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분리 불안 (10/10)

희성이 직접 물어 온 애인이라 해도, 포용하기 힘든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분리 불안이었다.

“…나 화장실은 혼자 가고 싶은데.”

희성은 화장실까지 턱턱 따라 들어온 늑대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화장실이 넓은 편인데도 야생 곰만 한 늑대가 따라 들어오자 공간이 꽉 찬 것만 같았다.

이제 익숙하긴 했지만, 희성은 애인이 분리 불안이라 해도 화장실만큼은 혼자 쓰고 싶었다. 씻기 위해 막 옷을 벗으려던 희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 늑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나 씻을 거야.”

그르르.

늑대가 씻으라는 듯 목을 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문제냐는 듯 산만 한 크기의 늑대가 회색 눈을 순진한 척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대놓고 관람하려는 자세에 희성이 발끈했다.

“소변도 볼 거라고.”

이번엔 늑대가 아예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희성의 사타구니 쪽을 보는 표정이 진중했다. 체모가 없다고 늘 놀리고 입을 대던 그곳. 곱게 넘어가려던 희성은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뭘 앉아! 빨리 나가!”

버럭 화내며 늑대의 등을 밀었지만 꿈쩍도 안 했다. 늑대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면서도 눈치를 보는 척, 애단 척 희성을 올려다봤다. 그래 봤자 속뜻은 ‘네 뽀얀 알몸 좀 같이 보자.’라 희성은 봐주지 않았다. 힘겨운 씨름 끝에 희성은 기어코 늑대를 문밖으로 내몰아 버렸다.

“하… 힘들어.”

겨우 화장실에 혼자 남은 희성이 문에 지친 얼굴로 기댔다. 윤치영을 내쫓긴 했지만, 문밖에서 자신이 나올 때까지 꿋꿋이 기다릴 걸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힘없이 툭툭 옷을 벗던 희성은 걱정에 잠긴 얼굴로 생각했다.

‘대체 분리 불안은 어떻게 고치지?’

이러다가 희성은 혼자만의 시간을 평생 가지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애인과 함께 있는 건 행복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시간은 물론 애인의 삶마저 뺏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함께 지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윤치영의 분리 불안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질 않으니, 희성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 * *

희성이 봐도 그간 윤치영은 긍정적으로 변하긴 했다.

우선 윤치영은 지독하던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다. 여전히 돈을 헤프게 쓰긴 했지만, 도박을 끊은 것만으로도 강아지에겐 그가 제대로 된 놈이 된 것처럼 보였다. 도박장에서 나락까지 떨어지는 놈들을 워낙 많이 봐서였다.

하지만 도박을 끊은 윤치영은 다른 중독에 빠지고 말았다.

‘대체 왜 분리 불안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지?’

이상하게도 윤치영의 분리 불안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오히려 나날이 심해져 그렇게 믿는 조직원들의 손에도 희성을 맡기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지영배와 희성을 단둘이 남겨 두기도 했는데, 이젠 그마저 싫은지 어디든 강아지를 직접 데리고 가거나 혹은 조직원을 한꺼번에 대여섯을 붙여 놔야 안심했다.

거기다 그는 자다 깨서도 희성의 존재를 수시로 확인했다.

한 번은 윤치영이 악몽을 꾸는지 자는 내내 거친 숨을 내쉬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선 곁에 있던 희성을 와락 껴안았다. 얼결에 깬 희성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그의 등을 토닥여 줬었다. 귀찮아도 윤치영의 불안정한 모습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잠도 잘 못 잘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희성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분명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데다 상견례도 해 정식으로 반려가 됐다. 희성이 해가 뜨는 바다 앞에서 반지를 주며 낭만적인 고백도 했다. 그런데도 윤치영은 날이 갈수록 희성을 품에서 놔주지 못했다. 너무 사랑해서 그런다기보단, 희성을 잃을까 봐 불안증을 앓는 것 같았다.

‘설마 내 고백이 믿음직하지 못했나….’

희성은 속상해하며 약지에 끼워 둔 반지를 매만졌다. 자신은 평생 그를 책임질 다짐을 했는데, 윤치영에겐 부족하게 느껴졌나 보다.

‘…오히려 너무 붙어 있어서 분리 불안이 심해지는 건가?’

점점 희성은 조급해졌다. 분리 불안이 심해질수록 윤치영의 페로몬 수치도 쉽게 안정되질 않았다. 그럴수록 희성은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독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불안감도 가끔 들었다.

그런 희성에게 어느 가능성을 시도해 볼 기회가 찾아왔다.

“다음 주에 해외 출장을 가야 할 거 같은데….”

“출장? 얼마나?”

“3일 정도인데. 같이 갔다가 일주일만 더 놀다 올까?”

3일간의 출장.

사실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희성에겐 분리 불안을 고쳐 볼 기회로 보였다.

‘3일간 떨어져서 지내보면 윤치영도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서로 단절한 채 지내보면서 윤치영에게 자신을 혼자 둬도 괜찮다는 걸 깨우쳐 주면 좋을 터였다. 거기다 연인 사이에도 혼자 지낼 시간이 필요하단 걸 윤치영이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역시 기회를 놓쳐선 안 될 것 같다. 잠시 침묵하던 희성은 그에게 다가가 까맣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윤치영, 출장 너 혼자 다녀올래?”

“…….”

물음에 서재에 느슨하게 앉아 있던 윤치영이 희성을 올려다봤다. 그는 분명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동공이 연해 초점 구분이 힘든 회색 눈동자 때문인지 뜻 모를 벽이 느껴졌다. 서로 떨어진다는 건 선택지에도 없다는 철벽이었다.

“아, 강아지 가기 싫어? 그럼 비행기 취소할게.”

“아니, 야.”

희성이 먹고 있던 새우짱 과자를 내려 두고 윤치영의 앞쪽 책상에 불량하게 걸터앉았다. 서로 위아래로 보게 됐다. 그중 윤치영의 시선은 느슨한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희성의 어깨에 가 있었다. 희성은 괜히 치수가 큰 치영의 티셔츠를 입었다는 생각을 하며, 듣는 태도가 불량한 그에게 열 내지 않기 위해 조곤조곤한 어조로 설득했다.

“이번 출장은 너 혼자 다녀와 봐. 난 3일간 집에 있을게.”

“그럼 나도 집에 있을게.”

“일인데 어떻게 안 가게? 혼자 다녀오라니까?”

“난 존재만으로 일하고 있는 거라 괜찮아. 안 갈래.”

철통 같은 말에 희성의 하얀 꼬리가 팍 식어 아래로 향했다.

“…너 자꾸 고집부릴래?”

“내가? 언제 고집을 부렸다는 거지….”

윤치영이 씩 웃으며 희성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는 눈꼬리를 미려하게 휘며 눈웃음을 살살 치더니, 등 뒤의 검은 꼬리까지 느리게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희성이 한번 떨어져 지내보려는 걸 알아챈 게 뻔했다.

“야. 윤치영.”

하지만 희성은 애인이 귀염을 떨어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매일 거울을 보며 귀여움에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그간 네 분리 불안이 심해지기만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떨어져서 지내보자. 오히려 우리가 너무 붙어 지내서 심해지는 거 같아.”

“…….”

희성이 진지하게 말하자 이젠 윤치영도 대화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지친 표정으로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이 떠올린 나름의 추론을 입에 올렸다.

“아까 자기가 베란다에 갇힌 거 보고 웃어서 벌주려는 거야?”

“…내가 너를 왜 벌주냐? 존나 괘씸하긴 했지만….”

이를 악물고 말한 희성은 윤치영이 은근슬쩍 돌리려 한 대화 주제를 다시 가져왔다.

“그냥 혼자 출장 다녀와. 고작 3일 떨어지는 거잖아.”

“3일이나 떨어지는 거지.”

“뭐래, 3일 떨어진다고 안 죽어.”

“자긴 안 죽겠지만 난 아니야.”

윤치영의 얼굴에 늘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조각 같은 미형의 인상이 두드러져 차가워 보였다. 드물게 진지한 모습이라 하마터면 희성은 뜻을 굽힐 뻔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안 죽는다니까!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래?”

윤치영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나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자기 귀엽다고 납치해 가면 어떡해?”

“납치는 무슨….”

“아니면 강아지가 나 두고 다른 여자 따라가면 어떡해….”

“…….”

윤치영이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희성을 소중하게 껴안았다. 투정처럼 들렸지만, 사실 뒤끝을 부리는 거라 희성의 표정이 뚱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인데 윤치영은 어제 일처럼 말하며 성가시게 굴었다.

지난번 희성은 호텔 로비에서 멋진 누나를 무작정 쫓아간 적이 있었다.

윤치영은 강아지에게 조직원들을 붙이고, 잠시 다른 일을 보러 간 참이었다. 마침 졸려서 호텔 로비에서 꾸벅꾸벅 졸던 강아지는 무언가를 보자마자 사납게 눈을 치떴다.

수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너 또 내 애인 괴롭히러 왔지!〉

강아지는 여자에게 추궁은 물론,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온 거냐, 너 수상하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 왕왕 짖으며 아주 투견답게 경계했다. 희성을 지키던 조직원들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작고 필사적인 협박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꺅, 강아지!〉

〈어…?〉

멋진 누나는 수장이 아니라 스타일이 비슷한 고양이 수인일 뿐이었다.

사실 강아지 모습으로 있으면 인간들의 키가 커서 다 비슷비슷해 보였는데, 어느 멋진 누나가 지나가자 수장이라고 착각해 버렸다.

〈강아지가 왜 여기 혼자 있지? 우리 집에 같이 갈까?〉

고양이 수인은 강아지가 자신을 위협한 줄도 모르고 마구 쓰다듬고 예뻐해 줬다. 희성도 무작정 짖고 경계한 게 미안해서 얼이 빠진 채 품에 쏙 안겨 있었는데, 하필 그 광경을 일을 마치고 온 윤치영이 보고 말았다.

그날 희성은 황급히 윤치영을 달래서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다. 문제는 그 이후 윤치영이 계속 그 일을 끄집어내며 뒤끝을 부린다는 거였다.

조금 전처럼 뭐만 하면 다른 여자 따라갈까 봐, 하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희성에게 ‘난 자기 두고 아무 데도 안 간다.’라고 말하길 기대하듯 노골적으로 바라봤는데, 희성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잘하지도 못해서 피곤하고 지쳤다.

“그럼 평생 이렇게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다니면서 살래?”

“왜? 싫어?”

“어.”

억센 대답에 윤치영이 알겠다는 듯 우아하게 웃으며 타협점을 제시했다.

“그럼 이제 화장실 밖에서 기다릴게.”

“야!”

이러다 희성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분리 불안을 얘기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난 싫어, 숨 막혀. 평생 이렇게 살 순 없어!”

“…….”

버럭 외치자마자 희성은 후회했다. 윤치영이 정말로 상처받은 얼굴이 됐다. 평소보다 조금 식어 버린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희성은 그의 눈에 우울함이 깃드는 걸 보았다.

결국 희성은 눈길을 피한 채 자신도 모르게 찔려 미안, 속삭이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자신이 평생 책임지겠다고 다짐한 반려인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 윤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뼘 작은 희성을 스르륵 안아 달래 줬다. 넓은 품에 희성이 강아지일 적처럼 쏙 안겼다. 어차피 윤치영은 강아지에게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단 걸 알아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어.”

뒤늦게 윤치영이 뭔가 포기한 것처럼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출장 혼자 다녀올게. 대신, 3일간 내가 원하는 곳에 있어.”

“뭐… 어디 호텔인데?”

“호텔은 안 되지. 누가 우리 강아지를 노릴지 모르는데….”

윤치영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교만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게 얄미워 희성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윤치영은 이럴 때 도통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수상했다. 이 교활한 늑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불안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정상적인 말이 나왔다.

“3일간 별장에서 지내.”

“너 별장도 있어?”

물어보곤 당연히 있겠지 싶었다. 그가 도박판에서 돈을 쓰는 규모하며, 가끔은 건물 서류까지 종이비행기처럼 오갔는데 별장쯤이야 없겠나 싶었다.

“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

윤치영이 해답을 찾아 기분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주변에 내가 가장 믿는 사람도 있고.”

“그게 누군데?”

수상쩍어하는 물음에 윤치영이 그저 명쾌하게 웃었다. 해결법을 찾아서인지 퍽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있어. 내가 강아지 다음으로 절대 못 이기는 사람.”

그런 수인이 진짜 있긴 하나. 희성은 미간을 구긴 채 의문을 담아 노려봤다. 하지만 윤치영은 답을 알려 주기는커녕 후련하게 혼잣말이나 했다.

