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六章 : 모용세가 (8/19)

六章 : 모용세가

“가주님, 사영입니다.”

남궁사영이 조용히 불렀다. 퍽 늦은 밤이었다. 세가에 깨어 있는 사람은 경비를 서는 무사 정도밖에 없었다. 늦게까지 세가의 일을 돌보는 남궁연오 혹은 남궁영명, 그리고 남궁사영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들어오게나.”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사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명은 그를 본체만체 검만 손질했다. 사영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게 다 창연각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 창연각에 침입했던 자는 믿기지 않는 수준의 고수였다. 사영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에 의해 얻어맞고 목이 졸려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그뿐이랴, 나중에 눈을 떴을 때 그의 검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치욕스러운 기억이었다.

그 후로 사영은 장로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영명에게서 신뢰를 잃고 말았다. 크나큰 손실이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찾아왔나?”

“아무래도 미심쩍은 일이 있어 이리 왔습니다, 가주님.”

그제야 남궁영명은 검 손질을 잠깐 멈추었다. 그의 매서운 시선이 사영에게 향했다. 자존심이 상한 사영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지난번 창연각 사건과 관련된 일입니다.”

“창연각 사건?”

영명의 시선에 언짢음이 묻어났다. 창연각 사건 후로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직도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젊은 남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그 남궁세가의 창연각이 털렸다는 소문이 얼마나 강호에 빨리 퍼져 나가던지 사영은 속이 다 쓰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습니까? 범인이 세가로 들어온 흔적도, 나간 흔적도 없다니 말입니다. 혹여 내부자의 소행일 수도 있습니다.”

“내부자의 소행이라? 내부자라 함은 자네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건가?”

영명이 비꼬자 사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최근 영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내 신경이 날카로웠고, 원래도 좋지 않던 성정이 더 포악해져 있던 참이었다. 그가 아무런 말도 못하자 영명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사영이 이를 악물었다.

“가주님, 어찌 저를 의심하십니까? 세가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지 오랜 세월입니다.”

“그래, 자네가 창연각 도둑에게 협조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렇다기에는 자네가 입은 손해가 너무 크거든.”

빌어먹을. 사영이 속으로 창연각 도둑과 남궁영명을 향한 분노를 불태웠다. 남궁영명 네놈도 언젠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인내하고 참으며 사영이 입을 열었다.

“창연각 사건 이후 그 꼬마가 소룡대회에서 우승한 일이 의심스럽지 않으십니까?”

영명의 얼굴이 굳었다. 사영은 그가 한위를 유독 예민하게 대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명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보였고, 사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는 소가주님이 그 어린애에게 무언가 가르쳐 줄 시간이 대체 언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가주님의 명이라면 반드시 지키는 분이 아니십니까?”

“…….”

“다만, 그분의 우애가 워낙 각별하시니 감싸고도신 거겠지요.”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마침내 영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영을 노려보았다. 사영은 이상하게 영명의 낯빛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는 연 도련님이 의심스럽습니다.”

영명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연이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 약해 빠진 녀석이 어떻게 창연각에서 비급을 훔쳐 갈 수가 있단 말이냐? 고작 소리 지른 것에 크게 앓아누울 정도인데?”

사영도 내심으로는 영명의 말에 동의했다. 연은 약했다. 그냥 약한 정도가 아니었다. 영명의 말대로 소리 한번 지르면 피를 토할 만큼 약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찜찜했던 것이다.

그는 영명의 지시에 따라 한위가 어떻게 지내는지 오래도록 지켜보던 사람이었다. 한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였다. 말도 아둔할뿐더러 거지나 다름없는 더러운 행색에 무술의 무(武)자도 모르는 꼬마. 정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점차 행색이 훤해지더니 또랑또랑해지는 것이다. 사영은 언제부터 한위가 그리 변하기 시작했는지 알고 있었다.

“소룡대회 전날 연 도련님은 한위 그 꼬마와 정말 친하게 어울리셨습니다. 제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괴롭히는 걸 잘못 보았겠지.”

영명은 사영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영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가주님, 만약에 그 꼬마가 뭐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연 도련님밖에는 없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합니다.”

영명이 쯧 혀를 찼다. 한번 창연각을 털린 후로 남궁사영의 머리도 털린 모양이었다. 그는 연이 감히 창연각을 털 수 있을 만한 실력이나 인맥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잘 알았다.

사영도 자신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영명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앞으로의 제안을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

“만에 하나 연 도련님이 관련이 없다 하시더라도…… 그 꼬마의 편은 줄여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주님께서 바라는 게 그것 아니십니까?”

“…….”

“그러나 소가주님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 말하고는 사영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루마리였다. 영명이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노려보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가 차근차근 거기에 적힌 내용을 읽는 동안 사영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두루마리를 읽고는 영명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떠오르는 과거의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어 어떠한 과거의 편린을 떨쳐 내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좋아. 어차피 이제는 장로가 아니라 할 일도 없겠지. 알아서 해 보게. 만약 이 일이 잘된다면 자네가 다시 복직할 수 있게 힘써 보도록 하지.”

여전히 비꼬는 말에도 사영은 얼굴이 환해져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만 나가 보라는 손짓에 사영이 방을 나갔다. 영명은 그가 나가자마자 손질하던 검을 내려 두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가 차를 따라 마셨다. 피처럼 붉은색의 차였다.

***

‘사부님이 아신 게 틀림없어.’

연이 초조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어젯밤, 은록은 분명하게 연을 바라보면서 모란이라고 불렀다. 그러고는 그 후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픈 와중에 혼몽했던 건 아닌 듯한데 왜 더는 추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니, 정말 나를 모란이라고 생각하시긴 한 건가?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차를 연거푸 마시면서 연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은록이 유독 말 없고 조용한 사람이라서 더욱 그랬다. 약이나 타고 진찰이나 받으면서 다친 곳은 어떤지 살펴보고 싶은데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유독 모란이 조용했다. 대체 무얼 하는 건가 궁금하여 들여다봤더니 쭈그려 앉아서 뭔가 사각거리며 깎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둥그런 나무 목걸이로, 난생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틀 전부터 조각하고 있던 것이기에 연은 그저 그가 심심한 것이라 여겼다.

“어떻게 생각해? 아무래도 사부님이 아신 것 같지?”

“뭐…….”

목걸이를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 내며 모란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알 때도 되었지. 제자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을 텐데. 내가 이 몸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어. 그래선지 의원에도 두세 번 부르고는 말더군.”

그건…… 그건 그랬다. 게다가 연과 모란의 관계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나. 거기까지면 그냥 이상하게 여기고 말았을 터다. 그러나 의술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은록으로서는 이상하게 여기다 못해 의심할 법도 했다. 하지만 모란은 영 시큰둥했다.

“하지만 들키면 뭐 어때서? 오히려 좋은 거 아냐?”

“좋은 거라고?”

“넌 네 사부와 다시금 좋은 사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지 않아.”

연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당연히 은록과 좋은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십 년 동안 연의 가족 같던 사람이었다. 믿을 리가 만무하고 미친 사람 취급 받을까 봐 말을 안 꺼냈을 뿐이지.

하지만 은록이 차라리 대놓고 물었으면 좋을 텐데 모란이라고 이름을 부른 뒤부터 깜깜무소식이니 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뭘 하는 거야?”

마침내 연이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모란이 다 만든 목걸이를 소반 위에 올려놓더니 그 위에 이런저런 이상한 돌들을 놓는 게 아닌가. 그는 연의 말에 대꾸 없이 집중한 얼굴로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으나 지난번과는 다르게 흡수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다. 피가 좀 꾸물거리는 것 같은 게…….

“잠시 손 좀 이리 내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연이 탁 손을 내놓자 모란이 잠시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잠시, 그가 똑같이 손가락을 긋자 따끔하며 검지 끝이 베였다. 피 한 방울이 똑 떨어지자 크게 파장이 일더니 이글거리며 피가 증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남은 것은 묘하게 반질거리는 나무 목걸이였다. 모란이 뿌듯한 얼굴로 목걸이를 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순간이동이 가능한 목걸이야. 목걸이에 네 피가 묻거나, 일정 이상 상태가 나빠지거나, 착용한 뒤 타의에 의해 몸에서 떨어지는 즉시 나에게로 이동하게 되어 있어. 재료가 없어서 만드는 데 고생 좀 했지.”

그러면서 모란이 직접 연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마치 옻칠을 한 것처럼 나무 목걸이가 다소 붉은빛으로 반들거렸다. 연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맨들맨들하니 감촉이 좋았다. 그가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마워.”

모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탁탁 털었다. 손바닥의 상처는 여전히 갈라진 채였으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아니면 입에 넣거나 핥아도 효과는 똑같아. 아무튼 체액만 닿으면 되니까.”

딱히 피를 내는 걸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니 아마 핥을 일은 없을 테지만. 아무튼 연이 목걸이를 품속에 잘 넣어 감추었다. 지난번처럼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는 일이 있다면 매우 유용할 터였다.

“참, 그 도적들은 알아서 잘 처리했어. 왕자우가 복수하려고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처리했기에? 아니, 아니다.”

딱히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기에 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고통받는 왕장호에게는 연민을 품었으나 그 외의 면에서는 아니었다. 녹림십오채의 악명이 괜히 유명하던가? 그들의 손에 의해 재산과 목숨을 빼앗긴 이들만 해도 셀 수가 없었다. 관아에 넘겨지는 즉시 판결 없는 사형인 것이다.

“좋아. 그럼 난 이만 볼일이 있어서.”

기지개를 쭉 펴더니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 그런 모란의 옷자락을 콱 붙잡았다.

“부탁이 있는데.”

“……부탁?”

녹림채 사건 이후로 연은 이상하게 모란이 전보다 훨씬 편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초반의 그 얄미운 감정은 더는 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전이라면 하지도 않았을 부탁을 슬그머니 건네 보는 것이다.

“사부님이 어떤지 좀 봐 주고 오면 안 될……까? 아무래도 칼에 찔린 상처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모란이 순식간에 모습을 갖추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은 멈칫하다가 슬쩍 아랫배를 만져 보았다. 하루 반나절이라 하였지. 그럼 지금쯤은 그…… 진주들이 사라졌을까? 괜히 오금이 근질거리는 것 같아 연이 고개를 퍼뜩 저었다.

“인공적인 내단이라니 보도 듣도 못 했어.”

내단이란 것을 생물이 오래 품고 있는 어떠한 것이라 칭했을 때, 진주도 엄연한 내단이긴 하였다. 그러나 증폭제니 뭐니 하는 것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다.

연이 끙 소리를 내며 침상에 누웠다. 어쩐지 속이 메슥거리는 것도 같았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낮잠을 청했다. 아직 어젯밤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숨 자고 나니 이번에는 머리가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다. 진통 효과가 있는 탕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산책을 하면 좀 나아지겠거니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니 한위가 정원에 오도카니 쭈그려 앉아 연못 안의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오늘은 연못 위에 연꽃이 떠 있었다. 모란은 정원에 꽃을 피울 때 특히나 연꽃 피우기를 즐겼다.

“한위야.”

그런데 한위의 얼굴이 영 울적했다. 다가가 의자에 앉자 한위가 연의 옆에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가만히 기다리기를 잠깐, 마침내 한위가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은 가주님을 싫어하시나요?”

뜻밖의 질문에 연이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번도 영명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딱히 연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한위는 발을 흔들며 한참을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주강 형님이 제게 화를 내셨어요.”

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주강이 화를 냈다고? 그 주강이? 연은 한 번도 주강이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했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사내가 아닌가.

“주강 형님이…… 세가를 나가서 자신과 함께 사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셔서…….”

그가 제 귀를 의심했다. 그 주강이 한위와 함께 나가서 같이 살자고 했다고? 어지간히도 한위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한위는 우물쭈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가주님의 인정을 받을 때까진 세가에 있겠다고 하였더니…… 많이 실망하셨나 봐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가 버리셨어요.”

연이 침음했다. 남궁영명은 세가 내에서 그다지 인망이 좋지는 않았다. 연오가 신뢰와 애정으로 사람들을 다루는 편이라면, 영명은 두려움과 억압을 바탕으로 지배하는 편이었다. 그 말은 아군은 있을지언정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였다. 주강이 연오에게만 충성하는 걸 보았을 때 그도 영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럼 너는 남궁영명 그자를 좋아하니?”

한위는 연이 영명을 부르는 방식을 듣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시니까요…….”

마치 연에게 혼날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위가 어깨를 움츠렸다. 연은 그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풀어 주었다.

“그래도 괜찮단다. 상관없어.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너도 싫어해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사실 연은 한위가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까지 영명을 좋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위에게 영명이 어느 정도 절대적인 존재라는 건 이해했다. 영명은 한위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자임과 동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였으니까.

아우가 하도 우울해하니, 연은 산책을 한 뒤 방에 들어가 푹 쉴 생각은 접어 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오 형님에게 가 볼까?”

얼굴이 밝아진 한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말없이 찾아가도 되려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만약 안 된다 하면 돌아오면 될 터였다. 게다가 연오는 말없이 찾아왔다고 나무랄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했지. 가끔 그는 거리가 먼 동생들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것도 같았다.

한위와 함께 화월당으로 가면서 연은 옷깃을 좀 더 단단히 맸다. 이제 슬슬 봄이 다가와서 사방이 푸릇푸릇해져 갔지만 여전히 몸에는 한기가 돌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이런 것 같기도 했다. 화월당에 도착하니 연의 예상대로 연오는 크게 반기며 둘을 맞이했다. 그는 이제 막 검술 훈련을 하려던 참이었는지 간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침 잘되었구나. 내일부터는 잠시 세가를 비울 참이라 한번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했거든.”

“어디에 가십니까?”

“음, 아버지의 명으로 주강에 가 볼 예정이다.”

주강……이라면 녹림십오채의 본거지가 아닌가. 어제 같은 일이 있었기에 연은 연오가 그곳에 가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녹림십오채가 관아를 점령하여 의원들을 납치 감금 및 살해한 일은 아침이 되자마자 순식간에 온 중원에 퍼졌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던 탓이다. 이 일로 황제가 크게 노하여 대대적인 소탕을 명했다고 했다.

