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유일한 가족이 사라진 그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발가벗겨진 채 차가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라면 조금 비슷할지도.
찬은 오랫동안 굶주린 배를 움켜쥐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왔는지 파리들이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다 쉬어 버린 나물 위에 앉았다.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깜박 잠들었다가 깨면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를 세다가 또 눈을 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찬은 그것만 생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그 어떤 것도 찬에게 의미가 없었다.
할머니가 해 둔 나물들이 쉬었다. 밥솥의 밥은 이미 보온 99시간을 넘겨 더 이상 숫자가 올라가지 않았다. 모두 먹어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찬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죽으면 할머니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까.’
분명 천국에 가셨을 텐데, 천국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 찬은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할머니라면 방에 틀어박힌 손자가 걱정돼서 천국에 못 들어가고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죽는 게 제법 좋은 생각 같아 보였다. 할머니를 오래도록 기다리게 하면 불효일 테니까. 찬의 마른 입술이 픽 웃음을 지었다.
‘반가워하실까.’
아니면 화를 낼까. 찬의 성격을 아는 할머니라면 차라리 잘됐다며 안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부터 찬의 세상에는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만약 만날 수 없더라도,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도 그거대로 괜찮았다.
이미 이 세상에 의미 같은 건 없다. 유일하게 찬을 조건 없이 사랑해 주었던 단 한 사람이 죽어 버렸는데 이제 무엇을 의지해 살아가야 하나. 그 증거로 며칠간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세상은 너무도 고독하고 쓸쓸한 곳이었다.
‘할머니. 대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어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 물음을 던지기에 그녀는 찬을 너무 사랑했다. 그 덕분에 세상이란 곳이 이렇게나 외로운 곳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찬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놓인 낮은 탁자. 양옆에 놓인 초는 다 타 버린 지 오래였고, 피웠던 향은 이미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치 당장이라도 걸어와 엉덩이를 팡팡 때리면서 일어나지 않고 뭐하냐 혼을 낼 것 같았다.
“…할머니.”
오래도록 말하지 않아 꽉 잠긴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우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그저 멍했다. 현실이라 믿기 힘들었다. 동네 어른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장례를 치르느라 며칠간은 그저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싸늘한 방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문을 열어도 이제야 방에서 나오냐며 타박해 주는 사람이 없다. 늘어져 있어도 엉덩이를 두들겨 주는 사람이 없다. 찬은 집에 돌아온 날 멍하니 영정 사진 앞에 앉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현실 같지 않아서 할머니의 사진을 보기만 했다.
그러다 쓰러지듯 잠들고, 일어나고. 잠들고, 일어나고. 찬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 흘렀다.
“…할머니, 날 왜 사랑했어?”
그가 작게 다시 속삭였다. 몸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을 쥐어 짜내듯 눈물을 흘렸다. 흐느낄 힘조차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 쌕쌕대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눈물이 귀를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사랑해 주지 말지. 할머니를 원망했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허망한 것이라는 걸 미리 알려 주지. 그는 흐릿해진 눈으로 영정 사진을 쳐다봤다.
“…빨리 죽을 거 알고 있었잖아.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되지도 않는 원망을 내뱉었다. 할머니가 찬보다 먼저 죽을 거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영원히 살 것만 같았다. 적어도 찬이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계실 거라 믿었다.
허무맹랑한 믿음일지라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할머니가 죽는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고운 한복을 입고,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할머니의 눈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미안해…….”
찬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사랑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 감사했다. 그래서 그녀가 영원히 살았으면 했다. 그는 손으로 눈 위를 덮었다. 눈이 불로 지진 듯 뜨거웠다.
“하…….”
사진 속의 할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찬 혼자 남겨졌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서 괴로웠다. 눈물이 손바닥을 적시고, 머리카락까지 축축하게 만들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짚은 팔이 휘청이며 당장이라도 꺾여 버릴 것 같았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일어나 앉았다. 홀쭉하게 들어가 버린 배 위를 문질렀다. 배가 고프더니.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영정 사진과 똑바로 마주 앉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찬을 키웠는지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모두 그를 버렸다. 이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찬을 원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했다. 어린아이에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거라는 느낌만 남았을 뿐. 할머니 역시 그 시절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아이가 된 찬을 처음으로 원한 건 할머니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적적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자식의 치부를 덮으려는 의도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저 찬이 불쌍해서였을까.
‘아, 한 번도 물어보질 않았네.’
왜 데려왔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대답이 두렵기도 했다. 찬을 원한 게 아니라,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거면 견딜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제 와선 물어볼 상대조차 없는 질문이 됐지만. 찬은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건 재미있었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유산을 제법 남겨, 돈이 궁하지 않았던 게 행운이었다. 하지만 노인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었을까. 경제적 부담이 없었다 해도 아이를 감당하기엔 힘들었으리라.
게다가 꽤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채 무기력하게 방안에 틀어박힌 아이라니. 시골에서 부지런히 살던 할머니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종자였으리라. 그런데도 그녀는 찬을 내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을 완벽히 이해해 주진 못했다.
찬이 속을 썩일 때마다 할머니는 거침없이 그의 엉덩이나 종아리를 팡팡 때려 댔다. 찬은 멍하니 옛날 기억을 되새겼다. 그를 한 대 때릴 때마다 할머니의 등이 더 굽고, 눈가에 주름이 늘어 갔다.
‘…아아.’
그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와 사는 동안 할머니는 더 나이가 들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면서 더 늙어 갔다. 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말을 잘 들었으면 더 오래 사셨을까. 그땐 왜 알지 못했을까. 영원히 살아계실 것만 같았는데. 그가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는 매 순간 할머니는 계속해서 죽어 갔다.
“미안해… 할머니. 미안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우스웠다. 그의 모든 것으로 할머니의 세월이 좀먹어 갔다는 걸 이제야 깨닫다니. 찬은 그대로 웅크렸다.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찬은 마른 손을 꽉 쥐었다.
그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던 단 한 명이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말을 좀 더 잘 듣지 못했을까. 왜 미운 짓을 했을까. 후회해도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했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도 할머니는 찬을 키웠다.
그 시간이 행복했다.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하루였을 뿐인데, 할머니가 죽고 사라진 지금에야 의미 없이 흘려보낸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행복하다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볼 것을. 그는 또다시 울었다. 바짝 마른 입안에서는 흐느낌도 아닌 숨소리만 쌕쌕 새어 나왔다. 온몸의 수분을 모조리 쥐어짜 냈다.
한참 또 울었다. 할머니는 온 힘을 다해 찬을 사랑해 줬다. 남은 생의 모든 것을 바쳤다. 더욱 굽어 가는 등을, 주름진 눈가를 그가 알아주지 않았어도 그녀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어린아이는 그렇게 키워졌다. 이 시골구석에서 할머니의 품에 안겨 이 정도라면 세상도 살아갈 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찬은 다시 모든 것을 잃었다. 죽는 것은 쉽다.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할머니가 바라고 있을까.
‘…또 속을 썩이는 짓이겠지.’
메마른 입술이 쩍 갈라졌다. 혀끝으로 핥자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비릿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찬은 하하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잘 살 자신은 없었다. 할머니가 없는데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냥 살아갈 수는 있다. 숨을 쉬고, 음식을 입에 넣고, 잠을 자면 된다. 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걸음 떼어 놓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대로 죽는 것보다 의미가 없더라도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까지도 더 살아야 했다. 그래야 할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다. 찬은 비틀거리다 문가에 기대섰다. 그렇게 죽길 바랐다면 처음부터 그를 데려오지도 않았으리라.
‘살아서. 그래서 뭘 하는데?’
스스로 답을 낼 수 없었다. 뭘 해야 할까. 그냥 이대로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면서 산다 해도 그것에서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죽지 않아야 하니까 사는 것뿐이다.
할머니가 싫어할 테니까. 또 속을 썩이는 짓이 될 테니까. 찬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꽉 줬다. 차라리 누군가가 죽여 줬으면 했다. 그러면 할머니를 만나서 할 말이라도 있겠지. 억울하게 죽었지만 어쩔 수 없으니 할머니와 있겠다거나.
‘…그러면 우시려나.’
그래도 만난다면 그 눈물을 닦아 주면서 핀잔이라도 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발에 발을 꿰어 넣었다. 옆에는 장례식 때 신었던 까만 구두가 엉망으로 놓여 있었다. 그래도 신발은 벗고 들어올 정신은 있었나. 헛웃음이 나왔다. 찬은 그것을 힐끗 보곤 그대로 집을 나왔다.
발을 직직 끌면서 천천히 슈퍼로 향했다. 늦은 오후의 시골길은 한적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 기분은 무척이나 쓸쓸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찬은 천천히 흙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도 반겨 줄 이가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와 닿았다. 이대로 그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 * *
찬은 멍하니 누워 있다 또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이 더 흘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하루에 한 끼쯤은 먹었을까. 속이 조금 쓰렸다. 머리맡에 놓인 봉지를 더듬어 보다 텅 빈 비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
사 온 컵라면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물만 부어서 먹으려 했는데. 그마저도 싫어서 대강 미적지근한 생수를 부어 먹었다. 풀어지지도 않는 라면을 으득으득 씹으면서. 겉도는 수프의 맛에 깡 생수를 들이마셨다.
찬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어지간하면 내일 다시 나가고 싶은데. 지금도 한계였다.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만 하나씩 꺼내 먹었으니. 또 한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굶어 죽는 건… 안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한 찬이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방 한구석에 말끔하게 비워진 컵라면 더미가 쌓여 있었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조차 귀찮아 그냥 컵에 있는 것을 모두 마셨다. 온몸에서 라면 수프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어찌나 길고 지루한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익숙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할머니가 있는 삶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소름이 끼쳤다. 그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게, 끔찍하고도 잔인했다. 그저 음식만 조금 넣어 주면, 기계처럼 숨을 쉬었다. 인간이란 것은 제법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는구나. 찬은 재난 영화들을 떠올렸다. 영화 속 그들 역시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삶을 이어가지 않았는가.
‘…죽는 날이 언제일까.’
이대로 나이 들어 죽길 기다려야 하나. 나가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도,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찬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씻지 않아 엉망이 된 머리가 조금 찝찝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씻는 대신 그냥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을 여니. 어둑한 세상이 보였다. 장막처럼 내리는 빗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가로등 하나 놓여 있지 않은 시골 마을은 한 치 앞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찬은 잠시 시계를 쳐다봤다. 비가 와서 하늘이 짙은 탓에 생각보다 늦진 않았다.
‘…슈퍼 할머니가 몇 시에 문을 닫으시더라.’
그는 잠시 고민하다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었다. 현관 한구석에 놓인 손전등을 집어 들고 우산을 펼쳤다.
‘그냥 내일 갈까.’
빗속으로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 더 굶는다 해서 당장 죽을 것 같지도 않다. 물론 기운은 좀 더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슈퍼까지 기어갈 수는 있지 않을까. 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비는 그냥 맞으면 무척이나 아플 것 같았다. 툭툭 아래로 떨어지는 방울이 언뜻 보기에도 무척 굵었다.
