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章 : 소룡대회
“그런 짓은 안 해!”
오늘도 모란과 함께 밤에 나가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뉘일 때였다.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막 모란에게서 말도 안 되는 해괴한 소리를 들은 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도 모란은 뻔뻔한 표정을 유지했다.
화정당에서 지내게 된 이래로 모란은 하루 종일 연의 곁에 붙어 다녔다. 질색을 하거나 짜증을 내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주치의라는 이름으로 탕약을 가져오는 것도 모란이었고 심지어는 식사할 때도 옆에 있었다. 식사할 때뿐이랴, 산책을 할 때나 책을 읽을 때조차 옆에 붙어 다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잊을 만하면 예상치 못한 곳에 꽃을 피워 연의 속을 박박 긁곤 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사방에서 꽃향기가 풀풀 날렸다.
그럼에도 모란과 함께 있는 것은 의외로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모란은 능글거리기는 했으나 의외로 수다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귀찮거나 성가시게 굴지도 않았다. 연이 서책을 읽다가 보면 그는 눈을 감고 오수를 즐기거나 손 위에서 무언지 모를 빛 몽우리를 튀기고는 했다. 마법이란 거겠지, 아마. 게다가 이상하게도 모란이 곁에 있으면 어쩐지 답답하던 가슴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리 사흘 정도 함께 지내며 언제쯤 치료해 주려나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차였다. 마침내 모란이 오늘 치료를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 왔다. 그런데 그 치료 방법이라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성적인 교합을 해야만 제대로 치료가 된다는 것이다. 의원인 연으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게 치료 방법이 될 수가 있단 말이야!”
“글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치료 방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라니까.”
모란이 슬그머니 설득하기 시작했다. 연은 어떻게든 저 말을 귀에 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저 사내에게는 사람을 어느 순간 홀딱 넘겨 버리는 간사한 말재간이 있었다.
“네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 뜸이나 침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만 성적 교합은 그중에서도 대침 같은 것이지. 제일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그 말에 연이 질색했다.
“그런 저질스러운 비유 쓰지 마!”
지난번부터 번번이 적절한 비유를 드는 데 실패한 모란이 뺨을 긁적거렸다. 그러다 연이 슬그머니 제 허리춤을 더듬어 검 손잡이를 찾으려는 걸 눈치챈 그는, 돌연 태도를 바르게 하여 앉았다. 연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리지(連理枝)라고 알아?”
연리지는 다른 뿌리에서 자란 나무가 점차 엉키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한 몸처럼 자라는 두 나무를 말했다. 흔히들 사랑이 지극한 연인들 사이를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모란은 처음에는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도 모를 때가 많더니만 이제는 그 어느 것도 모르는 일이 없었다.
“본디 태어날 때 성질이 다른 것들이 잔뿌리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몸통까지 엉키게 되지. 풀려 해도 풀리지 않고. 나무뿐만이 아니야. 무릇 살아 있는 생물들은 서로 마음이 가면 육체도 닿으려는 법이지. 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연이 인상을 썼다. 또 시작이었다. 모란이 말을 꺼내면 홀리게 되는 것의 시작. 이번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그가 단단히 다짐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육체적인 교합을 이루려는 게 단순히 후손을 가지기 위해서일까?”
그러나 결국 연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어 대꾸하고 말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모란은 씨익 웃더니 돌연 화제를 바꾸었다.
“근원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이 근원이란 것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아무튼 근원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을 느끼게 만들지. 희노애락(喜怒哀樂)이나 오욕칠정(五慾七情), 이 모든 것이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거든.”
그럼 근원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의미겠군. 그 생각을 하자 연은 불현듯 갑자기 지난 십 년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저 분노하거나 우울하기만 했던 자신이, 혹은 의술을 배우는 동안 그저 기쁘고 즐겁기만 했던 자신이. 마치 다른 감정은 없었던 것처럼…….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이 있다면 바로 애욕(愛慾)이야. 감정들 중 유일하게 다른 이유 없이 순수하게 상대만을 향하는 것이지. 애욕은 상대와 닿고 엮이고 싶게 만들어.”
그 말에 연은 과거의 생각에 잠기려다 벗어났다. 빙그레 웃고 있긴 하였어도 모란의 눈은 순간 번들거리는 빛으로 빛나는 듯했다.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서로의 근원이 근접하고 닿는다는 의미야. 이렇게 통하는 이들끼리 육체를 맞부딪치면 이 근원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하지.”
완전히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연은 어느 순간 또 집중하고 말았다. 모란의 말은 생경했으나 거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연으로서는 경험한 적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자였다. 그리고 분명 연이 감히 다다르지 못한 경지를 본 사람이었다.
“섞인다고는 해도 각각의 근원이 푸른색이나 붉은색이 섞여 자색이 되듯 하지는 않아. 아무리 섞여도 그저 청색과 홍색일 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연리지처럼 얽히는 거야.”
“얽힌다고?”
“그래. 이렇게 얽히다 보면 어느 순간 인연이 되지. 더 시간이 오래 지나고 관계가 공고해지면 이 인연이란 것은 각각 상대의 운명이 되어 버려. 결코 끊을 수가 없어. 이번 생애에서도, 그다음 생애에서도 만나게 되거든.”
홀린 듯 새로운 지식을 주워 담던 연이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래서 그게 그 말도 안 되는 치료법과 무슨 상관인데?”
모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줄줄 말을 이어 나갔다.
“성적인 교합은 말이지……. 크게 두 가지 장점이 있어. 애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마치 윤활액처럼 근원이 마찰 없이 잘 섞이게 도와줘.”
느낌 탓인가, 연은 어째서인지 모란의 말이 자꾸 저질스럽게만 들렸다.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첫 번째 말을 들으니 치료 방법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럼 두 번째 장점은?”
“간단해. 성적인 교합을 하면 혀든 손가락이든 무엇이든 몸속으로 쑤셔 넣게 되어 있으니까, 육체 속에 있는 혼을 건드리기에는 최적의 방법이지. 게다가 감정이 격렬해지면 혼도 요동을 쳐서 작업하기 쉬워지니.”
연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래서 지난번에 입을 맞춘 것이었나? 무엇이든 몸속에 쑤셔 넣는다는 말에 그의 귀가 잠시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 잠시간 떠올렸다. 며칠 전 모란과 입을 맞추던 때를, 거칠게 입 안을 탐하던 그……. 그가 고개를 퍼득 저었다. 정신을 바짝 차린 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전혀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입을 맞추는 정도로도 충분한 거 아냐?”
“되기는 하는데 충분하지는 않지. 교합이 백 중 백의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입맞춤은 백 중 십 정도밖에는 안 돼.”
연이 방어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 중 십 정도로만 해, 그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대비하였다. 모란이 끈질기게 자신을 설득하려 들거나 혹여나 힘으로 어찌할 경우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모란은 더는 연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순순하게 물러날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연은 어깨 힘이 빠졌다.
“……그걸로 끝이야?”
“그러면 어찌하게? 네가 싫다면 방법은 없어. 말했듯이 근원이 통해야 하지, 그렇지 않다면 더 해를 입힐 뿐이라서.”
연은 모란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상대의 동의가 없다면 효과 없는 치료법이란 이야기였다. 무언가 찜찜하였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문득 얼어붙었다. 지난번의 입맞춤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면 연도 내심으로 동의를 했단 말이 아닌가?
연은 혼자서 미미하게 희게 질렸다가 붉게 질렸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느라 그를 지켜보는 모란의 눈에 잠시 금빛 이채가 감돌며 희미한 미소가 걸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도련님.”
밖에서 하인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연이 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모란이 공식적으로 화정당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난 뒤라 편하기는 하였다. 모란이 방에 들어와 앉아 있어도 아무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들어오거라.”
연이 허락을 내어 주자 하인이 들어와 방에 고급스러운 자개함을 내려놓았다. 연은 그가 아뢰기도 전에 저 자개함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가주님께서 보내오신 것들입니다.”
정중하게 말하고는 하인이 다시 문을 닫고 물러났다. 연이 한숨을 쉬며 자개함을 열어 보았다. 자개함 안에는 말린 과일이며 육포, 혹은 몸에 좋다는 음식들이 죄다 들어 있었다. 연이 쓰러진 이후부터 연오는 꾸준히 연에게 이렇게 보양식들을 보내오곤 했는데 그게 벌써 구석에 쌓여 갈 지경이었다.
다시 자개함을 닫던 연의 얼굴이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연오가 과하게 보양식을 보내서가 아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한위에게 찾아가 봐야겠어.”
연은 보양식을 보자 나눠 줄 사람이 바로 생각났다. 바로 한위였다.
그날, 생일 연회 이후로 연은 단 한 번도 한위를 보지 못했다. 화정당 뒤뜰 정원으로 몰래 찾아오는 일도 없었고 형에게 괴롭힘을 받는 척 찾아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생일 연회 날 끝이 너무 안 좋았기에 연은 한위가 걱정이 되었다. 나가서 찾아보고는 싶었으나 연회가 끝난 뒤 며칠 동안 꼼짝없이 드러누워 앓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지내려고.”
바닥에 편히 드러누운 모란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이 외투를 걸치자 그가 한숨을 쉬고는 마지못해 일어나 따랐다.
밖으로 나가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주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모란에게 좀 더 오래 머물렀다. 연은 제 사부인 은록에게서도 비슷한 시선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 전과 달리 모란이 남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남에게 무관심한 주강이라면 몰라도, 사부님이라면 그냥 넘어가시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모란은 사부님과 사이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능청스럽게 별 이상 없다고 대답하기만 하니. 정말로 별 이상이 없는 게 맞나? 그럴 수가 없을 텐데. 미간을 접으며 생각에 잠기는데 주강이 무례하지는 않지만 단호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도련님, 어딜 가십니까? 날이 추우니 밖에 있지 말라는 소가주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말이 당부지, 아마 명령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연오의 과보호는 말 그대로 과보호였으니까.
연은 몇 년 전―혹은 더해서 십 년― 여름철 더위에 쓰러졌던 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셋이나 되는 사람들이 교대까지 해 가며 제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오의 명령이라서 물러가라 해도 물러가지도 않았다. 얼마나 민망한 경험이었던지 그는 그 후부터는 어지간해서는 더위에는 쓰러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한위를 만나러 갈 것이다.”
연은 주강이 그래도 자신을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간 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옆으로 비켜 주기까지 했다. 그간 주강이 한위와 제법 말을 나누곤 했던 걸 떠올린 연이 납득했다. 좀 친해질 법도 하지. 영명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어서 그렇지, 본디 한위는 제법 사교성이 좋은 편이었다.
연은 처음에 한위의 늙은 유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유모는 일을 하러 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한위도 마찬가지였다. 연은 그제야 자신이 한위가 정말로 머무는 곳이 어딘지는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늙은 유모가 있는 곳은 말 그대로 하인들이 지내는 숙소였다. 한위가 자주 놀러 오기에 착각을 했을 뿐이다. 연이 주강에게 물었다.
“주강, 한위가 지내는 곳이 혹시 어디인지 아나?”
“폐월당(閉月堂)인 줄로 압니다.”
남궁세가는 넓었다. 그냥 넓은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일단 직계들이 각각 지내는 곳의 수부터가 꽤 된다. 연이 머무는 화정당, 연오의 화월당, 영명이 지내는 창일당처럼 수도 없이 많은 전각과 누각들이 있었다.
뿐이랴, 세가의 열두 장로들과 그 식솔들 또한 세가 내에서 살았다. 거기에 방계에 무사들과 시비, 하인들까지 지내려면 많은 부지와 건물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았어도 연이 모르는 장소도 아직까지 많았다. 폐월당도 마찬가지로 처음 들어 본다.
“폐월당은 어디에 있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쩐지 주강은 평소보다 좀 적극적인 것도 같았다. 연을 대하는 태도도 좀 더 유연해진 것도 같고……. 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처음으로 주강에게 사적인 대화를 걸어 보았다.
“한위와는 요즘 친해 보이던데.”
주강이 말없이 연을 바라보았다. 빈말이 아니었다. 한위가 화정당에 놀러 올 때면 주강은 이따금 한위만 쳐다볼 때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구박받느라 눈치 빠른 한위도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언제부터인가는 화정당에 놀러 오는 날이면 주강 옆에 붙어 있는 일이 잦아졌다.
놀라운 건 주강도 한위가 달라붙는 걸 그저 받아 준다는 것이다. 초반에 한위를 하도 차게 바라보기에 싫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정이 든 모양인지. 주강이 한위의 편이 되어 준다면 괜찮겠지.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주강은 드물게도 연의 말에 대꾸를 해 주었다.
“제 조카아이를 닮았습니다.”
외동이 아니었단 말인가? 연은 그게 더 놀라웠다. 주강은 한시도 세가를 떠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족이 없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군, 하고 대답한 연이 멈춰 섰다. 폐월당에 당도한 탓이었다. 충격을 받은 연은 그만 그 자리에서 굳었다. 모란이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데.”
건물 자체는 화정당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분위기가 스산하여 한기가 돌았다. 정원은 정원이라고 할 수 없을 잡초 밭이었다. 한 번도 치우는 이가 없었는지 나뭇잎 무더기가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외관이 이러니 안이라고 좋은 꼴일 것 같지는 않았다. 연은 잠깐 이를 악물었다가 걸음을 옮겼다.
“한위야.”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은 더했다. 바닥이 완전히 얼음장 같았다. 게다가 변변찮은 가구조차 없어서 옷이 구석에 구겨져 널려 있었다. 옷뿐이랴, 이런저런 잡동사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연이 한위에게 선물했던 것들도 있었다. 개중 검 손질 도구 정도만 소중하게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 정도니 청소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불을 들춰 보았다가 먼지가 풀풀 날려 연이 기침을 하자 모란이 강아지 덜미 채듯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이거 놔!”
짜증을 내도 히죽 웃은 모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방 밖으로 끌어냈다. 밖으로 나와 보니 햇빛에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모란이 연을 완전히 먼지의 영향권에서 빼내며 지껄였다.
“이래 봬도 내가 도련님 주치의라서 말이야.”
연은 정말이지…… 의원인 자신 앞에서 주치의 행세를 하는 사내를 만나게 되리라곤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딱히 모란에게 좋은 대접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남 있는 자리에서 이래도 되나 싶어 연이 흘깃 주강을 보았다. 다행히 주강은 말없이 방 안을 살피고 있느라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듯했다.
연은 폐월당 다른 곳도 두루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한위는 없었다. 아니, 마치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다. 그나마 생활감이 남아 있는 방 하나를 제외하면 죄다 낡고 허름해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제 자식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영명은 왜 이리 한위를 싫어하는 것일까?
겨우 방 좀 뒤지고 다녔다고 체력이 떨어진 연이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주강이 집을 한 바퀴 둘러보는 동안 연이 모란을 슬그머니 건드렸다.
“누구 찾아낼 수 있는 마법은 없어?”
팔짱을 끼고 기대서 나뭇잎이 굴러다니는 걸 지켜보다 모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신기해 보여도 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그런가…….”
연이 중얼거렸다. 하긴 무술을 펼치는 데 있어서 내공이 필요한 것처럼, 마법도 무한정 펼칠 수 있는 건 아닐 터였다. 당연히 그 기술에도 한계가 있겠지.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모란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내가 못 한다는 건 아니고.”
연이 휙 고개를 돌렸다. 모란이 빙글빙글 웃었다. 연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 자신을 놀려 먹는 일에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마력 탐지라는 게 있거든.”
“당신 이야기는 안 들을 거야.”
모란이 저쪽 세계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연은 짜증이 났다. 듣고 싶지 않은데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듣다 보면 어느새 홀딱 넘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모란은 들은 척 만 척 말을 이었다.
“마력 탐지란 게 뭐냐 하면 자신의 기운을 사방에 넓게 펼쳐서 주위에 뭐가 있나 알아보는 거야. 남궁세가 정도의 넓이라면 사람 하나 찾아내는 건 빠르지. 해 줄까?”
“꺼져!”
