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51)

#116

“설령 있다 해도….”

“나한테는 말 안 한다고? 너무하지, 그건. 내가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잖아?”

“말하면? 말하면 뭐 어쩌게. 그 조건에 널 끼워 맞추기라도 하게?”

하하, 미친놈. 이현은 일부러 적당히 말을 돌렸다. 내가 곧이곧대로 말하겠냐?

이현은 정연의 입을 막은 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장난이라고 한들, 정연마저도 이현의 조건을 듣고 지완을 떠올리지 않았는가. 만약 지완이 듣는다면, 그 얼토당토않은 연상에 확신을 가질 게 뻔했다. 그딴 건 권지완의 거만함만 배불리는 꼴이다.

“글쎄, 과하게 낭만적인 걸 네가 선호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 내 입에서 지금 노력이 몇 번째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노력해 본다니까. 채이현이 나를 너무 불신한다는 게 좀 안타깝지만.”

“….”

“난 거짓말 안 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지완은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끝을 물었다. 이현이 떠름하게 입술을 물었다가 빠르게 풀었다. 여유로운 척을 하는 것도 재능이다. 재능 없는 이현은 무척 노력 중이었고.

“과하게 불호니까 걱정 마. 대체 뭘 보고 배운 거야…. 이게 네가 말하는 작업이야? 제발 아니길 빈다.”

말리지 말자. 태연해지자. 권지완이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현의 노력에 비해 그런 것쯤은 아주 우스울 정도로, 천부적으로 체화되어있는 지완은, 이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작게 입을 벙긋거렸다. 정말?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그리곤 이현의 입에서 꼭 이상형 얘기를 듣고야 말겠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이현의 방문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이러니까 더 궁금하네. 말해 봐.”

“….”

“부탁이야. 지금 무척 간절해.”

능글맞은 그 작태에서 호기심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애당초 지완에게 이상형 따위가 중요할 리 없다.

오히려 ‘내 이상형이 뭐든 넌 아니야.’ 같은 말로 이현이 먼저 운을 뗐다면, ‘이현아, 내가 이상형 따위에 구애받는 타입이 아니라서. 다들 그러더라고. 이상형과는 달랐다고.’ 정도의 오만한 대답으로 대화에 종지부를 찍어버릴 지완이었다.

다만 지완은 지금, 회피적인 이현을 간파한 것이다. 그 틈을 포착한 지완이 그냥 이현을 보내줄 리 없다. 또 그런 지완을, 이현이 모를 리도 없다. 서로를 이해하진 못해도,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전부 원치 않게 체득해버린 것이지만.

“말하기 전까지 안 비킬 거지, 너.”

“아마? 아니면 따….”

“아니면 따라 들어오겠지.”

잘 아네. 지완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질리는 새끼. 이현은 익숙한 환멸을 느끼며 단언했다. 일단 넌 아니야.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구체적으로 말해 봐. 굉장히 기대되니까.

이제 막 스물여섯이 된 지완과 이현은 제야의 종소리는커녕, 새해를 알리는 뉴스 한 줄도 접하지 못한 채로 여전히 방문 앞에서 유치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애당초 새해 따위는 이 둘에게 관심 밖의 얘기였지만.

“비흡연자. 넌 확실히 불가능한 거.”

“이런, 이기적이네. 넌 피우면서?”

“어, 나 존나 이기적이야.”

“뭐, 금연이 새해 목표로 제격이긴 하지.”

디데이도 코앞이고. 지완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 기만적인 반응에 이현은 마른 얼굴을 두 손으로 크게 쓸어내리고는 따박따박 말을 이었다.

“이쪽 바닥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

“….”

“비슷한 맥락으로 운동이랑은 거리 먼 사람. 또… 성격이 너무, 너무 순하고 착한 사람. 나한테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 나 없으면 죽겠다고 할 정도로…. 눈앞에 안 보이면 막 불안한, 그럴 정도로….”

와, 진짜 최악인데. 이현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조건들과 정반대의 것들을 나열했다. 죽었다 깨어도 넌 아니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건데, 말하다 보니 이렇게 애를 쓰고 열을 올리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숨 좀 쉬어, 이현아.”

그러나 이현이 애쓴 것에 비해 지완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너무 노골적인 이현의 의도에 코웃음을 치거나, 비웃거나,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가며 잘난 체나 할 줄 알았건만. 지완은 도리어 이현의 말 중간중간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이현의 ‘이상형 논강’을 경청할 따름이었다.

“여자를 만날 때는 귀찮은 걸 많이 감수하나 봐. 내가 보기엔 최악의 조건인데, 의외네.”

지완은 가만히 입술을 축이더니, 곤란한 듯 제 눈썹을 매만졌다. 야, 끝났으면 좀 비켜. 이현의 말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바닥에 시선을 내리꽂았던 지완은, 한참의 숙고 끝에서야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조건이 안 되니까 남은 수단이 몸밖에 없네.”

