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8)

개에게 물렸다 2

4.

고통스럽다. 고통스럽다는 말로 전부 표현할 수 없었다. 모든 뼈를 조각조각 내는 기분이었다. 찬이 바닥에서 꿈틀 움직였다.

머릿속이 몽롱했다. 새까만 어둠 속은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느낄 수 없었고, 눈을 감아도 잠든 것 같지 않았다.

“윽…….”

또다시 온몸이 뒤틀렸다. 유일하게 가진 건 윤도의 웃옷뿐이었다. 찬은 그 위에서 몸부림쳤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미쳐 버릴 것 같을 때마다 옷 위에 뺨을 갖다 댔다. 서늘하고 매끈한 촉감이 느껴질 때마다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그 위에 코를 처박고 미약하게 남은 냄새를 빨아들일 때마다 이곳에 가둔 그 남자를 생각했다.

분노하다가, 증오하다가, 애원하듯 꺼내 달라고 울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벽을 만나면 의미 없이 손이 아프도록 두드렸다. 찬은 허덕이면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실 감았는지 감지 않았는지도 혼란스럽다.

‘얼마나 지났지.’

뼈가 조각나는 고통이 지나갔다. 느리게 눈을 깜박여 봤지만 제대로 눈을 감았다 뜨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찬이 덜덜 떨면서 윤도의 웃옷 위에 웅크렸다. 뭘 먹지도 않았으니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게 일주일이랬던가.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찬은 더욱 몸을 작게 말았다. 매끈한 천이 서늘하게 피부에 닿았다. 아주 추웠다가, 조금 따듯해졌다.

가만히 숨을 내뱉었다.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혼란스러운데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걸까. 찬은 숨을 꾹 참았다. 숨이 턱 막혀왔다. 또다시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았다. 또 지나가겠지. 고통을 잊기 위해 윤도를 떠올렸다.

증오스럽다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이곳에 가둔 게 그였으니 꺼내는 것 역시 윤도의 몫이리라. 찬은 허덕이면서 울었다.

얼마나 또 지났을까. 눈이 아팠다. 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빛……!’

불나방이라도 된 듯 그쪽으로 기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빛에 눈이 욱신거렸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위로 빛이 느껴진다는 게 좋았다. 감사했다.

찬이 엉금엉금 기어서 빛이 닿는 곳으로 다가갔다. 제법 익숙해진 빛 사이로 거대한 인영이 보였다.

“으…….”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바짝 들어야 했다. 원래 보던 것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윤도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얼굴 위로 떠오른 미소 속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조금 더 두렵다. 찬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윤도가 이렇게 컸던가? 옅게 풍기는 냄새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가 처음 보는 미소를 지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착하다.”

그 말과 함께 뺨에 손이 닿았다. 시선이 마주치니 꼼짝할 수도 없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뜨끈한 손바닥에 뺨을 가볍게 비볐다.

“삐이이이이…….”

찬은 스스로의 소리에 흠칫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뻐끔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다시 냈다.

“빼애…….”

윤도가 픽 웃었다.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찬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분명 윤도가 이상한 짓을 한 게 틀림없다. 그와의 첫 키스에서 이상한 걸 삼켰던 게 떠올랐다.

‘그래. 그것 때문이야.’

분명 목을 망치는 뭔가가 있다 찬이 경계심을 안고 뒤로 물러나니 윤도가 다시 허리를 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보다도 더 크다. 뒤로 물러나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어?’

분명 손이 있어야 하는데 낯선 것이 있었다. 옅은 황갈색 털로 뒤덮인 다리, 발굽. 찬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분명 손을 들었는데 짐승의 다리가 움직였다. 손목을 까닥 움직이자 발굽이 달린 발이 까닥 흔들렸다. 찬은 벌떡 일어섰다. 미친 듯이 빛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아니야. 아니야…….’

네 발이 움직였다. 네 발? 사람은 발이 두 갠데. 두 발로 걷는데. 순간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발이 꼬이면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거친 바닥에 머리가 쾅 부딪혔다.

몽롱해진 시야로 몸을 쳐다보니, 부드러운 털에 뒤덮인 피부가 보였다. 털, 피부. 짧은 하얀 털. 황갈색의 털. 찬은 크게 울었다.

“삐이이!”

악을 썼다. 이건 그가 아니다. 짐승이 되었다. 짐승, 짐승. 찬의 정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팔다리를 버둥버둥 흔들었다. 스스로의 발굽에 다리가 서로 차이고, 머리가 몇 번이고 바닥에 부딪혔다. 찬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윤도가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 그 얼굴에 찬이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가쁜 숨을 내쉬다가 조금씩 진정했다.

“그래. 착하다.”

윤도가 그를 어렵지 않게 품에 안았다. 사람일 때와 다르지 않게 목에 양팔을 두르게 하고, 찬의 뺨을 어깨에 기대게 했다. 벌벌 떨리던 몸이 조금씩 잦아들어 갔다.

‘꽃사슴이라.’

윤도가 픽 웃었다. 제법 어울렸다. 시선을 내리자 파들파들 떨리는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황갈색의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등에 흩뿌려진 하얀 점을 손끝으로 쓸었다.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던 찬이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윤도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는 움찔거리는 작은 꼬리를 만지작거리다 등을 쓸어 줬다.

“그래. 무서웠지.”

느긋한 말이 흘러나왔다. 늑대의 거짓말이다. 윤도가 웃음을 지그시 삼켰다. 처음으로 본 자신의 모습에 찬이 그대로 무너졌다. 새까만 눈 위에 공포와 고통이 어렸다. 발작하듯 온몸을 뒤틀어 대더니. 이젠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윤도가 찬의 목덜미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났다. 연약한 짐승의 냄새. 사냥감의 냄새.

“음…….”

공포에 질린 심장박동이 코끝에 그대로 느껴졌다. 윤도가 차에 올라타 사슴을 무릎 위에 앉혔다. 네 개의 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허우적거리는 찬을 그냥 답삭 잡아 올렸다.

“내가 널 구해준 거야.”

“…….”

“그 어둠 속에서, 내가 널 구했어.”

윤도가 분명하게 속삭였다. 커다란 눈망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손바닥으로 자그마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찬이 끼잉하고 새끼 같은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기댔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 * *

윤도는 다시 찬을 호텔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사람일 때와 다르지 않게 취급했다. 그 작은 행동에 찬이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온전히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거겠지.’

그는 죽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알맹이가 사람이라 해도 몸이 짐승이다. 그렇다고 찬에게 풀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한 번 그랬다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꼴을 봤으니까.

조금 더 망가졌다간 수인으로서의 꼴을 갖추지 못할 테니, 일단은 보살펴 줘야 했다. 같은 개과 동물이라면 늑대의 모습으로 교미해도 되겠지만, 어쨌든 찬은 꽃사슴이었으니까. 교미가 아니라 섹스를 해야 하지 않은가.

윤도가 침실로 들어가니 찬이 재빨리 다가왔다. 새까만 눈 속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비쩍 마른 다리로 그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곤 바짓자락을 덥석 물었다.

“착하다.”

있는 힘껏 바짓자락을 물고 있던 찬이 조금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윤도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비쩍 마른 몸을 덥석 들어 올렸다.

발발 떨고 있는 사슴을 무릎에 앉혔다. 처음엔 어떻게 앉아야 할지도 모르더니. 이젠 제법 익숙한 자세로 다리를 접었다.

윤도가 죽을 스푼으로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찬이 혀로 죽을 날름 핥았다. 웃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지그시 물었다. 아마 스스로는 사람처럼 먹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윤도는 인내심을 가지고 죽 한 그릇을 한 스푼씩 떠먹였다.

“찬.”

윤도가 부르자 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새까만 눈 속에 짙은 안도감이 어렸다. 이름을 불러 줄 때면, 사람이었다는 걸 자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도 봤겠지만, 나 역시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굳이 변해서 보여 주진 않았다. 이제 갓 짐승이 된 찬이 천적을 눈앞에 두면 분명 공포에 질릴 테니까. 윤도는 쫑긋거리며 움직이는 귀를 가만히 매만졌다. 자그마한 꼬리가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인간들 틈에는 수인이 제법 많이 있어. 물론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너 역시 이제 수인이니 알 건 알아야 해.”

수인. 인간과 경계선을 긋듯이 말하자 찬이 삑 하는 짧은소리를 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그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다신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싶은 두려움. 윤도는 도망치려는 찬의 앞발을 단단히 붙잡았다.

“수인은 인간과 짐승의 모습을 둘 다 가질 수 있어. 뭐, 자세한 얘긴 넌 몰라도 돼. 어차피 내 암컷이니까.”

다정하게 웃으면서 매끈한 목을 쓰다듬었다. 머리 위로 불룩 솟은 뿔이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찬.”

이름을 불러 주니 찬이 제 발로 다가와 윤도의 무릎에 턱을 기댔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둘러 갔을까.

그냥 모조리 망가뜨려 버리고, 오로지 그만 남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윤도의 손이 하얀 점이 흩뿌려진 찬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과 그 아래 느껴지는 따듯한 체온이 기분 좋게 감겨 왔다.

“네게 좋은 얘기를 하자면.”

윤도는 처음으로 꽃사슴이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사슴은 그저 사냥감일 뿐이었는데.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어.”

“삑!”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낸 찬이 허둥지둥 그에게 달려들었다. 발굽이 정신없이 윤도의 가슴을 툭툭 때렸다. 팔딱거리며 뛰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네가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지. 그 몸에 익숙해지면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어.”

정확히는 그냥 사람의 형태를 띠는 것뿐이지만. 윤도는 흥분하기 시작하자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찬을 잡아 들었다.

“그러니까 익숙해져야지?”

그 말에 눈을 깜박거린 사슴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 모습에 느긋한 웃음이 흘렀다.

그날 이후로 윤도는 침실 문을 굳이 잠그지 않았다. 찬은 어딜 가나 그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오리가 처음 보는 것을 어미라 여기듯, 그를 유일한 구원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윤도가 소파에 앉자 앞에서 서성거리던 찬이 앞발을 들어 그의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가끔 걷는 것도 다리가 꼬이는 걸 생각하면, 저도 소파에 앉고 싶은 모양이었다. 윤도가 찬을 가볍게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삐익…….”

소파에 앉고 싶은 듯 버둥거리는 몸을 꾹 눌러 앉히니 얌전히 몸을 말았다. 윤도는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었다. 눈을 깜박이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에 절박함이 가득했다.

“제대로 움직일 줄 알면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어.”

윤도가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의 손가락이 마른 엉덩이를 쿡 찔렀다.

“꼬리를 자의로 움직인다든지.”

그 말에 꼬리를 움직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꼬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윤도의 손가락이 척추를 더듬으며 위로 올라왔다.

“아니면 귀를 움직인다든지.”

삐죽 솟은 귀는 그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았다. 찬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지만 귀는 미동조차 안 했다. 윤도가 팔랑거리는 귀를 쓰다듬었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냥 예를 든 것뿐이다. 사실 꼬리를 움직이거나 귀를 움직이는 건 딱히 상관없다. 그냥 몸에 얼마나 익숙해지느냐가 문제지. 찬은 그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지 삑삑거리는 작은 신음을 내면서 파들파들 떨었다.

윤도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구경했다. 한참이나 홀로 낑낑거리던 찬이 그의 가슴을 또 발굽으로 툭툭 쳤다.

“왜?”

