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견례는 이른 저녁으로 잡혔다.
희성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기본적인 단장을 하고 나갔다. 윤치영은 평소와 달리 조금 분위기가 덤덤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강아지를 살뜰히 챙겨 손을 잡고 별채를 나섰다.
상견례 자리는 늑대 영역의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 옆쪽에 예쁜 연못을 낀 아름다운 곳이었다. 희성은 막상 상견례 자리에 가니 긴장됐지만, 마침 눈이 내려 꼬리를 살랑 흔들며 돌길을 걸었다. 예전부터 눈을 좋아한 희성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상견례에 모인 수인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자리에는 감시자와 희성, 수장과 양혜찬. 그리고 윤치영의 어머니가 모여 앉았다. 식탁은 몹시 넓었고 고급 한식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희성은 탱탱한 새우를 봐도 영 식욕이 돌지 않았다. 주변에서 팽팽하게 감도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상견례 자리라기보단 싸우러 만난 것 같은데.’
희성은 눈치를 보듯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수장과 감시자가 서로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고, 양혜찬은 여전히 윤치영의 눈도 못 마주친 채 테이블 어딘가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윤건영이 태연한 얼굴로 비꼼 같은 칭찬을 했다.
“이렇게 보니 네가 견인족이랑 잘 어울린다는 건 알겠군.”
“누나도. 둘이 언제 약혼반지까지 나눴나 몰라. 내가 오작교 역할을 해서 그런지 보기 좋네.”
둘은 평범하게 대화하는 듯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윤건영의 검회색 눈빛은 한결같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윤치영도 미소만 머금고 있지 회색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나마 윤치영의 어머니가 가운데 자리 잡아 상견례 자리를 주도했다. 아름답고 인자한 그녀는 희성이 다른 종족임에도 편견 없이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다른 종족인 수인이 이런 자리에 온 건 처음이구나. 편하게 먹으렴.”
“가, 감사합니다.”
희성은 어렵게 대답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내숭이나 애교는 전혀 못 부리는 성격이라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내심 희성은 도박장에서 일하며 기본 테이블 매너를 익혀 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 그랬다면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성격 때문에 밥 먹는 것부터 어색해 보였을지도 몰랐다.
나름 여유가 생긴 희성은 최대한 윤치영에게 조력하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줬다. 서로 좋아 죽는 모습을 보여 주기였다.
“고기 좀, 먹어.”
희성이 스테이크를 잘라 윤치영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 태도가 몹시 어색했다. 평소 희성은 식사 시중을 받기만 했지 윤치영에게 권하는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희성은 이런 마음에도 없는 살가운 짓을 잘 못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윤치영은 자리에 온 뒤 처음으로 진짜 웃음을 피식 지었다.
이내 그는 희성을 녹아내릴 듯한 다정한 눈으로 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먹여 줘. 평소처럼.”
‘…시발.’
희성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그를 언짢음과 경악이 담긴 눈으로 노려봤다. 진심이냐고 묻는 거였다. 하지만 윤치영은 왜 그러냐는 듯 뻔뻔하게 희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자.”
결국 희성은 포크로 윤치영을 찌르고 싶은 만큼 고기를 콱 찍어서 먹여 주었다. 육즙이 넘쳐흐르는 고급 스테이크가 윤치영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기를 씹는 내내 희성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희성이 얼떨떨하다 못해 질린 눈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다정다감한 연인의 표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광경에 속았는지 윤치영의 어머니가 흐뭇하게 말했다.
“치영이랑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아, 그… 네.”
“상견례 날짜가 빠르긴 했는데, 혹시 우리에게 보여 줄 다른 가족은 없니?”
“…….”
가벼운 물음에 희성의 까만 동공이 굳었다. 가족. 희성에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질 거 같은 단어였다.
다행히 대답은 윤치영이 대신해 줬다. 살벌한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이미 만났을 텐데….”
윤치영이 이번엔 양혜찬 쪽을 바라봤다. 회색 눈을 마주치자마자 양혜찬의 얼굴이 사색이 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금발 머리칼 끝이 떨리는 게 애처로워 보였다. 지난번 희성에게 딸기 주스를 맞을 정도로 거들먹거리던 태도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개의치 않고 윤치영이 이어 말했다.
“우리 강아지 5년간 키운 사람.”
“무슨, 소리인지….”
그래도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는지 양혜찬이 윤치영의 말을 받아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희성이 보기에 여전히 그는 윤치영을 두려워하는 걸 숨기지도 못했다. 상처도 욱신거리는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볼품없게 놓쳤다. 결국 곁에 앉아 있던 수장이 직접 그의 식사를 도왔다.
윤치영은 그 광경이 퍽 우스운지 의자에 느긋이 등을 기대며 물었다.
“우리 도련님은 도박 좋아해?”
멸시라 느꼈는지 양혜찬이 사납게 눈을 치떴다.
“그런 더러운 놀음은 안 좋아합니다.”
양혜찬은 이번만큼은 윤치영을 보고 떨지 않았다. 평소 윤치영이 도박을 즐긴다는 소문이 퍼진 걸 생각하면 그를 비방하기 위해 한 말인 듯했다.
하지만 역시나, 윤치영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그럼 박건태랑 무슨 즐거운 얘기를 한 거야?”
“아무 얘기도 안 했습니다.”
“아….”
대답이 이어지기도 전에 윤치영이 테이블 아래로 희성의 손을 꼭 쥐었다. 큼직한 손은 따듯했지만, 정작 윤치영은 교활하게 웃으며 양혜찬을 압박하고 있었다.
“도박장 실장을 어떻게 알길래 아무 얘기도 안 했단 말부터 나오지….”
‘얘도 성격 참….’
그 대화를 듣던 희성은 올 게 왔다 싶었다. 윤치영이 아무런 눈치도 안 보고 양혜찬부터 압박해서 놀랐다. 그건 마찬가지인지, 양혜찬의 눈동자가 굳은 게 보일 정도로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희성은 내심 놀랐지만, 괘씸함에 양혜찬을 사납게 노려봤다.
역시 양혜찬은 박건태와 연관돼 있었다. 하긴. 그날 병원에서 양혜찬과 도박장의 개들을 마주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을 테고, 박건태가 수장 쪽에서 준 제안을 놓칠 리도 없었다. 희성은 비열한 그들의 놀음에 제가 다 질릴 지경이었다.
“윤치영.”
그때 수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윤치영을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그저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누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남매 사이에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의 어머니마저도 어떻게 끼어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윤건영이 여상하게 말했다.
“도박 노름에 빠져 살던 네가 이렇게 반려가 생겨 이런 자리에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나도 몰랐어.”
윤치영은 잔을 우아하게 마시며 대답했다. 내심 희성은 그가 한결같이 대화에서 우위를 점한 것 같아 안심됐다. 안심한 희성은 마음껏 양혜찬을 경계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상견례만 끝나면 양혜찬에게 직접 보복하겠단 거친 생각도 할 무렵이었다.
그때 이어지는 윤건영의 말에 처음으로 윤치영이 동요를 보였다.
“아버지도 네가 견인족을 반려로 삼겠다고 데려온 걸 직접 봤으면 참 기뻐하셨겠지.”
“…….”
삽시간에 윤치영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평소 미소가 가라앉는 것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그의 무표정은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도 소름 돋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왜 이러는 거지…?’
희성은 탁자 아래를 살폈다. 뭔가 이상했다. 자신의 손을 쥔 윤치영의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었다. 평소 부드럽기만 하던 윤치영의 눈매는 사납게 치떠져 있었고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희성에겐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뒤늦게 윤치영이 누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아버지도 아주 기뻐하셨겠지.”
윤치영이 밭은 숨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반대편 손으로 잔을 쥔 그는 한참 뒤에야 한숨처럼 웃었다. 잔에 남은 붉은 와인이 가늘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가 식인을 해도, 감시자가 된 걸 축하한다고 하신 분이니까.”
‘뭐…?’
희성의 눈이 커졌다. 윤치영의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식인을 해도, 감시자가 된 걸 축하한다고 한 아버지라니. 대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도 안 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할 수도 없었다. 변화를 느낀 희성이 조급하게 그를 불렀다.
“윤치영?”
윤치영이 감정 제어가 안 되는지 반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송곳니가 빠드득대며 돋아났고 회색 눈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목덜미에 힘줄마저 툭 불거진 채 숨을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나 야수와도 같았다. 거기다 힘 조절마저 하기 힘든지 손에 쥐고 있던 잔마저 부서져 버렸다.
챙그랑!
“치영아!”
“야, 너…!”
어머니와 희성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수로 돌아간 윤치영을 보곤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희성만이 그의 손에서 황급히 깨진 잔을 빼앗고 상처를 살폈다. 그나마 손바닥의 굳은살에 조각이 스쳐 피가 많이 나진 않았지만, 피가 곳곳에서 나서 위험해 보였다.
“구급상자 없어요? 어서 누가 좀…!”
다급하게 외친 희성이 주변을 돌아봤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광경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고용인을 포함한 모두가 멀찍이 떨어진 채 윤치영을 두렵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장만이 자리에 그대로 앉아 무표정하게 동생을 응시하고 있었고, 희성이 유일하게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이리 나와, 치료하러 가자.”
결국 희성은 억지로 윤치영을 데리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치료도 고용인들이 두려움에 다가오질 못해서, 구급상자를 건네받아 직접 치료해 주었다.
그때까지도 윤치영은 고통스럽게 거칠어진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희성은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먼 과거 자신이 아파서 엄마가 울 때처럼.
* * *
“화나면 차라리 잔을 던지지. 왜 네 손안에서 깼어….”
희성이 타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지 축 처진 귀 아래 얼굴에는 속상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윤치영의 손은 희성이 봐주고 있었다. 그동안 윤치영은 희성의 어깨에 콧날을 묻은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직 페로몬이 안정된 상태가 아니라 그런지, 감정이 크게 동요하자 몸이 버티질 못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더 충격을 줬다간 페로몬 쇼크가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희성은 그가 두렵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애타게 기대고 있는 윤치영이 안타까웠다. 그의 가족들이 윤치영을 대하던 모습을 보니, 왜 한낱 하룻강아지인 자신에게 온 마음을 주고 기댔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때 윤치영이 뜨거워진 이마를 희성의 어깨에 비비며 말했다.
“강아지…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그럼 걱정 안 되겠냐?”
희성이 구박조로 말했다. 하지만 윤치영은 오히려 좋다는 듯 가늘게 웃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반짝였지만, 다행히 희성과 단둘이 남아서인지 조금 진정이 된 듯했다.
그래도 그가 걱정스러워 희성이 조심스레 권했다.
“너 그냥 본체로 돌아가 있을래…? 정신 온전하게 돌아갈 수 있겠어?”
“그럴 순 있을 것 같긴 한데… 뭐 하러 돌아가?”
윤치영은 몸이 뜨거운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희성의 몸에 둘러 주었다. 신열이 올라 거칠어진 숨결과 붉어진 입술이 유독 야릇해 보였다. 그는 분명 힘겨울 텐데, 아첨이 섞인 어투로 희성의 허리를 슬슬 만지며 말했다.
“자기가 몸으로 나 진정시켜 줄 수 있잖아.”
“…너 다쳤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
희성이 다그치며 손에 마저 약을 발라 줬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지만, 이럴 때만큼은 한결같이 애교스럽게 구는 윤치영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애써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게 보여서 더 안쓰러웠다.
일단 희성은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더 윤치영이 편안해하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일단 별채로 돌아가자. 이리 와.”
다행히 윤치영은 순순히 희성을 따라나섰다. 이른 저녁, 아직 해가 지고 있어 그래도 주변이 조금 밝았다. 희성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윤치영을 데리고 눈길을 걸어갔다.
그 뒤로 윤치영이 뒤를 돌아보며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시선 끝에는 정확히 수장이 지내는 본채가 있었다.
윤치영은 불빛이 들어온 창문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희성이 말을 걸자 평소처럼 굴었다. 강아지 앞에서 공격성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 * *
다시 별채로 돌아왔을 땐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별채 앞쪽 고즈넉한 마당에서 희성은 윤치영의 손을 잡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풀 내음이 섞인 찬 공기가 폐부까지 들어찼다. 살벌하던 공간을 나온 뒤 피까지 봐서 계속 긴장 상태였는데, 별채로 돌아오자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좀 진정됐나 보네.’
그건 윤치영도 마찬가지인지, 아까보단 한결 호흡이 안정된 채 희성의 손을 꼭 붙잡고 서 있었다. 그래도 희성은 오늘만큼은 자신이 윤치영을 진지하게 돌봐주자고 마음먹었다.
심각해진 희성이 신경 쓰이는지, 윤치영이 갑자기 손을 내려 마당에 쌓인 눈을 크게 뭉쳤다. 손을 다친 걸 알아서 희성이 말리려 했지만, 윤치영이 눈 뭉치를 둥글게 만드는 게 더 빨랐다.
“강아지… 이거 봐.”
그는 맨손이 차갑지도 않은지 샤워볼만 한 눈덩이를 희성에게 슥 내밀었다.
“자기 본체.”
“…야.”
희성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분노로 열이 올라 머리 위로 하얀 강아지 귀가 튀어나왔다.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고 싶은데, 눈 뭉치와 크기나 색깔이 제법 비슷하긴 해서 반박할 수가 없어 억울했다.
그래도 강아지는 참지 않고 성질을 부렸다. 윤치영이 내민 눈덩이를 뺏어 그의 얼굴로 던졌다. 얄밉게도 윤치영은 요령 좋게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역시 체구답지 않게 날렵했다.
“쓸데없이 체격만 큰 게!”
희성이 굳이 늑대의 단점을 찾아 놀리며 다시 눈덩이를 던졌다. 하지만 윤치영은 타격은커녕 그저 귀엽다는 듯 웃더니, 희성을 품에 크게 껴안아 가두려 했다. 그것조차 얄미워 희성은 잽싸게 강아지로 돌아갔다.
왕!
계속 티는 안 냈지만 사실 희성은 눈을 좋아해 금방 신이 났다. 강아지는 접힌 귀를 팔락대며 눈 위를 팔딱 뛰어다녔다. 그 뒤로 작은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뒤이어 윤치영도 늑대로 변해 희성을 뒤쫓았다. 강아지는 처음에는 진심으로 기겁해 죽을 듯이 도망쳤지만, 이내 검은 늑대의 콧잔등에 푹신한 엉덩이가 밀려 발라당 넘어졌다.
그 위로 거대한 늑대가 코로 강아지의 몸을 핥고 마구 비볐다. 간지러운 장난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강아지가 아르릉대며 앞발로 코를 때리고 도망쳐도, 늑대는 금세 강아지를 뒤쫓아 몸을 뒤집어 분홍 배를 봤다.
‘간지러워!’
눈 위에 발라당 드러누운 강아지가 혀를 내민 채 활짝 웃었다. 따라 눈 위에 엎드린 늑대가 평소처럼 뽀뽀를 하듯 계속 입을 비볐다. 희성은 한참을 간지러움에 웃다가, 힘차게 일어나 반대로 늑대를 뒤쫓기 시작했다.
왕!
거대한 늑대가 하룻강아지에게 쫓긴다고 꼬리마저 내린 채 도망쳤다. 희성은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뒤쫓아 늑대의 긴 꼬리를 공략했다.
투견의 성질머리는 어디 안 갔는지, 꼬리를 제대로 물자마자 강아지가 온몸으로 매달렸다. 그거에 놀라 늑대가 꼬리 쪽으로 머리를 빙글 돌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강아지에게 항복하듯, 옆으로 앉아 강아지 몸체만 한 앞발로 살살 강아지를 건드렸다. 의기양양해진 강아지는 뒤늦게 꼬리를 놔주고, 늑대의 우아한 갈기에 푹 파묻힌 채 그를 바라봤다.
빠르게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는 뒤늦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함께 체온을 맞댄 둘 위로 고요하게 눈이 내렸다. 희성은 검은 늑대의 갈기에 뺨을 댄 채, 까만 눈으로 늑대를 바라봤다.
‘…그래도 좀 괜찮아졌나 보네?’
이렇게 보니, 눈이 내리는 겨울과 검은 늑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희성은 새하얀 세상을 배경으로 두고 우아하게 앉은 늑대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의 본체가 이런 모습이면 어떨까 싶은 부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윤치영이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숨기고 살았던 게 아쉬웠다. 진작 본체를 봤다면 그를 더 빨리 좋아하게 됐을지도 몰랐다.
