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章 : 의원
‘내가 이렇게 착한 인간이었던가.’
삐딱하게 앉아 술을 마시며 모란이 고뇌했다. 그는 최근 자신이 부린 오지랖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오지랖도 그런 오지랖이 없었다. 새삼 성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게 죄다 한 인물을 향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환자 돌본답시고 밤마다 마실 나가는 것 도와줘, 동생 집에서 내쫓긴다고 하여 도서관 같은 것도 하나 뒤집어엎었지. 그것도 모자라 유지하기 꽤나 성가신 아공간까지 열어 가면서 가르쳤단 말이야. 가르치는 재미가 있긴 했다만.’
안제테다에서 알고 지내던 녀석들이 알면 기겁했을 것이다. 그 백모란이 언제부터 이렇게 잘도 상대를 도와줬느냐 이 말이다. 망가진 혼을 수복하는 건 그렇다 치자. 상당 부분이 그의 책임이었으니.
모란이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병 마시고 기절할 만한 독한 도수의 술을 물처럼 마시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 독을 마셔도 취기가 살짝 오를까 말까 했다. 요즘 하도 돌아다녀 햇빛에 잘 그을린 피부 위로 술병에서 넘친 술 한 방울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인연이 얽혀 버려서 그런가. 정말 잘 엉키기는 했어.’
근원과 근원이 가닥가닥 엮이는 게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아무 근원이나 다 잘 얽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맞지 않아서 죽어라 시도해도 엮이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연과 모란의 근원은 정말이지…… 환상적으로 잘…… 엮였다. 이제 와서는 풀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인연이 얽혀서 이렇게 구는 건 아니었다. 모란이 미간을 접었다.
‘어쩔 수 없어. 그 예쁜 얼굴로 파르르 떨며 입술을 조금만 깨물기만 하면 그냥 홀랑 넘어가고 마는걸. 대체 알면서 그러는 건지 모르면서 그러는 건지.’
물론 연의 성격상 모르면서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더욱 문제인 것이다. 왜냐면 연이 알면서 그러면 더 쉽게 넘어갈 것 같았던 것이다.
‘아이낙스의 심정이 다 이해가 가는군.’
아이낙스는 육십여 년 전 안제테다 중부 지역을 호령하던 여왕의 이름이다. 철혈 군주, 실리낙스의 대마녀, 우타마의 영원불멸(永遠不滅)한 왕 등등 여러 가지 칭호로 불리던 여자. 힘도 어찌나 세던지 모란은 그 여자와 싸우던 때를 떠올리면 새 육신에 들어와 있는 지금까지도 등이 다 쑤셨다. 그 여자에게 등짝만 여섯 번을 베이고 찔렸던 탓이다. 상처 중 하나는 저주 때문에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물지를 않고 피가 흘러 옷을 몇십 벌이나 버렸었다.
아무튼 그런 독한 여자가 하루는 노리개로 수인 아이를 주워 왔다가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모란이 보기에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수인 때문에 아이낙스는 딱 한 방울뿐이지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그 구경거리를 보다가 까딱 죽을 뻔하긴 했지만.
‘좋은 추억이군. 한 번쯤은 더 붙어 보고 와도 됐을 텐데.’
모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그는 아이낙스와 달리 연 때문에 영토의 반을 말아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고 모란이 생각했다. 사실 사랑이니 뭐니, 그에게는 다 웃기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고 싫어하면 싫어하는 것이지. 뭘 애증이며 뭐며 울고불고…….
“모란 님, 술을 더 가지고 올까요?”
조용히 들어온 기녀가 정중하게 물었다. 모란이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내저었다.
“음, 아니야. 됐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옷자락이 흘러내리며 상체가 근사하게 드러났다. 여력이 될 때마다 아공간에서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몸은 군더더기 없이 근육이 붙어 있었다. 모란은 잠시 가슴팍에 난 화상 자국을 손으로 문질러 보다가 피식 웃으며 옷자락을 대충 간추렸다. 기녀는 모란의 맨몸에도 전혀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보고를 올리도록 할까요?”
“전에도 말했지만 굳이 꼬박꼬박 보고할 것 없어. 알아서 하라고 해라.”
귀찮았던 모란이 손을 내젓자 기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자 따가운 아침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어느덧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모란은 자신 소유의 주루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랬다. ‘그의 주루’이다.
원래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모란은 바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그다지 돈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필요할 때 골치가 좀 덜 아프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돈이 아니라 돈이 있음으로 인해 모여드는 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앞서 연이 모란의 몸을 쓰면서 모아 둔 돈이 있기는 하였으나 자금으로 운용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연과 거래를 하여 자금을 빌렸다.
첫날은 연에게 말한 대로 금 열 냥을 들고 도박장으로 향했다. 도박장이란, 그 얼마나 돈을 모으기 쉬운 장소인지. 모란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근방의 도박장을 돌며 돈이란 돈은 싹싹 긁어모았다.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이 있다면 더욱이 좋았다. 그가 원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모란은 금 열 냥을 스무 냥으로 불린 뒤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주었다. 공짜로 돈을 나눠 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난 뒤에는 정보를 가지고 오면 돈을 주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정보를 모으다 보니 들려오는 유익한 소문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어디의 호화로운 주루가 왈짜패의 행패로 장사가 되지 않아 주인이 눈물과 탄식으로 밤을 지새운다거나, 어느 지역에 거대하고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 밭이며 논을 다 망친다거나, 혹은 주강 동부 지역이 녹림과 수림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거나.
그다음은 쉬웠다. 안제테다에서 이백오십여 년 동안 하던 게 바로 그런 일이었다. 모란은 왈짜패로부터 주루를 구해 소유권을 양도받았고, 인간의 피 맛을 알게 된 사나운 짐승을 잡아 족쳐 비싼 값에 팔아넘겼다. 주강 동부지역에서 날뛰던 산적과 도적들은 그 수가 제법 되어 현상금이 걸린 녀석들을 하나하나 잡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금 열 냥을 갚는 것은 금방이었다.
돈이 모이자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모이자 정보도 모였다. 정보가 모이니 또 돈이 모인다. 모란은 하오문이라는 문파와도 곧 연이 닿았다. 그들은 일종의 정보 연합이었다. 모란은 몇 번의 거래를 하며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만들어 놓으면 그다음은 쉬웠다. 며칠에 한 번 들러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이 만들어 둔 것들이 잘 돌아가나 확인 좀 하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이나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어제처럼 귀엽고 썩 괜찮은 상대가 있다면 슬며시 꼬셔서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고.
해가 뜬 위치를 본 모란은 슬슬 연이 일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지개를 쭉 펴며 그가 창밖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쓸데없이 정문으로 나갔다가 주루의 사람들이 문 앞까지 나와서 자신을 배웅하는 성가신 상황은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주루를 나선 그가 어슬렁거리며 세가를 향해 걸어갔다. 안휘성 근처에는 커다란 시장이 있는데 모란의 취미는 이 시장을 가로지르며 이것저것 사는 것이다. 지나가다가 그의 시선이 과일 가게 앞에서 멈추었다. 노란 귤이 한 바구니 쌓여 있었다.
‘귤을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
연은 지금도 꽤 괜찮았지만 모란의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말랐다. 좀 더 찌워 두면 좋겠네. 그리 생각하며 모란이 귤을 샀다. 소쿠리에 담아 들고 설렁설렁 걸어가면서 그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아침부터 웬 날파리들이지.’
그냥 무시하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귀찮음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했다. 모란은 바로 세가에 들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부터 뒤를 졸졸 따르기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좀 으슥한 곳에 다다르자 앞뒤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모란이 보기에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심지어 딱히 귀엽게 생기지도 않았다.
“네가 백모란이냐?”
얼굴에 길게 상흔이 남아 있는 사내가 단검을 위협적으로 흔들어 대며 물었다.
“그래, 내가 백모란이다.”
이제 어쩔 것인가 궁금해하며 보고 있자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달려들었다. 물론 모란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여기 와서 딱히 원한을 산 적은 없는데. 특히 백모란의 이름으로는 말이야.’
의아해하면서 모란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달려들던 사내들이 컥, 하는 소리를 내더니 돌연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픽픽 고꾸라졌다.
“마침 잘되었군. 재료를 또 구하러 갈 때였는데 알아서 굴러들어 와 주니.”
모란이 휘파람을 불었다. 네 명이라 수도 딱 맞았다. 대충 굴려다가 한군데 무더기로 쌓아 둔 뒤 그가 마력으로 공간을 접었다. 이 한산한 골목길에서 화정당까지의 공간을 접었다가 놓으니 어느덧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그러나 화정당 안은 아니었다. 화정당 바깥 침엽수림에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귀퉁이다.
모란은 한 명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고 갔다. 도중에 정신을 차린 녀석이 희미한 신음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러나 모란에게는 벌레가 바르작거리는 것 정도로 느껴질 따름이다. 그가 손을 까닥거리자 땅 위에 놓여 있던 바위 하나가 움직이며 좁은 입구 하나가 드러났다. 실상 입구라기보다는 깊게 파 놓은 구덩이에 가까웠다.
몸을 숙인 모란이 팔을 뻗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집어 들어 꺼냈다. 주강 동부 지역에서 잡아 온 도적 중 하나였다. 처음 넣을 때는 팔팔하던 도적은 지금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축 처져 있었다. 모란은 도적을 꺼내 아무렇게나 땅 위에 내려 두었다.
“으아……. 으으…….”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남자가 버둥거렸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모란은 아무렇게나 남자를 땅속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바위로 입구를 닫기 전, 그가 씩 웃었다.
“반성하고 있으면 꺼내 주도록 할게.”
바위로 구멍을 막자 거짓말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란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나머지 의식을 잃은 사내 셋에게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렇게 화정당을 중심으로 네 귀퉁이에 묻어 놓은 사람들을 교체하는 것이다. 대마녀 아이낙스로부터 배운 술식이었다. 물론 전혀 연이 좋아할 만한 방식이 아니었기에 모란은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연의 혼이 크게 손상된 걸 알게 된 날, 모란은 바로 이 술식을 만드는 데 착수했다. 자신의 근원을 찢어 연의 근원을 수복하는 일은, 생각보다 기운이 꽤 많이 소모되었다. 문제는 자신이 불어 넣어 주는 것보다 연의 몸에서 흘러 나가는 생기가 더 많다는 것이었다.