“산적과 수적이 기승을 부리다 못해 어제는 관아를 점령해 의원을 납치하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느냐. 그래서 안휘성 일대의 각 문파와 세가가 연합하여 주강 일대 현황을 살펴보려고 한다. 소문에 따르면 왕장호가 죽었다고 하던데……. 사실이 어떤지 확인도 해 봐야겠지.”

왕장호가 죽던 때를 떠올리며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오는 아마 연이 왕장호의 목숨을 직접 거둔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었다. 연오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어디 한번 막내의 실력을 좀 볼까.”

연오가 대련을 청하는 말을 하자 한위는 얼마나 기뻐하던지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였다. 단숨에 기운이 회복되는 게 보여 연이 흐뭇하게 웃었다.

연오와 한위는 곧장 검을 빼 들었다. 둘 다 날이 번쩍이는 진검으로, 한위는 최근 들어 목검에서 진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제 막 진검을 쥔 이에게 진검을 사용하는 대련은 권장하지 않지만 상대는 연오였다. 실력 차이가 까마득하게 나니 한위와 검을 맞대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가 알아서 대처할 수 있었다.

한위는 나날이 눈에 띄게 일취월장하였다. 대련을 하면서 연오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둘을 바라보던 연이 문득 이상한 느낌에 제 뺨을 만졌다. 화끈거리며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뭐지?’

몸이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가 싶어 미간을 문지르고 있자 대련하는 중에도 연오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단번에 한위를 승복시킨 그가 검을 거두고 다가와 근심스러운 얼굴로 연을 살폈다. 한위도 바로 다가왔다.

“몸이 안 좋은 것 같구나.”

“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방에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연이 휘청였다. 한위가 얼른 옆에서 부축했다. 연오와 한위가 바로 앞에 있으니 영 별로인 몸이 더 실감이 나서 연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완치될 수 있을 테니 전처럼 그렇게 우울하지는 않았다.

“안 되겠다. 네 주치의를 불러야겠다.”

명치부터 오금까지 간지러운 이 증상은 대체 무엇인지 미간을 찡그리며 스스로 진찰해 보던 연은, 연오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지금 연의 주치의라면 은록이었던 것이다.

“형님, 이런 일로 부를 것 없습니다. 별것 아니니 돌아가서 좀 쉬면 됩니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열이 올랐는데 어찌 별것 아니야?”

“무엇보다 지금 진은록 의원님은 부상으로 인해 검상을 입어 거동이 힘드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녹림십오채 사건 때문에요.”

어떻게든 은록을 보지 않고자 애써 둘러댄 이유에 연오가 쯧 혀를 찼다.

“진은록 의원도 그 일에 연루되었는지는 몰랐구나.”

연이 속으로 뜨끔하였다. 어제 관군이 도착하기 전에 모란, 은록과 함께 셋만 은밀하게 관아를 빠져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칼에 찔린 건 사실이니, 그런 은록을 불러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그냥 쉬면 됩니다. 게다가 주치의라면 은록 의원님 말고 모란도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모란을 떠올렸는지 연오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은 더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상태가 영 심상치가 않았다.

“전…… 이만 화정당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려는 한위를 형님과 마저 대련하라며 떼어 두고 화정당으로 돌아갔다. 터벅터벅 돌아가는 길에 제 맥을 짚어 보니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이상하군. 감기 몸살이라기에는 증상이 다른데.’

체온이 오르고 맥박이 빨랐다. 속이 좀 메슥거리고 어지럽기는 하였으나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가장 거슬리는 건 명치 부근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가던 중 연이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싶은데 어째 증상이 아주 똑같았다. 그러니까, 이따금 춘약이나 최음제를 먹고 가라앉지 않는다며 엉거주춤 달려오곤 하던 환자들과 말이다. 명치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기분은…… 분명한 성욕이었다.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겠지 싶은데 한번 자각을 하자 다리 사이가 점차 묵지근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지만 은록이 다쳐서 누워 있는 게 연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은록이 와서 진맥한 뒤 춘약을 먹지 않았냐고 묻는 건 정말 상상만 해도…….

연은 다소 불편하고 민망한 기분으로 화정당에 도착했다. 혹여나 시비나 하인들에게 눈에 띌까 후다닥 침소로 뛰어 들어가 옷부터 벗었다. 아까 언제 한기가 느껴졌냐는 듯이 몸이 더웠다.

‘춘약의 해독제가…… 어디에 있더라?’

연이 자개장을 뒤져 약초를 꺼냈다. 기본적으로 해독 작용이 있는 감초를 잘근잘근 씹어서 삼켰으나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지? 춘약을 먹을 일이 무어가 있다고? 연은 오늘 먹은 것들을 되짚어 보았으나 마신 건 찻물과 은록의 탕약밖에 없었다. 그것도 평소에 항상 마시던 차와 약이였다.

점점 몸에 열기가 오르기만 하여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하고 다리 사이가 근질거리고 욱신거렸다. 가만히 앉아서 침착하려 노력하다 보니 불현듯 의심 가는 게 떠올랐다. 바로 어젯밤 모란이 밀어 넣었던 진주였다. 분명 모란도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라 했지. 그럼 그게 어떠한 작용을 일으킨 게 아닐까?

모란이 돌아올 시간이니 어떻게든 참으려고 애를 쓰다가 연은 그만 지고 말았다. 그래, 어차피 모란에게 못 볼 꼴 여럿 보인 거, 자위하는 모습쯤 보여도 이제 상관은 없을 터.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연이 침상에 기대어 바지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쥐니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읏…….”

분명히 쾌감이 느껴지는데 마치 무엇에라도 막힌 것처럼 도통 사정을 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연이 모란을 향해 이를 갈았다. 대체 그 망할 진주가 무슨 작용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었다……. 어찌할 방도를 찾을 수 없어 연은 그저 베개만 끌어안았다.

모란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 시진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도착하자마자 그가 본 건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엎어져 있는 연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놀라 다가가자마자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킨 연에게 멱살을 잡혔다. 물론 이 반응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한두 번 잡힌 게 아니기에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아직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 못 한 모란에게 연이 괴로운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물었다.

“빌…어먹을 진주……에 대체…… 무슨 짓을 했어?”

그렇게 묻자 모란이 움찔했다. 연은 정말이지 모란을 죽이고 싶었다. 그가 없는 한 시진은 정말이지 고통이었다. 몸은 잔뜩 달아올라 있는데 사정을 할 수가 없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음, 그게…… 고의는 아니야. 정말이야.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네.”

퍽 난감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모란은 핥듯이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었다면 모란에게 한 대 날리고 말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최음제의 재료가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는 최음제의 재료로도 쓰였으니까! 거기에 차에, 은록의 탕약에, 모란의 피가 대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란도 진주가 이런 작용을 하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처음 만들어 본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다고 한 시진 동안 이런 꼴로 방치된 연의 분노와…… 흥분이 식는 것은 아니었다.

“제발, 어떻게 좀 해 봐…….”

연이 헐떡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목덜미가 식은땀 때문에 축축하여 기분 나빴다. 어쩔 줄 몰라 바르작거리는 연을, 모란이 쉬쉬 달래는 소리를 내며 눕혔다. 단순히 옷을 벗기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오싹했다.

모란은 평상시처럼 애무를 하려다가 그게 오히려 연을 더 괴롭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잠시간 질금거리며 말간 액을 줄줄 흘리는 연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연이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움츠렸다. 어쩐지 모란의 눈빛이…….

“잠시만, 뭐 하려는……. 아!”

연의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모란이 덥석 성기를 입에 담은 것이었다. 어찌나 쾌감이 지극하던지 그것만으로도 그는 절정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사정이 되지를 않았다. 모란이 고개를 내려 끝까지 삼켰을 때 연은 거의 흐느끼고 말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어쩌지 못하고 이불만 움켜쥐는데 모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의 것을 빨기 시작했다. 충격적이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모란의 혀가 움직이고 츱, 하는 소리를 내며 빨 때마다 연은 온몸이 뜨거운 물에 잠기는 것 같았다.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며 모란의 머리를 밀어 내려 애를 썼다. 연의 물건을 물고 있는 모란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러나 연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 그만, 아, 앗! 앗! 그만……!”

축축한 혀가 부드럽게 핥는 감각과 목구멍에 제 성기가 죄이는 느낌에 연이 몸서리를 쳤다. 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예민한 성기를 빨리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연이 아무리 바르작거리고 밀어 내려고 해도 모란은 멈추지를 않았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괴로워하다가 겨우 다시 모란을 보았을 때 연은 깨달았다. 그는 명백히 연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쾌감에 못 이겨 버둥거리고 신음하는 것을……. 그런데 그걸 깨닫고 나자 어째서인지 몸이 더 달아오르는 것이다.

“제, 제발…….”

몇 번이고 야살스럽고도 깊게 빨린 연이 제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에야 모란이 멈추었다. 그는 언제 괴롭혔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타액으로 반질거리는 발간 성기를 혀끝으로 문질렀다. 완전히 흐트러진 연이 몸을 움츠리며 희미하게 히끅 하는 소리를 냈다. 모란이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아무래도 이런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날 것 같지.”

모란의 눈에 잠시 금색 빛이 머물다 사라졌다. 그가 연의 납작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 끝으로 간질거리다가 이내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내 짐작으로는 내 피 때문에 양기가 너무 넘치는 것 같단 말이야. 평범한 사람 같으면 괜찮았을 텐데 네 몸은 좀 특수한 상황이라.”

겨우 정신을 추스른 연이 이를 꽉 악물었다. 그래서 진주, 넣는 거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물론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모란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마 연이 네가 싫어할 텐데…….”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은데, 아니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제 성기를 쥐고 살살 흔들면서 한다는 말이 저런 거라니! 숨만 헐떡거리던 연은 기어코 모란을 발로 세게 걷어차고 말았다. 모란이 옆구리를 문지르면서 사과했다.

“미안, 좀 귀여워서…… 참기가 힘드네. 보면 알겠지만……. 있지, 내가 고자라서 그간 널 건들지 않은 게 아니거든.”

모란의 다리 사이가 불룩한 것만 봐도 고자가 아닌 건 잘 알겠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이건 말건 지금 이 몸 상태만 해결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연이 이를 악물었다.

“뭘, 하면 되는데?”

연은 애가 타 죽겠는데 모란은 미적거리기만 했다. 제가 싫어한다는 게 무언지 짐작이 가지 않아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모란이 한다는 소리가…….

“말마따나 춘약이나 최음제가 아니더냐. 정사를 나누면 되는 것이지.”

……라는 게 아닌가. 지금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연이 모란의 멱살을 쥐었다.

“그러면 이제까지 할 거 다 해 놓고 무슨, 뭐 대단한 것처럼……. 할 거면 빨리, 하란 말이야!”

연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모란이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온몸을 벌겋게 물들이며 누워 있는 연의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평소 망나니처럼 대충 걸치던 옷이 벗겨지자 근육이 잘 붙은 몸이 드러났다. 연은 새삼 깨달았다. 모란의 몸은 열여덟 살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멀었다. 이십 대 중반의 사내 몸과 같았다. 하기야 온갖 기이한 것들을 할 줄 아니 육체를 마음대로 만드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았다.

차례차례 옷을 벗어 던진 모란이 마침내 바지를 벗었을 때 연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고 말았다. 모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물건이…… 그냥 물건이 아니었다. 가히 대물이라 할 정도로 컸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호기로운 소리를 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니까 저걸…… 저걸 어디에 넣는다고?

“후회는 하지 않게 해 줄게.”

나직하게 속삭인 모란이 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달큼하고 야하게 혀를 섞는데 몹시도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빨리 해방되고 싶었던 연이 끙끙거리며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벌렸다.

모란이 귀며 목덜미 따위를 길게 핥으며 제 물건을 연의 다리 사이에 문질렀다. 동시에 모란의 몸에 제 성기가 문질러지자 연은 그저 숨을 헐떡이기만 했다. 이렇게 좋은 게 단순히 약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문득 이는 충동에, 연이 처음으로 모란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깨물고 혀를 밀어 넣자 모란이 멈칫했다가 연의 혀를 쪽 빨아들였다.

“너무 귀엽게 굴면 안 되는데. 응?”

“당…신은…… 내가 뭘 하든 귀엽다고 하잖아.”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눈을 휘어 웃었다. 연은 잠시 그 웃음에 홀렸다. 제가 알기로 모란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웃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매번 그런 식으로 구는 건가?”

그리 말하고는 모란이 덥석 목을 무는 바람에 연이 움찔했다. 어째서 순간 짐승에게 덜미를 물리는 것 같았을까? 맥이 펄떡펄떡 뛰는 급소를 세게 빨리자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 자신이 모란에게 이리 급소를 의심도 없이 내주게 되었을까?

연의 그 의문은 익숙한 향내가 풍기는 탓에 사라지고 말았다. 맡아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이 방에는 그런 향유 없는데……? 아!”

“내 주머니에는 있지.”

뭐? 주머니에 항상 향유를 들고 다닌단 말이야? 모란이 질척한 액체로 젖은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었다. 연은 몸을 살짝 틀며 신음했다. 뒤로 어떤 감각을 느낄 수 있는지 이제는 알기 때문에 몸이 절로 떨렸다. 어느새 손가락이 둘로 늘었다. 향유를 더 들이붓고 철벅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 모란이 물었다.

“잠깐 좀 괴롭혀도 될까?”

“아, 아니…….”

연이 고개를 저었으나 모란은 음습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가능한 깊이 밀어 넣었다가 안을 짓누르며 빼내니 연의 시야에서는 불똥이 튀기는 듯했다. 떨리며 벌어지는 입술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그는 이 신음 소리가 자신이 내는 것이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실은 허락을 구하는 말은 아니었어.”

그렇게 지껄이면서 모란이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연이 바르작거리자 한 손으로 양 손목을 쥐더니 아까 상처 낸 손가락을 이로 잘근거리며 세게 빨았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일었다.

“그렇지?”

손가락을 빼내어 구부러진 손마디로 회음부를 미끌미끌 문지르며 모란이 채근하듯 물었다. 허락을 구하는 말은 아니라면서 왜 제게 묻는 것인지 연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란이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가 자신을 괴롭히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그 지극한 쾌감을…….

