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6/10)

사건 이후 보름이 지났다. 그간 두 사람은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는 희성이 바빴다. 일주일 만에 퇴원한 윤치영을 간호해 줘야 했고―엄살 같았지만―, 조직의 일도 희성이 일부분 처리했다. 그 때문에 거실 테이블은 강아지의 업무용 책상이 됐다. 강아지는 주기적으로 보고를 올리러 온 조직원들에게 현명한 판단을 내리곤 했다. 한 번 짖으면 ‘진행해’, 두 번 짖으면 ‘그건 하지 마’였다.

그중 희성이 처리한 가장 주요한 일은 ‘박건태 색출’이었다.

“영배 형, 박건태 어디까지 추적했어?”

침실에서 부스스한 꼴로 나온 희성이 물었다. 지영배는 추적에 능한 만큼 이 일에 적격이었고, 희성이 박건태에게 당한 일을 듣자 기꺼이 부탁을 받아들여 줬다.

이번에 윤치영이 부상을 당한 사이 박건태는 종적을 감추고 튀어버렸다.

역시 눈치 하나는 좋은 새끼였다. 늑대족 수장에게 붙었던 박건태는 팽 당할 걸 눈치챈 건지, 혹은 희성이 윤치영과 상견례를 했다는 소문을 들은 건지. 10년간 몸을 바쳐 일한 도박장을 미련 없이 떠 버렸다.

거기다 간 큰 짓까지 했다.

〈…도박장 돈까지 다 들고 잠적했다고?〉

강아지 배신하던 여우 커서 호랑이 등도 처먹으려 든다고, 박건태는 견인족 도박장의 돈마저 홀랑 털고 도망쳤다.

종적을 깔끔하게 감춘 걸 보면 아마 대비책을 오래도록 준비해 둔 듯했다. 그 사랑하던 여자도 데려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데, 정보를 들은 희성은 기가 차다 못해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그 새끼 찾으면 진짜….〉

그날 이후, 온몸의 솜털이 다 설 정도로 화가 난 강아지는 작정하고 박건태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늑대 조직원들의 추적 능력은 비상할 정도였고, 수색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박건태의 위치가 특정되고 있었다. 희성의 정보력도 한몫한 덕이 컸다. 박건태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5년간 곁에 붙어 있던 희성의 눈엔 그가 뭔 짓을 할지 훤히 보였다.

“그 새끼 갈 곳 별로 없어. 전과도 많아서 어차피 해외로 못 뜨니까, 내가 말한 고향인 부산부터… 흐읏!”

갑자기 희성이 미묘한 신음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체고가 희성의 허리를 넘는 거대한 늑대가 서 있었다. 새카만 모피를 우아하게 빛내는 모습과는 달리, 즐거워하는 기색이 늑대의 회색 눈에 뻔히 보였다.

“허, 허벅지 좀 핥지 마!”

희성이 버럭 화를 내며 샤워 가운을 하체까지 꽉 여몄다.

이번 부상으로 윤치영은 늑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문제는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늑대든 인간일 때든 꼭 희성의 살을 맛보듯 핥아 봤다. 특히 부드러운 허벅지 사이에 관심이 많았다. 희성이 질색하며 화를 내는 이유가 있었다. 그간 늑대가 어찌나 입질을 해 댔는지 하얀 허벅지가 따가울 정도로 이빨 자국이 울긋불긋하게 올라와 있었다.

“아, 아무튼 영배 형….”

늑대를 밀어낸 희성이 귀 끝까지 붉어진 채 다시 지영배를 바라봤다. 막상 화를 내고 나니 민망했다. 하필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야릇한 모습이나 보이다니. 희성은 윤치영에게 목줄이라도 걸어 놔야 하나 싶었다.

다행히 지영배는 그런 연인 간의 장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늑대로 변한 윤치영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대화하는 거리도 침실 문 쪽 끝에서 거실 끝일 정도로 멀찍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전히 윤치영은 본체로 지낼 때 공격성이 짙어져 희성만이 그 곁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희성이 시커먼 늑대를 대충 밀어내며 말했다.

“박건태 그 새끼 잔머리 하나는 잘 굴리니까 형도 조심해야 해.”

“예.”

“추적 늦어도 되니까, 조심하는 쪽으로 해 줘.”

“아닙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상관없으니까 이제 형도 나한테 반말하면 안 돼?”

부탁하던 희성이 머뭇머뭇 물었다. 허벅지 사이에 낀 까만 늑대의 주둥이를 밀어내느라 행동이 조금 어정쩡했다. 하지만 희성은 이런 민망한 상황보다도 지영배의 존대가 더 꺼려졌다.

이상하게도 희성은 자신이 윤치영을 막 대하는 건 거리낌 없었는데, 조직원 형들에게 존대를 듣는 건 조금 찔렸다. 이제 희성은 자신에게 늘 친절한 늑대 조직원 형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조직원들도 강아지를 보면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갈 정도로 제법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조직원들은 새카만 늑대의 눈치를 보고 정중히 말했다.

“…그건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희성이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지영배가 희성에게 멋진 새 옷을 조심스레 건네주고 갔기 때문이다.

한겨울, 지영배가 추위를 타는 희성을 위해 강아지용 패딩을 사 왔다. 희성은 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옷을 든 채 지영배를 배웅해 줬다. 그래도 속정이 많아 자신을 잘 챙겨 주는 그가 고마웠다.

‘박건태 새끼. 형들 더 고생시키기만 해 봐라….’

강아지용 패딩을 곱게 쥔 희성은 이를 갈며 집 안으로 향했다. 작은 머릿속에는 박건태를 향한 증오심만이 꽉 차오른 채였다.

그 뒤로 검은 늑대가 큰 몸집으로 소리도 없이 맹수처럼 다가왔다. 지영배가 상황 보고를 위해 올라와 중단됐던 일을 이어서 하기 위해서였다.

“왜? 나 씻을 거야.”

‘응, 씻어.’

늑대가 알겠다는 듯 꼬리를 슬슬 휘적였다. 희성은 갑자기 순순히 구는 윤치영을 수상쩍게 보다가, 재빨리 화장실 앞으로 가서 샤워가운을 벗었다. 옆쪽에서 교활한 늑대가 마치 사냥감을 보듯 고개를 은밀하게 낮춘 채 주변을 맴도는데, 어딘가 수상했다. 최대한 빨리 샤워실로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따라오지 마. 너랑 씻으면 힘드니, 아…!”

역시 윤치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희성의 몸 균형이 무너지도록 탄탄하고 마른 허리를 푹신한 머리로 퍽 밀었다.

거대한 늑대의 몸짓 몇 번에 희성의 몸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중심을 잃고 카펫에 네 발로 엎어진 희성의 몸 위로 거대한 늑대가 멋대로 올라탔다. 낌새를 눈치챈 희성이 어떻게든 검은 모피 아래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희성은 강아지 모습이든 사람 모습이든 늘 윤치영에게 힘으로 역부족이었다.

“놔, 놔! 많이 했으면서 왜 또… 으응, 야…!”

결국 희성은 그날 저녁 내내 벌을 받게 됐다. 거사 중 지영배의 보고를 멋대로 받았다는 죄목이었다. 거기다 벌을 받는 도중 즐겼다는 이상한 죄목이 더 붙어 늑대에게 지독하게 시달렸다. 박건태를 향한 분노마저 잠시 잊을 정도로.

* * *

…희성이 악몽도 꾸지 않고 모처럼 깊이 잠든 밤이었다.

페로몬 수치가 널뛰는 윤치영을 밤새 감당했더니, 언제 잠든 지도 모른 채 기절하듯 잤다.

그런 희성이 희미한 통화 소리를 들은 건 고요한 새벽이었다.

“음… 위치만 보내 둬. 그래… 알겠어.”

이제야 사람형으로 돌아온 건지, 곁에서 윤치영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희성은 잠결에도 이 시간에 왜 통화를 하냐고 잔소리를 하고 싶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받는 전화는 대부분 감시자의 일과 관련됐기 때문이었다. 아플 때 일하는 설움을 아는 희성은 부상을 당한 윤치영이 일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잔소리는 입 안에만 맴돌 뿐, 종일 스킨십에 시달렸던 희성은 도통 눈을 뜨지 못한 채 윤치영의 손을 잡고 웅크려 있었다. 그런 희성을 윤치영이 뒤에서 한가득 껴안아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불렀다.

“자기야, 자기야?”

“…응.”

“나 잠깐 나갔다 와야 하는데… 내가 자기 데려가도 돼? 졸리면 강아지 모습으로 자고 있어.”

“…….”

희성의 하얀 강아지 귀가 움찔 떨렸다.

진짜 나갈 생각이었다니. 당장 안 된다는 말부터 하고 싶었지만, 말려도 어차피 윤치영은 혼자 나갈 것 같았다. 거기다 이런 늦은 시간에 온 연락은 윤치영이 꼭 필요한 중대사뿐이었다.

결국 희성은 흐으, 하고 여린 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이다가 갑자기 발딱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같이 가.”

“안 피곤해? 자기 그냥 자고 있어도 괜찮은데….”

“네가 아픈 몸으로 나가는데 내가 어떻게 자?”

희성이 엄하게 말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윤치영이 허리를 지탱해 주지 않으면 넘어졌을 거면서 태도만 엄했다.

조용히 웃음을 참은 윤치영은 부스스한 머리칼을 넘기며 비몽사몽한 강아지를 챙겨 줬다. 희성을 밤새 살뜰히 챙겨 주고 싶었지만, 늦지 않도록 자리에 나가야 했다.

* * *

윤치영은 웬일로 직접 운전을 했다. 덩달아 희성도 편한 강아지 모습이 아닌 인간형으로 보조석에 앉았다. 강아지용 카시트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아픈 윤치영 대신 희성이 직접 운전하겠다고 고집도 부려 봤지만, 윤치영은 어차피 희성이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상황도 계속 변할 거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목적지로 가는 동안 희성은 짐짓 굳은 얼굴로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이런 날엔 누군가가 윤치영의 변덕이나 결정 한 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차는 한 시간 가까이 도로를 달렸다.

‘멀리도 나가네….’

이동 내내 희성은 꾸벅꾸벅 졸았다. 곁에서 간간이 윤치영이 강아지야, 자기야, 부르며 허벅지를 매만지고 춥다며 티셔츠 아래 손을 넣었지만 파리를 쫓듯 귀찮아하는 반응밖에 못 했다. 윤치영처럼 희성도 잠에 약한 편이라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차는 어느 산 아래 컨테이너 두세 개만 달랑 있는 외진 곳에 섰다. 어둑한 곳에서 보이는 거라곤 멀리 물류 창고로 보이는 큼직하고 투박한 건물뿐이었다.

뒤따라 검은 차 두 대가 멀리 섰다.

희성은 긴장한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워낙 어두워서 어떤 차인지, 누가 탔는지도 분간이 안 갔다. 만약 위험한 놈들이라면 부상을 당한 윤치영 대신 자신이 나설 생각이었다.

“잠깐 여기 있어.”

그사이 윤치영이 희성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내렸다. 차의 시동도 끄지 않은 채였다.

평소와 똑같이 유한 윤치영의 모습에 희성은 김이 좀 샜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경계심을 세운 채 윤치영을 바라봤다. 여차하면 자신이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윤치영이 내리자 다른 차에서도 수인들이 황급히 내렸다.

‘뭐야…? 형들이 왜 여기 있지?’

다행히 차에서 내린 건 위험한 수인들은 아니었고, 윤치영의 조직원들이었다. 그중에는 어딘가 조급한 얼굴인 지영배도 있었다.

안심한 희성은 편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을 살폈다. 윤치영과 조직원들은 서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지영배가 무언가 보자기에 싸인 걸 윤치영에게 넘겨줬다. 급박한 상황인지 짧게 대화를 했을 뿐, 조직원들은 다시 차를 타고 급후진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암거래 물품이라도 준 건가…?’

안 그러면 저렇게 급하게 넘겨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지영배가 답지 않게 심각해 보여서 희성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사이 윤치영이 한결같이 나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 춥다. 자기야.”

“으으… 손 좀, 빼!”

윤치영이 희성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손끝이 무방비한 가슴을 만지자 희성이 화를 내며 돌덩이 같은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윤치영이 난데없이 하얀 귓바퀴를 깨물고 숨을 거칠게 내쉬며 웃었다.

‘또 이러네….’

희성은 흠칫 몸이 굳었지만 더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윤치영이 페로몬에 민감하고 그만큼 힘겨워하는 걸 알아서였다. 그는 꼭 다른 수인의 페로몬을 맡고 오면 폭력적으로 변하곤 해서, 스스로 갈무리할 시간을 줘야 했다.

그렇게 윤치영은 한참 희성의 목덜미에 콧날을 묻은 뒤, 한결 차분해진 한숨과 함께 다정하게 말했다.

“이거 잘 가지고 있어.”

그가 품에 안고 온 두툼한 보자기를 희성의 품에 내려놓았다. 제법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희성은 긴장과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을 숨긴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겠으니까 빨리 집에나 가.”

“왜? 급해? …그럼 여기서 한 번 하고 갈까?”

“…운전해.”

희성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직이 말했다. 정말 스킨십에 미친 놈이다. 자기 전에 몇 번을 했는데 저런 농담이 나올까 싶었다.

그래도 윤치영의 평소와 같은 장난에 희성은 긴장이 풀렸다. 차도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노곤함이 다시 밀려들고 있었다.

희성은 편안한 한숨과 함께 품 안의 보자기를 내려 봤다. 보자기는 자신의 두 손에 꽉 차게 들어오는 크기였다.

“근데 이건 뭐야…?”

희성이 의아하게 보자기를 살폈다. 대체 얼마나 귀한 물건이길래 조직원들이 그렇게 다급하게 넘겨주고 간 건지 궁금했다.

윤치영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그저 나른하게 말했다.

“풀어 봐.”

“……?”

이렇게 쉽게 풀어도 되는 걸까. 희성은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조심스레 보자기에 손을 댔다. 안에는 마약이나 귀중한 보석, 혹은 누군가의 약점이 될 수 있는 물건이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보자기 안에는 희성의 예상을 모두 빗나간 것이 들어있었다.

“…강아지…?”

