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二章 : 형제 (3/19)

二章 : 형제

‘미약하지만 확실히 몸이 나아졌다.’

쓴 탕약을 삼키면서 연이 진단을 내렸다. 몸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손이 전보다 덜 시린 정도의 호전이었다. 그가 입 안에서 탕약을 굴려 맛과 향을 분석하려고 애를 썼다.

“칡, 황기……. 석창포(石菖蒲), 그리고 백두구(白豆寇)를 넣으셨군.”

백두구라니, 소화가 잘되지 않는 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긴 몸이 찬 사람은 대체로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니 바른 추측이긴 하지.

탕약을 여러 번에 나누어 마셔 보았으나 연은 두 가지의 약초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사부에게 바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았다.

연이 탕약을 비우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도로 내갔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아직도 백모란의 몸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면경을 확인했다. 여전히 자신의 몸이었다. 다시 백모란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굳이 면경으로 확인할 것까지도 없었다. 백모란과 자신의 몸 상태는 천지 차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모란과 다시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의원에 가면 마주칠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마주친다고 해서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데면데면 지나가겠지. 그래야 할 테고, 그러기를 바랐다.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신이 풀리긴 했으나 그는 딱히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날이 쌀쌀하다 못해 매서웠다. 화정당 안이나 천천히 거닐며 산책이나 하고 올 생각이다.

문을 열고 나간 연이 자신의 정원을 새삼스럽게 다시 둘러보았다. 계절마다 심는 식물이 달라서 나무들은 겨울에도 잎이 파랬다. 주강은 자리에 없었다. 그는 종종 세가의 일로 자리를 비울 때가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연은 화정당에서 일하는 시비와 하인 몇과 마주쳤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이 식사를 했거나, 이야기를 나누었거나 혹은 연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거나…….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예민한 성정의 도련님 심기라도 거스를까 말없이 정중하게 고개만 숙여 보였다.

연은 딱히 정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중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커다란 연못이었다. 제법 거대한 연못과 그 중앙에 위치한 정자는 척 보기에도 운치가 좋았다.

한참 정자를 바라보던 연의 시선이 어느 곳에 가서 멎었다.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 근처에 작고 노란 꽃이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봄이 올 시기이긴 하지.

빤히 꽃을 바라보던 연은 다가가…… 발로 짓밟았다. 다시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꽉꽉 짓이기고 나서야 그는 만족했다.

사실 백모란의 몸으로 사는 게 다 좋지만은 않았다. 딱 한 가지, 그의 이름만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란의 어미는 백모란을 품을 적에 아이가 딸인 줄로만 알아서 이름을 그리 지었다. 하지만 태어난 건 사내아이였고, 다시 짓기 귀찮았는지 아니면 모란꽃을 유독 좋아했던 건지 백모란의 이름은 그대로 백모란이 되었다.

하필 사람 이름을 꽃 이름으로 지을 것은 뭐란 말인가.

연은 세상에서 꽃이 제일 싫었다. 그는 봄보다는 겨울이 훨씬 좋았다. 꽃이 들어간 것 중에 좋아하는 것은 딱 하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었다. 그가 퍽 마음에 들어 하는 어구다. 어떤 꽃이든 반드시 지기 마련이니.

할 일도 없겠다, 그는 정자 근처를 돌며 다른 꽃들도 지르밟아 없앴다. 핀 꽃도 얼마 없었기에 곧 할 일이 사라진 연은 오도카니 연못 근처, 적당히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좀 쓸쓸했다. 왜 전에는 혼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혼자 있는 방법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겠지.

시장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한 건 좋아하지 않지만 완전히 홀로 지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식사 때가 지나도 챙기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자신이 찬 바람 맞으며 하루 종일 여기에 앉아 있어도 그 누구 하나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다시 바스락하고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누구냐!”

연오나 주강 정도나 되면 바로 기척을 알았겠지만 연은 그런 정도는 되지 못했다. 얼굴을 굳힌 그가 천천히 다가갔다. 근처의 풀숲을 발로 걷어찼으나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검집으로 헤집어 봐도 그저 풀잎과 줄기뿐이었다. 이제 슬슬 몸이 차갑게 식기도 하여 연은 찜찜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세가 내이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과연 동물이었을까?

산책을 마치고 오니 주강도 돌아와 있었다. 연은 주강에게 방금 전의 일을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닐 것이다. 또 말해 봤자 무엇 하겠는가? 주강의 반응은 시원찮을 것이었다. 그가 충성하고 있는 사람이 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은 주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백모란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나이도, 가족도, 출신 고향도 알지 못한다. 듣기로는 연이 태어나기도 전, 남궁세가 주최의 무술 대회에서 제일(第一)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최연소의 나이라 당시 화제였다고들 했지…….

확실히 주강의 무공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호위도 완벽했다. 그가, 이따금 연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러나 무예가 고강한 고수들이 이따금 허약한 자신을 업신여기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연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주강이 제게 신경을 제대로 쓰질 않으니 수풀에서 뭔가 바스락거렸다고 말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형님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으시지.’

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강이 연오의 감시역이라고는 해도, 진짜 감시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감시라기보다는 나름 연오의 보살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였던가, 더위를 먹고 인적 드문 곳에 쓰러진 후부터 주강이 붙어 다녔던 것 같은데……. 자신이 그때 아마 주강에게 짜증도 좀 냈었을 테고……. 그래, 싫어할 만하군.

“좀 더 건강해지면 되겠지.”

중얼거리며 연이 푹신한 침상 위에 몸을 뉘였다. 어쨌든 그의 목표는 다가오는 봄까지 건강해져서 세가를 나가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겨울에 나갔다가는 십중팔구 된통 앓아누울 것이 분명했다.

그날 연은 산책을 해서인지 드물게 푹 자고 일어났다. 약한 불면증도 앓고 있었기에, 다음 날도 일어나 산책을 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어김없이 화정당 정원의 뒤쪽에 자리 잡은 연못으로 향했다. 다리를 지나던 그는 멈칫했다. 시야에 걸리는 노오란 작은 꽃이 있었다. 지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다리 입구에 난 작은 꽃을 빤히 바라봤다.

“……내 착각인가?”

어제 분명 이 근처 꽃은 밟아 없앤 것 같았는데……. 미간에 주름을 잡은 연이 다시 꽃을 짓뭉갰다. 노란 꽃잎들을 툭툭 차서 연못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마저 산책을 마쳤다.

그러나 그다음 날, 다시 산책을 나온 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 자리 그대로 똑같이 자그마한 노란 꽃이 산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재생력이 강한 꽃이 있을 수가 있나? 한참을 꽃을 노려보다가 땅을 파낼 만한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예 뿌리까지 제거해 버릴 생각이었다.

다시 부스럭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연이 멈칫했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가 못 들은 척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연못의 정자로 향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서 흘깃 보자 수풀 아래 무언가 보일락 말락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핏 보면 지나가 버릴 그런 무언가였다. 연이 안력을 돋웠다.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그러나 어른이라기에는 작고……. 어린아이인가?

‘세가에서 일하는 어린 시비나 하인이겠군.’

“이리 나오렴.”

“…….”

아마 자신이 지나가자 숨어 버린 게 아닐까 추측하며 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환자 중에는 몸이 약한 자들이 많다. 대부분 노인과 어린아이들이었고, 덕분에 연은 구슬리는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혼내지 않을 테니까, 어서.”

과연 그의 추측은 맞아서 잠시 후에 작은 인형(人形)이 엉금엉금 수풀에서 기어 나왔다. 열세 살쯤 된 어린아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연은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옷차림이 퍽 꼬질꼬질했다. 산이며 들을 쏘다니다 돌아온 작은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지나간다고 하여 그렇게 숨어 있지 않아도 된단다.”

연의 말에 아이가 얼굴을 들었다. 까맣고 퍽 똘망똘망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연은 어째서인지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디서 이 아이를 봤지? 대체 어디서? 어렴풋이 떠오르려고 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아이가 후다닥 도망쳤다.

“잠시만……!”

연이 붙잡기도 전 아이는 다람쥐처럼 날래게 수풀 안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그 후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황망하여 연이 잠시 그 자리에 섰다. 주변은 높은 담장과 잘 꾸며 놓은 수풀, 그리고 나무가 전부였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도련님.”

갑자기 주강의 목소리가 들려서 놀랐지만 연은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주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수상쩍은 기척을 느끼고 온 모양이었다.

“누가 있었습니까?”

연은 잠시 아이가 사라진 수풀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해 낸 찰나였다. 그가 시치미를 뗐다.

“아니, 작은 동물이었어.”

주강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연이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는 듯했다. 연이 손짓했다.

“돌아가 봐. 혼자 있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기색으로 주강이 돌아간 뒤 연이 팔짱을 끼고 수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아무리 아이라도 그렇지 주강이 제대로 확신을 하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기척이 조용하다니 놀라웠다. 무엇보다 주강이 다가오는 걸 먼저 감지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 외에도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강이 가고 난 뒤 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렸으나 다시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일은 없었다.

아이가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놀라서 도망갔으니 다시는 안 오려나, 하고 있던 연이 흠칫했다. 수풀 아래 꾀죄죄한 얼굴이 불쑥 나타나 있었다. 아이치고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척이 조용했다.

“……한위, 맞지?”

이름을 불러 주니 아이,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이 내심 혀를 쯧 찼다. 사실 얼굴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용했다. 한위는 일 년에 한두 번, 남궁영명이나 남궁연오의 생일 연회 때나 구석진 자리에 잠깐 앉아 있다가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출신이 그다지 좋지 않아 세가에서 완전히 무시받는 위치였다.

남궁세가 직계 간의 사이는 다소 복잡했다. 일단 남궁영명의 삼남 이녀 중 연오와 첫째 누이는 정실부인인 황보세희의 자식이었다. 둘째 누이는 예전에 영명과 연인 관계에 있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은 어떠하냐 하면 굳이 따지자면 첩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첩실이라 하여도 연의 모친인 모용단리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가(慕容家)의 여식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게다가 연이 남궁영명을 증오하는 것과 별개로, 영명은 연을 나름 신경 썼다. 물론 연오와 비할 바는 안 되었지만.

반면 한위 모친의 출신은 한미하기 짝이 없었다. 세가 내에서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그녀는 기루에서 일하던 하녀였다고 했다. 한위는 영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가진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한위를 낳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산욕열(産褥熱)로 사망했고 한위만이 세가로 보내졌다.

그 후 한위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라났다. 영명이 한위가 자신의 눈에 띄는 걸 몹시 싫어한 탓이다. 세가의 가주가 그러하니 다른 사람들의 취급이 어떻겠는가?

원래도 한위가 이 정원을 들락거렸었나? 연은 알 수가 없었다. 전의 그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즐기지를 않았다. 밖으로 나갈 때는 유일하게 모란을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모란의 몸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한위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겠지.’

딱히 한위가 소위 천한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백모란일 때나 지금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얼마 전까지의 ‘남궁연’은 그다지…… 사교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연못 옆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으며 묻자 한위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알기로 한위는 분명 열다섯이다. 그런데도 몸이 놀라울 정도로 작았다. 단순히 체격이 작은 게 아니었다. 연의 눈으로 보기에는 영양 섭취 부족으로 인한 발육 부진이었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행색도 열다섯이라기보다는 열 살에 가까워 보였다. 빼빼 마른 이 녀석이 그의 동생이며 혈육이라는 사실이 새삼 연의 가슴에 와 닿았다.

연이 유심히 관찰하는 동안 한위는 경계하면서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앉으라는 의미로 톡톡 의자 옆을 두드리자 눈만 깜박거렸다. 못 알아들었나 해서 연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여기 앉으렴.”

한위가 슬그머니 다가와 앉으려고 할 때였다. 엉덩이를 간신히 붙이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갑자기 또 지난번처럼 후다닥 달아나더니 바스락거리며 수풀로 숨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주강이었다. 그가 주위를 살펴보는 가운데 연이 한숨을 쉬었다.

“새였어.”

“새……입니까?”

“그래. 누가 애완용으로 키운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고는 연은 다음번에도 주강이 한위를 달아나게 하는 일이 있을까 봐 덧붙였다.

“앞으로 사소한 일로 쓸데없이 오지 좀 마.”

좀 재수 없게 말했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해야 안 올 것 같고……. 주강은 잠시간 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다음 날 연은 산책을 나가기 전 이것저것 챙겨 들었다. 물건을 품에 밀어 넣고 연못으로 향한 연이 우뚝 서서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를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노란 꽃은 대체 왜 자꾸 피어나는 거지?

그가 꽃을 짓밟지 못한 건 한위가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 탓이었다. 하는 수 없이 꽃에서 신경을 끈 연은 의자에 앉았다. 다시 톡톡 두드리자 이번에는 한위가 한결 고분고분하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눈치를 보며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앉았다.

“흠…….”

잠시 한위를 관찰하며 살펴보다가 일어난 연이 연못으로 향했다. 가지고 온 천을 연못 물에 적신 그가 한위의 턱을 잡았다. 한위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더니 바짝 얼어붙었다. 제 손위 형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바짝 긴장한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은 적신 천으로 꼬질꼬질한 얼굴을 박박 닦아 냈다. 얼굴빛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색은 괜찮군. 딱히 병이 있거나 하지 않아. 건강한 체질이야.’

그는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흙이 묻다 못해 거뭇한 소매를 걷어 마른 팔의 맥도 짚어 보았다. 어린아이답게 몸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날씨가 여간 추운 게 아니었기에 뺨은 추위로 발그레했다.

