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시동을 왜 켜? 이현이 홱 고개를 돌리자, 누가 봐도 채이현은 지금 추워 보이거든, 하며 지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지완에게 그런 배려가 어울릴 리 없다. 잠시나마 이현의 경계를 푼 지완은 그대로 액셀을 지르밟았다.
배고프다며. 지완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였다. 차는 이미 야외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늦은 저녁, 아니 밤, 눈까지 흩날리는 그 낭만적인 배경 속에서, 이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짢은 얼굴로 이를 아득 물었다. 이현과 지완이 있는 이 차 속만이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구라였던 거 알잖아. 그냥 거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괜히 한 말인 거.”
“알지.”
“…그럼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냐? 의도가 뭐야? 무서워해, 아님 귀찮아해?”
“그렇게 말하면 좀 서운하고….”
연습장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은 빠르게 차창 너머로 흘러 지나갔다. 호텔로 들어서는 긴 초입을 역으로 빠져나가며, 지완은 툭툭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근데 무서워하는 채이현이나, 귀찮아하는 채이현이나… 나한텐 둘 다 재밌긴 해. 보는 맛이 있지.”
긴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가죽 핸들의 스티치를 쓸어내리다가, 핸들을 꺾었다. 운전하는 폼이 지루하리만큼 여유롭다.
권지완은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인 걸까. 어제의 권지완도 다 농락일 뿐일까. 아닌데, 그때의 권지완은 분명….
이현은 조금 전 자신이 뱉은 발언이, 자신이 덜컥 인정해버린 지난밤이, 이렇게까지 시답잖을 줄은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정적이 맴돌고, 공기가 얼거나, 혹은 이번에도 지완이 잔뜩 비웃으며 또 한 번의 거드름을 피우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눈썹이나 잔뜩 치켜올려 그 지독한 표정을 내비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지난밤을 꿈으로 혼동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새끼가 아닐까.
그런 이현의 비아냥을 비웃기라도 하듯, 올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굴곡 없이 직선으로 깔린 드라이빙 코스로 들어서며 지완은 아주 뻔뻔히, 너무나도 경악스러운 말을 뱉었다.
색종이 같던 눈발이 질퍽하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눈 오는 크리스마스 밤에 드라이브 정도면… 데이트의 정석이잖아. 이렇게, 너랑 내가, 크리스마스 밤에.”
“…야, 가겠다는 나 억지로 태운 건 너야.”
“아. 불만인 줄 알았어? 그게 아닌데, 이현아.”
“….”
“너랑 나랑 지금 아주 정석적인 데이트, 하고 있다고.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사람이 놀라면 기함을 한다고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놀라움엔 도리어 조용해지는 법이다.
이현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두 번 끔뻑일 뿐이었다. 눈가가 절로 파르르 떨리며 움찔거렸다. 지완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지금 내가 뭔 소리를 들은 거야. 이현이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갸우뚱거리며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눈이 여러 차례 쌓이고 녹고, 또다시 눈이 흩날리고 있는 이 어두운 내리막길에서마저 지완의 운전은 안정적이었고, 그의 태도 역시 지독할 만큼 안정적이었다.
“아니야? 그럼 말해. 나름 노력 중인데… 이런 노력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아니지. 맞겠어? 이게?”
데이트겠냐, 이게?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지완의 말에 뒷말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대신했다.
“유감이네, 그걸 부정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소감을 물은 거지.”
“너 아직 술 안 깼으면 운전대에서 손 떼.”
이현은 시선을 조수석 창밖으로 돌리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수석의 안전벨트가 해제되자마자 주행 중인 차 안에서는 부드럽지만 또렷한 경고 알람이 일정 박자로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현은 주변을 크게 살피며 차가 멈출 만한 장소를 살폈다.
차에서 내리겠다, 혹은 이 미친 새끼야, 지금부턴 내가 운전해서 돌아갈 테니 빨리 갓길에 차 대, 따위의 명백한 의사 표명이었다.
“이런 곳에서 죽긴 싫어. 그것도 권지완, 너랑 단둘이? 하하, 절대.”
이 날씨에, 이 시간에, 이런 곳에. 권지완의 차 말고 이딴 어두컴컴한 길을 지나다니는 차가 더 있을 리 만무했다. 드라이빙 코스가 크게 에두르고 있는 짙은 호수는 물살 대신 눈살을 머금은 채 어둠 속에서도 청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그런 감상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완은 천연덕스럽게 데이트를 입에 올렸으나, 이현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와 비슷한. 술이 안 깬 게 분명한 권지완이 핸들 한 번 잘못 돌려 저 호수로 그대로 처박힐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지완은 이현의 요구에 응하듯, 사이드미러를 잠깐 살피더니 지체 없이 한쪽 길에 차를 멈추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이현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그럼 이런 노력은 어때? 꽤 가상하지. 말도 잘 듣고.”
