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51)

#111

결과 판에 한눈이 팔린 정연도 이현의 끊긴 말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언제나 이현은 말을 안 하거나, 아니면 하다 마니까. 이와 상관없이 재민의 시작은 좋았다. 코치가 계기판에 대해 급히 문의하며 경기가 조금 지연되는 듯했으나 점수와 관련된 건 아니었다.

안정적인 스타트에 정연은 금세 다시 결과 판에서 눈을 떼고 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던 얘기마저 해봐라, 그래서 네가 선발전에 참여를 왜 하냐, 말하고 싶은 얼굴이다. 다행히도 이현의 난데없는 짜증을 꼬집어가며 토라질 만큼 정연은 감성적인 타입이 아니었다.

“…감독님도 팀 분위기에 기강을 잡고 싶겠지. 좀 붕 떠 있잖아, 사안도 사안이고…. 그리고 나도 이번엔 참여하고 싶었고.”

“네가? 왜? 귀찮게.”

“정신이 좀 산만해서. 집중을 할 필요가 있어.”

“…그니까 왜?”

“…어, 재민이 노 타겟1 판정받았다. 재사격해야겠네. 폼 좋았는데.”

이현은 그만저만하게, 무미건조하게 또 말을 돌렸다. 고질적인 문제다. 이현 자신도 잘 아는 문제였고, 덕분에 정연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구겨졌다. 그런 정연의 시선을 읽은 이현은, 시린 손을 비비다 경기장을 향해 짤막한 박수를 보냈다. 정말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야, 채이현, 그렇게 심드렁한 얼굴로 뭐하냐?”

“…재민이 응원하잖아.”

“….”

“대충이긴 해. 근데 그냥… 이재민 잘할 걸 아니까.”

“너 또 뭐야? 왜 그러는데? 심란한 건 난데, 왜 네 얼굴이 더 죽을상이냐고. 좀 괜찮아 지나 싶었더니… 아픈 것도 아니라며. 며칠 새에 또 무슨 일 있었어? 재민이한테는 별말 못 들었는데? 왜 안 어울리게 짜증까지 나있어?”

중간에 말을 멈춘 정연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목소리를 낮췄다. 어딘가 재민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정연이다. 모아졌다가 풀어지고, 다시 모아졌다가 풀어지고, 그 짧은 새 저 긴말을 홀로 이어가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정연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이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털었다.

살짝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정연은 분명 효과적이다. 맥없는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없어, 그런 거. 그냥… 어수선한 분위기 따라가는 거지.”

“혹시 너, 이번 사건이랑 무슨 관련 있어? 진태우? …설마 도핑?”

정연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 속삭임과 다름없을 정도로. 앞에 앉아있는 코치 몇몇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연이 좀 전 지완과 유진에 대해 언급을 할 때부터 아닌 척하며 은근히 흘깃거리는 게 이현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현은 제 쪽으로 몸을 잔뜩 기울인 정연을 가볍게 밀어내며 웃음을 흩트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태우…, 그 선배, 이번 올림픽 출전 나가리 된 이후로 너한테 괜히 피해 의식 느끼고 있긴 했잖아. 사격부에 채이현의 저주가 내렸다느니, 그딴 재수 없는 소리도 다 그 새끼가 시작했고. 혹시… 아니다. 그 선배가 그런다고 해도 네가 신경 쓸 인물이 아니지. 그럼 도핑? 아, 너 도핑 검사 따로 했잖아. 권지완이랑. 맞지?”

정연이 이현의 얼굴을 요목조목 훑어가며 말을 빠르게 이었다. 중간 중간 호흡을 넣어가며 이현의 낯빛을 살피다가, 무언가를 읽어낸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뜬다. 또 어떻게 매번, 제 낯빛만 보고도 속을 알아차리는 것인지. 정연의 눈썰미가 이젠 신묘할 지경이다. 난 똑같이 생겼는데, 항상. 이현은 양 볼을 슥슥 매만졌다.

“도핑문제네. 너 지금 미묘하게 표정이 더 좆같아졌어.”

…물론 그게 항상 맞지는 않지만.

그럴 만하다.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나도 믿기지가 않는데.

“정연아, 너 며칠 새 입이 더 험해졌다.”

“네가 권 선수 앞에 설 때 그러는 것처럼?”

“…왜 여기서 또 권지완이 나와?”

“그야 네가 권 선수 얘기할 때만 격하게 반응하잖아.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또 언제…. 이현은 말끝을 대강 흐리며 패딩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유도부의 상황도 사격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더하면 더했지, 지완 덕에 B사의 협찬까지 얻어낸 유도부의 사기는 이전보다 크게 올라간 상태였고, 호텔을 에워싸고 있는 산에서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유도부의 크로스컨트리 기함 소리는, 날마다 끝을 모르고 커져 갔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후로 권지완은, 바로 옆방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마주칠 틈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훈련 일정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오늘에서야 숨 돌릴 시간을 얻은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적인 운동선수들의 루틴 속에서, 눈 뜨면 총질을 하고 눈 감으면 잠드는 이현에게 훈련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눈 감고 있는 시간….