“네가 몇 살이지?”

연의 질문에 한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접었다. 그러고는 수를 헤아려 보는 듯하더니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펼쳤다. 연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정신 연령이 심하게 낮다. 하지만 몸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말을 못 하는 것이냐?”

눈을 깜박거리더니 한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는 한데 말투가 어눌하고 느렸다. 연이 다시 맥을 짚어 보았다. 기혈이나 기맥에는 막힌 곳이 없고 통천혈(通天穴)이나 백회혈(百會穴) 부근의 흐름도 이상이 없었다. 오지(五遲) 혹은 오연(五軟, 자폐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치(白癡)도 아니다. 눈빛이 맑고 또렷했다.

속으로 드는, 설마 하는 가정을 지우며 연이 품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냈다. 보따리를 풀어 헤치자 주먹밥 두 개와 당과 몇 개가 나왔다. 입을 조금 벌린 한위가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배에서는 희미하게 꼬르륵 소리도 났다. 연이 오늘 아침 식사로 만든 식사였다.

“먹으렴.”

밀어 주자마자 한위는 사양도 않고 덥석 손으로 주먹밥을 쥐어 와구와구 먹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연의 마음속에서는 안쓰러운 감정이 번졌다. 아무리 남궁영명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비나 하인들이 네게 밥을 안 주니?”

주먹밥을 모두 먹은 한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의 낯빛이 흐려졌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사람과의 교류도 적은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굶기기까지 하다니? 아무리 출신이 천하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미가 줬는데……. 할미이가 아안, 일어나요.”

“할미?”

“으응. 잠만 자.”

그러더니 한위가 돌연 구슬 같은 눈물을 서럽게 뚝뚝 흘렸다. 연이 당황했다.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 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죄다 울음을 터트리곤 했으니 굳이 달랠 필요성도 못 느꼈던 탓이다.

어색하게 팔을 뻗어 등을 어루만져 주었더니 한위가 흐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나 울음이라기엔 너무 조용했다. 숨을 죽여 우는 게 익숙하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울어도 달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니.

위로가 어설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간 쌓인 서러움이 많아서 그랬는지 한위는 한참 만에야 울음을 멈췄다. 눈이며 코가 안쓰럽게 붉었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연이 당과를 천으로 싸 주었다. 한위가 소중하게 당과를 품고 일어났다. 훌쩍거리면서도 한위는 머뭇거리다가 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 생각에 잠겼다. 할미라는 건 아마도 한위를 돌보는 사람인 거겠지. 병으로 앓아누웠나? 최악의 가정을 하자면 죽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날 밤 연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잠을 설쳤다. 지척에 중한 환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한위를 돌보고 있는 사람은 그가 능히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일 수도 있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뒤 그는 한참을 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다. 이따금 감각이 둔해지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 도구가 없어.’

현실적인 고민을 하던 연은 얼마 안 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으면 사 오면 될 것을, 무얼 고민하고 있나?

다음 날 연은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차려입었다. 오늘은 좀 오래 거닐 예정이니 옷은 특별히 따듯한 것으로 골랐다. 괜히 춥게 다니다가 작년…… 그러니까 체감상으로는 십일 년 전이지만, 아무튼 그때처럼 가벼운 기침에서 폐렴으로 번지게 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연이 화정당을 나서자 주강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사실 혼자서 외출하고 싶었지만 그는 연의 말은 듣지 않았다. 연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사실 모란일 적이나 지금이나 주강의 태도가 크게 다르진 않단 말이지.’

시비나 하인 같은 경우에는, 남궁연일 때는 몰랐던 면모를 많이 보여 주곤 했다. 그들은 모란에게는 시비나 하인이 아닌 이웃이며 형이었고 누나였다. 귀엽다고 음식을 나눠 주기도 했고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었으며 술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강은 어떠했냐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견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모란일 때도 그가 길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사람이 그런 것이다.

남궁세가를 나선 연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마 자신이 저 풍경 중에 하나가 될 일은 없겠지.

가면서 낯익은 사람을 몇 만났으나 반은 연의 얼굴도 못 알아보았고, 반은 알아보고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었다. 모란일 적에도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연은 새삼 제 평이 안 좋다는 걸 체감했다.

연은 바지런히 걸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을 지나 외곽으로 들어가자 주루가 하나 보였다. 만물상(萬物相) 금향루(錦香樓). 진은록과 종종 오곤 하던 곳이었다. 주루에 들어가기 전 연이 주강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건 남궁세가에 알려져도 좋지만 무엇을 사는지는 딱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차남이 치료 도구를 구입했다는 게 알려져도 큰일까지는 나지 않겠지. 그러나 굳이 알려 성가신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연의 말에 주강은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듯 이 층을 잠시 쳐다보더니 묵묵히 입구에 섰다. 제게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주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연은 걸음을 옮겼다.

금향루는 만물상이라는 명칭답게 모든 것을 파는 곳이다. 손쉽게 물건을 구입하고 싶은 사람들이 비용을 지불하면 대신 발품을 팔아다 대리 구매해 줬다. 또한 구매한 물품은 그 누구에게도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연은 이 층의 한 객실로 안내받았다. 일각 후 비용을 치르고 난 뒤 침구(針灸)며 약재에, 어린아이 옷가지 등 물건을 들고 아래로 내려오니 주강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연은 자신의 호위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사람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벼운 외출만으로도 연은 다소 피로해졌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 일찍 일어난 탓도 있었다. 세가로 돌아온 연이 보따리를 풀었다. 일단 침구 같은 도구들은 자개장 안 깊숙한 곳에 넣었다. 옷가지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만 챙겨 연못으로 향하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한위가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더 꼬질꼬질해졌다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한위가 냉큼 연이 앉은 의자 옆에 앉았다. 연이 가져온 보따리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에 풀어 헤쳐 안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장난감이며 당과, 떡 따위의 간식이었다. 한위는 특히나 장난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만지작거리더니 감사 인사를 했다. 열다섯 살이면 장난감에는 흥미를 잃을 나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좋아한다는 건 변변찮은 놀잇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겠지.

떡을 손에 쥐고 야무지게 베어 먹는 한위를 보며 연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한위야.”

“네에.”

“내일은 해가 지고 나서 올 수 있니?”

한위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이 관심을 보여 주니 정에 굶주린 아이는 해가 지면 춥다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연이 굳이 저녁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에 한 번 주강이 자리를 비울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내일 저녁이었다. 연은 보따리 안에 겨울옷을 넣고는 한위의 몸에 잘 매어 주었다.

“추우니까 내일은 이걸 입고 오렴.”

“네에.”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는군. 연이 아무 생각 없이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멈칫했다. 언제 감았는지 머리가 기름지다 못해……. 언제 씻기기도 해야 할 텐데. 겨울이니 연못에서 씻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위가 신나서 뛰어가고 난 뒤 연은 정자 다리 입구에 핀 노란 꽃을 노려보았다. 매일같이 새로 피는 기현상에도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짓밟아 뭉개 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정당 안으로 향했다. 연의 발아래에서 꽃잎이 흐트러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한 꽃향기를 남겼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 산들거리는 미풍이 일더니 노랗고 작은 꽃이 하나하나 다시 영글기 시작했다…….

***

“도련님,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밖에서 무뚝뚝하게 주강이 고했다. 그리고 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용히 사라졌다. 이때만을 기다렸던 연이 덮고 있던 이불을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구를 챙겨 든 그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울 밤바람이 매우 사나워서 잠시 몸을 떨며 제자리에 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못으로 향하니 한위가 연과 함께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추웠을 텐데……. 이복형제라고는 해도 엄연히 자신의 동생인데 이렇게 숨어서 만날 필요가 있나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남궁연이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건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연은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한위의 처지를 보았을 때, 세가의 의사를 불러 봤자 마지못해 와서 봐주거나 약 같지도 않은 약을 지어 주고 갈 게 뻔했다.

“네 할미에게로 가자.”

“정말요?”

한위가 눈에 띄게 좋아하더니 다시 수풀로 달려갔다. 연이 잠시 수풀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로 드나드는 거지? 한위처럼 수풀 속을 기어 지나갈 수는 없으니 연이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한위는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위는 걸음이 무척 빨라서 연은 따라가는 데 곤욕을 치렀다. 경공도 어두운 와중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도 몇 번이었다. 부끄러움에 한위가 보기 전에 얼른 일어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연신 욕지거리를 삼켰다.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라고. 백모란의 몸을 체험해 봤기에 제 몸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한위는 세가의 외곽 중에서도 인적 드문 곳을 따라 걸었다. 평소에도 자주 쏘다니는 길인 게 분명했다. 둘은 하인들의 처소를 지나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그 할미란 사람이 지내는 곳임이 분명했다. 세가에서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데다가 한기 어린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엄습하는 추위에 연이 말없이 몸을 떨었다.

“여기이, 여기요.”

연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그 남궁세가에 어떻게 이런 초가집 같은 곳이 있을 수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세가의 공자를 돌보는 사람인데 취급이 너무 박했다. 지금 당장 해결은 못 하기에 일단 잠자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병자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그가 가져온 호롱에 불을 붙였다. 방 안이 환해지며 그제야 병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할미.”

한위는 노파의 곁으로 달려가 손을 쥐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연은 병자의 머리맡에 놓인 당과를 볼 수 있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일단 문을 닫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바닥이 냉골 같았다.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날 병도 나겠다.

침구를 꺼내 든 연이 노파를 살폈다. 의식은 없으나 숨은 쉬고 있고 몸이 차가웠다. 손발에 붓기가 있었으며 명치를 눌러 보자 간이 부은 것이 느껴졌다. 연이 맥을 짚는 동안 한위는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성신염(慢性腎炎)이로군.’

간이 허약해져 온몸에 기운이 없고 무기력하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덥지도 않은데 도한(盜汗, 식은땀)이 있으며 정신도 혼몽할 테고. 그나마 다행인 건, 치료 못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많으니 이렇게 앓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다. 연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공심법이었다.

연이 침구를 펼쳤다. 한쪽 팔이 부러졌어도 침은 잘 놓을 수 있었다. 침을 놓기 전 조심스럽게 병자의 옷을 풀어 헤쳤다. 침을 놓기 좋을 만큼만 벗기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날개를 펼친 작은 새 문신이 어깨에 있었다. 이를 확인하니 연은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노파는 하오문(下午門)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오문(下午門)이란 무엇인가. 무림강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점소이, 시비, 기녀 등 낮은 곳의 이들로 이루어진 문파가 있으니 그 문파가 바로 하오문이다. 세상 어디에나 있었고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파. 사람을 대하는 게 일이기에 정보 습득에 능하기도 하였다. 정보를 얻어야 살아남으니 그들이 익히는 무공은 공격이나 방어보다는 은신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정보를 얻는 것이다.

아마 주강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한위의 기척은 이 노파에게 배운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나이에 놀라운 성취였다. 재능이 있다는 소리겠지. 시선을 돌리자 한위는 연이 노파에게 침을 놓는 걸 움찔하면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보통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침놓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하는 걸 생각해 볼 때,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침을 모두 놓고 난 뒤 기다리면서 연은 고민에 빠졌다. 만성신염에는 육미탕(六味湯)이 제일 효과적이다. 하지만 바닥을 따뜻하게 땔 나무도 없는데 이 노파나 한위가 탕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효과는 좀 떨어져도 환으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겠군. 만약에 나무가 있다 해도 약탕 만드는 데 쓰느니 방을 지피는 데 쓰는 게 건강에는 백번 나았다. 연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 노파가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할미!”

한위가 반색을 하며 반겼다. 노파는 한참을 눈을 깜박거린 후에야 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파가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연은 모르는 척 침구를 정리했다. 연이 침을 모두 제거하자 한위가 울먹이며 노파에게 안겨 들었다.

“이제 아프지 마!”

연은 노파가 손짓으로 한위에게 대화하는 걸 보며 미간을 접었다. 벙어리였구나. 연은 못 알아보는 손짓도 한위는 잘만 이해했다. 이제야 한위의 말투가 어눌한 것도 이해가 갔다. 벙어리 유모와의 교류가 주가 되었으니 말에 능숙할 리가 없었다.

“응, 맞아. 형님이야!”

노파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한위가 해맑게 외쳤다. 노파의 얼굴 가득한 근심 걱정은 보이지도 않는가 보지……. 아무튼 볼일을 모두 마친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슬으슬한 게 영 몸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따뜻한 방이 필요했다.

“내일 또 보자꾸나, 한위야.”

“네에, 형님!”

한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둘이 당과도 나눠 먹을 수 있겠지. 흘끗 두 사람을 보고는 연이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도란도란 한위의 말소리가 울리는 낡은 누각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보는 건 언제나 좋았다. 그 광경은 그의 마음을 채워 주곤 했다.

화정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어두침침한 길을 돌아오면서 그는 한 번 더 넘어졌다. 이번에는 밤눈이 어둡고 급히 걸어서가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담장을 휙 넘다가, 지난번 백모란에게 패대기쳐져 다쳤던 발목도 다시 삐었다. 나무를 짚고 서서 가만히 욕설을 지껄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둑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도련님.”

연은 이번에는 놀라서 작게 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를 뗐다.

“무슨 일이야?”

쌀쌀맞게 묻자 주강의 시선이 잠시 연의 다리에 향했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답하고는 주강이 다시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를 꽉 문 연은 힘겹게 자신의 따뜻한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서 보니 손바닥이며 무릎이 죄다 까져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이불 안으로 기어들었다.

