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동시에 지완은 이현을 떠올렸다. 투명한 소리를 내며 언더락 잔에 떨어지는 술은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유는 더없이 간단했다. 술, 채이현은 술을 좋아하고, 술 앞에서 기고만장해지는 그의 모습은 꽤 재밌다.
유진은 묘하게 이슥해진 눈을 한 지완을 바라보다, 볼을 괴며 말을 이었다.
“하 대표가 맡아온 드라마, CF, 이번 첫 영화까지…, 한석우 아버지가 그 대표 제작자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아.”
“….”
“스폰 설이야 데뷔 때부터 하 대표의 꼬리표였으니까 그렇다 쳐. 근데 공개된 사진이 너무 적나라하던데? 그 상대가 하 대표란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봐. 이미 말도 많이 나오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네.”
“….”
“더 듣고 있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지완은 언더락 잔을 유진 앞으로 밀어두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지루한 대화에 대한 싫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 지완의 완고한 태도에도 유진은 빙긋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을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은 처음에 했어. 하 대표, 난 이해된다는 거.”
“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 없겠지.”
“근데 내가 의아한 건… 너야, 지완아.”
담배를 꺼내 물려던 지완은 유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여전히 찍어낸 듯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완이 관심을 두지 않는 서류 봉투의 겉면을 매만지며 긴 호흡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하 대표가 이걸 완전히 공개할 일은 절대 없다는 거, 네가 더 잘 알면서…. 왜 이번엔 기사가 뜨자마자 하 대표를 보러 왔을까?”
“….”
“더는 하 대표가 건방지게 구는 걸 못 참아서? 그래서 이제 어떡하려고?”
지완은 유진의 두 눈을 도리어 더 빤히 바라보며, 들고 있던 연초를 가만히 물었다. 두툼한 아랫입술이 연초에 살짝 눌린다. 유진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정리하는 것일까. 오팔로 장식된 테이블을 타다닥 두드리던 지완은 한쪽에 놓여 있던 유진의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불을 붙인 후 첫 숨을 얕게 내뱉은 지완은 피곤한 눈가를 쓸어내렸다. 길게 뻗은 두 손가락 사이에서 가만가만 타들어 가는 연초의 연기가 지완의 얼굴을 희끄무레하게 가렸으나, 시큰둥해 보이는 그 기색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거, 없애려고.”
지완은 유진이 만지고 있던 서류 봉투 위로 가라앉은 시선을 얹었다.
“…이거? 이게 원본일 리 없을 텐데?”
“….”
“어머, 하 대표를 아예 정리하려고? 드디어? 아니, 이제 와서?”
놀란 눈, 아니 흥미 어린 눈을 한 유진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뜻 모를 기대가 비쳤다.
지완은 그새 아슬아슬해진 재를 털어내지 않은 채 세민에게 다가갔다. 세민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을 뿐이다. 뭘 먹인 거야. 지완은 대답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정제지. 그게 아니면 너 오기 전에 겁먹은 하 대표가 도망갈 것 같아서. 아침 첫 비행기 표도 예약해뒀던데? 무리했다는 걸 알긴 한 거지. 유진은 조금 김빠진 투로 심심하게 대답했다.
“근데 지완아, 정말… 이제 와서 왜?”
“…왜?”
“응, 왜? 정리를 하고자 했다면 진작 할 수 있는 일이었잖아?”
“….”
“그런데도 굳이 하 대표를 지금까지 놔두고 있던 이유는….”
유진의 권태로운 손끝이 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빙 돌아갔다.
“하세민은 그런 존재니까? 채 선수에 대한 너의 아이러니가 만들어낸….”
“….”
“너무 거창한가. 그래도 내 눈엔 그렇게 보이더라. 지완이 네가, 이현 씨에게 지니고 있는 그 아이러니를 방치하고 있는 거나, 하 대표를 지금까지 그냥 놔두고 있던 거나… 같은 맥락인 것처럼.”
지완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닿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끝의 방향을 바꿨다. 유진의 목소리는 물기가 어린 것처럼 유연했다.
과장이 과해. 지완은 언뜻 냉랭하게 들릴 정도로 간결하게 대답할 뿐이다.
“어쨌거나 이걸 정리한다는 건, 이현 씨에 관한 것도 정리가 됐다는 건가?”
“아쉽기라도 한 가봐.”
“아쉽지, 그럼. 그동안 네 옆에 있었던 건, 음, 물론 비즈니스 얘기를 빼놓을 순 없겠지만… 그것보단 네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니까.”
“당신 재미를 위한 건 아니었는데.”
지완은 심드렁한 얼굴로 연기를 내뱉었다. 아찔할 만큼 짙은 연기는 보는 이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어머, 당신?”
“….”
“…갑자기 거리감이 확 느껴진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같네. 네가 18일 때였나? 하하. 기분 이상한걸. 하 대표뿐만 아니라 나도 정리하려고?”
“그래, 가능한 한 빨리.”
“그 이유는 또 뭐려나.”