“귀엽기는.”
“꺼지라니까!”
연이 딱딱거려도 모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먼 산을 살펴보듯 주위를 휘휘 보더니만 그가 어느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담장 너머 어느 부분이었다.
“저기 있네.”
저기 있다고는 해도 연의 눈에는 담장만 보일 뿐이었다. 약을 올리는 건가 싶어서 다시 모란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낼 때였다. 다박거리는 작은 발걸음이 들리더니 익숙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위였다. 그런데 완전히 기가 죽어서 터덜터덜 돌아오는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한위는 폐월당에 와 있던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송골매를 본 새끼 짐승처럼 놀라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냅다 도망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연이 쫓아 달려가려고 하는 걸 모란이 탁 막았다. 연은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주강이 기다렸다는 듯이 매처럼 몸을 날린 것이다. 한위는 얼마 안 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주강의 손아귀에 덜미를 채여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연은 한위의 표정보다도 다른 것에 더 놀라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
드물게도 한위는 대꾸하지 않고 도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멍 자국은 이미 모두에게 보인 뒤였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몸 여기저기에 쓸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셋 모두 바로 이것이 폭행의 흔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 모두 때리거나 맞는 것에 익히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연은 정확히 무언지는 몰라도 이 일이 영명과 관계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직감이 들었다. 지난번 연오의 생일 연회 때 영명의 분노를 생각한다면 그럴 법도 했다. 연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한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들은 일단 한위를 폐월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최대한 먼지가 없는 방에 한위를 앉혀 두고 연이 상태를 살폈다. 멍이 들고 조금 쓸리고 까지기는 하였으나 심각한 상처는 없었다. 내버려 두면 자연히 나을 만한 상처였다.
하지만 옷 위에 남은 선명한 발자국을 보니 연의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누가 때렸을까? 짐작 가는 대상이 너무 많았다. 한위는 죄를 짓기라도 한 얼굴로 머리를 수그렸다.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위야.”
부르고는 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런 상처를 입었을 때의 기분을 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 아니, 아플 때도 있지만 처음으로 맞았을 때에는 수치심이 가장 먼저 들기 마련이었다. 아픈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친 자존심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존심은 으레, 형편없이 굴복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주위 사람에게 보여 줄 때 가장 크게 다쳤다.
연은 모란일 적 두들겨 맞고 돌아오면 모란의 모친이 슬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은록이 가끔 말없이 상처를 치료하곤 하던 것도 떠올랐다. 그건……. 저도 모르게 모란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업자득이었지.
할 말을 찾지 못한 연이 어색하게 한위의 등을 도닥였다. 그러고 있는데 모란과 주강이 빤히 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뭐냐는 의미로 인상을 써 보이자 주강이 바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모란은 흐음, 하고 턱을 괴고 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지 않으려고 연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어쩐지 눈으로 빙그레 웃는 듯하더니 모란이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척 봐도 누구에게 맞고 돌아온 거네. 누가 때리던?”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던지는 질문에 연이 뜨악했다. 저렇게 대놓고 맞고 돌아왔다고 말할 줄이야! 뜨악한 질문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한동안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가서 팔다리 좀 분질러 주고 올 수 있는데.”
우울한 건 어디 갔냐는 듯 한위도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연은 갑자기 모란이 손쉽게 제 팔을 분지르던 날이 떠올라 움찔했다가 자존심이 상해 얼른 마음을 가라앉혔다. 놀라운 건 주강도 모란의 말에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연이 이를 꽉 악물었다. 이 생각도 없는 자들…….
“그러고 나서 뒷감당은 어쩌려고? 당장 누구에게 보복이 갈지 생각은 해 봤어? 하려거든 그 싹을 뿌리부터 제대로 치워 버려야…….”
말하던 중 자신을 바라보는 한위의 표정이 어떠한가를 깨달은 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무릇 무림인이라면 은원을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한위는 여려 마음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성장 환경을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하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얼굴로 한참을 꿈지럭거리더니 한위가 입을 열었다.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제가 잘하지 못해서…… 이래요.”
“무얼 잘하지 못했는데?”
다시 한참을 꾸물꾸물하더니 한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술 훈련이요.”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검술? 대체 무슨 검술? 한위에게 글이나 말조차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걸 연은 잘 안다. 그나마 연이 만날 때마다 가르쳐서 겨우 또래처럼 말이 제대로 트이고 글도 깨우치고 있는 한위였다. 재능이 뛰어날 게 분명한데도 검술을 가르치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던 게 바로 엊그제였다.
“검술이라니, 대체 누가 네게 검술을 가르쳤단 말이야?”
“그게…… 연오 형님 생일 연회 날, 가주님이…….”
반쯤 울먹이며 이어지는 한위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생일 연회, 연이 돌연 피를 토하는 바람에 연오나 연이나 정신이 없던 때였다. 뜻밖에도 남궁영명이 폐월당을 찾아왔다. 그날 연회의 일 때문에 가뜩이나 정황이 없던 한위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그에게 영명은 말했다.
-너에게는 내 아들 자격이 없다.
울먹이며 발치에 엎드린 한위를 싸늘한 시선으로 본 영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몸에 더러운 피가 흐르는구나. 하지만 동시에 남궁세가의 자랑스러운 피도 흐르지. 내게는 통탄스러운 일이다.
한위는 그저 조용히 흐느껴 울 따름이었다. 그는 한 번도 영명을 원망한 적은 없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위에게 있어 가족은 흔히 말하는 가족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영명이나, 혹은 그 외의 형제자매들은 멀게만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연오는 어릴 적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 다르지만 연은 크게 아프고 난 뒤부터는 차갑고 쌀쌀맞은 형이라 말 한번 제대로 붙여 보질 못했다. 누님들은 일찍이 출가하여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었다.
그 먼 가족들 중에서도 영명은 까마득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냐고, 말해 주면 기꺼이 고치겠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위는 영명이 흘리는 기운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였다.
-하지만 딱 한 번 내 아들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영명이 그리 말했을 때 한위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았다. 마음속에서 희망이란 것이 반짝거리며 자랐다.
-얼마 후에 안휘성에서 무술 대회가 열린다. 네 또래 녀석들이 참가하는 소규모의 대회지. 그 대회에서 세 번의 승리를 거두면 앞으로는 내 아들로 인정하겠다.
한위는 영명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술 대회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기회에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인정받은 후에는 영명을 가주님 대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몰래 숨어서 연을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영명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세 번의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영명의 말이 칼날처럼 서늘하게 한위의 명치에 박혀 들어왔다.
-네 이름에서 남궁이라는 성씨를 빼앗을 것이다. 너는 더는 남궁가의 혈통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것이고, 그 벙어리 늙은이도 더는 곁에 있을 수 없게 되겠지.
한위에게는 날벼락 같은 통보였다.
그 후 영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는 말까지 마치고 나서 한위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가주님께서는, 검술 훈련을 해 줄 스승을 차, 찾아가라 하셨는데……. 제가 모자라서 가르침을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연은 머리가 다 아찔해져 왔다. 이번에 안휘성에서 열리는 무술 대회라 하면 하나밖에 없었다. 소룡대회. 말 그대로 작은 용들, 열여섯이 되지 않은 나이의 어린 무인들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말이 소룡대회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전국 각지의 후기지수나 고명한 고수들의 어린 제자들이 어른 못지않은 결투를 벌이는 것이다.
보통 이 대회에서 무림의 차기 봉황이니 용이니 정해지곤 했다. 연오가 바로 이 대회에서 무려 세 번이나 제일소룡이 된 적이 있었다.
이제 겨우 세가의 내공심법을 아는 수준인 한위가 세 번이나 승리할 만한 대회가 절대 아니다. 영명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한위를 남궁세가의 족보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위만 순진하여 모를 뿐이지.
그러나 이 잔인함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은 영명이 자신의 모친에게도 그리 잔인하게 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끝끝내 제 모친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었지. 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한위의 몸에 남은 흔적은 그 검술 스승이란 자가 해 놓은 것임이 틀림없었다.
“네게 검술을 가르치는 자의 이름이 무엇이지?”
한위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나, 남궁…사영이라 하셨습니다. 세, 세가의 열두 장로 중 한 분이시라고…….”
연도 익히 아는 자였다. 남궁영명의 최측근이자 세가의 귀한 비급이 보관되어 있는 창연각(敞延閣)의 경비를 맡고 있는 호법장로였다. 그만큼 무공이 대단한 자다. 그러나 인성이 대단하지는 못했다. 타고나기를 졸렬하며 비겁한 작자였다.
연은 재빨리 한위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폈다. 검술 훈련을 한다고 하기에는 목검 하나 허리춤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 무인이라면 가장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 한시도 몸에서 병장기를 떨어트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연이 알기로 한위에게는 목검조차 없었다.
“설마 오늘 그리 맞은 이유가 검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더냐?”
어지간히 서러웠는지 한위가 말없이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하여 물었던 연이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한위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한때 모란을 괴롭힐 적에 잘하던 게 트집 잡아 괴롭히기라 혹시나 하여 물었더니 역시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준 적도 없는 검을 핑계로 어린아이를 저렇게 괴롭히다니 어디 나이깨나 먹은 무인이 할 짓인가?
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다시 남궁연이 된 후로부터는 나름 한위를 신경 쓰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어린 형제에게 무관심하게 군 지난 십 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안한 것은 둘째 치고 일단은 소룡대회 문제가 시급했다. 남궁이라는 성씨를 쓰지 못하게 한다는 건 앞으로 한위가 남궁가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의 대우를 어찌 감히 비호라고 하겠냐마는, 아무리 그래도 명목상의 보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마음 같아서는 나라도 검술을 가르쳐 주고 싶다만…….”
연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이런 쪽에서는 한위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위보다도 체력이 떨어지는 데다가 무공의 성취도 높지 않았다. 뜻밖에도 주강이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가 한위 도련님의 검술 훈련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연이 놀라 주강을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나서서 가르치겠다 하는 게 놀라웠다. 실력이야 의심할 부분이 없었다. 주강은 고수 중의 고수였다. 이따금 주강의 검술을 볼 수 있을 때가 있었는데 실로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고마워, 주강.”
“딱히 고마움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제법 싸늘한 얼굴로 주강이 딱 잘라 말했다. 한위는 제대로 검술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연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주강이 도와준다니 훨씬 나아지기야 하겠지만……. 그가 알기로 대회까지는 고작 삼 주 정도 남아 있었다.
삼 주라니! 대회 참가자들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손에 검을 쥐고 다니던 무가의 자식들이다. 그에 비해 한위에게는 변변찮은 검조차 없었다.
“일단은…… 검부터 사러 가야겠다.”
“정…말이요?”
검까지 얻게 된다는 말에 이제는 한위의 얼굴이 맑게 개었다. 맑게 개다 못해 신나서 그 자리에서 팔짝거리며 뛰었다. 연이 보기에 한위는 주강이 검술을 가르쳐 주고 그가 검을 사 준다고 하니 이제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정을 아는 연은 한위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아닌 것을…….
한위가 앞서서 시장으로 향하는 걸 뒤따르며 연이 한숨을 쉬자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대회란 것이 뭔데?”
“소룡대회라고 있어. 구대문파 오대세가의 유망한 어린 후기지수들과 제자들이 참가하지. 종종 사파에서도 참가하기도 하고.”
“전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군?”
모란이 아무렇지 않게 지적했다. 연은 잠깐 침묵하다 마지못해 인정했다. 무공의 성취가 높지 않다 하여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죄다 고수들이었던 탓에 보는 눈은 제법 있었다.
“어쨌든 노력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연은 벌써부터 한위가 남궁한위가 아니게 되었을 때를 가정해 보고 있었다. 세가에서 쫓아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쫓아내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아예 들이지를 않았겠지. 남궁영명의 자식이 어디 다섯뿐이던가? 연이 얼핏 들어 아는 자식들만 세 명이 더 있었다. 연을 포함하여 연오와 두 누이는 모두 모친의 신분이 확실하였기에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한위는 왜? 모친의 출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위를 아끼는 것도 아니고. 이번 일도 그렇다. 마치 순전히 한위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 이런 제안을 한 것 같았다. 왜 그리 한위를 싫어하면서 세가에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기야 영명 그자가 어떤 비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모란이 말을 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대회 참가자들 수준이 어떠한데?”
“글쎄……. 꽤 대단한 편이지. 보통 참가자들은 열두 살 미만과 열두 살 이상으로 갈려. 열두 살 미만은 고만고만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면 말이 달라지지. 형님 같은 경우에는 열다섯에 이미 세가의 무사들 여럿을 상대로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추셨으니.”
“흐음. 세가의 무사들 수준이라…….”
모란이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묘안이 있나 하여 바라보았다가 연이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 한들 뭘 어찌한단 말인가. 모란의 묘안이 연의 묘안이 되는 게 아닌데.
사실 연은 최근 들어 모란이 퍽 신경 쓰이는 중이었다. 물론 자신처럼 특별한 경우를 겪은 사람이고, 하루 종일 곁에 있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종종…… 모란을 보면서 가슴이 들찌근해지는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왜 자꾸 모란에게 곤란한 상황에 대한 답을 구하고 의지하게 되는지.
‘모란이 내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다.’
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환자가 의원을 지나치게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그는 왕왕 봐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고, 상한 몸을 치료하여 고통을 없애 주니 호감과 신뢰가 가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마침 그가 가고자 하는 점포에 당도하여 연은 얼른 번잡한 생각을 털어 버리며 한위와 함께 들어섰다. 온갖 무기들을 총망라하여 팔고 수리하는 곳이기에 점포 안에는 무인들이 몇 있었다. 한위는 진검을 보며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그러나 한위에게 진검은 일러도 아주 한참 일렀다. 연은 목검이 진열된 자리에 이르렀다.
목검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하여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무가의 자식들도 처음부터 진검을 잡지는 않는다. 보통 가벼운 목검에서 시작하여 검과 비슷할 정도로 무거운 목검으로 차츰 옮겨 간다. 그런 식으로 검을 잡는 방식, 대하는 태도를 오랜 시간에 거쳐 깨우치게 되어 진검을 잡게 될 때는 더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렇기에 남궁세가같이 잘나가는 무가의 자식들은 목검조차 결코 허투루 고르지 않았다.
‘기본적인 체력은 있으니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어야겠는데.’
손에 쥐이는 감촉과 무게감, 그리고 한위의 신장 등을 고려하여 연은 목검 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잡이에 붉은 가죽 끈이 감긴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는 목검 하나를 더 골랐는데,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둘 모두를 사서, 왜 두 개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한위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주강에게 배울 때나 대회에 나갈 때는 이 좋은 목검을 쓰고, 남궁사영 앞에서는 이걸 쓰거라. 좋은 목검을 썼다가는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까.”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위가 소중하게 목검을 받아 들었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연은 좋지 않았던 심기가 누그러졌다. 그제야 한위가 배가 고프겠지 싶은 생각이 들어 객잔에 가자 할 때였다. 돌연 한위가 연의 앞에 크게 절하며 엎드렸다.
“한위야!”
놀라서 얼른 일으키자 한위는 굳건한 얼굴로 연을 응시했다. 이제 그는 처음 만나던 날의 어눌했던 발음은 찾아볼 길 없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비록 가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못해 더는 남궁한위가 되지 못하여도, 형님의 아우가 되지 못하여도……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연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받은 충격이 크기 때문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일단 자리를 옮겼다. 한위는 객잔으로 향하는 동안 내내 연의 얼굴을 살폈다. 객잔에 가 앉은 뒤에도 연은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려 잠시간은 한위를 보지 못했다. 음식이 나온 뒤에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형님, 제가…… 주제넘은 말을 하였나요? 화가 나셨나요?”
불안해하며 한위가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작은 탄식 뒤에 입을 열었다.
“한위야. 오히려 나는 네게 사과를 해야 한다.”
한위가 놀란 얼굴로 퍼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연은 말을 이었다.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전에 나는 네게 관심이 없었단다. 네가 궁핍하게 지내는 것을 은연중에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였지. 형이란 자가 아우가 당하는 부당함과 불의를 방치하였으니 나는 비겁한 사람이다.”