안제테다에서 사용하던 몸이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겠지만 현재 그의 몸은 어렸다. 한마디로 말해 미완이라 감당이 되지를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 술식이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살아 있는 사람을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파묻는다. 그리고 네 사람으로부터 기운을 좀 뽑아낸다. 이 기운은 밤마다 연이 매일 잠드는 침소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너무 오래 파묻어 두면 죽어 버리고 생기 대신 사기가 전해지니 모란은 좀 뽑아냈다 싶으면 녹림에서 대충 아무 도적이나 잡아 와 갈아 끼우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생기를 억지로 뽑아내 넣어 두는 것이니 말이다……. 모든 마녀의 술식이 그렇듯이 중간에 거르거나 멈추게 되면 그만큼 술자와 생기를 받던 사람에게 반작용이 가해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연은 화정당 외의 다른 곳에서 잘 일도 없는 데다가 만약 그렇다 해도 하룻밤 정도는 모란이 옆에서 잘 관리해 주면 그만인 것이다. 가장 심한 타격이 가해질 때는 술식이 깨질 때지만 이곳에는 안제테다와는 달리 술식을 깰 만한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운동을 하니 기분이 좋군.”
술식의 재료로 썼던 녀석들은 관아에 넘겨주고 현상금까지 받아 온 모란이 기분 좋게 화정당으로 향했다. 주치의라는 아주 편한 구실로 제지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곧장 침소로 향했다. 침상 위에는 연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모란은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아 귤을 까먹었다.
“어떻게 잠꼬대 한 번을 안 한단 말이야.”
연은 모란이 본 중에 가장 잠버릇이 얌전한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추위를 타는 탓에 눈 바로 밑까지 이불을 끌어다 덮고는 그대로 아침까지 조용히 숨만 쉬며 잤다. 몸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자 버릇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지켜보며 계속 귤을 까먹었다. 연은 다섯 번째 귤의 껍질을 깔 때쯤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풀풀 귤 향기가 퍼진 탓이었다. 모란은 여섯 번째 귤을 먹으며 연의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금 뒤척뒤척하던 연이 곧 눈을 떴다. 처음에는 모란이 있는지 모르는 듯하더니 인지를 하자마자 곧 짜증을 냈다.
“……내가 잠자는 동안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그랬던가? 잘 모르겠는데.”
시치미를 떼며 모란이 귤 하나를 까서 연의 새하얀 뺨 위에 올렸다. 최근 혈색이 차츰 돌기 시작해 전처럼 창백하지는 않았다. 연은 모란을 노려보며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굴러 떨어지는 귤 알맹이를 낚아챈 그가 불퉁한 얼굴로 귤을 먹기 시작했다. 모란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귀엽기도 하지.
“자, 더 먹어.”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연은 모란이 주는 귤을 세 개째 받아 들었다가 멈칫했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그가 모란을 바라보았다.
“……설마 오늘이 치료하는 날이야?”
“어떻게 알았어?”
“그날만 되면 많이 먹이잖아.”
이런, 눈치채고 말았군. 그러나 이리 먹인 게 딱히 치료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란은 평상시에도 항상 연을 많이 먹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언제나 체력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체력 증진은 원래 잘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모란이 네 번째 귤을 내밀었다. 치료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이 다소 시무룩한 얼굴로 귤을 받아 들었다.
“밤에 할 거니까 낮에 잘 먹어 둬.”
연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다지 잘 먹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보면 아침이며 점심에 저녁까지도 죄다 한위에게 줘 버리는 것이다. 꼬맹이가 뭣도 모르고 눈치 없이 식사를 뺏어 먹는 걸 볼 때면, 모란은 제가 없으면 연이 완전히 빼빼 말라 버리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치료를 한다 말한 덕에 연은 나름 열심히 식사를 했다. 평상시면 대충 숟가락 몇 번 깨작거리고 말 것을, 산적 하나에 소면 한 그릇, 그리고 당과까지 두 개나 먹었다. 저녁이 되어서는 후식으로 나온 밀떡도 하나 먹었다. 딱히 먹고 싶어서 먹는다기보다는 양을 채워 넣는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모란은 그걸로도 만족했다.
마침내 저녁이 되었을 때 연은 긴장한 얼굴로 침상에 앉았다. 이번으로 벌써 다섯 번째 치료였으나 매번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익숙해질 수가 없는 치료이긴 했다. 모란이 앞으로 다가와 앉자 고통을 예감한 연이 입술을 슬며시 깨물며 주먹을 꾹 쥐었다.
‘또 귀엽게 구네.’
하지만 이번에는 귀여운 것만은 아니었다. 모란이 손을 뻗어 턱을 쥐자마자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기라도 하듯 혼이 크게 동요했다. 그저 간단한 접촉일 뿐인데도 감정적으로 크게 움직이는 것이다. 모란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대로 입을 맞췄다. 쪽쪽 입술을 맞부딪친 뒤 타액으로 젖은 입술 위를 어루만졌다. 긴장한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좀 토할 것 같아도 참아, 알았지?”
다정하게 속삭이며 모란이 중지와 검지를 슬며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문지르면서 입술은 동시에 연의 귀를 탐했다. 붉게 달아오른 귀를 핥고 깨물고 빨아들일 때마다 연은 귀엽게도 움찔거리곤 했다. 모란은 그에게서 퍼져 나가는 성욕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치 단것을 먹듯 귓불을 빨았다. 혀끝으로 달아오르는 상대의 열기가 느껴졌다.
‘아, 정말이지 한입에 먹어 치우고 싶군.’
연이 질색해서 도망칠 만한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좀 더 밀어 넣었다. 흰 이를 건드리고 발간 혓바닥을 짓눌렀다. 살금살금 손가락이 점차 깊은 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반사 작용으로 구역질이 올라와 괴로웠는지 연이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마디를 눌렀다.
‘안 닿는데.’
모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였으나 이번에는 그가 닿고자 하는 부분이 더 아래에 있었다. 목덜미를 잡고 최대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보자 아슬아슬하게 닿긴 닿았다. 고통으로 연의 몸이 퍼득 굳었다.
“흐으, 으…….”
고통을 참느라 연이 숨을 헐떡거리자 더운 숨이 모란의 손등에 닿았다. 연이 괴로움에 저도 모르게 팔목을 잡아 밀려고 아등바등하는 걸 모란이 잡아 눌렀다. 순수하게 치료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어떤 행위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건 말건 연의 눈에는 생리적인 구역감 때문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욱, 흐으, 윽…….”
“착하네, 조금만 더…….”
살살 달래며 모란이 연의 입 안을 헤집었다. 그때마다 연의 몸이 움찔거리며 튀었다. 벌어진 입에서 말간 타액이 턱을 따라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모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혼을 만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뱃가죽을 가르는 것이지.’
예전에 마족을 잡아다가 고통을 가하기 위해 결박하고 배를 갈랐던 걸 떠올렸다. 혼을 이리저리 헤집자 마족이 눈을 까뒤집고 고통스러워하며 마침내 모란이 원하던 정보를 내뱉던 것도. 그러나 연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건 치료가 아니라 망가트리는 일이 아니던가.
마침내 포기하고 손을 빼내자 구역감이 올라왔던지 연이 입을 막으며 숨을 헐떡거렸다. 기침도 몇 번 이어졌다. 혼이 건드려질 때면 항상 그렇듯이 연의 눈빛이 아득하고 흐렸다.
“다…… 끝났어?”
이걸 어찌 말해야 하나 모란이 고민했다. 혼을 만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뱃가죽을 가르는 것 따위의 신체 손상을 제외한다면…… 역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좋았다. 쾌감에 들떠 있는 동안 혼은 잘 구워진 떡처럼 말랑해지다 못해 뭉글뭉글 부풀어 올라 만지기 쉬워졌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평소와 달리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고―아예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빨리 끝났던 터라 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연아, 아프지 않게 잘해 줄 테니 한번 나와 자 보지 않으련?”
한번 자 보자는 말이 성교를 하자는 말임을 알고 있는 연이 홱 몸을 뒤로 뺐다. 모란이 예상한 반응이었다. 지난 두 번의 제안마다 연은 이런 반응을 보여 왔던 것이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안 돼. 분명 몸을 만지는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했잖아.”
“지금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야.”
모란은 삐딱하게 턱을 괴고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
“혹 거절하는 이유가 내가 싫어서이냐?”
“뭐? 아니, 아냐.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물론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모란의 질문에 연이 당황했다. 실은 당혹스러워서 그렇다는 게 제일 정확할 것이었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모란이 만질 때마다 동요하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 까닭이다. 소룡대회를 기점으로 더는 모란이 싫거나 꺼려지지도 않았다. 도리어 내심 그가 더 만져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연은 가까스로 변명을 하나 댔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연의 말에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깐 침묵하더니 되물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래. 난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과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아.”
“그럼 간단한 일이잖아. 치료할 동안만 나와 사귀면 되는 것이지. 치료가 끝나면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돌아가면 되고.”
말문이 막혀서 연이 모란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어처구니없고 야만스러운 발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어째서 은연중에 서운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서운하다니, 말도 안 되는 느낌이었다.
연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오기가 생겨났다. 모란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자신은 별거인 것처럼 굴기가 싫었다.
“아니다. 당신과 사귀느니 그냥 조금 더 허용해 주고 말래.”
“나와 사귀는 것이 뭐 어때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지금도 제멋대로 구는데 만에 하나라도 사귀게 되면 더 속을 끓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아니다. 왜 그런 가정을 하는가? 어차피 사귀지도 않을 건데.’
연이 지레 놀라 다시 생각했다. 잠시라도 저런 사내와 사귄다는 가정을 하다니! 요즘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게 틀림없었다.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상대의 거절이 분명하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그렇다면 삽입 외의 다른 건 해도 된다는 거지?”
“그……래.”
허락하는 순간 얼굴에 그려지는 미소가 얼마나 선명한지 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삽입 외의 다른 거……라면, 아무튼 입만 맞추는 것 이상의 일이라는 거겠지. 연이 바짝 긴장했다. 모란의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연은 그가 어딘가를 덥석 잡거나 만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가 먼저 만진 것은 옷자락이었다. 연의 침의 자락을 들치더니 멈칫하였다. 그러고는 묶인 자락을 풀어냈다.
연이 잠시 숨을 멈췄다. 스륵 부드럽게 비단 침의가 흘러 내렸다. 화로와 탕파 덕분에 공기가 따뜻한데도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추워도 잠시 참아 봐.”
피부를 스칠 듯 손을 훑어 내린 모란이 이번에는 바지로 손을 향했다. 이것도 벗겨 버리려나 하고 몸을 굳혔으나 벗기지는 않고 대신 손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사타구니로 향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자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안쪽을 건드리고는 뒤로 향했다.
