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章 : 사냥대회
‘내 생각에는, 어쩌면 내가 모란을 조금쯤은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리 생각하던 연이 신음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모란이 엉덩이를 아프게 내리친 탓이었다.
“집중해야지, 연아.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할 정도로 내가 부족하게 했을까?”
“으읏, 그게, 아니라……. 아!”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구 흔들린 탓에 연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모란은 밖으로는 소리가 들릴 일이 없다고 했지만, 아래층에서 이따금 희미하게 웃음소리나 비파 연주음 따위가 울릴 때면 연은 온몸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주루였다.
모란이 연의 엉덩이를 꽉 쥔 채 허리를 움직였다. 연이 올라탄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모란이 흔드는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란의 성기가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안을 깊이 찌를 때마다 통증과 쾌감이 뒤섞였다. 천에 묶여 시야가 깜깜한데도 불꽃이 튀는 듯 느껴졌다.
“아, 앗, 앗! 흐아, 앗!”
너무 깊이 삽입당하는 것 같아 울먹이며 몸을 비틀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손이 묶인 탓이었다. 무자비하게 꿰뚫린 채 고개를 젖히자 모란이 덥석 목을 깨물었다. 연은 흠칫하여 저도 모르게 뒤를 조였다가 더욱 빨라진 추삽질에 신음을 내뱉었다.
“흐, 힘들, 힘들, 어, 아읏, 윽!”
결국 얼마 안 가 연이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떨어지는 체력으로는 모란이 쳐올리는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엎어지면 강제로 다시 일으켜 세워졌다. 연이 눈꺼풀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란은 연이 예민하게 느끼는 부분들을 핥고 빨면서 꽉 끌어안았다. 꾹꾹 안을 짓이기듯 박아 넣자 오금이 다 저렸다. 절정이 넘실거렸다. 그러나 이미 두 번은 사정한 뒤라 연은 흐느끼며 숨을 가쁘게 쉴 따름이었다.
모란에게 여러 차례 맞아 엉덩이는 화끈거리고 따가웠다. 치료하는 중이라 이따금 속 깊은 곳에서 쿡쿡 찔리는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다. 그러나 모란이 묶인 손 위를 잘근거릴 때나 예상치 못하게 어딘가를 물고 빨 때마다 그 통증은 쉬이 잊혔다.
“묶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퍽퍽 박아 올리면서 모란이 귀에 대고 지껄였다. 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모란은 그의 귓바퀴를 아프도록 씹었다. 연은 인정해야 했다. 눈을 가리거나 혹은 묶이거나, 엉덩이를 맞는 것들이 더 흥분을 일으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감각이 지극한 탓에 퍽 힘들었다.
“흐윽, 아, 아……!”
연이 경련하듯 허벅지 안쪽을 떨었다. 온몸이 녹진녹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모란이 박아 넣을 때마다 절정에 가까워지기는 하였으나 다다르지를 못하니 힘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란이 잠시 멈추었다. 가고 싶어? 모란의 말에 연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깊게 입맞춤을 하고는 모란이 제 것을 꺼냈다. 뒤를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몽둥이 같은 물건이 느리게 빠져나가는 느낌에 연이 몸서리를 쳤다. 그러자 모란이 퍽 귀엽다는 느낌으로 여기저기를 입술로 지분거려 왔다.
연은 모란이 시키는 대로 이불 위에 엎드렸다. 목덜미를 잘근거리더니 모란이 뒤에 중지와 검지를 밀어 넣었다. 그가 무얼 할지 대충 짐작이 간 연이 몸을 떨었다.
부드럽게 풀린 뒤를 손가락이 찌걱이며 헤집었다. 안쪽을 꾹꾹 눌리자 연이 아읏, 하고 소리를 냈다. 참으로 원초적인 감각이었다. 이렇게 사정을 유도하나 싶어 가늘게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자니 모란이 연의 것을 손에 쥐었다. 미끌미끌 문지르자 연이 헉, 하고 숨을 집어 삼켰다.
“자, 잠시만…….”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려 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럴 때에는 항상 그렇듯이, 모란은 연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예민하다 못해 발갛게 잔뜩 달아오른 성기를 손에 쥐고 문지르고 흔들면서 그가 안쪽을 문질러 왔다. 흰 별이 튀어 오르는 듯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어가려 하자 모란이 팔로 꽉 잠아 끌어 당겼다. 그러고는 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고 싶다면서?”
무어라 항변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안 그래도 두 번의 사정으로 예민한 성기를 쥐고 흔드는 데다 손가락으로 추삽질까지 하는 건 감당하기 힘든 자극이었다.
연은 제가 무슨 소리를 내면서 신음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란에게 완전히 쥐어짜이는 기분이었다. 쾌감이란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 아! 힉, 흐윽…… 흐아!”
무얼 부정하려는지 연신 고개를 저은 연이 이불을 쥐어뜯고 발버둥치는 동안 모란은 찍어 누른 채 상대의 반응을 맛보았다. 중간에 연은 제 것이 무언가 질금거린다는 느낌은 받았으나 사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정하지는 않아도 절정은 찾아왔다. 무언지 모를 선연한 쾌감이 등골을 찔러 댔다. 연이 견디지 못하고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냈다.
엎드린 자세를 버티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모란은 연을 자비롭게 놔주었다.
“흐윽, 흐…….”
완전히 지친 연이 가만히 누워 가빠진 숨만 골랐다. 모란과 몸을 섞게 되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근원을 치료하는 일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모란과의 관계는 지나치고 힘든 구석이 있었다.
아픈 건 괜찮다. 그런 건 참으면 되니까. 그러나 쾌감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종류였다.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야한 소리를 내게 되고, 또 매달리고 발버둥 치게 되고…….
하지만 수치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이성이 휘발될 정도로 지극한 감각을 맛본 뒤에 찾아오는 나른함과 탈력감은 좋았다.
힘이 빠진 연이 엎어져 누워 있기만 하자 모란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었다. 눈이 부셔 깜박거리고만 있으니 손을 묶었던 끈도 직접 풀어 주었다. 비단으로 된 부드러운 천이었는데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손목을 만지고 있자 모란이 살근살근 문질렀다.
“아프거나 쓰라려?”
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모란과 관계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차 수위가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느낌 탓만은 아니었다. 모란이 하는 것들은 민망하기는 하여도 막상 해 보면 퍽 좋았다. 죽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겠지만, 묶이는 것도…… 혹은 눈이 가려지는 것도.
아직도 힘이 없어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모란이 바르게 눕히고는 다리며 복부에 질척하게 묻은 것들도 닦아 냈다. 그러고는 항상 그랬듯이 금빛이 영근 눈으로 살펴보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무래도 내가 아까 전에 자제하지 못하고 좀 지나치게 쏟아부은 것 같은데.”
그가 가슴이며 복부를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연이 눈을 굴렸다. 자제하지 못했다고? 하긴 오늘따라 좀 심하게 괴롭히는 것 같기는 했다. 모란이 이곳저곳 더듬거리며 가늠해 보고 살살 긁어 보는 듯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부어 넣은 걸 다시 끄집어낼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는 몸이나 근원에 더 좋으니까.”
“그런데 뭘 부어 넣는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연은 한 번도 치료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그저 대충 근원이란 것이 찢어졌는데 그걸 치료한다 정도가 그가 아는 전부였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바느질 같은 거야. 내 일종의, 기운 같은 것으로 찢어진 부분을 한 땀, 한 땀 기워 넣는……. 생으로 바느질을 하니 당연히 아프지. 특히나 잘 안 보이는 상태에서는 거의 불 끄고 바느질하는 셈이거든. 엉뚱한 곳 찌르기도 하고, 좀 잘 보려고 잡아당기며 쥐어뜯다 보니 당연히 더 아프고 오래 걸리고.”
“그럼 잘 보이면 덜 아프고 더 빨리 끝나고?”
“그렇지!”
모란의 설명에도 연이 인상을 썼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설명해야지,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면 어떻겠냐는 둥 말을 하니 오해하는 것 아닌가. 연이 그렇게 따지자 모란이 눈을 굴렸다.
“하지만 난 원래 친절하게 설명해 버릇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연은 모를 것이었다. 모란이 얼마나 예외적으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고 있는지……. 평소라면 혼이 갈기갈기 찢겨서 본원지기를 흘리고 죽어 가든 말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혹은 알고 지내던 사이라면, 아파서 죽는다고 하건 말건 그냥 엎어 놓고 헤집어 치료를 해 주든가. 그러다가 쇼크사를 하면 재수가 없는 것이고, 살아남는다면 운이 좋은 것이고.
하지만 연은 그리 대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말마따나 훅 불면 날아가 버릴 작은 솜털 뭉치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냥 솜털 뭉치도 아니었다. 귀엽고 예쁘고, 또 귀엽고……. 행여나 날아가 사라져 버리면 모란은 퍽 속이 상할 것 같았다. 그러니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게 아닌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모란이 손가락 끝을 베자 붉은 피가 송글송글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슬아슬 떨어지지는 않고 점점 크게 고이더니 마침내 붉은 보석 같은 결정이 되었다. 결정을 떼어 낸 모란은 그 안에 섬세하게 작은 술식을 새겨 넣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연에게 내밀었다.
“깨물면 안 돼. 그냥 삼켜.”
“이게 뭔……데?”
미심쩍게 물어보면서도 연은 몸을 일으켜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분명 피로 만든 걸 보았는데, 혀에 올려놓아도 그다지 비린 맛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늘 밤에 좀 고통스러울 수가 있으니 그걸 예방하는 거야. 부작용이 좀 심해질 수는 있지만 적어도 고통은 없지. 뭐, 부작용이래 봤자 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 말고는 없을 테지만.”