연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모란이 능글맞은 얼굴로 손가락을 넣어 뒤를 벌렸다. 괴롭히는 건 나중에. 그렇게 말하며 모란이 손가락 세 개를 밀어 넣었다.

“읏, 아…….”

찔걱이는 소리를 내며 모란이 아래를 들쑤시자 연이 고개를 젖혔다. 그 빌어먹을 진주 때문인지 무엇을 하든 다 좋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란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며 대신 두꺼운 것이 문질러질 때는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연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잠시만, 안…… 될 것 같아.”

“응? 무어가?”

연의 발목을 잡아 제 어깨에 걸며 모란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가슴을 간지럽혔다.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대충 가늠해 봐도 너무 굵었다. 아까 손가락 세 개도 겨우 들어갔는데 대체 어떻게…….

“진짜 끝내주고 좋을 거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모란이 꾹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연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싶었는데, 이내 그런 생각이 훅 달아나고 말았다. 아래가 벌어지는 게 손가락을 넣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르기에는 늦었다.

“아, 아……. 잠시, 잠시만…….”

모란이 또 어린아이 달래듯 쉬쉬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밀고 들어오는 것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이 숨도 못 쉬고 헐떡거리자 그가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심장 바로 윗부분이었다.

“아!”

연이 이를 악물었다. 마치 안에 몽둥이를 쑤셔 넣는 것 같았다. 느릿느릿 뒤가 강제로 벌어지는 생소한 감각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겨우 숨만 쉬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연은 차라리 보지 말걸 싶었다. 이제 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연이 입술을 떨자 모란이 살살 핥아 주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 사기꾼……. 아흑!”

연이 모란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생채기가 났지만 그걸로는 모자라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게 어떻게 사람의 다리 사이에 달린 것인가? 무기나 마찬가지지……. 모란은 그 무기를 반쯤 삽입한 채 연의 젖은 눈가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빨며 능청맞게 웃었다.

“어디가 사기꾼이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분명, 그렇게…… 안 컸단 말이야, 앗!”

모란이 허리를 크게 한 번 움직이자 배 속을 얻어맞는 것 같았던 연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억울하고 또 아프기도 해서 이 나쁜 자식, 하면서 눈물을 찔끔거리자 모란이 살살 허리를 쳐올리며 손으로 꽉 잡았다.

“무슨 소리야. 네게는 매우 솔직하고 착하게 굴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고는 한 번에 콱 박아 올리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무어가 솔직하고 착하다는 거……. 그렇게 생각하던 연이 돌연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냈다. 모란이 제 것을 끝까지 밀어 넣은 탓이었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안이 깊게 찔린 느낌이었다. 연은 모란이 일부러 이리 괴롭게 만드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동안 모란이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나도록 박아 넣는 걸 그저 입술만 깨물고 버텼다. 굵은 것이 들락이는 통에 아래가 얼얼하고 아팠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디가 좋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여기고 있을 때……. 모란이 조금 자세를 바꾸어 추삽질을 하자 돌연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으, 읏…….”

연이 몸을 떨자 모란이 더욱 깊게 찔러 올렸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오금에서 느껴지던 간질거리던 느낌이 선득한 쾌감이 되어 번졌다. 이게 뭔가 하여 연이 당황했다. 저도 모르게 상대를 밀어 내는데 모란은 연이 당황하건 말건 봐주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재미 보는 것도 괜찮지만…… 정석이라면 역시 이쪽이지.”

“아, 앗!”

연이 헉 하고 숨을 쉬었다. 모란이 퍽퍽 허리를 박아 넣을 때마다 등골이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여전히 깊이 찔려 뻐근하다 느낄 정도로 아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아픔 또한 쾌감이었다. 처음에는 신음하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고 버텼지만 깊이 삽입된 물건이 뭉근하게 안을 짓눌러 대는 것에는 도리가 없었다.

“흑, 읏…… 응!”

몸을 들끓던 열기가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흥분감은 여전하여 연이 숨을 헐떡였다. 모란의 물건이 뒤를 드나들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선정적이었다. 엉덩이 사이에서 잔뜩 젖은 소리를 내며 안을 아프게 찔러 댈 때마다 반사적으로 조이게 되는 것이다. 수치스럽고 아픈데 그 감각까지도 좋게 느껴지다니 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 아! 아앗!”

한번 박힐 때마다 쾌감이 연의 온몸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듯했다. 엉덩이가 모란의 몸에 자꾸 철썩철썩 부딪쳐 얻어맞는 것 같기도 했다. 모란이 가볍게 연의 것을 쥐어흔들어 주자 아까 못 간 게 거짓말인 것처럼 흰 백탁액이 튀었다.

그러나 해방감과 사정의 여운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다.

“아읏, 자, 잠시만……. 흐앗, 악!”

이제 막 사정하여 예민한 몸이었지만 모란은 봐주지 않았다. 연이 몸을 버둥거리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건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밀어 넣는가 하면 몸이 위로 밀려날 정도로 세게 쳐올리기도 하였다.

행위가 계속될수록 연은 그만이라든가 잠시라는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숨만 겨우 쉬며 감당 못 할 쾌감에 짓눌릴 뿐이었다. 눈앞에서 몇 번이고 흰빛이 까마득하게 번졌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쾌감이었다. 모란은 기어이 연이 연달아 사정을 하게 몰아붙이고 나서야 멈추었다.

“흐으, 헉, 앗, 아, 아앗!”

연이 몸을 퍼득 떨며 이를 악물었다가 이내 신음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두 번째 사정을 강요받을 적에는 마치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신음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모란이 자신의 것을 깊이 밀어 넣으며 집요하게 연의 표정을 살폈다. 힘이 풀려 사지를 늘어트릴 때에서야 연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모란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읏…….”

그러나 아직도 모란이 제 것을 삽입한 채였기 때문에 연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채 흥분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성을 질러 대던 게 떠올라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움찔했다. 모란이 손바닥으로 아직 흥분이 덜 가라앉은 성기를 문지른 탓이었다.

“아!”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이자 모란의 물건이 주륵 빠져나갔다. 그 감각에 연이 몸서리를 쳤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자 마저 빼내며 모란이 엉덩이를 꾹 쥐어 벌렸다. 뒤에서 무언가가 느리게 흘러내렸다. 그가 손가락을 넣어 안에서 향유와 정액을 긁어내는 느낌이 생경해, 연이 눈을 꾹 감았다.

“치료했는데 하나도 몰랐지?”

“치…료?”

고개를 돌려 보자 어느새 모란의 눈이 금빛이었다. 영글었던 고리가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치료를 했다고? 하지만 아무런 고통도 없었는데?’

아니, 그야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모란에게 삽입당할 때마다 배 속을 얻어맞는 것 같았으니……. 그러나 달군 검에 몸 깊숙한 곳을 찔리는 그 특유의 느낌은 없었다. 연이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나도 안 아팠는데…….”

“네가 날 얼마나 받아들이냐에 따라 고통도 다르거든. 물론 단순히 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 말하고는 모란이 잠시 연의 몸을 살폈다. 아니, 어찌 보면 좀 더듬거리면서 사심을 채우는 것 같기도 하고……. 연이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단순히 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음, 아직 열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네. 그래도 하룻밤 푹 자고 나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겠는데.”

퍽 흡족한 얼굴로 모란이 연의 엉덩이를 도닥이고 주물럭거렸다. 짜증 낼 기운이 없어 어찌하지는 못하고 싫은 내색을 하며 뒤척이기만 했는데, 모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천에 물을 묻혀 와 몸을 닦고 뒤처리를 해 주었다. 그뿐이랴, 옷도 갈아 입혀 주고 이불도 보송한 것으로 갈아 주었다.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는 손에는 과일이며 간단히 먹을 만한 간식까지 들려 있었다.

“이렇게 안 해도 되는, 읍.”

모란이 입에 잘 깐 군밤 알을 밀어 넣는 바람에 연은 목이 턱 막히고 말았다.

마지못해 씹어 삼키는데 그제야 모란과 정사를 나누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끝까지 가게 되면 무언가가 바뀔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뀌는 것 없이 그저 모란과 자신일 뿐이라는 게…….

몸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기로 가볍게 들떴다. 모란의 알뜰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이불을 덮고 뒤척뒤척하다가 미간을 접었다. 이 열은 어째 좀 수상쩍은데. 진주…… 아니 약 기운이라기보다는…….

그리고 과연 예상대로였다. 저녁때까지 열이 내리지 않고 기침까지 콜록거릴 때에야 모란의 입가에 내내 걸려 있던 미소가 좀 가셨다. 그가 한숨을 쉬자 연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제 몸이 아플 때마다 주위 사람들 반응이 여간 짜증 나고 싫은 것이 아니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니었으니까.

“왜, 몸이 이따위라서 한심해?”

모란은 연이 뾰족하게 말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내게 한심한 자들은 널렸어. 내 눈으로 보기에 다들 고만고만하거든. 내게 덤벼드는 놈들 상대할 때 죽이지 않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 할 텐데. 약해 빠져서는 정말이지 어린애만도 못한 수준이라.”

연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연에게 먹일 과일을 깎느라 모란은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술술 껍질이 깎이는 사과는 예술 그 자체였다. 그는 무엇이든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냥 그런 차이야. 다른 놈들이 성가시게 구는 모기 떼 같다면…….”

그가 공들여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 차곡차곡 쌓는 걸 보며 연이 생각했다. 모기 떼라. 처음 만난 날 모란이 팔을 부러트릴 때 벌레 다리 부러트리듯 바라보는 것 같았던 게 착각만은 아니었구나.

“연이 너는 좀 요만하고 작고 동글거리는…… 귀여운 솜털? 훅 불면 휙 저만치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지. 그러니까 내게는 다루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겠어?”

검지와 엄지로 아주 작게 콕 집어 보이며 말한 모란이 사과를 먹이려다 연의 표정을 보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음, 사과 좋아하지?”

연은 다소 멍한 기분으로 모란이 집어 준 사과를 우물우물 씹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모란이 방금 전의 대화도 잊고 빈둥거리기 시작할 때쯤 툭 물었다.

“모란, 당신은 얼마나 강해?”

연은 진지했다. 창연각 사건에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지난번 녹림 산적을 상대할 때도 그랬다. 모란이 강한 정도는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어느 고수가 그 많은 인원을 그리 한순간에 싹 쓸어버린단 말인가? 그것도 손짓 하나에? 연오는 물론이고 영명도 쉬이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글쎄, 비교 대상이 없어서 딱히…….”

“그 녹림채 도적들도 모기 떼처럼 느껴졌어?”

모란이 눈을 굴렸다. 그러나 연은 진심이었다. 이제까지는 막연히 모란이 강하구나, 생각하는 정도였지만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까 한 말이 도무지 허세라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게다가 이때까지 그가 말한 것들을―이백오십 여년을 살아 왔다든지 혹은 산을 한 번에 가르기는 힘든 일이라든지―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중원에서 모란을 이길 사람은 아예 없을지도 몰랐다.

이백오십 살……. 평소에 자신이 모란을 너무 막 대한 감이 있지 않았나 새삼 심란하였다. 연이 생각에 잠긴 걸 어떻게 오해하였는지 그가 수습하려고 다소 애를 썼다.

“그래, 모기 떼는 아니고 그냥 뭐……. 그런…… 아무튼 비슷한 느낌이라 이거지.”

하지만 끝내 다른 비유를 찾지 못한 채 포기한 모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은 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모기 떼처럼 느껴지나 보다.

“아무튼 오해는 하지 말라는 거야. 네가 좀 심하게 약한 것처럼 느껴지긴 한데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으니까. 또 어차피 이대로라면 한 일이 년 안으로는 건강해질 거고.”

모란은 제가 깎아 놓은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별 사고만 안 친다는 가정하의 말이지만.”

“내가 언제 사고를 쳤어?”

“잠깐 한눈판 사이에 도적 떼거리에게 붙잡혀 쥐어 터져 있는 게 사고 치는 것이지 아니야? 세상에, 그 잠깐 동안 숨이 꼴딱 넘어가고 있으니.”

쥐어 터져……. 진짜 말 한번 예쁘게 하네. 연이 주먹을 쥐었다. 맞긴 맞았으나 고작 따귀 한 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모란에게 진 빚이 많았기에, 연이 할 수 있는 건 그가 심통이 난 얼굴로 깎아 넣어 주는 과일 조각이나 받아먹는 것뿐이었다.

“……정말 한 번에 산을 가를 수 있어?”

모란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이번에는 연의 입에 사과를 두 조각이나 넣어 주었다. 그래, 못 가른다는 소리는 안 하는 걸 보니 정말 할 수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열심히 사과를 씹어 삼킨 뒤 연이 물었다.

“사부님은 좀 어떠셨어?”

“괜찮아 보이던데.”

연에게 사과 한 알을 다 먹이고 난 뒤 모란은 춘화집을 펄럭펄럭 넘겨 보는 중이었다. 성의 없는 대답에 연이 미간을 접었다. 정말 살펴보고 오기는 한 건가?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모란이 한숨을 쉬었다.

“정 걱정되면 내일도 보고 올 테니 좀 자라. 응?”

손을 뻗기에 처음 만난 날 그대로 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게 떠오른 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모란은 그대로 눈꺼풀을 내려 감겨 줄 따름이었다. 연은 몇 차례 눈을 깜박이다 순순히 눈을 감았다. 열로 인해 잠은 순식간에 쏟아졌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도련님, 하고 부르는 시비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보통 응답이 없으면 물러나곤 했는데 긴한 일이었는지 계속 부르는 통에 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며 아팠다.

어느덧 아침이라 방 안이 환했다. 지난밤 모란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주인 대신 춘화집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평범한 춘화집은 아니었다. 남자 두 명이 얼싸안고 있는 표지다. 그중 한 명은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홀딱 벌거벗고 있었다.