다음 날 연은 끙끙 앓느라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작게 기침을 한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켰을 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몸이 영 좋지를 않았지만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시비가 소세용으로 받아다 놓은 뜨거운 물을 놓고 약재를 잘게 쪼개고 썰었다. 한위에게 줄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부러진 팔 때문에 한쪽 손으로 약을 빚느라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다. 그래도 어떻게 요령을 익혀 몇십 개를 동글동글 잘 빚어 놓으니 벌써 점심이었다.

시비들이 점심을 가지고 오기 전 연이 환약을 잘 싸서 치워 두었다. 오늘도 한위 줄 주먹밥을 만들 생각이었다. 한위는 좀 잘 먹을 필요성이 있었다. 연이 점심을 가지고 온 시비에게 일렀다.

“연오 형님에게 시간 괜찮으면 단둘이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고 전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연이 먼저 연오에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번에는 할 말이 있었기에 꼭 같이 식사를 해야 했다. 잠시 후 돌아온 시비는 연오가 흔쾌히 승낙했노라 전해 왔다.

연이 주먹밥이며 환약을 싸서 나가자 한위가 몸을 쭈그리고 앉아 연못에 작은 조약돌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밥인 줄 안 잉어들이 잽싸게 다가왔다가 느릿느릿 다시 돌아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한위야, 하고 부르니 한위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형님.”

보따리를 풀자마자 한위는 주먹밥이며 먹거리를 여지없이 손으로 집어 와구와구 먹었다. 오늘은 기운을 좀 차린 노파가 신경을 썼는지 옷이 바뀌어 있었고 얼굴도 덜 꼬질꼬질했다. 머리카락도 보송해 보였다. 연은 마음 놓고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위야. 돌아갈 때 이걸 꼭 가지고 가렴. 뭉그러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

한위가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킁 냄새를 맡아 보더니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미간을 팍 찡그렸다. 약간 불안했던 연이 덧붙였다.

“약이니 가지고 가서 아침저녁으로 꼭 두 번씩 먹으라고 해.”

“할미에게?”

“그래. 그래야 할미가 다시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야.”

눈을 휘둥그레 뜬 한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연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푼 듯했다. 아마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형이니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겠지. 그러나 가족이라고 해서 다 이러지는 않는 것을. 연이 쓰게 웃었다. 남보다도 못할뿐더러 원수 같은 가족도 있는 법이다.

연은 가만히 앉아 한위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혼자서도 잘 놀았다. 아니, 혼자 노는 방법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한위는 제법 한참을 연의 곁에서 머물다가 갔다.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도 헤어지기 싫은지 내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딱히 놀아 준 것도 없이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연은 한위가 대체 어디로 드나드는지 알기 위해 수풀이며 담장 근처를 뒤적거리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비의 목소리에 돌아섰다. 뭐, 언젠가는 알아내는 날이 오겠지……. 지금은 형님을 뵐 때였다.

***

“어서 오거라. 어쩐 일로 네가 먼저 나와 식사를 하자고 하는구나.”

화월당에 당도하니 연오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오랜만에 먼저 만남을 청한 아우가 퍽 반가운 눈치였다. 오늘도 화월당에는 처리해야 할 일거리가 가득이었다. 연오는 두루마리 한 무더기를 밀어 내며 탁자에 앉았다. 소면을 시작으로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잘 구워져 반들거리는 오리구이는 입맛이 없는 연조차도 젓가락을 뻗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형님이 신경 좀 쓰셨구나.’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려니 연은 다소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몰랐으면 모를까 근래 들어 알게 된 사실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을 쯤에 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연오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형님, 실은 궁금한 것이 있어 이렇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한 것입니다.”

“궁금한 것? 얼마든지 물어보아라.”

술을 훌쩍 마시고는 연오도 잔을 내려놓았다. 연은 연오를 잠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연을 여러모로 신경 써 주곤 했다. 의원이며 진귀한 약에, 못해도 며칠에 한 번은 얼굴을 보며 어찌 지내는지 물어봐 주었다. 주강을 붙여 신변에 이상이 있거든 바로 알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을 향하는 눈빛에는 염려와 걱정이 들어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된 사내에게는 분명한 과보호였으나, 그 과보호 덕에 연은 그나마 남궁세가가 완전히 미워지지 않았다. 영명의 남궁세가와 연오의 남궁세가는 다를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일에는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완벽하고 곧다고만 느껴지는 형님이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얼마 전에 우연히 한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위의 이야기를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연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위가 세가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없어 굶고 다닌 모양입니다. 어찌 저와 이리 처지가 다릅니까? 한위나 저나 같은 아우가 아닙니까?”

그 말을 하면서 연의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한위는 연오에게만 동생이 아니라 그에게도 동생이었다. 모란으로 지내면서 뉘우침과 반성이 있었으니 돌아와서 이렇게 챙기는 것이지, 그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한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가식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가식적이어도 한위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진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연의 질문에 연오는 한참 침묵하더니 조용히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도 한위가 어찌 지내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굶고 다니는 줄은 몰랐구나.”

“형님.”

“나름 신경을 써 준다고 써 줬는데 한참 부족하지. 안다.”

연오가 신경을 써 주는 정도가 분명 연에게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꼬박꼬박 연을 식사 자리에 부르면서도 한위는 그렇지 않았다. 세가에 충성스러운 시비나 하인들을 배치해 주지도 않았고, 유일하게 한위를 돌보는 노파가 다 죽어 가도 방치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는 연오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연오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연아. 아버지는 한위를 싫어하신다.”

단호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드물게도 연오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야.”

연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연이 식어 가는 음식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분의 아들로서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 것도 못마땅해하시는 정도지. 심지어 나의 도움까지도 말이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오는 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의로운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곤 했다. 그런 연오에게 있어 옳은 일 중의 하나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궁영명이 어디 제대로 된 부친이던가? 연은 연오가 영명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심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몇 번이나 지켜봤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사람을 붙여 돌봐 주려고 할 때마다 한위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감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자명한 일이지.”

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위가 싫다면 대체 왜 세가 내에 데리고 있는가? 다들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남궁영명에게는 자식들이 더 있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자식이라 하여 반드시 세가 내로 들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연오도 그 이유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한위를 내보내려고 한다. 세가는 한위에게 절대 좋은 곳이 아니야.”

연은 연오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가 생략한 말 또한 알아차렸다. ‘남궁영명이 살아 있는 세가는’인 것이겠지. 그건 연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간 많이 답답했던지 연오가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나중에 한위를 일단 남궁세가와 연이 닿은 소박한 상회에 보내 일을 배우게 한 다음, 자신이 정식으로 가주 자리를 물려받으면 한위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영특한 녀석이니 뭘 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연오가 쓰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비웠다. 무공으로 술기운을 밀어 내 등 뒤에서 미약한 아지랑이가 일었다. 소가주로서 그는 술을 마실 수는 있어도 취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오리고기를 한 입 먹은 연이 일단 칭찬했다.

“훌륭하네요.”

“그렇지? 나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요리란다.”

맛있는 오리구이에 대한 칭찬으로 분위기가 밝아지자 연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럼…… 한위 나갈 때 저도 같이 나갈까요? 한위는 세상 물정도 전혀 모를 테고…….”

연오가 정색하자 연이 속으로 이크, 하고 혀를 찼다. 연을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엄격한 손위 형제이자 소가주였다. 그가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간만 찌푸렸는데도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한위와 네가 같으냐? 그런 소릴 하려거든 좀 강건해지고 나서나 말하거라.”

“제 건강이…… 뭐가 어떻습니까?”

내심 발끈하여 대꾸하면서도 말 같잖은 소리라는 건 스스로 잘 알았다. 하룻밤 잠시 한위와 짧은 밤 마실 나갔다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앓는 몸뚱어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겨울 대신 봄에 세가를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한위 내보낼 때 사람 딸려 보낼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연은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모란의 몸으로 살면서 그는 세상의 쓴맛을 제법 보았다. 남궁세가의 공자로 살 때는 실로 상상도 한 적 없던, 그런 쓴맛이었다. 어미를 잃은 농사꾼의 아들이란 그런 위치였다. 사부인 진은록이 곁에 있었기에 그나마 그 삶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봄부터는 배움을 받거라. 내가 보기에 너는 나중에 세가의 장로가 되는 것이 좋겠구나.”

세가의 장로라……. 그다지 놀라운 제안은 아니었다. 세가에서 장로란 무슨 위치에 있던가? 가주의 측근이며 방계이든 직계이든 남궁세가와 핏줄로 얽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솔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에 걸맞은 영화를 누렸다. 보통은 연처럼 장남 외의 형제자매들이 장로가 되곤 한다.

그러나 연은 절대 세가의 장로가 될 생각은 없었다. 연오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그는 세가가 지긋지긋했다.

“연아, 대답이 없구나.”

“알겠습니다, 형님.”

형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장로가 되는 건 안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운해하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연은 의원이 되고 싶었다. 의원이 되어서 사람들이 완쾌하는 모습, 또 그 완쾌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말해 봤자 ‘네가 의술의 의 자나 아느냐’ 하는 반박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연은 그런 속마음은 내놓지도 않았다.

“한위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네게 부탁이 있구나.”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난 못 하지만, 대신 너라도 한위를 좀 봐주렴. 아버지도 네가 한위를 챙겨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실 것이다. 나 역시 네가 한위 이야기를 꺼냈을 때 놀라웠으니까.”

연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연오가 놀라워할 만도 했다. 그동안 연이 행동해 오던 게 있었으니까. 그는 어렴풋한 기억 속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몇 년 전 연회에서 한위가 애타는 시선을 보낼 적에 자신이 야멸차게 고개를 돌렸던 걸 기억해 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니 연오의 시선은 대략…… 네가 이제야 사람이 되는구나, 그 정도에 가까웠다.

“주강에게도 언질을 줘 놓을 테니 필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을 전하거라.”

연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남궁영명이 의심하지 않도록 나름 한위를 챙겨 주라는 건데…….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영명이 의심하지 않게 한위를 챙겨 주는 일이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다.

저녁을 마치고 연은 다시 찬 바람에 몸을 떨며 화월당을 나왔다. 자박자박 화정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이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위가 어디서 지내더라? 미리 말을 해 주긴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디 가십니까?”

“잠깐 들를 곳이 있어.”

연은 하오문의 노파가 지내는 낡은 누각으로 향했다. 가서 한위를 보게 되면 좋고, 아니면 환자 상태를 보고 오면 되는 것이다. 아까 연오가 주강에게 언질을 했으니 이제는 편히 보러 가도 된다.

‘그렇다면 주강은 형님의 말은 따라도 아버지에게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의미군.’

흘깃 주강을 바라보니 그는 묵묵히 연을 따라가고 있었다. 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오는 원래도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이들 따르곤 했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예민하고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연조차도 그의 형은 좋아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낡은 누각이 코앞이었다. 아무리 봐도 누각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건물이다. 빛이 안에서 어른어른하고 한위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연이 조용히 한위야, 하고 불렀다. 용케도 들었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한위가 뛰쳐나왔다. 강아지처럼 기운 넘치는 녀석이었다.

“형님!”

잠시 화정당에 들러 먹을거리라도 들고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위는 그저 연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팔짝거리던 한위는 뒤늦게 주강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뻣뻣하게 굳었다. 주강은 조용하게 한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가에 꽤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중에 주강도 속하는 줄은 몰랐다.

“한위야, 들어가자.”

한위가 끄덕끄덕하면서도 끝까지 주강의 눈치를 봤다. 연은 뒷걸음질 쳐 슬그머니 누각 안으로 들어가는 한위의 뒤를 따랐다. 둘은 막 저녁을 먹고 있던 중인 듯했다. 식은 밥에 마른 나물 반찬 두 가지가 고작이라 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 겨우 병석을 털고 일어난 병자와 한참 자라는 중인 한위에게는 적절치 못한 식단이었다.

연이 들어서자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연 큰절을 올렸다. 말은 없어도 치료해 준 것에 대해 크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연은 잠자코 노파의 팔을 잡아 앉혔다.

“살릴 수 있으니 살렸을 뿐입니다.”

그래도 노파는 몇 번이나 꾸벅거리다가 주섬주섬 이불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무언가 하여 받아 보았더니 대(帶, 허리띠)에 매달고 다니면 될 법한 장신구였다. 명주실과 무언지 모를 천을 엮어 만든 장신구를 보자 연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이 비슷한 걸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스승님이 이런 걸 차고 다니셨지.’

번잡스러워 장신구는 하고 다니지 않는 분인데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물건을 보니 정감이 가, 연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앞에서 대에 차 보이니 노파의 안색이 환해졌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를 표하고는 연이 손을 내밀었다. 노파가 한위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맥을 짚어 보니 아직도 만성신염의 증상이 있기는 하나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포하고도 반은 약을 먹어야 몸이 낫을 것입니다. 약을 다 먹고 난 후에도 증상이 지속되면 한위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나이가 있으니 앞으로도 조심해야 하고요.”

말을 하면서도 연은 다시 허름한 상차림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먹고 지내면서 제대로 회복되기란 힘든 일이었다. 방도 아직도 냉골이었고 이불도 홑이불이었다. 호롱불조차 그나마 연이 지난번에 주고 갔기에 방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방 안을 둘러보며 연은 대충 한위를 통해 챙겨 줄 것들을 유념해 두었다.

“한위야. 내일은 화정당 연못에 오지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한다.”

