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51)

#128

채이현이 물어보지 않으니… 굳이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말을 덧붙이는 지완은 조금도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얇은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자, 견고한 팔의 근육들이 조명을 머금는다.

“그런데 이제 생각이 좀 변해서.”

“….”

“안 그래도 정리를 해야 했는데, 네가 아주 적절한 시기에 말을 꺼냈지.”

“….”

“다 좋아. 다 좋은데… 기사가 릴리즈 된 타이밍이 정말 최악이었어. 그게 문제야.”

“그건…!”

“내가 채이현 좆을 꽤 잘 빨고 있었거든.”

핸드폰을 내려놓은 지완은 그 손으로 세민의 얼굴을 잡아들었다. 묘하게 신경질적이다. 세민의 양 볼은 거세게 짓눌려 턱이 저릴 정도였다. 내려갔던 세민의 시선이 강제적으로 들려 지완과 마주했다.

동시에 세민의 입술이 파리하게 떨렸다. 방금 권지완의 입에서 어떤 충격적인 말이 나온 것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세민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알겠어, 알겠어! 수습할게, 수습한다고. 너도 모르는 거 아니면서 왜 그래? 내가 그걸 공개하겠어? 내가 이 지랄을 왜 떨었는데. 네가 한석우를 들먹이면서 자극하니까…. 하하, 여기까지 쌓아온 게 밝혀지는 거, 그거 제일 두려운 사람이 나야. 이번 일은… 그래, 맞아. 객기였어. 그냥 거래 수단으로, 좋게, 조용히 해결하려 했는데, 네가 나 개무시하고 한석…. 아니야, 됐어. 없던 일로 해. 너도, 상관없는 척해도 속으론 걱정이 되니까 채 이사부터 밖으로 빼돌린 거 아니야?”

“….”

“근데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진태우 입도, 내가 막았잖아? 네 지랄 때문에 시선 쏠린 거…. 씨발, 진태우가 입 놀리면 나까지 좆 되니까….”

세민은 안달 난 사람처럼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세민의 머리로는 이해 못 할 상황에, 그는 그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치와 감으로 여기까지 견뎌온 세민이, 어쩌면 당연히 자각할 경고 신호였다.

“더 해 봐.”

그런 세민의 발악 아닌 발악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지완은, 긴 눈꼬리를 가볍게 비비며 읊조렸다. 세민의 턱을 부여잡던 손을 놓고, 바로 휴지를 뽑아 든다. 세민을 잡았던 손을 꼼꼼하게 닦아내는 일련의 움직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세민은 잠시 주춤했으나, 아려오는 볼을 추스를 틈도 없이 이를 아득 물고 소리쳤다. 습관처럼 끼워 넣는 웃음소리는, 마치 위협에 직면한 작은 동물이 제 몸집을 불리는 것과 비슷했다.

“…채이현 찌라시? 그거 때문에 그래? 내가 그 새끼한테 그 정도 장난도 못 쳐?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리고 도핑, 뭐 해보기도 전에 초친 게 누군데. 내가 돈 먹인 검사관 새끼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 하하, 이 씨발, 채이현한테 그런 건, 성공했더라도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어. 재검하면 그만인걸!”

“….”

“그런 식으로 논란 잠깐 만들고 대중들 시선 돌리면, KADA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정유진도 편해! 국제 표준에도 없는 약물? 선수들이 몰래몰래 처먹는 거 KADA도 눈감아 주던 일이야. 선수들은 성적 올리고 국위는 선양되고, 모두가 좋은 일이거든. 진태우 하나 병신같이 지랄난 거? 어쩔 수 없이 조사 들어간 마당에 다른 논란으로 관심만 돌리면, 서로 귀찮을 거 없이 흐지부지될 일이었다고. 채이현 둘러싸고 조금 시끄러워지면 모두가 편안해지는 길을 굳이 네가 막더니, 아, 대신 한석우 일로 시선을 돌리려 한 거였어? 이번에도 내가 희생양이고?”

말을 뱉을수록 세민이 껴안고 있던 두려움에 분노가 섞여들었다. 세민은 정말 토악질을 하듯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빠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억울할 만하지? 근데 다 됐다고. 나도 씨발 왜 이렇게까지 흥분을… 하하, 권지완, 네가 이해해. 술 때문인가 봐. 그냥 넘어가. 채 이사 관련 자료를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게 좆같아? 그럼 파기해, 어차피 나도 손 뗄 거야. 이 짓도, 노친네들한테 몸 굴리는 짓도. 너한테 돈 좀 얻어내려던 거? 그것도 포기할게. 됐어, 어떻게든 내가 벌면 돼. 대체 씨발, 네가 왜 이렇게까지…!”

