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8)

5.

찬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침실 문은 잠기지 않았다. 물론 방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지만, 윤도가 살고 있는 방은 원래 살던 집의 10배도 충분히 넘어서 종일 방만 돌아다녀도 피곤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속옷 한 장 안 주던 때와 다르게, 드레스룸에는 그의 옷이 주르륵 걸렸다. 새 신발, 새 옷. 한 번도 차 본 적 없던 값비싸 보이는 손목시계. 맬 일이 없어 보이는 실크 넥타이까지 그의 것이 되어 윤도의 옷장 한구석을 차지했다.

그는 굳이 다른 것에 손대지 않았다. 아니, 침실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았다. 짐승이 되기 전과 같이 얌전히 침대에 있다가, 씻고 다시 홀딱 벗은 채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찬, 오늘도 침실에만 있었어?”

제법 다정한 말과 함께 윤도가 성큼 들어왔다. 찬은 평소와 같이 멀거니 그를 쳐다보다 시선을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도는 픽 웃으면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런 행동이 너무 낯설었다. 오히려 이상했다. 차라리 그냥 아무 말도 걸지 않고, 답도 해 주지 않고, 그냥 다리를 벌린 채 섹스하는 것에만 집중했으면 했다.

찬이 멀거니 윤도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몸을 쓱 훑어 내리는 게 느껴졌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가슴에 닿았다. 따듯한 손바닥이 천천히 심장 위를 덮더니, 손가락이 천천히 마른 몸 위를 더듬었다. 연약한 피부의 유두를 손톱으로 긁는 행동에 찬이 어깨를 움츠렸다.

장난을 치듯 손끝으로 젖꼭지를 문지르고 긁어댄 윤도가 웃으면서 바짝 마른 배 위를 더듬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흐음…….”

찬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자꾸 배를 문지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윤도는 찬이 인간으로 돌아온 이후 매일같이 배를 만지작거렸다.

‘섹스할 때도 만지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는 자지를 넣고 쑤시면서 배가 불룩 올라오는 걸 재미있어 하더니. 이젠 안 넣고도 만져 대는 게 이상했다. 찬이 슬쩍 그의 손을 떼어냈다.

순순히 물러난 윤도가 이번엔 그의 턱을 붙잡곤 이리저리 돌렸다.

“멍은 많이 사라졌네.”

“…….”

“수인들은 회복이 빠른 편인데, 왜 너는 느리지? 강제 각성 때문인가?”

그도 모르는 걸 찬이 어찌 안단 말인가.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툭 쳐냈다. 노골적인 짜증에도 불구하고 윤도는 여느 때와 같이 서랍에서 연고를 가져와 손수 발라 주기까지 했다.

찬은 눈을 감았다. 피부 위를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는 손길은 오윤도답지 않았다. 그가 약을 다 바르더니 다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돌아온 이후로 윤도는 한 번도 찬을 안지 않았다. 그렇다고 찬에게 흥미가 떨어진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매일 저녁이 되면 돌아왔고, 언제나 찬에게 연고를 발라 주었으며 함께 잤으니까.

찬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윤도가 달라진 것도 그냥 이상하기만 했다. 차라리 억지로 찬을 안았으면 예전과 똑같구나 하고 생각할 텐데.

“…이리 와.”

어느새 씻고 온 윤도가 그를 끌어당겼다. 찬은 버둥거리는 대신 인형처럼 얌전히 품에 안겼다.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은 그가 등 뒤에서 찬을 끌어안고 팔베개를 해 줬다.

등에 닿는 심장 소리는 무척 느린 편이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눈이 감겨 왔다.

“…….”

반쯤 잠든 순간, 찬은 엉덩이를 쿡 찌르는 감각에 눈을 슥 떴다. 그가 고개를 반쯤 돌리자 윤도가 픽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동안 참는다고 참았는데. 이러고 있으니 또 서네.”

찬의 팔뚝보다도 굵은 그것이 등허리를 꾹꾹 찔렀다. 커다란 손이 그의 납작한 배를 둥글게 문지르기만 했다.

“…안 해?”

쿠퍼액으로 등이 질척해졌다. 그 물음에 윤도가 눈을 깜박이더니 웃어 버렸다.

“할까?”

“…상관없어.”

언제부터 자신의 동의를 받고 섹스를 했다고. 시큰둥한 대답에 윤도가 잠시 고민하는 듯 손을 멈췄다. 비쩍 마른 배를 몇 번 더 더듬은 그가 조금 더 아래쪽으로 손을 옮겼다.

‘…그럼 그렇지.’

찬은 눈을 감았다. 윤도가 찬의 한쪽 다리를 들어 뒤쪽에 누운 제 허리에 올렸다. 자세가 조금 불편했지만, 그냥 있었다. 뒷구멍이 뻐끔 벌어지는 느낌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

윤도의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이제 그의 자지에 익숙해졌다는 듯 손가락 두세 개 정도는 쉽게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게 낯설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까지만 해도 남자 자지를 뒷구멍으로 무는 건 상상조차 못했건만.

찬은 주먹을 꼭 쥐었다. 풀어 주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마치 박아 주길 기다렸다는 듯 녹진녹진하게 풀어지는 감각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흐윽…….”

쑥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찬이 눈을 부릅떴다.

“하……. 이제 완전히 내 자지에 길들여졌네.”

윤도의 목소리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찬은 베갯잇을 꼭 쥐었다. 거의 야구 배트 같은 자지를 이렇게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거기에 반응하듯 저도 모르게 질질 싸는 것도.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천천히 할게.”

그러길 바라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배 위를 더듬은 윤도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찬의 다리가 흔들거렸다.

“흣. 으응…….”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쾌감을 어쩔 수는 없었다. 찬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윤도가 빠져나갈 때마다 안쪽 살이 같이 딸려 올라가는 걸 고스란히 느꼈다.

어깨를 물어뜯는 대신 부드러운 입술이 꾹 닿았다. 퍽퍽 소리를 내며 침대가 부서져라 허리를 흔들던 것이 환상이었다는 듯, 느긋하게 움직이는 게 더 오싹했다. 당장 억지로 주입 시키는 흥분 대신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감각이 찬의 몸을 더 안달 나게 만들었다.

“하아… 으……. 아흐윽!”

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윤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래. 착하지…….”

달래듯이 어깨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 그가 자지를 꾹 밀어 넣었다. 여전히 격렬한 행동은 없었다. 그냥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여유롭고 부드러운 동작이 이어졌다.

“아니… 흑… 아아…….”

찬의 손톱이 윤도의 팔을 긁었다. 쑥 빠져나갔다가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허리 짓이 이어졌다. 끝에, 조금만 더, 더……. 찬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 세게 박아 달라 애원하고 싶은 감각이 이어졌다. 윤도의 뜨거운 숨소리가 뒷목에 흩어지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읏……. 응…….”

한계까지 자지를 밀어 넣은 그가 힘을 줘 찬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것이 움찔거리며 떨려 왔다. 그리고 금세 안쪽에 미지근한 것이 퍼져 나갔다.

“흣… 흐읏…….”

찬이 동시에 바르르 떨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땀이 났다. 가쁜 숨을 토해내자 윤도가 낮게 웃으면서 귀 뒤에 입을 맞췄다.

“기분 좋았어?”

“…….”

“아주 자지를 안에 잘라 넣고 싶나 보네.”

노골적인 말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쾌감의 한계까지 끌어올려졌던 몸이 노곤하게 늘어졌다. 찬은 대꾸 없이 그냥 잠들었다.

그날 이후로도 윤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갔다 오면 다정한 척하며 뺨이나 입술에 키스했고, 온몸을 더듬었다. 그러다 감질이 날 정도로 부드럽고 느린 섹스를 했다.

‘…모르겠어.’

대체 왜 이러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암컷이라서? 그렇다고 해도 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사람으로 돌아온 이후 찬은 더 이상 짐승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정말 달라진 거라곤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일까. 찬은 침대에 누웠다.

“피곤해?”

멍하니 보내는 시간은 아주 금방 흘러갔다. 언제 들어왔는지, 깜박 잠든 사이 돌아온 윤도가 침대에 걸터앉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머리를 살짝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눈을 떴지만, 다시 잠든 척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찬이 깬 걸 알겠지만.

“계속 여기 있으니 답답하지.”

“…….”

“내일은 어디 나갈까?”

그 말과 함께 윤도가 웃으면서 허리를 당겨 안았다. 평상시와 같이 등에 닿는 감각이 익숙했다. 또다시 배 위를 더듬는 손길이 따듯했다.

“…어딜.”

외출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나가고 싶긴 했다. 끌려온 뒤로 외출은 못 했고, 그 뒤로는 짐승이라서 못 나갔다. 벌써 바깥을 돌아다닌 게 머나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어딜 가고 싶은데.”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찬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굳이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사실 이 도시 한가운데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가 아는 세상은 탁 트인 시골뿐이었으니까.

가만히 있으니 윤도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한번 생각해 봐. 내일은 종일 같이 있을 테니까.”

“…….”

“피곤한가 보네. 잘 자고.”

그가 뒷목에 입을 맞췄다. 찬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정한 나날이 이어지니 마음이 불편했다.

잠은 이미 낮에 실컷 잤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고, 먹고, 멍때리는 것뿐이었으니까. 등에 느껴지는 심장 소리만큼이나 손이 따듯했다. 자면서도 배 위를 꼼꼼하게 덮은 손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찬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윤도 때문에 짐승이 됐다. 다시 사슴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어쨌든 짐승이 됐다. 다신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끔찍하고, 답답하다. 수인들이야 원래 그런 모습을 타고 난다 해도 찬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짐승’의 몸에 갇히는 경험은 조금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모든 근원은 등 뒤에서 자고 있는 오윤도였다.

그가 찬을 끔찍한 꼴로 만들었다. 어둠에 처박고, 또한 구해 줬다. 고통 속에 내던졌다가, 끌어안아 줬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그 한가운데 오윤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놈이 없으면, 지옥에 처박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짐승이 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얻어맞고 윤간당할 뻔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처음부터 그에게 강간당하지 않았으리라. 찬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증오하면 편한데. 원망하고, 미워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그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찬을 지옥 속에 처박은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다정하고 너그러운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피었다. 수빈이 한심하다는 듯 비웃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반푼이, 덜떨어진 것. 아직도 인간의 모습을 못 띤다고 수군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찬이 많이 뒤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사슴으로 있으면서 식사부터 잠드는 것까지 모조리 윤도에게 기대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짐승인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찬이라는 이름을 꼬박꼬박 불러 줬다.

이 감정이 바로 애증일까. 찬은 여전히 배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 위에 손을 겹쳤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은 그의 손으로 다 감싸기엔 너무 컸다.

“…음.”

낮은 소리와 함께 윤도가 찬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끔찍하게 징그럽다가도, 없으면 허전했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증오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윤도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채색으로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끝도 없을 만큼 아득해 보이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잠들 시간이었다. 찬은 온몸에서 힘을 뺐다.

이대로, 조금 더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 * *

찬은 셔츠를 입다가 멈췄다. 옷을 제대로 입어 본 게 얼마 만인지 셀 수 없었다. 단추를 잠그는 게 어색했다.

‘이게 맞나?’

그런 것도 잊을 만큼 낯설었다.

“뭐 하고 있어?”

어느새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윤도가 성큼 다가왔다. 찬은 그를 아래위로 훑다가 단추로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단추를 잠갔다. 아직 제대로 입은 거라곤 속옷이 전부였다. 그것도 어색해 미칠 지경이었다. 피부에 닿는 천의 감촉이 이렇게 낯설고 어색한 거였나.

찬이 인상을 찌푸리자 윤도가 손을 뻗어 단추를 빠르게 잠갔다. 금세 다 잠긴 셔츠를 물끄러미 보다가 바지를 집어 들었다. 이걸 입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윤도는 찬이 옷을 챙겨 입는 걸 보더니 픽 웃었다.

“말끔하게 입으니 좀 낫네.”

그제야 윤도는 찬이 제대로 옷 입은 걸 본 적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언제나 시골에서는 후줄근한 반바지에 늘어난 셔츠 차림이었으니까. 그리고 윤도는 거의 바지 하나만 입고 지냈고.

그 일이 아주 오래전의 추억처럼 느껴졌다. 찬은 윤도가 내미는 대로 고분고분 외투를 걸쳤다. 그가 입은 대로 정장을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윤도와 손을 잡았다. 손을 잡았다. 찬은 또다시 생각했다. 손을 잡았다. 어색했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자 윤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 발로 호텔에 드나든 적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서 호텔에서 나갔다. 차 안에서 찬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번에는 운전기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윤도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고개를 돌렸다.

“왜?”

“…운전, 할 줄 아나 보네.”

그 말에 윤도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찬은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입을 닫았다. 시골에 살면서 운전 못 하는 그가 이상하기로 치면 더 이상했다.

“어디 가고 싶어?”

“…아무 데나.”

찬은 창에 머리를 기댔다. 도시는 아주 숨 막히고, 예뻤다. 가지런히 심어진 가로수, 쭉쭉 뻗은 빌딩, 수많은 사람들. 예쁜 모양으로 깔린 보도블록, 매끄러운 도로.

윤도는 별다른 말없이 시내를 돌고, 돌았다. 찬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눈여겨 봤던 건물이 세 번째로 지나갔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찬.”

“…….”

“수인이라는 걸 인간에게 들키면 안 돼.”

당연히 그렇겠지. 속으로 슬쩍 빈정거렸다. 정말 내놓고 말할 만한 일이었다면, 수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모두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찬은 호텔 상층 로비에 득시글거리던 수인들을 떠올렸다. 각종 동물과 사람들이 뒤섞인 그곳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수인들의 사회는 따로 있긴 하지만…….”

핸들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찬이 창에서 머리를 떼어냈다.

“뭐, 넌 몰라도 돼.”

“…왜?”

“내 암컷이니까. 게다가 클랜에서는 강제 각성을 거친 수인은 제대로 취급 안 해 주기도 하고……. 그렇다고 손톱에서 다른 패밀리로 넘어 가려고 해도 받아 줄 데도 없고. 그리고 넌 사슴이니 탈론도 아니고, 뭐…….”

끝으로 갈수록 그냥 중얼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딱히 찬에게 설명하는 투는 아니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클랜, 손톱, 패밀리, 탈론. 처음 듣는 말들이 머릿속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윤도는 그 뒤로도 수인에 대해서 설명했다. 대부분은 수인으로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주의사항이었다.

어린 수인들은 수인들의 사회에서 적응시킨 후 인간 세상에 내보낸다는 사실부터, 수인들의 죽음까지. 찬은 멍하니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나중엔 그것마저도 귀찮아져서 가만히 있었다.

‘내게 필요한 일도 아니고.’

사실상 수인이라는 자각 또한 없었다. 사슴으로서 지낸 한동안의 기간은 그냥 꿈같았다. 끔찍한 악몽. 그 정도의 기억으로 머릿속 한편에 고스란히 봉인했다.

‘다시 사슴이 되지도 않았고.’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으니, 사슴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몰랐다. 윤간당할 뻔했다는 것도 나중에 윤도에게 듣고 알았다.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맞은 흔적을 멀거니 거울로 보고 있으니, 윤도가 머쓱하고 미안한 얼굴로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놨다. 찬은 그냥 끄덕였다. 윤도만큼이나 덩치가 큰 남자에게 걷어차이고, 이상한 약을 먹은 것까진 기억났으니까.

‘사슴이 된 것도 약을 먹어서였을 거야.’

그러니까 약을 다시 먹지 않으면, 다시 사슴이 되지 않으리라. 찬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제일 마음이 편했다. 정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가 거기까지였다.

그러니까 수인이 어쩌니저쩌니 떠드는 윤도의 말은 조금도 마음에 닿지 못했다.

“구경이라도 좀 할까? 방에 있으면 심심할 텐데. 그래, 클래식이 좋다던데. 그것도 좀 사고. 그러면 플레이어부터 사야 하나.”

윤도가 커다란 건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찬은 그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와 들른 백화점은 엄청나게 크고, 반짝거렸다.

좋은 냄새, 높은 천장, 밝은 조명. 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윤도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사고 싶은 게 명확한 듯 음향기기를 파는 곳에 들어간 그는 찬에게 대뜸 뭐가 좋으냐 물었다.

“잘 모르는데.”

음악 같은 건 할머니의 고물 라디오로나 듣던 거였다. 그 말에 윤도가 턱을 매만지더니 대강 제일 비싼 것을 찍었다. 그리고 그 옆에 음반을 파는 곳에서 클래식을 전 세트 구매했다. 찬은 그냥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그다음엔 책이었다. 책 읽는 것에 별 취미 없다는 찬의 말에 윤도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림이 예쁜 동화책 전집을 샀다.