진맥을 마친 연이 말하자 한위가 동그란 눈을 깜박거렸다. 얼굴에는 조금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왜요……?”

“내일 사람이 찾아와 너를 내게 데려올 것인데…….”

말을 하면서도 연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가 세워 둔 계획은 전적으로 한위의 협조가 있어야 순조롭게 진행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 한위는 어떤 상황인지 알아서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이 물끄러미 총명한 아우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쯤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위도 벌떡 일어나 따라오려는 것을 연이 마저 저녁을 먹으라고 앉혀 두고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니 주강은 아까 그대로 서 있었다. 어떻게 저리 미동도 없이 서 있을 수 있는지 연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수가 되면 다들 저런 걸 할 수 있게 되나 보지?

연은 다시 칼날 같은 바람을 가르며 화정당으로 향했다. 그가 겨울이란 존재에 대해 한 다섯 번쯤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주강이 돌연 자신을 불렀다. 연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해서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이 아니던가? 뒤를 돌아보자 주강이 한참 바라보더니 아닙니다, 하고 말을 마쳤다.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안 할 거면 대체 뭐 하러 불렀어? 부른 이유가 아주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마 한위와 어느 사이 저렇게 친해졌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둘은 침묵 속에 묵묵히 걸어 화정당에 도착했다. 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뜰에 우뚝 버티고 선 주강을 한번 보고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달리 추운 밤이었다.

***

“예?”

열심히 화정당 뜰을 비질하고 있던 하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연은 마루를 열심히 닦고 있던 하인과 물동이를 지고 나르고 있던 시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연이 다시 지시했다.

“한을 데려오라고 했어.”

하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질을 멈추고 공손히 말했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아우 말이다.”

그제야 하인은 연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예민한 주인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게 분명한 태도로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한위 도련님을 말씀하시는지요.”

“이름이 한위던가? 그래, 아무튼 그 녀석.”

하던 가락이 있었기에 쌀쌀맞은 말투 내기는 쉬웠다. 하인은 허리를 공손히 숙여 보인 뒤 비질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화정당을 나섰다.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자 잠시 뒤에 하인이 한위를 데리고 왔다. 한위는 다소 어색하게 형님, 하고 인사했다. 연이 팔짱을 끼고 한위를 내려다보았다.

“네게 참 실망이 크다. 형님이 계시면 응당 매일 인사를 하러 와야 마땅한 법인데.”

이런 연은 처음 보는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늦게 그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안녕 못 하면 어쩔 것이지?”

안 그래도 동그란 한위의 눈이 더 커졌다. 하인과 시비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딱히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일 터였다. 정도가 더 심한 수준으로 매일 모란에게 하던 짓이었으니까.

“형으로서 어리석은 아우에게 가르침을 줘야지 안 되겠다. 따라 들어오거라.”

한위는 고분고분하게 쪼르르 연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 문을 닫고 이제는 둘을 보는 시선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연이 한위에게 방석 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한위가 신기한 얼굴로 연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연은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보려다가 보나 마나 부실했을 게 빤하여 꿍쳐 놓았던 주먹밥을 내놓았다. 오늘 아침 식사로 만든 것이었다. 한위가 주먹밥을 와구와구 먹는 동안 그가 아이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폈다. 오늘도 꼬질꼬질하다.

“한위야,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내지?”

“으음. 할미랑 밥 먹고……. 나가서 놀다가 연못 왔다가……. 저녁 먹으러 돌아가요.”

연은 게 눈 감추듯 주먹밥을 먹어 없애고 귤을 까고 있는 한위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놀기만 한다는 소리였다.

어젯밤 연은 한위를 찾아가 이제는 매일같이 화정당에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 앞에서는 차게 대하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며, 단둘이 있을 때의 태도가 진짜라는 것도 일러 주었다. 한위는 놀랍게도 연이 자신을 그렇게 대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가주님 때문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데 한위의 표정에는 한 치 원망도 없었다. 그게 그저 한위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한위는 남궁영명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였다. 물론 연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여겼다. 아버지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 와 있는 동안은 글을 좀 배워 보지 않겠니?”

“글이요?”

문무(文武) 중 연은 안타깝게도 한 가지밖에 가르칠 수가 없었다. 무공은 가르칠 만한 재능이나 체력이 안 될 뿐더러 너무 눈에 띄었다. 세가에서 남의 눈에 띄게 되면 영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한위는 연의 제안에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 싶은 열정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저 연이 하자고 하는 건 다 좋아서 그러는 건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일단 밖에 나가서 시비에게 소셋물을 받아 오렴.”

“네!”

하인을 시킬 수도 있지만 연은 일부러 한위를 시켰다. 소셋물을 받아 오는 건 보통 종들이 하는 일이다. 연은 남들에게 자신이 한위를 종으로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아마도 세가 내에서는 모란 대신에 한위를 괴롭히는 것으로 소문이 날 것이다.

그게 연이 바라는 바다. 세가 내의 평판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곧 나갈 곳이었고, 연오만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평판이 안 좋을수록 세가를 나가는 일 또한 수월해질 터였다. 게다가 한위가 이 일로 세가 내의 사람들에게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더욱이 좋았다.

잠시 후 한위가 놋그릇에 찰랑이는 따뜻한 물과 마른 천을 가지고 왔다. 연은 천을 물에 적신 후 한위에게 내밀었다.

“이것으로 네 손을 깨끗이 닦고 옷을 가지런히 하렴. 무언가를 배울 때에는 항상 정갈한 차림이 적합하거든.”

연의 말에 한위가 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꾸물꾸물 손을 닦는 동안 연이 머리도 단정하게 묶을 두건을 내밀었다. 한위가 서툴게 두건으로 산발하고 있던 머리카락을 묶어 넘겼다. 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필묵을 꺼냈다.

시간이 지난 뒤 그는 깨달았다. 한위는 정말이지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물론 정식 제자는 아니지만 가르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총명하여 이해도 좋았으며 외우는 것도 곧잘 했다. 배우는 내내 전혀 지루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가르치면서 연은 자신보다 좋은 스승에게 배우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날의 배움이 끝난 후에 연은 가지고 있는 지필묵을 옷가지에 둘둘 싸 내밀었다.

“가는 길에 누가 묻거든 내 빨래를 가지고 가는 것이라 하면 된다. 지필묵은 네가 가지고, 옷은 나중에 몸이 더 커지거든 입고.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밖에서는 낡은 옷을 걸쳐 입는 게 좋겠다.”

한위가 얼핏 수수해 보이는 옷을 만지작거렸다. 한위가 입은 옷소매가 짧아 손목이 훤히 드러나는 게 전부터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큰걸요.”

“금방 자랄 거야. 내 장담하지.”

연이 보기에 한위는 타고난 강골이었다. 제대로 먹고 자기만 한다면 금세 자라날 것이었다. 소중하게 옷가지를 품에 안은 한위가 꾸벅 인사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좀 더 제대로 된 옷을 입게 하고 싶은데.’

연은 한위를 보기만 하면 챙겨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뭔가 주고 싶어도 딱히 줄 것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은 죄다 한위가 쓰기에는 눈에 띄는 것뿐이다.

‘어디 보자, 고기를 섭취해야 하니 육포 한 더미와……. 다 해졌으니 신발도 필요하겠고.’

남궁연으로 돌아오고 난 뒤로는 꽤 무료했던 차라 연은 한위에게 이것저것 해 줄 계획에 골몰했다. 그냥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영명의 눈을 피해 잘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영명이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는 묘한 승리감과 더불어 궁리하는 재미도 있었다.

연은 형으로서 가르침을 준다는 핑계로 다음 날에도 한위를 불러 댔다. 시비들 보란 듯이 한위에게 모진 말을 하기도 했다.

“너는 워낙 아는 게 없으니 뭘 시킬 수도 없겠다. 잉어 밥은 줄 수 있느냐? 멍청하여 어디 제대로 주는 방법이나 아느냐?”

그러면 한위는 신나서 잉어 밥을 쥐고 연못으로 달려갔다. 연이 연못을 좋아하는 것처럼 한위도 연못을 좋아했던 탓이다.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으니 화정당이라도 돌고 오라 그러면 신나서 뜀박질을 하고 왔다. 한위는 달리는 걸 퍽 좋아했다.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잔심부름도 여러 번 시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도련님, 탕약입니다.”

어떻게 해야 진짜 굴리지 않으면서도 한위를 더 굴리는 것처럼 보일까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시비가 조심스럽게 연을 불렀다. 글씨를 쓰고 있던 한위가 눈치 빠르게 붓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한구석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들여오거라.”

시비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을 올려 두었다. 쓴 탕약을 마시자 몸에 온기가 번졌다. 연이 탕약을 모두 마시자 시비가 공손히 알려 왔다.

“내일부터는 올릴 탕약이 없습니다. 의원에 사람을 보내 약을 받아 올까요?”

그러고 보니 탕약이 떨어질 때가 되기는 하였다. 연이 잠시 고민했다. 사부가 진찰을 받으러 오라고는 했지만 정말 가도 괜찮을지…….

남궁연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백모란의 인연에는 미련을 가지지 말자고 했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다. 의원에 들르면 그가 맡고 있던 환자들도 몇 볼 수 있지 않을까?

연의 시선이 문득 한위에게 향했다. 그가 알기로 한위는 내내 세가에서만 자라났다. 아마 밖에 나간 적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연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아니, 내가 직접 가서 받아 오겠다. 진찰을 받을 일도 있으니. 한위 너도 따라오거라.”

한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연이 시비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영 쓸모가 없으니 짐꾼으로라도 써야겠지. 이리 와. 외출할 옷을 꺼내 오너라.”

무표정했으나 시비가 슬쩍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한위를 흘깃 보는 것을 연이 확인했다. 그의 계획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한위가 정말 외출할 옷을 찾아 뒤적이는 걸 지켜보다가 시비가 나가자마자 팔을 잡아 말렸다. 한위가 고르는 옷을 입고 나갔다가는 고뿔에 걸릴 터다. 연은 두꺼운 장포를 두 겹 입은 뒤 위에 외투를 껴입었다. 한위가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여기 밖으로 나가요?”

“그래. 시장에 가 볼 생각이야. 가 본 적이 있어?”

“아뇨! 한 번도요!”

흥분으로 한위의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한위는 열다섯이 될 때까지 벙어리 유모와 함께 세가에서만 지내며 냉대를 받고 자랐다. 그럼에도 낙천적이고 성격이 퍽 밝았다. 어쩌면 남궁영명이 아니었다면 연오만큼이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린 무인으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을 텐데…….

문을 열고 나가니 한위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연의 뒤에 붙었다. 주강은 한위에게 잠시간 냉랭하기까지 한 시선을 한번 보냈다.

연은 그런 주강이 뜻밖이었다. 주강은 좋아하는 것을 거의 티 내지 않는 만큼이나 싫어하는 것도 티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혹 애들을 싫어하나?

주강을 경계하던 것도 잠시, 세가를 나가자 한위의 얼굴은 환해졌다. 연의 곁에 딱 붙은 채 그는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모든 것이 신기할 터였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연은 한위를 데리고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은 그렇게 고급스러운 편은 아니었고 음식도 연오와 먹은 것처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오리구이며 소면에 교자 등은 썩 먹을 만했다.

한편 한위로서는 이때까지 살아온 날 중에 오늘이 가장 신나는 날이었다.

그날 연못에서 연에게 존재를 들키기 전까지 한위의 세계는 협소했다. 벙어리 유모와 비가 새고 찬 바람이 드는 낡은 전각, 사람들의 냉대와 허기, 추위, 외로움……. 자신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연오나 연이나 그에겐 너무나 먼 사람이었다. 연회가 열릴 때나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연은 한위를 내치지 않았다. 왜 몰래 정원에 숨어들었냐고 혼내지도 않았고 말투가 어눌하다고 놀리지도 않았다. 난생처음 먹어 본 맛있는 주먹밥과 당과를 주었다. 며칠 동안 끙끙 앓으며 식음을 전폐하던 유모를 치료해 주기도 했다.

한위에게 있어 연은 그늘진 세상에 뜬 해와 같은 존재였다.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조용한 연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거친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형을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배울 때는 정갈한 차림을 해야 한다는 걸 들은 후로 그는 흙장난을 하고 난 뒤에는 꼭 물에 손을 씻었다.

세가 밖은 처음이었다. 세가의 무서운 무사들이나 조용하고 차가운 어른들과는 다르게 밖의 사람들은 활기차고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이렇게 떠들썩할 수 있다는 걸 한위는 처음으로 알았다. 주먹밥도 맛있었지만 오리구이도, 소면도…….

행복한데 문득 서러워진 한위는 잠시 훌쩍이고는 와구와구 음식을 먹었다.

연은 그런 한위에게 음식을 조용히 밀어 주었다. 많이 먹여서 얼른 살을 찌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조금 살이 붙은 것도 같으나 아직도 열세 살 정도로 밖에는 안 보였다.

객잔에서 음식을 먹고 난 뒤 연은 한위에게 사과 사탕과 꼬치도 사서 쥐여 주었다.

이 시장에서 할 수 있는 재미난 건 거의 다 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한위에게 시장 구경을 시켜 줄 때였다. 돌연 연의 몸이 굳었다. 저만치서 익숙한 사람 둘이 실랑이를 하는 중이었다. 그중 한 사람의 얼굴이 익숙해도 지나치게 많이 익숙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전 씨에게서 다 듣고 왔는데.”

