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51)

#118

한차례의 물벼락과 함께 남아있는 머뭇거림도 사라진 것일까. 다시금 차분해진 이현을 바라보며 지완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이현은 저지를 느릿하게 벗어내었다. 어차피 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지완이 저지를 던진 방향으로 가볍게 던져보았으나 이미 무거워진 이현의 것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지완은 그런 이현의 다음 행동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후, 버거운 짐에서 한차례 벗어난 이현은 짧은 호흡을 내리 쉬더니 그새 철퍽해진 자리에서 한 걸음 벗어났다. 진작 축축해진 소매를 끌어다 제 턱과 목울대를 느릿하게 쓸어 넘기며, 지완이 처음 자신을 내려놓았던 그 위치에 다시 걸쳐 앉았다. 단정한 이현의 음색이 습도 높은 욕실을 울렸다.

“맨정신이야. 네 덕분에 물벼락까지 맞고 정신이 아주 확 깼어.”

“….”

“…내가 지금 이 상태에서도, 네 손에 흥분을 할까?”

“어느 쪽이었으면 하는데.”

지완의 무덤덤한 물음에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현의 눈빛은 고요했으나 이름 모를 일렁거림이 짙은 눈동자 속에 서려 있었다.

“당연히 아니길 바라지.”

“난 그 반댄데. 아무래도 내 쪽이 정배인 것 같고.”

“….”

“채이현, 넌 내기는 하면 안 되겠다.”

지완은 퍽 난감하다는 듯 콧잔등을 가볍게 찡그렸다. 이현은 헛웃음을 뱉어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현의 얼굴 위로 익숙한 지완의 모습이 겹쳤다.

“그래? 그렇게 자신이 있어서 계속 서 있기만 하냐? 비 맞은 개새끼처럼?”

비 맞은 생쥐 꼴, 멋이라고는 하나도 나지 않는 자태로 퍽 거만해진 이현은 몸을 뒤로 살짝 젖히며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 진짜 코미디네.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현 자신도 이유를 모를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뭐가 됐든 여기까지 온 건 결국…. 자책보단 야릇함에 가까운 조소였다.

비로소 지완의 시선은 응답을 받았다. 잠자코 기다리던 지완의 친절은 정확히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

지완의 얼굴선을 타고 내려온 물방울들이 뚝뚝 이현의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찰박거리는 소리는 지완과 이현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꾸만 엉겨 붙는 젖은 옷의 소리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지완은 이현의 호흡으로 장난을 치며 어긋난 박자로 이현을 몰아세웠다. 이현이 지완의 흐름에 익숙해지려 순간 자세를 고쳤고, 이현이 숨을 진정하는 순간 고개를 틀었다. 시시각각 주의를 빼앗긴 이현은 몇 번이나 벽타일에 머리를 부딪혀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이현은 지완의 혀를 작게 깨물었고, 그건 또 다른 자극이 되어 지완의 짓궂은 흥분을 돋우었다.

지완은 아주 익숙하게, 그리고 매우 능숙하게 이현의 옷을 벗기려 했으나, 이현이 간신히 그 손을 제지했다. 홍조가 옅게 오른 얼굴로 떨리는 호흡을 색색 내뱉는 이현은 턱에서 투두둑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손등으로 훔쳐내곤 입술까지 벅벅 닦아냈다.

“권지완, 너부터 벗어.”

“…하하. 대단한 갑질이네.”

“싫어?”

이현은 흥분과 물기가 척척히 배어 있는 두 눈으로 한껏 지완을 쏘아보았다. 지완은 이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작게 놀란 듯했다.

“전혀.”

“잘 됐네. 싫어도 봐줄 생각은 없었거든.”

그러나 이현의 제지에 굳었던 입꼬리는 이현의 말 한마디에 다시 해사하게 풀어졌다. 얄밉게 올라간 입술 선을 타고 다시 물 한 방울이 지완의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안 그래도 몸 선을 다 드러내던 운동복은 물에 젖어 지완의 몸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어깨선부터 팔의 근육, 광배, 그리고 허리까지, 굳이 옷을 벗지 않아도 이미 벗은 거나 다름없는 지완이 옷 끝을 잡아들자, 다시 이현이 지완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정말 스트립쇼라도 시키려고? 지완은 장난스럽게 물었으나, 그의 말투에선 미처 숨겨지지 않은 조급함이 배어 나왔다.

단호하게 지완의 손목을 붙잡은 이현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낯뜨거운 흥분과 마주해야만 했다.

이현의 손끝에 닿은 지완의 박동은 민망할 정도로 솔직했다. 태연히 농지거리를 내뱉는 그와 달리 입맞춤보다 더 진하게 이현을 내리누르는 그 박동이 새삼스레 이현의 온몸을 짓이겼다.

그럼에도 지완에게서 부끄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현은 그 노골적인 흥분에 전이되듯, 말라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벗길 거야.”

“….”

“불만 있어? 맘껏 먹고 맘껏 버리라며.”

