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하하, 미친 새끼….”
“너한테도 기쁜 소식인가 봐?”
‘종종 좆같을 때가 있어, 이현아. 네가 총질과 한 몸인 것처럼 굴 때면.’
‘아마 질투인 것 같은데.’
비슷한 투로, 비슷한 말을 한다. 한결같이 이상한 곳에서 솔직하게 구는 점을 칭찬이라도 해야 할까. 절로 터지는 웃음에 볼 근육이 작게 움찔거렸다. 온몸 구석구석, 심지어 양 볼마저도 근육이 수축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현은 나른한 숨을 들이쉬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몽롱함이 아직 완전히 가시진 않았고, 덕분에 의미 없는 웃음이 연신 호흡 사이를 장식했다.
“네가 승부욕을 보이는 게 어이없잖아. 내 경기, 총질, 사격, 훈련… 뭐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형체도 없는 거에 대고 뭐 하는 짓인지.”
새삼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는 듯하다. 낮을 지운 긴긴 밤 동안 말보다 몸을 더 섞었고, 말이라곤 숨을 헐떡이며 권지완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짖는 것이 전부였다. 완성되지 못하고 신음으로 흩어졌던 지난밤의 문장들 대신 이현은 사뭇 가벼운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또 있냐? 경기, 사격, 그런 거 말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또 뭐가 있나 새삼 궁금해지는데.”
“이현아,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아마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니까.”
이현은 몸을 움직여 옆으로 돌아누웠고, 지완은 그런 이현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지완이 미약한 등을 조금 더 밝히자, 더욱 환한 빛이 방 안의 어둠을 몰아냈다. 지완은 바람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너. 채이현한테는 채이현이 중요하지.”
“…그건 좀 애매해. 그리고 또?”
“….”
“없어?”
“글쎄… 채 이사님 정도?”
잠시 침묵하던 지완은 가볍게 대답을 흘렸다. 어딘가 기시감을 주는 묘한 모습에 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밝아진 시야는 점점 더 넓어져 하나둘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현은 공연히 말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몇 시야?”
“새벽 두 시 반.”
“지금…. 오늘이 그럼 일요일인가? 하룻밤은 훌쩍 지났을 거 아니야.”
지완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아닐걸, 턱을 괸 채 뻐끔대는 작태가 사뭇 심술 맞다.
이현은 게슴츠레한 눈에 힘을 주며, 침대를 이리저리 더듬거렸다. 넓은 침대 위, 가까스로 닿은 핸드폰은 길게 이어졌던 밤을 증명했다. 깔끔하게 방전됐다. 몇 번 전원 버튼을 꾹꾹 눌러대다 대강 던져두었다. 한껏 갈라진 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새어 나왔다.
“월요일?”
“글쎄.”
“…설마.”
“….”
“야…. 설마 화요일이야? 아니지?”
이번에도 지완은 말없이 물을 건넬 따름이었고, 덕분에 이현의 입은 서서히 벌어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 무성의 경악이 점차 이현을 지배했다.
건조할 정도로 태연한 지완의 그 두 눈이 이현의 현실 감각을 아주 잠깐 앗아갔으나, 자각은 금세 돌아왔다.
“하하. 아니….”
“….”
“와. 우리 진짜 미쳤네.”
이현은 참담한 심경으로 제 눈을 가렸다. 덧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작금의 현실에 아뜩한 이현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완에게서도 천연스러운 소성이 새어 나왔다. 작은 소성은 조금씩 커져 갔고, 이현의 헛웃음과 달리 지완의 것은 나름 진실되어 보였다.
살짝 벌린 손가락 사이로 이현이 지완을 흘겼다. 지완은 제 입을 고운 손으로 가렸으나, 그럼에도 뭐가 그리 우스운지 웃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쿡쿡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떨리는 지완의 어깨가 묘하게 이현의 신경을 자극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 내가 웃겨서. 자조야.”
“….”
“우리라는 네 말이 나한테 꽤 야하게 들려서 말이야.”
이현은 제 눈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 되물었다.
“…너 진짜 어디 문제 있어?”
발음은 불분명했지만 기가 막힌 이현의 심정은 고스란히 담겼다.
“하하. 그러니까. 이런 내가 너도 웃길 거 같은데.”
“물이나 내놔.”
골똘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그런 표현을 입에 올린 적이 없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현의 무의식을 반영한 변화라 한들, 그뿐이다. 그런 말 하나하나에 일말의 의미도 두지 않는 이현은, 지금 지완이 보이는 자조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일으켜 세워줘? 웃음을 갈무리하며 지완이 덧붙였으나, 이현은 맥없이 손을 휘저었다. 이현은 몸을 살짝 기울여 물을 들이켰다. 일어나고 싶진 않았다. 이현은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 미친, 잠깐만!”
