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날 이후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이부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게 늑대가 아니라 윤도라는 것. 물론 늑대가 윤도고 윤도가 늑대지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찬은 담요 위에 웅크리고 앉아 윤도를 힐끔 쳐다봤다. 늑대의 모습으로 있을 땐 다쳐서 그랬는지 계속 잠만 자더니. 이젠 마당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거나, 아니면 잠을 잤다.
‘늑대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건가.’
찬은 여전히 웃옷을 입지도 않는 남자를 힐끔거렸다. 옷을 입을 생각이 있긴 했는지 서랍을 뒤진 흔적은 있었지만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바지는 찬의 것이었고, 맞는 신발이 없어서인지 계속 맨발이었다.
헐벗고 돌아다닐 거라면 차라리 늑대인 게 낫지 않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윤도의 속내를 조금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게 자신이 늑대인간임을 밝힌 후에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비밀이라든지, 어디 가서 말하면 물어 죽일 거라든지. 협박 한마디 없이 그냥 씩 웃고 넘어갔지만 찬은 알 수 있었다. 만약 어디 가서 윤도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그가 목을 물어뜯어 버리리라. 백 마디의 말로 하는 협박보다, 그 짧고 간단한 웃음 한 번이 더 오싹했다.
‘뭐… 딱히 말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찬은 멍하니 생각하면서 무릎 위에 뺨을 갖다 댔다. 동네 어른들에게 늑대인간이 나타났다 외칠 것도 아니고, 친구에게 말하기엔 정호 한 명뿐이다. 정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호들갑 떠는 성격이긴 하니. 늑대인간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찬은 낮게 한숨을 토해 냈다. 어떻게 생각하든 윤도가 늑대인간이라는 건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닌 셈이다. 늑대든 인간이든. 중요한 건 지금 그가 이 집에 살고 있다는 것뿐이었으니까.
찬이 살짝 움직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 대던 것도 거의 나은 줄 알았더니. 아직도 욱신거리는 곳이 있었다. 씻을 때 떨리는 손끝으로 더듬어 본 구멍은 참혹할 정도였다. 찢어진 살이 손끝에 만져질 정도였으니. 이틀은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찬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이후 그는 다시 열에 들뜨지도 않았고, 찬에게 성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후우…….”
그는 낮은 신음과 함께 몸을 쭉 폈다. 얼얼하던 구멍도 상당히 나아졌고, 푸르스름하던 멍도 상당히 옅어졌다. 어쨌든 강간당한 이후로도 시간은 흘렀고, 배도 고팠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되고 나서도 딱히 뭘 먹진 않는구나.’
늑대의 모습일 때 뒷산에서 먹을 걸 해결하는 것 같더니. 사람으로 변한 뒤에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찬은 굳이 그것에 대해 묻거나, 같이 먹자고 운을 띄우지도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컵라면을 뜯어 미적지근한 물을 붓고 있으니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손이 잘게 떨려 왔다. 그의 눈을 외면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또야…….’
윤도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뭘 하든 지켜봤다. 그냥 보기만 했다. 감시라고 하기엔 조금 더 노골적이고, 협박이라고 하기엔 담담했다. 좁은 집안에서 윤도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 외에는 무엇을 해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
찬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평소처럼 라면을 씹어 먹었다. 와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보통 때는 몇 번에 걸쳐 씹더라.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평소에 어떻게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똑바로 쳐다봐 주면 될 텐데. 찬은 그에게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악몽이고 끔찍한 일이었다. 강제로 구멍에 자지를 처박고 저 좋을 대로 흔들어 댔다. 그런데. 그렇게 끔찍한데도 따듯하게 닿았던 체온이 자꾸만 생각났다.
‘…미쳤구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미친 게 틀림없다. 찬은 라면이 원수라도 되는 양 있는 힘껏 씹어 댔다. 그와 스킨십을 했던 유일한 사람이 할머니였다. 서슴없이 안아주고. 아무렇지 않게 만져 주는 사람. 그리고 그다음엔 윤도가 처음이었다. 피가 통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찬을 만졌다. 다정하게 안아 준 것은 아니지만 따듯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등과 가슴을 누르던 손의 뜨거운 감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사람의 체온에 굶주렸다고 하지만 그건 강간이었다. 심지어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심스러운 무언가에게 당한. 찬은 남은 라면 조각을 입안에 욱여넣고 대충 씹어 삼켰다. 날카롭게 부서진 부분들이 목 안쪽을 긁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찬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강간당하긴 했으나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개에게 물린 것과 똑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피할 수 없이 당한 일이다. 그러니까 욕 한 번 하고. 광견병 주사 한 대 맞고 짜증내면서 잊어야 했다.
여전히 윤도의 시선이 느껴졌다. 찬이 한 번 돌아보지 않아도 그는 계속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시선의 뜻을 해석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또다시 강간을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한 감정이 비치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애틋한 감정이 생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둘 사이에 있었던 건 피범벅이었던 강간뿐이다. 찬은 미적지근한 라면 수프 물을 마시고 컵라면을 구석에 잘 쌓아 뒀다. 그냥 윤도가 사라져 줬으면 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 수 있을 텐데. 찢어졌던 뒷구멍도 아물 테고. 어깨에 물린 자국도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찬은 머뭇거리다 윤도에게 고개를 돌렸다.
“…….”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게 이 집의 규칙이라는 듯이. 찬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에게 나가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집주인을 강간하고 나서도 뻔뻔스럽게 집에 붙어 있으니. 나가라고 말한다 한들 그가 순순히 나갈까.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 얘기를 꺼내는 순간 윤도가 물어뜯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고 찬이 집을 뛰쳐나가자니 윤도는 더 이상 아무 짓도 안 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했다. 늑대 모습일 때는 가끔 고기라도 먹더니. 사람으로 돌아간 이후로는 그것도 뚝 끊었다. 기껏 사 왔던 고기는 냉동실로 들어갔다. 찬은 어찌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냥 그는 무기력하게 또다시 잠을 청했다.
* * *
기묘하기 짝이 없는 동거는 계속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면 윤도가 어디 나갔다 오는 듯했지만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찬은 잠결에 나가는 문소리를 들으면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애초에 비밀도 아니라는 듯 거칠게 쾅쾅 문을 열고 닫았으니. 깨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생각이지.’
이대로 영영 살진 못할 게 아닌가. 찬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참치캔을 손끝으로 끌어왔다. 예전에 슈퍼에 갔을 때 사람이 고기도 먹어야 하지 않냐면서 슈퍼 할머니가 하나 가져가라고 억지로 넣어 준 것이었다. 그 고기가 참치를 뜻하는 건 아닐 테지만. 신경 써 주시는 데 사양하기도 민망해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고 받아 왔다.
평소처럼 라면에 미적지근한 물을 부은 찬이 잠시 고민하다 참치캔을 뜯어 컵 안에 쏟았다.
‘…찌개에도 참치를 넣으니까……. 라면에 넣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따로 반찬을 집어 먹는 것도 귀찮고. 보기에 조금 별로긴 했지만 크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찬이 젓가락을 든 순간. 앞에 굵은 다리가 성큼 다가왔다. 면바지 안에 가려졌어도 근육질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허벅지를 보다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뒷목이 아플 정도로 시선을 올리고 나서야 윤도를 쳐다볼 수 있었다.
“하.”
기가 막히다는 듯 툭 내뱉는 한숨 속에 담긴 건 경멸이었다. 희번득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가 참치와 뒤섞인 라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찬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깨작거리며 종이 뚜껑을 반쯤 덮었다.
“일어나.”
명령조의 말에 멀뚱히 눈을 굴렸다. 찬이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가 손을 뻗어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콜록…….”
찬이 잔기침을 뱉어 냈다. 갑자기 쑥 들린 몸 때문에 흔들린 라면 컵에서 국물이 조금 흘렀다. 비틀거리면서 제 발로 서자 그제야 윤도의 손이 멱살을 놔줬다.
“왜, 왜…….”
왜 이러는 걸까.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찬이 제대로 묻기도 전에 그가 그의 팔을 붙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서 챙겨 왔는지. 마루 아래에 커다란 신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한 번도 신지 않은 듯 깨끗한 것을 보니 어디서 사 온 게 분명했다.
