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내 몸값 걱정? 돈 많잖아, 너. 다만 이현은 실없이 응수했다. 그래도 네 몸값만 하겠어? 지완은 진심인 것 같았다.
“너나 치료받아. 그 손. 아, 선발전 언제로 미뤄졌는데?”
“글쎄. 핸드폰을 꺼둬서. 시끄럽잖아.”
“…난리 났겠네.”
“난리 났겠지.”
지완은 얼굴을 찌푸리는 이현에게 제 연초를 물렸다. 이현은 더한 대거리 없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이현이 피우던 연초는 지완의 몫이 되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권지완, 근데 난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이현이 흐린 연기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어제 하루가 너무 길어서, 아니 그제부터, 아니 며칠 전부터. 내내 이어진 날들이 너무 길어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네가 아니면 누가 이러고 있겠어.”
“….”
“이런 곳에서 섹스하고, 기절했다가, 일어나자마자 담배 피우고?”
“….”
“채이현밖에 못 할 짓인데.”
“그게 그 말이냐?”
“말이 안 될 건 없지.”
그럼에도 이현은 신경을 곤두세웠던 모든 것을 지난 밤, 아니 오늘 아침 사이에 잊었다.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는 듯하지만,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이현의 소성이 무심코 바람을 타고 새어 나왔다.
“…권지완.”
“응.”
“나 이제 게이인가?”
“아마 아닐걸.”
지완은 협탁 위에 놓인 재떨이에 재를 털며 시시하게 대답했다. 아, 재떨이가 있었구나. 미처 보지 못했다. 권지완은 어딜 가든 제 맘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구나. 그거 하난 괜찮네. 이현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뭔데. 나 남자랑 잤잖아.”
“그냥 남자랑 잤다는 말은 불쾌한데.”
“….”
“넌 권지완과 섹스한 채이현이지.”
맞는 말이다. 이현은 위태로운 재를 바라보다 지완에게 턱짓했다. 지완이 이현의 앞으로 재떨이를 내밀었다. 툭툭 털어내며 이현이 작게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
“게이가 될 필요는 없어, 이현아.”
“….”
“다른 새끼랑 섹스할 생각은 접어.”
지완은 눈썹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연기가 닿지 않도록 연초의 끝을 위로 향한 채, 이현이 눈을 비볐다. 뭔 개소리야.
“난 너한테서 벗어날 재능이 없다니까. 너도 그냥 내 목줄 쥐고 노는 게 좋을 거야.”
“…아니, 내가 쥔 적이 없다니까?”
“잘됐어. 서로 억울하고.”
뻔뻔한 지완은 가볍게 이현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럼 진짜 다음엔 네가 박혀.”
이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응수했다. 또 유치한 말장난이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정말?”
“…아마?”
지완은 마지막으로 연초를 빨아들이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현이 다시 그 위로 짤막해진 연초를 비벼 눌렀다.
“야, 너도 마찬가지야.”
“….”
“너도 좆 함부로 놀리는 거, 이제 못 하게 됐잖아.”
“….”
“그 표정은 뭐야? 당연한 거 아니야?”
지완은 묘한 얼굴로 이현을 응시하다가, 끝내 웃음을 지었다. 말이라고. 이현아, 전부 네가 쥐고 있다니까. 그의 웃음소리는 꽤 유쾌했다. 지완의 낯을 쳐다보던 이현에게서 단호한 음성이 드리웠다.
“…그리고 여기서 똑바로 정리해.”
“정리?”
“다음부터 그럴 일 없어. 지금까진 매번….”
이현은 진실로 불쾌한 듯 제 입술을 잘근잘근 곱씹었다. 어느새 선수용 스포츠 스프레이를 꺼내든 지완이 통을 흔들며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그 얼굴에 웃음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조금 전보단 확실히 얄밉고 재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래, 잘 알지. 소총 삼자세, 사격계의 마라톤?”
“…너 지금 내 말이 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지완은 뜬금없이 이현의 종목을 들먹였다. 이현이 언짢게 눈살을 찌푸렸다.
“안다니까. 채이현 체력 좋은 거.”
권지완은 귀신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매번 먼저 알아차리는 걸까.
사실 이현은 눈뜸과 동시에 부정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관계 중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이번에도 자신의 사정이 더 먼저였다는 것을. 이번에도 자신이 사정한 횟수가 지완보다 더 많았다는 것을. 그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남자로서의 자부심, 이제 이런 건 둘째 치고, 선수로서 쪽팔렸다.
지완의 말마따나 이현이 도맡고 있는, 진정 현시대, 채이현으로 대변되는 50m 라이플 삼자세는 사격계의 마라톤으로 불릴 만큼 체력적인 면에서 그 어떤 종목보다 압도적인 기량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지금껏 너무 처참한 꼴을 보이지 않았나. 이럴 순 없다. 이현은 선수 친 지완을 향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현이 뻔하다는 듯, 지완은 짓궂은 목소리로 쓸데없는 희롱질을 덧붙였다.
“근데 난 네가 나 때문에 정신을 잃을 때 가장 즐겁거든. 채이현 올림픽 본선이 몇 분이더라…. 200분, 그것보다 버겁다는 거잖아, 내가.”
“….”
