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七章 : 사냥대회(二)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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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대회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쨍쨍했다. 대회는 안휘성 황산 부근 어느 숲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사냥대회를 위해 오래전부터 조성된, 역사가 깊은 숲이다. 남궁세가의 소유로, 걸어서 둘러보는데 한 시진이나 걸릴 정도였으며 풀숲과 나무가 울창했다. 이 숲 안에 일결월산토(一䟾越山兎)를 풀어 두고 잡아 오는 게 바로 남궁세가 사냥대회의 방식이다.

“이게 일결월산토란다.”

한위가 신기한 얼굴로 토끼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목에 붉은 공단 목줄을 두른 토끼들이 시큰둥하게 발로 몸을 팍팍 긁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 놓일 정도로 앙증맞고 귀여운 체구이지만 놀랍도록 빠르고 뛰기도 오래 뛰었다. 껑충 뛰면 한 번에 산도 넘는다는 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세가에서는 평소에 온갖 좋은 것들을 주어 가며 공들여 일결월산토들을 관리했다. 사냥대회를 위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결월산토가 백 년을 살면 영물이 된다는 말이 있지.”

그리 말하며 연은 일전에 산에서 보았던 그 사슴을 떠올렸다. 정말 경이롭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이런 작은 토끼도 오래 살면 그런 위압감을 풍기게 되는 걸까? 한위가 눈을 반짝거리며 일결월산토를 관리하는 무사에게 물었다.

“정말 백 년을 살면 영물이 되나요?”

“글쎄요, 도련님. 직접 제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꽤 오래 산 녀석들은 종종 신묘하게도 우리를 탈출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사가 넉살 좋게도 대답했다. 일결월산토는 오래 살수록 그 간이 진귀한 약효를 발휘한다. 동일한 크기의 금과 같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오래 살면 우리를 탈출한다기보다는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다는 게 정확한 말일 터였다.

그만큼 이 사냥대회에서는 토끼들을 상처 없이 잡아 와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토끼들도 손을 워낙 타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나서 깡충깡충 잘도 뛰어다녔다. 사냥대회 후에는 식욕이 왕성해지고 새끼도 많이 낳는다고 하니 세가에서는 일석이조였다.

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사람들마다 낯이 익었다. 이 대회는 소룡대회만큼 다른 이들의 참여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상당수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는 안휘성에서 제법 날고 긴다 하는 고수들이었다. 우승 상품이 제법 쏠쏠하니 실력에 자신 있는 자들은 솔깃할 법했다. 우승자는 잡은 토끼 중 가장 좋은 녀석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저도 잡을 수 있을까요?”

“음…… 아마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 마리 정도라면……. 일결월산토는 이 대회를 위해 키워지는 만큼 평소에 훈련을 받는다. 이 녀석들은 사람을 피해 도망 다니게끔 훈련되어 있었다. 영리하기도 해서 한 번도 사람에게 잡히지 않아야 훈련 뒤 간식을 받는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보통 우승자가 다섯 마리 정도 잡으니, 한위라면…… 잘하면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서로 간에 방해하는 것도 허용되니 방해 없이 혼자서 잡는다는 가정하에.

“주강 형님과 같이 사냥을 다니기로 했어요.”

“주강이라면 확실히 토끼를 많이 잡을 수 있을 테지.”

한위에게 한두 마리 정도는 줄지도 몰랐다. 그도 이 사냥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으니 일결월산토를 잡는 방식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이 영명을 바라보았다. 이 사냥대회에는 항상 영명이 출전하고는 했다. 그는 특별히 사냥과 추적에 용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남궁세가의 가주임을 의미하는 두건이 기세등등하게 매여 있었다.

영명에게 향하는 한위의 얼굴이 다소 시무룩해졌다. 숲속에서 영명과 마주하는 걸 상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올해는 가주가 출전하니 연오 형님은 자리에 남아 계시겠구나.”

“연오 형님은 안 나가시나요?”

한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냥대회는 가주 아니면 소가주가 나가게 되어 있는데, 둘 다 자리를 비우는 법은 없었다.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기에 책임자가 있어야 했다.

한위는 갈팡질팡하는 듯했으나 이내 주먹을 쥐었다. 소룡대회에서 우승한 뒤 한위는 전처럼 영명을 그다지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연이 쓴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당과를 꺼내 내밀었다. 연에게 간식을 받는 것에 익숙한 한위가 납죽 당과를 받아먹었다. 냠냠 먹던 그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였다.

“맛이 평소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사 와서 그런 모양이구나. 참, 마차 안 바닥에 작은 꾸러미가 있는데 거기에 내 약이 있으니 가져와 주겠느냐? 마차가 너무 먼 곳에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한위가 곧장 마차로 달려갔다. 사냥대회에 올 때 연과 같은 마차를 타고 와 헷갈릴 수는 없을 것이다. 연이 한위를 바라보는 동안 같이 온 모란이 옆으로 다가왔다.

“날이 좀 쌀쌀하군. 마차 안에 있을래?”

모란이 제게 마차 안에 있기를 권하는 이유가 날이 쌀쌀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연은 잘 알았다. 고개를 젓자 모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주위를 길게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사냥대회 참가자가 많았다.

연이 모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강이 다가왔다.

“연 도련님.”

고개를 숙인 주강은 평소와는 좀 다른 차림새였다. 세가의 무사로 지낼 때의 복식이라기보다는 사냥꾼에 가까웠다. 오늘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가 한위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위 도련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 두고 온 것이 있어 마차에 물건을 찾으러 갔는데……. 무슨 일인지 아직까지 돌아오지를 않네. 마차에 가서 무얼 하나 좀 봐 주겠어?”

고개를 끄덕인 주강이 마차로 향했다. 연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연오에게 향했다. 연오는 이것저것 지시를 하느라 바빴다. 햇빛이 눈부셔 손 그늘을 만들고 있던 그가 연을 보고는 반갑게 손짓하였다.

“연아, 날이 추우니 이리 와서 햇볕이라도 좀 쬐고 있거라. 볕이 좋구나. 항상 손발이 차니 몸을 따뜻하게 하여야지.”

오늘도 연오가 연을 보자마자 건강에 관련한 잔소리부터 했다. 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몰래 모란을 발로 툭 쳤다. 방관하고 있던 모란이 그제야 개입했다.

“요즘 도련님 몸 상태가 전에 없이 아주 괜찮습니다.”

“그래?”

연오가 반색했다. 그가 연의 손을 주물럭거려 보더니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전에는 얼음장 같더니 이제는 미지근한 정도가 되었구나.”

그가 모란에게 ‘자네 정말 마음에 드는군!’ 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때까지 연을 맡았던 의원들이 별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근본적인 원인도 몰랐으니 치료를 할 수가 있었겠는가? 물론 원인을 알아도 치료가 불가능했겠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무엇이든지 내줄 테니.”

모란이 짐짓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명이 불러 연오가 멀어지자 연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연오의 태도를 보니 모란에게 이만저만 해 준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간 형님에게 얼마나 받았어?”

“받을 수 있는 만큼?”

모란이 히죽 웃었다. 연은 뭐라고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도 치료를 해 주는 게 맞기는 했고, 게다가 모란에게 좀 내준다 하여 빈궁해질 남궁세가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연의 돈도 아니었으니…….

연은 숲 근처에 쳐 놓은 막사에 앉아 사냥대회가 준비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결월산토가 들어 있는 나무 우리가 숲 근처로 이동하는 걸 눈으로 좇고 있는데 모란이 옆에 앉았다. 손에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먹거리가 들려 있었다. 연은 별생각 없이 모란이 내민 찐빵을 받아먹었다. 모란이 풍경을 구경하는 것처럼 주위를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꽤 수가 많네.”

“그래?”

“음, 그래도 예상한 대로 상대는 안 되겠군. 아무리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말이 있지 않아?”

“그렇지.”

남들이 듣기에는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둘이 주고받았다. 연은 마치 모란과 있는 이 자리만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슬쩍 모란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무인들이 사냥대회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돈 자랑이지.’

사냥대회는 안휘성에 남궁세가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친선 대회였다. 때문에 세가의 온갖 가깝고 먼 친인척들과 더불어 남궁세가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금도 연오와 영명에게 어떻게라도 말을 걸기 위해 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은 자신이 세가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위치인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연에게도 다가오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물리칠 수 있었다. 실은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지만.

