에는 그저 풀잎과 나무뿐인데 어느새 알이 굵은 밤알이나 빨간 산딸기 열매 따위가 손에 얹어져 있었다. 그런 것을 주워 먹으며 돌아다니니 배가 고픈 것도 몰랐다.

“이런 일에 굉장히 익숙해 보이네.”

“뭐어, 여행하면서 야영이나 노숙을 많이 해 봤거든. 언제 어디서 식량이 떨어질지 모르니 어디에서든 먹을 것을 찾아내야 하기도 했고.”

모란이 무언지 모를 풀잎을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다. 무언가 해서 연도 받아 씹어 보니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썼다. 인상을 쓰며 뱉어 버리자 큭큭 웃으며 모란이 제가 씹던 잎도 퉤 뱉었다.

“빨리 여행을 가고 싶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모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힘들지만 재미있지. 치료 다 끝나고 나면 바로 가자.”

그런데 지난밤 대화를 떠올린 연에게는 대수롭게 여겨졌다. 애써 태연하게 좋지, 대꾸하기는 했으나 벌써부터 설레는 것이었다. 치료가 언제 끝난다고 했지? 일 년이면, 이제까지 서너 달 정도 치료를 받았으니……. 그가 가만히 남은 기간을 헤아려 보았다.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갈세가로 가던 중 절벽에서 추락했다는, 심각하다면 심각한 상황임에도 연의 마음은 근래 들어 가장 평화로웠다. 불안이나 초조함도 없이 평온하고 좋았다. 둘은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떠가는 구름을 보며 잠시 낮잠을 즐겼다가 웅장한 폭포를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하루가 흘러 순식간에 뉘엿뉘엿 해가 질 때가 되었다.

다시 원래 지내던 곳으로 돌아온 모란은 어제 말한 대로 닭고기를 구해 왔다. 간이 잘된 것을 부위별로 나뭇가지에 찔러 넣고 구워 먹으니 천하 진미라.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달달한 홍시도 나누어 먹고 나자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좀 더 늦게 찾았으면 좋겠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한 연은 뜨끔하여 모란을 보았다. 그가 잠시간 연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잠겨 표정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연은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는 겨우 모란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에, 좋은 걸 보여 줄까.”

연이 움찔했다. 흡사 ‘좋은 거 해 줄까’와 비슷하게 들렸던 탓이다. 무언지 감도 잡히지 않아 갸웃거리고 있자 모란이 하늘을 가리켰다. 깜깜하여 달과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었다. 연이 고개를 들자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별똥별은 허공에서 길게 유선을 그리며 떨어져 계곡 물에 참방 빠졌다.

“아…….”

곧이어 무수히 많은 별들이 와르르 쏟아져 계곡으로 떨어졌다. 몇 가지는 잔디밭 위로 나뒹굴었으나 대부분은 계곡을 향해 일직선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연의 눈동자에 별빛이 말갛게 고였다. 별들이 이슬비처럼 잘게 쏟아져 일렁였다. 둘 사이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내가 지내던 곳에는 별이 내리는 밤이란 것이 있었거든. 정확히 말하면 별이 아닌 이형의 존재가 땅에 내려와 생명을 탐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지.”

“별이 내리는 밤…….”

중얼거리며 연이 절뚝거리며 계곡가로 다가갔다. 계곡에 물이 아닌 별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손을 뻗어 바닥에 잠긴 것 하나를 잡아 올리니 이내 파스스 가루처럼 흩어져 바람에 날렸다. 마치 꿈결 같았다. 연의 가슴이 부풀어 올라 구름처럼 간들거렸다.

“환각은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모란이 어찌나……. 어찌나 그가, 그토록이나……. 무언가 속에서 차오르는 것은 많았으나 연은 그저 말없이 모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모란을 천천히 보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저에게 향하는 그 눈. 얼굴이 짓는 표정. 낮고 고요한 음성.

“연아?”

모란이 그리 물으며 다가와 고개를 숙였을 때, 연은 팔을 뻗었다. 의아함으로 벌어지는 입술에 처음으로 먼저 입을 맞추고 혀를 섞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어둠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눈꺼풀 아래에서 빛이 톡톡 터져 흘러내렸다.

