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그 이름을 꺼내버린 감독은 지완을 힐끗 쳐다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지완이 고개를 살짝 돌려 반응했다. 편하게 말하세요, 따위의 건방진 표정으로. 그 정도면 나름의 예우를 차린 것이다. 이 와중에 이현은 그런 지완을 보며 짐짓 놀라고 있었다. 쟤가 웬일이야.
“그때처럼 공조 의혹, 차명 계좌, 명의 대여니 뭐니… 그런 의심들만 엮여서 피곤해진다고. 권 선수도 검찰 불려가고 고생깨나 했잖냐. 온갖 가십들까지 줄줄이 굴비 엮듯이 엮여서 시끌시….”
“….”
감독 대신 박 코치가 마저 말을 잇다가, 네, 여보세요? 이내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말을 멈췄다.
지완은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떨하게 마주 본 지완의 얼굴은 이현의 예상과 다르게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평소보다 더 굳은 그 분위기에서 이현은 이질적인 차이를 감지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지완이었다. 그게 이현의 의구심을 부풀렸다.
방금 전까지 제 좆을 물던 그 입술을 매만지는 지완의 손끝이 왠지 모르게 히스테릭하다. 대충 걸친, 젖어버린 옷은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지완은 툭툭 구겨진 옷 밑단을 털어낸 후 걸음을 옮겼다.
받지 않는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전화를 거는 듯한 꼴이…. 권지완, 쟨 왜 저래? 지금 어딜 가? 누구한테 전화를 저렇게….
“…감독님, 이거 상황이 좀 꼬이는 듯한데….”
이현이 현관문으로 향하는 지완의 뒷모습을 의뭉스럽게 응시하는 사이, 벌써 세 번째 전화 통화를 마친 코치는 난처한 얼굴로 떠듬떠듬 운을 뗐다. 감독에게 말을 전하며 곤혹스럽게 이현을 쳐다본다.
“방금 전담팀에서 연락 왔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채 이사님 출국한 거 맞고… 도피성 출국 정황 파악됐답니다. 이거 저번 권지완 때처럼 이현이가 연관됐냐, 안 됐냐가 지금….”
이현에게 뒷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마도, 아버지가 논란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상황에 직면한 이현에게,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회사 일이야, 그게 뭐든 이현이 알 바 아니니까.
중요한 건 쟤다. 저 새끼의 태도, 분위기, 표정. 느낌이 묘하게 이상하다.
지완을 신경 써 목소리를 잔뜩 낮췄음에도, 방 안을 채우는 코치의 말은 지완의 신경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러나 지완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겉옷을 챙길 뿐이다.
그 모든 작태에, 이현은 본능적인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감독님, 전 그 일이랑 연관 없으니까 걱정 말고 있으세요. 협회에도 말 전해주세요.”
지완의 뒷모습에 시선이 고정된 이현은, 도리어 감독과 코치를 안심시키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겉옷을 챙긴다.
“야 이놈아, 아니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
“제정신이냐? 싸돌아다니다가 기자들이라도 만나면….”
“권지완 차 있어요. 머리가 좀 복잡해서요. 근처에서 바람만 쐬고 올게요.”
마치 제 것인 양 지완의 차를 들먹이는, 단호한 이현의 음성이 지완을 붙들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채려던 지완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제야 지완은 얼굴을 설핏 구기며 이현을 돌아보았다. 마주 보는 시선은 오직 정적이었다. 멈춰 있는 지완을 대신해, 이현이 그의 뒤로 팔을 먼저 뻗었다.
“…야, 권지완. 너 지금 어디 가냐?”
이현의 목소리는 단정하고 나직했으나, 동시에 선명하고 냉정했다. 조금 전, 둘 사이에서 이현이 뱉었던 낯뜨거운 호흡은 날카롭게 식어 있었다.
“너 뭐 알고 있지.”
지완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조금은 세게 짓누르며, 이현이 그를 복도로 몰아냈다. 지완은 반항 없이 뒷걸음칠 뿐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고요한 그의 시선이 대답을 대신했다.
“씨발, 이번에도? 또?”
주인 없는 방에 감독과 코치만을 남긴 채,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이현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실렸다. 욕설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으나 담긴 게 분노는 아닌 듯했다.
뜻 모를 지완의 시선에 오롯이 응하며, 이현은 그대로 지완의 손목을 잡아챘다. 지완은 여전히 이현의 행동에 순순히 따를 뿐이었다.
지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뺏어 들자, 꺼지지 않은 화면에는 같은 번호로 도배된 통화 목록 창이 이현을 반겼다. 고작 번호 몇 개 저장된 그 폰으로 지완이 끊임없이 전화를 걸던 상대는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번호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현은 순간 불쾌한 기억의 조각을 끄집어냈다.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왜 네가 하세민한테 전화를 해?”
*
“너 대체 뭐야?”
“….”
“몰랐다고 발뺌할 생각 하지 마. 병신 취급도 정도껏 해.”
