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五章 : 의원 (7/19)

***

“할 일도 많은데 정말 짜증 나게 하네.”

모란이 퍽 걷어차자 도적이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크게 신음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주강 근처의 산이란 산은 죄다 뒤지고 다녀서 그는 드물게도 피곤했다.

‘술식을 어떻게 수정하면 한 번에 두세 명씩 집어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더 오래갈 텐데.’

연이 한번 크게 앓을 때는 유독 생기가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그러면 그걸 채우기 위해 화정당 사방에 파묻어 둔 술식 재료들의 기운도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것이다. 본래는 며칠은 갔을 것이 이틀밖에 가지 않았으니 이번에 유독 크게 앓기는 하였다.

하지만 모란도 이번엔 단순히 술식 재료 구하자고 산에 온 게 아니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산 어디에도 진은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 근방 녹림채 어딘가에는 그 의원 양반이 있어야 하는데.’

은록은 단순히 사라져 버린 게 아니다. 또한 사라진 의원이 은록뿐만도 아니었다. 이 근방의 유명하다는 의원들은 모두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약재상의 장사가 될 리가 만무했다.

문제는 누가 의원들을 데려갔느냐였다. 어지간한 권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의원들을 납치하고 사건을 무마하기란 힘들었다. 그러니 둘 중 하나다. 대단한 권력자거나 혹은 그만큼 절박하거나. 그리고 모란은 그 절박한 자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다.

최근 주강 근처에서는 녹림과 수림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소탕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소탕이 아니다. 누가 시행했는지는 몰라도 산허리에 뿌려진 독무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덕분에 모란의 재료 수급도 어려워졌다. 잡아들이는 녹림채 도적 중에 부상당하거나 병든 자가 많았던 탓이다. 이 독무에 당한 누군가가 살기 위해 의원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졸개가 다쳤다고 해서 이럴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녹림의 수두(首頭) 정도는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질렀을 터다. 짐작 가는 상대는 녹림십오채(綠林十五寨) 두목 왕장호였다. 태산일도양단(太山一刀兩斷)이니 하는 웃기지도 않은 호칭을 가졌더랬지. 산을 가른다고? 이런 독 따위에 당하는 자가? 모란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이 독무는 남궁세가에서 뿌린 것인가? 아마 그 남궁영명이란 자겠지. 손속도 참으로 악랄하군.’

진은록이 있는 곳에 그 두목도 있겠거니 하고 찾아왔더니 이 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십오 채라더니 한 이십 채쯤 되는 도적 소굴을 죄다 뒤졌는데 두목은커녕 다 죽어 가는 조무래기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산적들이 산에 있지 않다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단 시간이 다 되어, 모란은 재료를 데리고 세가로 돌아갔다. 술식의 특성상 하루라도 거르면 반작용이 생기니 재료도 꼬박꼬박 갈아 주어야 했다. 그런데 재료를 바꾼 뒤 화정당으로 가니 연은 자리에 없었다. 연뿐이랴, 한위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벌써 저녁인데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연은 못해도 축시(새벽 한 시 ~ 세시)가 지나가기 전까지는 저 침상에 누워 얌전히 잠이나 자야 했다. 그 순간 모란의 뇌리를 스치는 어떠한 생각이 있었다.

“설마 또 밖에서 그 면사포 뒤집어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연은 세가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현재 그의 명성은 꽤 유명했다. 왜 화타니 편작이니 하는 호칭이 붙었겠는가? 신원 미상의 공자가 밤마다 면사포를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사라지는데 소문이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 모란이 인상을 썼다.

오늘 그가 예상한 대로 주강 근처 산에 진은록도 있고 그 왕장호라는 두목도 있어서 전부 잡아 족쳤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큰 문제가 된다. 연은 녹림이 의원들을 납치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던가.

심지어 바로 이틀 전, 그 신비스러운 의원이 낮에 나타나 사람들을 치료한 뒤다. 소문이 짠하게 퍼진 와중에 연이 면사포를 쓰고 돌아다녔다면 완전 나 잡아가 달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셈이었다.

‘젠장, 오늘 내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란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이백오십여 년의 긴 세월을 그때그때 충실히 살아왔다. 거의 후회는 없는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후회하게 될 만한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연이었다. 언제나 저도 모르게 자만하고 말 때면 일이 터지는 것이다. 자만 때문에 일이 생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유독 속이 탔다.

그가 크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연이 납치되지 않았기를 바랐다. 이건 단순히 그 신비 의원이 도적 두목에게 납치되어 치료를 강요받는 수준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제발 그 산적 두목이 연의 얼굴은 모르기를.’

연은 그냥 연도 아니고 남궁연이였다. 그 두목 왕장호를 그리 만들어 놓은 그 ‘남궁’인 것이다. 모란은 연과 한위가 근방에 있기를 바라며 마력을 넓게 퍼트렸다. 곧장 익숙한 기운이 잡혔다. 한위였다. 그러나 연은 없었다.

모란의 얼굴이 굳었다. 축시까지는 두 시진이 남아 있었다. 두 시진 안에는 연을 찾아 침상에 데려다 눕혀야 한다. 모란이 이를 갈았다.

‘이 빌어먹을 술식, 이번 일 끝나고 나면 꼭 뜯어고치고 만다.’

곧 그의 신형이 세가에서 사라졌다.

***

“으…….”

몸이 흔들리는 움직임에 연이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헝겊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지. 혼몽하여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으려다가 연이 번쩍 눈을 떴다. 왜 정신을 잃게 되었는지 기억이 났다.

‘분명 농부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연은 눈에 씌워진 것을 벗겨 내려다 멈칫했다. 손목이 차가운 금속 족쇄로 죄여져 있었다. 눈에 씌워진 것도 머리 전체에 마치 작은 자루가 씌워진 것에 가까웠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말 발굽이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연은 자신이 마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자신이 어디로 실려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을 납치한 건지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온몸이 욱신거려 마치 두드려 맞은 것만 같았다.

연이 어떻게든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무의미하게 애를 쓰는 동안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더니 억센 손들이 연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땅에 발을 디뎠으나 힘이 없어 연은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몸이 몹시 춥고 식은땀이 났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비실거려? 설마 손을 댄 건 아니겠지?”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중한 의원 나리인데. 자,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보는 눈이 있으니 어서 들어가시죠.”

“아무튼 의원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약해 빠져서는.”

소중한 의원 나리?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말투를 듣자 하니 이들이 자신을 해치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연은 양쪽에서 팔이 붙잡혀 들리다시피 질질 끌려갔다. 그는 대문을 지나, 마당이나 뜰 따위를 건너간 뒤에는 실내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이윽고 연은 어딘가 따뜻한 방에 무릎 꿇려졌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부터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연이 습관적으로 진단을 내렸다.

‘이건…… 흉강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숨소리인데.’

그가 무의식적인 진찰을 멈춘 것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그래, 이자가 그 화백인가 편백인가 하는 자라고?”

“예, 두목. 소문에 따르면 화타인가 편타인가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듣기로는 아주 솜씨가 좋은 자 같았습니다.”

그놈의 화타의 후손이니 편작의 후계자니 하는 헛소문에 치를 떨 만한 여유도 없었다. 두목이라는 단어가 연의 귀를 스친 탓이었다. 연이 움찔하여 고개를 들었다. 두목이라니, 여기가 무슨 도적 소굴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디 얼굴 한번 보자.”