속곳 위로 엉덩이를 움켜잡는 손길에 연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단단한 손가락이 살을 쥐고 있는 감촉이 너무 생경했다.
“긴장은 풀지 말고.”
모란이 그리 말하며 입을 맞췄다. 긴장을 풀라는 것도 아니고 풀지 말라니……. 그러나 이어진 능숙한 혀 놀림에 연의 의문은 흩어지고 말았다. 모란은 혀를 물어뜯을 것처럼 구는가 하면 야하게 놀리며 숨 막히게 굴기도 했다. 한 손은 엉덩이에 가 주무르고 있고 다른 한 손은 가슴 위에 있으니 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란은 짓궂게도 연의 유두를 못살게 괴롭혔다. 세게 문지르고 꼬집듯이 비틀기도 했다. 그때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연은 입을 맞추느라 말을 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손톱을 세워 유두를 살살 긁더니만 모란이 노골적으로 다른 한 손을 움직였다. 연이 당황했다.
“……!”
모란이 바지를 느릿느릿 벗겨 버리는 것이다. 침의라 헐렁한 바지가 허벅지에 가서 걸렸다. 몹시도 부끄러워서 연이 눈을 질끈 감는데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고통이 찾아들었다. 연은 깜짝 놀라 휙 고개를 틀었다.
“뭐, 뭐 하는……. 아!”
항의하려다가 연은 또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손으로 때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아픈 매였다. 당황하여 버둥거리자 모란이 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또 연달아 때리는 것이다. 이제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화끈화끈했다.
다섯 번째로 얼얼한 매를 맞을 적에 연은 신음하며 그만 모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고통보다는 수치심이 앞서는 상황에 연이 모란의 팔을 꾹 잡았다.
‘그만하라고 해야 하는데…….’
어렴풋이 지난번 모란이 엉덩이를 때려도 되느냐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피를 토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 무어라고 설명을 했더라, 감정, 감정적으로 동요해야…… 근원이…….
일곱 번째로 엉덩이를 맞고는 더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연은 모란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여덟 번째로 맞을 때는 몸이 들썩였다. 그런데 모란이 세게 때려서 그런 것인지 자신이 그런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만하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물론 아팠다. 아픈데, 연은 이상하게 이 상황이 좋았다. 아무도 모란과 연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이 상황, 어린아이처럼 엉덩이를 맞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받아들이는 자신이……. 명치가 꽉 조이는 듯한 고통이 가해진 건 바로 그때였다.
“……!”
턱 숨이 막혀 몸을 떨자 모란이 언제 가차 없이 손찌검을 했냐는 듯 쉬쉬 하면서 달랬다.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언제 모질게 때렸냐는 듯이 빨갛게 달아 오른 흰 엉덩이를 살살 주물렀다. 모란이 식은땀에 젖기 시작한 목덜미를 입술로 더듬거렸다.
“이번에는 참을 만하지?”
놀랍게도, 정말 그래서 연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가 매달린 채 끙끙거리며 고통을 참는 동안 모란은 양손으로 엉덩이를 쥐었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주물거렸다. 연의 얼굴이 고통에 질렸다가 발갛게 달아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냥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곳이 다 드러나도록 손가락 끝에 꽉 힘을 주고는 벌려 쥐는 것이다.
‘이, 이 무슨 망측한…….’
실수였는지 주물거리던 모란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슬쩍 찌르자 연이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게 실수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손가락 하나가 슬그머니 굳게 다물린 입구를 문지르는 게 아닌가.
“거긴, 아! 으…….”
명치가 찔리는 듯 아파서 연이 말을 잇지 못했다. 모란은 발갛게 열이 오른 뺨에 입을 맞추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밀어 넣을 듯 손가락으로 뒤를 꾹꾹 눌러 댔다. 연이 수치심에 몸을 떨자 그는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연의 다리 사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얄팍한 속곳이라 손바닥의 뜨뜻한 체온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여기…….”
느슨한 미소를 걸친 모란이 제 손을 뒤집더니 손등으로 슬그머니 문질렀다. 구부러진 손마디가 스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연은 제 것이 단단하게 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좋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이제 명치를 쥐어짜고 찌르는 듯한 고통은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연아.”
다정하게 부르면서 모란이 열이 오른 눈가며 입술 위로 야하게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깨물고는 더욱 노골적으로 연의 다리 사이를 지분거리며 지껄여 댔다.
“이렇게 귀엽게 굴면 무척 난감해.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데.”
연은 모란이 하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머리가 핑핑 돌고 어지러웠다. 모란과 시선이 마주치자 온몸에 근지러운 감각이 번졌다. 그가 자신을 어찌하고 싶어 한다는 욕망을 읽어 낸 까닭이다. 부끄러움에 말은 없었으나 연의 시선도 모란처럼 상대를 더듬었다.
더 이상 고통이 없으니 치료가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연은 제 다리 사이에 가볍게 닿은 모란의 손 위에 저도 모르게 제 것을 살살 문지르고 말았다. 모란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연은 얼마 안 가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뒤로 물러나려 할 때였다.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어느새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모란이 가볍게 들어 올려 엎드려 눕힌 것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지, 응?”
모란이 속곳 안으로 서슴지 않고 손을 밀어 넣었다. 그 손에 제 물건이 쥐인 순간 연은 마치 몸속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기분이었다. 흰 쾌감이 솟구쳤다.
“아, 아…….”
연이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고는 입을 다물었다. 모란의 손이 움직이자 온몸이 떨렸다. 손이 움직이면서 나는 옷자락이 서걱거리는 소리까지도 오싹오싹했다. 이불을 쥐어 잡고 입을 꽉 다물고 있자 모란이 흐트러진 옷자락 위로 드러난 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어차피 밖에는 안 들려. 그 예쁜 소리 좀 내 보렴.”
손가락이 입술을 누르고 입을 열고 들어왔다. 연은 반사적으로 다소 세게 깨물고 말았다. 그러나 아프지도 않은지 모란은 뒤에서 웃는 소리를 내더니 기어이 손가락으로 입 안을 휘저었다. 연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모란이 물건을 쥔 손을 더 빨리 움직이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빠르게 숨이 차올랐다.
“흐윽, 읏, 앗!”
모란은 교묘하게 손을 움직였다. 손으로 쥐고 빠르게 흔드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견딜 만했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으로 선단을 문지르는 것에는 견디지 못하고 날카로운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
이제까지 제 손을 이용한 자위 정도밖에 하지 않았던 연에게 모란이 주는 자극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절로 허벅지며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숨은 점차 가빠졌다. 자위 같은 것에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크고 뜨끈한 손안에 죄다 쥐여 흔들리자 몸서리가 쳐졌다.
“앗, 아! 아!”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며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고 길게 핥다가 모란이 펄떡펄떡 맥이 뛰는 퍼런 핏줄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결국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모란의 손안에 파정한 뒤, 연은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이불 위로 엎어진 그가 숨을 가쁘게 쉬었다. 머릿속이 희게 질릴 정도로 달콤한 쾌락이었다. 뒤에서 자신을 부담스럽지 않게 짓누르고 있는 모란의 체온과 무게가 퍽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내가…… 내가, 미쳤지.’
시간이 지나자 연은 정신이 다 아득했다. 자신이 아까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소리를 냈는지 떠올리자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모란의 손안에 파정한 걸 처리하는 건 차마 보지 못하고 이불에 얼굴만 박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모란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정말 나랑 한번 해 볼 생각 없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연은 모란의 말을 의심했다. 방금 그게 한 것이 아닌가? 아니, 어떻게 방금 것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가 있지? 모란을 바라보던 연이 깜짝 놀라 휙 시선을 치웠다. 그리고 연신 눈을 깜박였다. 모란의 다리 사이가…… 그러니까, 그게…… 아니…….
‘저게 정말 인간인가?’
전에 가진 것과 똑같지만 다른 질문을 다시 던져 보면서 연이 제 눈을 의심했다. 제가 뭘 잘못 봤나, 혹은 옷이 구겨진 걸 이상하게 본 것은 아닌가 하며 다시 쳐다보니…… 잘못 본 건 아닌 듯했다.
‘저런 크기의 물건이, 아니었는데. 아니, 맞나?’
모란의 몸에 있으면서 연은 그 흔한 자위 한번 해 보지 않았다. 의원 일을 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욕구를 풀 여유가 없었을뿐더러, 여유가 있어도 그러지 않았다. 남의 몸이라 거부감도 들었고 도덕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과 달리 도덕이라곤 죄다 내버린 것 같은 모란은 달콤한 말로 살살 구슬렸다.
“아주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정말 좋을 거야.”
연은 모르겠지만 모란은 지금 꽤, 아니 꽤도 아니고 많이 동해 있는 상태였다. 아파서 울먹거리는 것도 좋지만 쾌감에 흐트러져 흐느끼는 모습은 더 좋았던 탓이다. 열심히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제 물건을 힐끔 바라봤다. 연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다시 모란의 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무의식중에 위험을 느낀 연은 서둘러 제 옷을 주섬주섬 갖추어 입었다. 모란은 굴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설득을 시도했다.
“그냥 입 맞추는 것보다도 방금 그게 좋지. 하지만 완전히 치료되려면 이 년은 더 넘게 시간이 걸릴걸.”
“더 시간이 걸린다고…….”
“그래. 하지만 조금 더 진도를 빼면…… 훨씬 덜 아프고, 시간도 덜 걸리고. 연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확실히 조금 전은 초반에 했던 것과는 달리 견딜 만한 고통이었다. 이보다 덜 아프고 기분이 더 좋으면 확실히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깐 고민하던 연이 퍼득 고개를 저었다. 자꾸 이렇게 모란이 하는 대로 넘어가기만 하다가는 넘겨서는 안 될 것을 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모란은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굴었다.
“물론 내 것이 좀 크기는 하고 넣을 때 아프기도 하겠지만 그런 아픔도 좋아질 정도로 잘해 줄 수 있거든. 찢어지거나 해서 네가 피 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내 약조하지.”
연은 잠시 이해가 되질 않아 멀뚱거리며 모란을 쳐다보았다. 모란의 물건 크기가 큰 것과 자신이 피를 보거나 아프게 되는 일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이런 것이었다.
‘어디에 넣는다는 건 아무래도 입에 넣는다는 거겠지. 그럼 성기를 입에 넣고 빨 때 입술이 찢어진다는 건가? 아니면 이로 깨물어서?’
