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51)

#109

재민은 답을 하지 않는 이현을 제쳐두고,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접시 위 간식들을 훑으며 웅얼거렸다.

몇 시간 버스로 이동하고, 훈련하고, 서바이벌하고, 스폰십 인터뷰, 거기다 술까지 마시고? 술 취한 형 케어하다가, 새벽에는 정유진 씨도 만나고, 다시 아침부터 밤까지 촬영…. 듣기로는 지완 선배, 전지 오기 전부터 스케줄 꽉 차 있었다는데… 체력 진짜 미쳤다니까요. 확실히 괴물 같아요. 재민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더니, 제 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지완의 행적을 늘어놓았다. 끝내 접히지 않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다음 간식을 골라 집었다.

아, 역시 살찌는 맛이 최고라니까요. 재민은 작은 마카롱을 한입에 꿀꺽 삼키며 감탄했다. 이현의 무심한 반응 정도를 예상하였으나, 재민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것은 묘하게 어색한 이현의 표정이었다.

“형… 설마 이것도 몰랐어요? 정유진 씨가 여기까지 지완 선배 보러 온 거, 사진 찍혔잖아요. 크리스마스 새벽에.”

“그 새벽? 그날?”

“하하. 그날 하루 종일 붙어 있었으면서, 형도 참…. 아니, 원래 남자들끼리 있으면 여자 얘기를 제일 많이 할 텐데…. 아니지, 형이랑 지완 선배는 그런 거랑 좀 안 어울리긴 해요.”

재민은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크게 웃었고, 이현은 홀로 골똘해지고 있었다. 그 새벽은 바로 그 새벽이다. 이현은 정리되지 않는 타임라인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림과 동시에 수치스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고, 자신을 눕혀두고 정유진을 만나러 갔을 권지완을 생각하니 감당할 수 없는 쪽팔림이 이현을 덮쳤다. 진짜 개씨발….

그 좆같음의 이유를 정확히 문장화하기는 어려웠으나, 그 와중에도 한 가지 불쾌한 의문이 이현의 뇌리에 명확히 꽂혔다. 그 새끼 혹시 정유진 만난 이유가…?

그때 분명, 권지완도 어느 정도 발기 상태였다. 아니, 웬만하면 그게 풀발이었으면 한다. 그것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건 정말…. 가히 충격적인 그 사이즈는 잊히지 않았고, 자신만이 사정을 맛봤다는 치욕적인 사실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현이었다.

권지완이라면. 그 상태의 권지완이라면 도중에 끊긴 관계를 다른 곳에서 이어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여기까지 상상하게 되는 스스로가 불쾌해, 이현은 사고의 고리를 끊어버렸다.

“눈까지 내려줘서 사진도 무슨 영화 같아요. 잠깐 보겠다고 정유진 씨가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달달하고…. 근데 열애설은 또 부인하더라고요? 지완 선배도 저번에 정유진 씨랑 그런 거 아니라고 했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터진 스캔들 중에 저는 그게 제일 좋았어요. 형은 뭐 좀 알 줄 알았는데. 하긴, 지완 선배가 그런 얘기까지 시시콜콜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긴 해요. 그런 점이 괜히 더 멋있는 거 같고. 참 말도 많은 재민의 중얼거림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연이 없으니 재민이 정연의 몫까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심하네, 이 새끼. 끊임없이 들어가는 당분 덩어리가 재민의 수다에 든든한 한몫을 해내는 게 분명했다.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재민의 입을 가만히 쳐다보다, 이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쪽팔림, 이유 모를 불쾌함,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은 아이러니, 온갖 것들의 복합체였으나, 그런 이현을 알 리 없는 재민은 하루 종일 유진과 지완에 대해 떠들 기세였다.

“지겨운 얘기 그만하고, 시간 확인해 봐. 아직 안 됐냐?”

자신이 게이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며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본질적인 번뇌에 우습게 사로잡혀 있는 이현에게 있어, 이는 아주 괘씸하고, 분한 주제였다. 이현은 재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응, 아직.”

볼이 부풀 만큼 입 안 가득 쿠키를 씹어대는 재민 대신, 익숙한 목소리가 이현의 물음에 답을 했다. 이현의 옆 의자가 부드러운 카펫 위에서 소리 없이 끌렸다. 시발, 이현은 고개를 돌려 음성의 주인을 확인하는 대신, 눈을 질끈 감는 것을 택했다.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다름 아닌 지완이었다. 천연덕스럽게 턱을 괘고 이현의 턱 아래를 툭, 손끝으로 건드린다. 내 얘기가 지겹다니, 서운하게, 라고 말하는 것처럼.

*

“넌 훈련 안 하냐? 시간이 널널하지?”

“하하, 설마. 난 채이현만큼 타고나질 못해서… 노력을 배로 해야 하거든.”

“….”

“나름 칭찬이었는데, 별로야? 그럼 어떤 게 좋으려나.”