“안 그래도 강아지 소개해 주려 했는데. 잘됐네.”

“…너 설마 다른 강아지 있는 거 아니지?”

“없다니까.”

이제 윤치영은 희성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희성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킨십을 받으면서도 희성은 내내 표정이 뚱했다. 윤치영이, 순혈 늑대들이 바람피우는 걸 매우 천박한 짓으로 여기는 건 알긴 하지만. 그래도 지난번 호두를 멋대로 데려온 전적이 있어서 수상했다.

“또 다른 강아지 데려오기만 해 봐… 평생 가둬 버릴 줄 알아.”

“강아지가 나 가둬 줄 거야?”

윤치영이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 키들대며 물었다. 희성의 입술을 쪽쪽 빨며 웃는데, 희성은 협박이 통하지 않아 화만 돋았다. 대체 윤치영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진심으로 윤치영을 묶어 둘 생각인데 그는 하룻강아지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해하기만 했다.

‘또라이를 이해할 수는 없지.’

그래도 타협을 보게 됐다. 안심한 희성은 혼자 있는 동안 실컷 쉬고 놀 생각에 들떴다. 애인이 서운할까 봐 티 내진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별장 얘기가 나올 때부터 꼬리가 흔들려 다 들켰다. 결국 희성은 해외 출장 전까지 윤치영과 한시도 떨어지지 못한 채 진득하게 붙어 지내야만 했다.

* * *

윤치영의 출장 날, 희성은 강원도에 있는 별장에 가게 됐다.

“너 언제 이런 호화 별장을 지어 뒀어…?”

희성은 3층짜리 별장을 보자마자 놀라 눈을 떼지 못했다.

별장은 강원도의 산 중턱에 있었다. 외딴곳이지만 시설은 호화롭다 못해 풍족했다. 별장은 천장이 높은 복층 식이었는데, 벽 한쪽이 통유리로 뻥 뚫린 모던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안은 화이트 톤의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인테리어 돼 있었고, 각종 놀이 시설은 물론 주방에는 일주일은 풍족하게 먹을 온갖 요리 재료가 채워져 있었다. 마당에는 새파란 스포츠카도 주차돼 있었는데, 그 주변은 푸른 산림이 펼쳐져 있어 꼭 외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현대식 집 같았다. 딱 강아지가 꿈꿔온 집이었다. 희성은 꼬리를 주체 못 할 정도로 흔들며 별장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다.

집 안으로 30인치 캐리어를 옮겨 둔 윤치영이 말했다.

“마음에 들어?”

“좀 사치스럽긴 한데… 와, 수영장!”

실내 수영장을 발견한 희성이 까만 눈을 빛내며 달려갔다. 이런 곳에서 3일간 혼자 지낸다니. 내심 윤치영이 출장에서 더 늦게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이곳이 안전한지는 확신이 안 섰다.

희성은 테라스로 나가 초목이 무성한 산야를 바라봤다. 별장은 산 중턱에 자리해 전망이 툭 터진 곳에 있었다. 외진 곳이긴 하지만, 이런 곳이 정말 안전할까 싶었다.

“근데 여기 정말 안전해? 산 중턱인데.”

“응.”

따라 테라스로 나온 윤치영이 뒤쪽에서 희성을 껴안았다.

턱을 희성의 어깨에 댄 그는 희성을 사선 쪽으로 조금 돌아서게 하며 말했다.

“이 산이 늑대산이라고, 야생 늑대 수백 마리가 사는 곳인데….”

“야생 늑대….”

그곳을 보고 놀란 강아지가 빠작 꼬리를 세웠다.

언제 침입한 건지, 야생 늑대 두 마리가 별장 마당을 기웃거리며 새로운 냄새를 확인하고 있었다. 젊고 호기심 많은 정찰 늑대가 분명했다. 이방인인 희성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야생 늑대들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윤치영이 먼저 무릎을 굽혀 손을 내밀자, 늑대들이 총총 다가와 냄새를 확인하고 금방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 버렸다. 강아지보다도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내 영토라 야생 늑대들 모두 내 수족이야. 나 여기서 자랐어.”

“늑대들은 뭐 다 자기 거래….”

희성은 얼떨떨해하면서도, 함께 쪼그려 앉아 윤치영이 손을 이끌어 주는 대로 야생 늑대들을 만져 보았다. 털이 거칠면서도 따듯했고 늑대들은 마냥 순했다. 희성의 존재가 낯설 법도 한데, 야생 늑대들은 희성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자기한테 내 체취가 진하게 남아 있으니까 늑대들이 지켜 줄 거야.”

말하며 윤치영이 쪼그려 앉은 희성의 어깨에 자신의 롱코트를 둘러 줬다. 희성이 서면 발목까지 오는 길이라 조금 불편했지만, 따듯하고 윤치영의 체향이 느껴져 벗진 않았다.

거기다 산도 안전한 걸 알게 되니 안심됐다. 오히려 도심과 달리 조용하고 사람도 없어 좋았다. 신이 난 희성은 야생 늑대들을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겠어. 너 이제 출장 가.”

“나 이렇게 보내게?”

“그럼?”

희성이 뒤돌아보니 정장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선 윤치영이 보였다. 훤칠한 키를 따라 시선을 올려 얼굴을 보니, 서운해하는 걸 숨기지 않는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예민해 보이는 회색 눈 하며, 굳게 다문 입술이 희성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희성은 한 번 더 인사했다.

“잘 다녀와. 출장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말하고 희성은 다시 야생 늑대를 매만졌다. 그새 주변에 야생 늑대가 대여섯 마리로 늘어 들뜨고 신이 났다. 확실히 늑대들이 제 편인 걸 알게 되니 조직원 형들처럼 느껴져 든든하기만 했다.

그사이 윤치영이 출장 가야 할 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도 윤치영은 희성의 곁을 떨어지지 못하고 뒤에서 껴안으며 질척거렸다.

“나 강아지 혼자 못 두겠어. 이러다 큰일 나면 어쩌지….”

“…집 안에 바이털 사인 카메라 설치한 거 다 봤으니까 빨리 가.”

희성은 훤칠한 것이 치대니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윤치영이 정말로 힘들어 보여서 버럭 화를 내지도 못했다. 늘 듣기 좋던 목소리도 낮게 갈라졌고 예민해 보이는 회색 눈에는 지친 기색이 비쳤다.

“나 벌써 자기 보고 싶어….”

“그래, 봐.”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으면 어떻게 해?”

“핸드폰에 앨범 봐. 네가 온갖 내 모습 찍어 놨잖아.”

“…….”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한 말인데 윤치영은 대답이 없었다. 희성이 설마 하고 뒤를 돌아보니 놈의 눈동자에 초점이 안 보였다. 그 표정을 본 희성은 심각해졌다. 그는 정말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것처럼 안색이 굳어 있었다.

“야, 윤치영.”

결국 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치영을 크게 안아 달래 줘야 했다.

“그럼 정말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을 때 와.”

희성은 그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기 전에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진짜, 진짜 내가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을 때만.”

“…….”

“이런 시간도 필요한 거 알잖아.”

희성이 힘주어 말하자, 윤치영은 결국 애인의 뜻을 따랐다.

그는 희성의 살이 오른 뺨과 콧날, 그리고 입술에 버드키스를 남기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희성은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참 유별나게 느껴졌다. 일족의 감시자가 고작 강아지에게 분리 불안을 느끼다니. 그를 두려워하는 수인들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역시 윤치영은 불안한지 희성에게 블랙 카드를 넘겨주며 말했다.

“나 진짜 다녀올게… 꼭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서 놀고 있어.”

“집에 놀거리 다 구비해 놓고 무슨….”

“별장에 보물도 숨겨 놨으니까 꼭 찾아보고.”

“보물?”

집 안을 강아지가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개조해 뒀으면서, 보물까지 숨겨 뒀다니. 희성은 윤치영이 자신을 위해 섬세하게 준비해 줘서 고마웠다. 자신을 힘껏 껴안는 윤치영을 보내기 미안할 정도였다.

그사이 윤치영은 겨우 결심을 마쳤다.

“자기랑 평생 봐야 하니까 하는 투자야.”

“응.”

마지막으로 출발 전, 윤치영은 희성이 내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가져갔다. 희성의 체취가 묻어 있어서 그나마 안정할 수 있다는 말을 해서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희성은 네가 애냐고 타박하긴 했지만, 그에게 목도리를 직접 둘러 줬다. 뽀뽀도 해 주고, 나름 서운한 척도 하며 보냈다. 등 뒤로 꼬리가 자꾸 신나게 흔들려 들키긴 했지만, 그래도 희성도 내심 그를 보내기 아쉬웠다.

그렇게 윤치영을 보낸 뒤.

‘드디어 나 혼자야…!’

겨우 윤치영을 보낸 희성은 아름다운 별장을 놀이동산처럼 바라봤다.

정말 호화 별장에 자신 혼자만이 남았다. 꿋꿋이 존댓말을 하는 조직원들도 없었고 감시도 없이 온전히 혼자였다.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희성은 편하게 강아지 모습으로 변해 비장하게 몸부터 털었다.

신나게 놀려면 3일은 부족했다. 드디어 혼자 지내는 만큼 알차게 쉬어 줘야 했다. 강아지는 먼저 별장 안을 통통 돌아다니며 주변을 탐색했다.

‘숨겨 둔 보물은 대체 뭐지?’

강아지가 예민한 후각으로 주변을 킁킁거렸다. 윤치영이 숨겨 둔 보물은 뭔가 했는데, 냉장고 옆 다용도실을 보자마자 알게 됐다. 그곳엔 새우짱 과자가 천장까지 꽉 찰 정도로 한가득했다.

신이 난 강아지는 새우짱 과자 하나를 사냥감처럼 거칠게 물고 침실로 갔다.

‘여기가 침실이었나?’

그다음으로 들어간 곳은 따듯한 햇살이 들어오는 침실이었다. 강아지는 자신의 몸 색깔과 같은 러그를 지나 침대에 올라갔다.-강아지용 계단이 곳곳에 있었는데 미리 준비해 준 듯했다- 푹신한 침대에 푹 드러누워 위를 보니 환상적이었다. 천장에 뻥 뚫린 창문이 있어 하늘이 훤히 보였다. 눈이 올 것처럼 먹구름이 껴 있었지만, 그것마저 좋아 강아지는 행복하게 몸을 부슬거렸다.

원래라면 지금쯤 윤치영에게 뽀뽀 세례를 당하고 온몸을 조물조물 마사지 당했을 텐데. 주변이 고요하니 평화롭고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내심 들뜬 강아지는 분홍 배를 까고 누운 채 꼬리를 살랑대며 생각했다.

‘집 좀 둘러보다가 영화도 한 편 보고, 배고프면 과자 먹어야지. 아, 차도 있으니까 직접 드라이브 나가서 먹을 거도 사 와야겠다. 운전해서 백화점까지 가 볼까?’

윤치영이 가기 전 카드를 줬으니, 큰 금액을 긁어 놀라게 해 줄까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흡족스러워 희성은 신나게 침대를 뒹굴거리며 새우짱을 먹었다. 침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꼭 구름에 누운 것 같아 잠이 솔솔 왔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자고 일어나니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진 희성은 부스스한 꼴로 일어났다.

‘밥부터 먹어야겠다.’

풍요로운 주방을 떠올린 희성은 팔딱 뛰어 거실로 나왔다. 신난 강아지의 걸음걸이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들뜬 채 즐거워하던 강아지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엄청 조용하네….’

텅 비다 못해 현대 미술 작품이 걸린 거실이 낯설었다. 뒷발로 접힌 귀를 느리게 긁던 강아지는 부스스한 꼴로 주변을 둘러봤다.

“…….”

어쩐지 좀 허전했다.

윤치영이 곁에 있을 때는 세상이 꽉 차 보였는데, 그가 없으니 세상이 텅 빈 것만 같았다. 호화로운 별장도 낯선 세상 같기만 했다. 혼자 남은 강아지에겐 무엇 하나 손대기 어렵고 높은 것들뿐이었다.

처음 별장에 왔을 때 희성은 혼자 있을 생각에 들뜨기만 했는데, 왜 이제 와선 아름다운 집이 적막하게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둘러봤다.

아웅….