찬이 마루 끝에 서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윤도가 신발을 대충 신고 쇼핑백에서 셔츠를 하나 꺼내 입었다. 처음 보는 그 옷 역시 새것인 티가 났다. 까만색 셔츠로 가렸음에도 이미 훌떡 벗고 다니던 몸을 기억해서인지 찬은 그 아래 있는 몸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다.
셔츠를 입은 윤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찬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었다. 강간당한 이후로 처음 밖에 나가는 셈이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팔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겨 있지 않은 대문을 거의 부술 듯이 열어젖히고, 마치 이 근방을 아주 잘 안다는 듯 앞장섰다.
“어디가?”
찬이 움직이지 않고 버텨 보려고 했지만 슬리퍼만 반쯤 벗겨질 뿐이었다. 똑바로 서서 마주 보니 2미터는 족히 될 키였다. 그 다리를 쭉쭉 뻗어 걸으니, 찬은 거의 반쯤 끌려가다시피 뒤를 따라야 했다. 대답 따윈 없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던 윤도가 구석진 곳에 있는 백숙집에 당당히 들어갔다.
“여긴…….”
보통 차 있는 외지인들이 자주 오는 곳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찬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 근방에 살았나. 아니면 밤마다 나다니더니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나.
그조차도 잊고 있던 곳이었다. 보통 시골에서 백숙 같은 건 다들 집에서 해 먹는 편이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시죠?”
윤도가 자리에 턱 앉았다. 찬은 쭈뼛거리다 그의 맞은편에 얌전히 앉았다. 지금 와서 도망가자니 바로 잡힐 게 분명하고. 음식점에 온 걸 보니 해를 끼치려는 것도 아니리라.
‘…대체.’
정말 윤도의 생각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참치가 뒤섞인 라면을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경멸. 한심. 그런 감정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얼굴. 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게다가 말끔한 차림새의 윤도와 달리 그는 후줄근한 반바지, 늘어난 티에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괜한 민망함에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윤도가 말없이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손짓했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싹싹하게 웃는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윤도가 별달리 깊게 생각하지도 않은 듯 고갯짓을 하면서 툭 내뱉었다.
“오리 백숙으로.”
“3, 4인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찬은 뒤늦게 벽에 걸린 메뉴판을 힐끔 살폈다. 1인분짜리 삼계탕도 있는데. 윤도가 당당히 시킨 건 제일 비싼 메뉴였다. 게다가 그 옆에 새빨간 글씨로 3, 4인분이라고 큼직하게 적혀 있기까지. 반사적으로 반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슈퍼에 갈 때면 대충 가격을 맞춰 지폐만 가져갔다가 잔돈은 달아 두고 오기까지 했으니. 십 원 하나 만져지지 않는다.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돈…이 없는데.”
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윤도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늑대로 변하든 아니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 버리면 되겠지만, 찬은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근방 사람이 아닌가. 당장 나가자 해야 하나 고민했다.
툭 소리와 함께 윤도가 식탁에 무언가를 올렸다. 척 보기에도 두툼해 보이는 지갑이었다. 보란 듯 미어지게 들어 있는 지폐는 가장 고액권이었다.
“…….”
찬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셔츠도 사고 신발도 사고. 뭘로 샀겠어.’
혹시 그동안 밤에 나가서 식사도 사 먹은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찬은 뻣뻣하게 앉아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음식이 나오는 그 순간까지 둘 사이에 대화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많이 먹으라고 종알종알 떠들면서 오리를 먹기 좋게 해체해 줬다. 찬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드니 윤도가 고갯짓을 했다.
“…나, 먼저 먹으라고?”
고갯짓조차 귀찮다는 듯 그는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찬은 떨떠름하게 오리 조각과 국물을 가득 담았다. 젓가락을 들어 깨작깨작 먹고 있는 동안, 윤도는 국자나 집게에 손 한 번 대질 않았다.
‘…왜 나만.’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다. 라면에 절여진 위장이 비명을 질러 대면서 고기와 밥을 반겼다. 찬은 윤도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고기와 밥을 입에 넣었다. 국물도 몇 숟갈 떠서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오리 백숙이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 먹고 있으니 속이 버거웠다. 허리를 굽히면 토하지 않을까. 한계까지 꾸역꾸역 밀어 넣은 찬이 새파래진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자 윤도가 절반도 채 못 먹은 냄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불쾌해하네.’
그는 기분을 숨기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냄비와 찬을 번갈아 본 윤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운터로 성큼 다가간 그가 지갑을 열고 지폐를 끄집어내다 잠시 멈칫했다. 옆에 서 있던 찬이 머쓱하게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윤도가 잠시 생각하더니 주르륵 꽂혀 있는 카드 중 하나를 내밀었다.
‘…와, 카드도 쓰네.’
늑대인간이 돈을 쓰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카드를 썼다. 찬은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의 지갑 안을 힐끔 쳐다봤다. 정말 기능에 충실한 지갑이었다. 다른 개인적인 것들은 하나도 없이 카드 서너 장과 지폐만이 든 지갑.
기묘하고 복잡한 기분에 멀거니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이 흘깃 스쳐지나갔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시선이 떨어진 후였다.
윤도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찬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그의 뒤를 쫓아갔다.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는데. 왜 따라가고 있는 걸까. 찬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자 윤도가 다시 돌아오더니 팔을 단단히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걸어가더니 택시를 잡았다. 어디 시골구석 집에 들렀다 나오는지. 마침 동네를 벗어나려고 하는 택시를 잡은 윤도가 찬을 안으로 구겨 넣었다.
“읍내.”
짧게 말한 그가 느긋하게 앉았다. 택시가 좁다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윤도가 들어와 앉아 있으니 무척이나 좁게만 느껴졌다. 찬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동네 마실도 안 나갈 옷차림으로 읍내까지 나가게 되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디 가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해 줄 테고.’
대답해 줄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밥 먹으러 가자고 했겠지. 찬은 주먹을 꼭 쥐었다. 택시가 읍내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이번엔 윤도가 지폐 하나를 집어 건넸다.
“거스름돈은 됐어.”
그가 택시에서 내리자 찬이 엉겁결에 따라 내렸다. 한참만에 나와 본 읍내는 예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번쩍이는 건 대형 마트 하나. 윤도가 찬을 단단히 붙들더니 거침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음부터 마트가 목적이었던 것처럼.
‘어떻게 이곳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거지.’
들어서자마자 와글와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윤도가 찬에게 카트를 끌라고 손짓했다. 얌전히 카트를 꺼내 오자마자 그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온갖 음식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즉석밥, 반찬 팩, 3분 요리, 냉동식품. 간단하게 돌려먹으면 될 만한 것들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카트가 꽉꽉 차도록 쓸어 담은 것을 찬 혼자 다 먹으려면 일 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찬은 윤도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아까 오리 백숙에도 손 한 번 안 댔다. 사람이 된 이후로 뭔가 먹는 꼴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많이 사서 뭘 어쩌려는 걸까. 찬은 무거워서 제대로 밀리지도 않는 카트를 힘껏 밀었다. 과일 코너를 지나갈 때, 윤도가 또다시 마구잡이로 카트를 꽉꽉 채워 넣기 시작했다. 포도, 사과, 배, 귤. 당장 제철이 아닌 것들은 비쌀 텐데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찬은 확신했다. 이걸 집에 사다 놓는다 해도 윤도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늑대인간들은 인간이 먹는 것을 못 먹든지, 아니면 안 먹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것도 아니면 입에 안 맞나. 찬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윤도의 뒤를 쫓았다.
돌아오는 길에 찬은 무릎 위에 올린 커다란 봉지를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카트가 꽉꽉 차도록 담아 댄 덕분에, 택시 트렁크에 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가 끌어안고 타야 했다. 그나마 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윤도가 어마어마한 비닐봉지를 마루까지 옮겨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택시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윤도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찬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어마어마하게 사 온 것들을 정리하는 건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대화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같이 살고, 먹을 것을 사 줬다. 찬은 부스럭거리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몇 달간 슈퍼에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윤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렇게 사는 게 좋아?”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사는 게 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찬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곤 냉동실에 냉동식품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눈치챈 윤도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가 답지 않게도 친절하게 말을 풀었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어떨 것 같아?”