‘…취향 정말 이상하네.’

이해할 수 없었다. 윤도가 꺼내는 까만색 카드는 아무리 긁고 긁어도 한도 초과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찬은 또다시 그의 손을 잡아끄는 윤도에게 끌려갔다. 클래식, 동화책, 부드러운 이불 여러 개, 폭신폭신한 인형. 그 외에도 영문 모를 것들을 사 대던 윤도는 어딘가 기뻐 보였다.

“찬, 필요한 거 없어?”

“…딱히.”

찬은 멀거니 대답했다.

“아무거나, 가지고 싶은 거라든지.”

그렇게 말해도 갑자기 생각날 리가. 필요한 건 이미 호텔 방에 다 있었다. 입을 것, 먹을 것, 잠자리까지 전부 다.

“그럼 하고 싶은 것.”

고개를 저었다. 윤도의 시선이 찬을 빤히 응시했다.

“영화라도 볼까?”

“…….”

영화관을 말하는 걸까. 이것까지 거부하면 승낙할 때까지 별걸 다 댈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살던 곳에서는 영화를 보려면 읍내가 아니라 시내까지 나가야 했다. 물론 찬은 귀찮아서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지만.

‘아, 가끔 마을회관에서 상영하면 보긴 했구나.’

윤도는 전화로 누군가에게 신난 목소리로 막 떠들더니 찬을 잡아끌었다.

바글바글한 극장 로비와는 달리, 상영관 내에는 단 한 명의 관객도 없었다. 찬은 윤도가 안겨 준 팝콘 세트를 끌어안고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어둑어둑한 안쪽은 너무 텅 비어 있어서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사람이 없네…….”

윤도가 자리 확인도 하지 않고 대충 가운데쯤에 앉았다. 찬이 엉겁결에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화가 시작했다. 텅 빈 영화관에 단둘이라니.

‘그러고 보니 뭘 본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표도 따로 안 끊었다. 찬은 팝콘을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혀끝에 느껴졌다. 별다른 의문을 표하고 싶지도 않았다. 찬이 멍하니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윤도는 옅은 빛이 비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안 봐?”

“별 흥미 없어.”

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팝콘은 아무리 먹어도 줄질 않았다. 하나하나 깨작깨작 씹어 먹다가, 그냥 바닥에 내려놨다.

영화는 어딘가 지루하고, 조금 덤덤한 로맨스였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만나고. 그리고 마음을 깨닫고 키스하는 그런 진부한 내용. 찬은 화면 속에서 울면서 키스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꺼졌던 불이 켜지자 윤도가 물었다.

“재미있었어?”

“아니.”

그 말에도 그는 별달리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윤도가 찬의 손을 잡아끌었다.

“넌… 넌 재미있었어?”

왜 그걸 물었을까.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말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찬이 무심코 걷다가 윤도의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받았다.

고개를 드니 알 수 없는 표정의 남자가 보였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찬이 욱신거리는 코를 문질렀다.

“…재밌었어.”

“…….”

“아주 재밌더라.”

대답을 바라듯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찬은 코를 매만지면서 시선을 피했다. 굳이 윤도의 대답이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어……. 그래.”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통하지 못한 반응에도 제법 흡족했는지 윤도가 이번엔 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또 영화 볼까?”

“…아니.”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별로.”

백화점도 몇 바퀴나 돌았고, 지금 당장 손에 든 건 없지만 산 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내용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영화도 봤고, 팝콘 몇 알 집어 먹었더니 속도 더부룩했다.

“피곤해?”

“응.”

“그럼 돌아가자.”

그가 차 있는 쪽으로 찬을 당겼다. 거의 반쯤 안겨 가다시피 걸었다. 어느새 밖엔 어둠이 낮게 깔려 있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수많은 불빛들이 어둠을 몰아냈다. 찬은 처음 나왔을 때와 같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손전등을 들어야 걸어 다닐 수 있는 시골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멍하니 창밖의 불빛을 좇다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별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별이 없어.”

그 말에 윤도가 고개를 슬쩍 꺾어 하늘을 보더니 픽 웃었다.

“별 보고 싶어?”

찬은 고개를 저었다.

“별이 다 땅에 내려와 있어서 그래.”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찬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게 헛소리라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윤도라는 사실이 이상할 뿐.

낯선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알아챘는지, 그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졌다.

“아까 슬쩍 본 동화책에 나온 말이었어.”

다시 차 안이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윤도는 또다시 도시를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거친 행동과 다르게 운전은 부드러웠다. 눈이 깜박 감겼다.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속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외출이 제법 잦아졌다. 찬은 멍하니 티브이를 쳐다봤다. 할머니가 바보상자라고 부르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티비는 계속 혼자 움직였고, 색색의 자극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찬은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가는 걸 막진 않는 것 같은데.’

나가 보려고 시도하진 않았지만, 얼핏 본 현관은 바깥에서 따로 잠그는 장치가 있진 않았다. 그리고 윤도 역시 나가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다.

나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시간이 나면 찬을 데리고 나갔다. 그냥 차를 타고 끝없이 달리기도 하고. 처음 가보는 고급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지나가다 잠시라도 시선이 머물렀던 옷이나 신발 따위를 억지로 사 주기도 했고, 그리고 마지막엔 의식을 치르듯 영화를 봤다.

최근 개봉한 영화는 모조리 다 봤다. 찬은 무릎 위에 뺨을 얹었다.

‘싫다.’

입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윤도가 싫었다. 끔찍한 기억들은 모두 그의 손에 이루어졌다. 짐승이 된 것, 강간, 납치. 마치 영화 속 비극적인 주인공이라도 된 양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찬은 눈을 감았다.

티비에서는 계속 시끄럽게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할머니 집에는 라디오밖에 없어서, 티비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익숙하지 않았다. 찬은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꽉 줬다.

‘오윤도…….’

인생에 갑자기 끼어 든 남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최악으로 점철된 그는 답지 않게도 가끔 다정했다. 그것을 다정이라 말해도 되는지 가끔 의심스러웠으나, 윤도를 보고 있으면 그 나름대로 찬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찬은 스스로가 미쳤다는 생각을 하면서 옅게 웃었다. 이 생활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살해당한다 해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끄덕일 수 있는 기분이었다.

윤도가 밉고, 원망스럽다가도, 그냥 덤덤해졌다. 어차피 찬 스스로도 내던진 인생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살아갈 이유조차 없다 생각한 삶이었다. 그것을 주운 것이 윤도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해도 그냥 흘러가게 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그냥 흘러가게…….’

찬은 온몸을 웅크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계속 시간을 흘려보냈던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소곤거렸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찬이 스스로를 망칠 때마다 윤도가 불쾌한 얼굴로 바로잡는다는 것뿐.

‘할머니가 아시면 차라리 낫다고 하시겠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뜨니 안으로 들어오는 윤도의 모습이 보였다.

“일어나 있었네.”

“…….”

“뭐 하고 있어? 티브이?”

그가 자연스럽게 찬의 옆에 앉았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 여전히 비쩍 마른 어깨를 감싸 안고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재미있어?”

“…아니.”

“나갈래?”

“아니.”

찬은 계속 고개를 흔들다 눈을 감았다. 몸이 위로 불쑥 들어 올려졌다. 엉덩이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그럼 기분 좋은 거라도 할까?”

“…아니.”

마른 배 위를 더듬는 손길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윤도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옷 속을 파고든 손이 더 위로 올라오진 않았다.

“그래.”

낮은 대답과 함께 등에 윤도의 가슴이 닿았다. 찬은 그냥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티브이에서 하는 프로그램의 내용이 뭔지 조금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냥 멀거니 움직이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들끼리 웃고, 떠드는 동안 찬은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윤도의 손바닥이 천천히 배를 덮었다.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머리 자르러 갈래?”

“…….”

긴 손가락이 찬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제야 목덜미를 덮을 만큼 길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중에.”

“그래, 나중에 가자.”

막연한 그 말에 윤도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배 위를 가볍게 쓸었다. 왜 굳이 배를 자꾸 만지는지 묻진 않았다. 찬은 그의 손등에 손바닥을 얹었다.

핏줄이 도드라지고, 뼈가 단단하게 만져지는 손등.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것을 더듬었다. 따듯한 체온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티비 속에서 커다란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렸다. 찬과 윤은 둘 다 웃지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을 흘려보냈다.

* * *

찬은 어색한 얼굴로 거울 속을 쳐다봤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니 피죽도 못 먹은 듯 불쌍해 보이는 얼굴이 같이 움직였다.

‘…생각보다 더 말랐네.’

굳이 거울을 유심히 보질 않았는데, 이렇게 불쌍해 보였나. 뒤쪽 소파에 앉은 커다란 남자를 거울 너머로 흘깃 쳐다봤다.

기다란 다리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앞으로 뻗고, 느긋한 얼굴로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다. 언제나 입는 정장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윤도의 몸에 꼭 맞았다.

‘…집에 있을 때는 거의 헐벗고 지냈는데.’

이렇게 반듯한 모습을 보는 건 아직도 낯설었다. 찬은 목에 천을 둘러 주는 미용사를 거울 너머로 한 번 보고 다시 윤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머리카락, 널찍한 어깨, 굵은 눈썹에 선이 짙은 턱선과 쭉 내뻗은 코. 반듯한 입술.

그 누구에게 물어도 저 남자가 짐승이라고는 대답하지 못하리라. 찬은 가볍게 혀를 찼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수인으로 만난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매력적이었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전부 다. 그것도 수인의 특성인가. 찬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미용사가 단호하게 찬의 머리를 붙잡았다. 차가운 물이 칙칙 뿌려지고 금세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찬은 거울 너머로 윤도를 계속 쳐다봤다. 그와 함께 하는 것들 중에 처음인 것이 너무 많았다. 영화관에 가는 것도, 이렇게 미용실에 오는 것도,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전부 처음인 것뿐이다.

‘나쁘지 않아.’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쁘지 않다. 찬은 그 말을 되새겼다.

제법 오랜 시간을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그 결과 할머니가 잘라 주던 것보다 훨씬 더 멀끔해진 머리를 이리저리 만졌다. 훤히 드러난 뒷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윤도가 픽 웃었다.

“훨씬 예쁘다.”

그가 계산하는 동안 거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확실히 거지꼴이더니, 이젠 조금 사람다웠다. 비쩍 마른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리고 마지막에 머리를 감고 드라이기로 이리저리 만져 댄 덕분인지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둥글어져 있었다. 찬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에 들어?”

“…응.”

“그래? 그러면 매일 머리 하러 올래?”

멀거니 그를 쳐다봤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걸 찾았다는 것이 기쁜지 윤도가 웃고 있었다. 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왜? 매일 데려다줄게. 내가 못해도 다른 놈들이…….”

“싫어.”

찬은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윤도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차에 타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고, 도시는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았다. 찬은 벨트를 당겨 꽂는 윤도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찬은 앞을 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도 차 있었으면 좋겠어.”

“왜? 어디 가고 싶어?”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것뿐이다. 윤도의 손가락이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찬은 괜히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면허 따야 하잖아?”

“…따면 되지.”

그 말에 윤도가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래, 차 사 줄게. 뭐가 좋아?”

“…몰라.”

“비싸고 큰 거 몰아. 그래야 주변에 다른 놈들이 안 다가오지.”

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차 같은 건 잘 몰랐다.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경운기 같은 걸 타고 다녔고, 가끔 차가 있다고는 해도 연식이 오래된 차나 소형차가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관심도 별로 없고…….’

면허조차 딸 생각을 안 했는데 알 게 뭔가. 윤도가 차 이름을 주루룩 내뱉었다.

“아무거나 골라봐. 고민되면 종류별로 사도 되고.”

“응.”

“아니면 나중에 운전기사 붙여 줄게. 아니, 차라리 그게 낫겠다. 더 안전할 거고.”

“응.”

“아니, 아닌가. 다른 놈이 널 보고 딴 맘이라도 먹으면 어떻게 해?”

“…….”

“차라리 내가 널 데리고 다닐게. 차는 사 줄 테니까 타고 싶은 걸로 골라.”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찬은 낮은 한숨을 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차를 보니 생각나서 꺼내 본 말이었기에 별다른 감흥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면허가 가지고 싶은 거야?”

“딱히…….”

굳이 면허가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면허를 위해 공부할 생각을 하니 갑갑하기도 했다.

‘어렵지는 않다던데.’

그래도 생각하니 조금 귀찮다. 찬은 눈을 감아버렸다. 윤도가 첫마디를 꺼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뜨니 익숙한 곳이었다. 언제나 영화를 보러 오는 영화관. 윤도가 여느 때와 똑같은 관에, 똑같은 자리로 그를 데리고 갔다.

언제나 영화관은 텅 비어 있었다. 늘 먹는 것도 정해져 있다. 팝콘과 콜라 세트. 윤도는 손도 안 댔지만, 찬은 몇 개를 집어 먹다 버렸다. 대부분 버려지긴 했어도 그는 늘 가장 커다란 걸 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영화가 시작했다. 찬은 평소처럼 팝콘 몇 개를 집어 먹다가 윤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재미없어?”

“…응.”

“나갈까?”

찬은 팝콘을 만지작거렸다.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팝콘이 바삭거리면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깨를 바짝 끌어당기는 손길에 의해 찬이 옆으로 기울었다.

“읏.”

윤도의 어깨에 머리를 조금 세게 박았다. 찬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머리를 들려고 하니, 커다란 손이 뺨을 가볍게 다독이면서 기대 있게 했다.

둘 사이에 있던 팔걸이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찬은 팝콘이 담긴 통을 끌어안았다. 어깨를 감싼 손이 따끈따끈했다. 평소 영화를 보는 내내 언제나 찬만 보던 윤도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

화면이 바뀔 때마다 색색의 옅은 빛들이 윤도의 얼굴에 쏟아졌다. 찬은 그 모습을 곁눈질하다가 팝콘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하며 차에 도착한 윤도가 뒷좌석에 찬을 밀어 넣었다.

“아……. 잠, 잠깐……. 읏.”

다급한 손길이 벨트를 풀고 바지를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속옷까지 몽땅 벗겨진 찬이 몸을 웅크렸다.

“부드럽게 할게.”

“여기. 주차장… 읏. 으응!”

아무 망설임 없이 키스해 오는 윤도에게 말이 먹혔다. 찬이 어깨를 밀어냈다가, 금세 끌어안았다.

혀가 익숙하게 안쪽을 헤집었다. 입천장을 문지르다가 볼 안쪽을 쿡 찔렀다. 그리고 혀가 뽑혀 나갈 만큼 세게 빨았다.

“으흑……. 아…….”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껏 부푼 자지가 허벅지 안쪽에 닿았다. 찬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것이 어떻게 안을 쑤시는지, 어떤 쾌락을 주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만져 주지도 않은 찬의 자지가 빳빳하게 선 채 움찔움찔 떨렸다.

“하으…….”

엉덩이를 단단히 붙잡은 손이 구멍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따로 정액이나 타액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녹진한 살이 손가락을 꾹 압박했다.

“…박아 주길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 그냥 구멍이 아니라 보지 구멍이네.”

“…….”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본 영화가 문제다. 내용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끝으로 가니 계속 섹스신이 이어졌다. 영화 속 노골적인 허리 움직임과, 달뜬 신음 소리에 몸이 달아오른 것도 사실이었다.

“…하으. 읏. 응…….”

금세 손가락 하나가 더 파고들었다. 한껏 구멍을 넓히는 손짓에 찬이 윤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이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다른 한쪽 손이 찬의 배를 더듬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왔다. 천천히 갈비뼈를 하나씩 더듬듯 미끄러지다 작은 젖꼭지를 만졌다. 살살 문지르듯 긁다가, 조금 세게 꼬집었다.

“하윽……!”

급하게 셔츠를 벗겨낸 윤도가 툭 튀어나온 쇄골을 혀끝으로 핥았다. 미끈거리는 쿠퍼액으로 뒤덮인 귀두가 엉덩이 사이를 문질러 댔다.

“…진짜 여기… 으응!”

정말 차 안에서, 주차장인데.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도중 윤도가 자지를 쑥 밀어 넣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섹스 때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구멍이 기다렸다는 듯 벌어졌다. 찬이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응?”

윤도가 뒤늦게 물었다. 분명 알고도 묻는 거다. 찬의 허벅지를 한껏 벌리던 손이 한쪽 발목을 뒷좌석의 머리 부분에 걸치게 했다.