숨을 돌린 세민은 마른 입술을 벅벅 닦아내며 흥분을 지우려 노력했다. 듣고 있던 지완의 얼굴이 점점 더 지겹게 굳어가는 게 세민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대체 왜 이러지. 세민이 느끼기에도 자신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 달달 떨리는 손끝은 세민의 의지와는 달리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부터도 닫히지 않았다. 뚫린 입에선 별의별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술 때문이 아닐걸. 네가 자는 동안 약이 꽤 많이 들어갔을 테니까. 여긴 약이 워낙 많아서 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약을 처먹든 안 처먹든 좆 같은 건 다를 게 없네.”

다시 무료함을 되찾은 지완의 음성이 멀지 않은 세민과의 사이를 메웠다. 약을 언급하는 지완은 순간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개씨발…!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세민이, 뒷목을 타고 아찔하게 올라오는 열감을 인지하며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이번엔 지완이 그 입을 막았다.

“뭘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할까.”

지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성의 없게 제 귀를 매만졌다.

“아, 그 전에. 네가 채이현 상대로 무슨 장난질을 치든, 그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 지금 네가 이따위로 나오는 게 다…!”

“정유진이 널 앰버서더 파트너로 부탁할 때 그러던데.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고.”

네가 내 눈앞에서 채이현 주변을 기웃대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난 이제 네가 뭘 하든 관심이 없어. 지완은 다시 툭툭, 핸드폰을 두드리며 화면을 밝혔다.

‘채이현’ 이제는 부재중으로 남아 있는 그 이름이 꽤 마음에 든다. 지완은 다시 말을 늘였다.

“개별검사, 별 이유 없어. 그냥… 채이현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훈련이 꽤 바빴거든.”

“….”

“한석우 일, 그건 뭐 겸사겸사. 채이현이 좀 혼란스러운 상태였거든. 그런 스캔들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고.”

“…너 지금 나랑 장난해?”

“그래 보이나? 내가 그럴 만큼 한가하지 않은데.”

“….”

“마지막으로 네 좆같은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 거잖아.”

시큰둥하게 말을 이어가던 지완은, 끝내 신경질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세민은 찰나에 몸을 움츠렸다. 떠듬떠듬 입만 벙긋거리다, 불안정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미친놈, 제정신 아니구나? 네가 이런다고, 정말 채이현한테….”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네.”

“….”

“내가 이런다고, 그 뒤에 왜 채이현 이름이 나오는 건지. 내가 지금 채이현 때문에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 아직도?”

“….”

“난 날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야. 이 시간에, 이렇게 피곤하게. 씨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줘야….”

마지막은 내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최소한의 책임? 새붉은 지완의 입술은 무책임하게 책임을 논했다.

동시에 지완의 핸드폰은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채이현이다. 두 번째 전화, 이해 못 할 만족감이 지완의 피곤을 녹진하게 적셨다. 이번엔 거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다만 전화가 끊길 때까지, 채이현, 그 이름을 집요하게 응시할 뿐이다.

이러면 내가 기대를 하게 되는데, 이현아.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곱상한 웃음을 새기며, 지완은 뒷목을 한가롭게 쓸어내렸다. 끈질기게 울려대던 진동은 꽤나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 조금은 난처해 보이는 목소리로 지완이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리 채이현이라도 이걸 알면 좀 복잡해지겠지. 여기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지금도 꽤 어렵거든….”

이현의 이름을 바라보며 얕게 웃던 지완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지만, 우러나오는 불쾌한 저의는 심히 노골적이었다.

세민은 생각했다. 속을 모르는 새끼는 위험하다. 그건 제 입으로 이현에게 경고했던 말이었다. 속을 모르는 권지완의 단조로움은 더욱 위험했다.

“…복잡? 정신병자 새끼,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와. 이게 알면 복잡하고, 모르면 안 복잡한 일이야? 하하, 그런다고 한 일이 없던 일로 돼?”

그러나 세민은 힘겹게 위기감을 삼켜내며 다시 입을 놀렸다. 오랜 시간 쌓여온, 지완을 향한 짙은 거북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왜 아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세민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조금 전에 꺼진 지완의 진동이 다시 울렸고, 지완은 세 번째 떠오른 이현의 이름을 보고는 끝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더는 즐거움을 숨길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려나. 지완은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이현의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더 이상 무리였다. 지완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술 한 잔을 세민에게 내밀었다. 잔으로 세민의 턱을 툭툭 미는 손길이 지나치게 사사롭다.

놀 만큼 놀아줬잖아. 이거 원본 어디 있어. 지완은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상한 냄새를 맡은 세민이 잔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자, 지완은 무례하게 턱 끝을 잡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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