그가 나른하게 대답하곤 가슴 위에 닿은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았다. 매끈한 발굽이 마음에 들었다. 숲이라도 뛰어다녔으면 발굽에 상처가 가득할 텐데. 짐승의 모습이 되고 나서 부드러운 카펫 위만 걸어 다닌 탓인지, 발굽이 무척이나 매끈하고 깨끗했다. 그것을 만지던 윤도는 앞으로 바깥을 걸어 다니지 않게 해야겠다 생각했다.

‘뭐. 사슴이 뛰어다닐 만한 곳도 없고.’

게다가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위치한 사슴 아닌가. 찬이 돌아다니기엔 산이 안전하지 않았다. 개체가 확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호랑이도 있고, 윤도와 정확히 같은 종족은 아니지만 늑대도 꽤 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수리 종류도 있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끈매끈한 발굽을 쓰다듬었다.

“삑…….”

찬이 그의 가슴 위에 코끝을 콩 박았다. 윤도는 새까만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뜻인지 가만히 생각하다 픽 웃었다.

“안 돼.”

“…삑, 삐익…….”

버둥거리는 몸을 잡아 눌렀다.

“아직 그 몸에 익숙하지도 않으니 상위 포식자를 만나면 안 돼.”

차라리 공포를 몸에 새겨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생각을 치워 버렸다. 그런 식으로 공포를 뼛속 깊이 새겨 주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몇 번이고 무너졌던 찬이 그 감각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사슴이 고개를 숙였다.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찬이 풀죽은 얼굴로 윤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윤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까만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찬이 그의 다리에 엉겨 붙을 기세로 졸졸 쫓아왔다. 현관으로 다가가니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깐 있어.”

윤도의 말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찬이 낑낑거리며 바지 끝을 물었다.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제법 만족감이 들었다.

“왜. 가지 말까?”

굳이 나가야 할 일은 없다. 그냥 이런 걸 보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모습을. 윤도의 말에 찬이 우는 소리를 내면서 그의 발아래 웅크리고 앞발로 발목을 끌어안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나왔다. 윤도가 당장 나갈 듯이 문고리를 잡자 찬의 눈물이 뚝뚝 흘러서 발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윤도가 허리를 숙여 사슴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몇 번 버둥거리던 찬이 기다렸다는 듯 답삭 안겨 들었다.

윤도가 느긋하게 웃으면서 다시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두고 어디 못 가겠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슴의 귀가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찬이 필사적으로 목을 끌어안으려 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듯 몇 번이고 휘젓는 통에 발굽이 윤도의 등을 퍽퍽 두들겼지만 간지러울 뿐이었다.

윤도는 지금 상황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니, 마음에 든다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백사우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친 클럽 두 개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윤도가 축축이 젖은 찬의 눈가를 문질러 닦아 주곤, 바닥에 내려놨다.

“움직여야 익숙해지지.”

그는 천천히 널찍한 호텔 방을 여기저기 걷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발이 꼬여 넘어지면서도 찬은 어떻게든 윤도를 쫓아왔다.

그는 또 넘어진 찬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제 윤도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불안에 벌벌 떨었다. 그 사실이 윤도에게 만족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비틀거리면서 다시 일어난 찬이 그에게 다가왔다.

“착하지.”

길들이는 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니. 처음 알았다. 그동안 닥치는 대로 사냥만 일삼아서 기른다는 게 뭔지 잘 몰랐다. 윤도가 손을 내밀자 찬이 가만히 머리를 기대 왔다. 그는 보들보들한 털을 매만지면서 웃었다.

* * *

윤도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쯤 찬 혼자 뭘 하고 있을까. 혼자 불안에 벌벌 떨고 있을까.

“뭐가 그렇게 재밌어?”

“사슴이 혼자 있을 땐 뭘 할까 싶어서.”

그 말에 다들 묘하게 침묵했다. 윤도가 소리죽여 웃었다. 패밀리는 공평하다, 모두가 동등하다 말하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모두 윤도의 ‘친구’라 부르면서도 윤도를 따르듯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찬을 혼자 두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슴을 옆에 끼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바깥에 나와서 누군가 짐승 취급을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윤도가 손짓하자 겉옷을 들고 있던 남자가 재빨리 입기 좋게 옷을 벌렸다.

“들어가 봐야겠어.”

“벌써?”

“요즘 조용하기도 하고. 꼭 내가 있어야 일이 해결되나?”

그 말에 주훈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주변의 몇몇이 동의하듯 끄덕였다.

“큰일 없으면 연락하지 말고 재량껏 해결해.”

툭 던지듯 말하곤 차에 올라탔다. 별다른 지시 없이도 매끄럽게 출발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보고 있으니 찬이 달라붙어 있던 게 떠올랐다. 정말 촌뜨기처럼 창에 찰싹 달라붙어 정신없이 밖을 구경했다.

‘인간 모습을 하면 데리고 나오는 것도 좋겠네.’

어차피 이제 와서 도망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다리에 엉겨 붙듯 바짝 몸을 비벼오던 게 생각나자 픽 웃음이 나왔다.

금세 도착한 윤도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안쪽은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하기만 했는데도 불안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웅크리고 고개를 바짝 든 찬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일어서자마자 다리가 아픈지 비틀거린 그가 벌벌 떨면서 다가왔다.

“기다렸구나.”

윤도가 손을 내미니 그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폴짝 뛰면서 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 제법 애교 있게 보였다. 넥타이를 풀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찬이 또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윤도가 느긋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가 올려 주지 않으면 침대에서 못 올라오는 한심하고, 나약한 짐승. 먹여 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 딱한 존재. 살아가는 모든 것이 윤도의 손에 달린 있다고 생각하니 만족스럽기만 했다. 그가 찬을 잡아 올려 주니 침대의 폭신한 감촉이 낯선 듯 비틀비틀 걷다가 푹 주저앉았다.

윤도가 누우니 찬이 옆에 바짝 다가왔다.

“음…….”

이대로 섹스하면 수간이 되나. 윤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파닥거리는 귀를 매만졌다. 윤도의 가슴 위에 발을 대고 꾹 누른 찬이 그 뒤로 사뿐 올라와 웅크렸다. 따끈한 몸뚱이가 약간의 무게로 윤도를 짓눌렀다.

“섹스할까?”

그 말에 까만 눈이 동그래지더니 빽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허둥지둥 움직이던 찬이 그의 몸 아래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던 다리가 겨우 제자리를 찾아 일어섰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네 개의 다리가 고스란히 보였다.

“…하긴. 지금 쑤셔 넣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네.”

늑대로 넣으면 무조건 죽을 거고, 인간으로 넣어도 몸뚱이를 보면 죽을 것 같았다. 윤도가 턱을 매만졌다. 어차피 수인이 되었으니 회복력도 제법 좋아졌을 텐데. 천천히 찢으면서 하면 안 되나. 그의 입술이 비뚤게 뒤틀렸다.

“됐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당장 발정기가 온 것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다. 게다가 지금 사슴 형태로 임신시키면 인간이 되는 건 제일 빨라도 새끼를 낳은 후가 될 터.

‘인간 모습으로 새끼를 배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섹스도 하고, 좀 더 편할 게 아닌가. 사슴의 모습으로는 하는 말을 알아듣기도 힘들고, 섹스도 못 한다. 윤도는 경련하듯 떨리는 몸을 잡아다 앉혔다. 새까만 눈 위로 두려움과 공포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삐익…….”

찬이 그의 뺨을 날름 핥았다. 윤도가 낮게 웃었다. 섹스할 때도 한번 부리지 않던 애교를 부리기까지. 삑삑거리는 소리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라 생각하니 제법 괜찮았다. 찬이 낑낑대는 소리를 내면서 웅크렸다.

“인간이 되어야지.”

윤도가 느긋하게 말하면서 웅크린 등을 쓸었다. 흩뿌려진 새하얀 점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셌다. 만족스러운 하루가 또 지나갔다.

* * *

윤도가 찬과 제법 잘 지내고 있는 동안, 천수빈은 짜증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대체 내가 왜…….’

오윤도. 그 자식 때문에 한 달 근신까지 당해야 했다. ‘같이’ 한 달 근신이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냄새 나는 짐승은 혼자 어두컴컴한 곳에 갇히는 게 재미있을지 몰라도 수빈은 아니었다.

언제나 가뿐하게 날아다니던 새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망할…….”

수빈이 입술을 꽉 깨물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만히 있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아무리 오윤도에게 먼저 주먹을 날렸다 해도 탈론의 새들이 수도 없이 죽었다. 아무리 덤볐다고는 해도. 그런 식으로 학살하는 것은 과잉 대응이다. 게다가 날개와 다리를 하나하나 잡아 뜯고 몸통을 짓밟으면서 즐기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수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혼자 상대하기에 오윤도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날아다니는 새라고 해도 아예 근접전을 피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잡아채서 날 수도 없고.’

무식하게 덩치만 큰 버러지. 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멸족 직전인 늑대라고 했나. 난생인 그에게 있어 윤도는 그저 냄새나는 들짐승일 뿐이었지만, 클로에서는 제법 잘나가는 존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 마리 남았다던가. 윤도의 종을 곰곰이 생각하던 수빈이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그 새끼의 얼굴을 한 방 날리고 싶은 것뿐이다. 그동안은 탈론의 뜻을 받아 움직였지만 이번만큼은 기꺼이 스스로 움직이리라 마음먹었다.

천수빈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우선은 뭐라도 잡아야 한다. 약점이든 뭐든, 오윤도에게 물 먹일 수 있는 거라면 아무거나. 그가 일어서서 방을 나서려 하자 저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볍게 내려앉았다.

“수빈. 빅 뉴스야.”

새가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변했다. 여자가 약간 흥분한 듯 얼굴을 붉혔다. 번들거리는 눈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무슨 빅 뉴스?”

대부가 죽었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이라면 당장 백사우가 가만히 있지도 않을 테고, 빅 뉴스라는 말로 가볍게 다루지도 않았을 터. 수빈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요즘 오윤도에게 암컷이 생겼다던데?”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암컷. 그 말에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오윤도가 머물던 집에서 정액받이나 하고 있던 그 남자.

‘수인은 아니었는데.’

수인의 기색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여자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주 끼고 돈대. 호텔 최상층에 뒀다더라.”

“그… 비쩍 마른 인간 말하는 거지.”

제대로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엉망으로 들쭉날쭉 길었던 머리카락과 앙상한 몸. 그리고 낮은 신음 소리. 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취향도 이상한 새끼.’

그 구멍이 그렇게 맛이 좋았나. 수빈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암컷이니 뭐니 해도,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윤도라면 아무리 잘 쓰는 구멍이어도 그냥 버리면 그뿐이다. 늑대라 해도 상대를 짝으로 정하지 않으니 버리는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다. 별로 도움 안 되는 정보에 수빈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인간? 아, 그래. 인간이었지!”

여자가 크게 웃었다.

“이번에 수인이 됐다더라. 아주 귀엽고 맛있게 생긴 꽃사슴이라던데. 직접 본 건 아니고 그런 말이 돌았어.”

“수인이… 됐다고?”

“클리크 놈들이 얼마나 과묵한지 알잖아. 그나마 클로 놈들 몇 명이 주워듣고 말하더라.”

수인이 됐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사우가 이를 꽉 물었다.

‘그 의식을 치렀다고?’

죽을지도 모르는 의식이다. 아니, 수인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든 지금은 대부분 실패해서 죽을 의식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르다니.

