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51)

#139

새삼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 화보 촬영장과 동계 전지가 떠올랐다. 이현은 홀더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차는 신호에 걸리지 않고 교차로를 그대로 빠져나갔다. 이현은 사이드 미러로, 그다음엔 백미러로, 거만한 권지완을 눈에 담았다.

대답 없는 이현을 내다본 정연이 대신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이현에게 정연의 물음은 이미 잊혔다.

[…됐다. 너한테 뭘 듣는 건 기대도 안 해. 그냥 올 거면 빨리 와. 언제부터 합류할 건데?]

“….”

[너 설마… 안 와? 뭐야, 우리 춘계 전지 대외비 취소된 거 너 때문이야? 너 디데이 전까지 계속 숨어 있게?]

시야에서 거대한 백화점 건물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이현은 정신을 차렸다. 겨우 캐치한 정연의 마지막 물음에 이현이 어설프게 대답했다.

“뭘 또. 나 그 정도 아니야. 나도 전해 들었어. 그게 낫다고 보고. 이번 올림픽 일정이 좀 빠르잖아.”

[너 그 정도 맞아. 근데 뭐… 하긴, 네 말이 맞지. 근데 수영도 취소된 마당에 유도만 꾸역꾸역 밀어붙이는 거… 뭔지는 몰라도 백 퍼센트 권 선수 때문이겠지? 또 변덕 부려서 미국으로 휴가 간 거 아니야, 권 선수? 저번 선발전도 제멋대로 굴더니.]

그러나 권지완은 정말 어디에나 있다. 시야에서 사라진 권지완은 정연의 입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어쩌면, 차라리 완전한 무소식이라면 나을지도. 그러나 채이현의 세상엔 권지완이 너무나도 많다. 그 사실을 권지완도 알기에 거만을 떠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선 권지완, 이 새끼가 지금….

[검진은 구라란 거 이 바닥 사람이면 다 알잖아. 권 선수가 정말 몸에 이상이 있었으면 기사가 났겠어? 어떻게든 결과 나오기 전까지 엠바고 때렸을 거 아냐.]

“….”

[유도는 최종 선발전을 LA에서 한다는데, 어느 종목이 최종 선발전을 개최지 바로 옆에서 여냐고. 선발전 떨어지고 돌아오는 선수들은 얼마나 처참하겠냐. 으, 잔인해, 유협. 사협보다 더 해. 거긴 진짜 권 선수밖에 모른다니까.]

권지완, 그의 이름을 곱씹은 이현은 순간 핸들을 꺾었다. 저릿하게 어금니를 깨무는 이현의 얼굴은 다분히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평창동으로 향하던 차는 급하게 노선을 바꿔 성북구로 향했다. 이대로 훈련장에 복귀해봤자 총질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처음부터 괜히 나왔나. 그냥 오전 훈련 마치고 잠이나 잘걸. 언짢은 이현의 심기에 정연이 불을 붙였다.

[혹시 그게 진짜 사실이야? 유진 언니랑 미국에서 비밀 결혼식 올린다는 찌라시? 그럼 진짜 대박인데. 넌 뭐 들은 거 없어? 아님 이번에도 그냥 출국길에 얼굴 비추기 싫어서 그러나.]

“….”

[그렇잖아. 매번 하루 먼저 가거나, 하루 늦게 가거나. 권 선수는 선수단 본단으로 출국길 사진 찍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이번에는 아예 두 달을 먼저 갔네.]

정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변함없이 당돌했다.

“… 글쎄. 나야 모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마지못해 대답하는 이현의 목소리에는 미적지근한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하긴, 잠적했던 네가 어떻게 알겠냐. 너, 그동안 권 선수랑은 연락하고 지냈으면…! 나 진짜 못 참아. 이현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정연은 다시 말을 돌리며 이현의 근황을 재차 물었다. 요즘 사격부는 어떻고, 재민이 성적은 어떻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정연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이현이 그걸 주의 깊게 들을 리 없다.

<유도협, “올림픽 파견 국대 최종 선발전 LA서 치러질 예정. 올림픽 컨디션 위한 이례적 결정”>

<‘거물’ 하나에 좌우되는 한국 유도, 메달이 뭐길래?>

<권지완, 미국서 비밀 결혼식이라도 올리나? ‘국대 일정’까지 바꿔가며 LA 머물러>

<권지완♥정유진, 미국서 밀회 확인? 증거 없는 목격담만 일파만파>

<다가오는 올림픽서 처음 선보이는 ‘유도 혼성 단체전’, 권지완만 있으면 金도 무리 없어>

<[칼럼] 두 개의 금 안겨줄 권지완 위한 배려, 특혜 아닌 합리적 전략이라고 봐야>

이현은 또 다른 핸드폰을 안쪽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고작 다섯 개의 번호가 저장된 그 잠잠한 핸드폰을 흘겨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비틀었다.

