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三章 : 연회 (4/19)

三章 : 연회

오늘도 정원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

일어나자마자 꽃부터 봐야 하는 연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은 약초로도, 식용으로도 쓸 수 없는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꽃이다. 연은 천천히 걸어가 나뭇가지를 쳐 냈다. 어차피 겨울이라 내버려 두면 금세 시들어 떨어질 테지만 그 잠시간조차 보기 싫었다.

정원에 꽃이 핀 지 오늘로 한 달이나 되었다. 이제는 처음처럼 거대한 규모로 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원 구석구석 숨어서 핀 꽃나무 가지들은 연의 심기를 거스르기엔 충분했다. 자신의 정원에 감히 꽃이, 꽃 따위가 피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연은 꽃을 모조리 따서 약용으로 쓸 수 있는 건 말리고 식용으로 쓸 수 있는 건 한위에게 들려 보냈다.

매일같이 제 정원에 꽃을 피우고 가는 건 싫었으나 그와 별개로 모란은 성실했다. 그는 첫날 이후로 꼬박꼬박 늦은 오후마다 연을 데리러 왔다. 연은 면사포를 쓰고 나가 환자들을 치료했고, 모란은 하품이나 하면서 연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시간이 되면 또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한 번쯤은 들킬 법도 한데 한 번도 주강에게 걸린 적이 없었다. 연이 내심 궁금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모란은 설명도 해 주었다.

“그것도 마법의 일종이지. 너 대신에 비슷한 기척을 남겨 두고 오는 거야.”

물어본 적 없다고 쌀쌀맞게 대답하긴 했으나 마법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무공이란 대개 공격과 방어에 치중된 것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전투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맥을 상세하게 짚어 보거나 상대에게 전달할 때를 제외한다면 내공은 좀 더 강력한 공격을 위해 주로 사용되곤 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이 사람을 해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모란이 사용하는 마법이란 완전히 종류가 달랐다. 공간을 뒤틀고 꽃을 피워 낸다. 불을 터트리고 물을 흘려보내며 바람을 일으켰다.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술…….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무림에 공개된다면 사술(詐術)이라고 지탄받겠지.’

똑똑 딴 꽃잎 덩어리를 흙 속에 파묻어 버리며 연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사술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술은 대개 비열하고 비겁한 성격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모란의 마법은 기이하고 거짓말 같아도, 보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빌어먹을 꽃을 피울 때만 빼고.

‘꽃을 피운다면 약초도 피울 수 있을 텐데.’

하루 이틀 사이에 자라나는 약초라니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었다. 당장 환자에게 필요한 약초를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른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심각한 질병에는 대개 희귀하고 값비싼 약초가 필요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꽃잎을 완전히 땅속에 파묻고 나자 마음이 편해진 연이 의자에 앉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모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일까? 한 달 전 이어진 내기는 아직까지도 종결이 나지 않고 있었다.

연은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했다. 모란에게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마을 사람은 아니다. 그 사람들 중 반은 자신의 이름도 몰랐다. 연은 대개 마을 사람들의 대화에서 ‘그 싸가지 없다는 남궁세가 둘째 도련님’ 정도로 언급되곤 했다. 이름을 모르는데 이름의 의미까지 알 리가 있나.

그렇다면 세가에서 일하는 시비나 하인, 혹은 무사란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해도 범위가 너무 넓었다. 어리다는 건 모란의 나이가 열여덟 살이니까 열여덟 살보다 어리단 의미인가? 아니면 내 나이보다 어리다는 걸까?

하지만 모란의 나이를 기준으로 잡으면 열여덟보다 아래인지조차 모호했다. 모란이 말하는 말투는 전혀 어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몸은 어리지만 그 안에 깃든 정신은……. 미간을 접은 연이 중얼거렸다.

“대체 그놈은 나이가 몇이지.”

“이백하고 오십육.”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연이 퍼득 굳었다. 빌어먹을 순간이동, 하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모란이 정자 지붕 위에 앉아 있다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잠시 후에 연이 자신이 들은 소리를 의심했다. 이백오십육? 스물다섯이라는 걸 잘못 들었나 싶었다.

“……스물다섯 살이라고?”

“아니, 이백하고도 반백 년을 더 살았다고.”

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이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고수들이 백 살을 훌쩍 넘어 살았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백이라니. 어떻게 사람이 이백 년을 넘게 살 수가 있나?

“아니지, 이백사십인가? 용의 둥지에서 한잠 잔 게 이십이던가, 삼십이던가…… 영 헷갈려서 말이야. 뭐 십 단위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적어도 저 소리가 사실이라면―사실이라고 믿는 건 아니지만― 모란이 던져 준 단서는 ‘모란보다 어린’은 아닐 것이다. 이백오십 살보다 오래 산 사람을 찾는 게 더 쉬울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오래 사는 건 신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겠지만.

연이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얼굴로 모란을 보았다.

“왜 벌써 왔어? 올 시간도 아닌데.”

“심심해서 놀러 와 봤어.”

“그럼 꺼져.”

험한 소리를 해도 모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옆에 앉기에 연이 노골적으로 싫은 낯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자신의 손에서는 오늘 따다 버린 꽃향기가 풀풀 났다. 오늘따라 향기가 지독스러운 꽃이었다.

“요즘 이 근처에 떠도는 소문이 하나 있거든. 들어 볼래?”

한위가 오는 것만 아니었다면 진작 방 안에 들어가 버리는 건데. 연으로부터 돌아오는 대꾸가 없어도 모란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밤마다 백면공자(白面公子)가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준다는데 실은 화타(華佗)가 환생한 거라고 하더라고. 혹은 편작(扁鵲)의 후계자라는 말도 있고.”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백면공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화타의 환생이나 편작의 후계자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문이었다. 게다가 연의 실력은 아직 은록을 따라가지 못했다. 소문은 항상 과장된다지만 이건 좀 심했다.

“그런 소문은 곧 사라지기 마련이야.”

“과연 그럴까…….”

모란이 기분 나쁘게 히죽히죽 웃었다. 연이 이를 악물었다. 종종 얼마나 약을 올리는지 백모란을 두들겨 패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건 후회스러웠던 과거를 조금이라도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숨만 푹 쉬자 모란이 더 놀리는 건 그만두고 잔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나비가 팔랑거렸다.

“그 마법이란 거…….”

모란의 손바닥 위에서 이상한 빛 무리가 춤을 추는 걸 보면서 연이 머뭇 말을 꺼냈다.

“혹시 나도 배울 수 있나?”

말을 꺼내면서도 연은 그다지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보통 이런 특별한 기술들은 일인전승(一人傳承) 혹은 혈육에게만 허락되는 형태가 많았다. 오대세가가 그들의 중요한 내공심법이나 무술을 직계와 방계에게만 허락하는 것처럼.

모란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빛 무리를 흩어 버리며 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줄 의향도 있었다.

“가르쳐 줄 수야 있지. 하지만 안 그럴 거야.”

“왜? 돈이 많이 들어서?”

백모란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그가 기지개하듯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는 의자에 길게 드러누웠다. 그 태도를 바라보는 연의 시선이 떫었다.

무림에서는 이따금 사람의 행동거지를 구대문파 오대세가에 비교하곤 했다. 가령 화산파(華山派)처럼 정의롭다거나 아미파(峨嵋派)처럼 엄격하다거나. 모란은 그런 식으로 비교하자면…… 개방(丐幫)에 가깝다고 연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개방의 거지들도 아무데나 드러눕고 앉거든.

“돈은 이제 필요 없어. 지난번에 빌렸던 돈도 갚은 지 오래고.”

금 열 냥을 벌써 갚았다고? 연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의자 아래로 팔을 편하게 늘어트리며 모란이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또 짜증 나게 모를 소리만 했다.

“내가 있었던 세계면 모를까 여기서 마법은 안 돼. 재능은 둘째 치고 연료가 없어. 그럼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시전자의 근원을 연료로 끌어다 써야 하거든. 결과적으로 쓸 때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꼴이 되지. 특히나 너는 그런 몸이라 더더욱 배워서는 안 돼.”

……생각해 보니 모란에게 배우는 과정은 별로 즐거운 과정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이렇게 성미를 긁어 대는데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얼마나 더 사람을 미치게 하겠는가? 게다가 모란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 순간 그와 자신은 사제 관계가 된다. 연이 치를 떨었다. 모란을 스승으로 모시느니 안 배우고 만다. 저 사내를 사부라고 부르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갉아먹는다면서 당신은 왜 매일 마법을 쓰는데?”

“아, 꽃 피우는 거 말이야? 그건 마법 아냐.”

대체 꽃을 피우는 것과 마법으로 만들어 내는 기이한 현상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나 싶었지만 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알아듣지 못할 설명이나 할 것 같았다.

백모란이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째. 전처럼 이유 없이 증오스럽고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연은 매우 짜증이 났다. 거슬리고, 성가시고, 종종 저 입 좀 다물게 하고 싶고…….

그렇다고 못 오게 막을 수도 없었다. 망할 순간이동은 연이 사용할 때는 편하고 좋았지만 모란이 자신에게 찾아오기 위해 사용할 때는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는 기술이었다.

“그건 그렇고 곧 네 형님 생일이라면서.”

모란이 손을 휘휘 젓자 흙이 마치 물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팔목까지 감겼다. 원치는 않았지만 한 달 정도를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다 보니 연은 알 수 있었다. 모란은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건 어떻게 알았……. 아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안휘성은 마을이며 시장, 상회 등 거의 모든 것이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안휘성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세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안휘성에 바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세가의 소가주나 되는 사람의 탄생일에는 항상 화려한 연회가 열린다. 그렇게 되면 세가에서 구매하는 엄청난 양의 식재료나 물품들 덕에 근처 상회나 소상인들의 매상은 부쩍 오르곤 했다. 안휘성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세가에서 벌어지는 연회의 즐거운 분위기가 퍼지는 것이다.

연오의 생일은 지금으로부터 팔 일 뒤에 있었다. 연으로서는 나름 이 몸으로 돌아온 뒤 첫 번째로 있는 즐거운 일이니 각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오가 누구인가. 그 남궁세가의 소가주로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난 사람이었다. 게다가 가지고 싶은 것도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위치였다. 때문에 연은 한참을 연오의 생일 선물로 고민을 해 왔고 아직까지도 정하지 못했다.

“선물로 뭘 할지 고민 중이지? 아직 못 정했지?”

그런 연의 고민을 읽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모란이 은근한 어조로 쿡 찔러 왔다.

“내가 추천해 줄까?”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연이 모란을 째려보았다. 뭘 안다고 형님의 선물을 추천해 주네 마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돌아온 지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렴 모란보다는 자신이 연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연이 째려보거나 말거나 모란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남궁가의 소가주는 거북이를 그렇게 좋아한다네.”

“거…북이?”

귀가 솔깃해 물어봤다가 연은 곧 자존심이 상했다. 안 듣고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는데 왜 매번 저놈의 말에 대꾸하고 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거북이. 거북이 모양으로 된 물건은 죄다 수집해 왔다던데. 언제 본 적 없어?”

그러고 보니……. 연오가 대(帶)에 옥으로 만든 작은 거북이를 자주 달고 다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잠시만. 그런데 대체 모란은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아는 거지? 연도 매일 보면서 몰랐던 걸 모란은 알고 있었다. 연만 모를 것이냐,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모르는 게 확실했다. 그간 연오의 연회 때마다 거북이 모양의 선물이 들어온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솔깃하긴 했다. 거북이, 거북이라…….

예로부터 거북이는 십장생(十長生)중 하나로 장수를 상징했다. 연이 바라는 바와도 일치하는 상징이다. 그는 빨리 연오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어 가능한 오래오래 다스리기를 바랐다. 게다가 모란의 말대로 거북이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면 연오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조만간에 나가 보기는 해야 할 것인데.’

한위가 도착한 건 바로 그때였다. 오늘도 여지없이 수풀을 바스락거리며 나타난 한위는 한 달 전과 달리 통통하니 살이 잘 올라 있었다. 키도 부쩍 컸고 무엇보다 건강해졌다는 게 한눈에 보여서 연은 퍽 흐뭇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형님!”

반갑게 부르던 한위의 목소리가 돌연 급해졌다. 왜 그러지? 하던 연은 곧장 까마득해지는 시야에 비틀거렸다.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와르르 쏟아지며 심하게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온몸이 어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곧 바닥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연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발이 시커먼 것에 잠겨 들고 있었다. 어둠, 그리고 또 어둠……. 공허…….