이내 혼자라는 걸 다시금 깨달아 실망한 강아지가 작게 울었다. 구슬픈 목소리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강아지는 접힌 귀를 뒤로 젖힌 채 시무룩한 얼굴로 다른 곳을 둘러봤다. 혹여 윤치영이 숨겨 둔 조직원 형이라도 있을까 곳곳을 살폈지만,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낑, 하고 기운 없이 낸 소리에 서글픔이 묻어났다.

‘윤치영…?’

강아지는 불안해하는 눈으로 별장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그중 주방 뒤쪽에 창고가 있었다. 혹여 갇힐까 걱정했는지 펫 도어가 설치돼 있어 희성은 무심코 안에 들어가 봤다.

어둑한 창고에서는 곰팡내가 났고 청소 도구와 보일러가 있을 뿐 별다른 물건은 없었다. 그저 주변이 정리가 안 된 느낌이 났다.

하지만 희성은 창고에서 끼친 익숙한 냄새에 몸이 굳어 버렸다.

어린아이처럼 혼자라고 무서워진 건 아니었다. 그저 먼지가 쌓인 창고를 봤을 뿐인데 불쑥 끔찍한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어.〉

폐가에 혼자 웅크려 누군가를 기다렸던 자신의 모습이 환영처럼 보이는 것만 같았다. 뒤늦게 희성은 애써 고개를 뒤흔들며 생각을 떨쳐 냈다. 하지만 주변을 불안하게 둘러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희성은 도망치듯 침실까지 달려가 윤치영이 두고 간 코트 위에 작게 몸을 웅크렸다. 서럽게 가라앉은 까만 눈이 올망졸망했다.

‘난 그간 진짜 혼자였던 적이 없었구나….’

희성은 도박장에서 혼자 있어도 늘 옆방 너머에서 불쾌한 소음이 들렸다. 온전히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기억이 자신을 괴롭히는 줄도 몰랐다. 희성은 코트에 남은 윤치영의 체취에 얼굴을 파묻었다. 과자가 가득 찬 집에 남겨지기 싫었다.

‘…혼자 집에 있기 싫어.’

결국 희성은 침묵을 못 버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치영에게 연락해 볼까 싶지만, 고작 3시간 만에 그를 찾는 건 말도 안 돼 보였다. 그리고 이런 끔찍한 기억쯤이야, 다른 행동으로 떨쳐 내면 될 것이다.

희성은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산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희성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 한결 개운한 얼굴이 됐다. 주변을 기웃대는 야생 늑대와, 잘 가꿔진 정원을 보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역시 나오니까 좀 괜찮네.’

나온 김에 산 경치도 구경해야겠다 싶었다. 멀리서 맑은 새소리도 들리니 머릿속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희성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차된 파란 스포츠카를 부럽게 구경하다가, 산을 의아하게 둘러봤다.

‘근데 여긴 무슨 3월에도 눈이 쌓여 있지?’

희성은 산을 신기하게 올려다봤다. 눈이 내리고 시간이 꽤 지났는지 제법 녹은 티가 났지만 그 위에 또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성은 강원도만 와도 서울이랑 참 다르구나, 하고 신기해했다.

강아지는 호기심에 조금 더 산길로 나가 보았다.

어쩐지 윤치영의 영역이라는 이 산이 마음에 들었다. 늑대 일족의 본가가 있는 곳보다도 훨씬 울창하고 어딘가 멋스러운 정기가 느껴지는 산이었다. 이런 곳이 윤치영의 것이라니 희성은 괜히 자신이 뿌듯하고 의기양양해졌다.

산을 둘러보던 희성은 의아한 걸 하나 발견했다.

‘저 건물도 윤치영 별장인가?’

멀리 윤치영의 별장과 비슷한 양식의 건물이 하나 더 보였다. 거기다 별장 두 채가 함께 지어져 붙어 있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희성이 있는 별장보다 세월이 느껴졌지만, 결코 낡아 보이지 않는 멋스러운 집이었다.

문득 희성은 별장 주변에 가장 믿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윤치영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 저기에 윤치영이 말한 사람이 있는 건가?’

호기심에 희성의 꼬리가 곤두섰다. 강아지는 너무 커 보이는 호화 별장을 돌아봤다가, 다른 별장을 다시 쳐다봤다. 윤치영의 별장에 혼자 남겨지긴 싫었다. 그것보단 호기심을 탐구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한번 가 볼까?’

조금씩 눈이 내리긴 했지만, 멀어 보이진 않으니 혼자 가볍게 다녀와도 좋을 듯했다.

비장하게 몸을 턴 강아지는 오랜만에 산을 올라가 봤다. 날이 조금 추웠지만 털옷을 입어 끄떡없었다. 그리고 정찰 후 돌아와서 월풀 욕조에서 몸을 녹이면 딱일 것 같았다.

‘다른 조직원 형이라도 있으면 감시했냐고 엄청 뭐라 해야지.’

희성은 엄하게 생각했지만 꼬리는 기대로 들뜬 채 살랑대고 흔들렸다.

올라가며 희성은 마지막으로 나올 때 봤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후 4시.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강아지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혼자 자는 건 싫으니, 저 너머에 있는 별장에서 누구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은 채였다.

* * *

‘미, 미친 거 아니야?’

산을 올라가던 희성이 경악한 얼굴로 생각했다.

별장으로 향하는 길이 생각보다 험했다. 눈이 쌓여 올라가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별장은 예상보다 아주 멀었다.

‘건물이 커서 가까워 보이던 거였다니, 아오.’

희성은 괜히 속은 기분이었다. 슬슬 산에 해가 져서 그냥 돌아갈까 싶었는데, 눈길이 미끄러워 다시 내려가기도 애매했다. 안 그래도 힘든 눈길이라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해 보였다. 차라리 거리가 좀 가까워진 별장에서 쉬는 게 나을 것이었다.

그런데 별장이 나오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희성은 슬슬 불안해졌다.

‘설마 이 길이 아닌가…?’

강아지는 멈춰 서서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희성이 올라올 때 갈림길이 있긴 했다. 하지만 윤치영의 사유지답게 표지판도 없었다. 강아지는 당연히 별장이 가까워 보이는 쪽으로 당당히 걸어갔는데, 산행 코스라도 되는지 산 위쪽이 아닌 옆쪽을 빙 돌듯 길이 빠졌다.

주춤주춤 걷던 희성은 걱정스레 하늘을 올려봤다. 점점 산에서 해가 지는 게 보였다. 산에 혼자 남겨지면 위험하니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이미 희성의 네 다리는 꽁꽁 얼어 버렸다.

‘너, 너무 추워.’

강아지가 바르르 몸을 떨며 재채기를 두 번 연달아 했다. 정말 이가 떨릴 정도로 추웠다. 내일이면 감기가 들 게 분명했다.

‘강아지로 변해도 춥다니….’

원래 강아지는 털옷을 입으면 제법 추위에 강해졌다. 하지만 진눈깨비가 내리는 강원도의 산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강아지는 다시 윤치영의 별장으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돌아가는 길이 더 위험해 보여 다시 앞으로 걸었다. 그래도 야생 늑대들이 자꾸 주변을 기웃대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강아지를 따라와 줘서 무섭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산이 제법 으슥해졌을 때였다. 이러다 얼어 죽겠다고 생각할 무렵 길 끝에 무언가 나왔다.

‘별장…?’

무슨 건물인지 구분은 안 되지만, 따듯한 빛이 새어 나오는 별장이었다. 안심한 강아지는 이미 감각이 없는 네 발을 겨우 움직였다. 자신의 약한 몸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웠다.

비척비척 별장으로 다가간 강아지는 그 문턱 앞에 마르게 주저앉았다.

‘제발 누구라도, 나와 줘….’

생각하던 강아지는 누구를 부를 소리도 못 내고, 스르륵 힘없이 주저앉았다. 몸에 아무 힘도 없고 머리가 뜨거운 걸 보면 지독한 감기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윤치영 보고 싶어….’

웅크려 쓰러진 강아지는 곁에서 어느 짐승이 킁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산에 사는 야생 늑대인지, 혀로 몸을 제 몸을 핥아 주고 주변을 빙글 돌며 안절부절못했다.

아우우!

아득한 의식 너머 야생 늑대의 하울링이 들렸다. 희성은 누구라도 자신을 주워 달라고 간절하게 생각하며,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 * *

“…….”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희성은 드러누운 곳이 절절 끓는 걸 느꼈다. 따듯하다 못해 살이 델 것처럼 뜨거워 희성은 자신이 애인을 매정하게 대한 죄로 지옥에 온 줄 알았다.

강아지는 더위에 꾸물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아래를 봤다. 너무 뜨거워 의아했는데 그냥 침대였다. 하지만 촉감이 딱딱해서 다시 봤더니 돌침대였다. 처음 보는 가구에 당황한 강아지는 부스스한 꼴로 주변을 둘러봤다.

‘대체 여긴 어디야…?’

강아지는 낯선 곳을 보고 놀라 한쪽 얼굴 털이 다 눌린 채 벌떡 일어났다. 향긋한 나무 냄새가 풀풀 나는 주변은 한겨울임에도 몹시 따듯했다. 에취, 하고 재채기한 희성은 몸이 뜨거워 이불을 발로 차낸 뒤,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나무 산장인 걸까, 주변에 가전 기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에 강아지는 하얗고 각진 침대의 끄트머리로 가 봤다. 주변에는 온통 오래된 나무로 된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낡아 보이기는커녕 고풍스러워 보이는 가구들이었다. 산장이라기엔 우아한 멋이 느껴져 희성은 단순히 돈 많은 노부부의 별장이라 여겼다.

그러다 강아지는 벽장에 칼 같은 간격으로 놓인 훈장을 발견했다.

‘뭐지? 군인이 사는 집인가…?’

벽장에는 오래된 듯한 군복과 훈장, 그리고 국기가 곱게 걸려 있었다. 흑백 사진도 있었는데, 어느 엄숙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군복을 입고 훈장을 하사받는 사진이었다. 다만 그 옆에는 이질적인 컬러 사진으로 어느 남자아이와 찍은 사진도 있었다. 아이는 표정이 밝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희성이 신기해하며 침대 끄트머리로 가 사진을 자세히 볼 때였다. 뒤쪽에서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깬 거냐.”

화들짝 놀랐다. 방에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는데 사진이랑 쏙 빼닮은 중년, 아니 노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흰머리가 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져 있었지만, 서 있는 자세는 아주 올곧았다. 일정한 걸음걸이도 나이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해 보였고 작은 강아지 앞에 죽 그릇을 내려놓는 행동에도 절도가 보였다. 희성에겐 할머니라 불러도 될 법해 보였는데, 짙은 눈썹 하며 강인해 보이는 눈빛에 강아지가 차마 입을 못 뗄 때였다.

“우리 일족의 순찰자가 새끼를 주워 왔더구나.”

‘새끼…?’

“그래. 널 말하는 거다.”

희성은 자신이 새끼 강아지로 보이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없어 별 반응도 못 했다. 코가 멍멍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마 감기 몸살이 심하게 든 듯했다.

정체불명의 할머니가 말했다.

“감기도 심하게 들어서 3일은 푹 쉬어야 할 거다.”

‘3일… 나 놀아야 하는데….’

“몸도 약해 보이는 놈이 왜 눈발을 헤치고 나와서는….”

할머니가 구박하면서도 따듯한 죽을 입에 대 줘서 조금씩 먹었다. 소고기죽이었는데, 간이 밍밍하지만 맛이 좋았다. 덕분에 입맛이 없던 희성도 죽을 제법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먹는 모습이 기특한지 할머니가 그래도 먹성 덕에 빨리 낫겠다고 칭찬해 주었다.

죽을 비운 희성은 흐릿한 눈으로 통유리로 된 테라스 쪽을 바라봤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어?’

세상이 온통 하얬다. 어제 진눈깨비처럼 내리던 눈이 이제 발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희성은 낯선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둘러보며 끙끙거렸다.

왕….

‘윤치영이 걱정할 텐데….’

아무리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지만, 그래도 희성은 윤치영이 걱정됐다.

그때 강아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혹은 걱정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할머니가 아서라, 하고 구태여 말해 주었다.

“나가고 싶어도 산에 눈이 쌓여서 못 내려가. 이왕 감기가 든 거 푹 쉬고 가거라.”

역시 광경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산을 내려가는 건 꿈도 못 꿨다. 그러다 희성은 할머니가 왜 혼자 늑대산에 살고 있나 싶었다.

‘왜 할머니가 윤치영네 영역에 사는 거지…?’

의아해하던 강아지가 꿍얼거리며 물었다.

‘할머니는 누구예요?’

“누구긴. 이 산에 사는 사람이지.”

‘이 산은 감시자 건데….’