“글쎄, 모란아……. 나는 모른대도.”

아니……. 백모란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지난번처럼 휑하게 가슴팍을 풀어 헤친 꼴이 끔찍하여 연이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건 원래 주인 몸이다, 원래 주인이 어떻게 옷을 입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속으로 되뇌었다.

백모란과 대화하는 사람은 연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땔감을 베어다가 파는 이웃집 한철이란 사람이었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연이 파르르 떨며 주먹을 꾹 쥐었다. 상대를 윽박지르는 모습이 마치 저잣거리 왈짜 같았다. 아니, 왈짜패도 저런 상스러운 옷차림은 하지 않았다.

“형님?”

한위가 조심스럽게 불러도 연은 꿈쩍도 하지 않고 둘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한철이 울상이 되어 마지못해 무언가를 백모란에게 넘겨주었다. 기어이 무언가를 뜯어낸 백모란은 씩 웃었다.

“모란아, 너 그때 머리라도 다쳤니? 응?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요즘.”

“머리 다친 걸로 보여?”

백모란이 활짝 웃으며 상체를 드밀자 한철이 질겁하여 주춤 뒤로 물러났다. 연은 그 반응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모란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머리 다쳤냐는 건 내가 지금 미친놈 같다는 말인가?”

“아니! 내가 언제 그런, 그런 식으로 말했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한철이 시선을 피하며 극구 부정했다. 전에도 한번 이런 식으로 덴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백모란이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가자 한철이 고개를 내저으며 땅에 침을 뱉었다. 연은 그 행동 또한 이해가 갔다.

엮이지는 않고 싶지만, 그냥 넘어가지도 못하겠다. 연이 조용히 백모란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봐도 백모란의 행동은 그동안 연이 저 몸으로 쌓아 둔 인맥을 죄다 파괴하는 걸로만 보였다.

그래, 상스러운 옷차림을 하건 이웃집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건 지금의 연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없는 일인데……. 꼭 저런 식으로 대해야 하나? 자신은 이제 말조차 붙이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부당한 분노이지만 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분노이기도 했다. 그사이 모란은 또 한 상인에게 들러 무언가를 뜯어낸 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기루였다. 노골적으로 기녀에게 추근거리며 붙는 걸 보고 연이 탄식하고 말았다. 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가는 게 아닌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다.

한위도 옆에 있었기에 연은 독하게 마음먹고 돌아섰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자꾸 보니까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고 모르는 척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지나간 인연에는 미련을 가지지 말자.

“이제 의원으로 가야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한위에게 말하며 연이 발걸음을 돌렸다. 진은록의 의원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벌써부터 피곤해 그가 발걸음을 빨리할 때였다.

“섭섭하게, 봤으면서도 왜 모른 척 그냥 가?”

대뜸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연이 펄쩍 뛰었다. 휙 뒤를 돌아서니 백모란이 저만치서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았는데. 지난번에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을 기절시킨 것도 그렇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전음과는 또 달랐다. 그러나 연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형님, 저 사람이 손을 흔들어요. 아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람이야.”

차갑게 말하며 연이 빨리 걸었다. 그러나 모란의 걸음이 더 빨랐다. 왜 제지하지 않나 싶어 주강을 쳐다보니 그는 모란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젠장, 그렇지. 그에게 있어 모란은 아직까지 연에게 얻어맞아 거의 죽을 뻔한 불쌍한 녀석일 터였다.

“정말 너무하네, 달링.”

“뭐?”

달…… 뭐라고? 백모란은 알 수 없는 수법으로도 모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 댔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연이 듣기로는 굉장히 거슬렸다.

모란이 빙글빙글 웃었다. 제게 또 무슨 뜻밖의 짓을 할까 노려보느라 연은 의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어린아이가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궁연 공자이신가요?”

아이가 똘망똘망하게 물었다. 정신없는 연을 대신해 한위가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어린아이는 쪼르르 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다시 나왔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감초를 쥔 손으로 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공자님, 의원님께서 들어오라 하셔요.”

그렇게 말한 아이는 심부름의 대가로 얻은 게 틀림없는 감초를 소중하게 쥐고는 쪼르르 달려갔다. 연이 마지못해 모란을 무시하고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모란도 연을 따라 들어오는 게 아닌가. 무시하고 싶어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연이 쏘아붙였다.

“그쪽은 왜 들어와?”

“왜 들어오긴? 제자이니까 들어오지.”

제…자……. 연의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억누르며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은록은 막 환자에게 침을 놓는 중이었다. 오래간만에 사부의 얼굴을 보니 연은 한결 모란을 참기 쉬워졌다. 마지막까지 침을 놓은 뒤에야 은록은 연을 맞이했다.

“이리 앉으십시오.”

제 뒤에 있는 백모란은 무시하려고 애쓰며 연이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진은록은 맥을 잡기 위해 손을 뻗다가 잠시 연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뭔가 하여 연도 제 손바닥을 바라보니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난번 한위의 유모를 치료해 주러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넘어져서 생겼던 자국이었다. 슬그머니 주먹을 쥐니 진은록이 가볍게 손목 어딘가를 꾹 누르는 것만으로 다시 펼치게 만들었다.

“그 몸으로는 가능한 한 상처를 입는 걸 피해야 합니다, 공자.”

충고를 한 뒤 은록은 진맥을 시작했다. 연은 가만히 앉아 은록의 미간에 조금씩 주름이 잡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있다가 그가 물었다.

“지어 준 약은 제대로 먹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아침저녁으로 먹었습니다.”

연의 말에 은록이 눈썹까지 찌푸렸다. 바라보는 시선이, 그런데도 몸이 이런 꼴이란 말인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은록은 이내 연의 부러진 팔에 감겨 있던 부목도 풀었다.

붓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리저리 살핀 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면 부목을 풀어도 되겠군요. 하지만 약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복용하십시오.”

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록이 내린 진찰 결과는 연이 내린 것과도 비슷했다. 건들거리는 태도로 팔짱을 끼고 있던 모란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약 같은 걸로는 소용없을 텐데, 아마.”

연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모란은 또 이상한 느낌의 눈을 하고 있었다. 연과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 그런 눈을 했냐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그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정말이지 건방진 태도였다.

“의원 양반, 당신도 알고 있잖아?”

모란의 말에 은록이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를 내거나 호통을 치거나 하지 않았다. 정작 화가 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의원…… 양반? 연은 순간 현기증까지 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한 번도 은록을 저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그 몸의 주인이 백모란이어서야! 결국 참지 못하고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자신이 알던 예전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굴든 상관없는데 사부에게 그러는 것만은 못 참겠다.

“백모란! 잠시 좀 보지, 당장!”

그렇게 외치는 순간 의원 안에 있던 익숙한 얼굴들이 연을 바라보는데 표정이 이랬다. 저 도련님 한동안 안 그러다가 또 성질 나오네, 하는……. 안 나가면 어쩔 거냐는 식으로 나올 것 같던 모란은 뜻밖에도 순순하게 연을 따라나섰다. 주강도 따라오려고 하기에 연이 딱 막아섰다.

“따라오지 말고 약이나 받아 와. 한위는 여기 있고. 알겠어?”

그 날 선 태도에 주강이 미간을 찌푸리고 한위가 입을 조금 벌렸다. 연은 대답도 듣지 않고 옷자락 차갑게 날리며 의원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환자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골목을 지나 으슥한 곳으로 가서야 멈춰 섰다. 단둘인 걸 확인한 연이 백모란을 쏘아보았다. 모란이 히죽 웃었다. 연은 저 웃음이 정말 싫었다.

“뭐 하는 짓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연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다 알겠다는 얼굴로 모란이 능청을 떨었다. 연은 예전에 이유 없이 모란을 증오하던 때와 지금 중 언제가 더 감정이 격렬한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꼭…… 꼭 사람들에게 그따위로 대해야 해?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예의라는 게 있지!”

“기본 예의라는 걸 배워 먹지 못한 몸이라서 말이야.”

모란이 아까 시장에서 한 것처럼 슬그머니 상체를 연에게 기울였다. 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 야만스러운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의 행동거지만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기본 예의 없이 사람들을 대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건 내 몸이거든. 알겠어? 내 이웃. 내 입. 내 눈. 내 코. 응?”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연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백모란의 말이 다 맞는 탓이다. 돌연 왜 이렇게 자신이 화를 내고 있나 회의감이 든 연은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래, 백모란이 어떻게 하든, 이제는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백모란은 백모란이고 남궁연은 남궁연이었다. 완전히 별개의 인생이었다.

“그래, 맞는 말이네. 내가 큰 착각을 했군. 하도 그 몸에 오래 있어서 말이야.”

진짜로 백모란과 더는 엮이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연이 차게 돌아서자 눈썹을 치켜세운 모란이 휙 몸을 날려 앞을 가로 막았다. 심기가 좋지 않았기에 연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좋지는 않았다.

“저리 꺼져.”

“아니, 뭐……. 하지만 사람이라면 무릇 예의범절이란 걸 알긴 알아야겠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팩 쏘아붙이자 모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째 모란이 자신을 퍽 귀엽다는 시선으로 보는 것도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성의를 보여 주면 난 좀 더 예의 바른 인간이 되어 줄 수 있어. 모든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의원 양반과 두세 사람에게는 그래 줄 수 있지. 지금 돈 좀 가지고 나왔지?”

“뭐?”

“돈 좀 있으면 내게 달라고 하는 말이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은 말없이 백모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인간이 정말 자신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게 맞나? 그것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말 왈짜패가 아닌가. 왈짜패도 이런 식으로 돈을 뜯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제안에 솔깃해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갈등 끝에 연은 마지못해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더럽고 치사하니 먹고 떨어지라는 마음으로 바닥에 툭 내던졌다. 모란이 히죽 웃으며 전낭을 주워 툭툭 흙먼지를 털었다. 연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한 자였다.

“이걸로는 모자란데. 딱 그 의원 양반이라는 호칭을 의원이라고 바꿀 정도의 예의범절인걸. 여기의 두 배를 내면 의원님이라고 불러 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모란이 덧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사부님이라고 부르는 건 싫을 거 아냐?

“……진심이야?”

“물론 진심이지. 돈 많잖아, 너. 남궁세가가 이 근방에서는 그렇게 잘나간다면서? 오대세가 구파일방이라……. 뭐 여기서는 아신족(亞神族) 같은 존재 아닌가?”

자칭 신의 첫째 자식들이라 우기던 그놈들처럼 오만한 것 같진 않지만. 모란이 여전히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아신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란이 자신을 뜯어먹기 쉬운 돈줄로 본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었다. 연은 이런 자에게 정말 돈을 내주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으나 적은 액수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저 야만인이 사부를 조금이라도 예의 바른 태도로 대하게 만들 수 있다면 연은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좋아.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으니 따라오도록 해.”

“잘 생각했어.”

연은 모란은 쳐다보지도 않고 의원으로 돌아갔다. 한위가 안절부절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 나왔다. 주강의 손에는 은록이 지어 준 탕약이 들려 있었다. 연은 은록에게 인사를 하고 갈까 잠시간 고민하다가 제 뒤에 모란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모란이 아까처럼 구는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세가로 돌아가기 전, 연은 한위의 품에 이것저것 들려 주었다. 겨우내 유모와 한위가 따뜻하게 입고 잘 옷, 육포 한 꾸러미, 서책과 지필묵 따위였다. 한위는 모란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오늘도 연이 준 걸 소중하게 품에 꼭 안고 돌아갔다.

“꽤 강하네?”

화정당으로 가는 길에 모란이 주강에게 껄렁거렸다. 주강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연이 노려보자 받은 것이 있는 모란이 조금 더 성의 있게 말했다.

“자네, 그 나이에 꽤 강하구만?”

“…….”

연이 속으로 이를 박박 갈았다. 원하는 걸 얼른 주고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모란을 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화정당에 들어오자 시비와 하인들은 오래간만에 제 주인의 심기가 차갑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연이 방으로 들어서니 모란도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그러더니 문을 닫았다. 왜 문을 닫나 의심스럽게 보다가 연이 빨리 내주고 쫓아 보내자는 생각으로 패물을 찾았다.

대충 값어치가 나가는 것들을 찾아내 쥐여 주자 모란이 히죽 웃었다.

“받아. 이거면 됐지?”

“이거면 충분하지. 원하는 대로 네 사부에게는 예의 바르게 굴어 줄 수 있어.”

그런데 모란이 가지는 않고 털썩 눌러앉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전에 의원이었다면서?”

“…….”

“널 찾는 사람들이 꽤 많던데.”

연은 등을 돌린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란과 엮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패물을 건네준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맡았던 환자들의 병세를 끝까지 보지 못해서 짜증 나는데 모란이 긁어 대니 연의 인내심은 빠른 속도로 바닥났다. 참다못해 주강을 불러 내쫓으려고 할 때 모란이 쿡, 말로 연을 찔렀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말이었다.

“전처럼 계속 그 사람들 치료할 수 있게 해 줄까?”

결국 참지 못하고 연은 모란을 휙 돌아보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어느 한 부분은 모란의 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자가 대체 어떻게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걸까?

연이라고 자신이 맡았던 환자들을 다시 찾아갈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남궁연이라는 신분이야 옷차림만 좀 바꾸면 숨길 수 있었으니까.