강아지는 생각이 그에게 전해지는 것도 아닌데, 괜히 쑥스러워져 다시 도망치듯 일어나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그 뒤로 늑대가 턱턱 걸어와 강아지의 몸을 별채 쪽으로 밀었다.
‘아, 왜!’
이제 그만 놀라고 하는 건지, 새카만 늑대가 강아지를 자꾸만 콧잔등으로 밀었다. 그 뜻을 눈치 못 챈 희성이 다시 줄행랑을 치자, 늑대가 몇 걸음 만에 강아지를 턱턱 따라잡아 아예 뒷덜미를 물었다.
깨갱!
세게 물지도 않았는데 놀란 강아지가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아직도 늑대의 입질은 트라우마였다. 윤치영도 움찔 놀라 입을 뗐다가도, 다시 슬쩍 목덜미를 핥아 주고 강아지의 뒷덜미를 물어 직접 옮겨 주기 시작했다.
‘노, 놀라라.’
강아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늑대의 입에 매달려 갔다. 시야 아래 하얗게 눈이 쌓인 마당이 보였다. 혹여 늑대가 자신을 놓칠까 불안해져 강아지는 꼬리를 가랑이에 만 채 얌전히 매달려 갔다.
곧 담을 앞둔 늑대가 한 번 힘껏 도약했다.
윤치영이 향한 곳은 별채에서 야외와 이어져 있는 온천이었다. 분명 돌담으로 막혀 있는 곳인데, 희성의 키만 한 담을 늑대가 손쉽게 타 넘었다. 그 날렵함과 힘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러다 감기 걸려.”
온천을 앞둔 윤치영이 반수 상태로 변했다. 어깨는 넓게 벌어져 직각으로 떨어졌고, 근육이 빠듯하게 단련된 근사한 알몸이 보였다. 강아지는 뚱하게 그의 훤칠한 몸을 올려 보다가, 자신도 반수로 변했다. 마른 근육이 자리했지만 소년 같은 자신의 뽀얀 몸이 불만스러웠다.
“자기도 다친 상태로 신나게 놀았으면서….”
투덜대며 희성은 따듯한 물을 몸에 끼얹었다. 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따듯한 온천을 보니 어서 들어가고 싶어졌다. 살면서 온천욕은 처음이었다.
간단히 씻은 뒤, 윤치영이 희성을 안고 온천에 들어갔다. 온천은 별로 깊진 않아 윤치영이 앉으면 가슴팍까지 물이 찼다.
그의 무릎에 앉은 희성은 편안하게 그에게 등을 기댔다. 살면서 늘 긴장하며 살아서인지, 이런 평화로움이 낯설었다.
그리고 이런 평화로움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희성은 윤치영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댄 채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야, 윤치영….”
대답 대신 그는 희성의 뺨과 하얀 목덜미 곳곳에 입을 맞췄다. 둘만의 시간을 기다렸는지, 무척 애달은 얼굴로 희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정 어린 키스에 시달리며, 희성은 그에게 하려는 질문을 망설였다.
대체 과거에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윤치영에게 역린인 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지금 불안정해 보이는데, 더 자극했다간 그가 페로몬 쇼크를 터트릴 것만 같았다.
결국 희성은 다른 질문을 했다. 그를 위해서 궁금한 것쯤은 참을 수 있었다.
“…양혜찬은 어떻게 할 거야?”
분명 아까 자리에서 양혜찬이 박건태에게 협력한 단서를 얻었다. 윤치영의 교활한 성격이라면 이미 그 단서를 조직원들을 시켜 알아냈을 것이다. 희성은 최근 윤치영이 보고를 듣는 일이 많아진 걸 알기에 확신했다.
윤치영이 희성의 물기가 서린 뺨을 쓸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강아지 건드린 값은 치르게 해 줘야지.”
“수장이 가만둘까?”
“글쎄….”
윤치영은 매끄럽게 웃으며 희성을 뒤에서 껴안으며 귓가를 깨물어 댔다.
“오히려 방해하면 더 좋지. 같이 처리할 구실이 되니까.”
“…….”
희성은 그의 담담한 미소를 바라보다가, 차마 어여쁜 회색 눈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이상했다. 희성은 그가 복수를 해 준다 해도 마냥 들뜨고 기쁘지 않았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윤치영은 자신의 친누나여도 ‘처리’를 하겠다는 건데, 희성은 그가 직계 가족만큼은 동족상잔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희성은 아예 박건태에게 복수할 생각도 안 했다.
다만 윤치영이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해치고 고통스러워질까 봐 그랬다.
두 사람의 근본은 갯과 동물이다. 무리를 보호하고 함께하려는 본능을 강하게 타고났다. 그 증거로 희성은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버리고 간 걸 알아도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어서 힘들었다. 자신을 먼저 배신한 박건태에겐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친누나를 적으로 둔 윤치영은 아무리 감시자라 해도 심정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윤치영.”
희성은 물속에서 윤치영의 손을 꼭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그냥… 잠시 둘이 멀리 갈까?”
“어디로?”
“…모르겠어.”
자신이 말했지만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희성은 지금 이렇게 불안정한 윤치영을 복수로 떠밀고 싶지 않았다. 그도 자신도 괜찮아질 때까지 잠시라도 복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쉬는 건 어때.”
“…….”
“네 몸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희성은 설득하듯 말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목소리가 작아졌다. 꼭 복수를 부추겨 놓고 겁먹은 강아지처럼 같이 숨어 버리자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희성은 이 일로 윤치영이 더 망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애지중지해 준 만큼, 자신도 그를 아껴 주고 싶었다.
설득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온천에 졸졸 물이 떨어지는 맑은 소리만이 이어졌다. 희성은 윤치영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꼈지만, 그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아래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윤치영이 희성의 하얀 강아지 귀를 씻어 주며 나른하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리 강아지를 무섭게 만들었을까….”
“난 무섭다고 안 했어.”
희성이 고집스레 이를 세우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윤치영은 조용히 귓가를 깨물어 대며 웃었다. 강아지가 감정 표현에 서툴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희성이 느끼는 두려움도 설핏 알 것 같았다.
누구나 손에 피를 묻히기 전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거기다 소중한 게 생기면 더욱 망설이게 된다. 윤치영은 희성에게 자신을 그렇게 아껴 주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진지하다 못해 울 것 같은 강아지의 표정을 보곤 말을 아꼈다.
“강아지, 그거 알아?”
윤치영은 강아지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알려 주기로 했다.
“난 늘 하루라도 강아지랑 편안한 마음으로 자 보고 싶었어.”
“뭐래… 그러고 있잖아.”
“아니. 자기가 매일 악몽을 꾸잖아.”
“…….”
희성은 멍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반수 상태로 돌아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붉은 입술을 짓씹는 윤치영이 보였다. 회색 안광이 섬뜩했다. 희성은 견인족이 이런 눈을 할 때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무리를 해쳤을 때에나 보이는 분노였다.
왜 생각 못 했을까.
윤치영에게 있어서 지켜야 할 무리란 그의 가족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희성은 그 사실에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을 느꼈다.
“우리 강아지가 매일 밤 낑낑거리면서, 자기 안 아프다고. 가지 말라고 악몽 꾸는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잘 수 있겠어.”
윤치영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버드 키스를 했다. 그의 송곳니가 희성의 여린 살에 스쳤지만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뒤이어 속삭이는 목소리조차도 달콤하기만 했다.
“강아지는 기다리고만 있어.”
“…….”
“다 해결한 뒤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진짜로 쉬자.”
그의 말에 희성은 겁먹어 제대로 보지 못한 현실을 다시 보게 됐다. 복수를 미룬 채 혼자 웅크려 참아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루하루 악몽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부당했던 과거에 서글퍼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희성은 제법 의연하게 눈가를 쓱 닦았다. 이제야 윤치영과 한 무리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뿐인 만큼 중요한 순간에 목표를 놓쳐선 안 됐다.
“그럼, 윤치영.”
“응.”
다시 마음을 다잡은 희성은 마지막 타협점을 제시했다. 윤치영의 눈빛이 무언가에 허덕이듯 불안정해 보였지만, 그래도 희성은 꼭 약속하고픈 것이 있었다.
“나랑…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
“아까처럼 네 몸 함부로 다루지 않겠다고 나랑, 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치영이 소나기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희성의 모든 호흡마저 삼킬 듯이 붙잡고 아래로는 하얀 몸을 놔주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은 채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더듬었다.
“아, 파…!”
희성이 가늘게 신음하며 그의 근육이 단단하게 부푼 팔을 짚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야트막하게 들렸다. 적잖이 놀란 희성이 물을 참방거리며 바동거려도 윤치영은 그 몸을 꼭 끌어안은 채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고작 그 약속이면 돼? 정말로?”
“아, 아파, 아…!”
“당연히 약속해 줄 수 있지. 당연히….”
나직한 말과 함께 윤치영이 가볍게 희성을 일으켜 세웠다. 얼결에 일어서게 된 희성은 속절없이 몸이 밀려 엎드리게 됐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희성은 제 엉덩이가 윤치영 쪽을 향한 것도 미처 자각 못 했다.
틈을 주지 않고 윤치영이 발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복숭아처럼 이로 크게 물었다.
“아, 흐읏!”
놀란 희성이 화들짝 놀라 꼬리를 바짝 치켜세웠다. 이내 부드러운 혀가 엉덩이 사이를 나른하게 핥자, 꼬리가 잔뜩 경직된 채 끝이 바르르 떨렸다. 윤치영이 가장 예민한 구멍부터 진득하게 핥을 줄은 몰랐다.
“응, 아, 거길, 왜… 흐으.”
수치심과 더불어 몽롱한 쾌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윤치영이 희성의 허리를 지탱해 세우며 혀로 예민하게 구멍을 유린했다. 희성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할딱였다. 농밀한 혀 놀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긴장에 꽉 조였던 구멍도 점차 나른하게 풀려 버렸다.
이내 윤치영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희성의 뒤에 붙어 섰다. 한 손으로는 불뚝하게 선 성기를 자위하며 희성의 붉게 달아오른 구멍에 그 끝을 댔다.
“자기는 구멍도 작네….”
“그런, 말, 좀….”
“바로 박아 주고 싶은데.”
윤치영이 억눌린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당장 묵직한 기둥을 박아 버리고 싶은지, 비좁은 구멍에 귀두를 끝이라도 비집고 넣으려 했다. 두려운 크기에 희성은 낮은 소름이 돋았다. 하얀 꼬리마저 가랑이 사이로 말았지만 그마저 윤치영이 위로 당겨 구멍이 훤히 드러나게 했다. 곧 윤치영의 손가락이 하나 파고들어 부드러운 내벽이 풀어지도록 살살 매만졌다.
“바로 넣지… 아, 하악!”
연달아 구멍을 파고든 손끝이 무른 살로 뒤덮인 극점을 살살 매만졌다. 어떻게든 우위를 잡으려던 희성의 억센 말은 새된 신음으로 이어졌다. 예민한 반응에 윤치영이 목 안으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구멍을 풀어 주던 손가락도 빠져나갔다. 평소처럼 애인을 달래 줄 여유도 없는지 다시 묵직한 귀두가 반쯤 푹 구멍에 파묻혔다.
“흐으, 흣, 너무 크다고….”
희성이 몸을 앞으로 내빼며 바르르 떨었다. 제 팔뚝만 한 크기의 성기가 저를 꿰뚫으려 할 때마다 나른한 소름이 돋았다.
잔근육의 윤곽이 묵직하게 드러나며 온 힘으로 접합부를 맞댔다. 온천욕을 해서인지 평소보다 안이 따듯하게 성기를 꽉 조여 줬다. 긴 한숨이 나오며 터질 것처럼 성기에 피가 쏠렸다. 그만큼 팽팽해진 귀두가 희성의 안을 묵직하게 자극했다.
“아, 하아… 왜 이렇게 조여, 자기야.”
윤치영이 퍽, 하고 세게 성기를 처박았다. 연달아 희성의 작은 엉덩이가 뭉개지도록 접합부를 문질렀다. 희성이 훌쩍대고 울면서도 뒤로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으려 했다.
“살살, 살살 해… 흐윽! 배가, 이상해….”
말리는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허릿심에 힘이 더 들어가기만 했다. 윤치영은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제 것을 모조리 품은 복숭아 같은 둔부를 내려다봤다. 피부로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따듯한 과육이 들어찬 것만 같은 살덩어리가 제 물건을 완벽하게 조이고 핥았다.
윤치영은 농밀한 감촉에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자꾸만 단단한 하복부를 때리는 하얀 꼬리를 허리와 함께 쥔 채 고정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 남자의 몸 안에 든 모든 것을 삼키고, 제 것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갈증뿐이었다.
이후로는 희성이 호흡마저 놓칠 정도로 마구 처박았다.
짧고 강하게 처박을 때마다 희성의 우는 소리가 끊긴 채 공중으로 흩어졌다. 윤치영은 팔에 온 근육이 묵직해질 정도로 마른 허리를 바투 쥐었다. 이젠 강렬한 본능만이 몸 안에 남았다. 조금이라도 희성의 안에 깊숙이 닿고 싶다. 자신의 정액으로 안을 진하게 채워 주고 싶다. 견희성의 안에는 제 것만이 들어차야 했다. 윤치영은 안에 누구의 흔적이 있든 모조리 긁어낼 기세로 귀두로 내벽을 자극하고 긁어냈다.
“으응, 아! 아, 아…!”
퍽, 하고 살을 쳐올릴 때마다 희성이 자지러지듯 울었다. 이미 희성의 성기는 홀로 발기한 채 끈적한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윤치영이 짓궂게 웃으며 희성의 성기를 마구 손으로 쥐고 문지르자 픽, 하고 여리게 사정했다. 희성의 동그란 눈가가 서럽게 무너지며 잘게 전율했다.
“으흣, 그, 그마. 흐, 하아….”
희성이 희미하게 무언가 말하는데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희성에게 제 열기를 퍼붓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윤치영은 이것도 페로몬 쇼크의 일종일지도 모른다고, 그만해야 한다는 이성이 희미하게 스쳤지만 이미 그의 몸은 희성의 몸을 고쳐 쥐고 있었다. 자꾸만 쓰러지려는 허리를 돌려, 아예 몸을 들어 올려 버렸다.
“이, 이 자세 싫어.”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되자, 희성이 윤치영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본능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그에게 매달렸다. 윤치영은 가볍게 희성의 몸을 들어 구멍에 성기로 파고들었다. 몇 번 자세를 제대로 잡아 성기를 퍽 쳐올리자, 희성이 고개를 뒤로 휘며 쾌감에 가늘게 떨었다.
“유, 윤치영. 형… 나… 흐읏!”
“괜찮아, 하… 괜찮아.”
“노티, 그만, 더, 커지지 마….”
희성이 잘게 울며 매달렸다. 윤치영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노팅을 준비하는 성기가 더 크게 부풀고 있었다. 성기 뿌리 쪽에 마치 고환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묵직해졌다.
하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윤치영은 송곳니를 아드득 갈며 제멋대로 성기를 뭉근히 비볐다. 그러자 줄곧 여리게 그만, 그만 하고 울던 희성의 목소리가 변했다. 윤치영의 두툼한 어깨에 매달리며 숨을 할딱이더니, 구멍을 꽉 조이며 속삭였다.
“흐으, 응, 하아… 조, 좋아.”
윤치영은 그 말에 발정했다. 희성이 자신을 받아 준다는 자체로 충족감을 느꼈다.
그 이후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늘 예민하기만 하던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치영은 스스로가 싫을 정도로 희성의 몸을 도구처럼 흔들며 마구 쳐올렸다. 단단한 하복부의 반동으로 인해 희성의 몸이 그의 무게만큼 성기 위에 깊게 짓눌렸다. 허벅지의 근육이 말처럼 부푼 채 절정까지 멈추지 않았다.
“윽, 후우….”
