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그러나 지완의 다음 말은 결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현은 선잠에서 단박에 깨어나야만 했다.
“네 입에서 그 이름들이 나올 때마다 거슬려.”
“…뭐?”
“거슬리기보단 좆같지. 그게 김정연이든, 이재민이든.”
“정연이랑 재민이…?”
“그래. 그 둘.”
“아니, 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네 발밑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야. 난 쉽게 물을 수도 없을 만큼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난데없는 지완의 말에, 이현은 멀뚱멀뚱 두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이현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너 지금 쉽게 물어보고 있잖아?”
“안 쉬워. 그런데 넌 진천으로 곧 돌아갈 거고… 팀에 합류해야겠지. 그리고 이재민과 김정연은 네 옆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정연이랑 재민이는 다르지. 알잖아, 너도.”
“글쎄. 뭐가 다르지….”
지완은 턱을 까딱이며 말끝을 흐렸다. 지완은 가벼운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넌 내가 너처럼 재민이와 정연이와의 관계를 끊어내길 바라? 그걸 원하냐?”
“….”
“야, 난 그럴 생각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이현의 음성에는 당황이 묻어나왔지만, 대답은 단호했다. 길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럴 생각 없다. 지체 없는 이현의 대답에 지완은 심심하게 웃어 보였다.
“맞아. 요구할 생각도 없어.”
“….”
“그 정도로 너랑 내 위치는 명백하다는 것뿐이야.”
“원망해도 소용없는 문제야.”
지완은 담담했다. 이현은 공연히 타는 목에 남은 커피를 집어 들었다. 들이켜기도 전에 헛기침이 터져 나와 마실 수는 없었지만.
“원망? 고백인데.”
“….”
“주기적으로 해야 네가 안 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앞으로 한동안 또 못 볼 테니까.”
“….”
“네가 신경을 쓴다면 더 좋고.”
당혹스러운 말을 마친 지완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놀랄 거 없잖아. 마저 마셔. 굳어 있던 표정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태연한 미소가 대신 자리했다. 이현은 입에 고인 숨을 내뱉었다.
벌써 다 왔네. 아쉽게. 시간은 벌써 아침을 향해가고 있었음에도 지완은 유감스럽게 중얼거렸고, 이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권지완의 고백이 일반적인 형용으로 표현될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이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포장할 만큼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그건 이현도 다를 바 없다.
그냥 즐기라니까.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현을 향해, 지완이 장난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택시 불러줄게. 타고 가.”
“네 차는?”
“장기 주차하면 되겠지.”
“…그래. 사실 지금 몸 상태가… 많이 고장 난 것 같으니까.”
이현은 잠시 가라앉았던 표정을 풀며 얼굴을 냅다 찡그렸다. 과장은 아니었다. 운전은 무리였다.
“이현아, 후회해?”
많이 힘들어? 따위로 지완은 묻지 않았다. 후회하냐는, 그의 솔직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질문에 이현은 심심하게 대답했다. 조금 무심하게.
“안 해.”
진실로 후회 같은 건 없었다. 웃기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도리어 후련한 기분이 든다. 전혀 낭만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감상이지만 나쁘지 않다.
이제 남은 건 훈련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이현을 잠자코 바라보다, 지완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이내 차는 공항의 장기 주차 타워에 들어섰고, 이현은 시트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담담하다 못해 시원찮은 말투로 이현이 말을 꺼냈다.
“아무튼, 야, 잘해.”
“….”
“야?”
“어.”
“왜 들리면서 대답이 없어.”
“대답을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적절한 게 안 떠올라서?”
“그냥 ‘너도 잘해.’ 같은 거 하면 되잖아.”
“난 못하는 걸 못 하고, 넌 잘할 테니까.”
지완은 어깨를 으쓱였다. 와, 씨발. 이거 진짜 안 되겠는데. 지완은 태연했고, 이현은 몸서리쳤다.
“그래도… 그래. 긴장은 좀 하는 게 좋겠지.”
“….”
“이번에 난 메달 두 개를 목에 걸 거고, 혼성전이 폐지되지 않는 한 올림픽에서 내가 따내는 메달은 앞으로 두 개가 될 테니까.”
“….”
“50m 복사가 폐지된 이상 채이현이 나갈 종목은 삼자세 하나뿐이고?”
“…아주 절호의 기회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지완은 얄밉게 말을 이었다. 지완은 이현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면서도 타고난 거만함을 도통 숨기지 못했다. 자신 있는 자만이고 재수 없는 사실이다.