평소 보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건전한 듯하여 좀 더 자세히 보니 벌거벗은 자의 엉덩이 사이에 커다란 막대기가 하나……. 그럼 그렇지. 전이라면 저런 크기의 막대기를 어찌 넣나 싶었을 텐데 모란의 양물을 보고 난 뒤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들어가긴 들어갔지……. 춘화집 표지가 너무 적나라하여 뒤집어 놓은 뒤 연이 말했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시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아파 보이는 연의 모습에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뵙자고 하십니다.”

순간 연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대체 영명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보자 한단 말인가? 이렇게 아플 때면 더더욱 영명을 보기가 싫었다. 얼굴이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몸이 안 좋아 뵙기 힘들다고 전해라.”

시비가 머뭇거리다가 물러났다. 가주님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퍽 안 좋아진 연이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시비가 돌아와 다시 말을 올린 까닭이었다.

“몸이 안 좋더라도 오라고 하십니다. 중한 말씀이 있으신 듯합니다.”

한숨을 쉬며 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아비란 자가 언제 남의 사정을 봐주던 이였던가? 머리가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하여 두꺼운 옷을 걸쳤다. 그나마 요즘 몸이 괜찮아졌는데 심한 감기로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은 얼굴로 나가자 요즘 통 보기 힘들었던 주강이 서 있었다.

“뭐야?”

“가주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연이 잠깐 말문을 잊었다. 주강은 연오의 사람이 아니었나? 대체 언제부터 영명의 말을 듣기로 한 거지? 이제는 속까지 다 쓰라렸다.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자 주강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미약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나마 주강이 완전히 영명을 따르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창일당에 도착하여 연은 잠시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가까이 다가갔다. 기다리고 있던 무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창일당에 들어서다 연이 멈칫했다.

‘뭐지? 이 향기는…… 어디서 맡아 본 것 같은데.’

그가 미처 생각을 잇기도 전에 영명의 말이 먼저 떨어졌다.

“들어오거라.”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영명이 자신을 불러들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영명은 보통 연오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나 세가의 행사 때나 얼굴을 보곤 하는 사이였다. 이렇게 창일당에 연 혼자 찾아와 독대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앉아서 서책을 보고 있던 영명은 연이 들어오자마자 못마땅한 얼굴로 쯧 혀를 차며 책을 덮었다.

“어찌 그리 몸 간수를 못하느냐?”

항상 영명이 저를 보면 하는 소리는 똑같았다. 허약한 것, 세가에 누가 되는, 병약한. 이따금 심기가 안 좋을 때면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익숙한 소리였으나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연의 기분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영명은 더 안 좋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가 붉은 차를 마시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제 네 나이도 스무 살이 아니냐.”

연은 영명이 자신의 나이를 알고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실제로 그는 연의 나이를 몇 번이나 헷갈린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네 형과는 달리 도통 세가에서 하는 일이 없고 무공의 성취도 낮으니 다른 일이라도 해야겠다.”

다른 일이라니, 뭔지는 몰라도 연의 마음에 들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영명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를 들어 연의 앞에 놓았다. 마지못해 받아 읽은 연이 표정을 찡그렸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성씨가 보인 탓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와 혼인할 여식의 이름이다.”

연의 표정이 굳었다. 영명은 지금 연에게 결혼으로 남궁세가의 세라도 불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 연도 항상 자신이 정략결혼을 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긴 했다. 병약하다고는 해도 그는 어쨌든 그 남궁세가의 차남이다. 세가나 문파간의 결속을 높이기 위해서는 혼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문제는 두루마리에 적힌 사람의 이름이었다. 모용령. 올해 소룡대회에서 한위와 겨룬 모용가의 열여섯 난 여식이다. 모용가 방계 출신으로 뛰어난 성취를 보이고 있는 존재였다. 네 살 차이는 결혼 상대로서는 적절하였으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로 모용이라는 성씨였다.

“싫습니다.”

“싫다?”

영명이 찻잔을 탁 내려 두며 연을 쏘아보았다. 은근한 노기임에도 연은 가슴이 다 죄어드는 듯하였다.

“지난번부터 아비에게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네가 감히 싫다 하였느냐? 하는 일도 없이 세가에서 빈둥거리면서 이런 쉬운 일조차 못 하겠다? 이 철없는 것 같으니라고!”

영명이 크게 호통을 쳤다. 연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런 영명을 쏘아보았다.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영명의 눈살이 파르르 떨리었다. 마침내 그가 내뱉었다.

“말 안 듣고 고집 센 것은 네 어미와 아주 똑같구나. 똑같아. 네 어미 때문에 모용세가와 사이가 멀어져서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아느냐? 너라도 어미 대신 그 빚을 갚을 생각은 못 하고 이렇게 염치없이 굴어?”

영명의 말은 비수처럼 연의 가슴에 꽂혔다. 잠시간 끓어오르는 분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자가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어머니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누구 때문? 허! 지금 나 때문이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네 어미가 그렇게 죽은 것은 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어머니가 그리 돌아가신 게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하셨습니까?”

연이 몸을 떨었다. 영명이 증오스럽고 또 증오스러워 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런 자가 어떻게 자신의 아비일 수가 있나? 사람이 어떻게 이리 후안무치하고 조금의 양심도 없을 수가 있지? 더는 참지 못하고 그가 크게 악을 질렀다.

“어머니는 바로 당신 때문에 죽은 거야!”

급기야 영명이 탁자를 엎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이 아주 형형하다 못해 미친 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시 내렸다. 아마도 연의 몸이 이런 폭력조차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신 그는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강 소리와 함께 찻잔이 산산조각 났다. 붉은 물이 바닥에 번졌다.

“내 기껏 생각하여 좋은 혼처를 찾아 주었더니 은혜도 모르는구나! 여봐라!”

문이 열리며 무사가 들어왔다. 영명은 뭐라 소리 지르려다가 이내 미간을 짚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분에 못 이겨 근처에 있던 서책도 집어 던졌다. 그러더니 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 저놈을 화정당에 가두어 나오지 못하게 해라.”

한시도 영명을 더 보기 싫었던 연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뒤돌아섰다. 무사가 조용히 연을 앞세웠다. 혹여라도 연이 어디로 가 버리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얼굴이었다.

“가시지요, 연 도련님.”

연은 부글부글 화가 끓는 마음으로 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영명이 그의 모친인 모용단리가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 말할 때마다 이 남궁세가가 한없이 경멸스러웠다. 그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영명으로 인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정당에 돌아오자마자 문 앞은 무사가 지키고 섰다. 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언제는 그가 화정당 밖으로 나가 돌아다닌 적이 있던가? 침상에 누우니 사나운 심기 때문인지 열기가 머리끝까지 훅 치밀어 올랐다.

시비가 탕약과 식사를 들여왔으나 연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무언가 먹을 만한 입맛이 아니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저 영명이 증오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자 연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다만 어둠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환장하겠네. 잠깐 사이에 또 무슨 일이야?”

문 앞을 무사가 지키거나 말거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모란이 방에 들어왔다. 연은 돌아보지도 않았고 대꾸도 없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이마에 손을 얹은 모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잠시 금빛 고리가 어렸다. 그는 연의 마음이 얼마나 사납고 난폭한지 볼 수 있었다. 증오와 분노가 넘실거리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문 앞을 무사가 지키고 있는 것부터가 수상하긴 했으니 역시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남궁연오가 없으니 아무래도 영명 그자뿐이겠지.’

세가에 남궁가의 둘째 자식을 감금할 만한 자는 많지 않았다. 연오가 지금은 주강의 녹림채를 살피러 가고 없으니 남는 사람은 가주뿐이었다. 영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모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이 영명에게 품고 있는 뿌리 깊은 증오만큼은 아니었다.

전에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도 않았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혼의 동요가 몸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란은 당장 캐묻지 않고 연을 내버려 두었다. 저런 종류의 분노는 누군가가 달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원인을 해결하든가 시간이 지나야 했다.

그는 연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무슨 일이 있는지 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는 없어도 개인적으로 알아볼 수는 있었다.

***

연은 이틀을 내리 앓았다. 역시 녹림채에게 잡혔던 일이 무리였는지 아니면 영명 때문에 심기가 상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오랜만에 앓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모친과 남궁영명이 함께 나오는 꿈을 꾸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잠에서 깬 뒤에도 숨만 고르게 쉬다가 한참 만에 눈을 뜬 연이 당황했다. 눈을 떠도 시야가 깜깜한 탓이었다. 밤인가 싶었지만 이내 스륵 치워지는 건 손이었다. 모란이 위에서 물끄러미 연을 내려다보았다.

“어…….”

연은 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가 모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창피인가 싶어서 벌떡 일어나려 하자 모란이 가슴을 짚었다.

“좀 더 누워 있어. 정말 더럽게 열이 안 떨어지던데.”

“이미 충분히 잤어.”

얼마나 잤는지 나오는 목소리가 거칠했다. 한숨을 쉬며 연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는데, 아니지, 모란으로 살았던 것까지 합하면 서른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연은 영명과 마주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크게 앓고 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다 들었어. 혼인하게 되었다며? 모용세가라면 네 어머니의 가문인가?”

이제는 심기가 많이 가라앉은 연이 그래, 하고 저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용세가는 남궁세가만큼은 아니어도 마찬가지로 싫은 세가였다. 필연적으로 어머니가 떠오르니까.

“뭘 해 줄까?”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연이 시선을 올렸다. 모란이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 아비도 싫고 혼인도 싫은 것 아니야? 원하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지. 세가에서 네 아비를 영영 치워 버린다든가, 혼인을 하지 않게 해 준다든가.”

연이 눈을 깜박였다. 왜 모란은 자꾸 자신에게 이리 해 주려는 것일까? 초반과 달리 이제 그는 대가도 받지 않았다. 꼭 연을 정말 어여삐 여기는 것 같지 않나.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모란은 지나치게 연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마치 연인 사이인 것처럼……. 그러나 결코 연인은 아니었다.

그는 모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연이 아주 작아서 훅 불면 날아가 버릴 솜털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고 우스운 비유인데, 그게 모란의 진짜 진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아니.”

연의 말에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예상한 대답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무슨 묘수라도 있는 것인가 기다려 보았더니 한참 만에 연이 대꾸했다.

“그냥 혼인할 거야.”

“그냥 혼인할 것이라고?”

“그래. 어쩌면 혼인하는 것도 세가에서 나갈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겠지.”

혼인한 뒤부터 연은 당당하게 세가에서 독립해 나가 살 수 있다. 그다지 원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이른 혼인이나 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모용령이 그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가족 중 한 명이 되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열여섯 살은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연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지치고 지겹다. 정확히는 이 세가에서 영명을 버텨 내는 일에 신물이 났다.

“흠.”

모란은 잠깐 소리를 흘리곤 말이 없었다. 그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연의 머리카락이나 만지작거렸다. 이틀 내내 앓느라 엉망인 머리카락을 자꾸 쓰다듬자 신경 쓰였던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씻을래.”

“씻겨 줄까?”

대꾸도 하지 않고 향하자 모란이 따라오는 게 아닌가. 연이 다소 어이가 없어 바라보았다.

“대답을 하지 않은 건 그러라는 뜻이 아니었어.”

“그랬어? 그런데 아니라고 해도 결과는 똑같지 않을까 하는데.”

모란이 뻔뻔스럽게도 말했다. 그러더니 목간통에 물을 채웠다. 그냥 허공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뜨끈뜨끈하니 김이 잔뜩 오르는 물이었다. 연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언제 봐도 모란의 마법이란 것은 퍽 신기하였다. 기왕 물이 데워졌으니, 연은 마지못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야한 짓을 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모란은 놀랍도록 목욕 시중을 잘 들어 주었다. 어쩐지 썩 익숙한 것 같았다.

“누구 많이 씻겨 주었나 보네.”

“그랬지. 예전에 노예였거든. 주인이 와서 시중들라고 하면 달려가서 씻기곤 했으니까.”

믿기지가 않아 연이 휙 쳐다봤다. 도무지 노예인 모란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모란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모란은 따뜻한 물을 부어 주면서 기분 좋게 목덜미를 주물러 주었다. 몸이 금세 노골노골 풀렸다.

“나도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야. 이백오십 년을 공으로 살았겠어? 죽을 위기도 많이 넘겼지.”

하도 시중받아서 그런지 그 주인도 나중에는 내 시중을 퍽 잘 들게 되더군. 그렇게 말하며 모란이 뜨거운 물을 정수리부터 부어 주며 살살 매만졌다. 그럴수록 연의 사나웠던 심기도 풀려 나갔다.

성이 풀릴 때까지 목욕을 마치고 난 뒤 연은 식사도 했다. 몸도 따뜻해지고 배도 차자 그제야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차까지 마시고 난 뒤 그가 다시 결론을 내렸다.

“역시 안 할래. 혼인을 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자가 조금이라도 흡족해하는 건 눈 뜨고 못 보겠어.”

영명이 괜히 모용세가와 혼인을 추진하는 게 아닐 터였다. 분명 얻는 이득이 있으니 그리하는 것이겠지. 연은 차마 그 꼴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모란이 엉뚱한 말을 했다.

“혼인을 하는 건 아무래도 좋다고?”

“그래. 어차피 내 나이면 혼인이 이른 것도 아니고.”

연은 어떻게 해야 이 혼인을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모란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영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인을 성사시키려고 할 게 뻔했다. 연의 반대 의사 같은 건 아마 별 영향을 미치지도 못할 것이다. 신부와 한방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서류만 오가면 끝이었으니.

“아까 혼인을 하지 않게 해 준다 하였잖아. 무슨 수를 쓰려고 했어?”

어떠한 생각에 잠겨 있던 모란이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글쎄, 이 혼인을 사주한 자를 땅속에 파묻어 치워 버릴까 했는데.”

연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란이 한 말이 진심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물어볼 것들이 있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혼인을 사주한 자가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네 아비를 구슬린 자지. 남궁사영 말이야. 아들이 상주로 있는 상단이 이 혼인으로 이득깨나 보게 되었더군. 모용세가와 거래도 트고.”

남궁사영……. 안 그래도 그 작자는 영명의 지시를 받아 소룡대회 건으로 한위를 괴롭혔을 때부터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이 두 번째로 궁금한 걸 물었다.

“진짜로 남궁사영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려고 했어?”

“뭐…… 그러면 추적대 따위를 보내도 땅 위에서는 절대 못 찾을 테니까?”