지완은 씩 웃으며 커피를 들이마셨다. 이현의 말을 여유롭게 받아치는 지완의 꼴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나, 그 기저에는 전혀 다른 결의 태도가 깔려 있었다. 기막힌 그 속내를 숨기지 않고 뻔뻔히 드러내는 지완의 모습에 이현은 두통이 일려 했다.

며칠 전의 공포가 새삼 다시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좀 죽고 싶어지는 이현이었다.

“여기에 네가 낄 일이 아니잖아. 네가 굳이 검사를 왜 받냐고.”

“내가 관련이 아예 없진 않지. 그리고….”

지완의 손에 이끌려 이현이 걸음 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유도부의 제2 훈련장이었다. 복합 체육관 신설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난 이 층짜리 소규모 유도 경기장이었는데, 이번 전지훈련 기간 동안 유도부가 별도 훈련시설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정말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만약을 대비해서, 기자들이랑 조금이라도 떨어진 곳이 낫지 않겠어?”

“나오겠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또 모르지. 사람 일은. 너도 모르는 새 복용했을 수도 있고, 또… 타액으로 전이되는 성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난.”

“…넌 그딴 말 하는 거 안 쪽팔리냐?”

“전혀. 네가 내 몫까지 창피해하고 있는 덕분에 난 즐기고 있어.”

지완과 이현이 갑자기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그들이 늘상 받던 특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의 이현에겐 이게 결단코 도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현은 다른 사격부원들과 달리 호텔과 가까운 이곳, 별도의 관리실에서 개별검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의뭉스러운 최초 신고자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기자들이 몰릴 게 뻔했기 때문이고, 현재 일어난 사격부의 모든 논란들과 어떻게 해서든 이현을 엮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비틀린 관심이 인터넷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그랬다.

지완의 뜬금없는 등장과 동시에, 때맞춰 갑작스럽게 전달받은 소식은 이현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감독진의 말에 불복하고 버스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완과 얌전히 이곳에서 검사관을 기다릴 수밖에. 핑계가 없다. 핑계가.

“너야말로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 하세민, 그리고 정유진…. 뭐 하나 잘못 나오면 연달아 다 큰일 나게 생겼던데.”

“걱정이 꽤 다정하네. 근데 하세민은 좀 빼지 그래.”

“…너 듣고 싶은 대로 들어라, 그렇게 해, 이 미친….”

이현은 막막한 심정을 한껏 담아 절레절레 도리질을 쳤다. 스스로 참을 수 있는 한계 지점까지 길어버린 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쓸어 넘겼으나, 속은 시원해지지 못했다. 거슬리는 머리가 이현의 속을 더 들쑤셨다.

이젠 진짜 머리 잘라야 하는데. 일단 묶어둘까. 그 길이의 차이는 아주 근소했으나 의외의 부분에서 예민한 이현에게는 꽤 중대한 차이였고, 이는 지난 며칠 머리 하나 자를 겨를도 없을 만큼 정신을 쏙 빼놓았던 지완을 향한 짜증으로 이어졌다.

이현은 점점 불거지는 짜증을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우습게도, 정유진 이름이 나오니 잠시 잊었던 그 원인 모를 쪽팔림과 불쾌함도 다시 치미며 번지는 짜증에 한몫을 더했다. 제 입으로 먼저 내뱉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완은 커피를 마저 호록거리며 이현을 날카롭게 올려보았다.

“머리 자를 시간도 없어 보이는 거치고는 이재민이랑 꽤 즐겁게 시간을 버리고 있던데.”

“뭔 소리야?”

“머리. 거슬려 보이잖아.”

“…네가 뭘 안다고 아는 척이야. 별로 차이도 안 나는데.”

자신의 얼굴에서 티가 난 것인지, 정연이나 재민도 못 알아보는 부분을 지완이 짚어내자 이현은 진심과는 전혀 다른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런 이현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지완은, 남아 있는 커피를 한 입 더 들이켜고는 옆에 내려놓았다. 이현은 코웃음을 쳤으나 지완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그는 꼬인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현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벽 쪽으로 다가섰다.

“눈이 달린 이상 알 수 있잖아, 이현아. 지저분한 것도 정도라는 게 있으니까.”

지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지극히 권지완다운 말을 일갈했다. 원래 이런 새끼란 걸 모르지 않지만, 빈정이 상한 이현은 아연히 비아냥댔다. 조금 전부터 더 번져나가고 있는 짜증이 애꿎은 말실수를 부추겼다.

“야, 할 거면 하나만 해. 그딴 말본새로 네가….”

헛웃음을 터뜨리던 이현은 말을 멈췄다. 그러나 이미 나온 말을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찰나에 당황한 기색 역시 숨기기엔 늦어버렸다. 지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듣고 싶지 않은 문장을 완성했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중하게.

“이딴 말본새로 내가.”

“….”

“너를 꼬실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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