“…하.”
지금 슈퍼 하나 갈까 말까 망설이는 꼴이라니. 찬이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오늘 비가 와서 관두면, 내일은? 모레는? 햇빛이 너무 세니까, 바람이 부니까 집에 있을 셈인가.
그는 세상이 좀 더 어두워질 때까지 멍하니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쪽 벽에 놓인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힐끔 쳐다보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위가 아팠다. 한참을 굶다가 가끔 먹는 게 라면. 그것도 거의 생라면이니. 위가 상하지 않을 리가 없다.
찬은 할머니의 시선에 떠밀리듯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슬리퍼 위로 물방울이 튀었다. 천천히 우산을 어깨에 걸쳤다. 손전등의 버튼을 꾹 누르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세상에 작은 빛이 생겼다. 그는 발밑을 비추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우스웠다. 죽어 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우산까지 쓰는 스스로가 모순적이라 느껴졌다. 차라리 비를 다 맞고 열병이라도 나면 아파서 죽었다고 할까. 찬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어찌나 억수같이 쏟아지는지 금세 슬리퍼가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발에 싸늘한 빗물이 계속 스쳤다. 손전등으로 앞을 비췄지만 그리 쓸모가 있진 않았다. 빛마저도 물에 휩쓸리는지 곧게 뻗어 나가야 할 빛이 이리저리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대문도 안 잠갔네.’
어차피 시골이라 다들 문단속에 그리 철저하지 않다. 앞집 뒷집 다 아는 사이에 외지인은 눈에 띌 테니까. 찬은 대문을 잡아당겼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빗소리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멍한 얼굴로 발을 내디딘 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언가가 발밑에 물컹 밟혔다.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추니 짙은 색의 커다란 덩어리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
비명을 지를 힘도 없어서인지 놀란 숨소리만 쌕 새어 나왔을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도움을 요청해도 빗소리에 묻혀 아무에게도 닿지 않으리라. 찬은 천천히 손전등을 움직였다. 일그러지는 빛으로도 그것이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람?’
그것도 남자였다. 덩치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비 때문인지 창백하게 질린 온몸은 떨림조차 없었다. 아주 미약하게 움직이는 가슴 덕분에 겨우 숨이 붙어 있다는 걸 알았다. 커다란 몸 아래에 고인 빗물이 짙었다.
찬은 주위를 살폈다. 인기척은 고사하고 동물 한 마리도 없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게다가 몰골을 보아하니 어디서 쌈박질이나 하고 온 모양이다. 옷은 어디다 버렸는지, 바지만 겨우 입고 있는 게 조금 괴상했다. 찬은 꽤 깊어 보이는 상처와 자잘한 상처들을 보곤 고개를 위로 돌려 버렸다.
“…젠장.”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와 살면서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 중 하나. 어렴풋이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조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쿡 찔러 왔다.
물론 이 남자와 아버지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랐다. 아버지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곰이 생각날 정도로 커다랬고, 엉망으로 다친 채였다.
‘…적어도 다치진 않았지.’
물론 술을 처먹고 어디서 혼자 굴러 긁혀 온 적은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쌈박질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눈앞의 남자처럼 아무 데서나 누워 잤다. 찬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손에 쥐어진 손전등이 묵직했다. 이 빗속에 누워 있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서 싸우다 온 남자라면…. 괜히 끼어드는 게 안 좋을 수도 있고.’
찬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남자의 옆으로 슬금슬금 지나갔다. 그가 철퍽거리면서 빗물을 튀기자 남자가 조금 꿈틀거린 것 같기도 했다.
대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찬이 천천히 빗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 남겨진 남자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면 거짓말이다. 집 앞에, 그것도 보란 듯 대문 앞에 누워 있는데 그 누가 무시할까.
‘차라리 밭 같은 데 누워 있지.’
끌어다 밭에 둘까 싶었지만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런 고생스러운 일까지 하고 싶지 않다. 얼핏 보기에도 그보다 한 뼘은 넘게 클 것 같고, 덩치도 두 배는 될 것 같았으니. 안간힘을 써도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도의상 누군가에게 신고를 하거나, 아니면 깨우거나, 그도 아니면 집에 들이거나. 어쨌든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찬은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버거웠다. 경찰에 넘기자니 정체도 모르는 낯선 외지인의 보호자로 불릴 게 뻔했다. 게다가 그와 싸운 상대들이 그를 찾아오면 어쩐단 말인가.
‘죽은 건 아니니까 정신 차리면 일어나겠지.’
홀딱 벗은 채로 버스도 두 대뿐인 시골 마을까지 온 남자다. 걸어왔다는 뜻일 텐데 다친 채로 여기까지 올 정도면 가는 것도 충분하겠지. 찬은 손전등을 괜히 몇 번 껐다 켰다.
어쩐지 짜증이 치밀었다. 그도 겨우겨우 살고 있다. 죽지 못해 산다. 그런데 왜 찬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하필이면 우리 집 앞에 쓰러져 있냔 말인가.
“…짜증 나.”
작게 중얼거렸다. 왜. 하필. 어째서. 거친 발걸음에 슬리퍼가 쑥 벗겨져 앞에 떨어졌다. 찬이 한숨을 푹 쉬고 맨발로 흙길을 디뎠다. 이미 푹 젖은 발이지만 맨발로 젖은 흙을 밟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다시 슬리퍼를 신었지만 까슬거리는 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그 남자 같다. 거슬리고, 또 거슬렸다. 찬은 그래도 그냥 걸었다. 슬리퍼를 벗어 빗물에 흙을 씻어 내는 것조차 귀찮고 의미 없는 짓이었으니까. 남자를 그냥 못 본 척했듯, 발아래 자근자근 밟히는 작은 흙 알갱이들을 무시했다.
‘그래, 이 정도 크기지.’
적당히 무시하고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찬은 손전등만은 비에 젖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제법 먼 길을 걸었다. 빗길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슈퍼에 도착했다.
간판 하나 없는 시골 슈퍼는 오래된 세월을 알려 주듯 낡은 평상이 앞에 나와 있었다. 지금은 빗물에 절어 있지만, 날이 좋은 때면 그곳에서 할머니들이 모여 수다를 떨었다.
“…주무시려나.”
찬은 불이 꺼진 슈퍼에 천천히 다가갔다. 유리가 끼워진 철제 미닫이문을 가볍게 밀었다. 역시. 잠겨 있지 않았다.
“…할머니.”
안을 살폈지만 그냥 깜깜했다.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올리자 몇 번 전구가 깜박이더니 환하게 켜졌다.
“할머니. 주무세요?”
주무신다면 그냥 돈을 놓고 가면 된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찬은 이십 초쯤 기다리다가 그냥 진열대로 다가갔다. 살 만한 건 몇 개 없었다. 동네 구멍가게에 뭐 그리 물건이 많을까. 그나마 제법 쌓여 있던 컵라면은 요 근래 찬이 다 사간 덕분에 상당히 줄어 있었다.
‘…컵라면 또 들여 달라고 할까.’
찬은 무심코 유통기한을 살폈다. 대체 언제 산 건지. 벌써 날짜가 아슬아슬했다.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잘 안 팔리는 것들은 심심찮게 유통기한을 넘기곤 했으니까. 찬은 대충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아이고. 찬이 아니냐!”
드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 방에서 할머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드라마 보고 있어서 못 들었네. 크게 부르지 그랬어.”
“계속 보세요. 괜찮아요.”
찬의 말에도 그녀는 손을 내저으면서 기어이 방에서 나왔다.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자그마한 몸집의 할머니가 고무신을 끌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애가 배싹 말랐네.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네.”
머쓱하게 대답했다. 사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딱히 친한 것도 아니었다. 다들 할머니의 손자로 아는 게 대부분이지, 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찬 역시 할머니의 친구분, 혹은 동네 사람 정도로 인식할 뿐이었다.
“또 컵라면 사?”
시골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런 건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크게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괜히 관심을 표한다. 아무것도 해 주지 않으면서.
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도 컵라면 사 가지 않았어?”
“…네.”
“컵라면만 먹으면 못써. 밥도 해 먹고 그래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야 네 할머니도 편히 눈을 감을 거 아냐.”
찬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빗물에 조금 젖은 듯, 지폐가 눅눅했다. 그는 그걸 내밀었다.
“그게 얼마더라…….”
할머니가 중얼거리면서 계산기를 꺼냈다. 눈이 안 좋은지 돋보기를 끼고 하나하나 꾹꾹 누르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알아서 비닐봉지를 뜯어 컵라면을 담았다.
“남은 건 달아주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짤랑거리는 거스름돈도 싫고, 거기 서서 느릿한 계산을 하는 동안 또 말뿐인 걱정을 듣기도 싫었다. 찬은 다시 우산을 펼쳤다.
아까보다 짐이 하나 더 늘었다. 바스락거리는 봉지에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섞였다. 여전히 발아래 자꾸 밟히는 흙 알갱이가 신경 쓰였다. 찬은 손전등을 꽉 쥐었다.
‘아직도 집 앞에 있을까.’
있으면 어쩌지. 차라리 사라졌으면 했다. 손전등이 거칠게 흔들리면서 엉뚱한 곳을 자꾸 비췄다.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물이 가득 고인 곳을 못 보고 발을 딛는 바람에 물이 튀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컵라면이 든 봉지가 손목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살아 보겠다고 먹을 걸 들고 돌아오는 길이라 그런가. 미약하게 움직이던 가슴이 눈앞에 자꾸 생각났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깊어 보이는 상처가 신경 쓰였다.
찬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털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이 금세 흙 알갱이들을 씻어 내렸다.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손전등은 아예 꺼서 봉지에 넣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우산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해 온몸이 흠뻑 젖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미적지근한 물방울의 느낌이 조금 불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외길에 들어선 순간. 찬은 우뚝 멈춰 섰다.
‘…어쩌려고?’
그 남자가 여전히 있으면 어쩔 생각인가. 경찰에 신고를 하나. 아니면 깨워서 보내나. 그도 아니면 집에 들이나. 찬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냥 신경이 쓰였던 것뿐이지, 별다른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빠르게 걸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어떻게 하지.’
남자가 아직 있어도 문제다. 찬은 누군가를 챙길 처지가 아니니까. 차라리 이장님께 전화를 해서 집 앞에 이상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하는 게 나을까. 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빗물에 반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이 좁은 시골구석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바로 내일부터 온갖 말에 시달려야 했다. 누구냐. 어떤 사이냐 등등. 찬은 느릿느릿 집 앞으로 걸어갔다. 점점 대문이 가까워졌다.
‘젠장.’