마지막으로 성기가 세게 처박힌 채 위치를 고정하기 위해 부풀었다. 노팅이 시작됐다. 윤치영은 고통스러운 쾌감에 희성의 어깨를 깨물어 대며 겨우 감내했다. 그 품 안에서 희성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허리는 힘이 잔뜩 들어가 하얗게 휜 채였다. 배 속에 파고든 윤치영의 성기가 진하게 사정할 때마다 희성의 배 속이 잘게 전율했다. 성기 끝에서 왈칵, 몇 번이고 사정액이 잘게 튀었다.
“강아지….”
노팅에 윤치영이 배부른 한숨을 내쉬며 옆쪽에 걸터앉았다. 이제부터 한 시간은 성기가 빠지지 않을 터였다. 희성이 훌쩍거리며 어깨에 매달리는 걸 안아 다독여 줬다. 성기가 너무 커져 미안했지만, 그래도 제 정액을 모두 받아 주길 바랐다. 윤치영은 가늘게 웃으며 붉어진 눈으로 희성의 뽀얀 엉덩이를 주물렀다.
“왜 또, 흐윽, 마음대로 하는데?”
이내 희성이 훌쩍이며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하며, 바들바들 떨리는 강아지 귀가 몹시 애처로워 보였다. 그나마 페로몬을 갈무리해 이성이 돌아온 윤치영은 미안함에 희성의 얼굴 곳곳에 버드 키스를 하며 물었다.
“자기 힘들어? 빼 줄까?”
“그냥, 가만히. 아아…!”
물으며 희성의 허리를 쥐고 성기 위에 조금 문질렀다. 아직도 자극이 심한지 희성이 비명을 지를 듯이 입을 빠끔거렸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내벽이 벅찰 정도로 들어차 쾌감이 심하게 몰려왔다.
이내 희성이 윤치영을 놓치기 싫은 것처럼 꼭 껴안았다. 바라던 대로였다.
“빼지, 마. 나, 나쁜 새끼야….”
저답게 거칠게 말한 희성이 까무룩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윤치영은 한숨처럼 웃으며 눈을 감은 희성의 귓가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내 웃음기마저 사라진 얼굴로 구멍 안에 파고든 제 것을 꺼떡였다.
윤치영은 희성을 소중하게 안은 채 마저 진한 노팅을 갈무리했다. 개운한 기분이 들면서도, 희성을 향한 갈증이 느껴졌다. 윤치영은 희성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복수를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한 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희성을 향한 집착만이 깊어졌다.
* * *
스윽….
희성이 잠든 지 얼마나 됐을까, 침대에서 함께 자던 윤치영이 혼자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디 가는 거지….’
희성은 잠에서 반쯤 깬 채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무척 몸이 고되 그를 붙잡진 못했다. 잠들기 전까지 침대에서 윤치영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탓이었다.
가까스로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였다. 지금 시간에 나가다니. 희성은 그가 할 일이 예상됐다.
양혜찬을 처리하러 갈 확률이 높았다.
희성은 자리에서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그리곤 멍하니 고요한 주변을 둘러봤다. 윤치영이 없으니 오히려 머릿속에 그의 생각만이 꽉 찼다. 이렇게 자는 사이 사라지다니. 희성은 내심 속상했다.
‘나한테 감시자로서 면모는 보여 주기 싫은 건가….’
어차피 윤치영의 잔인한 면모를 아는데. 거기다 감시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아는데, 왜 그렇게 자신에게 숨기는지 이해가 안 됐다. 물론 자신이 충격받을 걸 걱정하는 것일 테지만… 희성은 한 무리로서 윤치영이 이런 일을 숨기지 않았으면 했다. 오히려 희성에겐 윤치영의 가족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답답한 마음에 희성은 나가서 윤치영을 기다리기로 했다. 별일 없을 건 알지만 그래도 그가 걱정됐다. 수장에게 당하는 게 걱정되는 게 아니라, 돌아와서 자신의 행동에 고통스러워할까 봐. 아무리 그라도 친인척과 대립하고 맞서고 난 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라도 기다려 주고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될지도 몰랐다.
“…….”
현관으로 나오자 여전히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희성은 작은 강아지 모습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밤하늘을 보며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이 없는 거 같다는 그런 우울한 종류의 생각을 했을 텐데. 이제는 윤치영부터 생각이 났다. 혼자 밤중에 나간 그가 신경 쓰였다.
‘그래도 정말 날 좋아하면, 차라리 다 내보여 줄 것이지….’
지금이라도 윤치영을 찾아갈까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윤치영을 방해할 수도 있어 여의치 않았다. 강아지는 불만스럽게 앞을 보다가 현관 앞에 쌓인 눈에 작은 발자국을 찍어 봤다. 당장 찌릿하도록 차가운 눈의 촉감이 느껴져 발을 뗐다. 늦은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져 털옷을 입어도 몹시 추웠다.
그때 강아지의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의아함에 위를 올려 본 강아지의 눈이 커졌다.
‘얘는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를 본 강아지가 작은 눈사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눈앞에는 구면이지만 낯선 존재가 다가와 있었다. 희성이 상견례 자리에서 봤던 남자였다.
“뭐야 이 강아지는… 휴지 뭉치인 줄 알았는데.”
윤치영의 둘째 형인, 윤진영이었다.
그는 안경을 써 날카롭고 고지식해 보이는 미남자였다. 동생인 윤치영보다는 체격이 반 뼘은 작았고, 굳게 다문 입술이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만큼 성격도 별로 안 좋은지, 그는 제 발보다 작은 강아지를 발등으로 슬슬 건드려 보고 있었다.
‘아오, 이 집은 외모를 타고난 대신 인성이 없는 건가?’
식인 늑대와 살을 맞대고 살던 희성은 그가 무섭기는커녕 귀찮기만 했다.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애인의 형이라 잘 대해 줄까 싶었는데, 자신을 발로 미는 싸가지 없는 행동하며 예민해 보이는 검회색 눈빛마저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강아지가 비키지도 않고 뚱하게만 있자 윤진영이 까탈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슨 강아지가 애교도 없어?”
‘뭐래.’
희성은 못 들은 척 뒷발로 대충 귀를 긁었다. 또 슬슬 간지러운 걸 보니 윤치영에게 황홀한 귀 청소를 부탁해야 할 시기가 온 듯했다. 따지고 보면 애인의 형이 온 건데도 지금 희성은 이런 딴생각만 들었다.
사실 희성은 기다리던 윤치영이 아니라 김이 샜다. 자꾸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 윤치영 성격상 자신을 위험한 환경 속에서 두고 갈 리가 없는데, 윤진영이 이곳까지 들어온 게 이상했다.
역시나. 별채 입구 쪽을 보니 조직원들이 신중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 희성은 내심 안심하며 정황을 파악해 봤다.
‘고집부려서 억지로 들어왔나 보네.’
윤진영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뒤쪽에 서 있는 조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게 확실했다. 아마 조직원들의 경고를 받긴 한 듯했다.
다만 조직원들은 그다지 어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그저 고민하듯 윤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치영의 형이기도 하고, 수장의 핏줄이기도 한 그를 함부로 끌어낼 수 없어 망설이는 것이 아닌지 추측했다.
서로 눈짓한 조직원들은 희성에게 수신호 한 조각만을 보여 줬다.
‘약함.’
강아지는 왜 조직원들이 고민하는지 한 방에 이해하게 됐다.
윤치영의 조직원들은 생각보다 결정권이 많았다. 윤치영이 그만큼 현명한 조직원들을 곁에 두기도 했고, 그들은 감시자의 곁에서 다른 늑대들을 심판하는 경우가 많기에 판단력이 뛰어나야 했다. 아마 윤진영을 들여보내 준 걸 보면 억지로 막든 안 막든 별 차이가 없을 거라 생각해서인 듯했다.
‘얘도 윤치영 형이면서 동생 눈치 보던데.’
거기다 윤진영은 상견례 자리에서 동생에게 말도 제대로 못 걸었는데, 행동을 유추해 보면 감시자에게 켕기는 게 많은 듯했다. 그만큼 알아서 행동도 조심할 터였다.
‘그냥 대충 강아지로 있다가 내보내지 뭐.’
결론 내린 희성은 뚱하게 앞을 보며 윤치영만을 기다렸다. 조직원들도 서로 눈짓을 하곤, 다시 대기 중인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언제든 희성에게 달려올 수 있는 거리였다.
아마 윤진영은 동생을 만나러 온 것 같은데, 웬 강아지 한 마리만 있다면 반려동물인 줄 알고 그냥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정상적인 수인이라면 그랬을 텐데. 역시 윤치영의 형은 달랐다.
“귀엽긴 한데… 내가 키울까?”
깽…!
윤진영이 강아지의 뒷덜미를 휙 들어 올렸다. 놀란 강아지가 고통에 비명처럼 울었다. 윤치영이 늑대 모습으로 살살 물어 옮겨 줬을 때는 아프지 않았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뒷덜미를 세게 쥐어 당기니 하얀 솜털이 죄 뽑힐 것만 같았다.
윤진영은 아파 웅크린 강아지를 공중에서 빙글 돌려 살피더니, 까칠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큰 건가? 뭘 먹였길래 배는 이렇게 빵빵해?”
‘시, 시발… 인간으로 변하긴 싫은데.’
강아지는 고통에 눈물을 찔끔 삼키며 생각했다. 작은 몸도 반달 모양으로 움츠러들어 꼬리도 가랑이로 말려들어 갔다.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윤진영의 어깨 너머 조직원들이 보였다. 당장 달려올 기세였는데, 희성이 고개를 저어 물렸다. 잘못하다간 자신이 윤치영의 애인이라는 걸 들킬지도 몰랐다.
‘그냥 가라고!’
윤진영이 적당히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곤란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인간으로 변하긴 싫었다. 작고 하얀 강아지가 오늘 상견례에서 만난 동생 애인의 본체라는 것도 들키기 싫었다. 희성은 그에게 윤치영을 책임질 수 있는 믿음직한 반려로 보이고 싶었다.
다행히 윤진영이 금방 희성을 품 안에 내려 줬다. 그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 마르게 떠는 강아지의 작은 고개를 휙휙 살폈다.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희성을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새끼 치면 나도 하나 달라고 해야겠다.”
‘네 조카일 텐데 주겠냐?’
윤진영은 상견례 자리에선 제법 격식을 차리더니, 뒤에서 하는 짓은 애새끼가 따로 없었다. 하는 짓이나 행동이 꼭 형제의 장난감을 탐내는 것 같았다. 희성은 윤진영을 짜증스럽게 노려보다가, 그의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에서 조급함을 엿보았다. 도박장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던 눈이었다. 희성은 이런 놈들과 엮여선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필시 무언가 일을 낼 놈들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사이 소복소복 내리던 눈은 이제 강아지가 혼자 걸어가지 못할 정도로 쌓였다. 강아지는 기회를 보다가 윤진영의 품에서 뛰어내려 탈출 시도를 몇 번 했지만, 다시 가볍게 잡혀 품으로 돌아왔다. 핏줄은 어디 안 가는지 형제라고 윤진영도 윤치영처럼 몹시 끈질겼다.
‘아오!’
“왜 자꾸 도망가?”
싸가지 없게 읊조린 윤진영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통통한 소고기 육포를 하나 꺼내 줬다. 길이가 강아지 몸만 한 육포가 통째로 희성 앞에 놓였다.
“자. 먹어 봐.”
‘…날 단순한 강아지로 봤나 보네.’
안심이 되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강아지는 육포 포장지를 자세히 살폈다. 독이라도 묻어 있을지도 몰랐고, 강아지용 간식이면 싫었다. 다행히 육포는 윤진영이 바로 눈앞에서 새것을 뜯어 줬다. 사람용 안주용인 것도 확인한 희성은 머뭇대다가, 야수처럼 육포를 빼앗아 물어뜯었다.
‘먹을 거로 회유하는 것도 똑같군.’
희성은 주는 건 굳이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거기다 마침 배도 고파 육포를 맛있게 먹었다. 이빨이 작아 제대로 씹지 못하고 자꾸 흘리게 됐지만, 그래도 씹을 때마다 소고기 맛이 고소하게 올라왔다. 평소 먹지 못한 별미라 더욱 맛있었다. 윤치영은 늘 부드럽고 아주 작게 자른 것만 먹여 줘서 가끔은 이런 게 당겼다.
“진짜 먹네?”
‘그럼 가짜로 먹겠냐.’
육포를 씹으며 웅얼거렸더니, 윤진영이 퍽 귀엽다는 듯 강아지를 쓰다듬어 줬다. 그 손길이 제법 윤치영처럼 섬세했다.
하지만 느낌은 조금 달랐다. 윤치영은 하얀 솜털을 한 올 한 올 아껴 주는 느낌이었다면, 윤진영은 마치 손 놀이를 즐기듯 강아지를 통째로 주물럭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딘가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라, 육포를 씹던 강아지는 간간이 이를 드러내고 윤진영의 손가락도 씹으며 경고했다.
그때 강아지의 꼬리 끝을 만지작대던 윤진영이 넌지시 물었다.
“퀴즈 좋아해?”
‘뭐래.’
강아지는 열심히 육포를 씹으며 무시했다. 앞발로 야무지게 육포를 잡은 채 마구 물어뜯기 바빴다.
“퀴즈 하나 내줄게. 맞히면 육포를 하나 더 주지.”
‘얘도 윤치영처럼 지 말만 하네.’
그가 뭐라 말하던 강아지가 뚱하게 생각하는 사이, 윤진영이 강아지 짧은 꼬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미친 늑대에 관한 퀴즈인데. 그 늑대가 누구인지 맞혀 봐.”
아그작, 퀴즈를 무시한 채 강아지가 작은 이빨로 육포를 겨우 잘랐다. 작은 조각을 수월하게 물어뜯는 사이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예전에, 미친 늑대가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늑대를 격리한 채 훈련시켰대.”
‘대체 뭐가 퀴즈란 거야.’
“훈련은 힘들었지만, 미친 늑대에겐 함께 탈출과 미래를 약속하며 정을 준 친우 셋이 있었는데….”
꿀꺽. 강아지가 드디어 육포 조각 하나를 삼켰다. 조금 큰 조각을 삼켜서 목구멍에 걸린 느낌이었다. 개의치 않고 강아지는 다시 야무지게 육포를 정신없이 씹었다. 이야기는 윤진영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로 이어졌다.
“사실 그 친우들은 아버지가 붙인 감시역이었고, 미친 늑대를 아주 두려워했대. 당연한 일이지. 주기적으로 정신을 놓고 남을 공격하는 놈인데.”
“……?”
이상함을 느낀 희성은 육포를 놓고 고개를 들었다.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미친 늑대 이야기와 혹독한 훈련. 그를 통제하려던 아버지와, 멸시당하던 늑대….
윤치영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강아지의 눈이 사납게 휘며 접힌 한쪽 귀가 예리하게 섰다. 입에 물고 있던 육포마저 윤진영의 무릎에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본 윤진영이 강아지의 앞발 하나를 악수하듯 쥐며 즐겁게 말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살기 위해 미친 늑대를 처리하려 했는데, 그 사실을 눈치채고 분노한 미친 늑대는 친우들의 팔을 씹어 먹었고, 감시자가 된 이후 아버지를 수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지.”
“…….”
“4년이나 알고 지내던 친우와 자신을 교정시켜 주려던 부모를 말이야.”
‘…그게 뭐.’
윤치영의 이야기임을 예감해서일까, 희성은 자신이 당한 일처럼 느껴져 화가 났다. 자신이 형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정과 마음을 쏟아 준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거였다면… 모든 게 허무했을 것이다. 복수만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때 윤진영이 안경을 추켜 올리며, 희성을 놀리듯 물었다.
“이제 그 식인 늑대가 누구일 거 같아?”
‘…씨발.’
희성은 그제야 윤진영의 의도를 알았다.
윤진영은 처음부터 자신의 본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개처럼 다루며 육포로 회유했고, 거기다 윤치영이 숨기려 한 과거를 제멋대로 알려 줬다.
동생의 반려자로 온 상대에게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희성의 얼굴이 분노로 굳었다.
“우리 새 식구, 본체가 아주 작은 강아지라더니… 윤치영이 딱 마음 놓고 정 줄 만하네.”
윤진영이 하찮은 것을 다루듯 손끝으로 강아지를 툭 치며 말했다. 희성은 이를 악물며 죽일 듯이 윤진영을 노려봤다. 하지만 윤진영은 퍽 귀엽다는 듯 화사하게 웃기나 했다. 형제끼리 웃는 얼굴은 닮았지만, 그저 아름답던 윤치영과는 달리 어딘가 오만해 보이는 미소였다.
