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생각보다 그리 끔찍하지 않았다. 오윤도와 사는 일은 그냥 견딜 만했다. 찬은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이 높은 이층집. 호텔에 살다가 언제부터 이런 곳에 살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묻지도 않았다. 하은이에게 아주 익숙한 것으로 보아 막연히 아이 때문에 구한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다.
넓은 마당이 딸린 집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찬을 생각해 준 건지, 윤도와 하은은 1층을, 그는 2층을 썼다.
그리고 오윤도는 단 한 번도 2층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딱 서른 개인 계단을 오르는 건 하은이 뿐이었다.
‘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그냥 그의 뜻을 알아차렸던 걸까. 찬은 소파에 앉은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윤도의 이런 배려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결국 이 지경까지 몰아간 것은 그가 아닌가. 선 밖을 아슬아슬하게 서성거리는 꼴이 거슬렸다. 그리고 안심하기도 했다.
빈약하기 그지없고, 언제든지 한 번에 무너져 버릴 선이겠지만. 윤도는 제 손으로 부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찬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이곳까지 온 것은 좋았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평행선이었다.
굳이 말을 섞지 않는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달라진 것이라곤 마치 ‘우연’인 것처럼 잠시 마주치는 것뿐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른 개의 계단은 어째서 내려갈 때마다 이렇게 힘든 걸까. 찬은 느리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엄마!”
하은이 계단 아래쪽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찬은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오윤도는 언제나 인형이라도 들 듯 번쩍 들던데, 그에게는 상당히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티브이 봐요. 티브이.”
하은이 찬에게 안긴 채 다리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그냥 묵묵히 아이의 뜻에 따라 티브이 앞 소파에 앉았다. 이미 주훈이 틀어 주고 간 듯 아이들 대상의 프로그램이 한창 나오는 중이었다.
“혼자 있었어?”
찬은 작게 물었다. 하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가 있는데?”
“…….”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찬은 하은이 그를 믿고 의지하려 들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내가 부모가 될 수는 있나.’
자격이 있고 없고를 따진다면 찬은 분명 미달이리라. 안타깝게도 그것을 모르는 건 유일하게 하은이 뿐이었다.
아이가 넋이라도 나간 듯 티브이를 보더니 슬금슬금 앞으로 기어 나갔다. 찬은 하은의 옷자락을 단단히 붙잡고 뒤로 쭉 당겼다. 윤도가 아이에게 몇 번이고 잔소리하던 게 생각났다.
찬은 하나로 꼭 묶인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 손짓에 하은이 뒤를 돌아보더니 이번엔 뒤로 물러나 그의 무릎 위에 폭 앉았다.
“재밌어?”
찬의 덤덤한 물음에 아이의 머리가 아래위로 몇 번이나 끄덕였다. 티브이 속에서는 제법 교훈적인 내용이 나오는 중이었다. 찬은 집안을 살피다 문득 화면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도의 호텔에 있을 때 하루 종일 질리도록 봤는데. 몇 년간 안 봤더니 제법 새로웠다. 비록 그게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어느새 하은이를 따라 멍하니 화면을 보던 찬은 갑작스러운 문소리에 흠칫 놀랐다.
“아빠!”
하은이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달려갔다. 고개를 돌리니 아이를 안아 들고 있는 윤도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언제나 이랬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마다, 찬은 이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다녀왔어.”
한참이나 늦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딸에게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찬에게 하는 소리인지는 애매했다. 오윤도가 선을 툭 건드리는 행동을 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찬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가 싫었다. 좋아할 수 없었다. 우스운 얘기였다. 결국 끝까지 증오하지도, 모든 것을 용서하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마음뿐이다. 찬은 하은이 다시 무릎으로 올라오는 걸 막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소시지 해 준대요.”
“좋겠다.”
무심한 대답이 나왔다. 하은은 그의 무뚝뚝한 말에도 그저 좋은지 가슴 위에 등을 기댔다. 따끈한 체온이 조금 기분 좋았다.
찬은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오윤도가 나타나고 나니 다시 티브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시 올라갈까, 아니면 그냥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오윤도가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다. 반듯한 정장 대신 면바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와이셔츠 대신 가벼운 셔츠.
그 모습은 언제나 신기하고 새로웠다. 순간 찬과 윤도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윤도였다.
그는 익숙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찬은 문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쳐다봤다. 제일 의외인 점이 이거였다.
‘요리 같은 건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아이 때문에 하게 된 걸까. 호텔 생활도 청산한 걸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아주 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가 맛을 신경 써서 그런지 꽤 먹을 만하긴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찬은 손을 씻자며 잡아끄는 하은을 따라 일어섰다.
* * *
소시지를 해 달라기에 해 줬더니, 몽땅 찬의 입에 넣고 있는 하은을 보곤 윤도는 속으로 웃었다.