그렇게 말해도 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더 많은 것이 뭐란 말인가. 사실 뭔가를 더 바라지도 않았다. 진짜로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할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것뿐. 그는 윤도를 멀뚱히 쳐다보다 다시 비닐봉지로 시선을 내렸다.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그 대답이 기분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물건을 챙겨 일어나면서 힐끗 윤도를 쳐다본 찬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매서운 얼굴 위로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차올랐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사실 지금 마음에 안 들어서 불만을 터뜨려야 하는 건 찬이었다. 어영부영 그를 강간한 사람과 한집에 살고, 외식을 하고 심지어는 같이 마트에서 장까지 봐오지 않았나.
‘모르겠다.’
찬은 모든 생각을 훌훌 털어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늑대인간인 것을 알고 이상한 일에 휘말렸다는 걸 깨달았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그는 깨끗하게 비운 봉지를 차곡차곡 접어 서랍에 넣었다.
윤도는 여느 때와 같이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게 그날의 마지막 대화였다.
* * *
그 뒤로 윤도는 가끔 말없이 찬을 질질 끌고 나갔다. 그래도 이제는 나름대로 요령이 생겨서, 윤도가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의 식사를 내려다볼 때면 알아서 일어섰다.
하나 알게 된 게 있는데, 윤도는 무언가 섞어 먹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아무래도 음식쓰레기를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찬은 오늘도 말없이 더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시선에 그냥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전에는 집에만 있었기에 후줄근하게 지냈지만 자꾸 밖에 나돌아 다니니 옷도 제대로 입고, 샤워도 이틀에 한 번은 했다. 찬은 오늘도 말없이 앞장서는 윤도의 뒤를 쫓아갔다. 시골길은 그보다도 윤도가 더 잘 알았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얼마나 걸었을까. 뒷산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낮에 고요한 마을에 울리는 짐승의 소리가 기괴했다. 찬이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윤도는 듣지 못한 듯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오늘은 또 어딜 가려고 그러나.’
근처에 있는 음식점은 전부 다 한 번씩 가 본 기분이었다. 알지도 못했던 곳이 어떻게 이리 많은지. 찬은 부지런히 윤도의 뒤를 쫓았다.
* * *
길게 늘어지는 울부짖음에 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근처 숲에서 짐승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새들까지 많아졌다.
울음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나무들이 거칠게 흔들리며 새들이 날아올랐다. 찬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같은 자세로 새들을 보던 할아버지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망조가 드나…. 철새가 왜 지금 보이지?”
철새였나. 찬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새파란 하늘 위에 새들이 뒤섞여 날아다녔다. 할아버지가 철새라고 부른 게 무엇이든, 확실히 보기 이상하긴 했다. 커다란 새와 작은 새들이 함께 다니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들린 슈퍼에서는 할머니가 인상을 팍팍 찌푸리고 찬을 맞아 줬다. 물을 하나 사다가, 꼭 물어 봐 달라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셔서 결국 입을 뗐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은……. 하아.”
슈퍼 할머니가 들으라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찬은 비닐봉지를 하나 뜯어 물을 집어넣었다.
“요즘 멧돼지가 자꾸 내려오는 것 같은데…….”
“멧돼지요.”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그래서 가끔 마을에서 전문 사냥꾼을 고용하기도 했으니까. 찬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멧돼지라고 하기에는 발자국이 너무 크더라고.”
“…….”
“대체 뭔지 모르겠다니까. 농작물을 파헤치진 않아서 다행인데. 집채 만한 것들이 다닌다 생각하니 무섭지.”
“음, 조심해야겠네요.”
“그래. 찬이 너도 조심해라. 특히 뒷산에서 가까우니까 더. 요즘 분위기가 흉흉하다.”
요 근래 산에서 산으로 퍼져나가던 울음소리인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늦은 밤에 그런 소리가 들리면 조금 오싹하기도 했다.
“할머니도 조심하세요.”
대강 인사를 남긴 찬이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집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경로당 같은 곳에 모여 소일거리를 하거나 수다를 떨 노인들이 모두 걱정스럽게 밖을 서성였다.
새가 날아다니면 하늘을 봤고, 울음소리가 울리면 주변을 살폈다. 찬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딱히 피해는 없는 것 같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찬은 태평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 * *
윤도와의 삶은 그럭저럭 이어져 가고 있었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그냥 가끔 외출해서 밥을 먹었고, 마트를 들렀다. 간혹 마을을 걷고 있을 때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찬은 또 앞에 버티고 선 윤도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냥 별다른 말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가서 대문을 연 순간. 찬은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와… 씨.”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대문 바로 앞에. 무심코 발을 디딜 만한 곳에 난도질당한 시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건 분명히 개였다. 새빨갛게 물든 온몸이 소름 끼쳤다. 보란 듯이 ‘전시’ 해 둔 개의 시체에 윤도가 코웃음을 쳤다.
“…이거, 어떻게 해?”
찬이 허리를 숙였다. 묻어 줘야 하나. 아니, 애초에 어떻게 집어 들어야 하는지부터가 곤란했다. 온통 피투성이인 몸은 어딜 들어도 그 부분이 뚝 잘려 떨어질 것 같았다. 쩍 벌어진 가죽과 근육 사이로 보여서는 안 될 부분들이 허옇게 보였다. 부릅뜬 눈은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손을 대려던 순간. 윤도가 찬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당겼다.
“너랑 상관없어.”
단호하게 잘라 내는 말과 함께 그가 개의 뒷목을 덥석 잡아 들었다. 찬이 든다면 온몸으로 안아 들어야 할 텐데, 윤도가 드니 마치 강아지처럼 작게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개가 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다 굳지 못한 피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 쓰레기는 버려.”
그 말과 함께 윤도가 대문을 쾅 닫았다. 코앞에서 닫힌 문이 잠기지 않았음에도 열 수 없었다. 찬이 눈을 깜박였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 위로 불쑥 솟은 윤도의 머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찬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그를 잡는 것은 고사하고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다. 그게 윤도와 찬의 관계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냥, 같은 집에 있는 것뿐이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문에서 돌아섰다. 윤도가 ‘쓰레기’라고 표현한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냉동 미트볼과 볶음밥을 비빈 것을 말하는 거겠지.
찬은 아직도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릇을 쳐다봤다.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미트볼 볶음밥을 입에 꾸역꾸역 넣었다.
그날 밤, 윤도는 돌아오지 않았다. 찬은 이부자리에 누울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늘 자던 자리에 담요를 두르고 누웠다. 그가 돌아오길 바라서가 아니라. 그냥 기분이 그랬다.
‘…시끄러워.’
밤이 새도록 짐승의 울음소리와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단단한 바닥에 누워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부자리에 누운 거대한 무언가가 없어서인지. 찬은 잠들 수 없었다.
* * *
윤도는 개의 뒷덜미를 붙든 채 성큼성큼 숲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젠장.’
개가 누군지 본 순간 알았다. 그게 불쾌했다. 누군가가 윤도의 것을 죽였다. 보란 듯이 난도질해서 문 앞에 내버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윤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안에 축 늘어진 무게가 불쾌하게 다가왔다.
윤도가 속한 ‘패밀리’는 몇 개로 나눠진 ‘클랜’에서 떨어져 나온, 표현하자면 자신의 클랜에 속하지 못하고 아웃당한 수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패밀리 역시 몇 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가 속한 ‘손톱’은 그중에 가장 큰 패밀리였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떨어져 나온 오합지졸들이 살아남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것을 제대로 묶고 통솔하기 시작한 건 천대경이라는 검독수리 수인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힘 앞에 그들은 ‘손톱’이라는 이름으로 모여들었고, 천대받던 패밀리는 클랜에 필적할 만큼 커졌다.
윤도 역시 늑대들의 클랜 ‘랑’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였다. 쫓겨났다고 표현하긴 어려웠다. 그는 처음부터 누군가와 무리 지어 생활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날 때부터 그랬다. 인간도 늑대도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인데. 그는 결코 그런 데에 관심이 없었다. 사회고 집단이고 뭐고,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길 바랐고, 그것은 못처럼 뾰족한 부분이 되어 클랜을 나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천대경의 압도적인 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어느 패밀리에 속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으리라.