보자기 안에는 금빛의 털을 가진 통통한 강아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온몸에 인절미 가루를 흠뻑 묻힌 것처럼 노란 털이 고왔다.

강아지는 아직 어린 듯했지만, 크기는 희성의 본체보다도 커 보이는 대형견 종의 강아지였다. 하지만 아직 어린지 주둥이도 짧고 꼬리도 짧았다. 노란 강아지는 희성의 손이 닿자 꼬물거리며 몸을 동글게 웅크렸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도 희성은 멍하니 굳은 채 강아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평화롭고 고요한 차 안에서, 희성의 까만 눈동자가 여리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반응도 모른 채 윤치영이 그저 설렌다는 듯 말했다.

“어때? 귀엽지?”

“…….”

“이름은 뭐라고 부를까… 갈색 발이 호두 같으니까 호두는 어때?”

“…….”

윤치영이 뭐라 뭐라 다정하게 말해도, 희성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강아지는 나로 충분하지 않았던 거야…?’

희성은 자신이 왜 충격받았는지도 모르고, 눈동자마저 올망졸망해진 채 손끝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결국 희성은 집에 돌아가는 내내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저 뻔뻔한 윤치영을 보지 않기 위해 품 안에서 잠든 강아지만을 쭉 지켜봤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에 들끓는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운전 중인 윤치영을 죽도록 때릴 것 같았다.

‘…침착하자.’

일단 희성은 윤치영과 함께 살면서 기른 인내심을 발휘했다.

자신이 화난 이유도 알 수 없는데 무작정 어린 강아지 앞에서 윤치영을 팰 수는 없었다. 일단 희성은 최악의 상황부터 소거해 보기로 했다.

떨리는 숨을 고른 희성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야, 윤치영.”

“응, 안 잤어?”

한 손으로 운전 중이던 윤치영이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희성은 지금 잠이 오겠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숨이 턱 막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인이 너무 당황하면 오히려 말이 안 나온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희성은 애써 타들어 가는 제 속을 외면한 채 가장 두려운 것부터 물었다.

“얘 혹시… 네 새끼냐?”

“풉….”

윤치영이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어렵사리 용기 내 물었던 희성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적어도 지금 희성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살벌한 눈치를 봤는지 윤치영이 웃음을 겨우 갈무리하곤 말했다.

“내 새끼면 털이 회색 아니었을까?”

“왜? 너 까만색이잖아.”

“자긴 하얗잖아.”

“너… 새끼 치는 게 무슨 물감 섞는 건 줄 아냐!?”

이 자식은 어떻게 이 상황에 저런 농담을 하는 걸까? 희성은 이를 악문 채 왕왕거리듯 따졌다.

“그리고 너랑 나랑 어떻게 새끼를 낳아!”

“낳을 수도 있지. 요새 의료 기술도 좋은데….”

은밀하게 웃은 윤치영이 슬쩍 희성의 손을 끌어 자신의 탄탄한 배에 뭉근히 문질렀다. 기겁한 희성은 당장 손을 떼 버렸다. 이 또라이 자식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일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수인 사회에는 종이 다른 연인끼리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술이 있긴 했다. 성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술이 있다 해도 희성은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지금 윤치영이 강아지를 데려온 것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적나라하게 표현해 보자면, 애인이 사실 자신은 유부남이었다며 집에 숨겨 둔 반려자의 자식을 데려온 기분이었다. 당연하게도 희성은 화를 못 참을 수밖에 없었다.

“넌… 넌 생각 좀 하고 말해! 대체 얘는 뭔데? 너 설마 인질도 잡아 오냐?”

“인질이라니… 난 그런 비겁한 짓은 안 해.”

윤치영이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단언한 대로 윤치영은 평소 교활하게 굴긴 해도 비겁한 짓은 안 했다.

하지만 희성은 이제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과 상의도 없이 다른 강아지를 데려온 것만 해도 충분히 비겁하고 악독하고 영악하고 충격적인 짓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희성도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온 게 심각한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성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꾸만 익숙한 불안이 피어올랐다. 버려지기 싫다는 가장 외면하던 속내였다.

그사이 차는 집 주차장에 들어섰다. 윤치영은 자신의 차가 세 대 주차돼 있는 주차장 옆에 타고 온 은색 스포츠카를 주차했다. 희성은 그때까지도 이를 꾹 악문 채 분노와 우울감에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강아지를 자리에 두고 차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강아지가 잠들어 있지 않았다면 노란 강아지랑 잘 먹고 잘 살라고 외치고 나갔을 것이다.

그때 안전벨트를 푼 윤치영이 희성의 손을 슬쩍 잡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자기 혹시 화났어…?”

“…화?”

앞만 노려보던 희성은 인상을 사납게 쓴 채 읊조렸다.

화가 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났다. 그런데 윤치영이 물으니 굉장히 같잖게 느껴지고 열이 받았다. 이미 화난 거 다 아는데 꼭 반응을 보려고 물은 것 같아서. 희성이 운전석을 돌아보니 윤치영이 눈치를 보듯 바라보고 있긴 했다. 희성에겐 그마저도 괘씸해 보여 하마터면 강아지일 때처럼 주먹을 올릴 뻔했다.

하지만 섣불리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화낼만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사실 희성은 자신이 정확히 화난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설마… 강아지한테 질투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희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난 강아지가 아닌데, 내가 왜?’

희성은 어엿한 성견이었다. 고작 어린 수인에게 질투하는 게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자꾸 윤치영을 욕하고 때리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품 안에 잠든 강아지만 없었더라면 진작 윤치영을 죽도록 때렸을 것이다.

일단 희성은 화난 이유 중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억지로 찾아서 횡설수설 말했다.

“난. 난… 나한테 사정도 말 안 하고 새끼 데려와서 화난 거야.”

“나도 급하게 데려오게 돼서 그래….”

윤치영이 살며시 희성의 손등을 감쌌다. 그는 불쌍한 척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강아지를 살살 달래 주기 시작했다.

“잠깐 갈 곳 없는 애기 맡아 주는 건데, 안 될까?”

“…누구 애기인데. 아는 수인의 애야?”

“응. 위험한 일에 휘말린 수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윤치영이 잠든 호두의 귀를 막고 속삭였다. 그 행동만으로 희성은 가슴 속에서 울컥 이유를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치받았다.

‘개새끼.’

윤치영이 자신한테만 다정한 줄 알았는데. 모든 강아지에게 그랬던 거였나 보다. 점차 희성의 새까만 눈에 물기가 서렸다. 울컥한 심정에 희성은 이를 꾹 다물고 바깥 어딘가만 바라봤다.

그것도 모른 채 윤치영이 달래듯 말했다.

“5일만 데리고 있으면 되는데… 우리 강아지가 싫다면 다른 곳에 맡길게.”

“…….”

희성은 대답 없이 차창 밖만 노려봤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목소리가 설움에 떨리는 걸 들킬 것 같았다. 거기다 지금 자신이 결정권자가 된 것조차 마음에 안 들었다. 갈 곳 없는 강아지를 이 추운 겨울에 다른 곳에 맡기기도 애매했다.

이내 희성은 포기하듯 나직이 말했다.

“…너 5일이라 했다.”

“응, 5일.”

윤치영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끼손가락을 희성에게 걸었다. 희성은 그 손을 내려다보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안 지키면 네 손가락 잘리는 거야.”

“자기 거니까 강아지 마음대로 해.”

협박에도 윤치영은 그저 좋다는 듯 대답했다. 보조석 시트를 짚은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희성에게 뭉근히 키스했다. 하지만 희성은 화가 풀리기는커녕 경고에 겁내지도 않는 그가 얄밉기만 했다.

“집에 가자.”

키스를 남긴 윤치영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희성도 따라 내리려다가, 안전벨트를 풀기 전 품 안을 내려다봤다.

날이 추운지 보자기에 싸인 노랑 강아지가 몸을 웅크리며 코끝을 꼬물거렸다. 대형견의 새끼답게 아직 새끼인데도 생수병만큼 몸이 컸고 체온도 따끈따끈했다. 그래도 같은 강아지라 그런지 지켜볼수록 어딘가 정감이 갔다.

역시 자신이 어른이니 성숙하게 행동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강아지를 빤히 내려다보던 희성은 다시 보자기를 조심조심 싸며 낮게 읊조렸다.

“…어려서 봐주는 거다.”

“…….”

“나 애들한테 잘 못해 줘.”

말만 엄했지 강아지를 살며시 안아 드는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희성은 강아지가 깨지 않도록 부드럽게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렸다. 곁에서 문을 잡아 준 윤치영이 그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지켜봤다.

“강아지가 강아지를 돌보고 있네.”

“넌 조용히 해.”

둘은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조심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곤 노란 강아지를 함께 내려 봤다. 서로 속닥이며 나누는 말이 많았다.

“귀엽다… 근데 자기가 더 귀여워.”

“닥, 조용히 해.”

“지금 애 앞이라 욕 안 하는 거야?”

윤치영이 간지럽게 웃으며 코트 품을 열어 희성을 뒤에서 껴안았다. 희성이 팔 뒤꿈치로 명치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소음에 잠이 조금 깬 건지, 호두가 입맛을 다시며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깨진 않았다. 잠꼬대마저 할 정도로 아주 멋진 꿈을 꾸는 듯했다. 자신이 식인 늑대와 작은 투견의 품에 떨어진 것도 모른 채.

* * *

호두는 아직 인간화도 못 하는 어린 견인족이었다.

수인은 어릴 적부터 본체의 모습으로 지내다가, 대략 예닐곱 살 정도는 돼야 조금씩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아직 어린 호두는 종일 강아지의 모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노란 강아지는 대형견 새끼답게, 희성의 두 손에 꽉 차고 넘칠 정도로 오동통했다. 거기다 아직 이유식을 먹는 나이라 손이 많이 갔다. 그나마 젖을 뗀 나이라 다행이었다.

문제는 호두가 갑자기 낯선 곳에 온 어린아이란 것이었다.

아우! 아웅, 아우!

호두는 아침에 깨자마자 자지러지듯 울기 시작했다.

어린 강아지는 희성을 경계했고 그보다 훤칠하고 키가 큰 윤치영은 두려워했다. 간식으로 달래 주려 해도 호두는 커튼 뒤에 필사적으로 숨으며 통통한 꼬리를 만 채 달달 떨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 앞에서 윤치영이 계란죽을 든 채 제법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호두. 자. 맘마 먹자.”

윤치영이 살살 달래 줘도 호두는 기겁을 하며 커튼 뒤로 눈을 숨겼다.

그럴 만도 했다. 윤치영은 부상 때문에 반수 상태를 유지했다. 시커먼 늑대 귀나 손가락만 한 송곳니는 어쩔 수 없다 쳐도, 특유의 진한 페로몬이 드러나서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일 터였다. 호두는 윤치영의 손만 다가와도 유리문을 긁으며 하울링을 하고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윤치영이 아무리 살갑게 굴어도 호두는 그를 적으로만 봤다.

“왜 무서워만 하지? 페로몬도 최대한 감췄는데….”

“…….”

한탄하는 윤치영의 뒤에서 희성이 소파 등받이에 불량하게 팔을 걸친 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저 자식은 강아지한테 밥이면 다 되는 줄 아나?’

희성은 윤치영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강아지를 혼자 키우라 말하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윤치영이 자신이 아닌 다른 강아지에게도 빌빌 기며 잘해 주는 모습을 꼴도 보기 싫었다. 소파에 웅크린 채 앉아 있던 희성은 인상을 꽉 쓴 채 시선을 돌렸다.

그때 윤치영이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걱정스레 읊조렸다.

“이상하네. 나 강아지 잘 돌보는데….”

“잘 돌보긴 무슨.”

희성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윤치영의 자만심이 우스웠다.

물론 윤치영은 강아지 케어를 잘하긴 했다. 털 손질도 잘해 주고 귀 청소나 식사도 꼼꼼하게 잘 챙겨 줬다. 스킨십도… 애정 어린 부드러운 말도 수시로 해 줬고, 정말 강아지를 왕처럼 키워 줬다. 생각하던 희성은 짜증이 치솟았다. 다시 생각하니 자만심을 가져도 될 만하긴 했다.

‘…짜증 나.’

그런데 이제 그 애정이 다른 강아지를 향했다는 게 자꾸 희성을 옹졸하고 서글프게 만들었다.

자신도 이런 게 질투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런 단순한 감정이라 단언하고 싶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희성은 그보다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허약한 자신을 내다 팔 거라 생각했던 날이나, 형에게 제 쓸모를 보이지 않으면 무리에서 내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느꼈던 불안이었다. 희성은 이제 그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는 걸 알아도 이 상황 자체가 싫었다.

그때 윤치영이 기운 없이 소파로 다가와 희성의 옆에 앉았다.

“자기야. 강아지가 좀 도와주면 안 돼…?”

윤치영이 가엾게 눈을 뜨며 희성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그사이에도 호두가 낑낑대고 우는 소리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지가 멋대로 데려오더니 이제는 도와 달라고 한다. 희성은 울 것처럼 무너진 눈을 숨긴 채 고개를 휙 돌렸다. 희성에겐 윤치영의 가증스러운 부탁도, 호두의 울음소리도 모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대체 자신보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뭐. 네가 데려왔으니까 알아서 해.”

매정하게 일어난 희성은 주방으로 가 물컵을 꺼냈다.

그 뒤로 윤치영이 시무룩해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더는 희성을 재촉하진 않았다. 다시 혼자 어떻게든 달래 보려는 듯 호두에게 말을 걸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호두는 계속 서럽게 울기만 했다.

아우, 아우!

같은 견인족인 희성은 어린 강아지가 우는 말을 고스란히 알아듣고 있었다. 보편적인 단어는 자라난 무리가 달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엄마아… 아빠! 어디 있어?’

“…….”

탁.

찬물을 마신 희성은 물컵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꾹 다문 입술 위로 눈빛이 서글프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성은 호두가 우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자꾸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가 떠올랐다. 울어도 소용없고 자신은 영원히 혼자일 거라는 절망감만 느꼈던 나날이.

역시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

사실 애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리고 희성은 자신이 그날 느낀 기분을 다른 강아지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도 윤치영에게 내고 아이는 일단 달래 주는 게 맞을 것이다.