두건이 벗겨지자 연이 호롱불 빛에 눈을 찌푸렸다. 곧이어 재갈도 풀렸다. 어지러워 고개를 흔들며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풍채의 사내였다. 눈빛이 형형하여 마치 호랑이나 곰 같은 자로, 실제 몸에도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허리춤에 걸린 거대한 도끼가 인상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대한 사내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거칠어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연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정말 도적 소굴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건물이 아무리 봐도 관아인 것 같다는 점이다. 사내가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저런 화화공자(花花公子)같은 녀석이 의원이라고?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의원인 게 확실한가?”

“아마…… 맞을 겁니다, 두목. 계집애 같은 면사포를 쓰고 다녔거든요.”

수하로 보이는 한 명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두목이라 불린 자가 으르렁거리며 거친 소리를 내자 수하가 얼어붙어 납작 엎드렸다. 연이 잠시 눈을 감았다. 방 한구석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흥, 장본인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두목이 몸을 일으켰다. 연이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 두목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로 연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허리춤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날이 바로 목 아래에 와 닿았다.

“네놈은 의원이냐, 아니냐?”

연이 잠시 망설였다. 의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부하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연에게 손가락질을 하였다.

“두목님! 그놈은 의원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남궁세가에서 일할 때 보아서 압니다!”

젠장, 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 하필 이 자리에 자신을 아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두목이 와랑와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원이 아니라고?”

“남궁영명의 아들입니다! 영명 그자와 마찬가지로 아주 악랄한 놈입니다.”

그 말이 미치는 파장은 강력했다. 사방에서 연을 죽이고자 하는 악의와 살기가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몸인데 살기가 쏟아지니,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두목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사나운 웃음이었다. 이쯤 되니 연은 사내의 정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도끼를 쓰며, 남궁영명을 증오하는 산적 두목. 최근 남궁세가에서 토벌에 실패한 녹림십오채의 두목 왕장호가 아니겠는가.

그가 돌연 뚝 웃음을 멈추고는 도끼날을 더 가까이 붙였다. 연은 자신의 목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감각에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래, 네가 정말 그 영명 그자의 아들이냐?”

“그렇다.”

도끼날이 목으로 더 파고들든 말든 연이 똑바로 고개를 들어 인정했다. 도적들 앞에서 구차하게 엎드려 떨거나 빌고 싶지는 않았다.

“남궁연이다.”

연은 당장 왕장호가 자신을 어떻게 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목을 겨누고 있던 도끼날을 내려 두었다. 저도 모르게 연이 왕장호의 손을 바라보았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손톱이 파랗다 못해 검은 색이었다.

연은 이들이 의원을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역시나 왕장호가 중독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이유는 아마도 영명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

아마도 죽겠지. 녹림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손속으로도 유명하지 않았나. 왕장호가 연을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쳐 죽이고 싶지만,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왕장호가 도끼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는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그가 빠득 이를 악물며 연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그에게서 지독한 입 냄새가 풍겼다.

“영명 그자 앞에서 네놈을 산 채로 찢어 죽일 것이다. 그자가 아들의 죽음을 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말 것이야.”

왕장호가 쥔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내팽개쳐져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면서 연이 생각했다. 글쎄, 과연 영명이 자신이 죽는 걸 본다고 하여 피눈물을 흘리기는 할까? 화를 내기야 하겠지. 산적 따위의 손에 아들을 잃게 내버려 두었다는 오명으로 가문의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될 테니.

그 후 왕장호는 연을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내버려 둔 채 방치했다. 도적들이 술판을 벌이는 걸 보며 연이 가늠해 보았다.

‘왕장호가 나를 얼마나 오래 살려 둘 것인가?’

하루? 아니면 이틀? 저도 모르게 모란이 생각나는 건 그간 그에게 너무 의지한 탓이리라, 연이 생각했다. 하지만 모란이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 누가 도적들이 관아를 차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지금쯤 엉뚱하게도 산이나 뒤지고 있을 게 뻔했다.

‘모란은 사부님이 녹림에게 잡혀갔다는 걸 알고 있었군. 그래서 산을 뒤지고 있었던 거야.’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은록이 여기 있을 거란 의미도 되었다. 사부님은 무사하실까? 어떻게든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자들이 자신을 순순히 의원들과 만나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한위는 괜찮을까?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으며 어린애이니 내버려 두자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확실치가 않았다.

정작 문제는 연 자신이었다. 납치당할 때 마신 흰 가루가 문제인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현기증이 났다. 그저 이만 악물며 인내하고 있을 때였다. 거나하게 취한 도적 하나가 연을 향해 손짓했다.

“이봐, 공자님. 여자가 없으니 심심한데 대신 와서 우리 수발이나 들지 그래.”

연이 대꾸조차 하지 않자 그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거칠게 머리채를 잡았다. 절로 신음 소리가 나올 것 같았으나 연은 꾹 참았다. 도적은 연을 질질 끌어서는 도적들 한가운데에 던져 놓았다. 왕장호는 말없이 술이나 마시며 제 수하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마을에서도 유명해. 죄도 없는 하인 하나를 트집 잡아 패 죽여 놓았다지? 아주 부전자전이군그래.”

‘죄도 없는 하인이면 모란인가? 죽이지는 않았는데, 정말이지 화타니 편작이니 할 때부터 알았지만 소문 한번 환상적으로 났구나.’

연이 피식 웃자 비웃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도적이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모욕적으로 따귀를 한 대 쳤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 이는 듯한 따귀였다. 그는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더 때리기 위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대신 기겁하여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연이 쿨럭 피를 토한 탓이었다.

“뭐, 뭐야?”

그대로 자리에 엎어진 연은 기침하며 바닥에 피를 한 움큼 쏟아 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조여 오는 듯했다. 지난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저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나, 연은 조소했다. 당장 도적의 손에 목이 따일지도 모르는데 이리 죽는 걸 두려워하다니……. 연이 다시 피를 뱉자 도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 손을 살폈다. 어이없을 만도 했다.

“아직 한 대밖에 패지 못했다고!”

“구량.”

왕장호가 부르자 도적이 바싹 굳었다. 그러고는 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녹림채 두목의 심기는 상당히 불쾌해 보였다.

“네놈이 감히 나보다 이 녀석을 손보겠다?”

“아, 아닙니다 두목님! 맹세코 그럴 생각으로 다룬 게 아닙니다. 제, 제 생각에는 이, 이 녀석이 원래 병에 걸린 놈이라서 그런 거 같……. 죄, 죄, 죄송합니다.”

벌벌 떠는 부하의 반응만 봐도 연은 왕장호가 얼마나 가혹한 두목인지 잘 짐작이 갔다. 어지간히도 심기에 거슬렸는지 왕장호가 도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방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연이 고개를 들자 다른 사내가 들어섰다. 왕장호를 빼닮은 젊은 남자였다. 연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필시 왕장호의 아들인 왕자우일 것이다. 아버지 못지않게 악명이 높은 자였다. 그가 험악한 시선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사내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버지, 그 의원 놈이 끝끝내 진맥도 거부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다시 도끼 손잡이에서 손을 뗀 왕장호는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연과 제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꽤나 무공이 고강할 텐데도 그는 일부러 술에 취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저 녀석은 아직 죽으면 안 되니까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해라.”

“예에, 알겠습니다.”

뜻밖이었다. 동시에 연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왕장호도 중얼거렸다. 아주 좋은 기회지, 치료할 수 있는 의원들이 한가득이 아니더냐. 왕자우가 그런 아버지를 흘깃 보고는 연을 끌고 나갔다. 비틀비틀 걸어가면서 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무엇 하나 물어봐도 되나?”

“다 죽어 가는 놈이 웃기기도 하군. 뭘 물어보려는 것이냐?”