“기이한 현상?”
“알다시피 내가 마법사라서, 내 기운이 말썽을 부리거나 장난질을 칠 수 있다는 이야기야.”
모란은 꼭 자신의 기운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연은 모두 이해할 수도 없으니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어떤 약이든 부작용은 있기 마련이다. 약이 독이고 독이 약이 되지 않던가? 모란의 치료도 비슷한 것이겠지. 요즘 부쩍 건강해졌으니 연은 부작용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나저나 아무리 관계를 맺은 사이라고는 해도 계속 맨몸으로 있기가 좀 민망했다. 연은 이제 조금 힘이 돌아온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모란이 그 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허리대를 직접 매 주면서 연의 입술을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였다. 연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추었다. 옷깃을 단정히 해 주며 모란이 다정하게 물었다.
“뭐 좀 먹을까? 항상 하고 나면 지치는 것 같은데.”
질문을 하기는 했으나, 그는 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기녀를 불렀다. 그가 이것저것 간단히 먹을 음식을 내오라 시키는 동안 연의 얼굴은 잠시 화끈 열기가 올랐다.
기녀가 나가고, 연은 전부터 퍽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주루 주인이 된 거야?”
분명 연이 알기로는 모란에게 이리 많은 돈은 없었다.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서 전에 여기저기서 돈이며 금을 빌린 것이 아니던가? 무슨 수를 썼는지 금세 다 갚아 버려서 그렇지…….
“내가 좀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서.”
능청맞게 대꾸하면서 모란이 상의에 옷을 대충 걸쳤다. 연이 잠시 그런 모란을 보다 아직 덜 식은 얼굴의 열기를 어찌하기 위해 자박자박 걸어가 창을 열었다. 호화스러운 주루답게 삼 층이나 되는 높이라 위에서 보는 풍경이 퍽 좋았다.
그동안 기녀가 주안상을 차려 왔다. 마른 과일과 밀떡, 당과 같은 안주와 술이었다. 기녀가 다시 나가고 나서야 연이 창밖을 보는 척 얼굴을 피하고 있던 걸 중단했다. 그사이에 벌써 춥기도 하여 창을 닫고 따뜻한 아랫목으로 파고들었다.
“지난번에는 상단주라고 했잖아? 백매화로 왔을 때.”
“뭐, 이것저것 손대다 보니 어쩌다가 작은 상단 하나 맡게 되었지.”
그래서 낮 동안 그렇게 나가 있는 건가? 새삼 연은 자신이 모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그다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모란은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는데도……. 연이 생각에 잠긴 동안 모란이 은근슬쩍 그 앞에 안주를 죄다 밀어 놓고는 술을 따며 화제를 돌렸다.
“요즘 남궁사영 처지가 꽤나 곤궁해진 것 알아?”
마침 허기가 진 상태였기에 별생각 없이 주섬주섬 주워 먹고 있던 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남궁사영이라면 소룡대회부터 이번 모용세가와의 혼인 건까지 사사건건 연을 성가시게 한 그 장로가 아닌가. 아무리 장로직에서 내려온 상태라 하여도 그는 무시할 수 없을 만한 권력과 재력을 쥔 사람이었다.
“남궁사영 장로가 왜?”
“아들이 상단 운영을 잘못해서 황가와 척을 지게 되었다는군. 내부자가 낱낱이 죄다 고발한 모양이야.”
“흠, 잘되었네.”
사영에게 유감이 많은 연으로서는 듣기 좋은 소식이었다.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라 놓은 흰 밀떡을 달큼한 조청에 찍어 우물우물 먹던 연이 멈칫했다. 모란의 얼굴이 지나치게 흐뭇하지 않은가. 설마 남궁사영이 곤궁하게 된 것에 모란이…… 무언가…… 했나? 남궁사영 때문에 자신이 곤란에 처했었으니까?
아니겠지 하면서도 심증은 자꾸만 그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모란에게 무엇이나 된다고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어 밀떡이나 하나 더 먹었다. 그저 지난번 말한 것처럼 심심했거나 혹은 권선징악을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
“주루에서 한숨 자고 갈까?”
“아니, 사부님에게 갈 거야.”
술을 마시던 모란이 잠깐 멈칫했으나 연은 곶감을 먹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이 주루는 안주가 꽤 잘 나오는 편이었다.
“그저께도 가지 않았어?”
“아직 사부님에게 배울 게 많아. 실은 사흘에 한 번도 적어.”
제 상황에 불만족한 연이 미간을 접었다.
솔직히 모든 것을 털어놓은 날, 은록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어 연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은록이 제 말을 믿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직접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완전히 허황된 소리로 들릴 게 분명한 것이다. 그런 연에게 은록이 이리 말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알다시피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은록이 보기에는 미심쩍은 일들이 꽤 많았다. 모란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모란과 연이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이 같은 것. 그 외에도 바뀐 모란과 연의 관계나……. 의원에 몇 번 오지 않았는데도 오래간 산 사람처럼 구는 연의 행동이 그러했다.
게다가 모란이 바뀌고 난 뒤부터 갑자기 생겨난, 화타의 후손이니 편작의 후계니 하는 소문은 은록의 귀에도 들어왔다. 처음에는 어느 마음 좋은 의원이 봉사 활동을 하나 싶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하는 말이 모란과 함께 돌아다니는 백면의 귀공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귀한 집 자식 같고 얼핏 병약해 보이는…….
결정적인 확신을 가진 건 아무래도 녹림채의 일이 일어난 그날이었다. 연은 은록이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그는 녹림채에 납치되어 간 뒤로 단 한 번도 정신을 잃은 적이 없었다. 거의 그럴 뻔한 위기가 있었으나 끈기 있게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확신을 얻었다. 그는 누구보다 제자가 치료하는 방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중완혈, 음교혈의 흐름이 빠르고 두통과 열이 있다. 피부에 발진이 있고 팔다리가 아플 때에는 무슨 처방을 내려야 하지?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은록이 자신을 시험함과 동시에 안심시키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 처방은 다른 의원과는 달리 은록만이 터득한, 고유한 것이었다.
-천추혈에 침구 처방을 내린 뒤 갈근, 승마와 작약, 생강을 탕으로 처방합니다.
-이유는?
-천추혈을 자극하여 중완혈과 음교혈의 흐름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승마에는 해열과 진통 작용이 있으며 갈근은 기력을 증진시킵니다. 또한 작약과 생강은 피를 잘 돌게 합니다.
그리 대답하고도 불안하여 연은 가슴이 쾅쾅 뛰었다. 하지만 곧 은록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연을 끌어안으며 말해 주었다.
-네가 맞구나, 모란아. 아니, 연아.
제가 가족이라 생각한 사람에게서 그 말을 들을 적에 연은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포기했던 인연을 다시 잇게 되었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후부터 연은 아픈 몸을 핑계 삼아 사흘에 한 번은 은록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환자들과 면식이 있으니만큼 대놓고 의술을 하지는 못해도 은록이 처방하고 치료하는 걸 보기만 해도 배우는 것이 많았다.
“흐음. 뭐어, 배우는 것이 나쁠 건 없지.”
모란이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데 어디서 달금한 꽃향기가 났다. 또 모란이 꽃을 피웠구나 싶어 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기둥이나 소반 등, 나무로 된 것을 살펴봐도 꽃이 피지 않았다. 그때 모란이 히죽 웃으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자 술 대신 꽃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연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면서 모란을 째릿 노려보았다.
“꽃을 좋아해서 이렇게 피우는 거야?”
“아니? 딱히 꽃을 좋아하지는 않아. 예전에 꽃가루만 맡으면 재채기가 나왔거든.”
그러면 대체 왜 시시때때로 꽃을 피운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연은 모란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전처럼 싫지는 않잖아?”
“여전히 싫어. 익숙해진 것뿐이지.”
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꽃 좀 피운다고 대수랴. 처음에는 질색할 정도로 너무 싫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꽃에 몸이 닿을라치면 등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나, 모란이 제게 해 준 것이 많았으니 이 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다만 은록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상하게 심술을 부리는 것 같다면 연의 착각일까? 연은 자신이 자꾸만 모란에 대해 제멋대로 착각하고 기대하는 것 같아 이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이건 결코 ‘어쩌면’, ‘조금쯤은’ 모란을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는 사이 모란이 술잔이 꽉 찰 정도로 커다란 꽃을 피워 냈다. 금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리는 예쁜 꽃이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때 모란이 꽃을 들어 연의 머리카락에 꽂아 주었다. 그러고는 연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입술을 쪽 훔쳐 내고,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것을 보듯 웃는 것이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연은 잠시나마 제 머리카락에 꽃이 매달려 있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왜 나에게 저런 얼굴을.’
뒤늦게 머리의 꽃을 떼어 내면서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모란이 자신에게 좀 덜 잘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풍랑같이 흔들리는 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을 텐데.
이제 충분히 쉬었다 싶어서 연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그는 돌연 숨이 턱 막혀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에는 모란이 말했던 부작용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아닌 듯했다. 마치 모란이 한위를 훈련시킨다고 아공간을 열었을 때 같았다. 게다가 거북함은 그때보다 훨씬 더했다. 객잔 아래층에서도 나지막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모란을 보니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이 숨을 헐떡이며 보자 이상하게도…… 허공에 희미하게 너풀거리는 옷자락이 보이는 듯했다.
모란은 연을 힐끔 보고는 손짓 한 번으로 숨 막히는 기운이며 너풀거리는 것까지 단번에 없앴다. 그제야 편해진 연이 크게 숨을 쉬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다가온 모란이 연을 가볍게 달랑 들어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톡톡 어깨를 털어 주었다.