결심한 희성은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가며 작은 강아지로 변했다.

순식간에 보폭이 작아지고 입고 있던 옷더미가 허물어졌다. 그 안에서 꾸물대며 나온 하얀 강아지가 비장하게 몸을 털고 윤치영에게로 향했다.

왕.

‘넌 저리 가.’

“강아지가 봐주게?”

대충 고개를 끄덕인 희성이 호두에게 다가갔다. 윤치영은 저리 가라고 허벅지를 앞발로 밀어 놓고-꿈쩍도 안 했지만-, 직접 호두의 등 뒤로 다가갔다.

희성도 같은 강아지라 알고 있었다. 강아지 모습으로 있을 때 사람을 보면 체격으로 인한 위압감이 엄청났다. 강아지의 낮은 시야로는 가까이 내민 사람의 손이나 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군지 도통 구분이 안 되는 데다가, 낯설기만 한 곳에서 다정한 말을 아무리 들어도 두렵기만 했다.

역시 비슷한 종족이 달래 주는 게 가장 좋았다.

하얀 강아지는 커튼에 부질없이 눈을 숨긴 호두의 등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려도 되게 크네.’

역시 대형견은 대형견이었다. 하얀 강아지로 돌아가서 보니 호두는 희성보다 두 배는 몸집이 컸다. 거기다 곱상한 걸 보니 외국의 레트리버 가문인가 싶었는데, 귀가 위로 서 있는 걸 보면 또 아니었다. 아무래도 도련님은 맞지만 엄마와 아빠의 종이 다른 듯했다.

희성은 대체 호두가 무슨 종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강아지 선배로서 애부터 진정시키기로 했다.

왕!

하얀 강아지가 용맹하게 짖었다. 강아지 대 강아지로서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끙끙대며 울기만 하던 호두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축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더니, 하얀 강아지를 보고 호기심이 돋은 듯했다. 내내 숨어 있던 짧은 꼬리도 슬쩍 위로 선 채 흔들리고 있었다.

곧 호두가 희성에게 다가와 몸을 낮춘 채 조심스레 코를 킁킁거렸다. 그래도 낑낑거리는 울음을 그치진 않아서 희성이 직접 혼을 내야 했다.

왕!

‘너! 강아지가 왜 울어? 네가 애야?’

하얀 강아지가 인상을 쓴 채 앞발을 콩 굴렀다. 혼내려 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어린것을 보자니 마음이 약해져 억세게 굴 수가 없었다.

이내 하얀 강아지는 혼자 심각해진 얼굴로 다른 곳을 보며 읊조렸다.

‘…애가 맞긴 한데.’

그 앞에서 호두가 낑낑 몸을 낮추며 희성의 보송한 가슴 털에 코를 파묻으려 했다. 덩치가 두 배는 큰 것이 무게로 들이받자 솜 덩어리 몸이 휘청였다. 겨우 중심을 잡은 희성이 다시 강아지에게 굳세게 외쳤다.

‘그래도 1kg가 넘은 강아지는 울면 안 돼!’

대차게 말한 희성이 다른 곳을 보며 또 혼자 심각해졌다.

‘…얘는 태어났을 때부터 1kg가 넘었을 거 같은데.’

그사이 호두가 희성을 발라당 넘어트리고 하얀 품에 얼굴을 묻었다. 동족을 만나 오죽 반가운지 짧은 꼬리는 바쁘게 흔들렸고 줄기차게 이어지던 울음도 잦아들었다. 그만큼 하얀 덩어리는 버겁기만 했다.

‘으으… 맘대로 해라, 그냥.’

호두를 밀어낼까 했지만, 이내 희성은 자포자기했다. 도박장에서 자신이 겪은 대로 아이를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조금 전 호두를 혼내던 자신이 무섭던 아버지 같아서 싫었다. 애는 애니까 울어야지. 차라리 그때그때 솔직하고 우는 게 훨씬 수인적이고 행복한 강아지로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사이 호두가 희성의 품에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나이만 어리지 희성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새끼라, 하얀 강아지가 발라당 넘어가며 힘겹게 호두에게 파묻히게 됐다. 희성은 버거운 새끼 개의 품에서 겨우 벗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호두는 이제 울지 않았다.

달랬으니 이제 밥을 먹일 차례였다.

‘자. 맘마부터 먹어.’

희성의 먼저 윤치영이 건넨 계란죽을 먹는 시범을 보이자, 호두도 안심하고 계란죽을 먹었다. 내심 배고팠는지 희성의 몸집만 한 계란죽을 싹 비웠다.

호두는 그릇을 싹싹 핥을 정도로 먹고 난 뒤, 곧장 희성에게 몸을 기대고 품에 숨으려 했다. 아무래도 낯선 곳에 오게 된 스트레스가 컸는지 희성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고 매달렸다. 희성이 귀찮아하며 밀어내려 했지만, 어린 게 어찌나 힘이 센지 베개에 깔렸을 때처럼 치우는 건 역부족이었다.

결국 호두에게 깔린 하얀 덩어리를 구해 준 건 윤치영이었다.

“내 강아지 또 어디 갔나 했잖아.”

‘뽀뽀하지 마! 네가 제일 싫어!’

강아지가 발버둥 쳐도 윤치영은 하얀 몸 곳곳에 뽀뽀 세례를 했다. 그는 침대로 강아지들을 옮겨 주고,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희성은 분홍 배를 까고 누운 채 품에 안긴 큼직한 것을 달래 줘야 했다. 호두는 밥을 양껏 먹고도 옹알이로 엄마를 찾고 있었다.

‘엄마, 아빠아….’

‘…형이라 불러.’

‘엄마….’

‘형이라니까.’

체념한 하얀 강아지가 웅알대는 사이, 호두가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옆으로 웅크려 누운 채 앞발로는 하얀 덩어리의 몸을 꼭 붙잡은 채였다.

그 둘을 윤치영이 사랑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슬쩍 호두의 앞발을 강아지에게서 떼어 냈다.

“귀엽다… 그냥 우리가 키울까?”

‘너 혼자 키워.’

하얀 강아지가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희성은 아직도 화가 안 풀렸다. 여전히 윤치영이 즐거워하는 모습조차도 꼴 보기 싫었다.

윤치영은 그런 강아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자기야.”

‘뭐.’

“근데 난 이제 우리 강아지밖에 안 보이나 봐… 호두 어떻게 돌보지?”

“…….”

희성의 곁에 엎드린 윤치영이 강아지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만졌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조금 기분이 풀린 하얀 강아지는 슬쩍 그의 손목을 안고 누웠다. 까만 두 눈도 설움과 안도감에 차 올망졸망해졌다. 윤치영의 그 단순한 말이 왜 그렇게 안심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호두와 함께 지낸 지 이틀이 지났다.

그간 희성도 윤치영도 제법 고생을 했다. 이틀 내내 호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에 어린 강아지 하나 생겼다고 이렇게 사고가 많이 터질 줄 몰랐다. 호두가 힘도 세고 체력이 넘친 덕분이었다. 역시 대형견 종의 새끼다웠다.

그래도 호두가 금방 집에 적응해서 다행이었다. 희성의 본체를 본 뒤로 마음을 놨는지, 먹고 자고 장난치고 또다시 먹기를 반복하며 희성과 윤치영의 혼을 쏙 빼놨다. 덕분에 하얀 강아지는 호두가 잘 시간만 되면 똑같이 혀를 내뺀 채 기절하듯 누워 있어야 했다. 일하는 것보다 육아가 체력 소모가 더 심할 줄은 몰랐다.

자연히 윤치영과 야릇한 분위기를 이어 갈 수조차 없게 됐다.

“강아지.”

저녁 시간이 되자, 윤치영이 샤워를 하고 나온 희성에게 슬쩍 다가왔다.

드레스 룸으로 따라 들어와 희성의 깨끗하고 뽀얀 등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희성은 전신 거울로 그 섬뜩한 회색 눈을 봤지만 애써 무시하고 옷을 껴입었다. 아직 다른 강아지를 데려온 윤치영에게 화가 다 풀리지 않았다.

“우리 데이트하러 갈까?”

“호두는 어쩌게.”

“아….”

윤치영이 새삼 돌은 눈깔이 되더니, 입가를 쓱 쓸며 쑥스러워했다.

“우리 좀 부부 같았어….”

“…….”

희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잠옷을 마저 꺼내 껴입었다. 이제 윤치영의 머릿속이 온통 꽃밭이란 걸 알아서 익숙했다.

그사이 윤치영이 희성을 뒤에서 슬쩍 껴안으며 목덜미를 깨물어 댔다. 야릇한 감촉에 희성은 고개를 반대로 움츠렸다. 눈앞에 전신 거울을 보니, 그의 널따란 품에 쏙 안긴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체격 차이 때문에 직각으로 넓게 벌어진 윤치영의 어깨가 유독 도드라졌다.

그 아래로는 실랑이가 잠시 오갔다. 희성이 제 허리에 올라온 윤치영의 돌덩이 같은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윤치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히 다리를 벌려 선 채 희성의 엉덩이에 묵직해진 사타구니를 붙이고 붙어 섰다. 어느새 윤치영은 여유 없는 얼굴이 됐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귓가에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 오래 참았는데….”

“고, 고작 이틀 가지고 무슨.”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희성의 귓바퀴가 붉어졌다. 윤치영이 이럴 때마다 희성도 야릇한 기분에 쉽게 달아오르곤 했다. 희성도 윤치영만큼 성욕이 넘치면 넘쳤지 덜하진 않았다.

“호두는 잠깐 맡길 사람 부르면 되잖아….”

“그래도, 우리 없으면 불안해할, 응…!”

더는 참기 힘든지 윤치영이 말하던 희성의 턱을 당겨 성급하게 키스했다. 틈을 주지 않고 희성의 잠옷 안으로 손을 넣어 살도 얼마 없는 가슴을 그러쥐었다. 반대편 손으로는 어서 자신의 것 좀 진정시켜 달라는 듯, 희성의 손을 끌어 회색 트레이닝복 안의 딱딱한 기둥을 뭉근히 매만지게 했다.

소름 돋는 감촉에 희성이 돌덩이 같은 팔을 밀어내듯 짚었다. 그가 이렇게 거칠게 굴 때를 보면 평소 여유 있게 굴던 모습은 모두 거짓말 같았다. 거울에 등을 대고 서게 된 희성은 잠시 밭은 숨을 골랐다. 윤치영이 아랫입술을 물며 절박하게 구니 덩달아 열기가 옮아 버렸다. 이내 희성이 윤치영의 어깨를 붙잡아 당기며 입을 맞출 무렵이었다.

와장창!

왕! 와, 왕!

갑자기 무언가 떨어지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연달아 호두가 맹렬하게 짖는 소리도 났다. 서로 잡아먹을 듯 입술을 섞던 둘의 눈이 커졌다. 고작 호두를 10여 분 혼자 뒀는데 사고가 터졌다.

“호두야?”

“…….”

어쩔 수 없이 윤치영이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 혼자 남겨진 희성은 망연자실함에 거울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가, 힘없이 밖으로 나가 봤다.

사고는 거실에서 벌어져 있었다. 호두가 온몸에 우유를 흠뻑 뒤집어쓴 채 신나게 그릇을 핥고 있었고, 윤치영이 큰 체격으로 주저앉아 주변을 조심조심 치우고 있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희성이 잠옷을 추스르며 물었다.

“또 뭐야?”

“우유 좀 식혀 두려고 탁자에 올려놨는데….”

이어지는 말은 생략한 윤치영이 사고를 친 주인공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듯 호두를 손으로 들어 올리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온몸에 따듯한 우유를 맞고 신이 나 꼬리를 흔드는 호두가 보였다. 희성은 자신만큼은 엄하게 혼내려 했지만, 막상 신나 하는 호두를 보니 어이가 없고 귀여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가서 호두부터 씻겨. 내가 마저 치울게.”

“아냐, 다 치웠어. 그렇지 호두야?”

윤치영이 우유에 젖은 호두를 안아 들며 활짝 웃었다. 그 행동이 다정했다. 강아지였던 희성에게 하던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희성의 꼬리가 한순간에 팍 식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곧 잡아먹을 것처럼 굴며 단둘이 있자고 하던 게 다 거짓말 같았다.

그사이 주변을 정리한 윤치영이 웅크려 앉은 희성에게 뽀뽀를 남기고 일어났다. 호두를 씻기려는지 화장실로 함께 들어가 버렸다.

“자기는 먼저 자고 있어. 호두 내가 씻길게.”

“…….”

혼자 남겨진 희성은 윤치영이 조심조심 강아지를 씻기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인상을 콱 구긴 채 서 있었다. 동그랗고 까만 눈이 세모꼴이 됐다. 희성의 하얗고 앳된 얼굴에 불만이 묻어나고 있었다.

‘…일부일처면 일부일처답게 조신하게 굴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상대가 강아지면, 다부다처라도 되나?’

유치한 생각에 시달리던 희성도 나름의 사고를 쳤다. 씩씩대며 괜히 옆에 있던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불만이라, 희성의 분노는 한없이 깊어지기만 했다.

* * *

그날 밤, 하얀 강아지는 베개 위로 올라가 잠든 윤치영을 빤히 내려다봤다.

“…….”

어둠 속에서도 강아지의 눈은 올망졸망했다. 밤이 깊도록 희성은 고민에 잠도 못 드는데, 이렇게 편하게 잠든 윤치영이 얄미웠다.

‘…개자식.’

…왕.

강아지가 슬쩍 웅알거렸다. 욕을 먹어도 윤치영은 그저 편안한 얼굴로 베개에 고개를 부슬거렸다. 잠결에도 그는 고개를 돌려 우뚝 솟은 콧대를 강아지의 보송한 품에 댔다. 부드러운 인상이 풀어지며 한결 미려한 인상이 돋보였다.

그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던 희성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윤치영. 성격이 교활하고 정신이 돌면 식인도 하는 놈에다가 섹스할 땐 말 그대로 개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지금 희성이 원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무리였다.

‘왜 나를 두고 다른 강아지를 데려오는데….’

