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전해준 건 이게 답니까?”
“아마도요? 전달한 지 고작 반나절 만에 이렇게 비어있는 게…. 진 선수 지금 좆 됐다면서요. 정말 죽으려는 거 아니고서야.”
이현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세민의 말마따나 파란 알약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이현은 유리병을 공중으로 가볍게 띄웠다가 안정적으로 감쌌다. 자세히 보니 병에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아까 부딪히면서 깨진 건가. 이현이 천장 조명에 유리병을 비춰 보는 사이, 세민은 늘어져 있는 옷들을 더듬더듬 손끝으로 훑어 대다가,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진 선수가 어떻게 방에 들어갈 수 있었겠어요?”
“….”
“이현 씨, 난 전화 받을 때부터 좀 이상했어요. 내가 이현 씨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내 비즈니스로는 더욱 더. 넘겨받은 지 얼마 안 됐거든요.”
그래서 여기로 부른 건데. 여기 내 대기실 아니에요. 세민은 메이크업 부스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익숙한 비원 시가 NO.3가 놓여있었다.
*
“…채이현, 네가 왜 여기 있어.”
세민의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누군가 문을 열고 세민과 이현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촬영 내 차례겠네, 세민은 가뿐하게 몸을 풀었다.
전형적일 만큼 고전적인 스리피스, 어쩐지, 이 대기실의 의상들은.
이현은 방금 막 시안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한 태를 갖추고 있는 지완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지완은 짙은 진회색 스리피스 위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세미체스터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무채색 속에서 검푸른 넥타이가 이현의 눈길을 끌었다.
지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이현을 살피다가, 세민의 혼잣말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제야 지완은 이현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돌렸다.
“이 새끼는 왜 여기 있지?”
“내가 이현 씨를….”
“나가라는 말이잖아.”
세민을 마주하자마자 지완은 가감 없이 말을 뱉었다. 코트를 툭 벗어 던지며 불쾌한 얼굴로 제 턱을 가볍게 쓸었다. 세민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두 눈에 비치는 반감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다시 세민의 입에서 어설픈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권지완, 이쪽 일에 관심이라도 생겼어? 아니면 나까지 곤란하게 하지 마.”
“내 앞에 얼굴 들이밀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한 번 하면 제대로 좀 알아들어. 응? 씨발, 좀.”
지완은 자주 보던 깔끔한 포마드가 아니었다. 가르마를 살짝 타고 이마를 반쯤 가리는 머리였는데, 이 또한 이현에겐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현에게 세민과 지완의 대화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럼에도 이현이 잠시 주춤한 이유는, 지완의 말에서 묘한 싸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맞다. 권지완 원래 이런 새끼지. 새삼 이현은 자각했다. 한동안 지완은 제게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지?
권지완이 직접 하세민을 추천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셀럽이 거머쥐게 될 것이라 예상했던 권지완의 파트너 자리를 하세민이 차지했다.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호전되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막연히 그랬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떠들어 대던 세민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지완의 음성만 이현의 귓가에 도달했다.
*
나가는 세민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이현은 제 앞에 있는 시안을 한 장 들어, 지완과 이리저리 견주어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현을 가만히 쳐다보던 지완은 이내 걸음을 옮겨 소파에 걸터앉았다. 피곤이 쌓인 것인지, 지완은 익숙한 자세로 고개를 괬다. 셔츠의 옷깃 위로 드러난 목울대가 가볍게 울렁였다.
메이크업 때문일까. 하얗고 붉고 검은 지완은 본인의 색감을 더 극명하게 드러냈다. 예민한 지완의 인상이 보다 부각되는 건 덤이었다. 고전적인 스리피스를 갖춘 모습에서도 이질적인 날카로움이 물씬 배어 나왔다. 지완의 시선이 이동할 때마다 밝은 눈동자는 백색 조명을 선명하게 반사시켰다.
자세히 보니 지완은 재킷 위로, 어깨에서부터 몸을 가로지르는 탄창 홀스터를 두르고 있었다. 가관이다.
컨셉 한번 대단하네. 007의 슈트를 도맡았다던 B사는 또 하나의 심벌을 만들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권지완은 빌런 쪽에 더 가깝고, 하세민은 협잡꾼 역할도 아까운 수준이지만… 뭐 어쨌든. 이현은 시안을 내려두며 물었다.
“하세민을 왜 추천했어?”
영 안 어울리는데. 부루퉁한 이현의 말에, 지완은 반쯤 내리감은 눈으로 이현을 천천히 좇았다. 오랜만에 갖춰 입은 스리피스가 답답한지, 지완은 베스트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냈다. 짙은 진회색과 대비되는 하얀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손짓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나른한 음성이 뒤이었다.
“왜. 욕심나? 바꿔 줘?”
“그게 그 말이겠냐?”
“난 또.”
