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일어나.”
나지막한 지완의 목소리에 이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단숨에 들어 올렸다. 몇 번이고 눈을 끔뻑이는 이현의 얼굴엔 점점 당황이 몰려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뿐이었던 도로는 이미 벗어나 있었다.
“…설마 나 잤어? 아니지?”
이현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정신이 아득한 걸 봐선 존 것이 분명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졸았다는 걸 믿을 수 없다.
“그래. 잤어, 너.”
“그게 가능해? 대체 언제….”
제 아버지의 치부를 밝히는 지완의 말은 아무리 이현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놀랄 만한 얘기였다. 물론 지완은 남 말 하듯 무심했고, 그걸 치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채 이사가 그 일과 관련 있다는 걸 주워들었겠지, 하세민이 몸 굴리는 상대가 한둘은 아니거든. 여기까지 말한 지완은 잠시 말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대 위에선 입이 더 가벼워지는 법이니까. 덧붙인 지완의 표현에 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정유진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고… 그 상황을 재밌어 한 덕분에 일이 쉬웠어. 대표 직함 받고, 사업에 발을 들이미는 대가로 하세민은 입 다물기로 했으니까. 기억하려나. 정유진 부탁으로 네가 나한테 전달했던 건. 지완의 말에 이현은 어렵지 않게 그때를 떠올렸다. 네가 그때 물어봤다면 대답했겠지만, 넌 묻지 않았으니까. 지완은 심심하고, 뻔하게 말을 끝맺었다.
이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현을 흘깃 바라본 지완은 삐딱하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겹더라고, 나도. 이제 그만 정리할까 했는데… 네가 하세민 때문에 날 걱정하는 거, 그건 재밌으니까. 그래서 좀 더 둬보기로 한 거야, 날 위해서.’
‘….’
지완의 입꼬리와 그 입꼬리가 만드는 볼의 도랑은 늘 그렇듯 곱상했다. 그 뒤의 얘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지완의 그 보조개를 눈에 담은 이후로 졸기 시작한 거겠지. 기막힌 심경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으니.
“그러게. 가능하던데. 덕분에 얘기가 길어지는 건 면했어.”
“….”
“피곤할 만해. 넌 흥분하면 잠에 드는 편이잖아. 안 그래?”
지완의 짓궂은 대답에, 이현은 최대한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원치 않았음에도, 잠시 숨어있던 열색이 이현을 놀리듯 불거져 나왔다. 지완이 부드럽게 깨물었던 귓가와 끈질기게 장난을 쳐댔던 뒷목이 공연히 간질거린다.
이현은 별안간 떠오른 부끄러운 생각에 제 몸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자는 사이에 혹시 또….
“잠든 널 가지고 놀았을까 봐 걱정되나 본데, 내가 운전을 해야 해서.”
“….”
“잠시 쉬어갈까 고민은 했어.”
깎아낸 듯 굴곡이 선명한 주먹으로 제 입을 가린 지완은, 잠시 저만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더니 태연하게 차 키를 뽑아 들었다. 이현은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현아.”
“…왜.”
“누군가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지완은 이현의 모자챙을 더 깊숙이 눌러 내리곤 낯설지 않은 손길로 마스크를 씌웠다. 머리칼 사이로 귀에 살짝살짝 닿는 손길이 예상과 달리 조심스러워, 도리어 이현은 숨을 삼켜야 했다. 그는 굳은 이현의 입가를 하얗고 긴 엄지로 쓸어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개를 홱 돌린 이현은 조수석 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찬 공기는 잊지 않고 이현의 무딘 정신을 화들짝 일깨웠다. 이현은 방금 지완의 손길이 거쳐 간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를 맞닥뜨린 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시선을 돌리니 익숙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뚜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현의 목이 곱게 뻗었고, 그제야 눈에 들어온 거대한 건물의 외관에는 XX병원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이현은 지금 XX병원 본 건물의 뒤편, 본 건물과 마치 쌍둥이처럼 놓여 있는 부속 건물, 아주 낯선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병원?”
의아한 이현을 뒤로한 채, 지완은 직원에게 차 키를 넘기고 익숙하게 안내를 전달받았다. 지완이 짧게 대답하자, 이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친 VVIP로 인해 버선발로 그를 마중 나와야 했던 직원은 조용한 목례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지완은 작게 턱짓하곤 앞서 걸었다.
“여긴 왜?”
지완의 뒤를 따라 전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나서야, 이현이 마스크를 내리며 물었다.
“난 가 봐야할 곳이 있어서.”
지완은 카드키를 짧게 대고,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무심한 손은 주머니로 향하지 않고 관자놀이로 향했다. 지완의 습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는 손길에서는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신경질적으로 비췄으나 지완의 말투는 다분히 부드러웠다.