“결론이 왜 그딴 식이야?”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나머진 불가하고… 뭐, 차치하더라도, 몸이랑 얼굴, 이게 먹힌다는 건 이미 증명됐으니까. 쉬운 길이 있는 걸, 어렵게 갈 필요 없지. 난 가진 건 잘 활용하는 편이라서.”

“미친 새낀가, 그걸 누가 증명을 해?.”

“누구긴. 너지.”

지완은 살짝 허리를 구부렸다. 땀 냄새 나, 가까이 오지 마. 이현이 엉거주춤하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아님 네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지완의 물음에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하고 보니 그 순간 후자를 우려했던 것이다.

씨발. 이현은 침묵을 유지했으나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그 대답에, 지완은 짓궂은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이현은 쓸데없이 성질을 부렸다.

“좆 까. 난 동의 못 하니까.”

“본인에 대해 아직도 의심 중인가 봐. 네가 원한다면 몇 번이라도 더 확인시켜 줄 의향이 있는데, 난.”

지완은 또 한 번 짓궂게 말을 받았다. 무게 없는 희롱에 불과했으나, 그 물음은 마치 질책처럼 이현을 동여매고 며칠간 이현을 고뇌하게 만들었던 문제의 중추를 건드렸다.

“의심 같은 거….”

의심? 확인? 뭘. 내가 남자 몸에 끌린다고? 알고 보니 내가…?

이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가자, 지완은 가벼운 분위기를 지워내곤 이현의 안색을 살폈다. 시선은 집요하게 이현의 두 눈을 좇는다.

눈을 마주하면 귀신같이 속내를 읽어낸다. 그걸 너무 잘 아는 이현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는 끈질긴 시선은 끝내 이현을 굴복시켰다. 이현이 마지못해 지완과 눈을 맞추자, 지완의 호박색 홍채, 그 가운데의 까만 동공이 일순간 이현의 시선을 그대로 흡수하며 반짝였다.

“이현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도 같아.”

“….”

“필요하다면 날 이용하라니까.”

지완은 음미하듯, 혹은 이현을 달래듯,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평범한 동작은 지나치게 평온했고, 바로 그 점이,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이현에게 일종의 안정감을 선사했다.

“…네가 문제야.”

“그러니까 이용하라고. 필요하다면 날 먹고, 버려. 어려울 거 없잖아.”

지완은 이현의 미간 사이를 톡톡 건드리고는 제 한 몸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양, 이현의 손을 가만히 제 볼에 가져다 댔다. 볼을 살며시 비비는 지완의 꼴을 보며 이현은 정신을 다잡았다. 재롱을 부릴 거면 제대로 부리라는 이현의 말을 온전히 체현하는 지완이었다.

“…너를? 퍽이나. 먹었다간 단단히 체하겠지.”

“바로 그게 내가 원하는 바지.”

능구렁이 같은 새끼. 그의 말마따나, 본인의 장점을 과히 잘 아는 지완은 그걸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능력까지 갖췄다. 저도 모르게 지완의 곱고 창백한 피부결을 손끝으로 톡톡톡 건드리던 이현은 소리 없는 헛웃음을 토했다. 손끝에서부터 번지는 지완의 낮은 체온을 곱씹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마 이현도 몰랐을 것이다. 정연이 말했던, 권 선수와 비슷한 표정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권지완에게는 얼마나 묘한 인상을 선사할지. 지완은 깊은 호흡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궁금하면 묻고, 원하면 요구하고, 의심되면 확인하고. 네가 이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상 거리낄 건 전혀 없다고 보는데.”

“내가?”

“응. 난 이미 포기했잖아.”

이번에도 지완은 믿기지 않을 만큼 순종적이고 굴복적인 말을, 믿기지 않을 만큼 안온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미친놈. 지완은 이현의 번뇌와 혼란을 단숨에 하찮은 수준으로 강등시켰다. 지완에게 그런 의도가 없음에도, 또 이현이 구태여 그렇게 여길 필요도 없음에도, 이현은 평생토록 꽁꽁 싸매 온 본인의 자존심을 어느 순간부터 아무렇지 않게 발가벗기는 지완을 보며 그런 얄팍한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얄팍한 정복욕이 이현을 덮쳤고, 그 정욕은 더 큰 정욕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정말… 씨발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채이현, 네가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

“….”

“난 기꺼이 네 발에 입을 맞출 테니까 넌 그런 나한테 자비를 베풀어. 어때,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쉽지? 로맨틱하게 들린다면 더 좋고.”

지완의 여유로운 미소에선 성숙의 향이 진하게 배어 나왔고, 또 동시에 개구진 소년의 모습도 보였다.

지완의 무언가가, 이제 이현에게 무척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것,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됐든 영리한 지완이 흔들리는 이현에게 도망갈 틈을 내어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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