왕자우가 피식 웃었다. 끌려가면서도 주위를 둘러본 연은 이곳이 안휘성의 관아임을 확신했다. 아무리 녹림이라도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관아를 건드린다는 것은 황가를 적으로 둔다는 게 아닌가? 그만큼 왕장호가 절박하다는 의미겠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당분간은 관아 내에서 지내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흐르면? 당연히 의심을 사게 될 것이고 황가에 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녹림 따위에게 관아를 점령당했다는 걸 알게 된 황가가 어떻게 나올까…….

“이곳에…… 진은록이란 자가 있나?”

연의 질문에 왕자우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연을 거칠게 흔들어 대며 물었다.

“진은록이란 자를 알고 있어?”

연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하였다. 하도 흔들어 대는 통에 대답하기가 힘들었으나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나의, 주치의야.”

“아, 그렇다면 마침 잘되었군. 그자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말이야. 같이 목숨 잃고 싶지 않다면 들어가서 잘 설득해 보라고.”

다시 질질 끌려 들어가면서 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사부님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왕자우가 향하는 곳은 관아의 감옥이었다. 의원들을 죄다 이곳에 가두어 두었는지 감옥을 지나갈 때마다 안에는 초췌한 몰골로 두려워하는 자들이 보였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한참을 지나 그들은 가장 깊숙하고 어두침침한 감옥에 이르렀다. 왕자우는 문을 열어 연을 거칠게 떠밀어 넣었다.

“내가 아까 한 말 명심해. 설득하지 못하면 너도 죽는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왕자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연은 끙끙 신음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연은 사부님이라 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은록의 상태는 그만큼 심각해 보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깼는지 벽에 기대어 있던 은록이 눈을 떴다. 그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을 바라보았다.

“연, 공자? 대체 여…긴 어떻게…….”

은록이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는 것이, 다시 정신을 잃은 듯했다. 연이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다가갔다.

침착하게 상태를 파악해 본 바, 몸에 절상(切傷)*과 자상(刺傷)*이 있었다. 절상은 오른쪽 옆구리에 난 것으로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고, 자상은 허벅지의 것으로 단검이 박혀 있었다.

연이 이를 악물었다. 얼핏 보면 절상이 위험해 보이지만 정작 치명적인 것은 허벅지에 꽂힌 단검이었다.

‘급소를 잘 아는 자의 소행이다.’

절상은 당시 피가 상당히 나기는 했을 것이나 차후 관리만 잘한다면 나을 부위였다. 반면 허벅지에 꽂힌 단검은 절대 뽑으면 안 된다. 혈맥을 건드린 상태라 뽑으면 다량의 출혈로 인해 아무리 길어도 일각 내에 사망하고 말 것이다. 연이 일단 자신의 옷자락을 길게 찢어 냈다. 그나마 여기서 쓸 수 있는 깨끗한 천이었다.

여기서 치료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연이 옷자락을 붕대 삼아 단검 주위를 압박하여 감았다. 당분간은 단검이 도리어 지혈하는 역할을 해 주겠지. 정말 당분간이지만…….

붕대를 감아 단검을 고정시킨 뒤 은록의 맥을 짚었다. 심박수가 느리고 체온이 심히 낮았다. 연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원들이 천지이니 어디 치료 도구가 없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의 눈에 걸린 건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보따리였다. 비틀거리며 다가가 기침을 하며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다행히도 안에 침구며 기본적인 약초가 들어 있었다. 약초 중에는 지혈 작용을 하는 것도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지혈제를 뿌릴 때 고통이 극심할 것이 분명하였다. 고통이 극심하면 은록이 의식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그가 의식을 되찾는 게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은록이 정신을 잃은 상태이기에 망설이다가 마침내 연이 침을 집어 들었다. 그가 침 하나를 혈도 자리에 놓았다. 고통을 완화하는 자리였다. 치료하여 회복을 꾀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게 의원의 의무였다.

지혈제를 뿌리고 바늘과 실로 상처를 꿰매는 동안 은록은 다행히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모든 처치를 마치고 난 뒤 연은 한시름 돌렸다. 단검도 어떻게 하면 좋겠지만…… 뽑았을 때의 출혈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바닥이며 벽이 얼음장처럼 느껴지는 감옥이다. 피를 흘리면 체온이 더 떨어진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은 쿨럭쿨럭 기침하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까처럼 피를 토하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점차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납치당할 때 마신 흰 가루 탓은 아닌 것 같은데…….

가물가물 눈이 감겨 가던 연이 정신을 차린 건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괴성 때문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짐승이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처럼 처절하게 울리는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보았다.

잠이 다 달아난 연이 바짝 긴장하여 앉자, 이내 와지끈 무언가 때려 부수는 소리와 함께 왕자우가 폭풍같이 들이닥쳤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아까 없던 멍 자국까지 있었다. 그가 쾅 소리가 나도록 철창을 열었다.

“당장 아버지를 치료하지 않으면 맹세코 네 멱을 따 버리겠다! 뭐라도 하란 말이야!”

왕자우가 검을 뽑아 들며 은록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의식이 없는 상대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금방이라도 왕자우의 검이 은록을 찌를 것 같기에 연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내가 진맥하도록 하겠어.”

“뭐라고?”

왕자우의 검 끝이 연에게로 향했다. 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자의 상처를 치료한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 역시 의원이다. 의식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저자가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를 진맥하고 치료하게 해 줘.”

그리 말하고는 연이 보란 듯이 방금 은록을 치료한 침구를 주워 들었다. 왕자우는 은록과 연을 번갈아 보더니 이를 갈며 이내 연을 끌어냈다. 연은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당분간 은록은 안전할 것이다.

왕자우에게 이끌려 감옥에 나왔을 때에는 아까 그 처절하던 비명은 멈추어 있었다. 대신 아까 그 도적들이 방에서 신음하며 나왔다. 거의 기다시피 나온 그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피를 흘리는 자도 몇 있었다.

왕자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연을 방 안에 밀어 넣었다. 도적 하나가 죽어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왕장호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바닥에 무언가를 퉤, 뱉었다. 둥근 열매 같은 것이 바닥을 굴렀다. 연은 그 열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야?!”

“이자가 의원이고 진맥을 할 수 있다고 하여 데려왔습…….”

왕자우가 뒤로 물러났다. 왕장호가 술병을 집어 던진 탓이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왕자우의 얼굴에 난 멍 자국도 왕장호가 낸 것이 분명했다.

“저놈이 의원이라고?! 저놈은 그 남궁영명의 자식이야! 육시(戮屍)를 하고 씹어 삼켜도 시원찮을!”

고통으로 이성을 잃은 왕장호가 도끼를 손에 쥐고 다가왔다. 혹시나 휘말릴까 왕자우가 연을 놔 주며 뒤로 물러났다. 왕장호의 눈에서 불덩이가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식은땀으로 젖어 축축해진 주먹을 꽉 쥐며 연이 입을 열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지 않나?”

높이 치켜들렸던 도끼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연이 계속해서 읊었다. 그는 왕장호의 까맣던 손톱과 부들부들 떨리던 손, 그리고 핏발이 선 노란 눈과 악취가 나던 숨결을 되짚었다.

“양귀비를 먹지 않으면 한시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식은땀이 쏟아지지. 오장육부가 꼬이는 듯하고 검붉은 소변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연이 입을 다물었다. 왕장호가 쿵 소리를 내며 거대한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을 노려보았다. 고통과 분노로 핏발이 선 눈이었다. 빠득빠득 이를 악무는데 잇몸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넌 남궁가의 사람이 아니던가?”