윤도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천대경 역시 세월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나이가 들었다. 패밀리는 강력한 무력을 중심으로 모인다.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종족끼리 모인 수인의 클랜은 누구 하나 강력한 이가 없어도 ‘공통점’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패밀리는 그렇지 않다. 늑대, 개, 매, 물고기. 온갖 종류의 수인들이 떠돌다가 슬그머니 모여든다. 공통점 따윈 없었다. 간혹 같은 종류의 수인끼리 모여 다니긴 해도 기본적으로 그들은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고민 끝에 태생은 클로, 난생은 탈론이라는 이름 밑에 뭉치기 시작했다. 번식 가능한 자와 가능하지 않은 자로 나뉘다니, 정말 짐승 같은 행동이라고 오윤도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더 효과적으로 유대감을 만들어 냈다.
탈론과 클로는 이내 패밀리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양분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이야 천대경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들을 때로는 경합시키고, 때로는 화해시키며 적절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가 죽고 나면 패밀리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와해되거나 아니면 다른 패밀리에게 잡아먹히거나. 그렇기에 후계를 정해야 했다. 누구보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자. 그것에 부합하는 두 수인이 윤도와 수빈이었다.
천대경과 친인척으로 추정되는 검독수리 수인 천수빈. 그리고 늑대 수인 오윤도.
천수빈이 천대경과 친인척으로 추정되어 후계자 싸움에서 유리해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오윤도는 늑대 클랜인 랑에서 쫓겨났지만, 여전히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언제든지 혈맹으로서 그를 도울 수도 있었다.
‘…망할 새끼.’
윤도는 목을 가볍게 돌렸다. 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오늘 잡아 찢어 죽이진 못해도, 곱게 보내진 않으리라. 천수빈이 왔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온몸이 근질거렸다. 이렇게 대놓고 도발할 정도라면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소리인가.
그의 입술이 뒤틀렸다. 탈론에서는 슬슬 몸이 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최근, 천대경이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건강상의 문제라고 다들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인척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도 천수빈은 후계 자리에 안착하지 못했다. 탈론에서 윤도를 얼마나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을지 생각하니 즐거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유찬의 집에 가만히 숨어 있으면서 몸을 회복하는 데만 신경 썼다. 수인이라는 것을 들켰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윤도는 음 하는 짧은 소리를 내곤 턱을 문질렀다.
‘…뭐. 상관없나.’
수인들은 인간에게 들키면 안 된다. 그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살아 왔다. 인간들은 아는 만큼만 이해한다. 그들에게 수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특히나 세계의 반이 부서진 후로는 더 그랬다.
정말 수인인 것을 숨기고 싶지 않으면 ‘멸망된 세계’로 가면 된다. 그러나 인간들이 사는 ‘문명 세계’를 좋아하는 수인들이 더 많았다. 그들도 사고를 하고, 이성이 있으며, 문명 생활을 좋아했으니까. 윤도는 그가 늑대 수인이라는 걸 알고도 도망치지 않았던 찬을 떠올렸다. 이상한 인간. 입가에 픽 웃음이 지어졌다.
윤도가 인간의 집에 들어앉아 버렸으니, 그 누구도 선뜻 무언가를 하진 못했다. 아니, 처음에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겠지. 그는 카드를 썼던 날짜를 세어 보았다.
‘…일주일 조금 더 걸렸나.’
생각보다 느려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실 당장 다음날 올 줄 알았다. 숨을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사람이 많은 마트에 노골적으로 얼굴을 내보였다. 집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 카드를 쓴 것은 한 번이지만, 이 근방에 온다면 윤도를 금방 발견할 수 있도록 애를 많이 썼다.
‘멍청한 새대가리.’
입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탈론에 새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새가 대부분이긴 했으니까. 윤도가 보기에 난생들은 거의 멍청했다. 그가 쿡쿡 웃었다.
찬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을 핑계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물론 머지않아 그들이 올 거라는 건 알았으나, 이런 방식은 생각한 적 없었다. 윤도의 클리크인 개로 도발하다니. 정말 새대가리들이나 할 법한 비겁한 짓이었다.
그는 혀를 길게 빼 문 개를 힐끔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찬에게 쓸데없이 무언가를 베푼 것 때문에 죽었다. 아니, 개가 죽은 건 윤도의 탓이었다. 새대가리들이 어떤 방법을 택하든, 중요한 단서들을 줄줄 흘리고 다닌 건 그였으니까.
제법 끔찍하게 죽어 있는 모습에 혀를 찼다. 바닥에 끌린 다리 한쪽이 거의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리곤 시체를 조금 더 높이 들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약해 빠졌어.’
고작 탈론에게 살해당할 만큼 약한 개체가 자신의 밑에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클로 중에서도 윤도를 유독 따르는 이들을 ‘클리크’라고 불렀다. 약해빠진 클리크는 필요 없다. 늘 입버릇처럼 말했건만. 나름대로 강한 것들만 선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약한 것들이 섞이는 모양이었다. 윤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숲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밤이 되어 가면서 숲속은 더욱 어두워졌다. 새까만 암흑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아주 고루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어쩐지 어둠이 짙어지니 찬의 생각이 났다. 이상한 인간. 그 말 말고는 그를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찬이 사는 그 집에는 불이 켜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새까만 어둠이 남아 있었다. 하루는 전등이 고장 난 건가 싶어 윤도가 무심코 불을 켜 볼 만큼 어두웠다.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발정기였다고는 하나, 기억까지 날아가 버린 건 아니었으니까. 어떤 식으로 강간했는지 하나하나 전부 다 기억났다. 비쩍 마른 다리를 벌리고, 억지로 자지를 쑤셔 넣었다. 찢어진 상처가 꽤나 컸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 안에 달라붙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아플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그리 편한 상태는 아니라는 걸 다음날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거의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욕실에 들어가서, 한참이나 나오지 못했다. 혹시 죽었나 싶어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물소리에 섞여 작은 신음이 울렸다.
그 뒤로도 찬은 제법 불편한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웠다. 윤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도망가거나, 아니면 피할 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윤도는 무작정 집에 들어와서 찬을 강간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찬은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멀거니 윤도의 등을 쳐다보다, 잠이 들곤 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를 들어 신고를 하지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윤도는 그게 너무도 이상했다. 정신이 나간 건 아닐까 의심했으나, 찬의 행동은 강간한 날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물을 부어 라면을 씹어 먹었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거나 자는 일상. 윤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삶에 의욕도 없는 놈.’
그게 찬에 대한 평가였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드높은 자존심을 구겨 가며 도망쳤던 윤도와 달랐다. 마치 내일 당장 죽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났다.
찬은 그저 가느다랗게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윤도가 보기에 그것은 학대였다.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세운 뒤, 간신히 명주실 같은 동아줄을 자신에게 내렸다. 때가 되면 자는 게 아니라,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모든 생명력이 쭉 빠져나가듯 잠들었다. 깨어 있을 때면 아무것도 안 했다. 집을 청소하거나, 빨래를 하긴 했으나 거의 기계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해야 하니까 한다. 그 명령에 스스로의 의지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아 보였다. 그 시간을 제외하곤 찬은 멍하니 앉아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허공을 쳐다봤다.
먹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간이 되어, 혹은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는 게 아니었다. 완벽하게 방전되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간신히 또 몇 분을 이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것도 쓰레기 같은 것만 주워 먹었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모든 것이 거슬렸다. 불쾌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윤도가 이끄는 클리크를 대하는 느낌과는 달랐다. 그는 긴 한숨을 쉬면서 뒷목을 주물렀다.
‘…내 건데.’
원하지 않았다 해도 찬은 어쨌든 윤도의 것이었다. 하필이면 완벽히 낫기 전에 발정기가 와서 가까이 있는 것에 손을 대 버렸다 해도, 어쨌든 그가 손을 댄 상대였다. 그러니 그건 윤도가 챙겨야 하는 ‘그의 것’ 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스스로를 해치고 있었다. 감히. 이가 으득 갈렸다. 오윤도의 것을 해칠 수 있는 건 그뿐인데. 찬은 어째서 태연하게도 윤도의 것을 망치려고 들까.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윤도가 손을 댄 순간부터 그는 윤도의 것이었다. 아무리 찬 자신의 몸이라고 해도 윤도의 것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윤도는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난다 해서 손댈 수도 없고.’