질투 유발이나 유혹 따위의 것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이 있었다. 연은 앞으로도, 이후로도 계속 모란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 특유의 느긋하고 태연자약한 태도와, 능청맞은 행동과 말을 언제나 곁에서 보고 들었으면 좋겠다. 계속 그가 자신을 특별히 대우하는 것이라 느끼고 싶다. 모란도 이렇게 자신을 원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연은 모란에게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잠깐 멈추어 있던 모란은 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평소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깊게 빨아들이고 혀를 질척하게 섞었다. 사납고 거칠어, 마치 잡아먹히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뜨니 모란의 눈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듯했다. 평소의 그 눈인가, 아니면 계곡에 흐르는 별들의 빛인가? 오싹하여 몸을 떨면서도 연은 이번에는 모란의 금빛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

입술을 떼어 낸 모란이 입가를 살살 핥으며 간청하였다. ‘다시’가 어떤 의미인지는 연도 잘 알았다. 그 간청에 따라 다시 먼저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다정하고 부드럽게 입술과 혀끝만을 살금살금 움직였다. 입술이 간지러워 연의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다시.”

응? 하고 되물어 올 때 연이 또 입을 맞추었다. 모란이 입술이며 혀를 세게 빨아 대다가 귀와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상대가 좋아 견딜 수 없었다. 가슴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넘치다 못해 줄줄 흘러 온몸을 적셨다. 적시다 못해 잠겼다. 그게 마치 구름에 잠긴 듯하니 다른 무엇보다도 이게 바로 운우지락이 아니고 무엇일까.

모란은 이내 목적을 바꾸었다. 연의 손을 들어 올려 자근자근 손마디며 손톱 끝에 자잘하게 입술을 문지르는 것이다. 눈이 마주치고 손이 마주친다. 서로의 시선이 섞이고 체온을 나누었다. 숨결이 피부 위를 간질였다.

그 모습에 연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확신이 고개를 들었다. 모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덜 자란 날개가 어설프게 홰를 치듯 뛰었다. 연은 더는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눌러 왔던, 모른 척했던, 가끔은 부정하고 싶고 혹은 긍정하고 싶던 마음을 내어놓고 말았다.

“모란, 당신.”

그렇게 입을 열고는 연이 떨리는 숨을 쉬었다. 모란이 고개를 들어 강렬하게 응시해 왔다. 연이 입술을 핥았다. 깨물고, 눈을 깜박였다.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연모하고 있어, 모란.”

연의 심장이 펄떡펄떡, 날갯짓같이 뛰었다. 연모하고 있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고백했다. 연의 고백에 모란이 멈칫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목울대를 울리며 연이 모란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눈을 깜박이며 한참을 그러고 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연아, 나는…….”

연의 손을 쥐고 있던 모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돌연 계곡에 흐르던 별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연의 심장도 까마득하게 곤두박질쳤다. 손이 떨렸다. 나는 되지도 않는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모란이 젠장, 하는 소리를 낼 때 연은 영락없는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만치서 바스락거리며 붉은 불빛이 어른거렸다. 애타게 제 이름을 외쳐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도 들렸다. 부끄러움에 연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빛이 사라지자 용기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눈을 질끈 감은 연이 후회하며 모란의 손을 밀어 내듯 놓았다.

“연아!”

모란이 피워 놓은 모닥불을 발견한 연오가 단숨에 경공으로 계곡을 넘어 건너왔다. 그 와중에 연은 모란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게 퍽 신경 쓰였다. 연오는 감격으로 신음하며 덥석 제 동생을 끌어안았다가 얼굴이며 몸을 더듬거리고 여기저기를 살폈다. 눈과 손이 분주했다.

“불빛이 반짝거리기에 반딧불인가 하였는데 네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어디 몸은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형님이야말로 괜찮으신지요? 갑자기 지반이 무너지는 바람에…….”

연오는 연의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동생이 살아 있다는 감격에 다시 한번 꽉 끌어안을 따름이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도착했다. 제갈우와 몇몇 무사들이었다. 제갈우가 아주 안도한 얼굴을 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네, 연오 동생. 나무에 걸려 있는 마차를 보고 얼마나 다행이라고 여겼는지 몰라. 운이 좋았지.”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연이 사과하자 제갈우가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죄송하기는, 오히려 내 쪽이 미안하지. 진법 관리를 제대로 못해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는가. 정말 하늘이 도운 셈이네.”

그렇게 말하면서 제갈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흐르는 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연과 백모란 둘 중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피워져 있는 모닥불과 나름대로 잘 만들어 둔 침상을 향했다. 마지막으로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기이하군. 정말 운이 좋은 것인가?’