“남궁가의 사람은 의원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방 안에는 아주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저 왕장호가 고통스러워하며 씩씩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의원이다. 내가 진맥을 하게 해 줘. 하지만 조건이 있다. 단둘이어야만 해.”

“……네놈을 어떻게 믿고 나가!”

왕자우가 달려들려 할 때 왕장호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은 저 떨림이 분노나 격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만큼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부하들을 쳐 죽이고 감히 관아에 들어와 점령하여 의원들을 납치할 만큼. 연이 침착하게 왕장호를 설득했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무인이 아니다. 피를 토할 정도로 약하고. 그래, 죽어 가고 있어. 왕장호 당신이 죽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일 테지.”

“…….”

“내가 단둘이어야 한다고 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는 들려줘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택은 당신 몫이니…….”

그 뒤 연은 침묵을 지켰다. 왕장호는 비틀거리다가 제 아들에게 손짓을 했다. 나가라는 표시였다. 왕자우는 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마지못해 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연이 왕장호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쿨럭 소매 안으로 기침을 하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손목을 잡았다. 워낙 강골이라 손목이 아주 두꺼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왕장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병이 있나 보지?”

“그래. 어릴 적부터. 무인이 될 수 없는 몸이지. 그래서 대신 의원이 되고자 하였고.”

눈을 감고 연이 진맥을 했다. 왕장호의 혈맥은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았다. 독이 시시각각 그의 몸을 자글자글 태우며 끔찍한 고통을 가하고 있었다. 왕장호가 가공할 내공을 가진 고수고, 정신력이 대단하였기에 그나마 이렇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진맥을 하는 내내 왕장호는 보란 듯이 도끼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마침내 연이 진맥을 하던 것을 놓고는 침구에서 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몸에 신중하게 침을 놓았다. 침을 꽂을 때 왕장호는 조금도 움찔하거나 하지 않았다.

마지막 일곱 번째 침을 놓을 때 왕장호가 숨이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부릅떴다. 고통 때문은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온함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

연이 고요히 왕장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걸 가볍게 손을 들어 저지했다. 왕장호가 떨리는 시선을 연에게 보냈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남궁영명의 독에 당한 후로 지난 네 달 동안 한시도 편하게 살지를 못했다. 처음에는 온몸이 벌레에 물어뜯기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가시에 찔리는 것 같더니 종내에는 그 가시가 칼로 변하였고, 그다음으로는 불로, 용암으로 변했다. 양귀비를 먹어도 이제는 잘 듣지도 않았다.

그런데 남궁영명의 아들이 제게 침을 놓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함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가 몸을 떨며 물었다.

“완치된 것인가? 완치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왕장호의 표정에서 미소가 가셨다. 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부터 전혀 사적인 감정 없이 의원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왕장호가 잔뜩 긴장하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찌나 몸을 떨었는지 꽂혀 있던 침들도 사정없이 떨렸다.

“당신이 당한 독은 치료 방법이 없어.”

왕장호가 눈을 부릅떴다. 이토록 고통 없이 평화로운데 치료 방법이 없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무슨……!”

“내가 방금 한 건 그저 고통을 차단한 것에 불과해. 이조차 오래가지는 못해. 임시로 중요한 혈맥을 모두 막아 놓은 것이라 일각이 지나면 다시 고통이 찾아올 테니까. 이건 단순히 당신에게 명료한 정신을 찾아 주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제부터 잘 듣도록 해. 당신의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연은 왕장호가 분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의 표정은 침착했다. 그만큼 오래 고통에 시달린 것이다.

“당신이 당한 독은 일종의 산공독(散功毒)이다. 알다시피 산공독은 무공을 운용하면 운용할수록 내공을 태워 버리는 독이지.”

심지어 이는 보통 산공독이 아니었다. 몹시도 지독하여 일단 한번 일정량 이상의 독에 노출이 되면 그 후로는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독에 당한 자는 무공을 운용할 때에만 그나마 고통이 사그라들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제정신으로는 참기 힘든 지옥을 겪게 된다.

연은 진맥을 하면서 알 수 있었다. 전과 달리 아주 잘 보였다. 독이 왕장호의 내공을 장작 삼아 몸을 활활 태우는 것이. 그 불이 왕장호의 오장육부를 해치고 있었다. 그러니 폐며 간이며 신장까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독에 당한 후로 네 달을 살았지. 앞으로 당신은 한 달을 더 살게 될 거다. 내공이 적은 자라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을 테지만 당신이 지닌 내공은 막강해. 그러니 이리 심한 중독에도 네 달씩이나 버텼겠지. 그리고 남은 한 달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지옥이 될 터.”

왕장호의 몸이 더욱 거세게 떨렸다. 연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때로는 잔인하더라도 환자에게 몸의 상태를 진실하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검붉은 소변은 이미 신장이 망가졌다는 뜻이고, 검은 눈 밑과 노란 눈은 간이, 손톱이 검고 푸른 건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숨에서 나는 악취는 장기들이 녹아 간다는 것이지. 앞으로는 더할 거고.”

격한 감정으로 핏줄이 터진 왕장호의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치료 방법이 없다고?”

“……그래. 그 어떤 의원이 와도 당신을 치료하지는 못해. 설령 해독을 하더라도 이미 육체가 손상된 수준이 심각해. 어쨌든 한 달 안으로 죽게 될 거야.”

양귀비와 술이 이미 중독된 육체에 손상을 입혔다. 이는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극한 고통에 시달리던 왕장호에게는 별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이런, 이런……!”

왕장호가 어느새 놓고 있던 도끼를 찾아 더듬거리는 걸 보며 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당신은 고통 없이 죽은 듯 잠들 수 있어.”

연의 말에 막 도끼 손잡이를 쥐던 왕장호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잠시간 고개를 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각이 지나기 전 내가 백회혈에 마지막 침을 놓으면 평화로운 잠이 몰려와. 한 달을 더 살지는 못하겠지만 더는 고통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

“…….”

굳이 왕장호의 아들 왕자우를 물린 이유가 있었다. 왕장호를 바라보는 왕자우의 시선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우상이나 기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왕자우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도적들은 왕장호가 고통에 미쳐 날뛰는 일이 있어도, 관아를 점령하는 미친 짓을 해도 순순히 따랐다. 왕장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녹림 도적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런 자가 두목이었기에 남궁세가도 그토록 오래 그들을 처리하지 못했다. 이런 자가 두목이었기에…… 영명이 비겁하게도 독무 따위를 쓴 것이겠지.

“흐으으…….”

도끼 손잡이를 꽉 쥔 왕장호가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의 팔은 끝내 올라가지 않았다. 연은 조용히 그자의 눈물이 바닥을 적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게 평화로운 잠을 자게 된다 해도, 당신은 비겁하게 죽은 게 아니야. 내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니. 적어도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부하들은 그렇게 알게 되겠지. 겁쟁이처럼 자살하여 고통에서 벗어난 사내가 아니라, 적의 비겁한 술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녹림십오채의 두목 왕장호로서.”

왕장호는 그대로 엎드려 잠시간 비통하게 흐느끼기만 했다. 정말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들이나 수하들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악명 높은 주강 녹림십오채의 두목인데,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자살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저 쓴 양귀비 열매를 씹고 술을 삼키며 겨우겨우 버틴 것이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관아를 점령하고 관군과 농민을 가장해 의원들을 납치했다. 그런데도 그 수많은 의원들 중 단 한 명도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끔찍한 절망과 고통이 채웠다…….

왕장호가 지난 네 달을 떠올리며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나는 마교의 왕장호다. 마교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겁쟁이 같은 짓은 안 한다.”