강아지가 서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실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윤치영이 갈 곳 없는 강아지를 친절하게 돌봐 주는 건 별일 아니었다. 희성도 그 점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어린 호두에게 잘해 주고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희성은 자꾸만 윤치영이 다른 강아지에게 다정하게 굴수록 불안해졌다.

이상했다. 희성은 그저 윤치영을 좋아하게 된 것뿐인데, 그에게 자신의 인생이 인질로 잡힌 것 같았다. 다시는 버려지기 싫다는 트라우마가 작은 강아지의 세상과 마음을 수시로 뒤흔들었다. 희성은 홀로 슬퍼지다가도 윤치영이 밉고, 온몸의 솜털이 설 정도로 화가 났다.

‘…나쁜 새끼.’

설움에 강아지의 색색대는 숨이 거칠어졌다. 홀로 찔끔 눈물을 흘렸더니 눈가의 털이 촉촉했다. 강아지는 윤치영을 내려다보다가, 그가 수려한 것마저 얄미워 앞발을 세게 휘둘렀다.

‘개새끼야!’

강아지가 잠든 윤치영의 이마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려서 숨을 세 번 몰아쉬고, 다시 앞발로 퍽퍽 내리쳤다. 윤치영의 부드럽게 흘러내린 앞머리가 솜털에 닿아 살랑 휘날렸다. 그럴 때마다 윤치영의 미간이 흠칫흠칫 떨렸다.

그래도 몇 대 때리자 화가 가라앉았다. 강아지는 조금 미안해져 윤치영의 이마를 슬쩍 핥아 줬다. 그러자 부슬거리던 윤치영이 졸린 눈을 뜨더니, 슬슬 웃으며 잠꼬대처럼 나른하게 말했다.

“응… 뽀뽀한 거야?”

‘…이, 시발….’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희성은 가증스러운 윤치영의 귓바퀴를 콱 깨물어 버렸다. 윤치영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강아지의 분홍 배에 입을 맞추더니, 못 참겠다는 듯 슬슬 웃으며 배 방구까지 해 버렸다.

‘아아악!’

치명적인 스킨십에 강아지가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단순한 배 방구조차도 강아지에겐 거센 파도를 맨몸으로 맞은 것과 같았다. 희성은 연달아 뽀뽀를 해대는 윤치영의 고개를 마구 발로 차 냈다.

‘이거 놔, 바람둥이 새끼야!’

“응… 나도 사랑해.”

“…….”

윤치영이 강아지에게 뺨을 기댄 채 그저 행복하다는 듯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지난번 부상을 당한 이후로 이러는 빈도가 늘었다. 지난 일주일간 윤치영이 해 준 사랑한단 말이 희성이 평생 들은 것보다 횟수가 많을 정도였다.

결국 강아지는 오늘 한 번만 윤치영을 봐주기로 했다.

‘쓸데없이 애교만 늘어 가지고….’

불량하게 생각하면서도 강아지는 베개 위로 올라가 윤치영의 귀 옆에 둥글게 웅크렸다. 자리에서 몇 바퀴 돌며 최적의 웅크릴 각도를 찾았다가도, 또 갑자기 윤치영이 마음에 안 들어 귓바퀴를 확 깨물어 버렸다. 그럴 때마다 윤치영이 잠결에도 행복한 웃음을 흘리며 하얀 덩어리를 살살 쓰다듬어 달래 줬다.

그날 밤 희성은 윤치영이 등을 한참 쓰다듬어 주는 내내 온갖 설움을 다 쏟아 냈다. 윤치영이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일 때까지였다. 그 말을 들어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 * *

‘이제야 잠들었네….’

옆으로 누운 윤치영은 베개에 웅크린 강아지를 조심조심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희성이 한참 간지럽게 성질을 부려서 잠이 다 깨 버렸다.

윤치영은 제 머리를 때리던 감촉과 희성이 으르렁거리던 소리를 떠올리며 피곤한 웃음을 흘렸다. 주먹만 한 강아지가 자신이 밉다고 하는데, 솔직히 미안하면서도 서글펐다. 그렇게 마음을 안 열던 희성이 이제 질투까지 해 줘서 좋았지만, 호두를 데려온 일로 이렇게 미움받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좀 억울한데….’

윤치영이 호두를 갑자기 데려온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희성을 생각해 호두의 정체를 숨긴 편이었다.

일단 윤치영은 하얀 강아지를 드넓은 침대 한가운데 조심조심 눕혀 두었다. 가장 좋아하는 극세사 담요를 덮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두 곁에 희성을 눕혀 두는 선택지는 유치한 질투 때문에 생각하지도 않았다. 윤치영은 어린애를 상대로도 뻔뻔해질 수 있는 놈이었다.

침실 밖으로 나온 윤치영은 서재로 향했다.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명등만 밝힌 어둑한 서재에서, 리클라이너 소파에 기대앉은 윤치영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담배를 피우고 싶어 품을 뒤적였지만, 담배 냄새를 맡고 잔소리할 강아지를 떠올리고 간지럽게 웃으며 포기했다. 부상 때문에 윤치영은 하얀 강아지에게 과보호를 받고 있었다.

마침 통화가 이어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예. 이사님.

지영배였다. 윤치영은 졸린 얼굴로 검은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매끈한 콧날이 두드러지며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은?”

- 오늘도 거의 잡았다가, 다시 도망치게 뒀습니다.

“몸은 성하게 뒀어?”

- 팔 하나 부러트렸습니다.

“아… 좋네.”

윤치영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늘 희성이 없는 곳에서 이런 일을 처리하는 편이었다. 강아지가 내색은 안 해도 자신의 잔인한 면모를 보면 은근히 거리감을 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소식만큼은 강아지가 좋아해 줄 것 같아 뿌듯했다. 박건태에 관한 소식이기 때문이었다.

- 한 번 더 잡았다가 놔줄까요?

“그냥 계속 추적하는 척만 해 둬. 그래야 우리 강아지가 잡기 쉬운 곳에 박혀 있겠지.”

윤치영은 마디 긴 제 손가락을 보며 한가롭게 말했다.

박건태는 언제든 잡을 수 있게 진작 추적을 다 해 놨다. 다만 윤치영은 박건태를 아슬아슬하게 몇 번 잡았다 놓아주며, 그를 따라간 세력이 흩어지도록 만들었다.

예상대로 추적 과정에서 박건태는 도박장에서 훔친 거금만 챙긴 채 저를 따라온 패거리를 하나씩 버렸다. 마지막에는 주차장에서 실컷 두들겨 맞다가 결혼을 약속한 애인마저 두고 튀었다니,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박건태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폐가에 처박히게 됐다. 언제든 찾아가 끝을 보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간의 과정은 강아지가 대하를 먹기 좋도록 손질해 주는 일과 비슷했다.

다만 한 가지 귀찮은 문제도 생겼다. 희성의 조언대로, 박건태는 정말 잔머리를 잘 굴렸다.

“잠적 준비는?”

- 모든 준비 끝났습니다. 내일 새벽부터 들어갈 예정입니다.

지영배가 무던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삼 일간 지영배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이유는 박건태 때문이었다.

“박건태가 머리를 굴릴 줄은 아네….”

윤치영은 귀찮다는 듯 피곤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박건태는 도박장 실장이었는지라 정보력이 꽤 좋았다. 그는 하필 지영배가 과거에 벌인 중범죄를 알고 기자 몇몇과 경찰에게 정보를 찔러 넣었다.

그 예전 지영배는 아내를 지키려다가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마침 윤치영이 처리하려던 늑대 일족을 죽인 사건으로, 만약 윤치영이 그를 조직원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면 진작 교도소에 갔을 일이었다.

일단 기자는 돈으로 막는다고 해도, 경찰들이 실적을 위해 지영배를 쫓아서 그가 잠적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신분이 위조될 예정이었다.

- 저… 감사합니다. 이사님.

지영배가 넌지시 감사를 말했다. 윤치영은 졸음에 눈가를 쓸다가 슬슬 웃기만 했다. 아주 과묵한 지영배에게 듣기 힘든 말 중 하나라 새롭게 느껴졌다. 역시 자신처럼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누구든 변하는 것 같았다.

- 혹시, 호현이는….

“호두 어떻냐고?”

- …예.

마침 지영배가 물어보려 했는지 말이 겹쳤다. 윤치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호두는 애처가인 지영배가 끔찍이도 아끼는 아들이었다. 다만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 아들을 따로 안전한 곳에 맡겨 둬야 했다. 이리저리 잠적하기엔 너무 어려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었다.

지영배도 아들을 어디에 맡길지를 가장 고민했는데, 윤치영이 직접 맡아 주겠다고 했다. 윤치영의 품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인지라, 지영배는 기꺼이 아들을 맡겼다.

윤치영이 도란도란 말했다.

“호두 잘 있어. 와서 깨자마자 계속 울긴 했는데… 강아지가 직접 돌봐 줬더니 밥 잘 먹고 같이 카펫에서 뛰어놀았어.”

말하던 윤치영은 옆쪽의 거울을 돌아봤다. 마침 강아지가 깨물었던 제 귓바퀴가 보였다.

희성이 진심으로 깨물어서인지 귓바퀴에 새끼손톱만 한 작은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윤치영은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왔다. 강아지는 이게 문제였다. 뭘 해도 귀여워 못된 짓을 해도 귀엽고 섹시해 보이기만 했다.

지영배가 넌지시 물었다.

- 희성 님도 호현이가 제 아들인 걸 아십니까?

“말 안 했어. 그래서 내 자식 아니냐고 자꾸 의심해. 아까는 나 자는데 막 때리더라….”

윤치영이 귀를 매만지며 서운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정말 희성이 뽀뽀를 한 줄 알고 깼는데, 잠든 강아지를 다시 보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보고 진짜 속상해서 그랬다는 걸 알았다. 희성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윤치영과 지영배는 호두의 정체를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아무래도… 계속 모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잘못해서 정보가 퍼지거나 하면 이 일에 연루되실 수도 있어서….

“음….”

윤치영이 은근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구겼다. 음영이 짙어진 무표정한 얼굴에 고심이 묻어났다.

만약 희성이 이런 뒷사정을 진작 알았다면, 지영배가 자신 때문에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고 크게 속상해했을 것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나쁜 놈이 되는 게 나았다.

윤치영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쨌든 일이 좀 귀찮아졌는데. 괜찮아?”

-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지영배는 무던하게 말했다. 차라리 아들이 어릴 때 일을 처리해 두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치영에게도, 지금 당장은 숨기는 게 희성을 위한 길이었다. 윤치영은 속정이 깊은 강아지를 걱정 없이 살게 하는 게 제1 목표였다.

그렇게 윤치영은 몇 건의 보고를 더 받고 전화를 끊었다. 마저 태블릿으로 상황을 확인한 그는 침실로 돌아갔다. 창밖을 보니 해가 점점 떠오르는 게 보였다. 윤치영과 희성은 점심이 넘어서야 일어나 활동하기에 지금이 한참 잠을 잘 시간이었다.

침대로 돌아간 윤치영은 잠든 강아지들을 확인했다.

‘호두가 잠버릇이 훨씬 얌전하네….’

호두는 여전히 기절 방석에 대자로 엎어져 잠들어 있었고, 하얀 강아지는 침대 구석 쪽에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분명 침대 한가운데 잘 눕혀 두고 나갔는데, 그새 구르고 굴러 구석으로 갔다.

윤치영은 침대가 기울어졌나 쓸데없는 의심을 하며 강아지를 다시 침대 한가운데로 조심히 눕혀 뒀다. 자면서 혀를 조금 내뺀 모습이 사랑스러웠고, 윤치영이 살살 만져 주자 손가락을 앞발로 껴안고 깨무는 잠버릇조차 좋았다.

“강아지… 나 너무 미워하지 마.”

침대 한가운데에 강아지를 둔 윤치영은 구석에 훤칠한 몸을 구겨 누우며 속삭였다. 그리곤 옆으로 누운 채 강아지의 턱을 살살 쓰다듬어 줬다.

“곧 엄청 큰 새우 먹여 줄게.”

“…….”

“아주 맛있는 새우.”

은근히 웃으며 말하자 희성이 주둥이를 움찔 떨었다. 새우라는 말에 반응한 건지, 혹은 새우를 먹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윤치영의 손가락을 얕게 깨물어 대고 몇 번 핥았다.

그 귀여운 잠버릇에 윤치영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한참 웃음을 참았다. 거대한 새우를 먹여 줄 때 희성의 반응이 기대됐다.

* * *

호두가 집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 작은 문제가 생겼다.

아르르….

윤치영의 본체를 본 호두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꼴이 조금 애처로웠다. 거대한 늑대가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질겁한 채 이를 세웠고,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꼬리를 만 채 온몸을 달달 떨어 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희성이 호두의 곁에 남아 달래 줬다.

“어제까지만 해도 윤치영이랑 잘 놀았으면서….”

늑대 모습으로 변한 윤치영은 제 침실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밖에서 앞다리를 꼬고 시무룩하게 엎드려 있었다. 우아한 늑대가 문 앞을 지키듯 엎드리자 지나갈 틈조차 남지 않았다.

호두가 무서워해도 오늘 윤치영은 늑대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부상 때문에 당연히 본체로 지내야 했는데, 그간 윤치영이 제멋대로 반수 상태로 지내 버렸다. 희성이 몇 차례 말리긴 했지만, 윤치영은 고집스레 본체로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희성은 윤치영도 자신의 본체 모습을 여전히 싫어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만큼 윤치영의 몸에 악영향이 갔다.

〈페로몬이 또 치솟은 만큼, 이틀간 꼭 본체로 지내셔야 합니다. 이러다 신체 컨디션이 악화되면 페로몬 쇼크가 더 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마약 중독자 의사가 시커먼 늑대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경고한 말이었다. 그만큼 윤치영은 꼭 회복기를 가져야 했다.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 해도 아픈 수인은 본체로 돌아가 쉬어야만 했다.

희성이야 윤치영이 본체로 지내도 별 상관없어 알겠다고 넘겼지만, 문제는 호두였다.

낑, 낑….

거대한 늑대를 본 호두가 희성에게 매달려 떨어지지를 않았다. 마치 희성을 지키듯 아르릉거리기도 하고, 희성이 조금이라도 침실을 나가려고 하면 자지러지듯 울며 손목에 온몸으로 매달렸다.