죽어도 관계없다는 걸까. 아니면 죽더라도 어떻게든 암컷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거였을까. 수빈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깜박였다.

“사우… 백사우가 그걸 허락했어?”

“그러니까 그 의식을 치르고 수인이 됐겠지.”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당장 패밀리에서 제대로 된 약을 공급할 수 있는 건 사우뿐이었으니 당연한 말이다. 그 오윤도가 귀찮게 다른 클랜이나, 다른 패밀리에 가서 절절매며 약을 구할 리도 없으니까.

수빈은 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발이 다시 땅에 닿기 직전 그의 몸이 검독수리로 변했다.

“어? 어디 가!”

여자가 버럭 외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까마득할 정도로 위로 날아올랐다. 지금 당장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날아다닌다는 장점을 백분 활용한 수빈이 목적지에 가뿐하게 착지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옥상에 가볍게 내려앉은 수빈이 옷을 툭툭 털었다.

그는 그대로 백사우의 방까지 직행했다. 굳게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은 부수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열고 들어오는 겁니다.”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수빈이 문짝을 떼어낼 기세로 벌컥 열고 들어가니, 사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제 각성 의식을 허가해 줬다면서.”

앞뒤 잘라 먹고 툭 내뱉은 말에 그가 빙긋 웃었다.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 이미 예상한 얼굴이었다. 그 반응에 속이 뒤틀렸다.

“네. 그런데요?”

옅은 웃음기마저 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사우가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붉은 혀가 느릿하게 혀를 핥는 모습이 노골적이었다.

“앉아서 얘기하죠.”

수빈은 그 자리에 앉는 대신 사우의 앞에 바짝 붙어 섰다. 둘의 무릎이 슬쩍 스쳤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수빈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오싹했다. 가느다랗게 보이는 눈동자가 뱀처럼 세로로 깜박였다.

“그런 위험하고 귀한 의식을.”

참으려 했으나 빈정거리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수빈의 말에 사우는 그냥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기만 했다.

“오윤도에게는 그렇게 쉽게 허가해 줬다면서?”

“쉽게라고 누가 그럽니까?”

“중립을 지켜야지. 백사우.”

수빈의 손이 등받이를 꽉 틀어쥐었다. 가까이 얼굴이 붙었음에도 사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짜증 나…….’

아마 오윤도도 백사우에게 쌓인 게 많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비식 새어 나왔다. 수빈이 입술을 길게 늘리며 웃었다.

뱀의 눈이 깜박, 깜박. 몇 번이고 세로로 움직이며 수빈의 모습을 담았다.

“패밀리 대부의 대리잖아.”

천대경을 들먹였다. 재미있다는 듯 웃는 사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중립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클로의 후보에게 특권과 편의를 주다니.”

“저 정도면 충분히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생각을 정리한 듯 또다시 느긋한 대답이 나왔다.

“아니, 옳지 않지. 그 암컷, 인간이었다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이미 다 알고 있었잖아.”

사우가 낮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손끝으로 한 번 쓱 문질렀다. 어쩔 수 없는 어린애를 상대하는 게 피곤하다는 듯, 비식 웃는 모습에 또다시 속이 뒤틀렸다. 뱀이 포식자를 비웃는다. 수빈의 손이 등받이를 세게 움켜쥐다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요?”

사우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더욱 바짝 들이밀었다. 조금 위협하려고 한 것뿐인데. 수빈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래서, 뭘 바라고 오셨는데요?”

어디 말해 봐. 쿡쿡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사우의 혀가 입술을 날름 핥았다. 뱀이라는 걸 언제나 각인시키듯 하는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손끝이 턱 아래 닿았다.

“치워.”

툭 쳐내자 사우가 소리죽여 웃었다. 수빈이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비치며 턱 아래를 문질렀다.

“오윤도에게 특권을 줬으니, 내게도 한번 줘.”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사우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머리를 기댔다.

“무슨 특권을 바라는 겁니까, 수빈. 당신도 어디서 암컷이라도 주웠나요?”

나약해빠진 인간 따위를 주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약하고, 약한 것이라니 수빈이 모욕당한 얼굴로 짜증 난 기색을 비치니 사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앞으로 내 행동을 한 번 묵인해 주는 걸로 충분해.”

“묵인이라.”

사우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눈 안쪽이 세로로 감겼다가 뜨였다. 완벽하게 인간으로 변할 수 있으면서도, 그런 특성을 남기는 것은 왜일까. 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생각이야 어쨌든 사우는 지금 꽤나 기꺼운 기분이었다. 묵인. 그 말에 담긴 것이 어떤 내용인지 금방 알아챘다.

‘오윤도에게 쌓인 게 많았나 보네.’

아마 근신 처분 때문이 아닐까. 웃음소리를 속으로 감췄다. 아직 한참이나 어린애. 오윤도에 비하면 애새끼나 다름없는 천수빈. 사우가 혀끝을 입속에서 굴렸다.

애새끼라서 가끔은 귀엽고, 가끔은 짜증이 났다. 오윤도와 나이 차이도 그리 크지 않으면서, 천대경의 밑에서 제법 귀한 취급을 받고 자란 태가 난다. 사우는 그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폭발하려 하는 수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렇게 성질이 급해서야.”

“…그래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대답을 재촉한 그가 다시 바짝 붙었다. 수빈에게서는 천대경과 엇비슷한 냄새가 났다. 동족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속 알맹이는 딴판이지만.’

사우는 일부러 대답을 늦췄다. 수빈이 안절부절못하다 발끝으로 소파를 툭 찼다. 그의 눈동자가 검독수리의 눈으로 바뀌었다가 인간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반대할 생각 따윈 없었다. 오윤도와 천수빈이 치고받고 싸우는 걸 지켜보는 건 꽤 재미있기도 했고,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 이득도 제법 챙길 수 있었으니까.

물론 돈벌이가 되는 것들을 모조리 틀어쥔 윤도에 비해 수빈은 빈털터리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애새끼가 날뛰면서 떼쓰는 꼴을 보면 제법 귀여우니 괜찮았다. 그리고 이럴 때 하나씩 빚을 지워 둬야 어린애라도 뜻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게 아닌가.

“좋아요.”

사우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좋아?”

애써 어설프게 반존대를 하던 것조차 잊었는지 성급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패밀리에 대한 반역이 아니면 묵인하죠.”

“알았어.”

그의 팔이 날개로 반쯤 변했다.

“잠깐만요, 천수빈.”

“…….”

수빈이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우는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은 눈이 감기질 않죠.”

“어째서?”

불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맞은편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에게도 리스크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오윤도는……!”

“그 역시 대가를 치렀습니다.”

물론 돈으로. 사우가 느긋하게 웃었다. 수빈은 가진 게 없으니 뭐로 대가를 치를까. 어차피 그 몸 밖에 없는 것을. 생각할 시간을 느긋하게 줬다. 어차피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수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뒷목을 문질렀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혀끝으로 입술을 슬쩍 훑었다.

“한 번은 아무 조건도 없이 네 부탁을 들어 줄게.”

“한 번?”

사우가 픽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에 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번으로 오윤도의 대가를 상쇄하기엔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천수빈의 약속 하나가 클럽 두 개의 가치가 있나?”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턱을 매만졌다. 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가 새하얗게 질렸다.

“…뭘 바라는데.”

사우가 뜸을 들이듯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이미 생각해 둔 건 있지만 바로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천수빈은 지금 몸이 달대로 단 어린애니까.

“하나로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당신에게서 바랄 것도 딱히 없고.”

속을 긁는다는 걸 알면서도 콕 집어 말을 이어갔다. 꽉 쥐어지는 주먹을 힐끗 바라보고 웃었다.

“세 가지로 하죠.”

“…….”

“설마 약속 하나가 클럽 하나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죠.”

그 말에 수빈에게서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우가 소리죽여 웃었다.

“교활한 뱀새끼…….”

“칭찬 고마워요.”

싱긋 웃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차피 지금 아쉬운 건 천수빈이고, 그는 절대 거부할 수 없다.

“잘 가요.”

“…승낙할 테니까 조용히 있어.”

그 말과 함께 커다란 덩치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남겨진 사우는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어떤 사건을 벌일지 무척이나 기대됐다.

‘제발 재미있게 해 줘, 천수빈.’

천대경의 조카라면 응당 그래야지. 어차피 둘 다 감시하고 있으니 큰 사건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모두 눈감아 줄 생각이었다. 사우는 긴 웃음을 뽑아내며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 * *

수빈은 검독수리의 모습 그대로 집 발코니에 날아들었다. 그의 무게를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난간이 발에 꽉 감겼다.

‘젠장…….’

교활한 뱀새끼. 사우가 뭘 요구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그는 언제나 대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온갖 술수를 가리지 않으며 이익을 챙겼다. 온 사방에 빚을 뿌려 두고, 그것을 미끼로 제멋대로 조종하려 들었다.

그것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될 거였나. 수빈이 날개를 퍼덕거렸다. 대가야 어쨌든 사우가 묵인해 주겠다고 말했으니 뭘 할지 생각해 봐야 할 시간이다.

‘패밀리에 대한 반역이라…….’

그러면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수빈의 눈이 깜박였다.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난간에 흠집이 났다. 안 그래도 대부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해 불안하고, 탈론에서도 자꾸만 압박을 주는데, 심지어 근신까지 해야 했다. 새삼스럽게 윤도에 대한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부리가 딱 소리를 내면서 다물렸다.

‘그 암컷의 가치가 클럽 두 개라 이거지.’

절대 제 손에서 놓지 않던 것을 기꺼이 풀었다. 사우가 늘 노리던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넘기지 않았는데. 수빈이 곰곰이 생각하다 픽 웃었다. 사우가 바란다는 것을 알아서 더욱더 손에 꽉 쥐고 있었을지도.

‘뒤틀린 새끼.’

그 어떤 것에도 초연한 척 굴면서, 남을 엿 먹이는 일에만 열심인 새끼. 윤도를 잘근잘근 씹은 수빈의 부리가 벌어졌다 닫혔다.

어쨌든 중요한 건 클럽이 아니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순순히 놔 주면서까지 암컷으로 만든 게 중요했다.

어째서? 수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혹시라도 그 암컷을 사랑하기라도 하나.

‘…설마.’

오윤도가? 고고한 척 혼자만 사는 오윤도가. 픽 웃음이 나왔다. 그냥 조금 더 아끼는 것이겠지. 스스로에게 답을 내놨다. 수빈은 날개를 쭉 펴고 퍼덕거렸다.

오윤도에 대해서라면 잘 안다. 남이 손댄 것은 더럽다고 생각한다. 그 무엇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의 것이라고 선을 그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그뿐. 언제든지 망가뜨리고 내내버릴 수 있는 짐승이었다.

수빈이 사람으로 변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독수리의 모습으로 다니는 게 좋았지만 집 안에선 역시 인간이 편했다.

“암컷이라.”

그동안 윤도가 노골적으로 이건 내 암컷이라 선언한 적은 없었지만, 알음알음 그렇게 소문났던 몇은 알았다. 그들은 결국 버려졌다. 흥미가 떨어졌다거나, 아니면 다른 것의 손을 탔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거나.

수빈이 느긋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중에 제일 최악은 다른 것의 손을 탄 거였지. 배신감이라는 그런 고차원적인 감정은 오윤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제 것이 더럽혀졌다는 원초적인 분노, 짜증. 그저 내가 잘 쓰고 있던 물건이 다신 돌이킬 수 없도록 지저분해졌다는 사실이 그의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게 했다.