“뭐, 방금 뭐였어, 그건?”
“별거 아냐. 다른 차원에서 좀 깔짝거렸나 봐. 신경 쓸 것 없어.”
연이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쳐다보았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란이 진기한 장면을 보여 준 게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것일 테지, 생각하고 털어 버렸다. 무언가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연이 다시 뒤를 힐끗거리며 겉옷을 입었다. 주루를 나가 은록의 의원에 당도할 때쯤에는 그 이상했던 현상은 점차 잊히기 시작했다.
의원에는 아직 환자들이 몇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은록은 환자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연은 조용히 한쪽에 앉아 은록이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몸이 좀 나른하고 피곤한 게, 아까 주루에서 관계한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하품까지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의원에 오면 항상 그렇듯이 모란은 아무 곳에 대충 앉았다. 처음에는 모란이 치료하지 않자 의아해하던 환자들은 이제는 그러려니 여기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은록에게 모란을 파문하였냐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연 공자.”
은록이 연을 불렀다. 그는 다른 환자가 있을 때는 이렇게 예의를 차렸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둘은 의사와 환자 사이인 것이다. 연이 일어나 은록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휙 기울더니 바닥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연이 꾹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어…….”
갑자기 바뀐 상황에 연이 당황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진맥을 짚고 있던 은록은 연이 깨어난 걸 바로 알아차렸다. 표정은 언뜻 침착해 보였으나 연은 사부의 눈에서 걱정하는 기색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아까와 달리 밖은 한층 어두워졌고 환자들도 없었다.
기절했나? 기절했다기에는 몸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좀 나른하긴 하였다.
“정신이 드느냐?”
“제가 왜 여기에…….”
“갑자기 잠이 들었다. 기면증의 일종인 듯한데.”
은록이 몸에 꽂아 두었던 침을 뽑았다. 기둥에 삐딱하게 기대선 모란이 저만치서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말했다.
‘부작용.’
이런. 아까 말한 그 부작용이구나. 아프지는 않아도 부작용이 심해질 수 있다더니 졸린 증상이 기면 증상으로 심화되었나 보다. 연이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어제 잠을 설쳤더니…….”
“불면증이 있는 것 같기는 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잠드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구나. 몸 상태는 전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은록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란의 그 치료는 아무래도 의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은 모란과 혼이 바뀌었다고만 했지 그 외의 마법적인 것이나 모란의 정체, 과거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 받은 치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니, 설령 모란의 정체를 말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치료의 종류에 대해서는 절대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은록이 연의 손목에 묶인 자국을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에…….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간 연은 얼굴이 불타는 듯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란이 오늘 손을 묶어 둔 채 ‘치료’했다는 것을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은록이 시시콜콜 캐묻는 성격이 아니라는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저, 오늘은 몸이 안 좋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은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잘 빚어 말린 환약이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몸에 좋을 게 틀림없었다. 연은 소중하게 환약을 받아 들었다. 은록은 환약을 내밀고는 다소 냉랭하게 말했다.
“몸이 제대로 낫기 전에는 용건 없이 여기에 오지 말거라.”
연은 그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은록의 지시는 타당했다. 의원에는 진찰과 치료를 받으러 올 때 외에는 들르지 않는 것이 좋았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옮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건강한 상태면 모를까 허약해진 상태에서는 도리어 병을 얻어 돌아가는 수도 있었다. 연이 환약을 품에 잘 넣어 가지고 의원을 나올 적에 모란이 물었다.
“연아, 여행 가 볼 생각 없느냐?”
“무슨 여행을?”
대꾸를 하면서도 또 잠이 무시무시하게 쏟아져서 연이 휘청휘청하는 걸 모란이 얼른 붙잡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어도 잠을 이기기가 힘들었다. 연은 반은 걷고 반쯤은 질질 끌려갔다.
결국 성가셨는지 모란이 그를 등에 업었다. 업힐 적에는 잠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이내 다시 졸음이 쏟아져서 그냥 몸을 내맡겼다. 아늑하고 아주 좋았다. 어차피 어두워서 다른 사람들 눈에도 잘 안 보일 터였다.
그러고 보면 그간 근원을 치료할 때마다 나른하고 졸린 게 절정의 여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모란이 뭐라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졸렸던 것이다. 연은 꾸벅꾸벅 졸다가 아예 모란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마음 놓고 잤다.
눈을 떠 보니 품이 갑갑했다. 모란이 편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저 좋을 대로 연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더니 연이 깬 걸 보자마자 태연하게 이어서 묻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여행 어때? 네 형님에게는 요양 간다 말해 두고 한위 데리고 다녀오는 거야.”
“아니, 왜 갑자기 여행을 간다는 건데?”
연은 좀 민망하여 뒤척거리며 물었다. 사실 그는 누구와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조금 갑갑할 따름이지 그 외에는 놀라울 정도로 아늑하고 좋았다.
아, 그러고 보니 사부님이 주셨던 환약. 연이 품을 뒤적거렸다.
“뭐어, 이제 곧 봄도 오겠다……. 저 산 너머 풍경이 그렇게 좋다고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모란의 표정은 퍽 심심해 보였다. 쓴 환약을 꼭꼭 씹어 삼키며 연이 눈을 굴렸다. 여행이라…… 좋기야 하겠지. 그가 항상 원하던 게 강호 유람이 아니던가? 모란과 함께 다닌다면 퍽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세가에는 큰 행사가 하나 있었다.
“당분간은 안 돼. 사…냥대회가 있어서…….”
연이 간신히 하품을 삼켰다. 봄이 다가올 때면 남궁세가는 사냥대회를 열었다. 그냥 사냥대회가 아니다. 무인에게 동물 사냥이란 아주 우습고도 쉬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남궁세가의 사냥대회는 달랐다.
이 년에 한 번 열리는 이 대회는 한 번은 무거운 철환(鐵絙)을 다리에 차고, 또 다음번에는 사 년 동안 키운 일결월산토(一䟾越山兎)들을 풀어…서…….
어느새 가물가물 졸던 연은 가슴을 도닥이는 손길에 푹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모란이 드물게도 얕게 한숨을 쉬었으나 이미 잠들어 버린 연에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
“으음.”
숨 쉬기가 답답하여 연이 몸을 뒤척뒤척했다. 평소 워낙 추위를 타는지라 그는 두터운 이불을 덮고 자고는 했는데, 이 이불은 따뜻하기는 하나 그만큼 무거워서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누가 제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 놓았는지. 연이 헉헉거리며 겨우 이불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답답해…….”
중얼거리던 연이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얼어붙었다.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앳된 것이다. 목소리뿐이랴, 이불과 베개에 비해 손도 몸도 비이상적일 정도로 작았다. 연의 머릿속에 처음 모란의 몸에 들어갔던 날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더듬더듬하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이었다. 그러나 모란은 없었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연이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필사적으로 면경을 찾았다. 면경을 발견하고는 기어가는데 옷이 너무 커서 줄줄 흘러내렸다. 겨우 까치발을 해 면경으로 얼굴을 본 연이 스륵 주저앉았다. 모란의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어려진 자기 자신이 그 안에 비쳤다.
“이게 대체 무슨…….”
연은 황망하여 그 자리에 엎어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일단 헐렁헐렁 흘러내리는 옷을 확인했다. 자신이 최근 즐겨 입는 침의다. 그 말은 과거로 간 게 아니라 몸만 어려졌다는 이야기인가? 모란도 없으니 뭘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러고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부를 수도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연은 그대로 웅크리고 앉았다.
마침내 모란이 나타난 건 배도 고프고 불안하기도 하여 연의 기분이 바닥을 긁고 있을 때였다. 구석에서 모란이 불쑥 나타났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과거로 돌아간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연은 저도 모르게 반가워 외쳤다.
“모란!”
별생각 없이 들어오던 모란이 그제야 연을 발견했다. 연은 모란이 제게 장난을 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어려진 연을 보는 모란의 표정은 멍했다. 단순히 놀랐다거나 충격을 받은 종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그의 눈에 금빛이 어렸다. 금색 고리가 하나둘 걸리더니 순식간에 여덟 개로 늘어났다. 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 눈을 피했다. 섬뜩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본 모란의 얼굴에는 쓴 미소가 걸렸다.
“이리 와 봐.”
모란이 침상에 앉으며 허벅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연은 옷이 몸에 휘감겨 엉금엉금 기다시피 향했다. 모란이 연을 번쩍 들어 다리에 앉히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일곱 살이나 되었겠네. 많아 봤자 아홉 살.”
그저 나이 판별만 해 준 것인데도 모란이 말하자 연은 안심이 되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일종의 부작용이야. 그러니까…… 네 근원이 주장하고 있는 거지. 네게 가장 부족한 부분을 달라고.”
연이 인상을 쓰며 작아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일곱 살의 몸뚱어리란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작아진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초조하게 물었다.
“설마 이 상태로 계속 머무르게 되는 건 아니지?”
“아마 못해도 며칠은 지속되지 않을까? 운이 좋다면 그 사냥대회 끝날 때까지…….”
모란이 드물게도 말꼬리를 늘였다. 연이 한숨을 쉬었다. 사냥대회는 가능하면 참가하고 싶었다. 그가 참가하지 않으면 한위가 혼자 참가해야 했다. 영명과 남궁사영도 틀림없이 있을 텐데 아무리 연오가 있을 것이라고는 해도 불안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온다니 다행이다.
가만, 그런데 방금 모란이 운이 좋다고 하질 않았나……?
“일단은 아프다고 둘러대야겠네.”