가장 큰 걸림돌은 주강이었다. 연오에게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는 연이 세가 밖으로 나갈 때 한 번도 따라나서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강 같은 고수를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만약 연이 의술을 펼치는 모습을 주강이 보면 연오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럼 연오는 당장 연을 불러내겠지. 언제 어떻게 의술을 배웠냐고 추궁하면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의술이 어디 책으로만 배울 수 있는 기술이던가? 반드시 스승이 필요한 학문인 것이다. 무엇보다 연은 그 누구에게라도 남궁세가의 ‘남궁연’이 의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었다.

무림인들은 의원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무공을 배우면 고뿔 정도는 걸리지도 않게 될뿐더러 고수의 경지에 이르면 금강불괴(金剛不壞)부터 만독불침(萬毒不侵)의 몸까지 이룰 수 있지 않던가.

허약하여 무공도 배우지 못하는 남궁세가의 차남이 어쩔 수 없이 의원 나부랭이나 되었다고 강호인들이 떠들어 댈 게 눈에 훤했다. 의원은 나부랭이라고 불릴 만한 직업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되는 게 아닌데도!

떠들어 대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일단 소문이 나면 ‘남궁’이라는 성씨를 떼고 타지에 조용히 정착해 사는 건 어려워지는 것이다.

‘의원이라는 건 비밀 중의 비밀로 부쳐야 해.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래야 내가 나중에 세가를 나가서 의원으로 활동해도 설마 그 남궁연이라고는 의심도 안 할 것 아니야.’

남궁세가와 상관없는 사람으로서 한적한 시골에서 의원으로 지내는 삶이라……. 생각만 해도 좋았다. 잠시 행복한 상상을 하던 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했다.

“네가 어떻게? 주강을 따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지난번 몰래 한위의 유모를 치료하러 나갈 수 있던 것도 그나마 세가 안이었기에, 그리고 주강이 자리를 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이라고 그간 주강을 따돌리려고 시도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당당히 세가를 걸어 나가든 따라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든, 담장을 넘든 언제나 주강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했다. 그 동안 데리고 다녔던 호위무사 중 가장 깐깐한 자였다.

“그거야말로 쉬운 일이지.”

그렇게 말한 백모란이 돌연 손을 뻗어 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워낙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당황한 연은 대처도 하지 못했다. 곧바로 까마득하게 세상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연은 숨도 쉬지 못했다. 바닥이며 천장이 비틀리더니 다음 순간에는 땅과 하늘을 토해 놓고 있었다.

땅에 발이 닿는 느낌이 들자마자 연이 모란을 공격했다. 그제야 그가 틀어막았던 입을 놔 주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아이고.”

모란이 인상을 쓰며 연에게 쥐어박힌 옆구리를 문질렀다. 그 움직임에는 과장하는 태도가 없잖아 있었다. 그가 투덜거렸다.

“혹시라도 소리를 지를까 봐 그런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연은 숨을 헐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그들이 있는 곳은 놀랍게도 산꼭대기였다. 깎아지른 절벽과 차가운 바람,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남궁세가가 비현실적이었다. 믿기지 않았던 연이 비틀거리며 절벽으로 다가가자 모란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연이 차갑게 그 손을 뿌리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환각? 아니면 기문진법(奇門陣法)*인가? 아니, 진법이라고 해도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궁금하지? 손 내주면 뭘 한 건지 알려 줄게.”

모란이 씨익 웃었다.

도대체 이 사내는 어떤 작자인가? 불한당이나 사기꾼같이 구는가 하면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본래의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이 한참을 노려보다가 손을 내밀자 그가 근처 나무에서 솔방울 하나를 따서 얹어 주며 손을 잡았다. 다시 주위가 비틀리는 느낌이 들어 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자신의 방이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위에 아까 모란이 따다 준 솔방울이 남아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모란이 아무렇게나 털썩 방석 위에 앉으며 지껄였다.

“뭐라고 할까, 말하자면 순간이동이라고 하는 거야. 이쪽에는 없는 개념이지, 아마?”

“순간……이동?”

“순간적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에서.”

뜻을 이해 못 해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그게 정말 가능하냐는 의미로 물은 것이었다. 경공에 뛰어난 사람들이라면 남궁세가에서 아까 그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다리를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이동하는 건 말이 달랐다. 심지어 모란은 방문을 열지도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방금 그건 마법이라고 하는 거야. 이를테면 이런 거지.”

손가락을 까딱하자 연의 손바닥 위에 있던 솔방울이 사라졌다가 모란의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그가 손바닥 위의 솔방울 한 바퀴 굴렸다. 그러자 어느 순간 솔방울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현상이었다. 연이 우뚝 그 자리에 서서 모란이 부리는 재주를 쏘아보았다.

“……마법이라고?”

돌연 솔방울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바람을 타고 스륵 문틈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연이 알고 있는 상식 내에서 굳이 설명하라면 허공섭물(虛空攝物) 내지는 삼매진화(三昧眞火) 정도였지만 이 정도의 무공은 연이 알고 있는 모란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모란이 건성건성 손을 흔들어 댔다.

“이쪽 용어로 설명하자면 특별한 원기를 이렇게 저렇게 운용해서 유형이나 무형의 형태에 간섭을 하는 거야. 가령 순간이동 같은 경우에는 공간을 비틀고 접는 거지.”

“…….”

“그러니까 종이를 접으면 가장자리 끝에서 끝 면이 맞닿는 것처럼……. 아니 뭐, 지금 이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이거라면 네가 몰래 나가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잖아.”

연은 대답 대신 모란을 바라보았다. 손도 대지 않고 기절시킨 것이나 아니면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 건 이런 술수의 한 종류인 모양이었다.

“이게 당신이 있다가 온 곳의 기술인가 보지?”

“뭐어, 그렇지.”

“어디에 있는 곳이야? 대륙 너머 서방?”

모란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냐. 여기나 대륙 너머나 다 비슷해. 내가 온 곳은 저기 어디쯤이지. 보이지 않는 어떤 벽을 열두 번 넘어가면 있는…… 이곳보다 훨씬 거칠고 위험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이야.”

“…….”

“달이 두 개나 뜨고 바다는 금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나지. 하늘에 섬이 떠다녀. 비가 오는가 해서 고개를 들어 보면 섬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 자락이거든.”

거칠고 위험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곳? 두 개의 달과 금빛 바다, 그리고 하늘을 떠다니는 섬이라니 연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잠시 그 광경을 상상해 보다가 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방금 모란이 한 방법대로라면 세가를 몰래 나가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봄이 와 세가를 나갈 때가 되면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한참 고민하던 연이 팔짱을 꼈다.

“대가는?”

연의 태도에 모란이 눈을 깜박이더니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

은록에게 예의를 차리라는 것만으로도 돈을 받아 갔는데 자신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주는 데에도 대가를 받을 거란 건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모란이 빙그레 웃었다.

“신원 보증을 좀 해 줬으면 해.”

“신원 보증?”

“남궁세가의 차남 정도나 되면 충분히 신원 보증할 만한 신분이 되지 않나?”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은 없겠다 싶던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원 보증쯤이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좋아, 그럼 거래 성립된 거지?”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게 분명한 모양새였으나 이 제멋대로인 사내에게 휘말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연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악수? 그가 코웃음을 쳤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란과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악연일 뿐일지도 몰랐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나가.”

뭐어, 하고 어깨를 으쓱한 모란이 휘적휘적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연이 한숨을 쉬었다. 피곤했다. 이상하게 모란과 있을 때마다 기운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앉으며 그가 미간을 접었다. 아무리 모란이 세가를 몰래 나가는 걸 도와준다고는 해도 너무 쉽게 승낙한 감이 있었다. 그 마법인가 뭔가에 정신이 홀린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마법이란 건 정말이지…… 기묘하고 이상한 것이었다.

연은 방금 전 모란이 보여 줬던 것들을 회상하다 이내 이불을 퍽퍽 때리며 심적으로 괴로워했다. 이제 와서는 거래를 무를 수도 없었다. 했던 말을 번복하는 건 그가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다음 날이 될 때까지도 연의 기분은 저조했다. 딱히 그렇게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모란이 약속을 지키리란 것에 대해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은록에게 예의를 차리게 되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돈을 좀 잃는 것이다. 두 번째 거래도 마찬가지였다.

오후가 되어 연의 기분이 좀 나아진 건 한위 덕분이었다. 무엇을 가르쳐도 한위는 척척 잘도 깨달았다. 검을 배워도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좋을 텐데. 연은 한위를 가르칠 때마다 드는 아쉬움을 접어야만 했다. 가르칠 만한 사람도, 장소도 마땅치가 않았다.

한위를 보내고 난 뒤 연은 의복을 정갈히 하고 앉았다. 차를 마시며 모란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느 순간 방 한구석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차를 내려 두자 잠시 후 모란이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와 방에 발을 디뎠다. 오늘은 어쩐 일로 가슴팍을 풀어 헤치지 않았지만 역시나 옷은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채였다.

심지어 술 냄새도 미미하게 났다. 연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란이 말했다.

“어째 나에게 할 말이 많은 얼굴인걸.”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연은 쌀쌀맞게 대꾸하며 나갈 채비를 했다. 모란은 퍽 신기한 얼굴로 그가 이것저것 걸쳐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긴 한겨울에 헐벗고 다니다시피 하니 이렇게 옷을 입는 게 신기할 법도 하겠지…….

“맨손으로 가게? 보통 여기서 치료할 때는 이상한 바늘을 쓰지 않나?”

모란의 말에 연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보았다. 오늘 바로 환자를 치료하러 가라는 이야기인가? 그야 나쁠 것은 없지만 믿기지 않아 그가 되물어 보았다.

“오늘 바로 가자고?”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다른 날에 가도 괜찮고.”

잠시 고민하다가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개장 안 깊숙이 넣어 뒀던 침구를 챙겨 들었다. 약재는 고민하다가 짐만 될 것 같아 다시 내려 두었다. 그는 안을 좀 더 뒤져 얼굴을 가릴 면사포를 찾아냈다. 시험 삼아 썼다가 다시 곱게 접어 소매 안에 밀어 넣으니 모란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자신이 뭘 했다고 저런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언제 그렇게 바라보았냐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제 출발할까?”

출발하기 전 연은 침소의 호롱불을 껐다. 자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연이 고민하다가 팔을 내밀자 억센 손아귀가 팔목을 휘어잡았다. 이상하게도 못 본 사이 모란의 몸이 부쩍 자란 느낌을 받았다.

순간이동 특유의 아찔한 느낌과 함께 땅에 발을 디딘 연은 그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모란의 몸은 분명히 자라나 있었다. 팔뚝도 좀 더 두꺼워졌고, 키도 컸고 전체적으로 근육이 더 붙은 느낌이다.

‘원래의 영혼이 들어가면서 몸의 성장도 달라진 건가? 하지만 난 왜 돌아온 뒤에 몸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지……?’

찬 바람에 연이 작게 기침하며 모란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날이 저물어 어두운 가운데 저 멀리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며 빛나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익숙한 건물이었다.

“저기로 가면 되나?”

“그래. 이제 가서 필요할 때 신원 보증을 해 주면 돼.”

모란이 먼저 앞서 걸어갔다. 자박자박 따라가던 연은 곧 저 익숙한 건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남궁세가에 꼬박꼬박 상납을 하는 상회 중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청진상회였다.

‘아니……. 설마 신원 보증을 하라는 게 저기서 하라는 건가?’

연은 도무지 모란이 무슨 일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자가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예측 불가한 언행만 일삼은 탓이었다.

“저기서 신원 보증은 왜?”

“별건 아니고 돈을 좀 빌리려는데 출입부터가 안 되어서.”

연이 입을 딱 벌리고 모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모란에게 준 돈도 꽤 되지 않던가? 그런데 돈을 더 빌린다고?

“내가 준 돈으로도 부족했다고?”

“부족하니까 저기에 빌리러 가는 거겠지?”

설마……. 이자가 사기꾼은 아닐까? 연은 모란이 얼마나 빌리는지 보고 신원 보증을 해 주든가 말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세가를 나갈 때 돈이 필요한데 모란이 거덜 내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빌리게 내버려 두고 청구는 세가로 가게 해? 어차피 못해도 봄에는 나가 버릴 테니 괜찮은 계획 같았다.

청진상회의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가 모란을 보자 바로 인상을 팍 썼다. 그러다가 뒤를 따라오는 연을 보더니 알아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은 연오나 영명을 따라 몇 번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아이고, 공자님!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연은 모란을 한번 흘긋 보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자의 신원 보증을 하러 왔습니다. 돈을 좀 빌리러 왔더니 들여보내지도 않고 그대로 내쫓았다면서요?”

무사는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연은 이해했다. 자신 같았어도 모란 같은 자는 바로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모란은…… 풀어 헤친 머리며 가슴팍이 드러나게 헐렁하니 입은 옷까지, 망나니 같은 몰골이었다. 무사가 연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누가 봐도 오해할 정도로 번잡스러운 행색이긴 하지요.”

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동행하는 사람을 에둘러 비난하자 무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길을 내주었다. 모란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번잡스러운 옷차림? 연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청진상회의 상주(商主) 연양운이 나와 연을 맞이했다. 상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나와 맞이하는 이유가 있었다. 연오만큼은 아니어도 연 역시 장차 세가에서 한자리 크게 차지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연은 굳이 지금 그 착각을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난번에 비해 훤칠해지셨군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제가 또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연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훤칠은 무슨……. 면경을 보다 보면 연은 이따금 놀랄 때가 있었다. 면경 속의 자신이 종종 곧 죽어 버릴 사람처럼 보이는 탓이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양운이 연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화려한 객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자 차며 술이 나왔다. 연은 입맛이 없어 차만 잠시 마시고 말았으나 모란은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사양하지 않았다.