“다 보이… 흐윽!”

“소리만 안 내면 안 보여.”

그 말에 급히 입술을 틀어막았다. 윤도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안쪽 주름을 더듬으며 빠져나가는 감각에 찬의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렸다.

거칠게 퍽퍽 박아 대는 것이 절정까지 강제로 끌어올리는 거라면, 이렇게 느릿하게 하는 건 절정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추는 짓을 반복하는 것과 같았다.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 안 내고, 착하네.”

넓은 귀두 끝이 천천히 구멍 밖으로 빠져나갔다. 찬이 고개를 젖혔다. 오싹한 쾌감이 발끝까지 관통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에 끝까지 자지가 꽂혔다.

“하윽!”

“쉿. 조용히 해야 안 들키지.”

찬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차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윤도가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번엔 끝까지 빼내지 않고 천천히 앞뒤로 움직였다. 무언가 걸리는 부분, 그 부분에 찬이 약하다는 걸 아는지 커다란 귀두가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으흑……. 읏, 읏…….”

“소리 못 막겠어?”

윤도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찬은 헐떡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막아도 몸이 조금씩 흔들릴 때면 자꾸만 손이 줄줄 미끄러졌다. 윤도의 커다란 손바닥이 찬의 입을 꾹 눌렀다.

“읍. 읍…….”

다시 자지가 걸리는 부분을 들쑤셨다. 아까보다 조금 더 격렬하게. 찬이 헐떡이면서 윤도의 손을 붙잡았다. 강하게 누르는 손길에 억눌린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하아…….”

흥분한 남자의 한숨이 들려왔다. 찬의 다리가 흔들렸다. 구멍 안쪽을 즐기듯 여기저기를 있는 대로 들쑤시다가 거칠게 퍽퍽 소리를 내며 자지를 박았다. 그러다 느긋하게 안쪽에서 이리저리 돌리기도 했다.

“으읍……. 읍… 음…….”

“만져 봐.”

윤도가 손등을 긁어내리는 찬의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평소와 똑같이 정액을 줄줄 흘린 배 위가 불룩했다. 미끈거리는 감각이 손바닥에 가득 느껴졌다.

“…흐읍…….”

찬은 배 너머로 느껴지는 자지의 감촉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윤도는 언제나 그렇게 넣고 만지면서 확인하는 것을 좋아했다. 더듬더듬 굵은 기둥을 확인하고, 유독 크게 느껴지는 귀두가 있는 부분을 꾹 눌렀다.

“하…….”

나른한 신음 소리와 함께 윤도가 허리를 바짝 붙여왔다.

“읍, 응. 으읍…….”

안쪽에서 움찔거리며 부푸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금세 정액이 쏟아졌다. 찬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 아흑…….”

몸이 벌벌 떨렸다.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억눌러서 그런지 절정의 쾌감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찬의 구멍이 꽉 조여 들었다.

“기분 좋아? 보지 쑤셔 줘서 쌀 거 같아?”

웃음소리와 함께 윤도가 그의 자지를 붙잡고 흔들었다.

“흐앗……. 응, 응! 으응!”

한줄기씩 새어 나오던 둑이 단숨에 터져 흘렀다. 찬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죽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고 정신을 차리니 윤도가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초점을 바로잡았다.

“…아. 한 번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노팅이 시작됐어.”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불룩한 배가 보였다. 그리고 아프도록 구멍 안을 채운 자지도 느껴졌다.

“…….”

이대로 두 시간은 있어야 풀린다. 억지로 뽑아내려면 뽑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짓을 했다가 구멍을 두 번이나 스스로 찢었던 찬은 그냥 온몸에서 힘을 풀었다.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뒷머리부터 등허리까지 쓸어내렸다.

윤도가 벗어 뒀던 정장 웃옷을 찬의 어깨에 덮었다. 그가 느긋하게 뒷좌석에 기대앉아 마주 안고 있는 찬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찬아, 오늘 진짜 예쁘다.”

섹스가 아주 만족스러웠던 걸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찬은 점점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을 어렵게 들어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긴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피곤에 흐려진 뺨 위에 입술이 닿았다.

“피곤해?”

고개를 끄덕였나, 아니면 대답을 했나. 정신이 몽롱했다. 찬은 윤도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매끄러운 실크 넥타이가 차갑게 피부에 닿았다.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요즘 어쩐지 자주 졸린 것 같아…….’

잠결에 그런 생각을 했다.

* * *

찬은 발을 까닥거렸다.

평소에도 먹는 것을 즐기진 않았지만 오늘은 더 먹고 싶지 않았다. 윤도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침부터 핏물이 흥건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왜, 입맛이 없어?”

찬은 젓가락으로 반찬 몇 개를 뒤적이다가 그냥 내려놨다. 이상할 정도로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없어.”

찬이 밥알 몇 개를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스티로폼을 씹는 기분이 들었다. 뒤적이던 반찬을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간 순간, 찬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우욱…….”

가까스로 상이 아니라 무릎에 쏟았다. 그나마 먹은 게 없어 쓴 위액과 으깨진 밥알 몇 개가 전부였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온 순간 찬은 다시 토했다.

“욱…….”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윤도가 그를 안아 들었다. 토해 낸 것이 그의 말끔한 정장에 묻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찬이 헐떡이면서 눈을 감았다.

왜 갑자기 다 역겹게 느껴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체했나?’

하지만 체할 정도로 뭘 먹지도 않았다. 늘 식사 때마다 찔끔찔끔 밥을 먹었다. 그래도 혼자 컵라면으로 때울 때 보단 훨씬 잘 먹고 다녔다. 끼니마다 갓 지은 밥과 반찬이 올라왔고, 외출해서도 윤도는 늘 몸에 좋은 요리들을 사 줬다.

찬이 가슴께를 문질렀다.

“갑… 갑자기 냄새가.”

참았는데, 구역질이 났다. 윤도가 욕실에 찬을 내려줬다. 변기를 붙잡고 웩웩거려 봐도 이젠 헛구역질만 나왔다.

“의사를 불러야겠다.”

윤도가 등을 다독거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통화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수인 중에서 의사 면허를 딴 자도 있는 모양이었다.

찬이 새파래진 얼굴로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그리 건강하지 못한데, 구역질까지 하고 나니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씻을래?”

윤도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씻을 기운도 없다. 그 말에 그는 편해 보이는 티와 바지를 가져왔다. 서슴없이 옷을 벗기는 손길에 그냥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는 토사물이 묻은 옷을 대충 벗겨 던져 둔 채 찬의 손과 입가를 물수건으로 닦아 줬다. 과할 정도로 친절하다. 너무 친절해서 이상했다.

“의사가 곧 올 거야.”

윤도가 이불을 덮어 줬다. 그 속으로 손을 넣은 그가 또다시 배 위를 만지작거렸다. 따듯한 체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에 찬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체했나 봐.”

“…….”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눈을 겨우 뜨니 윤도가 꽤 심각한 얼굴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윤도?”

“응? 아, 그래. 체했을 수도 있고.”

그가 픽 웃으면서 다시 배 위를 쓰다듬었다. 찬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또 잠이 쏟아졌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순간, 처음 들어보는 벨 소리가 울렸다.

“의사가 왔나 보다.”

윤도가 직접 나가더니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누가 봐도 ‘의사’답게 생긴 사람이었다.

“어쩌다 네가 의사를 다 부르나 했더니.”

“시끄러워.”

친한 사이인 듯 핀잔을 주고받은 그가 침대로 성큼 다가왔다.

“어디가 아파요?”

“방금 토했어.”

찬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도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남자는 찬의 이마를 만져 보고, 아 해 보라 시키더니 청진기로 가슴께를 더듬으며 진찰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고, 평범하게 입덧이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찬은 멍하니 입덧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입덧? 입덧이 뭐지?’

그 단어가 순간 이해되질 않았다. 입덧. 임신한 여자들이 헛구역질하는 그거 아닌가. 찬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입덧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남잔데. 입덧일 리가 없잖아요. 그건 임신한…….”

그 말에 의사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윤도를 돌아 봤다. 도움을 구하는 시선에 그가 손을 까닥거렸다.

“윤도와 잘 얘기해 봐요. 다른데 아프면 얘기하고.”

의사가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금세 현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찬은 이불을 꽉 쥐었다.

“무슨……. 무슨 말이야? 입덧?”

“임신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못 먹어도 좋으니까.”

윤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이었다. 찬이 남자라는 사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임신? 내가?”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그동안 수도 없이 섹스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임신으로 이어지나. 찬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래.”

윤도가 덤덤하게 대답하곤 어깨를 밀어 눕혔다.

“좀 더 쉬어.”

찬이 눈을 깜박였다. 그의 말투나 행동이 너무 평소와 같아서 아무 것도 문제될 게 없는 기분이었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조금 자고 생각하자.”

커다란 손이 눈 위를 덮었다. 해야 하는 말이, 묻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많은데. 단숨에 어둠에 묻혔다. 찬이 입술을 달싹였다.

‘임신?’

그것도 현실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수인이라는 것을 처음 본 그 순간처럼, 아득한 꿈같다. 찬은 눈을 질끈 감고 잠 속으로 도망쳤다.

* * *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커다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찬은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래로 내렸다. 납작한 배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약간 배가 나왔나? 싶다가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손으로 윤도가 하듯이 배 위를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어났어?”

윤도가 평소와 같이 물었다. 또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가 찬에게 빙긋 웃어줬다.

“아침 먹어야지.”

평소와 똑같다. 어제 임신이라는 단어를 들은 게 꿈같다. 찬은 고개를 끄덕이곤 터덜터덜 식탁으로 갔다. 어제와 완벽하게 다른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평소라면 고소한 냄새가 날 식탁에는 무미건조한 냄새가 났다.

늘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를 썰던 윤도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찬은 머뭇거리다 젓가락을 들었다. 오늘도 뭔가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라도 먹어 봐. 그중에 먹을 수 있는 게 없으면 다른 거 가져 오라고 할 테니까.”

찬은 그 말에도 그냥 음식을 뒤적거렸다. 뭐 하나 당기는 게 없었다. 한참이나 젓가락으로 이것저것 헤집다가 결국 그냥 내려놨다.

“…유찬, 먹어.”

안 먹으면 강제로 입을 벌리고 욱여넣을 기세였다.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가 임신했어?”

그 말에 윤도가 허를 찔린 듯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찬아.”

“진짜야?”

“…….”

“내가 임신했어?”

고장 난 기계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찬은 솔직히 이 모든 게 믿기질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남자는 임신을 못 하는 동물이었다.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짐승들도 암컷이 임신하지 수컷이 임신하진 않는다.

끔찍한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윤도가 잠시 침묵하더니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찬은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윤도를 만나고 지금까지 지내면서 단 하루도 현실 같은 적이 없었다. 오늘을 포함해서 단 하루도.

‘…질 나쁜 거짓말이 아닐까.’

다시 배 위를 더듬었다. 언제나 윤도가 하듯이 아무리 꾹꾹 누르고 만지작거려도 비쩍 마른 배가 만져질 뿐, 아이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유찬.”

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윤도가 또라이라서 그런 착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세상에 동성 커플이 제법 있긴 하지만 그들이 임신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쏟아지는 잠도 임신했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같아 싫었다.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티브이를 켜서 소리를 높였다.

“찬아.”

그 뒤로 윤도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 소리를 더욱 높였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알았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소리 좀 줄여.”

윤도가 리모컨을 빼앗아 소리를 적당하게 줄이곤 다시 돌려줬다. 찬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윤도가 평소처럼 나가고, 대화조차 안 하는 사용인들이 들어와서 청소를 말끔히 마쳤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갔다. 찬은 그동안 몇 번이고 배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안 느껴진다. 안 느껴져야 했다. 그는 윤도가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수십 번이나 배를 만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도, 윤도는 찬의 배 위를 더듬으면서 잠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날들이 흘러갔다. 임신했다는 농담을 들어서인지, 어쩐지 배가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찬은 양치를 하다가 멀거니 거울을 쳐다봤다.

“…찬아, 뭐해.”

윤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가 나온 것 같아.’

자꾸 임신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다. 찬이 거칠게 칫솔질을 하다가 그걸 팩 던져 버렸다. 윤도의 발치에 거품 묻은 칫솔이 떨어졌다.

“찬아.”

배 위를 더듬었다. 예전엔 비쩍 말라서 홀쭉하기만 했던 배가 약간 살이 붙은 듯 통통해져 있었다. 찬은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다른 곳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마른 팔뚝, 뼈가 드러난 어깨, 목 뒤. 발작하듯이 온몸을 만지다가 배를 문질렀다.

“…찬아.”

윤도가 성큼 들어왔다. 찬이 옷을 벗어 던졌다. 마른 몸에 유독 배 쪽만 조금 나와 있었다. 멍하니 거울로 약간 튀어나온 배를 바라봤다.

“…살… 살쪘나 봐.”

찬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윤도가 등 뒤에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배 위에 닿았다.

“그동안 너무 안 나와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

“벌써 제법 불러야 정상인데, 너무 말라서 그랬나 봐.”

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찬은 거울 너머로 윤도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배로 시선을 내렸다. 얕게 튀어나온 배가 낯설고 이상했다.

“…나 병 걸렸나 봐. 그래, 복수 같은 거 찬 거 아니야?”

“…병이 아니라 임신한 거야.”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듯 윤도의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찬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임신?”

“그래, 임신. 나랑 너의 새끼. 내가 네 구멍에 좆질 해서 새끼 뱄다고, 네가.”

저속한 말과 함께 그가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외면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배 위에 닿은 손을 뿌리쳤다.

“…….”

거짓말. 그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찬이 배를 더듬었다. 윤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새끼 만들던 날에 아주 좋아서 흔들어 놓고.”

윤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찬이 뒤로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았다.

“왜, 기억 안 나?”

“안… 안나.”

“아주 수컷 냄새에 환장해서 달려들었잖아. 발정해 가지고 헐떡대면서 자위하고. 결국 못 가서 내가 쑤셔 주니까 환장하고 질질 싼 것도 기억 안 나?”

“…….”

어두운 그림자가 그를 집어삼켰다. 찬이 숨을 헐떡였다. 윤도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두려웠다. 육식동물의 냄새가 났다.

드러난 이가 유독 날카롭게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벽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윤도가 앞에 허리를 숙이며 다정하게도 속삭였다.

“기억날 때까지 다시 쑤셔 줬으면 좋겠어?”

“아니… 아니.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새끼 뱄으니까 잘 먹고, 잘 자야지. 태교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가 싱긋 웃으면서 뺨을 매만졌다.

“응? 찬아, 잘 지내자. 그래야 너도 건강하고, 새끼도 건강하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찬이 벌거벗은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윤도가 그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팔다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 찬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아니야.’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숨이 턱 막혔다. 발작하듯 몸을 뒤틀고 있는 그를 끌어안은 팔의 힘은 너무 거세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냥 그대로 흘려보내자 생각했다. 별다른 의미 없는 시간이라 해도, 그냥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무언가를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를 키울 자신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오윤도의 자식? 남자가 임신? 사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던 찬의 상식이 산산조각 났다. 그동안 몇 번이고 두들기고 또 두들겨서 실금이 간 바닥이 와르르 박살이 났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들이 현실로 닥쳐왔다.

“헉… 흐윽…….”

숨이 가빠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데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슬아슬하게 끝을 붙잡고 있던 정신이 손을 빠져나갔다.

발작하듯 몸부림치던 찬이 죽은 듯 늘어졌다.

* * *

찬은 그냥 멍하니 배를 만지작거렸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하루가 다르게 배가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일 수도 있다.

‘…임신이라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다가, 문득 오윤도를 원망했다. 증오했다.

“유찬.”

찬아. 라고 부르던 목소리 대신 딱딱한 이름이 들렸다. 찬은 그냥 그걸 무시했다.

“찬아.”

이번에는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찬, 뭐라도 먹어야지.”

그다음에 무슨 행동이 나올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뒤이어 윤도의 손이 억지로 입을 벌리고, 죽을 부어 넣었다. 다정하게 한 숟갈씩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고스란히 부어 넣었다.

“욱… 으. 아!”

아무리 버둥거려도 죽이 넘어갔다. 숨을 쉬기 위해 컥컥거릴 때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미적지근하고 끈적이는 감촉이 역겨웠다. 찬의 뺨과 턱, 윤도의 손에 죽이 엉망으로 묻었다.

그릇의 반 정도를 입속에 억지로 쏟아부은 윤도가 빙긋 웃으면서 그릇을 내려다봤다.

“나머진 알아서 먹을래?”

