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근데 표정은 왜 그러냐고.”
지완은 이현을 응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현이 애써 시선을 피하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바람 섞인 한숨을 내쉰다. 고개를 가볍게 내렸다 올린 지완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전처럼 얄밉게 생글거리는 웃음은 아니었다.
“노력 중인데, 쉽지 않네.”
“그럼… 더 노력해야지.”
지체 없이 튀어나온 이현의 대답은 대단히 건방졌다. 좀 유치한가. 이현은 제 코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권지완, 네가 이딴 걸로 기분 나빠하면 안 되지. 네가 한 일을 생각해 봐라, 이 양심 없는 새끼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하, 뻔뻔해라.”
“…뻔뻔? 내가 뻔뻔하다고?”
“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굉장히 억울하다는 얼굴이네.”
“야,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어색해진 공기에, 먼저 미적미적 엘리베이터를 기어 나오던 이현은 지완의 단어 선택에 멈칫했다. 듣자 하니 우습다. 권지완은 무슨 자격으로 불만을 표하는 것인지. 이현의 머릿속에서 번뜩, 아니 번뜩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한구석에 계속 지니고 있던 찝찝함이 다시금 점화됐다.
“권지완, 너야말로… 넌 양심이 없냐? 누가 누구보고 뻔뻔하대.”
“양심?”
“어, 양심. 내가 말 꺼내는 거 자체가 웃겨서 그냥 입 다물고 있으려 했는데….”
“….”
“아무리 그날, 그렇게 됐다고 해도, 솔직히 바로 그다음에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잠깐만, 하하, 이현아.”
“뭐, 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게 해줘야지. 그날, 그렇게, 그다음에, 그러는 게 뭔데. 내가 알아서 알아들어야 하는 거야?”
“….”
“물론 이번에도… 그게 필요하다면 그것까지 노력해보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복도는 조용했다. 호텔 전체가, 아니, 14층에서 정연과 재민이 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꽤 시끌시끌하던데, 아무래도 21층에는 이 새해맞이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이들만 모인 듯하다.
나이 먹는 게 전혀 유쾌하지 않은 중년의 감독진들과 유례없는 전지훈련 사건 사고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코치진, 그리고 그 사건을 수습하느라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매니저들만이 남아 있으니… 어쩌면 그럴 만도 하다.
덕분에 이현의 마땅찮은 질타와 껄끄러운 지완의 반문만이 나직하게 복도를 채웠다.
“뭘 모르는 척이야. 사진까지 찍혔잖아. 네 일상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니까? 알아?”
“그건 알아, 나도 유감이고. 근데 사진? 사진이라….”
이현의 모호한 말이 답답한지, 지완은 저지의 지퍼를 반쯤 내리며 중얼거렸다. 이현의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가, 이내 불량한 미소를 머금는다.
…설마 또 정유진? 이현의 괘씸한 흘김 속에서도 지완은 거리낌 없이 그 이름을 먼저 꺼냈다. 그 얼굴은 분명 승자의 얼굴이다. 이러면서 누가 누구한테 뻔뻔?
“쓰레기 새끼. 정유진 씨한테 안 미안해?”
“나야, 네가 신경이 쓰인다니 나쁘지 않은데. 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지완은 진실로 이현의 질타가 만족스러운 듯했다. 씩 미소까지 짓는 지완의 모습을 이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이없을 만큼 당당한 지완의 태도에 이현은 가운뎃손가락을 펴 보였다. 지완은 그런 이현을 못 본 척하며 제 턱을 느릿하게 쓸어내릴 뿐이다. 언뜻 보면 죽이 척척 잘 맞는 둘이었다.
“그런데 이현아, 내가 정유진한테 미안할 일은 없어. 이 말도 했던 것 같은데, 저번에.”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겠고, 그래서 꽤… 놀랍고 즐겁고 짜릿하기도 한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지완은 충분히 능청을 떨었다. 이현이 말을 꺼낸 의도를 이미 다 파악하고는 나긋나긋하게 이현의 견책을 피해 갔다.
정유진과 더 이상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말했고. 그날 만난 건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 너도 알다시피 약도 필요했고, 기사도 필요했지. 처리할 일도 많았거든. 정유진이 와줘서 덕분에 쉬웠어. 이것마저도 네 기분이 나쁘다면…. 지완은 이현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며 꽤나 신중한 목소리로 설명을 더했다.
“다신 정유진을 안 보면 되려나. 그 정도면 돼?”
“….”
“네가 말장난으로 치부할까 봐 덧붙이는데, 진심이야. 네가 만나지 말라는 한마디만 하면 난 그렇게 할 거야. 그 정도쯤이야… 오히려 흥분되는데.”
미묘하게 들뜬 그 투가 그의 뱀 같은 속을 드러냈다.
지완은 지금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지완의 세치의 혀가 내뱉은 말들 중 그거 하나는 분명한 진실이었다. 권지완은 그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쿡쿡거렸다.
“잠든 널 두고 내가 정유진이랑 그날 새벽을 보냈을까 봐….”