그가 마교인 줄은 대충 알고 있었다. 소문이 그러하였고 진맥을 짚었을 때 느껴지는 내공심법이 그랬다. 저 말은 끔찍한 고통 속의 한 달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의미인가? 연은 그가 말을 잇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나 왕장호는 그대로 가만히 멈춰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왕장호가 토해 놓았다.

“살아서 증오스러운 남궁영명 그자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데.”

그가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 살기가 지독하였다. 무릇 무인이라면 가능한 마교 출신의 사람에게는 원한을 사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교리가 은원은 반드시 배로 갚을 것을 명하고 있다는 건 유명했다. 실지로 그들은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복수만을 위해 살기도 하였다.

왕장호가 핏줄이 다 터진 붉은 눈을 들어 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크게 웃었다.

“그러나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영명 그자는 파멸을 맞이할 테지. 다른 동지가 그에게 복수하려 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나보다도 오래되고 질긴 원한을 가진 자이니,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영명 그자를 죽여 버릴 터.”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본래 정파와 사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궁영명은 정파 중에서도 사파에 지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원한을 샀다 하여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왕장호의 말은 어딘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왕장호가 도끼 손잡이를 꽉 쥐었다.

돌연 어느 순간 힘이 빠져나가며 그의 눈빛에서도 살기가 가라앉았다. 연은 그의 눈에서 어떤 불씨가 꺼지는 것을 보았다.

“살고 싶다. 그러나…… 살고 싶은 만큼 죽고 싶구나.”

“…….”

“나를 죽여라.”

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장호는 언제 눈물을 흘리고 침통해했냐는 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른 한 손에는 그의 도끼가 쥐여져 있었다. 눈을 감겨 주려 하자 왕장호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연은 흐트러진 의복을 정갈히 했다. 아까 도적에게 머리채를 쥐여 엉망이 된 머리카락도 풀어 두건으로 다시 묶었다. 그러고는 대침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이 똑바로 연의 손으로 향했다. 대침을 쥔 손이 천천히 정수리를 찌를 적에 왕장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왕장호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취하는 잠이로구나…….”

그는 길게 숨을 뱉었다. 곧 왕장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연은 환자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꽂았던 대침을 뽑았다. 이내 다른 일곱 개의 침도 뽑은 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침술은 그가 은록으로부터 가장 마지막에 배운 것이다.

환자를 모두 치료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인 이상 의원은 모든 사람을 살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살릴 수 없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을 참다못해 머리를 짓찧어 대거나 몇 번이고 자살 시도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은록은 정말로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 일곱 개의 침과 대침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일곱 개의 침을 놓고 나면 환자는 고통을 잊는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고통을 잊고 평온함 속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잠자듯 죽음을 맞이하곤 했다. 모순적이게도 의원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자비가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연은 은록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침을 놓을 때마다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게 정말 올바른 일일까? 이것을 과연 의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이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할 때면 은록은 언제나 그 의문을 계속 가지고 있으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환자를 죽이기 전이나 죽이고 난 뒤나 절대 그 의문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말했다. 현재까지도 연은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침구를 정리한 뒤에도 연은 그저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심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해시가 지났을까? 통 시간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왕자우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터……. 하지만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기침을 하느라 엎드렸다가 연이 중얼거렸다.

“모란의 치료가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의미가 없기는 왜 없어?”

불퉁한 목소리에 연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모란이었다. 막 도착했는지 그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문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를 보자 드는 반가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모란이 가까이 다가와 훑듯이 연의 몸을 어루만졌다. 닿는 곳마다 피부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모란의 눈에 금빛 고리가 하나둘 영글어 가는 걸 보다가 연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일어 시선을 돌렸다.

“빌어먹을, 이 근처에 관아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가까이서 보니 모란의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찾느라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대충 상태를 살폈는지 모란이 옷 속에 손을 밀어 넣으며 다짜고짜 입부터 맞추려는 걸 연이 밀어 냈다.

“잠시……만……. 일으켜 줘.”

“일어서지 않아도 돼. 누워 있어.”

“밖에 있는 자에게 할 말이 있어. 일으켜 줘. 아니면 내가 일어설 테니.”

드물게도 모란이 초조한 얼굴로 혀를 차고는 연을 일으켜 세웠다. 어쩐지 그는 왕장호와 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아는 것 같았다. 모란의 부축을 받아 문을 열고 나가자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앉아 있던 왕자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모란을 보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다. 사방에서 도적들이 무기를 치켜들었다.

“넌 누구냐!”

“…….”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왕자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지!”

연은 품에서 대침을 하나 꺼내 왕자우의 앞에 던졌다. 그러고는 무심하게 말했다.

“왕장호는 내가 죽였다. 그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급소를 찔렀지.”

왕자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대침과 연, 그리고 모란을 바라보더니 끝내 이성을 잃었다.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분노에 크게 괴성을 지르더니 연을 죽여 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살기 어린 공격은 간단히 막혀 버리고 말았다.

모란이 팔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을 가로질러 금빛 고리가 걸렸다. 동시에 달려들던 왕자우의 몸이 휘청했다. 몸이 땅속으로 푹 꺼지며 무릎까지 파묻힌 탓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으아아악!”

왕자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온몸에서 붉은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더니 검날에도 붉은 검기가 맺혔다. 왕장호는 마교에서 나간 후 아들에게도 마교의 내공심법과 검술을 가르친 모양이었다.

모란은 잠시간 눈썹을 찌푸리고 이 마교 특유의 붉은 검기를 살펴보았다. 충분히 살필 만큼 살핀 후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손에 걸려 있던 금빛의 고리가 순식간에 세 개로 늘어났다. 땅이 갈라진 건 바로 그때였다.

“이게 뭐야!”

“아악! 살려 줘!”

왕자우와 도적들 아래의 땅이 검고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연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반달 모양으로 쩍 벌어진 땅속으로 도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왕자우와 몇몇 도적만이 간신히 모서리에 아등바등 매달렸다. 왕자우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란을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이 정도 봐줬으면 됐겠지.”

모란이 연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 얼굴이 마치 처음 만났던 날처럼 무심하고 차가웠다. 연은 분명 모란이 왕자우를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왕자우가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것을 모란이 발로 걷어차 아래로 떨어트렸다. 남은 도적들까지 한 번에 집어삼킨 뒤에야 땅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아무런 비명 소리 없이 사방이 고요했다. 대체 어찌 땅을 이런 식으로 움직였을까? 이런 기괴한 수법은 난생처음 본 연이 말을 더듬거렸다.

“죽……였어?”

“안 죽였어. 잠시 가두어 뒀을 뿐이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가 연이 모란의 표정을 보고는 멈칫했다. 주춤 뒤로 물러나는 걸 모란이 단번에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분명 내 간호를 헛수고로 만들면 가만있지 않겠다 하였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어?”

모란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게 분명하기에 연이 입을 다물었다. 실은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곧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니, 세상이 고꾸라졌던가? 왕자우 앞에서는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모란이 아예 연을 들쳐 안았다. 연은 억울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아침 해, 뜰 때까지 밖에 안 나갔는데…….”

어이가 없던 모란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한 시진이 넘도록 관아란 관아는 죄다 뒤지고 다닌 걸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다. 모란은 연을 들쳐 안은 채 벌컥벌컥 관아에 있는 방들을 열고 다녔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방을 골랐는지 모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문이 알아서 닫혔다. 그 기세에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거친 기세와는 다르게 모란이 연을 내려놓는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톡 건들면 깨지는 살얼음을 대하는 듯했다.