“저거 무서운 거 아니야. 어제도 같이 놀았잖아.”

희성이 애써 달래 줘도 호두가 희성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희성의 만면에 사랑스러워하는 미소가 감돌았다.

“왜? 나도 다칠까 봐 그래?”

호두가 울 것 같은 눈으로 희성을 지키듯 옷깃을 물어 안쪽으로 당겼다. 희성에겐 그것만으로도 호두가 장하고 대견해 보였다. 낯선 무언가를 보면 본능적으로 숨으려 드는 게 당연한 나이인데, 동족을 지키려는 모습이 용맹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범한 견인족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증거였다.

‘대체 호두는 종이 뭐지?’

희성은 수인종 구분이 차별적인 시선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인은 혈통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부모의 종에 따라 성격이나 본능이 갈리기 때문이었다.

궁금증에 희성은 윤치영의 탁자에 있던 태블릿을 들었다.

그리곤 호두를 신중히 쳐다보았다. 인절미 색 털을 가지고 귀가 멋들어지게 선 강아지. 희성은 대체 호두의 종이 뭘까 생각해 보다가 우선 떠오른 후보부터 검색해 보았다. 노란 진돗개부터 포메라니안, 혹시 몰라 여우도 검색해 나온 사진들을 하나하나 호두에게 보여 줬다.

“호두 이거 봐 봐.”

희성이 호두를 달래 품에 안고 사진을 하나하나 넘겼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호두는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자 눈물 젖은 눈으로 금방 사진을 집중해 봤다. 희성은 그런 호두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어릴 적 자신보다도 덩치가 컸던 동생도 떠올라 더욱 정감이 갔다.

그 다정한 모습에 문밖의 늑대가 불만을 숨기지 못했다. 불안해하다 못해 서운해하는 티가 팍팍 나는 눈으로 희성의 주의를 끌었다.

그르르….

“쉿. 넌 조용히 해.”

“…….”

희성이 눈길도 주지 않고 단칼에 말했다. 그 모습이 서운한지 늑대가 무언가 얇은 천을 부욱 찢는 소리가 났다. 놀라 옆을 보니 다행히 찢어져도 되는 수건이었다. 희성은 다시 늑대에게서 관심을 끄고 호두에게 차근차근 사진을 보여 줬다.

마침 호두가 꼬리를 반짝 들며 반응을 보인 사진이 있었다.

‘엄마! 엄마!’

“와… 레트리버였구나.”

엄마가 레트리버라니, 진짜로 호두는 귀족 견인종 가문의 자제였다. 그런 아이가 대체 왜 귀가 솟은 아빠를 만났고,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늑대로 변한 윤치영이 대답을 해 줄 리가 만무했다.

‘저렇게 삐졌는데 대답은 무슨….’

이제 윤치영은 삐져서 고개를 돌린 채 누워 있었다. 불러도 눈도 안 마주치는데, 사실 자기 좀 봐 달라고 티를 내는 게 온몸에 묻어났다.

본체로 돌아간 수인은 무리를 더 찾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 손과 발을 못 쓰는 상태에서는 무리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희성도 그 간절함을 알기에 윤치영이 삐져도 일단 별말 없이 내버려 두고 있었다.

문제는 늑대가 분리 불안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아우우…!

갑자기 온 집 안에 늑대의 스산한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낮은 하울링에 희성마저 꼬리를 바짝 말게 됐다. 놀라 귀를 잔뜩 젖힌 채 설마 하는 마음에 침실 밖을 보니, 시커먼 늑대가 자신 좀 봐 달라는 듯 꼬리를 슬슬 흔들며 서 있었다.

“가, 갑자기 뭐야? 놀라라….”

희성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했다. 늑대의 하울링이야 가끔 들어 봤어도, 윤치영의 하울링은 처음 들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나 들을 법한 낮고 깊은 소리였다.

희성은 쿵쿵대는 가슴을 쓸어내린 채 품 안에 호두부터 감싸 달래 줬다. 그나마 희성이 투견이라 이 정도로 놀라고 말았지, 호두는 아예 소리도 못 내고 굳은 채 희성의 몸에 실례를 했다. 그 흔적을 본 희성은 윤치영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애 놀랬잖아!”

“…….”

“호두랑 같이 씻어야겠네….”

희성은 투덜거리며 휴지로 대충 실수를 처리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그러자 검은 늑대가 시무룩하게 희성의 눈치를 봤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카펫을 위협적으로 긁고 주변을 턱턱 돌아다니며 거칠게 그르릉거렸다.

이제 윤치영을 누구보다 잘 아는 희성은 그 속내가 뻔히 보였다.

‘고작 애가 실수로 마킹 좀 했다고 화를 내냐.’

한숨과 함께 생각한 희성은 샤워부터 했다. 그 김에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 반신욕도 했다. 윤치영 때문에 피로감이 몰려와 몸을 좀 녹이고 싶었다. 호두는 평소 윤치영이 자신에게 해 주던 것처럼 세면대에 적당히 물을 받아 그 안에 넣어 놨다. 다행히 호두도 반신욕으로 긴장이 풀렸는지 오리 인형으로 장난을 치고 놀기 바빴다.

겨우 찾아온 평화에 희성은 편하게 욕조에 등을 기대 누웠다.

바깥에서는 늑대가 여전히 성질을 부리는지, 무언가 물건을 턱턱 떨어트리는 소리가 났다. 희성은 그런 윤치영이 유치하고 한심했다. 어린 강아지한테 질투해서 대체 뭐하겠다고 저러는 건지. 유치하다 못해 아주….

‘어…?’

생각하던 희성은 불현듯 허공을 본 채 굳어 버렸다.

‘…이때까지 내가 저랬잖아.’

고작 어린 강아지한테 질투하고 그걸 못 숨겨 온몸으로 티를 내는 것. 모두 자신이 하던 짓이었다.

‘저렇게 하찮아 보였다니….’

질투하는 윤치영을 보니 그간 자신이 얼마나 유치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질투 같은 걸 할 필요도, 불안에 떨 필요도 없었는데.

희성은 욕조 안에서 자신의 강아지 귀를 조물조물 빨래하며 생각에 빠졌다.

‘어차피 우린 애인 사이라 이런 거에 질투할 필요 없었는데….’

정반대 입장이 돼서 그럴까, 희성은 그간 느꼈던 질투가 부질없고 사소해 보였다. 그렇다고 윤치영의 괘씸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늑대의 하울링을 처음 들어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분명 늑대는 외롭다고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준 호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해 두려워만 했고, 지금 늑대는 희성이 없으면 제대로 된 생활도 못 하는 혼자였다. 희성도 강아지로만 지내봐서 본체로 돌아갔을 때 동족의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지, 또 외로워지는지 알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퉁명스러웠던 행동을 떠올리니 윤치영에게 미안해졌다.

‘…오늘은 호두 재우고 윤치영이랑 같이 있어야겠다.’

마저 하얀 귀를 씻어 낸 희성이 생각했다.

귀도 깨끗하게 씻었으니 지금이라도 어른스러운 강아지로 행동할 때였다. 희성은 다정하게 구는 걸 가장 못했지만, 윤치영이 자신에게 해 준 것의 반만 해 주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많은 것이 쉬워졌다.

* * *

목욕 후 호두가 겨우 잠이 들었다.

한숨 돌린 희성은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이제 의사가 말한 대로 윤치영에게 약을 먹여야 했다.

달칵.

소리 없이 문으로 향한 희성은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 엎드려 있던 늑대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복도에서 기다렸다. 희성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불쌍하게 기다렸어?”

물음에 거대한 늑대가 소리도 없이 고개를 희성의 허리에 기대고 뺨을 비볐다. 평소 살벌하게만 보이던 회색 눈빛이 퍽 서글퍼 보였다. 평소대로라면 희성은 모난 말만 하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다리를 굽혀 까만 늑대를 껴안고 한동안 평화를 즐겼다.

호두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아픈 윤치영을 혼자 둬 미안했다. 그래도 늑대는 포옹 한 번에 서운함이 다 풀린 듯했다. 두툼한 검은 꼬리를 슬슬 흔드는데, 그 모습을 본 희성은 아주 겉모습만 늑대고 속은 실없는 강아지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한창 늑대와 뽀뽀를 하며 놀던 희성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와. 너 약 먹어야 하잖아.”

그르르….

늑대가 떨어지기 싫은지 투레질하듯 거칠게 숨을 쉬며 희성의 주변을 맴돌았다. 졸졸 희성을 쫓아가 엉덩이도 한번 아프지 않게 깨물고, 곁에 우아하게 앉아 약을 기다렸다. 무릎을 굽힌 희성은 자꾸만 뽀뽀하자고 제 턱과 입술을 핥는 늑대를 겨우 말리고 말했다.

“너도 약 먹고 푹 자. 아픈 거 참지 말고.”

희성은 내키지 않지만 약을 준비했다. 페로몬 완화제는 약이 독했다. 아마 약을 먹으면 윤치영은 금방 잠들 것이었다. 희성은 호두가 와서 사실 가장 고생하는 건 윤치영이 아닐까 싶었다. 단둘이 있으면 성관계를 통해 자연스레 페로몬이 풀어졌을 텐데. 하필 부상과 육아가 겹쳐서 약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희성은 오늘만 약으로 넘기자 하고, 약을 늑대에게 먹여줬다. 꿀떡 약을 삼킨 늑대는 투정처럼 희성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희성은 약이 잘 넘어가도록 긴 목을 쓰다듬어 주다가, 슬쩍 궁금한 걸 물었다.

“근데…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다 네 본체를 무서워했어?”

으르르….

대답은 투정 같은 으르렁거림뿐이었다. 슬슬 약 기운이 도는지, 늑대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중심도 제대로 못 잡고 섰다. 거대한 늑대가 벽과 의자에 몸 곳곳을 부딪치며 비틀비틀 걸어대서 결국 희성이 힘겹게 그를 지탱해 손님방의 침대까지 이끌 수밖에 없었다.

“으으… 무거워.”

희성은 열심히 거대한 늑대를 옮겨서 침대에 잘 눕혀 뒀다. 그러자 늑대가 옆으로 풀썩 누우며 나른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르르….

다행히 윤치영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늑대는 들끓는 숨을 내쉬면서도 희성의 품에 이마를 무겁게 비볐다. 늑대가 반려에게나 보이는 애교였다. 희성은 맹수를 버겁게 안아 주며 갈기를 크게 쓰다듬어 줬다. 자꾸만 윤치영이 졸린 눈을 떠서 희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옆에 있을 테니까 잠이나 자.”

“…….”

“자라고. 무슨 침대만 한 늑대가 애교야?”

희성이 퉁명스럽게 말해도 늑대는 그저 기분 좋게 꼬리를 턱, 턱 매트리스에 내리쳤다. 참 꼬리도 거대하고 채찍 같았다. 희성은 거대한 늑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며, 약 기운이 돌 때까지 곁을 지켜 줬다. 자꾸 윤치영이 사랑한다고 희성의 입술을 핥아서 주둥이를 손으로 붙잡은 채 재워야 했다.

곧 늑대가 고요하게 잠이 들었다. 평화롭게 눈 감은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

희성은 윤치영이 잠든 모습을 길게 바라봤다.

검고 우아한 늑대. 볼수록 신화에 나오는 신의 피조물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였다. 그런 게 고작 자신에게 분리 불안을 느끼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희성은 늑대의 푹신한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모처럼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풍성한 갈기와 멋스럽게 솟은 검은 귀하며, 굵기가 손가락만 한 송곳니는 감탄이 나왔고 곰과도 같은 발바닥도 신기했다. 꼬리는 털이 북실북실해 얼핏 보면 희성의 허벅지만 했다. 이렇게 듬직하게 생겼는데, 앞발은 사람일 때처럼 희성의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참 고집스러운 늑대였다. 잔웃음을 터트리던 희성은 이내 의아해하는 얼굴이 됐다.

“…이상하네.”

희성은 어디 하나 멋지지 않은 곳이 없는 늑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이렇게 우아하고 멋진 걸 왜 다들 무서워했지?”

희성은 자신의 말에 흠칫 놀랐다.

원래 희성은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칭찬은 더더욱 못했다. 그런데 윤치영의 이런 면모를 자신만 알아봤다니. 이 우아한 늑대의 진짜 모습을 봐 주지도 않고 무서운 짐승으로만 취급한 수인들의 안목이 꽝이었다. 희성은 자신이라도 그의 진짜 모습을 봐서 다행이라고, 퍽 간지러운 생각을 했다.

그러다 희성은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 말을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삭임은 늑대의 보송하게 솟은 귀를 보자 떠올랐다.

〈이상하다… 이 귀여운 걸 왜 버린 거지?〉

“…….”

윤치영이 처음 강아지인 자신을 주워 왔을 때 그런 말을 했었다. 강아지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채 바라보던 다정다감한 눈빛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눈웃음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윤치영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푹 빠졌을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이 그의 진정한 모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다시 반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네.’

희성은 세상에서 가장 까맣고 우아한 늑대를 쓰다듬으며, 서서히 작은 강아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온 세상이 거대해지고, 거대한 늑대는 훨씬 커져 보일 때까지 본모습으로 변화했다.

강아지로 돌아간 희성은 옷가지를 열심히 빠져나왔다. 그러곤 거대한 늑대의 주둥이에 편안하게 턱을 괸 채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윤치영을 바라보았다.

‘윤치영은 내가 단순히 강아지라 좋아해 준 게 아니야.’

강아지는 그의 주둥이에 포근하게 뺨을 비비며 생각했다.

‘…성격 나쁜 견희성이라 좋아해 준 거였어.’

도박장에서 온갖 멋진 수인들을 보고도 무감각하던 자신인데, 윤치영에게만큼은 감상이 달라졌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처럼 진정한 그를 알고 변하게 됐다. 그런 자신처럼 윤치영도 모든 강아지에게 이끌리는 게 아닐 터였다. 애초에 호두를 질투할 필요도 불안에 빠질 필요도 없었다.

행복하게 뒹굴던 강아지는 잠든 늑대의 갈기에 몸을 푹 파묻었다. 윤치영의 품은 사람일 때든 늑대일 때든 따듯하고 푹신했다. 성격 나쁘고 까칠한 강아지에게 푹 빠진 이상한 놈. 하지만 희성은 그 특별함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단 걸 알려 준 그가 고마웠다.

