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정말 그걸로 되겠어? 응. 지금은 햄버거 말고 아무것도 안 끌려. 지완의 물음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건넸다.
아마 지완은 지난 며칠 제대로 된 수면조차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체력의 한계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지완의 얼굴에도 농도 짙은 피곤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봐. 그러게 내가 운전한다니까.”
“그 몸으로?”
“난 원한다면 더 쉴 수 있으니까. 넌 가면 선발전이고… 네 마음대로 한국 온 거, 그것도 질책받을 거고.”
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실상 지완보다 더한 피로를 감당해야 하는 건 당연히 이현이었다.
햄버거를 오물대면서도 눈은 자꾸 감겼고,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은 것임에도 찌르르한 고통이 허리를 괴롭혔다. 아직도 허벅지가 덜덜 떨리는 듯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지완이 이현의 몸 상태를 모를 리 없다.
“안 간다고 문제 될 것도 아니었어.”
“그건 네 입장이지. 유협이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유협이 이러다 지원을 끊기라도 하면 어떡하게?”
“하하. 날? 협회장이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하진 않을 거 같은데.”
공항으로 곧게 뻗은 새벽의 도로는 한적하다 못해 텅 비어 있었다. 지완은 이현이 내민 커피를 한 모금 받아 마시고, 고개를 찬찬히 돌리며 뻐근한 근육을 풀어냈다.
“그냥 택시를 타자니까. 뭘 또 굳이 직접 운전을 해?”
“채이현의 배웅을…. 난 기회 잘 안 놓쳐.”
“야, 택시 정도는 같이 타줄 수 있었어.”
“이 시간을 택시 기사와 함께 하고 싶진 않고.”
“…고생도 사서 한다.”
“응, 덕분에. 즐기는 편이야.”
지완은 흐리게 웃었다. 화려한 이목구비는 얼굴의 작은 변화도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눈길을 끄는 미색이다.
예쁘긴 더럽게 예쁘다. 이현은 한 입을 더 베어 물며 생각했다. 비릿한 웃음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마치 그의 전유물인 것처럼.
“원래 어젯밤 비행기였다며. 몇 시간만 일찍 출발했으면 탈 수 있었잖아. 넌 잠도 안 잤으면서 뭐 하다가 시간을 놓쳐?”
“딱히 뭘 하진 않았고, 자는 채이현 구경을 했지.”
“…넌 꼭 그러더라. 볼 게 있냐?”
“자꾸 듣고 싶은 거야? 구경할 만하다고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차라리 그냥 깨우지.”
“그건 또 싫고.”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이현은 영종대교 옆으로 펼쳐진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이현의 손에 들려 있던 햄버거 포장지는 어느새 지완이 가로채 콘솔박스로 처박은 상태였다. 빈손을 자각한 이현은 멋쩍게 입술을 축였다.
차에 술 냄새가 밴다며 빈정대던 권지완이 이제는 낯선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권지완 차에서 쫓겨난 적도 있는데…. 도로에 버려졌던 그 새벽의 공기가 다시금 불어오는 것 같았다. 억울함이나 씁쓸함은 아니었다. 변해버린 상황에 대한 이질적인 감회였다.
변화의 시작은 대체 어디서부터였을까? 권지완과 살을 맞대고,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현아, 뭘 그렇게 봐.”
잠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이현을 향해 지완이 물었다. 듣기 좋은 지완의 목소리가 이현의 사색을 몰아냈다.
“아… 바다. 오랜만이라.”
“….”
“저번에 바다 갔을 때 생각나네. 나쁘지 않았는데. 너 취한 것도 보고.”
“이번에도 봤잖아.”
“그러고 보니까, 그땐 너 바로 잠들었잖아. 연기한 건 아니지?”
“하하. 그게 원래의 나야. 그 뒤로는 노력이고.”
“그게 노력으로 되나….”
“너랑 섹스할 생각만 해. 그럼 버텨져.”
지완은 우스운 농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건 또 무슨 시답잖은 농이냐 물으면 뻔뻔한 얼굴로 농이 아닌 진심이라 할 테지만.
사람들은 모르겠지. 권지완이 꽤 속없고 한심한 새끼라는 걸. 이 새끼가 이런 건 나만 알겠지. 그렇다고 억울한가? 그건 아니었다. 이현은 홀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이현을 보며 지완은 짓궂은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 여전히 피로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이현의 귀를 듣기 좋게 간질였다.
“또 가. 이현아, 그땐 네가 원하는 대로 술 마시고 잠들어줄게.”
“바다를?”
“어디든.”
“제안이야?”
“부탁인데.”
“….”