“오윤도…….”

아끼는 구멍이 있으면, 그걸 못 쓰게 만들어 줘야지. 수빈이 낮게 웃었다. 그게 윤도의 성질을 벅벅 긁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네가 길들여 놓은 물건, 잘 썼다 하고 돌려 주면 얼마나 길길이 날뛸까.

게다가 제법 고분고분해 보였으니, 그냥 박으면 박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 오윤도는 그런 걸 좋아했으니까.

수빈의 입술이 길게 찢어지듯 미소지었다.

‘오윤도가 아끼는 거라 하면 기꺼이 써 보겠다는 놈들도 많을 거고.’

어차피 버려질 텐데. 윤간한 놈들의 애라도 배면 더 재밌겠군. 멍하니 생각한 수빈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정 안되면 그냥 새끼 낳는 존재로 길러도 되고. 어차피 인간에서 수인이 되는 것들 중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별로 없었다. 새끼라도 낳게 해서 길러주면 좋은 거지.

수빈이 느긋하게 웃었다. 어차피 윤도에게 버려지고 나면 갈 데도 없을 테니 절절매며 기는 꼴을 봐도 재미있으리라. 한때는 오윤도의 아끼는 구멍이 추락하는 모습이라니.

‘자리 비우는 날이야 뻔하고…….’

그날 호텔의 경비가 은연중에 강화될 테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처음부터 문을 이용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수빈은 즐거운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발코니로 나간 그는 날개를 펼치고 빠르게 날아올랐다.

* * *

찬은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카펫 위를 돌아다녔다. 시야가 한참이나 낮아진 것이 아직도 어색했다. 눈가에 발굽이 보일 때마다 짐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빼애…….”

게다가 사람 말도 할 수가 없다. 윤도가 사람의 모습을 띠면 다시 말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언제 사람이 될지 기약조차 없었다. 찬이 불안하게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뭐 하고 있어.”

툭 던지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허둥지둥 윤도에게 뛰어갔다. 이제 그래도 걷고, 뛰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찬이 그의 다리에 온몸을 비볐다.

“찬.”

그렇게 불러 줄 때마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윤도는 여기에 있는 사슴 한 마리가 유찬이었다는 걸 기억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딜 봐도 그냥 사슴이기만 한데. 울음소리조차 사람 같지 못하고 빽빽거리기만 하는데도 윤도는 그를 꼬박꼬박 찬이라고 불러 줬다.

‘윤도가 아니면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

두려움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어디 동물원, 혹은 숲속에라도 내버린다면 찬은 그냥 그렇게 사슴으로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모든 이들이 사슴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찬은 스스로를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윤도의 바짓가랑이를 꽉 물었다.

“왜 이럴까.”

책망하는 말과는 다르게 꽤나 기꺼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손이 찬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어깨에 다리를 올리고 뜻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몸으로 어설프게 목을 끌어안았다.

‘정호에게 연락해도 믿지 않을 테고.’

애초에 연락할 방도조차 없지만 연락한다 해도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문자는 칠 수 있을까. 찬은 발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냥 윤도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긴 목의 뒤쪽과 등을 느긋하게 쓸어 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뿔이 많이 자랐네.”

새삼스러운 듯 윤도가 그렇게 말하곤 거울 앞에 찬을 내려놨다. 처음 거울을 봤을 때는 발작하면서 날뛰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체념한 상태였다. 찬은 멍하니 거울을 쳐다봤다. 머리 위에 삐죽 솟은 두 개의 뿔이 제법 자라 있었다. 처음엔 민둥하더니, 이젠 그래도 뿔이라는 게 제법 보인다.

‘녹용……. 보약…….’

오싹한 공포심이 온몸을 관통했다.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뿔은 잘려서 약재로 팔리고 몸에는 구멍이 나서 틈틈이 피를 빨리겠지. 그것도 아니면 고아 먹을지도 모른다.

찬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윤도가 뿔을 슬슬 쓰다듬었다.

“제대로 다 자라면 꽤 멋지겠어. 아, 인간의 모습일 때 뿔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윤도는 동그래진 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섹스할 때 잡고 하면 좋을 것 같거든. 부러뜨리지 않게 살살 잡을게.”

큭큭 웃는 소리와 함께 긴 손가락이 뿔 주변을 더듬었다. 찬은 멍하니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인간들은 보약 같은 걸 떠올릴 텐데 윤도는 섹스를 생각했다.

차라리 그게 나은 것 같았다. 적어도 신체의 일부를 자르진 않으니까.

‘뿔을 자르면 아플까.’

녹혈이라는 것도 있다 들었으니 아프겠지. 찬은 빙글 돌아서서 윤도에게 허우적거리며 발을 휘저었다. 그가 말하는 섹스를 한 지 무척이나 오래된 기분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몇 달은 지났으리라. 창밖으로 보이는 건 새파란 하늘뿐이어서 계절을 알기도 힘들었다.

윤도가 창가에 바짝 데려가 주면 밖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는 침대에는 너그럽게 올려 줘도, 창가에는 안 올려 줬다.

“삐이…….”

커다란 손이 익숙하게 뺨을 더듬었다. 찬이 따듯한 체온에 온몸을 기댔다. 지금 당장 그의 곁에 있는 건 윤도뿐이다. 오윤도뿐이다. 찬을 꺼내 준 것도, 인간인 것을 기억해 주는 것도, 오직 그뿐.

찬은 그에게 조금 더 바짝 다가갔다.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윤도에게 절절거리면서 매달리는 현실에 죽고 싶다가도, 그가 없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또 불안해져 윤도를 찾았다.

‘미친 게 틀림없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찬은 그냥 생각을 모조리 지우고 윤도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 * *

오늘은 윤도가 자리를 비우는 날인 모양이었다. 찬은 안절부절못하면서 그의 발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가끔 걷는 발에 차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혼자일 때의 두려움이 더 컸다.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 봐도 윤도는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는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바짓단을 꽉 물었다. 쭉 잡아당기니 그가 흘깃 내려다보곤 다시 넥타이를 맸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막연히 그런 두려움이 들었다. 사실상 그의 호의에 기대 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언제고 와르르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는 모래성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얌전히 있어.”

윤도가 기어이 현관으로 다가갔다. 찬이 바짓단을 문 채로 질질 끌려갔지만 그는 무슨 깃털 하나 묻은 것처럼 가뿐하게 걸었다.

그가 신발을 못 신게 물고 멀찍이 도망가니 그냥 다른 것을 꺼내 신었다. 찬이 발굽으로 바닥을 콱콱 찍으면서 소리를 냈다. 윤도가 문을 열었다. 차마 밖에까지 따라갈 용기는 없었다. 바깥은 인간들이 가득할 테니까. 두려웠다.

현관의 경계선 바로 앞에 선 채 소리를 냈지만 그는 매정하게도 문을 닫았다. 찬은 멍하니 문을 쳐다봤다. 널브러져 있는 신발 한 짝. 그리고 닫힌 문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발을 질질 끌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찬은 그냥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어딘가에서 윤도가 불쑥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펫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가, 소파 위에 올라가려고 낑낑거렸다.

사슴의 원래 크기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일 때도 평균보다 작은 찬은 사슴일 때도 작은 모양이었다. 발을 들어 소파를 툭툭 치다가 정신없이 뛰었다. 그러다 넘어지면 그냥 그대로 웅크리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따끈한 햇빛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해가 지고 나면 윤도가 돌아올까. 찬은 빨리 해가 지길 빌었다. 눈을 꼭 감은 채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하늘이 새까맣게 변했다.

‘…밤인가?’

고개를 드니 창문에 거대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찬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커다란 무언가의 형태를 천천히 눈으로 더듬었다.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듯 커다랗게 늘어선 것에 깃털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날개…….’

하얀 무늬가 들어간 부분이 눈에 띄었다. 퍼덕거리며 움직이자 순간 스며들어온 햇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다음 뒤이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리가 쏟아져 내렸다.

찬이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전유리인 듯 조각조각 난 유리가 온몸을 두들겼다. 거친 바람이 쏟아지면서 방 안의 것들을 뒤흔들었다.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높은 소리가 울렸다.

“후우…….”

새가 날개를 접으며 바닥에 내려선 순간. 그것은 사람이 됐다. 찬이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윤도만큼이나 덩치가 컸다.

‘…수인?’

하긴, 윤도만 수인일 리가 없다. 그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걸음에 온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독수리에게서 흘러나오던 포식자의 감각이 찬의 모든 기운을 앗아갔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빛을 등지고 선 그가 웃는다고 생각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입술이 길게 늘어지며 쩍 갈라졌다.

“유찬?”

찬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윤도가 그를 찬이라 불러 주는 것 외에 다른 이의 입에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내가 사람인 걸 알아?’

삑 하는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찬은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인간과 조금 다른 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맞나 보네.”

그 말과 함께 둔탁한 충격이 찬의 몸에 찾아왔다. 가차 없이 사슴을 걷어찬 수빈이 휘파람을 가볍게 불었다. 경련 한 번 못하고 그대로 날아간 몸뚱이가 바닥에 철퍽 쓰러졌다.

‘왜 짐승이지?’

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윤도가 설마 짐승의 모습에 박는 걸 좋아하나.

“변태 새끼.”

큭큭 웃음소리를 낸 그가 유찬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제법 멀리 날아간 찬은 반쯤 기절한 채로 헐떡이고 있었다.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고개를 숙여 가만히 몸뚱이를 살피던 수빈이 느긋하게 웃었다. 그의 몸이 새로 변했다. 보통의 검독수리보다 훨씬 더 큰 날개가 가볍게 퍼덕였다.

휘파람 같은 새 소리가 방안을 다시 휘돌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사슴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단단히 찬을 붙든 수빈이 그대로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하게 멀 정도로 높이 날아오른 새의 모습은 금세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찬이 온몸을 움찔 떨었다. 수빈은 약간 더 인내심을 가지고 눈을 뜨길 기다렸다. 한 번 더 걷어찼다간 그냥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삐…….”

짐승의 모습이라 그런지 뭐라고 하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수빈이 짜증스럽게 구두 굽을 바닥에 내리쳤다. 텅 하는 소리가 울리자 바짝 선 귀가 쫑긋거리더니 부르르 떨렸다.

찬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긴 속눈썹 밑으로 새까만 눈이 천천히 드러났다.

“드디어 일어났네.”

수빈이 한심한 기색을 내비치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도 누워 있는 찬의 몸뚱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사람 꼴은 갖춰야지.”

그 말에도 사슴은 사람으로 변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수빈은 위로 고개를 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윤도 이 새끼는 멍청한 게 취향이었나.’

새삼스럽게 오윤도의 취향을 알고 싶진 않았는데. 그는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발끝으로 찬의 가슴께를 가볍게 툭툭 찼다.

“사람으로 변해 보라고.”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했다. 그 말에 찬이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수빈이 욕설을 꿀꺽 삼켰다.

“사슴 구멍에 박히고 싶어? 오윤도 취향이 그런가?”

“삑…….”

“별… 거지같은. 짐승 새끼 구멍에 박으라니. 우리 모두 수간엔 별 취미 없는데.”

찬이 부들부들 떨더니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금세 픽 웃었다.

“아아. 그런 건 못하나?”