어쨌든 윤도의 상대가 아닌가. 또 마음이 동하면 안을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은 별생각이 안 들지만 혹시 아나, 또 안고 싶어질지. 윤도는 갈 곳을 잃은 분노가 안에서 날뛰는 것을 느꼈다.
누구 하나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 당사자에게 모든 것을 풀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것인데. 그렇게 흠집 내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면 보기 싫으니까. 윤도는 개의 가죽을 꽉 움켜쥐었다.
어쨌든 찬이 스스로를 해하고 있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해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 그러나 개는 달랐다. 약한 개체가 있다는 게 불쾌하더라도 어쨌든 윤도의 클리크 중 하나가 아닌가.
죽은 게 아무리 한심하다 해도, 윤도의 것이었다.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충분하다. 꽤 깊은 곳까지 거침없이 올라온 그가 바닥에 시체를 툭 던졌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난도질 된 몸이 조각조각 벌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부분들이 위태롭게 늘어났다.
“몸 풀기 좋은 날이야.”
윤도가 웃으면서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사방에서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크게 울리는 소리에 윤도는 오히려 크게 웃었다.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 윤도는 대충 수를 짐작해 보려다가 관뒀다. 몇이 오든 딱히 상관없었으니까. 저 멀리서 긴 하울링 소리가 들려왔다. 탈론만 모인 줄 알았더니, 클로도 근방에 와 있는 모양이었다. 한 숲에 모여 있다간 윤도가 오기도 전에 치고받고 싸우다 다 죽을 테니 흩어져 있었나. 웃음이 나왔다.
“천수빈!”
윤도가 크게 이름을 불렀다. 숲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날아오르는 새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없나.”
아쉬운 일이다. 윤도는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새대가리들이 날 잡으려면 크기라도 큰 놈이 와야지.”
비웃는 소리에 그 어느 누구도 울지 않았다. 수도 없이 많은 새들이 고요하게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밝은 하늘 아래서 봤어야 하는데. 윤도는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슬쩍 훑었다.
‘…몇 분 안 남았나.’
하울링이 들린 곳이 옆 산이니, 윤도의 클리크가 오기까진 조금 시간이 남았다. 천수빈처럼 부하들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멍청한 새끼들. 클로가 도착하기 전에 날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드나?”
윤도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발톱을 빼듯 손가락을 단단히 구부렸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새들이 하나씩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윤도를 둘러싸듯 들려왔다.
“이런 맛있는 건 혼자 먹어야 하는 법이야.”
윤도가 입술을 슬쩍 핥았다. 요란한 기합이나 어떻게 공격하라는 소리는 없었다.
삐익 하고 길게 울리는 새 소리가 한 번 들렸다. 윤도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 아니 새 수인을 거칠게 잡아챘다. 늑대 중에서도 유독 거대한 그에게, 새들은 무척이나 작게만 느껴졌다.
“맛있을 줄 알았는데.”
윤도가 이죽거리면서 팔을 그대로 부러뜨렸다. 비명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그것을 그대로 휘둘렀다. 급히 새로 변하려는 행동에 그대로 날개를 찢어 냈다. 어차피 새가 날개를 잃으면 살지 못한다. 윤도는 몸뚱이만 남은 것을 집어던졌다.
‘천수빈이 없으니 영 시시하네.’
새대가리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놈인데. 윤도는 입맛을 다시면서 새 수인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뭉그러뜨렸다. 커다란 손바닥 아래에서 뼈 정도는 손쉽게 으스러졌다. 윤도가 혀를 차면서 나무 위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방관하듯 나뭇가지 위에 앉아 구경하던 것들을 몇이나 낚아챘다. 인간으로 뒤늦게 변하려고 하거나 말거나. 비쩍 마른 다리를 으스러뜨리며 잡아 뜯었다. 피 냄새가 났다. 개중에 인간으로 변해서 발목이 잡힌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윤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목을 조르려고 하던 수인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가락에 힘을 꽉 주니,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버둥을 쳤다. 금세 뚜둑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축 늘어지던 몸이 다시 새로 변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시시해.”
윤도가 씩 웃었다. 도망친 보람이 있었다. 이게 맞는 일이다. 그 앞에서는 천수빈 정도가 아니면 몇이 와도 똑같았다. 이까짓 난생들. 알이라는 보호막이 없으면 태어나지도 못할 것들. 윤도가 킬킬 웃었다. 주변에 새의 깃털이 나풀나풀 날렸다. 날개가 뜯기고, 몸통이 으스러지고, 다리가 뽑히거나 머리가 짓밟힌 것들에게서 피 냄새가 났다.
윤도가 손을 툭툭 털었다. 피 때문인지 손에 달라붙은 깃털들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금 당장 천수빈에게 가서 보고해.”
그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숨죽인 채 남아 있던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도는 까만 밤하늘에 어렴풋이 움직이는 몇 개의 날개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긴 하울링 소리와 함께 클로들이 도착했다.
“…뭐야. 클로에서 다 왔나.”
윤도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클로에서 대표로 밀고 있는 게 그이긴 했지만,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패거리가 따로 있었다. 늑대나 개들은 윤도를 따르는 반면, 호랑이나 여우 같은 것들은 같은 클로이긴 하되, 윤도의 클리크가 되진 않았다.
가장 앞에 나서 있던 늑대가 몸을 쭉 펴며 사람의 모습으로 일어섰다.
“괜찮… 윽!”
윤도는 그대로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물론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남자가 무릎을 굽히면서 허리를 숙였다.
“일어나.”
짧게 말하자 그가 신음을 삼키며 일어섰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얌전히 고개를 숙인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윤도가 이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도는 남자의 기대에 부응하듯 커다란 손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무능하고.”
얕게 신음하면서 다시 고개를 숙인 남자가 이를 꽉 악물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어.”
다시 한 번 머리가 거칠게 돌아갔다. 어지러운지 고개를 흔든 그가 주먹을 꼭 쥐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윤도는 손을 한 번 더 들다가 조용히 내렸다.
“…잘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는 그제야 뒤쪽에 있는 클로들을 쳐다봤다. 클리크와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것들. 그가 보란 듯 씩 웃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이미 내가 다 먹어 버려서 어쩌나. 하긴, 맛도 없더라고.”
윤도가 크게 웃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힘을 과시하듯 노골적으로 일을 벌여 놓은 것을 확인하듯 모두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클리크를 제외한 클로들이 천천히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로를 힐끗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더니 여우가 나섰다.
“…딱히 도움은 필요 없어 보이니, 이만 가 볼게.”
“오느라 고생했는데, 시체라도?”
윤도가 히죽 웃으면서 발에 채는 새 몸뚱이를 걷어찼다. 붕 떠오른 시체가 여자의 발 앞에 툭 떨어졌다.
“사양하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은 윤도와 크게 얽히고 싶어 하지 않은 기색이 강했다. 그들이 한참이나 멀어지고 나서야 윤도는 아직도 바닥에 늘어져 있는 개의 시체를 집어 들었다.
“이거 잘 챙겨.”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가 거의 조각나기 직전인 시체를 끌어안았다. 이미 거의 굳어 버린 피 때문에 벌건 피가 크게 묻어나진 않았다.
“…탈론의 짓이지?”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윤도에게 재차 묻진 않았다. 윤도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늑대 몇 마리와 개들을 가만히 살폈다. 다들 윤도가 잠적한 동안 제 나름대로 회복을 하긴 했는지 멀끔한 모습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들었다.
“잘 묻어 주기나 해.”
약해 빠지긴 했지만 어쨌든 윤도의 클리크가 아니었던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그의 것이니 챙겨야 했다.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싱겁고 약해 빠진 것들이니까 먹진 말고.”
윤도가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툭툭 걷어찼다. 축 늘어지는 날개를 꾹 짓밟았다. 천수빈의 생각이었든 뭐든 문 앞에 보란 듯 시체를 널어 뒀다. 그러니 이 장면을 보여 줘야 했다.
