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51)

#125

“바로 며칠 전에 네 아버지가 무슨 전화를 받더니… 회사 일이 다시 불거질 수도 있단 말을 들었나 봐. 회장님 쪽이랑 연락을 할 줄 알았는데, 권 선수한테 먼저 연락을 하더구나. 물론 회장님 상황이 좋지 못하지만… 네 아버지랑 권 선수 사이가 가까웠다는 건 엄마도 몰랐네.”

“…아, 그래요?”

“권 선수가 네 아버지보고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다고. 시끄러워질 일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며…. 네 아버진 말 안 해도, 엄마가 봤을 땐 최 대표 짓인 거 같아. 최진명 대표, 기억하니? 그때, 그….”

“회사 일 말고, 다른 건요.”

채 이사의 일에 입 다무는 조건으로 하세민이 새로 판 대표 명함. 진작 얘기가 끝난 일을, 하세민이 다시 들쑤신 것뿐이다. 그 말은 지완을 통해 이미 들었다.

‘몸 굴리는 짓, 그만하려는 것 같던데. 정유진 사업에 발을 들이민 것도 돈 때문이었겠지만, 정유진이 쥐고 있는 고액 건들을 하세민이 상대하기엔 너무 급이 안 맞거든. 이번 도핑 논란으로 더 확실히 알게 됐겠지.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 정도는.’

‘그래서?’

‘연락이 왔었어. 채 이사님 건을 완전히 덮는 조건으로 내 지분을 좀 넘겨받고 싶다고.’

어머니의 오해를 정정해줄 생각 없는 아들은, 말을 끊고 덤덤히 그다음을 물었다. 다른 기사는 다 헛소리일 뿐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지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난 너한테 거짓말은 안 해, 이현아. 익숙한 그의 문장도.

“어머, 아들…! 그건 정말 아니야, 네 아버지가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다. 알잖니.”

어머니는 맑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당황을 숨기지 않았다.

“연말부터 그런 뉴스들로 시끄러웠잖아. 괜한 구설수로 진흙탕 싸움하자는 거야. 네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고. 너무 상스러워서 차마 입에도 담기가….”

상스럽다는 표현에서 짙은 불쾌감이 배어 나왔다.

이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저 소파 뒤로 몸을 기대며 고개를 높이 뉘었다. 가라앉은 두 눈에는 모호한 정적이 흘렀다.

*

지완은 건조한 입술을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입술을 떠난 손끝은 어느새 달라진 차의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가, 그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새벽의 한 가운데, 여전히 밖은 어두웠다. 비어 있는 조수석, 조금 더 낮아진 차체와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시트가 아까의 차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어때.”

[음, 많이 억울해 보여. 술에 많이 취했고, 시끄러워.]

전화가 연결되자 지완은 짤막하게 물었다. 도로의 빛이 드문드문 지완의 얼굴을 밝혔음에도 그 낯을 읽긴 힘들었다.

[근데 생각보다 연락이 늦었네? 기사 뜨자마자 나한테 하 대표를 부탁한 것 치곤.]

“…채이현이 궁금한 게 좀 많아서.”

[이현 씨? 다 얘기해 준 거야? 많이 놀라진 않았어?]

“자던데.”

[어머나.]

꾸벅꾸벅 졸던 이현이 떠오르자 굳어 있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색색거렸던 숨결이 귓가를 다시 간질이는 것 같아 지완은 입술을 축였다. 그래. 대단해, 채이현도. 지완은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정지 신호에 맞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텅 빈 옆자리를 흘깃 돌아보는 지완의 시선엔 미미한 즐거움이 비쳤다. 유진의 작은 소성과 말소리는 전화 너머로 흩어졌다.

[그래서 우리 채 선수님은 채 이사 관련해서 어디까지 알게 됐으려나.]

“관련 혐의, 그걸로 하세민이 뭘 얻었는지.”

[그게 전부?]

“….”

언뜻 냉랭한 기색이 날카로운 얼굴선 위로 올라탔다. 유진의 음성은 의뭉스러웠으나,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잠깐의 정적 후 유진이 다시 물었다. 일상적인 피곤함이 더욱 묻어 나왔다.

[…해는 늦게 떠도 아침은 금방 올걸? 오래 걸릴 것 같아? 나도 많이 피곤해. 내일 촬영도 있고.]

“가고 있어. 10분 정도.”

[그래? 그럼 하 대표도 그만 진정시켜야겠네. 시끄러워서 조금 짜증이 나려는 참이야. 네가 온다는 얘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알아서 해.”

때맞춰 신호가 바뀌었다. 전화를 끊은 지완은 흐리게 남아 있던 표정을 지워내고 액셀을 눌러 밟았다. 세단은 소리 없이 출발했다.