연오의 말대로 얼음장 같던 손발도 요즘에는 미지근한 정도였고 창백하던 얼굴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답답하던 가슴도 많이 좋아졌고 숨도 덜 차고……. 하지만 몸이 괜찮아졌다고 한들 초조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한참 대회 준비가 진행 중인 숲만 바라보았다. 모란은 한가하게 옆에서 귤이나 까먹고 있었는데, 도리어 그게 연의 마음을 다소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귤이 좀 시긴 한데 맛있네.”

그렇게 말하며 모란이 자연스럽게 연의 손 위에 귤을 올려 주었다. 모란으로 살 적에 이웃 중에서 유독 먹을 것 나눠 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천성이 그랬다. 그러나 모란이 자신에게 먹을 걸 나눠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유형은 아닌 듯한데.

“이건 달다.”

모란이 이번에는 귤을 반 쪼개어 나누어 주었다. 아무렴 어떠랴. 연은 퍽 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모란이 주는 대로 날름날름 받아먹고 있는데,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연오가 묘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연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뭔가 말하려는 듯했으나 누군가에게 바로 불려 가고 말았다. 연이 미간을 접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던 거지?

반 시진쯤 기다리자 드디어 사냥대회가 시작했다. 연오가 임의로 마련된 단상에 올랐다. 대회의 상품 설명과 이런저런 사냥 성공 기원을 하기 위해서였다. 공력이 담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먼저 세가의 사냥대회에 참가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세가의 소가주로서 연오가 참가자들에게 말하는 모습을 보다 연이 조금 의아해했다. 왜 올해는 영명이 연설을 하지 않는 것일까? 매 사냥대회 때마다 영명은 빠지지 않고 개최 연설을 해 왔다. 그러나 올해는 어째서 연오에게 맡겼을까?

‘본격적으로 형님에게 세가 일을 넘겨주기 위해서인가? 하지만 왜?’

아직 연오가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에는 일러도 한참 일렀다. 영명을 보니 그는 연오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이게 바로 부자지간이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둘의 모습을 보며 연은 얼마 전 모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꽃이 피는 뿔을 가진 영물과 마주했던 날의 대화다.

한위가 남궁영명에게 복수하고자 한다면, 하는 가정으로 입을 연 모란은 이어 말했다.

-세가에 남궁영명을 죽이려는 자가 있어. 내가 알기로는 오래되고 끈질긴 원한이지.

연은 모란의 말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영명은 여기저기에 적이 많았다. 당장 세가 내에만 하더라도 그를 싫어하는 자가 얼마나 많던가? 왕장호조차 그 외에 영명을 죽이고자 하는 다른 동지가 있다고 언급했을 정도니…….

그러나 싫어하는 것과 죽이려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모란의 뉘앙스는 마치 한위가 영명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과 한위가 가주에게 복수한다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야?

-왜 영명 그자가 그토록 그 꼬마를 못살게 구나 의아한 적 없었어?

당연히 있었다. 왜 그렇게 한위를 괴롭히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그리 싫으면 아예 입적도 하지 않으면 되었을 것을 어찌하여 굳이 세가 안에 들여놓았는지……. 연으로서는 그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남궁영명은 한위의 모친을 죽였어. 자신의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직접 살수에게 살인 청부를 했더군. 생각해 봐. 그저 기루에서 일할 뿐인 하녀를 살수에게 살인 청부까지 해 가며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연의 얼굴이 굳었다. 모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명의 행동은 이상한 일이었다. 밖에서 가진 자식이 제법 되긴 하나 영명은 그걸 흠결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연이 한숨을 쉬었다.

-엮이지 말아야 할 사람과, 엮였던 거군.

-그래. 절대 엮이면 안 될 사람과 엮였던 것이지.

남궁영명의 적은 세가의 적이요, 세가의 적 또한 영명의 적이었다. 살인 청부를 하여 죽일 정도로 엮이면 안 되는 자가 대체 누구인가? 세가의 적일 터였다. 후보를 떠올려 본 연이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모란이 대답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연은 말이 없었다. 분명 한위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영명을 죽도록 미워할 수도 있었다. 그럴 만도 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말했듯이 미워하는 것과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달랐다. 직접 행동에 옮길 만한 여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연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완전히 굳은 상태였다.

-그 말대로라면 가주를 죽이려는 자는…….

한위와 관계가 있으면서도 영명과 척을 진 자. 세가를 적대하는 집단에 소속된 자. 오랜 원한을 지닌 자. 믿을 수가 없어 연이 입을 다시 다물었다. 모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적기인 행사가 하나 있지.

크게 금속이 울리는 소리에 연의 회상은 거기서 멈추었다. 사냥대회를 시작하는 징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일결월산토를 관리하는 무사들이 숲 안에 토끼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훈련받은 토끼들은 쏜살같이 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치 빛과 같은 속도였다.

‘만약 가주를 죽이려고 한다면 사냥대회가 가장 좋은 시기다.’

사냥대회가 진행되는 숲은 넓고 울창했다. 일부러 토끼를 잡기 어렵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영명은 항상 혼자 사냥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가주는 우승자 후보에서 제외지만, 그래도 우승자보다 더 많은 토끼를 잡아다 저력을 과시해야 가주의 면이 살았다. 즉 이번 사냥대회는 영명이 유일하게 혼자 있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영명을 죽이고자 할 때 운과 실력이 따라 준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연이 주먹을 쥐었다. 그는 제가 영명이 죽는 걸 원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영명이 죽는다 하여 슬플 것 같지는 않았다.

제 아버지가 저지른 일은 실로 끔찍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와 자신이 혈육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아버지란 존재인 것이……. 이따금 그래도 아들이라고 연을 신경 쓰곤 했던 게 떠오르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 일이 벌어지겠지.”

“그렇겠지.”

연이 입을 꾹 다물자 모란이 마치 마음을 읽은 듯 툭툭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에 몸에서 힘이 풀렸다. 연은 이제 자신이 모란을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게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퍽 안도가 되는 것이다.

다시 징이 크게 한 번 울렸다. 영명을 비롯하여 참가자들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모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 같은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가볍게 손 좀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고개를 끄덕거리자 모란이 저벅저벅 걸어 마차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아마도 지금쯤에는 순간이동으로 숲에 가 있을 터였다. 모란이 세니 다치거나 죽을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겠다 싶어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연이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연오였다.

“왜 그리 놀라느냐?”

“아,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말로 이번에는 연오가 여기에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도 사냥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면 이리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했을 터. 연오는 연이 쥐고 있는 귤 한 알을 보더니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요즘에는 모란과 잘 지내서 다행이구나. 전에는 그리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연은 그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연오에게 무어라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전에는 같이 잘 지내지 않았느냐?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십 년 만에나마 화해하였으니 다행이지. 오늘 너를 챙겨 주는 걸 보니 안심이다. 게다가 의원이라고도 하니.”

십 년 만에 화해……? 연이 고개를 들었다. 전에는 같이 잘 지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가 알기로는 모란과는 처음 만난 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열 살…… 열 살일 적에…….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열 살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에는, 같이 잘 지냈다고요?”

“그래. 너무 어렸을 적의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나 보구나. 종종 내가 너희 둘과 함께 놀아 주곤 하였는데. 몇 번은 한위도 같이 데려와서…….”

연오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예전의 추억을 상상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연은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 한위가 무어라 하였더라?

-아주 어릴 적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종종 저와 함께 놀아 주셨지요. ……그때 모란 형님도, 연오 형님도 같이 즐겁게 놀아 주셨어요. 아프신 후로는 밖에 잘 나올 수 없으셨던 것뿐임을 알아요.

문득 드는 위화감에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적의 일이야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열 살 전에 모란과 함께 지낸 건 정말이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그 부분만 유별나게 누가 도려내어 훔쳐 간 것만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하긴, 열 살에 크게 앓았으니 어릴 적 기억이 없을 수도 있지.’

연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지웠다. 어린아이들은 곧잘 열병을 내며 앓고는 했는데, 그러다가 죽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운 좋아 살아난다 하여도 귀와 눈이 멀거나 머리가 나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에 비하면 어릴 적 기억이 사라지는 정도는 무난한 증상이다.

돌연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아니, 저기 저거 연기 아닌가?”

“설마 불이 난 거야?”