남궁영명을 세가에서 치워 버린다는 것도 비슷한 방법이겠구나 싶어 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남궁사영을 없애 버린다 하여 혼인이 중단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모용세가와 말이 오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실상 혼인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궁영명을 치워 버린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되었다. 아무리 부친이 증오스럽다 한들 연은 영명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라 사주할 수는 없었다.

“아니면 혼인식 날 행패를 좀 부린다든지.”

“……무슨 행패?”

“비를……. 아니, 비는 약하고 우박을 떨어트린다든가, 아니면 주례가 선언하기 전에 이 혼인은 반댈세! 하고 뛰어 들어온다든가.”

우박이야 그렇다 쳐도 이 혼인은 반대라며 들어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리고 주례는 또 무어란 말인가? 이번에도 역시 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남궁영명이야 그렇다 쳐도 모용세가도 마찬가지로 이 혼인을 원했다는 건 다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모용단리가 죽은 후로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경색된 상태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연의 모친은 나름 모용세가에서는 사랑받던 여식이었으니. 연은 그의 외조부인 모용천을 떠올려 보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영명처럼 증오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결코 반가운 사람도 아니었다.

어쨌든 모란이 제시한 방법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것들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거라면…….’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자개장을 뒤졌다. 그가 꺼낸 건 고급스러운 비녀와 서신이었다. 그러나 이건 마지막 수단으로 두고 싶었다. 사실 수단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망설이다가 다시 자개장을 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란은 연의 혼인에 끈질긴 관심을 보였다.

“아니면 이건 어때. 네게 다른 청혼자가 있는 거야.”

“나에게 청혼할 다른 사람이 누가 있어? 만약에 있다 한들 모용세가에 준하는 힘을 가져야 어떻게 성사가 될 텐데.”

“흠.”

모란은 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연이 이 모든 상황에 짜증을 내고 있을 때쯤, 한참 만에 이렇게 묻는 것이다.

“네 이상형이 무엇이지?”

“내 이상형……?”

연은 왜 그런 걸 물어보는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일단은 무인이면 좋겠어. 그럼 건강할 테니까. 내가 의원이니 약한 자에게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선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그럼 외형은? 뭐 그냥 막연히 상상하고 있는 미인도가 있을 거 아냐?”

“있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어봐?”

“어서.”

이번에는 모란이 또 무슨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까 불안했다. 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글쎄, 뭐……. 몸매 좋고 예쁘고…… 빨간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 대체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무슨 이상한 일 하려는 건 아니지?”

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모란은 능글맞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내가 언제 이상한 걸 했다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내 이상형도 알려 줄까?”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모란은 연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리고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이상형을 나열했다.

“난 상대가 좀 성질이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우는 모습이 귀여운 사람이지. 특히나 침대 위에서 귀엽게 울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어지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모란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이 인상을 썼다. 그러다 이내 질색하는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이상형도 평범하지를 않고, 아주…….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변태 같다? 모란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연이 움찔했다. 변태는 변태인데 좀 무서운 변태다.

아무튼 연은 시간을 두고 고민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영명에게 감금되어 있는 동안은―물론 나가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지만― 고민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

시비로부터 말을 전해 들은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 했느냐?”

“가주님께서 모용세가에서 온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하셨습니다.”

용건을 전한 시비가 정중하게 함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연이 허, 하고 기도 안 찬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의 의사가 이 혼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는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줄은 몰랐다.

모용세가는 요녕성(遼寧省)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요녕성에서 안휘성까지 마차로 달려오는 경우에는 꽤나 오랜 여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도 말을 꺼낸 것이 이틀 전인데 벌써 모용세가의 손님이 도착했다니, 영명은 적어도 한 달은 전부터 이 일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이건 또 뭐야.”

함을 열어 보니 고급스러운 옷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옷을 입고 나오라는 거지? 연이 차게 웃었다. 그렇게 해 줄 의향은 전혀 없었다. 무엇이든지 영명이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예 나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사들에게 끌려 나가기는 싫었다. 영명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연은 평소대로 걸쳐 입고 나갔다. 밖에서는 주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은 정말로 그가 영명의 지시를 따르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주강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창일당에 다다르자 연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연이 잠시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연회장은 두 자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영명과 장로들이 앉아 있는 남궁세가의 자리, 그리고 모용세가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 자리. 그 자리 중앙에 모용천이 앉아 있었다.

모용천이 누구인가 하면 마치 빛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검술을 쓴다 하여 광연검(光然劍)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반로환동의 경지에 오른 자라 영명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또한 연의 외조부이기도 하였다.

연이 들어서는 쪽으로 모용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연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영명은 자신이 보낸 옷을 연이 입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자 혀를 찼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자리가 자리였기 때문인지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엇 하느냐? 오랜만에 뵙는 네 외조부께 인사드리지 않고.”

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아직도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모용천에게 인사를 올렸다.

“모용세가의 가주님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조부님이 아닌 가주님이라는 호칭에 모용천의 눈썹이 움틀 하였다. 그러나 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외조부? 외조부라 해도 전혀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용천을 본 것은 열 살 때의 일이다. 모란으로 지냈던 일까지 포함하면 무려 이십여 년 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사실 연은 모용천이 오리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자리가 혼인식도 아니고, 혼인을 올리기 전 약식으로 얼굴이나 보자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던가?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모용사걸이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모용령의 부친이다. 방계 중에서도 한미하고 무공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수완이 좋아 현재 모용세가에서 나름대로 한자리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모용령은 조용하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연은 모용령에게 관심이 가지도 않았다. 아름답게 꾸미기는 하였으나 열여섯이었다. 네 살 차이가 큰 차이는 아니라지만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연은 실제 산 세월로 치면 서른이 아니던가? 그의 눈에 모용령은 까마득하게 어려 보였다.

연회는 참으로 지루했다. 정작 당사자인 연이나 모용령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이 혼인으로 이득을 볼 자들만 웃고 떠들었다. 말이 없기는 모용천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연회가 끝나도록 앉아 있기만 했다. 벌써부터 피곤하여 어서 화정당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피곤하여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남궁연. 자리에 앉거라!”

영명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앞이라 더는 어쩌지 못하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할 뿐이었다. 연은 손님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연회장을 나갔다.

‘모란은 오늘 언제쯤 돌아올까? 한위나 만나러 갈까? 모용세가도 왔으니 설마 영명이 더는 감금하지는 않겠지. 감금이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렇게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연아.”

연이 몸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낯선 목소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따라온 모용천이 서 있었다. 연은 이 혼인에 모용천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모용천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 말하면서 연은 모용천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을 보았다. 아마 모용천도 연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을 터였다.

연에게 모용천은 제법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옛날부터 그의 모친은 못해도 일 년에 서너 번은 연을 데리고 요녕성에 가고는 했다. 연은 그저 어미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게 좋아서 요녕성에 가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일 년, 이 년……. 시간이 흐를수록 모용단리는 요녕성에 다녀올 때마다 더욱 심한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그녀는 일 년에 서너 번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정도로 요녕성을 무척 그리워했다.

“안 본 사이 많이 컸구나.”

그렇겠지요, 십 년이나 전이었으니. 속으로는 그리 말해도 연은 겉으로 별 대꾸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모용천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딱히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런 것도 없이 남같이만 느껴졌다.

“정말 단리를 많이 닮았어.”

하지만 그 말에, 연은 슬슬 불편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저런 말까지 꺼냈으니 모용천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연은 여기서 모용천과 애틋한 가족애 따위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가 딱 잘라 말했다.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저는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인을 한 뒤에는 모용세가에 와서 살거라.”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모용천이 꺼낸 이야기는 그만큼 뜬금없는 것이었다. 혼인을 한 뒤 모용세가에서 살라고? 하지만 모용천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전 네가 여기서 잘 지내는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니…….”

“그러니, 모용세가에서는 잘 지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모용단리가 죽은 직후였다면 연은 생각도 하지 않고 모용천의 말에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얼굴을 보지 않고 산 지 십 년이나 되었다. 연의 냉랭한 태도를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상관없는 건지 모용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모용세가를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와는 다른 태도시군요. 제 얼굴도 보기 싫어하시더니.”

“그때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에 연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용천은 알고나 있을까? 모용단리가 죽은 뒤 연에게 남궁세가가 얼마나 지독하고 무섭게 느껴졌던가……. 정작 필요로 할 때는 모습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 와서 데려간다고 하다니?

이제 연은 모용천이 필요하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그저 자꾸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수면 위로 올리니 보기 싫을 뿐이었다. 연이 딱 잘라 말했다.

“십 년이 지나도 어머니가 그리우니 어머니를 닮은 절 데려가시려는 거군요.”

“그 무슨…….”

“그러나 안 되겠습니다. 저는 전혀 이 혼인에 응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

“실은 영명 가주님이 마음대로 하신 것이라 저는 제가 혼인하게 된다는 것도 이틀 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혼인의 당사자인 걸 고려하자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더는 마주하기 싫었던 연이 그리 말하고는 뒤를 돌았다. 모용천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것 같기는 했으나 불쾌해서 듣기가 싫었다. 어떻게 가주라는 사람들이 다 하나같이 제멋대로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우습거나 별 의견도, 의지도 없는 머저리로 보이나 보지……. 빌어먹을.’

하루빨리 남궁세가를 나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일단 한번 혼인이라는 주제가 거론된 이상 영명이 앞으로도 계속 이 문제로 연을 성가시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제가 싫다고 하면 연오가 반대할 게 뻔하니 주강 동부 지역의 도적들을 살펴보라 보낸 것일 테고 말이다.

저조한 기분으로 화정당에 돌아가려던 연이 문득 멈추었다. 불현듯 그냥 한위가 보고 싶었다. 한위만 보고 싶었을 뿐이랴. 은록도 보고 싶었다. 그래, 정말이지 은록이 보고 싶었다.

‘사부님…….’

찾아가려고 했으나 중간에 워낙 일이 많아서 미처 찾아가지를 못했다. 모란이 한 말이 떠올랐다. 워낙 사방에서 못 살게 구니 은록에게 대놓고 자신이 제자라는 걸 밝혀도 정말 뭐가 대수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은록은 볼 수 없는 처지니 대신 폐월당으로 향했다. 요즘 아파서 몸져누운 데다가 영명에게 바로 감금까지 당하느라 오래도록 한위를 보지 못했다.

“한위야.”

부르며 들어서니 뜰을 쓸고 있던 시비가 정중히 인사를 해 보였다. 요즘 폐월당은 봄을 대비하여 정원사가 한창 뜰을 가꾸는 중이었다. 예전의 그 허름한 분위기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쾌적했다.

“한위 도련님이 지금 자리를 비우셨는데, 곧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연이 누굴 찾는지 바로 눈치채고는 시비가 알려 왔다. 고개를 끄덕인 연이 기다리자 잠시 후 한위가 도착했다. 그는 연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반가운 얼굴을 했다.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괜찮단다. 그래, 오늘도 남궁인 장로께 배우고 돌아오는 길이더냐?”

한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폐월당 안으로 들어서니 이제는 공기도 훈훈하였다. 바닥에 앉던 연은 문득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발견했다. 자개함 위에 옥으로 된 노리개와 전낭이 놓여 있었다.

“노리개?”

한위가 가지기에는 비싼 것이라 의아하여 보고 있었더니 활기찬 대답이 돌아왔다.

“주강 형님이 그다지 화가 난 게 아니셨나 봐요. 어제 주셨어요.”

“……그러니?”

대답은 그리했지만 연은 영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녀 모두 가리지 않고 옷에 달고 다니는 것이 노리개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여인이 즐겨 사용하는 종류 같았다. 새것은 아니다. 옥은 말끔하였으나 붉은 술의 빛이 바래 있었다. 주강이 사용했을 리는 없었다. 그는 결코 치장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이걸 왜 한위에게 주었을까? 그만큼 한위가 주강에게 중요해졌나?’

옆의 전낭도 수상쩍었다. 꽉 차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이만저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혹시 이 전낭도…… 주강이 준 것이냐?”

“앗, 네. 돈을 맡길 곳이 필요한데 아무에게 맡길 수는 없겠다고 제게 맡기셨어요.”

“…….”

연은 일단 전낭을 집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침상 아래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한위는 멀뚱거리며 연이 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언뜻 본 전낭의 속은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두 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거의 주강의 전 재산일 텐데……. 여인이나 할 법한 노리개는 왜 주고 전낭은 왜 주는지 연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위에게 정을 많이 주었단 말인가? 그래, 한위가 누군갈 배신할 만한 성격은 아니라지만.

‘분명 주강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래서 제 전 재산을 줬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연으로서는 주강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영명의 밑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인가? 안 그래도 혼인 일로 머리가 복잡한데 주강까지 고민을 더해 주다니…….

한위와 함께 폐월당 안으로 들어가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은 주강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 모용령과 혼인하게 될 테니까. 그리 되면 영명과 더불어 모용천까지, 그의 인생에 피곤한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형님?”

한위가 의아하게 보기에 연이 얼른 표정을 고쳤다. 그러나 한위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어도 저조해진 기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한위와 시간을 지내다 보니 해가 질 무렵이 되었다. 지금쯤이면 모란이 돌아왔으려나 싶어 화정당으로 가 보니 영명이 보낸 무사들만 얼쩡거리고 있어 연은 더 기분이 상했다.

“왜 갑자기 지금에 와서야…….”

모용천은 모용단리가 죽었던 그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입술을 깨물던 연의 눈에 문득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이 눈에 들어왔다. 모란이 마시고 버려둔 모양이었다. 별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꽤 묵직했다.

슬쩍 뚜껑을 따서 냄새를 맡아 보니, 향이 아주 그윽한 것이 결코 싸구려 술은 아니었다. 연이 미간을 접으며 술병을 바라보았다. 이 몸으로는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모란의 몸으로는 꽤 마신 적이 있었다. 그의 몸은 술이 잘 받았고,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 체질이었다.

‘마시고 싶다. 하지만 안 되겠지.’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연이 벌컥 술을 들이켰다. 모란은 물론이거니와 남궁영명이며 모용천까지 다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데 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 된단 말인가?