“그래, 안다.”

“……?”

대답에 오히려 희성이 놀랐다. 강아지 말을 알아들을 줄은 몰랐다. 수인 중 가장 많은 종족이 견인족이긴 했지만, 방언이 많아 본체로 돌아가서도 말이 통하는 건 흔하진 않았다. 거기다 희성은 그간 늑대들과 지내며 신체 언어가 안 통하는 게 익숙해져서 더 신기했다.

놀란 표정을 봤는지 그녀가 강아지의 머리를 세차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뭘 놀라냐? 산지기 하려면 다른 수인들 말 정도는 알아들어야지.”

‘아니, 윤치영을 어떻게 아는… 으으, 아파…!’

궁금해하던 희성이 격렬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반항했다. 강아지의 눈 위쪽에 흰자위가 드러날 정도로 머리를 쓰다듬어서 아팠다. 산지기라더니, 손힘이 범상치 않았다.

강아지가 납작해진 머리를 다시 이불에 비벼 세우는 사이 낯선 사실을 듣게 됐다.

“내가 그 애 직접 키워 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쉬어.”

‘뭐…?’

정전기가 선 얼굴로 그녀를 의아하게 올려봤는데, 한 점 거짓 없이 올곧기만 한 얼굴이었다. 희성만 더 큰 의문이 남았다. 윤치영의 엄마는 이미 상견례 때 본 적이 있는데. 키워 줬다면 엄마라는 거 아닌가? 그런데 또 있다니. 윤치영이 자신에게 숨긴 게 있나 싶어 강아지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옆쪽의 사진 속의 아이를 다시 보니, 분명 환한 웃음이 윤치영과 똑 닮아 있었다.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어쨌든 안전한 상대라는 거겠지?’

희성은 어질어질한 머리로 겨우 결론 내리고, 힘이 없어 숨을 헐떡였다. 감기 몸살이 심해 생각을 오래하기도 지쳤다. 그래도 불안해 핸드폰이라도 확인하려는데, 할머니가 주먹만 한 강아지를 자꾸만 이불에 쏙 넣어 뒀다.

“푹 쉬어야지. 감기도 독하게 든 놈이 왜 자꾸 움직여.”

‘핸드폰만 볼 거예요.’

“그냥 자라 이놈아!”

‘아, 핸드폰만 본다니까…!’

왕!

강아지가 힘없이 짖으면서도 계속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할머니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희성이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오는 족족 제자리로 돌려놨다. 강아지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왕왕 짖어도, 뭘 대드냐며 이불을 온몸에 잘 덮어 줬다.

‘씨, 무슨 할머니가 이렇게 힘이 세….’

결국 강아지가 할머니의 고집에 졌다. 강아지는 만만치 않은 할머니의 성격에 엎드려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호적수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색색거리던 강아지는 얼마 안 가 잠이 들고 말았다. 감기는 지독했고, 낯선 곳이어도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깊은 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희성은 내심 호화 별장에 혼자 남겨지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하루를 꼬박 쉰 희성은 겨우 꾸물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산장의 구조도 정확히 알게 됐다. 구석구석 기웃거리며 정찰하던 강아지는 경악한 얼굴이 됐다.

‘여기 뭐야…? 왜 윤치영네 집만큼 큰 거야?’

퇴역 군인인 할머니가 혼자 사는 작은 산장인 줄 알았는데, 별장은 작정하면 대가족이 며칠 얼굴을 안 보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집이 넓었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총 두 채였는데, 그중 희성이 지내는 곳은 가장 큰 3층짜리 나무집이었다. 옆으로는 2층짜리 고급 펜션 같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다.

거기다 야외 복도로 이어진 사우나실도 있었다. 뜨끈한 사우나실을 기웃거리던 강아지는 할머니가 정말 윤치영을 키워준 엄마라 돈이 많은 건가 의심하게 됐다. 그래도 할머니가 안전한 사람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안심한 희성은 호사를 마음껏 누렸다.

“춥지? 옷 하나 해 줘야겠네.”

‘옷?’

할머니는 말은 퉁명스러운 편이었지만 희성을 지극정성으로 챙겨 줬다. 감기에 걸린 강아지가 으슬으슬 떨며 돌아다니자 옷을 주려 했다.

‘윤치영이 어릴 적 입던 옷이라도 주시려는 건가….’

희성은 털옷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긴 했지만, 그래도 몸살이 나으려면 옷을 입는 게 나을 것 같아 할머니를 타박타박 따라갔다. 어찌나 정정한지 그녀는 행동만큼 걸음걸이도 무척 빨랐다.

할머니는 척 봐도 고급스러운 서재에서 무언가 천을 만지기 시작했다. 희성은 윤치영의 서재만큼 훌륭하게 꾸며진 곳을 둘러보며 점점 할머니가 정체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책장에는 외국어로 된 책도 많았고 심지어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꾸준한 노력이 그녀의 삶이 된 게 눈에 보였다.

그 책장에는 어느 남자아이의 사진도 있었다.

‘윤치영 사진이 여기도 있네….’

높은 곳에 있어 작은 강아지의 모습으로는 자세히 보기 힘들었지만 윤치영이 확실했다. 중학생 때로 보였는데, 대충 봐도 귀티가 흐르던 도련님이었던 걸 알 수 있었다. 침실에서 본 사진보다 자랐을 때 사진이었는데, 사춘기인지 얼굴에 생기는 조금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는 기운 없이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젊을 적 할머니가 가슴을 펴고 서서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던 희성은 한 가지 정보를 떠올렸다.

‘순혈 늑대들은 설마 야생에서처럼 유모에게 자식을 맡기는 건가?’

야생 늑대들은 우두머리 부부만이 새끼를 칠 수 있었고, 유모를 둬서 공동 육아를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고지식한 순혈 늑대들은 야생의 습성을 따를 확률이 높았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할머니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윤치영을 키워 냈다면 하나였다.

‘윤치영의 유모였구나….’

희성은 윤치영이 조금 불쌍해졌다. 그 한량 같은 자유분방한 성격에 군인의 손에서 자라났다니. 할머니를 살펴보던 희성은 윤치영이 자신 다음으로 못 이기는 사람이자, 또 믿는 사람이라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됐다.

다만 희성은 감시자의 유모인 할머니가 왜 이곳에 혼자 지내는지 궁금했다.

‘여기서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으려나….’

희성은 처음 윤치영의 집에 갔을 무렵의 기분을 느꼈다. 그 당시에도 넓고 고적한 집에 윤치영이 혼자 사는 걸 보고 안쓰러워했었다. 희성은 자신이 쓸데없는 잔정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독과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기에 마음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씁쓸한 생각은 옷을 입자마자 휘발됐다.

“자, 다 됐다. 이제 이거 입고 다녀라.”

‘벌써 옷이 다 됐어요?’

꿍얼꿍얼 묻는 사이 할머니가 강아지를 책상에 올려 옷을 꾸역꾸역 입혀 줬다.

네 다리를 구멍에 잘 끼워 주고, 얼굴도 제대로 뺐다. 도톰한 천이 범상치 않게 몸에 감겼다. 제법 쫀쫀한 재질이라 할머니가 여러 번 강아지의 몸에 옷 태를 바로잡아 줘야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거울로 옷을 확인한 희성이 버럭 짖었다.

‘이게 뭐야!’

희성은 성질부터 내고 말았다. 내심 뜨개질이나 혹은 남는 강아지 옷이 있나 싶었는데, 실상은 어설프다 못해 하찮은 것이었다. 거울 앞에 선 강아지가 미간을 꽉 구긴 채 화를 내며 몸부림쳤다.

‘난 양말 같은 건 안 입어!’

“가만있어!”

희성의 몸에는 짱짱한 양말이 입혀져 있었다. 색깔도 화사하고 밝은 수면 양말이었다. 네 다리가 튀어나오는 곳에 구멍을 뚫었다고 강아지 옷이라고 하다니. 그나마 양말이 새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싫은 건 싫었다. 강아지가 짜증에 마구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 받게도 양말은 강아지의 몸에 꼭 맞았다. 더욱이 짜증 나는 건 따듯하긴 하다는 거였다. 그래도 투견은 양말 같은 건 입지 않았다. 희성은 좁쌀만 한 이를 드러내며 거울 위쪽을 바라봤다. 할머니가 사이즈가 잘 맞아 다행이라고 양말을 다시 쫀쫀하게 입혀 주려 했다.

‘이딴 거 안 입는다고요!’

“입고 있어, 따시게 지내야지!”

불호령에도 자존심이 상한 강아지가 당장 양말을 벗으려 했다. 앞발로 닿지도 않는 옷을 벗으려 하고 마구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간 살이 실하게 올라 양말은 야무지게 둥그런 맵시를 유지했다.

강아지가 싫어하는 걸 봤는지 그녀가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아껴야 잘 사는 것도 모르고. 배은망덕한 놈이….”

말만 구박조지 얼굴에는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듯 미소가 만연했다. 하지만 희성은 연분홍 패턴이 들어간 수면 양말이 싫어 아예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당장 벗기라는 시위였다. 이렇게 하면 윤치영은 웃으며 사진을 몇 방 찍긴 해도 희성의 뜻대로 해 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감기 들린 것이, 쓸데없는 짓 말고 간식 먹으러 나와라.”

‘벗겨 달라고요!’

결국 쌩하니 방을 나가는 할머니의 뒤로 희성이 뒤뚱뒤뚱 따라붙었다. 신경질적으로 짖어도 봤지만, 할머니는 어디선가 빨간 딸기를 꺼내 강아지에게 내밀었다. 무심코 한입 베어 문 희성은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즙에 눈이 초롱초롱해진 채 일단 성질을 죽였다. 몸이 따듯하니 좀 낫긴 했다.

‘…윤치영이 보기 전까지만 입어야겠어.’

할머니는 절대 벗겨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희성은 감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되도록 거울을 보지 않고 지냈다.

그날 희성은 감기라는 이유로 죽과 간식을 실컷 먹고 더욱 양말을 벗을 수 없게 됐다. 통통한 배를 감싼 채 누운 희성은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보다 이곳이 낫다고 생각하며, 기절하듯 잠들었다. 호사를 누린 하루가 지나갔다.

* * *

‘여긴 3월에도 눈이 오네….’

강아지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강원도는 3월에도 한겨울이었다. 찬찬히 내리던 눈은 어느덧 강아지의 키보다 많이 쌓였다. 희성이 마당으로 나가면 점프로 움직여야 할 정도로 길이 막혔다. 키가 큰 윤치영에겐 문제가 없겠지만, 도저히 이곳까지 차가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윤치영 돌아왔을 때도 눈이 안 녹으면 어쩌지….’

희성은 윤치영이 걱정되고 자꾸 생각났지만, 차마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분리 불안을 고쳐 보자고 떨어져 지내는데, 걱정된다고 자신이 한 번이라도 연락을 하면 윤치영이 당장 귀국해 헬기를 타고 이곳까지 올지도 몰랐다.

이내 강아지는 마음을 굳게 고쳐먹었다.

‘…아니야. 윤치영은 내일 밤 오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돼.’

이왕 분리 불안을 치료해 보자고 떨어진 거, 그래도 조금만 더 견뎌 보자 싶었다.

그렇게 이른 아침 일어난 희성은 고요한 집을 구석구석 정찰 좀 하고, 부스스한 꼴로 밖으로 나가 봤다. 퍽, 하고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려서 설마 했는데 할머니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한겨울인데, 상의에 긴소매 티셔츠 한 장만 입은 채였다.

‘무, 무서운 할머니라니까….’

눈 위를 통통 뛰어간 강아지는 쪼개진 나무가 쌓인 곳 위로 올라가 앉았다. 이른 시간부터 장작을 팼는지 쌓여 있는 나무 양이 제법 많았다. 마중 나온 게 기특한지 할머니가 웃으면서도 무뚝뚝하게 아는 척을 했다.

“강새이 벌써 깼나, 왜? 늦잠 좀 더 자지.”

‘꼽주는 거 다 알거든요….’

희성이 졸린 눈으로 투정 부리듯 옹알거렸다. 어투만 들어도 할머니가 게으른 걸 타박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태생이 한량 같은 윤치영은 자랄 때 자신보다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고집도 센데, 할머니와 살았다면 매일 아침이 전쟁 같았을 터였다.

그녀는 강아지가 말대꾸하는 게 그저 귀여운지, 가까이 다가와서 장갑을 낀 손으로 희성의 머리를 좍좍 쓰다듬어 줬다. 여전히 강아지 눈 위쪽에 흰자위가 드러날 정도로 거친 손길이었다. 강아지가 그만하라고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면 바닥에 납작해질 때까지 쓰다듬어졌을 것이다.