연은 모란의 몸에 들어가기 전을 떠올렸다. 그때라고 한위가 그렇게 지내는지 아예 몰랐을까? 아니다, 알고 있었다. 한위가 하고 있는 초라한 행색과, 가족들이 함께하는 자리에 항상 없던 그의 빈자리의 의미를 그라고 몰랐겠는가. 몸이 너무 힘들고 지쳐 신경 쓸 기력이 없다는 이유로 줄곧 외면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한위는 저가 다 억울한 표정으로 큰 소리를 냈다. 어찌나 그 기세가 강력하던지 상대가 연이라도 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쥐고는 한위가 항변했다.
“아주 어릴 적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종종 저와 함께 놀아 주셨지요. ……그때 모란 형님도 연오 형님도 같이 즐겁게 놀아 주셨어요. 아프신 후로는 밖에 잘 나올 수 없으셨던 것뿐임을 알아요.”
연이 눈을 깜박였다. 한위가 아주 어릴 적에…… 모란과 연오 형님, 그리고 그가 함께 놀아 주었다고? 대체 언제? 연오 형님이 함께 놀아 주었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저 자신이 기억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모란과 자신이 함께 놀아 주었다는 건 도무지…….
한위가 너무 어렸던 탓에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연은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은 별생각 없이 소면을 후루룩 먹는 중이었다. 꿀꺽 소면을 삼킨 뒤에 눈을 굴리던 그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물었다.
“아, 그 코흘리개가 네 녀석이었구나.”
“코, 코흘리개 아니었어요.”
“맞다니까.”
“아닌데…….”
모란이 한위를 놀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이 없다. 그저 모란이 한위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으나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품 안을 더듬으며 전낭이며 중요한 물건들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그런데도 꼭 어딘가 중요한 물건을 두고 온 것 같았다.
모란이 그런 연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이 모란을 한번 째릿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선언했다.
“아무튼 대회에서 세 번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걱정하지 마렴. 네가 남궁한위가 아니게 되면, 나 역시 남궁이라는 성씨를 버릴 테니까.”
“네?!”
한위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건 한위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서서 호위를 하고 있던 주강도 빤히 쳐다보았고 모란 역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항상 계획하고 있던 걸 말로 꺼내니 연은 오히려 마음이 약간 후련했다. 한위가 크게 당황했다.
“저, 저 때문에 그러실 것까진 없어요!”
“딱히 너 때문이 아니다. 원래부터 세가를 떠나 살기로 했던 것. 그 일을 좀 더 빨리 한다 해도 상관은 없겠지.”
연은 한위가 남궁한위가 아니게 될 때 그 자신도 남궁이라는 성씨를 버릴 작정을 했다. 그저 계획하고 있던 가출…… 아니, 독립을 몇 달 더 일찍 당기는 것뿐이다.
그는 남궁세가에 거의 미련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미련은 연오와 한위 정도였다. 연오야 세가에서 잘 지낼 테니, 한위를 데리고 가면 딱 맞을 것이라 연은 생각했다.
작은 의원을 차려 한위와 함께 사는 삶이라…….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연의 행복한 상상을 모란이 젓가락을 내려 두면서 시큰둥하게 툭 건드려 깨트렸다.
“치료는 어쩌고?”
아차, 그렇지. 치료가 있었군. 그럼 좀 더 나중에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모란이 툭 던졌다.
“성씨를 버리기까지 한다는 건 세가 근처에서 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먼 곳으로 갈 거 아냐?”
잠시 생각해 보다가 연이 수긍했다. 일단 남궁이라는 성씨를 버리기로 결정한 이상 이 근처에서 살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렇네. 굳이 댁과 같이 가서 살 수도 없으니 그럼 좀 나중에 떠나야겠군.”
연의 말에 모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다소 음험한 빛으로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그렇지. 굳이…… 나와 같이 가서 살 수는 없을 테니까.”
왜 저런 오묘한 말투로 말하는지 연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상하게만 여겼다. 모란은 먹던 소면을 마저 국물까지 마신 뒤에 그릇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 두면서 상쾌하게 말했다.
“그러려거든 내후년 봄이나 돼야겠는걸! 완치하려면 못해도 두 해는 잡아야 하니 말이야.”
모란의 말에 연이 놀랐다. 두 해? 이 년이란 말인가? 이 년이면 내년 봄에 세가를 나가고자 한 계획은 불가능했다. 설마 이 년이나 걸리는 게 그 망측한 치료법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인가?
연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모란이 그의 앞으로 따끈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만두를 밀어 주었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번엔 매콤하게 양념을 한 두부조림도 앞에 놓았다.
“좀 먹어. 아까부터 한 입도 먹지 않았잖아.”
“입맛이 없어.”
모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연의 개인 접시 위에 만두와 두부를 얹어 주었다. 제멋대로인 행동에 연이 인상을 쓰자 만두를 하나 더 얹었다.
“무릇 환자는 많이 먹어서 체력을 길러 두는 거야. 특히, 힘든 치료를 앞두고는 더욱 그래야지…….”
연이 움찔했다. 저건…… 앞으로 치료가 힘들 거라는 예고 같은 건가? 그러나 모란의 말이 틀릴 것은 없었다. 아프면 입맛이 없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먹어야 한다. 의원이라 더욱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마지못해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모란이 묘하게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래, 그렇다니까! 그래서 지금 주장(珠江 : 주강) 동부 지역이 완전히 난리가 났다고. 남궁세가에서 토벌하려다가 실패까지 했다지 않아.”
남궁세가라는 단어에 연의 관심은 자연히 뒤로 쏠렸다. 흘깃 보니 다쳤는지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무인이 보였다. 팔뚝에 묶은 청색 고리 매듭을 보아하니 남궁세가에서 지원을 받는 상회의 표국 무사인 듯하였다.
“동부 지역 근처에 얼마나 녹림과 수적(水賊)들이 기승을 부렸어? 소문으로는 남궁영명이 직접 나서서 소탕하려고 나섰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던데.”
실패하고 돌아왔다니, 그래서 영명의 안색이 그리도 안 좋았나? 어쩌면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겠다. 그 높은 자존심에 남 앞에서는 보이기 싫었겠지. 그나저나 안휘성 근처에서 대놓고 남궁영명의 실패를 떠들어 대다니 배짱 한번 두둑했다.
“그런데 말이야, 최근에 그 지역에 고수가 한 명 나타났다더군. 어찌나 기술이 신묘한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데, 현상금이 걸린 도적 녀석들만 잡아 족친다는 거야.”
“그렇다면 현상금을 노리는 고수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관아에서도 애 좀 먹고 있다고 하니까 현상금이 어마어마하거든. 덕분에 주강(珠江) 녹림십오채(綠林十五寨) 두목 왕장호가 벌에 쏘인 황소처럼 날뛰고 있다고. 이 팔도 지난번 수송 때 왕장호에게 당한 거야. 간신히 살아 나왔다구!”
“이 사람, 허풍은. 그 태산일도양단(太山一刀兩斷) 왕장호 아닌가? 자네가 그 작자에게 당했다면 팔만 부러졌겠어? 몸이 두 동강이 났겠지.”
동행인이 핀잔을 주자 허풍은 허풍이었는지 무사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왕장호가 날뛴다는 이야기는 허풍이 아닐 것이다. 대개 세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연이었지만 주강 동부지역 소탕 이야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다. 한동안 세가의 무사나 장로들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었지.
‘상회에서 어지간히 받았나 보지? 영명 그 작자가 직접 나서다니.’
그럼에도 실패했으니 어지간히 속이 쓰렸을 것이다. 하기야 왕장호는 결코 우습게 볼 인간이 아니었다. 소문으로는 사파 중에서도 마교 소속의 잘나가던 고수라고 들었다. 그러나 힘을 추구하여 어지간한 수단은 허용하는 마교에서조차 내칠 정도로 그 손속이 비열하고 잔인하다고 하였다. 민간인은 물론이고 상회의 피해도 극심하다더니 결국 남궁세가에서도 나선 모양이다.
“태산일도양단? 산을 한 번에 가를 수 있을 만한 실력자라는 건가?”
무림에서 별칭은 보통 과장된 바가 많았다. 그것을 모르는지 모란이 의아해하기에 연이 가르쳐 주었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살다 와 이따금 상식을 모르는 티를 낼 때가 있었다.
“진짜 태산을 쪼갤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과장한 거야. 별칭이니까. 전뇌검(電雷劍)이니 일보만리(一步萬里)니 하는 사람들이 진짜 번개처럼 빠르고 한 걸음에 만리를 가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겠어?”
“아, 그런 건가. 난 또. 하긴 정말 한 번에 산을 쪼갤 수 있었다면 도적 떼 두목이나 하진 않았겠지. 한 번에 산 쪼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모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의 개인 접시에 만두를 하나 더 얹었다. 연이 접시 위의 만두를 노려보다가 젓가락으로 깨작거렸다. 말투가 어째, 한 번에 쪼개는 건 어려워도 여러 번이면 산 같은 건 충분히 쪼갤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착각일까?
“그만 얹어!”
연이 살짝 짜증을 내고 나서야 모란은 음식 얹어 주기를 그만두었다. 평소보다 과식을 한 상태라서 그런지, 한위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연은 심기가 다소 언짢았다. 그러나 세가로 돌아오고 나자 알 수 있었다. 이건 과식 때문이라기보다는 한위에 대한 걱정과 영명을 향한 증오 때문임이 확실했다.
“형님, 전 이만 가 볼게요!”
세가로 돌아오자 한위가 꾸벅 다시 인사를 했다. 주강은 연을 한번 보고는 모란이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한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마냥 해맑기만 한 한위를 보니 연은 근심 걱정부터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한위가 대회에서 세 번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여차하면 한위와 함께 세가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가장 좋은 방안은 한위가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세가에서 쫓겨나듯 나가는 것과 당당하게 인정을 받고 나가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주강과 한위를 보낸 뒤 고민에 빠져 화정당에 들어서다 말고 연이 휘청거렸다. 현기증이 심해 이마를 짚자 어느새 다가온 모란이 가볍게 한 팔로 몸을 감아 부축해 주었다. 그러더니 돌아가지 않고 연과 함께 침실까지 들어오는 것이다.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이자 연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연은 순간 놀랐다. 언제 모란이 이렇게나 컸지? 거의 주강과 비슷한 것 같았고, 체격도 훨씬 탄탄해졌다. 모란의 시선이 날카롭게 연의 몸을 살폈다.
“지금 몸 별로 안 좋지?”
“……왜, 치료하려고?”
몸 상태가 별로라는 걸 간접적으로 인정하며 연이 침상에 앉았다. 몸에 한기가 돌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따스한 온기가 필요했으나 시비가 두고 간 탕파를 끌어안아도 그다지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치료해야지. 그러기로 했으니까.”
모란이 옆에 앉자 연이 당황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왜 또 자신을 저런 그윽한 시선으로 보는지……. 성적 교합이 어쩌고 했던 게 떠올라 조금 더 뒤로 몸을 물렸다.
“좀 아프기는 하지만 한번 치료하고 나면 훨씬 몸이 낫게 될 거야. 더 건강하고, 더 기분도 좋아지겠지. 더 보기 좋아질 테고.”
“꼭 내가…… 순수하게 건강해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말하네.”
모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픈 사람 보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당연한 거 아닌가? 난 네가 몸이 안 좋아서 끙끙 앓는 모습은 보기 싫다. 신경 쓰이거든.”
더는 뒤로 물러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연이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그간 간신히 잊으려고 애를 썼는데, 또다시 모란과 입을 맞추던 순간이 떠오른 탓이다.
“연이 넌 그냥도 보기 좋지만 건강해지면 더욱 그럴 거야.”
이상하게 다정하게 들리는 투로 말하며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모란이 이렇게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연은 당혹스러웠다.
“어서. 식사 잘해서 기운 있을 때 해치워 버려야지.”
그제야 연은 덜컥 겁이 들었다. 지난번 입맞춤이 잊히지 않은 건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만이 아니다. 그 뒤에 이어진 고통이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는데도 모란은 잠자코 기다려 주기만 했다.
“지…난번처럼…… 그렇게 아플까?”
가능한 한 겁을 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말았다. 모란은 난감한 얼굴로 뺨을 슬쩍 긁적였다.
“조금쯤은 덜 아플 거야.”
그만한 고통에 조금 덜 아프다고 해서 그다지 위안은 되지 않았다. 마침내 연이 용기를 내어 모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차가운 손과는 달리 뜨끈하고 단단한 손바닥이 잡혔다. 씩 웃으며 손을 마주잡은 모란이 슬그머니 검지와 중지로 손바닥 안을 긁자 연이 숨을 집어삼켰다.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단단히 잡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게 더 허용해 주면 그만큼 덜 아프고 기분도 좋을 수 있어.”
“뭘, 허용해 달라는 건데?”
“더 만지게 해 달라는 거야. 입이나 손 따위 말고, 이 안쪽 말이지.”
금방이라도 만질 듯 모란의 손끝이 연의 옷자락을 들쳤다가 물러났다.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또 모란이 간교하게 그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고민할 것도 없어. 사실 난 모르겠네. 왜 고민하는 거지? 내가 만져서 네가 기분이 좋고 덜 아프게 되면 좋은 거 아닌가? 어차피 우리끼리만 아는 일일 텐데.”
말도 안 되는 이유였으나 놀랍게도 연은 그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모란의 말마따나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를 텐데 뭐 어쩌랴 싶었다. 그만큼 연은 고통을 겪는 것이 싫고 넌더리가 났다.
“그냥 안마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 기분 좋은 안마지. 지난번 혀를 섞었을 때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잖아.”
노골적인 말투에 정신이 든 연이 펄쩍 뛰었다.
“혀를 섞다니!”
“그럼 침을 나누었다고 할까.”
모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연은 속으로 모란의 직설적인 화법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가도…… 결국에는 부정을 하지 못했다.
고통은 둘째 치고서도 지난번 입맞춤은 기분 나쁘진 않았던 것이다. 피 비린내가 가득해서 그렇지.
그래도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모란에게 이 이상을 허용해 주는 건 선을 넘는 기분이 들었다.
넘어 버리면 연의 인생을 바꾸어 버릴 만한 그런 선…….
“입맞춤이나 손으로 만지는 이상은 안 돼.”
또 그 끔찍한 고통을 참을 각오를 하고 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란은 더는 설득하거나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시작하기 전에 동의를 받을 것이 있는데.”
“동의?”
“치료를 하는 동안에는 가능한 가만히 있는 게 좋아. 혹시나 심하게 날뛸 경우에는 묶어도 되겠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은 다시 용기가 수그러들고 말았다. 묶을 정도로 아프단 말이야……? 빌어먹을, 그냥, 그냥 조금쯤은 더 허용해 준다고 할걸 그랬나? 닥쳐올 고통을 상상한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조용히 심호흡도 했다.
가까이 다가온 모란이 연을 밀어 눕혔다. 영락없이 아래에 깔린 모양으로 침상에 누운 연의 심장이 쾅쾅 뛰었다. 이상하고 낯선 구도였다. 모란이 평소처럼 능청맞게 히죽거리기나 하면 좀 낫겠는데, 지금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어 더욱 그랬다. 모란이 움직이자 옷자락이 스치며 사박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모란은 지난번처럼 연의 얼굴을 만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긴장으로 차게 식은 뺨을 감싸 오자 연은 귀밑 아래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이 신경 쓰였다.
‘거긴…… 급소인데…….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모란의 무얼 믿고 이런 걸 하게 내버려 두는 건지 다시 한번 의구심이 들었으나 일단은 인내하기로 했다.
모란의 손은 목덜미를 느리게 쓸고 내려와 가슴 위에 올라왔다. 쾅쾅 뛰는 심장이 느껴졌는지 모란이 손끝으로 다독였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옷자락을 헤치며 그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연이 짧게 숨을 쉬었다.
