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그래도 사격부 수속이 앞 순서라 다행이지. 우리 어디서 모이랬나?”
정연은 조금 지친 기색을 내비치며 먼저 걸음을 앞섰다. 달랑거리는 그녀의 포니테일을 보며 이현이 물었다.
“우리 사진 찍는 건 다 끝났나?”
“응, 아마? 단체 사진 찍었고, 수속은 하는 중이고, 이제 게이트 들어갈 때 저 본부 임원분들 응원길 사진만 찍히면 되는데… 그건 뒤 순서 팀이 하는 거잖아.”
“그럼 그냥 가면 돼. 모이라는 지시 없었어.”
아무 생각이 없다는 이현의 말은 정확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올림픽 출국길에서, 이현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했을 때 입꼬리를 들어 올렸고, 조금은 초점 나간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파이팅 포즈를 취해달라는 기자들 앞에서 선뜻 주먹을 쥐어 보이며 열의를 표하기도 했다. 기계처럼 뚝딱뚝딱 행동하다가, 더 이상의 사진 촬영이 없다는 얘기를 정연에게 들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눈에 생기가 조금씩 돌아왔다. 아주 조금씩.
재민과 정연은 그런 이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의 팔을 질질 끈 채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하나였다. 정연은 느긋한, 어쩌면 조금은 게으른 이현을 재촉하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안 걸을래? 얼른 수속 마치고 몸 풀어야지, 좆같은 비행기 좌석에서 열 몇 시간 존버하려면.”
*
사흘이면 장거리 비행의 여독을 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건 두 번 다신 못 타. 그건….”
사실 다른 때보다 좀 더 고됐던 건 부정할 수 없다. 이현은 뻑뻑한 뒷목을 주물렀다. 아직까지도 긴 비행의 고단함이 쌓여 있는 듯했다. 무려 사흘이 지났는데도.
이건 모두 체육회에서 내세운 어불성설 타결안 때문이었다. 이코노미에 익숙하지 않은 이현의 몸뚱어리 때문이기도 했고.
형평성 보장을 위해 대한체육회가 실시한 타결책, 그 답은 전세기였다.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의 이동은 언제나 체육계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종목을 불문하고 선수단을 모두 비즈니스에 태울 만한 여력을 갖춘 협회는 극소수였다. 선수들은 사비를 들여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를 해야만 했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하는 선수가 대부분이었다.
“유도부, 그 새끼들 일부러 전세기 안 타려고 먼저 갔나?”
사격부는 이현의 역량과 자비 덕분에 모두가 비즈니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같은 비행기에 타는 짝꿍 종목에서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격뿐만 아니라 사비를 들여 업그레이드를 하는 몇몇 개별 선수들을 향해서도 뒷말이 나오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이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욕을 처먹는 건 체육회와 협회 측이었고.
그래서 대한체육회가 제시한 타결안은 전세기였다. 선수단 본단을 모두 태우고, 체급을 우선순위로 넓은 좌석을 배정했다.
지난 동계에서는 꽤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게 문제였다. 동계와 하계는 종목의 차이가 너무 컸다. 동계에서는 80kg 이상의 선수를 찾기 어렵지만, 하계는….
역도, 레슬링, 수영, 농구, 권투에 럭비, 그리고.
“유도…, 아, 또 잡생각.”
이현은 고개를 크게 털어내고는, 일정표를 다시 한번 차분히 읽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내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이현의 얕은 집중을 손쉽게 깨트렸다. 밤 열한 시, 이 시간에 저를 찾아올 사람이라면 정연이나 재민, 또는 매우 높은 확률로 총감독뿐이었다.
무시할까. 문손잡이를 쥔 이현의 손이 잠시 멈칫했으나 그는 짧은 한숨을 토하며 문을 열었다. 매우 높은 확률은 역시나 들어맞았다.
“야 이놈아, 이 시간에 왜 안 자? 컨디션 관리 안 해?”
“…감독님이 오셨잖습니까.”
이현은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피곤함이 잔뜩 묻은 손길로 쓸어 넘겼다. 잠이 잘 오지 않았을 뿐이지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벨 안 누르고 노크했잖냐. 노크 소리 정도는 안 들릴 만큼 푹 자야지, 수백 번도 더 말하지만, 숙면도 체력 관리다. 컨디션 관리해야지.”