매일매일 뉴스 메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권지완의 기사를 곱씹다가, 이현은 지완과의 카톡창을 켰다. 정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차라리 완전한 무소식이라면 이 정도까지 기분이 개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굴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1이 사라지지 않은 노란 말풍선들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 씨발….”

[뭐라고?]

“아니, 별거 아니야.”

이현이 평창동에 틀어박히고 넉 달이 지났다. 백일이 넘는 시간을 오롯이 체감하며 지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의 넉 달에 비해 길게 느껴지긴 했다.

특히 지난 두 달이 더욱 그랬다.

매일 하는 훈련, 똑같은 루틴, 잡음 없는 조용한 훈련실. 이 모든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할 채이현이었으나, 이번엔 아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적막함이 못마땅했다. 못마땅한 걸 넘어 좆같았고, 이현도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권지완, 그 새끼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두 달이 넘었다.

‘안 자냐? 매번 이 시간에 안 자고 뭔 짓이야?’

[안 그래도 당분간 연락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현아.]

‘….’

[이유는 안 궁금한가 봐? 안 묻네.]

‘선수 일정 다 아는데 뭘 굳이…. 권지완, 나도 바빠.’

[아. 일정?]

지완은 잠시 뜸을 들였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알면 좀 아쉬워하지 그래.]

‘…시간 버리지 말고 잠이나 자라. 몸 관리 똑바로 해. 혼성전도 출전한다며.’

[….]

‘이번에 금 두 개 다 걸어야 나랑 동점이야, 너. 나한테 금 하나 뒤처져 있잖아. 새로 종목 개설된 거, 하늘이 주신 기횐데 꽉 잡아야지.’

[…하하, 네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럼 내가 너 아니면 누굴 신경 써.’

[….]

‘괜히 다정하게 듣지 마. 성적 얘기하는 거야. 아무튼 팀원들 멱살 잡고 혼성전 우승시키려면 정신 차려야 할걸, 너도. 몸 존나 축날 게 뻔하잖아.’

[…그래, 맞지. 이현아, 네 말이 맞아.]

‘….’

[정말 더 미적거릴 수는 없겠어.]

그 이상한 대답과 함께 끝난 전화가 마지막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격주에 한 번 걸려오던 전화도 정말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신 차리라며 단칼에 지완의 말을 잘라낸 건 이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고 나니 조용한 핸드폰이 신경을 야금야금 좀먹는다. 인터넷을 도배하는 기사들이 짜증을 더했다. 헛소리인 걸 뻔히 알면서도.

[…채이현! 내 말 듣고 있어?]

“아, 어. 뭐라고?”

[넌 뭐 들은 거 없냐고! 이 속보 뭔데? 사실 맞아? 미쳤나 봐, 이게 대체 무슨….]

순간 정연의 격양된 목소리가 이현의 고약한 잡념을 헤집고 꽂혀 들었다.

속보? 되묻기 위해 이현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체된 교차로에서 라디오의 뉴스 소리가 작고 낮게, 그러나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정연의 반응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시간 기준 14일, 배우 하세민 씨가 극단적 선택 후 의식 불명 상태로 LA 별장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잠적으로 논란을 빚은 지 약 넉 달 만의 소식인데요. 현지 수사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 30분께 별장에서 하세민 씨가 쓰러져 있는 것을….]

“…뭐야, 이게.”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이현은 조급한 손길로 음량을 키웠다. 놀란 정연의 경악이 연신 반복되고 있었지만, 이현은 지체 없이 전화를 끊었다.

[…현장에서 유서로 보이는 자필 메모가 발견되었고, 다른 범죄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전해 왔습니다. 현지 수사 당국은 체내에서 치사량의 마약 성분이 검출된 점을 보아, 마약 중독으로 인한….]

동시에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이현의 또 다른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난 두 달간 잠잠했던 그 핸드폰은 역시나 때를 맞췄다. 그러나 이현의 시선은 내려가지 않았다.

[…은 일전 논란이 되었던 전 국가대표 진 모 선수의 몸에서 검출되었던 것과 동일한 성분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진 모 선수 사건 당일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하세민 씨와의 연관성 역시 다시 주목되고 있는데요. 한편, 하세민 씨가 그동안 정·재계 인사들에게 성 상납을 해왔던 기록이 익명으로 제보되면서, 해당 폭로가 두려웠던 하세민 씨가 결국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측하는…]

“….”

[…의식 회복 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이…, …기다리던 팬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속보를 전하는 급한 목소리는 점점 이현의 귀에서 흐려지다, 띄엄띄엄 들리기 시작했다. 조금은 멍한 이현의 눈이 라디오에서 천천히 떨어져 핸들을 향했다.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이현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현은 기계적으로 액셀을 내리밟았다.

받지 않아 끊긴 전화는 다시 울렸고, 이번에도 이현은 그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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