“긴장했어? 오늘은 지난번보다 더 길 테니 각오해 두는 게 좋을걸.”
그렇게 말하고는 모란이 옷자락 속에 손을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살살 어루만지다가 중지와 검지가 가슴 정 가운데를 꾹 눌렀다.
“아까보다 맥이 더 빨리 뛰는데.”
그렇게 말하는데 어쩐지 말투가 묘한 것이다.
뭐지, 이거……?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연이 이불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조롱당하는 것도 같고 불쾌한 것도 같은데 어쩐지 야릇한 기분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건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의원이라면 응당 환자의 불안감을 최대한 해소해 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란은 어쩐지 연의 불안감을 더 부추기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쉬이…….”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는 연의 팔목을 잡아 누르다시피 하며 모란이 입술을 내리눌렀다. 지난번에는 피를 토해 정신이라도 없었지, 멀쩡한 정신에 이 짓을 하려니 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모란은 굳게 다물린 입술 위를 혀로 느리게 핥고는 속삭였다.
“연아, 입 벌려야지. 입맞춤 이상은 하지 않겠다 하지 않았어.”
숨이 턱 막혀서 연이 조금 헐떡였다. 돌연 지난번 꿈이 떠올랐다. 모란이 턱을 잡아 누르자 엉겁결에 그가 입술을 열었다. 또 지난번처럼 혀부터 들어오려나 긴장하는데 아니었다. 모란이 벌려진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가슴 위를 느리게 손으로 문질렀다. 어느 순간 그의 눈에 익숙한 금빛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그 눈에 홀린 사이 모란이 깊게 입을 맞추었다.
뜨끈한 열기를 담은 혀가 입술을 문지르며 쑥 밀려올 적에 연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모란은 처음에는 혀끝과 혀끝을 문질러 대더니 입천장을 느리게 건드렸다. 그러고는 혀 아래 연한 살을 파고들다가 입 안이 가득 차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이 밀어 넣었다.
혀가 들락거리자 음습하고 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연은 가쁘게 숨을 쉬었다. 그저 입맞춤일 뿐인데도 참으로 음탕하고 야했다.
그래, 그랬다. 정말이지 음탕하고 야한 입맞춤이다.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이러니 그 이상의 것은 얼마나 더할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싹오싹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고 했지. 얼마나 기분이 좋기에?’
가슴 위를 헤매이던 모란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유두를 슥 건드렸다. 실수인가 하였는데 손가락 사이로 집어 문지르는 게 아닌가.
연이 손을 들었다가 밀어 내지는 않고 옷자락을 붙들었다. 손톱 끝으로 살살 긁히자 등골에 오싹하는 느낌이 번졌다.
다음 순간 연이 헉, 하는 소리를 냈다. 닥쳐 오는 격통에 저도 모르게 퍼득이는 것을 모란이 찍어 눌렀다.
지난번보다 덜 아플 거라고 했는데 연은 전혀 그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다. 거의 똑같이, 끔찍하게 아팠다. 누군가 제 몸 안에 벌겋게 타오르는 숯을 하나 던져 넣은 뒤 여기저기 굴려 대는 것 같았다.
“으, 흐으……. 으읍!”
연의 비명은 모란의 입에 막혀 신음 소리로 흘러나왔다. 연은 처음에는 참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참을 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고개를 저으며 밀어 내려고 했으나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만 쉬었다가 하면 안 되겠냐는 소리 역시 모란의 입과 혀에 막혀서 나오질 않았다. 어느 순간 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눈가에서는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이런.”
연이 하도 심하게 버둥거리니 혀를 짤막하게 찬 모란이 한쪽 손을 뻗었다. 침대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허리끈이 날아와 연의 손목에 뱀처럼 휘감겼다.
“아, 흑……. 잠, 잠시, 그만……. 그만해…….”
모란은 급히 오르내리는 연의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그가 우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모란이 보기에 그는 제법 잘 참는 편이었다.
모란이 손을 움직이자 더한 고통이 찾아왔는지 창백하게 질린 채 연이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젖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낫기 때문에 모란은 가타부타 말없이 연의 혼을 꽉 잡아 쥐었다.
지난번 제 기운을 이용해 작살처럼 꿰어 둔 혼은 아직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모란은 비슷한 것을 하나 더 박아 넣었다. 그게 연에게 가해진 첫 번째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가 아니었다. 혼을 꿰어 두는 건, 집을 건축하는 것에 비유하자면 대들보를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부러 연을 달래지 않았다. 극한 감정을 느껴야 작업이 더 수월해지는 탓이다. 연이 불안감과 고통에 몸부림치게 내버려 둔 뒤 그는 자세히 혼을 살폈다. 이제 다시는 둘로 나눠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는 다음 과정으로 나아갔다. 갈라진 부분들을 꿰매어 더는 안에서 본원지기가 새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모란이 제 근원과 본원지기를 조금 뽑아내었다. 사실 조금이라기에는 양이 많았는데, 잘 뽑아지지가 않아 우악스럽게 뜯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잘 가다듬고 녹여 갈라진 틈새 사이로 밀어 넣으니 아래에서 악 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이 다시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사실 근원은 아무리 나뉘어졌다고는 해도 동일한 것들이니 한 그릇에 두면 언젠가는 원래대로 돌아오긴 한다. 연의 혼도 마찬가지로 십여 년을 그리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원래대로 다시 섞여 붙을 터다. 현재 워낙 상태가 심각해 자연스럽게 붙기도 전에 죽어 버리는 것이 먼저라서 그렇지.
그러니 남은 방법은 연의 본원지기가 모두 새어 나가기 전에 다른 재료로 메꾸고 꿰매어 내는 것뿐이었다. 이 경우에 다른 재료란 모란의 근원이요, 생명이었다.
모란의 근원은 하도 거대하고 튼튼하여 조금쯤 뜯어낸다고 큰일 나는 수준은 아니었다. 커다란 이불 끄트머리에서 실오라기 좀 잘라 내는 수준이라 솜이 새어 나갈 일도 없다. 같이 딸려가는 기억 역시 쓸모없는 것이다. 연의 혼을 수복하기 위해 필요한 양은 그에게 있어서는 수명 십몇 년 정도를 나눠 주는 것에 불과했다. 이제껏 이백오십여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는 그 이상을 살 것이기 때문에 십몇 년 정도는 우습다. 다만 좀 신경 쓰이는 게 있기는 했다.
‘이렇게 내 근원을 섞어 버리면 인연도 완전히 엮여 버리는 것인데.’
그러나 파리하게 질려서 입술을 깨물고 울고 있는 연을 내려다보자 이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인연이 엮인들 무슨 문제겠는가. 그저 앞으로 일평생 보는 일이 남들보다 더 잦아지는 것일 텐데.
게다가 모란은 드물게도 연이 퍽 마음에 들었다. 혼이 그 지경이 되어 성격이 날카롭고 예민하긴 하였어도 기본적으로 연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란은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자신이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땀을 뜯어내는 모란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보다는 덜하겠지만 그도 만만찮은 고통을 느끼는 중이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바닥을 기고 난리를 쳤을 만한 고통이었으나 모란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이런 작업이라 나웨가 그리 난리를 쳤었군.’
나웨는 그가 전에 머무르던 세계에서 알고 지내던 반인반룡으로, 다 죽어 가는 연인을 위해 수명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한 달분 나눠 주고 아프다고 질질 짜고, 또 한 달분 나눠 주고 질질 짜곤 했었지. 그 고통이 이해는 간다. 물론 모란이 질질 짜는 일은 없을 테지만.
‘어지간히 좋아했나 보군. 이런 짓을 일 년이나 했던 걸 보니.’
다시 제 근원 한 뼘을 박박 뜯어내 밀어 넣어 주며 모란이 생각했다. 나웨는 수명을 나눠 주고 나면 밤에 벌벌 떨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울었지만 모란은 그럭저럭 참을 만한 고통이라 여겼다. 정작 연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만 하얗게 질린 채 숨만 헐떡이는 중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항상 넘쳐 나는 제 본원지기를 콸콸 쏟아 부었다.
이 이상은 무리일 듯하여 잡고 있던 혼을 놔 주었더니 고통 때문에 잔뜩 힘이 들어가 긴장하고 있던 몸이 축 처졌다. 아파서 그런지 성질나고 서러운 기색이 땀과 눈물로 젖은 얼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다…… 했어?”
“그래. 오늘분은 다 했어.”
가만가만 눈물로 젖은 뺨을 소매로 닦아 주려 하자 연이 고개를 돌려 피했다. 티는 안 내려고 하지만 모란의 눈에는 그가 울먹울먹 울음을 참고 있는 게 다 보였다.
이런, 느릿느릿 결박을 풀어 주면서 모란이 생각했다. 우는 모습이 퍽 귀엽지 않은가. 더 울리고 싶은 욕망이 슬그머니 모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파서 우는 것도 괜찮았지만 다르게 우는 것도 볼만하겠다. 제 근원을 뜯어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모란이 손목을 묶었던 걸 풀어 줬다. 어찌나 몸부림을 쳤던지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자연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교합한 게 언제였더라. 자리에서 일어나 연이 갈아입을 만한 옷을 찾으며 그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만족할 만한 정사는 자그마치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아무리 모란이 깨우침을 얻은 존재라 해도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고한 경지에 오른 신들 또한 오욕칠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아직 육신에 매여 있는 그라고 별수 있겠는가. 그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정사를 떠올리면서 슬쩍 입맛을 다셨다. 매질을 당하면서도 신음 소리를 퍽 음탕하게 낼 줄 아는 자였다.
하지만 채찍질이나 매질 따위도 상대의 맷집이 있어야 흥이 나는 법이다. 더군다나 연에게는 그런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이 좋겠지. 모란은 상대를 괴롭히는 것도 좋아했으나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즐기는 방법들을 알고 있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것도, 사납고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도 모두 좋았다.
‘귀여운데.’
침상 위 기진맥진한 연을 보며 모란이 슬며시 입술을 핥았다.
모란의 입장에서 겨우 스무 살―에 모란으로 살았던 십 년을 더하자면 서른이지만 스물이나 서른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된 상대는 마냥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고통에 지친 나머지, 누워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연에게 일단 물을 좀 먹이며 모란이 생각했다.
‘키운 적은 없지만, 이런 게 애완동물을 키우는 느낌일지도.’
그리고 제가 하겠다고 연이 바르작거리는 걸 잘 달래서 땀에 젖은 옷을 벗겨 주고 입혀 주었다. 손이 많이 가기는 하지만 괜찮다. 하지만 모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애완이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 더군다나 애완(愛玩)하던 마족 하나는 손이 가게 만들 때면 꽤 짜증이 났었단 말이지. 딱히 그렇게 귀엽지도 않았단 말이야. 툭하면 손톱을 세우기나 하고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곤 했다.
‘책임감이 들어서 그런가. 양심이 찔려서 그런가. 아니면…… 역시 귀여워서 그런 거겠지.’
모란은 연을 잘 구슬려서 물을 더 마시게 한 다음, 침대 위에 널어 뉘여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란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모란과 같은 몸을 썼던 자였다. 그랬기에 생소하고 관심이 갔다. 심지어 이제는 완전히 인연이 엮이지 않았는가.
연의 몸에서 삐질거리며 다시 나오려는 기운들을 잘 도닥이며, 모란이 슬며시 먼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에서 튕겨져 나왔을 때, 모란이 떨어진 세계 ‘안제테다’는 그야말로 혼돈과 혼란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육체를 얻느라 모란은 십 년이나 혼으로만 떠돌며 아등바등했다.
그렇게 지내다 겨우 들어간 곳은 그나마 상성이 좋던 노예의 몸이었다. 그것도 다 죽어 가는 어린아이. 사방이 인간뿐인 이 세계와는 달리 안제테다에서 인간은 좀 괜찮게 생긴 벌레와도 같은 존재였다. 수도 적고 힘도 약해 언제 짓밟아도 되는 것이다.
겨우 혼이 비어 있는 육체를 얻어 들어간 뒤 모란은 초반에 한참을 고생했다. 그가 얻은 육체의 주인은 마족이었다. 끔찍하게 힘든 노역과 어린아이라고 봐주지 않는 구타나 채찍질 따위는 모란을 제법 성가시게 만들었다.
그 주인 마족은 모란의 맷집이 제법 좋다고 기뻐하였다. 좀 더 컸을 때는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쪽 눈을 도려내기도 했다. 사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적응이 안 된 건 멀쩡한 양쪽 눈이었다. 시야가 넓어진 게 어찌나 낯설던지.
그렇게 초반 십몇 년을 모란은 주인에게 학대당하며 살았다. 죽을 뻔한 위기도 수없이 많았다. 얼마나 비참하면서도 짜증이 나고 성가셨던지.
덕분에 복수의 열매는 매우 다디달았다.
마침내 깨우친 것이 있어 완전히 차원이 다른 힘의 소유자가 되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자신의 주인이 다스리던 성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마족에게 똑같이…… 아니, 조금 더 과하게 갚아 주었다. 마족이 살려 달라거나 죽여 달라고 애걸복걸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줄을 채워 질질 끌고 다녔다. 딱 자신을 괴롭힌 만큼만. 그리고 그가 지은 업보만큼만.
그 후에는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쇠약해진 몸이라 얼마 안 가 동족에게 잡아먹혔다고 했던가?
안제테다는 한마디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힘이 질서인 곳이라 힘 있는 자가 약자를 어찌해도 비난을 받지 않았다. 아니, 비난을 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어찌하지를 못했다.
모란은 그곳에서 이백오십여 년을 온갖 일을 겪으며 살아왔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으나 잃은 것도 많았다. 때로는 영웅이라 불리었고 때로는 두려움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 호칭들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거칠던지 모란은 이제는 어떤 일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를 못했다.
아니, 아니다. 그 과정이 거칠어서가 아니다. 원래부터 그는 어느 일에도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지내던 곳이 원래의 세계가 아니라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이백오십 년이 지나 모란은 영웅으로 불리고 아무도 쉬이 덤비지 못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도 언제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곳에 속한 자가 아닌 탓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지 말라고 저를 붙잡는 이들 다 뿌리치고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나?’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이 세계에 돌아와 얻게 된 연(緣)중 연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 죽어 가면서도 모순적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그 자체라서, 저가 잃어버렸던 것을 가지고 있어서, 볼수록 기분이 즐겁고 어여뻐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란이 중얼거렸다.
“이유보다는 결과가 더 중할 때도 있는 것이지.”
어느새 연은 기절하듯 푹 잠들어 있었다. 깊은 고통을 이기는 것이 힘들었을 터였다. 모란은 무심코 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졌다. 고개를 숙여 상대를 보는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모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
“지난번 치료한 건 어땠어? 좀 덜 아팠지?”
침상에 기대어 서책을 읽던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좀 덜 아팠냐고? 그게 어떻게 좀 ‘덜’ 아픈 게 될 수가 있는 거지?
확실히 모란에게 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몸이 좋아지는 게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몸이 좋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치료는 전혀 긍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정말, 정말, 정말 끔찍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연은 그날 이후로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냥 아픈 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순간의 고통을 인내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모란이 말했던 그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가? 조금 더 허용해 주는 바로 그것 말이다.
“그…거 말이야.”
“흠?”
모란은 요즘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옆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연은 내쫓을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신의 몸을 치료해 주는데 뭔들 못 해 주겠느냐 싶기도 했고……. 두 번째로는 모란이 곁에 머물러 있는 게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이다.
삐딱하게 누워 귤껍질을 착착 깐 모란이 반은 제 입에 넣고 반은 연에게 건네주었다. 연은 미간을 찡그린 채 손바닥 위에 오도카니 올라와 있는 귤을 노려보았다.
“맛있는 귤이야. 신 거 아냐.”
모란의 말에, 마지못해 연이 하나 떼어 입에 밀어 넣었다. 달긴 달았다. 그런데 기분이 오묘했다.
“아무튼 그거가 뭔데?”
“입…… 맞추는 이상으로 하면, 덜 아프다면서? 얼마나 덜 아프지?”