그렇게 까무룩 어둠에 잠겼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듯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연은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모란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아름다운 금빛 고리가 반짝거렸다.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연은 모란의 뜨끈한 손이며 단단한 팔이 제 덜미와 몸을 꽉 잡아 받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이 혼미하여 그런지 무언가 이상하였다. 모란이 길게 숨을 뱉는데 시야 한쪽에서 어떤 반짝거리는 고리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모란이 연을 놔 주었다. 그러더니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고 쉬는 게 좋겠어. 해도 달도 구름에 가리는 날이니.”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어지러워 연이 고개를 저었다. 한위가 울상으로 연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형님, 괜찮으신가요?”

“그래,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심한 현기증이나 기절은 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가 몸속에서 부서지고 으스러져 조각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등은 벌써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선물을 사러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한위에게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은 뒤 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모란은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이 너무 창백하세요.”

“걱정 마렴. 전에도 종종 이랬으니까.”

안심하라는 의미로 연이 얼굴이 희게 질린 한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살 만해지자 그는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오늘 밖에 나가지 말고 쉬라는 것과 해와 달이 구름에 가리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어디 모란이 이상한 말을 한두 번 했었나. 기력이 쭉 빠져 연은 더는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그날 푹 자고 나자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혹시나 몰라 연은 이틀을 좀 더 느긋하게 쉬었다. 그날 까무러치는 듯한 느낌은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괜히 무리했다가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연을 알기라도 하듯 모란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정원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연은 부득불 추위에 떨면서 나가 이를 갈며 꽃을 꺾어 내야만 했다.

한위가 울상으로 찾아온 건 따뜻한 방에서 쉰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식사에 맛있는 간식이 나와 연이 바리바리 싸 들고 연못으로 나갔다. 그런데 한위는 어째서인지 맛있는 간식을 먹고도 별로 기운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한위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연이 부드럽게 묻자 한위는 우물쭈물하더니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생일 선물이요……. 저는 선물해 드릴 것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연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면 한위도 연회에 참석을 하기는 했다. 매번 참석했다가 금방 돌아가서 그렇지, 어쨌든 한위에게 연오도 형님인 것이다.

물론 연오의 생일 연회에서 한위가 선물을 한 적은 없었다. 하고 싶어도 물건도 돈도 없었을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연이 있었으니 한위에게는 상황이 달라진 셈이었다. 몸도 꽤 좋아졌고 하니 한위와 함께 형님의 선물을 사러 나가면 딱 좋겠는데.

연이 잠시 제 몸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외출해도 괜찮을 듯했다.

“그럼 나와 같이 시장에 가 보겠니?”

“네! 형님과 같이 사러 가고 싶어요!”

한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는 품을 뒤적뒤적하더니 낡은 전낭을 하나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하여 보니 안에 동전들이 한 줌 들어 있었다.

“그동안 모은 돈인데, 이걸로 큰형님의 선물을 살 수 있을까요?”

연은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갑자기 그의 것이 아닌 참담함이 밀려왔다. 한위도 영명의 자식이었고 그의 형제였다. 한 푼 두 푼 모은 동전은 객잔에서 한 끼 식사로 소면이나 먹으면 그만일 액수였다. 연은 속으로 분노하였고 영명을 한층 더 혐오하게 되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전낭을 받아 들었다.

“그래. 내게 맡겨 두면 알아서 계산하고 돌려주마.”

아마 전 재산임이 틀림없는 전낭을 한위가 아무런 의심 없이 내밀었다. 연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품에 밀어 넣었다. 신이 난 모습으로 한위가 얼른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연이 들어가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나오니 한위는 시치미 뚝 떼고 정문으로 들어와 구박받는 동생의 모습을 충실히 연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요즘에는 나날이 일취월장하다 못해 즐기기까지 하는 중이었다. 연은 이따금 한위를 가엾게 여긴 시비나 하인이 무언가를 몰래 쥐여 주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리 와라.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나 있으니 짐꾼이라도 해야지.”

“네!”

오늘은 신난 탓인지 한위가 구박받는 동생 역치고는 지나치게 씩씩하게 대답하며 졸졸 따라왔다. 그런 씩씩한 모습에 오히려 시비나 하인들이 더 동정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연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연이 흘깃 주강을 보았다. 주강도 근래에는 한위에게 보이던 쌀쌀한 태도가 많이 가셨다. 아직도 가끔 서늘한 눈빛으로 보곤 했지만 이따금 한위와 조용히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담소를 나눈다니,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는 말 한마디 먼저 건네는 적이 없는 주강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연은 드물게 평화롭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가를 나오자마자 백모란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연의 얼굴이 떫어졌다. 게다가 지난번 심하게 현기증을 앓았던 날 모란이 자신을 부축해 주었던 게 떠오르자 기분이 애매모호해졌다.

“여기서 다 보네. 시장 가는 길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모란이 스윽 연의 곁에 붙어 왔다. 연이 다시 주강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그는 모란의 접근에 제지를 하지 않았다. 모란이 들러붙을 때마다 제지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저 몸에 있을 적 결코 주강과 친분은 쌓지는 않았을 것이다…….

“볼일이나 보러 가시지.”

“뭐어, 내 볼일이 시장에 있어서 말이야.”

지나치게 능글맞은 태도에 주강이 약간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도 하겠지. 이전의 모란이었다면 어디 남궁연에게 이런 식으로 굴기나 했겠나?

연은 답답했다. 정말이지 저 백모란은 당신들이 아는 그 백모란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고 있어? 근래에 청진상회에 새 물품들이 많이 들어왔다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추근거리는 느낌으로 붙어 오며 모란이 권유했다. 연은 그의 권유를 못 들은 척 흘려보냈다.

그러나 흘려보낸 걸 곧 다시 주워 담아야만 했다.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도 가는 곳마다 그가 원하는 거북이를 팔지 않았다. 전부 살아 있는 거북이거나 지나치게 싸구려거나 아예 없거나 했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청진상회였다. 연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상회에 들어가기 전에 한위를 바라보았다. 청진상회에서는 싸구려는 다루지 않는다. 아무리 못해도 물품의 질이 중상은 갔다. 그는 한위의 선물을 청진상회에서 사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한위가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선물을 하게 되면 영명이 의심하고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선물은 두 가지 이상을 사야겠군.’

연회에서 보일 것 하나, 괜찮은 물건으로 하나. 괜찮은 물건은 상회에서 사면 되겠고 연회에서 보일 물건은 대충 제일 싼 것으로 하나 사면 될 것이다. 결정을 내린 연이 상회에 들어섰다.

“아니, 공자님, 모란 대협. 어서 오십시오.”

이번에도 상주 양운이 뛰쳐나와 둘을 맞이했다. 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 모란이 금 열 냥을 갚았을까? 그렇게 짧은 시일 내로? 궁금했지만 주강이 있는 자리에서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운은 연은 알아보았으나 한위가 남궁가의 직계 중 한 명이라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이 데리고 다니는 어린 하인이겠거니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으나 어쩐지 입맛이 썼다. 언젠가는 한위도 남궁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어쩌면 연오의 말마따나 한위는 세가를 떠나 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다…….

“혹시 소가주의 생일 선물을 사러 오셨습니까?”

연을 객실로 안내한 양운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물었다. 연이 앉자 모란도 바로 옆에 앉았다. 그리고 연이 조금 놀랐다. 모란의 앞에 내오는 술이 꽤 귀한 물건이었던 탓이다. 이런 술을 내온다는 건 모란이 꽤 귀한 손님이라는 의미인데. 금 열 냥을 갚았다는 게 정말일까?

‘설마 진짜 도박장에서 돈을 불린 건…….’

모란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술을 단숨에 마시는 그를 흘끔 보면서 연은 양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북이와 관련된 물건을 사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거북이 말씀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양운이 나간 사이 연이 한위를 돌아보았다. 한위는 아까부터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객실에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하고 있었다. 제 아우에게 당과를 하나 쥐여 주면서 연이 물었다.

“한위야, 선물로 무언가 염두에 둔 물건이라도 있니?”

“저어…… 그럼, 검 손질 도구요.”

객실의 화려함에 약간 주눅이 든 한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검 손질 도구? 다시 묻자 한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다고 하면서도 연의 속내는 좀 복잡했다.

보통 무가의 자식들은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자신의 검을 가지게 된다. 첫 번째는 목검으로 시작하여 열다섯이 되면 진검을 선물받았다. 그러나 한위에게는 진검은커녕 낡아 빠진 훈련용 목검 하나조차 없었다. 한위에게도 검을 하나 선물할 수 있게 되면 좋으련만.

곧 양운이 돌아와 연의 생각이 흩어졌다. 그의 뒤로 상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와 탁자 위에 온갖 물건들을 올려 두었다. 온통 거북이뿐이었다. 거북이가 조각된 벼루, 거북이가 그려진 그림, 거북이 찻잔, 거북이 손잡이 단검, 거북이, 거북이, 거북이…….

가장 진국인 것은 살아 있는 흰색의 거북이였다. 홍옥 같은 붉은 눈이, 모르긴 몰라도 부르는 게 값일 터였다.

물건들을 살펴보던 연의 눈에 들어온 건 한 작은 조각상이었다. 손바닥 위에 사뿐히 올라가고도 남을 정도로 아담한 녀석으로 금방이라도 기어갈 듯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조각상치고는 너무 작아 보였다. 그다지 값어치가 없어 보이는 것과는 달리 검은 천 위에 애지중지 모셔져 있었다. 연의 시선이 가는 곳을 눈치챈 양운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공자님,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그 녀석은 야명주(夜明珠)입니다.”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명주! 밤에도 스스로 빛을 내는 돌이 아닌가. 양운이 보란 듯이 방의 창문을 어두운 천으로 가리자 조각상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연도 야명주는 들어 보기만 했지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야명주로 만든 거북이 조각상이라니, 형님도 이건 안 가지고 계실 것 같은데. 몹시도 탐이 났다. 양운은 연이 갈등하고 있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옥을 깎아 만든 녀석들도 멋지지만 역시 야명주를 따라갈 만한 건 없지요. 돈을 쓰시는 보람을 느끼실 겁니다. 가격도 금 석 냥밖에 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가격을 더 불러야 하는데 연 공자님이라서 싸게 해 드리는 겁니다.”

양운은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가격을 불렀으나 금 석 냥은……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연의 주머니에 금 석 냥이 없었다. 세가로 돌아가서 패물을 좀 처분하면 되긴 하겠지만 연오의 생일 선물로 턱 사 버리기에는 부담이었다. 보통은 연오의 선물로 금 한 냥이 좀 안 되게 썼기에…….

“그걸로 줘.”

술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운 모란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금 석 냥짜리를 저렇게 덜컥 산다고? 진짜로? 모란은 아무렇지 않게 품에서 비단 전낭을 꺼내 그 자리에서 금 석 냥을 건넸다. 연은 대체 그가 무슨 짓을 해서 한 달 만에 금 열 냥을 갚아 버리고도 남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양운은 연이 뭘 시도해 보기도 전에 잽싸게 야명주 거북이를 고급스러운 자개함에 넣어 동봉했다.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민하던 물건은 모란이 사 버렸으니 연이 다른 물건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모란이 연에게 야명주 거북이를 슥 내미는 게 아닌가.

“……이건 왜?”

“형님 선물로 하고 싶던 게 아니었어? 가지라고.”

연은 받지 않았다. 어떻게 받겠는가? 금 석 냥짜리 물건은 모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줘도 덜컥 가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 모란이었다. 이게 공짜로 주는 게 아니라는 생각부터 먼저 드는 것이다.

“……대가가 뭔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되는데.”

그럼 그렇지……. 또 무슨 부탁을 할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연은 일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양운에게 검 손질 도구 몇 개만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동안 모란이 다가와 추근거렸다. 슬그머니 어깨에 팔을 얹으며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려 하기에 연이 질색하며 팍 쳐 냈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보나 마나 이상한 부탁일 게 뻔하지. 안 해.”

마침 양운이 검 손질 도구를 가지고 나왔다. 연은 고심해서 손질 도구 세 가지를 골랐다. 그러는 동안 모란이 포기도 하지 않고 야명주 거북이를 들이밀었다. 양운이 검 손질 도구를 포장하면서 오묘한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과묵해서 말로 하지는 않아서 그렇지 이상하게 보는 건 주강도 마찬가지였다. 주강이 알기로 연과 모란은 절대 이런 관계가 아니었던 탓이다. 연이 모란을 거의 죽일 뻔한 날 이후로 둘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주강은 근본적인 것이 달라졌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양운과 주강이 이상하게 보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연과 모란은 실랑이를 벌였다.

“간단한 부탁이야. 일각 정도만 투자하면 되거든. 일단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해도 되잖아. 게다가 듣고 싫거든 나머지 돈은 내게 차차 갚으면 되지.”