일단 강아지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나한테 왜 저딴 말을 해 주는 거지?’
어차피 희성은 식인 늑대임을 알아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작 윤치영이 진짜 식인 늑대가 맞을 거라 예상했다. 처음 페로몬 쇼크가 왔을 때 모습을 봤을 때는 아예 확신했었다.
‘정작 윤치영은 페로몬 쇼크 때문에 고통받고 살았을 텐데.’
그런 비극적인 사고를 형이란 존재가 먼저 소문내고, 이제는 동생의 애인에게 비방까지 하러 왔다. 희성은 그가 진심으로 역겨워졌다. 감시자인 동생 앞에서는 두려움에 말도 제대로 못 꺼내면서, 정작 이렇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험담을 하고 다니다니.
희성은 이런 앞뒤가 다른 사람을 도박장에서 수두룩하게 봤다. 남을 꾀어내 속이고 돈 앞에서 이면을 드러내는 사람. 희성이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부류들이었다.
이미 돌아선 희성의 속내도 모르고, 윤진영이 강아지가 흘린 육포를 다시 입에 가져다 대 줬다. 강아지는 이번엔 육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밀어낸 채, 그의 무릎에서 마루로 폴짝 뛰어 내려갔다. 더는 윤진영이랑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너도 곧 잡아먹힐지도 몰라.”
고작 저딴 협박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걸까. 강아지는 어이없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윤진영을 돌아봤다.
협박쯤이야 도박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희성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윤치영의 페로몬을 유일하게 풀어 주고, 그를 정상으로 돌려줄 방법을 알기에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정말 식인 늑대가 무서웠다면 희성은 진작 윤치영의 곁에서 도망쳤을 것이었다.
더는 대화할 가치도 못 느낀 강아지는 뒤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툭.
그때 윤진영이 강아지 앞에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아까처럼 육포는 아니었고, 두툼한 돈 봉투였다.
“난 강아지한테 큰 거 안 바라고 있어.”
“…….”
“미친 늑대랑 다르게, 말이 좀 통하는 상대면 되는데….”
그가 말하며 돈 봉투를 슥 가까이 밀었다. 내용물이 제법 묵직해 보였다. 흥미를 따라 강아지의 꼬리가 위로 높이 서고 한쪽 귀가 움찔했다.
희성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만족스럽게 웃은 윤진영이 선심 쓰듯 말했다.
“앞으로 윤치영 동태랑, 가족들을 감시하는지 여부만 내게 주기적으로 보고해 주면 돼.”
‘…자기 끄나풀이 되란 건가?’
회유하러 온 거였다니. 희성은 이제야 윤진영이 온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강아지의 눈이 세모꼴이 됐다.
‘이 새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사실 그럴 만했다. 어쨌든 자신은 감시자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데다가 빈털터리 견인족이었다. 누가 봐도 돈으로 회유하기 쉬워 보이는 상대였다.
거기다 본체를 아는 걸 보니 그간 정보도 꽤나 모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머리를 굴릴 줄 안다는 의미이리라. 희성은 얘도 순혈 늑대긴 하구나 싶었다.
강아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이 까만 눈을 굴리는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꼬리를 한번 탁 턴 강아지는 돈 봉투 입구를 슬쩍 앞발로 들어 액수를 살폈다. 안에 노란색 5만 원권 지폐가 빼곡했다.
이천만 원.
도박장에서 지낸 희성은 눈대중 한 번에 액수를 가늠했다.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그리곤 슬쩍 눈알을 굴려 옆쪽을 바라봤다. 윤진영이 손가락을 초조하게 무릎을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다 그 위로 표정을 보니,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윤진영이 보였다.
희성은 도박장에서 5년간 일한 경력을 십분 발휘했다.
판에서 내가 우위다.
결론 내린 강아지가 당장 반응을 보였다.
툭.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강아지가 돈 봉투를 앞발로 밀었다. 고개도 픽 돌리더니 옆으로 발라당 드러누워 버렸다. 분홍 배 째라는 듯이.
치욕적인 상황에 윤진영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견인족 중에서도 하룻강아지에게 교섭하는 상황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래도 감시자가 처음으로 상견례까지 데려온 애인이었다. 거기다 윤진영은 그간 늑대 일족의 자금을 몰래 써 왔기 때문에 끄나풀이 꼭 필요했다. 어떻게든 감시자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윤진영은 다시 강아지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얹어 주고, 정보를 줄 때마다 200씩 더 주겠어.”
그 말에 강아지는 반응 하나만 보였다. 흥미는 있다는 듯 짧은 꼬리를 한 번 휘적거린 정도였다.
“강아지 주제에….”
윤진영이 예민한 얼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아지를 노려봤다. 주먹만 한 게 돈 욕심이 엄청났다. 마음 같아서는 강아지를 협박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조막만 한 놈이 겁먹고 줄행랑쳐서 감시자에게 보고할 수도 있었다. 윤진영은 감시자가 두려운 만큼 어떻게든 대비를 해 둬야 했다.
“…지금 두 배로 주고, 정보를 줄 때마다 오백씩 넘기겠어.”
턱. 강아지의 앞에 두툼한 돈 봉투가 하나 더 놓였다. 이제 그 두께가 강아지의 몸통만 할 정도였다.
고심하던 강아지는 슬쩍 고개만 들어 액수를 가늠하더니, 결정을 내린 듯했다.
왕!
강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약의 표시로 윤진영의 손등에 촉촉한 콧잔등을 한번 찍었다. 수인 공통으로 쓰이는 신뢰의 표시였다.
겨우 한숨 돌린 윤진영은 송곳니를 은근히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근본 없는 개라 설득이 편했다. 돈으로 회유가 안 될 리가 없었다.
“…연락은 봉투에 쓰여 있는 번호로 연락해. 반드시 보름에 한 번씩.”
왕.
대충 대답한 강아지가 돈 봉투 하나를 문 채 질질 끌고 집 안으로 가져갔다. 윤진영은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조그마한 게 퍽 야무지긴 했다.
하지만 상대가 어떻게 보든 강아지는 의연하게 돈 봉투를 마저 옮기고, 이제 꺼지라는 듯 윤진영에게 한번 짖었다.
왕!
“지금 우린 서로 우연히 마주쳐서, 간단한 통성명만 한 거야.”
걱정 말라는 듯 강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뚱해 보였지만 꼬리가 빠르게 휘적거리고 있었다. 분명 진지한 거래인데, 윤진영은 들떠 보이는 그 꼬리가 퍽 마음에 안 들었다.
윤진영은 마지막으로 협박의 표시로 강아지와 두 눈을 길게 마주쳤다. 야생에서 눈을 마주치는 건 도전과 위협의 뜻이었다. 조그만 강아지니 가볍게 제압당하고 꼬리를 마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다.
“감시자는 배신에 가장 예민한 거 기억해 둬라.”
이 일을 들키면 네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직한 말에도 강아지는 또 뒷발로 접힌 귀를 긁적이더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윤진영은 어딘가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뒤돌아섰다. 그래도 감시자에게 끄나풀을 심어 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감시자에게 들킨다 해도 배신한 저 개새끼가 처리되겠지.’
어쨌든 윤진영은 수장의 핏줄인 만큼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치였다. 뒷배를 만들어 두는 게 큰 이득이었다. 생각보다 예산이 크게 나가 막막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긋지긋한 감시자의 눈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윤진영은 안심하며 조용히 안뜰을 나섰다. 그가 걸을 때마다 눈 위로 발자국이 생겼다.
* * *
희성은 안으로 들어가 인간형으로 변했다.
스르륵 하얀 알몸으로 일어난 희성은 하얀 나이트가운부터 빠르게 챙겨 입었다. 표정은 조급하면서도 몹시 들떠 보였다. 희성은 나이트가운의 꼬리 구멍에 철없이 마구 흔들리는 꼬리를 끼워 넣은 다음, 거실 테이블 앞에 쭈그려 앉아 돈의 액수를 다시 세 보았다.
‘사천만 원…!’
드디어 돈이 좀 생겼다.
도박장에서 1년 넘게 빠듯하게 일해야 생길 돈이었다. 희성은 하얀 꼬리를 바쁘게 흔들며 사천만 원을 세고 또 셌다. 드디어 자금이 생겨 기쁘고 든든했다.
그때 윤진영이 사라진 걸 본 조직원들이 희성을 찾아왔다. 조직원 둘은 강아지가 괜찮은지 살피다가, 큰 액수를 만지는 걸 보곤 놀라 물었다.
“어디서 난 돈입니까?”
“윤치영네 형이 줬어.”
조직원들의 얼굴이 굳었다. 윤진영이 손해 보는 성격도 아닌 데다가 나쁜 쪽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타입이란 걸 알아서였다. 어리고 뽀얀 희성에게 돈을 쥐여 줬다면, 필시 조건이 있을 터였다.
걱정되는지 지영배가 강아지를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살피며 물었다.
“…혹시 거래를 하신 겁니까?”
희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오백만 원씩 차곡차곡 나눠 놨다. 조직원들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내가 윤치영의 동태를 살펴서 주기적으로 정보를 넘기기로 했어.”
들뜬 희성이 말에 지영배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그는 감시자를 따르는 만큼 그의 성향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감시자는 특히 배신에 자비가 없다. 그걸 알기에 무구한 강아지를 구해 줘야만 했다.
지영배는 처음으로 엄격한 눈이 된 채 희성에게 말했다.
“그게 이사님을 배신하는 행동인 건 아십니까?”
“……?”
빠르게 돈을 세던 희성의 손이 멈췄다.
드디어 강아지 귀를 뒤로 눕힌 희성이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고 까만 눈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조금 찡그려져 있었다.
희성이 불량하게 한쪽 귀만 까딱이며 말했다.
“영배 형. 나 이 돈으로 윤치영 맛있는 거 사 줄 건데.”
“하지만 지금 거래로 이사님의 정보를 팔아서 얻은 돈이라고….”
희성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수금한 거지.”
“…….”
“윤치영도 자기 형 처리할 진짜 구실 생기고 돈도 생겼으니 좋아할걸?”
자리에서 일어난 강아지가 차곡차곡 정리한 돈을 별채의 금고에 넣어 뒀다. 비밀번호 설정을 조직원들이 못 보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본체는 분명 강아지인데, 많은 돈을 굴려 본 적이 있는 태도였다. 도박장에서 일한 만큼 당연했다.
그 모습을 조직원들이 사뭇 낯설게 보다가, 일단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감시자와 함께 움직이는 그들은 강아지가 양아치 짓을 하는 것쯤은 무던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래도 지영배는 혹시나 희성에게 뒤탈이라도 생길까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을 물었다.
“혹시 계약 증거는 어떻게 남기셨습니까?”
“콧잔등 찍었어.”
지영배는 그럼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 계약이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희성이 돈을 꿀꺽해도 그쪽은 희성을 못 건드리고 할 말도 없었다. 감시자의 눈치를 볼 일만 더 생기지. 아무래도 윤진영이 감시자의 눈치를 너무 봐서 제대로 된 계약 증거를 남기지 않은 듯했다.
그때 희성이 늦은 시간을 살피더니, 먼저 앞서 나가며 조직원들을 이끌었다.
“형. 윤치영이나 찾으러 가자. 너무 늦어.”
희성이 제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그 뒤로 지영배가 심경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체념하듯 말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
강아지가 욕이라도 들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지영배는 다시 평소처럼 묵직한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똑똑한 강아지에겐 표정도 함부로 들켜선 안 됐다.
다행히 제 본체 두께만 한 목돈이 생긴 강아지는 금방 다른 곳으로 관심이 쏠렸다.
“윤치영 뭐 좋아하지? 금붙이 맞나?”
희성이 다른 조직원에게 붙어 서며 도란도란 물었다. 윤진영이 안심하며 걸어간 발자국 위로 희성의 한층 작은 발자국이 다시 찍혔다. 가만히 있던 윤치영의 또 다른 승리였다.
* * *
희성의 걱정과 달리, 윤치영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강아지가 뭐라 했는데?”
윤치영은 장식장에 옆으로 기대선 채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멀리 무드 등만이 켜진 어둑한 응접실에서 그는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들뜬 회색 눈동자만큼은 선연하게 보였고, 그의 뒤로 감시자를 따르는 조직원들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감시자의 본분을 아는 늑대라면 차마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두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응접실 소파에 구겨지듯 앉은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랑은, 네가 절대 아, 안 자려 했다고 말했더니… 눈도 안 마주치고… 인상을, 찌푸렸어.”
양혜찬이었다. 그는 심하게 몸을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하며, 말조차 제대로 못 하고 더듬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나마 옆에 수장이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앞에서 윤치영은 설레는 소년처럼 입가에 손바닥을 짚은 채 물었다.
“역시 질투인가? 질투 같았어?”
“흐으….”
“질투 맞는 거 같아. 네가 나랑 잠깐 만났던 걸 먼저 말해 줬다며?”
윤치영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 애인 이야기를 하듯 기대감이 서린 태도로 대했다.
하지만 양혜찬은 제대로 대화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게 윤치영의 존재는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과거 시커먼 짐승이 자신의 오른팔을 솜 인형처럼 물어뜯은 기억은 꾸준히 악몽으로 시달릴 정도로 끔찍했다.
양혜찬은 무력하게 몸을 떨었다. 어느덧 반수 상태로 돌아가 금발 머리에 늑대 귀가 드러나 있었고, 허리 아래 긴 꼬리는 제 허벅지를 푹 감쌌다.
“그래서? 강아지가 너한테 음료수 던지면서 뭐라 했어?”
“…자, 자기가, 네 보호자니까… 건들지, 말라고….”
“보호자… 보호자래. 큭큭큭. 꼬질한 강아지가 내 보호자 하겠대.”
윤치영이 고개를 숙인 채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행복감을 숨길 수 없는지 뺨을 부끄럽게 감싸며 보호자란 단어를 혼자 반복해 말했다. 양혜찬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처분을 기다리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보다 못했는지, 옆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윤치영. 그만해라.”
“…….”
쭉 양혜찬의 손을 잡아 주고 있던 윤건영이었다. 내내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던 윤치영의 입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윤치영의 시선이 이번엔 수장을 향했다. 미소는 싸늘하게 식은 채였다.
“누나… 잊었어?”
그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경고하듯 일러뒀다.
“수장은 타당한 이유 없이 감시자의 일에 끼어들 수 없어.”
“네가 지금 하는 짓은 감시자의 일이 아니야.”
“왜 아니야? 양혜찬이 죽이려던 내 보호자랑 관련된 일인데.”
비꼼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수장은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킬 뿐 대답이 없었다. 이미 그녀도 양혜찬이 혐의가 있단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수장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감시자에게 수장마저 추궁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장은 양혜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나를 추궁해라.”
오히려 그녀는 양혜찬을 지켜 주듯 엄격한 얼굴로 감시자에게 맞섰다.
“뭐야….”
그 모습에 윤치영은 별다른 감흥 하나 없는 눈으로 응시하다가, 픽 웃으며 새삼스럽다는 듯 물었다.
“누나…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정말 정분이라도 난 거야?”
“…함부로 말하지 마.”
“진짜 지켜 주는 거구나. 아… 내가 항상 악역인 거 지긋지긋하다.”
말 몇 마디에 윤치영은 누나의 진심을 파악했다. 계산적이고 수장의 자리에 집착하는 누나가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나온다면 역시 감정적인 이유밖에 없었다.
기꺼우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평생 윤치영은 누나가 자신과 달리 올곧고 아주 현명하신 분이라 수장의 자리에 오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고 닮은 점이 있었다. 누나도 자신처럼 연인을 위해 규율까지 어기며 지키려 들었다.
윤치영은 빙글대고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하긴… 양혜찬이 누나 말을 잘 듣긴 했지? 이제 침대에서 목줄도 채운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잡종이랑 뒹구는 게….”
수장이 이를 드러내며 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윤치영은 퍽 즐겁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간 윤치영에게 수장과 양혜찬은 협력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둘 다 자신을 증오하고 죽이기 위해 혈안이었다.