제갈우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마차 사고 이후로 혹시나 몰라 남궁세가에서 온 일행들은 근처 마을로 돌려보내졌다. 길이 망가졌다는 걸 핑계로 객잔에서 극진히 대접을 하고 있는 중이다. 대체 누가 숨은 고수인지를 알 수 없으니 진땀이 다 났다. 그런데 그 절벽에서 추락한 연과 모란이 거의 상처도 없이 멀쩡히 살아 있다?

더군다나 바위 협곡은 혹시나 살아남았을지 모를 침입자를 대비하여 정기적으로 둘러보는 곳이었다. 지난번 확인했을 때만 해도 마차가 걸려 있던 나무는 없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나무가 자라날 수가 있었을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찌 된 일이며, 과연 후처리를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제갈우는 일단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자, 일단은 세가로 돌아가도록 하세. 다들 지쳤을 테니.”

“아, 제가 발목을 다쳐서.”

부러 모란에게서 시선을 비껴 내며 연이 말을 꺼내자 동생을 도닥이고 있던 연오가 화들짝 놀랐다.

“괜찮다 하지 않았어? 어딜 어떻게 다쳤느냐?”

“별것은 아닙니다. 그저 발목을 좀 삐었을 뿐이라…….”

연은 귀가 화끈화끈했다. 연오를 다시 만나 좋기는 하였으나 아까 모란의 말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연아, 나는…….’

이다음에는 무얼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필 이때 사람들이 찾아오다니 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대답을 듣지 못해 다행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다행히도 둘의 부상을 예상하고 움직인 사람들이기에 들것도 있었다. 발목에 부상이 있으니 연은 들것에 실려 제갈세가에 가게 되었다. 들것이라고는 해도 지게에 가까운 물건이라 제 모양새가 민망하기도 했다. 모란에게 업혀 다녔던 걸 떠올리며 저를 지고 가는 사람이 힘들겠구나 했는데 뜻밖에도 가는 길이 평탄했다. 제갈세가에서만 공유하는 일종의 지름길인 모양이다.

‘거절인가? 아니면 승낙인가. 그도 아니면…….’

도착하면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생각하는데 어쩐지 점점 연과 모란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연오와 제갈우가 시선을 교환하나 싶더니 어째 모란과 연 사이에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니, 분명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제갈세가에 도착했을 때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갈우가 몇 마디 나누더니 모란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다. 연이 당황했다.

“형님? 모란은 왜 데려갑니까?”

“별것 아니다. 그저 의례적인 절차일 뿐이야.”

의례적인 절차를, 왜 모란에게만 하고 저에게는 하질 않는가? 연은 모란이 그 진법을 작동하게 만든 원인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연오가 연의 어깨를 다독였다.

“걱정 말아라. 별일은 없을 테니. 너도 나도 오래 전부터 모란을 알고 지내지 않았느냐?”

아니, 연은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일 중 하나가 모란을 걱정하는 게 아닐까? 그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제갈세가에서라고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왜 하필 그때 그 순간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몹시도 애가 타는 것이었다. 무슨 대답이라도 들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을.

“연아! 무사했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금려 누님.”

저를 부르는 이름에 뒤를 돌아보니 제갈금려가 있었다. 차림새가 편한 옷을 입은 걸 보니 마찬가지로 연을 찾아 산을 찾아 헤맸음이 틀림없었다. 금려가 안도한 얼굴로 다가와 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역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연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원래라면 연오의 약혼자라는 이유로 일 년에 서너 번은 꼬박꼬박 봤을 터다. 그러나 모란의 몸에 들어간 후로는 십 년 만에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아 몹시 초췌하구나.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단다. 어서 들어와 치료를 받고 쉬렴. 식사도 제대로 못 했겠어.”

연은 양심이 아팠다. 연오와 금려가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고기도 구워 먹고 과일도 먹으며 잘 먹고 잘 지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려는 제갈세가의 의원을 불렀다. 발목을 내보였을 때 연이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삔 정도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멍과 부어오른 정도가 심했다. 그는 침을 맞고 부목을 감았다. 금려가 연을 도닥였다.

“그래도 삔 정도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구나.”

연오와 금려를 양옆에 끼고 걱정을 받고 있으려니 연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옆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이것 좀 먹거라 저것 좀 먹거라 하는 것도 미칠 노릇이었다. 이미 저녁을 먹어 배부른 상태였던 연은 그저 괴로웠다. 더군다나 자신은 지금 모란의 대답을 듣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지 않은가. 일각 정도만 더 늦게 도착하시지, 하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는 죄책감이 들어 어깨가 미묘하게 처졌다.

“저, 금려 누님. 모란은 언제까지 그 의례적인 절차를 받게 되는 겁니까?”