연이 이를 갈았다. 이 뱀같이 교활하고 간사한 혓바닥 같으니라고……. 그가 또다시 갈등에 빠졌다. 야명주 거북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걸 살 수 있겠냐 싶기도 했고.

일단은 양운이 있는 자리에서 왈가왈부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야명주 거북이를 받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늘 제법 물건을 판 양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이번에도 양운은 상회 문밖까지 친절히 둘을 배웅하고 나섰다. 그를 뒤로 하며 연은 좀 한적하고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위에게 아까 산 검 손질 도구를 내밀었다. 한위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받았다. 연이 구매한 손질 도구는 모두 세 가지로 하나는 제일 싼 것이었다. 시장 어디 가나 파는 평범한 손질 도구다. 연이 먼저 그것을 가리켰다.

“연회에서는 형님께 이걸 드리렴. 나머지 두 개 중 하나는 네가 가지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 때와 시간이 된다면 네가 직접 연오 형님께 드리면 된단다.”

한위와 연오의 것은 손질 도구 중에서도 고급스럽고 좋은 물건이었다. 자신이 선물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던 한위가 손질 도구와 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제가 형님께 드린 돈보다 훨씬 비싸잖아요…….”

“네가 어디 남이더냐? 다름 아닌 가족인데 이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단다. 내가 바로 네 형인데.”

그렇게 말하면서 연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죄이고 아팠다. 올해 세가를 나갈 때 한위를 두고 나갈 수가 있을까? 한위도 같이 데려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떠나 버리면 한위가 크게 상심할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연의 선물을 받은 한위는 벌써 코가 빨갛게 변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데 안쓰러웠다.

그건 그렇고……. 연이 몸을 돌렸다가 뒤로 물러났다. 아까부터 모란이 왜 이리 지나치게 가까이 붙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연이 일단 주강에게 한위를 맡겨 두고 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주강의 귀에도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연이 멈췄다.

“그래서, 그 부탁이란 게 뭔데?”

오늘 세가에서 나오는데 모란이 우연을 가장해 기다리고 있던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그가 한위를 만나러 그러고 있었겠는가, 아니면 주강에게 말할 것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연에게 용건이 있으니 그러고 있었겠지.

“다른 건 아니고……. 몸을 좀 만지게 해 줘.”

“뭐라고?”

오늘따라 연은 자신의 귀를 여러 번 의심했다. 몸을 만지게 해 달라니 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혹시 다른 의미로 말한 게 아닌가 싶어서 연이 잠자코 더 기다렸다. 그러자 모란이 기분 나쁘게 아래로 몸을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연의 기분은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가슴이나 엉덩이면 좋겠는데. 둘 다 만지게 해 주면 더 좋고.”

“……일각 동안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게 해 달라?”

“음, 상황에 따라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연이 잠시 주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침 한위에게 뭐라 말을 해 주고 있었다. 모양새가 검 손질 도구의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는 중인 것 같았다. 잘됐군. 다시 모란에게 시선을 돌린 연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워, 잠시만!”

“닥쳐!”

모란이 잽싸게 피한 탓에 건물 벽을 공격하고 만 연이 분노로 몸을 떨면서 벽에 박힌 검을 다시 뽑았다. 얼마나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지 않아도 그는 무인이다. 연이 방금 받은 모욕은 이제까지 받은 것 중 최악의 것이었다. 남색을 하는 자들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저놈이 그런 놈인 줄은 몰랐다.

모란이 바로 피한 바람에 안타깝게도 주강이 연의 칼부림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가 바로 몸을 날려 연의 앞을 막아섰다. 주강의 어깨 너머에서 모란이 얄밉게도 지껄여 댔다.

“충분히 오해할 만도 한데, 일단 설명 좀 들어 보면…….”

연은 짜증도 나고 화도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뭐, 일각이면 되는 간단한 부탁?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희롱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간 모란이 자신을 약 올려 대고 정원에 꽃을 피운 것까지 합쳐 한꺼번에 분노가 폭발했다. 연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질렀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아니, 그러니까 오해라니까! 어디까지나, 그래, 의료적인 목적이라고.”

모란의 변명에 연은 더 열 받았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의술을 핑계로 환자를 희롱하는 파렴치한 작자들이었다. 진맥을 하기만 하면 되는데 병명을 알아야겠다면서 상관도 없는 부위를 만지는 작자들!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드물게도 주강이 난감한 얼굴로 연을 말렸다. 모란은 몇 번 더 변명을 하려고 하다가 바로 포기했다. 그러더니 뻔뻔하게도 뺨을 긁적거렸다.

“뭐, 지금은 말해도 안 들을 것 같으니까 이따가 보자구…….”

“어디 가! 이리 안 와?!”

백모란이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쌩하고 도망가 버렸다. 백모란! 연이 소리 질렀으나 모란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연이 비틀거리며 섰다. 검 좀 휘두르고 화 좀 냈다고 숨이 찼다. 주강은 연이 검을 집어넣고 나서야 앞에서 물러났다.

연이 씩씩거렸다. 이러려고 야명주 거북이를 준 거였어? 몸을 만지겠다고 선물을 주는 게 화대와 다를 것이 무엇 있나? 연은 모란이 준 야명주 거북이를 집어 던지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금 석 냥짜리를 길거리에 그냥 던져 버릴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시간이 지나고 나자 연은 침착해졌다.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말없이 저만치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한위에게로 향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나고 흥분했지, 싶은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검을 뽑을 정도는 아니었나?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으나 고개를 저어 쫓아 보냈다.

“미안하다, 한위야.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어.”

“아, 아니에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한위가 연의 검을 바라보았다. 한위도 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경솔히 검을 휘두른 게 아닐까 연은 후회했다. 작은 모욕에도 얼마든지 검을 뽑을 수 있는 게 무인이란 사람들이지만, 적어도 한위 있는 곳에서는 피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한위는 아까 연이 칼부림을 한 모습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세가로 돌아오기 전, 연은 한위를 위해 이것저것 사 주었다. 간식거리, 마른 반찬이나 물을 부어 끓여 먹을 수 있는 재료들, 옷, 신발 등등……. 물건들을 사다 보니 모란을 향한 분노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연은 세가로 돌아와 심부름을 핑계 삼아 한위에게 한 짐 들려 보냈다. 여전히 저조한 기분으로 침소 문을 열고 들어가던 연이 놀라 탁 세게 닫았다. 방 안에 모란이 있었다.

“……너!”

연이 발끈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그런 식으로 튀어 놓고 이렇게 찾아와? 게다가 또 순간이동으로 무단 침입이었다. 뭐? 마법이 뭘 갉아먹으니 안 된다고? 본인은 물 쓰듯이 쓰면서! 연이 가지고 있던 야명주 거북이를 집어 던져…… 아니, 돌려주려고 품을 뒤적이는데 그걸 어떻게 오해했는지 모란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일단 한번 이유라도 들어만 봐. 그래도 납득이 안 가면, 그때는 다시는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일 없을 거야. 내가 언제 약속 안 지킨 적 있나?”

그건, 그건……. 연은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랬다. 약 올리는 일이 매번 있기는 했어도 모란은 약속한 것은 지켰다. 나름대로 은록에게 예의를 갖춰 하대를 하지는 않았으며, 금 열 냥에 대한 신원 보증을 한 이후로는 꼬박꼬박 연을 세가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까 밖에서 느낀 수치심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연은 그런 사실들을 순순히 인정하기가 싫었다. 마지못해 그가 모란에게 기회를 줬다.

“일단, 듣기는 해 보지. 그 이유라는 게 뭔데?”

“좋아. 설명이 길어질 것 같으니 좀 앉아 봐.”

모란이 씩 웃는데 기분 나쁘게도 연은 그가 자신을 매우 귀엽게 여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튼소리 하기만 해 보라는 마음으로 연이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이번에도 모란이 말하는 대로 넘어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 널 봤을 때 내가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서 착각을 했어. 게다가 평범한 인간을 본 것도 너무 오랜만이었고.”

평범한 인간?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백모란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해 대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소리가 반일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무슨 착각?”

“오래 살다 보니 내가 보는 눈이 좋아졌거든. 시력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벌써부터 연은 모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서론이 이렇게 긴지.

“그러니까 말이지, 나에게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이 보여. 이 근원이란 건…… 흠, 뭐라고 해야 이해가 빠를까.”

모란이 생각에 잠겨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이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처음이라, 연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주인에게 혼이 돌아가서 그런지, 백모란이 이런 얼굴이었나 싶었던 것이다.

지난 한 달 사이 모란은 부쩍부쩍 커져서 이제는 정말 막 성인이 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나 잘 그을린 피부, 강건한 근육과 더불어 여전히 막 걸쳐 입는 망나니 같은 옷차림 등이 낯설었다.

“근원이란 건 혼을 말해. 내공이나 기(氣)와는 다르지. 아마 넌 무인이니 본원지기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원지기(本元之氣)란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는 어떠한 기운이었다. 평상시에는 쓸 일이 없고 써서도 안 되는 것이다. 보통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나 쓰는 것이다.

의원으로 활동할 때 연은 중병에 걸린 환자들이 병과 맞서 싸우느라 본원지기가 점차 소모되는 걸 관찰할 수 있었다.

본원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건 병에 걸렸을 때뿐만이 아니었다. 무림에서 이따금 전해지는 소문 중에는 본원지기를 끌어 올려 평소의 배나 되는 가공할 무력을 펼쳐 적에게 승리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보통 그들은 폐인이 되거나 이긴 지 얼마 안 되어 죽어 버렸다고 했다. 그만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본원지기는 과연 어디로부터 왔을까? 어머니로부터?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그건…….”

연은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란의 말을 들으니 의문이 떠올랐다. 본원지기는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아이를 가질 때마다 본원지기가 소모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가지는 걸 꺼려할 것이었다. 모란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본원지기란 것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는 거야. 심장이나 단전 따위가 아니라 더 귀하고 중요하고 깊숙한 곳, 바로 ‘근원’에서 맺어지지. 육체는 이 근원을 담아 놓는 그릇에 불과해.”

어느새 연은 분노나 짜증도 잊고 조용히 모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누구도 들려준 적이 없는 이야기다.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리란 걸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모란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한번 느낀 적 있던 감정이 연을 엄습했다. 이자는 누구인가? 사람이 맞기는 하나? 분명 사람은 사람인데…….

“이 근원이란 것은 보통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정신, 혼, 아르바시, 쿰바, 라이모……. 명칭은 달라도 사람이라면 이 ‘근원’이 존재한다는 걸 반드시 느끼고 있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모란이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근원은 어지간해서는 손상되지 않아. 손상되면 큰일 나니까, 아무렴,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런데 말이다, 연아.”

갑자기 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혹스러워 그가 몸을 휙 뒤로 뺐다. 모란이 그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모란이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은 마치 그 시선에 제 몸이 꿰뚫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근원에는 문제가 있어.”

연의 가슴이 또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눈을 깜박였다. 내 근원에 문제가 있다고? 그러니까…… 내 혼에 문제가 있단 말이야?

“몸이 아픈데 몸에는 이상이 없지? 아무도 네가 왜 그렇게 앓아눕는지 알아내지를 못했지?”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껏 내내 궁금해 왔던 대답을 뜻밖의 인물로부터 들은 탓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연은 수백 수천 번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 몸은 왜 이렇게 아프지? 열에 들떠서 헛소리를 하면서, 기절해 까무러치면서, 좀 힘들게 움직였다고 자리에 주저앉고 구토하면서……. 뭐가 문제일까, 내가 뭘 잘못했나 몇 번이나 곱씹어 보았다. 백모란이 되었을 때는 의원이 되면 알 수 있을까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런데 몸이 잘못된 게 아니라니, 그래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니.

“내 혼의 어디가 문제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어?”

원래도 허약했던 몸이란 건 알지만 모란의 몸을 경험해 보니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모란의 몸에 있으면서 행복했던 이유 중 하나는 더는 숨이 차지 않고 아프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이 몸으로도 그럴 수 있다면 연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지.

연은 저도 모르게 간절한 얼굴을 보였다. 모란이 그런 연의 얼굴을 보고는 뺨을 긁었다.

“그게 잘 모르겠단 말이지.”

“잘 모르겠다니?”

“말했지, 처음에 널 봤을 때 이 몸에 적응을 못 해서 착각했다고. 이 눈으로 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모란이 금색 고리가 영근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색으로 빛나는 고리는 처음에는 하나더니 곧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어째서인지 등골이 선득해 똑바로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모란은 그렇게 한참을 연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툴툴거렸다.

“지금 이 몸으로는 아무리 집중해서 봐도 문제가 있다 없다 정도만 알 수 있단 말이야. 뭘 고치려거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잖아.”