그러나 일순간 번뜩인 충격과 공포가 이현의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마치 각성이라도 한 듯,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나른했던 몸 곳곳으로 싸늘한 소름이 퍼져나갔다,
“야…, 그럼 어제…!”
이현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했던, 전신을 점령한 후유증은 아찔한 두려움으로 인해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람을 지배하는 건, 역시 체력보다 정신력이다. 이현이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부스스한 머리칼이 시야를 가리며 흩어졌다. 온몸에서 근육통이 들끓고, 아래에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지완이 손을 뻗어 나풀거리는 이현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퍽 다정한 손길과 달리 그의 말은….
“코치진이, 우리를 봤냐고?”
“….”
“일찍 묻네.”
지완의 음성은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했고, 그 다정함에 이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완은 우리라는 표현에 강세를 두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괜히 괴롭히고 싶어지는 질문인데.”
빌어먹을 훈련이 문제였다. 휴일은 일요일까지였고, 오늘은 화요일이다. 그리고 권지완은 언제나 미쳐 돌아 있고.
그러나 의심 가득한 이현을 보며 지완은 점차 시선을 가라앉혔다. 사분사분한 손길은 그치지 않고 머리에서 볼로 내려와 부드럽고 서늘한 감촉을 남기고 있었지만, 지완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설마. 내가 지금 네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리 없잖아.”
“….”
“며칠 더 쉬겠다고 연락했어, 네 핸드폰으로. 코치진은 내일부터 나올 거야.”
“…그런 건 좀 바로바로 말해.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난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왜 잘하고도 욕먹게 굴어.”
안도를 찾은 이현은 풀썩 다시 몸을 뉘었다. 물에 조금 적셔진 이현의 입술에, 지완은 간지럽히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런 낯간지러운 행위조차 이젠 덧없이 자연스러웠지만, 이현은 괜히 몸을 뒤척였다.
“근데 이현아, 정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봐.”
“…그야 넌 이상한 곳에서 이상하니까.”
“…만약 내가 널 그대로 업고 문을 열어줬으면 어땠을까.”
“….”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
“상상에서 그쳤지만.”
넌 어땠을 것 같은데. 지완은 물었으나, 이현의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몇 번의 가벼운 입맞춤을 더하고, 의자에 걸쳐두었던 후드를 집어 들었다.
이현이 입고 온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현의 옷은… 벌써 며칠 전이 된 그날 밤의 차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팔.”
지완의 말에 이현은 느릿하게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곤 팔을 들었다. 언젠가는 직접 옷을 입혀보고 싶다는, 예전에 지완이 했던 장난스러운 말이 떠올랐다. 그토록 소원이라면야. 이현은 잠자코 지완의 말을 들었다.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섬유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품이 큰 후드 소매는 이현의 손등을 반쯤 덮었다. 이현 역시 절대 작은 체구가 아님에도, 새삼스레 지완과의 체격 차이를 실감해야만 했다. 이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덤덤히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여전히 지완의 시선은 이현을 향하고 있었다. 굳은살이 이젠 피부처럼 자리한 이현의 손바닥을 조금은 세게 내리누르며 지완이 낮게 읊조렸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보일 생각은 접어. 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미쳤어? 순간 의심을 한 건 권지완, 너라서 그런 거고.”
“알지. 그런데도 네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게 좆같아서, 난.”
“아니,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이현은 심심하게 웃어 보였다. 부질없는 곳에서 진지해지는 그 모습을 장난으로 치부하려 했으나, 지완의 표정은 어딘가 공교로웠다.
“야, 새겨들어, 좀.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에 이런 꼴 보일 이유 전혀 없어.”
이현은 지완의 손을 뿌리치며 그 예쁘장한 얼굴을 가볍게 밀어냈다. 뺨을 내어주면서도 지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현이 좋아하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덩달아 실소가 터졌다.
“아, 그보다… 너나 빨리 옷 챙겨 입어. 차 키는 어딨어?”
“키?”
“이미 늦었잖아. 왜 또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
“뭘 모르는 척해, 권지완. 최종 선발전도 불참하려고? 이게 미쳤나.”
*
이현은 햄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도저히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선택한 것이 햄버거였다.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 번에 몰아친 극심한 허기가 격렬했던 긴 밤을 증명했다. 식욕보다 성욕이 더 지독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