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남궁연(南宮淵).
그는 금년 스무 살의 청년이다. 또한 남궁세가 가주 남궁영명의 삼남 이녀 중 차남이었으며 예민하고 아랫사람 괴롭히기 좋아하는 고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차남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명문 세가 내에서는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았다.
물론 성정 때문만은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자라난 후기지수들 중에는 성격이 고약한 자들이 제법 있었으니 성정 따위가 큰 결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낮게 평가되는 이유는 어릴 적 원인 불명의 고열에 며칠을 앓아누운 뒤부터 허약해진 심신 때문이었다.
반면 남궁세가의 장남인 남궁연오(南宮鍊悟)는 올해 스물다섯으로 중원오룡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잠룡(潛龍)이었다. 문무(文武)에 있어 놀라운 재능을 소유했으며 대나무같이 다소 융통성이 없는 면은 있었으나 협(俠)과 의(義)를 아는 사내였다. 남을 이끄는 데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외모도 사내답게 준수했으며 강골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장남과 차남은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남궁연은 장남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남궁연오와 달리 남궁연은 태어나서부터 스무 살이 되는 이때까지 부족하기만 한 인생을 살아왔다. 물질적으로 부족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모친인 모용단리는 연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병사하였다. 그렇다면 연에게는 있어서 모친이 애틋할 법도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딱히 모친의 애정을 받으며 자라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유모의 손에서 길러져 어미의 젖 한번 물어 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남궁연오는 어린 동생인 연을 나름 어여삐 여기기는 하였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로서 동생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부친인 남궁영명은 연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기에 모용단리가 작고한 뒤로 연은 죽 거의 혼자였다. 예민한 성격에는 그런 성장 환경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 연에게 백모란은 좋지 않은 의미로 특별한 존재였다.
연은 열 살 때 심한 고열을 앓았고,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크게 앓은 뒤로는 몸이 현저하게 약해져 무공을 익혀도 큰 성취를 보기가 힘들었다. 머리는 좋은 편이라 무엇을 배워도 잘 이해하곤 했지만 남궁세가는 무가(武家)다. 과거 대대로 검황(劍皇)이며 검후(劍后)를 배출한 남궁가는 언제나 무(武)를 첫째로 쳤다. 아무리 다른 재능이 걸출해도 검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뒷배가 되어 줄 모친도 없고 검에 재능도 없으니 연이 받는 건 무관심한 시선뿐이었다. 의식주가 훌륭해도 마음은 외롭고 쓸쓸하였다. 몸이 아프니 성격은 예민해졌고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모든 말과 행동에 날이 섰다. 그 날카로운 성질이 주변의 만만하고 어린 하인에게 향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연은 언제나 자신의 하인인 백모란이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괴롭혔다. 저보다 두 살 어리기까지 한 어린아이니 어느 정도는 봐줄 법도 했건만 백모란을 향하는 손속은 항상 잔인했다. 제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꼴도 보기 싫은 데다가 이따금은 놀랍게도 그가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싫으면 내쫓은 뒤 다른 하인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면 되는데도 그는 꼬박꼬박 백모란을 불러 괴롭혀 댔다. 백모란은 처음에는 반항을 하는가 싶다가 나중에는 체념했는지 고분고분해졌는데, 그게 오히려 연의 행동을 가혹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성격이 좋지 않다 해도 연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괴롭힌 적은 없었다. 백모란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모란만 보면 시시때때로 손발이 나가곤 했다. 모욕적인 언사는 일상이었다. 당연히 그런 둘을 보는 눈과 귀가 있으니 세가 내에서 연의 평가는 점점 낮아지기만 했다.
모란도 자신처럼 모친을 일찍 여읜 탓일까? 아니면 자신과는 다르게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서였을까? 연은 종종 고민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유 모를 괴롭힘은 점차 가혹해지기만 했다. 악의도 강해져만 갔다.
그렇게 연은 모란과 십 년을 같이 지냈다. 그럼에도 미운 정조차 들지 않았다. 모란도 연도 이 상황에 완전히 익숙해질 때쯤 사건이 터졌다. 연의 인생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사건이었다.
그날은 춥다 못해 바람이 칼날처럼 아렸다. 그래도 방 안에서만 있자니 답답하여 문을 열고 나왔더니 밖에 부르지도 않은 백모란이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연은 성질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날도 춥고 짜증이 나니 화풀이를 하려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백모란이 아주 뚜렷한 음성으로 연의 이름을 불렀다. 남궁연, 하고.
감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연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금방 불같은 분노가 찾아왔다. 그동안 착한 척 얌전한 척하며 본모습을 속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간신히 검을 빼어 들지 않은 건 백모란이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죽여도 진즉에 죽였을 것이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정말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노려보아도 백모란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이 병신아.”
……하고 말할 적에는, 연의 이성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얼마나 죽이고 싶던지 백모란이 피를 토하고 발끝에 딱딱한 게 채여도, 문지기며 사람들이 말려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멈춘 건 모란이 마지막으로 피를 토하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였다. 주위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연이 비틀 뒤로 물러났다. 추운 날씨에 숨이 찰 정도로 두들겨 패서인지 아니면 심적인 소모가 있어서인지 그는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연의 눈에 보이는 건 낯선 방의 풍경이었다.
머리 위로는 흙과 나무, 그리고 지푸라기를 성기게 엮어 인 천장이 있었다. 찬 기운이 올라오는 나무 바닥은 연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다. 화정당이 아니다. 화정당에 이렇게 허름한 곳은 없다.
이내 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어리고 낯설었다. 가장 낯선 것은 곁을 지키고 있다가 저를 모란이라고 부르며 걱정 어린 얼굴로 대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랬다. 연은 여덟 살의 어린 백모란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넋을 놓았다. 자신이 백모란이 되었다니, 그것도 여덟 살의 어린 백모란이 되었다니 이럴 수가 있나.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당사자인 연조차 이건 꿈이 아닐까 몇 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정신적인 충격은 고스란히 어린 몸으로 전해졌다. 연은 몇 날 며칠을 고열을 내며 앓았다. 열 살 때 그랬던 것처럼 죽을 듯이 온 몸이 들끓는 고통에 시달렸다.
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앓으니 모란의 모친은 몹시 걱정하여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다. 낯설기만 한 여인을 보는 연의 눈에는 눈물이 성글게 맺혔다가 굴러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모란을 괴롭힌 죗값을 받는 것인가?
열로 혼몽해진 가운데 밭일과 바느질로 거칠어진 손이 이마의 땀을 훔쳐 낼 때면 제 어미의 곱고 보드라운 손과 겹쳐 보이곤 했다. 정작 연의 모친이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연이 진은록을 만나게 된 건 그가 앓아누운 지 사흘째의 일이었다. 이러다가 제 자식에게 큰일이라도 날까 염려스러웠던 모란의 어미가 데려온 것이었다. 열기에 흐릿해진 눈으로 연은 작고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은록을 보았다. 곱고 알록달록한 비단옷도 아닌데, 그저 깨끗한 흰옷일 뿐인데 움직임 하나, 내뱉는 말 하나가 고아했다.
원인 불명의 열이 모두 가라앉고 난 뒤에도 연은 한참을 적응 못하고 단기간 실어증을 앓았다. 모란의 모친이 무얼 해도 고개만 젓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불은 불편했고 식사도 거칠고 맛이 없어 입에 맞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몸이 바뀐 충격이 가장 컸다. 잠깐 괜찮아졌다가도 다시 열이 나기 일쑤라 진은록은 한동안 연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경기까지 하여 모란의 모친은 일을 하러 나가는 동안 그를 진은록의 의원(醫院)에 데려다 놓았다. 그게 사제지간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뛰어난 의원인 진은록의 입장에서는 이유 없는 열이나 실어증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에 데려다 놓은 건 증상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라고, 연은 추측했다.
아무튼 그렇게 가게 된 진은록의 작은 의원은 매일같이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로 바빴다. 연은 첫날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 종일 한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음 날부터는 차츰 진은록의 의술 활동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진은록의 의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침 한두 번 놓고 나면 기어서 온 사람이 걸어서 나갔으며, 얼굴이 희거나 파랗게 질린 사람에게 약을 지어 주면 얼마 후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와 감자나 쌀, 야채 따위의 식량을 보답으로 들고 돌아왔다.