처음으로 희망에 차서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모란이 해결만 해 준다면 아까 전에 있었던 그 무례하고 치욕스러웠던 일 정도는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만져 보면 돼. 직접 만져 보는 것만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거든. 특히 가슴은 근원이 잘 보이는 곳들 중 하나야.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일수록 그래. 믿을 만한 사람 외에는 너를 똑바로 바라보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 거야.”

그런 말은 난생처음 들어 본다. 연의 얼굴을 보고는 모란이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아마 그쪽 세계에서 유명했던 말인 듯했다. 아무튼 연은 이제야 아까 모란의 언사가 이해가 갔다. 그러면 일단 먼저 설명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대뜸 몸을 만지게 해 달라 하면 그 누가 오해하지 않겠냔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가슴은 그렇다 쳐도 엉덩이는 왜? 의아해진 연이 물었다.

“엉덩이는 인체 급소가 아닌데?”

“엉덩이는 뭐랄까……. 근원을 볼 때 보조적인 도움을 주지…….”

드물게도 모란이 말꼬리를 오묘하게 흐렸다. 보조적인 도움이 뭔지는 몰라도 그다지 유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튼 앞으로는 제대로 말해. 아까는 영락없이 남색가인 줄로만 알았잖아.”

그러자 돌연 모란이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뭐지? 저 미소는……. 어쩐지 이제까지 봐 온 표정과는 종류가 다른 것 같은데……. 모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연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남색가가 무어가 어때서?”

“뭐?”

“정말 궁금해서 그래. 내가 남색가면 뭐가 어때서? 그러면 문제가 되나?”

연은 턱 말문이 막혔다. 너무 당연한 걸 물으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어찌…….”

“그것 참 내가 들어 본 중에 가장 이상한 말이로군.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문제라니! 그런 해괴한 소리는 처음 들어 봐.”

모란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남색가의 문제점이 대체 뭐냐는 얼굴로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이 당황했다. 뭐가 문제인지 말해 보라고?

“남자와 남자는 대를 잇지 못하잖아.”

“…….”

‘아니, 그런데 대체 이자는 아까부터 왜 이렇게 귀엽다는 표정으로 보는 거야? 진심으로 나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가?’

연은 다시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모란이 마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사근사근하게 말을 해서 더욱 그랬다.

“그 말대로라면 여색가도 대를 잇지 못하니까 안 되겠지?”

“……그렇지.”

일단 맞는 말이니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대를 잇는 것은 가문의 큰 중대사 중 하나였다. 후사가 없으면 핏줄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남자에게 씨를 받아 자식을 낳기만 하면 되겠군. 대만 이으면 되니까 그 후에는 마음껏 여색을 해도 되고 말이야. 남색가도 밖에서 자신의 핏줄을 이은 자식만 데려오면 그 후부터는 마음껏 남색을 해도 되는 건가?”

“그건…….”

연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옳지 않게 느껴지는데, 반박할 말을 찾지를 못하겠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의무라고 하려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처럼 의무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긴 하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의무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연이 고민하자 모란이 태연한 얼굴로 다른 예시를 꺼냈다.

“아니면 반대로 생각해 보도록 하지. 씨 없는 남자나 여자도 다른 사람과 맺어져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대를 이을 후손을 생산할 능력이 없으니 연애하거나 결혼할 권리도 없는 것이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방금 네 논리가 그것인데?”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모란을 노려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이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말에 허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모란이 또 연에게 있어서는 그 빌어먹을 귀엽다는 식의 표정으로 보면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또?”

“……또 뭐?”

“다른 이유는 없어?”

모란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연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모란은 또, 그 젠장맞을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표정 지었다고 뭐라 할 수는 없으니 연은 속만 부글부글 끓을 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남색가라고?”

“무슨 소리를, 난 남색가가 아니야.”

아니라니 모란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입장인 연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가 지껄여 댔다.

“여자와 남자 모두 좋거든. 나는 만인을 사랑하지……. 각각 매력이 각별해. 만져 보면 알겠지만 둘 다 가슴도 엉덩이도 쥐는 맛이 달라.”

몇 번이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모란은 상종 못 할 인간이었다. 진짜 저질스럽고 야만하기 짝이 없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쥐는 맛이 어쩌고 어째? 연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도 모란은 빙글빙글 웃을 따름이었다. 정말 이자에게 맡겨도 되는 건가 연은 의심이 갔다.

“그럼 슬슬 한번 제대로 볼까.”

모란이 여기 앉으라는 의미로 바닥을 툭툭 쳤다. 확신이 들지 않아 머뭇거리던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야명주 거북이 값은 내가 갚을 거야, 알겠어?”

“그래그래, 알겠으니 얼른 이리로 와서 앉아 봐.”

연이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모란의 앞으로 다가갔다. 풀썩 앉으려는데 모란이 허리를 팔로 감아 잡아당겼다. 졸지에 모란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연이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허리에 감긴 팔이 얼마나 굳건한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최대한 접촉하는 게 좋거든. 보기 힘드니까 이제 얌전히 좀 있어 보렴.”

모란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여 연도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허리에 감긴 팔이나 깔고 앉은 단단한 허벅지가 너무 신경 쓰여서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란은 먼저 연의 목 바로 아래에 검지와 중지를 얹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더니 천천히 손가락을 내렸다.

연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누군가와 한 번도 이런 친밀한 접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손가락이 쓸고 내려간 자리가 화끈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내 모란이 손을 펴 손바닥을 가슴 정중앙에 댔다. 그의 눈에서 금색 고리의 개수가 시시각각 달라지며 아롱졌다.

이 자세가 민망하고 불편하여 연이 천장만 바라봤다. 그가 이상한 걸 느낀 건 차츰 이 상황에 익숙해질 때였다. 허리에 감겨 있던 손이 슬금슬금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느낌 탓이겠지 싶었는데 손이 엉덩이 위에 올라오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보조적인…… 도움을 준다고 했지.’

좀 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입술 꾹 깨물고 있던 연이 소스라쳤다. 모란의 손이 꽉 엉덩이를 움켜쥔 탓이었다.

“이봐!”

발버둥을 쳤더니 모란이 쉬쉬 달래는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에게 하듯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모란은 그래그래, 하면서 말로만 달랬다. 눈에 금빛 고리가 걸려 있지 않았다면 연은 벌써 그를 걷어차고 품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급기야 연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왔다.

“이 개자식, 이거 안 놔?!”

“글쎄, 안 그래도 보기 힘들다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데도 사람이 보러 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아마도 모란이 또 그 마법인가 뭔가로 조치를 해 놓은 게 분명했다. 연은 몸을 들썩여도 봤지만 벗어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한편 연과는 달리 모란은, ‘옳지, 이거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도 연이 심하게 발버둥치기에 팔에 꽉 힘을 주었다.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하고 있었다. 골똘히 들여다보던 모란이 무심코 물었다.

“엉덩이 좀 때려도 될까?”

너무나 기가 막힌 나머지 연이 제 귀를 의심했다. 워낙 혼을 들여다보는 것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모란은 뒤늦게 아차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연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팔을 놔주자마자 또 아까처럼 검을 뽑아 들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 수인족도 꼬리를 틀어쥐었다고 죽이니 마니 했었지. 일단 설명을 해야겠다 싶어 모란이 살살 잘 달랬다.

“내가 엉덩이는 보조적인 수단이라고 했잖아.”

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모란은 엉덩이를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생각했다. ……왜 이렇게 손에 착착 감기지? 살 좀 잘 찌워 놓으면, 더……. 상대가 성인인데도 하는 모양이 어린애 같아서 이상하게 양심에 찔리기는 하는데. 하긴 언제는 내게 양심 같은 게 있었던가. 모란이 속으로 히죽 웃었다.

“감정적으로 격발을 해야 근원이 더 잘 보여.”

“…….”

“정말이라니까? 어떤 감정이든지 극할수록 요동을 치고 난리를 부리거든.”

연은 불신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모란의 말은 사실이었다.

연의 혼은 처음에는 허벅지 위에 앉혀진 것만으로도 잘만 부풀어 오르더니, 차츰 진정이 되자 다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한 모란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전에 하던 대로 좀 더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엉덩이 좀 움켜쥔 건 건드렸다고 할 수조차 없었다. 사실 그는 지금 쉬운 방법을 놔두고 어려운 방법으로 돌아 돌아 가는 중이었다. 연의 혼에 문제가 생긴 게 아무래도 자신과 관련된 것 같으니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혼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이 방법을 알자면 먼저 가장 사람의 혼이 요동치는 때가 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혼은 격렬한 감정적 변화를 느낄 때 거세게 움직인다. 극한 슬픔이나, 기쁨이나, 분노 따위의 감정이 바로 혼이 발하는 빛이었다.

이런 감정이 극에 달할 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죽어 가고 있을 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증오에 들끓고 있을 때, 그리고 바로 성적인 관계를 맺을 때다.

게다가 육체가 왜 혼의 그릇이겠는가. 주둥이가 긴 병 안의 내용물을 만져 보려면 무엇이든 넣어 봐야 한다. 다른 말로는 성기든 손가락이든 혀든 간에 몸속으로 밀어 넣어 봐야 한다는 의미다.

원래의 몸이라면 슬쩍 피부를 만져 보는 것만으로 상태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몸은 그러지를 못했다. 완성이 되지 않은 몸이라 단순히 보고 있는 것도 좀 무리였다.

하지만 연의 성격상 뭐라도 밀어 넣었다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고 덤비거나 혀를 깨물어 버릴 게 분명했다. 유혹한다고 하여 넘어올 상대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기 힘들어도 뭐가 문제인지 한 번쯤 제대로 보긴 봐야 했다. 모란의 눈에는 연이 본원지기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게 보였던 탓이다. 본원지기를 흘리고 다닌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력이 급속도로 새어 나간다는 의미였다. 몸속에서 소진되는 것도 아니고, 밖으로 새어 나간다니…….

수십, 수백 가지의 혼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모란에게도 이런 상태는 난생처음이었다. 혼이 손상된 게 분명했다. 조금 찢긴 정도라면 괜찮겠으나, 만약 최악의 상태라면……. 그렇기에 최근 열심히 몸을 완성시키면서 모란은 틈틈이 연의 상태가 어떤지 살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지난번 정원에서 연은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그런데도 돌연, 온갖 일을 다 겪은 모란도 놀랄 정도로 연의 본원지기가 한꺼번에 새어 나가는 게 아닌가. 임의로 최대한 주워 담아 밀어 넣고 제 기운으로 봉하기는 하였으나 임시방편이었다. 금이 간 벽 겉면에 회반죽만 발라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셈이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이긴 하나 아무리 그래도 모란은 강제적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보긴 봐야 하니 나름대로 그는 신사다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협조가 필요했기에, 모란은 결국 좀 비겁한 방법까지 써 가며 파르르 분노에 떨고 있는 연을 살살 구슬렸다.

“이것 봐. 보여?”

연이 움찔했다. 옷을 젖혀 드러난 모란의 가슴에 사나운 흉터가 있었다. 연은 저 흉터가 왜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모란의 몸에 있는 흉터가 저것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언제였나, 모란이 막 열 살이 되던 해였다. 겨울이었고 날이 꽤 찼다. 그날도 연은 모란을 쥐 잡듯이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아무리 괴롭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기에 연은 분이 올랐다. 그래서 밀어 버린다는 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때가 겨울이니만큼 날씨는 끔찍하게 추웠다. 손이 곱아 일하기가 힘들었기에 시비나 하인들은 뜰에 화로를 놓고 손을 쬐곤 했다. 모란은 바로 그 화로 위로 넘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리기는 하였으나 화로가 엎어지면서 튀어나온 숯 하나가 가슴 위로 떨어졌다. 꽤 심한 화상이었기에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너한테 그동안 엄청 맞았잖아. 이거에 비하면 엉덩이 맞는 것 정도는 참을 만한 수준이지 않나?”

그건…… 그건 그렇지만. 연은 다소 억울했다. 아니, 말마따나 백모란이 맞긴 했으나 그게 어디 백모란이었던가? 그간의 고통은 전부 다 자신이 느낀 것이었다. 화상을 입을 당시의 끔찍한 고통도, 겨울이라 화상이 덧나 진물이 났을 때의 고생도 전부 연이 직접 감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흉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아, 때려. 하지만 때리려거든 다른 곳을 때려.”

아무리 제 몸을 고치기 위해서는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지만 엉덩이만큼은 모란이 때리게 둘 수가 없었다.

“다른 곳 어디?”

“……얼굴?”