이번에는 모란이 벌떡 일어나 바르게 앉았다. 그 음흉한 표정을 보자 연은 괜히 말했다 싶었다.
“질척거리는 정도에 따라 다르지.”
“질, 질척?”
단어 선정을 해도 꼭 그따위로……. 연이 주먹을 꽉 쥐는데 모란이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게다가 모란이 쓸데없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한번 해 볼래?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만져 보면서 내가 얼마나 덜 아파질 수 있는지 알려 줄게. 연이 너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도 괜찮을지 알 수 있을 거고.”
이래도…… 되는 걸까…….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모란의 뒤로 햇빛이 역광처럼 비쳤다. 연은 잠시 홀린 듯 모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머리를 제멋대로 풀어 헤치는 일 없이 하나로 묶었는데, 햇빛이 비치자 검은 머리카락이 연한 갈색으로 빛났다. 다갈색 눈동자에는 투명하게 햇빛이 고였고…….
‘치료가 진짜 고통스러워서 그래. 단지 그 이유 때문이야.’
마른침을 삼킨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란이 눈을 휘며 웃었다.
“좋아. 이리로 와 봐.”
침상에 앉은 모란이 툭툭 자신의 앞을 손으로 건드려 보였다. 긴장한 연이 손바닥의 땀을 이불에 닦아 냈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궁연일 적에 한 번, 그리고 모란일 적에 한 번.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입을 가볍게 맞추고 포옹하는 정도로 끝났다. 한 번도 이런…… 그래, ‘질척’이는 분위기는 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연애하는 중도 아니었다.
“편하게 앉아 있으면 돼. 이번에는 조금도 안 아프니까.”
모란의 팔이 허리를 감을 적에 연이 움찔했다. 전에 치료를 받을 때는 항상 밤이었는데 이리 환한 낮에 침상에 앉아 있으니…… 오히려 아픔에 대한 두려움은 덜했다. 나른하여 적당히 기분이 좋았다. 얌전히 앉아 있으니 모란이 턱을 잡았다. 망설이다가 입술을 조금 벌리자 착하네, 하고 칭찬이 돌아왔다.
“음…….”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치는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이상야릇했다. 모란은 처음부터 깊게 혀를 섞었다. 짓누르고 휘감고 슬쩍 깨물기도 하였다. 입 안을 헤집는 움직임이 어찌나 야하고 능숙하던지. 눈을 감았다가 뜨자 모란이 씩 웃으며 입을 떼어 냈다.
“다른 걸 좀 더 해 볼까.”
싫으면 얼마든지 밀어 내라는 말과 함께 모란이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또 입을 맞추려나 하고 있는데 입술이 향한 곳은 귀였다.
다소 거칠고 말캉한 입술이 귓불을 더듬는 통에 연이 몸을 움츠렸다. 곡선을 따라 문지르다가 이로 잘근거렸다. 약간 아팠는데, 놀랍게도 그 아픔조차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귀를 깨물리는 동안 모란의 한쪽 손은 연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목덜미가 시작되는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다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와 옷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것이다. 연이 조금씩 숨을 헐떡거렸다. 츱, 하는 소리를 내며 모란이 세게 귓불을 빨고 혀로 핥았을 때는 몸을 떨고 말았다. 몸이 오싹하고 다리 사이가 근질거렸다.
“기분 좋지?”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어 연은 입술만 깨물고 말았다.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모란이 손을 움직였다. 교묘하게 옷자락을 들추고 들어온 다음, 당장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옷을 잡아당기다가 이내 빼내는 것이다. 그러더니 이번엔 무릎 위를 어루만졌다.
마치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기분으로, 연은 제 목덜미를 핥으며 동시에 몸을 어루만지는 모란의 손을 바라보았다. 톡톡 두드리던 손이 점차 위로, 또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옷자락 아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향한다. 연이 가늘게 숨을 쉬었다. 마침내 모란의 손이 다리 사이에 와 닿았다.
“거절 안 하는 걸 보니 기분 좋은가 보네. 착해…….”
모란이 낮게 중얼거렸다. 손바닥으로 옷감 위를 뭉근하게 누르자 연이 읏, 하고 작은 신음을 뱉었다. 더, 직접적으로 만져 주었으면 했다. 더, 지금보다 더…….
손바닥으로 살금살금 눌러 대던 모란이 손가락을 굽혔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여 윤곽을 더듬었다. 그러다 보란 듯 옷자락을 걷어 다리 사이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모란은 이제 노골적으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더 세게 손바닥을 눌러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는 연의 심장이 쾅쾅 터질 듯 뛰었다.
도련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억!”
시비가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연이 걷어차는 바람에 모란이 그대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연이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미안해.”
“괜찮아…….”
아래에서는 마치 바닥에 짓눌린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괜찮은 것 같지 않은 목소리라 다소 찜찜했지만 그보다는 밖의 시비가 더 신경 쓰였다. 연이 옷차림을 가지런히 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주강 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들이도록 할까요?”
“그래.”
주강이 들어올 때까지도 모란은 바닥에 누워 있다가 김샌 얼굴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주강이 모란에게 아주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사실 주강뿐만이 아니었다. 모란이 연의 곁에 붙어 능글맞게 굴거나 깔짝거리는 걸 보는 사람들은 다들 해괴한 것을 보는 듯 바라보곤 했다.
“한위 도련님에 대해 드릴 말이 있습니다.”
역시나 한위에 대한 말일 줄 알았다. 며칠 전부터 주강은 매우 성실하게 한위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한위는 아침이 되면 강아지처럼 뛰어왔다가 저녁이 되면 발을 질질 끌며 돌아가곤 했다. 그만큼 훈련이 힘들었던 탓이다.
“아무래도 대회 출전이 어렵겠습니다.”
예상했던 말에 연이 침음했다. 그래, 아무래도 삼 주간의 훈련만으로 몇 년을 단련해 온 애들을 이기기란 힘들 것이었다.
“역시 시간이 문제지?”
“아니요. 아예 대회 출전이 불가하다는 의미입니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회 출전이 불가능하다니?
“자세하게 말해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소룡대회는 참가 자격이 결코 까다롭지 않았다. 대회가 열리는 전날까지 보호자와 함께 찾아가 신청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이 또한 열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니 열다섯 살인 한위는 충분히 자격이 되었다. 주강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한위 도련님의 말로는 자격이 되지 않아 세가의 수치가 될 뿐이라며 남궁사영 장로가 신청을 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는군요.”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했다가 다음으로는 화가 나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 비열한 영감이 감히 그런 말을!”
용건은 그것뿐이었는지 할 말을 모두 마친 주강이 고개를 숙이고 난 뒤 물러났다. 다시 모란과 단둘이 남게 되었는데도 연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화가 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남궁영명은 정말, 한위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영명뿐만이 아니라 남궁사영도 마찬가지였다. 세가의 수치라고? 정말 세가의 수치가 되는 작자들이 누구인데!
남궁사영이 안 된다고 하여 대수인가? 보호자라면 연도 될 수 있었다. 당장 한위를 데리고 가 신청하려고 문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자 모란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진정하고 앉아 봐.”
“뭐야?”
“일부러 숨어서 한위를 도와주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니었어? 아직은 이렇게 대놓고 도와주는 걸 보이면 난감하지 않겠나?”
“어차피 나중에 세가를 나가 버리면 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은 마지못해 모란의 말을 인정하고 돌아와 침상에 도로 앉았다. 연오가 왜 자신 대신에 몰래 한위를 도와달라고 했겠는가? 연이 도와주는 걸 알면 영명은 그조차 못 참고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침착해지려고 해도 화가 도무지 식질 않았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그 남궁사영인가 하는 작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잖아? 그렇지?”
입술을 깨물던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세가의 장로들은 크게 두 가지 파로 나뉘어져 있다. 영명의 측근들과, 앞으로 새로이 가주가 될 연오의 편을 드는 이들이다. 남궁사영은 그 측근 중에서도 영명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그리고 내가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니 말이야,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 그 세 번의 승리인가를 거둔다고 해서 과연 정말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모란의 말에 연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연도 영명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한위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걸 보니 약속을 지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들로 인정하니 어쩌니 한 것도 한위 앞에서만 한 약조가 아니던가. 자신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고 잡아떼면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모란이 의기양양하게 씩 웃으며 말하는 게 아닌가.
“일단은 그 장로를 치워 버리자. 그리고 이왕 참가하는 거 대회에서 우승하게 만드는 거지.”
“그 대회에서…… 우승하게 만든다고?”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소룡대회는 어린 무인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참가한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대회였다.
제일소룡(第一小龍)부터 제이, 제삼까지 우승자를 가리는데 각 우승자는 강호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 우승자들이 별 탈 없이 자라게 되면 성인이 되고 나서는 중원의 무림 오봉이니 칠룡이니 불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 된다면 영명도 한위에게 마음대로 굴지는 못할 터였다.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작자였으니까. 문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한위가 대회에서 우승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칠 일 만에?”
“당연히 칠 일 만에는 안 되지. 하지만 일 년이라면 어떨까? 아니면 좀 넉넉하게 일 년 반? 좀 굴려야 하긴 하겠지만.”
칠 일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는데 무슨 연유로 일 년이니 일 년 반이니 말하는 건지, 연은 알 수가 없었다. 모란은 히죽 웃더니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였다.
“일단 그 늙은이부터 치워 버리자고.”
꼴도 보기 싫은 남궁사영을 치워 버린다니 연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모란이 말하는 것들은 죄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궁사영을 치워 버린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어려울걸. 남궁사영은 오십 년도 전부터 세가를 지켜 온 호법장로야. 어지간한 일로는 경질당하지도 않지. 아니, 잘못을 저질러도 영명이 덮어 버릴 텐데.”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당연히 안 되지!”
무슨 난리가 나게 만들려고 남궁사영을 죽이나? 연은 모란이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선득해졌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도 도로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모란이 불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았다.
“호법장로라는 게 대체 뭔데?”
어쩐지. 호법장로인 걸 알고서도 그리 치워 버린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얕게 한숨을 쉰 연이 입을 열었다.
“세가의 규율과 규칙을 수호하는 장로야. 규율, 규칙뿐만 아니라 세가의 큰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자들이기도 해. 남궁사영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지. 창연각(敞延閣)을 지키는 자니까.”
“창연각?”
“창연각은…….”
무가나 문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손이나 직계 제자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고유한 무공과 내공심법 등이다. 가령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검법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은 세가의 친족이 아니면 배울 수가 없는 검법이었다. 소림사의 소림곤법천종(少林棍法闡宗)이나 무당파의 그 유명한 태극신공(太極神功) 또한 마찬가지로 직계 제자들에게나 허용되는 무공들이다.
이러한 무공들은 각별히 중요하게 여겨져 구전에서 구전으로, 혹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이어지곤 했다. 물론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전(失傳)을 대비하여 무공들을 비급으로 적어 두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거나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각 문파와 가문에서는 철두철미하게 무공 비급을 보호하곤 했다. 남궁세가의 창연각이 바로 그 경우이다.
창연각은 장로조차 쉬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진입하려거든 기관진식은 물론이거니와 삼재(三才), 오행(五行), 육합(六合)에 팔괘(八卦)와 구궁(九宮) 중 하나도 빼놓지 않고 통달해야 한다. 그러니 기관진식에 능하기로 이름을 떨친 제갈세가의 장로 수준이나 되면 모를까, 평범한 무인들은 진법의 술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동행하지 않으면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만큼 억지로 뚫고 들어가려 하면 목숨까지 위험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두세 달에 한 번 정도는 겁 없이 비급을 얻고자 들어가려는 정신 나간 놈들이 있으니 항상 호법장로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남궁사영은 그런 창연각의 경비를 책임지는 위치였다. 모란이 연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누군가 창연각에 침입하면?”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더는 호법장로의 직위를 유지할 수는 없겠지.”
별생각 없이 대답해 주던 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연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은 모란이 씨익 웃었다.
“창연각이 어디에 있는데?”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건 불가능해. 아무리 순간이동이라도 무리야. 어디에 무슨 기관진식이 있는 줄 알고?”
“불가능한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모란이 자신만만하게 웃는데, 이상하게도 신뢰가 갔다. 그간 그가 보여 준 마법이라는 기술 때문일까? 그러나 신뢰는 갔으나 걸리는 것이 있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대가는?”
“대가?”
모란이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닫더니 뺨을 긁적거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창연각으로 달려갈 것 같았던 태도를 바꾸어 그 자리에 앉았다.
“딱히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냐. 그냥…… 심심해서 그래.”
“심심하다고?”
“그래. 이 세계가 얼마나 평화로운지 마치 휴가를 나와 있는 기분이라서.”
연은 또다시 모란이 있던 세계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납득은 가지 않아서 의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이유가 그냥 그뿐이야?”
“또 하나 있기는 하지. 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좋아하거든. 보통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질 않으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난 전의 세계에서 영웅이었어.”
“영웅이라고…….”
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좀 변태 같고 능글맞은 남자가? 툭하면 죽이니 팔을 부러트리니 하는 사람이? 모란은 턱을 괴고 불신으로 가득 찬 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한 백 년도 전의 이야기지, 아마. 내가 처음으로 영웅이라고 불리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거든. 마을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에미스? 아미스? 뭐 대충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아무튼 그 마을 영주가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 친분이 있던 녀석이라 무언가 하고 달려가 보았더니 매일매일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실종된다는데…….”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연은 어느새 홀린 듯이 모란의 말을 듣는 중이었다. 참으로 교묘한 재주를 가진 혓바닥이다.
“사실 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거든. 산책하러 갔다 오면 정상까지 고작 길어 봤자 한 시진 정도?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벌써 열 명이나 사라졌다니 난리였지. 아무리 산을 수색해도 옷자락 혹은 신발 한 짝 나오지를 않았어. 약초를 캐어 먹고 사는 마을이니 난감한 일이지. 산에 올라야 먹고 사는데 목숨을 걸고 올라가야 하니. 그런데 알다시피 내가 마력 탐지를 좀 하지 않아?”
“그럼 마력 탐지로 사람들을 찾아낸 건가?”
“물론, 찾아냈지. 놀랍게도 사라진 사람들은 저기 지하 까마득한 곳에 파묻혀 있었어. 산 높이의 몇 배나 되는 깊은 곳이었지. 절벽도 동굴도 없는 그저 산일 뿐인데 말이야. 그것도 사라진 지 며칠씩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살아 있는 채였지. 결단을 내려야 했어. 사라진 사람들을 포기하고 산을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생계 수단을 포기하고 산을 갈라 사람들을 꺼내느냐.”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지하 깊숙한 곳에 산 채로 파묻혀 있었던 걸까? 아니, 그보다 산을 뭐 어떻게 한다고? 가른다고? 진짜 가능한 일이어서 지난번에 태산일도양단이니 뭐니 한 거야?’
“영주는 내게 산을 갈라 달라고 했지. 파내기에는 너무 힘들었거든. 산이 바위투성이라서 삽을 꽂을 만한 곳도 적당치 않았고. 그래서 꼭대기에 서서 내가 산을 가르려고 할 때였어.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
모란이 말꼬리를 흐리며 말을 멈추었을 때에서야 연은 자신이 몸을 다소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똑바로 세우는데 그가 히죽 웃었다.
“뒷이야기 궁금해? 왜 사람들이 실종되었는지, 그 아래 파묻혔는지 알고 싶지 않아? 계속 이야기해 줄까?”
“아, 아니……. 전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사실은 궁금했으나, 연은 자존심 때문에 애써 아닌 척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모란은 다 안다는 듯이 히죽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그래? 그럼 난 창연각이나 다녀와야겠다.”
“뭐? 이봐!”
연이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모란은 순간이동으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또 제멋대로! 짜증이 난 연이 소리 질렀다.
“백모란! 돌아와!”
물론 백모란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 창연각이 대체 어느 곳인 줄 알고 간단 말이야?’
창연각에 함부로 들어가려 했다가 죽은 사람만 기십이었다. 연은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다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던 시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련님, 뭔가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아니다.”