“글쎄, 며칠 정도가 걸리지 않을까. 별것 아니니 큰 걱정은 말거라. 그보다 왜 더 먹지 않고. 사내가 이리도 소식을 해서야.”

배불러 죽을 지경이었으나 그리 말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연이 겨우 한 입 더 먹고는 피곤하여 입맛이 없다며 겨우 거절했다. 금려는 마지못해 시비에게 식사를 무르게 했다.

“그래, 마차가 떨어질 적에 어땠는지 기억이 나느냐?”

금려의 물음에 연이 속으로 움찔했다. 이건 어떤 의미로 묻는 것일까? 아무리 상대가 금려라 해도 제갈세가란 곳이 어떤지 보고 듣고 나니 제갈이란 성씨를 단 사람들이 모두 무슨 의도를 가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모란과 증언이 엇갈릴까 연은 사전에 입을 맞춘 대로 말했다.

“지반이 무너져 마차가 기울어 떨어졌던 게 기억납니다. 중간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마차가 나무에 걸려 있었습니다. 발목을 다친 상태라 모란이 저를 업어 주었고요.”

연의 설명에 금려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더는 묻지 않았다.

“마차 추락이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닐 테니 기억을 못 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지는구나. 그래, 푹 쉬거라.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고.”

“네, 감사합니다.”

금려와 연오가 다정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자 연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혼인 후부터는 금려 누님을 형수님이라고 불러야겠구나. 금려가 세가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연은 혹시나 하여 밤늦게까지 모란을 기다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모란은 없었다. 일부러 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지척에 있어 오지 못하는 건지 연은 알 수가 없었다. 제갈세가에서 모란을 이렇게 따로 데려갈 정도면 계속 감시를 하겠지, 하면서도 동시에 혹시나 모란이 저를 피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연은 다음 날에는 모란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모란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연이 참지 못하고 연오를 찾아가니 당연하게도 금려가 곁에 함께 있었다.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연이 침착하게 따졌다. 물론 모란이 진법을 작동시킨 원인인 건 맞지만 양심은 잠깐 버려두었다.

“아무리 의례적인 절차라 해도 이상합니다. 왜 저는 모란을 죄인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 형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차가 추락한 건 진법에 이상이 있어서가 아닙니까? 모란은 저를 도와주고 치료해 준 은인입니다.”

“오해를 하고 있구나.”

동생이 구사일생한 것에 아직도 크게 영향을 받은 연오는 연이 평소보다 다소 무례한 태도를 보임에도 유독 다정하게 말했다.

“이는 모란 스스로의 의지다.”

“모란, 스스로의…… 의지라고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오해가 있다면 확실히 풀고 싶다고 하더구나.”

연은 힘이 쭉 빠졌다. 모란 스스로의 의지라고 함은 오해를 풀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쩐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연오와 금려가 별일 없을 것이라 했으나 연에게는 이미 별일이 생긴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은 이틀 뒤에 제갈세가를 출발하기로 하였다. 본래는 넉넉하게 사흘을 쉬고 갔을 테지만, 마차가 절벽에 추락한 일로 일정에 차질이 생겨 버렸다. 길일로 잡아 놓은 혼인 일정을 미룰 수가 없으니 서둘러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출발하는 날까지도 모란은 일행에 합류하지 않았다. 연이 시무룩 기가 죽은 것을 보고 연오는 며칠 뒤에는 모란도 올 것이라 다독였다. 물론 연은 그것 때문에 기가 죽은 게 아니었다.

고백했다가 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연도 매 시간이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대체로 이런 생각들이었다.

망할 별빛들, 하면서도 그래도 별이 흐르던 계곡이 넋 나갈 정도로 어여쁘기는 하였지……. 또 모란이 그토록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쪽쪽거렸으니 누구라도 오해할 만하지 않느냐고 분명치도 않은 어느 상대를 향해 따졌다. 그러다 오해가 아니라 정말 모란이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겠냐고 합리화해 보는 것이다.

아무튼 융중산에서 내려올 적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마차 또한 혹시나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느릿느릿 굴러 남궁세가의 귀빈들이 머물고 있는 고급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에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한위는 연을 보자마자 엉엉 울었다. 미리 전서구로 연이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어도 실제로 모습을 보니 감정이 북받친 모양이었다. 우는 와중에도 무어라 말을 하기는 하는데 대체로 연 형님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연오 형님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차라는 단어도 몇 번 나왔다.