뭘 어쩌겠다고.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버거웠다. 있으면 상당히 문제다.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까. 찬은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이마 위에서부터 미지근한 빗방울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남자가 사라졌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리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남자의 밑에 고인 웅덩이는 짙은 색이었다. 검붉은 색. 아마도 피가 아닐까. 빗물에 씻겨 내려간 상처에서도 방울방울 피가 맺히고 있었다. 찬은 반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애써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대문 앞을 바라봤다.
“…=…응?”
창백하게 질린 피부의 덩치 큰 남자를 이 거리에서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문 앞은 그냥 암흑이었다. 분명 핏기 없이 질린 몸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였는데.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비닐봉지를 뒤적여 다시 손전등을 꺼냈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버튼을 꾹 눌렀다. 딸각 소리와 함께 일그러진 빛줄기가 대문 앞으로 향했다.
“…….”
찬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나뒹구는 우산을 집을 생각도 못 했다. 이미 반쯤 젖어 있던 몸이 축축해졌다. 남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그곳에 누워있는 건 엄청나게 커다란 개 한 마리였다. 진짜 찬이 실제로 본 개들 중 가장 컸다.
사람에 이어서 개. 찬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내가 기력이 쇠해서 헛것이 보이나.’
왜 자꾸 대문 앞에 이상한 것들이 누워 있는 걸까. 눈이 아프도록 비빈 후 다시 봤지만 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나타나지도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그 남자가 그새 죽었나. 남자와 싸운 누군가가 경고의 의미로 찬의 집 앞에 개를 던져 둔 걸까. 아니면 무언가 이상한 일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걸까.
찬은 천천히 개에게 다가갔다. 빗물에 푹 절은 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처럼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몸은 약해 보였다.
‘…남자는 어디 갔지?’
이 시골구석에서 그런 덩치의 남자를 끌고 가려면 분명히 눈에 띌 텐데. 외길에서 차가 오가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사람이 들려면 둘은 필요할 텐데. 온갖 생각이 찬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찬은 개를 손전등으로 꼼꼼히 비췄다. 날카로운 이빨, 축 늘어진 몸. 그래도 사람에 비해서는 조금 가벼운 생각이 들었다. 개니까. 게다가 그 남자가 너무 신경 쓰였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 버린 탓이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남자에 대한 것들이 흙 알갱이처럼 마음속 밑에 자근자근 밟혔다.
“아. 이런…….”
빗물이 들어갔는지. 손전등이 깜박거리다 툭 꺼졌다. 빗물 사이로도 무언가가 타는 냄새가 났다. 찬은 손전등을 대충 비닐봉지 안에 던져 넣었다.
대문을 쭉 밀었다.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개와, 마당 안쪽을 살폈다.
‘…데리고 들어가는 게 낫겠지.’
알량한 죄책감이라고 해도 좋다. 마음 밑에 깔린 작은 알갱이들이 거슬려서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인간이 아니라 개니까. 찬은 온갖 이유를 들어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으면서 개를 신경 쓰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는 우선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봉지를 집 안에 던져 넣었다.
‘…집 안에 들일 수는 없고.’
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개인데. 이걸 어떻게 집에 들일까. 게다가 비에 흠뻑 젖어 있으니 더 곤란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당에만 들여놓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찬은 집 안을 대충 둘러보다가 창고로 향했다. 약간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비를 피하기엔 좋았다. 그는 창고 문을 활짝 열어 두곤 다시 개에게 다가갔다.
“…물진 않겠지.”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약간 벌어진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얼핏 보이는 날카로운 이가 오싹했다. 찬이 조심스럽게 개의 몸을 툭 건드렸다.
그 순간.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개라기보다는 짐승의 소리였다. 본능적으로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그런 울음. 찬이 순간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내리는 비에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또 조용해진 개를 다시 조심스럽게 만졌다. 벌써 미지근해진 체온이 손바닥 아래 느껴졌다. 찬은 조심스럽게 앞발을 한쪽 들어 올려 어깨에 얹었다. 이렇게 큰 개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끌 수는 있을까.’
찬이 어깨에 한 쪽씩 앞발을 얹었다. 그것만으로도 무릎이 휘청거렸다. 오랫동안 방치해 쇠약해진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 힘껏 개를 당겼다.
그래도 아예 힘이 없진 않았는지 다행히도 개는 조금씩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찬이 이를 꽉 악물었다.
‘왜 이렇게 무겁지.’
시골에서 온갖 똥개들은 다 봤지만 이처럼 큰 개는 처음이었다. 송아지만 하지 않을까. 곧게 네 다리로 선다면 진짜 송아지만 할지도 모른다. 찬은 앞발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바짝 마른 손가락이 털에 파묻혔다. 질척거리는 털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후우…….”
겨우겨우 개의 몸을 대문 안까지 끌었다. 아직 마당을 지나야 했다. 찬은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어이 집 안으로 들이고 나니 이제야 의문이 생겼다.
‘내가 대체 왜….’
어째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찬은 까끌한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여전히 마음 바닥에 달라붙은 흙 알갱이 때문이다. 빗물에 씻어내듯 간단하게 치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개를 창고에 들이고, 아주 약간. 조금만 돌봐 주는 걸로 충분히 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찬은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에 힘을 꽉 줬다. 차라리 지금 들어가서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고 나올까. 별 생각을 다 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려면 우선 젖은 옷을 벗어야 하고. 이 개를 끌고 가려면 다시 옷이 젖을 것이다. 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맞다, 우산….’
우산이 어디까지 굴러갔을까. 나중에 누군가 발견하면 찬을 혼내러 오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개를 창고에 데려다 놓고 우산까지 찾아올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개를 질질 끌었다. 마당에 약간 짙은 색의 빗물이 흘렀다. 분명 피겠지만, 찬은 그걸 무시했다. 지금 상처까지 신경 쓰며 옮기기엔 그의 체력이 너무 달렸다.
“끄응…….”
정말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있는 힘껏 개를 끌었다. 창고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축 늘어진 몸이 이렇게 무겁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자꾸 무릎이 툭툭 꺾였다.
처음에는 약간의 죄책감 때문에. 개니까. 하필이면 대문 앞이라서. 온갖 이유를 붙여 악착같이 움직였는데 이젠 오기가 생겼다. 뭘 위한 오기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아직도 그 남자가 신경 쓰여서? 그도 아니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 누구도, 무엇도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찬은 이를 꽉 악물었다. 앞발을 쥔 손에서 힘이 줄줄 빠져나갔다.
“아…….”
순간 무릎이 꺾이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얕은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찬이 푹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처음 힘껏 하는 일이 개 옮기기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찬은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아무리 물기를 훔쳐내도, 쏟아지는 비에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그는 다시 개의 앞발을 어깨에 걸쳤다. 뜨거운 숨이 젖어서 달라붙은 천 너머로도 느껴졌다. 그리고 간혹 고통인지, 아니면 반사적인 소리인지 모를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찬은 거의 반쯤 기어가다시피 해 창고까지 개를 끌어왔다.
“…헉…. 헉…….”
그대로 먼지 가득한 바닥에 드러누웠다. 제법 널찍한 공간이었는데도 커다란 개가 널브러져 있으니 가득 찬 듯 보였다.
아직 해야 할 게 있다. 찬은 숨을 몰아쉬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왕 신경 쓰려고 마음먹었으니 상처도 살피고 물기도 닦아 주는 게 낫겠지. 그는 발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억지로라도 움직일 기운이 났다. 그동안은 그저 누워서 먹고, 자고, 눈을 뜰 뿐이었는데. 찬은 젖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씻어야겠네….’
그리고 억지로 씻기까지 해야 한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 * *
찬은 대강이나마 씻고 수건을 모조리 꺼냈다. 바짝 마른 수건은 할머니가 곱게 개어 넣어 둔 그대로였다. 그는 잠시 멍하니 수건들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버석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산 이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던 슈퍼 할머니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찬은 주섬주섬 수건을 끌어안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할머니가 해 둔 음식들은 모조리 상했고, 모든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 좋았던 추억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하하.”
억지로나마 소리 내어 웃었다. 찬은 다시 창고로 향했다. 커다란 개의 밑에는 다시 얕은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색은 또 짙은 색. 물에 젖은 바닥이 짙어진 것과는 또 다른, 검붉은 피의 색깔이었다.
찬은 대충 개 옆에 수건을 쏟아 놓곤 불을 켰다. 느리게 깜박이는 불빛 아래 드러난 거대한 몸은 생각보다도 더 컸다.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환해졌다.
“…개…?”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가졌다. 그냥 손전등으로 봤을 땐 개라고 확신했다. 안까지 끌고 들어올 때, 개 치고는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조명 아래서 보니, 개라고 표현하기 조금 미묘했다.
크기도 그렇고, 묘하게 야생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들개나 그런 종류일까. 찬은 주춤거리며 옆으로 다가갔다.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정말 그냥 개를 주워온 건 맞나. 그게 아니면 어디 들짐승인가. 찬은 여전히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그것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절한 듯 보인다는 것뿐.
‘물진 않겠지….’
그래도 조금 무서워서 주둥이가 있는 쪽은 피했다. 찬은 바짝 마른 수건을 커다란 몸뚱이 위에 차곡차곡 덮었다.
“…해치려는 건 아니야. 네가 날 해치지 않는다면…….”
알아먹을 리는 없지만 스스로가 편해지려고 중얼거렸다. 찬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른 수건을 꾹 눌렀다. 털에 스몄던 물기가 손바닥 모양을 내며 수건을 적셨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짝 섰다가, 움츠러들었다. 가래가 끓듯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오싹거리는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찬은 그냥 입을 꾹 다물고 계속 손을 움직였다. 축축이 젖은 수건을 꾹 짜내고, 또 털의 물기를 빼냈다.
‘…꼬리.’
만지면 보통 싫어하지 않나. 찬이 머뭇거리다 물에 푹 젖은 꼬리를 수건으로 감싸서 손으로 꾹 짰다. 짜증이 나는 듯 그릉거리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기절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봐 주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찬은 꼬리까지 꾹꾹 짜내곤 천천히 개의 몸을 살폈다.
‘개가 맞겠지?’
아니면 늑대와 개의 중간쯤인 들개쯤 되려나. 그것도 어쨌든 개의 일종이니 개는 맞다. 찬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커다란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마른 곳에 데려다 놓으니, 생각보다 몸은 금방 말랐다. 수건으로 안 되면 드라이기라도 가져 와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럴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찬은 약간 젖은 털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물기를 몇 번이나 짜낸 수건에는 검붉은 자국이 군데군데 남았다. 상처 때문이겠지. 바닥에도 피가 흘렀던 흔적이 남았다.
‘…나중에 치워야겠다.’
누가 보면 살인 현장 같은 걸로 오해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찬은 털 사이사이로 선명히 보이는 상처들을 유심히 살폈다. 동물이 다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곰곰이 옛날을 생각했다.
시골구석에서 사는 동안, 똥개도 몇 마리 키웠다. 물론 대부분은 제 명대로 못 살고 어디 가서 이상한 걸 주워 먹고 죽었지만. 개들이 다쳤을 때 할머니는 어쨌더라. 찬은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그냥 뒀던 것 같다.
