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그래. 난 오늘이 선발전이거든.”
“….”
“지금이 여섯 시니까, 일곱 시간 남았네. 가는 데 네 시간쯤… 바로 출발하면 몸 풀 시간 정도는 남겠지. 상관없어.”
“….”
“선발전 수준에서 컨디션으로 제약을 받을 만큼 시시한 기량은 아니니까, 내가.”
지완은 아무렇지 않게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당장 몇 시간 후의 선발전보다 이현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처럼 무심하게.
허? 참다못한 이현이 기어이 탄사를 토했다. 그러나 단박에 따지고 물을 말을 찾진 못했다. 지완의 이상한 논리는, 이상하게 반박할 곳이 없었다.
지완은 이현의 속을 읽은 것처럼, 볼을 괴고 있던 손바닥으로 제 입을 살짝 가리며 혼연한 웃음을 숨겼다.
“이건 거만이 아니라 사실이야. 네가 겸손을 원하니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렇다고 기만이나 위선을 떨 순 없잖아.”
지완은 말과 함께 슬쩍 이현의 귓바퀴를 쓸어내렸다. 소름이 돋는 이유는 지완의 손길 때문인지, 기막힌 그의 말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서울에 왜 올라왔어?”
“….”
“생각도 많은 새끼가 왜 이럴 때 뒷생각을 안 해?”
“…이현아.”
“어차피 며칠 간 계속 시끄러울 거, 굳이 바로 서울 올라올 필요가 있….”
“….”
“…아, 뭐. 왜 또. 뭘 그렇게 보는데, 이 한심한 새끼야.”
괘씸한 지완은 이현의 눈을 고집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병실 안의 조명이라곤 뒤에서 비치는 유약한 등이 전부였지만, 지완의 호박색 눈동자는 점점 더 그 색을 짙게 드리우는 것 같았다. 이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완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이현의 숨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난. 오히려 만족스럽지. 이 피곤함까지도 꽤 마음에 들어.”
“…지랄한다. 그딴 식으로 굴 거면 운동 관둬, 그냥.”
“네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내가 발을 뺄 수 없는데.”
“….”
“그리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몸 쓰는 거밖에 없어서 말이야.”
지완의 넓은 어깨는 몸이 전부라는 그의 말을 그대로 대변하듯 거만하게 으쓱거렸다. 몸을 쓴다, 라는 표현에 공연히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 이현은 짜증스럽게 입술을 축였다.
“넌 좀 그냥 넘어가는 말이 없냐?”
“바라는 것도 많다니까.”
물기에 젖은 뒤 제대로 말리지 않은 이현의 머리칼은 평소보다 더 곱슬곱슬했다. 그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지던 지완이 툭툭 그 뒷목을 건드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려고?”
지완은 가볍게 목을 돌리며 뻐근함을 풀어냈다. 채이현, 너도 눈 좀 붙여. 해가 뜨면 더 시끄러워질 거고…, 네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여러모로 피곤해질 테니까. 다시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적당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알겠으니까, 야. 잠깐만.”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나가려는 지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현은 조급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 부름에 지완이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가만히 이현을 돌아보곤 짧게 되묻는다. 왜. 아쉬워? 씩 웃는 낯이 천연스럽다.
“졸지 말고 운전 똑바로 해. 진짜 죽어, 그러다.”
“그래, 안 죽도록 노력해볼게.”
“그리고….”
이현은 머뭇거리며 숨을 돌렸다. 그런 이현의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완이다.
“고맙다.”
“….”
“내가 안 고마울 이유가 없어. 그냥 그렇다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이야. 이현은 나름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뱉은 말은 정작 저 자신도 이해 못 할 이상한 문장이었다.
기분 탓일까. 반쯤 비친 지완의 얼굴이 묘하게 굳는다. 이현은 차마 지완을 바라보지 못하고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마냥 고맙지만은 않아. 너한테 고마움을 느끼는 게 맞는 건지, 네 말이 다 맞는 건지도 확신이 없어. 여러모로 찝찝하니까. 이건 내 감이야.”
“….”
“그래도 그게 나아. 그냥 고마워하는 게. 찝찝함까지 파고들 생각 없어, 그게 뭐가 됐든. 난 이번 일 말고도 지금 충분히….”
말을 잇는 이현도 스스로가 답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이현은 착잡한 심경으로 제 이마를 쓸어내렸다. 우습지만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혼자 병실에서 중얼거렸던 때처럼. 맥박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너 하나로도 벅차거든.”
“….”
“난 앞으로도 물을 생각 없어. 그러니까 권지완, 너도 하던 대로 해. 내가 물을 생각 없으니까 너도 말할 생각 하지 마.”
“….”
“그리고 할 거면 좀 똑바로 해. 알고 싶지 않은 일을 불가피하게 묻게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이번처럼.”
“….”
“너무 이기적으로 들려도 어쩔 수 없어. 네 탓도 커.”