연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흘끔 창연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창연각의 푸른 전각 지붕이 보였다. 정말 지금 저 곳에 침입하고 있는 중인가 싶어 연이 유심히 볼 때였다. 돌연 창연각 지붕에서 흰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가가 소란스러워지는 게 아닌가.
연은 제 눈을 의심했다. 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화정당 담장 너머에서 아스라하게 무사들이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침입자다! 창연각에 침입자가 들어왔다!”
정말로? 정말 창연각에 침입했단 말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백모란은 정말 미친 자임에 틀림없었다.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우뚝 서서 지켜보는 동안 저만치서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니 주강이 서 있었다. 연은 뒤늦게 그가 제 호위무사라는 걸 떠올렸다. 요즘 워낙 한위와 붙어 있는 일이 잦아서 잊고 있었다.
“도련님, 혹시 모르니 들어가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만약 연이 평범하게 무가의 자식으로, 제대로 자라난 상황이었다면 그도 창연각에 달려가 손을 보태고 있었겠지.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항상 보호받는 입장이었다. 다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여 돌아서는데 주강이 주위를 살피고는 물었다.
“모란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란은 잠깐 어딜 좀…….”
연이 얼버무리며 화정당 안쪽으로 향할 때였다. 안채 문이 벌컥 열리며 모란이 나타났다. 연은 그를 무시무시하게 째려보며 다가갔다. 어째 그의 품이 좀 불룩했다. 평소답지 않게 단정하게 옷도 제대로 입고 있고.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연이 얼어붙은 사이 주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란, 네게서 탄 냄새가 나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탕약을 끓이다가 좀 태워서 그만.”
모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연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강을 뒤로한 채 서둘러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진짜 창연각에 다녀왔어?”
“그럼. 이걸 보라고.”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란이 품 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무공 비급이었다. 그냥 비급서도 아니다. 천뢰지동검법(天雷地動劍法)이었다. 위력이 고강한 검법으로, 그냥 혈육도 아니고 가주나 그 직계만 배울 수 있는 검법이다. 연도 배울 자격은 되지만 신체 조건이 되지 않아 배우지 못하는 무공이 아니던가.
연이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피고는 소리를 낮추어 소리를 질렀다.
“이걸 들고 오면 어떻게 해?!”
“반응을 보니까 대단한 건가 보네. 이런 걸 들고 와야 그 장로인가 뭔가가 제대로 잘리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지 않게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익히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실전은 안 될 텐데.”
뚫어져라 비급서를 바라보던 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왕 저지른 일……. 창연각의 침입자를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해 세가의 명예가 좀 실추되긴 하겠지만 큰 해는 없을 것이다.
모란은 씩 웃으며 비급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창연각에 침입까지 했는데도 옷자락 끄트머리만 좀 그슬리긴 했을 뿐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고수일지도 몰라. 형님이나, 혹은 반로환동한 장로들보다…….’
밖은 계속 소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웬 침입자가 들이닥쳐서 무공 비급서를 훔쳐 갔으니 큰일이 난 것이다.
세가의 소란은 그날 새벽까지 죽 이어졌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범인이 순간이동을 했으니 잡을 방도가 없었을 터.
연은 그날 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세가의 횃불을 보며 어쩐지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하여 매우 찜찜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노발대발 분노한 남궁영명이 세가의 장로며 무사들을 죄다 소집했다. 어찌나 쩌렁쩌렁 온 세가에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 대는지 깨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이 일어나 옷을 걸치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 어느새 들어온 모란이 씩 웃었다.
“구경 가지 않을래? 아주 볼만할 텐데.”
연은…… 모란의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보고 싶었다. 아니,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주강도 소집당했는지 자리에 없어서 연은 모란을 곁에 붙이고 조용히 걸어갔다.
담 너머로 흘깃 보니 다들 연무장에 모여 있었는데 무사나 호법 장로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밤새도록 세가와 그 주변을 뒤지느라 얼굴이 퀭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영명과 사영의 표정이 제일 볼만했다.
“사영 자네는 대체 무얼 한 건가! 어떻게 침입자가 들어간 걸 보지도 못해!”
“죄송합니다, 가주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연히 보지도 못했겠지. 순간이동으로 들어갔을 텐데 어떻게 보겠어? 조용히 들어갔다 나와도 되었을 것을 굳이 나갈 때 모두 보라고 난리 친 모란의 심보도 참 고약했다.
그러나 정말…… 연은 이 상황이 몹시도 통쾌했다. 영명이 펄펄 날뛰는 것이나, 남궁사영이 죽상을 하는 것이나.
결국 남궁사영은 창연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로 장로의 자리에서 강등을 당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다음으로 실력자인 남궁인이 앉았다. 그는 영명보다는 연오를 지지하는 장로들 중 한 명이었다. 모든 일을 인수인계받았으니 아마 한위에 대한 일도 인계를 받았겠지. 영명은 창연각 침입사건으로 한위의 일까지는 신경이 미치지 못한 듯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즐거운 구경을 하고 나니 연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 연의 상태를 단박에 눈치챈 모란이 히죽 웃었다.
“권선징악, 좋지?”
“응. 권선징악…… 좋네.”
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만큼이나 기분이 좋은 것 같은 모란이 휘파람을 불며 앞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연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는 처음 봤을 때처럼 모란이 얄밉거나 싫지는 않았다.
***
주강이 딱 잘라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한위 도련님은 재능이 뛰어나십니다. 예선전에서라면 한 번쯤은 이길 수도 있겠습니다. 요행을 바란다면 간신히 두 번까지도 이길 수 있겠고, 천운이 따른다면 세 번의 승리를 거둘 겁니다.”
한위의 어깨가 시무룩하니 축 처졌다. 주강의 결론은 사실상 세 번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이 봤을 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법장로의 직위를 박탈당한 남궁사영 대신 그 자리에 앉은 남궁인은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제대로 한위를 가르쳐 주었으며 대회 출전 신청까지도 흔쾌히 해 주었다. 그러나 남궁사영에서 남궁인으로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여 한위의 승률이 크게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연이 한숨을 쉬며 손짓했다.
“그간 수고 많았어. 이만 나가 보도록 해.”
주강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그간 열심히 한위를 가르쳐 놓은 것치고는 조금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위는 완전히 풀이 죽은 채 의자 위에 오도카니 걸터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연은 마음이 안 좋았다. 자신이야 자발적으로 남궁이란 성씨를 버리겠다고 했지만 한위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었다. 남궁세가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연은 그간 한위가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걸 알지만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도 있는 법이었다.
다만…… 이 방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선 모란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전에 말한 대로 할까?”
대답하기 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연이 손짓을 했다.
“한위야, 나가서 시비에게 세 명분의 차와 다과를 내오라고 하거라.”
한위는 눈치 빠르게도 둘이 나눌 말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네, 하고 얌전히 한위가 나가자마자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연은 마음이 좀 복잡했다. 대체 언제 어느 순간부터 모란과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단순히 그가 자신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다가 연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무슨 생각?”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는 언젠가는 당신에게만 의지하게 되어 버릴 거야. 곤란한 일이 생기면 모란 당신부터 찾게 되겠지.”
“그러면 안 되나?”
연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모란이 팔짱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표정이 잠시 희미하게 변한 것 같았지만, 그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었다.
“인생에 한 명쯤 의지할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이해가 안 되어서 그래.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 줘? 왜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어?”
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자신이 모란이었다면 남궁연이라는 사람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주인 없는 몸에 들어와 앉아 인생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몸을 학대하여 지워지지 않을 흉터까지 만들지 않았나? 싫어할 만한 이유가 넘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란의 행동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면 너는 왜 밤마다 나가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데? 그것 또한 이유 없는 호의지.”
“그건 이유 없는 호의가 아냐. 그냥…… 자기만족이지. 나는 의원이고, 의술은 지속적으로 단련해야 해. 게다가 사람들이 완치된 모습이 좋으니까.”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연이 고개를 저었다. 모란은 그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자기만족이야. 네가 그 꼬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그런 거지.”
뭐야, 그 말은. 그럼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좋아한다는 건가? 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그는 모란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는 매번 모란에게 짜증만 냈던 것이다. 자신에게 좋아할 만한 구석이 어디가 있다고? 명치 어딘가가 참기 힘들게 간질거렸다. 연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한위를 어떻게 하려는 건데? 겨울에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처럼 한위에게도 뭔가 할 수 있는 거야?”
모란이 빤히 바라보다가 입매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연아.”
연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모란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금지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니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그 빌어먹을 꽃이 필 때마다 한 번도 좋은 적이 없었는데. 연이 속으로 생각했다.
“꽃이 필 때가 아닌데 피면 꽃나무 수명도 깎이지. 아, 물론 그 꼬마가 일찍 죽어도 상관없다면 당장 강하게 만들 수도 있긴 해.”
상상만으로도 싫었던 연이 인상을 쓰자 모란이 히죽 웃었다.
“물론 그렇게 할 리는 없지만.”
그건 그렇고 연은 왜 굳이 꽃나무 수명을 깎아 가면서까지 모란이 꽃을 피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즘엔 정원의 꽃을 치우다 치우다 하루 이틀 정도는 체념하고 내버려 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마법이라는 훌륭한 수단이 있거든. 저녁에 한 시진씩만 그 꼬마를 빌려주면 그 소룡대회인가 뭔가에서 우승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한위에게 뭔가 이상이 생기지는 않는 거지?”
연이 캐묻자 모란이 걱정일랑 하지 말라며 장담했다. 이제까지 한 말은 죄다 지키긴 했지만 연은 이상하게도 영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연이 다시 한위를 불러왔다. 어쨌든 둘보다는 한위의 의견이 제일 중요했다.
문을 열자 쪼그리고 있던 한위가 시킨 대로 차와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연은 일단 한위를 앉힌 뒤 차와 다과를 쥐여 주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먼저 마법이 무엇인가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꼬마야. 너 그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번 해 볼래?”
그런데 연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란이 먼저 말을 가로채는 게 아닌가. 한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잠시만, 아직 무슨 방법인지도 말하지 않았잖아.”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모란이나 한위에게 연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모란이 생글거리며 한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단 한번 체험해 보고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안 그래?”
우승할 수 있다는 말만으로 홀딱 넘어간 한위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도 한위가 기어코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니, 결국 연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건데?”
모란이 대충 허공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공간이라고 있거든. 일종의 작은 주머니 차원 같은 곳인데……. 대충 차원과 차원 사이 틈바귀 어딘가를 찢어서 만든 공간이라 완전히 내 통제하에 있지. 거기서 수련할 거야.”
아공간? 주머니 차원? 차원과 차원 사이? 듣긴 들었으나 항상 그렇듯이 모란의 마법에 대한 설명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잘 다녀와. 한 시진이라고?”
“조금 덜 걸릴 수도 있고 더 걸릴 수도 있고. 평범한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만한 시간이 그 정도라서.”
마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한위만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연이 간략하게라도 설명을 하려던 찰나, 모란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돌연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변한 것은 없는데 무언가가……. 한위도 연과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요…….”
“익숙해져야 할 거야. 자, 이리로 오렴.”
어리둥절해하며 한위가 모란이 손짓하는 곳으로 가 섰다. 그러자 스산한 분위기가 사라지며 둘의 모습도 사라지고 말았다. 연이 조심스럽게 둘이 사라진 자리에 다가갔다. 순간이동과는 또 달랐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모란과 한위가 돌아온 건 한 시진이 좀 못 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서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던 연이 또다시 드는 스산한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마치 연기처럼 방 한구석이 일렁이더니 모란과 한위가 나타났다. 한위는 다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연을 보고는 단번에 달려들었다.
“형님!”
와락 저를 끌어안기에 얼떨결에 마주 안아 주기는 하였는데 반응이 이상하게 격렬했다. 어쩐지 어딘가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모란이 설렁설렁 다가오더니 한위의 덜미를 잡아 끌었다. 한위가 아차 싶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뭐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자 모란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모란도 달라진 것 같았다. 옷이 원래 저랬던가……. 워낙 망나니처럼 헐렁하게 입고 다니는 인간이라서 좀 꼬질꼬질해진 걸로는 구별이 안 갔다.
“뭔 일이 있었겠어? 열심히 검술 훈련이나 했지. 내가 상대도 좀 해 주고.”
한위가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연은 이상하게 느낌이 찜찜했다. 뭘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아공간이란 곳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아무래도 한위가 염려되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연이 모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아공간이란 곳, 나도 들어가 봐도 되나?”
“지금 상태로는 안 돼. 아주 큰 문제가 생길 거야. 치료가 더 길고 고통스러워질 거고.”
연은 깔끔하게 아공간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 치료도 못 견디게 고통스러운데 그보다 더 고통스러워진다면 치료를 아예 포기하게 될지도 몰랐다.
“한위야, 별문제 없는 것이지?”
모란을 아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라서 연이 물었다. 그러자 한위가 어른스럽고도 의젓하게 대답했다. 오늘따라 얼굴이 똘망똘망해 보였다.
“걱정 마세요. 형님.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피곤할 텐데 가서 쉬거라.”
한위가 모란과 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화정당을 나갔다. 모란을 바라보니 그가 드물게도 퍽 피곤한 얼굴로 길게 하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이만 가서 좀 쉬어야겠다. 아공간 열어 두는 게 이만저만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피곤하네. 당분간 밤 나들이는 좀 쉴게.”
“그……래. 푹 쉬어.”
연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모란도 어슬렁거리며 침소를 나갔다. 연도 여전히 무언가 놓친 듯한 찜찜한 기분으로 침상에 가 누웠다.
그가 왜 자꾸 그런 느낌이 드는지 깨달은 건 나흘 뒤의 일이었다. 모란이 네 번째로 한위를 데리고 아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날, 벼락같이 찾아온 깨달음에 연이 모란의 멱살을 쥐었다.
“안에서 대체 뭘 하는 거야? 한위가 나이 들어 버렸잖아!”
하루나 이틀 정도는 긴가민가하였는데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되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키도 크고 머리카락도 길어지고 점차 앳된 기미가 사라졌던 것이다. 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파나 마교에서나 쓰는 그런 금단의 무공들이었다. 사악하고 괴이한 무공들 중에는 고강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대신 급속도로 나이가 드는 식으로 사용자의 생명을 앗아 가는 것들도 있었다.
“진정해, 진정.”
“한위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을 거라며!”
연이 화를 내자 키가 제법 자란 한위가 당황하여 주위를 서성거렸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란이 뻔뻔하고 태연한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건 부작용 같은 게 아냐. 그러니까…… 그저 나이가 들었을 뿐이지.”
약을 올리는가 싶어 연이 발끈하였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거라고. 무얼 상상하는지는 몰라도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아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거든. 이곳에서의 한 시진이 그곳에서는 두 달이라서.”
모란이 씩 웃으며 멱살을 쥔 연의 손등을 살금살금 도닥였다. 연은 어이가 없어서 손을 탁 놨다. 일 년이나 일 년 반 정도가 필요할 거라더니, 진짜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게 만들 줄은 몰랐다. 한위가 난감한 얼굴로 모란의 편을 들었다.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알고서도 제가 선택한 것이에요.”
이제야 알겠다. 한위는 의젓하거나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정말 그만큼의 성장을 한 것이다. 처음 아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한위가 매우 반가워하며 달려든 것도 이해가 갔다. 연이야 한 시진밖에 안 되었지만 한위는 두 달이나 자신을 못 본 것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납득은 해도 기운이 빠져 연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대회에서 우승할 수는 있는 거야?”
“이틀 정도만 더 이렇게 하면, 아마도? 이 꼬마가 꽤 열심히 하더라고. 네 형처럼 세가의 무사를 여럿 상대할 정도는 아니어도 서너 명 정도는 가능할 거야.”
연이 다시 한위를 위아래로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않을까? 너무 빨리 자랐다든가…….”
“아마 아닐걸. 너 말고는 아무도 이 녀석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던데. 성장기라서 좀 빨리 자랐구나 싶겠지.”
