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길들여진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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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젠탈 성의 성당 문이 공식적으로 열린 건 3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쿵.
수아의 등 뒤에서 육중한 문이 닫혔다. 그녀를 한입에 삼킨 뱀이 아가리를 닫은 것이다.
수아는 지난번과 달리 기꺼이 그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뱀의 배 속을 닮은 이 음산한 영역에 절대 발 들이고 싶지 않았던 2년 전 여름의 정수아는 죽었다.
정수아도 뱀이다. 먹잇감에게 부지불식간에 접근해 목을 휘감아 조이고 혈관에 독니를 박아 넣는다. 당한 걸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중독될 대로 된 저 남자는 제가 당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수아는 시선을 흘끔 들어 붉은 길 끝에 선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검은 턱시도 차림으로 제단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던 찰나처럼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짐승의 기운이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점잖아 보이는 남자의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
일부러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더니 남자가 가슴팍을 크게 부풀리며 가지런히 모아두었던 손을 풀었다. 신부가 도망치면 저 손으로 단숨에 휘어잡으려는 듯이.
수아는 웃음을 참고서 마지못한 척하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얇은 여름 웨딩드레스 자락이 사각사각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정면의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를 지켜보던 하객들의 입이 벌어졌다.
수아의 머리를 장식한 티아라와 귀에서 길게 늘어져 흔들리는 귀걸이, 그리고 목을 휘감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건 모두 죽은 잉그리드가 아끼던 보석과 밀라와의 결혼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던 웨딩 주얼리를 해체해 수아의 취향에 맞춰 새로 제작한 물건이었다.
언젠가 몇 대 폰 알브레히트 부인의 웨딩 주얼리로 보석 박물관에 전시된다던가. 그 아래엔 수아의 이름이 적힐 것이다.
“부부로서 평생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결혼식을 주재하는 신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가운데, 마지막 말은 흘러나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랑? 그 말 평생 못 듣게 해줄 거야. 내 사랑을 목줄로 삼은 대가야.
“이제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 대한 서약과 맹세의 증표로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남자가 먼저 수아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웠다.
족쇄는 한 쌍이다. 수아는 족쇄의 반대쪽을 집어 남자의 손에 끼우기 시작했다.
넌 내 졸작이야!
문득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 필립의 미간이 깊이 일그러졌다. 환청은 사라지지 않고 온 성당에 메아리치는 것도 모자라 밀라가 이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퍼부은 악담도 함께 뒤엉켜 울리기 시작했다.
개를 고르랬더니 뱀을 골랐어.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멍청이.
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뱀처럼 미끄러지며 그의 약지에 반지, 아니, 족쇄를 채우는 순간에야 그 말이 뇌리를 예리하게 관통했다.
단단히 잘못됐다. 그는 지금 원래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벌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이 여자야말로 뱀일지도.
시선을 들어 여자를 노려보던 찰나였다. 눈이 마주쳤다. 슬픔에 푹 젖은 갈색 눈망울에는 그를 향한 두려움과 반항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자를 처음으로 범했던 그날 밤처럼.
우스웠다.
뱀이라니. 여자는 암캐였다. 지금은 얌전히 복종하나 언젠가 그가 한눈을 파는 날 목줄을 끊고 도망쳐버릴 되바라진 암캐.
뱀은 그였다. 배 속에 똬리를 튼 사슬 뱀이 흥분해 잘그락잘그락 몸을 뒤틀자 필립은 신부의 허락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자를 끌어당겨 키스해버렸다.
절박한 키스가 시작된 찰나 여자의 눈에서 그가 보았던 감정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걸 필립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 속엔 오만한 개를 끝내 길들인 주인의 환희뿐이었다.
오직 나만이 길들인 개.
오직 나의 반항만을 명령처럼 신봉할 나의 충직한 개새끼.
연출부터 각본, 주연까지. 어느 무명 발레리나의 위험한 극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