그만큼 그간 자신의 질투와 불안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사실 희성은 두려웠던 것 같다. 나중에 윤치영도 자신을 빈집에 버려두고 가거나, 갑자기 다른 강아지를 데려와 자신에게 흥미를 잃을까 봐. 그래도 상관없다고 의연하게 생각해 왔지만, 아직도 강아지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글썽글썽해질 정도로 속이 상했다. 그래서 윤치영이 호두를 데려오자 과하게 불안해하고 그만큼 그를 미워했었다.

하지만 희성은 윤치영과 같은 눈으로 그를 보게 되니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애초에 버려지기가 싫다면….

‘…내가 얘를 책임지고 살면 되잖아.’

까만 갈기에 파묻혀 있던 강아지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길이 번뜩 보이는 듯했다. 희성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윤치영을 곁에 잡아 둬야겠다고 결심했다.

투견에게 사랑이란 쟁취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참한 반려를 맞이할 자격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희성은 그 가르침을 받고 자란 견인족이었다. 그런데 윤치영을 만나 그에게 상견례까지 휘말려, 아무런 연인의 약속도 없이 함께하고 있었다.

‘확실히 내 애인이란 표식을 남겨 놔야겠어.’

역시 관계의 정립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백이 필수였다. 거기다 애인을 사로잡기 위해선 자신이 준비된 강아지라는 걸 어느 정도 증명해야만 했다.

다행히 희성은 수익도 있었고, 돈을 숨길 최적의 금고도 진작 마련해 뒀다.

일단 돈을 좀 확인해 봐야 했다. 윤치영을 두고 방을 조심히 빠져나온 강아지는 자신만의 금고로 향했다.

‘내 돈 잘 있겠지?’

금고는 윤치영의 집에 처음 왔을 적부터 구비해 둔 곳으로, 강아지인 희성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거실로 나온 강아지는 소파 아래로 꾸물꾸물 엉덩이를 씰룩여 들어갔다.

어둑한 곳에서 희성은 고개를 들어 구멍이 난 소파 바닥을 앞발로 뒤적거렸다. 그러자 묵직한 돈 봉투가 툭툭 떨어졌다. 희성이 윤치영이 떨어트린 돈을 도둑질하거나 윤진영에게서 꼼꼼하게 수금해 모아 둔 돈으로, 드디어 윤치영에게 쓸 일이 생겼다.

그동안 고맙게도 윤치영의 형이 쓸데없는 거짓 정보를 줄 때마다 송금을 해 줬다. 덕분에 희성은 매달 강아지 몸 두께만 한 돈을 안정적으로 챙길 수 있었다.

‘좋았어….’

다행히 돈을 더 수금하지 않고 고백을 준비할 수 있을 듯했다. 안심한 희성은 돈 봉투를 물어 열심히 자신의 방으로 옮겨 뒀다. 돈이 제법 무겁고 양이 많아 한참 부스럭거려야 했다. 윤치영이 약 기운에 취해 깊이 잠들어서 다행이었다.

에취!

돈을 전부 정리한 강아지가 재채기를 했다. 먼지가 많은 장소라 재채기가 계속 나왔다. 그래도 희성은 책임감 있게 돈을 끝까지 정리했다. 윤치영을 정식 애인으로 맞이해 먹여 살릴 생각을 하니 돈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저거 어떻게 먹여 살리지….’

윤치영은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지만 그만큼 낭비벽이 심했다. 거기다 도박 중독이라는 전적도 있는데, 자신이 이런 양아치 짓으로 생활비를 감당 가능할지 심히 걱정됐다.

이내 강아지는 고개를 흔들어 걱정을 떨쳐 냈다.

‘…아니야. 그래도 내 애인 하나는 스스로 먹여 살려야지.’

희성은 투견답게 생각하며 의지를 다졌다.

늘 소중한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배신당했던 희성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윤치영을 끝까지 책임지며 잘해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반려였다. 늘 관계에 결정권이 없던 강아지에게 이번 고백은 의미가 컸다.

‘윤치영은 금붙이 좋아하니까, 역시 고백에는 반지가 좋겠지?’

이제 강아지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었다. 강아지는 온몸에 솜털이 설 정도로 설렘 가득한 생각을 하며 소파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윤치영을 만나 살이 쪄서 배가 자꾸 틈에 꼈지만 애써 무시한 채였다.

* * *

희성은 남은 이틀을 바쁘게 보냈다.

자신에게 찰싹 붙은 호두도 돌봐야 했고, 늑대로 지내는 윤치영도 대충 봐줘야 했다.

거기다 중간에 마트에 가는 척 몰래 빠져나가 반지도 사 와야 했다. 조직원 형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반지가 이렇게 비싼 줄 몰랐는데.’

희성이 산 반지는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희성이 도박장에서 꼬박 1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가격인지라 손을 떨며 샀다. 무난한 걸 살까 싶기도 했지만, 윤치영의 소비 수준을 알기에 어떻게든 맞춰 보려 했다.

‘…윤치영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희성은 반지를 보며 아까움보다는 설렘을 느꼈다. 집에서 윤치영을 볼 때마다 기대감이 넘실거릴 지경이었다. 자신이 멋지게 반지를 건네줄 때 윤치영이 기뻐해 주는 상상을 줄기차게 했다.

‘반지도 준비됐고… 호두도 오늘 엄마한테 돌아가니까, 분위기 좋을 때 고백하면 되겠지?’

이제 5일이 지나 호두도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제 방에 반지를 숨긴 희성은 품 안에서 곤히 잠든 호두를 쓰다듬어 줬다.

‘그래도 정들었는데… 꼭 보내야 하나?’

막상 호두를 보낼 날이 오니 아쉬워졌다. 희성은 호두가 겁을 지레 먹어서도 자신을 지켜 주던 용맹한 면모에 홀딱 빠졌다. 만약 부모에게 돌아가는 날만 아니었다면 세상을 멋지게 살아갈 투견의 자세를 알려 줬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호두의 부모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윤치영한테 애를 맡긴 거야…?’

윤치영 같은 제정신 아닌 놈한테―애인이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맡기다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호두가 윤치영이랑 단둘이 지냈다면 아직도 적응 못 하고 울고만 있었을 것이다.

‘윤치영 깨면 이번엔 부모가 누군지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희성은 걱정스레 생각하며 침실로 향했다. 윤치영은 점심이 훌쩍 넘었는데도 잠들어 있었다. 깊이 잠든 모습을 보니 아직도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회복이 빨라서 밤새 사람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희성은 호두를 품에 안은 채 윤치영이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가까이서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얘는 그냥 하루에 23시간 잤으면 좋겠다. 조용한 게 훨씬 나아.’

희성이 윤치영의 진득한 애정 표현을 감당할 시간은 한 시간이 한계였다. 거기다 윤치영은 자는 모습이 훨씬 나은 듯했다. 훤칠하게 단련된 알몸으로 누워 느슨하게 잠든 모습이 꼭 남녀노소 모두 홀리고 다니는 잘생긴 한량 같았다. 그나마 잔인한 성미 때문에 조직 보스라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다행이었다.

똑똑.

그때 멀리 현관에서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성의 예민한 강아지 귀가 바짝 섰다.

아마 조직원인 듯했다. 윤치영은 워낙 소리에 예민해서 조직원들은 절대 벨을 누르지 않았다. 역시 노크 소리만으로 짜증을 느꼈는지 윤치영이 잠든 채 미간을 은근히 찌푸리고 있었다. 페로몬 수치가 높아 많이 예민해졌는지, 제 영역에 침입한 다른 존재를 느끼고 이를 빠드득 갈아댔다.

일단 희성은 현관문을 열어 주러 갔다. 모처럼 찾아온 지영배가 바깥에 대기하고 있었다.

“영배 형, 쉿.”

“저… 아, 예.”

희성이 지영배를 보자마자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보였다. 윤치영 때문은 아니었고, 호두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잠에서 깨면 특유의 미친 체력으로 뛰어다닐 터였다.

그런데 지영배의 반응이 의외였다. 들어올 때는 평소처럼 무표정했는데, 희성의 품 안을 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귀여운 호두 때문인 듯했다. 이런 걸 보면 지영배도 감정이 있는 수인이 맞는 것 같았다.

“형, 기다려 봐.”

희성은 목소리를 낮춰 지영배에게 전하고 침실로 향했다. 하필 자신만 깨어 있어서 제일 바빴다. 침대로 가서 감각이 너무 예민한 윤치영의 손을 잡아 깨우고, 일어난 그에게 뽀뽀 세례를 한참 당하고. 도망과 소리 없는 투덕거림을 반복하다가 겨우 침실에서 윤치영과 나왔다.

“영배 일찍 왔네… 아… 제시간인가?”

윤치영이 나이트가운을 느슨하게 걸치며 말했다. 부스스한 꼴이 꼭 그리스 신화 같은 곳에 나오는 게으름의 신 같았다. 그나마 멀쑥한 놈이라 못나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사이 윤치영은 서재로 향하더니, 지영배에게 무언가 보고를 듣기 시작했다. 희성은 그 옆쪽 소파에 앉아 잠든 호두를 쓰다듬었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해져 도저히 품에서 호두를 놓을 수 없었다.

‘영배 형은 호두를 부모에게 데려가려고 온 거겠지….’

갈수록 희성은 처음에 호두에게 못나게 대했던 게 미안해졌다. 출신을 궁금해했던 것도 찔렸다. 이렇게 귀엽고 용맹한 강아지인데, 그냥 이상한 부모에게 돌려보낼 바엔―다시 생각해도 윤치영에게 맡긴 게 이상하다― 자신이 키울까 싶을 정도였다.

역시 부모가 누군지 윤치영에게 따져 물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 궁금증은 묻지 않아도 점점 해소되고 있었다.

마침 윤치영이 서랍 아래를 뒤적여 무언가 꺼냈다.

“자, 여기 새 신분증.”

“감사합니다.”

얼핏 보기에 여권과 신분증이었다. 그것을 윤치영이 제대로 보지도 않고 졸린 눈으로 지영배에게 건넸다.

“부득이하게 이름도 바뀌었는데… 난 계속 영배라 불러도 되지?”

“예.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지영배가 묵직하게 대답하며 새 신분증을 품 안에 잘 챙겨 뒀다. 희성은 낯선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을 번갈아 봤다.

‘신분 위조…? 영배 형이 그럴 일이 있나?’

아무래도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라 낯설었다. 거기다 윤치영이 자신의 사람들만큼은 잘 챙기는 건 알았는데, 신분 위조까지 해 주는 줄은 몰랐다.

뒤늦게 희성은 신분 위조가 필요할 만한 일을 떠올렸다.

〈제가… 늑대 일족을 죽였습니다.〉

“아….”

지영배가 얼핏 털어놨던 과거가 떠올랐다. 살인은 당연히 중범죄니 지영배가 신분을 바꿔야 하는 게 이해됐다. 윤치영이 직접 챙겨 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때 희성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던 호두가 깨어났다. 작은 몸을 꾸물대며 뒤척이던 호두는 희성의 손목에 뚱하게 고개를 기대더니, 뒤늦게 무언가를 발견해 꼬리를 치켜세운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두가 외친 말은 견인족들만이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아바! 아빠! 아빠!’

“…아빠?”

희성의 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하게 굽어졌다. 품 안에서 꼬리와 함께 엉덩이까지 격렬하게 흔드는 호두를 내려다보는 사이, 지영배가 다가와 호두를 조심스레 안아 줬다.

“그래, 집에 가자.”

“……?”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희성이 둘을 번갈아 봤다. 통통한 대형견 강아지와 지영배. 거기다 아빠라 부르다니… 갑자기 우람한 호두의 체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희성이 멍하게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영배 형… 언제 나 몰래 결혼했어?”

답지 않게 지영배가 희미한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 미소가 사라지긴 했지만 분명 뿌듯해하는 미소였다.

그는 희성에게 숨김없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호현이 잘 돌봐 주셨다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름도 따로 있었구나….”

희성은 감사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정보에 혼미해졌다. 그 뒤로 윤치영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참는 모습하며, 호두가 꼬리가 날아갈 듯이 흔들며 좋아하는 모습. 그리고 지영배가 자신을 대하듯 꼼꼼하게 아들을 챙기는 모습이 전부 낯설게만 보였다.

‘호두 아빠가… 영배 형이었구나. 그럼 다행이네.’

희성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두가 부럽기도 했다.

희성은 술주정뱅이 아빠에게 버림받았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호두는 지영배가 윤치영에게 따로 맡겨서라도 지켜 주려고 한 듯했다. 다행이라 느껴지면서도 희성은 가슴 어딘가가 먹먹했다. 자신과 다른 아빠를 둔 호두가 아주 조금은 부러웠다.

그리고… 윤치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낯설게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을 따라 희성의 미간이 거칠게 좁아졌다.

“…야.”

“바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희성이 나직이 윤치영을 부르자, 지영배가 눈치 좋게 인사를 하고 호두를 안은 채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윤치영보다 높은 새로운 권위자가 희성임을 잘 알아서였다.

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치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뻔뻔한 식인 늑대 자식은 도통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지포 라이터 뚜껑을 튕기며 눈웃음을 살살 치고 있었다.

희성이 불량하게 강아지 귀를 한쪽만 세운 채 물었다.

“뭐야?”

“뭐가?”

“호두. 왜 말 안 했어?”

물을 때까지 윤치영의 손에서 지포 라이터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희성은 확 라이터를 빼앗아 버렸다. 그러자 윤치영이 그럴싸하게 눈치를 보는 척했다. 뻔뻔한 연기임을 알아챈 이유는 슬쩍 손을 뻗어 희성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 하얀 꼬리를 야릇하게 쓰다듬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배 아들인 거? 어쩔 수 없었어.”

“뭐가. …너 말 잘해라.”

희성이 경고처럼 말하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영락없이 불량한 양아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희성이 이렇게 위협할 때 제발 하얀 강아지 귀부터 숨기고 협박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희성은 모르겠지만 화를 낼 때마다 접힌 귀가 움찔거려서 주눅 든 척하기도 힘들었다.