연이 여기가 어떤 방인지 미처 살피기도 전에 모란이 덮쳤다.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운 입맞춤이었다. 처음에는 아프게 입술을 깨물리고는 다음으로는 혀가 씹혔다. 항의하는 의미로 밀거나 때릴 만한 힘도 없었다. 그저 아프도록 고개가 꺾인 채 모란을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

불에 달군 칼에 찔리는 듯해 연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희미해져 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운도 좀 돌아왔으나 모란에게 매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마터면 모란의 혀를 깨물 뻔하기까지 했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매달리다가 힘이 빠져 팔이 미끄러져 내리자 쯧 혀를 차며 모란이 연을 고쳐 안았다. 이제 그는 모란의 무릎 위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흐으…….”

모란이 연의 옷을 풀어 헤쳤다. 동시에 노골적으로 세게 귀를 빨아들이고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입술과 혀가 닿는 자리마다 소름이 돋았다. 모란이 손으로 쥐는 부위마다 마치 자국이 남을 것처럼 느껴지고 명치 아래쪽은 근질거렸다.

견디기 힘든 한기와 고통이 모란의 접촉에 점차 사그라들었다. 연은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란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읏!”

오늘따라 모란은 진도가 빨랐다. 한 손은 엉덩이를 꽉 움켜쥐더니 어느새 다른 한 손은 연의 성기를 잡아 문질렀다. 고통과 쾌감이 교차하자 연의 이성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부러 몸을 맡겼다. 두 감각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잊게 만들기에 좋았던 것이다. 가령, 그의 손길 아래에서 서서히 꺼지던 녹림십오채 두목의 생명이라든가…….

“오늘따라 얌전하네.”

연의 가슴에 이를 내어 따끔하게 하다가 입술로 유두를 문지르며 모란이 중얼거렸다.

바지 속에서 나는 질척거리는 소리에 연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숨만 헐떡이며 모란이 손을 더 빨리 움직이는 걸 볼 따름이었다.

“흐음. 착하게 군다 이거지.”

“아!”

모란이 돌연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자 연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픈데도 그의 손에 가득 쥐인 물건이 근질거리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모란이 꾹 쥔 채로 손을 움직여 쥐어짜듯 움직이니 그 자극이 지독해, 연은 이를 악물었다. 꼼짝도 못 하고 있자 모란이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면서 바지를 벗겨 냈다. 입술이 목덜미부터 타고 올라가 귓불을 잘근거리더니 속삭였다.

“아래를 봐.”

연이 가만히 있자 모란이 쥔 손에 좀 더 힘을 가했다. 연아, 아래를 보라니까?

그 말에 이상하게도 저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얼굴이, 특히나 모란에게 잘근잘근 씹히고 빨리고 있는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를 따름이었다. 평상시의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란에게 얌전히 잡힌 그가 있을 뿐…….

입술을 깨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란의 손에 쥐인 제 성기가 보였다. 연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란의 손가락 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귀두가 드러났다. 질금거리며 말간 액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모란이 보란 듯이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자 척척거리며 물기 어린 소리가 들렸다. 연은 얼마간은 버텼으나 엄지손가락이 귀두를 문지르다 안을 후벼 파듯 할 때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젖히고 말았다.

“아, 아!”

숨이 가빠진 만큼 쾌감도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 사정을 코앞에 두었을 때 모란은 도리어 손을 움직이던 걸 멈추고 말았다. 연이 모란에게 매달리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런, 게 어디에……. 흐읏!”

“네 선택이란다, 연아. 보기 싫거든 안 보면 돼. 보고 싶거든, 봐. 네가 어떤 식으로 내 손 위에 싸 버리는지…….”

모란이 음탕하고 야한 말을 귓가에 지껄였다. 결국 연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제야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은 모란의 손이 자신의 것을 크게 주무르기도 하고, 빠르게 위아래로 흔드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등골에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애원했다.

“잠시, 잠시만, 아, 앗!”

견디기가 힘들어 저도 모르게 상대의 손목을 잡아도 모란은 봐주지 않았다. 손을 멈추는 법도 없었다. 머리끝까지 쾌감이 차오르다 넘쳐흐를 적에 모란은 귀두를 가볍게 막았다. 흰 사정액이 모란의 손바닥 안으로 흐트러졌다.

진이 빠진 연은 모란에게 완전히 기대었다. 숨을 헐떡거리는데 평소와는 달리 치료받을 때 특유의 고통이 멈추지 않았다. 아까는 불에 달군 검에 깊게 찔린 것 같다면 지금은 그냥 달군 검 끝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왜…….”

“네가 내 간호를 헛수고로 만든 덕에, 고맙게도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질 않아서.”

모란이 제 손에 묻은 정액을 보란 듯이 느릿느릿 연의 허벅지 안이며 마른 배 위에 묻혔다. 그 선정적인 모습에 연이 얼굴을 확 붉혔다.

모란은 다시 연의 피부 위를 입술이며 이로 잘근거리면서 어디론가 손을 뻗었다. 연은 그제야 그들이 어느 방에 있는지 살필 수 있었다. 관아에서 지내던 어느 관직자인지 아니면 녹림들인지 누군가 기생을 불러 이 방에서 질펀하게 논 게 틀림없었다.

모란이 가져온 것은 비녀 두 개였다. 그냥 비녀도 아니고 진주가 알알이 박혀 있는 꽤나 비싼 물건이었다.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는 고통에 연이 입술을 깨물며 모란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이 고통은 일단 한번 시작되면 치료가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란이 비녀에서 진주를 떼어 내 그릇 위에 담았다. 총 여덟 알이었다.

“그것 아느냐? 사실 이 진주도 일종의 내단이나 마찬가지이지. 복용해도 효과가 미미하고 효과보다도 부작용이 심해서 거들떠도 안 보는 것일 뿐.”

“그게 대체, 읏, 무슨 상관이기에…….”

다음으로 모란이 한 행동에 연이 눈을 크게 떴다. 모란이 손가락을 들어 다른 쪽 손을 긋자 마치 칼에 베이기라도 하듯 상처가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그리 크지 않은 상처인데 피가 왈칵왈칵 쏟아지는 게 아닌가.

후두둑 피가 떨어지며 흰 진주알을 벌겋게 물들였다. 단순히 물드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진주알이 피를 흡수하는 듯했다. 그동안 모란의 마법을 보며 사술 같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조금도 튀거나 그릇을 적시지 않고 진주알에만 몰려드는 피는 솔직히 기이했다.

놀랍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진주알은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색깔도 반지르르한 고운 분홍빛이었다. 작은 밤알만 한 크기가 되고 나서야 모란은 진주알에 피를 쏟는 걸 그만두었다. 그러더니 산호색의 진주알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처음인데 잘 만들어졌네.”

“그게…… 뭐야, 대체?”

“이거? 인공적으로 만든 내단. 한번 먹어 볼래?”

연은 엉겁결에 입을 벌려 모란이 밀어 넣어 준 진주를 물었다. 먹어 보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이로 물어 보았으나 지나치게 단단했다. 이건…… 그냥 커다란 진주였다. 그냥 삼키다가는 질식해 죽을 만한 크기의.

눈살을 찌푸린 모란이 침으로 반질거리는 것을 꺼냈다. 그리고 한참 진주를 들여다보더니 쯧 혀를 찼다.

“이런, 아무래도 소화시키려면 하루 반나절쯤 걸리겠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

모란이 다시 피부 위로 입질을 하기 시작했다. 연은 그가 내단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는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님을 깨달은 건 모란이 바지를 완전히 벗겨 냈을 때였다.