술은 부드럽고 감미롭게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어찌나 품질이 뛰어난 술이던지 목 넘김이 아주 좋았다. 두어 모금 더 마시자 몸에 훅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가를 소매로 훔친 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술병을 바라보았다.

“……좋은데?”

모란이 돌아온 건 연이 술 한 병을 거의 다 비워 갈 무렵이었다. 별생각 없이 들어오던 모란이 문득 멈추었다. 왜 방에서 이렇게 진탕 술 냄새가 나지?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에 걸린 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빈 술병을 탈탈 털어 보고 있는 연의 모습이었다. 모란은 드물게도 경악했다.

“……연아?”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자 고개를 돌린 연이 방긋 웃는 게 아닌가. 모란이 한숨을 쉬며 술병을 낚아챘다. 텅텅 비어 있었다. 연이 주정을 부렸다.

“한 병 더 내놔.”

그러고는 제 옷자락을 잡아당겨 흔드는 것이다. 주정도 귀엽게 부리네. 그가 탁자 위를 확인해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안주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제 연은 어디에 술을 숨겼나 모란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자 퍽 시무룩한 얼굴로 털썩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귀엽기는 하지만 몸 상태가 술을 마셔도 될 만한 상태가 아닐 텐데.

그때 연이 벌겋게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모란을 빤히 보더니 대뜸 시비를 걸었다.

“너 그 눈깔 하는 거 싫…다…….”

“그래……. 네가 이 눈깔 싫어한다 이거지.”

금빛 어린 눈으로 상태를 살피던 모란이 픽 웃었다. 다행이랄지, 내일 아침 술병이 날 게 분명하단 걸 빼고는 몸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모란에게서 뜯어낼 술이 없다는 걸 납득하지 못한 연이 침상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재우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드물게 몹시 귀여운 모습이라 모란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연이 본격적으로 주정을 부렸다.

“혼인하는 것도 싫고……. 완전, 어린애 아냐? 열여섯이면.”

그래그래 하고 있으려니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짜증을 부렸다. 모란이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얘는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기에 뭘 하든 귀엽고 예뻐 보이나?

“열네 살이나 차이가 난다구, 열네 살이나. 양심이 있으면, 응? 한 손은 몰라도 두 손 넘어가는 나이 차는 건들지도 말아야 하는 거 아냐?”

연이 조근조근 정상적인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모란이 슬쩍 제 손을 바라보았다. 연과 자신 사이의 나이 차를 세어 보려면 손이 몇십 개는 필요하겠는데.

“주강도 그래,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고민거리나 얹어 주고…….”

“왜, 주강이 뭘 했어?”

모란이 살살 구슬리자 연이 술술 토해 놓았다.

“한위에게 자기 전 재산을 맡겨 놓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전 재산을 그 꼬마에게 맡겨 놓았다 이거지. 모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주강이 그리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결코 좋은 이유는 아니었고 시기도 그가 예상한 것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또?”

“또……. 내 외조부란 사람이 너무 귀찮게 하고……. 내 아버지란 작자는 개새끼고……. 내 몸은 완전 쓰레기에다가…….”

연의 말이 느릿느릿해졌다. 그러나 졸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글픈 얼굴로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했는데, 당신이라서…… 말하는 거야.”

“그래, 무슨 말인데?”

한참을 입만 꾹 다물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난 항상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하곤 했는데, 실은 아냐.

“어머니는 자살한 거지. 이 세가가 싫고 아버지도 싫고 나조차도 싫어서.”

이불보를 만지작거리며 연은 가만히 모용단리가 죽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기억 처음부터 모용단리는 언제나 우울하고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슬픈 사람이었다. 자신을 봐 주지 않는 영명 때문에도 슬펐고, 요녕성이 그리워서도 슬펐다. 연은 유모와 시비가 불쌍하다며 소곤거리는 걸 잠결에 듣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용단리는 영명을 너무 사랑하여 슬펐으리라.

영명을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세가의 혼인식 날. 모용단리의 눈에 영명은 완벽한 남자로만 보였다. 영명도 모용단리에게 퍽 잘해 주었다. 그렇게 만남이 지속되다 완전히 사랑에 빠져 버렸다. 남궁영명과 혼인하고 싶다는 모용단리의 의사를 모용세가에서는 반갑게 받아들였다. 여러모로 나쁠 것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후 영명은 모용단리를 배반하였다. 모용세가를 뒤에 업고 가주에 오르고 나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용단리를 찾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보세희와도 혼인하여 정실로 맞이했을 때, 모용단리의 가슴은 반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지면 영명이 자신을 봐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연을 낳고도 영명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모용세가 금지옥엽의 사랑은 그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끝이 났다.

모용단리는 요녕성으로 너무나도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품에 안겨 상처를 다독이고 싶었다. 그래서 영명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혼을 거절당하고 난 뒤, 그녀는 단식까지 결행하였다. 그러자 영명은 어떻게 했던가? 고집이 세니 꺾어야겠다며 아예 감금해 버렸다. 잘못했다고 빌면 문을 열어 주고 음식을 주겠다고 하였다…….

모용단리에게도 절망스러웠겠지만 연에게도 만만찮게 무섭고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던 연이 떨리는 한숨을 뱉었다.

“솔직히 백모란으로 있을 때 너무 좋았어. 당신 어머니는 진짜 어머니 같았거든……. 그러다 백모란이 된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폐렴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알았지. 환자에게 살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대단한 실력의 의원이라도 별수는 없더라고.”

모란의 어머니는 아들이 제대로 의원의 제자가 되어 제 살길을 찾았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기력을 잃었다. 일찍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한 것이다. 반면 모용단리는 달랐다. 그녀는 영명을 잊고 싶어 반쯤 미쳐 있는 상태였다.

끝끝내 모용단리는 잘못했다고 빌거나 방에서 나오는 일 없이 음식을 거부했다.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서야 영명은 주치의를 들여보내 주었는데, 그리될 때까지 연은 얼마나 영명에게 매달리고 간곡히 애원했는지 모른다. 열리지 않는 창일당 문 앞에 엎드려 제 어머니를 좀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었다…….

그러나 주치의가 들어갔을 때는 너무 늦었다. 몸이 지나치게 약화되어 모용단리는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았다. 울고 있는 연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어린 아들을 한번 보고는 눈을 감고 잠자듯이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도저히 남궁세가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연오 형님에게 부탁해 모용세가에 찾아간 적이 있었어. 그토록 어머니가 가고 싶어 하던 모용세가니 나를 받아 주지 않을까? 하지만 문조차 열어 주질 않았지.”

술기운이라도 빌리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말들이었다. 툭툭 털어놓고 나니 어느 정도 취기도 가셨다. 모란은 말끄러미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싫은 것만 말했으니 이제는 좋은 것도 말해야 하지 않겠나. 연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모란, 당신이 세서 좋아.”

“그래?”

전부터 그랬다. 모란의 힘과 재주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라서 좋았다. 그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몸을 치료해 내는 것도, 침입 불가에 가까운 창연각에서 비급을 훔쳐 나온 것도, 소룡대회에서 한위를 우승시킨 것도, 또 사라졌던 은록을 구해 낸 것도.

연은 모란에게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고 있었다. 정작 그가 힘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인 건 짜증 나긴 하는데, 그것도 좀 좋아.”

“흠. 몸이 완전히 낫고 나면 술 좀 자주 먹여야겠는데.”

연은 몸을 기우뚱 앞으로 기울이다가 모란의 품으로 널부럭 안겼다. 사실 안겼다기보다는 가슴이나 명치쯤에 머리로 박치기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란이 잠깐 켁, 소리를 내는 사이 연이 하품을 했다.

“실은 그 치료도 좀 좋아…….”

모란이 주는 그 쾌감이며 감각이, 좋긴 좋았다. 부끄러워서 그렇지. 그 말에 모란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고 연은 까무룩 잠에 잠기고 말았다.

***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닐 것이야.”

연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면경을 보니 눈 밑이 퀭했다. 술병이 난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연은 두통으로 신음했다. 머리가 쾅쾅 울려 댔다. 더 끔찍한 건 어젯밤 모란에게 했던 말들이 다 떠오른단 점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 괜찮다. 도리어 기분이 괜찮아졌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한 말들은? 죄다 주워 담고 싶었다.

“그렇게 날 좋아하는지는 몰랐지.”

모란이 히죽거리며 시비가 타 온 꿀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밀었다. 연은 그를 째릿 노려봤지만 일단은 목이 타니 꿀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갈증은 덜했으나 속은 다소 메슥거리고 쓰렸다. 전형적인 술병의 증상이었다.

“술주정뱅이의 말은 다 헛소리야.”

따갑게 쏘아붙이면서도 제 말이 억지라는 건 연도 알았다. 취중진담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게다가 더욱 민망하고 부끄러웠던 건 일어나 보니 옷도 침의로 갈아입혀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술주정을 한 뒤 상대에게 뒤처리까지 맡기다니……. 그게 모란이라니…….

어제 술을 마실 때 이런 일을 예측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한 모금만 마신다는 게 어느새 두 모금이 되고 한 잔이 되고 한 병이 되어 버렸다.

“오늘 중요한 손님을 맞이해야 할 텐데 낮까지는 좀 자 두지 그래?”

중요한 손님? 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모용천을 말하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언지 묻기도 전에 뭐가 그리 급한지 모란은 휙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틀 전부터 그는 뭘 하는지 꽤 바빴다.

“……뭐, 나쁠 건 없겠지.”

안 그래도 몸이 꽤 괴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연은 다시 침상으로 기어 들어갔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자 다행히 두통도, 메슥거리는 속도 덜했다.

얼굴도 훨씬 생기가 돌았다. 이제 머리도 맑고 명쾌해진 터라 연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어제 연이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가 혼인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해졌을 터였다. 적어도 모용천만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영명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혼인을 진행하려 한다면, 연도 좋지 않은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게 비록 세가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일지라도…….

연이 남궁세가에 가능한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연오뿐이다. 앞으로 연오가 세가를 물려받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능한 좋게 끝내고 싶은데.”

영명이나 모용천 둘 중 한 명이 마음을 돌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겠지. 연이 중얼거리며 자개장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녀와 낡은 서신을 꺼내 들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서신은 두고 비녀만 품에 넣었다.

잠시 후 시비가 와서 고했다.

“도련님. 모용천 가주님께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지금 화정당 객실에 계십니다.”

그럴 것 같았다. 모용천이 겨우 어제 대화로 혼인을 단념하고 돌아갈 것이었다면 굳이 남궁세가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모를 단정히 하고 화정당의 객실로 향하자 모용천이 앉아 있었다. 그는 객실 안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어떠한 흔적이라도 찾고자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리 말하며 연이 자리에 앉자 모용천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표정이 담담하였다.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다.”

연이 익히 예상한 대답이었다. 모용천은 시비가 내온 차를 마시며 연에게 제안했다.

“만약 혼인 뒤 모용세가에 온다면 네게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마. 무공의 성취가 낮고 건강이 안 좋다 하였지. 무림 최고의 의원을 붙여 주마. 필요하다면 내단도 구해다 줄 수 있다.”

그다지 끌리는 제안은 아니었다. 연은 속으로 짐작했다. 아무래도 그의 어머니가 지냈던 곳이나 자신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그리움이 깊어진 모양이지. 연은 모친을 많이 닮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이미 제게는 좋은 주치의가 있습니다.”

모란이라고, 좀 변태적이고 얄밉기는 해도 실력은 아주 좋은 사람이 있었다. 실제로 요즘 연의 상태는 최근 들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직 건강하다고까지는 말 못 하지만. 모용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치의가 있는데도 이렇게 몸이 안 좋단 말이냐?”

모용천 같은 고수의 눈에는 연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게 한눈에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반로환동의 경지에 오른 세가의 장로도 연을 보면서 모용천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혹은 어제 술을 마시고 난 뒤라 더욱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연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받아들이는 걱정은 오로지 연오와 한위가 보내는 것뿐이다.

혹은…… 모란이라든가.

“마침 잘 오셨습니다. 드릴 것이 있었거든요.”

그리 말하며 연이 품속에서 비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모용천은 비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럴 만도 하겠지. 모용단리가 남궁세가로 올 때 소중히 간직하던 비녀였다. 어지간히 귀한 물건이니만큼 중요한 사람이 선물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비녀를 조심스럽게 쥔 모용천은 눈가가 붉어졌다. 연은 그 모습에 눈을 내리깔았다.

“또한 어머니가 죽기 전 남기신 서신이 있습니다.”

“서신…… 말이냐?”

이제부터 비열한 짓을 할 것이기 때문에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말을 꺼낸 이상 이제는 무를 수 없었다.

“이 혼인을 파해 주시면 그 서신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용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기 서린 얼굴로 연을 바라보았다. 죽은 딸이 남긴 서신이다. 그에게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연에게도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저 마음이 어떨지는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처음으로 모용천이 표정을 내보였다. 연은 담담히 탁자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얀 것……. 그토록 모용세가에 오는 것이 싫으냐?”

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러는 그의 기분도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이 지긋지긋해졌다. 남궁세가나, 모용세가나 그가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은 자들이 인생을 마음대로 하려고 쥐어흔드는 상황 말이다.

“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할 때는 가지 못했으니까요. 네, 가기 싫습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으나 연은 꿋꿋하게 버텼다. 모용천은 비녀만 쥐고 있다가 그대로 나가고 말았다. 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렸을 적 모용세가에 가서 살았다면 인생이 나아질 수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과 비슷했을까……. 외조부가 그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게 퍽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빨리 세가를 나가서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먼 곳에서 의원을 차렸으면 싶었다.

‘또 술이 마시고 싶군.’

술병으로 아침에 고생한 게 언제냐는 듯 다시 술이 마시고 싶었다. 이래서 다들 술을 마시는 거겠지. 그나저나 어제의 술은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다.

그런 술이기에 모란이 매일 마시는 건가? 하루에 한 잔 정도라면 마셔도…… 되지 않겠지.

연은 의원이기 때문에 환자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제 한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목록 중에서도 첫 번째에 가까웠다. 아니, 금기 중의 금기였다.