겨우 표정을 눈치 보듯 갈무리한 윤치영이 말했다.

“이번에 박건태가 머리를 썼더라고. 경찰한테 과거를 찔러서 영배가 신변 정리를 좀 해야 했어.”

“…….”

박건태 때문이었다니. 희성은 갑자기 호두와 지영배에게 너무도 미안해졌다.

어쨌든 자신 때문에 일을 처리하다가 부자가 위험해졌다니. 사정을 알게 되니 화가 좀 죽었다. 희성은 조금 전과 달리 한결 걱정스러움이 묻어난 눈이 됐다.

그래도 억울함만큼은 가시지 않았다.

“…그럼 왜 나한텐 그걸 다 숨겼는데!”

희성은 그간 호두에게 질투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진작 지영배의 아들인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잘 대해 줬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윤치영이 자신의 반응을 즐기느라 일부러 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 있던 윤치영이 희성을 달래듯 품에 슬쩍 안겼다. 나긋한 어투 하며 꼬리를 쓰다듬는 행동이 교활하면서도 다정했다.

“내가 손쓰면 별거 아닌 일인데… 강아지가 많이 걱정할까 봐 그랬지.”

“…….”

“그래도 영배가 신변 정리 확실히 해서, 이제 박건태 어떻게 처리해도 뒤탈 없어. 자, 여기 박건태 상태랑 위치.”

윤치영이 슬쩍 희성에게 태블릿 PC를 내밀고 다시 품에 안겼다. 태블릿을 손에 쥔 희성은 늑대를 괘씸하게 내려다보면서도 차마 화풀이를 못 했다. 어쨌든 박건태 새끼 때문에 다들 고생하게 된 일이었다.

희성이 태블릿으로 서류를 확인해 보니 완벽하게 궁지에 몰린 박건태의 정보가 빼곡했다. 아마 윤치영이 직접 손을 쓴 듯했다. 이러면 윤치영에게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이번만 봐준다.”

“응.”

“씻고 옷 입어. 박건태 잡으러 가게.”

결국 희성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쨌든 호두도 무사하고 지영배도 무사하니 아무렴 다행이었다.

일단 희성은 현관으로 향해 지영배의 품에 안긴 호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호두 잘 가, 형이 한 말 기억하지?”

왕.

“밥 잘 먹고 잠도 잘 자서 형처럼 용맹한 강아지가 돼야 해.”

왕!

진지한 말에 윤치영이 조용히 뒤돌며 힘겹게 웃음을 참았다. 강아지가 강아지를 가르치는 광경은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됐다. 지영배도 마찬가지인지 희성을 바라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목을 가다듬고 정중한 인사를 남겼다. 둘이 나서자 다시 집 안이 고요해진 듯했다.

그사이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윤치영이 희성을 뒤에서 슬쩍 껴안으며 물었다.

“호두 가서 아쉬워?”

“그럼 안 아쉽겠냐.”

“나도 아쉽네….”

윤치영의 말에 희성은 씁쓸하게 시선을 떨궜다. 호두에게 좀 더 잘해 줄걸. 그런 후회가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식인 늑대는 아닌 듯했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내쉬는 한숨에 그간의 고생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난 평생 자기뿐이면 될 것 같아.”

“…나갈 준비나 해.”

희성은 얼굴이 붉어진 채 욕실로 향했다. 뒤늦게라도 진실을 알아서인지 마음이 후련했다. 이제 남은 건 복수뿐이었다.

* * *

희성은 처음 박건태를 만났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형은 희성에게 있어 은인이자 유일한 가족이었다. 자신도 조직의 말단이면서, 말라빠져 다 죽어 가는 강아지를 살려 보겠다고 죽을 먹여 주고 지하에 낡은 매트리스를 깔아 자리 한쪽을 내줬다. 희성이 겨우 기운을 차려 다시 사람으로 변한 날도 이거 살 줄 알았다고 기뻐하며 옷을 내줬다.

형의 품에서 자라나며 희성은 많은 걸 배웠다.

〈넌 내 아래에 들어온 이상 투견으로 살아가야 해.〉

〈투견? 왜?〉

〈여기까지 떨어졌으면 인마, 살아갈 방법이 그거밖에 없어.〉

〈난 형이 주워 온 거잖아….〉

희성이 대꾸해도, 박건태는 투견으로서 살아가려면 그 약해빠진 정신부터 단련해야 한다고 강아지를 구박하고 혹독하게 굴었다.

이후 희성은 제대로 쉬었던 날이 없었다. 처음에는 물건을 배달하는 법을 배웠고, 전단지를 빠르게 돌리는 법이나, 손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 법. 그리고 적당히 윗선에 형 대신 깨지는 법도 배웠다. 나중에는 술과 담배도 배웠지만, 그것만큼은 몸이 너무 약해 따라갈 수가 없었다.

희성에게 전부 아프고 죽을 것 같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살아남아 열심히 형을 따라왔다. 형에게 쓸모를 안 보이면, 그에게마저 버려지면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삶이 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하 도박장을 빠져나온 희성은 오히려 박건태의 곁이 벼랑 끝이었음을 알게 됐다.

박건태가 얼마나 개 같은 논리로 자신을 잡아 두고 괴롭힌 건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철저히 이용해 자신의 목숨값마저 빼돌리려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신을 구해 준 것만큼은 고마웠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것마저도 그저 충동적인 감흥에 행한 위선적인 짓이었다.

하지만 이제 둘의 입장은 정반대가 됐다.

끼익….

늦은 새벽, 희성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폐가에 들어섰다. 부산까지 윤치영과 맛난 먹거리를 꼭꼭 챙겨 먹고 오느라 한참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폐가 안이 어두컴컴했지만, 벽에 스위치를 누르자 낡은 전구가 깜빡이며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안은 오히려 더 으스스해 보이기만 했다.

희성은 겁도 없이 폐가에 연장을 챙겨 들어섰다. 그 뒤로 윤치영이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따라 들어섰다. 조직원들은 희성의 부탁대로 폐가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조용하네.”

폐가 안은 고요했다. 바닥에는 먼지가 그득 쌓여 걸을 때마다 무언가가 불쾌하게 밟혔고, 제대로 된 성한 가구 하나 없었다. 물도 나오지 않아 도저히 수인이 살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

그 가운데 희성이 착잡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동그랗고 눈매가 순한 두 눈은 우울을 머금은 채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은 희성이 어릴 적 버려졌던 폐가와 비슷했다.

희성은 방구석에 놓여 있는 더러운 이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불과 5년 전, 말라빠져 다 죽어 가던 자신이 웅크렸던 곳과 비슷했다.

만약 자신이 그날 박건태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부질없는 후회와 함께 먹먹한 감정이 밀려왔다. 자기연민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저, 원하는 대로 남들처럼 평범하게도 살아 보고, 그러다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빨리 만날 수도 있었는데. 박건태에게 빼앗긴 시간이 아쉽고 아까웠다.

그리고 그날 버려졌던 자신의 꼴을 다시 떠올려 봐도 불쌍해 속상했다. 희성은 울 것같이 무너진 까만 눈을 애써 어둠 속에 숨긴 채 의연하게 말했다.

“…나 예전에 이런 곳에 있었어.”

“…….”

말하고 후회했다. 이런 구차한 말을 왜 했나 싶었다.

그런데 윤치영이 곁으로 다가와 손을 깍지 껴 잡아 주었다. 그 행동만으로도 희성은 위로가 됐다. 울컥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윤치영도 착잡한 건 마찬가지인지, 답지 않게 낮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가 더 빨리 강아지 찾으러 올 걸 그랬네.”

“이제 와서 쓸데없는 소리 뭐 하러 해.”

“아쉬워서….”

“…….”

감정을 참고 있던 희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변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희성은 황급히 윤치영이 잡아 준 손을 빼내 주변을 둘러보는 척했다. 아직도 누군가에게 눈물을 보이는 게 싫었다. 거기다 복수를 앞뒀는데 눈물이 고인 얼굴로 박건태 앞에 설 수는 없었다.

희성은 눈물을 쓱 닦고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방에는 낡아 버려진 가구뿐이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벽장이 있었다. 그 안을 슬쩍 살피니 유독 비좁은 안이 보였다.

“…….”

얇은 벽장의 뒤판을 빤히 보던 희성은 방을 나갔다. 이번엔 버려진 식기가 놓인 주방을 둘러봤다. 더러운 그릇 사이에 벌레 시체가 보였고 사용감이 보이는 양은 냄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안에 탄 자국이 선했지만 다른 것보다 비교적 깨끗해 보였다. 희성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주방을 확인한 희성은 방으로 돌아와, 낡아빠진 의자에 강아지용 담요를 펼쳐 놓은 뒤 윤치영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넌 앉아 있어.”

“강아지… 내 자리부터 챙겨 준 거야?”

윤치영이 감격하기 전에 희성이 그 싹을 잘랐다.

“이제 내가 뭘 해도 거기 움직이지 말고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단호한 말에도 윤치영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의자에 곱게 다리를 꼬아 앉았다. 주변은 폐가였지만 꼭 오페라라도 보러 온 귀족 같은 자태였다.

그 앞에서 희성은 조직원들에게 진작 받아 온 도끼를 힘 있게 들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있는 힘껏 벽장 뒤쪽 널빤지를 내리쳤다.

“으아악!”

널빤지 뒤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났다. 희성은 망설이지 않고 도끼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우지끈!

벽장 뒤쪽이 허무하게 무너지며 사람 하나가 네발로 기어 나왔다. 거지꼴이 다 된 박건태였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살도 뒤룩뒤룩 찐 데다가, 한쪽 팔이 붕대로 감겨 있었고 살이 드러난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벽장에 그럴싸하게 가짜 판을 대서 숨을 곳을 만들어 둔 건 칭찬할 만했지만, 상대가 그를 잘 아는 희성인 이상 부질없는 짓이었다. 희성이 한심해하며 도끼를 옆에 대충 던져뒀다.

“형… 아직도 형이 똑똑하다 생각하는 거야?”

“희, 희성아….”

바닥을 기던 박건태가 흘끗대며 도망갈 눈치를 봤다. 하지만 문 옆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윤치영을 보곤 발작하듯 몸을 떨더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 바로 얼굴 옆에 도끼를 맞을 뻔해서인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고 말도 더듬었다.

“저, 씨, 씨발. 저 씨발 새끼…!”

“뭐야, 형….”

희성이 마치 매일 본 사이처럼 별 동요도 없는 얼굴로 물었다.

“한번 VIP는 평생 VIP라며?”

“희, 희성아! 안 그래도 형이 할 말이 있다.”

박건태가 바닥을 네발로 기어와 희성의 매끈한 바짓단을 꽉 붙잡았다. 희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걸음 물러나려 했지만, 박건태가 필사적으로 무릎으로 기어 다시 다리를 붙잡았다.

“너, 저, 저, 저 새끼랑 엮이면 절대 안 돼! 그동안 저놈이 날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알아? 잡아서 죽일 듯이 패고, 차로 갑자기 뒤에서 받아 버리고! 내, 내 앞에서 죽을 뻔한 놈이 몇인 줄 알아?”

“…그래서?”

“다 나라서 어떻게든 튄 거지, 저 새끼 그냥 사람 사냥하는 거에 맛 들인 미친놈이야. 너, 희성아.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야 해, 응?”

“…….”

필사적인 설득에도 희성의 눈빛은 별 미동도 없었다. 도저히 감정을 읽을 수가 없는 무덤덤한 낯빛이었다. 박건태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일말의 혐오감이 감돌았을 뿐,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이나 했다.

“맞아… 쟤 미친놈인데.”

“그, 그래! 저거 완전, 제정신 아니라니까! 응? 희성아, 그러니까 이제라도…!”

박건태가 뭐라고 하든, 희성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내 생기가 없던 까만 눈에 강렬한 무언가가 맺혔다. 5일간 육아와 질투에 시달린 데다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윤치영에게 속았다는 억울함이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자신은 진지하게 고백까지 준비했는데. 이제 와서 다 자신을 위해 호두의 정체를 숨겼다고 하다니. 생각할수록 희성은 윤치영이 괘씸해졌다.

“그래도 애초에, 형이 날 버리지 않았다면 윤치영을 못 만났겠지….”

역시 화가 풀리지 않았다. 희성은 거칠어진 숨을 한차례 고르더니, 분노만이 남은 얼굴로 거칠게 발길질을 해 버렸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윤치영을, 안 만났는데!”

“커헉, 아악, 악…!”

희성이 말마디마다 박건태의 배와 옆구리를 마구 걷어찼다. 박건태가 꼴사납게 몸을 웅크린 채 켁켁거렸다. 어딘가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났고 섬뜩하게 살이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먼지 구덩이인 바닥에 박건태의 몸이 볼썽사납게 굴렀다.

희성은 그 꼴을 보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간 육아에 시달리고 윤치영의 계략에 속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중 가장 힘들고 화가 나는 건 자신이 그런 윤치영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윤치영이 얄밉고 짜증 나는데 그래도 저놈이 좋아서 힘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를 책임져야 한다는 게 이렇게 버거운 일일 줄은 몰랐다.

“허억, 허억….”

이제 정신 차리기도 힘든지, 박건태가 숨넘어갈 것처럼 고통에 헐떡였다. 그 예전 희성은 이보다 더한 구타를 당하고 누명에다가 허벅지에 칼까지 맞았는데, 고작 구타에 곧 죽을 것처럼 구는 모습이 같잖아 보였다.

고통에 맛이 갔는지 박건태가 본성을 드러냈다.

“너 이 씹새끼, 컥, 폐가에서 다 죽어 가는 거 배부르고 등따습게 키워 줬더니 이게…!”

익숙한 욕설에 희성은 대답도 없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옆을 둘러봤다. 사납게 날이 선 까만 눈빛이 형형했다. 시선이 아까 대충 던져둔 도끼에 닿았다. 망설임 없이 희성이 무기를 집어 들자, 박건태가 다시 발작하듯 세 치 혀를 놀렸다.

“희, 희성아! 넌 예나 지금이나, 앞뒤 분간을 못 했어. 저놈이 너한테 흥미 떨어지면 금방 버려질 건데, 왜 또 한 치 앞을 못 봐!”

