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내가 내일, 아니, 지금 가져다줄 테니까…. 안일했다. 그제야 제 안일함을, 권지완의 핀트는 언제든 더 엇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세민은 말을 토막 냈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 대답이군.”
“진짜야, 어차피…, 어차피 그간….”
“더 지체할 시간 없는데.”
얕게 한숨을 내쉬는 지완을 향해 세민은 도리질을 쳤다.
정말 권지완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럴 리 없음에도, 그럴 리 없겠지만…. 실제로 사람 목숨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권 회장도 능숙하게 상대해왔던 자신이다. 그럼에도 세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마주한 지완의 얼굴에서, 바로 그 권 회장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잘 떠들더니 왜. 정말 죽을 걱정이라도 해? 이런, 설마.”
“….”
“사람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지. 얼굴 다 알려진 너를. 여기 한국에서.”
“….”
“당연한 거 아닌가?”
지완은 실없는 비웃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 말에 세민은 다급한 호흡을 겨우 고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죽고 싶을 만큼 좆같다. 세민은 밭은 숨 사이로 저열한 욕들을 뱉어냈다.
불안과 비굴, 분노와 발악을 오가는 세민을 바라보며 지완은 실망스러워했다. 고작 이런 일, 이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언급했던 건 세민이었으나, 그건 오히려 지완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고작 이런 일, 고작 이 정도에도 바닥을 다 드러내니 재미가 없다. 그간 상대를 너무 많이 해줬다. 결국 지완은 무심한 말을 뱉었다.
“네가 여기서 네 발로 나갈 일은 없겠지만.”
“…!”
“온 김에 끝을 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채이현이 전화를 세 번이나 했잖아.”
지완은 그대로 세민의 입을 벌리고 술잔을 들이부었다. 세민은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완강하게 버텨보려 했으나, 움직이지 못하는 세민이, 그것도 지완을 앞에 두고 상대가 될 리 없다.
세민이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 그 입을 벌렸던 지완의 손가락은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다.
“…씨발.”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지완은 머뭇거림 없이 세민의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코뼈가 부러지는 사실적인 충격음이 술잔 깨지는 소음을 가렸다. 신음 소리도 하나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은 세민의 옆얼굴에는 크리스털 잔의 파편이 낭자했고, 지완은 그 위로 손을 털었다. 가볍게 손을 쥐었다 펴자, 흐르는 피가 손을 얼룩덜룩 더럽힌다.
지완은 휴지를 뽑아 들고 벗어둔 외투를 챙겼다.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에 깊게 안도하며, 그는 그대로 룸을 빠져나왔다.
*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말똥해진 탓일까. 이현은 밖에서 들리는 조그만 인기척에도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무릎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부닥쳤다. 핸드폰을 주우려는 찰나 병실의 문이 열렸다.
“…노크 안 하냐?”
“열렬히 날 찾던 것 치곤 매정한 반응이네.”
조심스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침입자는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병실은,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들어오는 적은 빛에 의존했다. 그마저도 지완이 문을 닫자 암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러 어둡게 하고 있던 거야? 지완이 퍽 다정하게 물으며 보조 조명을 켰다. 주황빛이 침대를 비춘다.
“…마실 거 줘?”
차갑게 식어 있는 찻잔을 집어 들며, 이현은 말을 돌렸다. 좋지. 안 그래도 피곤해서 죽을 것 같거든. 그건 녹차야? 내건 녹차. 넌 커피 마셔. 이현은 온장고로 손을 뻗었다. 이 시간에 커피를 직접 내리는 건 사치다. 따뜻한 캔 커피를 꺼내든 이현은, 식어버린 제 찻잔과 캔 커피를 번갈아 보다가, 무의미한 농을 건넸다.
“이번에도 내가 마시던 게 더 욕심나면, 마셔. 내가 마실 때 뺏지 말고. 그냥 줄 테니까.”
“과분한 배려네.”
다만 이현의 재미없는 농지거리를 그냥 넘길 리 없는 지완은, 뻔뻔하게 이현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됐어, 미친놈아. 이현은 불퉁스럽게 캔 커피의 뚜껑을 열어 지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커피를 받아든 지완이 소파 한쪽에 걸터앉으며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이현이 눈을 끔뻑이며 묻자,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지완이 대답했다.
“당분간 네가 머물 집 입구 카드 키, 그리고 당분간 네가 쓸 핸드폰. 관리인 불러 놨으니까 오늘 오후부턴 지낼 만할 거야.”
“집?”
“원할 때 저장된 번호로 연락하면 널 데리러 올 거야. 불편하면 직접 운전해도 되겠지만… 평창동, 거기 진입이 꽤 까다로워. 돈 썩어나는 노친네들을 위한 동네라서.”
지완의 눈엔 커피 따위로 해결할 수 없는 피곤이 넘실거렸고, 다가오는 아침에 걸맞게 목소리는 낮게 갈라졌다. 그런 그의 기준에서 이 정도면 친절한 설명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현은 못마땅하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지완은 말을 더했다.