그의 앞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딘가 죄책감이 들었다. 찬이 생각하는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것만은 알았으니까.
유찬, 그의 인생에는 뭐가 있었을까.
윤도는 ‘아무것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내밀었던 손을 잡았으리라. 그것을 이용해 먹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유찬에게 이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까웠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지옥인데, 윤도만 즐거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나마 하은이가 웃어 주고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여전히 아이를 어색하게 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워하진 않았다.
가끔은 하은이를 데리고 자는 날도 있었다. 윤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하은, 야채도 먹어야지.”
그의 말에 포크로 소시지를 푹 찍던 손짓이 멈췄다. 아이 나름대로 복잡한 얼굴로 남은 야채를 쳐다보다, 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소시지는 하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쿡쿡쿡 연달아 야채를 모조리 찍어 모으더니, 그것을 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찬에게 주려나.’
윤도는 곁눈질로 두 사람을 보면서 조용히 수저를 움직였다.
“이리 줘.”
찬이 작은 목소리로 손짓했다. 순식간에 하은의 얼굴이 활짝 피더니, 시무룩하게 어깨가 처졌다. 제 엄마의 밥그릇과 야채를 7개나 찍어 둔 포크를 번갈아 쳐다보던 눈이 꼭 감겼다.
그리곤 단숨에 야채를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다. 윤도는 순간 아이가 토하지 않을까 잠시 걱정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하은은 울먹이면서 양파와 피망, 당근을 모조리 꿀꺽 삼켰다.
“착하네.”
칭찬이지만 조금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찬이 제 앞에 남아 있는 소시지를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 줬다. 그 말 외에는 따로 대화 따윈 없이 식사가 끝났다.
그 자리가 부담스러웠다는 듯 찬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윤도는 딸에게 주스를 따라 주다가 불쑥 물었다.
“소시지 해 달라더니, 왜 안 먹었어?”
정확히 하은이가 먹은 건 두 개뿐이다. 환장하게 좋아하는 음식인데, 어째서였는지 조금 궁금했다. 그의 물음에 아이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좋아하는 거라서요.”
“…….”
“그래서 엄마 줬어. 야채는 싫어하니까 하은이가 먹었어.”
윤도는 말없이 보드라운 뺨을 토닥였다.
“안 돼요?”
“아니, 잘했어.”
높이 올려 뒀던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어 줬다. 작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더니 배시시 웃었다.
“다음에도 소시지 해 줘요.”
“그래.”
윤도는 묵묵히 대답하곤 자그마한 등을 다독였다. 익숙하게 어깨에 기대는 그 느낌이 좋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동족의 냄새. 그의 피를 이은 자식의 사랑스러움. 그 모든 것들이 윤도에게는 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뒷정리를 잠시 미루고 아이를 안은 채 널찍한 거실을 걷고 있으니 고요함이 한층 더 크게 다가왔다. 2층은 언제나 조용했다. 무엇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윤도가 높다란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은이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아빠는 왜 엄마 방에 안 가요?”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안 좋아한다.’는 말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윤도와 찬 사이의 모든 것을 담을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하은이도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사탕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더니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후…….”
윤도는 계단을 힐긋 쳐다봤다.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지긴 했다. 처음에는 며칠이고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여 하은이에게 식사를 갖다 주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내려오나.’
굳이 세어 보진 않았지만, 제 나름대로 적응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윤도는 적어도 이대로만 계속 지낼 수 있어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더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진 않는다. 하은이에게 아주 다정하진 못해도, 매몰차게 대하지 않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간혹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은 집에 살면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괜찮다.
윤도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거칠게 머리카락을 넘겼다.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와도 같은 변명에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내가 만든 걸 알고도 먹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끔찍하진 않은가 보지.’
윤도는 식탁 위를 치웠다. 하은이 때문에 간단한 요리 정도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건 찬 때문이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일하는 사람이 만들어 두고 간 것으로 적당히 먹었을 텐데.
하은이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엄마가 뭐가 먹고 싶대.’라고 했다. 당연히 냉장고 속엔 그 음식이 없었다. 사 올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윤도가 만들었다. 그리 썩 나쁘진 않았다. 평소라면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 깨작거리다 말았을 찬은 밥공기를 절반 가까이 비웠다.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냥 앞으로도 식탁에 같이 앉는 거면 된다. 식구라는 말도 같이 먹는다는 뜻이 아닌가. 남들이 말하는 ‘가족’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식구만 되어도 좋다.
윤도가 식탁의 의자를 넣었을 때, 느린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
짧은 소리와 함께 찬이 멈춰 섰다. 둘 모두 서로가 없는 듯 행동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를 마저 넣고, 찬은 물을 한 잔 마셨다.
윤도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등에 이른 인사를 건넸다.
“잘 자.”
빠르게 나가려던 발이 순간 멈췄다.