곧 불이다! 하고 누군가가 외쳤다. 연오가 굳은 낯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회가 일어나기 전 몇 번이나 점검을 하였는데 불이 나다니 아무래도 불길하였다. 다들 급히 근처 냇가나 강가에서 물을 퍼 나를 만한 것을 찾았다. 숲에 들어간 사람들이 들리도록 경종을 크게 울리는 찰나, 안에서 누가 팔을 움켜쥐고는 비틀거리며 달려 나왔다.

“스, 습격입니다! 소가주님! 안에, 괴, 괴한들이 습격을……!”

남자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연오가 곧장 검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예상한 대로 사냥대회에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연오가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연아, 넌 한위와 함께 마차 안에 가 있거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은 입맛이 썼다. 일이 터지면 형님이나 세가의 다른 무사들은 검을 빼어 들고 달려가는데, 자신은 이렇게 보호받아야 할 입장이라……. 허리에 찬 검이 다 무색했다. 이럴 때면 그는 차라리 무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곤 했다. 무림에서 가장 강한 검이라고들 부르는 남궁세가라서 더욱 그렇다.

‘하다못해 이 일로 다친 사람이 생겨도 치료조차 할 수 없지. 의원이라는 걸 숨기고 있으니.’

터벅터벅 걸어가니 모란이 마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연이 힐끗 숲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풀풀 치솟는 중이었다.

“모란 당신이 불 지른 거야?”

“뭐, 무슨 일이 났다는 걸 보여 주긴 해야 할 것 같아서. 기습당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혹시 몰라 돌아다니고 있던 녀석 중 한 명도 좀 손봐 주었지. 불은 일각쯤 후면 알아서 꺼질 테니 걱정 마.”

그리 말하며 모란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연이 막 들어가려는 찰나, 돌연 모란이 그를 세게 밀쳤다. 땅에 나동그라졌으나 불평은 할 수 없었다. 검기를 두른 검이 무서운 속도로 문밖으로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검기를 둘렀다는 건 어지간한 수준을 넘은 실력자라는 이야기였다. 모란도 이번에는 손으로 막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쯧 혀를 찼다.

“설마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삔 것 같았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모란이 힐끔 연을 보더니 손을 뻗었다. 이내 검기가 희미해지더니 튀어나왔던 검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다친 짐승이 내는 듯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금니를 악문 듯한 목소리가 짓이겨지는 듯 흘러나왔다.

“어째서…….”

천천히 마차 앞으로 다가가자 오늘 사냥대회에서 영명을 죽이려고 했던 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래도록 세가에서 인내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자, 능히 그럴 만한 실력자…….

그의 뒤에는 한위가 쓰러져 있었다. 연이 준 당과 속에 수면제가 섞여 있던 탓이었다. 연은 조금이라도 오늘 일에 한위가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일이 잘 풀려서 그저 어릴 적 놀란 기억으로만 남기를…….

상대는 팔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모란의 말로는 마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을 잃도록 마법을 걸어 놓았다고 했으니 그걸 이겨 내기 위해 자해를 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늦었어. 네가 세웠던 계획은 실패했다.”

상대는 말없이 연과 모란을 노려보았다. 이런 모습을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은 내심 주먹을 꾹 쥐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는 살기가 대단했던 탓이다.

그로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을 위해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렸는데 모란이 끼어든 탓에 수포가 되어 버렸다.

무려 삼 년을 과거의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새 신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오 년을 연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인내했다. 그로부터 또 오 년을 오늘 이 대회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기다렸다. 모든 것은 복수를 위해서였다. 자신의 누이의 원한을 갚기 위해……. 영명이 죽여 버린 유일한 혈육의 보복을 위해서.

그는 주강, 이전의 이름은 진위림. 영명의 손에 죽은 누이 진비령의 남동생이자 마교 출신의 무인이었다.

***

진위림은 마교의 총애를 받는 무인이었다.

한때 그들은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이었다. 하나 그런 시간도 잠시, 부모가 산적에게 살해당해 세상에는 진위림과 그의 누이인 진비령만이 남고 말았다.

슬픔 속에서도 어린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였으나 어린아이들이 생존하기란 퍽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그들이 살던 마을에 기근까지 들었다. 하루에 멀건 죽 한 그릇이라도 먹으면 잘 먹은 축에 속할 정도였다.

결국 물도 음식도 없어 나무껍질을 씹다 죽어 가던 남매를 거둔 것이 마교였다. 당시 마교는 고아들을 거두어들여 그들을 위해 충성하는 무인집단을 만들고자 했고, 진위림과 진비령은 그들에게 선택된 것이다.

마교에 들어가고 난 뒤 위림은 실로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을 알려 주면 열을 깨우쳤으니 마교에서는 크게 반길 만한 일이었다. 하나 위림의 누이인 비령에게는 재능과 소질이 없었다. 남보다 배를 노력해도 내공이 잘 모이지 않았고, 무술의 성취 또한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둘은 열심히 노력했다. 자신들을 거두어 주고 밥을 제대로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성인이 되었을 때 비령은 안휘성의 첩자로 보내졌다. 세상에 누이 외에는 소중한 것이 없었던 위림에게는 서글픈 일이었다. 누이를 만나고 싶어도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위림에게 마교에서는 좀 더 높은 직위에 오르면 비령을 다시 마교 본산으로 불러 주겠노라 약속했다.

위림은 더 노력했다. 더 고강해져 더 높은 직위에 올라 자신의 누이와 다시 함께 살고 싶었다. 만나지 못하는 대신 둘은 꾸준하게 서찰을 주고받았다. 마교에서 훈련을 받으며 힘들어했던 누이는 안휘성에서의 첩자 생활을 마음에 들어 했다. 다정한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 안개가 없는 햇살 가득한 마을, 채소며 강아지를 길렀다는 이야기……. 누이가 평범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위림에게는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비령으로부터 오는 서찰에 어느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어느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위림은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제 누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마교에서도 비령은 사실상 첩자보다는 위림의 충성을 이끌어 내는 수단이었기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위림은 마교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비령에게서 눈물에 젖은 서찰이 오기 전까지는…….

[위림,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마음이 혼란하고 충격적이구나. 더없는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단다. 나의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다. 눈물로 밤을 지새워도 슬픔과 충격을 이겨 낼 수가 없구나. 이제는 무를 수조차 없다. 모든 게 늦어 버렸어.]

위림의 마음은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까지 그의 누이는 편지에서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위림은 가능한 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누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땐 모든 게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이웃들은 강도가 들어 비령이 죽은 것이라 했다. 돈이며 귀중품을 훔쳐간 데다가 진범도 잡혀서 관아에 넘겨졌다고. 그러나 비령은 십 년을 넘게 마교에 있었던 사람이다. 재능은 없어도 강도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관아에 가니 강도는 이미 처형당한 후였다. 모든 정황이 수상쩍었다.

밤이 되어 위림은 조용히 비령의 집에 숨어들어 갔다. 깊은 슬픔과 분노 속에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방 안을 천천히 거닐다가 어느 기둥 앞에 멈추었다. 둥근 홈이 있었다. 검을 들어 틈에 꽂고 힘을 주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둥글게 말린 서찰이 쏟아졌다. 위림과 비령이 주고받았던 것들이다. 위림은 누이의 서찰을 모아 집을 떠났다.

객잔에 방을 얻은 위림은 호롱불을 켜고 밤새도록 그 안에 들어 있던 서찰들을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위림과 비령 사이에 오간 서찰만이 아니란 걸. 비령은 사랑하던 누군가와도 서찰을 교환했던 것이다. 둘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구구절절 애절하게 표현했다.

위림은 차가운 얼굴로 서찰을 읽어 내렸다. 상대는 서찰을 보내면서 한 번도 제 신분을 밝히지를 않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얼마나 읽었는지 손때가 묻어 낡은 서찰을 낱낱이 살펴보고, 묵 특유의 향과 종이의 질감을 견주어 보았다.

누이는 주고받은 서찰만 남긴 게 아니었다. 꾸준히 쓴 일기 또한 남아 있었는데, 그 안에서 비령은 찬란히 빛나는 해에 그 사람을 비교하곤 했다. 무려 삼 년간의 교제였다. 처음 일이 년 동안 비령은 구름에서 노니는 듯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점차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리 적혀 있었다.

‘영명.’

딱 그리 적혀 있었고, 그 후로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죽었기 때문이다.