‘…내가 반창고를 붙여 줬었나.’
시골 어른들은 개에게 그렇게 세심한 정성을 쏟진 않으니까. 하지만 이 개의 상처는 제법 깊어 보였고,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찬은 젖은 수건을 다시 끌어안고 집으로 향했다.
‘어쩌지? 수의사 선생님께 가야 하나.’
읍내에 가면 동물 병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대동물 전문이다. 소, 돼지 같은 것들. 그곳에서 강아지들이 치료받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 시골 어른들이 그런 식으로 개를 아끼는 경우는 잘 없었으니까.
‘…개 치료는 해주나?’
게다가 소동물 치료비는 훨씬 비싸다던데. 세탁기에 수건을 왕창 넣은 찬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서랍장을 뒤졌다. 할머니가 약 같은 걸 모아 둔 통을 찾아 여니, 빨간 소독약이 보였다.
급한 대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사람에게 쓰는 것이긴 하나 개에게 써도 큰 상관은 없지 않을까. 찬은 대충 생각하면서 다시 창고로 향했다. 물기를 닦아 준 덕분인지 훨씬 상태가 안정된 듯했다. 체온을 뺏기지 않아서인가. 쌕쌕거리던 숨소리도 조금 작아졌다.
찬은 개의 배와 등을 더듬었다. 푹 젖어 있던 털이 마르면서 부풀기 시작해 상처들이 살짝 가려졌다. 미적지근하던 온도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괜찮은가.”
개의 상태를 어찌 안단 말인가. 계속해서 수의사에게 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우선 빨간 약을 열었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거의 들이붓는 수준으로 상처에 붉은 약을 발랐다. 주변 털이 검붉은 색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게다가 이걸 수의사한테 어떻게 데려가….’
가장 큰 문제는 읍내까지 이 개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였다. 리어카에 실어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운기를 운전해서 갈 수도 없었다. 경운기를 운전할 줄 모르니까.
‘…아, 그러고 보니 경운기는 어쩐다.’
할아버지가 끌고 다녔던 경운기는 여전히 뒷마당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할머니도 운전을 못 하셨고, 찬도 못 했다. 그 경운기는 그저 할머니의 추억거리였는데. 묻으면서 옆에 같이 묻을 걸 그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찬은 거의 비어 버린 약통을 흔들어 보곤 깊어 보이는 상처에 마저 부었다. 붕대라도 감아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붕대로 쓸 만한 천이 없었다.
그래도 몸이 말라가는 중이라 그런지 개의 숨소리가 상당히 편해졌다. 털 속을 만지면 차가운 몸 대신 따끈한 온도가 느껴졌다. 찬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담요를 꺼내 왔다.
‘개한테 별 걸 다 해 주네.’
진짜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찬이 커다란 몸을 담요로 꼼꼼하게 덮었다. 그대로 방에 돌아갈까 하다가 그냥 창고 벽에 기대앉았다. 밖에서는 계속 빗소리가 났다. 귀가 멀어 버릴 정도로 거친 물소리.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빗물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냥 멍하니 개를 보기만 했다. 뭔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찬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개와 씨름하는 동안 잊고 있던 허기가 뒤늦게 찾아왔다.
‘…배고프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데 움직일 힘은 어디서 났을까. 저 커다란 것을 질질 끌고 들어온 걸로도 모자라, 몸을 닦아 주고 상처도 나름대로 치료했다. 찬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온몸이 나른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친 개가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
‘…컵라면이랑. 담요를 가져오고. 또….’
머릿속으로 천천히 하나하나 물건을 떠올렸다. 더 이상 여러 번 오가는 건 질색이다. 찬은 눈을 꽉 감았다가 뜨곤, 기운 없는 다리에 힘을 줬다. 남은 담요를 챙기고, 컵라면이 든 비닐봉지와 물병을 챙긴 그는 다시 창고로 돌아왔다.
이제 할 건 다했다. 수의사에게 갈 것도 아니니 찬이 본다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개가 죽어 간다 해서 그가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찬은 다시 창고 구석에 앉았다.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컵라면을 북 뜯었다. 미지근한 물을 붓고 수프를 탔다. 거의 생라면을 와작 씹으면서 라면수프 푼 물을 마셨다.
밤이 깊어지면서 비는 더 거세게 내렸다. 귀가 아팠다.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면서 몸을 웅크렸다. 비 때문인지 전구가 두어 번 깜박였다. 꺼질 때마다 온 세상이 새까만 암흑으로 물들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있는 곳은 무사할까. 찬이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사실 할머니가 묻힌 이후로 그곳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전구가 깜박거렸다. 환상이 아니라는 듯, 새까만 어둠이 물러갈 때도 담요를 덮은 개는 눈앞에 놓여 있었다. 찬은 그냥 그것을 바라봤다. 흘러내리며 지붕을 때리는 거친 빗물 소리에도 개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피곤해.’
무릎 위에 뺨을 기댔다. 이렇게 움직인 게 얼마 만인지. 근육이 갑자기 힘을 몽땅 끌어 쓴 탓에 온몸이 노곤했다. 찬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깜박 정신을 잃었다.
* * *
찬은 몸을 좀 더 웅크렸다. 약간 추웠다. 꼼지락거리면서 이불을 끌어당기다가 늘 덮는 이불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담요?’
멍하니 눈을 떴다. 손으로 담요를 가볍게 쓸었다. 눈앞에 놓인 갈색 담요는 서랍장에 있던 것 중 하나다. 천천히 어제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쏟아지던 비. 반라의 남자. 다친 개. 찬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집?”
분명 어제 창고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집 안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살짝 먼지가 쌓인 할머니의 영정 사진. 다 녹아 흘러내린 초. 반쯤 말라붙은 물그릇과 구석에 쌓인 컵라면.
어제의 일이 환상 같은 것이었나 고민하면서 고개를 돌린 순간. 찬은 눈을 의심했다.
“…뭐지?”
헛것을 보고 있나. 천천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바짝 마른 얼굴이 만져졌다. 아플 정도로 눈을 비빈 후에 다시 그곳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찬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늘 그가 자던 이부자리에 개가 누워 있었다. 그것도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고. 이불이 모자랐는지 밑으로 쑥 나온 꼬리는 다 말라서 폭신폭신해 보였다. 느리게 꼬리가 살랑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개는 찬의 베개까지 야무지게 베고 누운 상태였다.
누가 보면 개가 이 집 주인인 줄 알 법한 작태였다.
“…….”
찬은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을 살폈다. 맨바닥, 담요 한 장. 이 차이는 뭐란 말인가. 누군가가 들어와서 자리를 정리해 줬다 해도, 사람인 그를 이부자리에 눕히는 게 맞지 않나. 찬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요 며칠 한 번도 씻지 않아 엉망이던 머리가 보송보송했다.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어제 집 앞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본 이후로 뭔가 일이 계속 이상하게 돌아갔다. 대문 앞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던 것부터가 괴상했다. 찬은 담요를 젖히고 할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보고 있었을 텐데 물을 수 없다는 게 슬펐다.
“…하아.”
그는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개에게 다가갔다. 슬쩍 이불을 들추니, 어제 발라둔 빨간 약이 말라붙은 곳이 보였다. 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은데.’
심해졌거나, 곪을 것 같으면 수의사에게 가 보려 했더니. 상처는 훨씬 좋아져 있었다. 경이로울 정도의 회복력이다. 찬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개의 회복력이 이렇게 빠른 건가. 그동안 할머니가 그랬듯 개를 그렇게 섬세하게 돌본 적이 없어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찬은 멍하니 그 자리에 누웠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어제 너무 격렬하게 움직인 탓인가. 그는 멍하니 개를 쳐다봤다. 꼭 감은 눈. 낮은 숨소리. 기이할 정도로 큰 것만 아니면 조금 귀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맨바닥에 누워 얼마나 있었을까. 배가 고파졌다. 보통 하루 정도는 무난하게 넘어갔는데, 어제 움직인 덕분이라 생각하면서 다시 컵라면을 하나 뜯었다. 또다시 미지근한 물을 부어 생라면과 수프 푼 물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개밥도 줘야 하는데.’
라면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가 개에 대해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냉장고 속에 있는 것들도 모조리 못 먹을 것들이고. 아마 밥솥의 밥은 상한지 오래됐을 터.
찬은 딱딱한 라면을 씹으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개에게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동네 노인들이 그러듯 대충 국에 밥을 말아 주려 해도 국도, 밥도 없다. 그는 라면 수프 푼 물을 마저 마시고 옆으로 대충 밀어냈다.
‘…또 슈퍼에 가 봐야 하나.’
거기 개 사료가 있었나.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읍내에 나가면 개 사료를 파는 곳이 있을 텐데. 거기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번뿐이다. 찬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쩌다 남의 식사. 그것도 짐승의 식사까지 신경 쓰고 있는 건지. 그래도 우선 집 안에 들였으니 무언가를 주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야생성 넘쳐 보이는 개가 그를 물어뜯을 것 같았으니까.
찬은 비척비척 일어섰다. 또 한 번 더 슈퍼에 가 볼 생각이었다. 만약 개 사료가 없으면 먹을 만한 거 아무거나 사 오면 되겠지. 대충 생각한 그는 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째서 저 개가 집 안에. 심지어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는지는 몰라도, 다시 창고에 갖다 놔야 했다. 할머니가 개는 집에 들이는 거 아니라고 했으니까.
‘…할머니 방은 괜찮겠지.’
거실에 누워 있는 걸 보면 찬이 자는 사이 별 달리 돌아다니진 않은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할머니 방은 그냥 잠가 버렸다. 들어갈 자신도 없고, 견딜 자신도 없었다.
찬은 무심코 방으로 돌아갔다. 담요를 꺼낼 때와 다른 점이 없었다. 여전히 쓰레기가 쌓여 있고, 도저히 머물 수 없는 상태 그대로였다. 어쩐지 약간 안심했다. 창고방도 열어 볼까 하다가 관뒀다. 거기 들어가려면 안의 물건을 꺼내야 할 텐데. 아무것도 꺼내져 있지 않으니 누군가 손대진 않았으리라.
그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냈다. 어쨌든 사료를 사 오기 전에 개를 다시 창고에 갖다 놓을 생각이었다. 만약 중간에 깬다고 해도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도록.
거실에는 할머니 영정 사진도 있으니까 더 조심스러웠다. 찬이 어제 했듯 개의 앞발을 들어 어깨에 얹었다.
“어?”
어제보다 훨씬 더 묵직했다. 심지어 어제는 며칠 굶은 상태가 아니었나. 그런데 오늘이 더 무겁다. 어제도 라면을 먹고 오늘도 먹었는데. 찬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힘껏 끌어내려고 했는데, 거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밑에 깔린 이불이 약간 따라오는가 싶더니 멈췄다.
“읏!”