그 예전, 윤치영은 전대 수장인 아버지를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누나에겐 그것만으로도 원한을 가질 만한 일이었는데, 한술 더 떠 윤치영은 감시자로서 힘이 너무 강했다. 그녀에게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양혜찬에게 자신은 유일한 형의 인생을 망가트린 원수였다. 그 때문에 윤치영은 계산적인 누나가 양혜찬을 만난다고 했을 때, 둘의 목적이 자신의 목숨임을 진작 눈치챘다.
윤치영은 목숨을 노리는 이유를 아는 만큼 자신을 위협하는 것쯤은 괜찮았다. 그 과정 중에 둘이 정말 정분이 나서 결혼을 한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죄 없는 강아지를 건드리려 한 것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윤치영은 품에서 핸드폰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증거까지 있는데 괜찮겠어? 리스크가 클 텐데.”
“…….”
증거품을 본 수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핸드폰은 양혜찬의 것으로 평범한 공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숙하게 범죄를 저지른 양혜찬이 썼다면 말이 달랐다.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증거품이 됐다.
윤치영은 웃는 낯으로 핸드폰을 찬찬히 확인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던 윤치영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우리 강아지한테는 독을 먹이려 하지도 않았고… 술에 취하게 만들어서 난간에서 밀지도 않았고. 침대로 이끌어 칼로 찌르려 하지도 않았잖아.”
“…….”
“우리 강아지가 칼을 좀 싫어하거든. 한 번 찔린 뒤로 많이 무서워해.”
윤치영은 자신이 당할 뻔한 일을 태연하게 주절거리며 그저 강아지만을 걱정했다. 그 예전 희성은 허벅다리에 칼을 찔려 봐서인지 날카로운 칼을 두려워했다. 한 번은 강아지 몸보다 큰 날붙이를 보고 몸이 굳어 한동안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희성에게 직접적인 목숨의 위협은 없었으니, 윤치영은 양혜찬이 희성에게 단순한 시비를 건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가 견인족 도박장과 연락을 한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진.
“이것도 견인족 도박장. 도박장… 강아지라고 너무 무르게 생각한 거 같은데….”
윤치영이 핸드폰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찾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 물건이지만 양혜찬이 숨길 만한 곳이 거기서 거기인지라 기회만 있으면 됐다.
내용은 얼마 없었다. 양혜찬이 입금했음을 알리는 문자 정도였다. 그 계좌를 확인해 보니 액수는 볼품없었다. 윤치영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툭 떨어트렸다.
“우리 강아지 목숨값이 고작 천만 원이었어?”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양혜찬을 응시했다. 양혜찬은 물어뜯겼던 제 오른손을 품 안에 숨기며 자꾸만 불안정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당할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감시자가 이번엔 심장을 물어뜯을지도 몰랐다.
윤치영은 그가 두려워하는 걸 보고도 그저 퍽 서운하다는 듯 읊조렸다.
“너무하네… 나한테 소중한 존재인 거 알면서.”
“…….”
“뭐… 너도 똑같은 고통 좀 겪어 봐라, 그런 허접한 생각으로 한 거였어?”
물으며 윤치영이 재밌다는 듯 키들거렸다. 일부러 양혜찬을 궁지로 몰며 모욕하고 드는 성격이 고약하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윤치영은 희성이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이런 장난도 없이 진작 양혜찬을 죽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골적인 비웃음에 양혜찬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는 마르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평생 궂은일 하지 않고 살았을 법한 곱상한 얼굴이었다. 이런 말에 충격을 받아 떠는 것도 윤치영에겐 어리숙하게만 보였다.
“너, 지금….”
양혜찬이 윤치영을 떨리는 눈으로 노려봤다. 윤치영을 죽이고 싶은 마음만큼은 여전한지, 두려움에 질린 채였지만 두 눈에는 증오심이 가득했다.
“네가 우리 형을 미치게 한 일이랑… 그게 같다고 생각해?”
“…….”
“네가…!”
양혜찬이 숨이 차는지 끅, 하고 말을 삼켰다.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윤치영은 별 감흥조차 없는 얼굴로 비딱하게 선 채 양혜찬을 응시했다. 이제 그는 눈물에 엉망이 된 얼굴로 짓씹듯 말했다.
“네가 우리 형의 인생을 망친 게, 어떻게 그 잡종 따위랑 같은데?”
“아….”
윤치영이 고운 미간을 굽히며 나직이 탄식했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기울이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옆쪽 소파에 툭 던져 놨다.
“잡종 따위?”
윤치영은 말도 안 되는 단어라 생각하며 곱씹었다. 어떻게 견희성을 고작 그런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 주먹만 한 존재는 이제 자신의 전부인데.
회색 눈을 멀거니 뜬 채 허공 어딘가를 보던 윤치영은 소탈하게 웃었다. 새삼 양혜찬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됐다.
자신에게 강아지의 존재뿐이듯이, 양혜찬에게는 그의 형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저렇게 멍청한 말을 하는 것이 이해됐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형을 반쯤 죽인 과거를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윤치영이 별다른 반응조차 없자, 양혜찬이 증오심을 담아 더듬더듬 말했다.
“네가 우, 우리 형의 사지를 먹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우리 형은, 폐인이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어.”
“…….”
“너만 아니었다면… 우리 형이 감시자가 될 수 있었어.”
“음….”
윤치영이 나직이 감탄성을 내며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책감 따위에 시달리는 건 아니었고, 마치 그 기억조차 깜빡했었다는 듯 한가로운 태도였다.
양혜찬의 심정이 이제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윤치영은 과거를 후회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지. 나만 아니었으면 정말 네 형이 감시자가 됐겠지. 그럼 누나도 수장 노릇 하기 편했을 테고….”
뒤늦게 윤치영이 먼 곳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기대 서 있던 장식장에서 등을 떼며 손목시계를 슥 살폈다. 양혜찬과 강아지에 대해 얘기를 하느라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됐다. 슬슬 혼자 잠들어 있을 강아지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자신도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해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한가한 생각부터 정리한 윤치영이 느긋이 말했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걔가 멍청한 짓 해서 나한테 잡아먹힌 건데.”
“너…!”
“너도 멍청한 짓 해서 이렇게 된 거고… 어쨌든 단순한 원한으로 벌인 짓이 맞단 거네.”
말하며 윤치영이 어둠 속에 서 있던 조직원에게 무언가 건네받았다. 나이프였다. 섬뜩한 회색 날이 번뜩였다.
“빨리 끝내자. 우리 강아지가 자다 깼을 때 나 없는 거 보고 울 수도 있거든.”
윤치영은 쓸데없는 걱정을 말하며 칼을 고쳐 쥐었다. 서슬 퍼런 날을 능숙하게 손안에서 돌리며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저, 저리 가… 꺼지라고, 아악, 아아악!”
양혜찬이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들끓는 비명이 귀를 찔렀다.
안 그래도 페로몬이 쌓여 감각이 예민해진 윤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저 비명 때문에라도 빨리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윤건영이 윤치영의 앞을 밀어내듯 막아섰다.
“윤치영. 적당히 해라.”
“적당히?”
윤치영은 이제 웃지 않았다. 핏발이 선 채 붉어진 눈빛이 야수 같았다. 어느덧 반수 상태로 돌아간 그는 송곳니를 아드득 갈며 자신을 가로막은 누나에게 경고처럼 말했다.
“양혜찬은 죄 없는 견인족을 죽이려 했어. 누군가 죽이려 들었으면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난….”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지 양혜찬이 더듬더듬 입을 뗐다. 하지만 윤치영과 눈이 마주치자 입이 굳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결국 윤건영이 양혜찬을 뒤에 둔 채 덤덤하면서도 굳은 어조로 말했다.
“…협상을 하자.”
“하고 있잖아. 난 양혜찬 목숨이면 돼.”
“내가, 다른 대가를 걸겠다.”
윤건영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해 보였다. 등 뒤에 양혜찬의 손도 끝까지 잡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지금 자신에게 대가를 말한 자체로 올곧은 누나가 얼마나 자존심을 굽히고 나온 건지 알고 있었다.
윤건영이 떨리는 검회색 두 눈에 긴장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네가 이 일을 넘어가고, 그 견인족과 결혼하겠다면… 다시는, 수장으로서 네게 맞서지 않겠다.”
“…….”
파격적인 말이었다. 수장이 감시자에게 맞서지 않겠다는 건 일족을 통제할 권력을 어느 정도 넘겨주겠다는 뜻이 됐다.
거기다 그 자존심 강한 누나가 처음으로 윤치영에게 협상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나가 내건 조건이 우스웠다. 타 종족과의 결혼이라니. 윤치영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분명 화사한 웃음소리인데, 어둑한 공간에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윤치영은 칼을 든 손에 힘을 뺀 채 손등으로 입가를 쓱 쓸었다. 그 모습을 윤건영은 무표정하고 예리한 눈으로 도통 통제할 수 없는 감시자를 응시했다.
웃음 끝에 윤치영이 나직이 말했다.
“누나… 그게 협상이야? 타 종족이랑 결혼시키면 내가 얌전해질 거라 생각하고 내건 모양인데….”
수장은 속내를 간파당하고도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만큼 답지 않게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윤치영은 저 나약하고 그럴싸한 외모밖에 없는 양혜찬을 수장이 왜 이렇게까지 감싸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수장으로서 맞서지 않겠다니. 자신에게도 퍽 괜찮은 조건이었다. 수장 본인의 자존심을 다 내버리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희성의 목숨에 맞먹는 조건은 절대 아니었다. 윤치영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길게 웃었다.
“난 목숨을 살려 주는 건데. 그럼 적어도 우리 강아지가 납득할 만한 조건을 말했어야지.”
가벼운 물음에 굳어 있던 수장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예리하고 첨예한 눈빛이 무너지며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허탈하게 긴장이 풀어지며 화가 돋은 건지, 동생을 보는 눈에는 혐오감마저 감돌았다.
“넌 고작 그 견인족 하나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까지 맞서는 건가?”
“그럼 다른 이유가 뭐가 있는데.”
윤치영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게 양혜찬을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 협상마저 거는 수장의 꼴은 우스운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태도가 수장을 분노케 했다.
“아무리 봐도, 넌 감시자의 자격이 없어.”
수장이 순식간에 나이프를 쥔 윤치영의 팔을 위로 꺾어 밀쳐 냈다.
“넌 아버지를 수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도, 네 원한 때문에 우리 일족을 위하지 않았어.”
기습적인 공격에 윤치영의 몸이 거칠게 벽까지 밀렸다. 윤치영은 매끈한 대리석에 등이 처박히며 나이프마저 수장에게 빼앗겼다. 완벽한 제압 기술이었다. 수장도 윤치영처럼 혹독한 훈련을 받으려 자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시자의 자리에서 내려와라.”
“…….”
응접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윤치영의 조직원들은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함부로 나서진 못했다. 나이프가 윤치영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목에 예리한 칼끝이 닿아 피가 가늘게 흘렀다. 그럼에도 윤치영은 오히려 긴장감을 비치기는커녕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그저 누나가 이렇게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몸싸움이 불리한 상황인데 먼저 공격까지 하다니.
하지만 늘 현명한 쪽보다는 두려울 것 없이 행동하는 쪽이 우위에 서곤 했다.
“누나….”
한숨과 함께 이름을 부른 윤치영이 윤건영이 쥔 나이프의 날붙이 부분을 움켜쥐었다.
그 행동에 놀란 윤건영의 눈이 커졌다. 윤치영의 손에서 흐른 피가 손목을 타고 가늘게 흐르며 윤건영의 손마저 붉게 적셨다.
“내가 어떻게 감시자의 자리를 내려놔?”
윤치영은 덤덤하지만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친 듯한 얼굴 안에 묵묵한 눈빛은 퇴폐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꿈꾸던 수장의 자리를 차지한 누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기에 그저 비꼬듯 말했다. 어릴 때부터 평범한 삶을 빼앗긴 윤치영에게 감시자의 자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자 후회였다.
“그럴 거였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고, 식인을 하지도 않았겠지.”
“윽…!”
윤치영이 수장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땅에 등을 대고 누운 수장의 몸 위로 올라탄 윤치영은 누나에게 칼을 거꾸로 겨눴다.
다시 칼을 겨누게 됐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윤치영의 손바닥에서 난 출혈이 심해지고 있었다. 손에서 타고 흐른 피는 점점 윤건영의 목을 붉게 적셨다. 그 핏물이 마치 누나의 목에서 피가 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에 윤건영도 숨을 거칠게 쉬며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윤치영은 자신의 부상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물었다.
“우리 아까 말한 계약 조건부터 다시 말해 볼까?”
하지만 말을 오래 잇지는 못했다. 옆쪽에 겁먹은 채 웅크려 있던 양혜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걸 느꼈다.
윤치영은 감이 좋았다. 무언가 낌새를 느낀 그는 응접실 입구 쪽을 굳은 눈으로 바라봤다.
“…….”
윤치영이 뒤를 돌아보자 도톰한 코트를 입은 누군가가 보였다.
그는 그림자에 숨어 있었지만, 시력이 뛰어난 윤치영의 눈에는 남자의 질겁한 눈빛과 뒤로 누운 하얀 귀, 그리고 주춤 뒤로 물러나는 걸음걸이가 모두 보였다.
“강아지….”
“…….”
희성이었다.
대체 언제 온 것일까, 줄곧 여유롭던 윤치영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아….”
윤치영은 눈동자를 가늘게 떨며 시선을 내렸다. 지금 희성이 목격한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에게 칼을 겨눈 자신.
자신의 손에서 흐른 피는 윤건영의 목을 흠뻑 적셔 가족을 죽이려 든 것처럼 보였다. 그 옆으로 겁먹은 채 발작하듯 떠는 양혜찬마저 자신의 업보처럼 보였다.
윤치영은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희성에게 가장 들켜선 안 될 모습을 보였다.
“자기야… 난, 난. 그러니까.”
“…….”
투둑.
윤치영이 칼을 바닥에 힘없이 떨어트린 채 희성을 향해 섰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잊은 채 수장에게 등을 보였다. 애써 어설프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이미 희성의 크고 까만 눈동자는 겁을 머금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간 윤치영은 이미 희성에게 잔인한 면모를 많이 보여 왔다. 하지만 강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희성이 유일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동족상잔이었다.
지난번 윤치영이 친인척을 처리하고 피 냄새를 풍기며 왔을 때도 눈도 못 마주치고 딸꾹질을 할 정도로 놀랐던 강아지였다. 희성이 이미 가족 같던 형에게 배신당해 상처받았던 걸 알기에, 윤치영은 그 잔인한 모습만큼은 숨기려 했다.
그런데 자신이 똑같이 누나에게 칼을 겨눈 모습을 보였다.
“자기가 생각한, 그런 상황 아니야. 난, 협상을 하려 했는데….”
“…윤치영.”
희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결 체구가 작아 이 상황에 위협을 느낄 법도 한데, 이전보다 한결 단단해 보이는 눈빛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 결심을 마친 것처럼.
윤치영은 희성이 투견으로 자라났지만 그가 올곧은 마음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희성이 비겁한 범죄를 저지르는 족속들을 몹시 혐오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
“…….”
단호한 말에 윤치영은 상처받은 얼굴이 됐다. 양혜찬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윤치영의 묽어진 눈빛이 울 것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왜?”
주먹을 움켜쥔 손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까, 희성에게 다가가는 윤치영의 몸이 휘청였다. 희성은 그런 윤치영을 보며 물러나지도 않은 채 굳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희성이 바닥 어딘가를 보며,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난….”
말이 채 이어지기 전이었다.
“너도 대가를 치러야 해.”
뒤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눈빛이 굳은 윤치영이 희성을 황급히 품으로 당겼다.
푸욱.
윤치영의 어깨에 나이프가 꽂혔다. 양혜찬은 자신이 윤치영을 찌르고 스스로 놀랐는지, 손을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희성은 윤치영의 어깨에 꽂힌 칼을 비현실적으로 바라봤다.
“너…!”
희성이 놀라 눈을 홉뜬 채 윤치영의 휘청인 몸을 지탱해 주었다. 뜨겁게 흐른 피가 등을 감싼 희성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붙잡아 주는 희성에게 윤치영이 상처받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변명도 필요 없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윤치영은 신체의 변화를 느꼈다. 수인의 몸이 부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입 안에 송곳니가 길게 돋아났다. 윤치영의 입술을 스스로 찌를 정도로 길고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었다. 검게 자라나는 손톱과 함께, 윤치영은 눈앞이 붉어지며 이성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페로몬 쇼크가 찾아오고 있었다.