영명. 위림이 이를 악물었다. 영명, 이 이름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안휘성에서 영명이란 이름을 가진 자, 이런 고급스러운 서찰을 쓰면서도 신분을 감춰야 하는 자, 살수를 보내 비령을 처리할 만한 재력을 가진 자.

걷잡을 수 없는 증오가 들불처럼 위림의 전신에 퍼져 나갔다. 위림이 서찰을 구겼다.

-남궁영명!

위림은 마교에 서신을 보냈다. 남궁영명이 비령을 죽였으니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복수를 하겠다, 이미 복수를 다짐한 자신을 막을 것은 죽음밖에는 없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돌아오는 답신은 없었다. 마교는 대신 위림의 패를 돌려주었다. 복수를 막지는 않겠으나 일절 마교와는 관련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위림은 그날 새 신분을 만들었다. 이름은 주강이요 외진 시골에서 올라온 무사다. 영명을 죽이기 전까지 그는 주강이었다. 진위림이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없었다.

위림은, 아니 주강은 삼 년 동안 한미한 문파에 들어가 성장하는 젊은 무사 흉내를 냈다. 삼 년 후에는 안휘성으로 와 세가에서 주최하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남궁세가에서는 젊고 재능이 유망한 무사를 마다않고 받아들였다.

세가에 들어간 뒤 주강은 영명이 어떤 자인지 파악했다. 간교하며 비겁하고 비열한 자였다. 삼 년간 교제한 여인을 비정하게 죽여 버릴 만한 인격의 소유자다. 이런 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싫었으나 그는 인내했다. 당장 목표는 영명의 신의를 얻어 호위무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명은 쉬이 주강을 믿지 않았다.

세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주강은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영명 이 악랄한 자는 사파를 향한 증오를 불태우곤 했다. 그중에서도 마교를 가장 증오하였다. 주강은 몇 번 마교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죽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마교인의 명을 끊어 주었고 때로는 모른 척 몇을 살려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영명을 향한 증오는 끝없이 불타올랐다.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주강은 연오의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오는 어찌 영명의 아래에서 났을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품이 곧았다. 곁에서 지내며, 주강은 그가 영명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남궁가보다는 어미인 황보가의 핏줄을 더 짙게 타고났다. 그러나 그게 주강에게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세가에서 지내며 주강은 다른 자식들도 눈여겨보았다. 남궁영명에게 정식으로 입적된 자식은 총 다섯이다. 다섯 중 연오만이 유달리 뛰어났고, 둘째는 허약하였으며 셋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영명이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라 간주한 주강은 조용히 셋째에 대해 캐 보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셋째 남궁한위는 비령을 꼭 닮아 있었다. 영명과 비령 사이에서 난 자식인 게 틀림없었다.

처음 한위를 본 날 주강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당장이라도 증오스러운 영명의 피를 이은 자식을 베어 없애고 싶어 몸을 떨었다. 그러지 못한 건, 의외로 영명이 한위를 끈질기게 살피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어찌할 수 없으니 그는 한위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고를 가장해 한위를 죽여 없앨 기회를 찾는 건 멈추지 않았다.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비령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다.

계속 연오의 호위무사로 지리멸렬하게 지내던 중, 그의 위치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연오가 주강에게 연의 호위를 맡긴 것이다. 정확히는 호위라기보다 몸 약한 동생의 안위를 맡긴 것에 가까웠다. 이는 연오가 주강을 실로 믿는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맡게 된 남궁연은 형과는 달리 형편없는 자였다.

주강은 곁에 머무르며 연을 관찰했는데, 그는 열 살에 크게 앓고 난 이후로 언행이 거칠었다. 대체로 모란이라는 시종을 향한 폭력이었다. 연이 그럴 때마다 주강은 영명을 떠올렸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지. 주강은 모란을 향한 폭력을 종종 말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모란 또한 한심하게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엾게 생각하기도 했다. 연은 남궁세가의 차남이다. 그가 계속 불러내면 일개 평민의 자식일 뿐인 모란은 그에 따라야만 하는 신세였다.

그렇게 연의 곁에 머무르면서 또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 주강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인내 끝에 얻을 복수의 열매의 맛을 매일같이 상상했다. 다만 그는 모란이 심하게 구타당하고 돌아갈 때면 이따금 부축 정도는 해 주었다. 모란을 향한 일방적인 폭력은 가끔 주강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강이 잠시 안 본 사이 연이 모란을 불러내 또 구타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매우 격분하여 모란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입에서 피가 쏟아져도 멈추지를 않았다. 이러다가 일을 내겠다 싶어 주강이 말리자 어처구니없게도 때리다 지친 연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상한 일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다시 깨어난 연은 전에 비해 얌전해졌다. 더는 모란을 불러내 때리는 일도 없었다. 그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기보다는 마치 촛불이 거의 다 타서 더는 태울 것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뿐이었다면 주강은 그저 무시하고 말았을 터였다.

놀랍게도 연은 어느 순간부터 한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처음 연오로부터 연이 한위를 돌볼 테니 도와 달라는 말을 들을 때 주강은 내심 믿기지가 않았다. 그가 지켜본 연은 한위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기는커녕 아예 한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만났는지, 어느 순간부터 한위가 형님, 형님하며 연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연오에게 그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주강은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연에게 먼저 말을 걸고야 말았다. 도련님, 하고 부르자 연이 뒤를 돌아보는데 마치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연이 한위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니면 한위가 연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둘 중 대체 어느 쪽이 영악하고 비겁한 존재란 말인가?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아 그는 그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뒤로는 무엇보다 쉬웠던 연의 호위 일이 그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한위가 연을 매일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주강은 한위가 찾아올 때마다 검 손잡이에 손을 뻗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했다. 그는 한위의 얼굴에서 영명의 얼굴을 보았다. 비령을 모욕하고 배신하여 살해한 남궁영명, 미치도록 죽이고 싶은 바로 그자의 얼굴을.

한위를 보면 심기를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한위에게서 영명의 모습이 보일 때도 그랬고, 영명이 한위를 냉대하는 걸 볼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점차 한위가 비령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질 때보다, 한위를 향한 영명의 냉대가 비령을 향한 모욕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한위가 비참한 지경일 때는 영명처럼 보였으나, 연과 함께하며 웃을 때는 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주강의 마음이 흔들렸다. 저 아이는 남궁영명의 아들이다. 그 끔찍하고 증오스러운 남궁영명의 자식!

한데 아무리 다잡고 다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한위가 화정당 뒤뜰에서 계절을 잊고 피어난 어리석은 꽃을 따다가 조심스레 제게 내민 순간, 겨우 그것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한위에게서 누이가 보이자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었다.

그 뒤로 주강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한위에게 마음을 내어 주고 말았다. 좀 친해졌다고 한위는 그새 마음을 놓고 다가와 조잘거리며 떠들곤 했다. 많이 외로움을 타는 아이였다. 주강은 그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여러 번 갈등에 흔들렸다.

지금 당장 손을 뻗어 가볍게 혈을 짚기만 해도, 혹은 가볍게 관자놀이나 목을 치기만 해도……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몸으로는 절명하고 말텐데. 몇 번이나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도 한위의 얼굴을 볼 때면 주강은 그리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영명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제 누이의 아들로 느껴졌다. 천진하게 웃는 모습은 도무지 영명에게서 온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목을 조르려고 다가간 손은 어느새 한위의 어깨를 짚거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세가에 연회가 열리는 날이 왔다. 주강은 혹시나 하여 기회를 노려보았다. 연회 경비에 자원해 나가면서 그는 과연 여기서 영명을 죽일 수 있을까 이리저리 견주어 보았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영명의 기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덤벼 보았자 분명 영명을 죽이지 못하고 끝난다. 그가 혼자 있다면 가능성이 있었을 테지만 한 가문의 가주라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주강은 손이 떨리도록 검 손잡이만 꽉 쥐었다. 한위가 연오에게 선물을 주러 갔을 때, 영명이 비령을 언급하는 순간에는 거의 검을 뽑을 뻔하였으나 간신히 참아 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끔찍한 연회가 끝났다.

연회가 끝난 뒤 연은 며칠을 앓아누웠다. 그사이에 한위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주강은 한위에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그 마음에 도리어 모르는 척 일부러 소식을 듣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연이 한위를 찾아갈 때가 되자 주강의 마음속에 들었던 어떤 감정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폐월당에 가면서 그런 주강의 변화를 느꼈던지 연이 입을 열었다.