깨물리는 상상을 하자 절로 인상이 써졌다. 하지만 아무리 물건이 크다 한들 입술이 찢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피를 보는데?”
“……응?”
“모란 당신…… 그것이 아무리 커도 입이 찢어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딱히 입에 넣어서 내 기분이 좋을 것 같지도 않아. 손가락을 넣을 때도 토할 것 같기만 하고 좋지는 않았어.”
모란이 드물게도 눈을 크게 뜨더니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슬그머니 바닥을 기더니 이내 연의 엉덩이에 닿았다. 연이 모란을 한번, 그의 다리 사이를 한번,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였다. 설마 저걸 내 엉덩이에 넣겠다는 건 아니겠지! 마치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모란이 태연하게 말했다.
“뭘 생각하든 그게 맞을 거야.”
“뭘 생각하든 그런 건 꿈도 꾸지 마! 무슨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연이 더듬거렸다. 어쩐지 아까 이상하게도 자꾸 거기를 만지더라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연이 서둘러 옷을 완전히 여미었다. 치료를 받고 나니 확실히 몸에 활기가 돌긴 하였으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제까지 한 것들도 다 괜찮지 않았어? 장담하건대 아주 기분이 좋을 거거든…….”
진지하게 설득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바람에 결국 모란의 얼굴로 베개가 날아왔다. 뭐어, 그래. 모란이 무릎 위로 떨어진 베개를 주워 들며 목덜미를 긁었다. 상대가 싫다는데 굳이 강제하거나 끈질기게 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굳이 급히 갈 이유도 없거니와, 뭐든 급히 가면 망하는 법이니.
그리 생각하면서도 모란은 연에게서 끝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갈증이 나고 허기가 졌다.
***
“형님?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넋을 놓고 있던 연이 정신을 차렸다. 문득 내려다보니 툭툭 따고 있던 꽃들은 어느새 손안에서 뭉개져 있는 상태였다. 어느새 꽃향기가 풀풀 나는 손을 질색하며 털었다. 오늘도 모란이 정원에 꽃을 피워 두고 간 탓이다.
한위가 얼른 나머지 꽃들을 마저 따 냈다. 그는 남궁가의 장로에게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연을 거드는 중이었다.
연은 그의 모습을 새삼 다시 살펴보았다. 소룡대회에서 우승한 후로 세가에서 한위에 대한 대접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이제 매일 남궁가의 장로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옷가지는 깨끗하였고 폐월당에도 하인과 시비가 배치된 덕에 깔끔하고 사람 사는 맛이 났다.
물론 영명은 매우 내키지 않아 했으나 세가는 영명의 의견으로만 돌아가는 곳이 아니었다. 장로들은 장차 세가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방치하는 걸 크게 반대하였다. 정작 한위가 방치될 때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이들이 소룡대회에서 우승하자 부당한 처사라고 하는 게 연은 웃기지도 않았다.
이제는 영명이 어찌하지 못할 테니 연은 한위를 괴롭히는 척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는 세가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았다. 동생이 한미할 때에는 괴롭히다가 소룡대회에서 우승하니 잘 보이려고 한다고들 하겠지.
그러나 연은 세가 사람들이 어찌 떠들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얼마 후면 자신과는 인연이 없어질 곳이 아니던가.
‘세가를 나갈 때 굳이 한위를 같이 데리고 나가지 않아도 되겠네.’
자신을 따라 나서는 것보다는 세가에 남아 있는 게 장차 한위의 장래에 좋을 것이었다. 소룡대회에서 우승한 이상 남궁세가는 전폭적으로 한위를 지지해 줄 터다. 연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그날 영명이 지었던 얼굴을 떠올리며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형님?”
한위가 걱정스럽게 다시 불렀을 때에야 연은 겨우 대꾸했다.
“아니, 아니다. 내 몸 상태는 괜찮아.”
그러고는 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은 넋이 나간 건 몸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오늘은 드물게도 상태가 좋았다. 다만 이렇게 몸이 좋아진 원인에 대해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란으로부터 치료를 받을 때마다 연의 몸 상태는 두드러지게 회복되었다. 치료를 받는 건 여전히 아팠지만 받고 나면 좀 덜 추웠고, 덜 숨이 찼으며 더 많이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받은 그 치료라는 것이 연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한위가 파 놓은 구덩이에 꽃을 던져 넣으며 연이 미간을 접었다.
‘진짜 그게 들어가나? 거기에? 정말? 어떻게 그걸 넣는다 치자, 하지만 어떻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거지? 무슨 수로?’
호기심이 일어 잠깐 상상해 본 연은 지레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모란이 해 준 그 행위들만 해도 연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혼자 자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그…… 넣는다는 것도 그렇다. 처음에는 상상도 못 한 행위를 제안하니 놀라 내쳤으나 시간이 지나자 연은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 할 때보다 치료가 덜 아프다고는 해도 여전히 큰 고통인 탓도 있었고 모란이 자신을 만져 주는 게 기분 좋았기 때문도 있었다. 모란의 언행에 질겁한 게 무색할 정도로 이성이 죄다 사라져서는…….
연은 쯧, 혀를 차고는 마지못해 제 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꽃잎 위로 흙을 덮었다.
‘모란과…….’
연이 흙을 한 더미 덮었다.
‘이렇고 저런 짓을…….’
흙을 팍팍 뿌렸다.
‘……하는 게 좋다, 젠장.’
그는 아예 흙더미 위에 발길질을 하다 문득 회의감이 들어 멈추었다. 어디 이런저런 짓 하는 것만 좋은가. 모란을 향한 연의 심기는 복잡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분명 상대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은데 그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단계도 넘었다. 자꾸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들 뭐가 대수냐는 생각만 떠오르는 것이다.
모란을 볼 때 뛰는 심장이 어릴 적 세가의 어느 시비를 향해 품었던 첫사랑의 느낌과 비슷했다. 비슷한데 달랐다. 왜 다르지? 그 시비는 여자고 모란은 남자여서 그런가? 아니면 그 시비와는 살짝 입을 맞추어 본 게 다라서? 그러나 이런 마음을 상담할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한위야, 너는 모란을 어떻게 생각하지?”
“음, 모란 형님은…….”
한위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그러고 보니 아공간이란 곳에서 훈련을 받느라 한위는 연보다도 더 모란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한위는 모란을 퍽 어려워하곤 했다.
“좋으신 분이에요. 그런데 무섭기도 하고요. 꼭 사람이 아니신 것 같거든요. 아공간 안에서는 더욱 그랬어요…….”
“그건 그렇지.”
최근 들어 연은 정말 모란이 이백오십 살을 넘게 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모란이 그 이상한 금색 눈을 하거나 세상 모든 일 겪어 본 이처럼 무료하게 굴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던 탓이다. 게다가 한 말은 꼭 지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백오십이면 어떻고 스물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게 연이 하는 고민을 없애 주지는 않았다.
‘사귀자고 할 때 그러마고 할 걸 그랬나?’
의식의 흐름대로 거기까지 생각한 연은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쳤군. 남궁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몸을 부르르 떨고는 다시 퍽퍽 감정을 담아 꽃잎 위에 쌓은 흙더미를 마구 짓밟았다. 한위가 눈을 굴리며 그런 연의 눈치를 보았다.
“연 도련님, 한위 도련님.”
부르는 소리에 연과 한위가 뒤를 돌아보았다. 종종거리며 다가온 하인이 정중하게 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가주님께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곧 가겠다고 전하거라.”
하인은 다시 종종거리며 사라졌다. 연이 신발 위에 올라간 약간의 흙을 툭툭 털어 내며 걸음을 옮기자 한위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영명이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이미 한번 공식적으로 한위의 편을 들어서인지 이제 연오는 거리낌 없이 한위를 곧잘 불러내곤 했다. 더 좋은 것은 소룡대회 이후로는 주강 대신 한위만을 데리고 나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주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주강은 이미 한위를 맡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그러니 단기간 내에 급격하게 상승한 한위의 실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 것이다. 실제로 소룡대회에서 돌아온 뒤 그는 한위와 대련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련 후의 주강의 반응은 불신하는 것도 아니었고 추궁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그는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눈으로 한위를 보곤 했다. 연은 그가 대체 한위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자신과 모란의 관계가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의문 한번 표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원래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내였기에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화월당이였다. 동백꽃이며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보며 연은 속으로 질색했다. 연오는 간만에 여유롭게 정원을 거니는 중이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고는 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점차 추위가 가시는 걸 보니 봄이 오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느냐, 한위야?”
아직까지 연오를 퍽 어려워하는 한위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위는 연오를 좋아하긴 하였으나 그게 편히 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기야 무려 열 살이나 차이가 나니 그럴 법도 하다고 연이 생각했다. 연오는 좀 섭섭한 모양이었지만.
“들어오거라.”
연오를 따라 화월당 안에 들어서니 시비들이 음식을 차렸다. 성장기이기도 하고 훈련을 받느라 식욕이 왕성한 한위 앞에는 특별히 작은 오리구이가 따로 하나 놓였다. 며칠에 한 번은 이리 불러 식사를 같이한 덕에 한위는 요즘 부쩍 살도 오르고 체격도 커지기 시작했다. 연오와 연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곤 했다.
“이리 셋이 식사를 하니 참으로 좋구나.”
진심으로 기쁜 얼굴로 연오가 입을 열었다. 그가 전부터 이런 자리를 바라 왔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걸 알기에, 연은 딱히 입맛이 돌지 않아도 연오와 함께 먹을 때는 평소보다는 부러 더 먹곤 하였다.
얼마간 식사가 이어진 뒤, 연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본론을 꺼내었다.
“오늘은 너희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려고 한다.”
“기쁜 소식 말입니까?”
“그래. 아직 구체적으로 날짜는 잡히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혼인식을 올릴 예정이다.”
이런 소식은 처음 접해 보는 한위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간은 세가에 살아도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어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반면 미리 짐작하고 있던 연은 연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형님.”
연오와 결혼하게 될 사람은 제갈세가의 여식 제갈금려로, 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약혼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연도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데 활기차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연오와 제갈금려는 사이도 좋아서 작년부터 정식으로 혼담이 오갔다고 들었다. 연오와 금려가 함께 지내며 꾸릴 새로운 남궁세가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연이 너도 이제 슬슬 혼인을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나이도 벌써 스물이니. 혹시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아직은 혼인할 생각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고 해야 하는데 연은 순간 걸리는 것이 있어 멈칫하고 말았다. 연오는 기민하게 그 찰나를 잡아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연이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저, 형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는 건 마음에 둔 사람은 있다는 거겠지. 그래, 어떤 사람이지?”