찬이 그를 노려보다 입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배 속에 자라고 있는 기생충에게 영양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손끝이 목 끝을 찌르기 직전에 윤도가 양 손목을 꽉 붙잡았다.

“…먹여 달란 소리구나.”

침대에 등이 닿았다.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나마 배 위에 올라타지 않은 건 새끼를 위함인가. 찬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윤도가 다시 뺨을 꽉 눌러왔다.

“흐욱…….”

다시 죽이 쏟아졌다. 거의 반 이상이 옆으로 줄줄 흘러내렸지만, 찬도 윤도도 개의치 않았다. 몇 개나 시켰는지 두 그릇, 세 그릇, 윤도가 계속 찬의 입속에 미적지근한 죽을 부었다.

버둥거리던 힘도 빠졌다. 헉헉거리면서 입안을 채우는 것을 뱉거나 삼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한참 만에 윤도가 뺨을 놔 줬다. 그의 손은 이미 허연 죽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질척거리는 죽이 차게 식으면서 찬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착하지.”

윤도가 빙긋 웃곤 손등으로 찬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토하면 아예 목구멍에 깔때기를 꽂아 놓고 부어 넣을 거니까 얌전히 있어.”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윤도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찬은 그를 노려봤다. 증오스럽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오윤도가 밉고, 원망스럽고,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 눈빛에 윤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빙긋 웃었다.

“눈이 아주 번뜩이네.”

“…….”

“죽이고 싶어? 증오스러워?”

그가 고개를 숙였다. 찬은 이를 꽉 악물었다. 재미있다는 듯 웃는 윤도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입술을 물어뜯다 보니 피 맛이 났다.

“뭔가 강하게 원한다는 건 좋은 거지. 내 목을 조르고 싶은 거면 좀 더 잘 먹고 손가락 힘을 기르는 게 좋겠어.”

윤도가 비웃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말끔하게 닦인 손끝이 찬의 목 위를 꾹 눌렀다.

“흐윽…….”

숨이 턱 막혔다. 얼굴에 피가 쏠렸다. 헉헉거리면서 숨을 들이마시자 윤도가 그제서야 손을 떼어 냈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윤도가 뺨을 툭툭 쳤다.

“정액 범벅인 것 같고 보기 좋네.”

그 말과 함께 그가 방을 나섰다. 찬은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침대에도 쏟아진 죽으로 흥건했다. 찬은 허연 죽이 말라붙을 때까지 멍하니 누워 있다 한참 후에 욕실로 들어갔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배가 한 뼘씩 자라는 기분이었다. 찬은 아래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래도 겨우 밋밋함을 유지하고 있던 배는 이제 누가 봐도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찬은 배 위를 더듬었다. 아기가 보고 싶다거나, 소중하다거나, 그런 생각은 손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몸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찬의 머릿속은 시시각각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배가 나오고 가슴이 살짝 부풀었다. 조금 살집이 붙었나? 싶을 정도긴 하지만 확실히 가슴이 나왔다.

‘거짓말.’

가슴을 쿡 찔렀다. 예전 같았으면 얇은 피부 밑에 자리한 뼈가 바로 만져졌을 텐데. 이번에는 약간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손끝이 다시 가슴께를 쿡 찔렀다. 근육은 아니었다. 윤도의 근육은 이런 감촉이 아니었으니까. 배를 더듬던 찬은 손톱을 세워 배 위를 긁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배가 나온 이유가 뭐든, 이것만 없으면 모두 해결되는 거 아닌가. 윤도가 새끼를 바라서 이 모든 벌어졌으니, 이 결과물이 없다면 그는 그냥 찬을 놔 줄지도 몰랐다.

찬의 길지 않은 손톱에도 상처가 났다. 따끔한 아픔이 있는 곳을 계속 벅벅 긁어냈다. 피 냄새가 났다. 아팠다. 얼마나 더 파내야 배 안에 있는 기생충을 꺼낼 수 있을까.

“꺼내버 리면 되잖아, 꺼내면…….”

그리고 그냥 그걸 오윤도에게 줘 버리고, 보내 달라고 하자. 새끼를 가지고 싶어 했으니까. 그냥 원하는 걸 주고 나면 찬은 필요 없어지겠지. 찬은 중얼거리면서 상처를 헤집었다. 피부가 찢어졌다.

멈출 수가 없었다. 찬의 손이 피에 젖었다. 오윤도는 항상, 항상, 항상 그를 힘들게 했다. 고통스럽고 아프게 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손가락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피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피 냄새가…….”

윤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큼성큼 욕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꺼내 줘야 돼…….”

찬이 중얼거렸다. 지금 그냥 줘 버리고, 보내 달라고 하자. 그의 마른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피로 손바닥이 질척거렸다.

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리 문을 잠가 놔서 다행이다. 찬은 눈을 깜박이다가 거울 속을 쳐다봤다. 볼록하게 나온 배의 상처 아래로 피범벅이었다. 다급하게 상처를 더욱 파고들었다.

“유찬! 찬아. 찬, 뭐 하고 있어?”

화난 듯 버럭 외쳤다가 뒤로 갈수록 다정해졌다.

“위험한 짓 하는 거 아니지? 이거 좀 열어 봐. 유찬, 열어 보라고.”

다시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흐으…….”

이를 꽉 악물었다. 손톱으로 상처를 더욱 찢었다. 그 순간 문이 그대로 부서졌다.

“…좋은 말로 할 때 열어.”

찬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윤도의 서늘한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루룩 흘러내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금, 조금만 기다려 봐.”

“유찬.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이거 너 줄 테니까…….”

상처를 더 헤집었다. 새끼는 대체 어디쯤 있는 걸까. 숨이 가빠졌다. 커다란 손이 피투성이 손을 꽉 붙잡아 위로 올렸다. 낮은 욕설이 들려왔다.

“지금 배 가르고 새끼를 꺼내 주겠다, 이 말이야?”

“그래. 원하는 거 줄 테니까. 난… 난 갈래.”

집에 가고 싶다. 찬이 버둥거렸다. 윤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넌 새끼 꺼내도 못가.”

“왜?”

“넌 내 암컷이니까.”

“왜?”

악을 쓰듯 되물었다. 그가 왜 그딴 것을 묻느냐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이유가 뭐가 필요해? 네가 내 암컷이라 그렇다고.”

“…….”

“다르게 말해 줄까?”

“…….”

“네 구멍이 내 전용 구멍이라 그렇다고.”

찬이 숨을 헐떡였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위로 붙들린 팔을 뒤흔들었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오윤도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오윤도…….”

“내 암컷이 내 새끼를 뱄으니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었는데, 왜 자꾸 화나게 만들어. 응? 찬아.”

상냥한 말투와 함께 손끝이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커다란 손으로 턱을 꽉 붙잡았다.

“다정하게 지내면 좋잖아. 새끼한테도 좋을 거고.”

혀가 코끝에 닿았다. 찬이 숨을 헐떡였다. 윤도가 쪽 소리를 내면서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싫어.”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때리지 않는 게? 목을 조르거나 구멍을 찢어 버리겠다고 협박하지 않는 게? 아니면 강간하지 않는 게?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윤도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그래도 어떻게든 좋게, 그냥 흐르듯이 생각하려했던 모든 것들을 지워 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옅게 품었던 희망을 모조리 걷어냈다.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은, 밑바닥에 깔려있던 증오와 원망뿐이었다. 찬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 선명한 감정이 실렸다.

“네가 어떻게 해도, 나는… 널 증오할 거야.”

이를 꽉 악물었다. 윤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든지. 잘됐네, 날 증오해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미친 새끼. 증오한다는 말에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오윤도가 입을 맞춰 왔다.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아.”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지며 머리가죽이 뜯겨 나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흐…….”

찬이 미친 듯이 웃었다. 입속에 피 맛이 났다. 윤도가 보란 듯 혀를 내밀었다. 피가 뚝 떨어졌다. 톡톡 흐르는 핏방울이 찬의 뺨에, 눈 위에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세상이 핏빛으로 보였다.

“마음에 들어.”

“미친 새끼.”

“왜. 자지도 물어뜯어 보게? 뒷구멍으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벅지를 꽉 붙였지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손쉽게 다리가 벌어졌다. 찬이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렀다. 가까이 바짝 붙은 남자는 어떻게 밀어내야 할까. 버둥거리면서 어깨를 밀다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피투성이 혀가 목덜미를 핥고, 가슴을 핥았다. 길게 이어지는 핏자국이 오싹했다.

“흐윽!”

찬이 윤도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임신한 것을 그가 깨달은 뒤로 한 번도 안지 않았었는데. 단숨에 밀고 들어오는 자지를 기다렸다는 듯 반기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벌어지긴 잘 벌어졌어도 메마른 건 어쩔 수 없는지 구멍이 욱신거렸다.

“자, 힘줘서 물어뜯어 봐. 너 잘하잖아, 구멍 조여서 내 자지 뜯어 가려는 거.”

“읏. 흐…….”

최대한 온몸에서 힘을 뺐다. 윤도가 픽 웃으면서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발끝이 바닥에서 자꾸 떨어졌다. 불안정하게 들린 몸 때문에 윤도의 온 체중을 실은 채 자지에 푹푹 박혀야 했다.

“아… 아으…….”

찬이 어떻게든 발을 디디려고 버둥거렸다. 그때마다 힘이 바짝 들어가는 몸 덕분에 구멍이 꽉 조였다.

“잘하네. 조금 더 하면 진짜 물어뜯겠어, 응?”

마른 피부가 마찰하는 게 아팠다. 고개를 흔들어 봐도 윤도는 멈추지 않았다. 화장실의 매끄럽고 차가운 벽에 닿은 등이 욱신거렸다.

“그. 흐윽… 그만……. 읏. 응……!”

피 냄새가 났다. 찬이 윤도의 머리카락을 당기다가 어깨를 미친 듯이 밀어냈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혓바닥이 뺨으로 올라왔다.

“하…….”

나지막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찬이 신음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마다 파고드는 감각에 머릿속이 번쩍거렸다.

“그만?”

윤도가 비웃듯이 말하면서 또 질질 싸고 있는 찬의 자지를 문질렀다.

“흐윽… 읏. 으…….”

“만질 때마다 진짜 물어뜯길 거 같은데. 조금 더 힘내 봐, 그러면 정말 뜯어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손끝이 귀두를 만지작거리다 구멍을 문질렀다. 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피 냄새가 나는 혀가 관자놀이까지 올라왔다.

“그만… 그…….”

온갖 감정이 찬을 짓눌렀다. 어두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눈앞을 가렸다. 증오스러운 오윤도의 얼굴도, 뒷구멍을 들쑤시는 자지의 감각도, 모든 것을 아득하게 멀어지게 만들었다.

‘도망가고 싶다.’

오직 그것만 바랐다. 찬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일어났을 때 찬은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햇빛을 거의 못 봐서 창백하게 질린 피부 위에 검붉게 남은 긴 자국은 윤도의 혀가 지나간 흔적이었다.

멀거니 몸을 내려다보다가 욱신거리는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손끝으로 부어오른 구멍을 살짝 누르자 정액이 기다렸다는 듯 줄줄 흘렀다. 그 양을 보니 기절한 동안 얼마나 쑤셔 댔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서 찢었던 피부는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피와 정액으로 엉망진창인 몸에서 유일하게 상처 주변만이 깨끗했다. 하얗게 붙은 붕대를 발작하듯 뜯어냈다.

“…….”

새끼를 꺼낼 만큼 깊게 파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무척 얕았다. 일주일쯤 지나면 딱지까지 떨어질 정도로.

찬은 멍하니 상처 위를 만지작거렸다. 따끔한 아픔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에서, 오윤도에게서, 배 속에 든 새끼에게서.

‘그냥 내가 죽는 게 제일 빠를까?’

그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찬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제일 편하다. 할머니를 생각해서도 자살만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 고통을 벗어나려면 죽는 것이 제일 확실했다.

“…할머니, 미안해. 미안…….”

찬이 중얼거리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고 서랍을 열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미안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어, 내 탓이 아니야. 찬은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벌벌 떨리는 손이 침실의 모든 서랍을 열어젖혔다.

찾는 게 없었다. 찬은 천장을 쳐다봤다. 마땅히 천이나 줄 같은 걸 맬 만한 곳도 없다. 어떻게 죽을까. 그는 벽에 기댄 채 침실 밖으로 나섰다. 윤도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를 흘깃 쳐다봤다.

“찬아, 배고파? 일찍 일어났네.”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찬은 그걸 무시하고 벽을 짚은 채 부엌으로 향했다.

“좀 씻지 그랬어.”

걸을 때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른 정액이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찬이 발을 질질 끌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쓴 흔적 없이 말끔한 공간이었다. 마치 어딘가 광고에 나올 것 같은 그런 곳. 찬이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하나하나 열었다.

부엌과 마찬가지로 쓴 흔적이 조금도 없는 예쁜 식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찬아, 뭐 먹고 싶어서 그래?”

뒤에 목소리가 들렸다. 찬이 벌벌 떨면서 더욱 빠르게 온 사방을 열었다. 그러다 길쭉하게 생긴 서랍을 열었을 때, 찾던 것을 발견했다.

나란히 꽂힌 칼. 찬이 그것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빼 들었다. 날카로운 쇠붙이 위로 빛이 미끄러졌다.

‘손목……. 아니, 아니야. 손목은 응급처치하면 살릴 수도 있댔으니까.’

밖에 윤도가 있다. 그러면 확실히 죽을 방법을 택해야 했다.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찬이 목을 더듬었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뛰는 곳을 확인하고 칼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약간 두렵긴 했으나, 계속 오윤도의 곁에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찬이 눈을 질끈 감고 목으로 칼을 푹 찔렀다.

“…이젠 자살하려고?”

고통 대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꽉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다 벌벌 떨리면서 칼을 툭 떨어뜨렸다. 찬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야가 정신없이 뒤흔들렸다.

윤도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암컷이구나.”

“…….”

“그나마 묶어 두는 건 너무한 것 같아서 풀어 준 건데. 이런 짓을 하네.”

빙긋 웃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찬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긴 손가락이 턱을 단단히 붙들자, 뼈가 부서질 것처럼 아파 왔다. 윤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조금 내려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주려는 듯 기괴한 표정에 또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윤도는 욕이라도 할 것처럼 턱에 힘을 꽉 주더니, 짐승 같은 소리를 내곤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그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다정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정말 내 암컷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은데. 자꾸 날 화나게 하네.”

회색 눈동자 속에 즐거움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찬은 그 눈을 노려봤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윤도가 더 증오스러웠다.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이 감정을 쏟아낼 단어를 찾지도 못했다. 가빠지는 숨을 겨우겨우 내뱉었다.

“아.”

갑자기 윤도가 진심으로 웃었다. 짙은 회색 눈동자에 즐거움이 깃들었다.

“증오든 뭐든 그렇게 감정을 담아 봐. 훨씬 보기 좋잖아.”

손등이 뺨을 툭툭 건드렸다. 찬은 눈을 감아 버렸다.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어둠에 붙들렸다.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생각보다 일찍 깼네.”

언제 또 잠든 걸까. 찬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니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얌전히 있어.”

고개를 이리저리 뒤틀어 주변을 쳐다봤다. 찬의 양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침대 머리맡에 못 박혀 있었다. 그리고 다리 역시 무릎과 발목이 단단히 묶여 쇠사슬로 침대에 연결된 채였다.

“아.”

아? 찬이 입을 우물거렸다. 입속에 무언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혀로 더듬어 보니 질척하게 젖은 천이 느껴졌다.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그냥 토할 것 같았다.

“혀라도 깨물면 안 되잖아. 그 혀로 내 자지도 핥고 해야 하는데.”

재미있다는 듯 웃는 소리와 함께 윤도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찬이 몸을 뒤틀었다. 철컥거리는 소리만 났다.

“가만히 있어. 어차피 네가 풀지도 못할 테니까.”

가슴께를 꾹 누른 손바닥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이젠 제법 부른 배를 쓰다듬은 윤도가 웃으면서 일어섰다.

“돌아오면 풀어 줄 테니까 그동안 좀 자고 있어.”

그 말과 함께 그가 침실을 나섰다. 당연한 듯 잠기는 소리가 났다. 홀로 남겨진 찬은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손목이 다칠까 봐 걱정이었는지 부드러운 천으로 손목을 꽁꽁 감싸고 수갑을 채워 뒀다. 발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읍!”

혀를 꾸물꾸물 움직여 봤지만 입안에 든 걸 뱉어 낼 수 없었다. 찬이 허우적거렸다. 팔다리를 미친 듯이 흔들다가 지쳐서 축 늘어졌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잠들었다가 또 깨어나서 몸부림쳤다.