햇볕에 그을린 목울대가 술을 삼키느라 부드럽게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 연이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는지요.”

모란이 단번에 술 한 병을 비우거나 말거나 표정의 변화도 없이 양운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연은 한숨을 쉬고 싶었으나 참으며 입을 열었다.

“이자가 돈을 빌리고 싶다고 하여 신원 보증을 서 주려고 합니다.”

“공자님께서 신원 보증을 서 주신다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지요. 그래, 대협께서는 얼마나 빌리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소협도 아니고 대협이라……. 양운의 비위는 정말 좋기도 했다. 모란은 벌써 다 마셔 빈 병을 내려놓고는 씨익 길게 웃었다.

“그렇게 많이는 아니야. 금 열 냥 정도?”

연이 휙 모란을 쳐다보았다. 금 열 냥! 그 정도면 자그마치 쌀 오백 석을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다. 모란이 대체 그런 돈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백모란으로 지낼 적에 연도 나름대로의 돈을 모아 두었다. 그렇게 많다고는 못하지만 몇 년 정도는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돈만 있나? 몸을 뉘일 수 있는 집도 있었다. 심지어 작은 밭도 하나 사 두었다. 언젠가 돌아올 진짜 백모란을 위해서! 이런 사내일 줄 알았다면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열 냥이라……. 그럼 대협께서는 어떤 식으로 돈을 사용할 생각입니까?”

“일단은 들고 도박장을 가 볼까 해.”

태연하게 모란이 대꾸했다. 연이 패물을 주며 ‘예의를 차릴 것’을 부탁한 은록을 제외한다면―제대로 지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하대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하대는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따금 연은 그의 머리 위에서 날카롭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이는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건 그저 날카롭게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왕관이나 태양처럼 느껴졌다.

“이 근처 도박장들을 돌며 서너 배 정도 자금을 불려야지. 그 다음에는 사람을 고용하고. 만들고 판매하려고.”

“무엇을 만들고 판매한단 말입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에 모란이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상인에게 제 돈 버는 재주를 털어놓는 사람도 있던가?”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양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곧장 모란을 위아래로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연은 양운이 상당한 보증금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승낙도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만큼 모란의 요구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운은 뜻밖에도 흔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남궁연 공자님께서 신원 보증을 해 주신다 하니 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자네, 계약서를 가지고 오게.”

그가 손짓을 하며 옆에 서 있던 시중인에게 계약서를 가지고 오라 했다.

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를 읽은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렇지, 보증금의 액수가 제법 높을뿐더러 만약의 상황에는 제가 대신 갚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금 열 냥 정도는 충분히 갚을 수 있긴 했다. 연에게도 제법 타격이 있어서 그렇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세가를 나가는 건 초여름까지 미뤄지게 된다.

‘지장을 찍어, 말어? 내가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하나? 이걸 해 준다고 하여 백모란이 정말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또 어디에 있지?’

고개를 돌려 모란을 바라보니, 그가 그윽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연은 바로 질색했다. 왜 저런 이상한 눈으로 사람을 보는 거야?

고민하던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좋아. 백모란의 몸을 사용한 사용료가 꽤 된다 이거지.’

십 년 동안 모란의 몸을 괴롭히고, 그의 인생을 마음대로 사용한 값이. 비록 원하지 않던 사용이었지만 어쨌든……. 생각해 보니 빚이 남은 것도 같은데, 이런 거라면 갚아 버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만약, 아니 만약도 아니다. 모란이 이렇게 돈을 빌려 가고 난 뒤 돈을 갚지 않으면 그걸로도 좋았다. 혹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좋았다.

백모란에 대한 빚은 완전히, 정말 완전히―티끌 하나 없이― 청산할 수 있는 것이다.

연은 모란이 금 열 냥이라는 돈을 갚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약속을 제대로 지키리란 기대도 안 했다.

모란의 행동이 워낙 예측 불가이다 보니 신뢰가 가지 않는 탓이다.

연이 지장을 찍자 양운이 조심스럽게 계약서를 연과 모란에게 한 장씩 주고 자신도 한 장을 가져갔다. 연이 가지고 있던 패물로 보증금을 지불했다. 양운이 보증금을 조심스럽게 받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곧 전낭에 반짝거리는 금 열 냥을 담아 모란에게 주었다.

살다 보면 알면서도 이렇게 금 열 냥을 허공으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거군. 계약서를 챙겨 품속에 넣으며 연이 생각했다.

“거래 감사합니다, 공자. 대협,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양운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했다. 그는 상회의 대문 앞까지 연과 모란을 직접 배웅해 주기까지 했다. 청진상회를 나오며 모란은 기분 좋은 얼굴로 금 열 냥이 든 전낭을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연이 면사포를 썼다. 바람이 불자 면사포가 하늘거리며 뺨을 스쳤다.

“여기 있으면 한 시진(약 두 시간) 후에는 다시 돌아오도록 할게.”

주강 몰래 나오는 것도 나오는 것이었지만, 돌아가는 것 역시 문제였다. 몰래 나왔으니 대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갈 때도 모란이 필요했다. 연이 걸음을 옮기자 모란이 전낭을 품 안에 밀어 넣으며 냉큼 앞을 가로막았다.

“혼자 가려고? 같이 가지 그래.”

“모란 대협께서는 도박장에나 가시지.”

연이 건조하게 대꾸하며 걸음을 옮겼다. 도박꾼은 그가 혐오하는 종류의 사람 중 하나였다. 모란으로 있을 적에 도박꾼인 가장이 아내와 아이를 굶어 죽게 만드는 걸 몇 번이나 보았던가. 치료비를 도박비로 날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연은 모란의 평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바닥으로 떨어질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딱히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연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제멋대로이고 예측 불가인 이 사내에게 말을 한다고 하여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가만. 영 도움이 안 되지는 않겠다. 연이 모란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데려가야겠군. 치료를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연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그러나 모란은 다른 방면에서 방해였다.

“의원 일은 얼마나 했느냐?”

“몸은 원래 그렇게 안 좋았나?”

걸어가는 내내 모란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여,

“올해로 나이가 몇이나 되지?”

“저녁은 먹고 하는 게 어때? 난 이미 저녁 먹었지만 한 끼쯤은 더 먹을 수도 있거든.”

별의별 물음을 던져 댔다. 연이 대꾸하지 않자 급기야는 시시껄렁한 말까지 해 댔다. 아니, 정확히는 시시껄렁하다기보다는 별 해괴하고도 전에는 들어 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면사포가 되게 잘 어울리는데. 아니, 얼굴을 가려서 좋다는 건 아니고. 그 있잖아,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내가 참 좋아하거든.”

칭찬 같기도 한데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사내가 같은 사내에게 왜 저런 칭찬을 한단 말인가? 뭐 사내답다거나, 아까 청진상회의 상주 양운이 한 것처럼 훤칠하다는 칭찬도 있는데 하필 면사포가 뭐가 어째?

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모란이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기로 다짐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바지런히 걷자 곧 그가 목표한 집이 나타났다.

환자들 중에서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일하기에 바빠, 혹은 가족이 무신경하여 의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은록은 의원 밖으로 나가기가 곤란한 처지니 그럴 때면 연이 직접 찾아가 치료를 하고 오곤 했다. 오늘 찾아가려는 사람은 바로 그런 환자였다.

사실 환자들을 다시 치료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모란의 제안에 넘어가긴 했어도 연은 내심 걱정이 많았다. 과연 난생처음 보는 사람인 자신에게 치료를 하게끔 허용하겠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설득을 해 보려고 했는데 모란이 있으면 그 설득도 필요하지 않았다. 백모란이야말로 그들에게 익숙한 의원의 얼굴이었으니까.

“계십니까.”

낡은 초가집 앞에 선 연이 점잖게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어린아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누구십니까, 하고 또랑또랑 물어보더니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란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찌푸리다가 아이가 입을 조금 벌렸다.

“아버지, 모란 의원님이 오셨어요!”

방 안을 향해 소리치고는 아이가 어서 들어오시라는 모양새로 문 옆에 섰다. 연과 모란이 들어갈 적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모란 의원님, 어째서 오늘은 그런 차림으로 오셨나요?”

그 말에 모란이 들어가다 말고 눈썹을 들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흥미로우면서도 연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워낙 제멋대로인 자가 아니던가. 다행히도 모란은 태연하게 대꾸해 주었다.

“내 차림이 뭐 어때서 그러냐?”

“입은 모양새가 마치 망나니 같아요. 못 알아볼 뻔하였습니다. 전에는 공자님 같더니 오늘은 산적 같으세요.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산에서 구르기라도 하셨나요?”

“뭐? 산적? 세상에 어디 나같이 잘생긴 산적도 있더냐?”

“그리고 말투도 이상하시네요…….”

솔직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말에 모란의 눈썹이 높이 치솟았다. 어린아이가 말도 참 잘하는구나. 연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모란이 깨달은 바가 있기를 바랐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피식 웃으며 아이를 지나칠 따름이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환자가 누워서 둘을 맞이했다. 이 사내는 어느 날 갑자기 중풍이 와 다리 한쪽을 제대로 쓰지를 못했다. 연이 무려 일 년을 넘게 돌본 자였다. 모란이 벽에 삐딱하게 기대는 동안 연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가지고 온 침구를 꺼내 들었다.

환자가 연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았다. 얼굴 한쪽에도 마비가 온 탓에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자 어린아이가 용케도 알아듣고 통역을 해 주었다.

“귀하신 분은 여기에 어떤 일로 오셨나요?”

어린아이가 귀하신 분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입은 옷차림도 옷차림이었으나 분위기가 남달랐던 탓이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밝아야 하기에 가지고 온 호롱불을 켜며 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호롱불이 너울지는 면사포 아래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자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모란 의원님은 다른 일이 있어 앞으로 의원이 되지 않기로 하셨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치료를 할 참이란다.”

“그럼…… 새 의원님이신 거군요!”

“그렇지.”

연이 환자의 맥을 짚고 다리를 안마해 주고, 침을 놓아 주는 동안 아이는 내내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았다.

아픈 사람과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 의원은 일종의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식으로 몸을 낫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이의 눈에 연은 유별나 보였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연의 분위기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떠한 분위기는 모란은 아슬아슬하다고 말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와 모란이 연을 바라보는 시선의 종류는 각각 달랐다. 모란이 표정 없는 얼굴로, 면사포에 가려진 연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흥미와는 거리가 먼 시선이었다. 마치 책을 읽는 듯 탐색하는 눈초리였다. 연은 집중하느라 그런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내 연이 치료를 마쳤다. 다행히 그간 못 들른 것치고는 환자의 상태가 양호했다.

“앞으로 두 달가량 정양 생활을 하면 걸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연의 진찰에 아이와 환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둘의 모습을 보자 모란 때문에 허공으로 날린 금 열 냥으로 불편했던 속이 훅 누그러졌다. 날릴 만한 가치가 있는 돈이었다.

“감사합니다, 새 의원님!”

침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연은 아이의 어깨를 도닥였다. 훨씬 어렸지만 어째서인지 한위가 떠올랐다. 연이 부드럽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될까?”

“양이라고 해요, 의원님!”

저를 바라보는 양이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났다. 모란일 적에는 이 애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연이 다소 의아해하며 양이에게 물었다.

“괜찮다면 혹시 몸이 어디 아픈 사람을 알려 줄 수 있겠니?”

양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연과 함께 나서기 전에 양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불편하지 않도록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쪽 팔이 닿는 범위에 물그릇이며 수건 따위를 놓아두었다. 간병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모친은 어디 갔을까, 희미한 의문이 잠깐 떠올랐다 금방 가라앉았다.

덩달아 제 모친까지 떠오른 탓에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연은 그 의문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양이는 충실하게 연의 부탁에 임했다. 가난하면 식사를 잘 못 하게 되어 몸이 허약해진다. 몸이 허약해지면 병이 따라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 허름한 마을에는 아픈 사람이 꽤 많았다.

양이는 연을 아픈 사람들에게로 안내했다. 처음 연을 보고 경계하던 사람들도 양이와 모란 덕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환자들을 찾아 치료한 연이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는 양이의 손에 연이 감초와 돈 조금을 쥐여 주었다. 양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만요!”

잠시 후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작은 꽃다발이었다. 양이가 조심스럽게 연의 손 위에 꽃다발을 올렸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새 의원님.”

소곤거리고는 양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아이가 집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모란이 치료하는 동안 내내 조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뜻밖이었다.

모란은 말없이 연을 바라보며 부서지는 달빛 아래 서 있었다. 망나니같이 야만스럽고 경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낯선 모습이었다. 눈빛이며 분위기가 서늘하다. 무심하게 자신을 보는 모란의 모습을 보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연이 물었다.

“지난번 사부님에게 그랬지. 내 몸은 약 같은 걸로는 소용없을 거라고. 그게 무슨 의미지? 당신도 의술을 배웠어?”

모란은 대답 없이 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제게 손을 뻗는 걸 쳐 내며 연이 뒤로 물러났다.

잠깐 연을 바라보는 눈이 이상한 빛으로 일렁이나 싶더니 모란이 이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의술 같은 건 몰라. 그냥 감으로 알 뿐이지.”

“……감이라고.”