찬이 있는 힘껏 다시 당겼다. 버거울 정도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깨를 파고드는 앞다리가 아팠다. 어제는 거뜬히 까진 아니어도 애써서 옮길 수 있었는데. 오늘은 옮기는 것조차 안 된다.
‘어제는 물에 푹 젖어 있기까지 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찬은 그냥 다시 얌전히 발을 놨다. 어제 너무 무리한 탓에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걸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어쨌든 안 되는 일에 더 이상 힘쓰고 싶지 않았다. 개가 집안에 들어오면 늘 할머니가 빗자루로 쫓아냈지만, 이젠 쫓아낼 사람이 없다. 그게 조금 슬퍼졌다. 찬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허둥지둥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반쯤 고여 있던 눈물이 조금씩 말라가는 게 느껴졌다. 어제 하늘의 모든 물이 땅에 내려오듯 죽죽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여전히 여기저기 고여 있는 웅덩이에는 밝은 아침 햇살이 반짝거리며 비쳤다.
‘…개 사료라….’
대충 아무거나 사면 되나. 어쨌든 개 사료나 사올 생각으로 집을 나오긴 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정말 개가 맞긴 한가. 찬이 멋대로 개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들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건 수의사가 봐야 알겠지만 읍내까지 저 무거운 걸 끌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고양이는 아니겠지?’
저렇게 생긴 고양이는 없을 테니까. 고양이에 대해 아주 잘 알진 못하지만 개처럼 생긴 고양이는 없겠지. 그런데 슈퍼에 고양이 사료만 팔면 어쩌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아무거나 사면 되지 않을까, 개 사료나 고양이 사료나. 찬은 조금 질척한 흙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늦은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었다. 시골의 아침은 새벽 일찍 시작되니까. 찬은 계속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슬리퍼가 물에 젖은 흙에 찰딱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 상당히 불쾌했다.
어제 슈퍼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에 비해, 오늘은 무척이나 빨리 도착했다. 여느 때와 같이 평상 위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찬이 아니냐!”
“…할머니.”
오늘은 친구들 없이 혼자 계신 모양이었다. 찬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찾아와서 그런지. 의외라는 기색이 가득했다.
“오늘은 뭐 사러 왔대?”
“…개… 개 사료 사려고요.”
개 사료가 있으려나. 그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디서 개가 생겼냐 물으면 어쩐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개? 개는 어디서 났대?”
“어…. 그게.”
주웠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자기 발로 들어왔다고 해야 하나. 찬이 어영부영 대답을 넘기려 했다. 할머니는 딱히 신경 쓰진 않는 듯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뭐 개라도 키우면서 정붙이고 살아야지. 그리고 찬이 너 자꾸 컵라면만 먹고 다니면 못쓴다. 네 할매가 얼마나 서럽겠어.”
“…….”
여전히 몇 가지 물건이 없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개 사료는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유통기한도 제법 넉넉했다.
‘…특이하네.’
컵라면 유통기한은 다 되어 가는데 개 사료는 유통기한이 넉넉하다니 이상했다. 안쪽에 딸린 방으로 쑥 들어갔던 할머니가 무언가를 손에 가득 들고 나왔다.
“자. 이거 가져가라.”
“이게 뭔데요?”
“반찬 좀 만들었다. 매번 올 때마다 컵라면만 찾고…….”
그 말과 함께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소리에 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다 죽을 생각이었는데 반찬까지 얻어먹어도 되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선뜻 받지 않고 있으니, 할머니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손을 붙잡아 반찬이 담긴 봉지를 쥐여 줬다.
“먹고 살아야지.”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더 할까. 찬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구석에 놓여 있던 개 사료를 집어 옆구리에 끼고 돈을 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할머니가 인상을 쓰면서 또 혀를 찼다.
“사람 새끼는 컵라면만 먹으면서. 개새끼는 사료를 사줘? 찬이 너. 컵라면보다 사료가 비싼 건 아냐.”
“…그래요?”
그런가. 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계산해 보지 않아서 그런 줄 몰랐다. 보통 이 정도 사료면 얼마 동안 먹을 수 있는지 모르니까.
“그냥 남은 음식 주면 될 걸.”
핀잔을 주는 목소리에 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쯧쯧 혀를 찬 할머니는 거스름돈을 주다 말고 허리를 숙였다.
“있어 봐라.”
“…….”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면서 꺼낸 그녀가 작은 봉지에 담긴 걸 불쑥 내밀었다.
“뭐예요?”
“개새끼 간식.”
“…….”
대체 왜 간식을 주신단 말인가. 찬이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할머니가 그걸 반찬 봉지에 꾹꾹 밀어 넣었다.
“하여간 개새끼들. 이걸 엄청 좋아한다니까. 그래서 숨겨 놓고 하나씩 주잖아. 찬이 너도 이거 주면 개가 엄청 좋아할 거다.”
개를 싫어하시는 게 아니었나. 약간 혼란스러웠다. 찬은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아 있던 개 사료를 떠올렸다. 의외로 개를 좋아하시는 걸 수도. 그런데 말마다 개새끼 개새끼라니.
‘하긴…. 개 사료를 슈퍼에 파는 것부터가….’
사람이 먹는 컵라면이나 과자는 유통기한이 지나는 것도 모르면서. 개 사료는 먼지도 쌓이지 않은 새것이었다. 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네가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할매 죽은 후로 네가 할매 따라가지 않을지 걱정했지 뭐냐.”
“…하하.”
그런 생각을 실제로 했다고 말하면 앉아서 끝없는 설교라도 들어야 할 분위기다. 찬은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개새끼 키우면 저거 봐서라도 내가 어찌 죽나 생각하게 돼. 잘했어.”
“…….”
“산책도 다녀. 예전처럼 방에 콕 처박혀 있지 말고. 소식 전해 줄 할매도 없으니 다들 걱정한다.”
“…네.”
그래도 집까지 찾아오는 이는 없다. 그게 조금 우스웠다. 할머니가 계셨으면 다들 벌써 몇 번씩은 오갔을 텐데. 찬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 볼게요.”
더 있으면 또 별 얘기를 다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 잘 가고. 반찬 떨어지면 말해라. 할매도 없고 널 누가 챙기니.”
“…….”
대답 대신 그냥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슈퍼 할머니가 다시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찬은 느긋하게 다시 길을 돌아갔다. 한쪽에는 개 사료, 한쪽에는 사람 사료. 양팔이 묵직했다.
‘…개랑 친해지라니.’
간식을 끼워 주면서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 개랑 친해질 수 있을까. 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덩치를 생각하면 이런 개 사료로는 일주일도 못 버티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키울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찬 역시 키운다기 보다는 그냥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었는데. 자꾸만 미끄러지는 사료 봉지를 다시 추슬러 옆구리에 꼈다.
여전히 그 개가 있을까. 찬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신경이 쓰여 문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손끝에 쿡 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개 생각만 하네.’
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할머니 생각에 묻혀 있을 땐 언제고, 이젠 개 생각만 한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문제였다. 하나에 빠지면 별다른 생각을 잘 못 한다는 것.
대문을 발로 슥 밀고 들어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집은 그대로라는 점이 불쾌했다. 다 망해 버리면 좋을 텐데. 찬의 옆구리에서 사료가 툭 떨어졌다.
“…하아.”
피곤했다. 발끝으로 포대를 슥 밀면서 집으로 다가가니 열린 문틈으로 여전히 누워 있는 개가 보였다. 이상하다. 꼭 찬이 아니라 개가 주인인 것 같았다. 무심코 조금 더 고개를 내민 그가 얼어붙었다.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사람을 적으로 인식하는 맹수의 눈이 그렇지 않을까. 찬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물까? 일어나면 어쩌지? 나갈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뒤집어 놨다. 바짝 긴장한 찬의 행동과는 달리 개는 별달리 신경도 안 쓰는 듯 시선을 홱 돌려 버렸다.
슬리퍼를 벗고 슬그머니 거실로 들어갔다. 컵라면을 대충 옆에 던져 둔 찬은 사료 포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 뜯어 주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배가 부르면 사람을 물어뜯을 생각까진 안 할 테니까. 찬은 대충 컵라면 컵에 담아 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부엌에서 꽤 깊은 그릇을 꺼내 와 수북하게 사료를 담았다.
약간 미묘한 냄새가 났다. 개가 원래 이런 걸 먹나. 찬이 살며시 개의 머리맡에 그릇을 놔 줬다. 꼭 감겨 있던 눈이 뜨였다. 꼬리라도 흔들 줄 알았는데. 이불 밖으로 비죽 나온 털 뭉치는 잠잠했다.
“…먹어.”
먹으라는 말을 알긴 하나. 찬은 먹는 흉내를 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그릇을 슬쩍 더 밀어 줬다. 분명 냄새라도 맡으리라 생각했는데. 흥미가 없는 건지 아니면 배가 고프지 않은 건지.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찬을 힐끔 보곤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배고프면 먹겠지.’
그는 더 깊이 생각하는 걸 관두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스럭거리면서 컵라면을 뜯기 시작하자 개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 걸로도 부족한지.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찬은 새까만 눈을 마주하곤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컵라면은 안 되지 않나?”
스스로의 말에 자신은 없었다. 중얼거린 찬은 미적지근한 물을 붓고, 할머니가 챙겨 준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조금 더 흥미가 생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개가 성큼 다가왔다. 장판 위에 발톱이 닿는 소리가 들렸다.
제 발로 서 있으니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찬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송아지보다 클지도.’
지금 보니 털도 잿빛이었다. 회색 개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다가와서 반찬통을 쳐다보기만 했다. 찬이 그것을 들이밀자 냄새를 맡는 대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흥 하는 콧방귀 소리를 냈다. 기가 막혔다. 사람 음식에 관심을 가지는 걸로도 모자라 콧방귀를 뀌는 개라니. 그동안 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았던 걸까, 아니면 이 개가 유난히 사람 같은 걸까.
거대한 몸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부자리 위에 자리를 잡고 누운 개는 제법 익숙한 솜씨로 이불을 물어 자기 몸에 덮었다.
“…….”
찬은 다시 드러누운 개의 뒤통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라면을 으득으득 씹었다. 어쨌든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으니. 새 이불을 꺼내야 했다. 또 바닥에 누울 수는 없으니까.
이불과 요가 남은 게 있던가. 멍하니 생각하던 찬은 그냥 담요를 질질 끌어왔다. 대충 허기를 때운 그는 그 자리에 다시 웅크리고 누웠다.
* * *
정말 개의 회복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사료가 담긴 그릇은 혀 한 번 댄 흔적도 없었다. 찬은 비닐봉지에서 컵라면을 또 꺼내다 간식을 발견했다.
‘친해져 봐.’
그는 잠시 고민하다 봉지를 뜯었다. 처음에는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흥미를 가지더니. 이젠 그냥 무시했다. 찬이 엉금엉금 기어가서 개의 코앞에 간식을 들이밀었다. 또다시 까만 눈이 번뜩 뜨였다. 처음 봤을 땐 조금 무서웠는데. 이제 두렵지는 않았다.