고놈 참 작고 귀엽다고 웃던 할머니가 말했다.

“배고프면 알아서 뭐라도 챙겨 먹어라.”

‘알아서요? 나 강아지인데.’

희성이 투덜거렸다. 그간 윤치영의 품에서 오냐오냐 커서 상전 취급받는 게 익숙해졌다. 순간 희성은 자신이 말하고는 제 스스로 참 버릇없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어제 종일 다섯 끼에 간식까지 먹여 주며 챙겨 줬는데. 말대꾸한 게 찔려 눈치를 보게 됐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히려 크게 웃더니 아궁이 쪽을 가리켰다.

“저 아궁이에 가서 고구마라도 주워 먹고 있어.”

뒤쪽에는 간이로 돌을 얹어 만든 아궁이가 있었다. 위에는 커다란 솥이 올려져 있었고 불을 땐 흔적이 남아 있었다. 까맣게 남은 재 사이로 언뜻언뜻 겉이 그을린 은박지가 보였다.

‘고구마…?’

희성은 장작에서 내려가 눈길을 걸어갔다. 해가 뜬 아침인데도 어젯밤보다도 추운 것 같았다. 남아 있는 불씨에 발바닥이라도 쬐고 싶어졌다.

‘고구마….’

아궁이로 다가간 강아지가 코끝을 킁킁거렸다. 재 사이에서 언뜻 고소한 고구마 냄새가 났다. 앞발로 주변을 뒤적거리니 재가 휘날렸다. 불이 꺼진 지 한참인지 뜨겁진 않고 따듯했다. 희성은 다 타 버린 장작 사이에서 은박지에 싸여 있던 고구마를 발견했다.

한참 뒤적대던 강아지는 가장 큰 고구마를 앞발로 굴려 꺼냈다. 뜨거워서 오래 앞발을 대진 못했고, 조심조심 고구마를 옮겨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리니 걱정됐는지, 할머니가 뒤쪽으로 다가왔다.

“욕심도 많지, 제 몸만 한 걸 주워 왔구먼.”

‘구박하지 말고 좀 까 줘요.’

희성이 고구마를 앞발로 툭툭 밀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참 귀엽다고, 미워할 수 없다고 중얼거리며 은박지를 까 줬다. 자신이 귀엽단 거야 윤치영에게 오천 번은 넘게 들어 익숙한 강아지는 껍질이 그을린 고구마만 바라봤다. 맨날 윤치영과 고급 요리만 먹다가 오랜만에 잘 익은 고구마를 봐서 그런지 군침이 돌았다.

곧 할머니가 큼직한 고구마를 반으로 가르고 껍질을 밀자, 김이 모락모락 피며 노랗게 익은 속살이 나왔다.

“뜨거우니까 강새이는 좀 기다렸다가….”

왕!

“거봐라, 내 뜨겁다 했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아지가 고구마를 물었다가 뜨거움에 발버둥 쳤다. 할머니는 말만 혼내는 어투지 웃기 바빴다. 강아지는 입천장을 데어 부들부들 떨면서도, 다시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었다. 어릴 적 크게 굶어 본 적이 있어서 희성은 음식을 고집스레 먹는 게 습관이 됐다. 비록 소화 기능이 약해 많이 먹진 못했지만, 부족한 소화 기능은 항상 식탐으로 이겨 내는 중이었다.

강아지가 고구마를 욕심껏 먹는 모습을 본 할머니가 기특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네놈은 아주, 이 먹성 덕분에 오래 살겠구나.”

‘책임질 놈이 있어서 오래 살아야 해요.’

“그래, 그래야지.”

그녀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 앞에서 희성은 고구마를 아작아작 씹으며 윤치영을 떠올렸다. 지금쯤 분리 불안은 좀 나아졌을지, 아니면 자신이 보고 싶다고 한국에 돌아오려다가 포기한 건 아닌지. 한 번 떠오르니 계속 생각이 났다.

희성은 자신이 타인에게 무관심한 편인 줄 알았는데, 윤치영에 대한 걱정은 은연중에 끊이질 않았다. 자꾸 틈만 나면 밖을 내다볼 정도니, 사실 분리 불안은 자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냐. 그래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좀 필요해.’

그래야 윤치영도 서로 떨어져도 괜찮다는 걸 알 것이다. 희성은 지금 여기서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으며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강아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 어딘가를 보며, 윤치영이 일을 열심히 하고 오길 바랐다.

희성은 할머니가 가져다준 우유도 마셔서 빵빵하게 배를 채웠다. 고구마와 함께 먹으니 우유 맛이 참 좋았다. 입맛이 아주 고급인 윤치영에게 이런 것도 좀 먹어 보라고 주고 싶었다.

‘또 윤치영 생각했네….’

생각하던 강아지는 반도 못 먹은 고구마를 서운하게 내려다봤다.

맛있긴 했지만 혼자 먹으니 기분이 나질 않았다. 평소라면 윤치영이 함께 음식을 먹으며 희성의 입 주변도 닦아 주고, 잘 먹었다고 칭찬도 해 줬을 텐데. 평소에는 귀찮게만 여겼는데 막상 없으니 허전했다.

하지만 먹먹한 생각은 할머니의 말에 휘발돼 버렸다.

“허옇던 털이 이거, 다 재가 묻어 가지고 어쩌나.”

‘재?’

강아지가 의아해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까맣다니, 제 상태가 감이 안 잡혀 의아했는데 겉이 그을린 스테인리스 솥에 비친 모습을 보니 감이 잡혔다.

‘시, 시발….’

하얀 강아지 몸이 숯 검댕으로 꼬질꼬질해졌다. 가장 큰 고구마를 먹겠다고 아궁이를 들쑤신 업보였다. 앞발과 가슴 털은 아예 새까맸고, 얼굴은 샴고양이처럼 주둥이 근처와 가운데가 까매 얼룩 강아지가 다 됐다.

큰일이었다. 경험상 희성의 하얀 털은 때가 타면 굉장히 오래갔다. 희성은 할머니가 임시로 가져온 수건에 힘껏 몸을 비벼 봤지만 오히려 숯 검댕은 온몸에 골고루 퍼졌다.

‘아오, 윤치영이 보면 분명 놀릴 텐데.’

털을 닦아 보려던 희성은 결국 완벽한 시골 개의 모습이 된 채 망연자실하게 늘어졌다. 분명 윤치영이 봤으면 실컷 웃으며 귀여워 죽겠다고, 영원히 기록해야 한다고 동영상과 사진을 찍고 놀렸을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짜증 나지만, 그래도 희성은 또 자신이 윤치영을 떠올린 걸 깨닫고 머쓱하게 앞발로 이마를 비볐다.

‘…사실 분리 불안은 나였나 보네.’

그래도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애인을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생각한 강아지는 기운 없이 장작 위로 올라가 주저앉았다.

그렇게 아침 내내 윤치영 생각을 하며, 할머니가 장작을 다 팰 때까지 곁을 지켰다. 먼저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란 말도 들었지만 그래도 고구마도 받아먹었는데 정 없이 굴 수는 없었다. 강아지는 나름 작은 나뭇가지를 물어다 장작 위에 쌓아 두며 손을 도왔다. 그것만으로도 할머니가 크게 칭찬을 해 줘서 뿌듯했다.

그때 장작을 다 팬 할머니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덕분에 빨리했네. 자, 이제 아침 먹으러 가자.”

‘고구마가 아침이 아니었어요…?’

희성이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할머니가 배가 빵빵한 강아지를 한 손으로 들고 집 안으로 척척 들어갔다. 이미 배 속이 꽉 찬 희성은 아침은 안 먹겠다고 거부했다가, 아침도 안 먹은 게 아까운 음식을 왜 남기냐는 불호령에 밥마저 다 먹고 대자로 뻗었다. 윤치영을 그리워할 틈조차도 없는 호사 아닌 호사였다.

* * *

늑대산의 산지기는 많은 일을 했다.

희성이 아침밥을 소화할 무렵, 산지기에게 임신한 야생 늑대가 찾아왔다. 겨울 산에서 먹을 걸 구하지 못해 도움을 청하는 듯했다.

“강새이는 놀고 있거라.”

희성은 당연히 할머니가 별장에 있는 먹이를 내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직접 본체로 변해 산으로 향했다. 놀란 강아지가 그녀를 쫓아가려 했지만, 붉은 늑대로 변한 할머니는 강아지를 집 안으로 밀어 넣어 뒀다. 눈이 쌓여서 어차피 강아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희성은 집에서 기다리며 산지기의 일을 지켜봤다. 산지기는 겨울 산에서 먹을 걸 구하는 법을 알려 주고 늑대들의 서열도 정리해주는 듯했다. 그래도 희성 때문인지 금방 돌아와 줬다. 희성은 날렵하고 현명한 붉은 늑대를 뒤늦게나마 존경하는 눈으로 보게 됐다.

평온하게 하루를 보낸 뒤 찾아온 별장의 밤은 고요했다.

바깥에서는 눈이 그칠 기미를 모르고 내렸다. 아궁이를 들쑤셔 샴고양이 무늬가 생긴 강아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테라스 밖만 바라봤다.

‘윤치영은 내일 밤에나 귀국할 텐데….’

벌써 내일이면 윤치영의 귀국 날이었다. 그런데 눈이 이렇게 더 내렸다간 길이 막혀 일주일은 더 못 볼지도 몰랐다. 별장이 평화롭기만 해서인지 기다림의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거기다 몸이 아프니 애인이 더 보고 싶었다. 희성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윤치영에게 날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눈 내리는 걸 보기도 지루할 무렵, 강아지는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할머니는 뭐 하고 계신 거지?’

의아함에 거실로 가 보니 안락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책을 읽고 있었다. 희성은 혼자 있고 싶진 않아서 그녀의 발목을 앞발로 긁었다. 안아 달란 거였다. 이번에 혼자가 돼 봤던 희성은 사실 자신이 혼자 남겨지기 싫어한단 걸 깨달아 이런 요구가 자연스러워졌다.

그 마음이 전해진 건지, 아니면 강아지의 기운 없는 표정을 본 건지 할머니가 기꺼이 품에 안아 줬다. 희성은 그녀의 허벅지에 엎드려 멍하니 폭설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희성이 산을 올라올 때는 발목에도 못 미치던 눈이 이젠 무릎까지 쌓였다. 그만큼 강아지의 까만 눈에도 차곡차곡 걱정이 쌓였다.

‘윤치영 보고 싶은데… 이렇게 되면 오도 가도 못하겠네.’

떨어진 뒤로 희성은 윤치영의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은 더디게만 흐르고 폭설까지 내렸다. 희성은 어쩐지 자신이 반려를 매몰차게 대해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그때 강아지가 시무룩한 걸 보았는지,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원래 여긴 3월에도 자주 폭설이 내린단다.”

“…….”

“그래도 3월에는 눈이 빨리 녹아. 또 얼마 안 가 감쪽같이 봄 풍경이 펼쳐지겠지.”

‘그거 말고요….’

눈이 빨리 녹든 간에 당장 윤치영이 보고 싶은데. 강아지는 서러운 마음에 낑, 하고 고개를 푹 앞발에 묻었다. 몸도 아픈데 애인도 곁에 없으니 서글프기만 했다. 겨울 산의 경치도 멋졌고, 이따금 야생 늑대들이 놀러 오는 것도 색다르고 좋았지만. 희성은 뭘 해도 도통 기력을 차리지 못했다.

보다 못했는지 할머니가 책을 덮으며 물었다.

“왜, 심심하냐?”

‘시간 좀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눈도 녹고 윤치영도 빨리 볼 텐데. 희성은 어쨌든 뜻은 비슷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할머니가 귀엽다는 듯 강아지의 목을 살살 긁어 주더니, 바닥에 강아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재밌는 거 좀 보여 주마. 보면 너도 좋아하겠지.”

‘또 양말 입혀 주는 건 아니겠지….’

강아지는 별 기대 없이 뒤뚱뒤뚱 할머니를 따라 걸어갔다. 하도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어서 그새 살이 더 쪘다. 첫날 입은 수면 양말이 더 몸에 끼는 기분이었지만, 희성은 애써 무시한 채 할머니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그녀는 책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소중하게 보관해 둔 건지, 고급스러운 가죽 상자를 책상 바로 뒤에 있던 금고 옆에서 꺼냈다. 희성은 영문을 몰라 뒷발로 귀를 긁으며 얌전히 기다렸다.