자꾸 흘러내리는 옷을 추스르며 연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평소에 워낙 아픈 일이 많아서 며칠 정도 두문불출했던 건 왕왕 있는 일인데 그래도 행여나 연오가 찾아올까 염려가 되었다.
“형님이 찾아오면 필히 내 얼굴을 보려고 할 거야.”
“아, 그 점이야 문제없지.”
모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개장 안에서 안 쓰는 여름 이불을 집어 왔다. 그러고는 대충 이래저래 뭉개 놓고 피를 한 방울 뚝 떨어트렸다. 옥으로 된 노리개도 대충 이불 속에 하나 쑤셔 넣은 뒤 무언가 중얼거리며 대충 휘휘 젓자 이불이 꾸물거리며 마치 사람처럼 움직였다. 연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골렘이란 거야. ……뭐, 이불 골렘은 처음 만들어 보는데, 공격력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해도…… 아무튼 골렘은 골렘이지.”
뭐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모란이 뺨을 긁적이고는 이불 골렘이란 것에게 가서 누우라고 명령했다. 이불 골렘이 스르륵 침상에 누웠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가슴―이라고 추측되는 부분―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연이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보다 얼른 다물었다.
“그냥 이걸로 끝이야?”
“여기에 환각 마법을 걸어 두면 보는 사람들은 다 네가 아파서 누워 자는 거라고 생각할걸. 맥을 짚거나 하면 잡히지 않으니 난감하겠지만……. 그거야 내가 미리 말해 두면 되는 거고.”
그러고 보니 모란은 공식적으로 연의 주치의였다. 도무지 의원 같지를 않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간단히 문제를 해결한 모란이 오도카니 침상에 앉아 있는 연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연은 깨달았다. 이불 골렘이 그인 척하고 있는 거라면 이 방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방뿐만 아니라 세가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좋지 않았다. 세가에는 연의 어릴 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연이 저도 모르게 모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퍽 관대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은 나와 지내야겠네.”
“으음…….”
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모란은 어쩐지 신이 난 얼굴로 그를 안아 들었다. 훅 높아지는 시야에 연이 기겁해 모란에게 매달렸다. 발아래가 붕 뜨는 느낌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아무튼 퍽 낯설었다. 그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리 안겨 본 적이 없었다. 제 발로 걷고 싶어도 신발이 없는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모란은 곧장 주루로 순간이동을 했다. 어제 정사도 나누고 술도 마신 바로 그 방이었다. 모란은 침상 위에 연을 내려 두고는 잠시 나갔다가 이내 옷과 함께 돌아왔다.
별생각 없이 입고 나니 퍽 값비싼 옷이었다. 면경으로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영락없이 어린 도련님으로 보였던 탓이다. 아무래도 연의 정신 연령과 신체 연령은 영원히 맞지 않을 모양이었다.
“안고 다닐까?”
“아니.”
정색하며 연이 뒤로 물러났다. 아까야 신발이 없고 옷이 흘러내려서 어쩔 수 없이 안겼다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모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문을 열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면 말해. 꽤 여러 군데 돌아다닐 거니까.”
연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상하게도 지금의 몸은 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딱히 병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곧장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뒤를 쫓아 종종거리며 내려갔다. 밤과는 달리 다소 편한 복장을 한 기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모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주님을 뵙습니다.”
이내 모란의 뒤를 따라 내려온 연을 본 기녀들이 작게 놀란 소리를 냈다. 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며 모란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꾸깃 미간을 구겼다. 이리 앉으니 확실히 몸이 작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어찌 된 아이인지요? 루주님 아드님이신가요?”
소면이며 딤섬 따위를 날라 오면서 기녀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연에게 보냈다. 음식을 보자 드물게도 아침인데 허기가 졌다.
“아니, 그냥 아는 아이. 당분간 맡게 되었어.”
연은 제 앞에 놓인 유별나게 작은 소면 그릇을, 다시 미간을 구기며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모란이 낮에 밖에 나가서 무얼 하는가 궁금했었는데, 그 의문을 풀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연은 이렇게 지내는 시간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생각했다. 다소 어색하면서도 야무진 손짓으로 젓가락을 잡았다.
“귀여워라. 뭐 먹고 싶은 것 있니?”
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기녀가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딱히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보통 아이들을 퍽 귀여워하는 편이니까.
그보다 뜻밖인 건 모란이 전혀 기녀들에게 추근거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모란과 기녀들의 사이는 무엇일까…… 충성 내지는 신뢰하는 사이에 가까웠다.
연은 식사를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모란이 먹는 양은 제법 대단했다. 기녀가 가져다준 두루마리를 읽으면서도 소룡포니, 소면 두 그릇이 훌쩍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이 열심히 소면을 먹고 있는 동안 모란이 틈틈이 소룡포를 폭 소면 위에 올려 주었다.
“배불러.”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지.”
하는 수 없이 소룡포를 한 입 베어 먹던 연은 문득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요즘따라 모란이 유독 자신을 먹이고 살찌우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느낌 탓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뭐든 얹어 주고 음식 접시를 제 쪽으로 밀어 주고……. 그런데 그 행동이 챙기는 거라기보다는…… 뭐랄까……. 무언가에 가까운데. 그러나 생각을 미처 잇기도 전에 모란이 슥 접시에 고기완자를 담아 내밀었다.
“이것도 먹어.”
연은 고기완자는 결국 반 남짓 남기고 말았다. 배가 불러서 겨우 차를 마시며 그가 모란이 하는 걸 바라보았다. 대개 기녀가 무언가 보고를 하면 모란이 듣고 이것저것 추리는 것이다. 연은 모란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 시진이 지나서야 기루에서 해야 할 모란의 일은 끝이 났다. 기루를 나서는 연의 손에는 기녀들이 챙겨 준 당과가 들려 있었다. 이러니 정말 아이가 된 것 같아 연이 어색하게 당과를 깨무는데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
“손잡아야지 길을 안 잃지.”
“내가 무슨 정말 어린애도 아니고 길을 잃어.”
이 거리는 연이 모란일 적 셀 수 없이 다닌 곳이었다. 그럼에도 연이 마지못해 모란의 손을 잡았다. 연의 걸음이 종종거렸기에 모란은 그에 맞추어 느리게 걸어 주었다. 연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물들었다.
모란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어느 좌판이었다. 좌판의 주인은 연의 이웃인 한철이었다.
예전에 모란에게 무언가…… 뜯긴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모란이 가자 한철은 좀 툴툴거리기는 했으나, 사이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시시덕거리고 담소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자리를 옮겼다.
그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어느 객잔의 점소이었고, 그다음으로는 포목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몇 사람을 만나고 나자 연은 모란이 지금 하오문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왔다. 사람들 중 두셋이 보이는 곳에 익숙한 새 문신을 하고 있었다. 한위의 말 못하는 늙은 유모가 하고 있던 문신 말이다.
‘그럼 초반에 한철에게서 뜯어낸 것이…….’
그냥 왈짜패처럼 삥 뜯고 다니던 게 아니었다 이거군. 하도 껄렁하게 다녀서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 백매화로 왔을 적에 하오문의 문주가 신분을 증명해 줄 거란 이야기를 했었지.’
정말로 친분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구나. 영명은 아직 백매화의 백 자도 꺼내지 않았지만―그런 무례를 저지른 자와의 혼인을 추진할 리가 없었다― 분명 신원 조사를 하긴 했을 것이다. 영명을 아주 우습게 본 고수가 아닌가.
물론, 신원 조사가 아주 까다로웠겠지. 환각 마법으로 만들어진 여인이니 본 사람마다 인상착의가 달랐을 터다. 게다가 백매화의 정체는 백모란이니 무슨 수로 찾아낼 수 있겠는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인 것을.
“그 화전민이 분명 거래를 끊었다 이거지?”
모란이 대장간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걸 멀뚱거리며 바라보다가 연이 흠칫하여 뒤로 물러났다. 또 희미한 옷자락이 모란 근처에서 펄럭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모란 앞에서 펄럭거리다가 이상하게도 돌연 연을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 같은 게…….
그때 모란이 힐끔 보더니 정체 모를 것에 손을 내저어 없애 버렸다. 연이 마른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을 꽉 잡았다.
‘다른 차원에서 깔짝거리니 뭐니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귀신 같단 말이야.’
다시 모란이 걸음을 옮기는 걸 타박거리며 연이 따라갔다. 그리고 슬그머니 모란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응?”
“혹시, 그, 뭐……. 귀신 같은 존재가 정말 있을까? 그냥, 궁금해서.”
모란이 왜 그렇게 물어보는지 다 알겠다는 얼굴로 히죽 웃었다. 연은 머쓱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귀신 같은 존재라면, 이따금 육신을 벗어나 그저 영체인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들이 있긴 해. 그런데 대개 거의 영향도 못 미치는 데다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지. 영체로 돌아다니는 건 꽤 힘들거든.”
있긴 있지만 거의 영향도 못 미치는 데다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니 연이 안도하여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의문이 들었다. 꼭 모란이 영체로 돌아다닌 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던 탓이다.
그러나 모란이 인적 드문 곳에 가 덥석 연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그 생각은 잊히고 말았다. 연은 반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곧 얌전해졌다. 모란이 곧장 순간이동을 했다.
‘가만, 평소에는 그냥 손잡는 것으로도 순간이동 잘만 됐잖아?’
일부러 이렇게 안았구나 싶어 연이 어깨를 퍽 때렸지만 모란은 별 타격도 없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어느덧 그들이 이른 곳은 어느 산속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수풀이 우거지고 산세가 거칠었다. 연은 모란이 저를 계속 안고 있자 다시 퍽퍽 때렸지만 모란은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 줘.”
