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게 줄 거면 명의를 바꿔 달라고 그랬었지, 이현아, 네가 예전에. 난 네 의사를 십분 반영한 것 같은데.”
“내가 언제 그딴 소리를 했어?”
“예전에. 내 차에서 널 내쫓아내면서 카드 줬을 때?”
“…아, 야!”
목청을 높이는 이현과 달리, 턱을 괸 지완에게선 점점 지루한 싫증이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한 것처럼, 이미 충분한 것처럼. 지완의 그런 사고회로에 이현은 더욱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핸들을 두드렸던 지완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이번엔 짧게 클랙슨을 내리눌렀다. 빵! 하는 소리가 다시 조용한 주변 공기를 들썩였다.
이현은 막무가내로 구는 유치한 새끼의 손을 밀쳐냈다. 이미 머리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채이현, 정 억울하면 고소해.”
“…그래, 네가 제정신일 리가 없지.”
지완은 어깨를 으쓱였다. 직각의 어깨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 시큰둥한 모습에 멱살잡이를 하고 싶었으나, 이현은 애써 고개를 털어냈다.
도로 위에서 실랑이를 벌였다간 홧김에 사고를 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현의 심호흡과 함께 차가 다시 출발하자, 지완은 그제야 꽤 예쁜 얼굴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마냥 맑은 웃음이 아니었다. 승자의 웃음이었다. 덕분에 이현은 이상한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골몰에 잠기던 이현이 이내 목에 힘을 주었다.
“야, 너 나한테 돈 자랑 소용없다는 거 알지.”
“알지.”
“….”
“억울하면 고소하라니까.”
이현은 지완에게 공연한 경고를 날려보았으나, 무용한 일이었다. 꽤 길게 고민한 것치곤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씨발, 웬 미친놈이 내 앞으로 건물을 넘겼다는 고소를 어떻게 해?”
“그럼 안 하면 되겠네.”
“…넌 오랜만에 나타나서 이러고 싶냐? 내가 이러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설마?”
“정말 설마. 난 네 이런 모습 보려고 그러는 건데.”
“아, 이 새끼 더 이상해졌잖아.”
시끄러운 욕설과 즐거워 보이는 소성, 그 어울리지 않는 두 소음이 넘실거리는 내부 상황과 달리, 등록된 차는 빌리지 출입구로 무탈하게 들어섰다.
저 멀리 지완의, 아니 이젠 이현의 것이 된, 어마어마한 돈 덩이의 담벼락이 보였다. 이현은 쓰러지듯 핸들 쪽으로 몸을 기대며 맥 빠진 소리를 내었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는 일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건 여전히, 도무지 이현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혹시 너 뭐, 나한테 큰 실수라도 했냐? 그래서 이래?”
“실수….”
“내가 그냥 봐줄게. 도로 가져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해?”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잘됐네. 내가 실수를 빚지긴 했잖아, 네가 말한 대로.”
지완의 입꼬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지완은 조수석 대시보드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현의 눈을 바라봤다. 전방을 향한 이현의 시야에 지완의 짓궂은 시선이 닿았다.
“권지완, 그건….”
“그 대가로 쳐.”
“야, 누구 좋자고 그걸 네 마음대로 정해. 그건 내가 정해야지.”
지완의 말에 질질 끌려가던 이현은 단박에 단호해져 지완의 말을 반박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건물이고 뭐고 내가 원한 적도 없는 것에 그 소중한 찬스를 그리 흘려보낼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한순간 단호해진 이현의 모습에 지완은 오묘한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보다가, 곧 어이없고 유쾌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채이현, 욕심 많네. 저것도 값이 꽤 나갈 텐데. 지완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도, 내가 알 바야? 이현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현아, 그냥 가질 수밖에 없잖아. 처음부터 나한텐 필요 없는 거였으니까.”
“….”
“넌 여기가 마음에 들고, 난 네가 마음에 드는 게 꽤 마음에 들고. 너나 나나 마음에 드는 결과인데 뭐가 문제지?”
이걸 우문현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논리적이면서 비논리적인 그 답과 함께 이현은 차고로 진입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막강한 권지완을 착잡하게 흘겨보다, 이현이 먼저 능글맞은 지완의 시선을 피했다. 이래도 내가 널 이기는 게 맞냐? 종종 드는 의문이 또 한 번 일었다. 도저히 난 이 새끼한테 이길 수가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더 웃겨. 어차피 내가 사용하는 건 똑같잖아. 야, 너 진짜 피곤하게 살아. 아냐?”
“기분의 차이지. 그 정도로만 여겨, 너도.”
지완의 차들을 제외하고 차고에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오전 훈련을 끝낸 뒤 모두가 퇴근한 것이다. 이번 주말은 넉 달 만에 주어진 이현의 휴일이자, 곧 이현 전담팀의 휴일이었다.
차고의 문이 서서히 닫혔다. 그 굳건한 문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완전히 닫히고 나자, 밖과 차단된 이곳에는 오롯이 이현과 지완, 둘만이 남았다.
자동으로 켜진 차고의 조명은 아주 밝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까지 내려앉은 밤의 공기가 주변을 메웠다.