결국 결박을 풀지 못한 채 윤도가 오는 시간까지 찬은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다.

* * *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윤도는 나갈 때면 늘 찬을 묶어 뒀다. 풀어져 있는 동안은 자해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윤도에게 붙잡혀 억지로 음식을 넘겨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또 강간당하든지.

먼저 지친 건 찬이었다. 윤도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늘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죽을 입속에 부어 넣었고, 증오스러운 눈빛에 흥분한 자지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찬의 팔다리를 구속했고, 자해를 막을 때는 늘 화를 냈다.

‘내가 먼저 미쳐 버릴 것 같아.’

아니, 오윤도는 원래 미친놈이었으니까 거기에 물드는 것뿐이다. 찬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문고리에 목을 매려다가 실패했다.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사슴일 때 어떻게 앉아 있었더라. 인간의 몸으로 어설프게 그 자세를 따라 했다. 무릎을 구부리고, 양팔을 굽혔다. 사슴이었던 때처럼 손을 안쪽으로 굽히려니 힘들었다.

찬이 괴상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자 윤도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찬아, 뭐 하고 있어?”

기분이 또 제법 괜찮아졌는지 다정한 물음이 나왔다. 찬은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시 사슴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새끼도 유산되지 않을까. 사람과 짐승은 다르니까. 설마 인간의 몸으로 사슴 새끼나 늑대 새끼를 낳진 못할 것 아닌가.

‘아니면 사슴의 몸으로 인간을 낳는 것도 못 할 테고.’

하지만 찬은 엉겁결에 인간이 되었으니, 다시 사슴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몰랐다. 윤도는 날 때부터 수인이었으니 잘 알고 있으리라. 윤도와 말을 섞기도 싫었지만, 방법을 물어 볼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사슴… 사슴이 될래.”

“갑자기 왜?”

“사슴이 되고 싶다고! 날 그 꼴로 만든 건 너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해? 어? 사슴 좋아했잖아. 짐승인 거 좋잖아.”

찬이 악을 썼다가 배실배실 웃으면서 말을 끝냈다. 윤도가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뺨을 매만지더니 웃었다.

“넌 못 돌아가.”

“왜? 너도 못 해? 왜 못해? 난… 나 사슴이었는데, 그거 다 꿈이야? 왜? 왜 못하냐고!”

사슴이 되면 다 해결될 것 같았는데. 찬이 미친 듯이 악을 썼다. 윤도가 픽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 소파에 기대앉은 그가 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임신한 암컷은 새끼를 낳을 때까진 못 변해. 저번에 말해 줬는데. 우리 찬이는 멍청해서 기억 못 하는구나?”

“…왜?”

“왤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도 네가 사슴일 때 새끼 밴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랬으면 난 네가 새끼를 낳을 때까지 사슴 뒷구멍에 박아야 했을 텐데.”

찬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윤도가 그의 눈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고개 들어.”

그는 증오 가득한 찬의 눈을 유독 좋아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긴 손가락이 턱 아래로 들어오더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끔찍해.’

그다음에 올 것이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찬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보고 싶지 않아.”

“…….”

“보기 싫다고…….”

숨이 가빠졌다. 찬이 그의 손을 뿌리치곤 벌떡 일어나서 침실로 달려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뒤따라오는 소리는 없었다. 만약 문을 닫았다면 부수고서라도 들어왔겠지. 열린 문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안심했다.

‘보기 싫어…….’

그래, 오윤도가 보기 싫었다. 죽는 방법으로 벗어나지 못하면, 그냥 도망칠까. 그동안 몇 번 현관문을 철컥거려 본 적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도망갈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 해서 납치될 때처럼 창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래……. 나가는 거야.’

제법 좋은 생각 같았다. 오윤도가 올 수 없는 곳까지, 아주 아주 멀리 가자. 찬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나가지?’

호텔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간 건 단 한 번뿐이었다. 호텔 밖은 분명 수인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오윤도에게는 부하들도 있고. 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임신한 것을 깨닫고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외출은 뚝 끊긴 상태였다. 한가한 드라이브를 하거나, 쇼핑을 하던 일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다시 나가면……. 기회가 있을 텐데.’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나가기만 하면 된다. 윤도가 손을 잡고 다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찬을 감시하진 않았다.

그땐 윤도가 찬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던 좋은 시절이었으니까. 픽 웃음이 나왔다. 새끼 때문인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찬은 배 위를 더듬었다. 이제 제법 불룩해진 배는 헐렁한 옷으로 가려도 어? 싶을 정도였다.

찬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배 위를 짓눌렀다. 차라리 그냥 중간에 유산했으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순조롭게 자라고 있다니. 제대로 먹은 게 없어도 아기는 찬의 온몸을 쪽쪽 빨아 먹으면서 잘도 자랐다.

미친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린 건 오윤도였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증오스러운 짐승.

‘어떻게 나가지.’

갑자기 친근한 척, 다정한 척 그에게 애교라도 떨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갑자기 아기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찬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연기라 해도 그건 할 수 없다. 아니, 나중에 필요하면 할 수 있을 거라 해도 아직은 아기의 존재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찬, 자?”

톡 하고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포기한 거야?”

“…….”

“좀 더 사슴처럼 굴어 봐. 그러면 변할지 알아?”

비웃는 소리다. 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침대가 흔들렸다.

‘벌써 포기한 거냐고?’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새까만 줄만 알았던 세상은 옅게 스며드는 빛으로 옅어진 어둠을 두르고 있었다.

포기하는 건 찬이 제일 잘하는 것 아니었나. 단 한 번, 딱 한 번 포기하지 않았던 그 일이 커다란 개였고. 그 일이 인생을 이토록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때 그냥 포기해야 했다.

‘그래, 그냥 다 놔 버린 듯이 있으면…….’

그러면 윤도도 다시 다정해지겠지. 언제나 찬은 그랬으니까. 예전으로 돌아간 줄 알고, 다시 데리고 나갈지도 모른다.

찬은 눈을 감았다. 이불을 걷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 자는 거 알아, 눈 떠.”

고분고분 눈을 떴다. 시야 끝에 윤도의 얼굴이 비쳤다. 모든 것을 놔 버리자 생각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이를 꽉 악물었다.

윤도가 만족한 듯 손바닥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그가 늘어져 있는 찬의 다리를 붙잡아 들었다. 그냥 멀거니 천장을 쳐다봤다.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가 지나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미끈하고 차가운 젤이 구멍 위에 닿았다. 손가락 대신 바로 귀두가 닿았다. 슬슬 문지르듯 움직인 자지가 단숨에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흐응!”

찬이 베개를 꽉 붙잡았다. 긴 손가락이 약간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슬슬 문질렀다. 살집이 붙어 말랑해진 가슴을 문지르듯 손끝으로 누르다 살짝 단단해진 젖꼭지를 비틀었다.

“읏…….”

시야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윤도의 손이 허벅지를 더욱 벌렸다. 그가 얼마나 깊이 들어오든, 더 이상 배 위로 자지를 만질 수는 없었다.

윤도가 볼록해진 배를 슬슬 쓰다듬으면서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찬은 입술을 씹으면서 신음을 참아보려 노력했다.

“이제 배가 제법 나왔네.”

자지가 느리게 빠져나가는 감각에 발끝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 으흣…….”

“오늘은 싫단 소리 안 해?”

낮게 웃는 소리와 함께 윤도가 거칠게 허리를 들이밀었다. 단숨에 안쪽을 파고든 자지가 움찔거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찬이 헐떡이면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웃음기 어린 회색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쿡쿡 웃는 숨소리가 목덜미를 뜨끈하게 적셨다.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은 윤도가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안쪽을 헤집었다. 끼익거리는 침대 소리가 거슬렸다.

“흐윽… 읏. 응!”

찬은 베개를 꽉 움켜쥐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이 끝나길 기다렸다. 평소라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아세우고 늘어진 몸뚱이에 신나게 좆질을 해 댔을 텐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윤도는 예전으로 돌아간 듯 등 뒤에서 찬을 안고, 손으로 배 위를 더듬었다.

‘반항을 안 해서 그런가.’

찬은 그의 손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그러나 금세 다시 커다란 손이 배 위에 닿았다. 어느새 약간 부푼 배가 아직도 낯설고 두려웠다.

기생충, 짐승의 새끼, 정신을 갉아 먹는 것.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등 뒤에 닿은 윤도의 체온이 오싹하게만 느껴졌다.

억지로라도 잠들어 보려고 눈을 감았다.

* * *

자해에 대해서만큼은 윤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찬도 굳이 윤도가 없는 동안 풀어 달라 설득하지 않았다.

얌전히, 모든 것을 놔 버린 것처럼 행동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윤도는 방에 카메라를 설치하고서 찬을 풀어 줬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했다. 그 행동이 찬에 대한 신뢰를 높인 듯했다. 윤도는 다시 제법 다정해졌고, 더 이상 강간하지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음식을 먹이지도 않았다.

“…오늘도 나가?”

“가지 말까?”

윤도가 픽 웃었다. 찬은 눈을 내리깔았다. 윤도가 나가는 요일은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목요일이었다.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까 윤도의 일정을 확인한 것뿐이다.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적거렸다. 입맛은 없었지만, 이렇게 먹으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윤도는 얌전히 찬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동안 여기에서 수십 일을 지냈지만, 윤도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도 잘 몰랐으니, 그냥 가면 가는가 보다 오면 오는가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체념한 척 얌전히 지내기 시작하면서 그가 나가는 요일을 체크했다. 그렇게 체크해본 결과, 윤도는 늘 월, 화, 목에 외출을 했다.

‘하지만 오윤도가 없다는 것만으로 여길 탈출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그 수많은 수인들을 뚫고 나갈 방법도 없다. 찬은 밥알 몇 개를 꾸역꾸역 씹어 넘겼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윤도가 고개를 까닥였다.

“더 먹어.”

“…입맛이 없어.”

“더 먹어.”

찬은 윤도를 쏘아 봤다. 그가 덤덤하게 시선을 받아쳤다.

“…다른 거 먹고 싶어.”

“다른 거?”

먼저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처음이었다. 입술이 떨렸다. 정말 오윤도가 들어 줄까. 언제나 말만 하라고 하긴 했으나, 찬이 진짜로 말한 적은 없다.

“그래, 다른 거.”

어영부영 대답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호텔에서 바로 준비하지 못할 만한 거. 오윤도가 밖에서 사야 하는 게 뭐가 있을까. 찬은 그동안의 외출에서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 않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날 데리고 나갈 만한 거.’

윤도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거 뭐. 너무 많아?”

“맞아. 너무 많아.”

“그럼 더 열심히 생각해.”

나가자는 말이 없다. 찬은 가물가물한 머리를 애써 굴렸다. 뭐가 있었을까.

“…영화관 팝콘. 그거 먹고 싶어.”

그 말에 윤도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팝콘이 먹고 싶어?”

“그냥 팝콘 말고. 영화관 팝콘.”

찬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 말에 그가 다시 웃었다.

“왜. 새끼가 먹고 싶대?”

“…….”

그렇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새끼를 팔아서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딱 달라붙었다. 처음부터 없었으면 하는 것을 이용하려면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 알았어. 사 올게.”

윤도는 더 이상 식사하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찍 들어올 테니까 기다려. 그동안 뭐 먹을 거면 먹고.”

“…그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

끝까지 같이 나가잔 소리는 없었다. 찬은 식탁 위에 엎드렸다.

‘실망할 때가 아니야.’

자해사건 이후로 그를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슬금슬금 솥 안의 개구리 삶듯 천천히, 하나씩 해 나가면 된다.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불룩해진 배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렸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하면 또 오윤도가 난리 칠 테니까, 약하게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가서, 나가서…….’

나가서 뭘 어쩌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임신한 남자다. 주변 시선이 얼마나 괴상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은 오윤도와 그의 씨 때문이었다. 증오스러웠다.

“흐윽…….”

눈물이 뚝뚝 흘렀다. 찬은 볼록해진 배를 주먹으로 쿡 때렸다. 도망쳐야 했다. 나가야 했다. 새끼야 유산되든 말든, 어떻게든 되겠지.

‘서두르지 말자.’

아직 시간이 남았다. 찬은 심호흡을 하면서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윤도가 커다란 팝콘 통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곳에서 먹었을 때 보다 훨씬 눅눅하고, 맛이 없었다. 그때도 딱히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맛있어?”

찬은 하나를 겨우 씹어 넘겼다.

“…별로야.”

그 말에 윤도가 기분 나빠하는 대신 웃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는 선뜻 팝콘 통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먹고 싶은 게 생겼다는 건 좋은 거야.”

웃는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멀거니 쳐다보는 찬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춘 윤도가 사랑스럽다는 듯 뺨을 쓰다듬었다.

이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 찬에게는 늘 짐승이었다. 그 밑에 깔린 잔인함을 몰랐으면 차라리 행복했을까.

찬이 윤도를 외면하고 누웠다. 잠시 뒤에 체온이 닿았다. 또다시 커다란 손바닥이 배 위를 덮었다. 메마른 눈이 쓰렸다.

지분거리는 손짓도 무엇도 없이 윤도가 목 뒤에 입을 맞췄다. 아마도 흔적이 남았을 잇자국을 혀끝으로 쓸었다. 찬은 느린 한숨을 내쉬고 잠을 청했다.

* * *

그 뒤로도 찬은 생각나는 음식들을 요구했다. 윤도가 나갈 때도, 나가지 않을 때도. 티브이를 보다가 불쑥 저게 먹고 싶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도 윤도는 끝까지 ‘나가자’는 한마디를 안 했다.

찬은 굳은 얼굴로 리모컨을 꾹꾹 눌렀다. 티브이 화면이 정신없이 바뀌었다.

‘돈이 좋긴 좋네…….’

뭐든 포장이 안 되는 게 없다. 고급 레스토랑에 예약제로 운영된다는 가게를 찍어도 윤도는 어떻게든 포장을 해 왔다. 물론 대부분은 제 친구들을 시켜서.

그렇게 포장해 온 것들은 하나도 맛있지 않았다.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심지어는 살아 있는 생선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어떻게 공수했는지 펄떡펄떡 뛰는 멸치를 가져오기도 했다.

멸치는 엄청 성질이 급해서 물 밖에 나오면 죽는다고 했는데. 찬은 티브이에서 떠들던 소리를 떠올렸다. 물론 먹진 못했다. 오히려 생선의 비린내 때문에 팔딱거리는 멸치를 앞에 두고 토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윤도가 픽 웃었다. 찬은 계속 리모컨을 꾹꾹 눌렀다. 채널이 끝도 없이 바뀌다가 1번으로 다시 돌아갔다. 또다시 숫자가 차근차근 올라갔다.

이제 더 이상 생각나는 것도 없다. 찬의 머릿속에 든 모든 음식을 꺼내 전시한 후였다. 멍하니 기계처럼 버튼을 누르던 그는 손가락을 멈췄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윤도가 손을 잡아 끌었던 커다란 곳이 떠올랐다. 살면서 처음 본 화려한 백화점. 찬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쇼핑 갈래.”

“쇼핑?”

윤도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픽 웃었다.

“뭘 사려고?”

“…몰라.”

“물건 구경하고 싶어?”

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가 잠시 생각하더니 픽 웃었다. 그가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 나가냐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말로 꺼내진 않았다. 얌전히 있자. 스스로를 달랬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아직 나가겠다고 요구하긴 일러…….’

쇼핑하고 싶다는 말에도 윤도는 나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좀 더 신뢰를 쌓아야 한다. 찬은 다시 채널을 돌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카탈로그가 들어왔다.

“자, 마음껏 구경해.”

“…….”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찬은 가까이 떨어진 카탈로그를 대충 넘겼다. 가격도 안 적혀 있었다. 반짝이는 종이 위에 인쇄된 물건들은 하나같이 비싸 보였다.

윤도의 시선이 느껴졌다. 뭘 고를지 흥미롭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사실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찬은 느릿느릿 카탈로그를 넘기고 또 넘겼다.

‘필요한 게 있을까.’

우선 도망칠 때 필요할 만한 거.

찬은 다리를 달달 떨면서 종이를 넘겼다. 그러다 신발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값비싸 보이는 남성용 구두들을 넘기고 나니 매끈한 모양의 운동화들이 보였다. 찬은 맨발을 꼼지락거렸다.

신발장에 찬의 신발들이 가득 들어 있긴 했으나, 윤도의 취향인지 단정해 보이는 단화나 구두들이 대부분이었다. 찬이 카탈로그를 북 찢었다.