“위험한 곳이라서 안 돼. 안기는 게 싫으면 업히련?”
업히는 것도 안기는 것도 싫었다. 연이 미간을 구기며 노려보든 말든 모란은 휘적휘적 잘도 산을 타고 걸어갔다. 확실히 어려진 몸으로도, 그리고 전의 몸으로도 걸어 다니기는 힘들겠다 싶은 험한 산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데?”
“이 산 주인 좀 설득하려 왔어. 하도 아래 동네 사는 이들이 못 살겠다 난리를 부려서. 하오문에서 종종 이런 일 해결해 달라 의뢰를 넣어 오거든.”
산 주인? 이런 크고 깊은 산의 주인이라면 어지간히도 부자인 모양이었다. 모란은 연을 안고서도 한 번도 비틀거리는 일 없이 훌쩍훌쩍 잘도 큰 바위며 고개를 넘어 다녔다. 그럴 때마다 어깨 너머의 풍경을 보면 연은 아찔해지곤 했다. 모란이 저를 떨어트릴 일이 없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소 재미있기도 하였다.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이런 경험을 언제 해 보겠는가? 물론 연은 어린아이일 때도 이런 경험은 없었지만.
“다 왔다. 한번 봐.”
산채 따위를 기대하며 돌아본 연은 얼이 빠졌다. 산채라고는 조금도 없고 대신 텅 빈 공터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냐, 거기 말고 저기. 큰 전나무 옆에.”
모란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연이 헉, 하는 소리를 낸다는 게 그만 히끅,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전나무 바로 옆에 사슴이 한 마리 서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슴이 아니었다. 몸의 크기가 마치 황소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부채처럼 크고 넓게 퍼진 검은색의 뿔에는 여러 종류의 잎사귀가 파릇파릇 돋아 있었다. 간간이 아직 피지 않은 여린 꽃봉오리나 작은 열매가 있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짐승의 것 같지 않은 깊고 검은 눈동자가 모란을 지그시 응시했다.
연은 모란이 누굴 향해 산 주인이라고 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산의 주인이란 다름 아닌 영물이었다. 터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뿔을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속도를 높이며 달려와 둘을 박을 것 같았다.
“설득……한다고?”
영물은 난생처음 보는 연이 사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속닥거렸다. 어쩐지 큰 소리로 떠들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슴에게는 그런 위압감이 있었다. 야생의, 산 것의, 마치 짐승 같은…….
혹은 작은 바다를 보는 듯한.
꼭 이따금 모란에게서 받은 것 같았던 느낌이…….
“그냥 짐승도 아니고 영물이잖아. 당연히 설득이 가능하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모란이 껄렁껄렁 손짓을 했다. 연이 보기에는 꼭 공격 좀 하라고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위협적으로 사슴이 머리를 흔들더니 곧장 쏜살같이 달려왔다. 연은 저도 모르게 꾹 눈을 감았다. 이내 쾅, 하고 바위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슬쩍 눈을 떠 보니 사슴의 뿔이 허공의 금빛 고리에 걸려 있었다. 모양새가 딱 모란의 눈에서 봤던 그런 고리였다. 힘으로 밀어붙이려다가 포기하고 뒤로 물러난 산 주인은 영 심기가 언짢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줬다. 들이박고 싶은지 머리를 흔들고 앞발을 치켜들기도 했다.
“이야기 좀 하려고 왔어. 공격하는 걸 봐주는 건 이번 한 번이야.”
더 공격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모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슴이 멈추었다. 게다가 모란도 조근조근 타이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 몇 죽였다며? 하나뿐이나 둘뿐이나 죽인 건 죽인거지……. 그래, 네 새끼 죽어서 억울한 건 알겠는데 너도 아직 어리잖아. 복수를 하고 싶거든 주제 파악을 좀 해.”
연이 사슴과 술술 대화를 나누는 모란을 한번, 사슴을 한번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대화가 되긴 되는 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난 경고했어.”
그리 말하고는 모란이 뒤돌았다. 사슴은 모란과 연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산처럼 우뚝 서서 바라보았다. 모란이 성큼성큼 걸어 어느 인적 없는 계곡에 다다를 때까지, 연은 내내 넋이 나간 채였다. 모란이 그를 내려 두었을 때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먹을래?”
언제 챙겨 왔는지 모란이 품에서 빨간 사과를 꺼내며 물었다. 사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던 연이 눈을 깜박거렸다.
“아까 그게, 그러니까…… 영물이었어?”
“응. 어린 녀석이야. 보아하니 아직 오십 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덕분에 어설퍼서 사람들 눈에도 잘 들키곤 하지.”
모란이 사과를 딱 반으로 쪼개 연에게 내밀었다. 연은 그저 받아 들기만 하고는 아까 보았던 광경을 곱씹어 보았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숲속 사이에 서 있던 거대한 사슴이라니…….
털썩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모란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계곡물이 시원하게 산을 타고 흘러내려 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는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설득하러 온 거야?”
“딱히 사람들을 죽이건 말건 상관없어. 어린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가 죽어 버리면 이래저래 아깝잖아.”
인간들 죽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영물 죽는 것이 아까웠구나……. 보는 시각이 참으로 다르기도 하였다. 모란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영물이 되기란 쉽지 않아. 짐승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개중 특별나게 타고난 놈들만이 어느 날부터 영물이 되는 거야. 백여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니 아깝지 않겠어?”
“그런……가?”
“그리고 영물이란 녀석들은 본원지기가 샘처럼 줄줄 넘쳐 나는 것들이라 산이 풍성해져. 지나가는 자리마다 꽃이 피고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히지. 짐승들은 새끼를 잘 배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인간에게도 좋은 일이거든.”
본원지기가 어떻게 샘처럼 줄줄 넘쳐 날 수가 있지? 그런 건 난생처음 들어 보는 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꽃이 피고 싹이 튼다……는 걸 듣자 어째서인지, 모란이 자꾸 정원에 피워 대던 꽃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연은 곧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휘휘 고개를 저었다.
‘……한데 분명 전에 꽃 피우는 건 마법이 아니라고 했었는데.’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모란이 왜, 피곤해? 하고 물어 왔다. 좀 피곤하기는 하였지만 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해도 중천이다. 게다가 자신 때문에 모란의 발목을 잡기는 싫었다.
“혹시 모란 당신도…… 뭐…… 영물(靈物) 비슷한 건가?”
그 말에 모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긴 영물은 엄연히 짐승이니 기분 나쁠 법도 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칠칠치 못하게 본원지기도 수습 못 하고 질질 흘리고 다니는 것들과 비교하면 안 되지.”
……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럼 뭐야? 영물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아니면 영물보다 급이 높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사람에게 영물이라는 호칭이 가당키나 하던가? 연이 뒤늦게 아삭아삭 사과를 먹었다. 달고 맛있었다.
그때 연을 흘끔 본 모란이 말을 꺼냈다.
“실은 오늘, 아니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가 궁금한데?”
연이 사과 씨를 빼 땅에 따로 톡톡 묻어 주었다. 산에서도 사과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근처에 계곡도 있고 땅도 기름지니 열매들이 잘 자랄 것 같았다.
“넌 네 사부를 좋아하지?”
“좋아하지.”
“그럼 주강도?”
연이 사과 씨를 심은 곳 위를 발로 꾹꾹 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무슨 장난을 치려고 저런 걸 물어보는 걸까 싶어 보자 모란의 얼굴이 진지했다.
“당연한 질문이지만 넌 형을 많이 좋아하지? 남궁연오 말이야.”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고 있어? 형제잖아.”
“한위도?”
“물론, 한위도.”
그리 대답하자 모란이 미간을 접었다. 그러고 보면 모란에게는 형제자매가 없었다. 오로지 어머니가 있었을 뿐이다. 형제자매가 있는 느낌이 궁금해서 물은 걸까? 모란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연이 한 것처럼 사과 씨를 바로 옆에 심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구하겠네? 지인이고 가족이니 말이야.”
“……왜 그런 질문을 해?”
불안해진 연이 물었다. 모란이 쓸데없이 이런 걸 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한위가 위험에 처한 걸까?
“그렇다면 가족이지만 지인만도 못한…… 네 아버지, 남궁영명이 위험에 처한다면?”
기분이 불쾌해진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일어서자 비로소 모란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영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구하겠냐고? 대체 왜 지금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란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바꾸지. 한위 그 꼬마가 남궁영명에게 복수하고자 한다면 도울 건가? 아니면 내버려 둘 거야? 혹은 말릴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참의 설명 뒤에 그가 모란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거짓말이나 기분 나쁜 농담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으나 모란은 부정하지 않았다. 연은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난 네 말을 따를 거야.”
그리 말한 뒤 모란은 가만히 기다렸다. 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결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무거운 침묵과는 달리 산바람이 그들 사이로 산들산들 불었다.
***
히죽 웃으며 모란이 연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렴. 뭐어, 어린아이의 몸으로 지내는 것도 꽤 괜찮지 않으냐?”
“전혀 안 괜찮아!”
모란이 나름대로 도닥였으나 연의 성미만 점점 예민해질 따름이었다. 도통 일곱 살 아이의 몸에서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탓이었다. 며칠 뒤에도 이러면 세가의 사냥대회에 참가하는 건 물 건너가는 것이다.
게다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두문불출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모란의 말로는 아직 그 이불 골렘이라는 것이 들키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들키게 된다면?
“흠.”
신발까지 신긴 모란은 퍽 만족스러워했다. 연이 어린아이의 몸이 된 이래로 요 며칠, 그는 제법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매일매일 색색의 옷을 갖고 와서는 이래저래 꾸며 보는 것이다.
