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51)

#104

“정유진이 건드리는 일이 좀 많아. 거긴 술만 나오는 곳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서. 기사라도 내보내려고?”

지완은 이현에게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눈짓했으나 이현은 세민이 자리했던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지완의 얼굴에 불만이 잠시 서렸으나 이내 그는 적당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난 그 병신을 어제 처음 알았는데.”

우연 아니겠어? 정유진 일을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지완은 퍽 시답잖은 얼굴로 왼쪽 눈을 비볐다. 굵게 진 쌍꺼풀이 짙게 팼다. 숨겨지지 않는 태연함이 더 수상쩍었다.

“정유진과 내 사이가 많이 가까워 보이나 봐. 어디서 곧 기사가 나간다는 소식을 주워들었는지… 나를 찾아왔더라고. 약이 대단하긴 해. 좀 놀랐어. 제정신은 확실히 아닌 거 같던데.”

지완이 몸을 뻗어 편한 자세를 찾자, 팽팽한 와이셔츠 위로 여실하게 드러난 가슴 근육이 함께 움직였다. 흐트러진 넥타이가 지완의 움직임을 따라 요연한 굴곡을 만들었다. 지완의 자세는 어딘가 선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앞에 있지도 않은 상대를 거만하게 빈정거리는 작태가 그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물론 웃기는 소리다.

“그래서?”

“부탁을 그냥 들어주는 건 재미가 없잖아.”

“야, 아까부터 자꾸 부탁, 부탁 거리는데…. 부탁? 네가? 네가 처음 보는 새끼 부탁을 들어준다고? 내가 여기서 웃어야 하냐?”

“그런 거까지 내 허락을 맡으려고? 나쁘진 않은….”

“그래서. 그냥 들어주지 않고 뭘 했는데.”

지완의 병적인 말장난을 가로챈 이현이 짤막이 물었다. 피로한 티를 부러 내기 위해 뻐근한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손가락 끝이 뒷목에 닿자 이현은 멈칫했다. 제 행동에 제가 움찔한 이현은 퍽 침착하고 무던한 눈으로 지완을 살폈으나, 지완은 두툼한 아랫입술을 무의미하게 축일 뿐이었다.

이현을 바라보던 지완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작게 바람 소리를 내었다. 이현이 찰나에 걱정한 뒷목 얘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약이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

바들바들 떨어대던 태우의 모습이 일순간 이현의 머릿속에 번득였다. 유쾌하지는 않았다.

“근데 눈앞에서 보자니 좀 거북해서.”

“….”

“볼래? 나도 제대로 확인을 못 하고 있었거든.”

꼬았던 다리를 풀며, 지완은 이현에게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일정한 각도에서 촬영된 카메라 녹화본에는, 익숙한 2107호의 창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낯익은 인영이 있었다. 이현은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가 누군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동시에 이현은 소파의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지완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결코, 그의 도 넘은 짓궂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분명 어제의 일로.

‘죽을 뻔했는데 저걸 그냥 보내?’

이현은 저를 덮쳤던 태우의 떨림을 다시 환기했다. 그때,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시큰둥한 지완의 시선을 뒤늦게 좇았다. 태우가 부들거리는 발걸음으로 멀어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추적했던 지완의 무덤덤한 시선을.

이현은 절상을 입은 듯 길고 붉은 흔적이 새겨진 손으로 제 뒷목을 담담히 쓸어내렸다. 새삼 의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걱정돼?”

“아니.”

“….”

“그래서 문제야.”

비상식적인 지완의 행동을, 터무니없을 만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현은 이제 와 자신도 어딘가 정상은 아님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 당황은 잠시였다. 이현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탁은 들어줄 거야?”

“아마도. 거래 내용은 이미 파기됐을걸.”

“….”

“근데 이거까지 부탁받은 건 아니잖아.”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지완이 제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애매한 말을 끝맺자마자 이현의 핸드폰이 수차례 울려댔기 때문이다. 재민과 정연의 경악 가득한 카톡이 연신 이어지며 이현의 화면을 밝혔다.

지완은 뱉은 말을 지킨 듯했다. 그 점이 더욱 유감이었다.

*

<국가대표 사격선수 진태우, 선발전 앞두고 ‘불법 약물 복용 적발’>

<창원군 진태우, 전지훈련 숙소서 금지 약물 투여 후 병원 응급 호송>

<[속보] 진태우 ‘변형 약물’ 복용 후, 의식 저하 상태 이어져>

<진태우 ‘도핑 양성’ 결과, 사실상 선수 생활 끝>

<‘불법 약물 복용’ 진태우, 훈련 중 동료 선수 ‘겨냥’한 사실 밝혀져>

<올림픽 이제 반년… ‘도핑’에 ‘동료 겨냥’까지, 사격은 이대로 괜찮은가?>

<도 넘은 경쟁 심리가 부른 참극, 진태우의 총구가 향한 이는 누구인가>

<[속보] 대한 사격회, ‘동료 저격’ 논란 내부 확인 중>

*

이현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완의 남은 촬영이 끝나 가고, 어느덧 밤이 될 때까지도 이현은 가만히 지완의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이현의 얼굴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이현을 둘러싼 촬영장은 막바지를 향할수록 소란스러워졌다.

