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51)

#140

‘<태성제약 고위 임원, 아들뻘 男접대부 앉히고… 동성 성매매 논란 잇따라>’

‘하세민 씨가 그동안 정·재계 인사들에게 성 상납을 해왔던 기록이 익명으로 제보되면서 … LA 별장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현 씨, 내가 이사님과 옛정을 생각해서….’

‘정말 더 미적거릴 수는 없겠어.’

액셀을 내리밟는 이현의 발끝에 힘이 실렸다. 점잖았던 배기음은 날 선 소리를 내며 답답한 도로 위에 울려 퍼졌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거리는 맑은 하늘 아래 꽤나 드라마틱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고, 잔뜩 찌푸려진 이현의 미간이 마치 눈 부신 햇살 때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네가 채 이사님 일을 이해한다면… 다행이네. 그걸 제외하고 나머지 기사들은 전부 헛소리니까. 적어도 네가 더 놀랄 일은 없어.’

‘이현아, 난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이현은 입 속에 고여 있는 이름들을 힘겹게 삼켜 넘겼다. 쓴맛이 돈다. 혀에 도는 쓴맛을 떨치려 천천히 혀끝을 튕겼다. 똑딱, 두 번의 흡착음이 여전히 울리고 있는 핸드폰 진동 소리를 장식했다.

선택지는 두 개다. 받거나, 받지 않거나.

[이번에도 안 받았으면 짜증이 날 뻔했어, 이현아.]

그러나 채이현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지완이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이현의 입술 사이에서 호흡이 부서지듯 터져 나왔다. 이현조차도 그 숨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이현은 여전히 도로 위에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한 손에 연초가 들려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으려고.”

권지완이 조수석을 차지했다는 점, 그 정도뿐이었다.

이현이 말없이 연초를 입에 물자 지완은 조수석 글러브박스를 열어 처박혀 있는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지완이 불을 붙이자마자 이현은 깊게 빨아들였고, 그 입 안에 고인 연기는 느리게 새어 나왔다.

인천 공항 고속 도로는 저물어가는 노을로 인해 타들어 가는 연초의 끝처럼 붉고 노르스름했다. 차가 마치 노을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도로는 길게 뻗어 있었고, 다행히 정체 구간은 길지 않았다.

“사람 피 말리게 한다니까. 마중까지 나왔….”

“야, 말은 똑바로 해. 마중은 무슨. 네가 갑자기 공항으로 데리러 오라고 하면….”

이현은 핸들을 작게 내리쳤다. 손에 들렸던 연초는 아슬했던 재를 투두둑 떨어트렸다. 뜨거운 재는 운전석의 핸들과 바닥을 더럽혔으나, 운전하는 사람도, 차의 주인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래. 내가 널 불렀고 넌 이렇게 왔고?”

“이젠 익숙한 그림이다, 이거지.”

“하하. 이현아, 불만이 많아 보이네. 난 마음에 드는데.”

“….”

“지난 두 달간 고생한 보람이 있달까.”

넉 달 만에 보는 권지완, 두 달 만에 듣는 목소리. 그러나 권지완에게 변한 점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현은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써 꿋꿋이 노력했다.

“고생?”

“….”

“그래, 너, 권지완…. 거기서 아주 많이 바빴겠더라.”

“….”

“할 일이 많았겠어, 여러모로.”

“그렇지. DISC가 좀 끈질기잖아. 이렇게 한국 들어오려고… 훈련 일정을 몰아서 하기도 했고.”

태연자약한 권지완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현은 그제야 답답한 눈으로 지완을 힐끔 살피고는 차량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볐다. 달갑지 않은 냄새가 파시식 퍼져 나왔다.

“그러니까 이현아, 괜히 힘 빼는 건 그만하지 그래. 난 시간이 아깝거든.”

지완은 미적지근해진 이현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웃어 보였다. 묘하고 깊은 눈에는 노을빛이 내려앉아 불그스름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가볍게 말을 돌리던 지완은, 이현의 머릿속을 모르지 않았다. 이현이 신경질적으로 추월 차선에 들어서자 지완은 고개를 얄밉게 까딱일 뿐이었다.

정말 그 볕 좋은 캘리포니아에 있다 온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이현이 흘끔 훑어본 권지완은 단 한 군데도 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흰 피부는 채도를 낮추고 명암비만을 높이고 있었다. 그 고상한 피부색이 한결 더 재수 없어진 것, 그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었다.

이현이 대답하지 않자, 지완은 곱게 새겼던 미소를 차츰차츰 지워 나갔다. 옆얼굴에 닿는 권지완의 시선이 읽힌다. 그 시선에서 박동하는 서늘함은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러나 이현도 쉽게 지완의 뜻에 맞춰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십 대의 차를 추월하고 나서야 이현은 툭 말을 내뱉었다.