*

어두운 복도를 잔잔하게 밝히고 있는 조명은 추접하게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그곳들과는 달랐다. 룸과 룸은 서로 절대 마주 보지 않았고, 룸마다 서로 다른 통로로 이어지는 설계는 그 누구와도 서로 마주칠 수 없는 구조였으나, 그럼에도 모든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탓에, 이곳에 다른 존재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지완을 안내하는 남자는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을 뿐 이후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이곳에선 침묵만이 생존의 조건이다. 대신 그의 구두 굽 소리와 슈트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적당한 소음을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도, 트레이닝복 차림의 지완은 의아할 만큼 잘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남자한테 남자를 파는 곳에서 여자가 일할 필요는 없지.’ 언젠가 유진이 장난스럽게 뱉었던 말대로, 이곳에서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복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지완은 모자를 벗었다. 21층부터 25층까지를 차지하고 있는 유진의 사업장은 ‘바’라는 한 글자 안에 담기에 그 규모부터 무리가 있어 보였으나, 그런 것 따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지완이 있는 25층, VVIP만를 대상으로 비밀리에 운영되는 이 층에서는 더욱더.

“….”

지완이 룸에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룸은 바깥과 온전히 차단되었으나, 복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앉아 있던 유진이 미소를 작게 지어 보이며 지완을 맞이했다. 유진의 옆에 서 있는 남자 역시 좀 전 지완을 안내했던 남자와 비슷한 착장이었다. 숨 쉬듯 침묵을 지키는 것까지 동일했다.

“이래서 여긴 발들이기 싫어.”

지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바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독하게 진동하는 술 냄새 정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술병과 비어 있는 술잔보다, 사람 새끼가 문제였다. 제 몸 하나 못 가눈 채 소파에 쓰러져 있는, 아니 묶여 있는 건지 쓰러져 있는 건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하세민으로부터. 지완은 더한 불쾌감에 휩싸여야만 했다.

어둑한 룸 안에서도 오팔 빛을 반짝이는 테이블 위로, 지완이 툭 핸드폰을 꺼내 던졌다. 시선을 아래로 깐 채 유진 옆에 묵묵히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핸드폰 전원을 껐다. 어머, 핸드폰이 깨졌네? 얼핏 핸드폰을 살핀 유진이 물었다. 지완은 깨진 금을 따라 손가락 끝을 움직일 뿐 말이 없었다.

유진의 곁을 지켰던 남자는 소리 없이 룸을 빠져나갔고, 남은 건 셋뿐이었다. 그중 한 명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확인해 봐. 하 대표 말로는 채 이사님…, 아니, 이걸로 지분 일부를 넘겨받고 정말 끝내려 그랬대. 그거면 스폰에서도, 이 일에서도 손 떼더라도 안정적인 자금줄이 되겠다고 생각했겠지.”

“….”

“그런데 한석우 얘기가 나오니 울컥했나 봐. 그래도 이번 일은 홧김이란 거, 알지? 하 대표가 이걸 완전히 공개해서 자폭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잖아.”

유진은 세민이 지녔던 서류 봉투를 지완 쪽으로 내밀었다.

“세민 씨 은근 겁이 많아서, 진 선수 일로 위기감을 많이 느꼈을 거야. KADA1에서 어느 정도 눈을 감아준다고 해도, 위원장들이 놀아나 주는 건 내 손이지 하 대표 손이 아니고.”

지완은 외투를 벗으며 흘깃 봉투를 쳐다볼 뿐이었다. 유진은 그런 지완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거랑 별개로, 이것도.”

이어 유진은 조금 전, 세민에게 내보였던 것과 동일한 usb를 다시 테이블 위로 꺼내 들었다.

이현 씨 검사 결과에 장난을 치려 했던 거, 불가능한 일이란 걸 누가 몰라? 화풀이나 할 겸 이현 씨한테 논란 정도 만들고 싶었겠지, 뭐. 아무튼, 파견 검사관에게 로비한 기록이랑 미리 검사지에 손댄 증거들,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모아두긴 했는데… 이런 건 너무 유치해서 확인하는 것도 우스워. 유진은 매력적인 목소리를 나긋하게 늘이며 덧붙였다.

내가 하 대표한테 겁을 주긴 했는데, 사실 이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 대표가 시도하기도 전에 네가 초를 치기도 했고. 말을 마친 유진은 싱긋 웃었다. 동의를 구하듯 말끝을 올리긴 했으나, 이번에도 지완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알아.”

그러나 다분히 지루한 투로, 지완은 드디어 첫 대답을 입에 올리며 유진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피로감이 잔뜩 쌓인 어깨를 나른하게 풀어내자, 뚜둑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난 하 대표도 이해돼. 몸 팔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 들통 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여전히 말이 없는 지완을 응시하다가, 유진은 거의 비어 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정신을 잃은 세민을 힐끔 쳐다본 유진은, 조금 남아 있는 술을 조용히 들이마셨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석우는 너무 직접적이었잖아.”

“그런가.”

유진이 잔을 테이블 위로 다시 올려놓자, 지완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런 걸 왜 마시는 건지. 지완은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유진의 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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