위에만 겨우 옷을 걸친 상태라 민망해하고 있는데 엉덩이를 주무르던 모란의 손이 좀 더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 연의 얼굴에 확 열기가 올라왔다.

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모란이 손가락을 금방이라도 밀어 넣을 듯 뒤를 지분거렸다. 대체 언제 향유를 열었는지 은은한 향기가 번졌다. 엉덩이에서 손가락이 미끌거리는 감각은 정말이지 노골적이었다.

하려면 하라는 마음으로 입만 다물고 있자 모란이 은근하게 요구했다.

“넣으라고 해, 어서.”

“읏, 뭐……?”

“여기에 넣어 달라 하라고. 그러면 기분 좋게 해 줄 테니까.”

며칠 전이라면 안 된다고 했겠지만, 지금의 연은 평소에 세워 두고 있던 윤리나 도덕심 따위의 벽이 상당히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모란은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중지로 느릿느릿 엉덩이 골에서 회음부까지 문질러 대는 것이었다.

연이 입술을 떨었다. 이를 악물었다가, 눈도 질끈 감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넣…….”

“흠? 뭐라고?”

어느새 연의 성기는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모란은 그의 울럭이는 목울대 위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금방이라도 밀어 넣을 듯이 손가락이 입구를 꾹 눌렀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이던 연이 마침내 간청하고 말았다.

“넣어…… 줘.”

단순히 덜 아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란이 주는 쾌감을 좀 더 맛보고 싶었다. 일단 한번 입 밖으로 내자 요즘따라 아슬아슬하던 마음속 금제가 와르르 무너졌다.

“아주 잘했어.”

모란이 연의 허리에 단단하게 팔을 꽉 둘렀다. 곧장 손가락 하나가 느리게 밀려들어 오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연이 모란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매달렸다. 마침내 선을 넘기고 만 것이다.

손가락은 미끌거리는 향유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움직였다. 몇 번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두 개로 늘었다. 모란은 손등이 닿도록 깊이 넣었다가 빼고는 다시 밀어 넣었다.

쯔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연이 눈을 감았다. 분위기가 야릇하고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다지 기분 좋은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부끄러웠다. 그러느라 연은 아까 그 산호색 고운 진주알이 스르륵 그릇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굴러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란이 가위질하듯 손가락으로 뒤를 벌렸을 때 연의 부끄러움은 정점을 찍고 말았다.

딱히 좋은 것도 모르겠고, 여전히 달군 칼끝으로 쿡쿡 찌르는 듯이 아픈 데다가 민망하여 연이 막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모란이 손가락을 깊이 삽입하며 어딘가를 꾹 누르자 등골이 오싹하며 야릇하였다.

“……?”

방금 그게 뭐였지, 하고 어깨에 기대었던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렸다. 착각이었나 싶었는데, 모란이 안을 꾹 누르자 연의 몸이 움찔 튀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분명했다. 연이 당황하여 바르작거렸다.

“이게, 무슨…… 아, 앗!”

아찔한 쾌감이 온몸을 울렸다.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자극이었다. 연이 아직도 그 느낌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사이, 모란이 손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시야며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켰다.

“아읏, 잠시, 아! 이상, 이상해……. 읏, 으!”

모란이 안에서 마치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구부렸을 때에는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입 안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모란에게 몸을 내줄 뿐이었다.

“연아, 네가…… 무척 귀엽다고 내가 말했던가?”

모란이 한숨을 쉬며 퍽퍽 추삽질을 했다. 어느새 엉덩이 사이를 드나드는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나 있었지만 연은 눈치채지도 못했다.

“내가 얼마나 인내하는 것인지 상상도 못 할 텐데.”

그리 지껄인 모란은 품에 안은 몸이 바르작거릴수록 속도를 높이기만 했다. 손가락이 드나드는 틈에서 향유가 뚝뚝 흘러 바닥을 적셨다.

“아, 아! 응, 읏……. 모란, 아흐윽……!”

하도 거칠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통에 허리를 들썩이다가 연이 모란에게 매달렸다. 오금이 저리고 떨리는 쾌감은 괴로울 정도였다. 그와 반대로 치료의 고통은 잦아들었다. 아까는 달군 칼끝에 찔리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가시가 박힌 듯 아픈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연은 신음하기에 바빴다. 낯설고 이상한 쾌감이 뚝뚝 흘러 선단을 적시고 있었다.

점차 절정이 다가와 연이 숨을 가쁘게 헐떡일 때였다. 모란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대신 꾹 닿는 둥근 것이 있었다.

“흣……?”

그게 안으로 매끄럽게 밀려들어 올 때에서야 연은 무엇인지 깨닫고는 아연실색하였다. 아까 모란이 만들어 둔 커다란 진주였다.

“앗, 뭐야, 아윽……! 싫, 싫어…….”

연은 빠져나가려고 바르작거렸으나 아까부터 허리를 감고 있던 모란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쉬쉬 달래면서도 모란은 가차 없이 진주를 굴려 안에 밀어 넣었다. 가장 굵은 부분이 지나가자 나머지는 쉬웠다.

기어코 뒤로 진주를 완전히 삼키게 될 적에 연은 몸을 떨고 말았다. 모란은 멈추지 않고 손등이 닿도록 손가락을 꾹 밀어 넣었다.

둥근 진주가 꾹 안을 짓누르며 느리게 들어가자 흰 쾌감이 번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연이 모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프지 않지?”

“아픈 게 문제가 아니잖…… 아흐읏!”

모란이 손가락으로 삽입된 진주를 짓누르자 가해지는 압박감에 연이 고개를 젖혔다. 단단히 선 성기에서 말간 액이 흘러내렸다. 두 번째 진주알이 뒤에 닿자 연이 다시 바르작거렸다. 그는 지금 이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덜컥 겁이 날 따름이었다.

모란이 식은땀이 흐르는 연의 목덜미에 입술을 잘게 내리눌렀다.

“내가 네게 안 좋은 일 한 적은 없지 않아. 잠깐만 참으면 돼.”

“잠, 깐만…… 얼마나…….”

“글쎄. 반나절 정도? 안에서 잘 녹아 흡수될 때까지?”

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모란은 입으로는 진주를 먹을 수 없으니 뒤로 먹이려는 작정이었던 것이다. 반나절은 절대 잠깐으로 퉁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는 상당히 기운이 돌아온 연이 밀어 내려고도 하고 퍽 치기도 하였으나 진주알이 다시 밀려드는 통에 그만 힘이 빠지고 말았다.

“읏, 아……! 안 돼, 아앗!”

모란이 밀어 넣을 때마다 제 뒤가 꿀꺽꿀꺽 잘도 진주알을 삼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진주알이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쾌감이 밀려오는 것도 믿기지가 않았다. 네 번째 진주알을 넣을 적에 연은 그만 절정에 이르고 말았다. 막 사정하고 난 뒤 다시 자극받는 게 괴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연신 쾌감에 떨며 반쯤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모란이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에서 진주알을 손가락으로 굴리자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안에서 진주끼리 부딪쳐 잘각거리는 소리도 미세하게 났다.

“그만, 그만…….”

하지만 그만이라는 단어는 이내 잠시만으로 바뀌었다. 더는 안 들어간다는 말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결국 연은 울먹이고 말았다. 쾌감으로 머리가 핑핑 돌아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안, 안 들어가. 아앗! 아흑, 안 들어간다고…….”

그러나 안 들어간다고 애원하는 말이 무색하게 진주알은 빌어먹게도 잘만 들어가는 것이었다. 모란이 여덟 개의 진주알을 모두 밀어 넣고 손가락을 휘저었다.