‘차라리 덤빌 거면 날 공격했어야지.’
그의 것에 손을 대느니, 그게 현명하다. 그래야 윤도가 덜 분노할 테니까. 그는 괜히 발로 새들을 꾹 짓밟곤 성큼성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것들이 그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윤도가 뒤를 흘끔 돌아보다 문득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검은 옷이긴 했으나, 피 냄새가 풍겼다. 피부가 드러난 부분은 벌건 자국들이 고스란히 말라붙어 있었다. 검은 옷이라 해도 밝은 데서 보면 검붉게 보이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찬에게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가 피투성이로 돌아가든 홀딱 벗고 돌아가든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을 테지만, 윤도가 신경 쓰였다. 찬은 윤도의 것 중 하나였으니, 굳이 놀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음.”
윤도가 거침없이 옷을 벗어 던졌다. 나뭇잎 사이로 슬쩍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잘 보였다. 셔츠를 벗어 내팽개치고 바지는 그냥 뜯어 버렸다.
“너, 내가 묵는 곳으로 옷 가지고 와라.”
가볍게 턱짓하자 지목당한 개가 짧게 울음소리를 냈다. 윤도는 그대로 늑대로 변했다. 오랜만에 변하는 모습에 온몸을 털어 냈다. 개운한 기분이 제법 좋았다.
산을 달리는 건 짐승의 모습이 더 편했다. 개의 시체를 끌어안은 남자를 제외한 윤도의 클리크 소속들이 모두 그의 뒤를 쫓았다. 숲을 나서기 직전 속도를 내 뒤를 바짝 쫓아온 개 한 마리가 인간으로 변하더니 그를 다급히 불렀다.
“윤도!”
귀에 박히듯 거친 목소리에 윤도가 달리던 것을 멈추곤 인간으로 변했다.
‘귀찮게…….’
눈썹이 찌푸려졌다. 윤도가 으르렁거리듯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주훈.”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슬쩍 움츠린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돌아오진 않을 생각이야?”
예상외의 질문에 윤도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간다. 당연히 찬의 집을 생각했었는데. 주훈이 말하는 것은 원래 살던 곳이다. 윤도는 대답하는 대신 이를 한 번 더 드러냈다.
“오윤도!”
조금 더 용기를 낸 듯 주훈이 다시 외쳤다. 윤도는 코웃음을 치곤 그대로 도약했다. 새까만 어둠에 잠긴 시골 풍경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만약에라도 인간이 몰려다니는 늑대와 개의 무리를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윤도는 한달음에 찬의 집 앞에 도착했다. 숲에서 가장 가까운 집. 윤도는 당장 문을 밀고 들어가는 대신 잠시 멈춰 섰다.
‘…돌아간다라.’
어째서 무심코 ‘돌아간다’고 생각할 때 찬의 집을 먼저 떠올렸을까. 윤도의 몸이 다시 늑대로 돌아갔다. 날카로운 발톱이 흙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윤도는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숲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새파랗게 빛나는 짐승의 눈동자 몇 개가 보였다.
그중 누군가가 고개를 치켜들고 길게 울었다. 하울링 소리가 울리자, 누군가가 또 울음소리를 냈다. 연달아 울리는 짐승의 소리에 윤도가 피식 웃었다. 그는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그냥 대문을 꾹 밀고 들어갔다.
* * *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마당이 어렴풋이 보였다. 윤도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수돗가로 다가갔다. 옷은 벗어 버렸지만, 피 냄새는 여전히 지독했다. 윤도가 앞발로 수도꼭지를 툭툭 쳐 돌렸다. 콸콸 쏟아지는 물 아래 몸을 들이밀었다.
차가운 물이 털을 적시자, 검붉은 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윤도는 한참이나 거기 서 있었다. 온몸이 푹 젖을 때까지. 그는 반쯤 열린 문 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안에 찬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이 시퍼렇게 보일 텐데도 놀란 기색 따윈 없었다.
“…….”
거세게 쏟아지는 물소리만 들렸다. 윤도가 이를 드러냈다. 또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열린 문. 그저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열 수 있는 대문. 힘없는 찬의 눈동자. 그 모든 것들이 윤도의 신경을 긁어내렸다. 어째서 스스로를 그렇게 내던지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인간들이 살고, 그 속에 수인까지 뒤섞여 사는 곳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리 착하게 흘러가지도 않았다. 도둑이 있고, 강도가 있고, 살인이 일어나고. 인간들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가 하면, 수인끼리도 죽고 죽이길 반복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무방비한 삶이라니.
윤도는 몸을 흔들어 물을 털어냈다. 투둑거리며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팔이, 다리가, 서서히 인간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윤도가 수도꼭지를 꽉 잠갔다. 노골적으로 변하는 모습은 처음 봤을 텐데도, 찬은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젖은 피부 위로 물방울이 도르륵 굴러 떨어졌다. 찬이 눈을 깜박이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입술은 꾹 다문 채였다. 어딜 다녀왔냐고 묻거나, 혹은 잘 갔다 왔냐고 인사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윤도가 거실에 발을 들였다. 벌써 꽤 오랜 기간을 같이 살아 왔음에도 궁금한 것 하나 없는 인간.
윤도가 찬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나 고인 물을 맞아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마른 어깨가 움칠 떨렸다. 조금 더 어깨를 웅크린 그가 담요를 어깨로 끌어 올리면서 고개를 조금 돌렸다.
‘…왜.’
그 질문이 윤도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서늘한 손끝이 까슬한 뺨을 문질렀지만 찬은 피하지 않았다. 강간한 이후로 처음 닿는 것임에도 불쾌해 한다거나, 혹은 피한다거나. 그런 반응이 전혀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찬이 담요를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윤도의 손등이 느리게 뺨을 쓸어내렸다. 입술을 작게 벌렸다.
“왜.”
툭 나오는 그 말에 찬은 그냥 멀거니 그를 바라보다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윤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하지 않는다. 질겁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윤도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강간당한 걸 잊었어?”
그것을 물을 줄은 몰랐던 건지, 찬이 처음으로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 속에 윤도의 얼굴이 비쳤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아.”
체념한 듯 부서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도는 그의 뺨에서부터 목. 뼈가 고스란히 만져지는 어깨로 손을 내렸다. 찬이 추운 듯 몸을 웅크렸다. 윤도가 고개를 숙였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담요를 헤치고,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읏.”
추운지 바짝 마른 몸이 움찔 떨려 왔다. 윤도는 그냥 가만히 내려다봤다. 차가운 손끝에 체온이 스며들면서 조금씩 온기를 찾아 갔다. 찬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항은 없었다. 윤도는 바짝 마른 가슴 위의 여린 유두를 손끝으로 긁어내렸다.
“아…….”
익숙하지 않은 듯 찬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윤도가 느릿하게 바지를 벗겨 냈다. 서늘한 손으로 자지를 살짝 쥐어 흔들자, 찬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셔츠를 거의 찢어 낼 기세로 위로 올렸다. 어깨에는 윤도의 이빨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천천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느릿하게 손을 흔들자 찬은 허덕이면서 자지를 뻣뻣하게 세웠다. 윤도의 손톱이 요도구를 살살 긁었다.
“아……. 흣.”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몰아쳤다. 찬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위를 즐기진 않아도 여러 번 해 봤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랐다. 다른 이의 손이 자지를 강하게 훑고, 손끝으로 민감한 귀두와 요도구를 자극했다. 찬이 가쁜 숨을 내쉬면서 단단한 어깨를 쥐었다. 한 손으로 잡기 버거울 정도로 단련된 근육질의 몸.
“그, 아… 그만… 읏, 으응! 나… 흑! 나와……!”
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남자의 손에 사정하다니, 머릿속이 뒤틀렸다. 강간당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지를 잡아 훑어 대는 손길에 사정하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나올 것 같다는 말에도 윤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정액을 짜내는 데 목적이 있다는 듯 더욱 빠르게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찬이 눈을 번쩍 떴다. 땀이 배어 나왔다. 잇새로는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어뜯으려 했던 어깨 위에 닿는 혀가 뜨거웠다.
“읏, 으… 으응!”