“한위와는 요즘 친해 보이던데.”

그제야 주강은 자신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더는 전처럼 한위를 죽이고 싶지 않다. 한위가 모욕받고 냉대받으면 분노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더는 그가 영명의 자식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위는, 그의 누이 진비령의 아들이었다…….

“제 조카아이를 닮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답한 뒤 주강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한위는…… 그의 조카였다. 그와 피를 공유하는 혈육이었다. 누이를 살해한 남자의 아들이 아니라, 죽음을 인지도 못 하는 나이에 어미를 잃고 불쌍하게 자라던 그의 조카아이였다.

이때까지 오래도록 정에 굶주린 주강의 무의식이 외쳤다. 저 아이를 보라. 네 누이의 아이를 보아라. 이제 진비령만이 너의 유일한 혈육이 아니다.

한위가 소룡대회에서 세 번의 승리를 하지 못하면 남궁이라는 성씨를 박탈당한다는 소식에 주강은 기쁨을 느꼈다. 그는 상상했다.

한위와 함께 이 세가를 떠나 산다면. 자신이 외숙부임을 알렸을 때 기뻐하는 한위의 얼굴을, 그런 아이를 장성할 때까지 돌보고 보호하는 삶을. 너무나 달게 느껴지는 삶이었다. 동시에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한순간이나마 영명에게 복수하는 것 이외의 삶을 상상해 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위를 가르치는 것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간 무가에서 살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위는 재능이 뛰어났다. 주강은 자신이 위림으로서 마교에서 훈련받을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든 훈련을 지시해도 한위는 이를 악물고 덤비고 싸웠다. 그러니 누이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누이도 재능이 없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혹독한 마교의 훈련을 끝마치곤 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이길 수는 없어서 한위는 소룡대회에서 이길 정도는 되지 못했다. 주강은 확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그리 패배를 확신했는데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위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 주강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을 한위는 해냈다.

한위가 소룡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강의 가슴은 누이를 잃은 뒤 처음으로 기쁨에 벅차올랐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위의 미래를 보았다. 제 조카는 누이의 장점만을 빼닮아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일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강은 현실을 깨달았다. 넌지시 한위에게 저와 같이 세가를 나가 살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한위는 무어라 답을 했던가? 가주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세가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주강에게는 혈육을 무참히 청부 살해한 살인자요, 천하에 다시없을 원수가 한위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아버지이자 가주인 것이다.

그는 다짐을 새로 다졌다. 한위를 위해서라도 영명 그자를 죽여 없애야 한다. 잠시나마 복수를 포기할까 했던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이번에 다가오는 사냥대회는 최적의 기회였다. 오래도록 준비하고 또 준비하지 않았나.

그는 사냥대회를 위해 영명에게 당한 사파의 사람들을 모았다. 녹림십오채에서 살아남은 산적들과 사파에서조차 버려지고 영명에게 당하여 복수를 원하는 자들을…….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주강은 그를 호위하는 척 다가가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하여 방심한 영명을 죽일 작정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거사를 앞둔 채 주강은 마지막으로 한위를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비녀와 제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건넸다. 비녀는 누이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만약 그가 죽음으로 실패하더라도 한위와 그 비녀는 남아 있으리라.

그리한 뒤 주강은 영명을 찾아갔다. 야욕이 있는 척하여 자신이 사냥대회에 공여를 하게 해 달라 부탁했다. 주강이 세가에서 십여 년을 넘게 지냈다는 걸 알기에 영명은 의심 없이 거만하게 굴었다.

-그 자리가 그리도 간절하다 하니 한번 두고 보도록 하지.

영명은 주강을 마음껏 부렸다. 호위무사가 하지 않아도 되는 잡일까지 시켰다. 치욕스러웠으나 그는 묵묵히 참았다. 십 년을 넘게 참았으니 이 짧은 기간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다. 그 결과 사냥대회를 책임지는 자리 중 하나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사냥대회 전 오래도록 숲을 거닐며 지형을 살폈다. 어떻게 하면 영명을 죽일 수 있을까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계산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냥대회 날이 왔다. 남은 것은 영명을 죽이는 일뿐. 영명을 죽이는 일에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어쨌든 한위를 다시 보기란 힘든 일일 터였다.

그는 모든 채비를 마치고 한위를 찾았다. 연에게 물으니 마차에 갔다 하여 마차 안에 들어간 순간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안에 한위가 쓰러져 있었다. 다급히 다가가려 했지만 한위에게 닿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는 잠이 쏟아져 내렸다. 팔에라도 상처를 내어 간신히 깨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누가 제 계획을 눈치챈 것인가? 대체 누가? 어떻게? 쏟아지는 졸음에도 불구하고, 주강은 눈을 부릅뜬 채 버텼다. 그의 뒤에 제 조카가 있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누군가 마차 문을 열자마자 주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검을 휘둘렀다.

뜻밖에도 문을 연 사람은 모란이었다. 또한 곁에 연이 있었다. 연의 얼굴을 볼 적에 그는 자신의 계획이 영락없이 영명에게 들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또한 아니었다. 숲 부근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주강이 몸을 떨었다. 이미 계획이 시작되었고, 시작과 동시에 끝장났다. 그는 지금쯤 영명의 몸에 검을 꽂아 넣었어야 했다.

주강이 격한 감정으로 눈을 파랗게 불태우는 동안 연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다들 숲의 불을 끄느라 급해 아무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이 참착하게 입을 열었다.

“……주강. 이야기 좀 해.”

“한위에게 무슨 짓을 했지?”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얼굴에 연은 입맛이 썼다. 그는 주강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동안 저 분노를 대체 어찌 참고 억눌렀을까? 어떻게 감출 수 있었을까?

“그저 재워 놨을 뿐이야. 나는 한위가 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걸 원하지 않거든. 당신이 이 계획에 개입되었다는 건 아직 아무도 몰라. 그러니 검을 거두어 줘.”

연의 부탁과 동시에 모란은 마차에 걸었던 마법을 해지했다. 돌연 언제 졸렸냐는 듯 정신이 맑아졌다. 그 즉시 주강이 검을 휘둘렀으나 모란에게 가볍게 막혔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모란의 손에 닿은 붉은 검기가 먼지처럼 강제로 흩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이런 수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모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검 좀 내려놓지?”

주강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왜 저런 실력자가 그간 연에게 형편없이 얻어맞고만 있었나? 그간 봐 왔던 게 연기가 아닐까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강자다. 검은 내려놓았으나 만일을 대비해 손잡이는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위림이란 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연이 모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모란은 정말 주강의 정체는 어찌 알았을까? 그간 워낙 놀라운 일들을 해내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세가에 잠입한 주강으로서는 당연히 의문을 가질 법도 했다.

“뭐, 이것저것 조합해 보면 쉬운 일이지. 처음 봤을 때부터 좀 수상쩍었어. 세가 무사란 놈들은 죄다 고만고만한 실력인데 그중 유독 한 명만 실력이 좋잖아. 그런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겨우 무사 따위나 하려고 남궁세가에 들어왔다면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연이 미간을 접었다. 그래서 처음 주강을 보았을 때 ‘자네 그 나이에 꽤나 강하구만?’ 따위의 말을 했던 거군. 너무 껄렁거리는 태도라 그냥 농담인 줄 알았다.

“두 번째는 녹림십오채의 왕자우던가 하는 놈이 저자랑 같은 내공심법을 쓰기에 마교 출신인가 하였고. 거기에 저 꼬마와 기가 많이 닮았으니 혈육이라고 여겼거든. 그래서 뭐, 이것저것 뒤져 보다가 과거의 일을 알게 되었지. 그렇다면 복수를 하기에 사냥대회가 적기라는 것도.”

주강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연은 주강의 심정이 심히 이해가 되었다. 그 누가 맥도 짚어 보지 않고 같은 내공심법을 쓴다는 걸 알아보겠는가. 게다가 말은 한위와 기가 많이 닮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지만, 아마도 근원인가 뭔가를 보았을 터였다. 같은 핏줄을 타고나면 근원도 닮은 거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라도. 세상에 가족이라 하여 기가 많이 닮은 것이 어디 있나. 아무래도 좋았던 주강이 연을 쏘아보았다.