“이거 사 줘.”

윤도가 그걸 받아 들더니 픽 웃었다.

“그래.”

그날 저녁이 되기 전, 찬은 수많은 쇼핑백을 전달받았다. 사달라고 했던 운동화는 색상별로 다 있었고, 부른 배를 감출 수 있을 만한 헐렁한 셔츠와 외투, 그런 것들이 사용인의 손에 의해 차곡차곡 옷장에 걸렸다.

그 이후로 찬은 매일같이 윤도에게 이걸 해 달라 저걸 해 달라 요구하고 또 요구했다. 손도 대지 않고 버려질 음식, 한 번 써 보지도 않고 구석에 처박히거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물건.

모든 것들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 걸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윤도는 끝없는 요구를 다 들어줬다. 찬은 소파에 누웠다. 오늘도 윤도가 나가는 날이었다.

‘목요일…….’

말끔하고 휑하던 호텔 방은 어느새 이런저런 물건들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찬이 옷을 만지작거렸다. 헐렁한 핏의 후드티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배가 나온 게 거의 티가 나지 않는 기분이었으니까.

멍하니 발을 까닥거리던 찬은 유일하게 윤도가 ‘불쾌한 기색’을 보이던 걸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 카탈로그를 북북 찢어 건넸는데, 그중에 향수가 섞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쁜 유리병에 담긴 연노랑 색의 액체를 흔들다가 칙 뿌렸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분명 인상을 찌푸렸지.’

찬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오윤도가, 늘 옅게 웃거나 무뚝뚝한 얼굴을 하던 그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그가 짐승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찬은 스스로의 팔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았다. 옅은 바디워시 냄새와 세탁한 옷의 냄새가 났다. 생각해 보니 호텔 방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냄새가 옅었다. 샴푸, 바디워시, 비누 등.

‘개…….’

오윤도가 늑대인 것과 달리 친구들은 개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말로 개새끼 어쩌고 하는 것들을 들었으니까. 만약 도망간다면 그들이 추적하리라. 찬은 스스로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도망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약간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나가느냐인데…….’

짙은 향수 냄새가 짐승들의 후각을 괴롭히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로 일부러 향수를 깊이 봉인시켰다. 그런 건 즐기지 않는다는 듯이, 찬은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도망치기로 결심한 지 벌써 한 달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오윤도의 기분은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어째서 믿음을 주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까. 찬은 약간 불안한 기분으로 소파에서 비척비척 일어섰다.

이대로 새끼를 낳을 때까진 어떻게든 가둬 두려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창문에 달라붙었다. 바로 이렇게 보이는데도 나갈 수가 없다. 찬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찬, 뭐 하고 있어?”

등 뒤에서 약간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도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창 너머로 보였다. 찬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동안 요구한 것들이 터무니없다 해도 윤도는 다 들어줬다.

물론 ‘반드시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것들은 일부러 요구하지 않았다. 괜한 의심을 사서는 곤란했으니까. 찬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대로 계속 윤도가 먼저 ‘나가자’는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간 영영 못 나갈 것 같았다.

‘괜찮겠지.’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영화 보고 싶어.”

“보면 되잖아.”

약간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찬이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윤도가 넥타이를 죽 잡아당겨 푸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관 가고 싶다고.”

다른 것보다 영화관을 먼저 얘기했다. 윤도가 그와 외출하는 날이면 당연하다는 듯 늘 영화관을 갔으니까. 그에게 뭔가 의미가 있는 거라면 조금 더 쉽게 승낙해 주지 않을까. 찬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침묵이 흘렀다.

“찬아, 너 임신했어.”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뺨에 손바닥이 닿았다. 숨이 턱 막혔다. 그건 누구보다도 찬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멀거니 올려다보자 윤도가 웃었다.

“임신한 남자의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말문이 막혔다. 손을 내려 제법 볼록해진 배를 만지작거렸다. 헐렁한 옷으로 가린다고 가렸지만 그래도 약간 부자연스러운 것까진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많이 없을 때 가면 되잖아. 그리고 어차피 둘이 보는데.”

그 말에 윤도가 고민하듯 입을 다물더니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

“지금 갈래?”

“응.”

“옷 입어.”

윤도가 넥타이를 소파에 던졌다. 그냥 정장 차림으로 가려는 듯 그가 느긋하게 앉았다. 이미 밤이 깊어졌다. 남은 건 심야 영화일까. 찬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헐렁한 외투를 찾아 입었다.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돌았다. 티가 안 나는 것 같다가도, 부자연스럽게 배가 나와 보였다. 찬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티 나도 괜찮아.’

우선 나가자, 그다음에 생각하자.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날 본 영화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보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던 것 같다. 깨 보니 호텔 침대 안이었다.

어쨌든 나갔다는 것만으로 중요했다. 단둘이 보는 영화는 이제 괜찮다는 뜻이다. 찬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제 나름대로는 임신해서 신경 썼다 이거지.’

일부러 내보내지 않으려던 게 아니라, 임신했으니까 신경 써 준 것이었다. 찬은 그 사실에 또 마음이 자근자근 짓밟혔다.

* * *

영화로 시작해서 찬은 천천히 종류를 넓혀 갔다. 영화관은 윤도가 혼자 대여해 버리니까 도망칠 수가 없다. 좀 더 사람이 많아야 했다. 개들이 냄새를 맡을 수 없도록.

찬은 유일하게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티브이를 열심히 봤다. 가끔 보이는 발레, 뮤지컬, 오페라, 연극 광고들을 보면 보러 가고 싶다고 윤도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을 했지만, 그는 결국 찬을 데리고 나섰다. 영화처럼 틀면 끝인 게 아니라서 그런지 자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붙어 있었다. 눈으로는 공연을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기회가 있을 거야.’

하다못해 오윤도라도 없으면, 그 친구들은 조금 더 느슨할 텐데. 찬은 얌전히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낼 때는 지독하게도 흐르지 않던 세월이었는데. 도망갈 날짜가 자꾸만 늦춰졌다.

매일같이 무언가를 해 달라 하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었다. 찬은 나갈 준비를 하는 윤도를 힐끔 쳐다봤다.

“오늘은 못 가.”

“…응.”

입을 꾹 다물었다. 윤도가 약간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일 같이 가 줄 테니까. 어디 가고 싶은지 생각해 둬.”

“그래.”

찬은 윤도가 나가는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일부러 윤도가 나가는 날엔 외출하자는 소리를 안 했다.

‘기회가 있을 거야.’

일부러 그가 나가는 날을 노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약속을 스스로 깨는 날이 오리라. 그때가 되면 윤도가 찬에게 미안해할 테니, 별 의심 없이 혼자 내보내 줄지도 몰랐다.

‘기다리자…….’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찬의 생각대로 기회는 금방 왔다.

일부러 마지막 공연 날을 잡았던 연극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찬에게 윤도가 정말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찬아, 내가 급하게 나가 봐야 돼.”

“…….”

“연극은 다음에 보자.”

기회다. 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최대한 의심스럽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그냥 연극을 못 본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 표현하면 되는 일이다.

찬은 표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마지막 공연이던데.”

윤도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조금쯤 미안해하고 있을까. 시선을 들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네가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찬은 티켓을 반듯하게 접었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동까지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외투를 벗었다.

“하…….”

곤란한 한숨 소리와 함께 윤도가 성큼 다가왔다.

“…다음에 가자.”

“…….”

다음엔 어차피 안 할지도 모른다. 크게 인기는 없는 공연인 것 같았으니까. 찬은 대답 없이 외투를 벗어 걸었다. 드레스룸을 나서려고 하자 윤도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찬아.”

긴 손가락이 팔을 아프도록 파고들었다.

“연극 꼭 보고 싶어?”

“…됐어, 못 간다며.”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윤도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찬이 그의 손을 떼어 내고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잠시 방안이 고요해졌다.

“찬아, 그럼 주훈이랑 갔다 와.”

주훈. 윤도가 제일 아끼는 친구인지, 통화할 때면 자주 들리는 이름이었다. 찬은 대답 대신 그냥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제 배가 제법 나와서 그런지 웅크린 자세도 불편했다.

드레스룸 안에서 뭐라고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입어.”

윤도가 직접 외투를 가져와 찬의 팔을 꿰어 넣었다. 단추를 잠가 주는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진짜 가도 돼?”

“그래, 보고 싶어 했잖아. 주훈이가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주훈의 존재로 걱정을 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윤도겠지. 감시할 사람이 있으니까. 비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현관에 선 남자는 윤도보단 작았지만 상당히 컸다. 190cm는 될까. 찬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훈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오며 가며 몇 번 얼굴을 보긴 했다. 찬 역시 어설프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데 새지 말고, 바로 데려와.”

“알았어, 걱정하지 마.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데려올 테니까.”

윤도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를 새기듯이 몇 번이고 숨을 쉬는 감각에 오싹해졌다. 도망친다면 찾아낼 수 있도록 냄새를 맡는 걸까. 찬은 양손을 꽉 쥐었다.

“잘 보고 와. 보고 싶어 했잖아.”

“…응.”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훈은 윤도처럼 손을 잡는 대신 경호원이라도 되는 듯 문을 잡아 주고, 지켜보기만 했다.

찬은 조심조심 걸었다. 극장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차 안은 적막했다. 윤도의 암컷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저 낯선 인물이라서 그런지, 주훈은 딱히 말을 걸려 하지 않았고 찬 또한 멀거니 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 준비도 못 했어.’

향수도 못 챙겨 왔고, 아직 도망칠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인기가 별로 없는 연극이라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이번엔 얌전히 돌아가자. 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 * *

인기가 그다지 없는 연극답게 자리는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게다가 내용은 어찌나 지루한지, 찬은 반쯤 졸면서 연극을 보다가 인터미션 시간에 벌떡 일어섰다.

“어디가?”

“…화장실에 좀.”

그 말에 주훈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다. 그것도 화장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기다렸다.

‘망할…….’

동성이라는 게 이렇게 불편한 거였나.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윤도에 이어 그의 친구들에게까지 신뢰를 얻어야 했다. 아무 문제없다, 잠깐 정도는 내버려 둬도 괜찮다, 다시 돌아온다. 그런 생각을 심어 줘야 한다.

찬은 별다른 반응 없이 얌전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주훈 역시 크게 의심하진 않는 눈치였다.

그날 연극을 기점으로. 찬은 조금 더 대담하게 나섰다. 윤도가 일을 나가는 날에 마지막으로 하는 공연이나 영화를 가고 싶다 요구했다.

마지막이니 어쩔 수 없다. 찬이 약간 체념한 듯 말을 꺼내면. 윤도는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주훈과 가는 것을 승낙했다.

영화를 이야기하자 당연하게 영화관을 전세 내려고 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주훈이랑 단둘이 보고 싶진 않아.”

그 말에 윤도는 눈을 크게 뜨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특하다. 그래, 단둘이 영화 보는 건 나랑만 하자.”

뺨을 토닥거리는 손길과 함께 그는 그냥 영화표를 두 장 끊어 줬다. 찬은 약간의 자유를 조금 더 손에 넣었다. 오늘도 함께 영화관에 들어간 주훈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지루해?”

“하하. 조금 지루하네…….”

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애써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애쓰더니 금세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찬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주훈이 바로 눈을 뜨고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 화장실에.”

찬의 말에 그가 일어서려고 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어. 금방 다녀올게.”

그 말에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했다. 찬은 주훈의 손을 뿌리치고 후다닥 밖으로 나섰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는 유혹이 발길을 붙잡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그냥 보내 줄 짐승들이 아니다. 게다가 다들 윤도를 대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찬을 너그럽게 풀어 놓을 리가 없었다.

찬은 화장실에 들러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 문 바로 뒤에 주훈이 서 있었다.

“왔네.”

그가 빙글빙글 웃었다. 마치 도망갈 거라 예상했다는 듯이. 순간 소름이 끼쳤지만 찬은 태연한 척 발을 옮겼다. 만약 화장실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갔다면 당장 질질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딜 가, 이 몸으로.”

그 말에 주훈이 약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찬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쳐다봤다. 점점 더 배가 불러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겨울이라는 것뿐이었다.

배를 가려 줄 만한 두툼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니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훈은 꾸벅꾸벅 졸았고, 찬은 조금 더 인내를 새겼다.

그 뒤로도 찬은 얌전히 윤도의 곁으로 돌아왔다. 주훈은 이제 찬을 믿기 시작했는지, 종종 화장실에 혼자 가겠다는 찬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윤도는 아무리 말해도 화장실까지 꼭 따라왔다. 주훈은 가끔 믿고 보내 줬다.

‘역시 오윤도가 있을 때는 못 도망치겠다.’

찬은 달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루하루 도망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벌써 연말이었다. 갇혀 지낸 지 벌써 몇 달째, 배는 이미 상당히 많이 나와서 누가 봐도 임신했다고 여길 정도였다.

매일같이 얌전하게 오갔다. 곧 연말이라 연인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날이 머지않았다.

‘그날이 도망치기 제일 좋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찬의 냄새를 제대로 쫓아오진 못하리라. 크리스마스이브도 딱 좋게 윤도가 외출하는 날이었다.

찬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선 도망칠 때 쓸 것들을 몰래 롱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비닐로 몇 겹이나 꽁꽁 둘러싼 향수 몇 개, 편한 운동화, 헐렁한 옷.

이브 날 저녁에 영화를 보고 싶다 우긴 덕분에 어렵사리 구한 자리 두 개는 상당히 구석이었다. 거기다가 무슨 예술영화 딱지가 붙어 있었으니, 주훈은 분명 꾸벅꾸벅 졸고 있으리라. 저녁 시간이 다 되자 기다렸다는 듯 초인종 소리가 났다.

“응…….”

찬이 꼼꼼하게 옷을 챙겨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다행히 윤도는 아침부터 외출하고 없다. 주훈이 찬을 아래위로 살피더니 픽 웃었다.

“완전무장이네.”

“…윤도가 춥대서.”

그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찬의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오늘이다, 오늘. 오늘 드디어 도망치는 거다.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움직였다.

끔찍한 오윤도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다정한 척하는 그 모습에 소름 끼치지 않아도 된다. 찬은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끼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극장에 도착한 주훈은 역시나, 영화가 시작된 지 십 분 정도가 지나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주변에 빼곡하게 앉은 커플들은 처음부터 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속삭이는 밀어들과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났다.

찬은 기다렸다. 조금 더 기다렸다. 2시간짜리 영화니까 시간은 넉넉하다. 옆 커플이 계속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흘깃거렸다. 영화가 시작된 지 40분. 주훈은 거의 코를 골 기세로 잠들어 있었다.

‘태연하게, 태연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찬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최대한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로 옅게 웃었다.

“잠깐 화장실 좀……. 자고 있어.”

“…그놈의 화장실.”

“몸이 이래서 어쩔 수 없어.”

“그래…….”

나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얌전히 몇 번이고 돌아온 덕분이다. 찬은 옆자리 커플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우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은 향수를 모조리 꺼내 비닐을 찢어 발겼다. 그러곤 입고 있는 패딩에 마구잡이로 뿌렸다. 패딩 바깥이 질척하게 젖어 고약한 냄새가 나도 멈추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향수 뚜껑을 아예 열려고 시도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냥 손가락이 아프도록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렸다. 주머니에 있는 서너 개의 향수를 엉망으로 뒤섞어 뿌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채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우선 냄새를 지워야 했다. 나중에 CCTV를 확인한다 해도 그건 나중 일이다. 찬은 정신없이 커다란 쇼핑몰 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밖… 밖으로 나가서.’

그다음엔 어디로 가지? 우선 나가자. 찬은 일 층으로 오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바깥의 공기는 무척이나 차갑고, 서늘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에 배인 짙은 향기가 흩어졌다.

찬은 걷고 또 걸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너무 막막했다. 무작정 걸었다. 배가 묵직하고,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아팠다.

짙은 향기를 계속 맡고 있다 보니 머리도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울렁이는 속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다가 그냥 패딩을 벗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벌벌 떨면서 걸었다. 배를 단단히 조였지만 그래도 부른 것을 어쩔 수는 없는지, 사람들이 흘깃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찬은 몸을 조금 웅크렸다. 부자연스럽게 나온 배가 약간이나마 숨겨졌다.

‘누구…….’

도움을 청할 사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찬은 추위에 덜덜 떨면서 웅크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유일한 친구, 정호. 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찬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그의 번호를 눌렀다.

* * *

정호는 카페 한구석에 벌벌 떨면서 앉아 있는 찬을 보곤 놀라서 다가왔다.

“찬아.”

“…정호야.”