그 말에 두려운 듯 끄덕이는 머리가 벌벌 흔들렸다. 더욱 몸을 웅크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엾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수빈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오윤도가 끼고 돈다고 해서 좀 괜찮은 암컷인 줄 알았더니……. 멍청한 반 쪼가리네?”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인간, 혹은 짐승. 두 개 중 하나밖에 못 하는 꼴이라니. 아무리 인간이 강제 각성 의식을 치렀다고 해도, 정신이 무너졌다 해도 인간의 모습을 갖추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지금까지 인간의 모습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니. 정말 오윤도의 취향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정말 사슴 뒷구멍에 박는 걸 좋아하든지.

수빈이 킥킥 웃었다. 그가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인간일 때 써야 빠르긴 하지만……. 뭐. 반푼이 새끼니 어쩔 수 없지.”

비웃는 소리에 찬이 그냥 고개를 파묻었다. 사슴이 제 다리 사이로 머리를 쑥 집어넣었다. 수빈이 찬에게 손을 뻗었다. 움찔거리면서 뒤로 물러나려는 사슴의 머리를 꽉 붙잡고, 입을 벌렸다.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굽이 바닥을 벅벅 긁었다. 따각거리는 불안정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허우적거리는 찬의 입속에 액체를 털어 넣었다. 뱉을 수 없게 턱을 치켜들게 하고 액체가 넘어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빈은 그 뒤로도 잠시 기다렸다가 던지듯이 손을 놔 버렸다.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찬이 바닥에 거칠게 부딪혔다.

“첫 발정기에 새끼까지 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렇지?”

수빈이 낮게 웃으면서 허우적거리는 몸을 발끝으로 툭 툭 건드렸다.

그가 먹인 건 발정기를 억지로 불러오는 약이었다. 물론 수인들의 사이에서도 불법인 약물이기에 구하는 게 조금 귀찮긴 했으나, 크게 어렵진 않았다.

‘잘됐네.’

약이 아니었으면 찬을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는 것도 못했을 테니, 잘된 일이다. 발정기가 되면 암수 상관없이 누구나 임신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불규칙하게 발정기가 찾아오면 보통 스스로의 ‘냄새’를 어떻게든 억제하려 하거나, 아니면 제 짝과 꼭 붙어 다녔다.

반푼이 수인이라면 냄새를 억제하는 법도 모를 테고, 심지어 혼자 던져져 있으니 결과야 뻔했다. 누구 새끼인지도 모를 것을 배게 되겠지. 수빈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젠장. 덜떨어진 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만 했으면 약 효과가 바로 들 텐데.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게 먼저라 그런지 효과가 영 느렸다.

어쨌든 발정기를 불러오는 약의 목표는 새끼를 배는 거였으니 어떤 종이 와도 임신 가능하도록 ‘인간’의 형태를 띠는 게 먼저였다. 당연한 일이다. 수빈은 물끄러미 찬을 내려다봤다. 겁에 질린 새까만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다가 질끈 감겼다. 슬금슬금 다리를 끌어당겨 웅크리는 모습을 짜증스럽게 쳐다보다 뒤돌아섰다.

“인간이 되면 불러.”

다들 인간의 형태일 때 쓰던 것만 봐서 그런지 답답하도록 느렸다. 수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런 냄새도 안 났다. 그 말은 아직 발정기는 시작도 안 됐다는 뜻이다.

수빈이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찬이 멍하니 그 뒷모습을 쫓다가 눈을 감았다. 온몸이 또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았다. 새까만 방에서 겪은 고통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아파…….’

이를 꽉 악물어도 삑삑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픔에 뒤이어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조각난 뼈가 일제히 불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눈을 깜박여 봐도 계속 정신이 흩어졌다.

‘도망가야 해…….’

그냥 말하는 것만 들어도 상대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냥 인간으로서의 ‘유찬’을 아는 존재가 있다는 게 너무 기뻤는데. 찬이 떨리는 다리로 바닥을 긁었다. 디디고 싶은데 제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콧속과 입속이 화상을 입는 기분이었다. 찬은 길게 신음했다.

윤도가 끔찍하도록 보고 싶었다.

* * *

윤도는 문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걸음 소리만 들려도 찬이 현관까지 나오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오늘은 유독 조용했다. 아니, 제법 큰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었나?’

찬의 높이로는 창문에 닿을 수 없었을 텐데. 아니면 드디어 사람으로 변했나사람의 모습을 찾았나. 윤도는 문을 열었다. 그가 나갈 때와 똑같이 신발 한 짝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찬.”

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윤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디 숨어서 잠들기라도 했나. 넥타이를 쭉 잡아당기면서 거실로 발을 들인 그는 그대로 굳었다. 산산조각 난 창문. 그리고 몇 방울 점점이 떨어져 말라붙은 피.

“하…….”

윤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는 인터폰을 들었다가 거친 손짓으로 쾅 내렸다. 손바닥 아래 전화기가 산산조각 났다.

“천수빈…….”

누군지 묻지 않아도 뻔하다. 호텔의 가장 위층의 창문이 부서졌다. 총을 맞아도 깨지지 않도록 두꺼운 방탄인데 그것을 깨뜨렸다. 윤도의 입술이 뒤틀린 미소를 띠었다.

그는 그대로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윤도?”

호텔 로비에 앉아 있던 주훈이 벌떡 일어섰다.

“새새끼들 본 새끼는 없어?”

“새?”

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윤도가 낮은 한숨을 쉬면서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볼 리가 없지.’

그런 식으로 침입할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비들에게 호텔 주변 하늘을 유심히 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도시에 검독수리가 나타나면 눈에 띌 테니 그놈들은 아주, 아주 높이 비행하는 버릇이 있었다.

“갑자기 탈론 놈들은 왜?”

“누가 드나들진 않았겠지.”

“그야… 당연하지.”

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따로 연락을 했는지 멀끔히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윤도 님.”

“탈론에서 누가 왔나?”

“아니요. 오늘은 아무도 못 봤습니다.”

“따로 경보도 안 울렸고.”

“네.”

윤도가 이를 꽉 물었다. 가장 꼭대기 방은 언제나 그가 사용하는 곳이기에 별다른 장치를 해놓질 않았다. 그 누가 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어쭙잖은 탈론 놈들이 와도 유리를 간단히 깰 수는 없었다. 윤도가 이마를 문질렀다.

어차피 답은 나와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단 한 놈.

윤도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윤도? 오윤도! 어디가!”

주훈이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윤도! 야!”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다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깨닫겠지.

“윤도 님?”

“나와.”

운전기사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윤도가 올라타서 있는 대로 속력을 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수빈. 천수빈.’

그동안 후계 자리에 함께 거론되면서도 ‘적’이라 인식한 적은 없었다. 그냥 재미있는 놈, 짜증나는 놈, 혹은 귀찮은 놈. 그런데 이렇게 작정하고 윤도의 성질을 긁으려 들다니.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려 댔지만 윤도는 거의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다.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은 한 군데였다. 천수빈이 머무는 곳을 아는 뱀. 그를 만나기 위해 달린 윤도는 운전대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늑대의 모습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더욱 그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윤도에게는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백사우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백사우가 있는 곳까지 직행하니 데스크에 앉은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오윤도 님. 미리 약속을…….”

“됐어, 앉아.”

사우가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 윤도를 맞아 줬다.

“어딘지만 말하면 조용히 갈 생각이야.”

“우선 앉죠.”

소파를 힐끔 쳐다보곤 다시 사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윤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새침을 떠는 얼굴을 보면서 이를 득득 갈았다.

“모르는 척하지 마.”

“뭘 말인가요?”

웃음이 나왔다. 그가 크게 웃자 사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둘 다 아는데도 끝까지 그러다니.

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극히 적은 사람들뿐이었다. 방을 청소하는 사용인 둘, 윤도의 측근 두셋. 그리고 백사우.

“아는 게 없다고?”

위협적인 느낌이 강한 말에도 사우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는 소파 위에서 다리를 꼬더니 턱을 괴면서 윤도를 쳐다봤다. 벌건 혀가 입술을 쓱 훑었다.

“말해.”

“무슨 일인지 알아야 무슨 말이든 할 게 아닙니까, 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을 해 줘야죠.”

사우가 빙글빙글 웃었다. 윤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장 빨리 눈치챘을 교활한 새끼가 그를 시험하려 들었다.

“누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라고 말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윤도의 눈이 서늘하게 식어 갔다.

“찬을 데려갔다.”

그 말에 사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누군가가… 가장 최상층에 있는 당신의 방에 침입해서 사슴을 데려갔다는 뜻인가요?”

윤도가 픽 웃었다. 찬이 사슴이라는 것을 함구하도록 시켰는데, 어디선가 정보가 술술 빠져나갔다. 사실 그동안 그것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윤도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화가 치밀었다. 백사우는 찬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사라졌는지 윤도보다도 빨리 알았다.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눈에서 불이 이는 듯 눈가가 화끈거렸다. 사우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뱀…….’

이 와중에도 비밀 따윈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하려 들었다. 불쾌감이 엄습했다. 천수빈에게 정보가 흘러들어간 것 역시 백사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한 뼘도 넘는 두께의 유리를 깨고, 사슴을 납치할 수 있는 ‘새’가 몇 마리나 될까…….”

괜히 뜸을 들이듯 턱을 매만지는 손을 꺾어 버리고 싶었다. 윤도가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어쨌든 백사우는 지금 천대경의 대리다. 그것을 몇 번이고 마음속에 되새겼다.

“대부님은 칩거 중이신데.”

빙긋 웃는 눈이 가늘어졌다. 천대경의 짓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굳이 찍어 말한다는 점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사우가 재미있다는 듯 하하 소리를 냈다.

“그러면 천수빈 뿐인가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되묻기까지 했다. 윤도는 팔걸이를 꽉 쥐었다.

“천수빈이 사는 곳이 어디인지만 말해 주면 돼.”

“어디 사는지 모르고 있었나요?”

“그 새끼는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데 내가 알게 뭐야? 새똥 냄새 때문에 도시에서도 못 사는 새끼를…….”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우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가 폈다. 그는 괜히 뜸을 들였다. 동작 하나하나에 짜증이 치밀어 눈앞이 번쩍거렸다.

윤도가 인내심을 새기고 또 새긴 뒤에야 그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요즘엔 거기 머문다더군요.”

그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고맙다는 인사 따윈 사우에게 너무 과했다. 폭풍처럼 왔던 윤도가 나가고 나자 방이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하여간.”

사우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천수빈이고 오윤도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대경이 칩거에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명확하게 결론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누가 후계자인지 겨루자며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탈론이고 클로고 권력에 눈이 멀었다. 사우의 손끝이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천수빈이 하는 짓이야 뻔하다. 애초에 찬의 존재와 강제 각성 의식을 치렀다는 걸 슬쩍 흘렸으니. 오윤도에게 되지도 않는 원한을 품은 그가 할 짓은 하나뿐이었다.

‘뭐, 죽이진 않을 테고.’

저도 머리가 있으면 죽이진 않겠지. 사우는 픽 웃었다. 오윤도가 나름 귀하게 여기던 것을 내놓으면서까지 원했던 상대다.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사우가 단정 지을 수는 없었으나, 가볍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둘 다 이번 기회에 한 번 맞붙어 보라지. 사우가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천대경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치고받고 싸우는 꼴을 보이는 한심한 족속들. 차라리 둘 다 크게 타격을 입어 그냥 근신했으면 하는 바람도 조금 있었다.

‘감히…….’