모란일 적 꽤 얻어맞아 본 경험상, 얼굴을 맞으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적으로 분하고 억울할 것 같았다. 어차피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그만이니까 괜찮을 터다. 그런데 그 말에 모란이 드물게도 인상을 쓰며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곧 생일 연회인데 쥐어 터진 몰골로 나가겠다고?”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연오의 생일 연회를 깜박하고 있던 연이 아차 했다. 그렇다. 연오의 연회에 맞은 얼굴로 나갈 수는 없었다. 누가 그랬냐며 당장 연오가 들고일어나 연회가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잘생기고 예쁜 얼굴 뭐 하러 그런 식으로 엉망으로 만들어?”

“뭐, 뭐?”

잘생겼다는 수식어와 예쁘다는 수식어가 동시에 들리자 연은 잠시 당황했다. 모란의 말이 저를 놀리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진심처럼 들렸다. 얼굴이 조금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애써 침착한 척하고는 있는데 연은 정말이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에 환장할 것 같았다. 모란을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 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럼 다리라든가.”

“다리 절고 다닐 일 있어? 그냥 제일 후유증 없는 엉덩이로 하지.”

“이…….”

연은 욕이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켰다. 이 작자는 대체…….

“그럼 배나, 등이라든가…….”

“거기 치면 넌 죽는단다.”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얼굴이 얼마나 솔직하던지 연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싶었다. 여기도 안 되고 저기도 안 되고……. 그러나 엉덩이 때리라고 하긴 너무 싫고. 그런데 모란이 또 그 간교한 혀를 놀려 댔다.

“엉덩이가 뭐가 어때서 그래?”

말하는 투가 남색가가 뭐가 어때서? 하고 물어볼 때와 똑같아서 연이 흠칫했다.

“아니, 때리기에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곳이 엉덩이잖아. 왜 굳이 다른 데를 고집하는 건데? 안 그래도 안 좋은 몸, 다른 데 때리면 진짜 안 좋아진다.”

왜 그러냐니, 엉덩이니까 그러지……! 정말 그 선택지밖에 없는가 연이 부들부들 떠고 있는 동안 모란이 솔직하게 말했다.

“게다가 엉덩이가 제일 효과적이야.”

“뭐가, 뭐가 효과적인데?”

“다른 곳은 맞아도 딱히 부끄럽거나 수치스럽지는 않잖아.”

모란이 다른 솔직한 마음 반은 조용히 삼켰다. 딱히 내가 엉덩이를 때리는 걸 좋아해서는 아니고…….

그런데 정말이긴 했다. 감정 중에 가장 원색적인 것 중 하나가 수치심이다. 다른 감정들과 달리 가장 여운이 오래가는 종류의 것이 아니던가.

수치심은 몇 년 이상이나 가는 것들도 있었다. 기쁜 감정이 지속 시간이 제일 짧으며 그 다음으로는 분노, 슬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수치심이 제일 오래갔다.

정말 이 길밖에 없는가 싶어 연은 주먹만 꽉 쥐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물었다.

“얼마나 맞아야 하는데?”

“당연히 충분히 보일 때까지지.”

한참을 갈등하다가 연이 결국 결심했다. 그래, 엉덩이 좀 맞는 것쯤이야…….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것이었다. 이내 연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만약 이 방법이 안 통한다면 모란을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말리라……. 허락하려는 말을 뱉으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란은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가슴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연은 큰 결심을 내리느라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금빛 고리가 복잡하게 엉키다가 순식간에 여덟 개로 늘어나 마치 만개한 꽃처럼 변하는 건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좋아. 원, 원하는 만큼 때려.”

그렇게 말하고는 몹시 부끄러웠던 연은 모란이 손을 움직이는 걸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엉덩이에 올 타격감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모란은 연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어 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여 연이 다시 눈을 뜨자 모란이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건 다음에 하자. 오늘은 힘들어서 더는 못 보겠으니까.”

이 짓을 다음에 또 하라고? 그렇게는 못 한다며 연이 소리치려던 찰나 모란이 벌렁 뒤로 누웠다. 진짜 힘들었는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연은 내심 놀랐다. 보는 게 힘들다더니 정말이긴 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서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모란이 입을 열었다.

“더 자세히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네 근원이 좀 찢겨진 것 같다.”

“찢…겨졌다고?”

“그래. 네가 내 몸에 들어갔다 나왔잖아. 맞지 않는 몸에다가 맞지 않는 시간대에 있었으니 생채기가 날 수밖에 없어. 당연히 몸에 안 좋지.”

이쪽으로는 아는 바가 없었기에 연은 그러려니 하고 들었다. 맞지 않는 시간대란 건 자신이 과거로 돌아간 걸 말하는 건가? 안 그런 척하려고는 했으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두려운 기색이 서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많이 안 좋다는 의미인가?”

하도 혼을 오래 들여다봤더니 기력이 쭉 빠져 누워 있던 모란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위험한 상태라고 솔직히 말을 해야 하는데 연의 표정을 보자 망설여졌다. 감정들 중 수치심만큼이나 강렬하고 오래가는 것이 두려움이라…….

옷자락을 쥔 손이 떨리고 있는 것까지 본 그가 잠시 눈을 굴렸다. 어차피 자신이 고쳐 줄 건데 뭐, 그럼 딱히 위험하고 자시고도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 모란이 자신의 몸에 돌아오고 난 뒤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별거 아냐. 좀 조심하고 치료받으면 낫는 거지.”

“그……래?”

안도한 연이 긴장을 풀었다. 무엇보다도 치료라는 말이 나온 것이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치료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의원으로서의 호기심이었다.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지?”

“두 가지 방법이 있지. 내가 직접 찢어진 곳을 이어 붙이든가 아니면 신령한 것의 정수(精髓)를 구해 먹든가. 여기서는 영물이나 내단이라고 하지, 아마?”

연이 미간을 접었다. 후자는 거의 불가능한 치료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물이 어떤 존재던가? 짧게는 몇십 년부터 길게는 천 년을 넘게 사는 생물들이었다. 그 유명한 인형삼(人形蔘)이나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을 비롯하여 뿔이 달렸다는 구렁이 독각화망(獨脚火網), 아주 오래 산 잉어 만년화리(萬年火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상당수는 목격자조차 없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일생 동안 한 번 보는 것도 힘들뿐더러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상대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내공 증진을 위해 그 자리에서 먹어 버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십 년에 한 번 시중에 나올까 말까 하는 것들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후자는 그다지 추천하지 않아. 짐승의 것이라 내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데다가 부작용이 심하거든. 자칫 잘못했다간 인간도 뭣도 아니게 되어 버리지.”

마치 언제라도 영물의 내단을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모란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어쩌면 모란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전자밖에 방법이 없다는 건데, 정말이지 내키지가…… 않았다……. 입술만 깨물다가 연이 물었다.

“치료도 설마 오늘과 비슷해?”

“뭐어, 어느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모란이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불안했다. 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에 엉덩이를 때려야 진찰이 가능하다는 해괴한 진찰법은 처음 본다. 연이 아는 중에 엉덩이를 때리는 게 치료법인 건 딱 하나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도록 가볍게 엉덩이를 때리는 것. 그 외에는 듣도 보도 못 했다. 진찰법이 이토록 해괴한데 치료법은 얼마나 더 이상하겠는가?

“치료할 때도 설마 그 망할 보조적인 수단이 필요한 건 아니겠지?”

모란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그가 딴청을 피우자 주먹을 꽉 쥔 연의 손등에 힘줄이 올랐다. 아까 그가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맞아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걸려?”

“얼마나 많이 찢어졌느냐에 따라 다르지. 다음에 다시 한번 보면 알 수 있을 걸. 모르긴 몰라도 꽤 오래 걸릴 거야.”

그렇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근원, 그러니까 혼이라는 게 찢어졌다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에서 모란 외에는 치료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연은 체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을 수 있다는 게 어디냐고 그가 스스로를 위로했다.

“치료 안 하면 계속 이런 몸으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렇지.”

“……그래, 알았어. 그럼 대가는?”

응? 모란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연은 오히려 그 반응이 더 뜻밖이었다. 당연히 지금까지 그래 왔듯 대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자신을 치료해 준다는데 대가를 주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모란은 턱을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연을 치료하려는 건 딱히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연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아직 딱히 필요한 게 없는데. 대가는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지.”

“돈이라든가 그런 건?”

“돈? 가질 만큼 가졌어.”

충분히 쉬었는지 모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조금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연이 멈칫했다. 부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모란이 잠시 후에는 똑바로 섰다.

“그럼 며칠 뒤에 다시 보도록 하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비틀하더니 다음 순간 모란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저런데 치료는 더 힘든 게 아닌가? 아니면 보는 것과 치료는 완전히 다른 성질인가? 연이 무심코 제 손을 들어 보았다. 희고 창백하고 차가운 손이다.

“정말로 고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는데.”

이제 와서 무공의 성취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 걷거나 움직여도 숨차지 않고 갑자기 기절하지 않을 정도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특히나 더운 한여름에도 종종 엄습하는 한기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몸을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어졌기에 연의 기분은 퍽 좋아졌다. 그 덕인지 입맛이 돌아 그는 드물게 저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밤이 되어 이불을 덮고 누운 연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렸다. 몸이 낫게 된다면 다른 곳에 여행도 갈 수 있게 될 테지. 제 나이대의 무인들이 못해도 한 번씩은 강호 유람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연은 내심 부러웠다.

‘모란은 정말 특이한 자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란이 떠올랐다. 오늘 일로 모란에 대한 연의 시각은 다소 바뀌었다. 모란이란 자는 평소에는 경망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느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한량 같았지만 어느 순간에 보면 그는 마치…… 그래, 마치 태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자처럼 보였다.

‘어쩌면…….’

사기꾼이나 협잡꾼 따위가 아니라, 괜찮은 자라면……. 그렇다면 어쩌면…….

오늘 외출했던 일로 피곤했던 연의 눈꺼풀이 가물가물 감겼다. 밤이 깊어지고 달이 이지러졌다. 동이 서서히 빛을 발할 때쯤이었다. 연은 무의식중에 어느 꿈에 잠겨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는 중이었다. 침상에 엎드려 있어 흐트러진 이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이 무겁고 뜨겁게 느껴졌다. 허벅지 안쪽을 꽉 잡는 뜨끈한 손아귀에, 그는 뒤늦게 제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잡힌 허벅지가 아파 신음하며 웅크리자 커다란 마찰음과 함께 엉덩이 한쪽이 얼얼해져 왔다. 몇 번이나 얻어맞은 연이 이불자락을 움켜쥐었다. 아프다. 아픈데 기분이 좋았다. 이 또한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연의 정신이 번쩍 든 것은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던 사람이 귀에 속삭였던 탓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에 서늘한 입술이 바짝 달라붙어 움직였다.

‘연아, 이렇게 하니 좋으냐?’

‘우리 연이는 음란하고 예쁘기도 하지.’

‘이렇게 하면 더 예쁘게 울어 본다 하였지?’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

다음 순간, 연이 이불을 제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덜미며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 파르르 몸을 떨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백모란이라니! 백모란이 자신을 희롱하는 꿈이라니!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연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었다. 다리 사이를 확인하고는, 좌절하여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느덧 아침 해가 뜨며 새로운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

“도련님, 이 옷은 어떠신가요?”

“괜찮아 보이는구나.”

연이 의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연회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주인임을 알기에 시비들은 알아서 옷이며 장신구 등을 골라 놓고 물러났다. 그러나 연은 연회에 참가하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사흘 전 꾼 모란의 꿈이 도무지 잊히지를 않았다.

“도대체 왜 그 따위 걸 꿈으로 꿔서는.”

그냥 모란이 나오는 꿈이어도 신경 쓰일 텐데 심지어 꿈에서 모란은 연의 그, 그……. 엉덩, 아니, 둔부를 가격하고 있었다. 더더욱 믿기지 않는 건 꿈속의 연은 그걸 기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 어느 사람이 엉덩이 맞는 걸 좋아하겠냔 말이다. 꿈이라서 그런 거겠지, 애써 생각해도 충격은 가시질 않았다.

또다시 떠오른 꿈에, 연은 이를 갈며 옷을 갈아입었다. 시비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괜찮아 보인다고 했는데 입고 나니 실제로도 퍽 잘 어울리는 것 같기에 만족스러웠다. 털이 북슬북슬한 외투를 하나 더 걸치고 난 뒤 별생각 없이 야명주 거북이를 챙기던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야명주 거북이를 보니 또 모란의 생각이 난 탓이다.

고개를 휘휘 저어 털어 버리며 화정당을 나섰다. 주강은 오늘 연회의 경비를 맡느라 자리에 없었다.