다시 잠이나 자며 심란한 심기를 다스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시비가 다시 종종 찾아와 도련님, 하고 불렀다.

“도련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남궁영명인가? 아니면 모용사걸? 그것도 아니면 모용령? 그러나 시비가 말하는 이는 뜻밖의 사람이었다.

“남궁단봉 총관님이십니다. 급한 일이라 하십니다.”

“남궁단봉 총관이라고?”

저도 모르게 연이 되묻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단봉 총관은 그와는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탓이다. 단순히 친하지 않은 사이를 넘어 사사로운 말 한번 건넨 적도 없었다. 겨우 얼굴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들어오시라 하여라.”

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허락했다.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도통 짐작 가는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남궁단봉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연을 찾아왔다. 꽤나 급한 얼굴이라 연은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총관님?”

“연 도련님, 정말 실례되는 일이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요.”

“시간이야 내줄 수 있지만, 대체 무슨 연유입니까?”

그는 아직까지도 남궁단봉 총관이 왜 자신에게 찾아왔는지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총관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던가? 세가의 온갖 경비와 중한 거래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세가와 계약을 한 상단에서 얻는 모든 수익이 일단 총관의 손을 한번 거쳐 간다. 그만큼 총관은 세가에서 가장 바쁘고도 중요한 직위였다.

“연 도련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체 무슨 일인지…….”

남궁단봉이 말하는 것은 이러하였다. 최근 세 달간 안휘성 근처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급성장한 신생 상단이 있다고 했다. 그 상단에서 이번에 세가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트기로 하였는데, 조건으로 남궁가의 직계가 증인으로 참석해 달라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명은 그런 일에는 나올 신분이 아니고 연오는 주강에 가 있느라 자리에 없다. 한위는 나이가 어리니 안 된다. 남은 사람은 연뿐이었다.

‘별 희한한 자도 다 있군.’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부정적인 의미로 보았는지 남궁단봉이 땀을 훔쳤다.

“참으로 무례한 자가 아닙니까.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정말 무시할 수가 없는 조건인지라…….”

“무슨 조건이기에요?”

“계약금으로 자그마치 금 백 냥을 준다 하였습니다.”

금 백 냥! 확실히 총관으로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혹시나 싶었는지 총관은 말을 덧붙여 연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무림사봉 중 제갈양리도 그 여인에 비하지는 못할 겁니다.”

금 백 냥 때문인지 아부가 참으로 대단도 하다……. 그나저나 이 황당한 조건에 돌연 어떤 사람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인이라 하지 않는가. 딱히 아름다운 여인이나 금 백 냥 때문이 아니라, 단봉 총관이 불쌍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천으로 인해 저조해진 심기를 환기할 필요도 있었다.

총관은 연을 영장당(永長堂)으로 안내했다. 보통 세가의 중요한 손님들을 대접할 때 사용하는 전각이다. 어지간히 중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총관은 연을 안내하면서 이 상단의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가에 대해 떠들었다. 세 달 만에 안휘성 자금줄을 휘어잡았다느니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른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영장당에 도착하자마자 연은 무사들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건물 안을 흘깃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쯤 되자 연도 미약한 호기심이 들었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다들 저러는 것인가?

그는 제갈양리를 본 적이 있었다.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종종 연오를 만나러 세가에 온 덕분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건 기억한다. 그런데 그보다도 아름답다라…….

그런데 안에 들어서자 정작 장본인은 어디에 갔는지 호위무사로 보이는 이만 자리에 서 있었다. 단봉은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백매화 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잠시 답답하여 주위를 둘러보고 오신다 했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매화? 꼭…… 이름이 말이지, 누구와 비슷한데……. 돌연 오늘 아침 모란이 한 말이 떠올랐다. 중요한 손님이 모용천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설마 이 백매화란 사람이 그 중요한 손님인가?

점점 백매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총관은 초조해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연은 그저 침착하게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중요한 손님이라는 것도 그렇고 백매화라는 이름도 그렇고 아무래도 모란이 꾸민 일 같았다.

‘백매화는 그럼 주루의 기녀를 고용한 것인가?’

꽃향기가 훅 풍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매화가 돌아온 모양인지 총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벅저벅하는 소리에 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백매화를 보았다.

“컥, 쿨럭, 쿨럭!”

사레가 들린 연이 찻잔을 내려놓다 말고 거세게 기침했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아니, 단순히 기침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매화가, 아니, 백모란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런, 공자님께서 감기에 들리신 모양이군.”

모란이 예측 불가한 행동을 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건 정말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붉은 옷을 차려입은 모란이 의자에 앉았다. 하늘하늘하고 어여쁜 비단 옷이다. 머리에는 비녀며 장신구를 꽂았고 귀에서도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그런데 그가 차를 마시려고 하자 팔 근육이 불끈했다. 옷이 꽉 끼도록 탄탄한 가슴 근육도 불끈했다. 그랬다. 어딜 봐도 모란은 지금 남자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 연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단봉 총관이 웃었다.

“하하, 도련님께서도 백매화님의 외모에 할 말을 잃으신 모양입니다.”

할 말을 잃어? 이건 할 말을 잃은 수준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모란이 여장을 하고 연의 앞에 앉은 상황에! 이 모습 어디가 제갈양리보다 아름답단 말이야! 이상형이 붉은 옷이 어울리는 여자라고 했지 붉은 옷을 입은 백모란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위무사며 단봉 총관은 모란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모란이 뭔 수를 쓴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란의 말은 더욱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

뭐, 뭐라는 거야? 연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게 뭐라는 건가 하는 얼굴로 모란을 바라보았다. 여장을 하였다고 하여 모란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당당하고 더…… 뻔뻔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 운명적인 사랑, 열정적인 사랑. 아무래도 나는 공자에게 그 모든 사랑을 느껴 버린 듯해.”

“뭐, 무, 뭘……?”

연이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총관은 아예 입이 딱 벌어져 있었다. 모란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들고 있던 붉은 부채로 연을 탁 가리켰다.

“연 공자, 나와 혼인해 주지 않겠나?”

연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여장을 한 모란이 세가에서 자신에게 당당하게 청혼하는 모습은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꿈에서라도 나올까 무서운 장면이 아닌가. 당황해 하는 사람들 중에서 모란만이 참으로 태연하였다.

“부끄러워서 대답도 하지 못하는군. 그럼 연 공자와 나는 혼인을 하는 것으로.”

“자, 잠시만, 백매화 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그건 불가한 일입니다. 연 도련님은 현재 약혼자가 있으신 몸으로…….”

“그까짓 거 파혼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서 모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전낭이었다. 탁자 위로 떨어지는데 꽤 무거운 소리가 났다. 총관이 조심스럽게 전낭을 열어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곳에서 나온 것은 빛깔도 영롱할 뿐만 아니라 크기도 꽤 큰 금강석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값을 따질 수 없을……. 이 무슨 돈지랄인가……. 아니, 그보다도 모란은 대체 저런 금강석을, 어떻게…….

“파혼하면서 입을 손해는 이 정도면 충당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총관은 조심스럽게 금강석을 내려놓은 뒤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워낙 중대사인지라,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 그럼 얼른 뛰어갔다 와.”

모란이 파리 내쫓듯 손짓하자 총관이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영명에게 알리려는 것 같았다. 총관이 사라지자 모란은 호위무사며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물렸다. 연과 단둘이 남자 그가 히죽 웃었다.

“어때?”

어떠냐고? 연은 한참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살아온 중에 이처럼 황당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란, 당신……. 이게 대체 무슨…….”

“그래도 어떻게 내가 나인 줄 한눈에 알아봤네. 말투에서 너무 티가 났나?”

그럼 모를 수가 있나! 여장했다고 하여 그 얼굴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연이 잠시 예의는 집어치우고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탔다.

조금쯤 침착해진 후 모란에게 따지고 들었다. 습관처럼 멱살을 잡을까 생각도 했는데 비단 옷이 너무 하느작거려 멱살을 쥐면 북 찢어질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왜? 좋지 않아? 넌 모용세가와 혼인을 올릴 일도 없고, 일단 나와 약혼을 맺어 놓으면 더는 혼인으로 귀찮아질 일도 없을 테고.”

그건……. 여장한 모란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였으나 일단 안 보려고 노력하며 연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알맹이야 어쨌든 지금 모란은, 아니 ‘백매화’는 안휘성 주변을 휘어잡는 재력가에, 젊은 여인이다.

모용천에게 서신을 인질로 잡기는 하였으나 정말 제 요구를 들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일단 파혼하고 ‘백매화’와 약혼을 하면 더는 영명이 혼인으로 귀찮게 굴지도 않을 거고, 모란이 실제로 결혼할 것도 아니고.

이윽고 연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좋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간단해. 그냥 내가 좋아 죽겠다고 하면 되는 거지.”

연이 잠시간 모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장한 모란이 좋아 죽겠으니 파혼해 달라고 한다라……. 좀 어려운 일이 아닌가? 어쨌든 노력은 해 봐야겠지. 연은 모란이 어떻게 상단주가 되었는지,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미인으로 보는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으나 총관이 다시 돌아와 잠시 질문은 미루어 두었다.

“가주님께서 백매화 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이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영명이 ‘백매화’의 제안을 고려해 볼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면 아예 세가에서 내쫓아 버렸을 테지. 모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뚱거리며 앉아 있자 뭐 하냐는 듯 손짓을 해 연도 마지못해 일어나 뒤를 따랐다. 하긴 좋아하는 사람 치고 너무 미적거리고 있기는 하였다.

모란이 앞에서 당당히 걸어가는 동안 연은 휘적거리는 비단 자락에 정신이 팔렸다. 여장을 하건 말건 모란은 평소 그 망나니 같은 옷차림새일 때와 똑같이 행동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모란이 미인으로 보이는 걸까? 연이 또 팔락거리는 붉은 옷자락에 시선을 뺏기고는 미간을 접었다. 옷이 퍽 아름답기는 하다.

그들이 창일당에 다다르자 영명이 나와 있었다. 금강석이 대단은 한 모양이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모란을 바라보는 영명의 얼굴은 아름다운 미인을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흡사 두려움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였으니.

“백매화라고 합니다. 남궁 가주님.”

모란이 당당하게 외쳤다. 영명은 굳은 얼굴로 모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이 여자를 만났느냐?”

연은 잠시 뒤에야 영명이 자신에게 묻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영명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 대답했다.

“오늘 총관님이 불러 나간 자리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그러고는 연이 가까스로 덧붙였다. 아…름다우신 분이지요. 그러고는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모란이 평소에 입던 망나니 같은 옷차림새가 무척 그리워졌다.

앞으로는 그런 옷차림을 해도 타박하지 않을 것이다. 영명은 그런 연을 잠시간 보다가 모란을 쏘아보았다. 연은 문득 영명의 시선에 누가 비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너는 어디 출신이냐?”

“안휘성 출신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모란이 의미심장하게 영명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한참을 모란을 살펴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남궁세가는 네 상단과 거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 보아라.”

영명의 말에 총관이 당황해 했다. 어디로 보나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던 탓이다. 그러나 가주의 명이니 그저 알겠습니다, 고할 따름이었다. 모란은 당황하지도 않고 씩 웃었다.

“그러면 대신 가주님의 둘째 아드님을 주십시오.”

창일당 안으로 들어가려던 영명이 휙 몸을 돌려 모란을 쳐다봤다.

“뭐?”

“거래는 아무래도 좋으니 댁 둘째 아들을 달라 이 말입니다. 한눈에 반했으니. 연 공자님과 혼인을 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에는 연도 어쩔 수 없이 큰 통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란의 저 껄렁함과 얄미움에 영명이 당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즐거웠던 것이다.

영명은 그 뻔뻔함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하더니 잠시 후 노발대발했다.

“지금 이 무슨 행태더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몰라 이러는 것 같습니까? 남궁세가의 창일당 아닌가? 게다가 내가 언제 건방진 행태를 보였습니까? 나처럼 어여쁘고 가녀린 여인이 용기를 내어 청혼을 하는 것이 여기서는 건방진 행태라 보이는 모양입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모란이 영명에게 깐죽거리고 있는 걸 보니 연은 최근 무거웠던 마음이 구름처럼 다 가벼워졌다. 세상에 이리도 보기에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싶어 아예 작정하고 이 모습을 구경했다.

당연하지만 영명은 모란의 시건방진 행태를 참아 내지 못하였다.

“여봐라! 이 건방진 계집을 잡아 가두어라!”

가주의 명령을 받은 무사가 다가올 때도 연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사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모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모란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너 명이 달려들어 잡아당기려 해도 모란의 몸에는 미동도 없었다. 마침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무사들이 땅에 나동그라질 정도였다. 연이야 마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대단한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이쯤 되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모란이 비범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당황한 건 무사뿐만이 아니었다. 영명이 외쳤다.

“이 무슨 비열한 사술인가!”

“사술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제 좀 많이 먹고 자서 그런가, 내 몸이 무겁나 봅니다.”

모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사들이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은 큭, 하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간 창일당에는 안 좋은 기억밖에 없었는데 이번 일로 괜찮은 기억이 하나 생겨날 듯하였다.

“네 이년! 네가 감히 나를 능멸해!”

영명이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왜 진작 뽑아 들지 않았나 의아할 정도였다. 모란이 날아드는 상대의 검을 부채를 들어 막았다. 단숨에 부채가 갈라졌다. 그러나 막상 검이 모란의 손에 닿을 때는 쩡하는 소리가 났다. 검과 손이 닿았다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경악한 영명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무인이었구나!”

“상단주는 무인이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모란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영명의 검을 쳐 냈다. 영명은 연달아 몰아쳤으나 공격은 번번이 막혔다. 연신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모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얼굴에 잠시 성가신 기색이 스쳐지나가나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영명의 검이 모란의 손에 꽉 쥐여 있었다. 검게 죽은 영명의 낯빛을 보아하니 검이 빠지지 않는 게 분명했다.

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멋지고…… 통쾌한 장면이다. 그러니까, 하느작거리는 모란의 붉은 비단 옷만 아니라면.

“어느 사파에서 왔느냐! 역시 마교인 것이냐?!”