오랜만이라든지,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몇 달 만에 보는 정호는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찬은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임신까지 했으니.’

의식적으로 몸을 더 웅크렸다. 조금 튀어나온 배에 시선이 닿았지만 임신이라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줘.”

찬의 말에 그는 놀란 얼굴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알았어, 도와줄게. 그런데 너 그러고 돌아다녔어? 외투도 없이? 또 이 냄새는 뭐야.”

입을 꾹 다물었다. 정호가 가볍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미안…….”

“뭘 도와주면 되는데?”

“돈… 돈 좀 줘.”

그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인상을 찌푸린 정호가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얼마나 필요해?”

“…많이. 많이……. 모르겠어. 현금이 필요해.”

“…….”

“갚을게. 진짜 어떻게든 꼭 갚을게. 내가 만약에, 정말 만약에 못 갚으면, 할머니 집 네가 가져. 집이랑 땅문서랑… 또 할머니 유산도 조금 있고. 또…….”

“유찬.”

그가 차갑게 식은 찬의 손을 꽉 잡았다. 더듬더듬 말을 내뱉던 입술이 얼어붙었다.

“우선 기다려 봐.”

정호가 벌떡 일어나서 카페를 나섰다. 찬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가만히 있는 순간순간이 두려웠다. 당장 누군가가 뒷목을 낚아챌 것 같았다.

“흐으…….”

몸을 웅크렸다. 오히려 향수 냄새 때문에 찾는 건 아닐까. 당장 옷을 몽땅 벗고, 벅벅 씻고 싶었다. 찬의 발이 덜덜 떨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정호가 꽤 큰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자.”

찬이 의아한 얼굴로 가방을 받았다. 무심코 열려고 하자 그가 손을 붙잡았다.

“여기서 열지 마.”

가방을 더듬더듬 만져보니, 지폐 다발로 느껴지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찬은 멍하니 가방을 쳐다봤다.

“고마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 정도면……. 심각한 거 같아서 그냥 도와주는 거야.”

“정호야,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 방에.”

“됐어.”

그가 픽 웃었다. 정호가 부유한 집 자식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찬이 더 잘 알았다. 윤도처럼 돈을 펑펑 써도 아쉽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이 가방에 든 건 그가 열심히 모은 돈의 전부일 텐데.

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정말 고마워…….”

“우선 외투라도 사 입고.”

“…….”

“입술이 새파라니까 따듯한 것도 좀 먹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메고 꽉 움켜쥐었다. 찬이 일어섰음에도 정호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또… 볼 수 있는 거지?”

“…응.”

“건강히 있어.”

그 말을 뒤로하고 카페를 뛰쳐나왔다. 우선 뭐부터 해야 할까. 찬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정호 말대로 우선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니 뒤섞인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찬은 망설임 없이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갔다.

* * *

이틀 동안 찬은 계속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빼곡한 지하철에 타기도 했고, 옷은 몇 번이고 사서 갈아입었다. 잠깐 들른 모텔에서 온몸을 박박 씻고 바로 나왔다.

정호가 준 돈은 생각보다 많았다. 샛노란 5만 원권으로 채워진 가방엔 3천만 원 정도가 들어 있었다. 벌써 백만 원 정도를 써 버렸지만 크게 아깝진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모든 것은 현금으로 해결했다. 찬은 기차역에 도착해서 의자에 앉았다.

‘시골로 갈까?’

할머니 집은 당연히 안 되겠지만, 다른 시골도 괜찮다. 시골에 사는 것은 익숙할 테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좋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찬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피하는 거라면 시골이 좋겠지만 그가 피해야 하는 건 짐승이었다. 그것도 냄새를 맡는 개들을 피해야 했다. 이미 호텔 방에는 찬의 냄새가 넘치도록 남아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냄새에 가려지는 쪽이 낫지 않을까.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도시에 머물면 CCTV가 마음에 걸리긴 했다.

‘냄새냐 CCTV냐…….’

찬이 머리에 쓴 모자를 꾹 눌러썼다. 감시 카메라는 어떻게든 변장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게다가 이미 배가 엄청나게 불렀으니. 더 이상 나돌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어차피 좋으나 싫으나 어디 한군데를 정해서 틀어박혀야 했다.

그러면 차라리 CCTV를 택하는 쪽이 낫다. 찬은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이 아주 많이 다니는 곳.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있는 곳. 수많은 냄새가 나는 곳.

‘모텔이나 고시원…….’

모텔도 좋긴 하겠으나, 그런 곳은 혼자 머무는 것이 이상했다. 장기 숙박을 한다는 것부터가 찾기 쉬운 조건일 테니까. 찬은 고시원을 찾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금액도 선불로 받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는 곳. 그냥 보기에도 뒷골목이었고 치안도 나빠 보였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당연히 방은 아주 좁았고, 그리 깨끗하지도 않았다. 복도에는 혹시 범죄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찬은 총무라는 사람이 준 열쇠를 꽉 쥐고,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하나에 작은 서랍과 행거 하나. 고물 같은 컴퓨터 한 대. 그리고 한 뼘 겨우 열리는 작은 창문을 가진 방. 그나마도 창문이 있어 조금 더 비쌌다.

“하…….”

찬은 문을 닫자마자 주저앉았다. 이 좁은 세상이 그가 겨우 찾은 안식처였다. 서늘한 공기는 약간 텁텁했다. 호텔만큼 좋지도, 넓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침대는 너무 딱딱해서 조금 누워 있으니 허리가 아팠다.

오윤도가 없다.

찬은 온몸으로 그것을 체감했다. 그가 없다. 그것이 너무나 기쁘고, 슬프고, 참담했지만, 안도했다. 눈을 감으니 눈물이 뚝 흘렀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냥 소리죽여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찬은 정신을 놓고 그냥 울었다.

* * *

눈물범벅으로 잠들었다 일어난 찬은 배를 더듬었다. 방금 전까지 안에서 움직이던 아기는 그가 손을 대자 죽은 듯 고요하게 침묵했다.

‘…싫다.’

사랑스럽지 않다. 누가 열 달 동안 품에 안고 있으면 모성애가 생긴다고 하는 걸 봤는데, 찬은 배 속의 이 존재가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았다. 그냥 끔찍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이제 밖에 나갈 수조차 없었다. 꽉 조여 맸던 천을 풀자 그동안 얼마나 배가 불러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티가 안 난다고 스스로를 속여 왔는데, 아무리 헐렁한 옷을 입었다 해도 티가 안 날 수 없는 크기였다.

찬은 고물 같은 컴퓨터를 켰다. 느려터진 인터넷 창이 뜨는 걸 멍하니 지켜보다 천천히 타자를 쳤다.

‘낳고 싶지 않아…….’

낙태하는 방법을 수도 없이 찾았다. 산부인과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불법 수술조차 할 수 없었다. 남자 임산부라니, 어디 이상한 곳에 실험체로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외에는 뭘 달여 먹어라, 계단에서 굴러라, 배를 때려라. 별별 얘기가 다 나왔다. 찬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이미 만삭이 가까워지면 애를 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어쨌든 낳아야 한단다. 애가 죽더라도 낳아야 한다는 말에 찬은 미친 듯한 웃음을 흘렸다.

“하…….”

찬은 쥐죽은 듯 가만히 있는 아기를 더듬었다. 손가락으로 쿡 찔러 봤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걸 느낀 걸까. 찬은 양팔로 눈을 가렸다. 또 눈물이 흘렀다.

너무 늦었다. 도망치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애까지 낳아야 한다. 찬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배 위를 내리쳤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이를 악물고 오윤도를 증오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오윤도만 안 볼 수 있다면 뭐든 좋을 것 같았는데. 이젠 그의 새끼를 낳아야 한다.

“흐흑…….”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났다. 찬의 마른 주먹이 몇 번이고 배를 때렸다. 아이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더욱 안쪽으로 파고드는 건 살아 보려는 몸부림일까.

찬은 팔을 툭 내렸다. 그냥 또 눈물이 났다. 이걸 낳으면, 그땐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것이 막막하고 답답하고 끔찍했다. 또다시 절망이 덮쳐 왔다.

* * *

어쨌든 숨을 쉬고 살아 있으니 목숨은 이어지고, 목숨을 이어가니 배는 고팠다. 찬은 나갈 엄두도 못 낸 채 하루하루를 배달 음식으로 연명했다.

밥을 입에 넣다가도, 이것이 배 속에 있는 것을 키운다 생각하면 구역질이 났다. 반쯤 먹다 토하고, 혹은 몇 숟가락 먹다 내려놨다. 찬은 비쩍 말라 가는데 아이는 죽지도 않았다.

픽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제가 기생한 몸까지 쪽쪽 빨아먹는다. 오윤도의 새끼 아니랄까 봐. 찬은 크게 웃었다.

“…싫다.”

저 좋을 대로 찬을 써 먹었다. 오윤도는 새끼를 낳는 구멍으로 썼고, 새끼는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으로 썼다. 찬이 큭큭 웃었다. 그는 이것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씻는 것조차 누군가의 눈에 띌까 두려워 새벽에 몰래 물을 받아 두고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씻었다. 찬은 반 뼘이 겨우 열리는 창문 틈에 얼굴을 갖다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손바닥 두 개만 한 창문은, 아무리 활짝 열어도 코딱지만 한 방을 다 환기 시키지도 못했다. 찬은 바깥의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다 벽에 기댔다.

끔찍했다. 게다가 점점 산달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찬 역시 짐승이기 때문일까. 그는 쓰게 웃었다.

‘…낳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대로 애를 낳다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그것도 괜찮으리라. 그러면 애도 죽고, 그도 죽고. 오윤도에게 크게 엿 먹일 수 있을 텐데.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목을 긁어내렸다.

산부인과에 갈 수는 없다, 남자니까. 그렇다고 해서 수인 전용의 산부인과가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그런 곳이 있으면 오윤도가 제일 먼저 날 찾아내겠지.’

어느 쪽이든 혼자 낳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찬은 불룩해진 배를 끌어안고 누웠다. 호텔에 있을 땐 마음은 불쾌했어도 몸은 편했던 모양이다. 손을 올려 뺨을 만지니 꺼끌꺼끌해진 피부가 만져졌다. 머리카락 역시 끝이 쩍쩍 갈라지고, 싸구려 비누로 씻은 피부는 메말라 있었다.

찬은 침대에 얼굴을 박고 웃었다. 이 모든 것들이 끔찍한데, 기분은 훨씬 나았다. 오윤도가 생각날 때마다 증오스러우면서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가 더 징그러웠다.

가늘게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발끝부터 천천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찬은 그냥 눈을 감았다.

* * *

찬이 길거리를 헤매고 정호를 만났을 때, 윤도는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받았다.

“…미안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주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내뱉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불찰이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윤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목을 졸라도 시원치 않았다. 한 번 패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냄새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봤는데, 도시 한복판이라 조금…….”

“CCTV는.”

“돌려 보고 있는 중이야.”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찬이 사라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윤도의 눈앞이 일그러졌다. 그의 암컷이다. 게다가 오윤도의 새끼까지 배고 있는데, 감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도…….”

주훈이 윤도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훈이 허리를 숙였다.

“윽…….”

머리카락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거칠게 얻어맞았음에도 그는 한마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진짜 미안해.”

“찾아내.”

“…….”

“그냥……. 그냥 닥치고 찾아내기만 해.”

윤도가 문을 쾅 닫았다. 남겨진 주훈이 그제야 더듬더듬 피를 닦아냈다. 끈적한 감각이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 죽을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그나마 이것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주훈은 낮은 한숨과 함께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머리가 찢어져서 그렇지 심각하게 다친 건 아니었다.

“…미치겠네.”

도망친 건지. 아니면 납치당한 건지. 사람들 사이로 스며든 냄새는 금세 덮여서 추적하기도 힘들었다. 이미 윤도의 클리크들이 CCTV를 닥치는 대로 확인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주훈은 머리를 꾹 누르며 방을 나섰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찬은 평소와 똑같았다. 모든 것을 놔 버린 듯 굴다가, 갑자기 이것저것 사 달라 말했다.

‘…젠장.’

그의 암컷이 조금 불쌍했다. 부른 배를 끌어안고 거울 앞에서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는 게 안쓰러웠다. ‘인간’들에게 남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윤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임신은 언제나 여성이 하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었다. 바깥도 못 나가고, 티브이 화면만 멍하니 쳐다보는 꼴이 보기에도 제법 아파서. 그래서 신경 쓰였다.

부른 배를 어떻게든 감춰 보려고 넉넉한 티를 입고, 두툼한 패딩을 두르고. 그러고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한참이나 돌아봤다. 윤도가 보기에는 절대 숨길 수 없어 보였는데도 찬은 진지했다.

‘…도망치려고 했던 건가. 아니면 또 납치?’

도망쳐서, 뭘 어쩌려고 했던 걸까. 찬이 산부인과로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면 시골?

‘그 집은 아니겠지.’

가장 먼저 그 집부터 확인했다. 클리크 중 한 명에게 감시하라 말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찬은 그 집이 있는 시골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시골로 들어갔으면 오히려 찾기 쉬웠을 텐데. 아니면 누가 작정하고 숨긴 건가. 윤도가 이를 꽉 물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올라왔다. 운전대를 붙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냥 무작정 달렸다. 가장 의심스러운 게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천수빈, 이 망할 새새끼.”

진짜 납치한 전적도 있다. 윤도는 기억해 두고 있었던 그의 주소로 달려갔다. 그때처럼 그냥 대문을 들이받고, 현관까지 들이받았다.

“이 미친 새끼가…….”

계단에서 절뚝거리면서 내려오던 천수빈이 욕설을 퍼부었다.

“…어디 있어.”

윤도가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이곳에는 비릿한 새의 냄새만 났다.

‘이곳이 아니면 다른 곳인가?’

이미 이곳의 주소가 알려졌으니, 다른 집에 가둬 뒀을 수도 있다. 윤도가 계단을 힘겹게 올라온 천수빈의 멱살을 붙잡았다.

“말해.”

“미친 개새끼야. 뭘 말해. 씨발, 내가 니 빌딩에 트럭이라도 들이박을까? 왜 자꾸 내 집을 부수고 지랄이야, 지랄이. 또라이 같은 새끼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깁스를 한 다리가 보였다. 윤도가 망설이지도 않고 그 다리를 툭 걷어찼다. 세게 차지 않았음에도 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

고통스러운 신음 다음으로 욕이 또 쏟아졌다.

“바른대로 말해. 아니면 나머지 한쪽 다리도 깁스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뭘 말하라는 거냐고, 이 개새끼야.”

천수빈이 악을 썼다.

“시발, 안 그래도 대부님한테 다리 분질러진 것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뭐? 다른 쪽도 분질러? 개새끼가 짖으면 다 말인 줄 아나.”

윤도는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툭 놨다. 바닥에 닿으면서 부러진 다리에 충격이 갔는지, 천수빈이 소리를 질렀다.

“…네 짓이면 팔다리를 다 뜯어 버릴 줄 알아.”

“와, 진짜 쳐 답답해 돌아 버리겠네. 개 같은 놈이 뭐라고 짖는질 알아야 대답을 하든 말든 하지. 사람 말로 좀 짖어 볼래? 멍멍? 개새끼야.”

누군가가 다가와서 쓰러진 그를 일으켜 세웠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고통이 가득했다. 윤도는 분노로 가득 찬 수빈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욕을 해 대는 반응에 윤도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던졌다. 굳이 안 줘도 그의 번호는 알고 있겠지만.

“수리비는 나중에 청구해.”

그리고 차를 다시 뒤로 뺐다. 거친 욕이 들려왔다. 언제나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던 차체가 여기저기 우그러진 채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윤도는 그대로 너덜거리는 대문을 다시 들이받고 달렸다.

‘…유찬이 갈 만한 곳.’

윤도는 찬이 자라온 환경을 대강 알고 있었다. 찬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시켜 알아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어릴 적 떠돌았다던 친척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들에게 갔을까? 이를 빠득 빠득 갈던 윤도는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

‘…친척은 아니겠지.’

애초에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라 했다. 유찬을 할머니가 떠맡은 이후, 친척들과 아예 왕래가 끊겼다고 했다. 아마 찬은 친척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리라.

윤도는 액셀을 꾹꾹 밟았다. 답답했다.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폐쇄적인 삶을 산 유찬에게는 잠시 기댈 곳조차 없어 보였다.

‘아.’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명이 있었다. 그가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이름은 모르지만 유찬과 같이 있는 걸 봤던 단 한 명. 한 달간의 근신을 끝내고 달려갔을 때 마주한 남자.

윤도는 휴대폰을 열었다.