“그래, 어찌 내가 위림이라고 알아보았다 치자. 그렇다면 지금 그런 자도 아비라고 여겨서 날 막으려는 건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꺾을 것이다.”

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딱히 영명이 죽을까 봐 이러는 것이 아니다. 주강이 이 계획을 성공하지 못할 거란 걸 알기에 이러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한위를 위함이다. 모란이 팔짱을 꼈다.

“아니, 실패할 계획이라 시도부터 차단한 것이지. 영명이 혼자서 사냥터를 돌아다닐 거라 생각해서 계획을 짠 거라면 틀렸어. 요즘 남궁영명은 결코 혼자 있지 않아. 항상 자신의 심복을 데리고 다니거든.”

“…….”

“굳이 심복뿐만이 아냐. 네 실력으로는 그자를 못 이겨. 필패(必敗)다. 어쩌면 희박한 가능성이나마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이야, 혹여 영명을 죽이는 데 실패한 뒤의 일은 생각해 보았나? 애초에 그자가 진비령을 왜 죽였다고 생각하지?”

“그건…….”

주강이 고개를 들었다. 비령을 왜 죽였냐고? 주강은 그 점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저 순진한 여자를 가지고 놀다가 영명이 죽여 버린 것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고, 그 이유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하오문은 안휘성에서 도는 소문들은 모조리 모아 수집하지. 찾아보니 예전 기록물에 이런 소문이 있더군.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실은 마교와 은밀하게 내통하는 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 사람들은 그 소문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겼어. 말도 안 되는 소문일뿐더러 그 소문을 낸 사람이 젊은 여인이었으니…….”

마교와의 내통. 그건 말도 안 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소문이었다. 남궁세가가 어떤 존재던가? 최근에는 잠잠해졌으나 당시에는 정파와 사파의 대립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남궁세가는 사파에 대적하는 이들 중에서도 선봉에 선 존재였다. 연의 조부인 남궁원은 곧기가 대나무 같은 자라 조금도 그릇된 걸 용납하지 못했다. 당연히 영명을 못마땅해했다. 그럼에도 모용가와 황보가의 지지로 영명이 겨우 후계자로 내정되기는 하였으나…….

‘다시 내쫓길 수도 있는 자리였지.’

남궁원은 영명을 영 기껍게 여기지를 못했다고 들었다. 마지못해 후계로 지명을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교와 은밀히 내통한다는 소문이 돈다. 게다가 그 소문을 퍼트린 자는 다름 아닌 진비령, 다름 아닌 마교인이었다.

“추측으로 진비령은 아마 궁지에 몰려 있었을 테지. 진비령이 먼저 영명의 신분을 알게 되었을까? 아니면 영명이 진비령의 신분을 먼저 알게 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아이는 이미 낳은 상태고……. 중요한 건 영명이 한위의 어미가 마교에 속했던 자라는 걸 안다는 거야. 이렇게 사파 조무래기들이 연합하여 공격하는 일은 그렇다 쳐도, 자네같이 오래도록 세가에 숨어 있던 마교인이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에도 과연 한위를 그냥 두고 넘어갈까?”

모란의 말에도 주강은 이만 악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감정이 절절 끓어넘쳐 이성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붉은 검기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냐. 영명도 알아보겠지. 그가 마교와 한두 번을 싸웠나? 굳이 구체적인 증거 없이도 영명의 마음속에서는 한위가 거슬리게 느껴지겠지. 단숨에 일말의 양심조차 저버릴 테고.”

그렇게 말한 뒤 모란은 힐끔 연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좀 굳기는 했어도 전반적인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주강은 그저 미동도 없이 검 손잡이를 쥔 채 한위를 보호하려는 듯 그 자리에 지키고 설 뿐이었다.

실은 모란은 복수를 하건 말건, 저 꼬마가 어찌 되건 상관이 없었다. 한데 한위가 어찌 되기라도 하면 다름 아닌 연이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완치되기 전까지 연을 치료하는 건 마치 공들여 탑을 쌓는 것과 비슷했다. 잘 쌓았다 싶다가도 바람 불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한위 같은 경우에는 바람도 아니고 누가 돌탑에다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 연은 또 크게 앓을 테고 그런 상황이 오면 모란은 아주, 매우, 정말이지 짜증이 날 터였다. 주강이고 영명이고 뭐고 죄다 쓸어다가 버리고 싶지만 그나마 연을 보아 참아 주었다.

“복수하려거든 주제 파악을 먼저 해. 눈이 멀어선 앞뒤 재지 않고 덤비지 말고.”

주강이 신음했다. 모란이 그를 내려다보는데, 순간 마치 산에 짓눌린 것 같은 느낌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의 낯이 창백해졌다. 상대에게 아무런 무기도 없음에도 검을 향할 수조차 없었다.

대체 모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모란이란 자가 과연 주강이 어렸을 때부터 봐 온 그 꼬마가 맞던가? 주강을 보며 모란이 길게 웃었다. 하지만 모란의 그 기세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연에게 발을 짓밟힌 것이다. 모란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 꼬마, 꽤 아끼고 있잖아. 안 그래? 그저 죽어 없어져서 꼬마의 인생에서도 사라지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안 돼.”

모란의 말에 주강이 치를 떨었다. 이렇게 복수가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가? 시작도 전에 이리 무너져 버리는 것일까? 어찌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속이 다 뒤집힐 정도였다. 모란의 눈에는 그런 주강의 심정이 보였다.

“대신에…….”

꽤나 약을 올렸으니 모란이 이번에는 단것을 던졌다.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할……. 복수에 불타 제 목숨을 부나방처럼 버리려 들었던 자다. 한위만으로는 주강을 설득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진비령을 죽인 살수가 누군지 알려 주지.”

주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비령을 죽인 살수라니, 죽이고 싶어도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잡지를 못하지 않았나. 살수란 정파나 사파 그 어느 곳에도 지탄받는 존재였다. 이들은 본디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통에, 주강 혼자의 힘으로는 누가 제 누이를 직접 죽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자가 제법 처신이 좋았나 봐. 아직도 살아남아 활동하고 있던데. 죽이고 싶지 않아?”

“…….”

“내 약속하지. 영명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게 될 사람도 네가 될 것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모란이 여차하면 주강을 어찌할 생각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흘깃 보니 연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최근 치료로 연의 근원이며 영체 따위가 퍽 예민해진 상태였다. 기분에 따라 몸 상태가 쉬이 좌우되니 모란으로서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좋아.”

한참 만에 대답한 주강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뒤돌아 한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복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한위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까 마차 문이 열렸을 때, 주강은 영명이고 뭐고 한위를 지키고자 하는 생각만 들었던 게 떠올랐다.

주강은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이를 악문 채 제 유일한 혈육을 한참 바라보다가 느리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는 걸 보면서 연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산에서 모란은 연에게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하라 했다. 내버려 두고 싶으면 내버려 두어도 되고, 혹은 말리고 싶다면 말려도 된다고. 주강이 원하는 대로 하려면 그가 영명을 성공적으로 죽이도록 돕겠다 했고, 그렇지 않다면 복수하지 못하게 돕는다 했다. 모란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십 년을 넘게 이를 갈며 준비해 온 주강의 복수냐, 아니면 한위의 안온한 삶이냐. 이건 그런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모란은 연에게 영명을 죽이거나 혹은 살리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준 것이다.

연은 잠시나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당장 영명이 없는 세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영명이 없으니 은퇴한 남궁원이 돌아오겠지. 연오는 젊은 가주가 되어 남궁원의 지지를 받으며 세가를 훌륭하게 꾸려 나갈 것이다. 연에게나 한위에게나 세가는 더는 괴로운 곳이 되지 않을 테고…….

그러나…….

그럼에도, 연은 주강을 막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부친이 증오스럽고 미워도 그게 옳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모란은 연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한위는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깨우기 전 머리를 쓰다듬어 보면서 연이 물었다.

“복수를 하면 기분이 좋을까?”

“당연히 기분 좋지.”

눈을 가늘게 뜨고 주강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모란이 고개를 돌렸다.

“사는 것도 한결 편해지고 짐을 더는 것처럼 느껴져. 다만 인생의 목표가 복수여서는 안 돼. 제 인생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까지 망치다가 복수가 끝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지고 마는 이들을 여럿 보았거든.”