어떤 사람이냐면……. 제멋대로에 야만스럽고 도통 앞으로 이어질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사내다. 창연각 정도는 가볍게 털어 버릴 정도로 실력이 고강한 데다가 변태 같은 작자이기도 했다.
연오가 강력하게 반대하기를 바라며 연은 부러 단점을 골라 입에 올렸다.
“제멋대로인 데다가 저보다 나이도 많고…….”
이백오십 살이면 나이가 많다 못해 까마득하지 않던가. 모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연도 전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사에 성의가 없으며 사귀자는 말을 심심풀이처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보니 연오가 진지하게 듣는 중이었다. 연이 한숨을 쉬고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은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좋아하고 있다는 의미임을 모르는구나.”
연오가 그렇게 말하자 연의 가슴이 뜨끔했다.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는 논리인지라 그가 정색하며 극구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안 되는 건 또 어디에 있느냐? 이건 한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연이 너는 자유롭게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을 올리면 된다. 아버지나 장로들이 반대해도 내가 도와줄 테니.”
“하지만 형님은 정략결혼이라 하여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연의 물음에 연오가 빙그레 웃었다.
“당연히 나야 금려를 사랑하지. 금려도 나를 사랑하고. 정략결혼이여도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니?”
그렇지 않은 경우를 연오나 연이나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보세희는 가문의 강요로 영명과 혼인하여 연오를 낳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명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반면 연의 모친인 모용단리는……. 또다시 모친의 생각이 나려 해, 연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자는 절대 아닙니다.”
연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자? 말을 하고도 아차 싶었던 연은 제 몫의 음식을 한위의 앞에 슬그머니 밀어 주며 딴청을 피웠다. 다행히도 연오는 연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집중하느라 실수로 낸 호칭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연은 더 심란해진 마음으로 화정당에 돌아갔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기에 한위와는 중간에 헤어졌다. 터덜거리며 돌아오니 모란이 침상 위에 편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서책을 읽고 있기에 뭔가 하여 보니 춘화집이었다. 연은 한숨을 쉬며 시큰둥하게 모란을 지나 외출용 외투를 꺼내러 갔다. 눈썹을 슬쩍 움직이며 연의 반응을 살피던 모란이 김샌 얼굴로 말했다.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더니 춘화집을 내려 두며 바로 앉았다. 연이 외투를 입으며 모란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누구를 춘화집 한번 본 적 없는 샌님으로 알아? 그 몸으로 지낼 적에 몇 번 읽어 봤어.”
모란으로 지낼 적에 또래의 아이들은 돈을 모아서 춘화집을 사거나 빌려다 읽었다. 대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 명이 은밀하게 꺼내며 같이 보자고 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보긴 보았는데 연으로서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냥 누군지는 몰라도 그림 잘 그리는구나, 혹은 저런 자세도 가능하구나 정도였다.
“이건 그냥 춘화집이 아니야.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냥 춘화집이 아니라고? 모란이 다가와 연의 앞에 굳이 보란 듯이 서책을 펼쳐 보았다. 연이 제 눈을 의심했다. 춘화집에 있는 그림들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아니라 남남상열지사(男男相悅之詞)였던 것이다. 대체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는지…….
연이 짜증을 내며 책을 탁 치웠다. 내가 이런 저질스러운 사내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날이 저물었어. 빨리 나가자고.”
딱딱거리는 말에 모란은 그제야 느적거리며 연의 팔목을 잡았다. 순간이동을 할 때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듯한 감각은 몇 번을 해도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익숙한 거리가 눈에 보였다. 연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당연히도 환자의 집이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치료했었던 중풍 환자는 이제는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거동이 용이해졌다. 환자가 오른손과 왼손을 움직이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자 연은 언제 심란했냐는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누굴 좋아하건 말건 이 애매모호한 느낌이 다 무슨 소용이랴. 이렇게 사람들을 치료해 주며 살면 좋은 것을.’
이제는 연이 올 때면 아픈 환자가 집에 있는 사람들이 미리 나와 서성거리며 기다리기도 하였다. 밤에 아픈 환자는 대개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기 마련이라, 그들은 크게 반가워하며 연을 맞이하곤 했다.
그날 밤 연이 일곱 번째로 방문한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연을 맞이한 여자는 남편이 답답함을 호소하고 숨도 못 쉰 채 끙끙거린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저희 아버지도 이러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무서워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막 혼인한 젊은 부부였는지라 연과 비슷한 또래의 부인이 울먹였다. 부인과 비슷한 연배라면 가능성이 낮기는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심장병일 수도 있으니 연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진맥을 해 보니 다행히도 남편은 급체를 한 것일 뿐이었다. 연이 침을 놔 주자 그는 곧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에서 요란하게 토하는 소리를 들으며 연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놓인 꾸러미들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들은 약재상이었다.
혹시나 약재를 좀 살 수 있을까 하여 연은 일단 앉아 기다렸다. 모란을 힐끔 보니 환자들을 치료할 때면 항상 그렇듯이 추근거리는 일 없이 조용히 벽에 기대어 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나 체증이 심하던지 이대로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배탈에 좋다는 약초를 먹어도 소용이 없더군요.”
잠시 후 한바탕 게워 내서 편해진 얼굴로 약재 상인이 돌아왔다. 구토와 설사는 병증에 속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늘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탈수가 오고 이로운 것도 같이 빠져나가는 부작용이 있어서 그렇지, 몸에 해로운 것을 배출하려는 자연스러운 치유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혹시 괜찮다면 약재를 구입할 수 있겠습니까?”
연의 질문에 약재 상인은 반색을 했다.
“아, 물론이지요! 어떤 것들이 필요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특별히 질 좋은 약초들을 골라 드리겠습니다.”
연은 꼭 필요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약초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샀다. 상인은 고마워하며 연에게 다른 약초들도 더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어두운 안색으로 크게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글쎄, 요즘은 통 장사가 안 된답니다. 약초를 채집해도 사 갈 사람이 없어 쌓이기만 하지요. 제가 아는 약초상도 장사가 안 된다고 울상입니다. 환자가 생기지 않아서 그런 건지, 뭔지 의원님들이 약초를 사 주시질 않으니.”
연이 의아해했다. 환자는 본래 끝이 없는 존재였다. 아니, 끝을 본다는 게 불가능하다. 아무리 완벽하게 치유를 한다고 한들 어느 날은 또다시 다른 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입는 것이다. 감기에 걸리는 일이 없는 무인조차 싸우다가 왕왕 부상을 입지 않던가. 게다가 겨울철은 사계 중 가장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때였다.
조금 의아하긴 하였으나, 연은 우연의 일치려니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죽같이 소화가 잘 되는 것을 먹되 당분간은 떡이나 고기같이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은 피하도록 하십시오.”
“꼭 그리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의원님.”
젊은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니 벌써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이 근처에는 더 이상 환자가 없는 것 같았다. 연이 피곤한 미간을 눌렀다. 그래도 체력이 많이 늘어 예전에는 겨우 다섯 명 치료하던 것을 요즘은 많게는 열 명까지도 치료할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갈 거야?”
모란의 말에, 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밤에 돌아다니니 유독 피곤하고 힘들었다.
“이제는 주강 없이 한위만 데리고 낮에 나올 수 있으니 굳이 밤에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모란 당신도 순간이동으로 밤마다 나오기 성가실 거고.”
연의 말에 모란은 눈썹을 까닥거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반가워할 줄 알았더니 어째 딱히 찬성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낮에는 네 사부님인가가 있잖아. 게다가 낮에 활동하면 이목을 끌 테고, 그러다 보면 신원을 알아내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리고 딱히 이렇게 밤에 나오는 게 성가시거나 하진 않아.”
드물게도 모란은 연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없어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낮에는 사부님이 계시니 굳이 연까지 활동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이제 연은 제법 유명해져서 밤마다 그만을 기다리는 환자들도 꽤 되었다. 낮에는 일을 해야 해서 치료를 받을 틈이 없거나 아까처럼 급히 발병하곤 했으니.
볼일을 모두 마친 연은 모란과 함께 화정당으로 돌아왔다.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연은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약재상의 말을 떠올렸다. 별일 아니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잠들었다.
그러나 약재상의 말이 결코 대수롭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님을, 그는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
“형님, 의원님이 문을 열지 않으신 것 같아요.”
연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한위가 기웃거리며 굳게 닫힌 의원(醫院) 문을 살폈다.
연은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은록의 의원에 들러 진찰을 받은 뒤 탕약을 지었다. 모란이 치료를 해 주니 굳이 들를 필요는 없지만 사부를 뵙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비록 이제는 그저 의원과 환자의 사이일 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은록은 연에게 크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한 달에 한 번 있는 날이라 연은 한위를 데리고 진찰받으러 나왔다. 그러나 의원에 도착했을 때는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은록이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일 년에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의원을 열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곤란한 사정의 환자들을 매일같이 돌봤다.
혹시 의원을 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게 아닌가 싶어 연은 계속 의원 앞을 서성였다. 귀를 기울여 보아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연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자리에 황망하게 멈췄다. 은록과 십 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 십 년간 의원을 닫은 적은 한 손에 꼽았다.
“아니, 오늘도 열지 않으셨네.”
걱정스러운 말투를 듣자마자 연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의 마을 사람이었다. 그가 서둘러 다가가자 마을 사람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이 캐물었다.
“진은록 의원님이 문을 열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 글쎄요……. 아마도 거의 팔 일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공자님.”
대답을 듣자 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팔 일? 팔 일씩이나 의원을 비워 두다니, 은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사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 채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결코 그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무슨 일로 이리 자리를 비우셨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걸 알면 이렇게 걱정도 하지 않겠지요.”
마을 사람은 딱딱하게 굳은 연의 얼굴을 보자 악명을 떠올렸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얼른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연은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의원 문을 두들겨 보았다. 역시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한위가 중얼거렸다.
“대체 어딜 가셨을까요…….”
연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사부님이 대체 어딜 가셨을까. 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연처럼 은록을 기다리는 사람 몇몇이 들렀다 갔을 뿐이다. 은록은 인망이 높았기에 방문객들의 얼굴에는 연처럼 근심이 가득했다. 인망만 높다 뿐이랴, 이 근방에서 은록처럼 실력이 좋은 의원도 없었던지라 와서 발을 동동 구르다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고, 의원님……. 의원님이 계셔야 하는데.”