종종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간청하는 때도 있었다. 진은록은 그 어떤 사람이든 치료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받는 값이 달랐다.
진은록은 연이 의서나 자신이 침을 놓는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가 중풍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연이 의서를 뒤적이자 눈여겨보고는 늦은 밤 환자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그는 다음날 연에게 낡고 깨끗한 책을 한 권 가져다주었다. 무언가 하여 열어 보니 천자문이었다. 아무리 몸이 여덟 살이어도 정신 연령은 스무 살인 연은 대충 훑어보는 시늉을 하고는 진은록에게 도로 내밀었다. 모란의 몸으로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읽을 줄 압니다.”
크게 앓고 난 뒤 아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어 한 말에 의심하거나 부정할 법도 했지만 진은록은 눈썹만 한번 찌푸리고는 말았다. 대신 가타부타 말없이 기초적인 경맥학서(經脈學書)를 가져다주었다. 무인으로서 혈도 자리 정도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알고 있던 연이 막히는 곳 없이 이해하자 그때부터 진은록의 본격적인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연은 정식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진은록의 치료와 모란 모친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연의 몸은, 아니 어린 모란의 몸은 곧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일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연은 모란이 처한 처지를 깨닫고 말았다. 바로 어린 백모란이 어린 연의 하인이자 몸종이었다는 점이다.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그는 다시 도련님의 수발을 위해 남궁가로 불려 가야만 했다.
열 살의 남궁연은 병마에 지쳐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혐오와 경멸 어린 표정을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보며 연은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지금의 자신은 스무 살이나 혹은 열 살의 연이 아닌 여덟 살의 어린 모란이었다.
십 년 전 과거의 자신이 모란에게 했던 괴롭힘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으면서 연은 처음에는 반항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자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신은 지금 과거에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미래이자 현재인, 스무 살의 연이 열여덟 살의 모란을 두들겨 패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바로 그때가.
연은 자신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운명을 따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니 그다음은 쉬웠다. 그저 십 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면 됐다.
뜻밖에도 이 시간은 연에게 있어 마냥 힘들거나 괴롭지만은 않았다. 연과는 다르게 백모란의 어린 몸은 매우 건강하고 또…… 건강했다. 고뿔 한번 걸리는 일이 없었고 힘도 좋았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모란의 몸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모란의 모친은 폐렴으로 작고하였으나 연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받은 모정은 가랑비처럼 연을 적시고 무르게 만들었다.
남궁연일 때는 없던 친구, 이웃, 스승……. 그 모든 게 낯설면서도 행복하고 좋았다. 딱 하나, ‘남궁연’ 도련님이―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괴롭히는 것만 뺀다면, 다소 빈궁하고 이따금 굶는 일이 있긴 해도 거의 완벽한 삶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 정해진 그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연은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그의 사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이제 의술 실력이 많이 숙달되어 그는 제대로 된 의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웃과 환자들이 제게 보내는 신망이 그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
왜 남궁연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렇게 좋은데 남궁연으로 살아야 하나? 저를 좋아하는 사람 한 명 없는 그 외롭고 가련한 삶으로?
몇 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결국 내린 결론은 남궁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백모란이 아닌 남궁연이었으니까. 그게 이치인 것이다.
연은 바로 ‘그날’, 새벽이 밝자마자 진은록에게 인사를 올리고 남궁가로 향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 어떨지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옳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날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제 인생을 제대로 고쳐 놓을 무언가가.
그렇게 연은 반항도 없이 남궁연이 자신을 가혹하게 두드려 패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고 난 뒤 연은 무의식중에 지난 과거들을 꿈꾸었다.
열 살의 자신, 스무 살의 자신…….
여덟 살의 백모란, 열여덟 살의 백모란…….
그가 가졌던 두 명의 어머니들과 은록, 형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도, 연은 두려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먹만 꽉 쥐고 있다가 그는 익숙한 냄새를 알아차렸다. 약초 냄새였다. 약초 냄새 하니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건 그의 사부인 진은록이었다. 연이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있었다.
“사…부님?”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상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의 의원이었다. 아플 적마다 연을 진료하는 세가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연이 깨어난 걸 알아차리자 의원은 다시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면서 물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돌아…왔구나……. 연이 멍하니 제 손을 들어 보았다. 햇빛에 잘 익어서 짙은 모란의 피부와는 달리 희고 말랐다. 그리고 차가웠다. 자신의 몸이 한참 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로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란으로의 삶이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연이 멍하니 대답 없이 앉아 있어도 의원은 익숙하다는 듯 제 할 일을 다 했다.
“기가 허해지셨습니다. 보신에 좋은 약탕을 올려놓고 갈 테니 식사 후에 드십시오.”
“…….”
“그럼 저는 이만…….”
한참을 제 손끝만 내려다보던 연이 주섬주섬 치료 도구를 챙기던 의원을 붙잡았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일각(一刻, 십오 분)이 채 안 됩니다. 몸이 큰 충격을 받아 잠시 의식을 잃으신 것이니 큰 이상은 없을 겁니다.”
대답하고는 그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여전히 멍한 채로 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꿈을 여러 번 꾼 적 있기에 이번에도 꿈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꿈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었다.
연은 면경을 들여다보았다.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들던 백모란의 몸과 얼굴과는 다르게 익숙했다. 한참 동안이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모란과는 다르게 혈색 없는 흰 얼굴이……. 그러나 백모란의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식은땀을 닦아 내며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한 몸에 있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이 몸이 더 안 좋게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주강이었다. 그의 호위무사며…… 동시에 ‘백모란’이 제법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지.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 연의 입맛이 썼다.
주강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데 얼핏 연을 스치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에는 몰랐으나 연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어딜 가십니까?”
주강의 질문을 연은 그냥 무시했다.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발을 신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언제 흐렸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뜰에는 핏자국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내상이 제법 심각할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면서도 연은 등골이 서늘했다.
백모란의 집으로 향하면서 연의 마음은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넘실거렸다. 이제 백모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모란의 원래 혼이 돌아오나? 아니면, 그저 그대로 텅 빈 몸이 되나? 연은 부디 전자이기를 바랐다. 마음이 급하니 경공을 써서 몸을 날리는데 돌연 주강이 가로막았다.
“도련님!”
“비켜, 주강.”
어떤 상처든지 다친 바로 직후의 처치가 중요하다. 물론 사부가 얼마나 상처 치료를 잘해 놓았겠냐마는 연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 얻어맞으면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 정도면 모란도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패 놓았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의미였다. 연은 잠시 주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은록도 과묵한 편이었으나 주강은 그보다도 더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모란이었을 적 주강과 나름 대화를 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말을 건네는 경우도 없고 붙임성도 없었으나 좋은 사람이었다. 실력도 좋았고. 그러나 그런 점이 지금은 방해였다.
‘해임한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연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호위를 맡고 있기는 하나 주강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키지 않으면 해임한다고 윽박질러도 그에게는 아무런 협박도 되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해코지하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 비켜.”
“…….”
“주강, 비키라고 했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자 마침내 주강이 물러났다. 연이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날렸다. 고작 경공술 좀 펼쳤다고 숨이 차 속으로 빌어먹을, 하고 욕을 지껄였다.
도착해 보니 백모란의 집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연이 도착하자마자 찬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따가운 시선들을 헤치며 연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강이 따라 들어오기 전에 면전에서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다행히 주강은 연이 닫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런…….”
연이 혀를 찼다.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백모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정좌하여 맥을 짚었다. 늑골에 금이 갔고 팔과 다리가 부러졌으나 뼈가 부러진 건 그다지 위중하지도 않았다. 위험한 건 내상을 입으면서 뒤틀린 혈도였다.