“응.”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찬은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를 가만히 듣던 윤도는 뒤늦게 픽 웃었다.
* * *
“아빠, 소시지 더 넣어 줘요.”
“안 돼.”
“히잉.”
하은이 우는 소리를 내면서 그의 다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모습에 윤도는 슬쩍 피망 두 개를 빼고 소시지를 하나 더 넣어 줬다.
처음으로 유치원에서 가는 소풍이 그리도 좋은지, 답지 않게도 새벽같이 일어난 하은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이 층까지 올라가 찬을 데려온 딸은 아주 신나서 거의 네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윤도는 작은 가방에 도시락과 과자, 주스를 넣어 주곤 하은의 등에 메 주었다.
“소풍!”
“오하은. 아무거나 입에 넣으면 안 돼. 특히 작은 동물 친구들….”
“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네!”
“무슨 일 있으면 아빠한테 연락하고.”
아이가 얼른 가고 싶은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던 찬이 반짝이는 아이의 눈을 무시하진 못하겠는지, 손수건을 하나 가져와 허전한 목에 꼭 매 줬다.
“감기 걸리지 마.”
하은이 거울 앞으로 종종 걸어가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제법 마음에 든 듯 뿌듯하게 웃은 아이가 윤도를 잡아끌었다.
“아빠 늦겠어요.”
현관에서 신발을 신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윤도는 잠시 동작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빠……?”
“응?”
“아파요?”
“아니, 괜찮아.”
등 뒤에 찬의 시선이 조금 느껴졌다. 윤도는 조금 급하게 아이를 배웅했다. 하은을 얼른 버스 안으로 밀어 넣은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윤도가 급하게 차 키만 쥐었다. 정말 운전해서 갈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우선은 얼른 집을 떠나야 했다.
다시 현관까지 온 순간, 윤도의 귀에 이명이 들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지금 땅을 디디고 있는 건지, 아니면 쓰러진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쿵 하는 소리에 온몸이 울리자 그제야 바닥에 쓰러졌다는 걸 알았다.
“윽…….”
온몸이 조각조각 나는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미리 말을 듣긴 했으나, 직접 겪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턱이 아프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도 픽 웃음이 나왔다.
이 꼴을 보면 찬은 조금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하곤 주먹을 꽉 쥐었다.
‘이따위 것을 약이라고.’
수인들에게 발정기는 비정기적으로 온다. 간혹 영영 안 오는 경우도 있고, 정말 틈만 나면 발정기를 겪는 이들도 있었다.
윤도는 그리 드물지 않게 발정기가 오는 편이었다. 그럴 때 적당히 상대를 잡아도 되겠지만, 그는 찬 이외의 그 누구에게서도 새끼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억제제를 먹었다. 영영 만나지 않을 거라 해도, 윤도의 암컷은 그뿐이었으니까.
매번 겪는 부작용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암컷이 한집에 살아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오래 복용한 탓일까. 윤도는 애써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워 보려 하다가 또 온몸을 내리치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흐려졌다가.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윤도는 가까스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우직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진 화면을 보면서 겨우 주훈에게 전화를 건 그는 답지 않게도 ‘제발’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윤도? 무슨 일이야?]
“나 좀, 호텔로.”
[뭐? 윤도야 그게 무슨…….]
주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윤도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자, 부서진 액정 조각이 손바닥에 박혔다.
따끔했지만 그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온몸이 조각나는 것 같았으니까. 긴 숨을 내쉰 순간, 정신도 같이 날아가 버렸다.
* * *
찬은 2층 발코니에서 노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은이 창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다가 혼나는 모습을 보고 조금 웃었다. 샛노란 버스가 출발하고, 찬은 방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윤도가 눈에 보이지만 않았다면 그냥 커튼을 쳐 버렸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무시하기엔 너무 컸고, 지금은 비틀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뭐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지만, 불안정해 보였다. 평소라면 찬이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도 남았으련만. 윤도는 그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쓰러질 것 같다.’
예감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찬은 고개를 내미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그를 살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가 누굴.”
어이없는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찬이 걱정해야 할 건 그가 아니었다. 아니, 걱정이라는 단어는 살면서 들어 보지도 않은 남자인데. 이렇게 서서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픽 웃은 찬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인간도 아니다. 짐승들 중에서도 거의 정점 가까이에 있는 존재인데,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까. 찬은 온갖 이유를 붙여 가며 윤도에게서 신경을 끄려 했다.
담요를 끌어당겨 덮은 순간, 윤도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엉망진창으로 빗속에 쓰러져 있던 남자. 늑대.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일어나는 대신 담요를 몸 위에 덮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때는 모른 척하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모른 척하고 싶었다. 찬은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듯이.
눈을 깜박이다 잠시 감았을 때, 등줄기에 오싹한 공포가 흘렀다. 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집은 그리 춥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떨렸다. 피가 식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짐승.”