척 봐도 낯빛이 안 좋은 아이를 업고 온 여인이 끝내 눈물을 터트리는 걸 보며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낡고 더러운 행색을 보아, 멀리서 아이를 업고 며칠을 걸어온 모양이었다. 연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지금은 보는 시선이 없었다.
“의술을 아는 사람인데,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연이 말을 걸자 여인이 울음을 삼키며 다가와 얼른 포대기를 풀었다. 아이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척 봐도 몸이 부었고 제 모친의 등에 토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연은 눈꺼풀과 혀의 색을 확인해 본 뒤 맥을 짚었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열이 있는 것이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심한 증상으로 번질 것이 분명했다.
“관격증(關格證)이군요. 아이가 며칠 전부터 소변을 거의 못 보지 않았습니까?”
“네, 네. 그렇습니다. 그랬어요.”
척 봐도 돈이 없어 보였기에 연은 전낭에서 돈을 꺼내 여인에게 쥐여 주었다. 여인이 손을 떨며 돈을 받아 들었다.
“이리로 나가면 사거리에 약초방이 있습니다. 가서 대황, 망초, 감초를 달라 하십시오. 대황은 한 손으로 쥐어서 두 줌, 그리고 망초와 감초는 한 줌씩 물에 넣어 두 시간을 끓인 뒤 아이에게 먹이세요.”
연은 혹시 몰라 여인에게 자신이 말한 것을 다시 읊게 했다. 필사적이었던 탓인지 다행히 여인은 세 번 만에 연이 말한 것을 완벽하게 외웠다. 그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크게 절해 감사를 표하고는 서둘러 약방으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던 연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는 한참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사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몸은 괜찮으신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하여 연의 낯빛도 어두웠다. 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한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형님은 의술을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그러고 보면 한위는 벌써 연이 누군가를 치료하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다. 궁금할 법도 했다. 연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예전에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단다. 그때 치료해 주신 분이 계시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배우게 되었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한위가 조용히 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연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한위의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비밀로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형님이 세가 근처에 의원을 여시면 정말 좋을 텐데요.”
당연하지만 세가 근처에서 의원을 열 생각이 조금도 없기에 비밀로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연오가 세가를 잇기는 하겠지만 그게 과연 언제가 될까? 오 년? 십 년?
영명은 무인이고, 무인은 오래 사는 이들이었다. 연오는 이제 스물다섯이다. 그가 가주 자리를 물려받으려면 십몇 년은 더 있어야 할 테지. 연은 그때까지 영명을 참아 낼 수 없었다. 영명만이 아니다. 연오나 한위가 있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세가 자체가 연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
세가에 도착하자 한위는 남궁인 장로에게서 검술 지도를 받을 시간이었다. 연의 얼굴이 워낙 어두웠던 탓에 그는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 마지못해 헤어졌다.
연은 화정당으로 향하며 은록이 갈 만한 곳에 대해 떠올려 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먼 친척이 호북성 근처에 산다고는 들었지만 그 친척마저도 생판 남에 가까울 정도의 사이라고 들었다.
근심에 잠겨 터덜터덜 화정당에 돌아오자 모란이 창가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힐끔 보고는 침상에 걸터앉자 언제 잤냐는 듯 모란이 눈을 떴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연이 별 대꾸를 하지 않자 모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어느새 그 특별난 금빛 고리가 영근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만져도 본 다음에 의아한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닌데.”
연은 무거운 근심과 걱정으로 말문이 막혀 말도 없이 침상에 누웠다. 그러다 번뜩 생각나는 것이 있어 다시 벌떡 일어났다.
“지난번에 마법으로 사람 찾는 것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정확히 말해서는 마력 탐지지만……. 왜,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누군데? 만났던 사람이어야만 가능해.”
모란이 들어줄 것 같은 태도를 취하자 연이 망설이다가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은록이 절대 별말 없이 의원을 비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지나치게 오래간 비워져 있는 의원에 대해서.
흠, 하고는 모란이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연이 인내심 있게 기다리자 한참 만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이 근방에는 없다는 건 확실하네.”
“이 근방이라면 범위가 어디까지지?”
“저기 밖에 산 보이지? 저 산기슭부터 이 부근 시장 좀 넘어서?”
연은 낙담했다. 이 근방에 없다니 더더욱 걱정이 커졌던 것이다. 모란이 도로 누우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디 놀러라도 갔나 보지.”
“그럴 분이 아니야.”
“아니면 여기서 사는 게 지겨워서 갑자기 이사 갔을 수도 있고…….”
모란에게 성질 낼 기운도 없어 연이 다시 침상에 누웠다. 그러고는 벌떡 또 일어났다.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안절부절못하자 모란이 보지도 않고 팔을 뻗더니 가슴을 꾹 눌러 뉘였다.
“아, 거참. 나가서 찾아본다고 해서 그 양반이 나올 것 같아?”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만 심기가 퍽 좋지 않았던 연이 드디어 모란을 노려보았다.
“사부님에게 예의 차리는 게 거래 조건이었다는 거 안 잊었지?”
“아무리 이 근처를 돌아다녀도 그 대단하신 의원님은 나오지 않을 거랍니다, 연 공자님. 그 체력으로는 시장 너머나 산 너머만 가도 지쳐 쓰러질 거 잘 알지 않아?”
안 그래도 심란한데 비꼬는 소리까지 들으니 결국 짜증이 치솟고 말았다.
“찾으러 나가는 것 아냐. 며칠 동안이나 의원이 비워져 있었으니 환자들이 치료를 못 받고 있을 거 아니야.”
연은 아까 해지고 낡은 차림새로 아이를 업고 달려와 발을 동동 구르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은록의 의원에서 기다리던 그 잠깐 동안 온 환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간절하고 필사적이었다.
십 년이나 은록과 함께 일을 해 왔으니 연은 그들이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을지 훤했다. 은록이 치료해 줄 때마다 그들이 정말 감사하다며 주곤 했던 소소한 물품이나 푼돈은 일반 의원에서는 약초값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몇 끼 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식사요, 재산의 일부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은록 같은 자만이 유일한 구세주였다.
연이 면사포를 챙겨 들자 모란이 창밖으로 해가 쨍쨍한 하늘을 한번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도 모자란지 다시 한번 푹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 눈을 깜박였다.
“그 꼬마는 훈련받는 중이지? 주강을 데리고 나가기엔 곤란할 테니 데려다줄까?”
“……고마워.”
연은 사양 않고 모란의 팔을 잡았다. 이따금 짜증 난다거나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모란은 항상 연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이였다. 그는 진심으로 모란의 도움이 고마웠다. 감사 인사를 듣고도 모란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불퉁한 얼굴을 했다. 무어라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착실히 했던 말을 지켰다.
순간이동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연의 시야는 어둑하였다. 어느 건물 안에 들어온 건 분명한데 문이며 창문이 다 닫힌 까닭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이 더듬거리다가 크게 자빠질 뻔하자 모란이 팔을 잡아 똑바로 세웠다.
곧장 환한 빛 무리가 띄워졌다. 마법인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은 은록의 의원 안에 들어와 있었다.
혹시나 하여 연은 의원 안을 살펴보았으나 약간의 먼지가 쌓여 있을 뿐, 남겨진 서신이라든가 쪽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일단 면사포부터 썼다. 그리고 창문을 모두 열었다. 햇볕이 의원 안을 환하게 비추어도 모란은 빛 무리를 끄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 중이었다.
“왜? 뭐라도 있어?”
“……아니, 별건 아닌데. 그저께인가 날 찾는 녀석들이 있었거든. 갑자기 그게 떠오르네. 지금 와서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보기에는 곤란한 상황이라…….”
모란이 중얼거렸다. 모란을 찾는 사람들? 누굴까, 전에 맡았던 환자인가? 그러나 모란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연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으나 더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아 일단 의원 내부터 간단하게 청소했다. 오랜만에 의원에 들어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라, 연이 생각했다. 다시는 여기서 치료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연이 의원 문을 열자 곧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면사포를 쓴 낯선 의원의 모습에 반신반의했다가 익숙한 모란의 모습을 보고는 그러려니 여겼다. 더군다나 사람들 중 몇은 연을, 정확히 말하면 밤에 일하던 의원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연은 화타니 편작이니 하는 과장된 소문들이 떠올라 민망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밤마다 면사포를 쓰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원이라니 이상한 소문이 날 법도 했다. 면사포 때문에 난 소문이지만, 때문에 도리어 면사포를 쓴 게 다행이기도 했다.
연은 일단 하던 대로 몰려든 사람들 중 중한 환자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모란은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도와줄까? 대충 어떤 사람들을 고르는지 알 것 같은데.”
“도와주면 나야 좋지만…….”
이래도 되나 싶어 연이 말을 흐렸다. 모란은 사람들을 휙 훑어보더니 슬렁슬렁 몇몇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유독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을 기가 막힐 정도로 골라내기에 연은 내심 놀랐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그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하긴 이제까지 모란이 보여 준 별난 재주들을 떠올리면 그리 신기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모란에게 바깥 정리를 맡기고 안에 들어와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연이 은록의 의원에서 진료하는 것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닫혔던 의원을 열고 있으면 누구라도 사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하루 종일 환자들을 받았음에도, 끝끝내 은록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마침내 의원 문을 닫았다. 환자들 중에서도 아주 급한 불 정도를 대충 끈 것뿐인데 몹시 피곤하였다. 연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래도 전의 체력이었으면 이런 진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엎어져 간신히 숨만 가랑가랑 쉬고 있자 모란이 쯧쯧 혀를 차며 다가와 연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 주었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구는 행동에 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란이 연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내일도 이렇게는 못 할걸.”
연도 모란의 말에 동의했다. 도저히 내일 밖에 나와 또 진료를 볼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체력이라면 나중에 세가를 나가도 의원을 차리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환자를 치료해 주고 정작 자신은 쓰러져 앓아 버리는 의원이라니……. 그처럼 웃긴 꼴이 어디 있겠는가. 연은 새삼 모란이 해 주는 치료가 제게는 아주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렇고, 좀 이상해.”
모란이 살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걸 내버려 두며 연이 미간을 접었다.
“무어가 이상한데?”
“이상하게 전보다 진맥 짚는 것이 수월해진 것 같단 말이지.”
밤에만 나가 소수의 환자들만 보느라 긴가민가하였는데 오늘로 확실해졌다. 전에 비해 반절의 시간만 진맥을 하고도 더 정확히 진찰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의 의문에 모란이 답을 내주었다.