지완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그대로 팔을 뻗었다. 추적한 눈에 젖어 희미해진 지완의 향수 냄새가 넓지 않은 차 안, 더 좁은 둘 사이 간격을 메우며 이현에게 훅 다가섰다.
이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만큼 더 가까워진 시선에 지완은 보기 좋게 눈꼬리를 미세하게 접어 보이곤 이현의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지완은 다시 자연스레 멀어졌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벨트를 부여잡아야만 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야? 무슨 짓을 꾸미는데.”
“꾸미긴, 보는 그대로. 너한테… 집적거리고 있잖아. 수작 거는 중인데. 방금 건 좀 자연스러웠어?”
“…하하. 진짜 가지가지 하네.”
평온한 지완의 모습에, 이현은 진실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멈춰선 지완의 차는, 물론 그럴 리가 없지만, 이현의 소성만으로도 들썩거릴 정도였다.
이현은 꼭 쥔 벨트를 놓지 못한 채, 진짜 이 미친 새끼… 따위의 악의 없는, 그렇다고 악의가 아예 없지만은 않은, 감탄 같은 욕설만 소성 사이사이로 뱉을 뿐이었다. 어쩌면 실성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야…. 권지완, 아까부터 데이트? 수작? 일부러 이래? 나 웃으면 되는 거 맞지?”
“비웃으라고 하는 짓은 아니지만… 일부러 이러고 있긴 하지.”
“미쳤네. 정신 나간 새끼.”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이현은 정말 눈물이 찔끔 맺힌 눈가를 손으로 훑었다.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컨셉을 이상하게 잡네? 이현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나 눈썹은 점점 구겨졌다. 근래에 이현이 지완을 향해 내뱉었던 수많은 ‘미쳤어?’ 혹은 ‘미쳤냐?’ 중, 가장 진실되고 진심을 담은 물음이었다.
“…권지완, 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 이러는 거면.”
“오해?”
그러나 지완은 아까부터 한결같은 표정으로 태연히 이현의 눈을 맞춰올 뿐이었고, 이현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순식간에 차분해진 이현의 목소리가 신중한 호흡으로 이어졌다.
“네 그… 뒤틀린 심사를 나에 대한 호감으로 오인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 괜한 지랄 그만해. 애초에 내가 널 찾았던 이유도…. 난 이번 일로… 그냥 없던 일로 하자는 소리야. 무안하고 창피해서 이러는 거면, 이게 더 우스워. 적당히 해.”
“….”
“못 들은 걸로 하는 게 나도 편하니까.”
이현은 혼잣말하듯 소리를 죽였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사실 그 순간 지완을 연민한 자기 자신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현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일말의 해방감이 이현에게 찾아오려던 순간 지완이 그 기대를 태연하게 깨부쉈다.
“그건 그렇지. 내가 고작 호감 따위로 남자 좆을 만지면서 흥분할 리는 없으니까.”
…뭐라고? 나름 진지하게 상황을 정리하던 이현은 한순간에 우스워져 버렸고, 툭 하고 뱉은 지완의 대답은 자못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절로 이현의 미간에는 다시 힘이 들어갔고, 관자놀이에 올라온 핏줄이 선명했으나 수치와 정도를 모르는 권지완의 옆에선 힘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다음은 가보면 알게 될 거라고 그랬잖아.”
“….”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해. 제대로 한 것도 없으니까. 몇 번 흔들자마자 내 손에 사정하고 잠든….”
간신히 창틀에 걸쳐져 있던 이현의 굳은 팔은, 순식간에 뻗어 나가 지완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완은 그 다급한 손짓을 익숙하게 잡아 내렸다. 정말, 이현아. 그건 너무했지. 가볍게 어깨까지 으쓱이며.
첫날밤에 소박이라도 맞은 새끼처럼. 미친놈이.
“…넌 결국 그 얘기냐?”
“아니, 그 반대 얘기. 덕분에 그런 식으로는 만족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말을 마친 지완은 차창 밖으로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핸들을 빠르게 꺾어 차를 돌렸다. 예고되지 않은 타이밍에 이현의 몸이 급박히 창 쪽으로 기울었다. 지완이 뱉은 말의 의미를 되물을 타이밍은 미끄러지듯 유턴하는 차 아래로 깔려버렸다.
어젠 꽤 눈이 예뻐 보였는데… 재미없네. 지완은 시시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현을 굳이, 굳이 차에 태워 원치도 않는 드라이브에 강제로 동참시킨 사람치고 지완은 미적지근했다. 권지완의 변덕은 여전했다. 질려버린 얼굴로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린 이현은 다시 몸을 반듯이 일으켜 세우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이현을 힐끗 쳐다보고는 지완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심히 내뱉었다.
“너도 나와 같았으면 해. 갖고 싶고, 뺏고 싶고, 얻고 싶은… 그 구차하고 병신 같은 욕구를 너도 갖길 바라. 너도 나에게. 나한테만.”
“…”
“난 그걸 원해, 이현아. 네가 나보다 좀 더 괴로운 쪽이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