신체가 이성을 잃은 채 검은 늑대로 돌아가려 했다. 상황이 위험했다. 이미 숨결마저 거칠어진 채 검은 발톱이 길게 돋아나고 있었다. 윤치영은 조직원들에게 희성을 건네며 말했다.
“당장… 견희성 데려가.”
“윤치영, 정신 차려!”
희성이 필사적으로 말하며 지혈하려 들었다. 하지만 조직원들이 윤치영의 명령대로 희성을 억지로 데리고 자리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어둑한 조명 아래로, 희성이 울 듯한 얼굴로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윤치영은 어지러운 시야 너머 희성의 그 표정을 눈에 담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강아지가 무사하길 바라며.
* * *
어릴 적 윤치영은 무척 행복했다.
다섯 늑대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윤치영의 생애 첫 기억은 털이 보송한 남매들과 꼬물꼬물 어울리던 기억이었다.
서로의 꼬리를 뒤쫓으며 사냥 놀이를 하고, 인형을 양쪽에서 힘껏 문 채 힘겨루기를 했다. 그때마다 늘 승리자는 윤치영이거나, 가끔은 누나인 윤건영이었다. 어른들은 타고났다며 윤치영과 윤건영을 차기 수장감이라고 칭찬했다.
〈역시 건영이와 치영이가 페로몬을 강하게 타고나서 성장이 빠르구나.〉
〈그럼 나 누나랑 닮은 거야?〉
어릴 적 윤치영은 누나와 닮았다는 게 그저 기쁘기만 했다. 윤치영에게 누나는 선의의 경쟁자이자 친구이고 믿을 수 있는 가족이었다. 그 마음은 남매들 모두 마찬가지인지라, 다섯 새끼 늑대들은 경쟁심도 없이 서로를 위하며 우애 좋게 지냈다.
그중에서도 윤건영은 어릴 때부터 침착하고 총명했다.
〈이제 나랑 떨어지지 말고 몸 조심히 다녀. 우리는 수장의 자식이라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어.〉
〈왜…?〉
큰누나의 말에 둘째 윤진영이 몸을 움츠린 채 꼬리를 말며 물었다. 다른 남매들도 솜털을 붙이고 모여 앉아 첫째 누나의 말을 경청했다.
〈수장 자리를 노리는 반수장파가 우리를 물어 죽일 수도 있어.〉
〈야생에서처럼?〉
윤치영이 웃으며 그저 가볍게 물었다.
야생에서 수컷 늑대는 핏줄이 다른 새끼를 보면 물어 죽이곤 했다. 수인은 동물의 본능을 강하게 타고나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컸던 윤치영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 주면 되잖아!〉
가장 새카만 늑대의 말에 남매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래도 나는 큰누나랑 붙어 다닐래, 나는 넷째랑! 나도. 말만 서로 편을 가르려는 거였지, 다섯 늑대는 늘 함께였다.
그 사소한 일상조차도 윤치영에겐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날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윤치영은 세 번의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첫 악몽은 성장기 무렵이었다.
‘이 냄새는 뭐지…?’
늦은 밤, 윤치영은 미묘한 냄새를 맡고 눈을 떴다. 코피가 났을 때처럼 주변에서 피 냄새가 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둡고 넓은 방 안에는 섬뜩한 고요만이 감돌고 있었다.
〈형… 어디 있어?〉
어린 윤치영은 자연스레 형들부터 찾았다. 어릴 적 세 형제는 우애가 좋아 같은 방에서 함께 잠들곤 했다.
그런데, 둘째 형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형은 문고리 앞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형?〉
윤치영은 형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방은 어두웠지만, 시력이 좋은 윤치영은 형의 모습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창문에서 스며든 달빛에 형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둘째 형은 맹수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잠옷이 처참하게 찢긴 채 온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옆으로 책상 아래 숨은 첫째 형도 보였다. 다리에 피를 흘린 채 웅크리듯 숨어 기절한 모습이었다.
〈형… 형! 괜찮아? 형! …엄마… 아빠!〉
윤치영은 당장 둘째 형을 감싸 안은 채 울먹였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에 늦은 밤 드넓은 수장 가옥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윤치영이 13살 때의 일이었다.
이후 윤치영은 안정을 위해 잠시 병원에서 생활했다.
불안에 늘 고용인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거나, 가족들이 자신의 물음에 답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누구도 윤치영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마저도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퇴원 날이 돼서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퇴원 날, 아버지는 어린 넷째 아들을 한적한 지방으로 데려갔다.
〈아버지, 나는 왜 집으로 안 가?〉
〈…….〉
〈형들은 누가 공격한 거야? 반수장파 사람들 맞지…?〉
물음에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침묵과 예절이 미덕이라 여기는 늑대들의 수장이었다. 어릴 적 그 가르침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윤치영은 낙담한 채 아버지에게 이끌려 갔다. 어차피 아버지는 그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윤치영은 다 자란 뒤에야 그날 아버지의 의도를 알았다. 아버지는 그저 넷째 아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던 것임을.
그날 아버지는 치영에게 다른 대답도 없이 조건을 걸었다.
〈치영아. 훈련을 잘 마친다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다.〉
〈훈련? 무슨 훈련?〉
〈…감시자의 훈련이란다.〉
아버지는 작은 새끼 늑대에게 통보만을 한 채,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가옥으로 데려갔다. 집은 온통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윤치영은 질겁한 채 아버지에게 붙어서며 물었다.
〈난 수장이 되고 싶어. 아버지… 감시자는 싫어. 나도 집에서 지내면 안 돼?〉
〈치영아.〉
그곳에 넷째를 데려다 두며, 아버지는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는 아이를 설득했다.
〈이곳에서 감시자가 되는 훈련을 잘 받으면 네가 가족을 지켜 줄 수 있을 거다.〉
〈가족….〉
그 말에 어린 늑대가 애써 회색 눈 안에 불안을 지웠다.
분명 형들을 공격한 건 반수장파일 것이다. 윤치영은 그 사실을 굳게 믿으며, 애써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그럼 나는 훈련받을 때까지 여기 있는 거야?〉
〈…그래.〉
〈형들은? 괜찮을까?〉
〈…….〉
아버지는 대답 없이 윤치영을 유모에게 맡겼다. 애써 의연하게 유모의 손을 어색하게 잡고 서 있는 넷째를 보며, 아버지는 별 감정도 없는 눈으로 말했다.
〈형들은 이제 괜찮다.〉
그렇게 윤치영은 낯선 곳에서 유모와 지내게 됐다.
다행히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윤치영은 대부분의 시간을 편안한 본체의 모습으로 지냈고, 유모와 고용인들은 그런 윤치영을 지극정성으로 살펴 주었다.
하지만 형제와 떨어지게 된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아우우!
윤치영은 밤마다 형제들을 찾아 하울링을 했다. 힘이 세지고 덩치만 빨리 자랐을 뿐이지, 윤치영은 형제들이 보고 싶었고, 혼자는 두려웠다.
〈유모… 왜 난 본체로만 지내야 해?〉
〈도련님….〉
〈훈련은 언제 끝나? 형들이 보고 싶어….〉
〈…이번 겨울 훈련이 끝나면 집에 잠시 돌아갈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유모는 윤치영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선생님으로서 곁에 있어 주었다. 그녀는 군인 출신으로 아주 강했다. 나이가 많았지만 현명하고 굳건한 유모는 외로움에 지쳐 가는 윤치영을 사랑으로 보살펴 줬다.
하지만 3년 만에 두 번째 악몽이 찾아왔다.
〈뭐지…?〉
해가 뜨기도 전인 어둑한 새벽녘이었다.
어지러움에 쓰러지듯 잠들었던 윤치영은 침대가 아닌 딱딱한 바닥에서 깨어났다. 의아함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윤치영은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유난히 주변이 고요하고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머리도 쪼개질 듯한 두통도 느껴져 밭은 숨과 함께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모….〉
자리에서 일어난 윤치영은 유모부터 찾았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윤치영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모…?〉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잔소리를 하던 유모였는데, 그녀는 화장실에서 피가 흐르는 어깨를 지혈하고 있었다. 윤치영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유모, 유모! 괜찮아?〉
〈도련님….〉
윤치영이 놀라 다가갔지만, 유모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애써 상처를 숨기며 의연하게만 굴었다.
〈괜찮아요, 도련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피를 이렇게 많이 흘리는데…!〉
윤치영이 울 것 같은 눈으로 말했다. 유모는 타지에 떨어져 살던 윤치영에게 유일한 가족이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유모가 입은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군인 출신인 그녀가 이렇게 당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윤치영은 걱정 어린 눈으로 유모를 응급 처치해 주고, 구급차를 부르며 손끝을 덜덜 떨었다. 그 당시 윤치영은 소년티를 채 벗지 못했을 때였다.
〈…유모, 누가 공격한 건지는 알아?〉
〈…….〉
〈아버지에게 알리면,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거야.〉
〈…도련님.〉
유모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윤치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의연하게 웃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유모….〉
〈이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유모는 고집스레 말하며 병원으로 이동했다. 이후에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영은 그날의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수장인 아버지에게 알려 분명 반수장파의 짓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윤치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 윤치영이 살던 가옥은 경계가 강화됐다.
거기다 또래의 친구 셋이 생겼다. 모두 윤치영처럼 훈련을 받으러 온 늑대들로, 감시자의 훈련을 받으러 왔다.
하지만 혹독한 훈련 속에서 넷은 누구보다 우애가 깊은 친구가 되었다. 감시자의 훈련을 통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을 듣고, 모두 하나의 약속마저 했다.
〈어떻게 감시자 시험 통과 조건이 일족을 직접 심판하는 거야? 난 싫어. 못 해.〉
〈나도 못 해….〉
〈나도. 난 수장이 되고 싶은데.〉
윤치영이 맞장구를 쳤다. 감시자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은 일족의 명예를 떨어트린 친인척을 직접 처리하는 것이었다.
잔인한 선출 조건에 친구 셋과 함께 아예 감시자의 시험을 거절하자고 약속했다. 다음 대 감시자가 없는 것쯤이야, 어른들이 해결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윤치영이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윤치영에게 세 번째 악몽 같은 밤이 찾아왔다.
‘몸이, 안 움직여….’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난 윤치영은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마치 제 몸이 아닌 것처럼 근육 하나하나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보니 상처마저 가득했다.
하지만 주변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가옥에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피 냄새가 그득하고 누군가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윤치영은 두통에 정신이 멍했지만, 애써 몸을 일으켜 거실로 비척비척 나가 보았다.
그곳은 온통 피바다였다.
친구들은 물론, 친구들을 보필하던 고용인들도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윤치영은 그 가운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가 없었다. 끔찍한 두통과 함께 귓가에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어지러워….’
윤치영은 이마를 고통스럽게 짚으며 비틀거렸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고 강한 멀미에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아릿한 고통에 다리를 보니 자신도 부상을 당해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상처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자신이 다치고 주변도 피바다가 되었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끔찍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 기억이 뭐였지?’
다행히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은 선명했다.
‘유모가 분명… 친구들한테 공격당하고 있었어….’
윤치영은 초점이 희미한 회색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광경이었다. 하지만 처참하게 다리가 꺾여 쓰러진 친구 중, 양혜찬이 한 말만큼은 귓가에 남아 있었다.
‘지찬이가, 수장의 명령이었다고 했는데….’
쉽게 자신을 배신한 친구를 윤치영은 무감각하게 바라봤다.
비척비척 걸어간 윤치영은 간신히 수장파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친구들이 다쳤다고. 제발 도와 달라고. 누군가 침입한 게 분명하다고 울먹였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별다른 말 없이 와 주었다.
다친 수인들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윤치영은 수장파 사람들이 거둬 줬다. 하지만 그 방식이 이상했다. 다친 윤치영을 방에 가둔 채 음식을 겨우 넣어 줄 뿐, 회복될 때까지 모두가 철저히 윤치영을 감시할 뿐 말조차도 섞지 않았다.
겨우 기운을 차린 윤치영은 아버지를 찾았다. 다행히 수장파 수인들이 아버지를 불러 줘 만날 수 있었다.
윤치영은 정신이 몽롱했지만, 한 가지 생각만큼은 확실했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버지… 왜 방관했어?〉
지엄한 아버지를 다시 만난 윤치영은 화부터 냈다.
〈유모가 다쳤을 때부터, 묵인해 왔잖아.〉
〈…….〉
아버지는 끔찍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윤치영을 응시했다. 윤치영이 세 번의 악몽 같은 일을 겪는 동안 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윤치영은 기대해 봤자 소용없는 상대라는 걸 진작 깨우쳤지만, 이번만큼은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자신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 알 수 없는 위협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라도 알아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분명,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
〈내가, 반수장파의 짓이라 했잖아!〉
〈…치영아.〉
아버지는 한참 뒤 나직이 운을 뗐다. 그 모습이 마치 상황을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기라도 하듯 끔찍하게도 무감각해 보였다. 윤치영은 자신과 똑같은 아버지의 회색 눈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뭐를?〉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듯 침묵을 지켰다. 아들을 위해 잠시 틈을 주는 건 아닐 터였다. 정말 그랬다면, 이어지는 말을 절대 통보처럼 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간 윤치영을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형들을 공격한 것도, 유모를 공격한 것도. 친구들을 반불수로 만든 것도… 모두 너였다.〉
〈…….〉
〈처음부터 잘 생각해 봐라. 치영아.〉
〈…….〉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이해가 느렸다. 윤치영은 아무런 반응도 못 한 채 아버지를 노려봤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을 벌주려고 꾸며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묘한 기시감이 소름처럼 등골을 타고 올랐다. 이따금 악몽으로 꿨던 형제가, 보모가, 친구들이 다치던 광경은 자신이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윤치영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덜덜 떨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부상을 당한 상처는 벌어져 피가 다시금 흐르고 있었다.
〈…아, 아니야. 아버지. 나는, 그런 기억이 없어….〉
〈치영아.〉
아버지는 아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그쯤이야 윤치영은 어릴 적부터 지긋지긋하게 겪어 익숙했다. 하지만 교활한 아버지의 손안에서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느낌만큼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겹고 힘겨웠다.
〈넌 똑똑하지만 늘 감정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못 보곤 했지.〉
〈…….〉
〈회복할 시간을 좀 줄 테니 추스르고 나오거라.〉
아버지는 윤치영을 혼자 방에 둔 채 자리를 빠져나갔다. 윤치영이 구토감에 시달리며 바닥을 기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제 손을 내려 봐도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아들이 혼자 견뎌 내야 할 과정 중 하나라 생각했다.
감시자가 되는 길은 고통스럽고 힘겨웠다. 모두가 거부해 결국 수장이 만들어 내야 할 정도로.
〈감시자의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한다.〉
말과 함께 아버지는 문을 닫았다. 아주 잠시 후, 문 너머에서 어느 늑대의 거친 숨소리와 물건을 거칠게 부숴 버리는 야수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 * *
감시자로 내정된 이후, 윤치영은 지긋지긋한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어….’
피폐해진 윤치영은 오직 집으로 돌아갈 희망만을 품은 채 시간을 죽였다. 하루하루 기다린 끝에, 약속한 날이 오자 몸을 움직였다. 항상 다정한 어머니는 자신을 반겨 줄 것이다. 자신의 남매들도 여전히 우애가 좋을 거라 믿었다. 윤치영은 어떻게든 가족을 만나 안전한 무리 안에서 쉬고 싶었다.
마침 돌아가는 날은 누나의 생일이었다.
‘누나는 이제 뭘 좋아하지? 인형?’
윤치영은 몸은 어른으로 자라났지만 어릴 적의 누나를 떠올리며 선물을 직접 골랐다. 윤치영에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선물이자 반가움의 표시였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치영은 피폐해진 눈으로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제대로 잠을 못 자 어쩔 수 없었다.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누군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을까 봐 잠시라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깊이 잠들기 위해 억지로 수면제에 의지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을 죽이기보단 시간 안에 죽어 가는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가족들이랑 있으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늑대들은 갯과인 만큼 무리 간의 결속력이 뛰어났다. 태어나는 것도 무리의 품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도 무리의 품에서 죽는 것이라 당연히 생각했다. 윤치영에겐 무리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위안이었다.