감히. 사우는 그 단어를 감히 떠올렸다. 감히 천대경의 눈이 잠시 떨어졌다고 그 자리를 차지해 보겠다고 수를 써. 그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다. 사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칩거한 상태로도 패밀리가 돌아가는 꼴은 잘 알고 계실 테니, 지금까지 말이 없다는 건 사우의 행동 역시 묵인한다는 뜻이다. 그는 느긋하게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찬이라는 하잘것없는 인간이 불러온 파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 * *

윤도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그를 맞아 준 건 클리크들이었다. 다들 굳은 얼굴로 주르륵 선 꼴을 보고 있으니 무슨 폭력배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겠어.”

평소 과묵하던 도현이 불쑥 나섰다. 주훈이 약간 미안한 얼굴로 윤도의 시선을 피했다.

“혼자 가도 돼.”

“무슨 소리야.”

윤도가 차 문을 열려고 하자 도현이 쾅 닫았다.

“클리크의 존재 이유가 뭔데. 이럴 때 함께 하라고 있는 거 아닌가?”

그가 손에 쥐어진 차키를 빼앗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백사우가 주소는 넘겨 줬어?”

윤도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그들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윤도 혼자라면 모를까. 찬을 데리고 있어야 하니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기.”

주훈이 재빨리 종이쪽지를 받아들었다. 그가 눈짓하자 죽 늘어선 차에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탔다. 윤도가 낮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놀란 얼굴로 그들을 힐끔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거 완전 시골 산구석이잖아?”

주훈이 주소를 살피더니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촌놈이라 그래.”

조수석에 앉은 도현이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윤도는 웃을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천수빈이 왜 시골구석을 고집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수빈은 인간의 모습보다 짐승의 모습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날아다니는 것 역시 즐겼다.

‘그럴 거면 멸망된 세계에나 갈 것이지.’

윤도의 입술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차가 일제히 출발했다.

주먹을 쥐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손을 폈다. 손바닥 위에 날카롭게 눌린 자국에서 피가 스물 흐르다가 멈췄다. 윤도는 점점이 떨어져 있던 마른 핏방울을 떠올렸다.

‘죽진 않았겠지.’

어차피 천수빈은 그의 것을 짓밟는 것에 희열을 느끼니, 그냥 죽이진 않았으리라. 게다가 자신이 죽음을 대갚음할 때 어떤 식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윤도는 빠르게 뒤로 사라져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도심을 빠져나온 차는 최고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갈수록 한적한 길이 이어지다가, 이내 1차선으로 줄어들었다.

‘가까워지고 있다.’

새 소리뿐만 아니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시골이라면 어딘가에서는 짐승의 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괴이하도록 조용했다. 윤도가 눈을 떴다.

“꽉 잡아!”

주훈이 버럭 외치자마자 차에서 텅 소리가 울렸다. 대문을 그대로 들이받고 달리는 모습에 윤도가 어이없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야. 천수빈네 집을 부술 수 있다니!”

뭔가 광기마저 가득한 말에 말없이 다들 손잡이를 잡았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주훈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액셀을 밟았다. 한계까지 속도를 올린 그는 그대로 현관을 들이받았다.

비명과 함께 피 냄새가 올라왔다.

“미친놈.”

도현이 중얼거리면서 찌그러진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섰다. 윤도 역시 열리지 않는 문을 거칠게 찼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졌다.

뒤로 줄줄 쫓아온 차에서 윤도의 클리크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거 확실하지?”

“아마도.”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늑대로 돌아가야 하나.’

아무래도 인간의 몸을 하고 있으면 냄새에 둔감해진다. 일반적인 ‘인간’에 비한다면 어마어마할 정도로 예민하긴 하지만 그뿐, 짐승에 비할 건 아니었다.

윤도가 목을 이리저리 돌리곤 변하려고 하자 먼저 주훈이 손짓했다.

“도현아, 네가 좀 변해 봐라.”

“나?”

“그래, 늑대보단 개가 낫지. 그렇다고 윤도에게 변하라고 해?”

“아, 이 새끼가…….”

“빨리.”

그 말에 도현이 인상을 썼다. 냄새로 추적하는 건 좋지만 뭘 맡게 한단 말인가. 윤도가 가슴께를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찬이 물었던 바짓단에 아직도 냄새가 남아 있을까. 그는 인상을 찌푸리다 불쑥 물었다.

“냄새는?”

“오기 전에 이불 하나 집어다가 냄새 맡게 했으니까 다 알아.”

윤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훈이 어설퍼 보여도 제법 섬세했다. 도현이 개로 변하려던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달콤한 향기가 스멀스멀 퍼져 나왔다. 윤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노골적인 발정기의 향기 속에 섞인 냄새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인간의 코로도 충분히 맡아질 정도로 짙어진 찬의 냄새.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이렇게 숨길 줄도 모르는 발정기의 향기는 처음이었다. 수인의 아이라면 어릴 적부터 발정기의 냄새 정도는 어느 정도 갈무리할 줄 아니까. 물론, 완벽하게 숨기진 못하더라도 이렇게 근방에 있는 모든 수인들의 몸을 달게 만들 정도로 풍기진 않았다.

윤도의 얼굴이 굳었다. 수인의 발정기가 아무리 불규칙하다고 해도, 이건 비정상적이었다. 아직 사람으로 변하지도 못하는데. 발정기?

‘…약.’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앞쪽에 서 있던 주훈과 도현이 주춤거리면서 물러섰다.

“흡…….”

두 사람이 조금 뒤늦게 숨을 멈추고 손으로 코 주변을 막았다. 그런 것으로 냄새를 모두 막을 수는 없다는 걸 모두 알지만, 둘은 필사적이었다.

윤도의 눈치를 흘깃 살핀 주훈과 도현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뒤로 시선을 돌리자 발정기의 냄새를 맡은 모두가 주춤거리면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본능이라는 게 어떤지 안다. 그것도 한 개체가 이렇게 나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면 누구라도 달려들 만했다. 그러나 윤도의 존재가 그 본능을 제대로 억누르는 모양이었다.

‘망할…….’

어디까지 진행된 걸까. 윤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암컷이, 아무리 강제라고는 해도 이런 곳에서 첫 발정기를 맞았다. 심지어 숨길 줄도 모르고 주변의 모든 수인들에게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나가.”

“그… 흐……. 알았어.”

주훈이 코맹맹이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도현의 손에 끌려 나갔다. 윤도는 느긋한 척 천천히 걸어가다가, 결국 뛰었다. 뒤를 쫓아오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윤도는 조금 더 트인 곳으로 비틀거리면서 향하는 클리크들을 바라봤다. 개중에 성적으로 흥분한 놈들도 있겠지. 불쾌해졌다. 그의 암컷인데. 윤도만이 맡고, 그의 자지만 세워야 하는 냄새인데. 엄한 것들이 찬의 냄새에 흥분했다.

그의 발이 바닥을 거칠게 걷어찼다.

분명 발정기가 되었으니 몸의 구조가 바뀌었을 터. 지금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면 임신하기도 쉽다. 암수 상관없이 임신시키고, 임신하는 게 당연하게 되었으니. 만약 누군가가 성기를 찬에게 쑤셔 넣기만 해도 새끼의 애비가 될 만한 자들은 수도 없이 많은 셈이었다.

윤도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한 발을 내딛을수록 냄새가 진득해졌다. 피부에 들러붙는다는 게 이런 걸까.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미 머리끝까지 찬 흥분에 자지가 뻣뻣해졌다. 이미 쿠퍼액이 줄줄 새어 나오는 듯 속옷 속이 질척했다.

“젠장…….”

지금 어느 정도 멀리 있는 그도 이 상황인데. 바로 지척에 있는 놈들은 어떨까. 그냥 넣는 대로 바로 질질 싸게 될지도 모른다. 복도 끝에 다다른 윤도는 철로 된 문을 노려봤다. 그 틈새로 마치 젤리 같은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주먹으로 내리치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 우그러졌다.

“열어.”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윤도의 말에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으흑…….”

안쪽에서 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윤도의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번쩍였다.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처음 겪는 분노에 손이 떨렸다. 그는 이를 꽉 물고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걷어차고, 또 걷어찼다. 언제나 매끈하게 관리되어 있던 구두 끝이 엉망으로 뭉그러졌다. 윤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철로 된 문이 우그러지고, 우그러지다가 느린 속도로 무너졌다.

이층집이 떨릴 정도로 무거운 소리가 났다. 윤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여러 가지로 떳떳치 못한 일에 쓰는 방이기라도 한지, 무너진 문은 각성 의식을 치르는 금고용 문보다 더 두꺼웠다.

윤도가 느릿하게 문을 밟고 넘어갔다. 방 안에 꽉 차 있던 발정기의 냄새가 조금 옅어진 탓인지, 모여 있던 것들이 고개를 돌렸다. 윤도의 시선이 그들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유찬.”

짐승의 소리가 나왔다. 한 남자의 허리 뒤로 뻗어 있는 익숙하고, 비쩍 마른 다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맞기라도 한 듯 얼굴은 얼룩덜룩 엉망이었다. 코피가 줄줄 흐르면서 눈물도 함께 흘렀다.

“유… 유운…….”

얼어붙은 공간을 뭉개진 목소리가 쩍 갈랐다. 그 가느다란 소리에 윤도의 이성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발밑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윤도가 성큼성큼 다가가 가장 가까이 있는 것부터 걷어찼다.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발정기에 머릿속까지 정액으로 꽉 찬 놈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윤도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그대로 목을 꾹 짓밟았다. 숨이 막히는 소리에 그대로 사지를 반대로 꺾었다. 하나하나 짓밟고, 꺾으면서 덤비는 놈들의 얼굴을 철썩 때렸다. 목이 꺾일 듯 휘었다. 손바닥으로 때릴 때마다 피가 튀었다. 버둥거리던 손이 윤도의 손목과 팔을 할퀴다 금세 늘어졌다.

그냥 아무것도 제대로 느껴지질 않았다. 모든 것이 아득했다. 찬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멍청하게 쳐다보는 장면만이 눈에 박혔다. 손자국이 그대로 난 뺨, 피가 흘러나오는 코, 엉망진창으로 젖은 눈가.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몸. 윤도가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등을 꾹 짓눌렀다. 조금씩, 조금씩 다리에 힘을 줬다. 버둥거리며 바닥을 긁던 손가락에서 손톱이 떨어져 나갔다. 조금 더 힘을 줬다. 도망치는 건 여의치 않다 생각했는지 몸을 뒤집으려고 발악했다.

조금 더. 윤도가 얼어붙은 얼굴로 더 힘을 준 순간, 우득 하는 소리가 들리고 버둥거리던 몸이 축 늘어졌다.

“히윽… 윽…….”

딸꾹질에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벌어진 다리를 닫을 생각도 못 했는지. 그대로 훤히 구멍을 드러낸 찬이 그냥 누운 채 히끅거리며 울음소리를 냈다.

“…….”

일어나라는 말 대신 찬을 들어 올렸다. 사슴일 때 그래도 제법 많이 먹는 것 같더니, 여전히 비쩍 마른 몸이 만져졌다. 그에게 허리를 붙잡혀 들린 채 사지를 늘어뜨린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흑. 윽… 윽…….”

애써 눈물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윤도는 그냥 그를 안았다. 시체처럼 가만히 늘어져 있던 찬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목을 끌어안았다. 몇 겹의 천 너머로도 열이 오른 몸이 느껴졌다.

“흐응…….”