“이 병원에?”
“아니. 여긴 채이현, 너 때문이지.”
“기자들 피해서 입원이라도 하라는 건가. 이거 태성 안주인이라도 된 기분인데.”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야 나쁠 건 없지만.”
능글맞은 지완이 머리를 깔끔하게 쓸어 넘기자 단정한 이마가 곧게 드러났다. 지완은 퍽 잘 어울리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현이 지완의 말에 기가 막힌 코웃음을 치기도 전, 20층에 도달했다는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지완은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복도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적막했다. 차분한 톤의 복도를 따라 들어가던 이현은 멈춰서는 지완의 뒤에서 주춤거렸다. 지완은 흘깃 뒤에 서 있는 이현을 살피곤 가볍게 노크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일단 오늘 하루? 이현이 그의 뒷말을 되묻기 전에, 네, 들어오세요- 대답하는 온화한 목소리가 주의를 사로잡았다. 문을 연 지완은 자연스럽게 이현의 어깨를 끌었다.
“어머, 권 선수… 이 시간에…. 응? 아들?”
너무 오랜만에 어머니와 마주한 이현만이 피 안 섞인 둘의 자연스러운 대면을 경황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닌 어디까지 알고 계셔?”
“글쎄, 채 이사님이 어디까지 고백했느냐의 문제겠지.”
*
“새해 첫날에 아들 얼굴 보는 건 근 10년 만인 듯한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왜 못 주무고 계셨어요. 정말 어디 아프신 건….”
“걱정 마, 아들. 잠자리 바뀌어서 좀 뒤척였어. 권 선수 덕분에 엄마 대단한 호사 누리지? 예전에 사모님한테 들었는데, 이 층은 웬만하면 회장 직함 말고는 못 들어온다더라?”
어머닌 아들의 근심을 덜어주려, 일부러 더 순순하게 웃어 보였다.
이현은 과하게 넓은 병실을 슥 둘러보곤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뚝뚝한 아들에게선 살가운 말이 쉽게 터져 나오지 않았다. 피곤으로 뻑뻑한 이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길게 그려진 속눈썹 그림자가 함께 흔들렸다.
우리 아들 보려고 잠이 안 왔나 봐. 근데 아들, 훈련은 어쩌고…. 그녀의 목소리는 더한 걱정으로 내려앉았고, 이현은 묵언의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을 꺼내려 입술을 벌렸다가, 벙긋거릴 뿐 묻지 못했다. 이현이 주저하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다. 머뭇거리며 시선을 떨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현은 일순간 막연한 거리감을 체감했다.
“그리고… 이번 회사 일 관해… 부모가 돼서 아들 얼굴에 먹칠을…. 어휴, 네 아버지도 너한테 많이 미안하게 생각할 거야. 엄마도 그렇고…. 오래전 일인 데다가, 네 아버지도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만 잠깐…. 너도 클 만큼 다 컸는데 엄마가 무슨 말을 하겠니. 아니야, 곧 정리될 거니까 걱정은 말아, 아들. 넌 네 일만 잘하면 돼. 이번 일로, 우리 아들이 나나 네 아버지한테….”
세월이 고풍스럽게 스며든 그녀의 얼굴이 새삼 달리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계셨구나. 아버지 퇴직 이후에도 관계가 지속됐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나? 그러고 보니 저번 논란 때도 어머니는 사모님 곁에 계셨지. 불안하셨나. 이현은 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아들, 우리 아들은 너무 주변에 무관심해서 어렸을 때부터 늘 걱정이야. …현아, 이젠 이것저것 좀 신경 쓰고 살아. 너무 총만 보지 말고. 인생은 점수판에만 달린 게 아니야.’
일전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라 자조적인 웃음이 목구멍을 막았다. 제 부모를 비웃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사실 그건 정말 이현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그간 몰랐던 부모의 전혀 다른 일면을 직면한 기분이 생소했을 뿐이다.
“늦었으니 일단 주무세요.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요.”
“엄만 이미 다 깼어. 넌 얼른 자. 눈이 빨개.”
“…전 좀 자면서 왔어요.”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물 한 모금을 들이켠 이현은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미 지완은 자리를 뜬 후였다. 이현의 목울대가 껄끄럽게 흔들렸다.
“그럼 권 선수가 운전해서 온 거야? 이 시간에 포항에서 여기까지? 어머, 현이, 너 놀랐을까 봐 그랬나 보다. 여러모로 고마워서 어쩌지. 이 병실도 그렇고, 네 아버지 일도 그렇고….”
그녀는 아들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에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 아들의 무심함에 대한, 오래 묵은 답답함도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