하여튼 여러모로 모순적인 새끼. 이현은 지완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볼에 닿는 이현의 손을 잡아챈 지완은 그 손끝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이현은 잠자코 손을 내주었다. 실은 그 입맞춤이 지완답지 않게 너무 조심스럽고 가냘파, 닿은 것이 입술인지조차 일순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야, 사격도 이번부터 혼성전 생겼어. 에어라이플, 에어피스톨, 트랩으로.”
“알고 있어. 근데 넌 참가 안 하잖아. 10m 위주고.”
“앞으로는 모르지. 10m든 뭐든… 내가 못하는 건 트랩밖에 없어. 어쩌면 트랩까지 잘할 수도 있고.”
“하하. 누가 누구보고 겸손을 배우라는 건지….”
“재민이한테는 비밀로 해. 엄청 재수 없어 할 거야.”
“이현아, 난 그 새끼 이름 나오는 거 달갑지 않다니까.”
금세 얼굴을 굳히는 지완의 모습에 이현은 순수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완의 정색은 진지하지 않았다. 지완은 입을 맞추던 이현의 손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이현은 손을 빼내며 소성을 가라앉혔다. 차는 빈자리를 찾았고, 지완이 주차를 마무리하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차 안을 메웠다. 질퍽하고 음탕했던 긴 밤에 미련이 남을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선뜻 먼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그리 다정한 투는 아니었다. 지완의 말은 건조했다. 그게 어울렸고, 그게 익숙했다.
“하지 마. 그냥 올림픽에서 봐.”
“하하. 디데이까지?”
“어. 분명히 말했다.”
“….”
“야, 왜 그렇게 봐.”
“먹고 버리라고 말한 건 나지만, 네가 그대로 이행할 줄은 몰랐는데.”
지완은 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그는 그리 억울해 보이진 않았으나….
이현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시선이 도달한 곳은 제 손이었다. 라이플을 쥐듯 익숙한 그립을 잡았다. 확고한 음성이 드리웠다.
“뭘 먹고 버려. 내가 널 언제 먹었다고. 먹어도 네가 날 먹었지.”
“….”
“…집중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너 말고 내가.”
“네가?”
“어, 내가. 내 사격을 방해하는 게 네 소원이라며. 네 소원 이루어진 지 오랜데. 너 때문에 총질이 제대로 안 됐던 적은 허다했거든. 사실… 딱히 방해라는 게, 너밖에 없었지.”
웃으라고 하는 소린데, 안 웃네. 싱겁게 말을 덧붙인 이현은 길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넌 나한테 제일 중요한 게 사격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난 잘 모르겠다.”
“….”
“뭐가 됐든, 계속 라이플을 들게 되는 데에는 네 이유가 커. 말했잖아.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결국 나한테 사격이나 너나 크게 다를 거 없지 않을까… 싶고. 그게 그렇게 큰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완의 굳게 닫힌 입꼬리가 작게 떨렸다. 지완을 지배하는 생경한 기분은 불안이나 두려움, 초조함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완 본인조차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이번에도 이현이 지완의 목을 힘껏 옥죄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현이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지완은 나락까지 추락하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기쁘고 불길한 징조였다. 그 나락은 어디일까.
“훈련에 집중 좀 못 하는 것도,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야. 근데 내가 너한테 책임 의식을 느끼고 있나 봐. 대충 하고 싶지는 않아. 네가 말하는 그 목적이 별 볼 일 없어지는 느낌이랄까.”
아주 오래전부터 지완이 준비했을 그곳에서, 과녁에 투투탄을 박아넣고 또 박아넣으며 정리한 생각이었다.
“내가 지금 오버하는 거 맞고…. 그래도 일단, 난 그래. 널 더 불쌍하게 만들면 안 될 것 같거든.”
이현이 고개 들어 마주한 지완의 두 눈은 고요한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숨죽인 지완의 모습이 이현의 가슴팍을 간질였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듣고 싶던 말 아니었어? 넌 항상 내 탓 하잖아. 네 인생에 끼어든 책임을 지라며.”
“….”
“어려우면 그냥 이것도 고백으로 쳐 둬.”
맑은 웃음과 함께 이현은 툭 말을 던졌다.
숨을 머금은 지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현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 것처럼 그저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작게 입술을 떨었다가, 또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부동 상태로 있던 지완은 한참이 지나서야 찬찬히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손끝에도 긴장이 서려 있었다. 뭐가 그를 이렇게까지 굳게 만들었을까.
이현은 차분히 벨트를 풀었다. 버려진 햄버거 포장지와 비어버린 커피잔도 잊지 않았다. 가뿐한 마음으로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그런 이현의 손을 지완이 붙잡았다.
항상 서늘했던 지완의 손에 조금은 열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착각일 것이다. 아님 정말로 그에게 술기운이 남아 있거나.
“이현아, 널 좋아한다는 말은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