보통 연회는 모든 사람의 일과가 끝난 밤에 이루어지기에 벌써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다만 연회 분위기가 막 무르익기 시작한 창일당(昌日堂)만큼은 마치 대낮처럼 환하였다. 연은 걸음을 옮기며 한위 생각을 했다.

‘오늘도 구석에 앉아 있다가 가려나.’

일단은 한위도 자식이긴 하니 가족 행사에는 구색을 맞추어 참석하기는 하나, 연은 행사 초반부 외에는 한위를 본 기억이 없었다. 한위가 원해서 돌아간 건지, 아니면 영명이 돌려보낸 것인지……. 연이라도 옆에 있어 주고는 싶은데 보이는 시선이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안휘성을 호령하는 남궁세가 소가주의 탄생일이니만큼 연회는 화려하고 규모가 컸다. 연회장 여기저기를 붉은 등이 환하게 비추었고, 한쪽에서는 비파며 금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자리마다 놓인 붉은 탁자 위에는 오리구이며 돼지구이며 온갖 구이와 찜과 면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제일 중앙 상석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영명의 자리다. 영명은 언제나 행사 중반부에 이목을 받으며 들이닥치기를 좋아했다.

연이 마지못해 시끌시끌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지나갈 적마다 익숙한 얼굴들이 스쳤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그리고 안휘성에서 꽤나 잘나간다 하는 상회와 중소 문파에서 각기 온 이들이었다.

연오는 그들 중 제갈우와 황보영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둘 모두 중원의 잠룡으로 손꼽히는 후기지수들이었다. 황보영신은 연오와 절친한 친우이자 동시에 사촌 사이이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연은 한위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며 남궁가 직계 가족들의 자리로 향했다.

직계들이 앉는 자리는 벌써 꽤 사람이 모여 있었다. 둘째 누이는 임신을 하여 오지 못했으나 첫째 누이인 남궁린은 가족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외에 영명의 형제자매들…… 마지막으로 황보세희가 있었다.

연을 발견한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옷태나 행동이 우아하고 활기가 넘치는 미인이었다.

“연아,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연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보세희, 그녀는 영명의 정실이자 연오의 친모 되는 사람이다. 이따금 연은 연오가 영명이 아닌 황보세희의 성격을 닮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허나 좋은 사람이었어도 연의 입장에서 가까이할 수는 없었다.

황보세희는 연에게 무언가 더 말을 건네고 싶은 눈치였으나 다른 가족들이 말을 거는 바람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연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는 가능한 조용히 연회를 마치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딱 질색이다.

대신 연은 차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위, 한위가 대체 어디에 있으려나……. 직계면서도 한위는 한 번도 이 자리에 앉은 적이 없었다.

한참을 찾다 연은 초대된 객들이나 사용하는 탁자에 앉아 있는 한위를 발견했다. 그의 동생은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 탁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식어 가는데도 손 하나 댈 엄두를 못 내는 듯했다.

연이 한위와 시선이라도 마주치려고 애를 쓸 때였다. 뒤에서 팔이 뻗어 나오더니 비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뭐 더 필요한 건 없나, 도련님?”

뻣뻣하게 굳은 연이 고개를 돌리자 모란이 바로 뒤에서 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놀라 크게 달그락 소리를 내려는 연의 찻잔을 잡아 주었다. 불현듯 며칠 전 꾸었던 꿈이 반사적으로 떠올렸지만 애써 눌러 두며 연이 인상을 써 보였다.

“여기서 대체 뭐 하는 중이야?”

“보다시피 시종으로 일하는 중이지. 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 면 요리라도 좀 먹지 그래.”

모란이 연의 앞으로 소면 요리를 슥 내려놓았다. 도대체 그가 무슨 꿍꿍이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하인 노릇씩이나 하면서? 심지어 모란은 근처의 사람이 자신도 소면을 달라 하자 심드렁하게 ‘소면 다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정말로 불량한 하인이었다.

“정말 왜 나왔어?”

“오늘은 달이 다 가려서 혹시나 하고 나와 봤지.”

모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은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모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난번 심하게 어지러웠을 때지, 아마. 해도 달도 구름에 가리니 오늘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이건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 모란의 경고 같은 것일까?

“별일 없으면 밤에 다시 한번 제대로 살펴보자고.”

오늘인가……. 결연한 얼굴로 끄덕인 연이 앗,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한위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몰래 손을 흔들어 주자 한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에도 이렇게 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위에게 뭔가 먹이고 싶어 안달을 내던 연이 문득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아냐.”

모란이 딱히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하지만, 그를 부려 먹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몸을 낫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나중에 대가를 받겠다고 해도 연에게는 엄연히 은인인 것이다.

연이 얌전히 입을 다물자 모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궁금한 건 그냥 두고 못 보는 성미인 모양인지 그가 채근했다.

“……아니, 신경 쓰이게. 왜?”

“별거 아냐.”

“별거 아니면 그냥 말하면 되잖아.”

실랑이를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연을 힐끔 바라봤다. 그냥 원하는 대답을 내주고 평화를 얻자는 결론을 내린 연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한위에게 소면 좀 가져다줄 수 있어?”

모란이 인상을 썼다. 역시 안 되겠구나 하는데 나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난 또 뭐라고.”

그러더니 모란이 휘적휘적 한위에게 걸어갔다. 완전히 잡심부름이라 정말 들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참 떨어진 한위에게 걸어간 모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의 앞에 소면과 음식이 담긴 작은 접시도 놔 주었다. 머뭇거리던 한위가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하자 그제야 다시 휘적휘적 돌아왔다.

“됐지?”

“……고마워.”

모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은 이상하게도 귀가 조금 달아올랐다. 어쩌면 그가 생각한 것보다는 좋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다시 사흘 전 꿨던 꿈이 다시 떠오르느냔 말이다.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바로 그때였다. 황보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단으로 향했다. 연오가 그의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은 다정한 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오는 상단에 선 채 미소를 지으며 객들에게 포권지례를 해 보였다.

“저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귀한 걸음 해 주신 분들에게 먼저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걸 보자 연은 연오 같은 사람이 되면 어떤 느낌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연오는 마치 전설이나 어느 소설의 멋진 주인공처럼 보였다.

상냥한 어머니에 가문을 이을 후계자, 오성이 뛰어나면서도 잘생기고 인격도 제대로 된 사람. 아무리 역경이 닥쳐와도 굳건하게 딛고 이겨 낼 그런 존재. 못되고 되바라진 동생 챙기고 엄하게 훈계시키는 것도…….

남궁영명이 등장한 것은 연오가 막 연설을 마쳤을 때쯤이었다. 그는 장로 한 명과 낯선 사람 한 명을 동반하고 있었다. 옷차림새를 유심히 보다가 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가……인가?’

옷차림새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지만, 팔목에 달린 방울은 당가의 표식이나 다름없었다. 암기가 주 특징인 그들은 어찌나 움직임이 유연하고 부드러운지 팔목에 방울을 달고서도 소리 한번 내지를 않았다.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제갈세가라면 모를까 당문세가는 남궁세가와는 그다지 연이 깊지 않다. 왜 당가의 사람이 영명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일까?

그런데 느낌 탓인지 어쩐지 영명의 안색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인이라고 내내 건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 연은 그러려니 넘겼다. 하긴 남궁영명의 나이도 이제 그렇게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강호에서 물러난 사람을 포함해 세가에서 반로환동(返老還童)한 장로가 두 명이나 있는 데 비해 영명은 아직도 그 경지에 이르지를 못했다.

슬슬 무공이 나이를 이기지 못할 때도 되었지.

“늦어서 미안하구나, 연오야. 일이 있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여기 앉으시죠.”

연은 자식 중에 영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가 오로지 연오만을 총애한 탓이었다. 그렇다면 연오는 어떨까? 그도 영명을 존경할까? 그러기에는 영명과 연오는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연오는 대체로 얼굴에 표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편이었으나 영명과 함께 있을 때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주가 참석했으니 한마디 안 하고 넘어갈 수야 없었다. 연오의 자리에 선 영명이 긴 연설을 마친 끝에야 선물들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직계부터 선물을 전달하면서 다들 연오에게 덕담을 한마디씩 하고 돌아갔다. 연오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진귀하고 좋은 선물들이 많았다. 연도 곧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오는 연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래, 무슨 선물을 가져왔느냐?”

“한번 열어 보시죠.”

한 손바닥에 올라가는 작은 자개함에 연오가 궁금한 얼굴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좋아하는 거북이를 선물 받을 줄은 차마 몰랐던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입은 옷 허리띠에 매달린 장신구도 거북이였다. 연오의 입꼬리가 드물게도 높이 치솟았다.

“귀여운 녀석인걸.”

정말 좋아하시긴 하는구나. 연은 연오의 입에서 귀엽다는 수식어가 나오는 건 처음 들었다. 거북이를 자세히 살펴보던 연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놀라워하며 감탄했다.

“야명주를 깎아 만들었구나.”

연오가 야명주 거북이를 쌓인 선물들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연은 자신의 선택이 성공적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모란에게 돈을 빌리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연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연의 기분도 좋았다. 그가 흡족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선물을 주는 시간은 끝없이 이어졌다. 연오가 덕담을 받고 감사인사를 하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음식을 먹었다.

연은 모란이 주었던 소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한위를 바라보았다.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선물을 주고 싶었는지 한위는 처음으로 연회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중이었다. 한위가 안절부절못하며 선물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 영명을 보았다. 그는 마침 다른 장로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위도 그걸 보고 일어난 게 분명했다. 불현듯 드는 불안감에 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내가 몰래 형님에게 전해 준다고 할걸 그랬나.’

그러나 남궁영명의 생일 연회라면 모를까, 연오의 생일 연회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위도 그의 동생이고 형제였다. 한위는 연신 영명의 눈치를 보며 걸음을 빨리해 연오에게 다다랐다. 한위가 선물을 들고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연오가 놀란 낯을 보였다. 낮은 목소리라 이 거리에서 뭐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오가 반갑게 한위를 맞이하고 선물을 받아 드는 건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다음 순간 연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군 게 언제냐는 듯이 영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위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연은 처음부터 영명이 한위를 눈여겨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한위를 향한 영명의 시선은 연오나 자신에게 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영명이 제게 대체로 무관심했다면, 한위에게는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친부에게서 받는 싸늘한 시선에 한위는 가엾게도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지고 말았다. 영명이 한위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걸 뒤에서 누군가 잡아 눌렀다. 모란이었다. 그는 그제야 모란이 아직도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이 겨우 참아 내는 동안 한위가 바닥만 쳐다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거, 검 손질 도구입니다.”

“아버지.”

연오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으나 영명은 손을 들어 막아 버렸다. 그러더니 경멸 어린 시선으로 선물을 살펴보고는 크게 비웃었다.

상단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객들에게는 안 들려도 가까이 있던 직계나 방계들이 듣기에는 충분한 말 소리였다.

“타고난 핏줄이 천하기 짝이 없어 선물도 마찬가지로 너저분하구나.”

“아버지!”

연오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영명은 이상하게도 한위에게 끈질기도록 악랄하게 굴었다. 한위가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제 선물을 도로 가지고 가려고 할 때 그가 빼앗아 든 것이다.

“감히 이따위 걸 내 아들에게 선물해 주려고 했단 말이냐?”

그 말에 한위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연은 방금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버지란 자가 아들에게 저럴 수가 있는가? 영명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성조차 되어 먹지 못한 자였다. 연은 자신이 영명의 아들이란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영명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성정이 거칠어진 듯한 그가 돌연 연을 바라보았다.

“연이 너도 잘 봐 두거라. 저 천한 녀석처럼 너도 네 어미를 닮아서는 안 될 것이야.”

“…….”

“내가 하는 말에 왜 대답이 없느냐?”

오늘 영명의 행동은 분명 평소와는 다르게 날이 선 것이었다. 연오는 이제 완전히 얼굴을 굳혔다. 황보세희 또한 마찬가지로, 더는 미소를 유지할 수 없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슬슬 경직된 분위기를 느끼고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란이 뒤에서 어깨를 잡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제 어머니를 닮을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 같은 자를 닮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닮는 것이 백배 천배 낫겠군요.”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연의 시선과 대답에 영명이 잠시 침묵했다. 얌전하고 조용하던 아들의 반항이 도무지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노가 일제히 밀려왔는지 영명은 그다음으로는 벼락과 같은 노호를 내질렀다.

“이 고얀 놈!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감히 아비를 향해 그 무슨 말버릇이야!”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는 해도 영명은 대단한 고수였다. 그가 노려보는 것만으로 연은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나 그를 노려보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결국 연오가 나서서 영명의 앞을 막아섰다.

“즐거운 연회 자리입니다. 이쯤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그 즐거운 연회는 완전히 파투가 난 상태였다. 영명은 연오를 한번 보고, 다시 한번 연을 노려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군중들에게 연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정중히 포권지례를 해 보였다.