“뭐래.”

“너, 너. 애교도 없는 그 더러운 성격으로, 저놈이랑 오래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

물음에 희성이 도끼를 힘없이 쥔 채 한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관없어… 쟤 이런 거에 페티시 있어.”

세 치 혀를 놀리던 박건태가 얼빠진 얼굴이 됐다.

사실 희성은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과 윤치영이 서로 잘 맞긴 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폭력적인 상황임에도 윤치영의 황홀해하는 시선이 뒤통수가 따갑도록 느껴졌다.

희성은 윤치영이 뭐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다린 복수의 순간인데, 후련함과 함께 허무함도 느껴져서 기분이 미묘했다.

오히려 쩔쩔매는 박건태를 볼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형… 진짜 허무하지 않아?”

“허억, 허억….”

“날 5년 동안이나 괴롭게 한 사람이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새끼였다는 게. 정말….”

희성이 도끼를 들고 박건태에게 타박타박 다가갔다. 박건태가 땀을 육수처럼 흘리며 벽으로 더듬더듬 물러나고, 또 뭐라 뭐라 설득을 하는데, 이제 그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 그래도 형이 날 폐가에서 데려와 줬잖아. 형이 유일하게 사람다웠던 시기에….”

“마, 맞아! 희성아. 내가 네 구원자였어!”

“…….”

희성이 다시 도끼를 바닥에 내려 뒀다. 복수에 흥미를 잃었다기보단, 추잡한 박건태의 밑바닥을 보니 그냥 이 수인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커졌다.

자신은 이제 미련 없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가야 할 때였다.

“한 번 나 살려 줬으니까, 나도 형 살려 줄게.”

그 모습에 박건태의 눈에 희망 어린 생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희성은 복수를 잊은 눈이 아니었다.

“이제 그냥, 조용히 벌레처럼 살아.”

말을 마친 희성이 있는 힘껏 박건태의 발목을 발로 내리찍었다.

빠각.

“꺽, 크흑, 컥…!”

말끔한 소리와 함께 박건태의 발목이 깔끔하게 부러졌다. 고통이 극심한지 박건태가 꺽꺽대며 비명도 못 지르고 눈을 뒤집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몸에 힘이 풀리며 박건태는 아무 미동도 없이 쓰러졌다.

희성은 그 모습을 동정은커녕 질릴 대로 질린 얼굴로 응시하다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돈 가지고 나가자.”

“자기야….”

윤치영이 돌은 눈이 된 채 자신을 보든 말든, 희성은 손을 털며 주변을 슥슥 둘러봤다. 그러곤 박건태가 숨은 옷장 뒤를 뒤져 캐리어 하나를 꺼냈다. 캐리어를 턱 바닥에 엎어 둔 희성은 한 방에 캐리어 비밀번호를 맞혀 안을 열었다.

그 광경을 넋이 나간 채 보던 윤치영이 물었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이 새끼 첫사랑 생일.”

희성이 대충 기절한 박건태를 턱짓하며 캐리어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돈 뭉치가 빼곡했고 그 가운데 작은 금고가 하나 있었는데, 그 비밀번호도 한 방에 맞혀 쉽게 열었다. 안에는 두꺼운 장부와 서류, 그리고 오만 원권 뭉치가 빼곡할 정도로 들어차 있었다.

“돈만 빼가자. 금고에 헛짓했을지도 몰라.”

희성이 챙겨 온 가방에 금고 안에 든 돈을 모두 쓸어 담았다. 윤치영은 그 터프하고 총명한 모습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나쁘고 섹시한 강아지가 눈앞에 있었다. 윤치영은 이제 술이라도 취한 듯한 눈으로 의자에 옆으로 기댄 채, 희성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돈을 가방에 묵직하게 챙긴 희성은 마지막으로 박건태가 쓰던 비밀 장부와 각종 서류를 찾아 윤치영의 앞에 탁 놔줬다.

“이건 너 알아서 가지고 놀아.”

“…자기 진짜 섹시하다.”

윤치영은 비밀 장부가 앞에 놓이건 말건 제 말만 했다. 희성도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았는지 다시 뒤돌아서려 할 때였다. 탁, 하고 하얀 손목이 강하게 붙잡혔다.

“강아지… 잠깐 앉아 봐.”

“놔. 나 바빠.”

“나 이제 못 참겠어….”

“놓으라고. 미, 밀지 마!”

윤치영이 옭아매듯 진득하게 희성의 허리를 안아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손으로 뱀처럼 마른 허리를 쓸고 희성의 따듯한 살을 함부로 움켜쥐었다.

이내 윤치영이 희성을 탁자로 밀어 그 위에 앉혀 버렸다. 희성이 나름의 저항을 했는데도 모두 부질없었다. 결국 희성은 다리를 벌린 채 윤치영에게 안기게 됐다. 그 어깨 너머로 돈을 바라보는 표정이 조급해 보였다.

“왜 여기서, 미쳤, 냐고. 흐, 허리, 깨물지 마…!”

스르륵, 하고 윤치영이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희성의 바지를 손쉽게 벗겨 하얀 속살을 드러내게 하고, 허리부터 차근차근 깨물어 살을 타고 내려갔다. 위에서 희성이 늑대 귀가 달린 머리를 밀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진득한 혀는 희성의 매끈한 성기를 살살 핥아 달아오르게 했다.

“으응, 아…!”

결국 무너진 희성은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애무를 받았다. 윤치영은 희성의 성기를 핥으며 작은 가슴을 내키는 대로 어루만지고 기둥이 목구멍에 닿을 때까지 애무했다. 끝내 희성이 입 안에 사정해도, 한참을 입에서 성기를 빼지 않고 기둥을 위아래로 빨았다. 결국 희성이 예민하니 더 자극하지 말라고 힘없이 애원해서야 놔줬다. 그제야 윤치영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입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모든 기력을 소진한 희성은 윤치영의 품에 강아지 모습으로 매달려 나와야만 했다. 돈과 뒷정리는 믿음직한 조직원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 * *

복수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막 부산 바다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오늘따라 춥지 않고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윤치영의 코트 사이로 고개만 내뺀 강아지는 앞발로 대충 수신호를 해서 키 189cm의 남자를 조종했다.

“바다 보고 가자고?”

‘그래.’

윤치영은 순순히 바닷가로 향했다. 박건태가 숨어 있던 달동네에서 계단을 꽤 내려가고, 도로 하나를 건너자 호두의 털 색과 같은 모래사장이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도 없고 고요해 무척 낭만적으로 보였다.

윤치영이 훤칠한 다리로 바닷가로 향하는 동안, 강아지는 점점 떠오르는 해를 보며 감상에 빠져 있었다. 윤치영은 그런 희성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강아지를 모래사장 위에 곱게 내려놨다.

강아지는 근엄한 얼굴로 해가 뜨는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졌다. 고요한 바다와 잔잔하게 밀려드는 파도 소리도 퍽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당당한 강아지의 하얀 가슴 털이 살랑였다.

드디어 복수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를지 몰라도 투견으로 자라난 희성은 역시 복수가 적성에 맞았다. 후련하다 못해 세상을 보는 시선에 뿌연 안개가 걷힌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희성을 괴롭히고 부질없이 자책하게 만들던 놈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쓰레기였다.

거기다 이제 자신은 그런 놈이 무슨 말을 하든 흔들리지 않았다. 우중충한 도박장과 일, 불안, 슬픔만이 전부였던 강아지의 세상이 훨씬 다채로워졌다. 뺨에 스치는 바람도, 제 등을 따듯하게 감싼 윤치영의 손도. 앞발에 닿은 모래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낭만이란 건 마음의 여유가 없는 자신이 누릴 수 없는 사치였는데. 이제 희성은 이 순간을 소중히 할 여유마저 생겼다.

모래사장에 앞발을 꿈지럭대던 희성은 마침 작고 하얀 조개껍데기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무관심하게 지나쳤을 텐데, 이제 복수를 끝내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돼서인지 색다르게 보였다.

예쁜 걸 보니 애인에게 주고 싶어졌다.

강아지는 모래를 앞발로 파헤쳐 입으로 조개껍데기를 꺼내려 했다.

“씁, 지지.”

‘아, 이거 놔 봐!’

희성의 의도도 모르고, 윤치영이 주먹만 한 몸통을 들어 올리며 말렸다. 그간 호두 좀 돌봤다고 자신까지 어린 강아지 취급을 했다. 희성은 성질을 부리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입에는 조개껍데기를 문 채였다. 당장 수상하게 강아지의 입을 살피던 윤치영이 볼품없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왜?”

‘…주웠다.’

다시 땅에 안착한 희성이 물건을 윤치영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작고 하얀 조개껍데기였다. 그 쓸모없는 물건을 보자마자 윤치영이 퍽 간지럽다는 듯 입가를 올려 웃었다.

“자기가 나 주는 거야?”

‘뭘 또 물어.’

강아지가 무심한 척 고개를 돌리며 앞발로 윤치영의 손을 밀었다. 빨리 조개껍데기나 가지라는 듯이. 윤치영은 못 참겠다는 듯 큭큭대며 기쁘게 웃더니, 조개껍데기를 소중하게 살피고 모래를 살살 털었다.

“하얗고 작네. 우리 강아지 닮은 조개껍데기라 더 좋다….”

‘야 이….’

희성은 짜증스레 윤치영을 째려봤다가, 정말 소중하게 조개껍데기를 챙기는 윤치영을 보곤 성질을 죽였다. 아까 박건태의 어마어마한 돈이나 장부를 털 때는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으면서, 조개껍데기를 귀중하게 챙기는 모습이 어여뻤다.

희성은 지금 이 순간 그가 제 곁에 있어서 기뻤다. 이제 희성의 곁에는 억만금보다도 강아지가 준 조개껍데기를 소중히 하는 참하고 잘생긴 애인이 있었다. 희성이 직접 쟁취해 직접 물어 온 반려자였다.

그래서일까, 희성은 자신의 본체가 작은 강아지라는 것이 더는 싫지가 않았다. 윤치영이 한결같이 좋아해 주고, 또 그와 만나게 해 준 자신의 모습 중 하나였다.

찰칵.

그사이 사색에 빠진 강아지를 윤치영이 노을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강아지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째려보는 얼굴도 고스란히 찍혔다. 그것마저 좋은지 윤치영이 미려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오늘따라 들떠 보이는 회색 눈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따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찍지 말까?”

“…….”

강아지가 대답도 귀찮다는 듯 윤치영을 째려봤다. 이렇게 분위기 망칠 거냐고 타박하듯 바라봐도, 그저 사랑스럽게 강아지를 바라보던 윤치영이 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기야.”

‘왜.’

“나 사랑하면 깨물어 줘.”

하여튼 교활했다. 강아지가 깨물 걸 알아채고 먼저 수작을 부렸다. 희성은 까만 눈을 찌푸린 채 윤치영을 위아래로 길게 훑어봤다. 사실 자신이 늑대가 아닌 여우를 만나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매번 이렇게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그 간지러운 행동에 희성은 용기가 났다.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아지는 윤치영이 팔에 걸고 온 자신의 코트를 이리 달라고 잡아끌었다. 윤치영은 강아지를 도와 원하는 대로 찾는 걸 손수 꺼내 줬다.

그리고, 희성의 코트 주머니에서 예쁜 반지 케이스가 나왔다.

“이건….”

반지 케이스를 본 윤치영이 설마 하는 얼굴로 강아지와 케이스를 번갈아 봤다. 강아지는 부끄럽지만 소심하게 짖고, 케이스에 앞발을 올리며 열어 보라는 뜻을 전했다. 그 뜻을 알아챘는지 윤치영이 조심조심 케이스를 열어 봤다.

“강아지….”

한 쌍의 반지를 본 윤치영이 녹아내릴 듯이 감동했다. 왕. 희성은 당당히 그의 약지를 깨물어 줬다. 이곳에 반지를 끼라는 듯이.

윤치영은 쌀알만 한 잇자국이 남은 제 손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멀리 낭만적인 파도 소리와 함께, 강아지가 반지 케이스에 특유의 악필로 정성 들여 써 둔 쪽지가 보였다. 윤치영이 웃음이 터진 채 입술을 깨물면서도, 시원스럽게 뻗은 눈가는 흥분으로 뜨거워졌다.

평생 지켜 줄게. 넌 내 곁에만 있어.

“이렇게 귀여운 고백은 처음이야….”

‘…멋진 게 아니라?’

희성은 의아해졌지만 고백의 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참아 냈다. 그래도 윤치영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해서 뿌듯했다. 그는 눈빛마저 묵묵하게 가라앉은 채 감회에 사로잡힌 듯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윤치영이 자신의 마디 긴 약지에 반지를 꼈다. 햇빛을 받은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며 빛났고, 손안에는 작은 조개껍데기를 함께 쥐고 있었다. 내심 희성은 저 조개껍데기가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좋나,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윤치영이 잔웃음을 터트리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근데 자기 그거 알아?”

‘…왜?’

윤치영은 자신의 품 안에 따끈따끈한 강아지를 끌어 뒀다. 무언가 중요한 걸 보여 주려는지 행동에 망설임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과 함께 강아지 앞에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보여 줬다.

“자기가 먼저 선수 쳤네.”

‘…어라?’

윤치영이 내민 것도 반지 케이스였다. 안에는 희성이 고른 것과 유사한 디자인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윤치영도 자신처럼 그동안 고백을 준비한 것 같았다.

그 마음을 확인해서일까, 희성은 내심 윤치영이 얄미웠던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고백에 조심스러우면서도 급했던 건 윤치영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난 더 멋진 이벤트 해 줘야겠다.”

왕.

윤치영은 기회를 놓쳐도 아쉽지 않은지 강아지의 머리에 입을 맞춰 주고 있었다. 대신 강아지의 작은 발에나마 반지를 걸어 주곤 모래사장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의 반려와 집에 갈 시간이었다.

솜털 같은 제 몸처럼, 홀가분함만을 안은 희성은 따듯한 윤치영의 품 안에 안착했다. 그의 코트 깃 안에 들어간 희성은 행복하게 몸을 웅크려 누웠다. 다시 제 턱을 살살 만지는 윤치영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뜻만을 담아서.

〈강아지는 건드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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