두려움이 많이 가신 건지, 아니면 발정기 때문에 그 역시 머릿속에 교미 생각밖에 없는 건지 찬이 낮게 신음하면서 윤도의 몸에 제 자지를 갖다 댔다. 뻣뻣해진 것을 매끈한 정장 위에 슬슬 문질렀다.

“어차피 자지로 가지도 못하면서.”

그의 말에 찬이 허덕이면서 고개를 조금 들었다. 마른 손가락이 윤도의 목덜미를 더듬다가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갔다. 근육의 갈라진 부분을 손끝으로 쓸면서 조금 더 은밀한 곳으로 내려 가려는 손을 붙잡았다.

“나중에.”

물론 윤도의 자지도 지금 바짝 선 채였지만 아직 상황이 완벽히 정리된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찬이 허덕이면서 애교를 부리듯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윤도는 잠시 생각하다 정장 웃옷을 벗어 찬에게 입혔다. 그러자 저도 나름 짐승이라고, 냄새를 맡는 듯 품에 고개를 처박은 찬이 헐떡이는 신음 소리를 냈다.

“…하아.”

윤도는 쓰게 웃었다. 처음 맞는 발정기의 흥분이 얼마나 짜릿하고 자극적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온몸이 흥분한다는 걸 체감한 것일 테니까. 세포 하나하나가 교미를 원하고, 머릿속에는 오로지 새끼를 배게 하거나, 배기 위한 생각으로만 꽉 들어찬다.

그래서 발정기의 그 감각에 중독되는 수인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약도 도는 거였고. 윤도는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헐떡이며 제 자지를 만지작거리는 찬을 바라봤다.

‘…뭐, 가렸으니 됐나.’

클리크 놈들이야 알아서 눈을 피할 거고. 냄새가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윤도의 것에 손댈 간 큰 수인은 없었다.

그가 문밖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천수빈이 길을 막아섰다.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수빈이 보란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덜떨어진 반푼인 줄 알았는데. 발정기 냄새에 이 근방 수인들 자지가 다 터지겠어.”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의 집에 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그가 빙긋 웃었다. 윤도가 수빈의 손에 들린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디오카메라였다. 그것을 보여 주듯 들어 올린 수빈이 킥킥 웃었다.

“대접해 주려고 했는데. 그냥 돌아가면 내가 섭섭하지. 네가 아쉽지 않도록 윤간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찍을 생각이었는데. 역시 생으로 보는 게 더 흥분되나?”

윤도는 그냥 그를 지나쳤다. 결국 자위로는 흥분을 해결할 수 없었는지, 찬이 끙끙거리면서 꾸물거렸다. 답답해 미쳐 버릴 것 같다는 얼굴로 애원하듯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오윤도.”

수빈이 카메라를 옆으로 툭 던졌다.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필이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올 게 뭐야.”

“내가 조금 성질이 급해서 말이야.”

윤도가 무뚝뚝하게 대답하곤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수빈이 빠르게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 아래층에서는 새와 개, 늑대들이 뒤엉켜 싸우는 중이었다. 개중엔 인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본 모습이었다.

“저번에 못다 한 대화는 하고 가야지.”

못다 한 게 뭐든 윤도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뭘 말하는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어서 찬을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는 수빈을 툭 옆으로 치곤 지나가려 했다. 손이 닿은 순간, 날카로운 발톱이 윤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세게 울렸다.

“천수빈.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새대가리였군.”

윤도가 검독수리의 발목을 꽉 움켜잡았다. 찬을 바닥에 살짝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무기만큼이나 날카로운 발톱이 윤도의 손등을 길게 그어내며 손을 풀고 멀찍이 날아가 다시 인간으로 변했다.

“이제 할 생각이 드나?”

“새대가리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새겨 주지.”

윤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딱 한 번, 크게 다친 그가 도망쳤다고 이제 이길 수 있다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라면 확실히 누가 우위인지 새겨 줘야 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애초에 윤도는 손톱의 후계가 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없었다. 클로와 탈론. 서로가 권력을 잡으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 내세운 게 그 둘일 뿐.

“새대가리라서 멍청한 생각밖에 못 하니, 그 머리를 그냥 떼는 편이 낫겠어.”

수빈의 웃는 얼굴에 쩍쩍 금이 갔다. 그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우습지도 않았다. 천대경의 친척이면서, 그와는 비교조차 되질 않는다.

윤도는 가볍게 피하기만 하다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똥 밭이나 기어 다니는 개새끼가.”

이를 악문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윤도가 수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새로 변하더니, 팔에 긴 상처를 냈다.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고통스럽긴 했지만, 이런 것으로 그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윤도가 씩 웃었다. 천수빈이 기를 쓰며 상처를 입히든 말든, 그대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번 내리쳤다.

“윽!”

수빈의 목이 거칠게 돌아갔다. 발톱이 윤도의 어깨를 푹 찍었다. 인간으로 변했다가, 새로 변하길 반복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인간으로 변했을 때 다시 한 번 주먹질을 했다.

“분수도 모르는 새대가리.”

윤도가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었다. 그의 세 번째 주먹이 닿은 그 순간, 압도적인 기운이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싸우던 것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런 기운을 품은 것은 모두의 기억 속에 단 한 명뿐이었다.

대부 천대경.

뒤엉켜 있던 모든 이들이 슬그머니 물러섰다. 싸움으로 인해 이미 박살 나 있던 커다란 창문에 거대한 새가 다가왔다.

검독수리의 한쪽 다리에 휘감긴 뱀 하나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날개를 접고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며 새도 뱀도 사람으로 변했다. 천대경과 백사우. 그 둘의 등장에 아래층 수인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며 허리를 숙였다.

윤도는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천대경은 절대적이었다. 그렇다 해도 찬에게 한 행동에 대한 분노가 윤도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오윤도.”

천대경이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처럼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모두가 추측하는 대로 건강 탓인지. 윤도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천대경의 등 뒤로 싱글벙글 웃는 백사우의 얼굴이 보였다.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미소로 엉망진창이 된 집안을 바라보는 꼴이, 마치 이렇게 되길 바란 듯이 보였다.

“…놔 줘라.”

천대경의 손이 윤도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이라곤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손짓에 멱살을 잡은 손이 스르륵 풀렸다.

“쿨럭…….”

수빈이 들으라는 듯 거친 기침 소리를 냈다. 윤도가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어쨌든 천대경은 여전히 가장 강한 자였고, 윤도가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윤도의 행동에 수빈이 엉거주춤 따라서 자세를 숙였다. 등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찬이 얼어붙은 게 느껴졌다. 발정기의 흥분 자체는 어쩔 수 없었는지,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내긴 했지만 천대경의 압도적인 존재가 더욱 버거운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자 주변을 살피고 있는 천대경의 눈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세 눈치챈 듯 그가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천수빈.”

“네. 대… 으흑!”

번쩍 고개를 들자마자 천대경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가슴께를 걷어차인 수빈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쓰레기만도 못한 놈.”

엄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수빈이 엉금엉금 기어와 다시 무릎을 꿇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가족에게 이런 짓을 하나.”

윤도는 뒤쪽의 백사우를 흘깃 쳐다봤다. 아마 천대경이 없었다면 큰 소리로 폭소하고 있었겠지. 수빈이 무릎 위에 놓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오윤도.”

“네.”

그가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어쨌든 이 일에 있어서 윤도는 피해자였다. 천대경이 그의 등 뒤에 웅크린 찬을 흘깃 쳐다봤다.

“가장이 되려면 암컷을 잘 갈무리해야 한다.”

“…신경 쓰겠습니다.”

윤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천대경의 시선이 머리 위에 느껴졌다. 잠시 좌우로 움직인 그의 발이 빙글 뒤돌아섰다.

“각 파벌에서 후계자라 미는 놈들이 이런 식으로 싸움이나 일삼고.”

마음에 안 찬다는 듯 혀를 쯧 차는 소리에 백사우가 신나게 웃었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이 바라는 게 뭔지 가끔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미심쩍은 시선을 즐기듯 넘긴 사우가 천대경에게 바짝 다가갔다.

“마음에 안 들어.”

노골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가 나왔다. 윤도와 수빈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그 말을 들었다. 이미 싸우는 순간부터 천대경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누가 눈에 차겠어요.”

뱀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아마 그 누가 와도 마음에 들지 않으실 겁니다.”

사우의 시선이 슬쩍 닿았다가 떨어졌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천대경이 그런 말을 하는 건 괜찮지만, 백사우가 저따위 말을 지껄이는 것에 짜증이 치밀었다.

“늦었습니다.”

짧은 말과 함께 뒤늦게 도착한 천대경의 수하들이 와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별다른 말없이 까닥하는 손짓에 그들은 천수빈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잠깐, 왜 나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대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행동에 수빈이 새로 변했다. 도망칠 수 없도록 날개를 단단히 붙든 채 다시 창밖으로 날아갔다.

주모자가 잡혀가고 나니 정리되는 건 금방이었다. 묵묵히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천대경과 신난 얼굴로 지시를 내리는 백사우라니. 수빈의 뜻에 따른 이들까지 모조리 연행한 그들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독 거대한 천대경의 발에는 또 백사우가 감겨 있었다.

“윤도……. 윤도야.”

아래층에서 얼어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훈이 새파래진 얼굴로 2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님이 직접 나서시다니, 우리도 뭔가 처벌이 있는 건…….”

“이만 돌아가.”

“너는?”

윤도는 말없이 일어서서 찬을 안아 들었다. 압도적인 힘에 밀려 잊고 있었다는 듯 주훈이 아, 하는 짧은소리와 함께 클리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부산스럽게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흘깃 본 윤도가 가까이 있는 문을 걷어찼다. 이미 천대경이 말끔히 탈론의 새들을 끌고 가 버린 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흐응…….”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사라져서인지 찬이 꼬물거리며 달뜬 숨을 쌕쌕 내쉬었다. 그의 옷 속에서 작게 움직이는 그 행동이 뭔지 뻔히 알 수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윤도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면서 손으로는 제 자지를 훑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뒤를 푸는 게 나을 텐데.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다음 방문을 툭 찼다. 서재와 드레스룸에 이어 침실이 보였다. 손님들이 머무는 곳인 듯 말끔하게 정리된 방은 조금 작았다.

“하아…….”

찬이 끙끙거리면서 윤도를 더듬었다. 비쩍 마른 손가락이 셔츠 위를 매만지다가, 옷이 방해된다는 듯 손톱으로 그 위를 긁었다.

윤도가 침대에 찬을 내려놨다. 그의 웃옷을 걸쳐 준 의미도 없이 흘러내렸다. 찬이 이불의 차가운 부분에 피부를 갖다 대며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흣. 으…….”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윤도가 침대에 걸터앉아 찬의 뺨에 손끝을 갖다 댔다.

“아!”

외마디 비명 소리가 났다. 벌써 보랏빛으로 멍들어가는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찬이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얻어맞아 입안이 찢어지기라도 한 듯 입술 사이로 핏기가 슬쩍 비쳤다.

“아, 아파…….”

“그래, 아파 보이네.”

윤도가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거친 손끝에 가지런한 이가 만져졌다. 하나하나 더듬듯이 쓸어내리자 찬이 말랑한 혀로 그의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이는 안 나갔으니 다행이다.”

“아……. 으우…….”

윤도가 픽 웃었다. 볼 안쪽이 찢겨 있었다. 찬의 혀가 꾸물거리면서 그의 손끝을 툭 건드렸다. 혓바닥을 살살 문지르자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기분 좋아?”

“아아…….”