맥이 탁 풀린 연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건 역시나 어리석은 짓이었다. 마법이라는 이상한 재주를 부릴 줄 알기에 자신의 몸이 이유 없이 아프고 허약한 이유에 대해서도 알 줄 알았다. 모란이 능청맞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충분히 볼일을 본 것 같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할까.”

“잠시만 기다려 줘.”

양이가 줬던 꽃다발을 손가락 끝으로 집은 연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내 냇가를 발견한 그가 미련 없이 꽃다발을 떠내려 보냈다. 손을 탁탁 털고 난 뒤 연이 돌아섰다.

“이제 됐어.”

그러나 모란은 연에게 다시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가 둥둥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는 꽃다발을 보면서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피곤했던 연이 미간을 접었다. 왜 안 가고 이러고 있는 거야? 애가 준 꽃다발 버렸다고? 안 그래도 양심이 좀 찔렸던 연은 입매를 굳혔다.

“왜?”

모란이 묻자마자 이런 종류의 질문을 예측하고 있던 연이 즉각 대답했다.

“난 꽃이 싫어.”

“꽃이 왜 싫은데?”

“싫은 데 이유가 있나?”

마음이 내심 불편했던 연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자 모란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 그냥이나 우연 따위는 없단 말이야.”

그리 말하고는 모란이 손을 내밀었다. 아픈 곳을 찔린 느낌이라 정말이지 잡기 싫었지만 마지못해 팔을 내주었다. 이미 세 번이나 겪었지만 순간이동을 하는 감각은 정말이지 아찔하고 기묘한 것이었다.

익숙한 방 안에 도착한 연이 비틀거리면서 모란에게서 멀어졌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체력을 거의 다 써 버렸기에 그가 입 안으로 신음 소리를 삼키며 면사포를 벗었다.

“앞으로도 오늘 이 시간 때쯤에 오도록 하지. 매일 오면 될까?”

겉옷을 벗던 연이 믿기지 않아 모란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몇 번 정도 더 이런 식으로 다녀오는 걸 바라긴 했어도, 매일까지는 원하지 않았는데.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한참 바라보다가 연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매일매일?”

모란이 과장하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매일매일. 왜, 그게 거래 조건 아니었나? 신원 보증을 하는 대신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게 해 준다고.”

“그건…… 맞지만.”

모란이 계속 환자들에게 데려다준다고 하는데도 연은 어쩐지 마음이 찜찜하였다. 그가 예상한 모란의 행동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깔끔한 빚 청산, 깨끗한 관계 청산이라는 결과물이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연과 달리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는 모란이 과장스럽게 몸을 이상한 방식으로 굽혀 보였다. 아마도 그가 지내다 왔다는 곳의 인사법인 모양이었다.

“그럼, 남궁연 공자. 내일 보도록 하지.”

말을 끝내자마자 모란은 언제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은 그가 사라진 구석을 한참을 노려보았다. 도대체가 의중을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야만스럽고 사기꾼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야 연은 침의로 갈아입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에는 집중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몸이 마치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있었다. 이불을 덮으며 연이 한기에 몸을 떨었다.

‘내가 잘못된 거래를 한 건 아닐까.’

사부에게 예의를 차리라는 대가로 패물을 조금 지불했다. 이로써 그 문제는 끝이다. 다음으로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도와주는 대가로 금 열 냥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걸로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대충 도와주는 척하고 어영부영 넘어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란이 매일매일 도와주겠다니. 이게 과연 좋은 일이기만 할까? 확실한 건 모란과 더 이상은 절대 엮이지 않겠다는 초반의 다짐과 거리가 멀어져만 간다는 것이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가운데에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어 연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

연이 일어난 건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좀 더 오래 자고 싶었지만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한위가 생각나 그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어젯밤의 한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몸이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었다. 밤새도록 방이 따뜻하게 지펴졌는데도 오늘도 손발은 차가웠다. 시비가 가져다준 탕약을 먹고 나자 다행히도 몸에 온기가 돌았다.

‘지난번보다 확실히 이 약이 더 센데.’

사부님이 꽤나 비싼 약재를 쓰셨구나 생각하며 연이 빈 탕약 그릇을 바라보았다.

곧 시비가 그릇을 치우고 점심 식사를 내왔다. 입맛이 없어 연은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남은 것들은 한위 줄 생각으로 챙겼다.

밥과 반찬은 적절히 주먹밥으로 만들고 떡과 당과는 간식으로 쌌다. 한위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좋았다.

한위에게 줄 작은 보따리를 챙겨 들고 나온 연이 자박자박 연못으로 향하다 멈칫했다.

어디서 향긋한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계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향기였다. 대체 뭔가 하여 걸음을 빨리한 연이 악,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화정당 정원이 연못을 중심으로 둥글게 완전히 꽃밭이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제 눈을 의심한 연이 눈을 감았다 떠 보아도 보이는 건 바뀌지 않았다. 칼날 같은 찬 바람이 뺨을 할퀴는 게 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풀밭에는 작은 꽃들이 만발하였고 나뭇가지에는 화사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쪽은 겨울인데 저쪽은 화사한 봄철이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연은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꽃밭을 노려보았다. 동백꽃이나 매화 외에도 봄이나 여름에만 피는 종류도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계절에 피우는 게 불가능한 꽃들이었다. 그리고 연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우와아.”

한위는 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척하는 오후 외에는 연못 옆 어느 구멍으로 기어 들어오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라 몰래 기어 들어오던 한위가 꽃밭을 보고는 입을 헤 벌렸다.

“겨울인데도 꽃이 엄청 많아요, 형님!”

“그렇구나…….”

연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꽃을 싫어하는 그로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광경이라도 그저 끔찍할 따름이었다. 그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백…모란…….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파들파들 떨며 특정한 꽃들을 일단 먼저 땄다. 말리면 약재로 사용할 수 있는 종류였다. 딱 그거 하나만 괜찮았다. 그 외에는 죄다 짓밟아 없애고 싶었다.

“한위야.”

연이 이상하리만큼 부드럽고 상냥하게 불렀다. 그가 일단 식용으로 먹어도 괜찮은 꽃들을 따다가 한위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먹어도 되는 꽃이니 할미 가져다주고 오렴. 이 보따리도 가져가서 같이 먹고.”

“네에!”

신난 한위가 연에게서 꽃과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그냥 가기 아쉬웠는지 가다가 유난히 탐스럽게 핀 복사꽃도 따다가 수풀 속으로 바스락거리며 사라졌다.

한위가 사라지자마자 연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을 잡았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꽃나무째로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정원사가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정원사가 또 연 공자 지랄 같은 성격 나왔다고 여기는 게 꽃을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연은 가차 없이 꽃이 핀 가지들을 베어 냈다. 베고 또 베고……. 꽃밭의 꽃들도 자근자근 밟아 뭉개며 최근 받은, 오갈 데 없는 분노와 짜증을 풀고 있을 때였다.

“이건 좀 너무한데.”

마지막 한 송이까지 짓밟은 연이 뒤돌아서자 백모란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스러진 꽃들로 처참해진 정원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검 좀 휘둘렀다고 숨이 차 연은 마지못해 들고 있던 검을 다시 꽂아 넣으며 모란을 노려보았다.

“네가 이렇게 한 거지?”

“내가?”

백모란은 뻔뻔하게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시치미를 뗐다.

글쎄, 내가 그랬던가? 빙글빙글 웃은 그가 잘린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가볍게 나뭇가지를 휘두르자 순식간에 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연이 치를 떨며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쾅쾅 뛰었다.

“내 정원이야!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허튼 수작이라니. 천금을 줘도 못 가질 정원으로 만들어 주었거늘.”

모란이 나뭇가지 위로 여러 꽃들을 피워 냈다. 흡사 꽃다발로 보일 정도였다. 꽃잎이 팔랑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연은 말없이 모란이 하는 짓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안 그래도 싫은 꽃은 모란의 손에 들리자 더욱 싫은 것이 되어 있었다. 근처에 가기도 싫었다.

“너…….”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연은 턱 숨이 막혔다. 꽃이 만발한 자신의 정원에 충격을 받아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탓이었다.

“저 연못 다리 근처에 피어 있던 노란 꽃, 네가 한 거지?”

연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짓밟아도 자꾸만 다시 피어나던 그 빌어먹을 꽃! 백모란이 했던 거였구나!

게다가 모란이 매번 노란 꽃을 피워 낸 거라면 걸고 넘어갈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올랐다. 그가 언성을 높였다.

“이때까지 매일 여기에 몰래 왔었어?!”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혔다. 연이 노려보며 따지거나 말거나 이번에도 모란은 뻔뻔하게 모르는 척 연못 근처나 거닐었다. 그가 연못 위로 발을 디뎠다. 놀랍게도 발은 물속으로 잠기는 일이 없었다. 수면 위를 걸으며 모란이 물었다.

“왜 그렇게 꽃을 싫어해?”

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뽑고 싶은 갈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무인이었다. 사람을 향해 검을 함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걸 연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란이 너무 뻔뻔하고 얄밉게 나오니 갈등이 치열한 것이다…….

모란은 들고 있던 꽃나무 가지를 수면 위에 흔들었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물 위로 연꽃이 요란하게 피어났다. 연은 잠시간 그 광경에 정신이 팔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라도 현혹되니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꽃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이유가 없는 게 확실해?”

연은 모란이야말로 왜 저렇게 이유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꽃이 싫냐고? 그 생김새며 향기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당장 내 정원 원래대로 돌려놔.”

그가 윽박질렀다. 모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연못 위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방울처럼 아담하고 작은 흰 연꽃 한 송이를 땄다.

연못에서 나온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연이 해치운 꽃 더미가 풀썩 주저앉더니 흙먼지로 화했다. 그가 부리는 현란한 재주들을 보고 있으려니 연의 정원이 아니라 마치 백모란의 정원 같았다.

“이름도 꽃 같은데, 왜.”

모란이 끝까지 박박 연의 속을 긁어 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곁으로 다가와서는 머리카락에 연꽃을 꽂아 주었다. 축축한 느낌에 연이 짜증스럽게 털어 내자 연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연이 보란 듯이 상대의 눈앞에서 연꽃을 콱 밟았다. 발아래에서 연꽃이 으스러졌다. 모란이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얼굴로 저런, 하고 중얼거렸다.

“내 이름, 싫어해.”

“…….”

“왜, 내 이름도 무슨 이유로 싫어하는지 물어보시지?”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자근자근 밟아 뭉갠 연이 뒤로 물러났다. 모란이 뺨을 긁적거렸다. 흐음, 하고 그가 눈을 굴리고는 입을 열었다.

“네가 왜 네 이름을 싫어하는지는 알고 있어. 약한 연(軟)이라 싫어한다며?”

뜻밖의 대답에 연이 당황했다. 모란이 맞는 말을 해서가 아니다.

남궁영명은 한위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나름대로 연을 신경 썼다. 그러나 연오에게 향하는 관심에 비하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만일 연이 연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연을 그대로 치워 버릴 정도의 차이 말이다.

그 차이는 이름에도 반영되었다. 연오의 이름은 연오(練悟), 언제나 단련하여 깨닫게 된다는 뜻이었다. 정말이지 그는 그 이름 그대로 자라났다. 오성(五性)이 뛰어나 모든 것에 능했고 무공의 성취에 있어서도 깨달음이 남달랐다.

반면 연은 어떠했던가? 연의 이름은 연오의 이름에서 연이라는 발음을 따온 것이다. 형제 간에 으레 쓰곤 하는 돌림자조차도 아니었다. 무르고 약한 연(軟)이라고 하여 딱 걸맞은 이름이라 하는 걸 영명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그러니 연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이 이렇게 약한 것도 이름 때문인 것으로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남궁영명 혼자서나 즐기는―웃기지도 않은― 농담거리였으니까.

연오가 매우 유명하여 연까지는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았을뿐더러 보통은 남궁연이라고 부르면 충분한 탓도 있었다. 제 이름의 의미까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연이 얼굴을 굳혔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

누가 말했든 간에, 하필이면 모란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란이 허리를 숙여 연의 발에 밟힌 연꽃을 주워 들었다.

너덜너덜해진 꽃잎을 한 장 떼어 내자 그것은 곧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연은 모란이 자신의 눈을 현혹하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꽃잎을 모두 떼어 낸 모란이 손바닥 위에서 빙그르르 꽃대를 굴리며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하자. 누가 나한테 네 이름에 대해 말했는지 알아내면 더는 네 정원에 손대지 않도록 하지.”

“뭐? 내가 왜 내 정원을 가지고 그런 불합리한 내기를…….”

“너무 광범위하니까 힌트를, 아니 단서를 주자면…….”

연의 항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모란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네가 아는 사람이고, 나이는 어려. 그리고…… 귀엽나? 응, 그래. 꽤 귀엽게 생겼거든.”

“이봐!”

바짝 약이 오른 연이 언성을 높였다. 모란은 마치 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그리고 해가 떠 있는 높이를 가늠하더니―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따가 보자며 휙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몹시 어이가 없었던 연이 어른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발을 구르고 말았다. 심지어 허공에 대고 주먹질까지 해 보였다. 아직도 연못에는 연꽃이 남아 있었다……. 겨울이라 물은 얼음장 같아 들어가 건져 낼 수도 없었다. 결국 혈압이 치솟은 연의 이마에 작은 핏대가 섰다.

“백모란!”

물론 모란은 돌아오지 않았다. 휑한 정원에는 반짝거리는 가루 조금과 연꽃, 그리고 백모란을 향한 분노로 찬 연의 외침만이 남아 쟁쟁 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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