모란이 손을 놔 주자 영명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게 눈에 보였다. 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일로 식은땀을 흘릴 정도인가? 모란이 강해서 그런지 그는 어쩐지 영명이 쇠약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교라…….”

모란이 씩 웃었다. 그가 갈라진 부채를 땅에 버리며 물었다.

“단정 짓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하오문의 문주가 내 신분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되면 남궁 가주께서는 이 무례를 책임지셔야 할 터.”

영명은 모란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란이, 아니 ‘백매화’가 단순히 돈 많은 재력가가 아니라 돈도 많은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 고수란 결코 무시 못 할 상대였다. 특히나 상대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 고수가 무례를 책임지라 하는 것은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와 연 공자님과의 혼인을 허락하신다면 이 모든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가주님과 저는 잠시 호승심으로 무력을 겨루어 본 것이지요. 상단과의 거래 또한 무사히 맺어질 것입니다.”

모란이 유들유들하게 거래를 제안했다. 연의 입장에서야 짜고 치는 판이었지만, 영명이나 무사들의 입장에서는…… 영락없이 남궁세가 둘째 공자에게 반한 재야의 고수가 혼인하게 해 달라 깽판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다.

“……당장 여기서 결정할 일이 아니니, 시간이 필요하다.”

마침내 영명이 정말 싫은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자존심 때문에 당장 여기서 그러마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이지 이미 패배의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해 보면 연이 서신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모용천이 혼인을 파하겠다고 하면 모란의 청혼을 승낙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혼인까지는 아니고 형식상으로 약혼만 이루어지겠지. 영명이 어디 자신에게 모욕을 준 ‘백매화’를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연은 가만히 영명과 모란이 자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지켜보았다. 영명은 끝끝내 연에게 의사 한번 물어보지를 않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도록 하죠.”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돌아선 모란이 연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 깽판은 무식하게 센 모란이 아니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어찌하지는 못하고 백매화만 노려보던 영명이 연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벼락같은 노호성이 울렸다.

“네 녀석은 어찌 이런 골칫거리를 데려와서는!”

골칫거리를 데려온 거라 한다면 오히려 단봉 총관이었기에, 그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영명은 더는 말하지 않고 잔뜩 심기가 상해 창일당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단봉 총관이 얼른 달려와 사과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도련님께서…….”

“아닙니다. 총관님 덕에 저도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지 않았습니까?”

여장한 모란이지만 총관의 눈에는 분명 아리따운 여인일 것이기에 연이 시치미를 뗐다. 총관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그를 보내고 난 뒤 연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화정당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진귀한 구경을 했다. 여장한 채로 영명의 공격을 받는 모란이라니…….

그리고 돌아와 침소의 문을 여니 모란이 침상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연이 저도 모르게 문을 세게 닫고 말았다.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모란이 씩 길게 웃었다. 여인의 옷을 하고 양반다리를 하니 퍽 민망스러워 보였다. 연이 잠시 미간을 짚었다.

“이런 방법일 줄은 정말 몰랐어. 세상에, 남사스럽기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괜찮아. 그리고 무어가 남사스럽단 말이냐?”

모란이 뻔뻔하게도 대꾸했다. 연은 자꾸 쩍 벌린 다리 사이로 가려는 시선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사내가 여인의 옷을 입었는데 그럼 남사스럽지 않아!”

모란이 고개를 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연은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 모란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뭐 어떠냐?’ 라든가 ‘엉덩이를 맞는 것이 어디가 어떠냐?’든가 하며 해괴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들이댈 때와 비슷한 태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네 말은 여자 옷이 남사스럽다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 사내에게는 사내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고 여인에게는 여인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잖아.”

이 말을 하면서도 연은 벌써부터 모란의 논리에 지고 말 것임을 예측했다. 그리고 과연 그 예측대로였다.

“남사스러우면 안 되나? 내가 남사스럽다고 하여 네게 피해를 주는 것이 있어?”

“아니…….”

대답하면서도 연은 모란에게 ‘너 정말 싫어’라는 눈빛을 보냈다. 모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만약 네가 이런 옷을 입었다고 해 보자.”

“나는 죽어도 그런 옷 안 입어!”

모란은 연의 저항을 그대로 무시했다.

“입었는데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면 그 옷은 더는 남사스러운 옷이 아니지 않아?”

“글쎄, 어느 사내든 그런 옷을 입으면 남사스럽다니까!”

“애초에 그 남사스러움은 누가 정하는 것이지? 그저 내가 보기에 옷이 흡족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내가 옷을 입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이지 남의 시선이 그리 중요하나? 연이 너는 네가 좋아하는 옷을 남이 싫어한다고 하면 더는 입지 않을 것이냐?”

응? 하고 모란이 물었을 때 연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모란이 좋아서 저 옷을 입겠다는데 자신이 어찌할 것인가. 말마따나 모란이 좋아서 저 옷을 입겠다는데 어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힘으로 강제하거나 그 앞에서 감히 비난할 자는 없다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혼인을 안 하게 된다면 그런 게 뭐가 대수일까.”

그 말에 연은 그만 흔들흔들 넘어가고 말았다. 그랬다. 따지고 보면 모란이 여장까지 하게 된 건 원하지 않는 혼인 안 하게 해 주겠다고 나름대로 나섰기 때문이 아닌가.

연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모란은 답답했는지 허리에 매고 있던 보드라운 허리대를 풀었다.

복근이 단단한 복부부터 맨가슴까지 아슬아슬 드러나자 연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리 보니 썩 괜찮은 붉은 가운 같아 보이기도 한다. 분명 여인의 옷인데도 이상하게 모란에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아까 네가 상상했던 대로 붉은 옷이 잘 어울리고 몸매가 좋은 미인이었나?”

연이 멈칫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눈치 빠르게 모란에게 물었다.

“단봉 총관이 제갈양리보다 아름다운 미인이라고 했었는데……. 마법……이었어?”

“그래. 환각 마법이지.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아서 기본적인 준비는 해야 하지만…….”

모란이 붉은 옷자락을 펄럭여 보였다. 그래서 여자 옷을 입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좋을 대로 자신이 상상하는 미인상을 보게 되는 거야. 뭐 봤던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든가, 혹은 연모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든가.”

그 말에 연이 떠올린 것은 아까 영장당에서 만났을 때 모란이 했던 말이었다. 어떻게 자신인 줄 알아보았냐고 물었었지. 그 말은, 원래라면 연의 눈에는 연모하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이 보여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의 눈에는 모란밖에는 보이지 않았었다. 연이 얼어붙었다. 누군가가 그의 가슴을 두들기는 듯했다.

모란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휘휘 고개를 젓고 있는데 모란이 슬금슬금 연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란의 아래 눕혀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치료……하려고?”

“아니. 하지만 꼭 치료할 때만 이러라는 법은 없잖아. 그렇지?”

모란이 붉은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러다 그 옷자락이 연의 손에 닿았는데 과연 부드럽고 촉감이 좋기는 했다. 연이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혹 여장이 취향이야?”

“아니. 하지만 상대에게 야한 옷 입히는 건 취향이긴 하지.”

눈을 휘어 웃은 모란이 손가락을 세워 연의 허벅다리 안쪽을 살살 어루만졌다. 연이 움찔했다. 모란이 주었던 쾌감이란 워낙 강렬한 것이었기에 작은 동기만으로도 금세 되살아나곤 했던 것이다.

“방금은 네게 얇은 홑옷 한 장만 입히는 것을 상상했는데…….”

그리 말하며 모란이 연의 귓불을 세게 빨았다. 얕게 신음하면서 연은 모란의 손길에 굴복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란의 이와 혀에 급소를 내어 준 연은 문득 의문에 잠겼다.

모란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왜 영명은 아까 모란을 보고 얼굴이 그리 희게 질렸을까? 그런 자도 사랑을 하기는 하였을까?

***

모용천은 사흘 뒤에 연을 다시 찾아왔다. 그는 다소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기다리고 있자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네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고 들었다.”

연은 아주 가까스로 차를 뿜지도, 기침을 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호란 곳의 속성을 떠올렸다. 연이 두어 달 남짓 밤에 환자들을 치료하고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화타니 편작 운운하는 이름들이 붙은 곳이었다. 모란과 자신의 사이가 어떻게 소문이 날지 알았어야만 했는데…….

“연인이 있는데 혼인이 들어왔으니 내가 원망스러웠겠구나.”

모용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연은 처음으로 모용천을 향해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모란이 이미 그런 일을 저지른 마당에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전 남궁 가주에게 이 혼인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리 말하고는 모용천이 잠시 앞에 앉아 있는 손자를 살펴보았다.

사랑하는 딸아이의 죽음은 아무리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 할지라도 버텨 내기 힘든 것이었다. 남궁세가에서 제 딸이 그다지 행복하게 지내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잘 지내게 될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릴 줄은 몰랐다.

온갖 후회가 들었다. 혼인을 시켜 주기 전에 영명의 행실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것을, 혹은 딸아이가 어찌 지내는지 더 잘 알아볼 것을. 가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척하지 말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남궁세가의 소식에서는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잠깐 등을 돌리고 있는다는 것이, 어느새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러다가 모용사걸이 혼인은 어떠하냐고 넌지시 제안했을 때에야 연의 존재에 대해 새삼 떠올렸다. 그러자 그동안 잠잠해졌다 여겼던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열 살도 채 안 되었을 때였는데 손자는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동안 귀 닫고 있던 온갖 소식들을 들어 보니 모용천에게는 이 혼인이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소식을 들어 본 바로는 연은 남궁가에서는 그다지 좋게 지내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늙은이의 이기적인 마음이며 착각일 뿐이었다.

그 모든 복잡한 마음을 담아 두며 모용천이 입을 열었다.

“서신은…… 되었다. 비녀도 돌려주마. 네게는 어미의 유일한 유품이 아니더냐?”

그가 조심스럽게 비녀를 다시 꺼내 탁자에 올려 두었다. 딸을 그렇게 잃었는데 그는 손자마저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꼼꼼하게 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번 파혼으로 겨우 회복되려던 남궁세가와의 관계는 다시 틀어졌다. 아마 어지간해서는 손자 얼굴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만약에 시간이 나고 그럴 마음이 들거든, 언제 한번 모용세가에 오려무나. 아니면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하여도 된다.”

연이 말없이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이 비녀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유품이 맞기는 했다. 모용단리가 죽은 뒤 영명이 화정당의 가구들이며 물건을 싹 갈아 치운 탓이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연은 아직도 약간 마음이 아팠다.

고개를 들어 모용천을 한번 보고는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가져가세요.”

“연아.”

“이 서신은 어머니가 가주님께 남긴 겁니다. 제가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진심이었다. 연은 한 번도 서신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읽고 싶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읽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서신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면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냥 모르고 지내는 편이 좋으리라, 연은 그리 여겼다.

모용천은 망설이다가 서신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행여나 구겨질까 염려하는 손길이었다.

“고맙다.”

“진작 드렸어야 할 서신입니다.”

연이 중얼거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용세가에 갔을 때, 품에 그 서신이 들어 있었다. 모용천을 만나지 못해 그대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언제라도 사람을 보내 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서신을 제가 품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외조부에게 서신을 전하고 나니 연은 마음이 복잡하였다.

“세상에는 인연이라는 것이 있지. 연이 너는, 아마도 이런 말을 싫어할 테지만…… 나는 네 외조부다. 부모와 자식 간만큼은 아니지만 혈육은, 그래. 인연 중에서도 가장 질긴 것이 아니더냐.”

“…….”

“다음에 또 보게 된다면 좋겠구나.”

모용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연을 보다가 방을 나섰다. 연이 반짝거리는 비녀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게 무어라고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모란은 남자가 여자의 것을 사용한다 하여 남사스러운 것 따위는 없다고 하였지. 그러나 누군가가 쓰지도 않는 여인의 물건을 보관하는 것은……. 그런 인연이란 것은…….’

혈육은 인연 중에서도 가장 질긴 것이리라. 하지만 그 질긴 인연이 꼭 혈육뿐이어야 하는가? 오로지 혈육만이 소중한 인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보다도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연은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문득 견딜 수 없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비녀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는 박차고 나왔다. 모란은 어딜 갔는지 없었고 한위는 보이지 않았다.

주강은 요 근래 통 보이지를 않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무치게 외로운 것인지 그는 알지를 못했다. 연은 손에 든 외투를 걸치고 무작정 걸었다.

화정당을 지나, 영성문. 그리고 영장당. 세가의 정문. 이렇게 지나 지나 걷다 보니 어느새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은록의 의원이었다. 은록이 부상 때문에 진료를 보지 못하는 게 소문이 났는지 마당에 온갖 먹을거리들이 쌓여 있었다.

‘사부님.’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고 연이 마당을 지나 문 앞에 이르렀다. 온 사방에 추억과 기억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한때 연이 진정으로 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연의 눈시울이 잠깐 붉어졌다. 모란에서 연으로 돌아오며 예전 인연은 다 끊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모란의 말대로였다. 한번 엮이게 된 인연은 도통 끊기지를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거절당하거나, 은록이 믿지 않거나, 혹은 그대로 내쳐질지도 몰랐다. 한동안 망설이던 연은 마침내 인기척을 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탕약 냄새가 났다. 은록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가 연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연이 어쩌지 못하고 서 있자 그가 권했다.

“앉으십시오.”

문을 닫은 연이 천천히 은록의 앞에 앉았다. 앉자마자 그는 연의 진맥을 짚어 보고는 이상이 없음을 깨닫자 손을 놓았다. 연은 한참을 망설였다. 은록은 인내심 깊게 그런 그를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연이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사부님.”

그 목소리가 떨리었다. 그가 가만히 앉아 있는 은록의 앞에 모든 이야기들을 와르르 쏟아 내었다. 스무 살, 모란을 두들겨 팬 뒤 과거로 가 그의 몸에 들어간 것, 그 후 다시 현재 몸으로 돌아오게 된 것. 모란은 모란이나 모란이 아니며 연이 모란이라는 것을.

그 모든 말을 쏟아 낸 뒤 연은 고개만 숙이고 상대의 판결을 기다렸다.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은록 앞에 깊은 절을 하였다. 그래, 쉽게 끊어지지 않는 인연은 혈육지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