진찰을 해 보니 기문혈(期門穴), 중완혈(中婉穴)부터 시작해 그 부근 총 일곱 가지의 혈도에 문제가 있었다. 연은 백모란의 옆에 놓인 침구(鍼灸)들을 발견했다. 그의 사부가 들렀다 간 게 분명했다. 아마 진은록도 연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겠지. 그리고 가지고 있는 침구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뼈는 진은록이 맞춰 두었으니 손대지 않아도 괜찮았다. 연이 깊게 심호흡을 하며 백모란의 몸에 손을 얹었다.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날부터 연은 매일매일 이날을 떠올리고 곱씹고 외웠다. 그는 혹여라도 실수로 자신의 몸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드는 의문이 있었다. 자신이 그리도 심하게 구타했는데 백모란의 몸은 과연 괜찮을 것인가? 평범한 사람인데?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수준의 폭행이었다. 연은 무언가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고민한 끝에 연은 백모란의 몸으로 직접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익혔다. 남궁세가의 직계만 배울 수 있는 내공심법이었다. 모든 내공심법이 그렇지만 창궁대연신공은 특히나 정갈한 내공을 단련하는 데 특별났다. 백모란의 몸을 마음대로 쓰고 자신의 괴롭힘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보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연은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는 내상을 입은 백모란을 추궁과혈(椎宮過穴)*하여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공을 주입하는 방식을 이용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시행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이렇듯 자신의 내공을 흘려 넣어 뒤틀린 혈을 바로잡으면 불구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제 내공을 소모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내공이 아니던가……. 연은 사부로부터 의술을 배우면서 무인으로서의 미래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이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능한 비슷하거나 같은 성질의 심법을 가져야만 했다. 진은록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그의 내공의 성질은 남궁세가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남궁세가의 내공이 정순한 물과 같다면 진은록의 내공은 번개와도 같았다. 그래서 연은 백모란의 몸으로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배운 것이다. 그는 최대한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었다.
연은 일단 운기조식 하듯 혈도를 한 바퀴 따라 흘려 넣었다. 그 과정에서 미세하게 뒤틀린 혈도 두 개도 잡아냈다. 다른 사람의 몸이었으면 모르고 지나갔겠지만 자신이 한번 썼던 몸이었으니 알아채는 것이 쉬웠다.
평상시 몸과 다른 점을 샅샅이 훑어 낸 뒤 그는 본격적인 치료를 실행했다. 기문혈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다른 혈도를 원래대로 고치고 나자 온몸에 진력이 빠지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하아…….”
손을 떼어 낸 연이 숨을 골랐다. 식은땀 때문인지 아까보다 몸이 더 차게 식은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연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경멸이나 혐오, 혹은 죽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안해, 백모란.”
그래도 십 년 동안 백모란의 재산도 나름대로 모아 두었고, 지금은 부상을 입었지만 나중에는 남궁세가의 심법 덕에 몸도 다시 건강해질 터. 지켜보다가 그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몰래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그게 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이 몸의 주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전제하에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문을 열자 주강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강은 연의 어깨너머로 백모란의 몸을 훑고는 말없이 옆으로 비켰다. 연이 신발을 신고 걸어가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수군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잠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들이다……. 환자로 찾아왔거나, 혹은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눴었지.
마음이 심란하여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나오던 연은 진은록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냉정하고 침착한 그의 사부가 드물게도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연을 휙 지나 백모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은 했으나 가슴이 덜컥 가라앉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은록이 연을 그냥 지나친 건 그가 남궁세가의 차남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백모란을 치료하는 게 그의 우선 순위였기 때문이다.
연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올 때와는 달리 터덜터덜 다소 힘없는 발걸음이다. 진은록은 진맥을 하자마자 분명 뭔가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음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이미 진단을 해 보았으니 백모란의 상태가 위중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리고 잠깐 사이에 그 상태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한 달 정도 요양하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오리란 것도.
허나 안다 한들 무엇을 어쩔 것인가? 어떻게 추측을 할 것인가? 항상 백모란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남궁연이 몸소 찾아와 치료해 주었다고? 그것도 의술의 의도 모를 도련님이? 의심을 가지겠지. 가지고도 남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차마 백모란의 몸이 불구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의원이면서 본인만큼 몸을 잘 아는 데다가 같은 심법을 가진 사람만이 완치할 수 있을 그런 내상이었다.
어차피 이제 더는 그의 사부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이자 아버지였던 이는 순식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연이 코웃음을 쳤다. 제자를 그 꼴로 만들었으니 원수가 되면 되었겠지. 진은록이 목숨을 중히 여기는 의원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모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찾아와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연은 남궁세가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퍽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생이별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상황이다. 각오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각오를 한다고 모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연은 오늘 아침 백모란의 몸으로 걸어온 길을 다시 따라 걸었다. 영성문을 지나 화정당으로 들어서니 뜰의 핏자국은 그사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예민한 성정 때문에 화정당의 시비들은 꽤 바지런한 편이었다.
묵묵히 제 뒤를 쫓아온 주강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연은 성큼 방에 들어섰다. 겉옷 하나 안 걸치고 나갔다 왔더니 몸이 한기로 떨렸다. 그의 형인 남궁연오나 주강이 겨울에 외투는커녕 얇은 겉옷 하나 걸치고 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연은 그래서 겨울이 유독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어떠한 이유’로 좋기도 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우면서 연은 생각에 잠겼다. 백모란이 다시 깨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영혼이 없으니 백치가 되나? 혹은 아예 깨어날 수가 없게 될까? 아니면 자신처럼 잠시 어디론가 갔던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돌아온 그의 몸에는 이전의 기억들이 남아 있을까?
어려운 문제였고, 백모란이 깨기 전까지는 답을 찾기 어려운 의문들이기도 했다. 차게 식었던 몸이 체온을 되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동안 연은 백모란으로 살아왔던 인생을 곱씹으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
‘이런, 깜박 졸았군.’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진은록이 피곤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눈을 뜨자마자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의 제자가 누워 있는 침상이었다. 사흘째 모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맥부터 짚어 보던 은록의 얼굴이 근심과 의문으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은록이 이곳 안휘성(安徽省)에 자리 잡은 지도 어언 이십 년째다. 한때 그는 황성에서 일하던 솜씨 좋은 의원이었다. 그러나 황성이 어떤 곳이던가? 온갖 부조리함과 부정부패가 판치는 곳이었다. 실력보다는 가문과 권력, 그리고 지위에 의한 처방이 내려지는 게 일상다반사라. 곧은 성정의 은록은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넌더리를 내며 황성에서 나왔다. 일가친척이 없었으니 딱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몇 년을 떠돌아다니며 명의라는 명성을 쌓다가 마침내 안휘성에 당도하여 작은 의원(醫院)을 하나 차렸다. 그는 가난한 자건, 부유한 자건, 혹은 인성이 악하거나 선하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 고통 앞에 귀천이 있던가?
대신 그는 반드시 치료에 대한 비용을 받아 내되 상대의 형편에 따라 값을 다르게 책정했다. 재산이 많은 자에게는 많이 받아 내어 그 비용을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형식이었다.
진은록이 제자를 들인 건 안휘성에 정착한 지 십 년 째 되는 해였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어린 아들이 며칠 내내 고열을 내며 앓고 있어 치료하게 되었는데, 전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열뿐이라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은 원래 종종 이유 없이 고열을 앓곤 했으니. 그러나 앓고 난 아이는 실어증을 앓았다. 목과 성대에는 이상이 없었으니 머리에 이상이 생겼거나 정신적인 문제였다.
아이의 모친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일이 없다고 했으나 은록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정신적인 문제였다. 아이는 식사도 거부하는 일이 잦았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전형적인 울병(鬱病, 우울증)의 증상이었다. 거기에 다시 열을 내고 발작하는 일이 있어 은록은 일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원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의원에 있는 동안 아이는 은록의 의술에 관심을 보였다. 회복이 되려는 긍정적인 징후로 본 은록이 넌지시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음 날 천자문을 가져다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의서(醫書)를 읽으려면 먼저 글자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이미 글자를 알고 있었다. 기초적인 경맥학서를 가져다주자 막히는 부분 없이 이해하기까지 하였다. 은록은 그때서야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가 대답했다.
“백…모란입니다.”
그때부터 모란은 진은록의 제자가 되었다.
자식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아들 같은 존재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어도 될 만한 아이였다. 모란은 총명했고 의원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냉정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였다. 그런 아이가 남궁연에게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며, 마을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릴 적에 은록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도록 모란을 알았기에, 은록은 남궁연이 얼마나 모란을 못살게 구는지도 알고 있었다. 남궁연이 모란에게 손찌검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으며 가끔은 도를 넘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오기에 어지간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은록이 진지하게 남궁세가의 하인 일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모란은 이미 의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남궁연의 하인으로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가 아닌가.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모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본인이 괜찮다니 은록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일은 그만두라고 진즉 말려야 했던 것을.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제자를 보며 은록이 탄식했다. 맥을 짚어 보니 내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모란이 워낙 건강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이후로 맥을 짚어 보는 건 처음이었던 은록이 잠시 멈칫했다.
