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51)

#117

“솔직히 말할까. 이현아, 네 의심은 내게 기회거든. 그러니까 넌 확인 외에 다른 이름을 굳이 붙이려 하지 마. 내 욕정에 또 어쩔 수 없이 이끌린 걸로 쳐도 좋고.”

“…야, 권지완. 너 지금 날 꼬시는 거야, 아님 어르는 거야?”

“글쎄, 둘 다?”

대답 대신 지완을 빤히 바라보는 이현은 언뜻 시시해 보일 정도로 시큰둥했다. 그러나 곧 그 차분한 입술을 짓이길 듯 깨문다. 붉은 입술은 일순간 희끄무레해졌다가 이전보다 훨씬 새빨간 빛을 띠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는 네 말에 내가 혹하는 게, 분명 정상은 아니지. 확인이라는 건 핑계다. 자신 있게 부정하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서부터 이현은 이미 수렁에 빠진 것이다. 아, 씨발, 이현은 짧지만 농도 짙은 숨을 토하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이 모두 빠진 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지완은 눈을 깜빡였다. 말하라는 뜻이다.

“…내가 방금, 아주 짧은 순간에, 아니, 찰나에… 네 어설픈 수작에 혹했어.”

“어설펐다니 유감이네.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지완이 대충 빈정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그 점을 이현도 모르지 않았다. 한결 숨이 편해진 이현이 피식거리는 웃음과 함께 질문했다. 독백에 가까웠다.

“이러는 내가 정상은 아니지? 아니지. 아니겠지.”

“질문이 그거야?”

“아니. 내 말은… 나 지금 많이 병신 같냐?”

제가 생각해도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럼에도 지완은 이현의 말에 조소를 터뜨리지 않았다. 진중하게 고민이라도 하는 것인지, 가볍게 제 입술을 손끝으로 훑어 내고는 이내 손을 뻗어 이현의 흐트러진 앞 머리칼을 살랑 치워낸다.

“그 말뜻이… 네가 틈을 보이고 있냐는 의미라면, 부정할 순 없지.”

졌다. 이현은 허탈한 두 눈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지완을 상대로 승복한 패배는 아니었고, 이현 자신을 향한 승복이었다.

“패배감이 어린 눈빛이네. 그거 꽤 위험한데.”

그 눈을 읽은 지완은 자연스럽게 이현의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카드를 가로챘다.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이현을 간파한 지완의 능숙함이 척척히 배어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똑바로 확인해봐. 네가 어떤지. 그게 아니면… 내가 어떤지?”

“….”

“이현아, 넌 또 내게 휘말리는 거지. 내 탓이야. 지금 좀 급해졌거든.”

자신의 잘못을 먼저 시인한 지완은, 그대로 문을 열고 익숙하게 이현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스물여섯을 맞이할 여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지완이 잡아끈 것은 스물다섯의 마지막 밤이기도 했다. 그 연장선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가며, 아니, 속수무책이길 바라며, 젠장, 이현은 속으로 통감했다.

이 빌어먹을 제야의 종소리.

단숨에 온 호흡을 하릴없이 뺏긴 이현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종소리에 악담을 퍼부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하면 머릿속에서 종이 울린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낭설이 사실인 양, 혼란스러운 이현에게 하늘이 유치하게 우롱하는 것처럼 비극적으로 때를 맞춰.

어디에선가 분명히 들리는 그 소리를 저주하며 이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현의 불민함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했다. 어쩌면 더 이상 불민함의 영역만은 아닐지도.

*

“…찝찝해.”

“그래, 나도 동감해.”

질퍽하고 끈적하게 입을 맞추는 와중에 나온 말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일상적인 음성이, 더운 신음 소리와 민망한 침 소리를 제외하고는 적막이었던 방 안을 처음으로 메웠다.

정말 이현과 지완다운 흐름이었다.

“…근데 왜 안 비켜?”

이현은 숨을 짧게 몰아쉬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이현은 아주 빠르게, 하나둘 인정해 가는 중이었다. 예상했던 것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그 지점이 충격이었다. 내가 이게 정말… 가능한 사람이었다니.

남자와의 키스가 가능했다. 정정한다. 권지완과의 키스가 가능했다. 바로 이 순간마저도, 권지완의 두툼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제 호흡이 빼앗기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마저도. 이현은 놀라워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권지완은 키스를 꽤 잘한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아주 잘한다. 성에 관련해서는 같은 나이대의 남자들보다 무덤덤한 이현조차도 단박에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렇다고 씻을 동안 기다릴 여유는 없거든. 적어도 난 그래, 이현아.”

입술에서부터 차츰차츰 내려가다가, 이현의 목에서 입을 뗀 지완은 그대로 이현을 가지고 욕실로 향했다. 가지고 가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쓸 수 없으리라. 마치 가방을 들 듯, 혹은 바닥에 내려두었던 덤벨을 다시 들어 올리듯 지완은 이현을 한 손으로 챙겼다.