찬이 부르르 떨었다. 울컥 정액이 쏟아졌다. 커다란 손바닥 위에 줄줄 흘러나오는 허연 액체에서 풋내가 났다. 손바닥에 고인 것을 물끄러미 보는 윤도의 모습이 낯설었다.
“…아. 인간이라 그런가.”
약간 의아하다는 식의 중얼거림이었다. 찬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간신히 이어 가고 있는 생명이 윤도의 손에 쏟아진 기분이었다.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그가 찬의 다리를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위로 들린 엉덩이를 더듬는 손이 다른 건 필요 없다는 듯 바로 뒷구멍을 찾아냈다. 찬은 뒤이어 닥쳐 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강간당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위로 들린 허리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피의 감촉. 굵은 손가락이 천천히 구멍 주위를 문지르더니 안쪽으로 쑥 들어왔다.
“으흑…….”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찬이 눈을 깜박였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뭐, 무슨… 읏.”
윤도의 자지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의 흉기는 찬의 엉덩이를 꾹꾹 찌르다 못해 뚫을 지경이었으니까.
‘손가락……?’
미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방금 그가 싸버린 정액인가. 찬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손가락이 안쪽을 꾹 누르며 더듬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윤도가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하나 더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
생각보다 아프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찬은 작게 신음했다. 손가락 두 개가 구멍을 살짝 벌렸다가 안으로 쑥 들어갔다. 안쪽이 무슨 모양으로 생겼는지 그도 몰랐는데, 윤도가 지금 알려 주 고 있었다. 찬이 입술을 벌렸다. 숨이 쌕쌕 새어 나왔다.
“찢어진 건 다 나았나 보네.”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도가 고압적으로 찬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다가왔다. 그가 마른 가슴 위에 입술을 대더니 입을 벌렸다.
‘잡아 먹힌다.’
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윤도의 어깨에 올린 손이 덜덜 떨렸다. 단단한 이가 얇은 피부를 긁고, 한입 가득히 그의 가슴을 물었다. 그 정도의 살이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린 피부의 유두를 꽉 무는 감각에 찬이 울음을 터뜨렸다.
“으흑…….”
뒤늦게 달래 주듯 뜨거운 혀가 잇자국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찬의 눈꼬리로 눈물이 뚝 흘렀다. 가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뒤쪽을 쑤시던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나 있었다.
“…흐…….”
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남자의 손길에 자지를 세우고 사정한 걸로도 모자라, 뒷구멍에 손가락까지 꽂고 있다니.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흐려졌다.
“그냥… 아윽…….”
그냥 차라리 강간할 때처럼 자지를 넣으라고 하려던 순간, 손가락 세 개가 구멍을 쩍 벌렸다. 찬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또 찢어진 건 아닐까. 엉덩이와 뒷구멍이 축축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정액 냄새만 났다.
“찢어지는 게 기분 좋으면 그대로 해 주고.”
약간 비웃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또 그 고통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 주는 걸까. 윤도의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벌어졌다.
“흐윽…….”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벌어지는 느낌이 선득했다. 찢어진 건 아니라 해도 꽉 다물린 구멍을 그렇게 벌려 대니, 온몸이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윤도의 어깨를 잡고 있을 힘도 없어 그의 등을 손으로 긁다가 목에 팔을 감았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오싹할 정도로 차갑던 체온이 꽤나 뜨거워져 있었다. 엉덩이를 아프도록 찌르고 있는 자지는 거의 데일 것 같은 온도였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손가락이 네 개로 늘어났다. 찬은 덜덜 떨면서 울었다. 그대로 당장 손을 집어넣어 내장을 모조리 꽉 쥐어 밖으로 당겨 버릴 것 같았다.
“읏, 으…….”
“왜? 안 찢어졌는데.”
이해할 수 없는 듯한 말과 함께 손이 쑥 빠져나갔다. 계속 벌려서 그런지, 뻐끔 벌어진 구멍이 움찔거리며 조금씩 수축하려 했다. 정액으로 질척거리는 손이 찬의 엉덩이를 붙잡아 벌렸다. 벌어진 구멍에 윤도의 귀두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가장 넓은 부분이 들어오고, 굵은 기둥이 빠듯할 정도로 구멍을 넓혔다.
“…찌, 찢어져…….”
“안 찢어져.”
단호한 소리와 함께 자지가 쑥 들어왔다. 찬의 팔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벌 떨렸다. 고개를 젓자 윤도의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읏, 으! 으흑!”
다리에서 힘이 쑥 빠져나갔다. 손을 몽땅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벌어졌던 구멍인데도, 찢어질 듯한 고통이 들이닥쳤다. 찬의 다리가 윤도의 허리 뒤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안 찢어졌어.”
저 말이 달래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친 걸까. 찬이 헉헉거리면서 팔에서 조금 힘을 뺐다. 윤도의 손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찬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파.”
“네 자지는 질질 싸고 있는데.”
그제야 아래를 쳐다보니, 반쯤 선 자지가 정액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이건… 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윤도가 느긋한 모습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강간할 때처럼 급한 것도 아니었다. 마치 즐기듯이 여유롭게 꾹 밀어 넣었다가, 귀두가 걸릴 때까지 빼냈다.
“흣, 으…….”
찬은 가쁜 숨을 겨우 삼켰다. 윤도가 쑥 밀고 들어올 때마다 그의 자지가 움찔거리면서 배 위에 정액을 울컥 뱉어 냈다. 마치 강제적으로 정액을 꽉 쥐어 짜내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흐음…….”
윤도가 아래로 손을 내렸다. 마른 갈비뼈를 하나하나 더듬은 손이 바짝 마른 배를 더듬었다. 정액을 펴 바르듯 배를 문지르던 그가 배꼽 위쪽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아… 그, 만……. 흣. 응…….”
찬이 고개를 저었다.
“너도 만져 봐.”
윤도가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찬이 더듬더듬 배 위를 만졌다. 미끈거리는 정액의 감촉, 그리고 메마른 배 위에 불룩하게 드러난 형태.
“…….”
믿기지 않는 현실에 찬이 멍하니 배 위를 더듬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만져보면 어디까지가 귀두인지도 알 지경이었다. 그가 너무 말라서 그런지 아니면 윤도의 자지가 너무 커서 그런지 혼란스러웠다.
“계속 만지고 있어. 기분 좋은데.”
윤도가 허리를 뒤로 쑥 뺐다가 꽂아 넣었다. 불룩 올라왔던 형태 역시 그의 허리 움직임에 따라 아래쪽까지 쑥 내려갔다가 배꼽 위쪽까지 올라왔다. 찬이 또 정액을 찔끔 뱉어 냈다.
“하……. 이렇게 하니까 꼭 자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윤도의 커다란 손이 찬의 손을 덮었다. 그리고 배 위로 꾹 짓누르니, 어디가 귀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막대기 끝에 아주 약하게 굴곡진 부분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찬이 멍하게 아래쪽을 쳐다봤다.
“흐… 읏, 윽.”
거의 반사적인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깊게 쑤셔 넣으면 정말 명치까지 오지 않을까. 찬은 멍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정도 되는 부피가 몸 안을 들쑤시니, 신음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윤도가 킥킥 웃더니 상체를 세웠다. 찬의 허벅지를 바짝 끌어당긴 그가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응, 응……. 하윽…….”
찬의 몸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거칠게 안쪽을 긁어 대는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조이다가 또 찢어진다.”
경고하듯 하는 말에 찬이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윤도가 혀를 가볍게 찼다.
“힘 풀어. 구멍 안 조여도 뻑뻑하니까.”
“…흐윽……. 윽…….”
어쩐지 눈물이 났다. 찬이 헉헉거리면서 울었다. 낮게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팔이 꽉 붙들렸다. 찬이 눈을 번쩍 뜨니, 바로 코앞에 윤도의 쇄골이 보였다. 길게 뻗은 곧은 뼈. 찬의 시야가 목젖까지 올라갔다가, 쇄골 아래까지 뚝 떨어졌다.
“읏, 응…….”