지완은 이현의 직설적인 요구에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가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찡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완이 멈칫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현은 이상한 곳에서 만족감을 얻고 한발 더 나아갔다. 어딘가 기고만장했다.

그런 이현의 흐름을 깨는 건 푸스스 흩어지는 지완의 웃음소리였다. 지완은 고개를 잘게 털어 머리칼에 맺힌 물방울들을 후두둑 떨어트리고는, 크고 길게 뻗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끅끅대는 경망한 웃음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으나, 위아래로 들썩이는 어깨 라인이 그의 즐거움을 대신 보여줬다.

지금 비웃어? 아니, 과하게 흥분해 버려서. 그래서 불만 있냐고, 없냐고. 이현이 한껏 불퉁스럽게 다시 묻자, 지완은 그제야 웃음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있을 리가 없지, 이현아. 얼마든지. 네 맘대로 해.”

흥분된다는 지완의 말은 그저 말뿐이 아니었는지,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전보다 가슴 근육이 크게 박동했다. 아직 촉촉하게 젖어 있는 지완의 입술을 훔쳐보던 이현은 괜스레 고인 침을 몰래 삼켰다.

지완은 이현의 말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듯, 등을 편히 기대고 앉아 두 손을 들었다. 욕조 위에 걸터앉아 있던 이현에게 지완을 내려다보는 이 시선은 새삼 낯설었다. 위에서 아래로 지완을 내려다보니….

“….”

확실히 더 야했다. 물기를 머금어 더 짙어진 속눈썹이나, 노르스름한 조명 아래서 유독 더 밝은 홍채부터, 모든 게. 이 순간만큼은 이현도 그 선정적인 감상을 떨쳐내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성 없는 지완의 모습에, 이현의 현실적인 갈등들도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갔다.

“팔 들어.”

“팔?”

“가만히, 팔 들으라고.”

“….”

이현은 지완의 옷자락을 쥐고 명했다. 그 말투는 명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만큼 이현은 결연했다.

그런 이현을 무척이나 즐거운 얼굴로 감상하던 지완은 또 한 번 멈칫했으나, 곧 천천히 욕조 위로 양 팔을 걸쳤다. 찰나에 그의 눈꼬리가 가뜬하게 올라가긴 했지만, 그건 못마땅함보다는 흥분 어린 흥미로움에 가까우리라.

지완은 이현의 말에 순순히 따르면서도, 역설적인 정복욕에 점점 사로잡히고 있었다. 웃음 중간중간 새어 나오는, 짐승 울음소리와 비슷한 낮고 목 긁는 신음 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물을 잔뜩 먹은 기능성 티를, 그것도 몸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운동복을 벗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현은 긴장으로 인해 자꾸 미끄러지는 손끝에 힘을 주고 옷자락을 들쳐 올렸다.

동시에, 섬유 위에서보다 훨씬 더 외설적인 선들이 뚜렷하게 더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치골과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대칭을 이루는 복사근은 이현의 긴장된 시선을 이끌기에 충분했으나, 무엇보다….

“너 가슴… 진짜 크다.”

두툼한 가슴 아래에서 한 번 걸린 티셔츠는 이현이 다시 옷자락을 고쳐 잡고 말아 올려야만 했다. 운동복에 압박이 되어 있던 것인지, 가까이서 보니 더 크게 느껴지는 지완의 가슴에 이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사를 내뱉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완의 몸이 좋다는 것쯤은, 이미 많이 들어 왔고, 보아 왔으며, 새삼스레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아직 마르지 않은 물줄기가 가슴 사이의 굴곡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의 틈에 맺히는,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놀라워했다.

그것을 보고 처음 느낀 것은 평생토록 지녀왔던 부러움이었고, 바로 다음으로 찾아온 건….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내가 아닌 거 같은데.”

“…이런 몸, 갖고 싶은데.”

이현은 지완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이현의 손은 남자치고도 큰 편이었고, 가지런했으나 강인했다. 그러나 그런 이현의 손으로도, 지완의 가슴 한쪽도 채 가려지지 않는다. 허, 이현의 탄사가 다시금 터져 나왔다. 감탄일까, 탄식일까. 애매했다.

이현은 탄탄하고 묵직한 가슴 근육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이현의 굳은살 가득한 손마디가 지완의 유두를 훑자, 지완의 몸이 움찔거렸다. 지완은 숨을 짧게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갖는 데, 여러 방법이 있잖아. 나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

“가지고 싶으면 가져야지.”

지완은 말끝을 끌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고작 한 번의 깜빡임이 요물처럼 야릇하다. 가슴 바로 위까지 옷을 말아 올린 채, 두 팔을 뒤로 늘어트린 지완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수동적이었고, 순종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라. 그 명쾌한 말 한마디의 온도는 이현의 숨을 목 끝까지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늘 이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지완에게 자신의 여유를 갈취당하는 이현은 지완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 목을 조르는 것처럼 손에 살며시 힘을 주며, 이현이 담담하고 차분하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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