연은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고, 그다음에는 다소 짜증을 냈으며 세 번째에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머리도 복잡해서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모란이 지나치게 흡족해 보였던 탓이다. 어찌나 흐뭇해하던지 연은 모란이 좀 미심쩍기까지 했다. 이런 부작용을 일부러 유발시킨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연의 생각과는 달리 실상 모란이 유도한 부작용은 재워 버리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앞으로 소란스러워질 얼마간의 기간 동안만이라도 안전하게 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연이 사부에게 받았다면서 홀랑 먹어 버린 환약이 변수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 많이 틀어지긴 했지만, 이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연은 심란해할지언정 앞으로의 소란에 심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일 없이 잘 이겨 낼 듯싶었다.
‘상당히 안정되었어.’
연이 마음대로 신겨진 신발을 노려보는 동안 모란이 상태를 살폈다. 가장 안 좋을 때는 하루 이틀도 제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몇 년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몇 년 정도로는 부족했다.
최근에 치료할 때마다 모란은 점차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치료를 끝내면 마흔, 혹은 오십까지는 살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짧지 않나 싶은 것이다. 단순히 본원지기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명을 길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에 잠겨 있던 모란의 시선이, 허공에 발을 동당거려 보는 연에게로 향했다. 모란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어려진 모습은 정말로 귀엽지 않은가. 어린아이는 그다지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달랐다. 아주 많이 달랐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무슨 눈?”
“그러니까…… 그런 눈!”
구체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연이 작은 주먹만 쥐어 보였다.
“귀여워서 시선이 자꾸 가는 걸 어찌할 수는 없는데. 원한다면 눈을 가리고 다닐까?”
모란이 능청맞게 굴었다. 연은 어이가 없어 대꾸할 말도 찾지 못했다. 모란은 정말로 연을 귀엽고 어여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 연이 넌 어릴 적 말고 다 큰 모습도 예쁘니까.”
“무슨 걱정을 했다고!”
상대를 하지 말자 싶어서 연이 진저리를 쳤다. 귀가 뜨끈뜨끈해졌다. 아무리 어려졌다고는 하여도 다 큰 어른에게 귀엽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는 좀 그만했으면 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앉아 있는 걸 모란이 가볍게 들어 올려 안았다. 연이 미간을 접었다. 요 며칠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모란은 정말 바쁘게 사방을 돌아다녔다.
원래의 몸으로도 감당 못 할 일정인데 어려진 몸으로는 더욱 힘들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저를 안고 돌아다니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안겨 다니니 편안하고…… 좋긴, 좋았다.
“좋아. 오늘은 좋은 객잔에 가서 좋은 점심을 좀 먹어 볼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모란은 맛있는 식사를 할 만한 곳을 많이 알고 있었다. 연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었다. 다행히도 모란이 가는 곳은 건물이 허름하든 아니면 호화스럽든 간에 음식이 맛있는 편이었다.
“이런.”
모란이 혀를 쯧 찼다. 그가 고개를 돌려 어느 한쪽을 바라보았다. 세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누가 골렘을 건드렸는데.”
“뭐?”
지금 세가에서 아픈 연 행세를 하고 있는 게 그 이불 골렘이란 것 아닌가. 연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들키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그런데도 모란은 태연했다.
“누가 골렘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그냥 이상하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맥을 짚어 보겠지. 맥을 짚으면 심장이 뛸 리가 없으니 아마 죽은 사람 같을 테니까 많이 놀라기는 하겠…… 음. 진짜 가 봐야겠군.”
뭐? 맥을 짚으면 죽은 사람 같을 거라고? 연이 기겁하거나 말거나 모란은 그를 자리에 내려 두었다. 혼자 내버려 둘 때마다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영 마뜩찮고 찝찝하였다. 그러나 세가에 연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는 어린 연을 알아볼 사람들이 많았다.
“금방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면 목걸이 사용하는 거 잊지 말고.”
“얼른 다녀오기나 해.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남궁세가가 있어 이 근처는 그다지 치안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녹림의 관아 점령 사건도 있고 하여 범죄자들이 숨을 죽이고 지냈다. 모란이 사라진 뒤 연은 멀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란일 때 약재를 사러 이곳저곳 뛰어다니곤 하였는데…….
‘알아서 찾아오겠지.’
말마따나 연은 정말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타박타박 돌아다니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란이 꽤 오래 걸리기에 입이 심심하여 당과를 사 먹을 때였다. 어디 앉아서 먹으려고 뒤를 돌아보는 찰나, 뭔가에 퍽 하고 부딪쳤다. 어린 몸의 연으로서는 당연히 꽈당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입도 먹지 못한 당과가 아깝게도 데굴데굴 굴러 흙이 잔뜩 묻었다.
속으로 쯧, 혀를 차며 일어나려는데 먼저 번쩍 일으키는 손이 있었다.
“괜찮니, 꼬마야?”
허리에 검을 찬 것을 보니 무사였다. 그런데 그냥 무사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무사다. 조금 얼어붙은 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사가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다. 그리고 보통 이럴 때에는…….
눈만 굴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연오가 근처에 있었다. 어느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런, 당과가 엉망이 되었군.”
연은 연오의 눈에 띄기 전에 가능한 내빼고 싶었다. 그러나 무사가 당과 값을 내주려는지 전낭을 뒤적이는 게 아닌가. 괜찮다고 하기도 전 작은 소란에 연오의 시선이 연에게 향했다. 연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엇,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제 실수로 꼬마를 넘어트리고 말아서.”
그러나 연이 피하기도 전에 연오가 알아차리는 게 먼저였다.
“……가만.”
연오가 걸어와 연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연은 그의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연오의 곁에 있던 장로 남궁운이 대신 생각을 말해 주었다.
“연 도련님을 닮았습니다.”
“운 장로님이 봐도 그러십니까? 정말 놀랍게도 연이 어릴 적을 닮았습니다.”
연은 그만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당연히 닮았겠지. 바로 장본인이 아니던가. 연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주위를 둘러보고는 연에게 물었다.
“혹시 부친이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이건 설마……. 자신에게 혼외자가 있다고 의심하는 그런 상황인가? 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을 들을 때까진 떠날 것 같지 않아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슬금슬금 도망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 무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연오가 눈짓으로 무사들을 쫓아 보내며 다정하게 물었다.
“겁먹지 말거라.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란다. 음, 그래. 당과를 떨어트렸다고 했던가?”
연오가 무사 한 명을 시켜 당과를 사 오게 했다. 그리고 손에 쥐여 주기까지 하니 더는 수가 없었다. 결국 연이 압박감을 못 이기고 아주 자그맣게 말했다.
“아버지는 안 계시는데…….”
실제로도 남궁영명을 없는 셈 치고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 않으니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연오와 장로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연은 연오가 대단히 큰 착각을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연은 어떤 방법으로든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 주루에서 살아요…….”
기녀가 낳은, 부친 없는 혼외자라고 알아서 생각하길 바라며 그렇게 말했는데 어째선지 연오와 장로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백매화가 루주라고 하였지요.”
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백매화가 아니라 모란이 주루의 루주인데! 그도 장안에 파다한 소문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미모의 부유한 상단주가 남궁세가 둘째 도련님에게 청혼을 신청했다는 소문이었다. 최근 모란을 따라다니니 그가 온갖 정보에 훤한 이유를 알 수 있었거니와, 저도 자연히 소문에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설마…….”
연오가 크게 오해한 얼굴을 했다. 게다가 그는 백매화가 난장을 부리던 날 자리에 없던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잘 보면 다섯 살이라고도 봐 줄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련님 나이가……. 하긴 열다섯이면 사내 노릇하기에는 충분하긴 하지요.”
아니! 그거, 그거 아닌데! 절대 아닌데! 맹세코 연은 열다섯에 사내 노릇 한 적은 없었다.
연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동안 연오는 심각한 얼굴로, ‘그럼 내 조카인가?’ 하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졸지에 연과 백매화 사이에 아들이 생기려는 순간이었다.
모란이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그가 자연스럽게 무사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연이 얼른 슬그머니 모란 뒤에 숨었다.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귀가 다 화끈거렸다. 모란이 능청스럽게 연오에게 말을 건넸다.
“소가주님! 여기서 다 뵙게 되는군요.”
“자네…….”
연오가 모란과 그 뒤에 숨은 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썹을 찌푸린 그가 물었다.
“이 아이와 아는 사이인가?”
“그럼요, 저의 먼 친척 아이입니다. 잘 알고 지내는 누님이 일이 생겨 돌보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연이 안 보이게 모란의 허벅지를 옴팡지게 퍽 때렸다. 안 그래도 오해하는 중인데 오해를 더 유발하면 어떻게 하나!
모란의 말에 연오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백모란과 백매화라는 이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를 짓고 있을지 잘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럼 혹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나?”
소중한 동생의 아들을 이렇게 세가 밖에 방치할 수는 없다고 다짐하는 얼굴로 연오가 말했다. 모란이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대체 왜 그래! 연이 모란의 돌덩이 같은 허벅지를 다시 퍽퍽 때렸다. 바로 옆의 무사가 흘깃 보기에 관뒀지만 이러다가는 남궁연에게 혼외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돌 판이었다. 모란이 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누님에게는 사랑하는 분이 계셨답니다. 이 아이는 그분을 아주 똑 닮았죠. 한데 안타깝게도 그분은 칠 년 전 마차에 치여 누님과 조카아이를 남기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누님은 열성적으로 아이를 키우셨답니다. 다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시고 닮은 사람들에게 청혼을 하시곤 하죠.”
“그런 일이 있었군…….”