“…….”
먹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개는 낮은 한숨을 쉬듯 그르렁거렸다. 찬은 간식을 주는 걸 포기하고 봉지를 마저 뜯어 사료 위에 살짝 올려놨다. 산처럼 쌓아 둔 알갱이들이 넘쳐흐르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찬은 다시 엉금엉금 기어가 그의 자리에 앉았다. 상처는 어느새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이틀 정도 있으면 완벽하게 아물지 않을까. 그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어차피 사료도 안 먹으니까 그냥 나가겠지.’
아무리 회복력이 좋은 개라고 해도 뭔가 먹긴 먹어야 하지 않는가. 영영 이 집에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찬은 이부자리 위에 누운 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슈퍼 할머니가 개라도 있으면 좀 낫다고 하던 걸 떠올렸다. 비록 그가 주는 밥에는 손도 안 대고, 시선을 맞추는 일도 극히 드물었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집과는 달랐다.
‘…할머니.’
찬은 여전히 할머니를 생각했다. 방안에 콕 틀어박혀서도 다른 기척을 쫓았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냄새. 거실에서 놀러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던 소리. 마당에서 무언가를 하는 기척.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개의 숨소리가 낮게 들렸다. 찬은 얼핏 다시 잠에 빠졌다.
* * *
예상과는 달리 개는 다 나은 것 같은데도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군데군데 붉은 소독약 자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상처 자체는 다 나은 듯했다. 찬은 점점 더 개와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냥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같이 살고 있었다. 정확히 같이 산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찬은 결국 사료를 밖에 내놨다. 대문 밖에 내놓으니 동네 개들이 오며 가며 먹는 건지. 아니면 다른 동네 사람들이 한 그릇씩 퍼가서 집 개들에게 주는 건지. 하루하루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것도 안 먹일 수는 없었다. 라면을 주는 건 정말 양심상 안 될 일이었으니. 뭘 줘야 하나 고민하다 돈을 털어 생고기를 좀 사다 줬다. 그러니 그건 좀 먹긴 했다. 물론, 찬 나름대로는 상당한 돈을 써서 사 온 거지만 개에게는 한 입 거리에 불과했다.
‘…돈도 찾아야 하는데.’
은행이 너무 멀다. 읍내에 나가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자전거라도 타고 가면 되겠지만 찬은 자전거를 못 탔다. 걸어서는 갈 자신이 없고, 사실은 버스 시간표도 몰랐다.
‘나갈 일이 있었어야 알지….’
할머니의 다정한 보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매일같이 깨닫는 중이었다. 찬은 서랍을 열어 돈을 세어 보았다. 컵라면을 사다 먹는다면 한 달도 너끈히 버틸 돈이었지만, 또 개에게 고기를 넉넉히 사다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음.”
어쩌지. 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라면을 하나 더 뜯었다. 약간 잘게 부숴서 그릇에 담아 뒀더니 이번에는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뭘 갖다 줘도 본 척도 안 하더니. 앞발로 그릇을 저 멀리 밀어냈다.
싫은 건가.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잘게 부순 라면을 집어 먹었다.
‘은행을 다녀와야 하나.’
찬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먹고, 또 깜박 잠들었다. 새 이불을 꺼내는 걸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아직도 그는 담요 신세였다. 대충 웅크린 채 잠든 지 얼마나 됐을까. 무언가가 얼굴을 간질였다. 찬이 고개를 흔들다가 손에 잡히는 털의 감촉에 멍하니 눈을 떴다.
개의 꼬리가 그의 얼굴을 간질이는 중이었다.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가질 않아 눈을 굴리다 손으로 털을 콱 붙잡았다. 그 순간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꼬리가 거칠게 움직였다. 위협하듯 그의 가슴께를 앞발로 지그시 누르는 감각이 오싹했다.
“…….”
한밤중인지 옅은 달빛 속에서. 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찬은 검은 것이 묻은 입가를 눈으로 더듬었다. 뒤늦게 비릿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피.’
어디서 무언가를 잡아먹기라도 했나. 활짝 열려 있는 문을 힐끔 쳐다봤다. 마당은 여전히 고요했다. 숨을 쉴 때마다 피 냄새가 얼굴 위로 퍼져 나갔다. 개는 새까만 눈으로 찬을 꾹 누르곤,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다.
이 모든 것이 꿈인 듯 느껴졌다. 자유롭게 문을 열고 나돌아 다니는 개. 풍겨 오는 피 냄새. 찬은 가슴께를 툭툭 털어냈다. 흙과 나뭇잎 같은 게 떨어졌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 눈을 뜬 찬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낙엽과 흙 알갱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시선을 내려 가슴께를 바라보니, 커다란 개 발자국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찬은 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커다란 몸을 힐끔 쳐다보곤 가슴께를 문질렀다.
‘…이상한 냄새.’
어제 피 냄새를 의식해서 그런가. 괴상한 냄새가 났다.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은 그가 창문을 열었다. 바깥의 냄새가 훅 들어왔다. 깨끗한 시골 공기에 묵어가던 냄새가 섞이며 흩어졌다. 찬은 발바닥을 자꾸 쿡쿡 찌르는 무언가를 잡아 들었다.
“와…”
개털. 이제야 집 안 꼴을 의식하니 온통 개털로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뭉쳐 굴러다니는 회색빛 덩어리. 찬의 옷에도 온통 털이 가득 붙어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을 때는 못 느꼈는데, 움직이니까 옷에 박힌 뻣뻣한 털이 따끔따끔 피부를 찔러 왔다.
“따가워…….”
눈에 보이는 털 몇 개를 떼어 내다가 그냥 옷을 훌렁 벗어 버렸다. 피부에도 가느다란 속 털 같은 게 온통 붙어 있었다.
찬은 한숨을 쉬곤 담요를 들었다. 온통 회색 털. 털. 원래 개가 이렇게 털이 많이 빠지나. 그는 굴러다니는 털 뭉치를 몇 개 줍다가 아예 빗자루를 꺼냈다.
청소할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데. 개 덕분에 엉겁결에 청소도 다 한다. 털이 날리지 않게 조심조심 바닥을 쓰는 동안 개는 눈을 뜨고 찬을 힐끔 본 뒤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분명 그의 이부자리는 털로 엉망이리라. 하지만 당장 자기가 누울 곳이 아니니 그냥 뒀다.
청소를 하고 환기까지 시키고 나니 개 냄새가 덜 나는 기분이었다. 물론 난다고 해도 익숙해져서 잘 못 느끼겠지만. 찬은 빗자루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창문을 닫자마자 다시 열어야 했다.
“하아…….”
그동안 잊고 있었다. 코가 마비된 탓인지. 반쯤 마르고 반쯤 썩은 나물과 밥이 문을 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괴로운 냄새를 풍겨 댔다. 찬은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것들을 모조리 봉지에 담아 바깥에 내놨다. 텅 비어 버린 냉장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보온이 꺼진 밥솥. 사라진 파리.
찬은 멍하니 거실을 둘러봤다. 부엌과 겸한 거실은 언제나 할머니가 말끔하게 정리하는 곳이었는데. 그동안 엉망진창으로 놔 뒀던 게 조금 죄송했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 옆에 눌어붙어 있는 촛농도 손톱으로 긁어냈다.
찬은 멍하니 영정 사진을 쳐다봤다.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진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리가. 그는 쓴웃음을 짓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의 아니게 청소도 하고 움직였더니 땀범벅이었다.
‘…개 덕분에 또 샤워를 하네.’
개털도 씻어내야 했다. 이대로 옷을 입었다간 또 따끔거려서 일어나게 될 것 같았다. 찬은 샤워까지 마치곤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세탁기도 마저 돌렸다.
빗물을 닦아 냈던 수건이 쌓여 있던 세탁기에서는 괴상한 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를 왕창 쏟아 부은 찬은 버튼을 꾹 누르곤 멍하니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또 배가 고팠다. 역시 사람이 움직이면 어쩔 수 없이 배가 고파지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게 며칠 전인데. 이젠 불쾌하다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했다. 찬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웃음소리가 흘렀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살아가는 걸까. 그는 방으로 돌아가서 봉지를 들었다. 가벼운 비닐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거의 비워진 반찬통을 물끄러미 쳐다본 찬은 결국 물을 틀어 설거지까지 했다.
그가 느리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개는 그저 누워 있었다. 찬의 움직임을 좇듯 힐끔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소리를 듣는 듯 귀를 쫑긋 움직이고 꼬리로 바닥을 몇 번 툭툭 두드린 게 전부였다.
기묘한 동거였다. 찬은 이제 그의 이부자리를 차지한 개가 없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분명 허전하겠지.’
저렇게 큰데. 그는 눈을 감았으나 잠들진 않은 듯 꼬리를 탁탁 움직이는 개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찬이 저것을 ‘키운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함께 살고 있었다. 하우스 메이트라고 해야 하나. 기묘했다.
그는 설거지까지 마친 반찬통을 챙겨 들고 슬리퍼를 신었다. 집을 청소하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한다 해도 밥까지 해 먹을 의욕은 생기지 않았다. 찬은 그대로 또 슈퍼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 앉아 있던 슈퍼 할머니가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이고. 설거지까지 했어?”
“잘 먹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찬은 여느 때처럼 컵라면을 담았다. 그가 계속 사 먹어서 그런지. 거의 다 사라져 가던 컵라면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이번엔 유통기한이 무척이나 넉넉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어제 피 냄새가 났지.’
대체 어디서 뭘 먹는 걸까. 찬은 할머니를 힐끔 살폈다. 소나 돼지를 먹는 걸까.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컵라면을 계산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요즘 별일 없으시죠?”
“별일? 뭐 별일이 있나. 아무 일 없지.”
축사 같은 곳에서 짐승이 죽었다면 말했을 텐데. 아무 말도 없었다. 찬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과 흙을 떠올렸다.
‘뒷산에 가는 걸까.’
거기도 동물이 살고 있으니 제법 그럴듯했다. 뭘 먹는지까지는 궁금하지도, 궁금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컵라면 봉지를 달랑거리면서 돌아온 찬은 여전히 그대로 누워 있는 개를 빤히 쳐다봤다.
‘알아서 먹고 다니면 좋은 거지, 뭘.’
그러면 앞으로 생고기는 안 사도 되나. 찬은 이제 익숙해져 버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가 원해서 개를 키우는 것도 아니니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근처 농가에 피해가 발생한 것도 아니니 더 신경 쓸 것도 없다.
굳이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 있는 개가 뒷산 동물을 잡아먹는 것 같다 말할 이유도 없고. 찬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다시 컵라면을 하나 뜯었다. 개도 알아서 살고 있으니, 찬도 알아서 살면 될 일이었다.