그 단어 말고는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다 못해 얼어붙었다. 찬은 제자리에서 서성였다. 다시 짐승이 되진 못했지만, 수인이 되며 발달 된 본능이 그에게 요란스럽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포식자의 냄새.’
찬은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구석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올라오지 않을 거라 믿었다가, 순간 두려워졌다. 단 한 번이지만. 윤도가 짐승일 때 어땠는지 겪어 봤으니까.
찬은 구석에 바짝 달라붙은 채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았다. 구석에 있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늑대로 변한 걸까.’
조금 이상했다. 윤도는 그의 앞에서 짐승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적어도 이 집에 온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다. 간혹 하은이가 새끼늑대로 변해서 바닥에 늘어져 있긴 했으나, 윤도는 한 번도 짐승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짐승으로 변하는 것이 금기인 것처럼. 지난날, 찬에게 고통을 준 것이 자신 안의 짐승이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찬과 과거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기에 그저 추측일 뿐이었지만.
“대체 왜.”
오늘은 뭐가 다른 걸까. 보지 않아도 냄새로 알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짐승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욱 몸을 웅크린 찬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하은이가 새끼늑대의 모습일 때는 조금 큰 강아지 같았다. 짐승의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는데.
필사적으로 밑의 상황을 모른 척하며 숨죽이던 찬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 옛날, 윤도가 늑대의 모습으로 있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짐승의 모습일 때는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찬은 양손을 꽉 맞잡았다.
‘다쳤나?’
분명 아침까진 멀쩡해 보였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하은이와 현관을 나설 때 잠시 비틀거렸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찬은 초조한 마음으로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크게 다쳤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단순히 윤도가 다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짐승으로 변한 뒤 다가올 후폭풍이 두려운 건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다가가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서는 것조차 엄두가 나질 않았다.
찬은 사슴이었다. 심지어 마음대로 변하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수인. 두려움이라는 이름에 애써 자신의 부자연스런 행동에 이유를 붙였다. 웅크리고 있었는데도 다리가 벌벌 떨렸다.
“읏.”
애써 무릎을 꽉 붙잡은 그가 일어섰다.
‘문을 닫든지, 아니면 상황을 봐서 나가든지 하는 게 나을까.’
같은 집 안에 있는데 오윤도를 피해서 나가는 게 가능할까. 찬은 불가능한 가정을 잠시 접어 뒀다. 문이라도 닫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인 순간, 지독한 냄새가 온 집안을 뒤덮었다.
짐승의 냄새와는 달랐다. 좀 더 진득하고, 달라붙는 듯한 감각이 익숙했다. 찬은 무심코 숨을 들이마셨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이미 잘 아는 냄새다. 잊을 수 없다. 옛날 일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뒤섞기 시작했다. 찬은 벽에 기대섰다. 숨을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흑…….”
허덕이는 숨소리에 가슴이 아플 지경이다. 찬은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외면하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발정기.’
단 한 번 겪어 본 그것. 처음으로 강간당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니라고 애써 외면해 보려 하니, 오윤도가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 길게 울었다.
“안 돼…….”
자꾸만 본능이라는 것이,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뒤쪽에는 발코니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저 아래층부터 짐승의 냄새가 짙게 풍겨오고 있었으니까.
찬은 자꾸만 도망치려는 다리에 단단히 힘을 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서 안절부절못하던 찬의 발이 뒤엉켰다.
“읏!”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찬은 일어나지도 못한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망했다.’
눈을 꽉 감았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점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 * *
찬이 오윤도의 냄새를 맡았듯, 그 역시 먹이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살짝 눈을 뜨자 열린 문밖으로 그가 보였다. 찬이 이 집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출입하지 않았던 2층인데. 역시 서른 개의 계단은 윤도에게 선이라 부를 수도 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은 확실히 늑대였다.
‘역시 처음 봤어.’
이렇게 매끄럽게 움직이고, 다치지 않은 늑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찬은 눈을 크게 떴다. 밝은 곳에서 처음으로 본 오윤도의 늑대 모습은 예상과는 다르게 아름답고 잔혹해 보였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어깨 부근의 근육, 매끄러워 보이는 털, 여유롭게 흔들리는 꼬리와 회색의 눈동자.
하은이가 새끼늑대의 모습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크기가 예상보다 크긴 했으나 새끼답고 귀여웠는데. 진짜 짐승이란 게 이런 거였나. 찬은 그대로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뼛속까지 마비시키는 듯한 공포감에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조차 잊었다. 그런데도 아름답다 생각했다. 피식자가 감히 포식자에게 품을 수 있는 생각인가. 찬은 거의 벌레가 기어가는 속도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늑대가 성큼 다가왔다. 거친 숨소리가 귀에 울리고, 조금 축축한 코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읏…….”