“120발의 총질보다 자극적이라는 거지.”
“…달달 외웠어?”
“더 할 수도 있는데. 결선도 언급해?”
지완이 손을 내밀자, 이현은 당연하게 팔을 올렸다. 좆 까. 이현은 허탈한 헛웃음을 흘렸다. 지완은 씩 웃고 말 뿐이다.
이현의 몸 위로 차가운 액상이 내려앉는다. 이현의 몸이 막대한 무리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도, 허세를 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지완은 이현의 어깨와 팔, 등 곳곳을 빠짐없이 살폈다. 씻길 때 다 봤을 텐데. 어쩌면 이미 한 차례 이현의 몸을 파스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을지 모른다. 그러나저러나 지완은 퍽 진지한 눈으로 임시방편을 마쳤다.
“여기서 이틀은 더 쉬고 훈련해.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통이 심해질 테니까.”
“….”
“거기도… 약은 발라놨지만, 혹시 모르지. 너에게 지극정성인 팀닥은 알아차릴 수도.”
“…오. 그거 정말 최악인데.”
“그래, 그게 더 최악일 테니까 따로 진찰 봐. 말 못 하고 앞 못 보는 의사면 되려나.”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의사를 해?”
“하던데?”
지완은 소파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이현의 옷을 집어 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옷가지들은 지완이 정리했을 테다. 편집증적인 새끼. 이현은 받아든 옷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속옷은 새것이었다. 누가 구해 왔을까. 권지완일까. 설마 권지완이 다른 이에게 시켰을까. 후자라면 끔찍한데.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 이현은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지완은 옷 입는 이현을 한참 동안 구경하다 제 옷을 걸쳤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가야 할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현은 블라인드를 걷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허리를 찌르는 아픔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완이 멈칫한 이현의 허리를 감쌌다. 이현의 의도를 알아채고 알아서 리모컨을 조종한다. 블라인드는 조용하고 빠르게 걷혔으나, 그래봤자 저녁이었다. 밖은 밝지 않았다.
“내가….”
“됐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이현의 통증 때문일까. 사뭇 가라앉은 지완의 음성에, 낯간지러운 것이라면 치를 떠는 이현이 말을 뺏었다.
“뭐. 왜. 사과라도 하게?”
“그런 거 안 한다니까, 이현아.”
지완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으나 어딘가 시원찮았다. 그럼? 이현의 물음에 지완은 한결 가벼워진 투로 농지거리나 내뱉었다.
“다음에는 내가 입혀봐야겠어. 옷 입히는 재미도 꽤 색다를 것 같아서.”
지완은 원래 있던 자리에 스프레이를 다시 넣어두고 이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가 봐야 해. 밥은 곧 마련될 거야. 이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전은 미뤄졌다면서, 이 저녁에 또 어딜 가야 하는 것인지. 그런 건 묻지 않았다. 그건 마치 그가 머무르길 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완은 이현의 생각을 정말 읽는 걸까. 이젠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든다. 지완은 기대가 한껏 어린 눈으로 이현을 붙잡았다.
“네가 물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어디 가는지.”
“…혼자 연애하냐?”
정곡을 찔린 이현은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그 냉랭한 응수에도 지완은 여전히 즐거워했다.
지완은 이현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우스꽝스러우나 이현도, 지완도 눈을 감지 않았다. 못마땅하게 지완을 깔보는 이현과, 그런 이현을 향해 눈을 곱게 접어 보인 지완이 촉 소리와 함께 입을 뗐다. 낯간지러운 긴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확실히 안 어울리지.”
“….”
“그보다 더 지독한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완은 작게 턱짓하며 이현의 뒷목을 툭툭 건드렸고, 이현은 그런 지완의 어깨를 툭 밀어내었다.
지완이 다시 고개를 틀었다. 조금 전보다 조금 더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낯간지러운 긴장이 아주 조금 움텄다. 아마도.
09. THE GOLD MEDAL WINNER, SOUTH KOREA, … (금메달은 대한민국의… )
<채진영 혐의 전면 부인, “도피성 출국 아니야, 조사가 필요하다면 성실히 임할 것”>
<사격협회, “선수와 일절 관련 없어, 선수 둘러싼 악성 루머에 강경 대응”>
<‘채 이사’ 둘러싼 특혜 논란에 검찰 측, “정황상 무혐의, 상황 참작해 수사 과정에서 제외한 것뿐”>
<[속보] 배우 하세민, 공식 인터뷰 무단 불참, 소속사 확인 중, 연락 두절 상태>
<일주일째 잠적 중인 ‘하세민’, 스타병의 발발?>
<유도 올림픽 2차 선발전, 당일 연기 결정… 거물 선수의 무단 불참 때문?>
<선수 하나 때문에 이랬다가 저랬다가, 우스운 유도협의 줏대>
<유도 권지완, 2차 선발전서 보여준 불가침의 기량!>
<[경기 영상 단독공개] 권지완, 채점 방식 변경 논란에도 이변은 없었다!>
<[포토] 테이핑하는 권지완, 오른손·어깨 위 잇자국은 어젯밤의 흔적?>
<(영상)[유도 올림픽 선발전] 권지완 ‘모든 경기 90초 컷’, 동료 선수들 ‘우린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