손가락을 쑤석일 때마다 연은 안에서 진주알들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손끝이 탁탁 진주알에 닿을 정도로 모란이 세게 추삽질을 하자 연은 다시 한번 사정을 하고 말았다.

그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떠는 동안, 모란은 기어코 꾹꾹 진주알들을 안쪽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몸을 덜덜 떨던 연의 눈가에는 끝내 수치심으로 물기가 어리고 말았다. 진주가 다시 빠져나오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마침내 모란이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을 빼냈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행위에 얼굴이 완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연이 숨을 가쁘게 쉬었다. 모란은 그런 연의 뒷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마침내 절정의 여운에서 벗어날 때쯤 모란이 입을 맞추었다. 처음과는 달리 이제 사나움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다정한 태도였다. 모란이 제 혀와 입술을 살금살금 빨고 안을 휘저을 적에 연은 콱 그의 혀를 깨물었다.

“윽!”

모란이 인상을 쓰며 입을 떼어 냈다. 그러나 연의 표정을 보더니 도로 히죽 웃는 것이 아닌가. 부끄럽기도 하고 바짝 약도 올랐던 연이 모란을 밀어 냈다. 이제는 모란도 순순히 연을 풀어 주었다.

“꼭, 그, 그런…… 그런 걸 해야 했어?!”

연은 배 속이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안에서 진주알들이 달그락거리는 것 같았다. 치료가 목적이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럼에도 너무 부끄러웠다. 행위뿐만 아니라 이제껏 한 번도 겪은 적 없던 쾌감에 몸부림치고 신음하고 울먹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모란이 능글거리며 지껄였다.

“내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고……. 뭐, 그럴 마음이 아예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연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검을 찾아 허리춤을 더듬거리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모란이 얼른 태도를 고쳤다.

“모든 내단이 그렇지만 특히나 진주는 예로부터 좋은 증폭제지. 오늘은 나도 너무 기운을 소진했거든. 그래서……. 임시방편이라고 할까. 싸구려 재료라 큰 효과는 없지만 지금 상태를 유지는 하게 해 줄 거야.”

모란이 너무 기운을 소진했다는 말을 듣자 연이 더는 뭐라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왜 기운을 소진했는지 익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찾고 또 거기에 저를 찾느라…… 시무룩해진 연이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 와중에 모란이 몸에 묻은 것들을 닦아 주고 옷 입는 것을 도와주자 연의 얼굴은 또 벌겋게 물들었다.

옷을 다 입고 난 뒤 모란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내가 사과할 일이 하나 있는데.”

“사과할 일?”

안에 들어간 진주들이 너무 신경 쓰였던 연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움직이기만 해도 부끄럽고 불편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치료를 꼽아 보라면 연은 단언컨대 이 치료를 꼽을 것이다…….

“실은 네게 술식을 하나 걸어 놓았었거든. 치료를 할 때마다 나도 기운이 꽤 많이 소진되는데, 영 감당이 안 되더란 말이야. 낮 동안은 화정당 주위에서 기를 긁어모아 밤에 네게 넣어 주는 그런 술식인데, 문제는 완료될 때까지 하룻밤이라도 거르면 반작용이 일어나. 축시가 되기 전 겨우 아슬아슬하게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그런 건 전혀 몰랐던 연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자신을 치료할 때 모란의 기운이 많이 소진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치료하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얼굴이었던 탓이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모란은 연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비틀거릴 때가 있었다. 치료는 그보다 더 힘든 일이겠지…….

“내가 자만했다. 괜찮을 줄 알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금방 알아내고 대처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아니었지.”

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모란이 이렇게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나올 때면 그는 기분이 매우 이상하였다. 모란이 제게 알 수 없는 술식을 걸었다는데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럼…… 앞으로는 밤에 꼭 화정당 외의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건가?”

“아니, 아냐. 술식이 너무 위험해서 개조 좀 하려고.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중간에 중단해도 반작용은 없는 것으로.”

그리고 한 번에 한 두세 명 집어넣어도 괜찮게……. 모란은 물론 산 사람을 재료로 쓴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오늘 연이 녹림십오채 두목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술식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모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목숨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재료로 쓰고 난 다음에는 현상금이 걸린 녀석이 아니면 대충 돈도 몇 푼 쥐여서 보내 주지 않나. 모란으로서는 대단한 관용이었다.

‘그럼 안정성을 위해 사방진이 아니라 오방이나 육방진 정도는 되어야겠지.’

대충 이리저리 궁리해 보니 연못 옆 나무 근처에다가 재료를 더 심어 놓으면 될 듯싶었다.

모란이 생각에 잠긴 동안 연은 피곤하여 잠시 엎드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사부님!”

아무리 잠시라고는 해도 어떻게 사부님을 잊어버릴 수가 있지! 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모란이 도로 잡아 엎어 놓았다. 모란의 품에 풀썩 쓰러지자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워, 연은 잠시 꼼짝을 하지 못했다. 모란이 다소 흑심이 들어간 손으로 슬슬 등을 쓰다듬었다.

“잠깐 쉬었다가 가.”

그러나 연은 모란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은록의 몸에 단검이 꽂혀 있는 상태인데 잠깐이라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비칠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란도 마지못해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정작 술식이 중단된 부작용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이렇게 안 좋아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들인 공이 하룻밤 사이에 훅 날아갔다.

연을 들다시피 부축해 감옥으로 향하며, 모란은 아까 도적들을 파묻은 장소를 노려보았다.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은록의 상태가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연은 걱정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은록이 사라진 게 며칠 전임을 감안해 보면 체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을 터였다.

감옥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갇혀 있던 의원들이 모란과 연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의원들을 풀어 주는 건 일단 나중이었다.

은록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얼굴이 몹시 창백했던지라 연은 일단 묶인 팔과 다리부터 풀었다. 바르게 눕히고 맥을 짚어 보니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연이 아까 찾아냈던 치료 도구를 뒤져 약초 몇 개를 꺼냈다. 다행히 금창약을 만드는 기본적인 재료들이 있었다. 약초를 넣고 짓찧고 있을 때였다. 뒤에 서 있던 모란이 어라? 하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

“깨어 있는데.”

깨어 있다니 누…가……. 연은 고개를 돌리고는 흠칫했다. 언제 정신을 잃었냐는 듯한 얼굴로 은록이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약초를 찧고 있는 연의 손을.

일단 연은…… 침착하게 약초를 손에서 내려놨다. 은록을 치료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해 들킬지도 모른다는 건 미처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생각도 못 했다기보다는 그저 연에게 의술이란 것이 너무 몸에 박인 직업이었던 탓이다.

대체 언제부터 깨어 계셨던 건가 하여 연이 내심 안절부절못할 때였다. 은록이 조용히 물었다.

“의술은 언제부터 배웠습니까? 연 공자?”

“그…게…….”

어떻게 좀 하라고 모란을 바라봐도 그는 딴청을 피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은록은 무심하게 제 배와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아까 연이 응급 처치를 해 놓은 부분들이었다. 그때도 은록이 실은 정신이 멀쩡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연의 머리를 스쳤다. 연이 겨우 입을 열었다.

“모란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고는 은록이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덤덤하였다. 모란이 가르쳐 주었다는데도, 정작 모란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은록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모란아.”

하고 부르는데, 대체 왜 모란을 쳐다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며 부른단 말인가?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더냐?”

은록의 질문에 모란도 연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후로 은록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상처를 짚어 볼 따름이었다. 감옥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창밖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달빛만이 그들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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