“여러분, 아버지가 많이 취하셨던 모양입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별일 아니니 부디 계속 연회를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멈췄던 음률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으나 아까와 같은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은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핑핑 돌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마치 지난번 심하게 현기증이 오르던 때 같았다. 어찌나 상태가 좋지 않던지 몸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일어나 봐.”

모란이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가볍게 연을 일으켰다. 무인도 아니면서 정말, 힘이 세기도 하지……. 연이 비틀거리며 모란의 부축을 받아 걸었다. 사실상 모란이 거의 들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연회에 왔던 객들도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돌연 모란이 쯧 혀를 찼다. 그러자마자 뒤에서 연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아! 괜찮으냐?”

연이 겨우 몸을 제대로 세웠다. 분명 까맣기만 할 하늘이 희끗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연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걸 보자 연의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 때문에 괜히, 연회가…….”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그보다 네 안색이 너무 안 좋구나.”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목구멍으로부터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연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컥, 하고 기침을 하니 무언가 줄줄 흘러나왔다. 손을 내려다보니 붉은 선혈이 한가득이었다.

설마 아까 그걸로, 내상을 입는다고? 겨우 그것 때문에? 연이 이를 악물었다.

“연아!”

아연실색한 연오가 다가와 비틀거리는 연의 팔을 잡았다. 얼마나 주위가 핑핑 도는지 연은 이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모란이 입을 연 건 바로 그때였다.

“소가주님, 진은록 의원님을 불러 주십시오.”

연은 혹시나 또 피를 토할까 입을 틀어막다 모란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저는 그분의 제자로, 부족하나마 의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으니 한시가 급합니다. 소가주님께서 직접 가셔야 빠른 인도가 가능할 겁니다. 저는 응급 처치를 해 두고 있겠습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 연오가 경공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단둘이 있게 되자 모란은 연을 아예 안아 올렸다. 숨을 헐떡이면서 연이 모란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딱히 잡으려고 잡은 건 아닌데 손이 닿는 곳이 그랬다.

“사부님은, 왜…….”

“어쩔 수 없잖아. 시간을 좀 끌어야 하는데. 젠장, 몸 상태가 이 모양이라 공간 마법도 못 쓰겠군.”

주위를 두리번거린 모란이 힘껏 뛰어올랐다. 연은 처음에 그가 경공을 쓴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발밑으로 남궁세가가 멀어지고 있었다. 허공답보(許空踏步)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날고 있었다.

이것도 마법인가? 정말 별 이상한 기술을 다 쓰는군……. 연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까마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별도 모두 짙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잠시 후 모란은 화정당 뒤뜰에 내려앉았다. 그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연을 침상에 눕혔다. 거의 간당간당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아 연이 혀를 깨물었다. 어쩐지 의식을 잃으면 큰일이 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연의 가물가물한 시야에 모란의 눈이 금색으로 빛나는 게 보였다. 아니, 어째서일까? 모란의 눈에 꽃이, 꽃이 피는데……. 갑자기 피가 올라와 울컥울컥 토해 내면서 연은 두려움에 질렸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었다. 연이 중얼거렸다.

“나……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네.”

살피는 것을 끝내고 연을 반쯤 일으키면서 모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괜찮다. 내가 말했지 않아.”

그의 손이 연의 뒷덜미를 휘감았다.

“혼 좀 찢어지는 건 별거 아니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모란이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 연은 정신이 몽롱하여 모란이 제게 무슨 짓을 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혀가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올 때에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잠시나마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없어 모란이 뒷덜미를 움켜쥐고 입을 맞추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겨우 올린 손만이 모란의 옷깃을 쥐었을 뿐이었다. 모란이 사납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을 때 연이 숨을 헐떡였다.

“뭐, 뭐 하는…….”

고개를 틀었으나 모란이 턱을 잡아 다시 입을 맞추었다. 뜨끈한 혀가 밀려들어 와 안을 더듬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깊이 밀어 넣는가 하면 부드럽게 혀를 감아 잡아당기기도 했다.

연이 신음하며 버둥거렸다. 습한 소리를 내며 모란이 입을 탐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연은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그가 꾸었던 꿈에서 느꼈던…….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은 겪어 본 중 가장 최악의 고통이었다.

“으……! 읏, 으!”

마치 뜨겁게 달궈진 부지깽이가 배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고통에 연이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눈꼬리에서는 생리적인 눈물이 길게 이어져 흘러내렸다.

아프다. 아팠다. 지독하게 아팠다. 그는 한 번도 이런 고통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을 잃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끔찍함이었다. 실제로는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일 텐데도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모란이 놓아 줬을 때, 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애원하는 중인데도 비참한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더듬더듬 모란을 밀어 내려는 손이 경련했다.

“그, 그만, 제발 그만해…….”

“그래, 알았어. 이제 끝났어.”

모란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떠는 연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아 잡아당겼다. 완전히 지친 연은 힘없이 그의 품 안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럴 만도 하지. 모란이 입술에 묻은 피를 핥으며 연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그가 어떤 상태인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결론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연의 혼은 찢기기만 한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 이계에서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모란은 자신의 몸이 제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대로라면 십 년 동안이나 주인 없이 혼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보통 주인이 없는 몸은 얼마 안 가 죽거나 삿된 것들의 차지가 되곤 했다. 물론 후자여도 금방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란이 막 돌아와 제 몸을 되찾았을 때, 놀랍게도 그의 몸은 매우 멀쩡한 상태였다. 뼈 두어 군데가 부러지고 금이 가기는 했으나 그걸 제외하면 건강하기까지 했다. 모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주인 없는 몸은 그가 없는 사이에 평범한 사람처럼 생활하기까지 한 게 아닌가. 이상하여 얼마간 육체를 살펴본 결과 모란은 자신의 것이 아닌 파편 한 조각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아도 그 조각과 일치하는 혼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란은 제 몸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놈이 누구인지 보러 가기나 하자고 생각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쉬웠다. 다들 남궁연, 남궁연 하고 떠들어 댔으니까. 남궁연이라.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데. 모란은 무심하게 그 익숙함을 흘려보냈다.

소문으로 들어 본 남궁연은 형편없는 자였다. 남궁세가의 실력도 없는 도련님이며 아랫사람의 목숨을 벌레처럼 여겨 죽도록 두들겨 패는 자였다. 모란은 미소 지었다. 어딜 가나 그런 자가 있기 마련이지.

모란은 생각보다도 손쉽게 남궁연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남궁세가에 그렇게 센 놈들이 많다기에 침입할 때 나름 신경을 쓴 게 무색할 정도였다. 아직 지금의 육신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무인이라 하는 대부분의 자들은 그의 눈에 어린아이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남궁연을 만나게 되었을 때, 무언가 이상하여 상세히 살펴본 모란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들어와 있던 게 바로 저 녀석이구나.

아마도 열 살 쯤에 남궁연에게 사고가 있었을 테고, 그 사고로 연의 혼이 대신 제게 들어왔으리라. 그렇기에 자신의 몸이 그토록 멀쩡히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는 상대의 안색이 좋지 않고 퍽 마른 것을 근거로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영혼이 이계로 넘어갈 적에 남궁연의 영혼이 제 몸 안으로 빨려 들어 왔구나. 그리고 빈 몸은 그동안 삿된 것이 차지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상대 덕에 제 몸이 멀쩡하다는 걸 알았으니 원래도 미약했던 화는 금방 가셨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황상 맞지를 않는 것이다. 연은 자신의 몸에서 십 년 동안이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이 멀쩡하게 있던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십 년 동안 혼이 비어 있던 연의 몸은?

보통 삿된 것에 씌면 그 빈 몸은 극단적인 공격성을 보인다. 절제가 없으며 오로지 욕망에만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연은 모란을 증오하긴 했어도 주변 사람들은 괴롭히지 않았다. 오로지 모란만을 향한 증오며 괴롭힘이었다.

거기까지 추론하였을 때 모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최악의 가정이 지금 현실이 되어 모란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연의 머리카락을 뒤로 깨끗하게 넘겨 주었다. 앉아 있는 것도 벅차 하기에 눕혀 주었더니 연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모란을 바라보았다. 모란은 상대의 눈을 통해 그 혼을 볼 수 있었다.

각각 성질이 달라진 채 둘로 나뉘어 버린 혼이었다. 임시방편으로 얼기설기 꿰어 놓은 자국에서 본원지기가 흘러나오는 것 또한 보였다.

그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왜 그리 본원지기가 미친 듯이 줄줄 흘러나왔던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릇이 쪼개진 채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바람에 다시 붙지를 못하니 죄다 흘러 나오는 것이다. 모란이 보기에 연은 이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까…… 대체 뭘, 한 거야?”

끔찍한 고통을 떠올리고는 연이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아플 수밖에 없었다.

찢겨진 혼들이 무너지려 하기에 급하게 임시방편으로 작살로 꿰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연은 금방 죽어 버렸을 터였다.

“치료한 거지. 원래 처음이 항상 제일 아픈 법이니 다음엔 그렇게까진 안 아플 거야.”

“그……래.”

연이 한결 안도한 기색으로 색색 숨을 쉬었다. 모란은 가만히 시선으로 연의 혼이 보여 주는 궤적을 따랐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궤적이다.

현재를 넘어서 미래로 이어지는 궤적은 흐릿하여 거의 보이지 않으나 현재부터 과거까지의 궤적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담담하게 혼이 그리는 역사를 읽어 냈다.

연, 열 살. ‘그날’을 계기로 혼이 둘로 나뉘어 찢어졌다. 모란은 이백오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만 저도 깜박 잊고 말았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입맛이 썼다.

찢어진 것 중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과거에 가까운 것은 연 본인이 가까스로 붙잡았고, 스무 살부터 미래에 가까운 것은 빈 모란의 몸이 가져갔다. 시간이란 원래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녀석이 아니니 혼이 십 년 전으로 넘어간 것이야 이상할 것까진 없었다. 혼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 운명대로 흘러갈 따름이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혼 하나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다른 말로는 운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니 스무 살 연이 여덟 살 모란의 몸으로 들어갔다 한들 미래나 과거가 변했겠는가? 만약 연이 모란의 몸으로 미래를―혹은 과거를― 바꿔 보려고 애를 썼어도,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으면서도 일어나지 않은, 정해진 흐름이라 결코 조금의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연, 스무 살. 시간이 흘러 원래의 모란이 돌아오자 마침내 연은 자신의 찢긴 반쪽의 혼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혼이 다시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오래 흐른 상태였다…….

둘로 나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혼들은 맞지 않는 조각으로 마찰을 일으켰다. 차라리 한쪽만 남아 있으면 괜찮았을 것을 반쪽을 돌려받고 만 탓이었다.

혼이 서로를 밀어 내며 마찰을 일으키고 균형을 잃으니 육체도 무너지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모란이 중얼거렸다. 그는 연이 십 년 동안 내내 ‘백모란’을 증오했던 걸 이해했다. 쳐다보는 것조차 끔찍하고 싫었겠지. 정말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란의 몸을 죽여야 빼앗긴 반쪽짜리 혼을 돌려받을 것이 아닌가? 가장 중요한 스무 살 이후의 미래를 모란이 가지고 있었으니 필사적으로 돌려받고 싶었을 터다. 미래가 없는 혼이 든 몸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었으니.

연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모란이 가장 소중한 것을 강탈해 간 강도라는 걸. 결국엔 돌려받긴 하였으나 그 대가로 빠르게 목숨을 잃어 가는 중이었다.

일 년? 아니, 일 년은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점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한 달, 혹은 당장 내일이라도 그대로 죽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부친과의 갈등에―아, 물론 그냥 평범한 고성이 아니긴 했으나―이 상태가 될 정도였다. 다른 정신적인 충격을 가했다가는 겨우 수습해 놓은 게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치료가 끝나고 난 뒤 말해도 늦지 않았다.

모란의 마음속에서 양심이 움틀거리며 오래간만에 무언가 뱉어 놓았다. 미약한 죄책감과 동정심, 그리고 무언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 덩어리였다.

이상하고도 묘한 감정을 곱씹어 보며 그가 손을 들어 천천히 연의 이마를 짚었다.

“자, 천천히 숨 좀 쉬어 봐.”

콜록거리고 몇 번 기침을 하면서 연이 가랑가랑 숨을 쉬었다. 여전히 몸 안쪽 여기저기가 욱신거리기는 했어도 이제 피를 토하지는 않았다. 호흡도 훨씬 편해졌고 정신도 다시 명료해졌다. 모란은 무심하게 제 소매로 연의 입가에 흐른 피를 슥슥 닦아 냈다.