이젠 혀를 내밀기까지 했다. 윤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처음이다. 아니, 물론 그동안 그의 눈치를 보면서 먼저 넣거나 허리를 알아서 흔든 적은 있어도 이렇게 안아 달라고 애처롭게 조른 적은 없었다.

발정기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흥분이 됐다. 찬이 손을 뻗었다. 자신의 쿠퍼액으로 질척한 손바닥을 윤도의 셔츠에 문질렀다.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다른 놈들이 넣었어?”

윤도가 고개를 숙였다. 찬의 다리를 벌리자 당장 안을 채워 넣어 달라는 듯 허벅지를 한껏 벌리고 윤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흐아. 하……”

찬이 가쁜 숨을 내쉬면서 윤도의 등을 손끝으로 긁어 댔다. 그는 타액으로 질척해진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천천히 뒷구멍을 더듬고, 조급하게 밀어 넣었다. 말랑말랑한 살이 손가락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하으…….”

마른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가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윤도는 가만히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손가락 하나 넣었을 뿐인데, 찬은 헐떡이면서 그것을 조이고 스스로 넣었다 빼길 반복했다.

“더… 으흑……. 더. 더…….”

꽉 말아 쥔 주먹이 윤도의 등을 툭 툭 때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원하는 만큼의 자극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찬의 냄새가 짙어졌다. 제어할 줄도 모르고 마구 뿌려 대는 향수 같았다. 윤도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성이란 단어가 점점 흐려졌다.

“망할…….”

거의 모든 섹스가 강간이었다. 그래서 처음 수인이 되고 나서의 섹스는 조금 다정하게 해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닥치는 대로 발정 난 냄새를 뿌려 대다니. 윤도의 몸이 찬을 덮었다. 뼈가 드러난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들이마셨다.

“하아…….”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윤도가 정신없이 벨트를 풀고 자지를 꺼냈다. 튕겨 나온 자지 끝은 이미 반들반들하게 젖은 상태였다.

“아무 자지나 세우게 만들고, 발정 난 암컷 같으니.”

윤도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 달콤한 냄새를 여기 있던 모든 수인들이 다 맡았을 거라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이미 말랑말랑하게 풀린 뒷구멍에 자지를 갖다 댔다. 밀어 넣기도 전에 찬이 허리를 움직여 스스로 집어삼켰다.

“읏. 응……. 하아… 아앙…….”

찬이 벌벌 떨면서도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윤도와 바짝 붙었다. 단숨에 뿌리까지 집어삼킨 구멍이 움찔거리며 조여 들었다.

내벽은 이미 질척하게 젖은 상태였다. 윤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발정기인 상대와 함께 있는 건 처음이었다. 왜 다들 발정기 약을 먹는지 이해가 됐다. 찬이 내쉬는 숨결 하나, 조여 들어오는 주름 하나, 얕게 울려 퍼지는 신음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윤도의 속을 뒤흔들었다.

“하…….”

윤도의 손이 찬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꾸물거리면서 감질나게 움직이던 자지를 잡고 그대로 퍽 소리 나게 밀어 넣었다가 뺐다.

“흐윽……! 아……!”

벌겋게 달아오른 찬의 자지에서 정액이 튀었다. 윤도는 그대로 몇 번이고 다시 안쪽을 들쑤셨다. 마른 가슴 위에 튄 정액을 혀끝으로 핥으니, 달콤한 맛이 났다. 발정기에 이른 수인들은 다 이런 걸까. 가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짐승의 소리가 났다. 윤도가 이를 드러내자 찬이 오히려 그의 뺨을 매만졌다. 가느다란 손끝이 굳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날카롭게 변한 이 끝에 스쳤다.

“흐. 아… 아응…….”

손가락을 잘근 깨물었다. 옅은 피 맛이 났다. 비릿하고 달콤한 냄새에 점점 더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찬의 손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키스, 그 행동에 윤도는 멍하니 찬의 눈 속을 쳐다보기만 했다. 정신없이 퍽퍽 소리를 내던 아래쪽이 멈추자, 그의 자지를 물어뜯을 듯이 구멍이 조여 들었다.

“…으응…….”

애교를 부리듯 찬이 윤도의 입술을 날름 핥았다. 옅은 피 맛이 났다. 키스를 한 적이 있었나. 말캉한 혀가 그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아. 의식 때.’

그때 딱 한 번 키스했다. 윤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손으로 찬의 뺨을 붙들자, 아프다는 듯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그제야 검푸른 멍이 가득했던 얼굴을 생각해 내고 손에서 힘을 뺐다. 윤도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며 찬과 키스를 나눴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입속을 엉망으로 헤집고, 빨아들였다.

“아, 흣. 흐윽…….”

찬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윤도를 끌어안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찬의 기분이 좋아질수록 냄새가 더욱 짙어지고 달콤해졌다. 문이 닫힌 방 안에서 도망치지 못한 냄새가 모조리 둘에게 스며들었다.

“아흑…=… 읏. 응!”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났다. 윤도는 늘어진 찬의 엉덩이를 붙잡고 정신없이 자지를 쑤셔 넣었다. 침대 위에 처박힌 찬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그의 등을 짓누른 윤도의 손이 짐승의 것으로 변해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가, 다시 인간의 것으로 변했다.

“흐윽…….”

찬이 부르르 떨었다. 금세 윤도의 혀가 등의 상처에 닿았다. 인간의 것처럼 뜨겁고 두툼했고, 늑대의 것처럼 차갑고 미끈거리기도 했다.

윤도가 몇 번이고 안쪽에 정액을 싸댄 덕에, 그가 자지를 한 번 뒤로 물릴 때마다 안쪽의 정액이 긁혀 나왔다. 구멍 주변으로 허연 거품이 일었다. 찬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미적지근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몽롱한 머릿속에 생각나는 거라곤 오직 쾌감뿐이었다. 찬이 허우적거리면서 손을 뻗었다.

“하…….”

윤도에게서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찬은 멍한 눈으로 늑대와 인간을 오가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혐오스럽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흥분됐다. 윤도에게서 풍기는 ‘강한’ 수컷의 냄새만으로도 찬은 정액을 줄줄 흘렸다.

“흐읏… 응!”

몇 번째인지 모를 정액이 몸 안에 또 쏟아졌다. 윤도는 그대로 자지를 뽑아냈다. 훤히 벌어진 구멍 안쪽은 이미 허옇기만 했다. 벌건 속살도 보이질 않고 그냥 정액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찬이 손으로 벌어진 구멍을 더듬었다. 오물거리며 닫히기 시작하자 한계까지 가득 찬 정액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더…….”

아직도 부족하다. 몸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대로 더 하면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손이 또다시 윤도의 자지를 더듬었다.

구멍에 넣고 있지 않으면 부풀지 않는 듯, 그의 것은 또다시 반쯤 물렁해진 상태였다. 찬이 양손으로 윤도의 자지를 문질렀다. 정액 냄새가 났다. 비릿하고, 풋내가 나는 듯한 그 향기에 찬은 멀건 정액을 흘렸다. 타액이 주륵 흘렀다. 망설이지도 않고 정액 범벅인 자지를 덥석 물었다.

“흐읍……. 읍.”

눈을 질끈 감고 목 안쪽까지 한 번에 삼켰다. 넣어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부피를 금세 키워 버린 덕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움찔거리는 구멍 밖으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웁… 으흐……. 읍…….”

코끝에 윤도의 음모가 닿았다. 머리 뒤쪽을 붙잡고 강하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찬이 얌전히 입을 벌렸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정액과 수컷의 냄새가 진득하게 엉겨 붙었다.

찬의 입과 목 속에서 움찔거리며 정액을 싼 윤도가 손을 놔 주었다.

“흐읍…….”

혀끝까지 허연 정액이 죽 늘어졌다. 찬이 입술을 날름 핥았다. 윤도의 냄새가 났다. 어둠 속에서 맡고, 또 맡았던 그 냄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몇 시간이고 정신없이 박히기만 했던 구멍이 허전하다는 듯 뻐끔거렸다.

“더…….”

교미해 달라 조르듯 윤도에게 매달렸다. 허전해 견딜 수가 없다. 뒷구멍이 무언가를 바라듯 움찔거렸다. 찬이 손을 뻗어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벌겋게 부어오른 곳이 아프다기보다는, 새끼를 밸 준비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새끼?’

몽롱한 머리로도 의아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새끼. 찬은 다시 뻣뻣해지기 시작하는 윤도의 자지에 얼굴을 문질렀다. 약한 아픔이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 머릿속에는 이 수컷과 교미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스스로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고, 요도구에 혀를 콕콕 쑤시며 입술로 물어 당겼다.

짐승의 발이 찬의 어깨를 짓눌렀다.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이 짐승의 털로 뒤덮였다가, 매끈한 사람의 피부로 변했다.

“여기……. 아흑……!”

찬이 기꺼이 다리를 벌렸다.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커다란 자지 위에 구멍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미 질척해진 구멍과 자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꽉 맞물렸다.

“아……. 아으.”

찬은 신음하면서 윤도의 등을 끌어안았다. 천장이 흔들리다가 일그러졌다. 안쪽을 문지르는 감각에 다시 정신이 번쩍거리며 튀었다.

방 안에 온갖 냄새와 열기가 뒤섞였다.

* * *

윤도는 질척거리는 침대에서 짜증을 내며 일어섰다. 얼마나 싸질러 댄 건지. 침대는 마른 곳 하나 없이 온통 정액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곳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찬은 세상모르고 잠든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미 하루 하고도 반이 지난 상태였다.

‘…발정기가 처음이라 길었나.’

보통은 하루 정도 지속되는데. 아니면 약의 부작용일 수도 있다. 윤도는 손을 뻗어 이마 위에 흩어진 찬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간지럽게 달라붙었다.

발정기 동안 찬은 정말 끝을 모르고 그를 원했다. 더 해 달라고 조르면서 먼저 입으로 자지를 빨았고, 틈만 나면 다리를 벌리고 스스로 뒷구멍에 자지를 밀어 넣었다. 윤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발정기를 보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찬은 잘 모르겠지만 윤도는 잘 알고 있었다. 발정기를 일부러 불러일으켜서 교미하는 걸 즐기는 일부 수인들을 제외하면, 보통 이것은 한 수인의 암컷 혹은 수컷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내 것.’

윤도는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유찬은 그의 것이었다. 발정기에 그렇게 싸댔으니, 새끼는 분명 생겼으리라. 게다가 마지막엔 넘치도록 사정한 것으로도 모자라 노팅까지 했다. 그는 찬의 몸을 당겨 안았다.

마른 몸에서 풍기던 달콤한 발정기의 냄새 대신 윤도의 냄새가 가득 묻어 나왔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젖은 목덜미에 코를 들이박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윤도에게 푹 절여진 냄새가 났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그는 한참이고 그냥 그렇게 찬을 끌어안고 있었다.

‘내 암컷.’

천대경도 암컷 갈무리를 잘하라 했으니까 좀 더 신경 써 주리라. 윤도는 보랏빛으로 멍든 얼굴을 더듬다가 그나마 색이 변하지 않은 이마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찬도 그를 원했다. 원하고, 또 원하고, 박아 달라 애원하고. 스스로 자지에 뺨을 비비면서 애교를 부릴 만큼 원했다.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먼저 키스도 하지 않았던가. 윤도가 낮게 웃었다. 그는 부어 있는 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옅은 정액 맛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다시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이제 그의 암컷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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