‘감시자도… 받아들이기 싫다고 하면 어머니는 들어주실 거야.’
그렇게 윤치영은 이제 훈련은 끝났다고 믿은 채, 거대한 늑대 일족의 본가에 도착했다.
늦은 한밤중 도착했지만 누나의 생일이라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의 낭만적인 날 같았다. 선물을 손에 고쳐 쥔 윤치영은 희망을 품은 채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윤치영은 생일 파티 중이던 홀에 들어섰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친인척들의 놀란 시선이 윤치영에게 은밀하게 모였다.
그들은 윤치영을 침입자처럼 보듯 놀람과 멸시가 서린 눈으로 응시했다. 그 안에는 두려움마저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친인척의 손을 잡으며 뒤로 물러났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경계심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윤치영은 고요하게 선 채 주변을 확인했다. 자신이 걸을 때마다 친인척들이 길을 피하는 모습도, 그 끝에 선 가족의 경악으로 물든 표정도 모두 눈에 담았다.
〈…치영아.〉
큰누나였다. 하지만 생일 파티의 주인공은 동생을 반겨 주지 않았다. 달라진 가족들의 눈빛은 다른 늑대 무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윤치영은 손에 쥔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며 예감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다.
상자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회색 눈동자가 여리게 흔들리다가도, 체념하듯 색이 바랬다. 입술을 깨물던 윤치영은 체념하듯 웃었다. 하필 이런 날 와서 현실을 확실하게 보게 됐다.
〈…….〉
윤치영은 어둡고 축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누나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윤치영을 보며 한 발짝씩 물러났다. 경멸 어린 시선도 느껴졌고 두려움과 혐오감, 혹은 이따금 흠모의 눈빛도 보였다. 하지만 흠모조차도 깨끗한 의도가 아니라는 걸 윤치영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상했다. 윤치영은 분명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감시자의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윤치영은 배척당하는 존재가 돼 버렸다.
어차피 자신은 다시는 무리로 돌아올 수가 없다.
깨끗하게 단념한 윤치영은 쓸모없는 감정을 걷어 내고 상황을 파악했다. 이제 무리에 속한 늑대로서가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그들을 바라봐야 했다.
애초에 아버지는 자신이 벌인 짓을 무리에 숨길 생각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야만 감시자의 힘이 강력해져, 다음 대의 수장이 일족을 통솔하기 수월해질 테니까.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었다.
〈…누나.〉
누나 앞에 선 윤치영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트로피인 누나. 누나도 자신만큼이나 우아하고 훤칠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동생을 보는 눈빛에는 경멸과 일말의 동정심이 서려 있었다. 곁에 선 어머니마저도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차마 넷째 아들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체념 다음은 순응이었다.
이제 윤치영은 돌아갈 고향도, 기다려 주는 가족도 없었다. 그저 차기 감시자로서 그들을 대해야 했다.
〈…생일 축하해, 선물이야.〉
윤치영은 웃으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누나는 고맙다고 나직이 대답했지만, 자신이 직접 받지 않고 옆쪽에 수행원에게 대신 선물을 받게 했다. 윤치영은 피폐하고 지친 눈이었지만,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까지 나눈 뒤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 윤치영의 뒤로 수군거리는 말이 길게 이어졌다.
밖으로 빠져나온 윤치영은 차에 올라타 수행원에게 말했다.
〈집으로 갈래.〉
〈…예.〉
운전사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윤치영이 그간 훈련하며 지낸 끔찍한 곳이었다.
윤치영은 지친 눈으로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늑대 일족의 저택을 바라봤다. 어릴 적 추억이 남은 곳이지만, 이제는 누구도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는 곳이었다. 고향을 잃은 듯한 그 기분은 윤치영의 마음을 늘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윤치영은 감시자의 길을 받아들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순응해야만 했다.
* * *
…강아지를 만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윤치영은 지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찾아갔다. 가족의 정이나 겉치레를 위해 찾아간 건 아니었고,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서 그를 찾았다.
그날 윤치영은 감시자가 된 지 몇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병상에는 정말 아픈 건지 궁금할 정도인 정정한 중년의 미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자신을 닮은 아들의 얼굴을 보고도 기꺼워하지도 않았다. 윤치영도 늘 그가 자신을 닮아 싫었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윤치영이 의자를 끌어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그거 알아?〉
〈…….〉
〈이번에 누나가 사람까지 써서 날 죽이려 들었어.〉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곁에서, 윤치영은 지루한 안부를 전하듯 한가롭게 말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목석처럼 누운 채 천장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반기지 않는 자리였다.
윤치영은 꼬아 앉은 다리 끝을 까딱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누나가 그렇게 존경하는 아빠를 수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고 이 난리네.〉
〈…….〉
〈다 아버지가 일족의 어린애들을 희생시켜서 자초한 건데… 이상하지 않아?〉
아버지는 죄목 같은 이유를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고집스레 눈을 꾹 감아 버렸다. 그 모습에 그저 여유롭게 굴던 윤치영은 이를 빠득 깨물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자기 신념만 올곧은 그가 수장의 자리에 오른 것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외면하는 것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젠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다만 윤치영은 그가 죽어 버리기 전에 궁금한 것 하나만큼은 해소하고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하나만 물을게, 아버지.〉
몸이 다 자라난 이후, 윤치영은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자신처럼 페로몬을 강하게 타고난 건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누나는 윤치영과 달리 온전하게 자라났다. 그 이유는 누나의 유모를 통해서 알게 됐다. 아버지의 조치가 따로 있었다.
〈누나도 나처럼 페로몬을 강하게 타고났었잖아.〉
〈…….〉
〈그런데 왜… 누나만 억제제를 먹여 키웠어?〉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눈을 고집스레 감은 채였지만, 잠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간이 고집스레 조여진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점점 윤치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습관적인 웃음이 식었다. 회색 눈동자는 사납게 날이 섰고 힘이 들어간 턱에서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수인 중에서 페로몬을 강하게 타고난 아이는 종종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학이 발달한 만큼, 성장기에 페로몬 억제제를 꾸준히 먹이면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다. 페로몬 쇼크를 겪을 확률도 낮아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윤치영을 방치했다. 살면서 고통스러운 악몽을 겪고 자기혐오에 몸부림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나처럼 똑같이 약을 먹여 줬으면… 나도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잖아.〉
침착하게 묻던 윤치영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우아하게 꼬아 앉은 다리에 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굵은 핏줄이 불거지며 튀어나오고 눈매가 맹수처럼 날이 섰다. 옆쪽에 아버지의 고용인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윤치영은 상관치 않고 아버지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랬냐고.〉
〈…….〉
〈대체 왜!〉
〈…치영아.〉
부름에도 윤치영은 거칠어진 숨부터 갈무리했다. 드디어 이 철통같은 남자가 무언가 말해 주려 한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 누나는 총명하지만 내 눈에 들려는 행동만 했지.〉
〈아… 노망난 건 아닌가 봐? 끝까지 누나 칭찬이네.〉
〈반대로 넌 호전성이 너무 강하고,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굴었다.〉
〈전부 당신 닮은 거잖아. 왜? 거울 보는 거 같아서 싫었어?〉
비꼼에도 아버지는 눈을 떠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지금 진실을 털어놓는 것조차도 그저 시기가 차서 말해 주는 기계 같았다. 어차피 기대도 안 한 사람이지만, 윤치영은 그가 이어 하는 말에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넌 강하지만 수장의 자질이 없었다. 그래서 감시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격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난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찾아 준 것뿐이다.〉
〈…그래서.〉
〈…치영아. 난 후회하지 않는다.〉
〈…….〉
윤치영은 힘이 들어간 손끝을 서서히 움켜쥐었다가, 공허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슨하게 입은 정장 바지에 손을 꽂은 채 병상으로 다가갔다. 병든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윤치영은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이제는 그를 자식으로서 마지막 가족의 정을 생각한 자신이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감시자의 길을 원했던 적이 있어?〉
〈…….〉
〈원했던 적이, 있냐고.〉
분노로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옆쪽에서 고용인이 가까이 다가와 고정하시라고 말렸다. 하지만 윤치영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끝까지 천장만 보는 눈을 치뜬 채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다 해도, 넌 감시자의 길이 아니었다면 그 재능을 가지고도 썩어 빠진 한량밖에 더 안 됐겠지.〉
〈아… 당신처럼?〉
윤치영이 헛웃음 끝에 어이없다는 듯 입가를 쓱 쓸며 말했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섬뜩함만이 감돌았다. 스스로를 비웃는 얼굴이었다. 윤치영은 마지막까지 가족에게 무언가 기대한 자신이 한심했다. 이제 그의 회색 눈동자는 떨리다 못해 불안정하게 가라앉았다.
〈난 그래도… 당신에게 뭔가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았어.〉
〈…….〉
〈나한테….〉
부모로서의 정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조차 없었다. 사납게 번들거리던 윤치영의 눈이 묽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면모는 잠시일 뿐, 윤치영은 무너지듯 허탈하게 웃었다.
페로몬 쇼크로 인한 사고 때문에 가족과 떨어트려 시골에 처박아 둔 줄 알았는데. 아버지에게 그 일은 모두 감시자로서 마땅히 겪어야 할 일이었다. 새가 멀리 날지 못하도록 날개 끝을 잘라 버리듯 모두 제 욕심으로 자행한 일이었다.
〈뿌듯하지? 자식들을 트로피처럼 금칠해서 잘 세워 놨잖아. 정작 까 보면 수장이 된 누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감시자가 된 난 광견병 걸린 개와 다를 바가 없는데.〉
〈…….〉
〈그래도 궁금증은 해소됐네. 고마워, 아버지.〉
차분하게 말한 윤치영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곤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곤 호화로운 병실에 누운 그에게 통보처럼 말해 뒀다.
〈마지막인데 누나한테 인사나 잘해 둬. 아버지를 유일하게 존경하는 자식이잖아.〉
어차피 지병으로 인해 얼마 살지 못할 사람이었다. 윤치영은 그를 수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더는 증오하기도 지치는 상대였다.
이후 윤치영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았다.
도박에 빠져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고 손에는 기꺼이 피를 묻혔다. 자신의 본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질수록 어떻게든 자기애를 뭉쳐 스스로를 꽉 감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 한시라도 살 수가 없었다.
너무 지칠 때면 과거로 돌아가거나, 고향 혹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윤치영은 늘 벼랑 끝에 몰려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윤치영을 기다려 주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고향마저 잃은 윤치영은 늘 공허함을 안은 채 도박에 빠져 살았다.
작고 꼬질꼬질한 강아지를 만나기 전까지. 기다림의 끝에는 늘 기회가 있었다.
* * *
“…….”
윤치영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온몸에서 밀려드는 싸한 고통에 윤치영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옆으로 누운 자세가 낯설었는데, 다시 보니 자신은 새카만 늑대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끔찍한 짐승의 모습으로 깨어났다. 고통과 더불어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두툼한 앞발에는 수액 선이 불편하게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늑대는 상관하지 않고 주변을 앞발로 더듬고 발톱으로 긁었다. 희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탁.
앞발을 툭툭 뻗자 투명한 유리 벽이 걸렸다. 페로몬 완화제를 맞고 있었는지 침대가 유리로 둥글게 감싸져 있었다. 아마 격리실인 듯했다.
‘격리실이면 면회도 못 왔겠네….’
페로몬 완화제를 맞을 때는 안정을 위해 면회가 불가인지라, 강아지가 몰래 침입하거나 고집부리지 않는 이상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곁에 있길 바랐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낙담한 늑대는 힘없이 늘어져 누운 채 색색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담요는 대체 누가 둔 거지….’
원래 격리실에 아무 물건이나 둘 수 없는데, 이불 위로 극세사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강아지가 워낙 좋아해 보기만 하면 격렬하게 몸을 비비는 담요였다. 이런 세심한 물건을 둘 사람은 속정이 많은 지영배뿐이었다. 아마 안정을 위한답시고 가져다 둔 듯했다.
하지만 희성이 좋아하는 담요만 있을 뿐,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늑대의 눈매가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거칠게 숨을 토할 때마다 우아한 갈기가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강아지도… 다쳤겠지.’
밀려드는 불안감에 어떻게든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희성의 말간 얼굴뿐이었다. 자신을 보고 뒷걸음을 치던 모습과 불안에 떨리던 눈빛, 그리고 끝내 숨기지 못한 겁먹은 얼굴까지. 만약 희성이 다치지 않았다 해도, 윤치영은 그 마지막 기억에서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아무 기억도 없었다. 또 이성을 잃고 늑대로 변했으니, 누군가 다쳤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악몽 같은 일이 반복됐다. 약을 먹었는데도 통제할 수 없었다. 허무감과 자신을 향한 혐오감에 늑대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짓 그만하고 싶어….’
윤치영은 어깨의 상처보다도 이 상황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페로몬 쇼크로 의식을 잃기만 하면 곁에 남아 준 소중한 누군가가 다치고 피를 흘린다. 새카만 늑대의 회색 눈이 묽게 흔들렸다. 그래도 작은 강아지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만큼은 자신 때문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견희성….’
신체는 늘 마음의 영향을 받았다. 점점 가슴속에서 치민 불안감에 숨이 가빠지며 현기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빠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묵직한 근육이 딱딱해질 정도로 힘이 꽉 들어갔다. 고통에 송곳니를 드러낸 채 억세게 턱을 악물었다. 자신의 심장 박동이 들릴 정도로 피가 빠르게 돌고 있었다. 페로몬 쇼크의 전조 증상이었다.
‘견희성….’
그르르….
거칠어진 숨결 사이로 그을음 같은 짐승의 소리가 났다. 윤치영은 고통스러운 부상마저도 잊은 채 직접 다리를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지금 당장 희성이 무사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증에 주변을 부숴 버릴 것만 같았다.
턱.
앞발이 유리 벽에 걸렸다. 발톱이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이어졌다가, 다시 힘없이 끊겼다. 근육에 오히려 과도한 힘이 들어가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점점 심장이 크게 뛰며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견희성… 하아.’
늑대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앓듯이 낮게 울었다.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당장 사람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두둑한 앞발로 시트만 긁게 됐다. 이 끔찍한 모습으로 한시도 지내기 싫었다.
그때 어디선가 어수선한 짖음이 들렸다.
와, 왕.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늑대의 눈이 커졌다. 분명 가까이서 환청처럼 짖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도저히 강아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윤치영은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강아지가 있는 곳을 알게 됐다.
담요 속, 옆으로 누운 늑대의 풍성한 갈기 속에서 무언가 다급하게 꾸물거렸다.
곧 이불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 주먹만 한 덩어리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이내 큰 결심을 했는지 풍성한 갈기를 타고 넘어 이불을 빠져나오려 했다. 늑대는 그 간지러운 감촉에 상처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차츰 숨결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이내 이불 옆으로 정전기에 잔뜩 털이 선 솜뭉치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왕!
견희성이었다. 강아지로 변한 희성이 꼬리를 날아갈 듯이 흔들며 윤치영의 얼굴로 바쁘게 다가왔다. 오죽 반가운지 아웅, 아웅 하고 울며 코끝을 마주 대기도 하고 아예 늑대의 콧잔등에 올라타 마구 뺨을 비벼댔다.
윤치영은 기꺼이 강아지를 받아들였다. 분홍 배를 핥아 주고 앞발로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강아지가 발라당 나가떨어져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작은 몸을 슬쩍 핥아 주고 반가운 소리를 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견희성이 무사했다. 아플 정도로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던 몸에 힘이 풀렸다. 조금 전까지 희성을 찾기 위해 온 주변을 들추고 부술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늑대는 작은 강아지조차 이기지 못할 듯한 유순한 눈이 됐다.
‘자기야….’
답지 않게 거대한 늑대가 여리게 끙끙거렸다. 우아한 검은 귀 아래 회색 눈동자가 은밀하게 비쳤다. 강아지가 그 눈앞에 더 가까이 기댔다. 어둡고 고요한 병실 안에서 둘은 서로의 온기만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윤치영은 어차피 희성이 못 알아들을 걸 알지만, 가장 묻고 싶던 말을 물었다.
‘나… 기다렸어?’
겉으로 나온 소리는 늑대가 그르렁거리며 거칠게 앓는 듯한 소리뿐이었다. 작은 소동물이었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 법한데, 겁 없는 하룻강아지는 분홍 혀로 코를 닦으며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왕!