찬은 몸을 움츠렸다. 날카로운 이가 드러나도록 으르렁거린 윤도가 발로 바닥을 콱 찍었다. 단단한 바닥에 발톱 자국이 남았다. 얼어붙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옛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수인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를 때, 늑대에게 물어뜯기고 강간당하던 기억이 찬의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졌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피가 모조리 발끝으로 빠져나간 듯 추웠다. 턱이 덜덜 떨려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 순간에 영원히 갇혀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커다랗게 뜨인 눈에 오직 윤도만이 들어왔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발톱이 다시 바닥을 콱 찍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사납기만 했고,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오윤도.”
찬이 괴로운 만큼 그 역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바닥을 몇 번이고 찍어 댄 발톱 아래 피가 흥건했다. 누가 더 괴로운지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찬은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분명 스스로를 구하는 것조차도 버거운데, 윤도가 고통 속에 가라앉는 것을 보고 있으니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찬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코끝에 손이 닿기 전, 윤도가 먼저 반걸음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멀어진 거리는 누구에게 더 고통스러울까. 찬은 그에게 붙잡혔던 그때처럼 조금 더 다가갔다.
매끄러운 털이 손바닥에 닿았다. 느리게 손을 움직이자 윤도가 길게 울었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소리를 낸 그의 앞발이 찬의 가슴께를 꾹 눌렀다. 날카로운 발톱의 끝이 옷 위를 지그시 눌러왔다.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 괜찮다. 무엇이 괜찮은지도 모르면서 찬은 계속 중얼거렸다. 오윤도가 그를 생각했다. 오윤도가 당장 달려드는 대신 발톱에 피가 날 정도로 스스로를 억눌렀다. 오윤도가. 찬은 멍하니 늑대의 회색 눈동자를 쳐다봤다.
“읏…….”
코끝이 찬의 턱과 목에 스쳤다. 날카로운 이가 위협적으로 조금 벌어졌다 닫혔다. 긴 혀가 턱을 쓸었다. 귀여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사냥감을 훑는 것에 가까웠다. 찬은 모든 것을 참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익숙하다. 그 말이 우스웠다. 그 누가 강간당하는데 익숙해진단 말인가. 그런데도 찬은 어쩔 수 없이 익숙했다. 그와 했던 수많은 섹스는 전부 강간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그 수많은 순간에서와 달리, 단순히 이 정도의 자제심과 다정함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아졌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비참하고, 또한 윤도가 안쓰러웠다.
“…넌 불쌍한 짐승이야.”
찬이 작게 중얼거렸다. 늑대가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불쌍한 짐승. 찬이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날카로운 발톱이 옷을 죽 찢어 버렸다. 마른 가슴 위에 긴 상처가 남아 따가웠다. 축축한 혀가 상처 위를 핥자 따끔거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읏…….”
“하아…….”
인간의 것으로 들리는 한숨 소리에 뒤이어 또다시 짐승의 소리가 났다. 찬은 아래로 몸이 끌려 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꽉 감았다.
허벅지에 닿는 단단한 근육이 움찔거리며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손으로는 마른 가슴 위를 가볍게 더듬다가, 금세 짐승의 발톱이 상처를 입혔다.
“…읏.”
찬이 숨을 들이마셨다. 뜨거운 숨이 머리 위에 쏟아지며 온몸이 무거운 살덩이에 짓눌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허덕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들뜬 숨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단단해진 자지가 꾹 눌렸다. 순간 찬은 얼어붙었다. 익숙해졌다 해도, 두려운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짐승에게 다정한 위로나 다독임을 바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슬쩍 이를 악물었다.
찬의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아. 몇 년 만인데.’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처음 할 때 어땠더라. 찬이 허덕이면서 윤도를 밀어내려고 한 순간, 자지가 구멍을 억지로 열며 들어왔다.
“읏!”
이를 악문 탓에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고통에 윤도의 등을 할퀴었다.
“자, 잠… 깐……. 앗, 하윽……!”
인간의 말 따윈 알아듣지도 못하는 듯 헐떡이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자지가 쑥 빠져나갔다가 다시 퍽 소리를 내며 처박히는 느낌이 오싹했다.
억지로 느끼게 하는 고통스러운 쾌감에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갔다.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는 그것은, 그저 짐승이었다. 또 어딘가 찢어졌는지 엉덩이와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커다란 자지가 엉망으로 들쑤시고 있으니, 하반신에 모든 감각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흐……. 읏, 응…….”
찬은 온몸을 늘어뜨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윤도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꿰어진 채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가슴 위를 짓누르는 발톱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이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고정된 채 신음만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껏 벌어진 다리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아…….”
찬이 손을 내려 반쯤 선 채로 정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자지를 붙잡았다. 질척해진 손으로 쓱 훑자 엉망으로 쑤셔지던 구멍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읏, 으응……. 아…….”