그냥 현상 유지와 다를 바 없는 결론처럼 보이지만 맘이 가뿐하다. 말주변이 없는 채이현은 지저분하게 말을 뱉었으나, 권지완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감사 인사인지, 협박인지 모르겠네.”
조용히 이현의 말을 듣던 지완은, 퍽 담담한 투로 토를 달았다. 순간 굳은 듯 보였던 얼굴은 정말 착각이었을까. 그는 다시 태연하고 뻔뻔한 낯으로, 문에 등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완의 반응에, 이현에게서 자조적인 소성이 새어 나왔다. 이현은 보다 편해진 투로 말끝을 늘였다.
“그리고….”
“….”
“….”
“…그리고?”
“….”
“채이현, 네 말을 더 기다렸다간 선발전에 늦을 것 같은데. 그게 목적이라면 이건 꽤 비겁한 방식이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현을, 지완은 다시 한번 얄궂게 놀려댔다. 이현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그래, 됐다. 여기서 뭘 더 말해. 이 정도면 오늘은 할 말 다 했어. 이현은 혀를 짧게 차곤 지완에게 다가갔다.
“가라. 혹시라도 거만 떨다가 선발전 망치지 말고.”
“그래, 네가 불필요한 걱정을 굳이 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난 그거 좋아하니까.”
“오버하지 마. 네가 실수라도 하면 그 물어뜯긴 손 때문일 것 같고, 그럼 또 나 때문일 것 같고. 괜히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란 의미니까.”
“이건 정말 별거 아닌데. 과분한 값을 쳐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지완은 다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사뭇 진지하게, 그러나 다분히 얄미운 태도로 대꾸했다. 이현은 지완의 어깨를 밀었다. 손에 잡히는 근육의 부피감이 두툼하다. 유치한 멋쩍음에 손을 떼려 했으나, 지완의 시선이 가만히 손등 위에 닿았다.
내릴 타이밍을 놓친 이현의 손을 바라보다, 지완이 얕은 소성을 머금는다. 얜 또 뭔 생각으로 웃어? 이현은 그 웃음을 흘겼다.
“이현아.”
지완은 그런 이현의 손을 잡아 내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금 전, 착각처럼 느껴졌던 그 굳은 얼굴이 다시 이현과 마주한다. 착각이 아니었다. 지완이 잠시 숨겨두었을 뿐이다.
“난 너한테 감사도, 사과도, 그 무엇도 전할 생각 없어.”
이미 내가 구차할 만큼 너에게 종속적이고,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내가 이기적이라서. 지완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동시에 뻔뻔하고 가볍게 덧붙였다.
지완의 말에 이현은 눈썹을 작게 찌푸리며, 침묵으로 그 의미를 물었다. 그의 얼굴 반쪽은, 콧대와 각을 이룬 그림자로 가려졌다. 긴 속눈썹은 그 위로 더 긴 그림자를 보탠다.
“그러니 너도 두 번 다신 하지 마. 난 듣고 싶지 않거든.”
지완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하지 마, 할 필요 없어. 내가 그런 말을 좋아하긴 해. 이현은 때아닌 우스운 생각을 홀로 곱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솔직한 이현의 음성은 망설임 없이 흘러나왔다.
“그럼 난 뭘 해.”
난 뭘 해야 해? 평범한 질문의 파동이 크다. 지완의 얼굴 위에서 속눈썹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내려앉아 있었고, 침묵의 시간 속에서 느리게 깜빡일 뿐이다.
“너무 뜻밖의 말이라, 아주 많이 놀라워.”
“….”
“뭐라도 기꺼이 부담하겠단 소리처럼 들리고.”
“그 정도는 아니야.”
자못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지완은 시선을 조금 들어 올려 이현과 마주했다. 고요한 그 목소리는 잔잔한 숨을 타고 주변을 겉돌았다.
“근데 왜, 어느 부분이 뜻밖인데?”
이현도 알고 있긴 했다. 그간 유지해온 자신의 무심함은 무책임함의 보기 좋은 허울이다. 무책임한 채이현에게 기대할 만한 말은 결단코 아니었으니까.
“왜긴. 넌 무책임하고, 무심하고, 방관적이고, 여러모로 이기적이고….”
“….”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텐데.”
지체 없이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는 지완을 향해, 이현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적막을 품고 침체되어 있던 지완의 순간은 그새 가고 없어졌다. 지완은 그런 이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한참을 고심하다가, 끝내 예쁘장한 웃음을 터트렸다.
“채이현, 넌 다른 거 할 필요 없어.”
“….”
“그냥 내 고집에, 마지못해 끌려다니기만 하면 된다니까.”
지완이 웃었고, 이현은 웃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지완의 하얀 얼굴을 말없이 바라본다. 머리칼에 가려진 지완의 이마, 코, 윗입술과 아랫입술, 턱 끝까지. 이현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그리고 찬찬히, 그 재수 없는 선들을 따라 내려왔다.
생긴 거 하나는 더럽게 예쁘지. 이현은 지겨울 만큼 익숙한 감상을, 이젠 낯설 만큼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