잘 때마다, 일생일대의 우스꽝스럽고 막중한 고민이 마치 스스로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것처럼, 이현은 꿈을 꿨다. 어쩌다 한 번 일 것이라 생각했던 꿈의 주인은 시도 때도 없이 이현을 찾아왔다. 전지 전부터 이현의 꿈을 침범하던 지완은, 하루하루가 갈수록 남의 꿈에 자리를 잡고 점점 더 남사스러운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현이, 망측스럽더라도 그 꿈을 즐기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건 마치 숙제처럼 이현의 숨을 졸랐다.

“너 여기, 눈썹 사이 찌푸리면서 움찔거리는데, 이현아, 그 표정… 눈썹 치켜올리는 거 묘하게 권 선수랑 닮았어. 예전엔 안 그랬는데, 갑자기 네 얼굴에서 권 선수가 보이네.”

“…말이 험해졌다니까, 너?”

“진짜야. 사실 이번 한 번이 아니고, 저번부터 점점 겹쳐 보이더라고. 권 선수 표정도 그렇고, 턱짓 까딱이는 거, 재수 없게 웃는 거, 근데 묘하게 야릇한 거….”

스읍, 정연이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잠시 멈췄던 경기는 재개되었다.

닮아? 내가? 권지완을? 닮아가기까지 한다고? 걜? 설마. 이현의 눈빛만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두 눈이 침착을 되찾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시에 이현은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현은 턱 끝을 잘게 떨었다. 한 번 더 제 볼을 쓸어내리는 이현의 손길에는 좀 전과 달리 복잡한 심경이 엉켜 들었다.

“…정연아.”

총개머리를 내리고 있던 재민이 차분한 손길로 실탄 2발을 장전했다. 이곳까지 우렁차게 들리는 것 같은, 기합 잔뜩 들어간 콜을 재민이 외치자, 더블 표적이 하이하우스와 로우하우스에서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잠만 이현, 지금 재민이….”

탕!

“내가 여자를 만나 봐야할 것 같은데.”

탕-!

산탄총을 제 한 몸처럼 파지한 재민의 몸이 실수 없이 정확하게 움직였고, 1번 사대의 싱글과 더블, 노 타겟을 포함한 다섯 개의 표적은 모두 명중되었다. 지적할 곳 없는 깔끔한 스타트였다.

그러나 정연의 두 눈이 향한 곳은 결과 판 따위가 아니었다. 정연은 오로지 놀라움만을 담고 있는 큰 눈으로, 기름칠 되지 않은 문이 삐걱대는 것처럼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현의 옆얼굴은 여전히 고요했다.

산탄총의 귀 아픈 격발 소리보다,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이현의 작은 웅얼거림이 정연의 관심을 모두 집중시키고 있었고, 그것은 클레이를 격파하는 산탄보다 강력한 한 방이었다.

*

12월 31일, 이현의 한마디는 사격부의 특별할 것 없는 연말을, 이번에도 그저 전지훈련 기간 중 하루에 그칠 뻔했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단숨에 이례적인 날로 변모시켰다. 소개팅을 하겠다, 그 갑작스러운 이현의 선언은 정연의 입에서 코치의 입으로, 코치의 입에서 다시 선수들의 입으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현이 던진 한마디는 우습게도 사격부 전체를 다시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선배, 그렇게 볼 필요 없다니까요. 선배 여동생은 안 된다니까?”

재민은 선발전에서 큰 위험 요소 없이 안정적으로 선발권 점수를 얻어내는 나름의 쾌거를 이루었으나 이미 클레이 스키트 종목의 선발전은 다른 이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느새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여동생, 누나, 사촌 동생, 사촌 누나… 뭐가 됐든 여자 형제가 있는 여타의 선수들에게 어떠한 가능성으로 먹혀들었다.

“설마 코치님도요? 코치님 딸, 남자친구 있다면서요?”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어디서 듣고 온 건지, 트레이닝을 하면서도 괜히 이현의 주변을 얼씬거리는 무리가 눈에 띄게 수북했다. 결국 1번 사대 슛만 보고 나온 스키트 선발전 경기장에서부터, 이현의 훈련장, 그리고 겨우 밥을 욱여넣는 이 저녁 식사 자리까지. 따라붙는 시선들은 점점 많아졌고, 정연을 통해 사실 여부를 찔러오는 이들이 끊임없었다. 정연은 단호히, 그 일말의 기대들을 계속해서 쳐내야 했다. 정연의 업이었다.

그 모든 관심의 가운데, 이현은 민망함과 낯부끄러움으로 몸서리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지건, 꽂히는 시선 따위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이현이었건만, 사안도 사안 나름이다. 어쩌면 도핑 논란의 주인공이 되는 게 나았을지도….

이게 뭐라고. 자의든 아니든 이딴 걸로 유난을 떨고 있는 스스로를 참지 못한 이현은, 결국 밥을 채 먹지 못하고 자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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