보닛을 내려치는 이현의 주먹이 매섭다. 부끄러울 만큼 진득한 호흡이 오갔던 것이 고작 한 시간 반쯤 전, 그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엔진 소리마저도 모두 차단된 차 안을 메웠다.
지완은 어설프게 굴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뻔뻔하게 나오지도 않았다. 꽂혀 드는 이현의 시선에 응하지 않고 전방을 주시할 뿐이다. 누리끼리한 가로등과 헤드라이트만이 어둑한 밤길을 밝히는 적막한 도로는 얼핏 선수촌을 떠오르게 했다.
지금 지완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럴 생각 없어.”
“….”
“요즘 네 얼굴을 읽질 못하겠다니까, 이현아. 그건 또 무슨 표정이야? 채 이사님에 대한 실망?”
“실망?”
“돈 굴리는 사람 중에 손 깨끗한 사람 없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고 있잖아. 아무리 그쪽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호텔 근처를 벗어나 어느새 대로변으로 빠져나온 지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회피나 조롱은 분명 아니었으나 이현의 감정적인 질문에 비하면 퍽 시원찮은 반응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내가 지금 우리 아버지 도덕성 논하자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네 차에 이렇게 올라타 있는 것 같냐?”
울컥 솟았던 화도, 별 볼 일 없는 지완의 대응에 한풀 꺾인다. 하? 이현은 허탈한 한숨을 덧붙였다.
신호에 걸린 지완은 드디어 고개를 돌려 이현을 마주했다. 묘한 시선으로 이현을 바라보다가, 제대로 말리지 않아 제멋대로인 이현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긴다. 난데없는 손길에 이현의 눈썹이 따라 치켜 올라갔으나 지완은 스스럼없이 굴었다.
춥진 않아? 한겨울에도 따뜻하다 못해 과하게 더울 정도인 차 안에서, 지완은 덤덤히 이현의 상태를 물었다. 어, 존나 따뜻해. 근데 지금 그걸 물을 타이밍이냐? 응, 난 그게 제일 궁금한데. 태연한 지완은 바뀐 신호에 다시 액셀을 지르밟았다.
“네가 채 이사님 일을 이해한다면… 다행이네. 그걸 제외하고 나머지 기사들은 전부 헛소리니까. 적어도 네가 더 놀랄 일은 없어.”
그럴 줄 알았어, 알고 있었지, 넌? 이 미친 새끼는 뭘 어떻게…. 예상했던 대로다. 지완은 그저 느긋하고 담백하게 말을 늘였다.
무서울 만큼 친숙한 이 흐름에 이현은 말없이 창문을 내렸다. 차디찬 바람이 지체 없이 이현의 얼굴을 휘덮는다. 열을 좀 식힌 뒤에야 이현은 읊조렸다. 앞뒤 없이 분을 토했던 예전과는 달랐다.
“…그게 내가 제일 어이없는 부분이라고.”
이현의 허탈한 음성은 까칠한 바람 사이로 흩어졌다. 창문틀에 머리를 처박을 기세로 이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완은 그런 이현을 힐끔 쳐다보더니 조수석 창문을 다시 올린다.
바람이 채워주었던 잠깐의 배경 소음은 사라지고 또 조용한 숨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지완은 흐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핸들을 꺾었다. 이현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나름 위로였는데. 소질이 없나 봐, 내가.”
지완은 가볍게 입술을 물었다.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엔 진지한 안타까움이 비쳤다. 우스운 일이다. 지완은 이어 한 손으로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현이 뺏어 들었던 바로 그 핸드폰에는, 액정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금이 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현은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전, 이해 못 할 상황 속에서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둘렀다가 그만 문손잡이에 지완의 핸드폰을 처박은 것이다.
어? 시발? 빠직거리는 소리에 이현도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금은 선명했다. 화면에 불은 들어왔으나 반절 정도가 새까맣다.
이현은 어정쩡하게 핸드폰을 다시 내밀 수밖에 없었고, 지완은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물론 책망도, 사과도 없었다. 그런 게 둘 사이에 있을 리가 없다.
이러니 코미디지. 남들이 보기에 둘은 코미디일 수밖에.
지완은 어딘가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새까만 화면은 번호를 보기 힘들었으나 아마 세민이리라. 연결음은 몇 번 가다가 끊기고 말았지만.
“아무튼 넌… 나도 모르는 우리 집 일을…. 대체 네가 뭘,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이젠 한탄과 비슷해진 이현의 혼잣말에, 똑딱, 천천히 혀를 차던 지완은 대뜸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 나 의심해? 치정극에서 자주 보는 그따위의 말을 너무나 범상하게 내뱉은 지완은 제가 생각해도 제 말이 우스운지, 짧은 헛웃음 덧붙였다.
“…뭐? 네가 뭘?”
분명 지완의 저 웃음은 자조다. 그러나 바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현은 멍청하게 되물어야만 했다. 뭐긴, 기사들. 지완은 짧게 대꾸했다. 웃음기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