절벽에서 추락한 후 정말 편하게 지냈기에, 연의 양심은 다시 푹 찔렸다. 울음을 겨우 멎어 갈 즈음에 한위가 울먹울먹 말했다.

“저는 여기가 싫어요.”

한위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던 연이 한위야, 하고 나무라며 근처에 있던 금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금려는 전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도리어 한위를 잘 달랬다. 그럼에도 잔뜩 풀 죽은 얼굴이라 연은 마차 여행이 오히려 한위에게 안 좋은 기억이 되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들었다.

돌아갈 때에 연은 한위와 주강과 같은 마차를 탔다. 예물을 두고 가는 대신 제갈세가의 귀빈을 싣고 가기에 올 때와 갈 때 모두 마차의 수는 비슷했다. 다만 제갈세가와 남궁세가의 깃발이 함께 나부낀다는 게 달랐다.

연은 깃발을 보며 제 마음도 저렇게 나부끼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나마 괜찮은 점이라면 주강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해 준 것 정도였다. 주강과 아주 몹쓸 사이가 되지는 않았구나 싶었던 연이 고맙구나 답해 주었다.

참으로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는 귀환 길이었다. 겨우겨우 세가에 도착하니 모란이 그들이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출발했다는 전서구가 도착해 있었다. 혹시나 하고 연은 또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러나 모란은 그날 밤도 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지 않는 건지, 오지 못하는 건지 그것을 알지를 못하니 기분만 자꾸 축축 처졌다. 밤이 깊도록 기다리던 연이 호롱불을 끄고 마침내 침상에 누웠다.

마음이 심란하니 잠자리도 심란하였다. 대충 나뭇잎 깔고 옷 덮어 만든 침상에서는 그리도 잠이 잘 오더니 왜 이러는가 싶어 연은 자존심도 상했다. 결국 얼마 안 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투를 걸치고 나오자 밤바람이 쌀쌀했다.

“도련님? 어쩐 일이십니까?”

화정당 정문을 지키던 무사가 의아하게 물었다. 보통 이 시간대에는 깊이 자고 있는 편이니 의아할 법도 했다. 연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거닐다 자려고 한다. 신경 쓰지 말거라.”

“예, 알겠습니다.”

자박자박 걸어 화정당 뒤뜰로 가니 달빛에 연못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나무를 보니 가지가 앙상하여 아직 잎도 꽃도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데 꽃이 없는 걸 보니 연은 더욱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한참을 연못 주위를 거닐다가 한숨을 쉰 연이 발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등골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뭐……지?”

분명 느껴 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연은 잠깐 비틀거리다 일단 화정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침소에 들어가 문을 탁 닫기가 무섭게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무거운 것에 온몸이 짓눌리는 듯했다. 침소 안의 자개장이나 도자기가 웅웅 진동하며 떨렸다.

“모, 란?”

저도 모르게 연이 중얼거렸다. 다시 모란, 하고 이름을 낸 순간이었다. 무언가 퍽, 하고 연의 등을 무겁게 후려갈겼다. 연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갑자기 묵직한 것이 몸에 얹힌 탓이었다. 다행히도 허공을 징징 울리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기묘한 감각은 사라졌다.

“이, 이게 뭐…….”

몸에 얹힌 무게감에, 연은 처음에 모란인가 생각했지만 곧 아니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쿨럭쿨럭 기침하며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의 모양새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특히 바닥에 아무렇게나 길게 널브러진 옷자락이 그러했다. 최근 들어 모란의 근처에서 휘날리곤 하던 옷자락이 아닌가.

연이 입을 딱 벌리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아주 붉었고 피부는 창백했다. 옷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귀는 뾰족했다. 연신 기침하며 피를 뱉던 상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연은 헉 숨을 집어삼켰다. 검은자와 흰자 구분 없이 눈이 까맣기만 하였던 것이다.

“모, 모란……”

연을 향해 옷자락을 그러쥔 상대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모란 한 단어만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침하던 상대는 기어이 연의 옷자락에 피를 한 바가지 흘려 내고 말았다. 문제는 피가, 피이되 붉은 게 아니라 은색으로 빛나는 피였다. 연의 옷 앞자락이 온통 은빛으로 반짝반짝 눈이 부시게 빛났다.

연이 얼어붙었다. 이것, 피가 맞기는 하나?

“으, 으으…….”

신음하던 이는 다시 모란, 하고 뭐라 부르고는 풀썩 쓰러지며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연이 미간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도 기절해 버리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환자를 보고 깨어난 의원으로서의 습관이 간신히 그의 정신줄을 붙들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새벽이 지나가고 해가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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