모란은 혼 좀 찢어진 것쯤이야 별거 아니라고는 했으나 연은 정말이지 죽을 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본인은 몰라서 그렇지 사실이기도 했다―

너무 끔찍하게 아파서 그런 감정이 들었나? 겨우 숨을 고른 그가 입 안에 고인 피를 삼키며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모란의 입술에 묻은 피가 먼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연의 얼굴에 미미하게 혈기가 감돌았다.

‘이건, 이, 인공호흡 같은 거지.’

연이 애써 생각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호흡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이 호흡을 불어 넣는 것처럼……. 그런데 아까 혀의 움직임이, 너무, 좀……. 꼭 그런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 건가?

오한이 들어 연이 몸을 떨자 모란이 이불을 끌어와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가슴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연은 심장이 다 덜컥거렸다. 오늘 너무 정신적으로 충격을 이래저래 받았나 보다.

‘그런데 이건 인공호흡 같은 게 아닌데.’

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 근원을 들여다본다는 행동을 위해 가슴을 어루만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모란의 손이 점차 아래로, 아래로 파고드는 것이다. 눈동자도 치료할 때와는 달리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 연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모란이 히죽 웃었다.

“지금 이거……. 설마…….”

“오해야.”

“오해라고?”

“딱히 만지고 싶어서 만지는 건 아니고……. 아니, 물론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진짜, 좀 좋은 사람처럼 보이나 싶으면 또……. 연이 이를 갈았다.

“당장, 손…… 안 떼?!”

실은 연의 혼을 고정시켜 놓으려고 들이붓다시피 한 제 기운이 삐질삐질 흘러나오기에 잘 다독여 넣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연이 이렇게 발끈할 때마다 퍽 귀여워서 자꾸 일부러 약을 올리게 되는 것이었다. 차마 뭘 할 기운은 없고 옆에 뭐라도 던질게 없나 연이 주위를 손으로 더듬거릴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연아!”

연오가 은록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모란은 언제 음흉하게 연의 가슴팍을 더듬었냐는 듯이 근엄한 자세로 앉았다. 은록이 들어서다 말고 백모란과 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모란과 연은 당사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지없는 악연이며 가해자와 피해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연오는 이불의 핏자국과 제 동생의 파리한 안색에 놀라 얼굴이 어두워졌다.

은록이 언제 멈칫했냐는 듯 침착하면서도 신속하게 다가와 맥을 짚었다. 그의 미간에 곧장 주름이 잡혔다. 한참을 은록이 맥만 짚고 있자 연오가 안달복달했다.

“어찌 된 일인가?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연오만 안달복달인가, 연도 내심 초조하여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아무리 지금은 모란의 몸이 아니라지만 감히 사부의 앞에서 이리 누워 있는 것이 민망도 하였고, 또……. 아까 모란이 무언가 수습하긴 하였으니 과연 어떤 식으로 결과가 나올지도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탓이었다.

“내상을 입을 만한 원인이 있었습니까?”

마침내 은록이 연의 손목을 놓으며 물었다. 연오가 아연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짚이는 이유가 있긴 하였으나 믿기지가 않은 탓이다.

연오의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연은 그만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도 핏기가 없어 여전히 얼굴은 창백했지만 평소 같았다면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방금 전 아버지께서 꾸짖기는 하셨는데…….”

연오가 말꼬리를 흐렸다. 영명이 화를 낼 당시, 그 목소리에는 미약하게 내공이 실려 있었다. 본래 고수들의 대갈일성(大喝一聲)*이란 그런 법이었다. 어린아이라면 경기를 일으켰을 터다. 일반인이라면 뒤로 자빠졌을 터였고.

그러나 사자후(獅子吼)*도 아니었고, 무인이라면 그저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말 정도였다. 내상을 입을 수준이 아니란 건 연오도 연도 잘 알고 있었다. 은록도 마찬가지였다.

“둘 중 한 가지의 경우입니다. 본래 내상을 가진 상태에서 치료를 하지 않으셨거나, 혹은 그 정도조차 타격이 될 정도로 공자의 몸이 좋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어찌 되었건 두 경우 모두 오랜 정양이 필요할 겁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오랜 정양이라니! 연이 겨우 말을 꺼내어 보았으나 심각한 얼굴을 한 연오가 딱 자르며 꾸짖었다.

“연이 너는 조용히 하거라. 매번 괜찮다 하더니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느냐. 피까지 토하다니, 얼마나 몸이 안 좋았으면!”

“하지만 형님…….”

모란이 조치를 취한 뒤라 훨씬 살 것 같았기에 연이 저항했으나 연오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안 그래도 평소에 유독 연을 과보호하던 연오였다.

연이 처음으로 쓰러진 날 이후로 그는 즉각 주강을 붙였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동생이 쓰러져 방치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름이 되면 더위를 먹을까 염려해 그 귀하다는 얼음을 보내왔다. 겨울에 추위로 앓을 적에는 열기를 더하는 보약과 솜이 두툼하게 든 비단 이불을 보내왔다.

안 그래도 연을 허약해 쓰러지고 말 동생으로 보는 그인데, 피를 토하는 것까지 보았다면?

연이 저도 모르게 뭐라도 해 보라는 얼굴로 모란을 바라보고 말았다. 모란이 슬그머니 씨익 웃더니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소가주님.”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제 앞에서 모란이 은록을 사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연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많이 안 좋았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가 매일 도련님의 곁에 머무르며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뭐?!”

연이 벌떡 일어나려다가 당황해서 다시 누웠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러자마자 연오와 은록이 동시에 손을 뻗어 가슴을 짚어 눌렀던 탓이다.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매일 제 곁에 머무른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란이! 심지어 연오는 모란이 그렇게 말하자 감탄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기론 아우가 자네를 많이 괴롭혔던 것으로 아는데. 괜찮겠나?”

그러자 모란은 뻔뻔하게 이렇게 말했다.

“의원 된 자로서 환자를 대하는 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겠습니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은 속이 다 답답했다. 모란이…… 모란이 어떻게 의원 된 자란 말인가. 의술도 모르는 데다가 치료를 빙자해 환자 몸이나 희롱하는데……! 종종 그 순간이동으로 사람들 눈을 피해 치료나 해 주고 다시 돌아가면 될 것을 굳이 곁에 머무른다고? 앞으로의 일이 불 보듯 훤했다. 연이 연오에게 항의했다.

“형님,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제가 저자를 어떻게 믿습니까?”

“연아.”

그러나 연오는 꾸짖는 시선을 보내고는 모란에게 대신 사과까지 했다.

아우를 대신해 사과하겠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연오가 저 사내에게 무려 사과씩이나 하는 걸 보자 모란을 향한 원망이 껑충 자라났다.

“제자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오가 은록에게 묻는 동안 모란은 얄밉게도 연에게 히죽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남은 보루는 은록뿐이었다. 아무리 연오가 허락한다 해도 은록이 허락하지 않으면 못 할 일이었다. 연은 은록이 모란의 말을 거절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은록은 놀랍게도 모란을 빤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제자의 실력은 좋은 편입니다.”

사부님? 연이 망연자실했다.

‘물론 제가 실력이 좋기는 하지만…… 제 실력이 좋은 것이지 결코 지금의 모란의 실력이 좋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이 은록에게 들릴 리는 만무했다. 들리도록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은록이 저렇게 말해도 허락한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연이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리 말하고는 은록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은록을 잘 모르는 연오나 모란은 그 말을 허락하는 말로 알아들었다. 연의 마지막 희망은 부질없이 무너졌다.

“화정당에는 빈 방이 제법 있으니 그곳에서 지내면 되겠군.”

“형님!”

모란이 매일 곁에서 머무르다 못해 아예 화정당에서 지낸다니 연이 아연실색했다. 모란이 자신을 치료해 준다는 걸 받아 주는 것과 그와 같이 사는 것 사이에는 아주, 엄청나게 큰 거리가 있었다.

억울하게도, 연은 항의하자마자 연오에게 혼나고 말았다. 연오가 연의 얼굴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아 주면서 엄격한 얼굴로 나무랐다.

“최근 들어 좀 나아지나 했더니 여전히 철없이 구는구나. 지금 네 몸 상태가 단순히 상대가 싫다고 하여 내칠 만한 수준이더냐?”

괜히 연오에게 꾸지람만 들은 연은 그저 억울할 따름이라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진짜 환장하겠군……. 그가 모란을 휙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일을 자처하는 거지? 이제까지 한 일이 있었기에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연오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다시 연아, 하고 불렀다. 좀 더 나무라려고 하려다가 연의 상태를 다시 상기했는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대신 모란에게 당부했다.

“그럼 잘 부탁하겠네.”

“최선을 다해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이 보기에는 정말이지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은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그저 모란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의 상태에 대해 좀 더 나눌 말이 있었는지 연오가 은록을 따라 나가자 방에는 모란과 연 단둘만이 남았다. 형님도 없겠다 연이 이제 대놓고 모란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수작이야? 당장 가서 못 하겠다고 해!”

“무슨 수작이기는. 당연히 치료하기 위해서지. 어디 이 치료가 쉬운 일인 줄 알아?”

모란이 찌푸려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쿡 눌렀다. 심지어 머리까지 쓰다듬듯이 도닥도닥하는 걸 연이 짜증스럽게 탁 손으로 쳐 냈다. 치료하는 건 다 좋은데 이런 식으로 어린애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순간이동도 매일같이 하기에는 힘들다고.”

“……그래?”

모란의 말에 연이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순간이동이라는 술법이 대단하다는 건 얼핏 느끼고는 있었다. 힘들 만도 하긴 하겠지. 아무리 봐도 힘들어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화정당에서 지내며 돌보면 좋은 것 아니야? 대체 무어가 문제야?”

“네놈이…… 네놈이 시시 때때로 희롱을 하잖아!”

연이 흥분하려다 말고 기침을 하자 모란이 흥분하지 마렴, 하면서 가슴 위를 도닥거렸다. 연은 또 짜증스럽게 탁 쳐 냈다. 그의 어머니에게서도, 아니 그 누구에게도 감히 받아 본 적 없는 취급이었다. 좋을 리가 없었다. 모란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오해야.”

“오해는 무슨!”

하는 태도와 말투가 있는데 연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모란은 뻔뻔하게 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넌 솜이 다 터진 곰 인형 같아 보이거든. 몸을 만지는 건 그런 거야. 내가 넣어 준 솜을 좀 더 잘 넣어 주기 위해서지.”

모란은 말을 끝낸 뒤 내심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은 불퉁한 얼굴로 눈썹을 찡그릴 뿐이었다.

“곰 인형?”

“그래, 곰 인형.”

“뭐 하러 쓸데없이 인형에 비싼 솜을 넣지? 그리고 곰 인형은 뭐야? 곰 가죽으로 만든 인형인가? 그런 비싼 인형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아니…….”

비유가 먹히기에는 이 세상은 모란이 머무르던 곳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결국 그저 뺨을 긁적이고 말았다. 아무튼 화정당에서 머무르려는 건 정말 치료에 필요해서 그런 것이다. 연이 얼마나 어떻게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리든 그가 보기에는 그저 퍽 귀엽고 하찮아 보일 따름이었다.

그는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을, 혹은 인간이 아닌 자들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다.

“의심하지 말거라, 정말이니까.”

모란이 웃었다. 그는 선과 악을 따로 가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행한 일을 책임지고 그가 만든 업을 풀어낼 따름이었다.

인연은 확실히 인연이로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연(緣)이란 언제나 예상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흘러가지도 않는 녀석이었다.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때도 있지 않은가.

“반드시 원래대로 회복될 테니 걱정은 말아.”

그리 말한 모란이 톡톡 침상을 두드리자 기둥에서 연한 보라색의 꽃이 주렁주렁 자라났다. 늘어진 꽃잎이 제 이마를 간질이는 탓에 기겁한 연이 벌떡 일어나자 그가 크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저런 자와 같이 지내야 한다니!”

기둥에서 꽃을 떼어 내며, 연이 치를 떨었다. 대체 어떻게 죽은 나무에서 꽃이 자라날 수 있는 거지……? 인상을 쓰며 포도송이처럼 달린 꽃송이들을 한참 노려보았다. 그리고 문밖으로 내던지려다 간신히 참았다. 문을 열면 불어 닥칠 차가운 바람이 싫었다.

결국 그는 방 한구석에 꽃송이를 집어 던지고 자리에 누웠다. 참으로 피곤한 하루였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했던 연은 기절하듯이 잠에 빠지느라 그만 한 사람을 깜빡 잊고 말았다.

연이 그날 연회에서 그대로 달아나 버린 한위를 다시 보게 되는 건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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