찬이 헐떡이면서 손을 움직였다. 옅게 풍기던 피 냄새에 정액 냄새가 뒤섞였다. 움찔거리는 구멍이 쓰리고 아팠다.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윤도를 집어삼키려는 듯 단단히 조여 드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안쪽을 헤집고 익숙해진 곳까지 단숨에 파고드는 감각에 찬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조였다.
그것을 윤도도 느꼈는지, 또다시 울음소리를 낸 그가 조금 더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찬이 위로 죽 밀려났다.
“오, 윤… 읏, 으……. 아파.”
단단한 바닥에 엉망으로 짓눌리고 있으니 억지로나마 느끼고 있던 쾌감마저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찬이 허덕이면서 말하자 윤도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찬은 엎드린 채 이불을 쥐고 허덕였다. 그의 침대에 오윤도가 처음으로 올라온 것이 짐승의 모습으로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흣, 하. 하아…….”
날카로운 이가 목덜미를 물었다. 선득한 아픔에 눈을 질끈 감았다. 후회했다. 손을 뻗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되면, 난 또 같은 짓을 하겠지.’
잠시간 보여 준 나약함과 인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찬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건 아주 보잘것없는 것뿐이었다. 변명하듯 생각한 찬은 베개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접촉 불량의 전구가 깜박이듯,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포식자 앞에 있던 공포와 플래시백으로 정신이 한계에 치달은 모양이었다. 찬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더욱 거칠게 구멍을 들쑤시고 있는 윤도에게선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순간, 겨우 지탱하고 있던 정신이 그대로 꺼져 버렸다.
* * *
삑삑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찬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온몸이 아팠고. 눈앞에는 침대 헤드만 보였다.
또다시 삑삑 소리가 났다.
‘뭐지……?’
순간 조금 다른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찬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은이!’
시계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몸 위를 덮은 윤도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오윤도. 오윤도!”
찬이 작게 외쳤다. 평소와 같다면 하은이는 오자마자 그의 방으로 달려올 게 뻔했다. 오윤도를 치우려 버둥거리던 그는 방을 둘러봤다.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는지. 덜 마른 핏자국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었다. 거기다가 비릿한 정액 냄새까지. 찬은 축축한 이불을 더듬었다. 몸이라도 가리기 위해 무언가 덮을 걸 찾으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발소리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찬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허리를 뒤틀자 아직도 구멍 속을 채우고 있던 자지가 쑥 빠져나갔다. 뒤이어 함께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이 들면서 피 냄새와 정액 냄새가 짙어졌다.
“흐윽…….”
찬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설마 여기 있는 건 아니지……?”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찬은 그대로 굳었다. 우선 하은이의 목소리가 아닌 것은 다행이나, 낯선 사람이라니. 숨죽인 채 가만히 있으니 문이 조금 열렸다.
문틈으로 모습을 보인 건 주훈이었다.
몇 년 전, 윤도에게서 도망친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라서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
방안을 살핀 주훈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데려가.”
찬이 툭 던지듯 말하니 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데려가려고 온 거 아니야?”
“맞긴 한데. 음.”
주훈이 인상을 찌푸리곤 성큼성큼 다가와 윤도의 팔을 잡아 어깨에 걸쳤다. 찬이 애쓸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몸이 어렵지 않게 들렸다.
무거운 듯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주훈 역시 윤도만큼이나 컸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대충 가운을 끌어 몸을 가려 준 그는 재빠르게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찬은 뒤늦게 몸을 일으키곤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대체 얼마나 열심히 쑤셔 댔는지, 아직도 벌어진 구멍 사이로 피 섞인 정액이 줄줄 흘러 이불을 적셨다. 찬은 아래를 잠시 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윤도는 어디다 놓고 다시 왔는지 주훈이 문가에 서서 그를 불렀다. 코를 살짝 찡그리는 모습에서 이 방의 냄새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도는 내가 데리고 갈게.”
찬이 고개를 그냥 끄덕였다. 침묵이 흐르고 주훈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또다시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헤어지고, 윤도는 몇 년 동안 억제제를 먹었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오윤도가 뭔가 챙겨 먹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찬은 그 억제제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주훈이 윤도 대신 변명이라도 하듯 재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발정기가 오지 않게 하는 거야.”
“…….”
“그리고 그 약은 부작용이 제법 심하고. 윤도는 이미 몇 년이나 먹어서 요즘 고생하고 있어.”
“그래서?”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찬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약을 먹고도 찬에게 열심히 좆질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며, 그가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용서해 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그 점만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 윤도가…….”
단어를 고르듯 잠시 멈춘 주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원망스러운 건 알겠는데. 널 위해서 알면서도 먹은 거니까. 조금은 그 점을 생각해 줘.”
“왜?”
불쑥 그 말부터 나왔다. 찬은 윤도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새로운 암컷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 해도 아무 상관없다. 아니면 좇질 하려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구멍을 들쑤시고 다녀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왜, 부작용도 심하다면서 그 약을 집어삼킨 걸까. 찬의 머리가 살짝 기울었다.