이현에게도 연락은 쏟아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태우가 저격한 동료 선수가 이현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대체 누굴까요? 그 총성 사이에 실탄이 있었다니. 정말 실총이래? 몰라요, 기사가 애매하던데요. 근데 실총에 실탄이니까 이렇게 난리 난 거 아니에요? 하긴, 아니면 서바이벌 게임이랑 다를 게 없잖아. 태우 선배님이 깨어나셔야 상황을 제대로 알 텐데…. 근데 누구기에 신고를 안 했대요? 아니, 이거 고발자 누구야, 대체? 그냥 또 루머 아니에요? 루머라고 치기엔… 약물은 팩트잖아. 최초 유포가 같은 언론사던데? 진짜 운동하다가 뒤질 날이 올 수도 있겠네요. 거참, 짜릿하네.

정말 부단히 시끄러웠다. 협회 차원에서도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입장부터 발표를 했으나, 어디서 새어나간 말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럴 만했다. 그걸 아는 건 지완과 이현, 태우뿐이니. 서바이벌장 CCTV 영상이 버젓이 찍혔을 텐데 몇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터넷에 나돌아다니지 않는 걸 보면 이 또한 이미 삭제된 것이 틀림없다.

“이제 다 끝났지.”

“무슨 일로 계속 나를 기다렸을까.”

“나와. 밥 먹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이현은, 지완이 촬영 끝난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안 갈아입어도 되잖아. 나중에 돈 지불해, 그냥. 나 더 이상은 배고파서 못 기다리겠거든. 이현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이현에게서 장난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완은 묘한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다가, 그래, 그럼, 하고는 먼저 문을 열었다.

그새 또 눈이 내렸는지, 밖으로 나오니 이미 쌓였던 눈 위로 더 하얀 눈이 소복하고 두툼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길 위에 이현이 첫발을 내디뎠다.

진짜 더럽게 춥네. 조금은 큰 보폭으로, 이현은 서둘러 촬영지에서 멀어졌다. 그 일말의 조급함이 추위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지완이 그 미묘한 차이를 모를 리 없다.

“배고픈 것보다 급한 일이 있어 보이는데.”

지완이 입을 여닫을 때마다 흐릿한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패딩조차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았음에도 태연한 지완은 이 더럽게 낭만적인 크리스마스의 추위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현아, 왜 읽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어.”

아까부터, 무섭잖아. 지완의 손가락이 이현의 코앞에서 빙빙 원을 그렸다. 지완은 무슨 바람인지 기꺼이 을의 위치를 자처하겠다는 듯, 이현의 안색을 살피며 퍽 초조한 얼굴을 지어 보였으나 그의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권지완, 이것부터 확실히 하자.”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네.”

이현에게서 낮고 단호한 음성이 드리웠다. 물론 말을 하는 와중에도 이현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지완 역시 그 속도에 맞추어 호텔로 뻗어있는 뒷길에 접어들었다.

“난 그렇게까지 할 생각 없었어.”

“….”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었잖아. 대답해.”

지완의 몫까지 추위를 감당하고 있는 것인지 이현의 걸음 속도는 무의식적으로 조금씩 빨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 위로 흐린 진눈깨비가 다시금 흩날리고 있었다.

“아, 대답이 필요한 말이었어?”

팔짱을 끼고, 몸을 조금 움츠린 채 성큼성큼 앞서는 이현의 옆에서, 지완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싱겁게 대꾸했다.

“난 그렇게까지 해보고 싶어서. 이러면 대답이 돼?”

밀린 알람과 지금까지도 쏟아지는 연락들은 지완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일순간의 눈부심에 눈살을 한 번 찌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근데 이현아, 네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핸드폰은 다시 그의 폴로코트 안주머니에 안착했고, 지완은 심드렁히 코트 밑단을 젖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설마 이 일이 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웃고 싶어지는데.”

“….”

“한번 참아 볼게.”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거만함 가득한 그 얼굴은 지완과 퍽 잘 어울렸지만, 지완은 이번에도 기꺼이 한발 물러서겠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이쯤이면 얼굴을 붉히거나, 터무니없는 얼굴로 지완을 흘겨야 마땅했을 이현은 여전히 정적을 유지했다. 앞만을 향한 시선은 이현의 무심함을 잘 보여주었다. 존나 뻔한 새끼, 그럼 그렇지. 이런 식으로 나올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근데… 고작 이런 말이나 주고받으려고 지금까지 날 기다린 건 아니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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