모란이 가리지도 않고 대놓고 말했지만 사실이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위를 바라보자 씩 웃는 게 아닌가. 전에는, 전에는 저런 식으로 웃는 애가 아니었는데……. 실력이 늘어난 건 괜찮았지만 한위가 모란에게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운 것 같았다.
“며칠 연속으로 아공간을 열었더니 정말 피곤하네. 난 먼저 가 볼게. 꼬마야, 내일 또 보자.”
아직 따질 것이 남아 있는데 모란은 설렁설렁 손을 흔들고는 연이 붙잡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봐도 제멋대로에 예측 불가한 사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말도 어눌하고 울던 한위가 그사이 많이 의젓해진 얼굴로 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좀 낯설기도 하여 연이 머뭇거리다가 제안했다.
“폐월당으로 가는 길까지 산책 좀 할까? 네 할미 진찰도 할 겸.”
“네, 형님.”
나가기 전 한위가 외투부터 먼저 챙겨 주었다. 연이 어색하게 받아 들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정당을 지키고 있던 주강이 빤히 한위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잘 못하는 한위가 어색하게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는 동안 연이 선수를 쳤다.
“어린애들은 성장이 빠르지.”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도 아니고 의문문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다. 연은 제가 다 식은땀이 나서 한위와 산책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화정당을 나갔다. 다행히도 주강은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연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뭐, 나 말고는 관심 있는 사람이 없어서 모를 거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오와 주강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폐월당으로 걸어가는 길, 한위가 모란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마법이란 건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음, 확실히 많이 신기하지. ……혹시 모란이 네게 마법이란 것에 대해서 알려 주었어?”
한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공간이라던가 순간이동을 대놓고 하려면 설명을 하긴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마법도 신기하지만, 전 모란 형님이 제일 신기해요. 가끔 그분은 꼭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남궁인 장로님 같기도 하고, 또…… 산이나 바다 같기도 하고.”
연은 한위가 받은 느낌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이따금 모란은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무엇으로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공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가던 길, 돌연 한위가 걸음을 멈추더니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연은 조금 놀랐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 남궁사영이 있었다. 장로 직위에서 파면되어서인지 어두운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그 역시 둘을 발견했다. 한위는 피하지 않고 사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위와 연을 바라보더니 이내 가던 길을 갔다. 연이 가볍게 한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한위야.”
한참을 사영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한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얼른 대회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꼭 보란 듯이 우승할 거예요.”
그런 말을 하는 한위의 눈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전에는 남궁세가의 소속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아 절박하던 눈이었다면, 지금은 달랐다. 그리고 연도 한위와 마음이 같았다.
그렇게 어느새 대회가 훌쩍 코앞으로 다가왔다.
***
“정말 사람이 많은데.”
마차에서 내린 모란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주치의라는 명목으로 연과 함께 마차를 탄 터였다. 마차에서 내린 연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인파에 눈썹을 찡그렸다.
소룡대회가 열리는 곳은 안휘성 회남(淮南) 지방의 제법 규모가 큰 연회장으로, 평소에는 지역 주지의 혼인이나 생신연 같은 행사에 사용되곤 했다. 그러다 대회가 열리는 한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 성대하게 꾸미는 것이다. 안휘성에서 열리는 대회이니만큼 매번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는 남궁세가는 귀빈 중의 귀빈이었다.
“참가자 수도 꽤 되는 데다가 볼만한 구경거리니까 여기저기서 몰려오지.”
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세가의 마차가 줄지어 멈춰 서고, 대회에 참가하는 어린아이들 몇몇이 내렸다. 연오 이후로 참가할 만한 직계는 한위뿐이라 나머지는 모두 장로의 자식이거나 혹은 방계 쪽의 먼 친척이었다.
유일하게 혼자서 내린 한위는 보호자들과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연이 눈짓으로 알은체를 하자 긴장했던 한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한위가 진정하려는 듯이 허리춤에 매단 목검을 꼭 쥐었다. 연이 사 준 빨간 손잡이의 목검이었다. 연이 중얼거렸다.
“대회에는 목검 소지가 필수라서 다행이야.”
“다행이지. 보통 이런 대회는 죽이는 건 실격이니까 좀 위험하잖아.”
미간을 찌푸린 연이 고개를 돌려 모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죽이다니, 이건 애들 싸움이야. 대회 역사상 한 번도 사망자가 나온 적이 없어. 팔다리가 부러지는 정도가 고작인걸.”
“아니, 내 말은 저 꼬마가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상대가 위험하다고.”
“뭐?”
이해할 수 없었던 연이 되물었으나 모란은 보면 알 거라며 웃기만 했다. 연은 어쩐지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모란이 한위를 대체 어떻게 가르쳤을까? 이 야만적인 사내가?
“참가자들은 이쪽으로 오길 바랍니다.”
대회 진행자가 출입문 근처에서 금빛 자수가 놓인 깃발을 흔들었다. 한위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연과 모란을 쳐다보고는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자 연이 다 긴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대도 됐다. 한위가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통쾌해지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영명은 연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연은 저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아 조금 걸음을 늦췄다. 모란과 함께 걸어가며 대회에 참가하는 듯한 어린애들을 보니 대충 실력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척 봐도 똘망똘망해 보이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울먹거리며 들어가는 녀석도 있었다.
대회는 각각 총 서른두 명의 아이들을 뽑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참가자가 워낙 많다 보니 가능한 한 쓸데없는 부상을 줄이기 위해 예선전에서 서른둘을 제외한 나머지를 걸러 내는 것이다.
공정한 진행과 판결을 위해 각 문파에서 자원한 고수들이 셋씩 짝지어 참가자들에게 점수를 매겼다. 열두 살 미만과 열두 살 이상으로 따로 진행되는 대회이기에 연령대에 따라 치르는 시험도 달랐다. 연이 알기로 열두 살 이상의 시험은 팔굽혀펴기나 연속으로 던지는 작은 공 베어 맞추기 따위였다. 시험 내용을 들은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야, 애들 장난이네.”
“당연히 애들이 참가하니까 그렇지.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난리가 나니까.”
물건 베기 따위는 쉬운 것 같으나 고수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대개 열 명 중 여섯 정도는 너끈히 시험에 성공했지만 그들에게 각각 매겨지는 점수는 천차만별이었다. 시험을 주관하는 고수들은 검을 잡는 자세만 보아도 상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아이들이니 어떠한지 훤히 보일 것이다.
연이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귀빈석에는 이미 영명과 연오를 비롯하여 장로 몇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란은 앉을 수 없는 자리기에 근처 아무 곳에나 앉았다. 연도 모란 근처에 앉고 싶었으나 마지못해 발을 질질 끌며 다가갔다. 연오의 자리 옆이 비어 있었다.
영명은 연을 무심하게 보고는 그저 고개를 돌렸다. 보통의 그는 연에게 이런 태도였다. 지난 연오의 생일 연회처럼 모친 어쩌고 하며 운운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반면 연오는 반가이 연을 맞이했다.
“여기 앉거라. 네가 어쩐 일로 이런 대회를 다 보겠다고 하는구나.”
“세가에만 있으려니 무료해서요.”
“옷은 좀 따뜻하게 입었느냐? 탕약은 가져왔고? 식사는 어찌 했어?”
“형님……. 그래서 모란이, 아니 제 주치의가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연오가 유별나게 굴자 얼굴이 화끈거려 연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 대화를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살펴보던 연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가 멈추었다. 남궁사영이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장로직에서 파면당했기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영명에게서 다소 떨어진 자리였다. 그때,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기민하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바람에 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예선전이 진행되는 동안 귀빈석에서는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남궁세가를 비롯하여 구대문파 오대세가의 사람들이 있는 자리였다. 은근한 정보가 오고 가기도 했고, 제 자식이나 제자의 우승을 호언장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연은 잠자코 차나 마시며 본선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연은 연오와 대화를 나눈 결과 그가 영명과 한위 사이에 오간 내기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긴 알고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주강은 왜 이 일에 대해서는 연오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을까?’
연의 의문은 본선이 시작되면서 흩어지고 말았다. 대회장 위로 서른두 명의 아이들이 올라온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한위도 끼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위의 얼굴을 확인한 연오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아니, 한위의 실력이 제법인가 보구나. 남궁인 장로님이 잘 가르치신 모양이야.”
사실 남궁인 장로는 하루마다 한위의 실력이 부쩍부쩍 자라는 걸 보고는 놀람을 금하지 못했다. 한위가 연을 찾아와 남궁인 장로님이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며 곤란을 토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슬쩍 뒤를 보니 영명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는 아마 한위가 예선전도 통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대회 진행자가 본선이 시작하기에 앞서 참가하는 아이들을 먼저 소개했다. 연은 성씨와 옷차림으로 각 아이들의 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구대문파 오대세가에 속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다 남궁한위라는 이름이 불렸을 때 귀빈석에서는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한위?”
“아마도 남궁가 가주의 아들일 거야.”
“남궁세가에 한위라는 직계 자식도 있었나?”
벌써부터 주위에서 한위의 이름을 수런거리는 걸 듣자 영명의 안색은 더욱 안 좋아졌다. 하긴 애초에 한위에게 대회 참가를 제안한 건 어디까지나 빈말일 뿐, 진짜 출전은 막으려고 했으니 지금 기분이 별로겠지. 그러나 연은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의 안색은 더욱 안 좋아질 것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회 진행자가 본선의 시작을 알리자 첫 번째로 겨루는 아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가 아래로 내려갔다. 무대 위에는 고수 둘이 자리했다. 미숙한 실력으로 다투다가 혹여나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서른두 명의 싸움은 고만고만했다. 서로 각 문파나 세가의 초식을 외우며 목검을 이리저리 맞대는 것이다.
그러면 어른들은 진지하거나 혹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규칙은 간단했다. 몸에 타격을 세 번 이상 허용하거나 검을 놓치면 지게 되어 있었다.
연이 흘깃 보니 일반 관람석에 앉아 있는 모란이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귀빈석도 마찬가지라, 자신의 문파나 세가 소속이 아니라면 대화를 나누기에 바빴다. 남궁세가 사람들을 보니 설마 하는 얼굴로 한위를 보며 뭐라 수군거리고 있었다. 한위의 차례는 세 번째였다.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다음은 남궁세가의 남궁한위, 그리고 화산파의 공소진입니다!”
마침내 한위가 나올 때가 되자 사회자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연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한위가 대련장 위에 올라가는 걸 주시하였다.
한위의 상대는 화산파의 직계 제자로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둘은 서로에게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한 다음 바로 허리춤에서 목검을 빼 들며 자세를 잡았다. 한위가 싸우는 것은 처음 보는 연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너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차를 두어 번이나 더 마셔야 했다.
화산파의 직계 제자, 공소진이 먼저 앞으로 몸을 날려 덤볐다. 실제 싸움이 아닌 대회였기에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초식을 외쳤다. 아직 미숙하여 매화꽃 향기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이를 고려하면 검술은 정석적으로 나무랄 곳이 없었다.
“매화십이검(梅花十二劍), 매화지란(梅花枝欄)!”
모두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놀라운 일은 다음으로 이어졌다.
한위는 상대가 바로 지척에 이르기까지 몸을 낮춘 채 가만히 있다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우웅,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압도적이었다.
공소진은 처음 한 번은 어찌 겨우겨우 막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아니었다. 한위가 검을 두 번 간단히 휘둘렀을 뿐인데 딱 하는 소리가 나며 상대의 목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빈손이 되어 버리고 만 공소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건 공소진뿐만이 아니었다. 정작 공격을 한 한위조차도 상대가 그리 쉽게 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귀빈석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름이 남궁한위라고?”
누군가가 다시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세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니 두셋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태였다. 놀랄 만도 했다. 그 누가 세가의 찬밥 신세였던 한위가 이런 실력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연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는 놀란 빛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거, 남궁인 장로께 큰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구나.”
그 후로 대회는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처음 대결한 상대가 유별나게 실력 차이가 났었는지 그 후로 한위는 한 번에 상대를 승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어렵지 않게 곧잘 이겨 내고는 했다. 두 번째 상대는 두세 번 검을 맞부딪치다가 견디지 못하고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한위가 몰아붙이는 힘이 강하고 무거운 탓이었다. 다음 상대는 좀 더 오래 버티기는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한위와 검을 맞대는 것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연은 한위가 완전히 자랐을 때 어떤 방식의 검을 쓰는 무인이 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며, 그만 가슴이 다 뛰고 말았다. 한위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과 남궁세가 검법 중 중검의 묘리, 모란이 가르쳐 준 거친 싸움 방식이 섞이니 상대하기 어려운 검법이 되는 것이다.
‘검을 부딪치기조차 싫은 상대가 되는 것이다.’
연은 모란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목검이라서 다행이었다. 한위의 기세는 사나웠고 또한 어딘가 야만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모란에게서 배운 것이겠지…….
검술 실력뿐만이 아니었다. 대회를 지켜본 결과 연은 알 수 있었다.
모란은 단순히 한위의 검 실력을 키워 준 것만이 아니다. 창연각에서 대체 또 무슨 비급서들을 들고 나왔는지 한위는 남궁가의 무공을 알뜰히 펼치고 있었다.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은 물론이고 천풍검법(天風劍法)에 천리호정신법(千里戶庭身法)까지 펼치는 걸 보며 연이 미약하게 신음했다. 연오를 보니 얼굴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한위가 펼치는 무공들은 영명이나 그 직계에만 허용되는 것들이었다.
‘훔친 비급서들의 무공을 죄다 한위에게 가르쳐 놓으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아니, 연은 애초에 모란이 어떻게 한위에게 저 무공들을 가르쳤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모란의 실력이 대단한 거겠지, 어렴풋이 가늠할 뿐이었다.
마침내 본선은 모용세가의 여식 모용령과 겨루는 최종 결승까지 다다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의 실력에 모용령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얼굴이 굳은 건 모용령뿐만이 아니었다. 모용이라는 성씨를 듣는 순간 연의 얼굴도 굳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연이 다른 생각은 잊었다. 지금은 한위에게 집중할 때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위가 포권지례를 했다. 상대도 말없이 포권지례를 했으나 얼굴은 영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란과의 대련에 비하면 그런 태도는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한위가 목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연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한위에게 있어서 모란과의 대련은 꽤 가혹한 시간이었다.
아공간은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땅이 있을 뿐. 하늘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었다. 공기가 무겁고 낯설어 현실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으며, 그를 가르치는 상대는 그리 너그럽지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견딜 수 없어서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런 그에게 모란은 견딜 수 없다면 얼마든지 말을 하라고 했으나 그게 오히려 한위의 오기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남궁이라는 성씨를 빼앗기기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영명의 아들로 인정받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한위는 순수하게 승리하고 싶기도 했고, 우승하여 연과 연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또한 스승을 두고 배워 나가며―물론 모란은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 하였으나― 무술이란 것이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 깨달은 탓도 있었다. 무술은 단순히 싸워 이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상대와 맞서면서 한위는 직감적으로 모용령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건 모용령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다.
“비려십오검(飛櫚十五劍) 섬광지천(閃光支天)!”
모용령의 목검이 날카롭고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한위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보법을 밟아 도리어 빠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모용세가의 쾌검도 쾌검이었으나, 남궁세가의 쾌검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
한위의 검술은 하늘을 나는 듯이 가볍고 빨랐다가도 상대의 검에 맞부딪칠 때면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서툰 감이 있어도 쾌검과 중검(重劍)의 사이를 제법 자유롭게 오가는 실력에 세가의 장로 둘이 저도 모르게 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둘은 잠깐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맞부딪쳤다. 모용가의 빛처럼 빠른 검술과 남궁세가의 번개와도 같은 검술로 인해 목검이 부딪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둘의 검이 연신 쩡쩡 울리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한참을 검을 맞대다 공격이 먹히지 않아 답답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한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세 걸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모용령의 검술이 화살이라면 한위의 검술은 제왕검형(帝王劍形)의 오의를 담아 마치 창과 같았다. 화살과 창, 결과는 정해진 것이었다.