‘모란이 언제 무공을 배웠던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일단 부러진 팔다리의 뼈를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기간의 치료로 해결될 만한 수준의 내상이 아니었다. 의원으로 바로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워낙 심하게 다친 데다가 경황이 없어 사람들이 바로 모란의 집으로 데려간 모양이었다.
모란의 집에서 의원까지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 초조하고 다급한 마음으로 치료 도구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은록은 남궁연과 마주쳤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걷던 남궁연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흠칫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은록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남궁연이 모란의 집에 들렀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남궁연을 공격하지 않은 건 바로 뒤에 선 주강이 고개를 흔들어 보인 탓이었다.
자신의 분노보다는 위중한 제자가 더 급했기에 은록은 이를 악물고 그를 지나쳤다. 그가 당도하자마자 마을 사람이 희게 질린 얼굴로 남궁가의 공자가 들렀다 갔노라 고하였다. 은록은 불안한 마음에 단숨에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맥부터 잡았다. 한참 뒤 은록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을 다시 살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들끓던 내기(內氣)나 뒤틀렸던 혈도가 제대로 치료가 되어 있었다. 부러진 뼈와 상한 근육이 회복되도록 한 달 정도 충분히 쉰다면 원래대로 건강해질 수 있었다.
은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다시 앉아 차근히 맥을 짚어 보았다. 역시 혈도며 기맥이며 모두가 정상이다. 그가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은록은 이십여 년이나 환자를 치료해 왔다. 그렇기에 내상이란 절대 우습게 볼 상처가 아님을 잘 안다. 정양 생활과 함께, 침과 뜸으로 천천히 뒤틀린 혈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장기적인 치료를 요했다. 놀라운 건 갑자기 치료된 내상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는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으나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모란의 몸은 분명 내공을 배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몇 번 남궁세가의 무사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남궁세가에도 상주하는 의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오로지 직계만 상대했던 탓이다. 진찰할 때마다 무사들의 몸에서 그는 남궁가 특유의 정순한 내공심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란이 배운 내공심법이 바로 그런 성질이었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남궁세가의 직계를 한 번도 치료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라면 직계만 배우는 내공심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에 모란이 남궁세가의 내공심법을 배웠다는 걸 전제로 하면 단시간에 이 정도 수준으로 치료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추궁과혈이란 방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추궁과혈이라니! 조건이 까다로웠다. 시전하는 사람의 내공 손실이 크니 함부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은록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누구일까. 모란과 동일한 남궁세가의 심법을 배웠고 의술을 아는 자, 그리고 본인의 내공을 내주어도 될 정도로 친밀한…….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궁금함에 기웃거리고 있던 마을 사람을 한 명 붙잡아 물었다.
“남궁연 외에 이 집에 들른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 공자 말고는 아무도 없소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을 사람이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은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방금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한 참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남궁연이 모란을 위해 몸소 와서, 무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공을 넘겨주면서까지 치료를 했다는 가정 말이다. 하지만 남궁연이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모란을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은록은 몇 번이고 모란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혹시나 모르고 지나친 어떠한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그런 건 없었다.
모란이 깨어나지 못하는 며칠 내내 은록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을 지키며 무슨 수로 회복된 것인지 알아내려 애를 썼다. 수면 시간까지 줄여 가며 서적을 뒤지고 맥을 짚어도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지낸 것이 벌써 오늘이었다.
‘오늘쯤에는 깨어나야 할 텐데.’
정신이 들었을 때와 들지 않았을 때의 진단에는 또 차이가 있었다. 은록이 침음하며 맥을 짚던 손을 놓았을 때였다. 미동 없이 가만히 누워 있던 모란의 손이 돌연 은록의 손목을 놀라울 정도의 힘으로 세게 낚아챘다. 정신이 드느냐고 묻던 은록이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백모란의 눈이…….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은 면경부터 확인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게 좀 믿기지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그마치 십 년 만인 것이다.
일어나 종을 흔들자 잠시 뒤 시비가 따뜻한 세숫물을 내왔다. 의복을 정갈히 하고 세수를 하고 나니 다음으로는 하인 하나가 아침을 들고 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모란일 적 나름 안면을 트고 산 사람이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연은 그가 자신을 퍽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또한 예상한 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언제는 평판 따위를 신경 썼는가?
그러나 백모란으로 지낼 적 이 사람과 얼마나 친했는가를 떠올리면 입맛이 썼다. 이곳 남궁세가는 중원에서 제일가는 가문이었으나 그랬기에 연은 결코 이곳에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었다.
젓가락을 든 채 연은 물끄러미 자신의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따끈하니 갓 지은 흰쌀밥과 종류가 여섯 가지나 되는 반찬은 한참 동안 먹지 못했던, 맛 좋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이었다. 백모란일 적에는 가난하였기에 고기반찬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도 남궁세가에서 일하였기에 겨우 몇 번 얻어먹을 기회가 있었다.
몇 숟가락 뜨다가 연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건 좋기는 하였으나 백모란이 가지고 있던 건강함이 그리웠다. 입맛도 몸 상태가 좋아야 제대로 돈다. 연은 얼마 먹지도 못하고 상을 물렸다.
상을 물린 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툭툭 떠올랐다. 백모란은 아직도 의식을 잃은 상태인가? 사부님은 어찌 지내실까. 만약에 백모란의 원래 몸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그게 나는 아닐 테니, 하루아침에 제자를 잃은 셈이 되실 텐데.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이내 환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옮아갔다. 전날까지 가능한 환자들의 치료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제대로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그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밖이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의 형제인 남궁연오였다. 그는 차갑게 장포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
“형님.”
연이 엉거주춤 일어나기도 전에 연오가 차게 명령했다.
“앉아라.”
그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연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남궁연일 적에야 가족 식사니 무엇이니 하여 못해도 며칠에 한 번씩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백모란에게 남궁연오란 일 년에 한 번이나 멀찌감치에서 보면 다행일 정도로 까마득한, 그 남궁세가의 소가주였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형님의 얼굴을 살폈다. 준수하면서도 강건한, 연과 달리 참으로 사내다운 얼굴이 그를 엄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에게 혼났던 것도 한참이나 예전이지, 아마. 십 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차갑게 꾸짖는 소리를 듣고서야 연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은 않았다. 사고를 하나 쳐 놓지 않았나.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았으나 속마음이야 어쨌든 반성하는 모양으로 연이 고개를 숙였다.
“무인이란 자가 어찌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사람을, 그것도 네 아랫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든단 말이냐?”
할 말이 없었기에 연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응했다. 연오가 보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인이란 자라…….’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연의 무공 성취는 길거리 삼류 무사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거칠고 힘든 수련이라도 할라치면 앓아눕는 탓이다. 남궁세가의 수치라며 사람들이 공공연히 수군거리는 일에 익숙한 연은 연오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새로웠다.
‘그나마 나를 무인 취급하기는 하는구나.’
꽤 오랜 시간을 보고 지냈는데도 연오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형제는 아니라 언제나 대하기 어려웠다. 성정이 대나무처럼 곧고 꼿꼿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관대하기도 했다. 동생으로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백모란으로, 남궁세가의 사람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점이었다. 남궁연오는 퍽 아랫사람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분노가 이해도 갔다.
“이유가 있다면 말해 보거라.”
이유라면 있었다. 남궁연일 때는 병신이라는 모욕을 들어서이고, 백모란일 때에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어느 쪽도 연오에게 해명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인이 건방지게 굴어 손찌검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궁연!”
연오가 언성을 높여도 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더 숙여 보였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이것 하나만은 진심이었다. 백모란의 몸으로 지냈기 때문인지 이제 더는 백모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남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 형편없는 변명이 연오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자신의 아우가 못마땅했던 연오가 들어왔을 때처럼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은 그저 묵묵하게 시선을 바닥에만 두었다. 연오가 보기에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얼굴이라 심기가 더욱 험악해져만 갔다.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내 눈에 띄는 일 없도록 해라. 알겠느냐?”