“왜.”
주훈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에게 있어 오윤도는 억제 따위와 거리가 먼 짐승이었다. 발정기 때는 참지 않고 가까이 있던 찬을 범했다. 발정기가 아니었을 때도 그는 늘 발정 난 상태였다. 다정한 애무나 말 한마디 없이 찬의 다리를 벌리는 데만 관심 있는 짐승.
생각할수록 점점 더 인상이 찌푸려졌다. 주훈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저래 보여도 윤도는 늑대야.”
“…….”
“자기 상대를 정하면 다른 상대는 없어.”
“난 싫어.”
“네가 좋든 싫든, 그렇게 된 일이야.”
협박인지 아니면 애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가 가지도 않는다.
찬에게 못 할 짓을 하고도 사랑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던 윤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감정은 행동과 너무 달라서 의심밖에 들지 않는다. 찬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어. 그냥, 알아만 두라고.”
주훈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의사를 보내 줄게.”
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어렴풋이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찬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실 거울로 보니 꼴이 엉망이었다. 의사가 필요할 만도 했다. 손끝으로 목 뒤를 만지니 너덜거리는 상처가 아팠다. 가슴 위에 남은 발톱 자국과 짓눌린 멍 자국. 찬은 온몸을 살피다 포기하곤 물을 틀었다.
주훈의 말을 모두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윤도가 늑대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찬에게 몇 번이고 암컷이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냥 새끼를 낳아 줄 구멍 같은 게 아니었나.’
진짜 오윤도가 그를 자신의 짝이라 생각한 걸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기묘했다. 오윤도의 생각 따윌 어떻게 알까. 찬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저 어둡게만 느껴졌다.
‘지금 와서 마음 같은 게 뭐가 중요해.’
주훈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정말로 오윤도가 그를 짝으로 생각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찬은 용서할 수 없고, 그는 또다시 같은 짓을 저지르겠지.
서로 사랑하진 못하겠지만, 한집에 사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이것으로 족했다. 찬은 수건으로 몸을 닦다가 멈칫했다. 하얀 수건 위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오윤도가 그를 사랑했다 하면, 진짜 암컷이라 생각했다 하면.
그는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됐다.
도리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 * *
윤도가 없는 동안 찬은 하은이를 혼자 돌봐야 했다. 주훈에게서 무슨 설명을 들었는지. 아빠가 없는 동안 자기가 다 알아서 할 거라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리는 게 더 힘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은이를 씻기고, 밥을 먹인 후에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면 그때부터 하원하고 오기 전까지 조금 쉬었다.
“생각보다 힘드네…….”
찬은 소파에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아이를 키우는 게 이렇게 버거운 일인 줄 몰랐다. 보면 늘 하은이는 말끔했고,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윤도가 그동안 혼자서 잘 챙겼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안일을 해주 는 사람이 이틀에 한 번은 온다는 점이었다.
만들어 둔 것을 데워 먹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힘든지. 거기다가 하은이가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인지 아주 껌딱지처럼 찬을 쫓아다니니 더 죽을 맛이었다.
“하아…….”
찬은 조금 체력을 회복하곤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의사가 다녀가긴 했지만, 섹스만으로도 온몸이 아팠는데 거기다 쉬지도 못하고 애를 봐야 했으니 정말 쓰러져 자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비틀거리면서 침실로 돌아온 찬은 침대 위에 쓰러졌다. 깨끗하게 빨아서 다시 깐 침구는 보송보송했다. 거친 정사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냄새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주일째구나…….’
가만히 날짜를 세어 보던 찬은 그대로 깜박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엔진 소리에 하은이가 하원했나 싶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찬은 고개를 들어 발코니 너머를 살폈다. 윤도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숨죽이고 가만히 있으니, 금세 윤도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찬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층을 돌아다니는 걸음 소리. 늘어놓은 것들을 치우는 소리에 이어 창을 다 여는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그렇게 바삐 움직이진 않을 텐데. 자리를 비웠던 게 신경이 쓰이긴 했는지 윤도는 제법 부산스러웠다.
“하…….”
찬은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윤도는 확실히 나쁜 새끼다. 정말 그에게 마음이 있다면,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집안을 치우는 것보다 먼저 사과하러 왔어야 했다.
주훈이 뭐라고 하든, 그는 그냥 짐승일 뿐이었다. 찬은 체념하곤 침대에 고개를 파묻었다. 방금 전까지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요란스럽게만 들리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안이 고요해졌다. 계단 앞에서 발소리가 뚝 멈추고, 찬은 조금 두려웠다. 그가 또다시 ‘부작용’을 겪을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 입으로 사랑한다고 지껄일까 봐. 아니면…….