아무래도 그건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연은 문득, 모란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말투와 자신에게 사용하는 말투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애 취급을 하는 건지, 각별히 다른 대우를 해 주는 것인지…….

연은 일단 한위를 깨우기 위해 손을 뻗다 멈칫했다. 이때까지 쭉 품어 왔던 의문이었다.

“사실 아직도 이해 안 가는 게 있어. 왜…… 한위를 세가에 정식 입적하였을까?”

영명은 무려 아무도 모르게 진비령에게 살수를 보내 살해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위까지 처리하는 게 상식적이다. 굳이 죽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세가에 들이지는 않아야 맞았다. 모란은 이제 소란이 거의 정리되어 가는 숲을 흘깃 보았다.

“진비령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영명이 죄책감을 가진다고? 모용단리가 죽었을 때에도 슬픈 기색 한번 보이지 않던 자다. 세상에 그자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죄책감’일 터였다. 모란은 아무것도 모르고 깊게 잠들어 있는 한위를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그자는 비령을 사랑했어. 신분을 감추고 삼 년이나 같이 교제를 할 정도로 남궁영명 인생에 있어 유일한 사랑이었거든. 다만 비령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했을 뿐.”

하지만 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잔뜩 인상을 쓴 그가 생각에 잠겼다. 그래, 영명이 정말로 한위의 모친을 사랑하였다고 하자. 아무리 그렇다 해도 모란이 어찌 이렇게 영명의 감정을 확신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고.

……아니겠지? 아무리 마법이라고 해도 설마 마음을 읽는다든가 하는 건. 그런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모란이 말했다.

“그때 기억나? 내가 백매화가 되어 남궁세가를 찾아왔을 때.”

왜 기억나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그날 일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죽을 때까지 연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만한 것이었다.

“당시에 내 모습은 각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여기거나 연모하는 이를 닮게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때 영명의 얼굴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마치 무서운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지 않아? 그가 과연 내게서 어떤 이를 보았을까?”

설마…… 모란에게서 진비령을 보았단 말인가? 그날 영명의 반응을 떠올려 보고는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모란에게 마교니 무엇이니 억측을 부렸던 것이었구나.

“게다가 하오문에서 기록을 읽은 게 아냐. 실은 남궁영명에게 저주를 좀 걸었지.”

연이 삐끗하였다. 영명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저주? 마법에 이어서 저주란 것도 쓸 수 있다는 거야? 정말이지 모란은 못 하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야. 그저 연속해서 악몽을 꾸게 만들어. 악몽이란 건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약점이 담겨 있기 마련이니……. 그자는 자주 진비령에 대한 악몽을 꾸더군.”

“…….”

“사랑에 눈이 먼 진비령은 영명이 마교와 관련되었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어. 이젠 죽은 사람이니 왜 그랬는지 속내는 모르지. 영명이 후계자라 저와 혼인하지 못하니, 끌어내리려는 속셈이었는지, 혹은 복수였는지, 그도 아니면 마교의 지시였는지. 아무튼 마교와 관련되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후계자에서 내려오는 게 싫어 청부 살해하기는 하였으나 그게 그자에게 죄책감을 남겼어. 차마 한위까지는 죽이지 못하고 데려와 키웠지.”

그래 놓고서 한위를 그렇게 괴롭히고 미워했단 말인가?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모란이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게 자식으로서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 일말의 책임감이야. 다른 말로 하면 최소한의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은 마음이 퍽 복잡했다. 진비령을 사랑하였다고……. 그도 누군가를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한위를 그리 냉대했던 건가? 자신이 진비령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도리어? 참으로 이기적이고 악랄한 자였다.

연은 잠시 제가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주강이 복수를 하게 내버려 둬야 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강이 복수를 하게 내버려 두었다면 연은 그 뒤로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터였다.

‘……조금이라도 그와 비슷한 자는 되기 싫어.’

이번 일로 더욱 영명이 경멸스럽고 싫어졌다. 그만큼 그자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깊게 한숨을 쉬며 연이 한위의 맥을 짚었다. 이제는 상당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는 게 슬슬 수면제 효과가 떨어진 모양이다. 기맥의 흐름이 활발해지도록 혈도를 짚은 뒤 한위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한위야.”

몇 번 흔들자 한위가 끙끙하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다. 그러더니 연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벌떡 일어나려다가 어지러웠는지 머리를 몇 차례 흔들었다.

“형님? 제가 왜 여기에……. 분명 마차 안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당과에 섞여 있던 수면제를 먹은 데다 들어가자마자 정신을 잃게 만드는 마법이 걸린 마차에 탔으니 기절하는 게 당연했지만 한위로서는 의아할 법도 했다. 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지금 사냥대회에 습격자들이 있는데 혹시 그놈 중 한 명에게 당한 건 아닐지 모르겠다. 혹시 몸이 이상한 곳은 없니?”

“아, 아니요.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괜찮아요. 하지만 습격 사건이라니…….”

한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주강의 핏자국을 보고 기겁했다. 연은 일단 어지럼증이 가실 때까지 한위를 앉혀 둔 뒤 저도 맞은편에 앉아 모든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창밖을 보자 얼추 끝났는지 숲속에서 연오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숲에 퍼졌던 불길도 지금은 가라앉은 상태였다. 숲에서 나오자마자 연오는 연과 한위가 있는 마차로 향했다. 옷에 그을음이 잔뜩 묻은 그가 동생들의 안위부터 살폈다.

“별일이 없던 것 같아 다행이구나. 습격은 숲속에서만 벌어진 듯하다.”

“형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은 연오의 소맷자락에 붉은 피가 점점이 튀어 있는 걸 발견했다. 연오의 피는 아니고 분명 습격자들의 것이다. 슬쩍 눈치를 주자 연오가 한위 눈에 보이지 않도록 슬그머니 다른 쪽 소매로 감싸 감추었다. 다행히 한위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중간에 주강이 합류하여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이번에 소탕당한 녹림십오채의 잔당들이더구나.”

그리 말하고는 그가 쯧 혀를 찼다. 마차 창밖으로는 숲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 중 반은 죽은 상태였고 나머지 반은 간신히 살아남은 몰골이었다.

연의 얼굴은 침착하였으나 한위는 눈을 크게 뜨고 숲 밖으로 끌려 나오는 잔당들을 보고 있었다. 팔다리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은 자도 있었는데,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한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마 곧 심문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먼저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한데.”

연은 그다지 비위가 상하지는 않았다. 의원으로 지낸 지 십 년이다. 끔찍한 상처를 입고 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한위에게는 보기 괴로운 장면일 게 분명했다. 연오도 한위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이상 대회를 진행하기는 무리겠지. 사람을 붙여 줄 테니…….”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연오가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그을음투성이인 영명이 검을 빼어 들고는 묶인 남자를 베어 올리고 있었다. 몸이 길게 갈리며 피와 비명이 튀었다. 처음에 연은 영명이 아니라 어느 광인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연과 한위를 다독이던 연오가 번개처럼 튀어 나갔으나 그사이에 영명은 벌써 두 명을 더 베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몸의 일부가 바닥을 굴렀다. 한위가 창백해진 채 넋이 나가 그 모습을 보고 있기에 연이 얼른 창문을 닫았다. 그러나 비명 소리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형…님.”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기에 연은 손을 들어 귀를 막도록 했다. 그에 한위가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꽉 막았다. 모란이 한위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한위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좀 덜 들릴 거야.”

“고마워.”

연도 마음 같아서는 한위처럼 하고 싶었으나, 영명이 너무 미친 자 같았기에 연오가 걱정이 되었다. 창문을 조금 열자 영명이 주위를 희번덕거리며 돌아보는 중이었다. 가히 광인이라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영명을 보며 다들 기가 질린 얼굴을 했다. 그가 검을 쥐고 소리쳤다.

“더러운 사파 녀석들! 누구냐! 마교냐? 마교에서 보낸 것이냐?!”

기가 질린 것은 연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도 성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의 영명은 최악에 가까웠다. 연은 그의 모습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저런 모습을 누군가에게서 봤었는데…….