한마디로 무기한 근신이란 이야기였다.
“예, 형님.”
연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연오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제야 고개를 든 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대하기 어려운 형제였다. 보통 도련님이 하인을 두들겨 팼다 하여 근신처럼 무거운 처분을 받는 일은 드물었으나, 연오는 바로 그런 드문 사람이었다. 불의는 결코 눈감아 주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그는 장차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몸이었으니까.
남궁영명에게는 총 다섯 명의 자식들이 있으나 감히 연오의 위치를 넘볼 자는 없었다. 정실의 자식인 데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에 무공의 성취도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성정 또한 곧고 올바르니 앞으로 남궁세가는 전에 없을 전성기를 누리리라 다들 떠들어 대곤 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법이지…….’
아무튼 근신이니 당분간 화정당 밖으로는 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연은 잠깐 자리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전에도 화정당 밖으로는 나가는 일이 드물었지만 백모란으로 살다 왔기에 몸이며 손이 심심했다.
‘전에는 대체 뭘 하면서 지냈지?’
연은 새삼 자신의 빈약한 인맥을 돌아보았다. 모란일 적과는 달리 이렇게 근신 처분을 받아도, 혹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찾아오는 이 한 명 없었다. 지금 때면 한참 환자를 돌볼 시간이었는데……. 그는 새삼 의원의 약초 냄새가 그리웠다.
첫날은 그럭저럭 방에서 잠이나 자며 보냈지만 둘째 날이 되고 셋째 날이 되자 연은 무료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정말로, 예전의 자신은 뭘 하면서 보냈단 말인가?
하릴없이 이불에 놓인 자수의 수나 세던 연은, 문득 문을 열어 보았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인기척을 감지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밖에는 주강이 있을 터였다. 바깥문까지 열고 나가자 바람이 훅 불어닥치는데 마치 주먹에라도 맞은 듯 뺨이 다 얼얼했다.
‘모란일 때는 이런 추위는 별거 아니었는데.’
무공의 성취가 높지는 않아도 몸이라도 건강하다면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주강에게 다가갔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연을 바라보았다.
“주강.”
“예, 도련님.”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연은 잠시 눈을 굴렸다. 남궁연일 때 주강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게 손에 꼽았다. 사실 모란이 되고 나서야 주강의 이름이 주강이라는 걸 알 정도였으니까.
“백모란은…… 좀 어떻지?”
드물게도 주강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게 죽어라 두들겨 패 놓고는 안부를 묻는다니 어처구니없기도 하겠지. 그래도 연은 답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주강이 입을 열었다. 겨울바람만큼이나 찬 목소리였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 어떤지 잘 알지 못합니다.”
쌀쌀맞군……. 아무튼 죽지는 않았다는 건 알겠다. 물론 연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직 깨어나질 못했나? ……아니 그런데, 자신 정도면 주강에게 있어 꽤 친한 편이 아니었던가? 다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추워서 다시 방으로 돌아온 연은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놀고만 지내다가 알고 있던 지식을 모두 잊을까 염려가 되었다. 사부에게서 배운 것을 다시 쓰며 정리하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이 남궁세가를 나가자.’
가족들이며 친척들이 있어도 그는 더는 이 집안에 있기 싫었다. 연오를 제외한다면 다른 이들은 사실 혈육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부모에 대해 생각하던 연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 새로 인연을 만들고 싶었다.
‘의원을 하나 차리자. 사부님이 했던 것처럼 꾸려 나가면서, 인연이 닿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을 하여 자식도 가져야지. 정말 가족을 만들어야지.’
어차피 자신이 나가도 붙잡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근신 중이니 지금 당장은 안 될 터다. 연오는 사람은 좋아도 융통성은 없어 한번 정한 바는 결코 바꾸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집을 나간다면 추격대를 보내 잡아들이고도 남았다.
일단 나가자고 계획하니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뒤 울적했던 심기가 많이 좋아졌다. 연이 자신의 방을 뒤졌다. 가지고 있는 패물들을 박박 긁어모아 보니 앞으로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재산이 되었다. 무언가 돈 될 만한 게 더 없나 자개장을 뒤지던 연의 손이 멈칫했다.
“이건…….”
연의 시선이 진주가 알알이 박힌 고급스러운 비녀와 낡아서 색이 바랜 서신에 향했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이 또한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입술을 깨문 채 한참을 응시하다 비녀와 서신에는 손도 대지 않고 탁 서랍장을 닫았다. 속이 갑갑하여 잠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밖에서 도련님, 하고 시비가 불러 왔다.
“소가주께서 부르십니다.”
“형님께서 어쩐 일로?”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의복을 단정히 하고 방을 나서자 주강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연오가 지내는 곳은 세가에서도 안쪽 조용한 곳에 위치한 화월당(華月堂)이었다. 도착하니 화월당의 정원에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정원을 지났다. 문 앞에 서자 시비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형님, 부르셨습니까.”
“음, 그래.”
연이 오자 연오가 보고 있던 서적을 덮었다. 이 자리에는 연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가의 열두 장로인 남궁자영과 남궁인이 미리 자리하고 있었다. 장로님, 하고 인사하자 둘도 가볍게 받아 주었다. 연은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연오가 손짓을 하자 시비가 금세 음식을 날라 왔다.
“다들 앉으십시오. 너도 앉거라. 주강에게 들으니 식사를 자주 거른다고 하던데.”
“그리 자주 거르는 것은 아닙니다.”
연이 자리에 앉으며 변호하자 연오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보다 다섯 살 어린 아우가 항상 신경 쓰였다. 원체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계절이 변할 때마다 크게 앓아눕기에 염려되어 의원에게 여러 번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별다른 원인은 없다는 불만족스러운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하루에 겨우 두 끼 혹은 한 끼를 먹는다는데 그게 어떻게 자주 거르는 것이 아니냐. 지난번에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아서 내도록 마음에 걸리더구나.”
연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건강이 퍽 좋지 않긴 했다. 하지만 건강이야 원래도 그러지 않았나? 그래도 이 집안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건 연오뿐이니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제대로 식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딱히 만족하지 않은 얼굴로, 연오는 잠시 빈자리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그의 바로 옆자리였다. 눈치 빠른 시비가 주인이 원하는 답을 바로 내놓았다.
“한위 도련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는 하였으나 연오는 다른 동생의 부재에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연은 잠시 자신의 동생인 남궁한위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남궁한위는 연오가 이처럼 가족끼리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연오와는 달리 큰 연회가 있을 때나 한두 번 얼굴을 본 정도라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 하기야 언제는 친한 사람이 있었냐마는.
세가의 소가주와 함께하니만큼 식사는 고급스럽고 맛이 좋았다. 연오와 장로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연은 말없이 얌전히 식사만 했다. 전에는 이렇게나 말이 없는 편이 아니었기에 연오가 이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침내 그가 연아, 하고 불렀다.
“몸이 안 좋은데 내가 억지로 불러낸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아닙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사실이기도 했다. 이 집을 나간 후에 대해 상상해 보니, 그래도 연오만큼은 그립고 아쉽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연오가 주의 깊게 연의 얼굴을 살피다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생각만 많으니 몸이 그 모양인 게 아니겠느냐.”
익숙한 목소리에 연은 등골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연오와 장로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주를 향해 포권지례(抱拳之禮)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남궁영명에 동요한 사람은 연뿐인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증오했다.
연오가 한위가 앉을 예정이었던 빈자리로 물러나자 남궁영명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왔다. 연은 이상하게 남궁영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도록 머무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식사하는데 내가 방해를 했구나. 앉거라.”
고개를 든 연은 그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자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궁영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하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연오가 대답했다.
“근신 처분을 내렸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지, 아니야.”
영명의 손이 시비가 새로 내온 식기를 들어 올렸다. 무인 특유의 단단하고 굳은살이 많은 손이었다. 그가 소면을 잠시 뒤적이다가 도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랫것이 말을 듣지 않으면 상벌을 분명히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어쩐 일로 연이가 연오보다 잘할 때도 있구나.”