“하하. 이것도 자꾸 듣고 싶어서 묻는 거야?”
지완은 스스럼없이 가볍게 웃었다. 그가 굴복과 순종의 태도를 스스럼없이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현은 머쓱히 제 목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올림픽이나 집중해. 이게 빠져서 놀러 갈 생각부터 하고 있어…. 이현은 일부러 더 무심히 대답했다.
“…그나저나 그럼 올림픽까지 계속 미국에 있는 거지?”
“그렇겠지. 굳이 돌아와서 출국길에 사진 찍히는 수고는 사양하고 싶고.”
단 한 번도 선수단 본단으로 출국길에 나선 적 없는 주제에, 지완은 무척 성가신 일인 양 어렴풋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수단 본단으로서 찍히는 출국길 사진에도 스폰서 수십억이 달렸다. 이현은 짧게 혀를 찼다. 스폰서의 입장이나 유협의 재정을 걱정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지완의 평판을 우려한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아쉬움이 이는 것을 이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인정한다. 몸은 고될 대로 고되지만, 집에 돌아가서도 왜인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에 흔들릴 이현도 아니었다. 무엇이 우선인지 이현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혹시 그게 진짜 사실이야? 권지완, 정유진 미국 비밀 결혼 찌라시? 그럼 진짜 대박인데. 넌 뭐 들은 거 없어? 아님 이번에도 그냥 출국길에 얼굴 비추기 싫어서 그러나.’
그러나…. 무심코 정연의 말을 떠올린 이현은 입에 맴도는 텁텁한 맛을 지우고자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안타깝게도 식은 커피는 예상보다 더 썼다.
그리고 이현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입을 열었다. 본인이 스스로에게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야, 권지완.”
“응.”
“난 구질구질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거 싫어. 괜히 혼자 신경 쓰는 것도 싫고.”
“….”
“그래서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오버하지 말고 들어.”
“그래, 뭐든.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길까.”
“너 정유진 씨랑 미국에서 만났냐?”
서론이 길다는 지완의 말끝을 이현은 고민 없이 덥석 물었다. 주저는 일순간뿐이었다.
순간 핸들을 쥐고 있던 지완의 손등 위로는 힘줄이 바짝 섰고, 지완은 곧바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발에 힘이 들어간 것인지 차는 속도를 높였다. 지완은 흥미로운 얼굴로 이현을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는 지완을 퍽 언짢게 바라보는 이현이었다. 만났냐고 안 만났냐고. 이현은 재차 되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덤덤해서, 오히려 지완은 제가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현은 지완이 듣고 싶던 말 그 이상을 매번 주저 없이 내뱉곤 했다. 채이현은 나를 순식간에 아주 병신으로 만들지. 지완은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웃음을 갈무리하느라 답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덕분에 이현은 뚱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지완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안 만났어.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연락은 했지만 아주 짧았고.”
지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의 답변을 전했다. 이현은 제 볼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너랑 비밀 결혼식 올린다는 기사까지 떴다는데.”
“하하. 이런. 결혼? 나랑 정유진이? 정유진이 뭐가 아쉬워서 결혼을 해.”
“그건… 또 그렇지.”
“여자 배우는 기자들의 먹잇감이니까. 피곤할 거야, 정유진도.”
“….”
“물론 난 지금 네 덕분에 피곤이 좀 가셨고.”
지완은 쿡쿡대며 핸들을 꺾었다. 어느새 멀리서 공항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현은 쩝 입술을 적시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됐고. 그런 찌라시에 잠시나마 신경을 썼다는 사실, 그런 건 의외로 이현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창피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뱉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그래? 그런 기사가 떴다고.”
“아, 정연이가.”
“…김정연?”
“내 주변에 정연이는 김정연밖에 없어. 너한테 전화 오기 직전에 통화했거든.”
이현은 시트에 몸을 푹 뉘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그나저나 정연이랑 재민이는…. 만나면 제대로 사과해야지. 걱정 많이 했을 거야.”
이현의 입에서 정연과 재민의 이름이 나오자, 지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재민이랑 정연이는 이번 혼성에 선발될 것 같은데…. 이현의 주절거림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지완은 다시금 자신의 열위를 자각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전력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지완의 입엔 쓴맛이 돌았다.
지완은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툭, 툭. 일정한 박자의 두드림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현아.”
사뭇 길었던 정적을 깨고 지완이 이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음성에는 익숙한 짜증과 낯선 불만이 묻어 나왔다. 불만인지 불안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이현은 다시금 쏟아지는 졸음을 힘겹게 외면하는 중이었다. 졸린 눈으로 지완을 흘기며 간신히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