“몸이 예민해져서 그래.”
“몸이 예민해졌다고?”
“치료 때문에 뭐라고 할까……. 본원지기 따위를 감지하는 감도가 올라간 거지. 진찰해 보면 어쩐지 이 환자는 언제까지 살 수 있겠다 감이 오지 않던?”
연이 입을 조금 벌렸다. 모란의 말대로였다. 함부로 입에 담거나 재단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진맥하는 환자의 수명이 어느 정도겠다 감이 왔다. 그만큼 전보다 중한 환자 가려내는 것도 쉬워졌다.
연은 아까 모란이 매우 수월하게 중한 환자를 골라내던 걸 떠올렸다. 의원인 연보다도 그는 쉽게 그 일을 해치웠다.
“그러면 모란 당신은…… 항상 그런 걸, 봐?”
“딱히 보려고 보는 건 아니고, 뭐. 그냥 보면 보이지. 수명뿐만 아니라 그 외의 것들도 그래. 가령 어디가 병들었다든가, 혹은 사람을 얼마나 죽였다든가. 크게 쓸모는 없는 능력이야.”
모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연은 문득 자신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건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모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의원이면서 정작 스스로의 수명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다는 게 참 모순적이었다. 그저 모란의 치료가 끝나도 남처럼 오래 살지는 못하겠거니 할 뿐이다. 한번 소모된 본원지기는 결코 회복되는 일이 없었으니까.
모란은 기운을 많이 소진한 탓에 흐느적거리는 연을 챙겨 들고 화정당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못마땅해하며 혀를 쯧 찼다. 실은 오늘 찾아온 그 중환자들보다도 더 안 좋은 게 연의 상태다. 모란이 연의 근원을 수복하는 걸 당장 멈춘다면 그 중환자들보다도 오래 못 살 정도였다. 그런 몸으로 치료하겠다고 나서니…….
그러나 이제 와서 네 수명이 하루살이 같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저 모란이 몸소 챙기는 수밖에. 그는 연이 비척비척 침의로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약재상이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하였지.’
장사가 안 되는 약재상들, 사라진 진은록, 백모란을 찾는 사내들. 모란이 생각에 잠겨 턱을 문질렀다. 오늘 연이 의원을 열자마자 밀려든 사람들을 보아하니 약재상이 장사가 안 되는 건 환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바로 의원이 없어서일 터였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란이 생각에 잠긴 동안 연은 비틀거리며 침상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눕자마자 곧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모란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무심한 얼굴로 제 생기를 흘려 넣어 주었다. 임시방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서, 점차 연의 안색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모란의 입가에 미지근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잠자는 중이라 듣지 못하는 연에게 아까 못 다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사람 죽인 것도 알 수 있고 사람 살린 것 또한 알 수 있어.”
무릇 생명을 가진 것들은 인생에 두 번 크게 본원지기를 발한다. 생명이 끝장날 때와 생명이 다시 살아날 때……. 그때만큼 감정이 격할 때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죽이는 손과 사람을 살리는 손은 각각 달랐다. 상대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모란은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가 이불을 끌어당겨 연의 손을 완전히 덮어 주었다. 그의 눈에는 잘 보였다.
사람을 죽이는 자의 손에는 죽는 자의 흔적만이 남아 깨끗해 보이나,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자의 손에는 죽는 사람과 사는 사람 둘 모두의 흔적이 남아 얼룩덜룩한 것을 말이다.
***
연은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저께 다 못 돌본 환자들이……. 그리고 은록 사부님이…….”
“그냥 이거나 먹으며 누워 있으렴.”
“하지만 누워서만 지낸 지 이틀이나 지났다고! 이틀이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도 변해 버리는 게 병세야.”
모란이 연의 가슴을 눌러 다시 눕혔다. 그리고 뭐라 항의하려는 입에 말린 감을 밀어 넣고는 말로 연을 공격했다.
“하룻밤 사이에 변해 버리는 건 네 병세겠지.”
할 말이 없어진 연은 침상에 다시 구겨져 누웠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 내내 열을 내며 끙끙 앓았다. 전날 무리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열이 내리고 몸도 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피곤한 감이 있었다. 모란이 뺨을 긁적이고는 제안했다.
“정 답답하면 산책이라도 할래?”
“세가 밖에서?”
연의 질문에 모란이 짐짓 다독이는 척 다소 힘을 실어 이불을 퍽퍽 누르며 과도하게 상냥하고 다정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니, 여기 정원에서. 예쁘게 꽃도 피워 놨는데 모쪼록 연이 네가 방울꽃을 좋아해 줬으면 해. 아주 예쁘거든.”
어쩐지 좀 짜증이 난 것도 같았다. 연은 내심 좀 놀랐다. 언제나 능청맞을 것 같은 모란이 짜증을 부리다니…….평소에는 꽃이라면 과민하게 구는 환자가 아무런 대꾸 없이 문만 흘깃거리자 참다못한 모란은 결국 다정한 말투 따위는 집어치웠다.
“정말 어지간히도 말을 안 듣네. 맘 같아서는 엎어 놓고 엉덩이라도 때려 말을 듣게 만들어 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정원이나 산책할래.”
연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모란이 히죽 웃었다.
“좋은 선택이야.”
연은 한숨을 쉬며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정원은 벌써 희끄무레하게 초록빛이 돌고 있었다. 아직도 날은 쌀쌀했지만 봄이 오긴 오려는 모양이었다. 모란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햇빛이 잘 비추는 곳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연이 모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 연이 아픈 동안 내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끙끙 앓다가 눈을 뜨면 서늘한 손바닥이 이마를 덮고 있었다. 연은 그게 그냥 열을 재려는 것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제게 무엇을 해 주었기에 오늘에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며칠은 앓아누웠을 텐데.
‘건강해지고 싶어.’
습관처럼 소망하다가 문득 연이 의문을 가졌다. 자신이 이렇게 아프게 된 게 모란의 몸에 들어갔다 나와서라면, 자신은 왜 그 몸에 들어가게 된 걸까? 모란의 혼은 왜 몸에서 나가 다른 어느 세계를 떠돌다 오게 된 걸까? 분명 그 원인이 있을 터였다…….
‘모란에게 물으면 답을 해 줄까?’
미간을 접으며 고민하다가 연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한위가 주강의 곁에 있는 게 보였다. 주강이 그다지 살가운 편이 아닌데도 한위는 유독 그를 따랐다. 그가 거절하는 일 없이 잘 받아 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모란이 해를 쬐는 동안 연은 의자에 앉아 한위와 주강을 지켜보았다. 둘의 모습이……. 모습이 친근하여 마치…… 형제? 아니, 형제는 아니고. 형제라기엔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래, 마치 스승과 제자 같았다.
연이 한숨을 쉬고는 저도 모르게 근심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은록 사부님…….”
모란이 돌연 해바라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연에게 불퉁한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하여 연이 쳐다보니,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무 오지랖도 넓고 무르고 착한 것 같아.”
저게 대체 무슨 개소리…… 아니, 헛소리란 말인가. 백모란이 무르고 착하다니. 아직도 연은 초반에 모란이 자신에게서나 상인에게서 가차 없이 무언가를 뜯어 간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남에서 나뭇가지 부러트리듯 제 팔을 부러트린 것도. 이 나이에 웃긴 일이지만 궂은 날에는 부러졌던 팔이 쑤셨다.
“좋아, 잠깐 나가서 네 사부 좀 찾아보고 올게.”
“정말로……?”
모란의 말이 믿기지 않아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심장이 쾅쾅 뛰었다. 모란이 나서 준다면 금방 은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예상보다 빨리 소모되어서 구해야 할 재료도 있고, 주루에도 들러 봐야 하고.”
주루? 술을 마시러 간다는 이야기인가, 저건? 연은 모란이 세가에 없을 때는 무엇을 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좀 궁금하기는 하였다. 가까이 다가온 모란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윽박질렀다.
“단, 조건이 있어.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는 꼼짝 않고 저기 안에 누워 있어야 해. 꼼짝 않고, 아주 얌전히, 저 침대에, 누워 있는 거야. 의원 일도 좀 쉬고.”
연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이지 내가 누구 곁에 붙어서 간호 따위나 하는 건 이백오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일이거든. 그걸 헛수고로 만들었다가는 돌아와서 가만 안 놔둘 테다. 알겠지, 연아?”
연아, 하고 부를 때는 조금 소름이 돋았으나 아무튼 은록을 찾아봐 준다는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연이 드물게도 고분고분하게 고개만 끄덕이자 모란이 만족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섰다. 이만 안에 들어가 보라는 의미였다. 그는 굳이 연이 침소까지 들어가는 걸 보고 난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연은 침상에 누워 중얼거렸다.
“요즘따라 유달리 잘해 주는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모란과 내가 좀 친……하고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는 의미일까? 언제 제대로 된 친구를…… 둔 적이 있어야지. 아니, 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무튼.’
눕기는 하였으나 워낙 오래 자서 잠도 오지 않았다. 연은 한 시진 정도는 천장의 문양을 세다가 다음 한 시진은 서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무척 느릿느릿 흘러갔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 거의 문을 열 뻔하였으나 이내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리 갑갑하다 한들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원으로서의 제가 환자가 말 잘 듣고 회복 잘하기를 바라듯이 모란도 그러기를 바랐을 테니.
지루하게 자리를 지키던 연은 어느덧 깜박 잠이 들었다. 얕게 잠에 빠져들었다가 눈가에서 어른거리는 햇빛에 반짝 눈을 떴다. 어느덧 아침이었다. 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모란은 분명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라 하였다.
확실히 오래 침상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몸이 훨씬 개운하고 상태가 좋았다. 시비와 하인들은 드물게도 일찍 일어난 연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평상시에는 몸 상태가 별로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연은 다소 민망하였다.
연은 모란이 찾아와 사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주기를 바라며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정원에 꽃이 피어 있지 않았는데, 그게 어쩐지 다소 신경이 쓰였다.
‘모란이 어제 떠난 후로는 들르지 않았다는 의미지, 저건.’
정원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으나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도 모란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 타닥타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한위였다. 처음 만난 이래로 한위는 거의 매일같이 연에게 찾아오고는 했다.
연이 하늘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아침 해가 뜨다 못해 이제는 어느덧 오후였다. 그가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한위야, 오늘 점심 식사는 밖에서 하는 게 어떻겠니?”
“좋아요!”
언제나 그렇듯이 연의 제안에 한위는 눈에 띄게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세가에서만 산 세월이 워낙 길다 보니 외출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다.