“질투니 뭐니 그딴 말 꺼낼 거면 그냥 가라. 더러워서 물어본 거야. 더러워서.”
“기분이 나빴냐고 물으려 했는데, 난. 뭐, 네가 그렇다면야.”
지완은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에도 또, 찔릴 것도 없는데 찔린 이현은, 이번에도 또, 알아서 먹잇감을 바쳤다.
이현은 지완으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정석적인 대답을 들었으나, 그렇다고 기분이 썩 기껍지는 않았다. 일순간 멋쩍은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도 낭패였다. 무엇보다 생글생글 웃으며 제 기분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지완이 심각하게 고까웠다. 이현은 불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딴 말 안 꺼낼 거여도 그냥 가라, 이 정도면 오늘 대면치는 충분하잖아.”
“난 늘 아쉬운 쪽이라.”
지완은 입가를 샐쭉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평생 아쉬워하든가. 됐으니까, 새해 복이나… 많이 받아라.”
이 재미없는 복도에서 이현만이 무미건조하게 새해를 입에 올렸다. 이현의 말에 지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직 자정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음을 확인한 지완은 콧잔등을 작게 찌푸렸다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채이현한테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 흔한 인사치렌데, 그렇지?”
“….”
“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이제 22년? 국대 선발 이후로는 9년짼데… 이제야 들어 보네. 새삼 놀라워라.”
뒷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든 이현을 향해 지완이 의뭉스럽게 읊조렸다. 의미심장한 지완의 목소리는 쓸데없는 추억팔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방에 들어가려는 이현을 붙잡기 위해 꺼낸 무의미한 말도 아닌 듯했다.
지완은 조금 낮게 깐 시선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새삼 별스럽게, 지난 시간을 가늠하는지 음성은 사뭇 가라앉았다.
갑자기 왜 이래. 심드렁하게 무시하려던 이현도 찰나에 멈칫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방금 뱉은 인사치레가 영 낯설다. 고작 한마디긴 했으나, 그 긴 시간 동안 새해에 겉치레식 덕담 한마디도 주고받지 못하던 사이였는데. 당장 작년과 비교해도 그렇다.
“…뭘 그런 걸 세고 그래?”
어딘가 떨떠름해진 이현은 공연히 불퉁거렸다. 우연히 닿은 카드키는 흔해 빠진 알림음과 함께 잠금을 해제했으나 방문이 열리진 않았다. 지완의 말이 이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봐 왔으니 너도 알잖아. 채이현, 네 무시는 내게 별로 소용이 없어. 아까부터 이 말이 하고 싶었거든. 네가 귀여운 짓을 해서 타이밍을 놓쳤지만.”
귀여운 짓, 그 경악스러운 표현에 불쾌함을 표하는 건 당연히 이현 쪽이었고, 지완은 늘 그렇듯 태연자약했다. 그러나 뒷말을 잇기 전, 숨을 돌리는 지완의 낯빛 위로 얕은 서늘함이 어렸다.
“네가 여자를 만나든 뭘 하든 상관 안 해. 근데 이현아, 너 귀찮고 복잡한 거, 싫잖아?”
“….”
“결국 미안해지기만 할 일을 굳이 만들 필요는 없지. 날 의식해서 그런 거라면 더욱 더.”
말을 마친 지완은 보란 듯이 어깨를 까딱였다. 한 번 열렸던 문은 다시 같은 알림음을 내며 닫히고 말았다.
자신이 정유진 얘기를 꺼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소개팅 얘기 때문에 이래, 얘? 순간 이현은 거만한 지완이 아주 우습고, 아주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뭐래, 귀엽긴 시발, 미쳤지, 아주.
지완은 알지 못할 자책조의 한숨을 깊게 쏟아내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카드키로 방문을 탁탁 건드리며 이현은 코웃음을 쳤다.
“권지완, 좀 겸손해져 봐. 이제 새해도 됐으니까. 넌 거만한 게 제일 문제거든.”
“겸손…, 네 이상형은 겸손한 사람인가 봐.”
“이상형? 뜬금없이 무슨….”
“그래, 이상형.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면 또… 노력해 보고.”
“….”
“더 말해 봐. 참고할게.”
불쑥 들어온 지완의 말은 가벼운 농담조였으나 노골적인 의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완의 눈빛은 또 단숨에 바뀌어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입술까지 축여가며 제 이상형을 묻는 지완의 모습에, 이현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고쳐 잡았다.
“뭐라는 거야. 내가 너랑 그딴 이상형 얘기나 하자고… 됐다. 할 말 없다, 난.”
“왜 할 말이 없어. 할 말 많아 보이던데, 걘.”
지완은 손을 대충 뻗어 제 뒷머리쯤에서 건성으로 휘적댔다. 아무래도 포니테일을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정연을 말하는 듯했다. 정연이? 정연이 말하는 거야? 이현의 물음에 지완은 느리게 눈만 끔뻑이는 것으로 겉대답 했다. 관심 밖의 얘기에 관해서는 정말 질릴 만큼 무성의하다. 한결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