유진은 정말 지완과 비슷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완이 툭하면 머금는 못된 미소가 유진의 입가에 어렸다. 보다 덜 건방지고, 보다 더 발칙하다. 내가 그 정도는 물을 수 있지? 유진은 다시 한 모금을 조용히 들이켜며, 낮게 웃었다. 간단하게 선을 긋는 지완을 향한, 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짜증을 내더라고. 안 그런 척해도 신경을 아주 많이 쓰거든.”
“….”
“….”
“지완아, 그 대답… 정말 재밌다. 이러면 더 흥미로워지는데.”
“이 정도면 됐겠지.”
지완은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끄며 읊조렸다. 유진의 감흥 어린 말을 잘라낸다. 그녀에게 더 이상 응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지완을 퍽 다정하고, 또 유쾌하게 바라보던 유진은, 느릿한 숨을 돌리며 잔을 테이블 위로 올린다.
이제 가라는 말이구나? 하긴, 너무 늦었네. 일순간 분위기를 바꾼 그녀가 굳은 몸을 가볍게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완은 가려는 그녀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꽤 다감한 배웅이다.
“당신한텐 고맙게 생각해. 여러모로.”
“응, 알고 있어. 내가 널 많이 돕긴 했지.”
“….”
“나야말로 비즈니스 하면서 권 회장님 덕을 많이 받았어. 그건 지완이 네 덕분이고. 게다가… 지루한 열애설을 몇 번이나 재사용하면서 이런저런 의혹들을 참 많이 덮었잖아? 사람들이 오해하는 너와의 애매한 관계를 나름 즐기기도 했어. 유치하지, 나도 참.”
그런 지완을 잘 알고 있는 유진이 장난스럽게 유감을 표했다.
“당신한테 즐거움이 됐다면야.”
지완은 어깨를 으쓱였다.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린 유진은, 못 말린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룸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유진은 뜻 모를 묘한 얼굴로 웃음을 그쳤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유진의 얼굴 위로, 지완의 얼굴은 더 이상 겹쳐 보이지 않았다.
*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이자, 한국의 자랑이죠? 권지완 선수님과의 관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또 한 번의 목격담이 크리스마스를 뜨겁게 만들었단 말이죠? 하하, 이런 질문도 이제 지겨우시겠지만요.]
[지겹긴 한데 일부러 사전 질문지에서 안 잘랐어요, 그 질문. 아니면 모두들 답답한 얼굴을 하고 계실 것 같아서.]
솔직하게 대답하는 유진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시끄러운 뉴스를 보고 싶지는 않아 막연히 채널을 돌리던 이현의 손이 멈칫했다.
재방송인가. 오랜만에 TV 앞에 앉아 있던 이현은, 화면을 끄려다 리모컨을 내려두었다. 금방 아침이 찾아올 줄 알았으나 잠들지 못한 새벽은 유달리 길었다.
[…하하. 그렇죠. 사실 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권 선수님과 유진 배우님의 첫 열애설을 제가 취재하기도…]
이현은 유리로 된 테이블 위에 발을 뻗고, 눕듯이 몸을 기댄 채 천천히 팔짱을 꼈다. 옆 병실의 어머니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다 잠이 든 상태였다.
[…이미 다들 알고 계실 텐데, 제가 권지완 씨를 한… 십년 전에 처음 봤어요. 지완 씨가 열여덟일 때요. 열일곱이었나…]
유진의 입에서 열여덟의 권지완이 언급되자, 이현은 허탈하게 말문을 터트렸다.
“…권지완, 난 네 인생에 끼어들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다. 네가 스스로 묶인 거야. 자기밖에 모르는 네가, 거만하게 굴다가 발을 잘못 디딘 거고.”
팔자에도 없는 고생, 사서 한다, 병신 새끼. 이현은 병실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해 금지 모드로 돌려둔 덕분에 쏟아지는 연락은 피할 수 있었지만, 웬일인지 마냥 조용한 핸드폰이 이상하게 거슬린다. 이현은 핸드폰을 매만지다, 팔뚝으로 제 눈을 가렸다.
“근데… 난 매번 너한테 끌려다니는 기분이거든. 즐기기는, 좆 까. 그것도 하던 새끼나 하는 거지.”
지완의 목에 걸린 줄이 제 발목에 묶인 듯하다. 적절한 표현이다. 치명적인 건 권지완이겠지만, 권지완과의 완력 싸움에서 언제나 이현은 질 수밖에 없으니까.
조용히 숨을 고르던 이현은 옆에 놓여 있던 리모컨으로 병실 블라인드를 더 어둡게 조절했다. 리모컨을 대강 던져놓고,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는다.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 연락처 목록에서 지완의 번호를 찾았다.
쓸데없이 권지완의 핸드폰이 떠오른다. 깨진 건 둘째 치고, 예전에 봤던 지완의 연락처가 떠올라 헛웃음이 터졌다. 코치와 감독 몇, 그리고 채이현. 결국 권지완을 이루는 건 그게 전부다. 유도, 그리고 채이현. 빌어먹게도 전자조차 후자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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