연오와 장로의 시선이 연에게 향했다. 그들은 이제 다소 겸연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연도 모란의 단단한 허벅지를 때리던 걸 그만두고 내심 안도했다. 아무튼 저 말빨하고는…….
그럼에도 여전히 의심이 가는지 연오는 물끄러미 연을 바라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참, 연이의 몸은 좀 어떤가? 요즘 침상에 누워만 있던데.”
“환절기라 그런지 기력이 많이 떨어져 계십니다. 아픈 것은 아니니 그저 푹 쉬게 내버려 두면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란이 청산유수처럼 매끄럽게 대꾸했다. 당할 때는 그토록 얄밉던 약장수 같은 말발이 이럴 때는 정말 좋았다.
“그래, 잘 부탁하겠네.”
연오가 연에게서 끝내 시선을 떼지 못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무사들이 따랐다. 연이 휴,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이상한 오해가 생길 뻔하였다. 연오의 일행이 완전히 사라지자 모란이 연을 가볍게 들쳐 안고 걸음을 옮겼다. 객잔에 도착하여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야 연이 물었다.
“그래서, 그…… 골렘이란 것은 좀 어때?”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네 스승이 와서 맥을 짚어 본 모양이야. 아주 눈치가 빠른 인간이던데. 사정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서 가볍게 마법을 좀 보여 줬지.”
“뭐?!”
“어쩐지 네 스승이 날 좀 싫어하는 것 같았어. 꼭 날 보는 시선이 납치범 보듯 하던데.”
연이 미간을 짚었다. 모란이 어지간히 은록 앞에서 껄렁하게 군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긴 모란은 딱히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닌데, 뭐라고 할까……. 유아독존(唯我獨尊)? 아니, 그보다는 인생을 혼자 유유자적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그나저나 마법을 그렇게 아무에게나 보여 줘도 되는 거야?”
“뭐 어때?”
만약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경우 마법이란 것은 사술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모란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하긴 그는 평소에도 마법을 굳이 철저하게 숨기기보다는 귀찮은 걸 피하기 위해 적당히 감춘다는 느낌이 강했다.
모…란…….
점소이가 내온 음식을 먹는 중 들리는 목소리에 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또 모란 옆에 무언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옷자락보다는 손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란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파리 쫓듯 손을 휘저어 없앴다. 쭈뼛 소름이 돋은 연이 젓가락을 멈추었다.
“그거, 대체 언제까지 가는 거야?”
“글쎄……. 저쪽에서 포기할 때까지? 좀 끈질기기는 하군.”
연이 보기에는 마치, 저주 같아 보이는데 모란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가끔 그 일렁이는 것이 연에게 방향을 돌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무시하려고 애쓰며 그가 마파두부를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나 모란이 추천한 객잔답게 풍미가 좋았다.
‘어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면 좋겠는데.’
세가의 사냥대회가 벌써 코앞이었다.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연이 한숨을 폭 쉬며 모란이 앞에 슬그머니 밀어 준 음식 접시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다. 사냥대회에 꼭 참가하고 싶었을뿐더러 더는 이상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 주루에서 지내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귀여운 어린아이 취급은 이제 그만 받고 싶었다.
다행히도 사냥대회를 앞둔 바로 전날 아침, 아침에 일어난 연은 자신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불 속에 파묻혀 뒤척거리는데 이상하게도 몸에 닿는 감촉이 생경하여 일어나 보니 알몸이었다. 밤새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입고 있던 옷이 벗겨진 것이었다.
자그마치 칠 일이나 되는,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그사이 어린 몸에 적응했다고 다 큰 몸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는데 허리에 감기는 팔이 있었다. 놀란 연이 펄쩍 뛰었다. 어느새 모란이 턱을 괴고 침상 옆에 기대어 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
모란이 이불 밖으로 드러난 연의 무릎 위를 입술로 가만히 눌렀다. 요 며칠 동안은 아예 없던 종류의 행동에 그가 움찔하며 이불로 맨다리를 덮었다. 연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주루에서 지내는 내내 모란이 바로 옆에 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심지어 침상을 같이 써도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일까지는 주루에서 쉬는 게 어때?”
“내일이 바로 세가 사냥대회야.”
“그다지 즐거운 사냥대회는 아닐 텐데.”
걸칠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연이 모란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투가 어쩐지, 드물게도 모란의 속마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연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모란이 저를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듯한…….
‘모란에게는 내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
그간 모란이 제게 하는 행동과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을 비교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연으로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모란이 자신을 꽤 아낀다는 건 분명했다. 그 사실이 기분을 다소 들뜨게 만들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잖아.”
연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모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는 것이다. 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보았다.
“……그런 못된 버릇 들면 곤란해.”
“무슨 못된 버릇?”
“네가 그런 식으로 바라보면 뭐든지 들어줘야 할 것 같단 말이지.”
이건 무슨 농담인가 하여 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진심이었다. 요즘에는 아는 사람 중 모란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후 연이 입을 옷을 가져다주었다. 어린아이였을 때 가져다준 것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럽고 연에게 잘 어울리는 푸른 색감의 옷이었다.
“식사하고 세가에 데려다줄게.”
고개를 끄덕인 연이 옷을 입었다. 어쩐지 몸이 매우 개운한 것이 이제까지 중 가장 상태가 좋게 느껴졌다. 기분이 퍽 좋아 보이는 모란이 가까이 다가와 직접 허리대를 매 주었다.
모란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연의 심장은 좀 빠르게 뛰었다. 이제는 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의미를 잘 알 것 같았다. 모란은 어떨까? 그도 자신에게 무언가 느끼기는 할까?
주루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은 오랜만에 화정당으로 돌아왔다. 며칠 만에 돌아왔으나 딱히 그립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밖에 나가서 산 며칠 동안이 정말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저 세가에 한위와 연오가 있어 아직까지는 뛰쳐나가지 않고 있다는 걸 새삼 되새겼다. 형제들이 좋은 것만큼이나 세가에 영명이 있다는 게 싫었다.
침상 위에는 이불 골렘이 다소곳하게 누워 있었다. 언뜻 보면 사람의 형체 같아 보이기는 했다. 이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자신이 자고 있는 걸로 보일 거라니……. 연이 이불을 손으로 만지자 팔이라고 추정되는 이불자락 끝이 파닥거렸다.
모란이 이불 속으로 쑥 손을 밀어 넣어 옥 노리개를 꺼냈다. 그러자 이불은 언제 살아 움직였냐는 듯 그저 흐트러진 이불 더미가 되었다. 연은 다소 죄책감이 들었다.
‘사부님이 많이 놀라셨을 텐데.’
뭐라 언질이라도 드릴걸 그랬다. 갑자기 어려지는 바람에 너무 경황이 없었다.
“좀 누워서 쉴래?”
“형님에게 가서 사냥대회 간다고 말씀드리고 올 거야.”
끊임없이 사냥대회 불참을 권하는 모란을 무시하며 연이 외투를 걸쳤다.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모란이 연 대신 침상에 길게 누웠다. 눈을 감는 게 낮잠이라도 자려는 모양새였다. 언제부터 모란이 제 침상에 누워도 별말 안 하게 되었나……. 다소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연이 화정당을 나섰다.
그는 먼저 한위에게 향했다. 폐월당으로 향하니 주강과 대화를 나누다가 한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며칠 만에 보는 것이라 연도 한위도 서로를 무척 반가워했다.
듣자 하니 한위는 몇 번이고 화정당을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올 때마다 자고 있어서 무척 걱정했다는 말에 연의 양심이 쿡쿡 찔렸다. 한위도 은록도 이제는 마법을 알고 있으니 어찌 되었다 언급할걸 그랬다고 다시 한번 후회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
얄팍한 후회도 잠시, 아무것도 모르는 한위를 보는 연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이제 한위에게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풀밭을 기어 다니던, 꼬질꼬질하고 말투가 어눌했던 그 어린 꼬마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얼굴과 몸에서는 배운 태가 나고 밝았으며 건강했다.
한위가 언제까지고 지금과 같으면 좋겠다고 그가 바랐다. 연오나 연과는 달리 한위만큼은 세가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나중에 커서 매정한 아버지가 있었지, 정도로 생각했으면 했다. 연이 다정하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었느냐? 스승님들께 배우는 것은 어떻고?”
“잘 배우고 있었습니다!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글을 배우는 것도 검을 배우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지난번에는 기본적인 기관진식에 대해서 배웠는데…….”
한위가 조잘조잘 떠드는 걸 보며 연이 문득 주강을 바라보았다. 주강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은 한위를 보는 주강의 시선이 전처럼 차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위가 별일 없이 이대로 성장하면 주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인이 되어 줄 터였다……. 연은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위와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다음으로는 연오에게 향했다. 연오도 마찬가지로 연을 보자 매우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먼저 물어보는 건 아니나 다를까 몸의 상태였다.
“좀 어떻느냐? 네 주치의 말로는 기력이 없어 많이 쉬어야 한다던데.”
“이제는 괜찮습니다. 푹 자고 먹으니 상태가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많이 좋아 보이는구나. 무슨 치료를 하는지 몰라도 주치의 실력이 좋은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다.”
실은 푹 자고 먹기도 먹은 것이었지만, 모란이 주루에서 치료를 과도하게 하는 바람에 상태가 쌩쌩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걸 연이 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연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일 사냥대회에 제 자리도 물론 있겠지요?”
“말이라고 하느냐. 한위 자리 역시 있다. 하지만 괜찮겠느냐? 바로 어제까지 침상에서만 지냈는데. 정 안 좋으면 쉬어도 괜찮다.”