“아버지! 이 자들은 녹림십오채의 잔당들입니다. 마교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어, 하고 모란이 뺨을 긁적였다. 연의 안색이 조금 질렸다. 그러고 보면 모란이 저주인가를 걸어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악몽을 너무 길게 꾸게 했나 보네. 저렇게 포악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 보면 영명은 평소에도 사파며 마교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편이었다. 악몽을 꾸어 예민해진 가운데 습격을 받아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연오가 장로들에게 눈짓을 했다. 차마 아버지라 검을 빼어 들지는 못하고 검집째 들어 공격을 막자 영명이 멈칫했다. 그사이 장로들이 겁에 질린 산적들을 끌어냈다. 영명은 연오와 장로들을 노려보다가 마침내 손을 부들부들 떨며 검을 내렸다. 검 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시선을 옮기니 한쪽에서 주강이 무표정하게 그런 영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까지 본 뒤 연은 창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평소에도…… 역시 소가주님이 계셔야…….”

“가주님 성정이 저러신 건 알았지만……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철수 준비가 한창인 밖에서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직도 귀를 틀어막고 있는 한위의 손을 내리기 전 연이 물었다.

“저런 걸 예상하고 했어?”

모란이 눈을 깜박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빠르네, 하고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주 노리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네. 난 영명 저자가 세가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길 바라거든.”

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란이 왜? 영명이 가주 자리에서 빨리 내려오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이제까지 지켜본 바, 모란은 결코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먼저 나서는 건 연이 부탁하거나 요청했을 때가 유일하지 않았던가.

“왜?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래야 네가 편해지니까? 모르는 것 같은데, 네 치료는 몸보다도 마음이 편해야 해서.”

“그러니까…… 그래야 내가 빨리 건강해지니까?”

“그렇지.”

모란이 빙그레 기분 좋게 웃는 걸 연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부터 그가 만사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까 주강에게 말할 때도 그렇고 마치 세가나 다른 무엇보다 연이 중요하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뭐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뭐라고 하지? 나무라야 하나? 하지만 나무라고 싶지 않은데?

연은 뜻밖에도 모란의 저런 태도가 제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껏 그를 첫째로 치는 사람은 없었다. 영명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인 모용단리? 아니면 연오? 연오는 분명 연을 아끼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세가가 우선인 사람이다. 한위는 자신을 좋아하기는 하나 첫째는 아니겠지.

‘누군가가 나를 첫째로 생각해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인데.’

연은 가만히 제 손목을 잡아 보았다. 맥이 빠르게 뛰었다. 굳이 이리하지 않아도 최근에 자신이 모란에게 많이 동요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가 무심히 누군가를 바라보다가도 연을 볼 때에는 표정을 바꾸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곤 했는데, 그럴 때면 유독.

‘유독…….’

이 감정을 뭐라 정의하지 못한 채, 연은 귀를 막고 있는 한위의 손을 내렸다. 식은땀이 어려 축축한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모란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모란은 여자도 남자도 상관없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그래도 자신을 제일 좋아하고 특별 대우해 주는 게 아닐까.

달가닥달가닥 달리기 시작한 마차가 덜컥일 때 연의 마음도 크게 튀었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 모란은 팔짱을 끼고 창밖의 풍경을 즐겼다. 한위는 시무룩 기가 죽은 채 연의 옆에 달라붙어 앉았다. 모란은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연은 생각이 많아 말이 없으니 자연히 한위도 말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게 무슨 대수고 또 좋아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야.’

마침내 마차가 세가에 도착할 적에 연이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마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모란이 훌쩍 먼저 내리더니 등을 돌렸다. 뒷짐을 진 채 제게로 까닥이는 손을 보며 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야?”

“아까 발목 삐었지 않아?”

연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까 주강이 휘두른 검 때문에 모란이 밀쳤을 때 발목을 삐긴 했는데, 용케도 알아보았다 싶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무슨 유난인가 하여 연이 타박했다.

“사람들 앞에서 무슨, 발목 좀 삔 것으로.”

정작 별거 아닌 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연이 모란을 무시한 채 마차에서 내렸다. 모란이 흠, 하는 소리를 내는데 그조차도 귀에 꽂혀 들어왔다.

“형님, 괜찮으신가요?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당황하여 한위에게 부축을 맡기고 걸으며 연이 이를 악물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는 모란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모란은 자신을 어찌 여기는가? 그걸 알아내야겠지, 연이 속으로 꾹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모란은 절뚝절뚝 걸어가는 연의 뒷모습을 보며 목덜미를 긁었다.

***

“이제야 왔군.”

깊은 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호롱불이 일렁이며 모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보통은 연의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방에 있을 필요성이 있었다.

주강은 차갑다 못해 별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들어섰다. 모란이 가볍게 팔짱을 꼈을 뿐인데도 움찔하며 그가 검 손잡이를 잡았다. 잔뜩 모란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누이를 죽인 살수를 알려 준다 했지.”

“그래. 거짓말인가 해서 찾아왔나?”

모란이 품속에서 잘 접은 종이를 꺼내 주강에게 건넸다. 어느 젊다 못해 어린 여인의 용모를 그린 종이였다. 그 아래 이름이며 신상, 얼굴과 달리 손은 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것 등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강은 주의 깊게 살펴보고는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러나 원하는 걸 얻은 뒤에도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주강은 온갖 기괴한 재주를 사용하는 이들을 만나 왔지만 모란과 같은 이는 처음 보았다. 얼핏 보면 평범한 청년으로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마치 태산이나 바다를 보는 듯해 식은땀이 났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다. 인지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았을 때 사람이 응당 느끼는 경외와도 같은 것이다.

모란이 비죽 웃었다.

“복수를 하는 데 그게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지.”

“그래,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지.”

대꾸하면서도 주강은 알았다. 딱히 저에게 설명을 해 줄 생각은 없을 거라는 걸. 주강은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남궁영명 그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 나일 것이라 했나? 그건 내가 그를 죽이게 해 준다는 의미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약속하지.”

모란은 마치 일상적인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

“장담하건대 앞으로 남궁영명에게 죽음은 오히려 편안한 안식이 될 테니, 네 복수는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게 될 터.”

주강은 모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모란의 말이 무슨 의미인가를 깨달은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와 비슷한 빛이 돌았다. 모란의 말대로라면 오늘 그는 하마터면 숲에서 영명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뻔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뻔하였다. 주강이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금방 걷혔다.

“죽기 전, 영명 그자가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은 반드시 나여야 해. 반드시.”

주강의 독기 어린 말에도 모란은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주강은 한참 동안 모란을 노려보다가 떠났다.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한 퇴장이었다.

모란이 한숨을 쉬었다. 이로써 연에게 숨기는 것이 두어 가지나 된다. 침상에 아무렇게나 벌렁 누웠다. 그가 연이 자고 있을 침실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금색 고리가 영글자 연에게 향하는 생기가 보였다. 이제는 다섯 군데에서 오고 있다. 그가 다시 눈을 감는 순간, 금색 고리는 모두 사라진 평범한 눈동자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너무 과보호를 하는 걸지도.”

모란이 중얼거렸다. 살아온 삶이 거친 탓에 그는 이게 과보호인지 아닌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런 게 난생처음이었던 탓이다. 이백오십 년을 살면서 점차 모란 주위에는 그보다 약한 자들만이 늘어 갔다. 강자들의 손짓 하나에 스러지고 마는 그런 약한 자들이다. 그러나 모란은 한 번도 그런 약한 자를 봐준 적이 없었다.

“혹은 너무 공을 들였나.”

이번 사건에는 오지랖이 깊어도 이렇게 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연의 일이었으니까.

왜 연만은 다른가, 곰곰 따져 보다가 그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연이 그저 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란이 씩 웃었다. 연은 약하고 귀엽고 어여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하고 귀엽고 어여쁜 것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

귀하고 소중한 건 상하지 않도록 아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좋았을 것을.

연아, 하고 중얼거려 보고는 모란이 다시 입 안에서 그 이름을 굴려 보았다. 처음에는 책임감으로 시작했다. 중간에는 약하여 신경 쓰인다 여겼고, 그다음으로는 귀엽고 어여쁘다 생각했다.

한데 점차 자라나기 시작한 이 감정은 이제 호감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모란은 이번 일이 단순히 연의 몸 상태가 악화될까 염려하여 주강을 치워 버린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연을 위해 또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만일 사냥대회에서 연이 영명을 죽게 내버려 두라 했다면 시행되지 않았을 계획이다. 모란은 아들에게 고통만을 안겨 준 아비에게 한 번쯤은 좋은 일을 하게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연을 보러 사라졌다. 호롱불만이 일렁이며 그가 떠난 방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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