* * *
정말 개는 나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밤이 되면 가끔 나갔다 오는 소리를 잠결에 들을 수 있었다. 찬은 굳이 눈을 떠서 확인하지 않았다. 털은 여전히 풀풀 날려서 청소를 해야 했고, 짐승의 미묘한 비린내에 환기도 자주 시켰다. 청소를 하다 보니 피곤하고 땀이 나는데다가, 털이 피부에 달라붙어 샤워도 해야 했다. 어쨌든 옷은 입고 살아야 하니 세탁기도 돌렸고. 청소하는 김에 쓰레기도 가끔 내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우울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사람 꼴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는데. 개가 들어온 이후로 엉겁결에나마 씻고 청소를 하게 되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슈퍼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면 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한 말일까.
요 근래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우울감이 조금 가신 것도 사실이었다. 할머니가 움직이라고 엉덩이를 팡팡 때려 대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이제 와서….’
그걸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드르륵 하면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개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그는 휴대폰 화면에 뜬 글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호.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찬은 느긋하게 메시지를 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답장하지 않은 메시지들이 뒤로 죽 이어졌다.
[야. 이제 슬슬 답장 좀 하지 그래? 살아 있긴 하냐?]
찬은 자판을 꾹꾹 눌렀다.
[응. 답이 늦었네.]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나마 정호가 그의 상황을 이해해 줘서 다행이다. 찬이 답장을 보내고 나서 잠시 기다리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이제야 전화 받네. 그동안 죽은 줄 알았잖아.]
짜증스러운 목소리 속에 안심한 기색이 가득했다. 찬은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살아 있어.”
[목소리는 다 죽어 가는데? 그래서 요즘 뭐 하고 지내?]
“…그냥. 뭐.”
하는 게 없는데 뭘 하고 지낸다고 해야 할까. 얼버무리듯이 대답하자 정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어?]
“…….”
[할머니도 안 계신데. 네가 움직여야지. 별수 없잖아. 좀 나가기도 하고. 집에 혼자 있으면 자꾸 더 우울해진다.]
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개를 힐끔 쳐다봤다. 걱정 가득한 소리를 쏟아내는 정호가 개 얘기를 들으면 조금 안심할까. 줄줄 흘러나오는 소리를 뚝 끊어 냈다.
“정호야, 내가.”
그 작은 소리에 정호가 말을 멈췄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기다려 주는 게 고마웠다. 찬이 개를 다시 힐끔 쳐다봤다.
“개…를 주웠어.”
[뭐? 개?]
“응.”
[개 키우는 거 좋지! 네가 뭔가를 키우겠다고 하니까 오히려 다행이다. 아주 좋아. 좋은 발전이야. 산책도 좀 다니고 그래! 개는 산책을 시켜 줘야 돼.]
알아서 잘 나다니는 것 같은데. 그는 굳이 친구의 말에 반박하진 않았다. 그냥 응, 응 하면서 듣고 있으니 정호는 계속해서 잘 생각했다며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다. 개를 키우는 게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나. 찬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너 또 고개만 끄덕이고 있지?]
“아… 응.”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다. 개도 키우고. 강아지 사진이나 좀 찍어 보내 봐! 얼마나 귀엽나 보게.]
“…음.”
[또 전화할게. 잘 지내라.]
전화가 뚝 끊겼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개를 빤히 쳐다봤다. 사진을 찍어도 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만약 사진이 다른 곳에 퍼지기라도 하면 동물보호단체 같은 곳에서 포획하러 오지 않을까. 이렇게 커다란 개라니.
망설이던 찬이 슬그머니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갑자기 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낸 모습이 제법 위협적이었다.
“…….”
찬은 그냥 다시 손을 내렸다. 아무래도 사진 찍는 게 싫은 모양이었으니까. 꼭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휴대폰을 다시 닫곤 얌전히 내려놨다. 그제야 개가 그르렁거리던 걸 멈추고 다시 누웠다.
* * *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하루가 가는 것이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했다. 느릿느릿 집안일을 하고. 대충 라면을 부숴 먹고 나면 하루가 지나갔다. 밤이 되면 개는 또 어디론가 나갔다 오는 듯했다. 기묘한 동거가 이어졌다. 찬은 이제 바닥에서 담요를 덮고 자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옆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찬이 잠에서 깼다. 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누가 봐도 들썩이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거칠게 아래위로 흔들리는 몸. 잇새로 쌕쌕 소리를 내면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 털에 뒤덮여 있어도 아프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찬이 슬그머니 다가갔다. 동거라고 하기도 애매한 관계였지만 아픈데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주둥이에서 나오는 숨소리가 뜨끈했다. 불이 붙는 듯 뜨거운 숨결에 찬이 놀라 손을 뻗자마자 개의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짜증이 난 듯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저절로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만지지 말라는 확실한 거부에 찬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마당까지 나갔다가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왜…….’
집의 주인은 찬인데. 어째서 그가 도망치듯 나와야 하는 걸까. 의아함과 함께 짜증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집 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다시 들어갔다. 개가 고개를 들어 찬을 보더니 다시 이를 드러냈다.
피해 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지만 그는 꾸역꾸역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도 이곳에 있고, 여긴 찬의 집이었으니까. 낮은 울음소리가 집안 바닥을 기어 다녔다. 억지로 앉아 있긴 했으나, 약간 두렵긴 했다. 언제나 가만히 누워 있던 개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힌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피할 곳도 없고.’
찬이 몸을 웅크렸다. 개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우스웠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그의 집인데. 영문 모를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찬이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어쨌든 잠들고 나면 개가 나갔다 오든 할 테니. 그냥 자 버리는 게 마음 편하리라.
그는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몸이 아팠다. 딱딱한 바닥에 짓눌리는 뼈 부분이 욱신거렸다. 게다가 숨이 턱 막혀 오는데다가 거칠게 흔들리기까지.
“으…….”
찬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쉽게 뜨이지 않는 눈을 겨우 들어 올리니. 엄청난 덩치의 남자가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사람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찬은 멍하니 어둠 속을 쳐다봤다. 흐린 빛 속에서 그는 더욱 위협적이었다. 강도. 도둑. 온갖 단어들이 뒤늦게 머릿속을 두들겨 깨웠다. 멍한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거칠게 틀어쥔 멱살 때문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누구… 헉……….”
비쩍 마른 팔로 밀어내려던 순간. 엄청난 고통이 아래쪽에 느껴졌다. 절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곳에. 찬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숨을 멈췄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과거 중세시대에 꼬챙이로 사람을 꿰어 죽였다는 게 뭔지 깨달았다.
“아……….”
고통에 정신이 흐려졌다. 무언가가 질척하게 엉덩이를 적시기 시작하면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마치 그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현실? 꿈?’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건 아닐까. 찬은 멍하니 남자를 쳐다봤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고통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손이 찬을 바닥에 그대로 던져 버리곤, 찬의 몸을 짓눌렀다.
“읏… 윽!”
어디가 더 아픈지 구분할 수 없었다. 찬이 뒤늦게 손을 휘둘렀다. 주먹에 남자의 머리가 닿았다. 타격이 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의 새까만 눈이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남자가 불쾌한 듯 목을 울렸다. 사람의 말이라기 보단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찬은 뒷목이 서늘해졌다. 두려움이 치밀었다.
“흐윽!”
남자가 허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목 끝까지 꽉 막히는 느낌에 찬이 허덕이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에 비하면 거의 이쑤시개 수준인 팔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헉… 윽…. 놔…….”
퍽 퍽 소리를 내면서 박힐 때마다 몸속의 모든 공기가 빠져나갔다. 찬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남자의 행동에 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미친… 새… 흐윽!”
찬이 미친 듯이 온몸을 휘둘렀다. 그의 발악 아닌 발악에 남자가 귀찮다는 얼굴로 구멍에서 쑥 빠져나왔다.
“흐억…….”
이상한 느낌에서 벗어날 새도 없이 찬이 허둥지둥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일어서려고 몸을 반쯤 일으킨 순간. 남자가 찬을 그대로 뒤집더니 등을 짓눌렀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찬은 엉덩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는 자지의 감촉에 사색이 되어 힘껏 버둥거렸다.
“안 돼… 미쳤어. 미친 짓이야. 제발…….”
엉덩이에 닿는 무게감. 감촉만으로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크기를 가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뒷구멍이 찢어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그런 것에 쑤셔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게다가 그는 남자이기까지 한데.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였다. 아무래도 커다란 자지 끝이 머릿속까지 뭉개 버린 모양이었다.
“그만… 제발… 아악!”
눈물이 뚝뚝 흘렀다. 살면서 강간당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심지어 남자에게. 거대한 크기에 맞춰 한껏 늘어나 있던 구멍이 쓰린 고통과 함께 오물오물 좁아 들고 있었다. 다시 뭉툭한 귀두가 찢어진 부분을 벌리면서 들어왔다.
“흐윽… 아파! 아프다고……. 아윽!”
생살을 잡아 찢는 게 이런 감각인가. 찬은 새하얗게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 턱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등 한가운데를 누른 손은 어찌나 크고 힘이 센지. 찬의 뒷구멍으로 드나드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헉…….”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곤충 표본이라도 된 듯 바닥에 못 박힌 찬의 몸에 자지가 처박힐 때마다 저절로 허리가 들렸다. 아래쪽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바닥을 몇 번이고 박박 긁다가 포기했다.
“흐윽… 읏… 윽…….”
그냥 아팠다. 더 비참한 건 뒷구멍을 파고드는 감각에 그의 자지에서도 정액이 줄줄 흘러내린다는 점이었다. 흥분 따윈 느끼지도 못했는데, 안쪽을 쿡쿡 찌를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정액을 토해 냈다. 찬이 바닥에 뺨을 댔다. 눈물로 범벅된 바닥이 질척거렸다. 쾌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아파……. 우욱…….”
토기가 치밀었다. 아래쪽에서부터 모든 내장을 목 위로 밀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찬이 헛구역질을 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구멍에 자지를 처박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찢어진 구멍이 쓰리다 못해 얼얼해졌다. 비릿한 피 냄새에 정액의 풋내가 뒤섞였다.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자 남자가 있는 힘껏 짓누르던 등에서 손을 떼어 냈다. 숨 쉬는 게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이미 허리 아래쪽은 마치 찬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강간당하는 체험이라도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멍하니 눈을 떴다.
“…하. 윽…….”
숨이 턱 턱 막혀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찬이 무심코 앞을 보다가 이부자리에 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 그곳에 사람인 양 누워 있었는데. 그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앞뒤로 거칠게 흔들리는 시야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흐윽…….”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남자가 등에 바짝 붙어오는 게 느껴졌다. 단단한 근육이 바짝 마른 등에 고스란히 맞붙었다. 찬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어깨 부근에 흩어졌다.
개가 내뱉던 것처럼 불이라도 삼킨 듯 뜨거운 숨결에 찬이 어깨를 움츠렸다.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천 위에 닿는가 싶더니. 그대로 어깨를 꽉 깨물었다.
“악!”