연이 조용히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정말 이자가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웠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기분 좋은 사람인 영명이 음식 대신 술잔을 기울여 마시고는 연오에게 손짓을 했다. 연오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연이의 근신은 이만하면 됐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연오의 대답을 끝으로 한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간간이 연오와 장로 사이에 말이 오가던 것과는 다르게 완전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다. 영명은 세가의 일에 대해 연오와 몇 가지 말을 나누었다. 대체로 영명이 일방적으로 무엇을 어찌하라 지시하는 것이었다.
연은 점차 불편해지는 속을 억누르느라 곤욕이었다.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식사가 끝날 무렵 영명이 연에게 칭찬이랍시고 말했다.
“네게도 내 피가 흐르기는 하는구나.”
칭찬이라니, 칭찬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욕이었다. 연이 이를 꽉 악물었다. 다행이라면 식사가 끝나기 전 영명이 먼저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연오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쩐지 연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사실 연은 어떻게 남궁영명의 아래에서 연오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오의 모친인 황보세희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럼 자신은, 제 어머니를 닮아서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연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주강은 잠시 남거라.”
연과 함께 막 나가려던 주강이 연오의 부름에 발걸음을 돌렸다. 화월당을 나가기 전 연은 잠시 말끄러미 주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오에게 다가가 작게 무언가 보고하는 중이었다. 주강은 연오가 붙여 준 호위무사다. 단순히 호위뿐만이 아니라 연오에게 꼬박꼬박 연의 동향을 알려 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물론 감시라기보다는 연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것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연의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는 연도 자신의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처음부터 제 몫은 아니었다. 십 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그런 인연들이었지.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궁연으로 돌아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관계인데도 정이 그리워서…….
남궁영명 때문에 얹혔는지 오늘따라 속이 유달리 메슥거렸다. 소화도 시킬 겸 좀 먼 길을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날이 매우 추워 온몸이 아렸다. 입김을 뱉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옮길 때였다.
“……?”
갑자기 제 앞의 그림자가 길어져 연이 멈칫했다. 이 그림자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은 늦었다. 돌연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이 뻗어 와 입을 틀어막았다.
연이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휘둘렀으나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이상한 느낌이 번지더니 온몸이 굳었다. 딱히 점혈을 당한 것도 아닌데 놀라울 정도로 몸이 둔해졌다.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축 늘어진 연을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 아래에서 땅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보법도 아니고, 경공도 아니야. 어떻게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가 있지?’
얼마 안 가 그들은 으슥한 곳에 다다랐다. 연은 갑자기 자신을 이리 납치하듯 데려가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 아니, 아니다. 시비나 하인들에게 좋은 주인은 아니었지만 원한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남궁세가 안에서 감히 이런 짓을? 게다가 시비나 하인들은 무공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면 돈을 노린 납치일까? 연오는 납치하기에는 무공이 고강하여 버거우니 차라리 연을 납치하자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돈 때문에 직계 자식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오명이 퍼지게 둘 수는 없으니, 영명은 마지못해 돈을 주긴 줄 것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연은 그 모든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자는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백모란!
연이 숨을 헐떡거렸다. 어떻게 백모란이 여기에?
그는 도무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 맨가슴이 드러나도록, 망나니처럼 겉옷만 대충 걸친 백모란이 삐딱하게 서서 무표정하게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러진 오른쪽 팔과 다리 한 짝에 부목을 대고 있었고 얼굴에는 맞아서 터지고 멍이 든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디로 보나 백모란이었다.
그래, 백모란이 깨어날 거라고 생각은 했다. 어떤 식으로 깨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상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상상들 중 백모란이 세가에 찾아와 납치하듯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간다는 건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어떻게 자신을, 세가의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도통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그가 아는 백모란의 몸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내공심법 하나 배워 매일 운기조식을 하던 수준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느새 마비는 풀려 있었다. 다음 순간 연은 비명을 질렀다. 백모란이 자신에게 발길질을 하기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자 극심한 고통이 터졌다. 부러졌거나, 못해도 최소한 금이 갔을 것이 분명했다. 연이 식은땀을 흘리며 꼼짝도 못하고 웅크리자 백모란이 걷어차듯이 그의 가슴을 발로 밟아 눕혔다. 빠득 이를 악물 정도로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연은 도무지 백모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백모란인 것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봐 온 얼굴은 익숙한데도 완전히 낯선 사람 같았다. 자신이 들어가 있을 때의 얼굴과 저자의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같은 얼굴인데 분명…….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풀어 헤친 망나니 같은 옷차림도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중이었다.
“네가 그 남궁연이냐?”
조롱하는 어투로 묻고는 백모란이 가슴을 짓밟은 발에 더 힘을 주었다. 호흡이 답답해진 연은 쿨럭 기침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모란은…….
아니, 남자는 더없이 야성적으로 보였다. 한편으로는 폭력에 거리낌이 없었다. 동시에 무감정하기도 했다. 연은 몸이 떨리는 게 추위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정신이 멍했다. 자신이 이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나? 그런가? 분명 팔이 부러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십 년간 연은 폭행에는 이골이 나 있었으니…….
“듣자 하니 내 몸을 이렇게 만들어 둔 게 너라면서?”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막 정답을 얻어 낸 느낌이었다. 이자는 정말 백모란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제는 절대 저 몸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 확신도 들었다.
이자가 백모란이구나.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몸의 원래 주인. 연은 저도 모르게 물어보고 말았다.
“백모란……?”
그리고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씩 웃었다.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 전에…… 변명 정도는 들어 주도록 할까.”
발끝이 부러진 팔을 툭툭 건드렸다. 다시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연은 그저 입만 다물고 버텼다. 없어? 다시 물어보면서 백모란이 뺨을 긁적였다. 연은 저 사내가 몹시도 낯설었다. 그제야 자신이 진짜 백모란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게 가까스로 떠올랐다. 근 십 년간 연이 알게 된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뭐어, 변명할 게 없단 말인가.”
“…….”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당하고는 못 살아서 말이야. 이 팔과 다리 부러진 거 네가 한 거지?”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팔은 부러졌으니 다리만 남았군. 우리 공평하게 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훅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은 등골이 오싹해 어깨를 움츠렸다. 무얼까?
인간인가, 이 사내는?
분명 어딜 보나 인간인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언제 웃었냐는 듯 백모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연은 한 번도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연이나 똑같이 보는 눈이었다. 무서워 떨면서도 연은 저항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이어질 폭력을 기다렸다. 백모란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간 고통을 받은 건 자신이라고는 해도 그는 백모란의 몸을 해치고 상하게 만들었다. 십 년 동안이나 자신은 셀 수 없이 백모란을 두들겨 패고 괴롭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굴 때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백모란은 자신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권리가 있었다. 그런 게 바로 중원에서 은원(恩怨)을 갚는 방식이었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백모란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백모란?”
자신의 이름을 되묻는 것처럼 중얼거리더니 백모란이 발을 치웠다. 허리를 숙인 그가 연의 멱살을 잡아 반쯤 일으켰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 조금 바르작거리는 연의 턱을 억세게 잡았다. 그러고는 연을 ‘들여다보았다’.
연이 헉, 숨을 쉬었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본 백모란의 눈동자는 검다기보다는 밝은 갈색에 가까워 보였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눈인데 그 안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동공에 금색의 공이, 아니 고리가 있었다. 그 고리가 느리게 흘러갔다…….
마치 강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리고 강은 흘러가 바다가 되고……. 이윽고 모란의 동공 안에서 거대한 것이 크게 일렁였다.
보고 있으려니 연의 정신이 멍해졌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이 상대에게 보여지는 것 같았다. 마음속? 아니, 마음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 연의 근원이.
“어쩐지 익숙한데. 예전에 본 적이 있어.”
익숙할 만도 하지. 멍한 와중에도 연이 생각했다. 네가 정말 백모란이라면, 모란이라면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 왜냐면 우리 어릴 적에…….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연이 퍼득 몸을 떨었다. 언제 정신이 흐릿했냐는 듯 도로 맑아졌다. 그가 숨을 헐떡였다. 마치 심해에 빠졌다 나온 것만 같았다. 방금 그게 대체 뭐였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연이 파르르 떨며 물었으나 백모란은 그대로 무시했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이제 떠올랐다. 너 그 꼬맹이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백모란이 눈썹을 찡그리며 연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까처럼 기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사람의 눈이었다. 너무 자라서 못 알아봤네. 중얼거리더니 백모란이 뒷덜미를 긁었다. 이제 그는 적대감은 어디로 갔는지 다소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연은 뚫어져라 그를 노려보다가 깨달았다.