곧 상자 안에서 두툼한 앨범 하나가 나왔다. 희성은 할머니가 가족 자랑이라도 하려나 싶었다. 역시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희성은 할머니가 앨범을 제 앞에 펼쳐 줄 때까지 별 기대감 없이 뚱하게 앉아 있었다.

“내 아들을 보여 주려고 꺼냈지.”

‘윤치영 사진인가? 아니면 다른 자식이 있는 건가?’

이왕 보는 거 윤치영의 어릴 적 사진이었으면 좋겠다. 윤치영은 희성에게 많은 걸 얘기해 주는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과거나 어릴 적 이야기만큼은 잘 해 주지 않았다.

희성은 자신과 정반대였을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분명 부잣집 도련님이니 풍족하고 행복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곧 강아지 앞에 앨범이 펼쳐지며 낡은 종이 향이 확 끼치고, 테두리가 낡은 사진첩이 펼쳐졌다.

“어때. 인물이 아주 좋지?”

‘어…?’

사진첩에는 온통 중학생쯤 돼 보이는 소년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결혼식이라도 간 건지, 호텔로 보이는 곳에서 격식을 차리고 할머니와 나란히 서 찍은 사진이었다. 키는 할머니와 비슷했는데, 화질이 안 좋은 사진으로 봐도 얼굴이 미형인데다 인물이 좋은 게 확연히 티가 났다. 커서 미남이 될 게 분명한 뚜렷한 이목구비였다.

‘윤치영은 이때도 예쁘게 생겼었네….’

윤치영을 알아본 희성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애인의 어릴 적 사진 좀 봤다고 꼬리가 살랑대며 흔들렸다.

사진 속 윤치영은 짙은 눈썹 아래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를 가졌는데, 한쪽만 찡그린 눈매에서는 날티가 났고 자신만만한 웃음이 돋보였다. 희성에겐 낯설면서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어쩐지 그는 늘 우아하게 다듬어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릴 적 사진을 보니 제법 사고도 많이 쳤을 법한 인상이었다.

그사이 앨범이 느리게 넘어가며 할머니의 설명도 이어졌다.

“이때는 주로 늑대 모습으로 지냈단다. 그때는 어린 게 야성이 너무 강해서 산에서 일주일씩 살다 오곤 했지. 지금 사람처럼 살고 있는 걸 보면 아주 대단해.”

‘와, 일주일….’

강아지는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앨범을 살폈다. 그녀도 사진을 하나하나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사진 속 소년은 조금씩 자라났다.

사진에는 아직 성장기인 듯한 늑대의 모습도 많았다. 새카만 늑대는 희성이 아는 모습보다 크기가 작고 날렵해 보였다. 사진은 다양했는데, 숲을 배경으로 늑대가 꿩을 물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사진도 있었고 다른 야생 늑대들과 하울링을 하는 사진도 있었다. 낯설게도 스포츠카 보닛 위에서 늘어지게 잠자는 모습도 있었다.

희성은 볼수록 신기해 이거 좀 더 보고 넘어가자고, 앨범이 넘어가기 전에 앞발로 팍 짚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잔웃음을 흘리면서도, 가만가만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내 핏줄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아들처럼 키웠지.”

애정 어린 말에 어딘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 의아함에 희성이 위를 올려다보자 애틋한 눈으로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타고난 야성도 축복이라 생각해 일족을 지키는 감시자가 되길 바랐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그 길을 원하지 않더구나.”

“…….”

“그래도 강새이 덕분에 이제야 감시자의 자리가 좋아졌다고 했지.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내 덕분에?’

강아지는 의아해졌다. 윤치영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데. 그중에서도 감시자의 일은 그저 익숙해할 뿐이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의아한 말이었다.

앨범이 뒤로 넘어갈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런데 사진 속 소년은 표정을 점점 잃어 갔다.

‘어…?’

희성의 살랑이던 꼬리도 움직임이 멈췄다.

자라날수록 윤치영은 눈에 띄게 피폐해졌고, 사진을 찍을 때 인위적인 미소조차도 짓지 않았다. 희성에겐 조금은 낯선 모습이었다. 이 시기에 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을지 궁금했다.

그 이야기는 할머니가 어렴풋이 해 줬다.

“사실 많이 외롭게 컸어. 재능이 아주 뛰어난 아이인데도 제 가족들한테 외면받았지.”

‘외면….’

희성은 교복을 입은 채 담벼락에 무표정하게 기대서 있는 윤치영의 사진을 보았다. 몸은 거의 다 자랐지만, 표정이 워낙 어두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윤치영의 입꼬리는 내려간 채 무표정했고 다크서클이 진회색 눈도 지쳐만 보였다. 적나라하게 말해 보자면, 그는 자신을 만나기 전보다도 불행해 보였다.

‘어릴 때 내가 지었던 표정이랑 비슷하네….’

희성은 윤치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분명 그는 유복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친엄마조차도 그를 경계했다. 거기다 강원도의 산중에서, 자유분방한 윤치영이 군 장교인 유모의 손에서 엄하게 컸을 걸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했다.

그때 할머니가 씁쓸하게 말했다.

“훈련 때문에 엄격하게 구느라 애정 표현을 많이 못 해 준 게 후회란다.”

‘애정 표현….’

희성의 강아지 귀가 예리하게 섰다.

갑자기 그간 윤치영에게 야, 너, 하며 못돼 먹게 굴고 함부로 대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윤치영은 자신의 반려인데. 자신도 언젠가 당연하게 여긴 그 표현들을 후회할 날이 올까?

희성이 생각에 빠진 사이에도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넌 나와 성격이 비슷하지만, 아주 똑똑한 아이지.”

할머니가 시무룩해진 강아지의 등을 괜찮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 넌 많이 표현해 주렴.”

“…….”

“그래야 감시자란 것이 지 애인 괜찮냐고, 수시로 늙은이에게 연락하진 않겠지.”

그 말에 희성은 그간 윤치영이 자신 대신 유모에게 연락했단 걸 눈치챘다. 거기다 그녀가 하고픈 말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겐 장모님 같은 존재인데, 제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투견으로서, 애인을 참하게 키워 준 장모님을 실망시킬 순 없었다.

왕.

약속의 표시로 희성은 대답과 믿음직한 행동을 보였다. 앨범 한쪽 귀퉁이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 콧잔등을 세게 찍었다. 수인 공통으로 쓰이는 믿음의 표식이었다.

그게 기특한지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희성의 머리를 세게 쓰다듬어 줬다. 희성은 이번엔 그 손을 밀어내지 않고 애써 굳세게 버티고 서 있었다. 참한 반려자를 키워 주신 장모님인데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흡족스럽게 웃은 할머니가 강아지를 예뻐하며 말했다.

“적당히 보고 나오거라.”

‘예.’

예의 바르게 왕, 하고 대답한 강아지는 방에 혼자 남게 됐다. 남은 앨범 페이지는 앞발로 힘겹게 넘겨 봤다. 그나마 페이지가 플라스틱으로 딱딱한 재질이라 넘기기 쉬웠다.

그중 희성은 대략 5년 전 날짜가 쓰인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꽤 오래전이었지만, 그래도 앨범에서는 가장 최근의 날짜였다.

‘그때면 윤치영이 막 감시자가 됐을 때일 텐데. 여기 왔었나 보네….’

사진은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처럼, 윤치영이 집 담벼락에 기대선 사진이었다. 그런데 유모와 함께 찍지 않고 혼자 정장을 세련되게 입고 웃고 있었다. 과거 사진과 비교해 보니, 특유의 유려한 미소가 어른이 되어 만들어졌단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곁에 아무도 없어서인지 사진이 허전해 보였다. 사진도 혼자 셀카로 찍은 게 티가 났다.

그중 앨범 마지막 장에는 미려한 글씨체로 쓰인 쪽지가 곱게 보관돼 있었다.

유모. 배웅 나오지 않을 거 알아서 쪽지라도 써 둬.

유모가 왜 화냈던 건지 알아. 내가 자해할 정도로 감시자의 길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두길 바랐던 거겠지.

그런데 유모. 이제 내겐 이 길밖에 없는 것 같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어.

어차피 난 늘 일족을 지키는 수장이 되고 싶어 했으니, 똑같이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감시자가 되려고 해.

언젠가 그런 사람이 생기면 감시자의 일을 좋아하게 되겠지. 다음에는 그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돌아올게.

그때까지 건강히 지내. 사랑해 엄마.

“…….”

희성은 오래도록 윤치영의 과거와, 어른이 됐을 때의 사진을 번갈아 봤다. 볼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는 언제부터 아픈 과거와 그로 인한 외로움을 미소로 숨기게 된 걸까.

희성은 조용히 뒤를 돌아 서재에 할머니가 걸어 둔 사진을 봤다. 따로 빼 둔 사진 속에서 고작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윤치영은 지금보다 어두워 보였다. 사춘기라기엔 느낌이 달랐다. 아직 어린 소년이 생에 많은 걸 포기한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폐가에 혼자 남았을 때를 보는 듯했다. 그가 안쓰러워 강아지의 눈이 올망졸망해졌다.

희성은 그가 유복해서, 풍족하게 탄탄대로만 걸으며 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신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가족에게 외면받았고, 원하지 않는 길을 걸어왔다. 그만큼 원하는 것도 자신과 같을 것이다.

‘분리 불안에 시달릴 때 조금 더 안아 줄걸….’

서로 떨어져 지내는 충격 요법보다도 한마디 애정 어린 말이 그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자라나는 동안 늘 혼자였던 자신처럼 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아지는 서글픈 얼굴로 사진 속의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그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윤치영 보고 싶어….’

지금이라도 윤치영에게 달려가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동안 서툴다고 표현 못 해 준 만큼 먼저 꽉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 여의치 않았다. 뉴스에서 눈은 오늘 밤 내내 더 내릴 거라 했다. 서글픔에 강아지가 사진을 보며 아웅, 하고 작게 울었다. 윤치영은 내일 아침이면 귀국할 텐데. 지금보다도 눈이 많이 쌓이면 산을 올라올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성은 그가 이토록 보고 싶은 적이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헬기에 매달려서라도 내려가고 싶었다.

그때였다.

아우우…!

한밤중 멀리서 아득한 멀리서 하울링이 들렸다. 강아지의 두 귀가 예민하게 섰다.

아무런 신호도 패턴도 없는 흔한 하울링이었다. 늑대산에서는 새소리보다도 흔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설마.’

하지만 감이 좋은 희성은 한 번에 야생 늑대의 하울링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강아지는 올망졸망하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전 들린 하울링은 분명 희성이 아는 늑대의 하울링이었다.

묵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하울링. 거기다 미묘하게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섞인 굵은 울음.

아우-!

분명 윤치영이었다.

희성은 확신하고도 믿기지 않아 테라스 밖만 애타게 바라봤다. 분명 윤치영의 귀국은 내일인데, 거기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밤중에 눈 내리는 산을 올라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야산에 올라올 생각을 하는 이상한 놈도 윤치영뿐이었다. 마침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하울링이 또다시 들렸다.

‘윤치영?’

확신한 강아지가 정신없이 테라스 문을 긁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더니 문을 열어 줬다. 쌩하니 밖으로 튀어 나간 강아지는 눈이 제 키보다 높게 쌓인 마당까진 못 나가고, 테라스의 계단 위에서 꼬리에 엉덩이까지 흔들며 마구 짖었다.

이윽고 폭설을 뚫고 검고 커다란 무언가가 다가왔다. 평소라면 야생의 무언가 나타났다고 도망갔을 법한 야수의 등치인데, 정체를 아는 희성은 앞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반길 수밖에 없었다. 검은 갈기와 온몸에 하얀 눈을 설탕처럼 묻힌 늑대. 희성은 눈발 사이로 그 형체만 보고도 그를 알아봤다.

‘윤치영!’

어떻게 이 폭설에 여기까지 오냐고 잔소리하고 싶었는데, 반가움이 먼저였다. 희성은 재채기를 연신 하면서도 마구 하울링하며 윤치영을 불렀다.

아웅, 아우!

반가움을 주체 못 한 희성이 제 모습도 잊고 마구 짖었다. 나 여기 있다고, 너무 기다렸다고 반가운 티를 못 내 안달이었다. 그 작은 하울링을 들었는지, 윤치영이 제법 음역대가 높아진 하울링으로 보답했다. 분명 그도 기뻐하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형체가 확실해졌다. 늑대도 눈발 사이로 하얀 강아지를 겨우 구분했는지 멈칫했다.

“……?”