“권지완.”

“….”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니까 너 불안하지, 지금.”

“…그렇다니까. 피가 말릴 정도라고 했잖아.”

“병신, 또 오버한다.”

“이런, 진심인데.”

지완의 작태에 이현은 코웃음을 쳤지만, 소성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현의 굳은 입꼬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이현이 천천히 입술을 축였다. 잠깐 삐져나온 이현의 붉은 혀에도 지완의 시선이 박혀 들었다. 이현은 살짝 내렸던 차창을 다시 올렸다. 도로 위의 바람 소리마저 차단된 차 안에는, 조수석 도어트림을 툭툭 두드리는 지완의 습관적 손짓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권지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채이현 역시 알고 있다. 여기까지만 할까, 나도. 어차피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시간을 살핀 이현에게서 늘어지는 음성이 드리웠다.

“그럴 필요 없어.”

“….”

“넌 실수를 했어도 난 안 할 거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실수?”

“그래, 네가 진짜 더럽게 재수 없긴 한데….”

올림픽대로를 빠져나온 이현은 꽤나 점잖은 솜씨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아까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핸들링이었다. 그렇다고 지완에게 시선을 내어주진 않았다. 이현은 곧장 뒷좌석으로 팔을 뻗어 내팽개쳐 둔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그제야 지완을 한 번 바라보고는 문자 창을 켰다. 이현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완의 두 눈이 그 한숨을 머금고 천천히 접혔다.

전화는 무리겠네. 이현이 타닥타닥 엄지를 놀릴 때마다 두툼한 입술은 함께 웅그려졌다.

길지 않은 문장을 이어가는 두 엄지는 느리긴 했어도 멈추진 않았고, 이현의 입에선 다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권지완, 그러니까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하랬잖아.”

“….”

“네가 그새 잊은 게 아니라면 넌 오늘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지완은 내리깐 이현의 눈꺼풀, 깜빡일 때마다 흔들리는 그 속눈썹을 응시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이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눈동자를 가라앉힐 뿐이었다.

써내려 가던 문장을 마무리한 이현은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았다. 전송 버튼은 아직 누르지 못했다. 대신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로 제 몰골을 확인했다. 마주한 자신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왜인지, 피곤에 찌들어 보이긴 했어도.

이현은 고개를 돌려 다시 지완을 마주했다. 미국 햇볕을 먹고 더 하얘져서 돌아온 권지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입술에 자리하고 있었던 상처는 당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현은 지완의 입술 끝을 꼬집듯 짓누르고, 이번에는 손을 살폈다. 잇자국이 선명했던 상처도 없다. 당연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이현은 지완을 한 번 치켜 올려보고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지완이 먼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건 이현이었다.

“권지완, 난 지금 네 달 만에 아버지한테 문자를 보내고 있어.”

“….”

올라갔던 지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경직되는 것을 이현은 놓치지 않았다. 그 경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말 끝까지 병신 같은 새끼. 이 와중에 네가 이걸 걱정해? 이현은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채 이사님한테 무슨 말을 할 거 같아?”

“채이현, 내가 설명해.”

어느새 굳어진 얼굴로 지완은 이현의 손목을 다급히 붙잡았다. 이현은 깨달았다. 이 형용하기 힘든 감정은 여전히 연민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권지완은 웃기는 새끼다. 왜 이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구는 걸까. 당연히, 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뭘 설명해. 안 물어본다고 했잖아.”

“….”

“묻어 두는 건 내가 해. 권지완, 난 알고 싶지 않고 그러니까 난… 모르는 거야, 어떤 것도.”

“….”

“난 너랑 권 회장님처럼 부자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존경스러운 아버지, 그쪽이 편해.”

혼잣말 같은 말을 마치고, 이현은 완성된 문장을 전송했다. 파란 말풍선이 문자 창을 채웠다.

“야, 뭘 그렇게 봐. 내가 아들로서 너무 무책임 해? 이기적이야?”

“…그럴 리가.”

“….”

“처음부터 네가 책임질 건 하나도 없었어.”

이거면 됐다. 이현은 탁 소리를 내며 선바이저를 덮었다. 지친 한숨을 토하지 않고 삼켜내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이현이 감내해야 할 최소한의 몫이었다.

그 몫의 구덩이에서 이현을 끌어 올리듯, 지완은 차분하게 응답했다. 그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고 나긋했다. 이현이 느끼기엔 그랬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이름 들리지 않게 해.”

“이현아, 난 같은 실수를 두 번 해본 적 없어.”

그 익숙한 어조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익숙한 어조에 익숙하지 않은 반가움이 밀려드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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