백모란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어디…….”
입을 여는데 나오는 목소리가 떨려 연은 좀 자존심이 상했다.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에 있다가 왔어?”
그렇게 묻자 백모란은 물끄러미 연을 바라보다가 멱살을 잡은 걸 놓아 주었다.
그러더니 언제 폭력을 휘둘렀냐는 얼굴로 어린애 일으키듯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주기까지 했다. 연이 정색하며 밀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연의 기분이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이로 따지면 그는 백모란보다 두 살은 더 많았다. 스무 살과 열여덟 살이 아닌가. 그런데 도무지 백모란은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중얼거리더니 백모란이 돌연 덥석 연의 몸을 슥 쓰다듬듯이 만져 보았다.
손이 불쑥 소맷자락 안으로 기어 들어와 손목을 쥐자 기겁한 연이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십 년이면 이보다는 더 말라야 하는데.”
“……?”
“지나치게 건강하네. 아니면 다른 루트로 돌았나?”
“뭐?”
루트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난생처음 듣는 단어다. 아니, 루트인지 루드인지 따위는 알 바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건강하다는 말이 연의 귀에는 매우 거슬렸다. 지나치게 건강해? 그는 열 살 이후로는 한 번도 건강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연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더듬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 검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니, 물론 지금 네 몰골이 건강하다는 말은 아니고…….”
물론 이 말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백모란이 지껄이는 말 하나하나가 죄다 거슬렸다. 한껏 예민해진 연이 그를 쏘아보았다. 궁금한 게 있으니 일단은 참았다. 백모란을 향한 이유 없는 혐오나 증오는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닌 모양인지…….
“십 년 전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는 알지?”
“알지.”
그러고는 백모란이 턱을 긁적였다.
“그런데 굳이 설명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정말로 귀찮다는 어투였다. 하지만 딱히 약을 올리려는 건 아닌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다시 연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듯이. 그가 피곤했는지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확신이 없는데……. 지금은 말고, 다음에 만나면 설명해 주도록 하지.”
“그게 무슨…….”
돌연 백모란이 다가오기에 연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아직 이 몸에 적응을 못 해서 지금은 제대로 못 보거든.”
연은 그 제대로 본다는 게 아까 이상한 눈을 하던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뭐. 팔 부러트린 건 미안하게 되었어. 실은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여차하면 죽일까도 생각했거든. 나도 나름 봐준 것이니 너도 그걸로 나름 봐주렴.”
아무렇지 않게 사과하고는 백모란이 웃었다. 연은 조금 질렸다.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
연은 백모란의 몸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는 내내 원래 몸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왔다.
소심한 성격일까? 아니면 그의 사부 같은 사람일까? 다혈질일지도 몰라. 연은 심지어는 몸의 주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까지 했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사람들은 절대 믿을 리 없는 각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연이 코웃음을 쳤다. 친구? 저런 막 나가는 자와, 친구? 전에 정신 나간 것처럼 백모란을 두들겨 패거나 이유 없는 적개심에 휘둘려 괴롭히고 나서도 연은 저렇게 태연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색은 안 해도 방에 돌아와서는 제게 인격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심란해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모란은 마치……. 사람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죽이는 것을, 벌레를 해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 이해할 수 없던 두려움을 맛보았던 연은 꾹 입을 다물었다.
십 년 전 그 순간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이유가 몹시 궁금했으나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연이 마른 입술을 핥아 축였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지?”
“그래.”
연은 잠시 땅바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리를 부러트린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태세를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고, 연도 고통을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됐어.”
그렇다면 더는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전처럼 백모란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백모란에게 굳이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연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남자와는 관여되어서 좋을 게 없다. 인생이 아주 피곤해질 것이다. 친구? 짧게 나눈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와는 절대 친구 같은 건 될 수가 없다. 그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
연은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지금 보니 그가 있는 곳은 남궁세가 외곽의 인적 드문 대나무 숲이었다. 남궁영명과 함께 식사를 한 것도 그렇고 부쩍 피곤하였기에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아까 내던져지면서 발목을 접질렸는지 연이 발을 조금 절었다. 팔 역시 아프다 못해 식은땀이 줄줄 날 정도였다. 화정당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기에 걸어갈 생각을 하니 다소 막막했다. 뜻밖에도 모란이 말을 걸어왔다.
“데려다줄까?”
내심 움찔하기는 했어도 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속이 메슥거리네. 며칠 동안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지내야겠다.
“데려다준다니까?”
됐으니까 알아서 갈 길 가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뒤를 돌아보니 백모란이 그 자리에 없었다. 억세게 잡아챘던 처음과는 다르게 다소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틀어쥐더니 몸이 붕 허공으로 떴다.
“……!”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모란은 힘도 들이지 않고 아이 들 듯이 달랑 연을 들어 올려 옆구리에 꼈다.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까야 정신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말이 다르지 않나!
“이거 놔!”
심지어 모란과 연은 키가 비슷하여 발이 땅에 질질 끌렸다.
“거 가만히 좀 있어. 가다가 쓰러지지나 말고. 내가 이리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데.”
쓰러지다 못해 다 죽어 가는 경우라도 이런 호의는 필요 없었다. 연은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허리를 죄고 있는 팔 힘이 너무 억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검술로는 남궁가에서 무시당하는 신세라고는 해도 연도 엄연한 무인이었다. 제 몸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백모란의 힘이 세진 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백모란이 힘이 이렇게 셀 리가 없다는 건 연이 제일 잘 알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가 자꾸 버둥거리고 팔꿈치를 휘두르자 옆구리를 쥐어박힌 모란의 눈가에 씰룩 성질이 솟았다.
“얌전히 있어야…… 착한 아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은 어땠냐면, 골치 아프게 이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딱 그런 눈빛이었다. 게다가 모란의 인내심은 짧기까지 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연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손의 그림자가 눈가를 덮자마자 의식이 흐려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연은 자신의 방에 고이 눕혀진 상태였다. 벌떡 일어나다가 신음하면서 아픈 팔을 감싸 쥐었다. 누가 조치했는지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부러진 팔만 아니었다면 연은 백모란을 만난 게 꿈을 꾼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연은 자신의 몸부터 살펴보았다. 점혈을 당하거나 하면 사람의 몸에는 항상 흔적이 남는다. 그러나 몸 어디에도 점혈을 당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심지어 연을 기절시킬 때 모란은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술이었다.
굳이 손도 안 대고 사람을 기절시키거나 점혈할 수 있는 방법은 탄지신통(彈指神通)*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모란이 탄지신통과 같은 고수의 수법을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연의 미간에 골이 잡혔다.
일단은 그가 자신의 팔을 살폈다. 단순 골절로, 굳이 뼈를 맞출 필요까지는 없었다. 복합 골절이면 골치 아플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부목을 대 놓은 솜씨는 의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연이 혀를 찼다. 가능한 한 들키지 않고 돌아와서 알아서 치료하려고 했는데 성가시게 됐다. 다시 감으려고 습관대로 붕대를 푸는데 밖이 수런거렸다. 세가의 의원이 당도한 모양이었다.
의원을 맞이하려고 몸을 돌린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붕대가 다 풀려 있는 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연은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켜 냈다. 의원이 인사를 했다.
“진은록입니다.”
연은 아까 백모란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진은록이 여기 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환자들은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치료하는 진은록이지만 그 치료에는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수준이 아니라면 환자는 반드시 의원에 직접 찾아와야 할 것.
그도 그럴 것이 진은록의 의원은 매일 문전성시였다. 매일 아침 문을 열기도 전부터 환자들이 문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러면 은록이 치료 준비를 하는 동안 연은 밖에 나가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중한 순부터 제일 먼저 온 순으로 골라낸 뒤 다른 사람들은 돌려보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수가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진은록은 의원 밖으로는 걸음하지 않았다.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시간에 환자를 열은 더 진찰하고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런 진은록이 직접 찾아왔다? 그것도 고작 팔이 부러진 정도로?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청하지는 않았겠지만 주강이 알리기는 했겠지. 주강과 은록은 제법 친분이 있었으니까. 그 모든 걸 고려해 보면 공식적인 요청이 없는데도 은록이 굳이 의원을 잠시 닫고 찾아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분명 백모란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제자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으니 이리 찾아오신 게 아닌가. 모란에게 유일하게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니.