그러더니 고개부터 갸웃거렸다. 희성은 자신이 재 때문에 샴고양이 무늬가 된 데다가 수면 양말을 짱짱하게 입은 것도 잊고 몇 번이고 하울링을 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겨우 반려를 알아봤는지 늑대가 슬슬 웃으며 턱턱 다가왔다. 눈이 제법 쌓였는데도 긴 네 다리로 손쉽게 걸어왔다. 희성은 그가 테라스까지 다가오자마자 코 인사를 하며 마구 몸을 비볐다. 인사를 나눈 둘은 따듯한 불이 켜진 야외 복도로 눈발을 피해 들어갔다. 다른 건물의 사우나와 이어지는 야외 복도였다.

몸에 묻은 하얀 눈을 털어 낸 늑대는 얼룩 강아지를 몇 차례 핥아 준 뒤, 서서히 사람 형으로 변했다. 훤칠하게 일어난 그는 벽에 걸려 있던 사우나 가운을 입으며, 한층 개운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야.”

무릎을 굽힌 그가 살갑게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얼어붙은 손에 강아지가 추워할까 제대로 만지지 못하고, 팔 안쪽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덥석 손목에 매달린 강아지를 그가 다른 수건으로 감싸 안아 주며 물었다.

“나 기다렸어?”

‘그럼 안 기다렸겠어? 그럼?’

강아지가 어쩔 줄 모르고 격렬하게 꿍얼거렸다. 도저히 기쁨을 못 숨겨 앞발을 종종거리기 바빴다. 윤치영 특유의 우아한 미소도, 낮고 말끔한 목소리로 하는 뻔뻔한 말도 전부 반가웠다. 다급해진 강아지는 끙끙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다행히 그 뜻을 금방 알아차렸는지, 윤치영이 쫀쫀하게 입혀져 있던 수면 양말을 힘겹게 벗겨 줬다. 몸을 힘차게 턴 강아지는 곧장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윤치영!”

반짝 강아지 귀를 달고 일어난 희성이 눈을 빛내며 안겼다. 등 뒤의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꼬리를 타고 날아갈 것 같았다. 희성에게 사우나 가운부터 입혀 준 윤치영은 꼬질꼬질한 그의 뺨을 닦아 주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강아지 왜 이렇게 좋아하지? 혼날 거 각오하고 몰래 일찍 온 건데.”

“혼날 거 알면, 이 밤에 왜 올라왔어. 왜, 왜?”

말만 구박조지 희성은 윤치영의 가슴팍에 턱을 댄 채 그를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올려다봤다. 반가움을 도저히 못 숨겨 윤치영의 어깨 곳곳에 세게 이마를 비비기 바빴다. 사랑스러움에 윤치영이 못 참고 희성을 껴안고 얼굴 곳곳에 입부터 맞췄다. 힘주어 껴안으며 하는 말에는 애정이 서려 있었다.

“진짜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으면 오라며?”

“아무리 그래도 야밤에 산을 올라오면 어떡해?”

희성이 좋아 죽는 티를 못 숨기면서도 할 말은 했다. 자신이 산을 올라오다가 죽을 뻔했어서 그랬다. 그렇게 실컷 걱정 어린 어투로 잔소리하니, 윤치영이 희성의 강아지 귀에서 꼬순내를 맡으며 투정을 부렸다.

“그간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와야 했어….”

“얼마나 못 잤는데?”

“1시간 겨우 잤나. 강아지가 코 고는 소리 안 들리니까 못 자겠더라고….”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윤치영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은근히 보였고 눈은 실핏줄이 다 서서 붉어 보였다. 그간 정말 잠을 못 잔 듯했다.

희성은 그가 안쓰러워져 아주 작게 그럼 잘 왔다고, 품에 안겨 속삭였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해 주고 싶었는데, 간지러운 표현을 말하기가 망설여져 괜히 윤치영의 등을 퍽퍽 내리치는 거로 마무리했다. 일단 날이 추워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 윤치영마저 감기에 걸리게 둘 수는 없었다.

거기다 등 뒤로는 테라스에 할머니가 나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눈은 아주 별꼴이라는 듯 바라보면서도, 입가에는 참 보기 좋다는 듯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윤치영이 맨발인 희성을 공주님처럼 가볍게 안아 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유모, 나 왔어.”

“오셨습니까, 도련님.”

열 걸음 밖에서 봐도 그녀의 얼굴은 지엄하게 굳어 있었다. 존댓말도 낯설어 곁에 있던 희성이 의아해할 때였다. 그간 윤치영과 꾸준히 보진 않아도 서로 아주 가까운 사이일 줄 알았다.

그때 윤치영이 희성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말했다.

“오랜만에 왔다고 화내는 거야.”

“무, 무섭다….”

희성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사이, 윤치영을 위아래로 쓱 훑은 유모가 한심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굳이 이 폭설에 눈발을 뚫고 산을 올라오셨군요. 이 끈기였으면 도박을 진작 끊었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결혼할 애인 생기면 데려오라며? 엄마 말 들은 거지.”

뻔뻔한 말에 결국 포기했다는 듯 유모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유하게 풀렸다. 그녀는 어서 들어오라는 듯 테라스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품에 어정쩡하게 안긴 꼬질꼬질한 희성을 보는 눈빛이 살가웠다.

“잘 왔다. 복덩이도 잘 데려왔고.”

“벌써 둘이 통성명했다며?”

“이미 내 새 아들로 들였지. 집에 네 방은 없으니 알아서 지내다 가거라.”

“큰일이네. 이 집 새 아들 꼬셔서 같이 자야 하나….”

둘의 대화를 들은 희성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이 싸우는 것 같은데, 분명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아옹다옹하고 있었다. 유모와 윤치영의 아슬아슬한 대화는 강아지의 장모님, 이란 부름에 일단락이 났다. 모처럼 따듯한 생기가 감도는 밤이었다.

* * *

유모와 도란도란 인사를 나눈 뒤, 윤치영은 몸을 녹이기 위해 따듯한 탕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눈 속을 헤매서 몸이 얼기도 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유모는 윤치영의 페로몬 수치를 직접 측정해 보더니, 서둘러 늑대로 변하라고 등을 세게 때렸다.

“페로몬 수치가 이렇게 치솟았는데 산을 올라올 생각을 하고 아주. 죽을 작정을 했구나.”

그르르.

늑대로 변한 윤치영은 희성이 잔소리를 하든 말든, 애인의 허리에 뺨을 대고 몸 곳곳의 체향을 맡기 바빴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씩 페로몬 수치가 떨어지긴 해서 희성은 늑대를 직접 씻겨 주기로 했다. 거대한 늑대의 몸체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워낙 윤치영이 희성을 배려하는 성격이라 손이 많이 가진 않았다.

희성은 새카만 늑대를 욕실로 이끌었다. 그새 드넓은 집의 구조가 익숙해져 정말 새 아들처럼 윤치영을 이끌게 됐다.

“이리 와, 너 몸 아직도 차가워.”

그르르….

챙겨 주는 게 대체 뭐가 좋다고 늑대가 희성 앞에서 앞발을 들었다. 늑대가 두 발로 서니 희성의 키보다 훨씬 컸다. 무거운 늑대를 겨우 안고 선 희성은 뺨이 축축해질 정도로 뽀뽀를 당하다가, 겨우 늑대를 탕 앞까지 이끌었다. 그래도 윤치영이 반가워 살벌한 애교를 부려도 달갑기만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늑대의 우아한 모피를 보던 희성이 놀란 얼굴로 검은 갈기를 들추며 물었다.

“너 왜 이렇게 하얀 털이 났어?”

원래 윤치영의 본체는 너무 새카매서 먹물에 푹 빠졌나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몸 곳곳에 하얀 털이 눈에 띄게 보여 걱정됐다. 새치처럼 무수하게 났는데, 아까는 털에 눈이 묻어 전혀 몰랐다.

윤치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꼬리만 살랑 흔들며 자꾸 희성의 티셔츠를 콧등으로 들췄다. 희성은 가만히 좀 있으라고 잔소리하며 평소 가장 좋아하던 까만 털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은 그간 재가 묻어서 회색 강아지가 된 거였지, 윤치영은 정말로 뿌리부터 하얀 털이 자라났다.

“늑대도 새치가 자라나…?”

의아해하는 사이, 해답은 목욕 수건을 가져다준 할머니가 말해 주었다.

“거 스트레스받으면 그런다.”

“아….”

“나약해 가지고. 내 그렇게 키운 적이 없는데… 쯧.”

유모가 잔소리하자 윤치영이 투레질하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늑대끼리는 말이 통하는지 유모가 어디 대드냐고 대꾸도 했다. 어투는 살벌해도 정겹기만 한 분위기였는데. 희성만큼은 윤치영을 서글프게 가라앉은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분리 불안 때문이구나….’

고작 3일 가까이 떨어진 건데,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외로워했을 윤치영의 나날이 눈에 선했다. 희성은 무작정 그에게 떨어져 보자고 한 게 후회됐다. 차라리 다른 대책을 고민해 보거나, 출장을 간 뒤에라도 그를 한시라도 빨리 부를 걸 싶었다.

속상함에 희성은 말없이 탕에 윤치영과 함께 들어가 그를 꼭 껴안았다. 따듯한 노란 전등 아래, 생각이 많아진 까만 눈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혼자 잠도 못 자고 타지에서 외로움을 견뎠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번에 희성은 그가 자신과 비슷한 과거를 가졌단 걸 떠올렸다.

윤치영은 늘 혼자였고 마음을 나눌 가족조차도 없었다. 그만큼 처음 무리를 이룬 상대와 떨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텐데. 자신이 그간 사랑을 과분하게 받은 것이 답답하다고 그를 멀리 떨어트려 놨다.

오히려 자신도 그의 애정 표현에 보답해 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윤치영의 분리 불안이 심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희성은 늑대를 품에 끌어안은 채 그의 몸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넌 나 없으면 하얀 늑대 되겠다.”

그르르.

서글픈 마음에 한 소리인데, 농담인 줄 알았는지 늑대가 희성의 뺨을 핥아 줬다.

그래도 희성의 우울한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혹독하게 군 게 미안했다. 자신이 살면서 겪은 게 그런 것뿐이라 똑같이 돌려주고 말았다. 매정함이 진정 무엇인지 안다면 반려만큼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문득 윤치영이 했던 말이 귓가에 스쳐다.

〈자긴 안 죽겠지만 난 아니야.〉

〈강아지가 나 두고 다른 여자 따라가면 어떡해….〉

그는 언제부터 우리 마음의 크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걸까. 후회스러운 마음의 크기만큼 희성은 그를 힘주어 껴안았다.

이제 희성은 자신이 애정 표현에 서툴다고 해서 꺼리지 않기로 했다. 보여 주고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아까도 그렇게 다짐해 놓고 윤치영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를 못 했다. 희성은 그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윤치영에게 애정을 온전히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낯간지러운 말은 하기 힘들었지만, 딱 윤치영의 반만큼만 보답해 줘도 될 것이다.

“야, 윤치영….”

애정 표현. 희성은 다짐을 했는데도 그를 부르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애인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건 당연한 건데. 좋아하는 만큼 말하고 보여 주는 건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간 희성은 상대를 좋아하는 티를 내면, 제 약점을 넘겨주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살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건 투견답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은 희성은 그간 느낀 제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해 보기로 했다.

“나, 그게… 있잖아.”

그르르.

희성이 말하길 머뭇거리자 늑대가 의아해졌는지 촉촉한 콧잔등을 목에 쿡 찍었다. 희성이 무언가 망설이는 건 드문 경우라 그런지, 아주 심각한 얘기를 하는 줄 아는 듯했다. 산만 한 것이 당장 몸을 털고 일어나는데, 강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디든 달려 나갈 기세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강아지의 서툰 고백에 특유의 뻔뻔한 반응도 못 보였다.

“이번에 떨어지고 느낀 건데… 나 이제 너랑 못 떨어질 것 같아.”

“…….”

드물게 늑대의 눈이 놀라 커졌다. 늘 태연하던 윤치영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내 희성이 눈도 못 마주치며 부끄러워하는 걸 확인하자, 늑대가 들떴는지 물속에서 서서히 풍성한 꼬리가 흔들었다. 희성의 고백은 늑대도 강아지로 만들었다.

희성은 부끄러움을 이겨 내고 더듬더듬 고백을 이어 말했다.

“어… 솔직히 너 없어도 살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르르….

“끝까지 들어 봐.”

