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서장(序章) (1/19)

서장(序章)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백모란’은 눈을 떴다. 전날 밤이 늦도록 불안함에 떨었던 게 무색하게도 마음은 지극히 평온했다.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문을 열어 보니 하늘이 흐려 해가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바람이 차갑다 못해 칼날같이 매서웠다. 그의 기억대로였다.

운명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모란은 옷을 갈아입고 얼음장 같은 물에 깨끗이 세안을 했다.

용모를 단정히 한 후에는 자박자박 조용히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자그마치 십 년을 산 곳이었다. 그는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란,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막 일어났는지 옆집의 문밖으로 종종거리며 걸어 나오던 아이가 종알거렸다. 금년 여섯 살 난 여아로 그다지 붙임성 없는 모란에게도 친근하게 굴곤 했다.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보고는 후다닥 뛰어 제 집으로 도망쳤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머리만 내밀어 수줍게 미소 지었다. 모란도 옅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의원(醫院)에 가는 중 이웃 몇을 더 만났다. 어릴 적 모친을 일찍 여의고 혼자 자란 모란인지라 다들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호의도 오늘로 끝이겠지.’

쓴 미소가 지어졌다. 의원에 도착한 모란이 들어가기 전 잠시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사부님.”

정좌(正坐)하고 약초를 다듬고 있던 진은록이 고개를 돌렸다. 모란이 새삼 이 작고 낡은 의당을 둘러보았다. 십 년 동안 지내 집보다도 더 집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익숙하다 못해 몸에 밴 약초들의 냄새…….

“모란아.”

이름을 부르고는 바라보는 진은록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는 과묵하지만 언제나 환자들의 증상을 관찰하는 일이 직업인지라 사소한 것 하나 놓치는 법이 없는 의원(醫員)이었다. 동시에 모란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한참 그를 바라보던 모란은 진은록이 다듬던 약초를 내려 두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오늘 날이 상당히 춥습니다.”

“……환자가 많겠구나.”

모란이 말을 돌리자 진은록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얼핏 겉으로는 냉정해 보여도 속으로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챘음에도 추궁하지 않는 건 모란을 배려하기 때문일 터였다.

옆에 앉아 약초를 같이 다듬으며 모란은 진은록의 모습을 살폈다. 수수하지만 깨끗한 백삼, 정갈한 차림새, 고아한 태도와 존경받아 마땅한 인격. 그의 인생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존재였다.

‘사부님께 나는 훌륭한 제자였습니까?’

차마 입 밖으로는 낼 수 없어 속으로 묻고는 완전히 다듬은 약초를 정리했다. 목각함까지 차곡차곡 정리하고 난 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저는 잠시 남궁가(南宮家)에 다녀오겠습니다.”

“또 너를 부르더냐?”

드물게도 진은록이 혀를 찼다. 그가 혀를 차는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모란은 그저 그렇다고 대답할 따름이었다. 이 모든 게 자업자득임을 알면서도 입 안이 썼다. 다시 사부님을 사부라고 부를 수 있는 때가 올까?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으니 지금 흘러가는 모든 시간이 소중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원을 나서기 전, 모란은 가능한 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절을 올려도 몇 번을 올렸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문을 나서고도 그는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날 남궁세가(南宮世家)는 무림 구파일방 오대세가 중에서도 감히 천하제일이라고 칭해도 될 만한 가문이었다. 직계에서부터 방계까지 재능이 출중한 자들이 넘쳤고 가문에 소속된 장원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뿐이랴, 여러 표국과의 계약으로 매달 막대한 상납금도 받고 있었다. 가문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전성기였다.

때문에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시비(侍婢)나 하인, 변변찮은 방문객들은 종종 남궁세가의 위용에 압박되곤 했다. 그러나 모란은 달랐다. 이 거대한 가문은 그에게 있어 다른 의미의 집이었다.

조금의 긴장감도 없이 무심하게 대문을 통과한 모란은 귀하고 비싼 청기와가 깔린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어릴 적부터 밥 먹듯이 드나든 곳이라 모란을 제지하거나 신분 검사를 하는 무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성영문(成永門)을 지나 화정당(花亭堂)에 이르렀다. 여덟 살부터 열여덟 살인 지금까지 모신 도련님인, 남궁연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화정당에 들어서려 하자 문지기 무사인 원형이 슥 가로막고 섰다. 하도 자주 왔다 갔다 하여 서로 얼굴이 익숙했다. 원형이 근엄하게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 시중을 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원형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잠깐 굳게 닫힌 문 너머를 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지냈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오는 곳이지만 이렇게 보니 모란은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아직 기상하지 않으셨을 텐데.”

“도련님 성격 아시잖습니까. 일어나셨을 때 바로 보이지 않으면 또 저만 경을 칠 겁니다.”