연오의 제안에 연이 고개를 저었다. 내일만큼은 그가 꼭 참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푹 쉬었으니 답답하여 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그저 근처 좋은 곳에 앉아 사냥하는 걸 구경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연의 안색을 살피고는 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 생각하기에도 이제 손도 발도 덜 시리고 전보다 얼굴에 혈색이 돌기는 하였다.
“그래, 너무 안에서만 지내도 안 좋은 법이다. 대신 주치의를 꼭 데려가도록 하거라.”
물론 연은 ‘주치의’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연오는 몸이 찬 동생을 위해 따뜻한 차를 내오도록 명령했다. 고급스러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연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상대가 누구이든 세가나 다른 사람은 상관치 말고 좋아하는 사람과 연을 맺어도 된다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슨 말인가 하여 의아해 고개를 들던 연이 이어지는 말에 컥, 하고 기침했다.
“상대에게 혹 아이가 있다든가, 나이가 많다든가 하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혹은, 상대와 혼인 전에 가진 아이가 있어도 괜찮다.”
아, 아이가 있다는 건……. 연은 얼마 전에 시장에서 어려진 몸으로 연오와 만났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연오의 오해는 아주 오래갈 것 같았다. 그가 일장 연설을 하려 하기에 연은 간신히 한위의 성장을 핑계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식은땀 나는 대화를 마치고 난 뒤에야 연은 화정당으로 돌아왔다. 연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라도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날의 작은 고난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돌아오니 침소에 모란뿐만 아니라 은록도 있는 것이 아닌가. 연이 덜컥 멈추었다. 모란을 바라보는 은록의 기세가 영 좋지가 않았다.
“사부님…….”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은록이 연을 보자마자 다가와 다짜고짜 맥부터 짚었다. 굳은 얼굴이 좀 누그러지는 걸 보자 얼마 전 이불 골렘의 맥을 짚었다던 게 떠올랐다. 죄책감에 연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모란이 그 와중에 또 껄렁하게 굴었다.
“보이지? 당신 제자 안 죽었다니까, 글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죽었다느니 살았다느니 하는 게, 그 이불 골렘 건으로 말다툼이 있었는지……. 게다가 다시 보니 모란은 껄렁하게 굴 뿐만 아니라 드물게도 기분이 좀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리 호언장담을 하는 걸 보니 신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의원인 은록의 귀에는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이 매우 아니꼽게 들린 모양이었다. 연은 이해했다. 세상에 환자가 죽는다 아니다 호언장담하는 의원은 없었으니까. 제 아무리 명의라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법이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언제부터 저 두 사람 사이가 저렇게 안 좋았지?’
하지만 곧 연은 한 번도 둘 사이가 좋았던 걸 본 적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대화 한번 한 적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다지 맞지 않는 사이였던 것이다.
“신? 못 될게 뭐 있나.”
모란이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연이 당황해 모란을 바라보았다. 은록이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참으로 오만한 자로군.”
사부님, 하고 미처 부르기도 전에 은록은 그대로 침소를 나갔다. 연이 미간을 짚었다.
“대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하지만 모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연은 잠시 망설이다 은록을 쫓아 나갔다. 심기가 언짢아진 모란이 침상에 벌렁 누웠다.
은록이란 자는 실로 눈치가 비상했다. 연은 모르겠지만 그는 한 번도 모란을 모란이라 부른 적이 없었다. 몸에 들어온 첫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부러 얌전히 굴었는데도 그는 첫말을 꺼낸 순간부터 혹시 다른 인격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기까지 했다.
사부님이라고 불러 보아도 대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누구냐고 대놓고 묻기까지 했으니 할 말 다 한 것이다. 그런 자가 연을 보았을 때 어땠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녹림채 사건 전부터 은록이 의심하고 있었으리란 건 분명했다. 그전까지는 확신할 만한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그 비상한 눈치는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이불 골렘을 만지다 못해 뒤집어 놓기에 달려가 보니 은록이 있는 게 아닌가. 제자가 오래간 아프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맥을 짚어 본 모양이었다. 당연히 이불에 맥 따위가 잡힐 리가 없었으니 이리저리 만져 본 것 같았다.
처음에 모란은 제자가 죽었다고 착각하고 이성을 잃었겠거니 여겼다. 잘 타일러 보려고 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불 골렘의 머리 부분을 들어 올리다 말고 모란을 돌아보는 은록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했다. 모란이 도착했을 땐 기어이 이불 골렘의 핵인 옥 노리개를 보란 듯이 찾아 놓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옥 노리개를 뺏기자마자 평범한 이불이 되어 버리는 골렘을 보며 모란이 입꼬리를 씰룩 움직였다. 참으로 냉정하고 침착한 자다. 환상 마법 때문에 실제로는 제자 몸을 헤집는 것처럼 느껴졌을 텐데. 가짜란 걸 알아차렸다는 건 기감도 매우 예민하단 의미다.
은록이 모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모란도 은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치 빠른 인간은 딱 질색이다.
-연이는?
-사정이 있어서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면서 모란이 다시 이불 골렘을 만드는 동안 은록은 꼼짝도 않고 서서 지켜보았다. 눈앞에서 모란이 마법을 부리는 것을 보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뭘 하는지 보이지도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누구의 목숨을 뺏어 연을 살리고 있는 거지?
모란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불 골렘을 완성시키며 뒤돌았다. 그것마저 눈치채셨다, 이거군. 그가 팔짱을 꼈다.
-그 누구의 목숨도 뺏은 적 없어.
땅속에 파묻은 인간들이 생각나기는 하였으나 그조차 목숨을 빼앗는 건 아니었다. 생기를 뺏는 것과 본원지기를 뺏는 건 다르다. 모란이 중요한 재료라면 땅속에 파묻은 인간들은 감미료와 같은 것이었다.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없으면 퍽 여러 가지가 힘들어지게 되는 재료들 말이다.
-처음 맥을 짚었을 때 연은 한 달도 채 못 살 것 같았다.
모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의 제자 명줄이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데도 그리 태연히 굴고 있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나아지더군. 아주 이상할 정도였다. 의술로는 불가능한 회복이었지.
-잘되었네. 제자가 금방 죽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아 있을 수 있어서.
점차 심기가 불편해진 모란이 조금 비꼬았다. 은록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런 일에 대가가 없을 수는 없다. 그래, 사적으로는 연이 오래 살게 되어 기쁘지 않다고는 못하겠군. 그러나 아는 바로, 내 제자는 결코 그런 비열한 방식의 치료를 수락하지 않았을 텐데.
모란은 제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를 정확히 깨달았다. 은록이 그가 연을 속이고 있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가? 당연히 있지. 그의 수명을 잘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닌가. 연의 성격으로는 수명을 잘라 나누어 준다거나 땅속에 인간을 파묻어 생기를 전해 주기로 했을 때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쯤 무슨 상태가 되어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
-그렇다면 연이 치료 방법을 거절하게 되는 일이 있다면 어쩔 것인데?
-연의 의사에 따라야겠지.
아주 고지식한 작자로군. 안제테다였다면 기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천성이었다. 물론 모란은 은록의 말에 따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안제테다에서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깨달은 건 세상에 목숨보다 중한 건 없다는 것이었다. 신념이니 윤리며 도덕, 그 모든 게 목숨 앞에서는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처절한 방식이라도 살아남아야 그런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끼는 자의 목숨이라면 더욱 그랬다.
게다가 지금 연에게 하는 건 비열한 방식 축에는 끼지도 않았다. 자신의 수명을 나누어 주는 것? 흔히들 말하는 바에 따르면, 도리어 숭고한 일이 아닌가. 땅속에 파묻은 자들? 남을 해하려 한 자는 언제고 자신에게도 해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법이었다.
모란은 그랬다. 그는 그런 자였다. 수단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했다.
다른 말로 은록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은록이 연의 의사를 존중하여 산적들이나 흉악범 따위를 납치해다가 땅속에 파묻는―이쪽에서 말하는 식으로는 사술― 식의 일을 하지 않고 연을 죽게 내버려 둔다면, 모란은 숨겨 가면서라도 그리하여 연을 살리는 것이다.
물론 모란에게도 나름대로의 선은 있었다. 그가 정말 양심 없이 수단 방법 안 가렸다면 가장 생기가 왕성한 어린애나 길 가던 젊은 사람을 아무나 납치해 죽을 때까지 파묻었을 터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마법사들이 흔히들 하는 그런 역겨운 짓거리 말이다.
모란은 문득 녹림 사건 당시 연이 왕장호를 죽이던 날을 떠올렸다. 연의 상태가 무척 안 좋았음에도 그는 일찍 나설 수가 없었다. 왕장호를 평온한 죽음으로 인도하던 연의 얼굴과 분위기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죽어 마땅한 악질인데도 연은 상대에게 연민을 가지고 평온으로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저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왕장호의 목숨을 거둬 없앴겠지.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물론 모란 같았으면 고통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을 터.
-아무튼 대가가 있건 말건 내가 치를 테니 이만 가 보시는 게 어때? 당신 제자는 며칠 뒤에나 돌아올 거거든.
그 말에도 은록은 한참을 모란을 쳐다보다가 돌아갔다. 그가 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모란도 주루에서 기다리고 있는 연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은록이 그 뒤로 계속 이불 골렘을 건드리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하고 가 보면 또 은록이었고, 그러면 신경전을 벌이다 둘 다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연은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하며 가족들 보러 갔다 하여도 대꾸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으니……. 그래, 연이나 한위나 둘 다 지나치게 그를 잘 믿기는 했다.
모란이 미간을 구겼다. 언젠가는 연에게 치료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말을 하긴 해야겠지. 그러나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 연의 혼이 완전하게 수복되기 전까지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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