무겁게 떨어지는 목검을 막으려다가 모용령은 그만 저만큼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목검을 놓치고 만 걸 확인하자 매섭게 모용령을 몰아붙이던 한위가 그제야 검을 내렸다.
모용령은 어지러운지 고개를 흔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다시 쥐는 손이 떨렸다. 분한지 입술을 깨물면서도 잘 교육받은 무가의 자식답게 모용령은 패배를 인정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이겨 놓고도 믿기지가 않아 한위가 잠깐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소룡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서 있는 한위에게 다가와 진행자가 팔을 들어 보이자 관중석에서 함성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회 진행자가 내공을 실어 큰 소리로 쩌렁하게 외쳤다.
“이번 소룡대회의 제일소룡은 바로…… 남궁세가의 남궁한위 공자입니다!”
대회 진행자가 한위의 우승을 외쳤을 때 연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귀빈석에서 역시 남궁세가라고 떠들어 대는 동안 정작 남궁세가가 앉은 자리에는 침묵이 깔렸다. 장로들 몇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 남궁한위의 스승이 누구인가?”
“내가 알기로 남궁한위는…… 가주님이…….”
말꼬리를 흐리며 한 장로가 남궁영명을 바라보았다. 따라서 고개를 돌린 연이 조금 놀랐다. 영명이 분노할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마치 귀신을 보는 것처럼 한위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한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영명은 잠시 후에야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는 애써 표정을 고쳤다. 사방에서 그에게 축하 인사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남궁 가주. 저런 아들을 두고 계시다니 세가에 큰 복이겠군요.”
지인의 축하에 억지로 웃어 보이기는 했으나 영명은 축하 인사에 수긍까지는 하지 못했다. 연은 영명의 처음 반응이 조금은 의아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뻤다. 이제 한위가 남궁세가에서 전처럼 그리 찬밥 취급을 받지만은 않을 것이다. 강호란 그런 곳이었다. 철저하게 실력과 힘으로 평가받는 냉정한 세계다. 연은 그 누구보다 그 순리를 잘 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승리에 남궁세가의 일원들이 기뻐하지도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소룡대회의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제일소룡은 한위였고, 제이소룡은 모용령이었다. 제삼소룡은 소림사의 직계 제자였다.
연은 한위가 상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소룡대회의 인기가 높은 데에는 주어지는 상품이 대단한 까닭도 있었다. 각 소룡은 명인(名人)이 제작한 진검과 황금 한 냥씩을 받았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한위는 떨리는 손으로 소룡대회의 주최자에게서 상품을 건네받았다.
진검과 황금 한 냥은 그 나이 대에게는 퍽 진귀할 것이나, 한위는 그보다도 이날의 승리 자체가 더 값지고 좋다고 느껴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좋은 날이었다. 사람들이 한위의 이름을 외치며 작은 영웅이며 인재고 용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문득 콧날이 시큰해져 한위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이제는 가주님이 인정해 주실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을 가지면서도 한위의 시선은 먼저 연과 연오에게로 향했다. 두 형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니, 놀랍게도 영명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영명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영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받은 번쩍이는 진검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한위가 고개를 들었다. 부친과 시선이 마주한 뒤 그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한위가 앞자리에 이르렀을 때 영명의 눈은 거의 불을 뿜어 내는 듯 형형했다.
“대체, 그 무공들은 어디서 배웠느냐?”
연이 고개를 휙 돌려 모란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그것도 하필이면 창연각을 그렇게 뒤집어 놓은 시점에서! 모란은 연이 노려보자 히죽거리며 웃을 따름이었다.
“저, 그게…….”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영명은 약속한 대로 아들로 인정해 주기는커녕 크게 호통을 쳤다. 사람들이 수런거리자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한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상품으로 받은 검만 꽉 쥐었을 때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연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영명도 연도 놀라 연오를 바라보았다. 연오는 침착한 태도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한위의 곁에 다가가 섰다. 가장 믿었던 첫째 아들의 행동에 영명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뭐라 했느냐?”
“아버지께서 바쁘시어 미처 막내아들에게 가르침을 줄 시간이 없으셨기에, 제가 직접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위 또한 응당 남궁가의 무공을 배울 만한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
“만약 제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가르쳐 주시는 대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에 연오는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영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사방에 그를 바라보는 눈과 귀가 많았다. 여기서 연오를 나무라게 되면 한위에게 일부러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왜 남궁가의 가주는 재능이 뛰어난 아들을 유달리 차별하였는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이 영명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래, 아주 잘했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영명이 이를 악물었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던 아들들이 어째서인지 최근 들어서는 유독 그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아주 잘하였어!”
노한 영명이 휙 옷자락을 휘날리며 뒤돌았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장로들이 서둘러 따랐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중 유독 남궁사영만이 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곧 고개를 돌렸으나 연의 마음에는 이상하게 찜찜한 마음이 남았다. 그러나 남궁사영에 신경을 쓸 겨를이 되지 못했다.
“한위야.”
셋만 남게 되자 드물게도 피곤한 얼굴로 연오가 불렀다. 영명 앞에 섰을 때와는 달리 한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연오는 연에게도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질문이나 추궁은 없었다.
“네 스승이 잘 가르쳤나 보구나. 보아하니 남궁인 장로님은 아니실 테고.”
연의 등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영명이라는 위기를 넘겼더니 이번에는 연오다. 연은 잠시 모란을 향해 폭력적인 충동이 일었다……. 한위는 이런 상황에서 둘러댈 만한 주변머리가 되지 않아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은…인이 계셨습니다.”
“그래? 잘된 일이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연오는 침묵했다. 연이나 한위나 그 침묵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연오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는 너희들이 남궁세가보다는 스스로를 위하기를 바란다.”
“형님?”
예상 밖의 말에 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연오는 손을 뻗어 한위가 품에 꼭 안고 있던 진검을 잡았다.
한위가 스르륵 놔 주자 그가 진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좋은 검이로구나. 중얼거린 뒤에 그는 한위의 허리춤에 직접 그 진검을 매달아 주었다. 불안해하던 한위는 그 행동에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무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조심하거라. 세상 인연이란 것이 모두 좋게 끝나는 것은 아니니.”
그리 말하며 연오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창연각에 침입자가 발생했을 당시 연오도 세가 내에 있었다. 그가 머무는 화월당은 창연각 바로 근처였던지라 빠르게 장소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복면을 쓴 괴한과 그 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궁사영이었다. 연오는 바로 검을 빼 들었다. 천풍신법(天風身法)으로 마치 폭풍같이 들이닥쳤고, 어찌나 그 기세가 맹렬했던지 처음 내디딘 발자국이 움푹 패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위력에도 맞붙은 상대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상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아귀힘으로 검신을 쥐고 있었다. 연오가 이를 악물었다. 괴한이 지껄였다.
“그쪽과는 싸울 생각이 없는데.”
“먼저 침입해 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일단 뒤로 물러나자 상대는 순순히 검신을 쥐었던 손을 놔 주었다.
연오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제가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창연각에 들어온 이상 그대로 놔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고수가 대체 왜 창연각에 침입하여 무공 비급을 가져가는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다시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그가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를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괴한이 입을 열었다.
“동생을 위해 빌려준다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말에 연오가 잠시 몸을 멈추었다. 동생? 연과 한위, 둘 중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복면 아래로 괴한이 히죽 웃었다. 어쩐지 익숙한 자였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서히 뒤로 물러나던 괴한의 인영이 부서진 건물 벽 그림자에 잠겼다. 깜깜한 그림자 속에서 눈만이 기묘한 빛으로 빛났다. 마치 짐승 같은 눈이었다. 온몸에서 위압감이 넘쳤다.
“이런 어두침침한 건물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장식되어 있느니, 네 동생을 위해 쓰이는 게 백번 낫지 않겠느냐? 눈과 귀가 있으면 너도 네 동생이 어떤 고초를 받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을 터. 고맙게 생각하거라. 네가 못 하는 일, 내가 대신 해 주는 것이니.”
그 말만 남겨 놓고, 괴한은 무려 오 층 높이의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연오가 서둘러 달려가 보았으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공중에서 증발한 것만 같았다. 그는 무사들이 달려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괴한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날부터 연오는 내밀하게 연과 한위 주변의 인물들을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둘의 주변에는 창연각에 침입할 만한 수준의 고수가 없었다. 주강은 연오보다 좀 더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으나 창연각에 침입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가 범인이었다면 검을 맞부딪친 순간 연오가 바로 정체를 깨달았을 것이다.
실마리가 없으니 괴한이 헛소리를 지껄인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소룡대회 날이 되자 연오는 알 수 있었다. 한위가 펼치는 무공들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 그 괴한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명이나 장로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가에서 한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러니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 고수가 훔친 비급서를 한위에게 가르쳐 준 것 같다고.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연오는 입을 다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세가 내에 정체불명의 고수가 있다는 것을 마냥 좋게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한위의 편을 들어 주는 것 같긴 했으나……. 혹시 한위를 가엾게 여긴 장로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장로였다면 이 역시 연오가 모를 리 없었다.
창연각에서 아주 잠시 마주했을 뿐이나 연오는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짐승 같으나 짐승만은 아닌 그 눈빛……. 그자는 과연 무슨 목적으로 한위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그날 그자의 까마득한 실력을 체감한 연오로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직은 한위에게 이런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거든 꼭 내게 말해야 한다. 알겠느냐?”
“꼭 그리하겠습니다, 형님.”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한위가 굳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연오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위를 보았다. 다음으로는 연이었다. 연을 향하는 걱정의 시선은 또 종류가 달랐다.
“연이 너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내게 말을 했었어야지.”
“하지만 그리하면 형님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습니까?”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영명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내가 난처한들 너희들이 난처한 것보다 더할까?”
연은 잠시지만 연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연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소룡대회가 끝난 후에는 항상 축제와 연회가 열렸다. 그걸 잘 아는 연오가 품을 뒤적이더니 전낭을 하나 내놓았다. 그러고는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를 떠났다.
연이 한숨을 쉬며 전낭을 바라보았다. 한위야 그렇다 쳐도 나까지 아주 어린아이 취급을 하시는군.
“……왜 더 추궁을 하지 않으셨을까?”
“형님?”
“아니다, 한위야.”
아무것도 모르는 한위가 의아한 얼굴로 연을 바라보았다. 연오가 나서 주기는 하였으나 그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 외에는 딱히 한위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왜 더 추궁하지 않는지 연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넘어가 주려는 걸까? 이런 심각하다면 심각한 사안을?
그건 그렇고…….
“대체 어디에 간 거야?”
연이 짜증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위에게 훔친 비급서의 무공을 가르쳐 놓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런데 분명 아까까지는 관중석에 있었는데 연오와 대화하는 그사이 모란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중에 어련히 나타나겠거니 싶었던 연이 한위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늘 훌륭한 경기였다. 정말 열심히 잘했구나.”
“아, 아닙니다. 이게 다 형님과 그분 덕분이에요.”
그리 말하면서도 한위의 얼굴은 이제껏 본 중에 가장 밝았다. 연은 이것이 한위의 인생 중 가장 처음으로 쟁취해 낸 승리라는 것을 알았다. 응당 축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연회장을 나서자 밖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소룡대회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드니 그만큼 가게의 매상도 오르고 객잔의 숙소도 가득 차는 까닭이다. 연이 힘 있게 한위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늘은 너의 날이니 먹고 싶은 것이나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마음대로 누려도 된단다.”
대회가 진행되는 사이 어느덧 날은 저물어 별이 반짝이며 뜨기 시작했다. 별들 아래로는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이 등을 켜 불을 밝혔다. 이런 때가 아니면 보기 드문 야시장이었다. 야시장을 난생처음 보는 게 분명한 한위의 눈도 별처럼 빛났다.
그들은 시장을 거닐었다. 한위는 모든 것을 다 한 번씩 보고 경험하려고 했다. 소룡대회의 우승자를 알아본 상인들이 공짜로 꼬치나 빵 따위의 음식을 쥐여 주기도 했다. 연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 모든 것들을 조금씩 맛본 한위가 형님, 하고 조용히 연을 불렀다.
“저는 형님이 처음 정원에서 당과를 주셨던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은, 형님과 함께 처음 시장에 나갔을 때가 더 행복했고, 지금은……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가주님께서 저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셨는데도 그래요. 이상해요.”
연이 쓰게 웃었다. 영명은 주변인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근처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자였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연이 돌려 말했다.
“행복은 그자가 주는 게 아니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지.”
연의 말에 한위가 우물쭈물했다. 이전의 한위에게 영명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까마득한 위치의 존재였다. 영명에 의해 제 삶이 좌지우지되었던 탓이다.
여전히 영명은 어려운 사람이었으나 대회에서 우승을 한 오늘은 달랐다. 더는 영명은 한위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도리어 절대적인 존재는 따로 있었다. 그렇다면, 하고 한위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행복은 바로 술에서 오지!”
뒤에서 누군가 덥석 묵직하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 바람에 화들짝 놀란 연이나 한위가 바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뻗으려다 말고 목소리의 주인을 인지했다. 연이 눈을 감으며 이를 꽉 악물었다. 백…모란 진짜……. 뒤에서는 술 냄새가 지독하게 풀풀 풍겨 왔다.
“으흠. 여기 술 정말 끝내주는데그래. 꼬마도 한번 마셔 볼래?”
한위가 솔깃하여 모란이 흔드는 술병을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는 걸 연이 탁 중간에서 낚아챘다. 화홍주? 비싼 것도 사 드셨군그래. 안 그래도 따질 것이 있던 연이 따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훔친 비급서의 무공을 한위에게 가르쳐 주었어?”
“이왕 손에 들어온 건 사용해 줘야지, 안 그래? 게다가 어차피 뭐 그 형님이란 자가 잘 수습했을 거고.”
“아니! 대체 창연각을 그렇게 뒤집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에게 훔친 무공 뻔뻔히 가르쳐 주는 심보가…….”
무책임한 행동에 하도 어이가 없어 연이 따지고 들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모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더니 둘을 덥석 잡고 질질 끌고 갔다. 한위는 끌려가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이 과장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또 행복을 줄 수 있는 게 뭔지 알아?”
“이거 좀, 놓고 걸어!”
“쉬쉬, 가만있어 봐. 좋은 거 보여 줄게. 내가 돌아다니다가 오늘 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연이 체념하여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렇듯이 팔 힘이 굳세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모란이 향한 곳은 야시장에서 좀 떨어진 언덕이었다. 다소 경사가 있어 연은 올라가면서 헐떡거렸다. 사실 이미 대회를 구경하고 야시장을 돌아다닌 것만으로 오늘분 체력을 다 소진한 차였다.
“도대체, 뭔데…… 여기까지…….”
야시장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주위가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보이는 빛은 달빛 정도뿐이었다.
밤눈이 어두운 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핑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거대한 폭죽이 터졌다. 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소룡대회는 당일 밤에는 항상 폭죽을 터트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곤 했다.
환하게 터지는 빛으로 보니 한위는 완전히 넋을 놓은 상태였다. 연달아 터지는 폭죽은 마치 만개하는 꽃을 닮은 듯도 했다. 아니, 꽃 따위를 닮았다기보다는……. 아무튼 흔한 구경거리는 아니니 연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위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행복은 이런 것에서 오나 봐요.”
그 말을 들으니 귀엽기도 하고 어쩐지 이유 모를 안쓰러운 감정이 들기도 하였다. 한동안 한위를 바라보던 연은 고개를 돌렸다가 모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부터인가 모란은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어색하여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연의 시선을 붙들어 맨 건 모란의 입가에 걸린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 연이 휙 고개를 돌렸다.
돌연 예전에 모란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짤막하나마 남녀 간 정교(情交)를 나누어 본 적은 있었으나, 아직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마음 깊이 은애해 본 적은 없다. 여자는 물론이거니와 남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어쩐지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심지어 그 대상이 모란인데도.
또다시 폭죽이 크게 터졌다. 만발하는 빛 무리가 쏟아져 내려와 연의 가슴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