혀를 찬 원형이 가타부타 말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모란이 여덟 살일 때부터 남궁연이 쥐 잡듯이 잡아 대는 걸 본 사람이었다. 남궁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엉망인 몰골로 나오는 모란에게 간식거리를 쥐여 줄 정도로 정이 많은 남자이기도 했다.

화정당에 들어선 모란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명(威名)이 쟁쟁한 남궁세가임에도 볼품없는 정원이다. 아무리 겨울이라 하여도 동백꽃이나 매화나무 몇 그루쯤은 있을 법했으나 꽃 한 송이 보이지 않았다. 겨울뿐만이 아니다. 여름에도 이 정원에는 꽃이 피는 일이 없었다. 화정당(花亭堂)이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앞뜰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간 모란이 가만히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지만 이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이각(二刻, 삼십 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마침내 문이 열리며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터운 망토를 걸치고 나온 청년, 남궁연은 안색이 희다 못해 창백했다. 소매 밑으로 언뜻 드러나는 손목은 무인임에도 마른 태가 났으며 찌푸린 미간에서는 예민한 성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곧잘 바위니 나무니 하는 단단한 것들에 비교되는 무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시들어 죽어 버리는 난(蘭)과 같았다. 혹은 모친을 닮아 수려하고 섬세한 외모가 수국이나…… 국화 같기도 하였다.

모란은 잠시 자신의 강건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치고도 강건함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이 육체와는 아주 달랐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모란을 발견하자마자 남궁연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모란은 대꾸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자그마치 십 년이었다. 길고도 길었으나, 짧다면 짧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영영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백모란이, 남궁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바로 이날을.

백모란은, 아니…… ‘남궁연’은 행복하고 보람찬 삶을 제 발로 걷어차고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찾아왔다. ‘연’은 이렇게 십 년 만에, 단 한 번도 행복한 적 없던 제 인생을 되찾으러 돌아왔다.

“남궁연.”

연은 자그마치 십 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불렀다. 고작 하인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남궁연은 잠시간 말문이 막혔다. 고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싸늘한 얼굴에는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는 살기가 어렸다. 눈빛이 밑도 끝도 없는 혐오와 경멸로 번득였다. 연이 얌전히 남궁연의 시중을 들 때에도 이따금 보던 시선이었다.

“남궁연.”

연이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웃었다. 다음 단어를 입에 내는 것은 더 쉬웠다.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 병신아.”

다음 순간으로 찾아온 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눈앞이 잠시 까마득 멀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 그는 형편없이 땅 위를 구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 수준이 낮고 몸 상태가 안 좋다 해도 남궁연은 무인이었고, 남궁세가의 차남이었다. 그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인 백모란의 몸으로 덤빌 상대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봐.”

퍼억! 잔인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얼마나 세게 걷어차였는지 몸이 잠시간 붕 뜰 정도의 타격이었다. 혈이 뒤틀리고 내상이 가해지는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차인 곳을 다시 차일 적에는 상대가 정말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잘 느낄 수 있었다.

연은 이해했다. 그가 그랬고, 연 자신이 그랬으니까. 백모란을 죽이고 싶어 하는 저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가운데, 마침내 이 소란을 알아차렸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이고 밟혀 얼음장 같은 차가운 바닥을 구르면서 연이 쿨럭쿨럭 기침했다. 경악한 원형이 달려와 남궁연을 말렸다.

“도련님, 모란은 무공을 배우지 않은 녀석입니다! 이러다가 죽이시겠습니다.”

“이거 놔!”

연은 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증오가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한 남궁연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화정당 문밖으로는 제법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은 ‘백모란’이 피 칠갑을 한 모습에 하나같이 기겁하고 있었다.

“아까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다시 잔인한 발길질에 채인 연은 하늘을 보며 드러누웠다. 숨도 쉬기 어려운 게, 아무래도 방금 채이며 몸 어딘가가 부러진 게 분명했다.

몸속이 뒤틀리고 꼬이는 극심한 통증에도 연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나 이렇게 하고 싶었다. 십 년 동안 이 몸에서 지내면서도 이 대화는 조금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비웃는 게 분명한 표정에 원형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남궁연은 분노에 얼굴이 희게 질렸다. 연은 그 분노에 쐐기를 박았다. 피에 물든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병…신 새끼…….”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입 모양은 분명했다. 말리느라 애를 쓰고 있는 원형이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구경꾼들은 못 보고, 오로지 남궁연만이 볼 수 있는 모욕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던 남궁연이 이를 갈며 발을 크게 들어 올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연의 정신은 그만 까마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주강이 남궁연을 제지하고 있었다.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익은 남궁연도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걸 시야에 담으며 연은 눈을 감았다.

이제야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갈 때였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