“네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전화로 하셔도 됐을 텐데.”
“너 잘 자는지 확인하러 왔다니까. 내 밥줄이 네 숙면에 달렸는데 내가 매번 이놈의 올림픽 앞두고….”
감독은 괜히 이현을 놀려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에게 은근슬쩍 눈짓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감독의 행차 이유를 훤히 드러냈다.
개막식까지는 이틀, 이현의 경기까지는 이 주가 남아 있었다. 경기 얘기를 하러 이 밤에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니, 그러면 목적은 뻔했다. 일정표에 쓰여 있는 기수 행진 연습날은 내일이었다.
그거 말고는 친히 총감독이 행차해 이현의 기분을 살피러 올 만한 일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 헛기침을 한 감독의 입에서 느릿느릿 말이 새어 나왔다.
“잡담은 그만하고….”
이현은 지금껏 잡담은 죄다 감독님이 하셨는데요, 따위의 말은 삼켰다. 잡담이 더 길어지기만 할 것이다.
“이현아, 그 뭐냐, 기수 관련해서 인터뷰 딴다는데… 어떠냐. 내일 기수 연습 끝나고. 말이 연습이지, 10분 안팎밖에 안 되는 국기 위치 설명 쪼가리 듣고 10분 정도 인터뷰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 고급스럽지 않은 탁자를 투박한 엄지로 문지르던 감독은 고개를 틀어 이현의 반응을 살폈다. 미디어 노출을 전부 거절하기 위해 수락한 기수 노릇이었는데, 그 기수 노릇 때문에 인터뷰를 해야 한다니. 웃기는 소리다. 이현은 누가 봐도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요?”
“나도 갑자기 전달받은 거다, 이놈아. 권지완이 그놈이랑 너를 내세운 것부터 이번에는 체육회가 먹자판을 벌였다는 건 너도 아는 사실이잖냐.”
감독은 곤란한 듯 제 빈 머리를 벅벅 닦아내었다. 그가 곤란해하는 것조차 실상 이현을 향한 배려였다.
죄인은 할 말이 없다. 지은 죄가 꽤 많은 이현은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었으나….
“그 인터뷰 안 하려고 기수 수용한 건데요. 인터뷰하면 권지완…이랑 같이 할 거 아닙니까? 싫습니다.”
잠시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 조금 주저했을 뿐, 이현은 매우 단호했다. 사실 이현은 늘 단호한 편이었고.
“아이고, 예전에는 군말 없이 말만 잘 듣더니, 진짜 이놈이 어느 순간부터 확 변해서는….”
감독은 혀를 차며 이현을 흘겼으나, 그 퉁명스러운 어투와 달리 금세 단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으리라.
“그래, 어차피 너 경기 앞두고 체육회도 강하게는 못 나왔어. 네가 싫으면 할 필요 없지. 경기가 우선이니까.”
“….”
“아니, 근데 그렇게 권지완이가 싫으냐? 네가 출국길에 그놈이랑 같이 얼굴 팔리는 건 죽어도 싫다고 해서 기수로 바꾼 거잖냐. 너희 둘, 아주 지지고 볶고 사이좋아졌었던 거 아니었냐? 다시 틀어졌어?”
“….”
“아니지. 또 그쪽에선 곧이곧대로 네 말을 들어주니…. 아님, 개막식 전에 권지완이 보면 경기를 말아먹기라도 할 것 같어? 이번에 유독 왜 그래? 아주 기를 쓰고 권지완이를 안 보려고.”
한숨을 잔뜩 섞어 중얼거리던 감독은 이내 백사 같은 눈빛으로 이현을 쏘아보았다. 이현의 머릿속을 열고 생각을 읽어내려는 듯 침침한 눈을 가늘게 뜬 채 흐음, 따위의 소리를 연신 내었다.
이현은 일말의 당황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것도 아니었다. 권지완에게 얘기했듯, 디데이의 막이 오를 때까진 절대 권지완을 볼 수 없었다. 보는 순간 흔들릴 것이다. 시선을 뺏기고 숨을 가다듬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
“맞아요. 이젠 제가 권지완한테 많이 흔들려서요. 근데 흔들리면 안 되거든요.”