구멍이 또 찢어진 듯 아팠다. 찬이 윤도의 가슴 위에 뺨을 기댔다. 그의 뜻과 달리 아래위로 들썩이는 몸에 약하게 멀미가 났다. 나름대로 풀어 준다고 풀어 준 모양이지만, 아래쪽이 얼얼했다. 허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감각이 마비된 기분이었다.
찬의 의지와 달리 발끝이 곱아들었다. 윤도의 손이 허리를 붙잡은 채 몇 번이나 마른 몸을 위로 들었다 아래로 내리찍었다. 찬의 자지는 이제 멀건 액체를 흘렸다.
“흐……. 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냥 멍하니 윤도의 심장 소리에 기대 온몸을 맡기기만 했다. 얼마나 더 들쑤셨을까. 찬은 부드럽고 단단한 근육 위에 뺨을 기댄 채 헐떡이기만 했다. 신음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입술 사이로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겨우 흘러나왔다.
“하아…….”
제법 만족스러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쑤셔 댄 것은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 가장 깊이 파고든 자지가 움찔움찔 떨렸다. 찬이 눈을 감았다.
뒷구멍을 빈틈없이 틀어막은 자지가 움찔거리면서 정액을 안쪽에 싸기 시작했다. 윤도가 낮게 한숨을 쉬며 그의 허리와 등을 끌어안았다. 찬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또다시 줄줄 멀건 정액을 흘렸다. 눈앞이 깜박거렸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려 했다.
윤도는 사정한 후로도 자지를 빼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찬이 눈을 깜박였다. 오래지 않아 다시 구멍 안쪽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아……. 늑대라고 했나.’
개와 비슷한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찬은 약간의 고통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의식이 멀어졌다.
* * *
새벽의 차갑고 습기 찬 공기가 집안을 꽉 채웠다. 윤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옆에 있는 마른 몸은 어제 늦게까지 안고 있던 찬이었다. 이미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지만 한 번 해서는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새대가리들을 찢어 죽여서 그런가.’
피를 봐서 그런지 온몸이 날뛰었다. 오싹할 정도의 쾌감이 흘렀다. 축 늘어진 몸에 몇 번이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윤도가 고개를 돌리니 겨우 다물어진 찬의 뒷구멍 밖으로 정액이 흐른 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그는 그걸 물끄러미 보다 그냥 일어섰다. 옆에 있던 체온이 없어져서 추운지 찬이 몸을 웅크렸다. 윤도는 이불을 대충 밀어 찬에게 덮어 준 뒤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마루 한편에 새 옷이 놓여 있었다.
느긋하게 새 옷을 입은 윤도는 대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느려 터져서는.”
가볍게 혀를 찬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대문을 열었다. 담벼락에 기대 서 있던 천수빈이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윤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날뛰고 흥분해선 암컷 구멍이나 들쑤시고. 재미 좋네, 오윤도.”
“너만 할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천수빈이 담에서 몸을 떼어 내더니 어깨를 툭툭 털어 냈다.
“우리 애들 아주 예뻐해 줬던데.”
윤도가 씩 웃었다. 바라던 대로 그 꼴을 본 모양이었다. 천수빈은 입술이 찢어져라 미소 짓고 있었다. 오싹한 웃음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당장에라도 윤도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도 네 애들 좀 예뻐해 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수빈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징그러운 새끼.’
어떻게 입이랑 눈이 저렇게 따로 움직일까. 윤도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담 너머를 턱짓했다.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윤도는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픽 웃었다. 실컷 찢어 죽이고, 흥분까지 모조리 풀어냈더니 제법 너그러운 기분이었으니까.
“먼저 예뻐해 준 건 그쪽이지.”
시시한 도발이었다. 넌지시 어제 죽은 개를 언급하자 천수빈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혹시 변명이라도 할까 싶어 물끄러미 쳐다보니,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지금 이곳에서 치고받고 싸워 봐야 어떤 답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윤도가 느긋하게 웃었다. 게다가 이곳은 인간들이 사는 곳이 아닌가. 천수빈도 당장 목숨 걸고 싸워 보자고 온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먼저 즐겁지 않은 웃음소리를 낸 건 수빈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봐야 둘 다 시간 낭비야.”
“호……. 새대가리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나름대로 머리라는 걸 굴리고 있긴 하구나.”
“땅이나 기어 다니는 버러지 새끼가 할 말은 아니지.”
수빈이 또다시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모든 건 우리의 대부님이 결정하실 거야.”
그 말에는 달리 할 대답이 없었다. 윤도는 그냥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차피 누가 이기든 지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당장 윤도가 천수빈을 찢어 죽인다 해도, 그들의 대부인 천대경이 윤도를 후계로 삼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아니면 차라리 날 죽이고 다른 이를 후계로 삼거나, 패밀리를 와해시킬 수도.’
그러니 당장 죽고 죽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론, 서로 상대를 죽이면 그다음 절차가 손쉬워지긴 하겠지. 천수빈이 죽어 버리면 누가 후계자 후보가 될까. 천수빈 만한 인물은 탈론에 없었고, 누굴 후계자로 밀어 준다 해도 천수빈보단 격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곰곰이 탈론의 인물들을 생각하던 윤도의 입술이 뒤틀렸다. 천수빈이 죽는다면 아마 천대경은 높은 확률로 윤도의 손을 들어줄 게 분명했다.
그는 천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윤도의 클리크가 아닌 이들 역시 천수빈을 어떻게든 없애야 한다고 윤도를 설득하려고 하긴 했다. 당연히 윤도는 그보다 약한 자들의 조언을 가뿐하게 씹어 먹었고.
그러나 그와는 달리 탈론의 말을 아주 얌전히 잘 듣는 천수빈은 곧이곧대로 윤도를 죽이려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네 말대로 대부가 결정하겠지.”
느릿하게 말하자 수빈이 오히려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윤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지금 당장 같이 가서 후계를 정해 달라고 징징거리자고 날 설득할 생각이야?”
그 말에 별 관심 없는 듯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윤도는 반쯤 마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수빈이 집 안을 흘끔 쳐다봤다. 담이 꽤 낮은 편이라, 둘에게는 집 안이 훤히 다 보였다.
‘문을 닫아서 다행인가.’
물론 그것으로 천수빈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윤도는 덤덤한 얼굴로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언가를 바라듯 꼼꼼히 더듬는 눈길이 불쾌했다.
“인간인데도 끼고 살다니. 제법 마음에 드나 보네.”
“아, 네놈이 이렇게 밖에서 은밀히 접선하려고 하는 꼴을 구경하니 재미가 아주 쏠쏠하지.”
큭큭거리면서 내뱉은 말에 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구멍이나 신나게 갖고 놀아.”
그가 경멸하는 어조로 툭 던지듯 말했다. 윤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에도 그냥 웃어 버리는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수빈이 노골적으로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정 난 개새끼.”
그 말과 함께 그는 순식간에 새로 변했다. 검독수리라 그런지 날갯짓 몇 번에도 순식간에 높게 날아올랐다. 윤도는 이른 새벽의 안개 낀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시력으로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발정 난 개새끼라.”
윤도가 중얼거리다 낮게 웃었다. 그는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제의 일로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민 천수빈의 반응을 보니 또다시 온몸의 피가 날뛰기 시작했다. 윤도가 바지 앞섶을 열자 커다란 자지가 툭 튀어나왔다.
그가 느긋하게 손으로 쥐고 훑었다. 어차피 진짜 예뻐해 줄 상대도 있지 않은가. 윤도가 거실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아직도 기절한 듯 잠든 찬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손가락을 쑥 집어넣자 다 빠져나오지 못한 정액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푹 적셨다.
윤도가 마른 허벅지를 잡아당겼다. 주르륵 끌려오는 찬은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귀두가 구멍을 벌리기 시작하자 울컥 쏟아지는 정액이 자지를 번들번들 적셨다.
“…하으…….”
잠결에도 내장을 모조리 밀어 올리는 느낌을 느꼈는지, 찬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고개를 느리게 흔들었다. 윤도가 비쩍 마른 허리를 꽉 붙잡았다.
“하…….”
정말 기분 좋았다. 좀 빠듯하긴 했지만, 찰싹 달라붙어 오는 내벽에 움찔거리면서 조여 대는 구멍까지. 윤도는 또다시 퍽퍽 소리를 내며 허리를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