하얀 것이 마치 윤치영을 원망하듯 노려보더니, 앞발로 코를 퍽 쳤다. 그래 봤자 따듯한 솜을 문댄 감촉이었지만 윤치영은 괜히 엄살처럼 눈을 꽉 감으며 검은 귀를 뒤로 눕혔다. 이렇게 하면 희성이 미안해하며 뽀뽀하듯 핥아 줘서 아픈 척하는 게 습관이 됐다.
역시 강아지는 누구보다 사나우면서도 약한 것에게는 억세게 못 굴었다. 늑대의 턱을 슬쩍 핥아 준 강아지는 자리를 고르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늑대의 풍성한 검은 갈기 털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 서서히 제 모습을 변화시켰다.
“…야, 윤치영.”
찬찬히 반수 상태로 변한 희성이 나직이 불렀다. 옆으로 누운 늑대의 몸에 올라탄 자세였다. 하지만 윤치영은 그 무게가 깃털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희성은 강아지일 때도 사람일 때도 체구가 작아 솜털 같기만 했다.
희성이 원망과 걱정이 서린 까만 눈으로 사납게 물었다.
“너, 또 나 기다렸냐고 물었지?”
“…….”
대체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윤치영은 그간 자신이 그렇게 뻔한 질문만 해 왔나 싶었다. 혹은 자신이 그렇게나 한 가지 대답만을 원했나 싶었다. 뻔한 질문인 만큼, 윤치영은 어서 희성이 뻔한 대답을 해 주길 바랐다.
역시나 강아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안 기다렸겠어?”
희성이 원망하듯 말했다. 답지 않게 사납게 뜬 눈 안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묽게 번진 까만 눈동자에는 물기마저 어려 여리게 떨렸다.
그 대답 한마디에 윤치영은 녹아내리듯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정말로 강아지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줬다. 안도감과 함께 심장 박동마저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희성이 다치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곁에 있어 줬다는 자체로 가슴이 미어지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자신의 악몽은 변할 수 있었다.
그 곁에서 희성이 늑대의 갈기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잔소리처럼 말했다.
“너 3일이나 잠들어 있었어. 알아?”
“…….”
“자면서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해? 갑자기 으르렁거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너, 너 울어?”
“…….”
희성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털이 검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었지만, 힘없이 누워 있던 늑대가 애달프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거대한 늑대가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이 퍽 이상해 보일 법도 한데, 드물게도 희성은 놀라 순진한 눈매가 두드러진 눈으로 눈물을 닦아 줬다. 이내 늑대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힘겨워하자, 희성이 우는 늑대의 머리를 어설프게 껴안아 달랬다.
“야, 야… 수컷은 하울링할 때 빼고 울면 안 돼.”
‘자기는… 하울링도 제대로 못 하면서….’
“뭐, 뭐라는 거야…. 나한테 욕한 건가?”
다행히 늑대 모습으로 말해서 희성이 알아듣지 못했다. 윤치영은 소리 없이 울던 와중에도 소탈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봤자 늑대의 송곳니가 비칠 정도로 입이 조금 찢어진 것뿐이지만, 희성이 곁에 있어 진심으로 기뻤다.
“아니면 아파서 우는 거야? 의사 부를까? 응?”
그사이 희성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불로 늑대의 눈시울을 닦아 주는데 그 손길이 거칠었다. 윤치영은 아픈 척 끙끙 앓으면서도 그것마저 희성다워서 좋았다.
역시 반수로라도 변해야겠다.
그간 희성이 강아지로 지낸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을 할 수 없는 본체는 불편했다. 윤치영은 고통도 잊은 채 수액 선을 대충 입질로 뜯어냈다. 희성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윤치영의 모습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늑대의 몸에서 근육이 불끈대며 안 그래도 커다랗던 덩치가 더욱 커졌다.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진 채였다. 상처가 있는 만큼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로 통증이 심했다.
“강아지….”
“너, 너… 이렇게 함부로 변하면 어떡해? 상처 벌어져!”
희성이 구박조로 말하며 등 쪽의 상처를 지혈하려 했다. 하지만 윤치영은 옆으로 누운 채 희성을 품에 껴안아 가둬 버렸다. 그러곤 잔소리하는 희성의 이마를 핥고 조심조심 입을 맞췄다. 그 묵묵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꾸물대며 난리를 치던 희성도 이내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잠긴 목을 가다듬은 윤치영은 애써 평소처럼 유하게 말했다.
“강아지가 나만 봐주겠다고 고백하는데… 본체로 있을 수는 없잖아.”
“내, 내가 언제 고백했냐? 내 말 좀 그만 왜곡해라….”
희성은 말만 구박조지 어정쩡하게 윤치영의 등을 쓰다듬어 위로해 줬다. 살며시 윤치영을 올려다보며 눈물도 닦아 주고, 반가운 마음을 못 숨기겠는지 슬쩍 두둑한 가슴에 뺨을 기대고 있었다. 그 등 아래 휘적여지는 꼬리는 마치 날아갈 것처럼 빨랐다. 윤치영은 그 반동으로 가벼운 이불이 움직일 때마다 행복한 웃음이 피었다.
희성을 품에 가둔 채, 윤치영은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자기 격리실은 어떻게 들어왔어?”
“잠입했어. 간호사 안 오겠지? 또 들키면 나 병원 출입 금지랬어.”
아무래도 희성은 줄곧 격리실에 작은 강아지로 침입한 듯했다. 윤치영은 격리실에 숨어들어 제 곁에 따끈따끈한 몸을 붙이고 있었을 강아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들켜 잡혔을 때 이거 놓으라고 힘껏 발버둥 쳤을 강아지도. 절로 행복한 웃음과 함께 희성을 보는 눈이 사랑스럽게 변했다.
“3일간 계속 잠입했었어?”
“그럼 널 혼자 뒀겠냐?”
퉁명스럽게 말한 희성이 윤치영을 안은 채 미어캣처럼 고개만 내빼 들었다.
윤치영은 그런 희성의 어깨에 콧날을 댄 채, 특유의 순한 살냄새를 맡으며 아프게 구기고 있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페로몬 선이 거의 발달 안 해서인지 희성은 인간으로 있을 때도 부드러운 비누 향과 꼬순내가 났다. 영역 의식이 강한 윤치영을 유일하게 안정시켜 주는 체향이었다. 윤치영은 희성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힘없는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나 자기가 곁에 있어 줘서 지금 안 아픈 건가 봐….”
“몸도 제대로 못 일으키는 게 무슨….”
희성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 어깨의 통증 때문에 윤치영은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지금 드는 생각은, 이런 아픔을 지난번 강아지가 겪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였다. 왜 희성에 관한 일이라면 마음이 이렇게 나약해지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가끔은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윤치영은 희성을 원하고 좋아하게 됐다.
자연히 윤치영은 자신이 칼에 찔리기 전을 떠올리게 됐다. 자신을 보며 뒷걸음질 치던 희성과 불안하게 떨리던 눈동자를.
“…….”
“…윤치영?”
윤치영은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누나를 향해 칼을 겨누던 자신이, 희성에겐 박건태와 같아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 증거로 희성의 태도가 묘하게 변했다. 자신과 길게 눈이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늘 호전적으로 눈을 치뜨던 강아지가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을 숨기듯 자신의 속내를 외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누나를 향해 칼을 들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윤치영은 불안감에 희성의 손목을 꽉 붙잡은 채 힘없이 물었다.
“강아지는… 상관없어?”
“뭐가?”
막상 물으려니 입이 안 떨어졌다. 하지만 이젠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원래 윤치영은 감시자의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감시자가 될 때 자기애를 포함한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한 만큼, 자연스럽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일이 싫고 혐오스러웠다. 감시자는 항상 무리를 감시하고 잔인하게 벌한다. 동족 의식이 누구보다 강한 견인족에 뿌리를 뒀기에, 외면하려 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윤치영은 담담하지만 묵묵함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감시자라서 사실 나쁜 일도 많이 해….”
“…알아.”
희성은 애써 무던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쯤이야 윤치영을 강아지로서 만나기 전부터 알던 것이었다. 그런데 윤치영이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하는 건 의외였다. 윤치영은 자신의 일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달라지는 법이었다. 희성처럼, 윤치영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윤치영은 스스로가 싫은 얼굴로 자신 없이 말했다.
“그리고 사실… 우리 강아지가 싫어하는 일을 제일 많이 해.”
“…….”
“동족도 처리하고, 가족도 내 손으로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해.”
말하던 윤치영은 희성의 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만큼 희성을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강아지가 자신을 기다려 준 만큼 그를 다시는 실망시키기도, 놓치기도 싫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이성을 잃고, 동족을 공격해.”
“…….”
“그런데도… 괜찮아?”
“…….”
물음에 희성은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그럴수록 윤치영은 벌을 받는 것처럼 시간을 견뎌냈다.
이내 희성이 상체를 일으켰다. 윤치영을 내려다보는 희성은 생각에 골똘히 잠긴 듯, 미간을 모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윤치영은 칼에 찔린 통증보다도 희성이 침묵을 지키는 시간을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 만약 희성이 극단적으로 자신을 떠나도 그를 놓칠 자신이 없었다.
뒤늦게 고심하던 희성이 입을 뗐다.
“윤치영.”
“…응.”
“네가 나쁜 놈인 거 처음부터 알았어. 아마 내가 제일 잘 알걸?”
“아닌데. 자기가 제일 나쁜데….”
윤치영은 조금 여리게 웃었다. 지금 자신을 침묵으로 안달 나게 만든 희성이 얄궂게 느껴지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거기다 넌지시 건넨 장난에도 한결같이 진지하게 구는 강아지도 좋았다. 세상 어느 강아지가 접힌 귀를 달고 이렇게 진지하게 구나 싶었다. 거기다 하얀 알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이다. 윤치영은 희성의 손을 꼭 잡아 손등에 입을 조심조심 맞추며, 이어지는 희성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다쳐서 다 죽어 가던 날 구해 준 건 너잖아. 사심이었지만.”
“응….”
“그리고 내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웃으면서 뽀뽀 같은 걸 해 준 거도 너고….”
“…….”
말하던 희성은 귀 끝까지 붉어진 채 시선을 헤맸다. 평생 칭찬이나 좋은 말과는 거리를 둔 채 살았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게 낯설었다.
하지만 진심조차 전하지 못할 정도로 용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희성은 제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지도 못하는 견인족이었다.
“또. 처음부터 널 속이고, 가출해도… 항상 날, 믿고 내 모습 그대로 봐 줬잖아.”
“…….”
“칼을 싫어하는 나 대신, 멍청하게 몸으로 막아 준 것도 너고….”
비난 같은 걱정이었다. 윤치영은 가만히 희성의 말을 들어주었다. 차마 눈도 못 마주치는 희성도, 그리고 등 아래 부끄럽게 숨긴 꼬리가 바쁘게 끝이 흔들리느라 제 허벅지 언저리를 톡톡 때리는 것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난 투견이야. 투견들은 자신이 믿어야 할 걸 스스로 정해.”
마음만큼은 정말 투견인 내 강아지.
“그러니 난… 계속 널 믿고 곁에 있을 거야.”
“…….”
“네 과거가 어떻다 해도… 나만큼은 진짜 네가 누군지 아니까.”
희성이 말하며 윤치영을 살며시 안아 줬다. 체격 차이 때문에 품에 안긴 것이었지만, 그래도 윤치영에겐 강아지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존재로 느껴졌다.
“자기야….”
윤치영은 입술을 깨물며 가늘게 웃었다. 희성이 울지 말라고 했는데 눈가가 붉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윤치영은 늘 희성의 앞에서 감정적으로 변하곤 했다. 희성도 용기 내 진심을 말하고 부끄럽고 벅찬지, 이제 꼬리가 빠르게 휘둘리고 있었다.
침묵 끝에 윤치영이 한 손으로 희성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내가 또… 페로몬 쇼크 와서 강아지 공격하면 어떡해?”
“괜찮아. 난 안 잡아먹힐 거야.”
희성의 대답은 흔들림 없었다. 윤치영은 희성이 본체는 주먹만 한 강아지면서, 대체 어떻게 이런 굳건한 대답을 할 수 있는지가 신기했다. 페로몬 쇼크는 당사자든 주변인이든 끔찍한 일이었다. 윤치영이 스스로를 혐오할수록 어떻게든 자기애로 감싸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한 일이었다.
그런데 강아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또 침대 밑에 잘 숨어 볼게. 작은 몸을 그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쓰겠냐?”
“…….”
“그리고 내가 다치면… 네가 후회할 거잖아.”
주먹만 한 게 속상해하듯 말했다. 윤치영은 매번 자신에게 그렇게 무심하면서, 이렇게 한 번씩 툭툭 정을 담아 행동해 주나 싶었다. 그 행동 한 번에 윤치영의 마음은 흔들리다 못해 이미 강아지에게 전부를 빼앗겼다. 윤치영은 희성을 꼭 껴안은 채 아랫입술을 깨문 채, 처음으로 웃음기 하나 없이 진심만을 담아 말했다.
“견희성….”
“응.”
“나도 사랑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방금 나한테 한 말들이 다 그 뜻이잖아….”
“아, 아닌데….”
희성이 멋쩍어하며 윤치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벼 댔다. 표정을 숨기고 싶은지 이마를 윤치영의 품에 푹 기대 버렸다. 그러면서도 고백이 좋은지 강아지 귀를 움찔거렸다. 자세히 보면 하얀 솜털마저 다 서 있었다. 윤치영은 간지러운 웃음을 길게 터트렸다. 희성은 늘 세상 누구보다 단단하게 굴면서, 알고 보면 이런 애정 표현에 가장 약했다.
간지러운 분위기가 얼마나 갔을까, 희성이 새삼 가라앉은 목소리로 머뭇머뭇 불렀다.
“근데… 윤치영.”
윤치영은 희성의 망설임 가득한 부름 한 번에 말을 건 의도를 눈치챘다. 강아지는 자기감정을 한 번도 제대로 숨긴 적이 없었다. 이런 온건한 부름은 분명 사고를 쳤을 때나 했다.
윤치영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 사, 사고 쳤어.”
“응. 사고 쳤어?”
“…응.”
“…뭔데?”
예상이 맞았다. 윤치영은 괜히 분위기가 가라앉은 척을 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희성이 어설프게 눈치 보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윤치영은 이제 희성이 사고를 쳤다고 해도 두근거리고 설레기만 했다. 자신도 참 중증이었다.
“지금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놈 얘긴데….”
입원이라니. 이번 사고는 제법 규모가 큰 듯했다. 답지 않게 희성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이번엔 희성이 강아지가 아닌 애인으로서 사고를 쳤다.
“내가 양혜찬을 찾아가서… 조, 좀 많이 팼다.”
결국 윤치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희성을 꼭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희성은 부끄러운지 순식간에 작은 강아지로 돌아가 버렸다. 부끄러움 많은 작은 강아지는 이불 속을 꾸물꾸물 파고들더니 윤치영의 가슴에 호빵 같은 엉덩이만 내보인 채 엎드렸다. 윤치영이 왜 그러냐고 그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달래 봤지만, 끝내 강아지는 가끔 손가락만 깨물 뿐 솜털이 선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윤치영은 그런 강아지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강아지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다친 채 버려져서도 누군가를 기다려 왔다.
그리고 자신은 고향을 잃은 채 떠돌며, 자신을 기다려 주는 단 하나의 존재를 찾아왔다. 아주 까맣고 작은 늑대일 때부터 수천 번 흔들리며 간절하게.
이제 윤치영은 자신이 정착할 곳이 희성이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를 평생 사랑하고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윤치영은 조심스레 강아지의 몸을 끌어 입을 맞췄다. 자기 식대로 사랑한다고 표현해 준 강아지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잘했어, 나도 사랑해.”
“…….”
강아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머뭇머뭇 앞발로 툭 윤치영의 턱을 밟더니, 망설이듯 입술을 핥아 주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크게 웃음을 터트린 윤치영은 아픔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강아지를 손으로 감쌌다. 희성도 윤치영의 손목을 작은 힘으로나마 꽉 붙잡았다. 오래도록 서로를 기다린 만큼 간절하게.
〈강아지는 건드리지 마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