지완은 이어 홀스터를 벗고 바닥으로 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탄창구들이 달랑거렸다. 눈대중으로 봐선 지완의 소품은 권총이 아닌 소총인 게 분명하다. 권지완한테 라이플이라. 요즘 따라 쓸데없이 빈번하네.
“안 물어봐?”
“고민 중이야, 지금.”
지완은 먼저 물었다. 이현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이미 대강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질문은 능청맞았다. 이현의 대답도 어이없을 만큼 침착했다.
예상했던 일이 아니라면, 이 물건은 더 이상 이현과 상관없다. 이현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의문들은 지완의 등장과 동시에 와해되었다. 예상했던 좆같은 일만 아니면 됐지. 놀랍게도 이현은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현의 무심한 얼굴을 관망하며, 지완은 두 다리를 교차했다. 긴 다리는 이현의 바로 앞까지 닿았다. 구두 굽에는 마저 닦이지 않은 흙들이 자작했다. 지완은 발목을 까딱이며 스트레이트 팁으로 이현을 건드렸다. 도발 같진 않았으나 이현은 발을 슬쩍 치워냈다.
지완의 그 간결한 동작들을 지켜보던 이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손에 쥐고 있는 유리병을 내밀어 보이면서. 조금 전까지와 같은 의문은 아니었다.
“야. 나 혼자 병신짓 한 거냐?”
…응? 하하. 지완은 다물었던 입술을 터뜨렸다. 지완의 얼굴이 그의 큰 손에 의해 가려졌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까지 황당한 웃음을 금치 못한 지완은, 이현이 다시 한번 손을 들먹인 후에야 겨우 소성을 정돈했다.
지완은 답답하게 옥죄이는 커프스의 단추를 간단히 풀고,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올렸다. 능글맞을 정도로 서글서글한 눈웃음은, 억지로 꾸며낸 것 같진 않았다.
“나야말로 궁금한데. 이게 왜 네 손에 있을까.”
“2107호에서 나오는 진태우를 내가…. 아니, 걘 거길 왜 간 거냐?”
“타이밍이 나빴네.”
“타이밍?”
“정말 알고 싶어서 그래? 아닐 텐데.”
지완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이현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지 못했다. 지완은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마치 이현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가소로운 확신을 하고 있었다. 분명 눈화장은 진하지 않은데, 평소보다 지완의 아이홀은 훨씬 깊어 보였다.
“그래. 아는 것만으로도 귀찮아질 게 뻔해서… 벌써 피곤한데, 그래도 말해.”
“너무 의외라서 좀 놀랍네.”
“알면 영광으로 생각해. 내 의외가 항상 너라는 거에. 이미 너 때문에 귀찮아진 일이 한두 개가 아니야.”
“….”
“그 눈은 또 뭐야?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고 빨리 말이나 해. 질질 끌지 마. 여기서 더 피곤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현의 말, 그 어디에서 자극을 받은 것인지 지완은 한순간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모호한 시선을 흩트리며, 지완은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뒤로 쓸어 넘겼다. 이현에게 익숙한 포마드였다. 지완의 이목구비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살짝 앞으로 기울었던 지완의 몸도 다시 뒤로 안착했다. 몸에 힘을 푼 지완이 가볍게 대답했다. 어딘가 들뜬 목소리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부탁 하나 들어줬어.”
“뭐? 부탁?”
“간절해 보여서 말이야.”
*
선수촌 내에서 도핑 논란이 터지더라도 최대한 쉬쉬하며 묻으려는 이유, 조용히 퇴출로 마무리 지으려는 이유는 결국 메달 때문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메달은 따는 것보다 박탈당하는 게 더 쉽다.
도방위에 걸리는 순간, 의심되는 시기부터의 모든 메달은 박탈당한다. 그런 불명예를 안고 퇴출당하느니, 메달이라도 고이 손에 쥔 채 이 바닥을 뜨는 게 낫다. 그건 이 바닥의 식구 감싸기 방식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의혹으로 주변 동료들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사게 만드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현은 하잘것없이 시원찮은 지완의 태도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밝힌 적이 없는데 그 증거가 어떻게 너한테 있어?”
“나한테 있는 게 아니라 정유진이 가지고 있겠지. 모든 거래는 기록을 남기니까.”
하세민이 이딴 걸 어떻게 얻어서 새끼 마담 같은 짓을 하고 있겠어. 지완은 심심하게 웃으며 팔을 뻗었다.
이현의 손에 들려 있던 병을 빼앗아 들더니, 제 손안에서 무미건조하게 돌려댈 뿐이다. 이현이 다시 가져가려 하자 지완은 곧장 유리병을 한쪽으로 던졌다. 운 좋게도 병은 지완이 벗어둔 홀스터의 가죽 부분에 안착했다. 아슬아슬했던 유리병은 날카로운 마찰음만 만들 뿐 깨지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