더 웃긴 건 그 터무니없는 손길에 이제는 편안함마저 느끼는 이현 자신이었다. 익숙하다. 그래, 익숙해….

다만 널찍한 욕조에 자신을 앉혀두고는 반쯤 풀어 헤쳐진 겉옷을 그대로 벗어버리는 지완을 향해 떠듬떠듬 물었다. 지완은 마치.

“설마…. 뭐 하냐, 너 지금? 아니지?”

“무슨 설마?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아마 맞을걸.”

지완이 걸친 트레이닝 저지는 저 멀리 던져졌다. 몸에 딱 들어맞는 운동복 상의의 밑단을 양손으로 잡고 그대로 벗어 올리려는 지완의 손목을 이현이 대뜸 잡아챘다.

“넌 정말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어?”

“찝찝하다며. 씻는데 옷을 입고 씻을 순 없잖아.”

“…나를 여기 앉혀 두고?”

욕실의 조명은 아주 연한 주황빛을 은은히 띠고 있었으나, 그런 색감의 차이는 둘째 치고 일단 너무 밝았다. 침대 등을 제외하고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둑했던 밖과 다르게, 이곳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밝았다.

무엇보다, 이현은 제정신이다. 일생일대의 미친 일탈을 도와줄 술기운조차 없다.

“아니, 같이.”

지완은 단호했다. 다른 선택지는 고려해본 적도 없는 것처럼, 그게 당연한 것처럼, 무척이나 심드렁한 단호함이었다. 이현의 두 눈은 지저분하게 방황 중이었다.

“…절대 못 해.”

지완의 갈라진 전완근에 시선이 닿고 나서야 이현은 입을 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한다. 그런 남사스러운 짓 같은 건.

“절대라니. 어렸을 때 샤워 같이 한 사격부 여럿 있잖아. 그 새끼들 혹시 다 죽었어?”

“그게 같아?”

“안 죽었다는 소리네.”

지완은 진실로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현은 태생적으로 시각 영역에 약했다. 아주 여러모로. 정확히 말하자면 약하다기보다, 예민했다. 예민해서 사격에 재능을 보인 건지, 사격을 하다 보니 예민해진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지만, 뭐가 됐든 그 남다름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눈앞에서 아무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 지완의 모습에, 이현은 당혹스러웠다. 지완의 속살은 아직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완이 제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어젖히는 행위 자체가 지나치게 민망했다. 척척한 옷이 빈틈없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꼴이… 더 야하게 보이는 건 내 문제일까, 아니면 확실히 비싸 보이는 이 조명이 돈값을 하는 것일까.

지완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실루엣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현은 널찍하고 두껍게 자리 잡은 지완의 가슴 근육을 바라보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야 말았다. 저 홀로 화들짝 놀라 침을 꿀꺽 삼켜가면서.

이현의 목울대는 그 움직임을 숨기지 못하고 턱없이 도드라졌다. 지완은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현아, 흥분을 돋우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면 성공적이긴 한데… 애쓸 필요 없어. 이미 흥분은 과할만큼 충분하니까.”

“…뭐가? 도대체 어디서 흥분이 돋는데.”

“네 모습이지. 나야 말로 네가 어느 부분에서 자극을 받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

“아, 방금은 거짓말이야. 알 것 같긴 해.”

지완은 제 몸을 가리키듯, 살짝 내려다보며 눈짓했다. 이현은 지완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완이 말끝에 터뜨린 야트막한 소성은 욕실 안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내 생각보다 더 네 마음에 드나 봐.”

그 낯뜨거운 말장난에 민망함은 배가 되어 이현의 뒷목을 붉혔다. 더는 버틸 수 없다.

“…야, 미쳤…!”

지완은 그대로 욕실을 빠져나가려는 이현을 붙잡더니 머뭇거림 없이 물을 틀었다. 욕조 옆 샤워부스에 고정되어 있는 레인 샤워 헤드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정말 비처럼 쏟아진 물은 욕조 바로 앞까지 튀었고, 덕분에 난데없는 여우비에 호되게 당한 사람처럼 둘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별안간 이현을 덮친 물벼락은 어설프게 남아 있는 이현의 잡념들까지 모두 휩쓸어갔다. 그걸 지완은 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확실하다.

“…안 꺼?”

“네가 탈의를 어려워하니까. 처음으로 옷 입고 씻어보려 했는데, 이것도 별로라면 어쩔 수 없지.”

“….”

“근데 이미 젖어버려서 어쩌나.”

말을 마친 지완이 물을 잠갔지만, 둘은 이미 흠씬 젖은 상태였다. 지완은 겉옷을 벗어 그나마 티 한 장뿐이었어도, 이현은 아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두꺼운 저지는 축축 늘어졌다.

이현은 눈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손으로 훔쳐냈다. 물기를 머금고 곱슬기가 더 또렷이 올라온 머리칼은 이현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함께 찰랑거렸다.

“…더럽게 무겁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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