“나야.”

-어. 윤도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주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무 성과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유찬 전화 기록은.”

-뽑긴 했는데……. 걔가 호텔로 온 뒤로 전화 기록이 아예 깨끗하던데.

윤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중에 할머니 죽고 통화한 번호 불러 봐.”

분명 찬은 통화를 했다. 늑대의 모습이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분명 근신이 풀리고 본 그 남자의 목소리다.

주훈이 번호 하나를 빠르게 불렀다.

-이게 누군데?

모른다. 그냥 찬과 같이 있는 걸 한 번 보고, 통화 한 번 하는 걸 들었다. 친구겠지. 번호를 되새긴 윤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나오라고 하면, 과연 그가 나올까.

‘아니면 그 새끼집에 같이 있다거나.’

머릿속이 폭발하듯 뚝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윤도가 부서질 듯이 우득 하는 소리를 내는 휴대폰에서 힘을 뺐다.

“…누군지 알아내.”

-알았어.

별다른 말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윤도는 다시 달렸다. 우선은 도시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

머지않아 휴대폰에 차근차근 정호에 대한 것들이 도착했다. 찬과 어릴 적부터 동창이었다는 것. 지금 어디서 일하고, 어디서 살고 있다는 것까지.

윤도는 회사 주소와 집 주소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집 주소. 그는 그대로 차를 돌렸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집은 아파트단지였다. 크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그냥 그런 평범한 곳. 윤도는 허술한 경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주훈이 살고 있는 층을 꾹 눌렀다.

유찬이 여기 있으면 그것대로 화나고, 없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화가 날 것 같았다.

‘…젠장.’

어느 쪽이든 화가 치민다. 윤도는 좁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났다.

식사는 하고 있긴 할까. 또 쓰레기 같은 걸 주워 먹고 있으려나. 아니면 예전처럼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뭔가를 입에 넣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새끼를 배고 있으니 잘 먹어야 할 텐데. 유찬은 늘 입이 짧았고, 배가 불러올수록 팔다리는 비쩍 말라갔다.

“유찬…….”

이가 갈렸다. 다신 외출 따위 꿈도 못 꾸게 만들어주리라. 윤도는 정호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정호.”

“누구세요?”

경계심이 옅은 건 시골 출신이라서인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문틈이 벌어졌다. 윤도가 그것을 붙잡고 문을 거의 뜯어내다시피 당겼다.

체인이 덜컥 걸렸다가 부서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누, 누구…….”

그제야 약간 두려워졌는지 정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윤도가 현관으로 성큼 들어갔다. 비좁은 작아 보이는 방 두 개가 전부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찬의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안도하면서도 화가 났다. 다른 남자와 같이 있지 않는다는 점에 웃음이 나오려다, 정말 어디 갔는지 짚이질 않아 분노했다. 윤도가 정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윽……. 누구…….”

불쾌하다. 그냥 그의 존재에 짜증이 났다. 찬과 연관지어 생각할 남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악, 아.”

빠져나가려는 듯 몸을 뒤틀던 정호가 인상을 찌푸리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아, 진짜 아파요. 그때 찬 네 집에서 봤던… 아악!”

찬. 그 말에 윤도가 쥐고 있던 어깨를 내던졌다.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난 정호가 기어이 뒤로 쿵 넘어졌다.

“유찬 어딨어.”

윤도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구두를 신은 채였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호가 주춤거리면서 뒤로 엉덩이를 밀었다. 슬슬 물러나던 그의 등이 벽에 닿았다.

“…찬이 주웠다는 거, 당신이죠.”

대답하지 않았다. 정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걔가… 거짓말을 했었네.”

“어딨는지만 말해.”

“개를 주웠다더니.”

중얼거린 그가 시선을 피했다. 온몸을 떠는 꼴은 유찬과 조금 비슷했다. 윤도가 허리를 숙였다. 찍어 누르듯 다가오는 그 모습에 정호가 슬쩍 몸을 움츠렸다.

“몰라요.”

그 말에 윤도가 손을 뻗었다. 찬의 친구고 뭐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봐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의 손이 정호의 턱을 꽉 붙들었다.

“아…….”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지, 진짜 몰라요……. 허윽…….”

긴 손가락이 피부를 짓눌렀다. 정호가 그의 손가락을 풀어내려고 발버둥 쳤다.

“돈만 빌려 갔다고요. 그냥 돈만…….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고, 말도 안 했어요.”

필사적으로 내뱉는 말이 점점 가빠졌다. 까만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정호의 두려움이 전해졌다.

“…연락 방법은.”

“연락하지도, 받지도 못했…….”

윤도의 손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풀려나자마자 정호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열린 현관문으로 불어 닥쳤다. 차가운. 윤도가 이를 빠득 갈았다.

‘하필 겨울에.’

적어도 여름이면 어디 가서 얼어 죽진 않았을까 걱정이라도 안 될 텐데. 한겨울에 뛰쳐나간 찬을 생각했다. 새끼까지 배고 있는 비쩍 마른 몸이 거친 바람에 흔들렸다. 윤도의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찬이를… 찾으려고요?”

더듬더듬 묻는 소리가 들렸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정호를 내려다 봤다.

“걔, 어디 안 좋아요?”

“…무슨 소리지?”

“배가…….”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이 달싹였다. 윤도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정말 제 친구에게서 돈만 받고 간 모양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정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이, 임신한 거 같이, 꼭. 아니, 임신했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배가 나왔다는 그런 말이었어요.”

윤도는 한숨을 내쉬곤 이마를 문질렀다. 이제 산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 주만 더 있으면 새끼를 낳을 텐데.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어쨌든 지금 정호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이런 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망할.’

개새끼들이 아무리 냄새를 잘 맡아도 도시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다. 게다가 영악하게도 온갖 향수를 범벅으로 뿌리고 도망쳐 냄새로 추적할 수도 없었다. 땅을 기는 것들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윤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뒷목이 뻐근했다.

이제 개들로 안 된다면 새의 눈을 빌리는 게 빠르다. CCTV를 뒤진다고는 하지만 그게 만능이 아니라는 건 윤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탈론에 협조를 요청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윤도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집어 정호의 앞에 반듯하게 놨다.

“연락 오면 바로 연락해.”

“…….”

“그 녀석 몸이 많이 안 좋으니까.”

윤도는 에두른 말을 하고 집을 성큼성큼 나왔다. 사라진 지 벌써 삼 일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윤도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다시 돌아오면 목에다 절대 풀 수 없는 쇠줄을 채워서 묶어 놓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다리를 부러뜨릴까.

천수빈이 절뚝거리던 걸 생각하니 그것도 제법 괜찮은 방법 같았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차피 새끼 낳는데 다리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나가는 것도 그리 즐기지 않으니까 발 정도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이가 갈렸다.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뒤통수를 친 건 찬이 처음이었다. 차 문을 부서져라 닫은 윤도는 백사우에게 달려갔다.

* * *

“이렇게 셋이 있으니 기분이 새롭네요.”

사우가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마주 앉은 윤도와 수빈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찬이 사라졌다.”

윤도가 말을 꺼내자마자 수빈이 불편한 몸으로도 벌떡 일어섰다.

“망할 새끼야. 난 진짜 모르는 일이라고! 이따위 일로 날 불러서 추궁할 생각이면 꿈 깨.”

그가 절뚝거리면서 문가로 나가려 했다. 윤도가 수빈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 이 개새끼가 어딜 만져.”

불쾌하다는 얼굴로 발작하듯 손을 털어낸 수빈이 짜증을 냈다.

“알아.”

“뭘.”

“네가 납치 안 했다는 거. 알겠다고.”

윤도의 말에 사우가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벌써 삼 일… 아니 오늘로 사 일째죠?”

“…탈론에서 조금 도움을 줬으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윤도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탈론에서 개새끼를 왜 도와? 시발, 거기다 오윤도의 요청?”

“…….”

“네가 개답게 기면서 혀로 바닥을 핥아도 절대 안 돼.”

수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윤도는 그를 힐끗 보곤 사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백사우.”

그 말에 수빈이 비웃는 소리를 냈다.

“백사우가 무슨 만능열쇠라도 되는 줄 알아? 백사우랑 손잡고 벌벌 기어도 안 돼.”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떨면서 웃어대는 소리가 울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사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 윤도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미쳤어?”

수빈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되물었다.

“제정신입니다, 수빈. 윤도의 암컷에 손댄 것도 속죄해야죠.”

“…….”

“그리고, 나에게 빚진 게 하나 있을 텐데요.”

사우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수빈이 이를 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뭔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우는 그것을 이용해서라도 윤도를 도우려 했다.

‘…대체 뭘 바랄 건지 짐작도 안 되네.’

백사우가 호의로 윤도를 돕는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분명 뭔가 바라는 게 있겠지. 게다가 나름대로 쥐고 있던 패를 써 버리게 만들었으니, 윤도에게는 더 많은 걸 바라리라.

호텔을 통째로 달라고 해도 주겠다고 생각했다. 윤도는 초조함을 숨기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뭘 바라는 건지 말해.”

“역시 말이 빠르네요. 사업도 몇 개 하고 있어서 그런가요? 수빈도 사업을 좀 해 보면 좋을 텐데.”

사우가 빙글빙글 웃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딱히 없지만.”

생각한 게 없긴. 웃음이 나왔다. 백사우가 이걸 생각도 안 해 봤을 리가. 이미 찬이 실종된 시점에서 결국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할 걸 알았을 게 분명했다.

‘하긴, 숨길 수도 없었지만.’

그 난리를 치면서 잡아들이라고 클리크부터 클로까지 다 내보냈는데. 백사우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 부탁을 세 개 들어주는 건 어떨까요.”

“…알겠다.”

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뭘 달라고 해도 줬을 텐데. 나중에 들어줘야 하는 부탁이라는 게 조금 걸리긴 했으나 당장 더 급한 건 찬이었다.

몇 주만 더 있으면 정말 새끼가 나올 텐데. 윤도가 입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 수빈, 제 부탁은 들어주는 걸로 알겠어요.”

“…….”

“윤도의 암컷을 찾아줘요.”

“…아, 망할. 내 다리가 이 꼴이라.”

수빈이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사우가 단호하게 비웃었다.

“당신 등 뒤에 날개가 한둘입니까?”

“그건 나랑 개인적인 거래였잖아.”

“천수빈이라는 사람에게 그것도 못 바라서야. 거래할 가치조차 없잖아요.”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빈이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섰다. 다시 절뚝거리면서 문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꽤나 거칠어 보였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오윤도.”

그 말과 함께 문이 쾅 닫혔다. 윤도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찾으면 연락하겠다고 하네요.”

“…뭘 바라는 거지?”

“그냥 생각해 보겠다고 했잖아요?”

사우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웃었다. 더 이상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윤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수빈에게 빨리 찾아내라고 전해. 괜히 뭉그적거렸다간 패밀리고 뭐고 날개를 다 뜯어 버릴 테니까.”

“새끼가 나올 때가 얼마 안 남았죠?”

“…….”

“그때가 발정기였으니까. 대충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이겠네요.”

사우의 말을 무시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새끼가 생긴 거 축하해요.”

“…그 말은 나중에 멀쩡히 살아 있는 새끼를 보면 해.”

윤도는 다시 문을 나섰다.

탈론에서 찾는다고는 하지만, 그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냄새로 추적할 수 없다고 해도 이리저리 알아보는 것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며칠간 잠을 안 자서 그런지 온몸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윤도는 반사적으로 옷자락을 툭 털어 내다가 며칠째 같은 정장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삼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기저기 돌아다닌 덕분에 흐려진 구두의 광택과 구겨진 정장이 조금 낯설었다.

찬의 집에 있을 때야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곤 해도, 이곳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윤도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암컷이 뭐라고.’

뭐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찾을까. 그의 새끼를 배고 있어서? 아니면 단순히 발정기에 휩쓸려 강간해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꾸 거슬려서?

윤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게 뭐라고 그가 이렇게 불안해야 한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아니면 내가 수인으로 만들어서.’

수많은 이유를 떠올렸다. 하나하나 생각나는 것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닌 무언가. 윤도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잠을 못 자서 쓸데없는 생각이 늘었다. 그냥 유찬은 그의 암컷이고, 그의 새끼를 배고 있으며, 산달이 가까워졌다. 그것뿐이었다. 그냥 그것뿐. 윤도는 차 문이 부서져라 세게 닫았다.

* * *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초조함이 윤도를 집어삼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어디 떠돌고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든지.

‘임신한 남자에 대한 말도 없고.’

분명 그게 알려지면 난리가 났으리라. 윤도는 팔짱을 끼고 수없이 많은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며칠 전부터 찬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잡힌 기록이 전혀 없었다.

마치 그냥 사라져 버린 듯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모래알들이 흘러내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어디 있을까.’

어디 공공기관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 같은 걸 급히 사서 들어갔을 리도 없다. 정호가 사는 꼴을 보니, 호텔에서 머물 만큼 돈을 주지도 못했으리라.

‘그러면 급 낮은 모텔이나 여관 같은 곳?’

불쾌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암컷이 그런 곳에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당장 끌고 나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박 씻긴 뒤에 호텔 방에 던져 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윤도는 낮은 한숨을 쉬면서 이마를 짚었다.

물론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눈에 띄는 대로 숙박시설들도 다 뒤져 보고는 있지만 며칠째 허탕이다. 배가 불룩 나온 비쩍 마른 남자가 눈에 안 띌 리 없건만.

윤도는 CCTV를 노려봤다. 마치 그곳 어딘가에 찬이 나타날 것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에 온 거리가 잡혔다가 사라졌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예 밖에 나오지도 않는 이유가 뭘까.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윤도의 머릿속을 스쳤다. 누군가에게 감금. 아니면 어디 구석진 곳에서 홀로 쓰러져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새끼를 낳고 있나. 길게 신음한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며칠이 지났다. 벌써 도망친 지 일주일을 넘겼다. 윤도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다 못해 밑바닥을 벅벅 긁고 있었다.

‘도움 안 되는 새새끼들.’

그들이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못 찾는 걸까. 성질이 날 때마다 주먹을 움켜쥔 탓에 손바닥에 길게 난 상처가 또 벌어졌다. 피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애써 감추려 노력하고 있는 본능이라는 것이 불쑥 머리를 쳐드는 기분이었다. 잡으면 어떻게 할까.

찬이 알았다면 그리 좋아하지 않을 법한 생각들이 윤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몸을 망가뜨리는 건 별로 달갑지 않다. 그의 것은 그래도 온전한 것이 보기 좋았으니까. 아니면 아예 각성을 치르는 방에 던져 넣을까. 새까만 세상에 하루 종일 있다 보면 그가 올 때마다 온몸으로 반길지도 몰랐다. 뒤틀린 웃음이 설핏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자 또다시 욱신거리는 옅은 고통과 함께 피 냄새가 났다. 손바닥을 펴 본 윤도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또 그렇게 있었을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짧은 음이 한차례 다 지나기도 전에 윤도가 전화를 받았다.

“천수빈.”

-전화를 쳐 받으면 니가 누군지 밝히든가 여보세요, 라고 하는 게 예의 아니냐?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도는 피 냄새가 나는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말해.”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재촉하면 또 지랄을 떨면서 혹시 일부러 안 찾을까 싶어 그냥 참았다. 윤도의 말에 수빈이 잠시 침묵하더니 픽 웃었다.

-창문 너머로 본 거라 확실하진 않아.

“어디야.”

-그리고 니 암컷 얼굴을 좀 사진으로 선명하게 찍어서 돌리든지 해야지. 어디 CCTV 화면을 찍어서 보내?

인내라는 걸 다시 새겼다. 찬을 찾으면 다리를 부러뜨리기 전에 머그샷이라도 찍어야 하나.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빈정댈 대로 빈정대는 소리가 한참이나 쏟아지고 나서야 주소 하나가 나왔다.

윤도는 그걸 듣자마자 그냥 전화를 끊었다.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곳이었다. 도시 중심에 가깝긴 하지만, 질 낮은 곳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억류된 건 아닌 건가.’

창문으로 봤다고 했고, 주소는 고시원이었다. 고시원에 찬을 감금해 둘 리가 없으니까.

“오윤도! 방금 탈론 놈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클리크들이 따라붙었다.

“내가 간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혹시 모르니까 더 찾고 있어.”

윤도는 따라붙는 무리를 떼어 내고 혼자 차에 올라탔다.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이 계속 들어갔다. 주변에서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새빨간 신호등도 아무 상관없었다.

누구 하나 치여 죽어도 신경 쓰이지 않으리라. 윤도는 이를 갈면서 주소를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