늑대가 투정처럼 목을 울렸다. 어떻게 야수 같은 모습으로 애교를 잘 부리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희성은 그를 달래듯 윤치영의 갈기를 조몰락거리며 말했다.

“살 수 있어도, 좀… 산 것 같지가 않더라.”

“…….”

“감기 때문에 아파 죽을 거 같은데도 네 걱정부터 들었고… 고구마를 맛있게 먹다가도 네 생각만 났고. 또 양말을 옷이랍시고 입어도, 네가 보면 좋아했을 것 같단 생각부터 들더라.”

그 말에 늑대가 나른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행복해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희성에게 더 가까이 닿고 싶은지 고개를 희성의 품에 깊숙이 기댔다. 푹신한 감촉에 희성도 점점 마음에 물러져 속내를 수월하게 말하게 됐다.

“떨어져도… 내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네 생각만 나던데.”

“…….”

“나, 나도, 너 많이 좋아하나 봐.”

희성은 고백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에게 제 본심을 말하는 것뿐인데 오히려 자신의 과거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쑥스러워도 마음을 표현하는 게 주저하는 것보다 후회가 없는 걸 알았다. 후련한 마음에 희성은 편안하게 강아지 귀를 팔랑이며 웃었다.

고백에 대한 보답은 격렬하게 돌아왔다.

“응, 읍…!”

순식간에 인간형으로 변한 윤치영이 입을 맞췄다. 욕조 물이 출렁이며 누군가의 마음처럼 흘러넘쳤다. 희성은 처음으로 스킨십에 여유를 가지고 갈구하듯 혀를 섞는 윤치영을 달래 줬다. 그간 자신도 기다린 만큼 후회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 * *

모처럼 윤치영이 자다 깨 희성을 찾지도 않고 푹 잠들었다.

‘으으… 피곤해.’

다만 희성은 밤새 윤치영의 뽀뽀 세례와, 노팅을 한 차례 견뎌 낸지라 지칠 대로 지쳤다. 아침에 강아지 모습으로 깨어난 희성은 피로감에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반대로 윤치영은 아주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멍한 강아지를 보자마자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뭐야?”

…왕.

윤치영이 진지해져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드문 모습에 희성도 섬칫 긴장해 그를 흘겨볼 때였다.

“너… 왜 이렇게 귀여워?”

“…….”

“응? 왜 아침부터 귀여운 건데.”

‘미친 새끼.’

돌연 윤치영이 강아지에게 뺨을 비비며 치근덕거렸다. 희성은 간밤의 다짐도 잊고 애인에게 욕을 하고 짜증에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밀어내진 못했다. 사실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 감기몸살이 잔류하기도 했고, 어젯밤 늑대를 씻기고 스킨십을 감당하느라 온 체력을 빼앗겼었다.

한참 침대에서 평화롭게 뒹굴던 둘은 슬슬 배고픔을 느낀 후에야 일어났다. 뒤늦게 사람형으로 변한 희성은 거울을 보곤 자신이 첫날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보다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건 식탁에서 마주친 유모도 똑같이 생각한 듯했다. 그녀는 희성의 말이 아닌 몰골을 보고 혀를 찼다.

“아주,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를 물어 와 가지고….”

“저 괜찮은데….”

“괜찮긴 무슨.”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이었다. 희성이 의연하게 젓가락을 쥐는데, 한쪽을 떨어트려 댕그랑거리는 처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희성은 장모님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 조금 속상했다.

유모는 그런 희성에게 포크를 가져다주더니, 마침 환하게 구김살을 편 얼굴로 식탁에 앉은 윤치영을 노려보다가 마구 등을 때렸다. 이 도둑놈아, 하며 때리는데 희성은 참 좋은 구경이라 여기며 포크로 소시지를 찍어 먹었다. 윤치영이 자신 외의 누군가에게 무력하게 얻어맞는 건 처음 봤다.

등이 붉어질 정도로 얻어맞은 뒤에야 식탁에 앉은 윤치영이 넉살 좋게 투덜거렸다.

“내가 애인 괴롭힐 리도 없는데. 엄마도 너무하네….”

“네가 직접 강새이 꼴을 보고 말해 봐라.”

‘또 저러네….’

얼마나 함께 지냈다고 희성은 이제 둘이 투덕이는 소리가 익숙했다. 오히려 윤치영이 편안해 보여 보기 좋았다. 가끔 듣기로, 윤치영은 유모를 엄마라고 부르던데. 정작 그가 친엄마에겐 그렇게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희성은 이곳이 가장 자신이 신경 써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간 희성도 유모에게 정이 들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냥 새 아들 해야지.’

희성은 속 편하게 생각하며 유모가 내밀어 준 생선구이를 싹 발라 먹었다. 밥도 아주 크게 떠먹고 천천히 먹는 윤치영에게 반찬도 골고루 넘겨줬다. 유모는 아주 반려를 잘 선택했다고, 복스럽게 먹어 예쁘다고 실컷 칭찬해 줬다. 희성은 장모님에게 점수를 딴 이유가 귀여움인 줄도 모르고, 평소처럼 윤치영의 손이 아닌 제 손으로 밥을 먹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낮 동안 유모와 도란도란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늑대산의 별미인 딸기도 먹었다. 한참을 유모와 보낸 둘은 해가 져 갈 즈음에야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눈이 쌓여서 위험할 텐데. 뭐 더 챙겨 줄 거 없나?”

“아냐, 유모. 눈이 빨리 녹아서 괜찮아.”

“너 말고. 강새이 위험할까 봐 그런다.”

“새아들만 챙겨 주고. 너무하네….”

윤치영은 딱히 서운해하지도 않으면서 엄살을 부렸다. 희성도 괜찮다고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눈이 얼추 녹기도 했고, 희성이 처음 올라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면 윤치영의 별장까지 가는 데 30여 분만 걸으면 됐다.

그렇게 문에 섰을 때는 윤치영의 손에 바리바리 짐이 들려 있었다. 희성도 작은 짐을 하나 들고 유모에게 힘차게 인사했다.

“자, 장모님. 다음에 또 올게요. 감사했습니다.”

몸을 숙여 강아지 귀를 팔랑대고 인사하니 유모도 윤치영도 크게 웃었다. 하지만 희성은 오히려 들뜬 얼굴이 됐다. 이제야 윤치영의 가족다운 가족을 만나서 좋았다. 꼭 자신에게 가족이 생긴 것 같았다. 새로우면서도 희한한 기분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는 위험하다고 짐을 굳이 한 손에 들고 서로 손을 잡고 내려왔다. 혼자 올라올 때는 힘들고 무섭기만 하던 산길이 윤치영과 함께 걸으니 예뻐 보였다. 푸른 초목도, 주변에서 호기심에 총총 따라오는 야생 늑대들도 고맙고 좋았다. 윤치영에게 늑대들이 자신을 구해 줬다고 말했더니, 포상으로 소고기를 줘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무언가 떠올렸는지 윤치영이 물었다.

“근데 강아지.”

“응.”

“내가 별장에 숨긴 보물은 찾았어?”

“어? 응.”

희성은 꼬리를 살랑대고 흔들며 대답했다. 대답은 무심했지만, 사실 새우짱 과자가 꽉 찬 별장을 생각하니 내심 들떴다. 내친김에 윤치영에게 별장에서 일주일간 실컷 지내자고 할까 싶었다. 뭐든 좋은 강아지는 윤치영의 손을 걷는 방향대로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새우짱 꽉 찬 거 봤어. 내가 저번에 꾼 꿈대로 꾸며 둔 거 맞지?”

지난번 희성은 꿈에서 새우짱 과자 밭에 빠졌다고 말했었다. 별 쓸데없는 이야기라 흘러가듯 말했었는데, 윤치영이 유독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윤치영은 희성을 귀여워하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이마를 톡 기댔다.

“보물이 고작 과자인 줄 알았어?”

“어? 아니었어?”

“주방 테이블 못 봤나 보네….”

윤치영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귀엽다는 듯 희성의 머리 위로 돋은 강아지 귀를 콱 깨물기도 했다. 희성은 영문을 몰라 대체 뭐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새우짱 과자가 숨겨 둔 보물이었어도 충분히 만족했는데 뭔가 더 있었나 보다. 희성은 그럼 과자 더미 사이에 보석이라도 숨겨 뒀나 싶었다.

산을 조심조심 내려가며, 윤치영이 스무고개처럼 힌트를 내주기 시작했다.

“별장에서 본 것 중에서 간식보다 더 값진 걸 말해 봐.”

“어… 게임기?”

“더 좋은 거.”

“엄청 큰 TV.”

점점 해가 떨어지는 산은 평화로웠다.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윤치영은 계속 더 좋은 거, 더 큰 거를 말해 보라 했다. 답을 이어 가던 희성은 집에서 본 가장 값비싼 걸 말하게 했다.

“그럼… 내가 느낌 좋다고 말했던 그 미술품?”

“그것도 비싸긴 한데. 더.”

“대체 뭔데? …설마 스포츠카야?”

희성이 눈이 초롱초롱해진 채 우뚝 멈춰 섰다.

별장에 주차된 한 폭의 그림 같던 새파란 스포츠카가 떠올랐다. 당연히 윤치영의 차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게 선물이었을까. 희성은 기대감에 하얀 꼬리가 위로 바짝 섰다. 윤치영을 보는 기대감이 서린 까만 눈도 커진 채 반짝였다.

윤치영은 그런 희성을 마주 보다가, 은근히 웃어 보이더니 예상외의 말을 했다.

“더 큰 거.”

“……?”

희성의 미간이 실망과 기대감 어딘가에서 굳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잘게 웃던 윤치영은 그런 희성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별장과 차, 모두 강아지 거야.”

“…….”

“전부 우리 강아지를 위해 내가 만들어 둔 선물.”

“…어.”

희성의 뒤로 바짝 누운 강아지 귀가 바르르 떨렸다.

그제야 호화 별장의 특이한 점이 떠올랐다. 어느 가구든, 혹은 문이든. 아주 작은 강아지도 손쉽게 다닐 수 있도록 계단이 놓여 있었다는 것을. 거기다 집에 놓인 미술품도 희성이 그 예전 무심코 마음에 든다고 말한 것이었고, 차도 꿈의 차라고 떠들어 대던 것이었다. 거기다 새우짱에 빠진 꿈을 꿨단 말대로 다용도실은 과자로 꽉 차 있었고. 희성이 하고 싶다고 한 온갖 게임기와 전용 풀장마저 있었다.

“유, 윤치영….”

희성은 살면서 처음으로 너무 기쁘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꼬리마저도 고장 난다는 걸 알았다. 늘 솔직하던 꼬리는 온 솜털이 선 채 끝만 간신히 까딱였다.

한참 그 모습을 즐겁게 본 윤치영이 희성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눈을 휘어 웃었다.

“나 자기 집에서 재워 주라.”

내 집. 처음으로 듣는 낯선 단어에 희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꿈의 집이라 생각한 그 동산이 자신의 것이었다니. 현실을 체감하자 겨우 고장 났던 꼬리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만큼 들떠 그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멀리서 자신의 새집이 보이고 있었다. 아름답고, 마당에는 윤치영의 늑대들이 지켜 주는 집이.

혼이 나간 희성은 어제의 다짐을 자신도 모르게 따랐다. 윤치영의 키가 큰 뒤통수를 올려 보던 강아지가 너무 들떠 더듬대는 어조로 말했다.

“넌 진짜, 진짜. 교활한 놈이야.”

“왜?”

“내가, 너. 엄청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잖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좋게.”

격렬한 고백에 윤치영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웃음 끝에 버드키스를 나눈 둘은 별장으로 꼬리를 살랑대며 걸어갔다. 희성은 가는 내내 기쁨에 횡설수설 본심을 다 말했다. 늙어서는 여기서 너와 평생 살고 싶다는 고백도 멋없이 했고,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드라이브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희성의 진심 중에 치영이 가장 좋아한 말은 ‘별장이 아무리 멋져도 너랑 있어야 좋다.’는 고백이었다. 이제 애정 표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희성은 오히려 엄하고 사납게 굴 때보다도 올곧고 단단해 보였다.

덕분에 윤치영은 분리 불안을 고쳐 보자고 떨어져 있던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희성과 떨어지는 건 몹시 고통스럽긴 했지만, 어린 애인의 성장을 볼 수 있단 것만으로도 평생을 위한 투자는 성공적이었다. 평생. 기다림의 끝에, 이제 윤치영에게 남은 달콤한 시간은 끝없는 초목처럼 무성해 보였다.

〈강아지는 건드리지 마라〉외전 마침166796263528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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