“뭐?”
“인터뷰 안 하니까 가세요, 감독님. 저 잘 겁니다.”
*
감독의 말마따나 기수 연습은 말이 연습일 뿐이지 정말 별것 아니었다. 각국의 대표들은 대강의 설명을 들으러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고, 그마저도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중구난방으로 말이 되풀이되었다.
이현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되풀이되며 조금씩 길어지는 설명 속에서도, 이현은 오직 설명하는 임원만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흩어지는 순간 제가 지완을 찾을 것이란 사실을 이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보지 않는 한 지완이 제 앞에 나타날 일이 없다는 것도 이현은 알고 있었다. 권지완은 채이현의 말에 반하지 않을 것이다.
“…뭐야?”
연습 같지 않은 연습의 시간을 끝내고, 혹시라도 지완과 마주칠까 다급히 걸음을 옮겨 방으로 돌아왔으나, 주인 없는 방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아, 또? 이현은 크게 문을 열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침입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재민아, 너 왜 자꾸 내 방에 와?”.
“하하, 형 왔어요?”
주인 없는 방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재민은 곰살맞게 미소 지으며 이현을 환영했다. 이현은 그 곰 같은 덩치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고개를 까딱였다.
대답. 이현의 짤막한 되물음에 재민이 다시 웃음을 흩트렸다.
“형-. 형 방이 그나마 깨끗하단 말이에요.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요.”
“네 방 온수 안 나와?”
“내 방은 두 명이 쓰잖아요. 한 명이 씻고 나오면 온수가 끊기더라고요.”
재민은 팔을 모으며 덜덜 떠는 시늉을 했다. 이 여름에 무슨…. 굳이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사실, 재민이 있으나 없으나 이현은 별 상관이 없기도 했고.
일반 대중들의 생각만큼 올림픽 선수 숙소는 좋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열악한 쪽에 가까웠다. 올림픽의 규모와 그에 들어가는 예산을 고려하면 이해 가능한 정도긴 하나, 시설 하나만큼은 최첨단을 내세우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불만스러운 수준이었다.
물론 이현은 욕을 하지 않았다. 욕은 주로 정연이 했다.
“덕분에 잘 씻었어요, 형.”
“아니 근데 키는 어디서 났어?”
“형이 열어두고 갔던데요?”
“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며 재민이 이현 쪽으로 다가섰다. 재민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이현을 향해, 재민은 문 옆에 걸린 키를 들어 보였다.
“봐요.”
“….”
“형도 기수 서려니까 떨려요? 정신없나 봐요. 하하.”
“….”
분명 과녁 보듯, 임원에게 시선을 꽂았다. 과녁과 지완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꽤나 똑똑하고 단호하게 행동하고 있다, 라고 감히 생각했건만…, 아주 그냥 혼자 지랄하는 중이었다.
이현은 그대로 걸려 있는 키를 멍하니 바라보다 가볍게 자조를 터트렸다. 오히려 스스로를 한 번 비웃고 나니 속이 깔끔히 비워지는 기분이다.
“아 참, 형, 지완 선배 왔었어요.”
그리고 재민의 말 한마디에 이현은 다시 한번 자신의 자만을 후회해야 했다. 속이 깔끔히 비워지기는, 시발.
“…언제?”
“조금 전에요. 형이 기수 연습 받으러 나가고 거의 바로요. 이 앞에서 마주쳤어요.”
“….”
“저는 지완 선배가 형이랑 같이 기수 연습 가려고 온 줄 알고, 형 먼저 갔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근데 그건 이미 알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냥 지나가던 길이셨나?”
유도부 숙소는 반대 방향 아녜요? 재민은 그새 입에 프로틴 바를 뜯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드라이기 소리가 중간중간 재민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나 이현에게 그런 방해는 중요치 않았다.
이현은 또다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저를 향한 비웃음이 아니라 고약한 권지완을 향한 미소였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난 것 같았어요. 생각해보니까 욕도… 하신 거 같고…. 아니, 근데 또 미소를 지으신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