찬이 비명을 질렀다. 뒷구멍이 찢어지는 고통에 익숙해졌나 싶었더니. 이번엔 어깨를 물어뜯으려 했다. 오싹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뒷머리가 쭈뼛 선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반사적으로 온몸이 움츠러들자 남자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흐윽……. 그만…….”
공포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미 그는 신경도 안 썼지만, 찬은 의미 없는 애원을 계속했다. 아니. 살기 위해서 중얼거렸다. 어깨를 꽉 깨물었던 남자가 피가 배어 나온 찬의 피부를 천천히 혀로 핥았다. 축축한 혀. 비릿한 피 냄새. 정액의 풋내. 질척한 땀 냄새. 짐승의 냄새. 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짐승. 개는 어디로 간 걸까. 그는 멍하니 비어 있는 이부자리를 보다 비가 오던 날을 떠올렸다. 쓰러져 있던 남자. 쓰러져 있던 개. 찬은 멍하니 그 두 상황을 번갈아 생각하다.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설마 지금 이 남자가 그 남자인가. 개인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뇌까지 모조리 뒤흔들 만한 충격이었다. 찬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남자가 위협이라도 하듯 그의 눈앞에 손을 짚었다. 비쩍 마른 찬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굵은 팔뚝은 근육질이었고, 발톱까지 달려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보다 눈을 크게 떴다.
‘발톱……?’
환상이 뒤섞이듯 그의 손이 짐승의 것으로 변했다가,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손가락이 보였다가 날카로운 발톱이 길게 돋아나기도 했다. 근육질의 팔에 회색빛 털이 돋아나다가, 금세 매끄러운 피부로 변했다.
이게 악몽이라면 정말 엉망이었다. 앞에 있는 게 짐승인지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꿈이라니. 찬이 멍하니 손을 뻗어 남자의 팔을 만졌다.
“…읏.”
손끝이 피부에 닿은 순간 남자가 있는 힘껏 자지를 쑤셔 박았다. 찬은 하얗게 불이 튀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절정에 가까워지기라도 했는지.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친 동작들이 이어졌다. 얼얼해져 있던 구멍이 더욱 빠듯하게 벌어지다 조금 더 찢어진 듯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 윽…….”
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칠게 떠밀리는 몸을 지탱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반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짐승의 감촉이 조금 익숙했다. 거칠고 뻣뻣한 회색 털. 그것은 제대로 만져 보기도 전에 매끈한 피부와 그 아래에 있는 단단한 근육으로 변했다.
이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지만 정말 꿈일 리 없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아픈데도 계속 잠을 잘 수는 없으니까. 쑥 빠져나가는 감각에 찬이 부르르 떨었다. 굵은 기둥이 구멍을 벌리는 것 보다, 귀두의 넓은 부분이 생살을 찢어 내는 게 더 아팠다.
“흐윽…….”
벌어진 구멍이 닫히기도 전에 재차 뒷구멍을 넓히는 감각에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빡빡하게 조여 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귀두로 더 크게 구멍을 늘린 그가 만족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다시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짐승 소리.’
남자의 얼굴이 어떤지 몰라도. 그의 울음소리는 분명 짐승의 것이었다. 아주 가끔 들을 수 있던 개의 울음소리와 똑같다. 찬은 그가 온몸을 짓누르고 들어올 때면 거의 기계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릿속까지 모두 뭉개 버리겠다는 듯 끝도 없이 들어오는 그의 자지가 정말 심장까지 닿은 기분이었다.
‘…역시 모른 척했어야 했어.’
찬은 미끈거리는 바닥 위에서 흔들리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과 얽혔다. 그 때문에 강간도 당하고. 이상한 일에 잘못 걸려든 게 분명했다.
“아윽……!”
찬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남자의 손이 턱을 바짝 들어 올렸다. 그는 본의 아니게 새까맣고 번들거리는 눈을 마주해야 했다. 한계까지 젖혀진 목이 아프고, 허리가 밀려서 그대로 척추가 부러질 것 같았다.
찬은 새까만 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단정한 얼굴은 짐승의 것으로 변했다가, 인간의 것이 되었다. 목울대를 긁고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는 인간이 내기엔 너무 야생적인 소리였다.
“…아파.”
찬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말로 해서 통할 상대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지닐 이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 얼굴에 그냥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읏. 으…….”
남자가 찬의 엉덩이를 뭉개 버릴 정도로 강하게 허리를 밀어붙였다. 전에 없이 깊이 들어오는 느낌에 찬이 허덕이면서 길게 신음했다.
‘끝인가…….’
안도했다. 커다란 자지가 움찔거리면서 정액을 짜내고 있는 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찬의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바닥에 거칠게 머리를 부딪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해방. 찬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한 순간부터. 구멍 안쪽으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뭐, 뭐 하는……. 아윽! 악!”
버둥거리면서 벗어나려고 하자 온몸의 내장이 끌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찢어져 피가 흐르는 살이 더욱 빠듯하게 벌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찬은 숨을 멈췄다. 의식이 날아가는 걸 잡을 수조차 없었다.
* * *
춥다. 조금 추웠다. 찬이 부르르 떨면서 바닥을 더듬다가 아무것도 찾지 못해 그냥 몸을 웅크렸다. 천의 감촉이 아니라 맨살이 느껴졌다. 뼈가 모두 조각조각 흩어지는 듯 아팠다.
“읏…….”
찬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슬며시 떴다.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그리고 무언가가 말라붙은 듯 파삭거리는 기분.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른 찬이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뒤늦게 밤의 일이 떠올랐다. 몸을 세로로 쪼개는 것만 같은 고통. 피와 정액 냄새. 짐승. 물어뜯긴 어깨.
멍하니 손을 들어 어깨를 더듬었다. 상처를 만진 듯 쓰리고 아팠다. 몸을 더듬자 말라붙은 것들이 파스스 부서졌다. 찬은 눈을 굴려 아래를 쳐다봤다. 추워서인지 유일하게 입고 있던 티셔츠에 몸을 구겨 넣은 채였다. 천천히 몸을 펴자 검붉은 색과 허연색으로 말라붙은 것들이 보였다. 그게 뭔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자지 위에도 허연 정액이 말라붙어 음모까지 하나로 뭉쳐 있었다. 찬은 핏자국이 배어 나온 어깨를 더듬다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엉덩이를 더듬었다. 뒷구멍이 어떤 상태인지 만져보는 것도 두려웠다.
“읏…….”
찬은 엉덩이에 느껴지는 말라붙은 것들을 손톱으로 살짝 긁어냈다. 핏덩어리였다. 손바닥에 가득 묻어 나온 검붉은 가루들을 보고 있으니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는 더 손을 내려 더듬어 보는 대신. 방을 둘러봤다. 어제의 그 남자가 개였으면 이미 도망쳤을까.
‘아니. 도망이 아니라 그냥 나간 거겠지.’
강간해서 도주했다고 보기에 그 남자는. 그 개는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며칠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뿐인데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마치 짐승들이 맹수를 알아보는 것처럼.
찬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겨우 상체를 지탱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부자리는 누워있다 나간 듯 걷어 낸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없어…….’
작은 거실은 숨을 곳조차 없었다. 찬이 약간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슬쩍 곁눈질을 했지만 눈 닿는 곳에 남자와 개 둘 다 보이지 않았다.
“…하.”
떠난 걸까. 한숨을 토해 낸 찬이 웅크리면서 덜덜 떨리는 다리를 겨우 추슬렀을 때. 바깥 마루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덩치. 웃옷을 걸치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등에는 근육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찬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널찍한 어깨에 제 집인 양 느긋하게 뒤로 살짝 젖힌 자세까지.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혼란스러웠다. 떠날 줄 알았다. 어쨌든 그를 강간한 사람이 아닌가. 아니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란 소리인가.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남자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찬은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냥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면서 아래위로 그를 살폈다. 허옇고 벌건 것들이 말라붙은 몸. 어깨에 선명히 남은 물어뜯긴 자국. 눈물 자국이 하얗게 남은 얼굴과 멍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엉망인 몸.
“흐음…….”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안쪽으로 성큼 들어왔다. 앉아서 올려다보니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어마어마한 자연재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처럼, 찬은 그냥 고개를 바짝 들어올리기만 했다.
도망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하고 나니 두렵지도 않았다. 어째서일까. 당장 죽이거나 또 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 보여서였을까. 스스로도 왜 피하지 않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남자를 보기만 했다.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찬의 얼굴을 한 손으로 덥석 잡았다. 긴 손가락이 어렵지 않게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기까지 했다. 찬이 목에 힘을 줬지만 어제와 같이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했다. 남자의 시선이 오싹했다. 훤히 드러난 엉덩이, 허벅지에 엉망으로 말라붙은 피와 정액을 조금이라도 가려 보려 티셔츠를 죽 끌어 내렸다.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기 시작하는 광대와 이마를 훑어 본 남자가 가볍게 혀를 찼다.
“…왜 도망치지 않지?”
조금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찬은 눈을 깜박였다. 아프도록 뺨을 누르는 손가락은 무척 단단해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목젖을 쳐다보다 조금씩 시선을 올렸다. 처음으로 제대로 본 그는 굵은 선으로 단숨에 그어 그린 듯이 생긴 사람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턱. 약간 비뚤어지게 웃는 입술. 곧게 뻗은 코. 그리고 깊이 들어간 눈. 찬은 남자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했다.
“여기, 내 집인데……?”
도망쳐야 할 건 그다. 가택침입에 강간까지 했다. 찬의 대답에 남자가 조금 의외라는 듯 빤히 쳐다보더니 픽 웃었다.
“내 이름은 오윤도다.”
“…….”
어째서 이름을 소개하는 걸까. 도망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소리일까. 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뺨에서 떨어져 나갔다.
윤도. 오윤도. 찬은 멍하니 이름을 되새겼다.
“네가 어젯밤에 봤다시피 늑대인간이고.”
마치 어제 달이 참 밝지 않았냐는 듯 태연한 말투였다. 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대답을 기다리듯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 역시 통성명을 하길 바라는 걸까. 찬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어…. 나는 유찬이고. 널… 당신을……. 주웠다가 물렸어.”
어젯밤, 이 남자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어깨 부근을 문지르자 둔해진 고통이 느껴졌다. 늑대인간에게 물렸는데 괜찮은 건가. 흘깃 윤도를 바라봤다. 그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다시 마루로 나가 걸터앉았다. 정말 이 집이 제 집인 양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동작이었다.
찬은 멍하니 등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별다른 변화는 없으니 괜찮은가.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개가 아니었구나.’
늑대 인간. 그 말이 한참 후에야 머릿속에서 이해됐다. 찬은 거대하던 개를 떠올렸다. 늑대가 원래 얼마만큼 큰 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렇게 큰 개는 본 적이 없었다. 생긴 것도 묘하게 개답지 않기도 했고. 찬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윤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 한 번 돌리질 않았다. 또 강간하려 든다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찬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줘 일어나려 했다.
“윽!”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마루에 앉은 윤도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찬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가 천천히 욕실로 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