이런저런 생각을 뒤섞던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윤도가 답지 않게도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서로의 기척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했다. 찬도, 윤도도. 서로가 두려웠다.
“찬아. 올라가도 될까?”
대답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정신이긴 한 모양이었다. 찬의 침묵이 긍정이라고 멋대로 해석한 그의 발소리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지금이라도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찬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더듬었다. 열린 문 너머에 윤도가 멈춰 섰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찬이 부스스 일어나 걸터앉았다. 상처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놀랐다. 윤도는 엉망진창인 꼴의 찬에게, 그리고 찬은 오랜만에 처음 봤던 그때처럼 해쓱해진 윤도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아.”
누구의 신음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살이 빠지니 더욱 무섭게만 보이는 모습에 기묘하게도 동정심이 들었다.
‘내가? 오윤도에게?’
어이가 없다.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한단 말인가. 그게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찬은 매번 윤도가 불쌍했다. 안타까웠다. 눈앞에 있는 저것은 짐승이라 그런지, 그의 나약해진 마음을 금방 눈치채고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왔다.
오윤도가 문밖에 있는 것과, 문안에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찬은 주먹을 꼭 쥐었다.
“다가가도 될까.”
안된다고 말하지 않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알량한 그 감정이 뭐라고. 불쌍하고도 가여운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찬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윤도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차이가 선득하게 닿았다. 저 반듯한 모습 안에 날뛰는 짐승이 있다. 찬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한발 다가올 때마다, 조금씩 더 움츠러들자 윤도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유찬.”
지금의 그가 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찬은 그의 발끝을 쳐다봤다.
“찬아.”
윤도가 당연하다는 듯이 무릎을 꿇었다. 그때도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도 꿇었다. 실컷 찬을 망가뜨려 놓고, 미안하다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것이 우습고, 한심하고, 불쌍했다.
커다란 어깨가 아래로 늘어졌다. 고개를 숙인 윤도가 천천히 사과하기 시작했다.
“잘못했어, 미안해.”
구구절절한 변명은 한마디도 없었다. 주훈이 말했던 약에 대한 내용도, 부작용도, 발정기도. 변명으로 들이댈 것들은 차고 넘치는데 윤도는 그것을 단 하나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찬은 눈앞에 있는 그의 머리 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반듯하게 넘어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윤도의 정수리를 이렇게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찬조차도 이제 세 번째인데. 늑대의 털을 조금 닮은 검은 머리카락을 쳐다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짐승을 만지듯, 그렇게 가만히 쓰다듬었다.
윤도는 가만히 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미동 없이 자세를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참을성도 없는 게 미련하게 구네.”
확실히 미련하게 군 것은 맞았다. 윤도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했더라도 찬은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찬은 일부러 조금 가볍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원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는지, 짐승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것보다 더 현명한 처신을 할 수가 없었어.”
찬은 그의 머리에서 뺨으로 손을 내렸다. 긴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 조금 혼란스럽고, 안심하는 기색에 흐릿하게 웃었다.
“참지 않아도 돼.”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찬도 확실히 알고 있다. 윤도도 알고 있으리라. 둘 사이에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회색 눈동자에 찬이 빙긋 웃었다.
윤도의 해쓱해진 뺨을 매만지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 입술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단단히 굳어져 있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이 집에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정도로 뻔뻔하지 않아.”
“…….”
“그 정도의 대가는 치를 수 있어.”
찬은 윤도가 상처받은 표정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았다.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절망과 체념이 뒤섞인 그 얼굴. 숨소리 하나까지 모두 기억했다.
약한 희열이 느껴졌다. 그를 상처 주는 것은 아주 쉽고 간단했다. 찬은 미친 듯이 웃지 않기 위해 혀를 살짝 깨물어야 했다.
무언가를 조금 더 말해 주길 기대하는 헛된 희망으로 가득 찬 눈을 바라봤다.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덮을 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필사적으로 기다리는 윤도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다정한 말 한마디면 된다는 걸 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상처 주지 않는 말 한마디면 된다. 찬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이게 전부야.’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그와 함께, 그의 곁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는 걸 예감했다. 윤도는 짐승이었다. 주훈의 말대로 짝이 하나뿐이라면, 찬이 얼마나 상처를 주든 아무 상관도 없는 것 아닌가. 최후의 호의로 생의 마지막까지 곁에는 있어 줄 테니,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오윤도의 마음을 찢어 놓고, 저열한 기쁨을 느끼는 스스로를 한심해 하면서, 서로 발목을 붙잡고 지옥에서 살아가리라.
그렇게 찬은 오윤도의 곁을 저 혼자서 지키기로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이런 자리를 넘겨 줄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자리였다.
찬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반듯한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그런 취급에 익숙하니까.”
윤도가 고개를 숙였다. 상처받은 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의 마른 무릎에 얼굴을 묻은 윤도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찬은 한참이나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개에게 물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