“포항으로 돌아가는 것도, 진천으로 내려가는 것도, 너희 본가에 가는 것도… 기자들 때문에 쉽지 않을걸. 잠잠해질 때까지만 있어. 계속 써도 되고.”
“…네가 왜 유난이냐? 뭘 또…. 야, 나도 돈 많아. 묵을 곳이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해.”
“알지, 너 돈 많은 거. 그래서 돈으로는 수작질을 못 하잖아, 내가.”
지완은 이현의 말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이현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자, 지완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현의 그 작은 실소를 보는 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어쨌든… 오늘 좀 충동적으로 굴긴 했어도 디데이가 코앞이야. 여유 부릴 시간 없어.”
“여유? 올림픽이 걱정돼? 의외네.”
“권지완, 네가 그랬어. 연습 똑바로 하라고. 올림픽 나갈 수나 있겠어? 라고 빈정댔잖아. 그럼 뭘 어쩌겠어. 해야지, 연습.”
“…아, 그랬지. 그때 네가 찍은 응원 영상 꽤 볼만했거든. 얼굴 잔뜩 찌푸리고 준비된 대본 읊는 꼴이.”
지완은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뭐하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연습, 거기서 해. 네가 라이플을 가지고 놀 만한 훈련실이 지하에 있으니까. 널 애지중지하는 너희 협회 쪽에서도 그걸 더 반길걸.”
직접 가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지완은 덤덤하게 덧붙였다.
…훈련실? 내 훈련실? 그게 왜 네 집에? 이현은 맥없는 질문을 그냥 삼켰다. 미친놈, 따위의 탄사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기막혀서 다리에 힘이 풀리듯, 지완의 옆에 털썩 자리할 뿐이다. 지완은 그런 이현을 향해 조금 몸을 틀었다. 이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익숙한 즐거움이 자리 잡는다.
“선발전 참여는 어렵게 될 것 같은데. 아쉽겠네. 안 그런 척해도 그동안 꽤 참가하고 싶어 했잖아?”
지완은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메마른 두 손을 모아 잡고 있던 이현이 떨떠름하게 지완을 돌아보았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선발전 변경 사항은 대외빈데?”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별로 없다니까.”
“….”
“이현아, 관심의 차이야.”
지완은 시큰둥하게 능청을 떨었다. 이 정도면 내가 무서워해야 하나?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심정에 사로잡힌 이현은, 짙은 한숨을 내리깔다가 거슬리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시원찮게 지완의 오른 손목을 잡아들었다.
“근데, 야…. 너, 물렸어? 여기 잇자국, 상처 뭔데?”
“아파 보여?”
지완은 꽤 장난스러운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지완이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법했고, 처물리기까지 한 권지완이 자신을 문 개새끼를 그냥 뒀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에겐 영 못마땅한 짜증이 일었다. 얜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뭘 어떻게 하면 물리기를 해? 물론 지완을 물어버린 그 상대의 안부는 알 바 아니다.
“세게 물린 것 같은데…. 사람 치아, 생각보다 더 세고, 엄지 쪽 기절골에 손상이라도 가면 너 주먹도 못 쥐어. 도복 깃도 못 잡는다.”
“알아, 사람 이가 얼마나 센지.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어.”
“…근데 뭘 웃어, 지금?”
“아, 옛날 생각이 좀 나서.”
지완은 뜻 모를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태연한 낯을 보니 심각한 것 아닌 듯했다.
“잠깐 기다려. 여기가 병원인데, 이렇게 둘 필요 없잖아. 바로 치료받아.”
심각한 게 아니어도 치료는 필요하다. 그의 손을 던지듯 내려두고,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받으면 돼.”
그러나 지완은 부드럽게 이현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상처 난 손으로는 이현을 건드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굳이 왼손을 뻗어서.
이현의 동의를 구하듯, 가볍게 턱짓하는 작태가 꽤 나긋하다. 이현은 어정쩡하게 몸을 굳혔다. 약하게 잡힌 손목이 괜히 낯설다. 끌어 앉히는 쪽이 익숙한데. 권지완에게서 어설픈 조심성이 보이는 매 순간 이현은 곤란해졌다. 하릴없이 제자리에 다시 앉을 수밖에.
지완은 아예 몸을 옆으로 기대, 오른팔을 소파 헤드에 걸쳤다. 상처가 난 오른손으로 볼을 괸다. 느슨한 움직임에는 쓸데없이 야릇한 분위기가 담겼다.
“간다고? 또 어딜?”
“내려가야지.”
“내려가? 설마… 포항을? 이 시간에? 미쳤냐?”
이현의 손목을 에워쌌던 그 손끝은 이현의 팔뚝, 어깨, 목까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이현의 목 뒤에 도달한 손은 흐트러진 뒷머리를 매만진다. 그 간지러움을 애써 모른 척하며 이현은 질색하고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