백모란을 떠올리고는 연이 반사적으로 이를 갈았다. 예전과는 달리 이유 있는 짜증이었다. 분명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했는데도 기절까지 시켜 가면서 사람을 짐짝처럼 날라? 완전히 제멋대로인 인간이었다. 연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팔이 부러졌군요.”
연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은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가 사부님의 제자라며 말하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일 크게 키우지 말고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상충했다.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나. 남궁연으로 돌아가면, 전의 인연에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은록은 그저 환자를 치료하러 나왔다는 태도로 치료 도구를 펼쳤다. 연이 잠시 그리운 눈으로 침구며 뜸, 금창약과 각종 연고를 바라보았다. 어서 세가를 나가야 다시 의술을 펼칠 수 있을 텐데…….
은록은 부러진 팔을 상세히 살폈다. 그도 연처럼 단순 골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가 팔꿈치 위 혈도에 침을 꽂자 놀랍도록 고통이 싹 가셨다. 여전히 깔끔한 솜씨에 연이 내심 감탄했다. 은록은 뼈와 근육이 상한 정도를 살피고는 연고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으면서 그가 물었다.
“어떻게 했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에 연은 시치미를 뗐다.
“무얼 말입니까?”
“백모란 말입니다.”
“제가 백모란을 두들겨 팬 일 말입니까?”
일부러 거슬리게 말했는데도 은록은 화도 내지 않고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지지 않고 바라보자 은록이 붕대 끝에 마무리 매듭을 지면서 다른 걸 물었다.
“팔은 왜 부러졌습니까?”
팔이 왜 부러졌냐면…… 원래대로 돌아온 백모란이 찾아와서는 똑같이 갚아 주겠다고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지…….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겠지. 연은 대충 둘러댔다.
“갑자기 주위가 어지럽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깨어나니 팔이 부러져 있더군요.”
거기에 그럴듯한 이유도 떠올라서 연이 덧붙였다.
“원한 살 짓을 많이 했으니까요. 정신을 잃은 사이 팔이 부러져도 이상할 건 없지 않습니까?”
평소 자신의 평판을 생각해 보면 제법 그럴싸한 데다가 설득력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진은록의 표정이 영 묘했다. 평소 연의 사부는 남궁연이란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치로 보았을 때 매우 싫어하는 게 분명했는데 왜 저런 얼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은록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신을 잃었을 때 증상이 정확히 어떠했습니까?”
아, 이상하게 여긴 게 아니라 쓰러진 이유를 알고 싶으셨던 거군. 연이 납득했다. 언제나 진은록에게 일 순위는 환자, 또 환자였다. 비록 그 환자가 자신의 제자를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두들겨 팬 놈일지라도…….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연은 은록에게 진짜 몸으로는 진찰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세가의 의원이나 자신이나 제대로 된 원인은 찾지 못했으나 사부라면 다르지 않을까 연이 은근히 기대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많이 어지러웠습니다. 가슴도 시리고 답답했고요.”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입니까?”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딱히 세지는 않았지만 두세 달에 한 번씩,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꼭 그랬었다. 특히 겨울이나 아니면 더운 여름에. 무공의 성취가 높으면 추위나 더위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데 연에게는 그런 성취는 영영 올 것 같지 않았다.
“맥을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맥은……. 그러나 미처 거부하기도 전에 은록이 팔꿈치의 침을 빼내며 연의 팔목을 잡았다. 진맥을 하던 은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속으로 쯧 혀를 차던 연이 눈을 깜박였다. 어지간하면 저런 표정은 보기가 힘든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연이 잡히지 않은 손을 꾹 쥐었다. 내 몸이 많이 안 좋나? 아니면 사부님도 원인을 모르시는 건가? 그는 한참을 맥을 짚어 본 뒤에야 손을 떼어 냈다.
“제 제자와 같은 내공심법을 배웠군요.”
이럴 줄 알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당신은 세가 의원이 아니니 진찰받지 않겠다고 뿌리쳐야 했는데, 정과 미련이 무어라고. 어찌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연이 일단 부정하고 보았다.
“어떻게 백모란이 남궁가의 직계에게만 허용되는 내공심법을 배운단 말입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
“세가의 무사들에게서 변변찮은 것이나 배웠겠지요.”
겉으로는 정색하면서도 연이 내심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금만큼은 은록이 진맥하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심경의 동요를 들켰을 테니까. 연의 부정에도 은록은 별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연은 오히려 그게 불안했다.
“근래 한기를 많이 느낍니까?”
“추위를 좀…… 타기는 합니다.”
다시 진찰로 돌아온 은록은 연의 손을 잡아 보았다. 손발이 차군, 그가 중얼거렸다. 열 살 때 크게 앓은 후로 연의 몸은 내도록 이랬다.
더위나 추위를 많이 탔다. 체온이 쉽게 올랐다가 쉽게 떨어지곤 했고, 겨울이면 손발이 찬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은록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히는 걸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부도 정확한 원인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일단 몸을 보신하는 탕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일단? 일단이라니?
은록은 펼쳐 두었던 침구와 각종 도구들을 둘둘 말아 정리했다. 그리고 전혀 사적인 이유 없이 찾아온 의원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처방을 내렸다.
“아침 식사를 한 후,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 탕약을 복용하도록 하십시오. 발목은 며칠 동안 무리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곧 나을 겁니다.”
은록은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은 부상까지 알아차렸다. 그만큼 그의 의술은 뛰어났다.
“하루 이틀 치료로 개선될 만한 몸 상태가 아닙니다. 시간이 나시거든 제 의원에 들러 진찰을 받도록 하십시오. 만약 탕약을 먹고도 또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면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의미니, 짧게 살다 가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들러야 합니다.”
짧게 살다 가고 싶지 않다면이라……. 독설에 가까운 진찰 결과였다.
전부터도 자신이 오래 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부에게 직접 확인받는 건 또 기분이 묘했다. 연이 아무 말도 없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은록이 다시 못을 박았다.
“허투루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탕약이 떨어지면 다시 의원에 들러 받아 가십시오. 진찰은 받지 않겠다면 사람을 보내 탕약만 받아 가도 될 것입니다.”
“……탕약이 떨어지면 들르겠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은 덜컥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은록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나가기 전 다시 물었다.
“태어나서부터 그랬습니까?”
“아니오, 어렸을 때 크게 앓고 난 후부터 이렇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록이 조용히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제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치료해 주는 마음가짐이 대단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에게 제자가 그리 큰 의미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전자의 경우가 맞겠지만.
은록이 떠나고 난 뒤 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도 의원이기는 하였으나 의학에 있어서는 아직 사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가 제 몸 상태를 살폈다.
‘이상한데…….’
전에도 이랬던가? 원래도 좋지 않던 몸이지만, 연은 백모란의 몸에 들어갔다 돌아온 후부터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어딘가가 문제라서 기의 흐름이 불규칙하고 날뛰는 듯하는데 몇 번이고 살펴보아도 혈도나 기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연이 이런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그도 나름대로 장래가 유망하였다. 벌모세수(伐毛洗髓)*도 했고 연오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영약도 먹으며 꾸준히 몸을 가꿨다. 그 모든 유망함과 재능이 열 살 이후로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약하고 느린 맥을 짚어 보다가 연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는 건강하다가도 갑자기 병을 얻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 안에 속한다고 하여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이제는 욕심이 생겼다. 백모란이 되기 전에는 그저 건강하지 못한 제 몸과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뿐,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세가를 나가고 싶었고, 가족이나 지인을 만들고 싶었다. 더 많은 환자들을 완치하고 싶기도 했다.
‘딱히 사부님을 뵙고 싶어서만 찾아가려는 건 아니야. 제대로 의원 일을 하고 싶어.’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문을 제대로 닫으며 연이 벽에 기댔다.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어 피곤했다. 특히나, 백모란 그자…….
그런 무례한 자와 다시는 관여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원래 그자의 몸이라고 해도, 나름 그 몸으로 꾸렸던 인생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연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