‘분명히 주루에 간다고 하였지.’
한위를 데리고 대낮부터 주루에 가기는 좀 그랬지만…… 입구 정도까지만 가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고 연이 생각했다. 어차피 이 근방의 주루는 두 개가 고작이었다.
요즘따라 호위나 감시에 소홀해진 주강은 연이 한위를 데리고 나가는 걸 보고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연오가 자주 부르는지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잦았다. 최근 연의 몸 상태도 좋아졌겠다, 머지않아 연오가 주강을 귀찮은 임무로부터 해방시켜 줄 모양이었다.
연은 일단 한위를 객잔에 데려가 점심을 사 먹였다. 요즘 무척 식욕이 왕성한 한위는 소면 한 그릇 정도는 우습게 해치웠다. 연이 잠시간 한위의 체격을 가늠해 보았다. 이제는 정말 얼추 열다섯, 아니 열여섯 정도로는 보였다. 점차 앳된 티도 사라지고 있었다. 장로에게 듣기로는 무공의 성취도 또래에 비해 월등하다고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연은 제가 다 뿌듯해지곤 했다.
점심을 마친 뒤에는 주루가 위치한 거리로 향했다. 화려한 홍등을 내거는 밤과 달리 낮의 거리는 조용하였다. 한위는 신기한 얼굴로 화려하게 꾸며진 점포나 객잔들을 흘깃거렸다.
마침내 연의 걸음이 멈춘 곳은 가장 화려한 주루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하품을 하며 걸레질을 하고 있던 점소이가 얼굴에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죄송하지만 저희 주루는 해가 지고 난 뒤부터 영업을 한답니다. 지금은 기녀들이 모두 자고 있는 시간이라…….”
물론 연은 기녀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점소이의 말을 잘랐다.
“혹시 백모란이란 자가 이곳에 있지는 않나?”
그 질문에 점소이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는 다시 한번 둘을 살펴보더니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모란이 여기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안으로 달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기녀 한 명이 나왔다. 낮에도 화려한 옷과 화장으로 치장을 한 미인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처음 보는 한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이 미간을 접었다. 단순히 술꾼 하나 찾자는데 백모란의 이름을 대자 이곳 사람들의 반응이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저는 기녀 월령이라고 합니다. 모란 님을 찾으신다고요. 어떤 용건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용건이랄 것까지는 없고, 안에 백모란이 있다면 이제는 아침 해가 떴다고 전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알아서 나올 테니.”
연의 표정에 기녀는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태도를 취했다.
“저, 공자님.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모란 님께서는 낮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는답니다.”
낮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보통 모란은 낮이면 연과 같이 지내는 편이 아니었던가? 이해할 수 없던 연이 얼굴을 찌푸리자 기녀가 과하게 상냥한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기루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은 밤에만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말을 전해 드릴 수 없거니와 설령 전한다 해도 언짢아하실 겁니다.”
낮에는 뭐? 운우지락이 어쨌다고?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모란이 주루에서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는 잘 알겠다. 알겠는데……. 그걸 왜 사내인 제게 말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던 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백모란 이 작자, 분명 남자도 좋다고 하였지.’
오래간만에 성질이 올라 연이 잠시 미간을 짚었다.
“운우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부님을 찾아 준다더니 주루에서 운우지락이나 나누고 계셨겠다? 기녀가 다시 얄미울 만큼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공자의 성함을 여쭈어도 될는지요?”
그냥 이 자리에서 나가 버리고 싶은 마음에 갈등하다가 연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
“남궁연.”
기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 뜨여져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이건 또 무엇 하는 짓인가 싶어 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기녀가 깊이 몸을 숙였다. 남궁이라는 이름에 이러는가 싶었는데 들어 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제가 루주님의 귀인을 미처 몰라보고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현재 루주님께서는 오늘 아침부터 자리를 비우신 상태입니다.”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말하는 루주가 설마 백모란은 아니겠지 싶었던 것이다.
“설마 그 루주가 백모란을 말하는 건……?”
“그렇습니다.”
연이 잠시 어안이 벙벙하여 이 화려하고 거대한 주루를 살펴보았다. 모란은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하였기에 이런 호화스러운 주루의 루주씩이나 되어 있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연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모란은 예측 불가한 사내였다.
“모란이 돌아오면 세가에서 보자고 전해 주십시오.”
“꼭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기녀가 엎드려서 일어날 기색이 아니기에 얼른 루주를 나가려던 연은 잠깐 머뭇거렸다. 저녁부터 나갔다던 모란이 간 곳이 궁금했다.
“어딜 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정확한 말씀은 없으셨으나 잠시 산에 놀러 갔다 오겠다고는 하셨습니다.”
산……? 새벽부터 지금까지 산에 있다는 건, 사부님이 거기에 계신다는 의미일까? 연이 의문스러워하며 주루를 나섰다. 그리고 다시 주루를 돌아보았다. 금 열 냥을 이 정도까지 불려 놓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였다.
주루를 벗어나자 내내 입만 벌리고 있던 한위가 뒤늦게 감탄했다.
“정말 예쁜 분이었어요. 제가 본 중에 건물도 가장 멋졌구요.”
“주루가…… 대체로 그런 편이지.”
연은 한위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쳤다. 아까 기녀에게서 들은 운우지락이라는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불청객을 쫓기 위해 그냥 한 말일까, 아니면 정말 사실이었을까? 연은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백모란이 공자나 기녀와 운우지락을 나누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연은 마음이 다소 심란했다. 그는 그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고생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도 환자들이 많을 터, 보는 눈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면사포를 썼다. 연이 이런 차림을 하는 건 처음 보는 한위가 눈을 반짝거렸다.
“비밀 의원이 되시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 성가시게 되는 것은 싫거든. 자…….”
그가 가져온 다른 면사포를 한위에게 씌워 주었다. 소룡대회 이후로는 한위도 차츰 밖에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위가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자 연의 기분이 좀 풀렸다. 환자들을 치료하면 더욱 나아질 것 같았다.
의원으로 향하는 길에 연은 약재상을 들렀다. 약재를 사러 왔다고 하자 약재상은 매우 반가워했다. 연은 문득 지난번 치료했을 때 장사가 잘되지 않는다고 했던 약재상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요즘도 약재상이 장사가 안 됩니까?”
“예에, 그렇습니다. 어디 의원 분들이 사러 오셔야지 말입니다. 의원분들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아 요즘 뒤숭숭하더군요.”
연의 머릿속에 사라진 은록의 행방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환자가 줄어든 게 아니라 의원이 줄어든 것이라면 장사가 안 될 만도 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이 물었다.
“혹시 의원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글쎄,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젓던 약재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관아에서 의원들을 소환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혹시 전염병이라도 돌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다들 은근히 불안해하고 있지요.”
“관아…… 말입니까?”
의원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 국가에 귀속되어 활동하는 의원과 개인적으로 개업하여 활동하는 의원. 허나 그 어떤 의원이라도 재난이나 전염병이 돌 때에는 관아에 협력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부님은 관아를 싫어하시는데…….’
은록과 같이 지내는 동안 전염병이 돈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은록은 황가나 관아라면 질색을 하였다. 아무리 전염병이 돌아도 관아의 부름에 응한 적이 없었다. 관아에서도 그런 은록의 고집을 알고는 포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모란은 관아를 뒤져 볼 것이지, 왜 산을 뒤지고 있단 말인가?’
연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모든 건 모란이 돌아오면 알게 될 일이었다.
연이 한위를 데리고 막 은록의 의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농부 한 명이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낯을 한 농부가 연이 도착하자마자 매달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이고, 의원님! 혹시 그 화타의 후손이자 편작의 후계자이신 의원님이십니까? 제가 얼마나 의원님을 찾아다녔는데요!”
대체 저놈의 소문은 언제 사라질 작정인지! 몇 번을 들어도 민망하기 짝이 없어 연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화타의 후손도 아니고 편작의 후계자도 아니지만, 아무튼 의원은 맞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아니, 제 아들 녀석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지더니 발광을 하는 게 아닙니까. 도무지 데리고 올 수가 없는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간질 발작인가? 아니면 광증? 독초? 혹은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던 그 전염병? 어느 쪽이든 내버려 두면 위험한 증상들이기에 연이 급히 농부들을 따라갔다. 한위도 연의 곁에 바싹 붙었다.
“여기, 여기입니다! 의원님, 빨리 오십시오!”
숨을 헐떡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연이 농부들을 따라갔다. 한참을 걸으니 과연 논두렁에 어느 남자가 컥컥거리며 뒹굴고 있었다. 연신 땅을 내려치는 게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숨도 쉬기 어려워하는 것이, 덤빌 것 같지는 않지만…….’
연이 한위에게 눈짓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한위가 가장 셌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제압하거라.”
바짝 긴장한 얼굴로 한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의 곁에 바짝 붙었다. 연이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마치 마비가 온 것처럼 손을 이상하게 구부리고 있었다.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더 자세히 관찰을 하기 위해 연이 몸을 숙일 때였다. 남자가 휙 팔을 휘둘렀다.
“형님!”
얼른 한위가 연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남자는 공격하기 위해 팔을 휘두른 게 아니었다. 흰 가루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이게 무슨…….”
연이 얼른 코와 입을 소매로 막았으나 조금 마시자마자 급격하게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던 그의 눈에 한위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연을 피하게 하느라 흰 가루를 정통으로 맞은 한위는 벌써 정신을 잃고 맥없이 땅으로 쓰러진 상태였다.
겨우 고개를 돌리자 순박한 농부가 칼을 빼 들고 있었다. 경련하며 괴로워하는 환자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연에게 다가왔다. 연이 점차 동공이 풀려 가는 눈으로 애써 올려다보았다.
“이자는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는데.”
“무인도 아니고 그냥 샌님이잖아. 이제 곧 정신을 잃게 될 거야.”
“허리춤에 검이 있는데 샌님이라고?”
“뭐, 멋 부리는 용으로 들고 다녔나 보지. 생긴 걸 봐. 어디 검이나 휘두를 수 있겠어?”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연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며 바닥을 긁었다. 하지만 거친 흙만이 손아귀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가 가물거리는 시야를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남자 한 명이 한위를 가리켰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하지?”
“내버려 둬. 아직 어린애잖아.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의원이라고. 자, 어서 마차에 싣기나 하자. 난 두목에게 목 잘리기 싫거든.”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제게 뻗쳐 오는 손을 마지막으로 연의 의식은 완전히 훅 꺼지고 말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