“내려. 대충 시켜서 밥이나 먹고 얘기해. 밥은 내가 사.”
“….”
“뭘 그렇게 봐? 밥은 무조건 내가 사.”
“….”
“토 달지 마. 입 열지 마. 닥쳐, 그냥.”
“…강매당한 꼴이 꽤 볼만 한데, 이현아.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야.”
지완의 차들 사이로 조심성 없는 주차를 마친 이현이 홀더에 내려놓은 플라스틱 컵을 집어 들었다. 커피가 조금 남아 있었으나 마실 생각은 없었다.
뭐 해. 안 내려? 이현은 차 문 손잡이를 쥐었다가 멈칫했다.
지완은 요지부동이었다. 지완의 시선은 집요하고 짓궂게 이현을 따라붙었다. 왜, 뭐. 이현은 입을 벙긋거리며 되물었으나 지완은 조용히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그 하얗고 곱상한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지완의 두 눈에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고, 얄궂은 욕망이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현은 지완의 시선을 가만히 응수하다가, 저도 몰래 입술을 물었다.
이현은 황급히 들고 있던 커피잔의 모서리로 지완의 턱을 밀 듯이 건드렸다. 지완은 곧장 콧잔등을 찌푸렸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다시 곱상한 얼굴로 돌아와 심심한 웃음을 입술 사이로 흩트렸다.
“이현아, 네가 이 차를 좋아할 줄 알고 있었어. 나머지는 너한테 너무 화려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나도 이 차 꽤 좋아한다고.”
“….”
“넓잖아.”
*
“아….”
이현은 아릿한 목덜미에 아랫입술을 절로 물었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서 조금씩 더해지는 지완의 무게감이 이현을 압박했다. 의도치 않게 시트 사이에 짓눌리는 손이 목보다 더 저릿했지만 이현의 신경은 온통 목에 쏠려 있었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은 점점 농도가 짙어졌고, 끝내 지완은 목으로 입술을 옮겼다. 다만 이현의 목에 닿는 건 입술보다는 치아였다. 지완은 늘 그렇듯 이현의 목을 깨물며 희롱했다.
지완은 한참이나 이현의 긴 목 곳곳에 진득한 흔적을 남겼다. 지완의 머릿결이 이현의 턱과 볼을 간질였고, 그의 체향과 섞여 흩어지는 샴푸 냄새가 이현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현의 체온은 점차 높아졌다.
이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자 지완이 천천히 몸을 뗐다. 이현은 그제야 저려 오는 손을 반사적으로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지완은 가볍게 웃었다.
“불편한가 봐. 네가 힘들면 이 이상은 무리지.”
“….”
“밥 먼저, 아님 샤워 먼저?”
조급해 보이는 손길과 반대로 지완은 여유롭게 턱을 까딱였다. 내리자는 의미가 분명했지만, 이현은 지완이 깨물어 대던 목 언저리를 쓸어내리며 머뭇거렸다. 야릇한 감각이 사라진 목은 어쩐지 아쉬움을 남겼다. 무엇보다 은근한 도발이 어린 지완의 눈빛이 이현을 자극했다.
“내가 힘들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오기가 생기지. 일부러 그래?”
“아마도? 의도가 상당히 다분한 발언이었지.”
이현은 그대로 거만한 지완의 입을 막았다. 지완의 입에서 얄궂게 터져 나온 웃음을 그대로 이현이 머금었다.
이현의 경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권지완을 이길 수 없을 테지만, 이렇게 지완이 여유의 우위를 점할 때면 발칙한 오기가 피어난다. 이현은 자신도 이해 못 할 들뜬 마음에 점점 더 몸을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지완이 이현을 끌어당겼다. 조수석은 어느새 뒤로 한껏 젖혀져 성인 남성 둘을 위한 공간을 힘겹게 마련했고, 이현은 콘솔박스에 박은 무릎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지완의 위에 안착했다. 창문을 짚고 선 이현의 손을 자신의 목 뒤로 두르며, 지완이 고개를 꺾었다. 짧게 벌어진 간격에 이현이 숨을 내쉬었다.
이현은 지완에게 이마를 맞댄 채 조금 불편한 자세를 고쳤다. 이현이 대충 걸친 후드 집업의 지퍼를 내린 지완의 손이 불쑥 이현의 등에 닿았다. 척추에 닿은 서늘한 감촉에 이현이 몸을 작게 떨었다.
당연히도 그 떨림은 지완에게 자극이었다. 지완의 얼굴은 단번에 색을 바꿨고, 이현은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권지완의 순간을 직면할 때면 언제나 미미한 통쾌함이 인다.
“권지완… 미리 말하는데, 오늘은 무조건 너 먼저….”
“….”
“너 먼저 가.”
깔끔하고 단정하게 조각된 이현의 얼굴 위로 이질적인 흥분이 서렸다. 원초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건방짐은 덤이었다.
“잠깐만… 나….”
“안 들려.”
지완은 거만과 순종을 벗어던졌다. 이토록 쉽게 인내가 무너지는 지완을 볼 때면, 그의 여유가 다 허상인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